“Xolstomer” (1885), a medium-length story of L. N. Tolstoy, is a novel work that reflects his life ideology and ecological sense in line with biological egalitarianism of deep ecology. This work deserves taking ecological approaches in that its author Tolstoy focused on the life of horse with a view to highlighting the issue of conflict and disharmony between human world and living organisms in natural world.
On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Xolstomer”, the medium-length story of Tolstoy, depicts human being's destruction of ecosystem, so that it may analyze fundamental reasons of broken and disharmonized relations between mankind and non-human living creatures. The other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are social ecology of human being with that of horse, and also compare human being and horse as representative entities of two different species, so that it may discover what would be the ecological ethics pursued by Tolstoy. Finally, this study is also intended to discuss any possible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the death of human and horse, which has even different aspects from each other.
In Tolstoy's “Xolstomer”, human-driven destruction of animal ecosystem is depicted in form of habitual violence and castration. Here, we can point out the following 4 fundamental reasons why people have irrational awareness and take absurd actions toward living creatures in nature, so that mankind and non-human living creatures have broken relations and disharmony with each other:
First, there are errors of judgment between appearance and actual being of mankind. Secondly, the errors of human being's awareness are associated with an action of castration. Castration is an anti-ecological action that cuts off any possibility of natural living creatures to preserve their own species. Thirdly, there is an issue of absurdity arising from human being's sense of private ownership and their possessiveness. Fourthly, there is an issue of absurdity in close associations with a great gap between words and deeds of human being. That is why modern literature would need to candidly uncover any human-driven mechanism and valuelessness of human language, but create a new and alternative language that may interconnect anything with one another, not any language of destruction and breakup. To this end, Tolstoy adopts horse, a non-human living creature, as a positive subject and discourse maker of new language for communication between mankind and other living creatures in nature.
In this novel, Xolstomer goes beyond a being of horse as personified animal, but takes a higher position as symbolic being of personalized nature. As a result, the comparison between social ecology of horse and human being and the comparison of horse versus human being as individual entity suggest a new language -
In Xolstomer, two different aspects of death between horse and human being reveal Tolstoi's ecological senses. The horse Xolstomer gasped for last ‘breath’ in this earth and came to death, laying down ‘all the burden’, implying a possibility to enter the world of soul. And even after the death, it gave away its flesh as feed for other living creatures, leaving a symbolic meaning of precious sacrifice to us. However, the selfish and dissipated life of human being is viewed as meaningless and vain life.
Xolstomer makes a connection of life with other living creatures in nature at the sacrifice of its flesh, and also connects with other horses as same species by way of ‘inhalation’ and ‘exhalation’, so its life runs again in living cycle of ecosystem without disconnection.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소설 『홀스토메르 Холстомер』를 1860년대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인 1885년에야 완성했다. ‘어느 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작가의 전기 문학과 ‘정신적 위기’ 이후에 쓴 후기 문학 사이의 단절되었던 예술 작품 창작 활동의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다. 톨스토이는 『홀스토메르』에서 주인공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을 등장시키는 이례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그의 문학적 관심이 인간 군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다른 생명체에게도 두루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인간 생명체와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관심은 그의 『인생론』(1887)에서도 드러난다. 1880년대 이후의 변화된 자신의 사상적‧종교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저서에서 톨스토이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도덕적 완성과 행복을 향해 인간이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하는 것처럼, 동물과 식물 역시 인간과 같은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말 떼와 새 떼, 곤충, 나무, 풀 속에도 삶이 존재하며, 그들 역시 자신의 개별적인 목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이 기반이 되어 생물의 개별성을 인정할 때에만 인간은 생명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톨스토이, 2010: 265-268).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그의 생명사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연구자 심성 보에 따르면, 우주의 실재를 하나로 보는 고대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의 일원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톨스토이의 생명사상은 비인간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식물, 더 나아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마저 ‘하나인 전체로서의 생명’, 즉 ‘만물에 있는 생명은 하나’ 이며 ‘우리 모두는 그 한 존재의 발현’이기에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귀결된다(심성보, 2007: 39-54). 만물이 평등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은 심층생태학에서 주장하는 생물 평등주의와 일맥상 통하는 바가 있다. 본 연구자는 이 같은 사상들이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식물의 형상, 특히 나무의 삶과 죽음을 중심 소재로 다룬 작품들을 분석해 보거나, 아동문학 작품에 나타난 어린이들의 생태 관념 등을 선행하는 연구 작업에서 살펴본 적이 있다(조미경, 원용숙, 2012: 235-256; 2013: 119-136). 본고에서는 그러한 논의를 더 확장시켜 중편소설 『홀스토메르』에서 동물의 의식을 통해 작가의 생태적 인식이 어떻게 표현되고,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 『홀스토메르』에 대한 기존 연구는 형식주의자 쉬클롭스키의 문학 비평 이론인 ‘낯설게 하기 기법’을 적용한 텍스트 분석을 필두로 하여 주로 문예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야꼽슨, 바흐찐 외, 1993: 24-29; 함영준, 1998: 629-652). 그 외 다수의 연구 작업에서는 의인화된 동물 등장인물들이 주로 인간의 형상에 비유되었다. 말이 태어 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과정에서 겪은 온갖 역정은 인간의 삶의 희로애락에 비유되거나, 말의 형상을 통해 젊음과 늙음,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개념들을 대조시키는 방식이 적용되었다(톨스토이, 2013: 135-149). 그러나 말이 인간들에 의해 수차례 폭행을 당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급기야 인간의 손에 도살당한다는 이 작품의 내용을 감안해 보았을 때, 작가가 말(馬)이라는 개체의 삶을 통해 인간 세계와 자연계의 생명체들 간의 갈등과 부조화의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을 생태학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고에서는 말 홀스토메르를 의인화된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 차원 더 격상된 인격화된 자연의 총체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존재로 해석해 볼 것이다.
톨스토이의 생태적 인식은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톨스토이는 15살 때부터 루소의 사상에 감화되어 십자가 대신 그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을 정도로 그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루소를 평생 동안 스승으로 삼았다(Н.Н. Гусев, 1926: 136). 1880년대의 정신적 위기 이후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이전에 쓴 작품의 대부분을 부인하고 비판하던 그였지만 루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호의 적이었으며, 오히려 채식주의와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계몽주의 사상가의 철학에 더 근접한 삶의 행보를 보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은 20세기에 등장한 생태 사상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송태현, 2011: 164). 그의 사상은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톨스토이는 문명의 진보와 인간들의 도덕적 해이의 결과인 자연 파괴와 불평등의 문제에 있어 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들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자주 반영 되어 나타난다. 특히 소설 『홀스토메르』에서 톨스토이는 루소의 자연 관과 사회사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모티브화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사적 소유의 문제를 큰 비중을 두고 다룬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루소는 사유재산 제도야 말로 인간의 소유 욕구를 부추기고 모든 인간 불평등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간의 사적 소유의 문제가 톨스토이의 『홀스토메르』에서는 말의 입으로 전해진다.
두 사상가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면 루소는 사유재산 제도를 인간의 불평등 문제에만 국한시킨 반면, 톨스토이는 이 문제를 자연 생태계의 생명체들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고에서는 중편소설 『홀스토메르』에서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고, 인간과 비인간 생물체들 간의 관계 단절과 부조화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또한 인간의 사회 생태와 말의 사회 생태, 그리고 두 종을 각각 대표하는 개체로서의 한인간과 말을 비교한 후,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생태 윤리는 무엇인지 밝혀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과 인간의 죽음의 다른 양상이 담고 있는 함의를 알아보면서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 생태적 전망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1)여기에 소개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대부분 Толстой Л.Н.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двенадцати томах: повести и рассказы. М., 1984, Т. 26에 수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의 인용은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고일·함영준 역, 『톨스토이 문학전집 8: 중단편선 III』, 서울: 작가정신, 2010의 번역을 따르며 쪽수만 표기한다.
먼저, 소설 『홀스토메르』에서 인간에 의한 동물 생태계의 파괴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부터 살펴보면서 논의를 펼쳐나가도록 하겠다.
톨스토이의 전기를 쓴 빅토르 쉬클롭스키는 『홀스토메르』(1885)의 장작 배경에 대해 서술한 글에서 작가가 평생을 말(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살았고, 1859년에 A. A. 스타호비치로부터 이 작품의 기본 구상을 듣기 이전부터 이미 말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의사를 그의 일기에 남겼다고 전한다(빅토르 쉬클롭스키, 2009: 465-476).2) 이와 관련된 일화로 1856년 5월 톨스토이가 작가 투르게네프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한 노쇠하고 고통을 많이 당한 늙은 거세마를 발견한 일을 들 수 있다. 이 불쌍한 거세마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사색에 잠긴 톨스토이를 보고 있던 투르게네프가 “아마 당신은 전생에 말이 었을 거요.”라고 농담을 던질 정도로 그는 말에게 몰입해 있었다(С.Н. К ривенко, 1890: 276, 함영준, 1999: 263 재인용). 톨스토이가 구상했던 말의 이야기가 자연 속에서의 평탄하고 자유분방한 삶이기보다는 인간에 의해 혹사당하고 고통 받았던 어두운 전력이 대부분 차지한다는 점은 『홀스토메르』의 줄거리를 통해서도 쉽게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소설 『홀스토메르』의 작품 구성은 전체 12개의 장들 중에서 1~4장, 9~12장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반면, 5-8장까지 4개의 장은 거세 마인 홀스토메르가 1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 얘기를 동료 말들에게 전해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이 전해준 자신의 과거사는 다음과 같다. 최고의 말의 혈통을 타고 태어난 홀스토메르는 튼튼한 체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얼룩빼기라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에 의해 격리되어 거세당한다. 그 후 헐값에 여기저기 팔려 다니며 격심한 노동과 폭행을 당한 거세마는 한 경기병 장교의 집에서 생의 최고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러나 경마에서 우승을 하던 바로 그날 딴 남자와 도주한 애인을 추적하기 위해 경기병 장교가 홀스토메르를 무리하게 몬 탓에 말은 발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그런 말을 장교는 팔아버린다. 그 후 또다시 팔려 다니는 신세가 된 말은 마지막으로 머물게 된 종마장에서 동료 말들에게 자신의 과거 얘기를 전해주며 회한에 젖는다. 늙고 병든 홀스토메르를 사람들은 들판으로 데려가 도살한다.
이 소설의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편견과 폭력성이 낳은 동물에 대한 무자비한 폭행과 학대는 상습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그로 인해 말의 육체는 서서히 병들어 간다. 소설 『홀스토메르』의 서술 방식은 섬세한 필치로 대상의 외관 묘사가 아주 생생하게 잘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홀스토메르의 몸에 난 상처들은 뚜렷하고 선명하게 묘사되어 그가 겪었을 지난 고통의 순간들을 연상하게 해 준다.
홀스토메르가 살면서 겪었을 온갖 수모와 폭행, 굶주림의 흔적들은 그의 몸에 조각처럼 아로새겨져 그 상처의 원인 제공자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인간들이 가한 폭행의 행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를 돌보았던 마부들은 ‘무릎으로 배를 걷어차거나’, ‘주먹으로 콧잔등을 아프게 후려치기도 하고’, ‘고삐의 죔쇠로 여윈 다리를 사정없이 아프기 때리기’도 했다. 특히 마부 네스테르는 젊고 멀쩡한 말은 내버려두고 유독 발목이 부러진 늙은 홀스토메르를 타고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그의 ‘삐딱하게 앉는’ 자세로 인해 말은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마부가 밤에도 멍에와 안장을 벗겨주지 않아 그 하중으로 인해 말의 무릎 상태도 나날이 악화된다. 말장수와 집시 주인이 휘두른 채찍과 구타의 흔적은 견갑골과 등에, 농부의 날카로운 쟁기 보습은 그의 발에 상처를 남겼다.3) 넓적다리에 난 깊은 상처와 부러진 양 발굽에 난 종창은 경기병 장교의 무모한 질주가 남긴 치명적인 부상의 흔적들이다. 주인이 후려치는 채찍을 맞으며 전력 질주를 하던 홀스토메르는 수차례 마차의 앞부분에 튀어나온 쇠에 발을 부딪쳐 ‘발굽이 쪼개지고 발의 정맥이 확장되고 두 다리는 휘어져’ 결국 불구가 되고 만다. 곳곳에 난 종창과 종기, 혹 등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가해진 구타로 인해 내부 조직이 파손되어 괴사가 진행되고 있고, 그 상처가 곪아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의 생명체를 인간과 서로 밀접한 연관을 지닌 유기체적 존재로 보지 않고 지배하고 착취해도 되는 열등한 타자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인간중심주의이다. 어떤 가치가 자신의 욕구나 다른 존재의 목적을 충족 시키는데 유용한지의 여부를 따져 판단하는 것이 도구적 가치이다(정대영, 2012: 142-143). 인간은 자연을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재적 가치가 없는 대신 도구적 가치만을 가진 존재로 보기 때문에 폭력을 가하거나 고통을 주는 것을 당연시한다. 마부 네스테르에게 홀스토메르의 늙고 병든 육체는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에 불과하고, 쓰다가 고장 나면 버려도 되는 연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연민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경기병 장교 세르푸호프스코이도 마찬가지다. 격렬한 질주 후 말의 다리가 부러지자 그는 미련 없이 말을 팔아버림으로써 고장 난 연장을 처분했던 것이다.
이 같은 행위는 환경윤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비인간 생명체들을 학대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개체는 자연생태계의 상호 의존하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도덕적 규범을 따라야 한다. 인간이 다른 생물에 대하여 절대적 특권과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으면 자연은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결정된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실용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대상이거나 또는 관조적 관계 대상일 때만 가치가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가 인간중심적 윤리학이다. 이러한 반생태적 윤리학을 극복하고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주창된 것이 바로 탈인간중심적 환경윤리이다(정대영, 2012: 142). 그러나 이 작품에서 말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존재이며, 그의 생명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들, 즉 ‘불공정한 사람들’일 뿐이다.
『홀스토메르』에서 인간이 가한 폭행 중에서 말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남긴 것은 바로 거세였다. 극심한 모멸감과 통렬한 아픔을 겪은 말은 이 사건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얼마나 큰 모순이 존재하는지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홀스토메르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말로 아름답고 균형 잡힌 육체와 경주마로서 뛰어난 특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상 얼룩빼기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구자 말’로 낙인이 찍혀 사람들에 의해 거세당한다. 이후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된 세 가지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세 가지 불행한 사건은 자연의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들의 불합리한 인식과 모순적인 행위,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과 비인간 생물체들 간의 관계 단절과 부조화의 원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들의 첫 번째 인식의 모순점은 외양과 실재를 판단할 때 나타난 다. 말의 외양과 실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들은 결국 허울뿐인 외양을 선택함으로써 말의 본질적 장점을 무시했다. “이건 완전히 얼룩이라니! 빌어먹을 이런 병신이 나오다니, 완전히 농사꾼 같군! 사육장에 남겨둘순 없어. 이건 치욕이야! 그래도 덩치는 아주 좋은데, 아주 좋아!”(34)라는 대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들의 입으로 홀스토메르가 최고의 준마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여기에서 ‘껍데기’라는 외양과 ‘러시아에 하나밖에 없는 좋은 혈통’의 ‘훌륭한 말’이라는 실재적 본질을 이분화 시키고, 이 두 가지 가치 중에서 가치가 더 못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더 나은 가치를 상쇄시키는 인간의 습관적 오류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관조적 관계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가치만을 중요시하고 미관과 편리를 위해 자연 생태를 쉽게 훼손하는 인간들의 행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들의 두 번째 잘못된 인식은 거세라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거세는 동물의 생식기를 잘라내어 더 이상 번식을 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이다. 이 일을 겪은 홀스토메르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괴로워하면서 자유롭게 벌판을 달리는 말들을 ‘영원히 잃어버린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나의 행복을 바라보듯이’ 지켜본다. 말들을 포함해서 모든 자연의 생명체 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은 종족번식일 것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본능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섭리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 의 본질이고, 자연의 생명체들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선(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동물의 삶의 목적을 실현 가능케 하는 신체기관을 인위적으로 제거해 버렸다. 이것은 자연의 생명체가 생명을 이어나갈 수있는 가능성을 단절시킨 반생태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정상적인 육체를 가졌던 동물은 신체 기관의 파손으로 불구가 되었고, 생명 번식을 위한 교미의 가능성은 인위적으로 조장된 불임으로 인해 생명의 단절로 변질되었다. 새끼를 밴 동족을 대하는 말들의 태도와 임신한 여성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에서도 상반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말들은 ‘수태한 말들을 존경’하기에 함부로 가까이 가서 방해하지 않는 반면, 인간 세르푸호프스코이는 임신 중인 종마장 주인의 아내를 대할 때 ‘존경이 담기지 않은’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불손한 어투로 대한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인간에게는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모순은 인간의 사적 소유 관념과 소유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로 드러난다. 말(馬)이 지적한 인간의 사적 소유 관념의 가장 중대한 문제점은 인간이 자신이 소유한 대상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 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소유한 모든 대상들, 즉 비인간 생명체로서의 동물과 물질적 대상인 땅, 집, 옷, 거기에 신분상 낮은 계급의 ‘다른 사람들’과 성적 차별 대상인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그 모두를 타자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소유한 대상들과 맺은 간접적인 관계에서도 그들이 끼치는 영향은 폭력이나 억압, 지배, 집착의 형태로 나타나는 ‘손해를 입히는 일’로 드러난 다. 그 결과 이들을 소유한 인간은 소유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배재함으로써 그 대상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세르푸호프스코이가 그가 소유한 애인으로부터 배신당한 후 방탕한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초라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스로 소외된 자의 운명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홀스토메르는 이러한 인간 들의 사적 소유 관념을 ‘낮고 저급한 본능인 감정’과 동일시하면서 무의 미하고 ‘잘못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간의 소유욕으로 인해 촉발되는 문제는 네 번째 모순인 인간의 말과 행동의 괴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홀스토메르는 인간이 행동이 아닌 말(言), 즉 소유의 욕망으로 인해 왜곡된 언어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 스스로 자연 생태계의 생물의 최상위 서열에서 밀려나 하등한 존재로 전락하는 일을 자초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선한 가치(‘좋다고 생각하는 것’)와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과는 무관한 인간의 언어는 과시욕과 허영으로 변질되고 오염되어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이 때문에 이런 인간의 언어에 담긴 인간중심적 기재와 무가치성을 폭로하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언어, 파괴와 단절의 언어가 아닌 모든 것을 상호 연결할 수 있는 언어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톨스토이는 이를 위해 비인간 생명체인 말(馬)을 새로운 언어의 능동적 주체자이자 담론자로 등장시키고 있다. 말의 서열을 인간의 서열의 한 수위에 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2)빅토르 쉬클롭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톨스토이가 『홀스토메르』의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게 된 것은 A. A. 스타호비치가 고인이 된 그의 형 M. A. 스타호비치가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단편소설 『얼룩 거세마의 편력』에 대해 들려주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M. A. 스타호비치에게 헌정했다. 3)톨스토이의 『홀스토메르』의 1860년대 초판본과 1880년대의 결정판본을 비교한 논문에서 연구자 함영준은 말의 이름 속에 채찍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1885년 판본에는 이 말의 별명인 ‘홀스또메르’가 ‘천(холст)을 재듯(мерить)’ 보폭이 크고 대범하다는 의미로 쓰여 있지만, 초판본에는 ‘흘르이스또메르’로 적혀 있으며 이는 ‘흘르이스뜨(хлыст)’, 즉 말을 때리는 가죽 채찍을 뜻하거나 자신의 몸을 매질하는 러시아 분리파 교도들인 ‘흘르이스똡스뜨보(хлыстовство)’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 두 단어가 모두 채찍질이라는 공통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함영준, 1999: 265).
능동적 주체로서 자연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적 관점에 기초한 언어나 담론과는 다른 새로운 언어와 담론이 요구되며, 이러한 새로운 언어사용과 표현은 생태문학 작품에서 주로 자연을 의인화하고 언술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이 활용되어 왔다. 자연만물에 대한 의인화 기법은 자연이 더 이상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수동적인 도구이거나 죽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의 메커니즘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유기체라는 생태학적 원리를 잘 반영시킬 수 있는 기법이다(신두호, 2001: 847-851). 소설 『홀스토메르』에서도 홀스토메르와 말의 무리가 의인화되어 각각 인간적인 특성을 부여받고 있다. 어린 홀스토메르가 어미 말에게 외면 받으면서 심적 고통을 체험하는 장면이나, 아름다운 갈색 암말이 농부의 쟁기를 끄는 회색 말을 유혹하는 장면, 젊은 말들이 늙고 추한 홀스토메르가 자신들의 귀족적인 감정에 상처를 입혔다고 여겨 반감을 가지고 괴롭히는 장면 등은 인간의 심리와 행위를 그대로 닮아 있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이 말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홀스토메르만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은 다른 말들은 갖지 못한 능력이었다. 거세마가 최고의 혈통을 타고난 말이란 걸 알아보았던 암말 뱌조푸리하도 그 사실을 동료 말들에게 인간의 언어가 아닌 말의 몸짓 언어로만 전해준다. 예외적으로 장난꾸러기 갈색 암말이 자신의 젊음을 뽐내는 말을 몇 마디 하긴 하지만 단 일회성에 그칠 뿐이다. 홀스토메르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단순한 말(馬)에서 사유하는 말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말들과는 차별화된 비참한 삶의 역정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털에 난 얼룩 반점 때문에 인간에 의해 격리 되고 거세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격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의례를 치루고 난 뒤 ‘문득 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얻은 대가였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평등의 원리는 그 대상이 어떤 종이건 그 존재의 고통을 다른 존재의 고통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동물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즉 쾌고 감수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과 같이 윤리적 대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피터 싱어, 2012: 38-50). 톨스토이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통은 악이 아니며, 오히려 이성적 의식이 고통을 체험할 때에만 인간은 진리를 인식하고 자신의 법칙을알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톨스토이, 2010: 253-259). 『홀스토메르』에서 거세마 역시 이 고통의 경험을 통해 ‘신중하게 사색하는’ 능력을 얻게 되어 ‘인간이라는 불가사의한 종족’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 철학 적으로 사유하는 말이 되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작품에서 단순히 의인 화된 동물로서의 말(馬)을 넘어서서 그보다 한 차원 더 위상이 격상된 자연의 인격화된 상징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로서 인간에 의해 고통 받는 비인간 생명체들에게 인간들의 행위의 실상과 새로운 언어를 전하는 능동적 주체자가 될 수 있었다.
말의 무리는 처음에는 추하게 늙은 홀스토메르를 깔보고 업신여기며 인간들처럼 폭력을 가했다. 그들에게 거세마는 ‘전혀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며 완전히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갈등관계는 암말 뱌조푸리하가 홀스토메르의 출신과 그의 경주마로서의 경력을 알려준 후 순식간에 해소된다. 말들은 홀스토메르가 태어날 때부터 추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폭력으로 육체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지혜로운 거세마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보인다. 이 작품에서 말의 사회 생태 역시 기본적으로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출신성분과 경주 능력에 따라 서열화 되어 있다. 황제가 타고 다니는 밀르이나 말들의 대장격인 줄드이바, 암말 뱌조푸리하를 포함한 스메탄코 출신의 혈통을 타고난 말들이 상위 서열에 포함된다면, 젊은 흑마 무슈카나 장난꾸러기 암말들, 농부의 소유인 회색말 등은 하위 서열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의 집단적 질서일 뿐, 누군가를 상습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거나 동족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니며, 서로 간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도 아니다.
한편 인간 사회의 생태도 말의 사회 생태와 겉으로는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사회도 계급이라는 제도로 철저하게 서열화 되어 있는 것은 동일하다. 황제를 비롯한 백작, 장군, 경기병 장교 세르푸호프스코이, 종마장 주인 등은 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마부장과 포목상 주인, 노파 등은 중간 계층에, 마부와 농부, 집시, 말몰이꾼 등은 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 소유하거나 소유 당하는 관계 이며, 소유한 자는 소유 대상인 인간을 폭행하거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는다. 상위 계급의 인간이 소유한 대상보다 하위 계급의 인간이 소유한 대상이 더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문제가 생긴다. 경마 에서 마부장의 소유인 홀스토메르가 백작의 말 레베지를 앞질러 우승하게 되자, 백작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는 게 두려워 마부장이 자신의 말을 팔아버리는 일이 그와 같은 경우이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생태는 계급이라는 제도와 사유재산 제도로 인해 서로 간에 철저히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분풀이를 할 곳이 없는 최하위 계층 사람 들은 동물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한다. 마부장에게 두들겨 맞은 마부에게 연민을 느낀 홀스토메르가 그를 위로하고자 했을 때, 마부는 오히려 말을 ‘아프게 후려치고’, ‘장화로 배를 걷어차는’식으로 반응한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문제가 자연의 생명체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 시대의 생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인간의 지배 욕구와 인간 사회의 위계 조직, 가부장적 계급 제도에서 비롯된 사회적 문제로 보는 사회생태론자 머레이 북친의 주장과도 연관 지어 볼 수 있는 부분이다(머레이 북친, 1997: 166).
이처럼 두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의 특성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는 두 다른 종을 각각 대표하는 개체로서 비인간 생명체들 중에서는 홀스토메르가 인간들 중에서는 경기병 장교 세르푸호프스코이가 다양한 측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외연적 특성과 내재적 특성으로 구분하여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외모의 측면부터 살펴보면, 처음 세르푸호프스코이가 홀스토메르를 사들였을 때는 두 등장인물이 비슷한 외형 조건을 갖추었었다. 인간은 잘 생긴 ‘미남자’였고 ‘냉정하고 포악하긴’ 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귀족 청년이었다면, 말은 ‘기골이 장대하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혈통이 좋은 말이었다. 세르푸호프스코이는 사람들이 싫어한 말의 그 얼룩 반점을 특이하게 여기고 말을 고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두 번째 만남에서는 두 존재의 외연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말은 비록 고통을 많이 당해 ‘추하게 늙긴 했지만’ ‘말의 자태와 화려한 털, 자신만만한 표정, 품위 있는 아름다움과 강인한’ 체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 ‘중후함’이 풍기는 모습이었다. 반면 인간은 ‘한때 대단한 미남자였음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도덕적으로 쇠잔한 타락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퇴락을 보여주는’ ‘불안한 시선’과 ‘언행의 비틀거림’은 말의 중후하고 균형 잡힌 자태와는 사뭇 대조를 이룬다. 두 존재 모두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아왔지만 한쪽은 여전히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쪽은 비루하고 타락한 모습이다. 이러한 외연적 특징은 그대로 둘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것을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존재의 내재적 특징은 품성과 그들이 타자를 대하는 태도, 사랑을 실현하는 방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둘의 품성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홀스토메르는 ‘신중하고 사색적’이며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지닌다. 고통을 많이 당했어도 참을성 있게 견딜 줄 안다. 부당한 폭력에 대해 모욕과 슬픔, 격분의 감정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투덜대는 법이 없었다’(59)). 한편 세르푸호프스코이는 젊은 시절엔 ‘행복하고 부자’였지만 몇 년 후 재산을 탕진해 많은 빚을 지고 초라하고 구차한 삶을 살아간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 돈을 가진 사람 앞에서 굴욕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자신이 이렇게 추락한 것에 대해남 탓을 하며 불만을 드러낸다. 그런 그에게서 고상한 성품이나 지고한 인격을 찾아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둘째, 그들이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홀스토메르는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인간을 증오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난 모든 걸 용서했어.”(37)) 인간과의 유대 관계를 유지 하려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준다. 때론 마부장에게 매를 맞은 마부에게 연민을 드러내 보이고, 노파에게 채찍질 당한 마부의 눈물을 혀로 핥아 주는 (“그 때 난 인간의 눈물에는 기분 좋은 짭짤한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았어.”(57)) 관심을 보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선천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리가 망가졌어도 주인이 달리라고 명령하면 언제든 달릴 준비를 할 정도로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한다. 그 무엇보다도 ‘거세마는 어느 누구에게도 악행을 저지른 적인 없었고’, 항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었다. 인간 세르푸호프스코이는 젊은 시절에는 신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부에게 호의를 베풀줄 아는 인물이었지만, 인생의 역경을 겪은 후 그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바뀌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딴 남자에게 간 정부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젊은 주인 내외를 만났을 때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몹시 질투하기도 하고, 담배를 권하는 젊은 주인에게 모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등 비루한 행동을 보인다. 생활비도 자신이 버는 것이 아니라 빙크레르샤라는 여인에게서 얻어다 쓰는 처지이다. 그가 자신과 타인을 얼마나 비천한 존재로 여기는지 다음의 독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못돼먹은 커다란 돼지 같은 녀석이야. 장사꾼 같으니라고. 하긴, 나도 돼지니까.”(73) 이처럼 타자를 대하는 둘의 태도에서도 좀 더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실현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그들의 삶의 목적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홀스토메르가 말들 중에서 한 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말이 뱌조푸리하였다면, 인간들 중에 그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경기병 장교 세르푸호프스코이였다.(“난 그를 사랑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50)) 경기병 장교로 인해 다리가 불구가 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일말의 원망도 없이 옛 주인을 사랑하고 있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숭고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마부 페오판도 사랑했고, 주인과 마부와 혼연일체가 되어 달리던 그 순간을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한 눈에 경기병 장교를 알아보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지만 옛 주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편 세르푸호프스코 이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좋아했던 정부(情婦)에게도 사랑의 감정이 아닌 소유의 욕구에서 비롯된 집착의 감정으로 대했고, 그래서 허락 없이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의 배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파멸의 원인이 자기 내부에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정부의 탓으로 돌려 그녀를 증오한다. 홀스토메르에 대한 그의 호의적인 감정도 상황이 바뀌자 금방 변한다. 경마에서 우승한 홀스토메르를 보고 ‘이건 말이 아니라 내 친구요. 황금을 산더미로 준다 해도 팔 수가 없소’(56)라고 하며, 말에 대한 애정을 보였지만, 바로 다음 날 불미스런 사건이 있은 후 팔아 버린다. 그는 종마장 주인과의 대화에서도 자신이 소유한 말의 경주 실력에 대해 한껏 자랑을 늘어놓고 과시하지만, 정작 실제 홀스토메르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톨스토이가 이 두 종이 다른 존재들을 통해 자신의 생태적 인식과 윤리관을 대변하고자 했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홀스토메르에게 부여한 새로운 언어는 그의 말과 행동의 일치 속에서 확연하게 잘 드러나 있다. 루소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은 모두 진리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톨스토이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고, 지고의 선(善)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소유하려 들지 않고,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타자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인간을 용서하고 따뜻한 연민의 눈길을 보내며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심성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고 노동으로 스스로 생산할 줄 알고, 타고난 본질에 따라 달리거나 날아다닌다. 그들은 종족번식이라는 신성한 임무에 경의를 표하고, 그 생명의 사슬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생명체들의 삶과 비교해보면 인간들의 삶은 욕망과 파괴의 본능, 야생의 자연 생명 체들보다 더 저급한 본능이 지배하는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제대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제는 인간이 자연에 눈을 돌려 자신을 성찰할 차례인 것이다.
생태윤리의 기조가 돌봄의 윤리라면, 우리는 우리가 자연을 돌보기 이전에 자연의 생명체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그러한 지고의 윤리를 배울 수 있는 겸허한 자세를 갖추고 열린 마음으로 자연의 소리를 항상 경청할 수 있는 귀를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과 인간을 대표하는 등장인물들의 외연과 내재적 특징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두 존재의 죽음의 양상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고, 이를 통해 작가의 생태적 인식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두 죽음의 차이점은 인간은 자연사한 반면에 말은 인간의 손에 의해 도살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 이면에 숨겨진 죽음의 의미에는 좀 더 깊은 철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가죽 장수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홀스토메르의 모습은 육체의 변화와 심리의 변화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말이 단말마의 숨을 내쉬고 경련을 멈추자 말가죽 장수는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말이 죽자 말가죽 장수는 가죽을 벗겨가고 개들과 새, 늑대들이 그의 살점을 뜯어먹고, 어느 농부는 뼈를 가져가 도구로 사용 했다. 톨스토이는 이와 유사한 장면을 「첫 단계」에도 실었는데, 자신이 도살장에서 목격한 끔찍한 소 도축 장면을 더할 나위 없이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4) 이 두 장면은 인간의 잔혹함과 죄 없이 살생되고 있는 수많은 짐승들의 비극적인 처지를 폭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목적을 지향한다. 그러나 죽지 않으려고 발부둥치는 황소와는 달리 홀스토메르는 이 죽음을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다가 곧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는 자세를 취한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자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삶에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 듯 ‘모든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의 죽음 직전의 심리 상태는 ‘두려움’이 아니라 환희로 가득한 ‘경이로움’이며, 그 앞에는 파멸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래서 정신은 마치 그 세계로 가려고 달려보지만 이승의 육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처럼 홀스토메르의 죽음은 단순히 고통스런 육체의 죽음의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로의 진입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인간 세르푸호프스코이의 죽음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장면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한 전지적 작가의 가치 평가가 덧붙여져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냉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 사회의 법률과 일반적인 상식에 의하면, 동물의 가죽과 고기, 뼈는 인간이나 다른 자연 생명체들의 먹이로 쓰일 수 있으나, 인간의 시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다루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며, 그런 행위를 할 경우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낱말들은 반복되어 나오는 ‘아무 쓸모가 없는’, ‘불필요한’ 등이라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이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육신은 다른 이들의 배를 채우고 새끼들을 먹여 살려 생명을 지탱하게해 주는 양식이 되거나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줌으로써 고귀한 희생이 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는 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기적이고 방탕한 인간의 삶의 무가치성, 즉 무의미하고 헛된 삶에서 비롯되는 문제의 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말은 죽으면서 ‘삶의 짐’을 내려놓았다면, 인간의 육신은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두 존재는 죽기 전과 사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존재들에게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말이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육체가 양식이 됨으로써 누군가의 육체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면, 그의 생명도 다른 존재에게 새로운 형태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 있다.
홀스토메르가 죽고 그의 조각난 육신이 뒹구는 그 장소에서 한 갈색 암말이 인간이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해도 고집을 피우면서 오랫동안 공기를 들이 마시고 있다. 바로 얼마 전 홀스토메르가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숨을 한 번 몰아쉬며’ 내뿜었던 ‘숨’을 그의 동료가 ‘들이 마시고’ 있는 것이다. 홀스토메르와 다른 자연의 생명체들은 육체로써 서로 생명이 연결되고, 그의 동료 말과는 ‘들숨’과 ‘날숨’으로 연결되면서 그의 생명은 단절되지 않고 다시 순환하게 된 것이다.
4)문을 통해 들어오기가 무섭게 도축업자가 칼로 모가지를 내리쳤다. 황소는 갑자기 사지에 힘이 쭉 빠진 듯이 쿵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즉시 한쪽으로 벌렁 뒤집어져 엉덩이와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도축업자가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 반대편으로 달려들어 뿔을 휘어잡고는 대가리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다른 도축업자가 칼로 목을 베었다. 대가리 아래로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자 피를 뒤집어쓴 남자아이가 양철통에 피를 받았다. 그동안 내내 황소는 마치 일어나고 싶기라도 하듯이 대가리에 경련을 일으켰고 네 다리를 버둥거렸다. 양철통은 쉽게 가득 찼지만 황소는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중략) 가죽이 벗겨진 황소 대가리는 흰색 정맥이 드러난 핏덩이였다. 가죽을 양 옆에 드리운 채 대가리는 그대로 있었지만 몸통은 계속 움직였다. 그러자 다른 도축업자가 한쪽 다리를 붙잡고 부러뜨린 후 칼로 잘라냈다. 남아 있는 다리와 몸통에서는 계속해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다른 다리들도 잘라져 황소의 남은 부분들과 함께 한쪽으로 던져졌다. 고깃덩어리는 끌려가 매달렸다. 그제야 경련이 그쳤다. (톨스토이, 2014: 117-118)
톨스토이의 작품에 나타난 생태 문제를 연구한 A. A. 고렐로프는 가축들의 입으로 직접 인간이 자행하는 범죄를 말하게 한다면 세상은 경악할 것이라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홀스토메르』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А.А. Горелов, 1995: 27). 톨스토이 에게 있어서 폭력을 행하거나 살생을 하지 말라는 규율은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톨스토이, 2007: 49). 그러나 『홀스토메르』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인간은 비인간 생명체인 동물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러한 행위의 저변에는 자연의 생명체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간 들의 인식의 오류가 깔려있었다. 첫째, 외양과 실재라는 가치를 이분화 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판단의 오류이다. 두 번째 인식의 오류는 거세라는 행위를 통해 자연의 생명체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시킨 반생태적 행위에서 나타난다. 세 번째 모순은 인간의 사적 소유 관념과 소유욕으로 인해 초래되는 관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의 문제로 드러난다. 네 번째 오류는 인간의 말과 행동의 괴리, 욕망으로 오염된 인간 언어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처럼 인간이 자연의 생명체를 대하는 태도에서 보여주는 본질적인 모순은 대상과의 합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관계의 단절, 생명에 대한 존중 감의 결여라는 특징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모순적 특징은 곧 인간과 물질 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요인이 고, 또한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인간을 동물보다 하등한 위치로 끌어 내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생물의 서열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상위에 있는 것은 그들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힘, 바로 연민의 정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톨스토이, 2007: 49).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순수한 감정의 발로를 막고 제한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며, 그 욕망들 중에서 소유욕은 모든 문제들의 가장 고질적이고 뿌리 깊은 원인이라는 것을 그는 소설 『홀스토메르』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유재산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이 작품의 창작 의도는 그의 삶의 실천적 측면과도 직접적인 연관 성이 있다. 톨스토이는 1880년대에 정신적 위기를 겪은 이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사유제산 제도를 거부하고 자신의 토지와 재산,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품 맥락은 후기 작품인 『부활』에서 귀족 지주들의 토지 사유에 대한 문제의 고발로 이어진다.
소설 『홀스토메르』에서 톨스토이는 인간과 자연 대상들의 합일의 가능성을 거세마 홀스토메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고통을 인내하고 자연의 인격화된 상징적 존재로 거듭난 홀스토메르는 지혜와 사랑, 용서, 연민, 생명에 대한 존중, 노동의 가치의 중요성을 대변하며, 자연의 대상들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관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홀스토메르의 죽음은 이 모든 가치들이 그의 생명과 더불어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의 희생된 육신이 다른 동물의 육체의 일부가 되고, 그의 숨이 다른 말의 숨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생명은 다른 존재와의 합일을 이루면서 순환하게 된다. 이는 인간들의 이분화 되고 단절된 세계, 생명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끊어놓았던 비생태적 세계에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톨스토이의 조용하고도 강력한 메시지이며, 또한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생태적 전망인 것이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태학적 인식을 다양하게 형상화시켰다. 그러나 작가의 이러한 경향을 다룬 연구 작업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태인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과 관련 있는 작품들을 심도 깊게 비교 연구하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루소 사상의 영향에 대해 서론에서만 잠시 언급했을 뿐이지만, 좀 더 면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두 사상가의 자연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 「첫 단계」라는 작품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으로 사료된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톨스토이의 생태적 삶의 기조를 잠시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톨스토이가 육식생활을 거부한 데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고자 하는 뜻도 담겨져 있다. 인간의 불평등에 대해 주로 문제를 제기했던 루소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가 톨스토이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종차별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점을 바로 이 작품에서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