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에는 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요소들이 있다. 영화는 카메라를 이용하여 촬영되는 메커니즘(Mechanism)의 산물이기 때문에 카메라 움직임은 감독이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각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영화에서 감독이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각적 요소 가운데 카메라 움직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선 카메라 움직임의 생성과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 감독의 표현 의도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카메라 움직임이 사실주의 영화 안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분석해 볼 것이다.
많은 영화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디지털의 발전과 더불어 카메라가 소형화되고, 다양한 부가 장비가 개발되면서 더욱 폭넓게 카메라 움직임이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은 화면에 시각적 풍부함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서를 창출해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감독의 의도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관객이 장면 안으로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과도하게 사용되거나 부적절하게 사용하면 감독의 주관이 너무 깊이 드러나게 되고 영화가 지닌 사실주의적 정서도 감소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카메라 메커니즘의 산물인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을 전혀 활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관건은 어떻게 영화의 사실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카메라를 움직임을 활용할 것인가이다.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은 일반적인 사실주의 영화와는 다른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여 감독의 의도를 적절하게 표현하면서도 사실주의적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사실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으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There are various visual elements in films through which the director can show his own intention. Since a film is the product of the mechanism that is shot using a camera, the movement of the camera can be said to be one of the most visual elements that the director can utilize.
This study will survey the movement of the camera among various visual elements that the director can utilize in his production of films. First of all, this study will examine the creation and function of the camera and analyze through a film, how the movement of a camera which can actively reflect the expressive intentions of the director can be utilized in realism films.
Many film directors utilize the movement of cameras to express his intention visually. Especially, as the cameras become small sized and various additional equipment are developed along with the digital development today, the movement of the camera is being utilized more widely. The various movements of the camera not only provides visual abundance to the screen, but also creates new emotions. Thus, these camera movements more effectively convey the director’s intentions and help the audience to be immersed easily into the scenes. However, excessive or inappropriate use of the camera movements in realism films shows subjectivity of the director, which reduces the natural emotions within the movie. This does not mean, however, camera movements should not be used in films, as they are the products of the camera mechanism. How directors deliver their intentions through the effective movement of the camera without harming the realistic emotions is crucial.
영화가 사진과 대별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움직임이다. 사진이 순간적인 시간을 포착해 정지된 이미지를 기록하고 재현해내는 것이라면 영화는 비록 착시 현상이긴 하지만 순간적으로 포착된 일련의 시간을 연속적으로 나열하여 움직임으로 재현해낸다. 뤼미에르 형제나 에디슨에 의해 영화가 탄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움직임을 기록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약 영화가 화면 안에 아무런 움직임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사진과 그 어떤 차별성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안에는 끊임없이 움직임이 존재해야만 한다.
영화 탄생의 목적은 움직임을 기록하고 재현해내는 것이었지만 그후 영화에 내러티브(Narrative)가 도입되면서 이야기 전달이라는 확장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을 위한 다양한 요소들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화면 안으로 관객의 집중도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영화에서는 주로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를 활용하게 된다. 두 가지 가운데 더 효과적인 방법은 시각적 요소를 활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각과 청각 정보 가운데 시각적인 정보에 대해 훨씬 반응이 빠르고 정확하다. 이것을 시각 우세성 효과라고 하는데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가 동시에 제시될 때 시각 정보가 더 우세하게 지각되는 현상을 말한다.1) 정보 전달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시각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곳, 즉 시선이 향하는 곳에 훨씬 더 집중하게끔 구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서 시각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각적 요소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로 움직임을 활용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집중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시선을 끄는 것이 중요한 데 인간의 시선은 고정된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에 더욱 이끌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 옆에서 그 사람의 시야 전면에 어떤 물체를 던지게 되면 허공을 응시하던 사람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그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시선이 움직임에 얼마나 본능적으로 이끌리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은 단순히 사진과 차별되는 형식으로써 쇼트 안에 움직임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시각 반응을 고려한 움직임을 활용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시각적인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피사체의 움직임이고 두 번째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피사체의 움직임이 서사적인 목적에 의해 생성되는 경향이 강하다면 카메라의 움직임은 서사적인 목적보다는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표현주의 경향의 영화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고 의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사실주의 영화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의 사실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촬영 장비를 활용한 카메라 움직임은 인간의 시각 체계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장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움직임에 의해 생성되는 의도된 정서를 느끼게 된다. 이런 이유로 사실주의 영화에서는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보여주고 사실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자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란 카메라 메커니즘(Mechanism)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을 배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카메라 움직임이 사실주의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영화의 사실성을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카메라를 움직임을 활용할 것인가이다. 본 논문에서는 영화감독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요소 가운데 카메라 움직임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을 통해 사실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가를 연구해볼 것이다.
1)김보성, 민윤기, 「시각과 청각 정보의 의미적 일치성에 따른 시각 우세성 효과의 변화」, 『인지과학』제20권 제2호, 2009, 109쪽.
1895년 영화가 탄생한 이후 카메라는 거의 20년간이나 고정된 위치를 고수해 왔다. 이렇게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었던 이유는 영화 탄생의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가 탄생하게 된 근본적인 목적은 현실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재현하기 위함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인간이 욕망이 연속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오늘날 영화라고 불리는 것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초기 영화에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마치 인간이 한 장소나 사건을 응시하듯 카메라를 한 위치에 고정하고 촬영이 이루어졌다.
초기 영화의 카메라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던 데는 인간의 시각 체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시각 체계는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범위는 일정한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실을 기록하기 위한 사진이나 영화에서는 그것을 프레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프레임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야각(FOV: field of view)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야각이란 눈동자 혹은 목을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는 범위를 뜻한다.2) 인간이 시야각 안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며 가장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때는 시각 자체에 아무런 움직임이 개입되지 않았을 때다. 즉 머리를 움직이거나 눈동자를 심하게 움직이지 않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가장 편안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기록과 재현이 목적이었던 초기 영화 시대에는 대부분의 영상이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되었고, 그러한 영상이 인간의 눈에 가장 사실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고정된 위치를 고수하던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후 그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영화에 활용된 것은 1920년대 들어서였다. 1920년대 제작된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에서는 단순히 영상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카메라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시점과 같은 주관적인 표현을 위해 카메라 움직임이 활용되었다.3) 즉 카메라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새로운 정서나 의미를 창조해내는 능동적인 예술적 도구로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카메라 움직임이 현실의 재현을 넘어 주관적인 표현 수단으로까지 진화하긴 했지만, 영화 프레임과 인간 시각 체계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관객은 영화를 볼 때 프레임 밖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로 자신의 시선을 제어할 수가 있다. 목이나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한 시각 체계이긴 하지만,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시선을 이동하여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곳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프레임은 다르다.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프레임은 보는 이(관객)의 선택이 아닌 보여주는 이(감독)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보는 이의 선택이 아닌 보여주는 이의 선택에 의해서 카메라 움직임이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감독이 보여주는 프레임 안의 상황만을 볼 수 있으므로 프레임 밖에는 무엇이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고 카메라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해가며 감춰진 세계를 드러내고 긴장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벨라 발라즈(Bela Balazs)는 관객이 프레임 안에서 인물의 표정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결과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했다.4) 어떤 것을 보고 영화 속 인물이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관객은 그 인물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에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의 호기심을 해소해주기 위해 감독이 취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다른 프레임을 제시하여 인물이 그런 표정을 짓게 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곧장 다른 프레임으로 넘어가기보다는 인물의 표정이 유발된 상황으로 카메라가 아주 천천히 느리게 이동하게 되면 호기심이 더욱 증대되고 긴장감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도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해 새로운 정서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메라 움직임이 지닌 가장 큰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 움직임의 기능은 서술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서술적 기능을 수행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주로 영화의 내러티브 전달을 위한 목적으로 생성되는 움직임으로써 장면을 묘사하고 설명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한 화면 내에 장면 전체를 담아내기 어려운 경우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모든 상황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도 서술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을 때 보다 움직임이 이루어지면서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술적 기능으로써의 카메라 움직임은 장면의 설명이나 묘사를 위한 전달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되지만, 어느 장면 안에 드러난 분위기를 편집으로 인한 손상 없이 전달하고자 할 때도 사용된다. 필요에 따라서는 의도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여 내화면과 외화면을 넘나들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할 수도 있다.
서술적 기능 안에서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면 관객의 시선을 유도할 수 있고 시선의 범위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5) 즉 관객의 주목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영화관에서 화면을 바라볼 때 화면 내에 여러 가지 피사체가 동시에 나타난다고 하면 관객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수 있다. 이럴 경우 움직임이 형성되면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쫓게 되고 움직임이 이루어진 피사체나 방향으로 주목성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주목성은 장면내에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수단이 된다. 화면 내에는 색상, 채도, 명도, 크기, 부피, 대비 등과 같은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주목성을 지닌 요소가 바로 카메라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 움직임이 지닌 또 다른 기능은 정서적 기능이다. 카메라 움직임은 단순히 피사체의 이동을 따라가거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서를 창조해낼 수 있다. 동일한 피사체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카메라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이 생성될 수 있으며, 같은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창조될 수도 있다. 특히 트래킹(Tracking) 기법은 이러한 정서적 기능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트래킹 기법은 카메라가 생성해내는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며, 카메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이 포함된다.6) 주로 달리(Dolly)나 크레인(Crane), 지브(Jib) 등과 같은 다양한 장비를 이용해 움직임이 생성되는데, 역동적인 움직임 생성은 물론이고 피사체의 앞이나 뒤, 옆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현대 영화에서는 다양한 크레인 장비를 이용하여 트래킹 쇼트가 완성되는데 여러 장비가 결합하여 촬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시각 체계와는 거리가 있는 영상이 창조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인간의 지각을 거스르는 비현실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래킹 기법은 감독들이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으려는 수단으로 가장 선호하는 카메라 스타일이기도 하다.7) 트래킹 기법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향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속도, 거리, 화면 크기의 변화 등을 통해서도 새로운 정서를 창조해 낼 수 있다.
정서적 기능으로써의 카메라 움직임은 피사체나 장면에 다양한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극적(Dramatic)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물론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고 고정된 상태라 하더라도 쇼트의 배열을 통해 새로운 정서를 창조해낼 수 있고 그러한 정서적 창조가 극적 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면 훨씬 시각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다. <현기증 Vertigo>에서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감독이 줌 인(Zoom In)과 트랙 아웃(Track Out)을 혼합시켜 촬영한 장면은 카메라 움직임을 이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창출해낸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히치콕 감독은 쇼트의 심도를 조형적으로 왜곡시켜 인물의 내적 혼돈과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하나의 쇼트 안에 다양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부여되면 새로운 정서는 물론이고 극적인 효과까지 창출해낼 수 있다.
2)신동은,「인간의 시각영역에 따른 디스플레이의 최적화 비율분석」,『디지털디자인학연구』제11권 제4호, 2011, 579쪽. 3)이윤정,「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에 따른 표현분석」,『디지털디자인학연구』 제12권 제1호, 2012, 495쪽. 4)이승구,「Camera Movement의 분석 연구」,『연극학보』제16권, 1985, 88쪽. 5)최승원,「움직임을 활용한 관객의 시선 유도 연출」,『디지털디자인학연구』제12권 제3호, 419쪽 6)이상우,「뉴미디어 영상에 대한 카메라 움직임 연구」,『공주영상대학교 논문집』제5권, 1998, 320쪽 7)양영철,「트래킹 쇼트의 창조적 사용」,『영화연구』27호, 2005, 161쪽
3. <자유의 언덕>에 나타난 사실주의적 카메라 움직임
자신만의 독특한 사실주의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에 나타난 카메라 움직임은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이다. 헤어진 연인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일본 남자의 짧은 체류기를 그린 <자유의 언덕>은 마치 아마추어가 촬영한 듯 단순하면서 투박한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학원 강사인 권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느라 며칠동안 집을 비운다. 그사이 헤어진 일본인 남자 친구 모리가 그녀를 만나러 서울에 온다. 권을 만나지 못 한 모리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서울에서 자신이 겪게 된 사건과 만나게 된 사람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그 일상을 기록한 편지가 권에게 전해지는데, 권이 읽는 편지의 내용에 따라 영화가 전개된다. 하지만 편지를 들고나오던 권이 현기증을 느껴 편지를 떨어뜨리게 되고 편지지의 순서가 뒤죽박죽되면서 영화의 내용 역시 인과관계가 모호해져 버린다.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이 평범한 인물의 단조로운 일상과 그 안에 내재된 기이한 정서와 욕망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대표적인 카메라 움직임은 고정촬영을 바탕으로 한 팬(Pan)과 줌(Zoom)이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쇼트가 고정촬영으로 완성되었으며 사실성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되어 온 핸드헬드(Hand-Held) 촬영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고정촬영이란 가장 기본적인 촬영기법으로써 카메라 헤드와 렌즈를 고정시킨 채 피사체를 촬영하는 기법을 말한다.8)
반면 핸드헬드 촬영은 카메라가 고정된 받침대나 기계적인 안정 장치에 부착되지 않았음을 현저하게 느낄 수 있는 촬영 방식을 일컫는다.9) 많은 사실주의 경향의 영화에서 사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핸드헬드 방식을 활용해왔으며, 영화는 물론이고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영상 매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실주의적 표현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핸드헬드 촬영이 영상에서 사실적인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은 것은 다큐멘터리나 뉴스 촬영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카메라들은 부피도 크고 무게도 무거웠기 때문에 이동성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카메라가 소형화되면서 카메라의 이동성이 향상되었고 다큐멘터리나 뉴스 현장에서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핸드헬드 촬영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이렇게 촬영된 영상은 생생한 현장감을 관객에게 전달해주었고, 그 후 현장의 생동감이나 사실감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 방식으로 핸드헬드가 관습화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핸드헬드 촬영기법이 사실적으로 인식된 이유도 촬영된 영상이 사실적으로 느껴진 다기보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나 뉴스에서 많이 사용되다 보니 관습적으로 사실적인 느낌이 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핸드헬드 방식으로 촬영된 영상은 인간의 시각체계와는 그다지 유사하지 않다. 핸드헬드 영상은 끊임없는 흔들림과 미세한 떨림을 담아내게 되는데 인간이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그러한 떨림은 발생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이 사물을 바라볼 때 인위적으로 그러한 떨림을 만들어내려고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시점 쇼트나 제3의 객관적인 시점을 표현할 때 핸드헬드 촬영을 활용하여 사실감을 부여하고자 했던 이유는 핸드헬드가 관습적으로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를 핸드헬드로 촬영할 때 발생하는 시각적 현장감이 전달되는 내용의 사실성을 극대화시켰고 이후 극영화에서도 내용의 사실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핸드헬드의 시각적 현장감을 활용했던 것이다.
극영화에서 핸드헬드가 미학적 의도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0년대 프랑스 누벨 바그(Nouvelle Vague)와 미국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10) 이때부터 핸드헬드를 이용해 촬영된 쇼트는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관객과 연결시켜주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쇼트로 인식되었고 이전까지의 도식적인 화면 구성과 카메라 움직임을 변화시키게 되었다. 특히 누벨 바그의 핸드헬드 기법을 활용한 자유로운 카메라 움직임은 자연광 조명, 롱테이크(Long Take)와 함께 사실주의적 장면을 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핸드헬드는 카메라를 직접 손에 들고 촬영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촬영할 때 포착하기 힘든 섬세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었으며, 인물의 내적 심리를 포착하는데도 탁월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움직이는 피사체를 촬영할 때 이 방식이 효과적이었는데, 현장성이나 즉흥성을 지닌 사실적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할 때 주로 활용되었다.
핸드헬드의 상대적인 개념인 고정촬영 방식은 일단 화면에 안정감을 부여해주는 것이 특징이며, 오랫동안 화면을 보고 있어도 시각적 피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방식이다. 하지만 정적인 느낌으로 인해 보는 이에게 호기심이나 긴장감을 유발해내기는 어렵다. 이런 정적인 느낌은 관객에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훨씬 더 사실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적인 화면이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시각 체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사물을 바라볼 때는 안정감을 지니고 사물을 응시하기 때문에 핸드헬드보다는 고정촬영 방식에 훨씬 더 가깝다. 따라서 인간의 시각 체계와 유사한 고정촬영이 핸드헬드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홍상수 감독은 관습적으로 사실감을 전해주는 핸드헬드 대신 고정촬영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스타일과 사실적 정서를 표현해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카메라 팬은 감독의 의도에 의해 인물의 시선이나 동선을 따라 아주 짧게 움직이면서 장면이나 상황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담고 있는 카메라 움직임이 사실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이유는 관객의 시선을 사전에 예상하고 카메라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 체계는 기본적으로 화면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에 먼저 시선이 향하게 되어 있다. 만약 넓은 화면에 여러 개의 피사체가 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될 것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심이 될 것 같은’이라는 판단은 어떤 기준에서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쇼트 안에 가장 중심이 될 수 있는 피사체는 내러티브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고, 앞 쇼트와의 관계 즉 전후 맥락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 감독이 특정 앵글이나 화면 사이즈를 이용하여 직접 쇼트내에서 가장 중심이 될 것 같은 피사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롱쇼트(Long Shot)나 롱테이크를 이용하여 넓은 화면 안에 관객의 시선을 풀어놓고 관객 스스로 가장 중심이 될 것 같은 피사체를 찾아내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실주의 영화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 바로 이 방법이다. 그 이유는 장면 안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행위 자체가 관객에게는 객관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사실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왜곡을 최소화하고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한다고 강조했던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은 넓은 화면 안에 형성된 카메라 시점이 관찰자와 참여자의 역할을 오가면서 관객의 참여를 부추길 수 있고, 이러한 참여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현장에서 상황을 관망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1) 즉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관객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유의 언덕>에서 팬으로 나타나는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성을 유지하면서도 감독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움직임이다. 화면 안에서 관객의 시선이 움직이게 될 부분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며 관객의 시선이 따라오도록 유도함으로써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하면서도 감독의 의도대로 장면을 제시해나간다. 즉 장면 안에서 관객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부여하면서도 감독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모리가 골목길에서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발견하는 시퀀스는 감독의 의도와 관객의 시선이 일치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림1]은 모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쪽 편을 바라보며 골목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다. 당연히 관객은 왜 모리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쇼트가 골목길 전체를 보여주는 롱쇼트였다면 관객의 시선은 자연히 모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쇼트의 사이즈가 크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시선이 이동할 여지가 없다. 그다음 모리는 시선을 두고 있던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림2]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모리를 따라 팬을 하다가 모리가 멈추면 함께 멈춘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지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감독이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객의 시선은 당연히 모리를 따라 골목 끝으로 이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는 무언가를 발견했지만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모리의 뒷모습뿐이다. [그림3]여기에서 바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카메라가 멈췄지만 모리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관객의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장면 안으로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보통 몽타주를 중시하는 연출 스타일에서는 이 지점에서 커트가 바뀌고 모리의 시점 쇼트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리의 시점으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모리에게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도록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은 쇼트를 전환하지 않고 짧은 팬을 이용하여 모리가 발견한 것이 강아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4] 모리의 시점이 아닌 관객의 시점으로 강아지와 모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짧은 팬과 함께 강아지가 골목밖으로 사라지면 모리는 강아지를 따라 카메라에서 멀어져간다. [그림5] 이러한 짧고 느린 팬은 관객의 시선과 일치되며 관객이 자연스럽게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듯 느끼게끔 해준다.
마지막까지도 홍상수 감독은 관객이 모리에게 이입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아지가 골목을 빠져나간 후에도 멀어지는 강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리의 시선으로 쇼트를 전환하지 않는다. 사실주의적 스타일에서는 이러한 연출 방식이 지극히 당연하다. 관객의 현재 시점에서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강아지가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장 이어지는 장면은 이전 장면에서 골목길로 사라진 강아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림6] 화면에는 바닥에 앉은 강아지가 보이고 관객은 이것이 모리의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뒤이어 영선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강아지를 끌어안게 되면서 카메라의 짧은 줌아웃과 틸트업이 이루어진다. [그림7] 비록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줌아웃을 통해 이 쇼트는 모리의 시점이 아니라는 것이 폭로된다. 인간의 시각 체계에서는 줌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카메라에서 줌인이나 줌아웃이 이루어지면 이것은 인물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줌에 의한 폭로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화면 우측에서 좌측으로 모리가 지나간다. [그림8] 모리가 화면상에 등장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상황이 모리의 시점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뒤이어 영선이 일어서면 다시 카메라의 줌아웃과 틸트업이 이루어지고 [그림9] 마지막으로 모리와 상원에게로 줌인이 된 후 장면이 마무리 된다. [그림10] 이렇게 홍상수 감독은 카메라 움직임을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담아내면서도 객관성과 사실성을 치밀하게 유지해나가고 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적인 카메라 움직임은 바로 줌이다. 줌은 초점거리를 광학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시점을 가까이 혹은 멀리 이동시키는 것이다.12) 줌을 이용한 카메라 이동 효과는 카메라가 직접 움직일 때와는 시각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줌은 극적인 집중과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능이며 감정의 과장이나 몰입이 요구되는 극영화에 많이 사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13) 줌을 이용한 초점거리의 변화는 이미지의 왜곡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실성의 감소를 유발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많은 영화감독이 줌의 사용을 기피해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이 줌을 사용하는 목적은 감독의 의도대로 사실성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이 진짜 현실이 아닌 영화적 현실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인지시켜주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은 홍상수 감독의 사실주의적 연출 스타일에 흡수되면서 영화 속으로 감정 이입이 이루어지고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줌이 사용되면 감정 이입이 무너지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닌 영화라고 인식하게 되고 한발 물러난 객관적인 시점으로 영화 속 장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고정촬영에 팬과 줌이 결합하여 생성된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의 사실성을 극대화하면서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유의 언덕>에 나타난 카메라 팬이 감독의 의도를 전해주면서도 사실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팬의 속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의 시각체계를 고려하면 화면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움직임은 적당한 범위를 적절한 속도로 이동하는 팬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속도란 인간이 머리를 움직여서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를 말한다. 가령 카메라로 팬을 시도할 경우 아주 빠른 속도의 퀵 팬(Quick Pan)에서부터 느린 속도의 슬로우 팬(Slow Pan)까지 다양한 움직임이 창조될 수 있다. 인간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어느 장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시선을 이동할 때 아주 빠르게 시선을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가 창조해낼 수 있는 것보다는 속도에 한계가 있다. 아무리 고개를 빨리 돌린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속도 이상은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카메라를 이용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퀵 팬을 실시하면 중간 부분은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고 그저 모션블러(Motion Blur) 현상처럼 보이게 된다. 모션블러는 빠르게 이동하는 피사체를 상대적으로 느린 카메라 셔터 속도로 촬영했을 때 피사체의 이동 방향으로 영상이 흐르듯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14) 하지만 인간의 시각 체계 안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다. 인간이 고개를 움직일 수 있는 속도는 모션블러 현상을 일으킬 만큼 빠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추정해본다면 인간의 시선과 가장 유사한 카메라 움직임은 인간이 고개를 움직여서 창조해낼 수 있는 속도를 지닌 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언덕>에 사용된 팬의 속도는 인간이 어떤 장면을 응시할 때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는 속도와 유사하다. 그래서 감독의 의도대로 카메라가 팬을 하더라도 마치 관객이 고개를 천천히 이동시켜 장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속도의 카메라 움직임은 감독이 장면에 개입하면서도 관객에게 직접 장면을 관조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상원과 남희가 말다툼을 벌이고 모리가 말리는 장면은 적절한 속도의 카메라 움직임을 통한 관조적인 정서가 잘 표현된 장면이다.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선 상원은 남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림11] 하지만 쌀쌀맞은 남희의 반응에 상원은 화가 나고 두 사람의 말다툼이 시작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관객은 이 장면이 모리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싸움이 격해지자 모리가 프레임인하여 상원을 데리고 자신의 방 쪽으로 이동한다. [그림12] 모리가 프레임인하면서 시점이 관객에게로 옮겨가고 카메라는 천천히 두 사람을 따라 팬을 한다. 팬의 속도는 관객이 현장에서 시선을 이동시키는 속도와 거의 일치한다. 모리가 상원을 앉히고 진정시키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잠시 멈추지만[그림13] 상원의 욕설을 듣던 남희가 소리를 지르자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처럼 천천히 남희에게로 이동한다. [그림14] 흐느끼던 남희가 일어나서 자신을 방으로 들어가면 카메라는 다시 팬으로 남희를 따라가고[그림15] 남희가 방문을 닫고 나면 카메라는 다시 천천히 상원과 모리에게로 이동한다[그림16].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감독의 의도를 담아내면서도 충분히 사실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 장면은 커트의 분할 없이 롱테이크로 이어져 있다. 일반적인 영상 문법에서 충분히 커트로 분절될 수 있는 부분을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들어 화가 난 상원이 남희 쪽을 보며 욕설을 하는 부분에서[그림13]상원과 모리의 시선이 남희에게 이동하면 화면이 커트되고 [그림14]로 직접 연결될 수 있다. 혹은 게스트 하우스의 마당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체를 롱쇼트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사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남희가 앉아있는 마루와 모리와 상원이 앉아 있는 마루는 바로 옆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롱쇼트와 롱테이크를 이용했다면 훨씬 더 사실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쇼트의 범위를 풀쇼트 혹은 그보다 좀 더 좁은 범위로 좁히고 관객의 시각적 움직임과 유사한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에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이를 통한 효과는 감독이 관객의 시선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면서도 관객이 사실적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자신의 의도대로 카메라를 움직여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면서도 인간의 시각체계와 유사한 카메라 움직임과 이동 속도를 통해 마치 관객이 직접 현장에서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사실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8)강철두, 이해만,「TV다큐멘터리의 카메라 기법에 관한 연구」,『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연구』제32호, 2010, 151쪽. 9)프랭크 E.비버, 김혜리 역,『영화미학용어사전』, 영화언어, 313쪽. 10)고현욱, 서동기,「핸드헬드와 스테디캠을 이용한 롱테이크 촬영기법 연구」,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제8권 제1호, 69쪽. 11)최원재,「앙드레 바쟁의 이데올로기와 리얼리즘에 대한 경계」,『씨네포럼』 제15호, 2012, 90쪽. 12)블레인 브라운, 구재모 역,『시네마토그래피, 촬영의 모든 것』,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108쪽. 13)이충직,마아림,「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형식에 대한 연구」,『영상예술연구』제14권, 2009, 184쪽. 14)이석호, 한정완, 「디지털 동영상의 프레임레이트와 모션블러가 수용자의 시지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한국과학예술포럼』제12권, 2013, 179쪽.
영화 탄생 이후 카메라는 오랫동안 고정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고정된 위치를 고수했던 이유는 초기 영화가 보여준 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초기 영화는 그저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카메라가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화는 다르다. 오늘날 영화가 지닌 가장 주된 목적은 바로 이야기 전달이다. 관객은 이야기가 궁금하여 영화관을 찾고 감독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많은 영화감독이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는 것이다. 카메라 움직임은 시각적인 풍부함을 제공하여 작품 안으로의 몰입감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정서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에 의해 극적 효과가 창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움직임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부적절하게 사용하면 감독의 주관이 너무 깊이 드러나게 되고 영화가 지닌 사실적인 정서도 감소하게 된다. 대부분의 카메라 움직임이 인간의 시각 체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관객의 눈에 카메라의 움직임이 사실적으로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가장 강력한 시각적 표현 수단인 카메라 움직임을 전혀 활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관건은 어떻게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하여 영화의 사실적 정서를 유지할 것인가이다.
<자유의 언덕>의 예를 통해서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영화라 하더라도 카메라 움직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이 비사실적인 정서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쇼트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강조하고 사실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유의 언덕>에서 홍상수 감독은 카메라의 흔들림이 없는 고정촬영과 치밀하게 계산된 팬과 줌을 통하여 제삼자의 시선이 아닌 관객 자신의 시선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켜 사실적 정서를 이끌어냈다. 이 작품은 효과적인 카메라 움직임의 활용이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면서도 영화의 사실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