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explores Mary Wollstonecraft’s desire for home and frustration in Letters Written during a Short Residence in Sweden, Norway, and Denmark. It is an autobiographical travelogue composed of her letters to Gilbert Imlay written through her travels in Scandinavia and revised before the publication. Wollstonecraft took this trip at the request of Imlay, her lover who was deserting her and their daughter for another woman. She put into the letters her grief and anguish over his infidelity and her broken dream of domestic happiness. At the beginning, she cherished the hope that she could regain her lover and set up a happy home. As the travels went on, however, she came to realize that it was just a vain hope. It caused her great pain, aggravated by the existence of her daughter who might never experience a father’s love and who would not escape from women’s dependent and oppressed state. At the end of her travels, Wollstonecraft began to gain her emotional independence by recasting her lover as a man who had lost all taste and greatness of mind in pursuit of material wealth and pleasure. Moreover, the success of Letters enabled her to achieve the financial independence as well.
영미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사상가의 명성이 사후에 알려진 전기적 사실들 때문에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그 사람의 사상까지도 오랫동안 거부당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들라면 메어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보수적인 정치체제와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의 개혁을 주창했던 울스턴크래프트는 생전에 저술 활동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사상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인권 옹호』(
20세기 초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와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등이 울스턴크래프트의 급진적인 반역 정신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했지만, 페미니스트 사상가로서의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 작업은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출현한 1960-70년대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전반기에만 그녀의 일생을 다룬 전기가 여섯 편이나 출간되었고, 울스턴크래프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당시 페미니즘의 기치를 잘 표상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그녀의 저작들은 젠더 문제뿐만 아니라 감수성, 공감, 숭고 미학 등 18세기 영문학의 주요 쟁점들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특히 18세기의 소위 ‘감수성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감정, 주체성, 정치학 등의 문맥에서 울스턴크래프트를 연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그녀를 동시대의 다른 여성 저자들과 비교하는 연구경향도 부각되고 있다. 물론 울스턴크래프트는 계몽주의 사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여성을 무엇보다 가정(성)과 모성에 결부시켰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리고 선구적인 페미니스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페미니즘 비평계에서 그렇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코라 캐플런(Cora Kaplan)의 지적처럼, 울스턴크래프트 연구는 젠더, 섹슈얼리티, 주체성 등에 관한 페미니즘 논의에 기여해왔다.1)
울스턴크래프트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녀의 저작들을 『여권 옹호』로 대표되는 정치적 논문들과 그녀의 사후에 고드윈에 의해 편집되어 출간되는 『마리아』(
민은경(Min, Eun Kyung)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 옹호』는 “신기원을 연 페미니스트 논문”이지만 꼼꼼하게 읽히는 경우는 드물다고 지적하면서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저작을 “그녀의 이후 저작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25, 126).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유가 발전하는 과정의 한 단계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Min 126-27). 이런 주장은 울스턴크래프트의 다른 저작들에도 적용된다. 개별 저서를 별도로 연구하는 한편 개별 저서를 울스턴크래프트의 전체 사유 체계 속에서 고찰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몇몇 평자들은 『메어리』와 『마리아』를 같이 읽거나 『여권 옹호』와 『마리아』를 같이 읽는 등 이런 작업을 수행해왔다. 특히 『여권 옹호』와 『마리아』를 연결시켜 읽는 평자들은 후자를 전자의 “자매편”(Min 127) 혹은 “속편의 일종”(Todd)으로 본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여권 옹호』의 광고란에서 “여성에 관련된 법들”과 “그들의 특유한 의무들”을 고찰하는 두 번째 권을 쓰겠다고 공약했는데, 『마리아』에서 바로 그 작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71). 그런데 이 두 저서를 같이 읽을 때 울스턴크래프트가 『마리아』를 쓰기 전에 출간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 짧게 체류하는 동안에 쓴 서한집』(
『서한집』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들 중에서 당시 독자들에게 가장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 텍스트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들을 정치적 논문과 소설적 서사로 양분하는 구도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앤서니 폴락(Anthony Pollock)의 지적대로, 『서한집』이 오랫동안 비평가들로부터 외면 받아온 이유일지 모른다(193). 게다가 고드윈이 “만일 남자가 그 저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진 책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 책이 그 책인 것 같다”고 논평한 이후로 오랫동안 이 저작은 개인적 고통과 슬픔을 토로함으로써 독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고백록으로 분류되어왔다(95). 그러나 『서한집』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고백하는 자전적 회고록일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구조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여행담으로서 장르상으로는 일종의 “잡종” 형태를 띠고 있다(Myers 166). 울스턴크래프트가 자신을 연인에게 버림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감상소설의 여주인공과 닮은 여성이자 “남성들이 하는 질문들”을 묻는 “관찰력 있는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설적 서사의 특징과 정치적 논문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다(11). 몇몇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울스턴크래프트가 『여권 옹호』는 “희망의 정신으로” 썼고 『마리아』는 “개인적 고통과 정치적 환멸을 경험한 후에” 썼다면(Min 130), 『서한집』은 개인적 고통과 정치적 환멸을 경험하는 와중에 썼다. 따라서 쓰인 시기뿐만 아니라 장르적 측면과 울스턴크래프트의 개인적 경험의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여권 옹호』와 『마리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본 논문은 『서한집』이 울스턴크래프트의 지적 여정에서 가정에 대한 그녀의 사유가 중대한 변화를 겪는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특히 집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행복한 가정의 불가능성, 같은 여성으로서 딸에 대해 느끼는 동류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아』를 예시하는 작품으로 본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 옹호』에서 여성의 주요 역할을 “다정한 아내”와 “이성적 엄마”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교육을 통해서 여성과 가정을 개혁하고 개혁된 가정에서 여성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음을 뜻한다(74). 그러나 『서한집』은 행복한 가정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불안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마리아』는 한발 더 나아가 이상적 남성과 행복한 가정은 여성의 낭만적 환상이 만들어내는 허구임을 경고한다. 공화주의적 이상과 결합된 행복한 중산계급 가정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희망은 임레이와의 사랑이 좌절되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정이 좌절되는 과정에서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정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데, 이 변화 과정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겪는 불안과 절망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서한집』이다.
『서한집』은 1795년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임레이에게 쓴 편지들을 수정하여 펴낸 책으로 1796년 1월에 출판되었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울스턴크래프트의 명성이 복원된 이후에도 이 저서는 한동안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이 저서를 다루는 비평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는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젠더, 숭고, 감정과 이성의 관계, 낭만주의적 주체성, 여성의 고통, 자아 찾기 등 다뤄지는 쟁점들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 저서가 파국에 이른 임레이와의 관계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겪는 고통과 절망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은 비평적 논의에서 간과되어 왔다. 본 논문은 『서한집』에 나타난 울스턴크래프트의 집과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열망과 그 열망의 좌절, 그녀가 겪는 고통과 절망을 살펴본다. 그리고 좌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화되는 울스턴크래프트의 당대 여성의 현실에 대한 인식, 딸을 포함하여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동류의식, 인간의 품성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상업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고찰한다. 본 논문은 또한 울스턴크래프트가 자신의 경험을 숨김없이 기록한 『서한집』을 통해서 감정적, 경제적 독립을 획득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1)영미 비평계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수용되어온 과정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캐플런의 글을 참조할 것. 울스턴크래프트의 연구사에 대한 국내 논문으로는 이진옥의 글을 참조할 것.
『서한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울스턴크래프트와 임레이의 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권 옹호』를 출판한 1792년에 울스턴크래프트는 퓨젤리 부부와 출판업자인 조셉 존슨(Joseph Johnson)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 파리로 여행할 계획을 세우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해 8월에 혼자 프랑스로 떠난다. 그 다음 해에 파리에서 임레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1794년에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딸 파니(Fanny)를 낳는다. 고드윈에 따르면 울스턴크래프트가 사실혼 관계에 있으면서도 임레이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가족이 겪고 있는 재정 문제에 그가 연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86).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임레이의 아내로 여겼고 파리 주재 미국대사로부터 그 증명서까지 얻었다. 그러나 1795년 사업 때문에 런던에 혼자 건너와 지내던 임레이는 순회공연단의 여배우와 관계를 맺는다. 그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임레이가 이를 알아채고 그녀의 자살을 막는다. 이때 마침 프랑스에서 은괴를 싣고 고텐부르그(Gothenburg)로 가던 임레이의 배가 실종되자, 임레이는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스칸디나비아로 가서 이 사건을 대신 해결해줄 것을 부탁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파니와 그녀의 유모를 데리고 스칸디나비아로 여행을 떠난다. 심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고, “그녀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몰인정했지만 재결합하고 싶은 남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그녀의 감수성을 만족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Godwin 95). 한마디로 말해서, 이 여행의 이면에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좌절된 꿈과 그 꿈을 복원하고자 하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열망이 있다.
18세기 영국에서 대표적인 여행 유형은 귀족층이나 부유한 지주계급의 자제들이 교육의 일환으로 가정교사를 대동하고 유럽 대륙을 유람하는 ‘대여행’(The Grand Tour)이었다.2) 다른 경우에도 여행지는 대부분 유럽 대륙이었고, 여성이 혼자 여행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비춰보면 울스턴크래프트의 스칸디나비아 여행은 몇 가지 점에서 이례적이다. 우선 이 여행의 목적은 상업 거래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문제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가 아니라 대행인으로 이 업무를 수행한다. 여행지는 유럽 대륙의 문명화된 국가들이 아니라 북쪽의 변방 국가들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성 보호자 없이 딸을 데리고 여행길에 오른다. 도중에 딸을 유모와 함께 고텐부르그의 한 가정에 맡긴 다음에는 혼자 여행을 한다. 특히 겨우 1살 된 어린 딸을 여행길에 대동한다는 사실은 딸이 있을 집이 없다는 현실, 연인이 “그녀와 그들의 아기를 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Beard 75). 그리고 스웨덴에 도착한 날 밤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러한 현실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아렌달(Arendall)이나 고텐부르그에 내릴 계획이었지만 역풍 때문에 배가 두 곳을 그냥 지나치게 되자 고텐부르그의 남쪽 해안에 내린다. 그곳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를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루 머물면서 환대와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밤 울스턴크래프트는 북부지방의 아름다운 여름밤 풍경을 보며 쉽게 잠들지 못하고 집에 대한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의 집에서 보내는 첫 밤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집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아파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그날 낮에 “잔인한 기억”으로 아파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 기억들이 연인의 변심 때문에 깨진 행복한 가정에 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10). 그녀의 고통은 평온하게 잠든 딸의 모습을 보며 더 격렬해진다. 그런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고통만이 아니다. “황홀과 고뇌의 가장자리”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기쁨도 같이 느낀다. 집에 대한 기억과 잠든 딸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그녀가 처음 접하는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위로와 연결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머물게 된 장교의 집 근처 해안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그곳 바위틈에서 야생팬지를 발견하고는 “좋은 징조”라고 여긴다(9).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꽃이 하얀색에서 자주색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을 가진 야생팬지는 그녀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기억은 봄날의 소나기처럼 이내 사라진다. 대신에 그녀는 그림 같은 풍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행복을 기대하게 하는 기쁨을 느끼며, “프랑스에서 목격한 잔혹 행위들을” 잊고 “꾸밈없는 동류의식이 내 마음을 확장시키는 동안” 걱정을 잊는다(10). 또한 그곳 사람들에게는 황금시대를 연상시키는 순박함이 있고 그들이 베푸는 환대와 “천성적인 정직한 공감”은 그녀를 기쁘게 한다(9). 사랑의 좌절과 정치적 열망의 좌절로 인한 고통을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위로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자연과 사람들에게서 얻는 공감은 개인을 공동체에 연결시키는 끈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계몽된 자유로운 세상의 시초를 알리는 듯했던 프랑스 혁명은 공포정치로 변질되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 꿈꾸었던 연인은 그녀를 버린 상황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을 “인류라는 장대한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이라고 여긴다(12). 그녀는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혼자’라고 느낀다. 이 고립감과 상실감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공감적 감정은 애착의 인력처럼 내가 여전히 거대한 전체의 일부라고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12). 이것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여행이 단순한 상업상의 업무 여행이 아니라 “그녀의 감정적인 고통과 우울증을 치유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Dolan 78). 울스턴크래프트를 위로하는 공감은 여행에서 만나는 낯선 자연과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생겨나고 있다. 친밀한 사회와 사람에게서 얻은 절망을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치유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집과 사회에 대한 꿈이 좌절되면서 오는 울스턴크래프트의 고립감과 무소속감은 자신이 여전히 인류 공동체의 일부라는 그녀의 의식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낯선 사람들과 자연 속에서 이방인성을 느끼기보다는 집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절망감과 혼자라는 고립감을 치유하는 공감적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여행이 그 속성상 일시적이듯, 공감적 감정이 주는 치유 효과 역시 일시적이다. 더구나 울스턴크래프트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환대와 공감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빈번하다. 공감은 인간의 천성이지만 어떤 순간에 우연히 일시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특히 환대는 아직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그곳 사회의 미개한 상태를 보여주는 특징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고텐부르그의 부유한 상인들이 정치는 고사하고 문학과 공공 오락도 대화의 주제로 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울스턴크래프트는 문명, 상상력, 사유 능력, 취향과 학문의 관계 등에 대해 숙고한다. 그리고 “아마도 학문 탐구가 부족한 것이 소도시의 거주자들에게서 이방인들이 따뜻한 대접뿐만 아니라 환대를 받는 이유인 듯하다”는 관찰을 내놓는다(14). 즉, 울스턴크래프트는 환대를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는 학문적 호기심의 부재와 연결시키고 있다.
환대에서 기쁨과 위안을 얻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울스턴크래프트가 모든 환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환대는 여행객들에 의해 선량한 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과도하게 칭송되어왔는데, 내 생각에 무분별한 환대는 오히려 나태함이나 머리가 비어있음을 웬만큼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이라는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14),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방인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행위인 환대가 지성의 결핍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쾌락을 쫓아서 여행하는 사람들은 여행지의 사람들에게서 받는 환대 때문에 그 지역의 미덕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먼 나라를 여행할 때 순간적인 사회적 공감이 지성이 내리는 결론에 영향을 주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109).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한 나라의 미덕은 이방인에 대한 환대나 공감이 아니라 “과학적 진보와 정확한 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109). 결국 무분별한 환대와 공감은 그 지역의 문명적, 문화적 낙후성을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환대와 공감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비판적 견해는 그녀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베푸는 환대와 공감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이중적인 태도를 설명해준다. 『여권 옹호』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중간계급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계급이라고 말한다(76). 그러나 『서한집』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 대해서 중간계급보다 하층계급이 더 그녀를 즐겁게 하고 흥미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층계급 사람들에게서는 솔직하고 공감하는 특성이 두드러지며, 울스턴크래프트는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그들의 강렬한 바람에 자주 감동받는다”(24). 하지만 그녀는 “그토록 협소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과 계속 시골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베푸는 환대와 공감은 그녀의 마음을 끌지만, 그녀의 지성은 “벗하기에 더 적합한 사회,” 즉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그리워한다(24). 다른 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울스턴크래프트는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그들은 프랑스 사람들의 예법을 흉내 내려고 하지만 교양이 없고 그들의 지성은 아직 계발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설픈 모방에 그친다. 그들이 베푸는 환대와 공감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집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고립감을 인류라는 공동체에의 소속감으로 대체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일 뿐, 그녀에게 아무런 대안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여행지의 사람들에게서 받는 환대와 공감이 주는 효과가 일시적이라면 자연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효과는 그것에 비해 지속력이 강한 듯 보인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울스턴크래프트는 숭고한 풍경을 보면서 영혼의 확장을 경험하거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는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기술한다. “괴로운 마음으로 인해 머리가 아플 때면 언제나 바깥 공기가 내 치료약”이라는 구절이 보여주듯, 괴로울 때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연에서 치유 받는다(82). 이 치유과정에서 자연은 빈번하게 그녀를 시적인 이미지들과 철학적 명상으로 이끌기도 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홀로 여행하는 그녀에게 공감하고 환대를 베풀어주지만 지적으로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부러 피해 자연 속에서 고독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환대를 베풀어주는 사람들에게 감동받으면서도 거리를 두었던 것처럼,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연 속에서 치유 받을 때에도 “신성한 인간의 얼굴을 보고 싶어한다”(24). 그곳 사람들에게서 받는 위로가 일시적이듯 자연의 위로와 치유 역시 일시적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유럽에서 문명국에 속하는 프랑스와 영국을 떠나 문명의 주변국인 스칸디나비아로 여행을 가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사람들에게로, 문명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연에서 명상을 하고 기쁨을 얻지만, 그곳은 자신이 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님을 안다. 그녀의 감정은 곧 피로해지고 그녀에게 절망을 안겨준 연인과 사회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지혜와 미덕을 유지시켜주는 곳은 자연이나 변방의 사회가 아니라 악행들이 저질러지기도 하지만 학문이 발전한 세련된 문명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에 들어있는 “짧은 체류”라는 말이 암시하듯, 그녀의 체류는 일시적이고 아무리 환대받고 공감을 얻는다 해도, 인류라는 공동체에 같이 속한다고 해도, 그녀는 그곳의 일부가 아니다. 이국의 풍경은 그녀에게 피난처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문명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추방지이기도 하다.3) 그녀는 상처받은 가슴을 안고 이국의 땅으로 떠나지만, 이 여정에서 그녀가 깨닫는 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으로 되돌아가서 그녀에게 집이란 없다는 현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되어버렸다는 현실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갔다가 다시 중심부로 되돌아가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정은 순환구조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물리적인 이동의 측면에서 보면 런던 → 스웨덴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도버 (→ 런던)으로 구성되는 전체 여정에서 출발지와 종착지는 같다.4) 여행을 시작할 때 이미 파국에 이른 연인과의 관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도 이 여행은 순환 구조를 띤다. 그러나 울스턴크래프트가 연인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여성이라는 계급 전체의 상황과 결부시켜 고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울스턴크래프트의 여행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순환구조가 아니다. 여행에서 목격하게 되는 여성들의 실상, 특히 찬 겨울에도 시냇가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하느라 손이 터서 피가 흐르는 여자하인, 아이 아빠가 도망가 버려서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고된 가정일과 남편의 학대로 노예처럼 굴종적인 삶을 사는 여성들은 울스턴크래프트로 하여금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 절망을 당대 사회에서 여성이 처해있는 일반적인 “억압 상황”과 연결시켜 숙고하게 한다(107). 그리고 “그녀의 개인적인 불행이 공적인 문제로” 바뀌는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바로 그녀의 딸이다(Bahar 136).
울스턴크래프트는 스웨덴의 고텐부르그에 도착한 후 파니를 유모와 함께 그곳의 한 가정에 맡기는데, 이때 처음 울스턴크래프트는 딸과 떨어지게 된다. 혼자 여행을 하는 동안 그녀는 파니를 생각하면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하고 꿈에서 그녀를 보면서 “희미하지만 절망을 즐거움으로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새로운 희망이 슬픔의 구름 속에서 무지개처럼 나타나는 듯” 느끼기도 한다(66). 이 점에서 “아이의 존재가 스웨덴을 집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Jones 21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파니는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여성의 억압적 현실과 행복한 가정에 대한 좌절된 꿈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녀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이 측면에서 보면 파니는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스웨덴을 집으로 만들어주기보다는 집의 부재를 더 절감하게 하는 인물이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모녀 관계가 강조된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같은 여성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파니와 헤어진 직후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으로서 나는 그녀에게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어요-여성의 종속과 억압 상황을 숙고할 때면 나는 엄마의 애정과 걱정 이상을 느껴요”라고 고백한다(36). 여기에서 “엄마의 애정과 걱정 이상”이라는 구절은 그녀가 딸에게 모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종속되고 억압받는 운명을 공유한 여성으로서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동류의식과 연대감은 “불운한 여성이여! 그대의 운명이라니!”라는 비탄에서는 여성 전체로 확대된다(36).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들에게 느끼는 동류의식과 연대감은 그녀가 홀로 여행하는 여성으로서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게서 받는 공감과는 다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후자가 일시적인 위로를 제공하는 기능만 한다면, 전자는 여성의 현실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정치적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퇸스베르그(Tonsberg)에서 묵게 된 여관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유모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는 젊은 여성을 본다. 이 여성에게는 아이가 있는데, 아이의 아빠는 양육비를 부담하지 않기 위해 달아나버리고 그녀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녀가 유모 일로 1년에 버는 돈은 겨우 12달러이고, 이 중에서 10달러가 양육비로 나간다. 이 미혼모의 처지는 울스턴크래프트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해 보이는 계획들의 불안정성”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54).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미혼모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그 계획들이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행복을 얻기 위한 계획들은 아이의 아빠가 떠나버림으로써 실현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미혼모에게 남겨진 것은 구체적으로 제시된 임금과 양육비가 보여주듯이 힘겨운 노동의 삶이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이 미혼모의 처지를 보면서 느끼는 연민과 슬픔, 고통은 초연한 위치에 있는 제 삼자의 것이 아니다. 그녀 자신도 연인에게 버림받고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으로서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미혼모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고통 받는 당사자와 제 삼자인 관망자 사이에 형성되는 일반적인 공감 관계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 관망자인 울스턴크래프트는 동시에 고통 받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지적 거리감을 이 미혼모에게는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일을 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보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서둘러 밖으로 나갈 정도로 울스턴크래프트는 미혼모의 처지에 강하게 공감한다. 그리고 이 둘이 “공유하는 고통”은 울스턴크래프트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에 대한 자신의 꿈 역시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닫게 한다(Weiss 218). 이 의식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 강해지는데, 이 과정은 자신과 연인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고 따라서 행복한 가정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수반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행 초반부에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7번째 편지에서 그녀는 퇸스베르그의 한 예배당에서 미라 처리된 시신들을 본 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된다고 말하면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쓴다(49). 그리고 “부재라는 일시적인 죽음”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다(49). 이 구절들은 그녀가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릴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의 수신자인 연인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가버렸다는 점에서 그에게 그녀의 부재는 일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이다. 울스턴크래프트도 이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깨달아간다. 16번째 편지에서 그녀는 스트롬스태드(Stromstad)에서 딸이 있는 고텐부르그로 돌아오는 여정을 전하면서 딸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연인에게서 오는 편지를 “몹시” 기다리고 있음을 드러낸다(91). 하지만 같은 편지의 결말부는 울스턴크래프트도 그들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토요일 저녁 울스턴크래프트는 작은 마차에 수확을 마친 호밀을 싣고 가는 농부와 그의 아이들을 지나가게 된다. 어린 딸은 마차를 끄는 털북숭이 말 위에 걸터앉아 막대기를 휘두르고 있고, 농부인 아빠는 아장걸음으로 그를 마중나왔을 아기를 안고서 마차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팔에 안긴 아기는 두 팔로 아빠의 목을 껴안고 있다. 조금 큰 아들은 뒤에서 쇠스랑으로 곡식다발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면서 따라가고 있다.
수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와 아이들, 저녁을 준비하며 이들을 기다리는 엄마, 이 가족이 만들어내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파괴된 울스턴크래프트의 가정과 대조를 이루며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농부의 아이들과는 달리 파니는 아빠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그녀가 행복한 가정의 꿈은 실현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울스턴크래프트가 느끼는 고통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여성의 것이라기보다는 딸의 미래를 생각하는 엄마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말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남녀 관계가 아니라 엄마와 자식 관계의 틀에서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딸에게로 돌아가고 있지만, 딸의 미래에 대한 생각, 이미 깨져버린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 때문에 그녀의 가슴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오른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슬픔과 고통은 덴마크의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앨토너(Altona)로 가는 여정에서, 즉 연인이 있는 런던이 가까워질수록 더 커진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울스턴크래프트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기록한다. 고통, 슬픔, 절망 등의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에도 그녀의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코펜하겐에서부터 그녀의 관찰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고 대신에 “괴로운 마음은 너무 자주 탄식을 한다”(116).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가장 잔인한 실망”의 기억으로 괴로웠지만 그 현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덴마크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그 거리를 없애는 행위로 볼 수 있다(124).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여행을 시작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한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런던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그 고통스런 현실과 직접 대면하러 가는 길이 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돌아갈 집은 이미 파괴되고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행복한 가정의 꿈이 파괴된 근본적인 이유를 상업의 비도덕성에서 찾고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갑작스러운 부의 유입으로 벼락 신흥도시가 된 함부르크(Hamburg)를 소개하면서 상업적 투기가 인간의 도덕적 품성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존감을 확보해주는 범위를 벗어나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 순간” 인간의 도덕 체계를 지탱해주는 원칙은 그 힘을 잃는다(127). 그들은 이익과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고, 상업상의 업무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은 희생된다.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시민, 남편, 아버지, 남자형제의 모든 자선행위들은 텅 빈 이름이 된다”(128). 여기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의 역할을 시민, 남편, 아버지, 남자형제, 이렇게 네 개로 분류하고 있는데, 시민이 공적 영역에서 남성이 담당하는 역할이고 나머지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이라는 점에서 두 개로 재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상업이 모든 것에 우선할 때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까지도 상업의 해로운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어느 영역에서든, 그것이 무엇이든, 남성의 역할은 공허한 것이 된다. 그리고 남성이 상업의 논리에 침윤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가정은 “여성에게 안전한 피난처”일 수 없다(Favret 120). 상업은 인간의 자존감과 도덕성을 파괴하고, 남성이 자존감과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을 때 행복한 가정이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일 뿐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사람의 품성은 환경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하면서, 상업에 몰두할 경우 사람은 취향과 지성을 잃게 되며, 기품 없이 겉으로만 부를 과시하거나 세련된 감정 없이 탐욕스럽게 쾌락을 즐길 때 야수처럼 변한다고 비판한다(125-26). 그런데 이러한 상업 비판은 함부르크라는 도시와 그곳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상업의 부도덕성에 대한 관찰자적 견해에서 연인에 대한 신랄한 개인적 항의로 바뀐다. “당신은 . . . 상업에 깊이 몸담은 이후로 이상하게 변했어요”(126).5) 연인이 변한 증거로 그가 더 이상 숙고하지도 않고 그의 지성과 열정이 깨어있지도 않다는 점을 든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지만 그 재능은 “천한 일,” 즉 상업적 투기에서 낭비되고 있다(126). 울스턴크래프트는 연인에게 “당신을 덮어 가리는 비열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요청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요청임을 그녀도 알고 있다(126). 이렇게 상업의 영향으로 변해 버린 연인은 세상에 훨씬 더 흔한 사랑(love)의 쾌락을 추구할 뿐 “공감보다 더 견고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애정(affection)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성을 잃어버린 인물로 그려진다(94). 즉, 울스턴크래프트는 연인과의 관계가 파국에 이른 것은 연인이 상업 활동에 몰두하면서 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상업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영국과 미국이 “자유를 획득한 것은 상업 덕분이고, 이것이 봉건제를 무너뜨릴 새로운 종류의 권력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인정한다(86). 세련된 문명사회에서 저질러지는 악행들을 알면서도 그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이 암시하듯이, 상업의 발달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시골에서는 자연과의 친밀감을 통해서 세련된 감정을 일깨울 수 있다면,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에서는 “사람들과 뒤섞임으로써 우리의 편견들을 심문하게 되고” 분석 과정에서 편견들을 없앨 수도 있다고 본다(20). 따라서 상업에 깊이 몰두하는 것은 인간의 품성에 해롭지만, 개인의 지성과 감성의 계발과 사회의 진보를 위해 상업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상업은 “사회적 진보와 타락 둘 다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Guest 306). 그러나 울스턴크래프트는 “부의 폭정은 신분의 폭정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의 폭정이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영역까지 파고들 때 그 최대의 희생자는 바로 여성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상업 비판은 런던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로 아직 미개한 상태에 있는 유럽의 주변부에서 상업이 발달한 중심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는 “사람과 불행에서 물러나” 숭고한 자연에서 일시적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지만 함부르크처럼 상업화된 도시에서는 상상 속에서 그 자연 풍경으로 되돌아가보지만 이내 “상업의 소음”이 그녀를 숭고한 자연 풍경 속에서 잊었던 “걱정거리들로 다시 이끌어낸다”(129). 이제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상업의 속임수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야망에 희생된 누군가의 비참한 이야기” 뿐이다(129). 이렇게 마지막으로 갈수록 상업에 대한 비판이 통렬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상업의 비도덕성에 물든 연인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파국에 이른 사랑과 깨져버린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 때문에 여전히 괴로워하지만, 이제 그녀는 연인을 상업적 이익과 쾌락을 좇느라 사유 능력을 잃어버리고 지성과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능력도 상실한 인물로 보기 시작한다. 로맨스 추구 서사의 틀로 이 작품을 읽는 재클린 랩(Jacqueline Labbe)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연인과 떨어져 있는 한 그들의 관계를 풀 수 없고, 그녀가 싸워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임레이와 함께 사는 것이라면, 귀향함으로써 그녀는 필연적으로 싸움에서 진다”고 주장한다(217). 그러나 연인을 더 이상 그녀의 지성과 감성에 응답하지 못하는 인물로 재설정하고, 상업이 가정영역까지 침해하여 남편, 아버지, 혹은 남자형제로서 남성이 해야 할 역할을 이름뿐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에서 행복한 가정이란 환상일 뿐이라는 각성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유는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울스턴크래프트가 텍스트 내에서 여행의 실제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으며 “연인이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녀가 정식으로 했었을 법률 중개인들과의 어떤 모임에 대해서도 상세한 내용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Pollock 197). 왜냐하면 이 전략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여행을 상업상의 업무 여행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관찰한 것들을 기록함으로써 “탐구와 토론을 장려하는” 저작을 생산해내는 여행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33). 즉, 울스턴크래프트는 연인의 요청으로 그를 대신하여 여행을 떠나지만, 자신을 당대의 “탐구 정신”을 구현하는 지식인 관찰자로 제시함으로써 연인으로부터 감정적 독립을 시도하고 있다(33).
2)철도와 증기선의 보급으로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대여행’은 중산층으로 확산되었고, 19세기에는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나이든 여성을 보호자로 대동하고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된다. 3)낸시 유제프(Nancy Yousef)는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위안을 주는 고텐부르그의 자연과 높은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 그녀에게 감금과 억압의 느낌을 주는 루소어(Rusoer)의 자연을 대조하면서 루소어의 풍경에서 “피난처는 사회생활이 주는 열망과 만족으로부터 유배되는 추방지이기도 하다”고 평한다(552). 4)이 작품에 실린 마지막 편지는 울스턴크래프트가 도버에서 런던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 끝나고 있다. 5)신디 맥밀렌 콘저(Syndy McMillen Conger)는 이 인용문을 포함하고 있는 문단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별의 세 단계, 즉 이별에 대한 불안, 부정, 분노를 연속적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본다(50).
울스턴크래프트에게 써준 위임장에서 임레이는 그녀를 “가장 좋은 친구이자 아내인 메어리 임레이” 또는 “임레이 부인”이라고 지칭한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이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호칭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임레이가 변심했고 울스턴크래프트와 딸을 떠나려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텅 빈 이름이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임레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에는 이 비어버린 이름에 내용을 채우려는 소망이 들어있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이 소망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총 25개의 편지들 중에서 마지막 5개가 연이어 슬픔이나 고통, 한탄, 피로감, 불안감 등을 보여주는 구절들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은 더 확실해진다. 특히 희망의 어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지막 다섯 편지들의 마무리 구절들은 그녀가 “임레이 부인”으로서 꾸려갈 가정을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여행을 시작할 때 그녀와 연인의 관계는 이미 파국을 맞고 있었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도 이미 깨져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여행은 집을 잠시 떠나 낯선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다. 25번째 편지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행에 대한 심한 피로감을 드러낸다. “나는 . . . 사람들과 장소들이 내 관심을 끌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을 떠나는 일에 지쳤어요”(130). 그러나, 메어리 파브렛(Mary A. Favret)의 표현을 빌리자면, “떠나는 것을 그만두고자 하는” 울스턴크래프트의 희망은 헛되다(“Letters” 224).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돌아갈 집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또한 허영입니다!”라는 탄식에서 드러나듯 울스턴크래프트도 이것을 알고 있다(130). 집을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시작된 여행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끝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여행에 “귀향은 없다”(Favret, “Letters” 224).
『서한집』에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스웨덴 해안에 처음 내렸을 때 도움을 받은 장교 부부는 좋은 인상을 주고, 딸을 맡겼던 고텐부르그의 한 가정의 행복한 모습은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울스턴크래프트는 말한다(56). 추수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농부 가족은 그녀가 몹시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제도로서의 가정은 여성이 고된 가정 노동과 남편의 폭정에 시달리는 젠더 억압의 장소이거나 남편은 주정쟁이고 아내는 하인들에게 잔소리하는 것으로 기분을 푸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그려진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정의 행복을 찬미하지만, 실제로 세상에서 가정의 행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의 마음속에서 조차도 애정을 계속 일깨우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지성이 더 계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4). 울스턴크래프트에 따르면 가정의 행복은 애정이 지속될 때 가능한데, 애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이 함양되어야 한다. 이 문맥에 따르면 상업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모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근대사회에서 행복한 가정이란 구조적으로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업 활동은 인간의 자존감과 도덕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애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지성의 함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가정이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할 때, 혹은 가정 자체를 꾸리는 것이 불가능할 때 여성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미혼모의 사례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립의 문제이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편지는 “런던으로 가는 내 여정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언급으로 끝난다(131). 일차적 의미에서 이것은 짐을 꾸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비유적 의미에서 이것은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고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릴 수 없다는 현실을 직접 대면하고 그 이후를 심정적으로 대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연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끝난 후 울스턴크래프트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다. 그녀는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는 동안에 임레이에게 쓴 편지들을 수정하여 책으로 펴내는데, 이 책의 성공으로 “재정적 보상과 상당한 인지도 둘 다를” 확보한다(Beard 88). 그녀는 저자로서 명성을 얻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연인의 요청에 의해서 연인의 대리인으로 여행을 시작하고 여행 기간에 연인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 편지 속에 개인적 절망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관찰과 비판을 적어 넣음으로써 자신을 지식인 여성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연인과의 관계 회복과 행복한 가정에 대한 희망은 여행 과정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함께 좌절로 바뀌지만, 편지들을 수정하여 출판함으로써 이 좌절을 실패로 남겨두지 않고 감정적,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출판하기 전에 수정 작업을 거쳤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서한집』을 구성하고 있는 편지들은 울스턴크래프트가 실제로 임레이에게 보낸 편지들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서한집』은 “사회에 대한 논평과 자연에 대한 기술을 담고 있는 공적인, 즉 ‘밖을 바라보는’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임레이에게 보낸 편지들은 거의 전적으로 울스턴크래프트의 번민과 연애사건의 미래에 대한 질문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Fav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