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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몸짓의 꿈’: 홍상수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 내레이션과 꿈, 몸짓의 관계에 대한 고찰 -아감벤의 「몸짓에 관한 노트」에 비추어- ‘The Dream of a Gesture’: Giorgio Agamben’s “Notes on Gesture” and Hong Sang-Soo’s Film Hill of Freedom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몸짓의 꿈’: 홍상수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 내레이션과 꿈, 몸짓의 관계에 대한 고찰 -아감벤의 「몸짓에 관한 노트」에 비추어-

This essay examines the relation between voice-over narration, dream and gesture in Hong Sang-Soo’s film Hill of Freedom (South Korea, 2014)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ought of cinema by Giorgio Agamben. Agamben argues that ‘the element of cinema is gesture and not image’ and every image ‘is animated by an antinomic polarity: on the one hand, images are the reification and obliteration of a gesture; on the other hand, they preserve the dynamis intact.’ (Agamben, “Notes on Gesture”, Means Without End: Notes on Politics, p.56.) The main question about the examination of Hill of Freedom in light of this thought of cinema is which aspect of the two this film realizes more strongly: Is it the film of gesture or that of image?

This question is related to the function of the voice-over narration in this film. In this essay, the narrator, Mori, plays an important role to determine the texture of the (non-)reality of the (re)presented events in the film. Are they represented as caught in the memory of the character, or as liberated from the memory and presented like the events in dreams? Are the gestures in this film, finally, even from the dream and the narration as linguistic activity, liberated?

Agamben’s thought of cinema is a sort of ‘media-biopolitics’, which sees gesture as ‘intersection between life and art, act and power, general and particular, text and execution.’ (Agamben, “Marginal Notes on Commentarie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Means Without End, p. 80.) From this perspective, this essay analyzes the possibilities of the ‘gesture’ in the contemporary film by Hong Sang-Soo, who has sought to present the human gestures with the cinematic dispositif as ‘dream of gesture’.

KEYWORD
몸짓 , 꿈 , 영화 ,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 조르조 아감벤 , 홍상수 , <자유의 언덕> , (비)리얼리티
  • 1. 들어가며

    홍상수 영화 <자유의 언덕>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사용하는 방식은 영화 전체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은 단지 인물의 생각을 목소리로 전하거나 사건에 해설을 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세계의 리얼리티의 성질을 새롭게 만든다. 이러한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며, 이에 대하여 영화론적으로는 어떠한 고찰이 가능할까? 이 논문은 <자유의 언덕>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행하는 기능을 분석하고 사유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영화 매체에 관한 그의 글 「몸짓에 관한 노트」에서 “영화의 요소는 몸짓이지 이미지가 아니다”3)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와 더불어 그는 영화 이미지가 진동하는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극성”4)을 논하는데, 하나는 몸짓을 사물화하여 의지적 기억 속에 잡아 둠으로써 “마술적 고립”5) 속에 담아두는 성질이고, 다른 하나는 몸짓의 잠재력을 보존하면서 비자발적 기억이 현현하게 하는 “번쩍이는 이미지”6)로서의 성질이다. 이 두 가지 영화의 속성은 <자유의 언덕>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몸짓’과 ‘내레이션’, 그리고 ‘꿈’은 어떠한 상호작용 속에 이 영화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을까?

    이 글은 아감벤이 영화에 관해 쓴 글에서 <자유의 언덕>의 고찰에 흥미로운 단초를 제공하는 지점들을 포착해 이 영화를 그에 비추어 논하고자 한다. 그를 통해 <자유의 언덕>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과 ‘쓰기’ 및 ‘텍스트’의 관계와 작용, 그리고 이 영화가 지닌,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꿈과 같이 모호한, 독특한 (비)리얼리티의 바탕을 ‘몸짓’과 ‘꿈’의 개념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7)

    1)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27쪽.  2)위의 책, 28쪽.  3)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 양창렬 옮김, 난장, 2009, 65쪽.  4)위의 책, 65쪽.  5)위의 책, 66쪽.  6)위의 책, 66쪽.  7)그럼으로써 기존의 홍상수 영화 연구가 보여 온 몇 가지 주요경향들이 가진 어떤 한계들을 넘어서고자 한다. 홍상수 영화 연구는 여러 관점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고, 자주 시도된 방식은 서사 및 시간구조 분석, 주제와 심리 탐구, 시점을 비롯한 형식미학 연구, 장소성 고찰 등이다. “‘서술-초점화’, ‘서사구조와 시간구조’ 등의 영화서술학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이 둘을 관련시키면서 영화서술학적 해석”(12쪽)을 하는 고현철의 『영화서술학과 영화의 유형학』은 서사학적 홍상수 영화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들은 의미 있는 분석을 담고는 있지만, 홍상수의 서사적, 형식적 실험과 인물세계 탐구가 영화 매체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홍상수 영화가 영화 매체학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성취하는가에 대한 통찰에까지 시선을 뻗지는 않아 보인다. 이 논문은 선행연구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통해 그 너머로의 새로운 통찰에 이르기를 시도한다.

    2. 내레이션-쓰기-꿈

    <자유의 언덕>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영화의 주인공 모리의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모리의 내레이션은 일본인인 그가 한국을 찾아 서울 북촌의 게스트하우스에 2주 동안 머물며 옛 애인인 권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보내는 나날의 일상적 정서와 생각을 전달한다. 이 내레이션은 모리가 권에게 남긴 일기 형식의 편지 텍스트의 발화이다. 따라서 모리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내레이션은 곧 그가 권에게 쓴 편지의 글을 읽는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첫머리에 관객에게 제시된다. 타이틀 시퀀스인 어학원 장면에서, 다소 지친 모습의 한 여인이 어학원 창구에 맡겨진, 모리가 자신에게 쓴 편지를 받아 나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편지는 여러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날짜나 일련번호가 쓰이지 않아 있는데, 편지의 수신자인 그 여인 -권-은 이것을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지면서 떨어뜨린다. 그 바람에 편지는 흩날리고, 종이들은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며, 그 중 한 장은 빠뜨려지기까지 한다. 권은 순서가 뒤섞인 그 편지 텍스트의 낱장들을 카페 ‘자유의 언덕’에 앉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골몰히 읽고, 영화는 간간이 그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편지에 담긴 내용이 영화 <자유의 언덕>이 보여주는 2주간의 모리의 나날들이라는 점에서, 그 편지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모리가 내레이션으로 말하면서, 모리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순간순간 계속해서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을 권이 ‘읽고’ 있음으로써, 이 영화는 순간순간 ‘쓰이고’ 동시에 ‘읽힌다.’ 모리의 내레이션과 그의 편지 쓰기-읽기의 이러한 관계는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것, 모리의 모든 경험의 묘사를 ‘모리가 쓴 것’, ‘모리가 말하는 것’으로 환원시킨다. 영화는 사실적인 스타일을 유지하지만, 그러한 내레이션-쓰기의 형식을 통해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모든 것은 모리에 의해 주관적으로 ‘쓰인 것’이 됨으로써 허구성을 띠며, 마치 ‘꿈’과 흡사한 성격을 갖게 된다. 모리의 내레이션은 언뜻 사건들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처럼 들리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들 자체가 모리의 내레이션 진술 자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리의 내레이션이 존재함으로써 사건들은 사실적으로 일어난 일로서의 굳건한 속성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대신, ‘모리의 이야기’로서 허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러한 ‘영화 속 텍스트’의 설정은 홍상수 영화가 흔히 취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다른 나라에서>가 극중 인물인 펜션집 딸에게 부여한 역할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영화의 사건들의 무대인 펜션에서 일하면서 영화의 시나리오를 습작하고 있다. 영화의 모든 사건들은 그녀가 쓰는 시나리오가 형상화된 것으로 나타나 보이며, 그로써 영화는 펜션집 여성이 쓰는 시나리오 안에 사건들이 들어있는 액자식 구성 - 그러나 이 액자는 완전히 닫힌 프레임을 지니지 않고, 액자 밖과 안이 서로를 휘감는 양상을 보인다 -을 취하게 된다. 즉, 영화가 재현하는 모든 사건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그녀의 상상 속 허구를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9) <다 나라에서>에서 영화와 동시에 ‘쓰이며’ 영화를 생성하는 시나리오는 <자유의 언덕>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레이션, 쓰여 읽히고 있는 편지로 대체되어 있다. 즉 여기서 글 혹은 말로서의 텍스트는 영화의 상영시간 동안 실시간으로 쓰이거나 읽히거나 말해지며, 그럼으로써 영화를 생성하고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가 생성하고 구성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영화’임이 자각되고, 그럼으로써 영화가 재현하는 사건들은 스타일상의 사실성과는 별도로 허구성을 보존하며 비사실적 성질을 드러낸다.

    이러한 홍상수 영화의 특성을 꿈에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꿈 역시 스스로 쓰이는 작동기제에 의해 시각화되는 이미지이자 사건이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무의식이 ‘쓰는’ 어떤 시나리오, 텍스트에 따라 사건화되어 나타나 보이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리 사실적이어도 꿈으로서 머문다. 내레이션이 없다면 - 모리의 편지가 없다면 - 외적 세계의 사실로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한 가지 층위만 지녔을 <자유의 언덕>의 세계는, 모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꿈’으로서의 속성을 관객에게 발설하고 있다. 홍상수 영화 <자유의 언덕> 전체를 휘감으며 독특한 (비)리얼리티를 만드는 것이 바로 그러한 내레이션의 작용이다.

    8)에드가 앨런 포우, 『꿈속의 꿈』, 공진호 옮김, 아티초크, 2013, 15쪽.  9)홍상수 영화의 액자구조에 관해서는 고현철, 『영화서술학과 영화의 유형학』, 부산대학교 출판부, 2014의 「액자구조와 상호텍스트성의 영화」를 참조. 특히, <다른 나라에서>에 관해서는 87쪽의 분석을 참조할 수 있다.

    3. 서술자로서의 보이스-오버 내레이터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내레이터’의 존재로부터 나온다. <자유의 언덕>의 내레이터는 극중 인물인 모리로서 ‘캐릭터-내레이터’이자, 모리 자신이 포함된 사건들을 진술하는 ‘서술자’의 속성을 지닌다.

    우리는 <자유의 언덕>에서 내레이터로서의 ‘모리’가 극중의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재현하는 사건들의 서술자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의 대리자인 권이 모리가 맡긴 편지를 찾아 읽기 시작한다. 이 편지가 곧 모리의 내레이션의 대본이므로, 영화 전체11)에 대하여 모리가 서술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자유의 언덕>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미 알아챌 수 있다. 즉, 모리는 영화가 재현하는 사건들의 행위자로서 극중 인물인 동시에 사건들의 재현을 주관하는 시나리오로서의 ‘편지’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의 내레이션은 ‘독자/관객’인 ‘권’이 읽는 이야기-텍스트를 쓴 ‘작가’의 ‘낭독’과 같은 역할을 하며,12) <자유의 언덕> 뒤에서 모든 이야기 내의 사건들에 속한 인물들의 행위13)를 조종한다. 그가 편지에 쓴 대로, 관객은 본다. 관객이 무엇을 볼 지는 모리의 편지/내레이션이 결정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를 영화 세계 내의 사건들로 구성함에 있어 재현되는 사건들 전체의 리얼리티에 대한 ‘모호성’을 자아내는 이러한 내레이터의 존재를 적절히 드러내는 동시에 적절히 숨긴다. 그래야만 재현된 세계의 핍진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어도 영화 내의 세계로의 몰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또는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선을 넘나드는 정도로만 서술자의 역할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자유의 언덕>의 관객은 편지를 쓴 이로서의 모리, 그것을 낭독하는 목소리로서의 모리의 내레이션을 알고 들으면서도, 그다지 의구심을 갖지 않은 채 꽤 오랫동안14) 영화 속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영화 속의 세계와 재현되는 사건들은 내레이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의 허구적 가능성을 갖지만, 관객은 이야기 속의 세계를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것의 리얼리티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 뒤에 내레이터로서의 모리가 있음으로써 영화 전체의 리얼리티의 질감이 달라지는 것을 예민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들에의 몰입과 이질적 미학적 감각의 그 미묘한 공존 속에 <자유의 언덕>의 중핵이 있다.

    스스로를 쓰며 미묘한 (비)리얼리티의 상태 속을 유영하는 영화로서 <자유의 언덕>에서의 내레이션은 “자기-의식적 말 걸기”15)를 행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편지-텍스트를 읽는 권의 모습이 수시로 내비춰지는 것은 이 영화가 지금 자기-의식적 발화를 하고 있음을 관객으로 하여금 완전히 잊지 않게 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마치 ‘자각몽’처럼, 꿈을 꾸면서도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간간이 눈치 채게 하는 것과 같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건들을 제시할 때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지나치게 장면들을 지배하는 대신 보이는 것에 가볍게 덧붙여지는 정도로 처리됨으로써 관객은 영화가 그려 보이는 세계의 리얼리티에의 믿음을 잃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된다.16) 이러한 상태는 거의 영화의 마지막까지 지속되며, 비로소 영화의 끝에 가서야 예민하지 않은 관객들마저 이 사건의 정체에 무언가 묘한 게 있음을 느끼게 된다. 결말이 모호하게 처리되면서 그때까지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거리를 두게 되기 때문이다.

    서술자이자 영화의 세계 속 인물인 모리의 존재, 그리고 영화가 재현하는 사건들이 텍스트에 바탕을 둔 것임을 일깨우는 ‘편지-읽기’의 쇼트들과 더불어 <자유의 언덕>은 영화 스스로가 스스로를 쓰고 있음을 관객에게 지속적이고도 은근하게 인식시키며 영화 속 세계를 써나간다. 이를 통해, <자유의 언덕>의 관객은 이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가 지닌 모호성에 서서히 다가간다. 앞서 논했듯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인 ‘어학원에서 편지를 받아 오는 권’의 시퀀스에서 그 작용은 이미 시작되고, 이는 끝까지 일관되게 지속되며 영화 전체의 리얼리티에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내레이션에 의해 덧씌워진/덧-쓰인(double-written) 층위는 독특하게 현실과 꿈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리얼리티의 결을 만든다. 1인칭 화자의 내레이션은 한편으로는 재현되는 사건들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허구성을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창조자’로서의 내레이터의 작용을 사라 코즐로프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꾼들』에서 이렇게 논한다.

    관객은 내레이션과 더불어 영화의 세계 속에 몰입하다가도 그것을 하나의 의식적으로 ‘쓰인’ 세계로 감지할 수 있다. 이때 “내레이션은 인물의 정신적 삶 속에 빠져드는 능력을 요구하는 대신, 관객에게의 자기-의식적 말 걸기의 조직 속에서 역할을 행하는 정신적 삶의 부분들을 만들어낸다.”18) 말하자면, 영화가 재현하는 인물의 행위들이 그 자체로서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적인 관객에게의 말 걸기를 통해 사건들이 마치 반투명한 것과 같은 상태 속에 놓이며, 그것은 바로 내레이션이 지니는 ‘정신적 삶의 부분’으로서의 기능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레이션을 통해 베일처럼 드리워지는 ‘정신적 삶의 부분’이란 무엇일까? 조르조 아감벤은 의지적 기억과 비자발적 기억의 대비를 통해 영화가 놓여 있는 독특한 긴장의 영역에 주목한다. 그것은 곧 ‘정신적 삶의 부분’을 열어내는 것과 연관됨을 이어서 살펴보겠다.

    10)Sarah Kozloff, Invisible Storytellers: Voice-over Narration in American Fiction Fil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p.45.  11)여기에는 편지를 읽는 권이 나오는 몇 장면들만이 제외된다. 편지 밖 사건으로서 편지를 읽는 권의 행위와 공간이 있음으로써, 모리의 서술은 편지를 경계로 액자 구조를 띠는 영화의 액자 속 세계를 주관한다.  12)이때 모리는 편지를 읽는 권까지 주관하지는 않음으로써 서사학에서 말하는 ‘내포 작가’ 또는 고드로의 용어인 ‘거대서술자’와는 구별된다. 이는 “‘내포 작가’와는 달리 표면에 드러나 서술을 하는 인격적 요소인 ‘서술자’에 상응하는 개념”(고현철, 앞의 책, 96쪽)으로 “명시적 서술자”(같은 곳)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리는 매우 강력하게 설정된 캐릭터-내레이터로서, 편지가 서술하는 세계에 한해 일종의 ‘작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3)엄밀히 보면, 권의 편지 읽기 행위만이 그 편지-서술의 외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리가 권이 읽도록 그 편지를 맡겨두었다는 점에서 권의 편지 읽기 행위도 서술자의 의도 안에는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편지를 읽는 권은 이때 영화 밖의 세계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14)하지만 평균적인 극영화의 시간적 길이에 비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63분으로 매우 짧고,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닌 리얼리티에의 몰입 가능 시간의 한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15)Ibid, p.45.  16)여기에는 홍상수 영화의 특이한 장소성의 표출도 기여한다. 실재하는 장소들이 주소와 이름까지 고의적일 만큼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임으로써, 리얼리티에의 믿음을 부추긴다.  17)Ibid, p. 45. “in many cases the voice-over narrator is so inscribed in the film as to seem as if he or she has generated not only what he is saying but also what we are seeing. in other words, films often create the sense of character-narration so strongly that one accepts the voice-over narrator as if he or she were the mouthpiece of the image-maker either for the whole film or for the duration of his or her embedded story. We put our faith in the voice not as created but as creator.”  18)Ibid, p.45: “Instead of claiming the ability to plunge into the mental life of the character, the narration creates those portions of that mental life which can play a part in the tissue of self-conscious address to the viewer.”

    4. 아감벤의 영화론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영화론은 영화학에서 아직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 『영화와 아감벤 Cinema and Agamben』20)을 비롯하여 아감벤의 영화론을 가지고 영화들을 분석하는 작업들이 최근 학계에 발표되며 관심을 받고 있다. 정치철학을 주로 펼치는 아감벤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매체이며, 그는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조르조 아감벤의 영화론의 핵심은 영화의 요소로서의 ‘몸짓’에의 주목에 놓여 있다. 아감벤은 영화에 관한 그의 글 「몸짓에 관한 노트 Notes on Gesture」21)에서,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 영화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논하며, “미학으로부터 윤리학과 정치학으로의 “몸짓의 전환””22)을 시도한다. 이 논의의 밑바탕에는 “몸짓을 잃어버린 사회”에 대한 진단이 깔려 있다. 아감벤은 ‘노트’의 첫머리에서 “19세기 말경 서구의 부르주아지는 이제 자신의 몸짓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리게 됐다”23)고 하면서, 영화가 탄생한 시기 영화 매체 (특히, 당시의 무성영화)와 몸짓의 상관관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 몸짓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채 격하게 걷고 몸짓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에티엔-쥘-마레와 뤼미에르 형제가 바로 이 시대에 찍기 시작한 영화를 볼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인상이다.”24) ‘몸짓’의 기록 매체로서의 영화 및 몸짓이 결핍된 삶에 관한 이러한 성찰 속에서, 아감벤은 삶과 사회에 결핍된 생동하는 존재의 ‘몸짓’을 영화 매체가 대신 충족하는 한편 결핍 그 자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논한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몸짓으로 채워져야 할 삶이 그것을 상실했을 때, 우리는 영화에 그 결핍의 충족을 바라게 되고, 이때 영화는 삶 본연의 몸짓을 담는 매체가 됨으로써 우리의 삶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거꾸로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감벤은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개념을 연관시키고, 나아가 모든 종류의 이미지는 몸짓과 움직임을 지향하며 변화해 왔음을 지적한다. 영화는 매체학적으로 보아, 몸짓을 나타내기에 최적합한 매체로서 아감벤의 시선을 끈다.

    몸짓에 초점을 둘 때, 이미지는 몸짓과의 관계에 있어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몸짓을 정지시키고 사물화시켜 말소해 버리는 상징으로서의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임의 잠재성을 보존한 채 의식에 지배당하지 않고 번쩍이는 현현을 내보이는 이미지이다. 전자가 ‘마술적 고립’ 속에 몸짓을 잃고 갇혀 있다면, 후자는 의지적 기억 너머로 튀어 올라 자유롭게 몸짓한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속성 가운데 아감벤이 영화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것은 후자, 즉 몸짓의 잠재력을 보존한, 비자발적 기억의 현현으로서의 이미지이다. 영화 매체가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으로서 고유하다고 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미지는 전자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예술사를 관통하며 일어나 온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렇다면, ‘몸짓’의 매체이자 ‘마술’의 예술이기도 한 영화는 이 두 가지 극성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를 몸짓의 매체 가운데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보는 아감벤은, 단연코 “이미지를 몸짓의 나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감벤은 베케트를 인용해 “영화는 몸짓의 꿈”이라 말하면서, ‘몸짓’을 ‘꿈’ 속에 담아내는 매체로서 영화를 내세우는 동시에, 영화라는 ‘꿈’에 ‘몸짓’의 각성을 끌어 들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몸짓의 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꿈’은 의지적 기억이 아닌 비자발적 기억으로서의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에, 각성의 반대인 몽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꿈은, 영화가 그렇듯이, 비자발적 기억이 현현하는 번쩍이는 이미지로서의 몸짓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본다면, ‘몸짓의 꿈’은 아감벤의 영화론을 적절히 표현하는 어구가 된다. 꿈이 의지적 기억의 지배를 벗어나 번쩍이는 몸짓의 현현이라면, 영화야말로 ‘꿈’ -‘몸짓의 꿈’-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조르조 아감벤의 영화론은 ‘몸짓’을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면서, ‘꿈’으로서의 영화가 ‘마술적 고립’이 아닌, 그것으로부터 ‘각성’을 시키는 ‘몸짓의 꿈’이 될 때 삶을 제대로 나타내는 영화일 수 있다는 논지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의지적 기억-마술적 고립으로서의 꿈이 아닌, 비자발적 기억-몸짓-으로서의 꿈, 혹은 그러한 꿈의 각성이란 무엇일까? 이를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몸짓’ 그 자체를 보다 자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몸짓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영화라는 꿈의 장치에서 작용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몸짓의 예술로서 영화는 미학만이 아니라 윤리와 정치의 영역에도 속해 있다고 보는 견해가 바탕에 깔려 있다.

    몸짓은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의 수단이나 행위이기 이전에, 몸짓 자체로서 ‘인간의 가장 고유한 영역’이다. 즉, 아무 쓸모가 없더라도 몸짓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를 짊어지고 그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한 ‘몸짓’을 볼 때 우리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몸짓은 그럼으로써 ‘에토스’와 연관된다. 존재를 맡고 짊어지는 몸짓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몸짓을 아감벤은 ‘순수 매개성의 영역’에 있다고 하고, 삶에 그러한 몸짓이 결핍된 것을 영화가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

    몸짓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에 있음으로써 어떠한 목적성의 굴레에서도 벗어난 채 소통가능성을 소통한다. 이러한 몸짓은 또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몸짓 자체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언어활동의 일부로서 그 안에 있지만,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는 것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짓은 언어적이면서 동시에 언어 너머, 혹은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감벤은 내러티브 영화에 적대적인 반면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발견한다. 철학자이기도 한 기드보르의 영화에 대한 글이 아감벤의 많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철학이 아방가르드 시네마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33) 오히려 아감벤의 영화론은 보다 보편적으로 여러 다양한 영화에 있어서 “이미지 안에 얼려 있는 상태로부터 해방된 몸짓”34)을 발견하는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연구들이 최근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35)

    19)아감벤, 앞의 책, 66쪽.  20)Henrik Gustafsson/Asbjørn Grønstad (ed.), Cinema and Agamben: Ethics, Biopolitics and the Moving Image, New York/ London, Bloomsbery Academic, 2014. 이 책 외에 아감벤의 영화론을 다룬 챕터로 다음의 서지들이 있다: Deborah Levitt, “Notes on Media and Biopolitics: ‘Notes on Gestures’”, in: Nicholas Heron, Justin Clemens, Alex Murray (ed.), The Work of Giorgio Agamben: Law, Literature, Lif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8, pp.193-211; Alex Murray, “The Homeland of Gesture”, in: Alex Murray, Giorgio Agamben, New York, Routledge, 2010, pp.78-94.  21)이 글은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 양창렬 옮김, 난장, 2009.  22)Gustafsson/Grønstad, op.cit. p.2.  23)아감벤, 앞의 책, 59쪽.  24)위의 책, 62-63쪽.  25)위의 책, 63쪽.  26)위의 책, 65쪽.  27)위의 책, 65-66쪽.  28)위의 책, 66쪽.  29)위의 책, 66-67쪽.  30)위의 책, 67-68쪽.  31)아감벤, 위의 책, 70-71쪽.  32)아감벤, 위의 책, 71쪽.  33)Benjamin Noys, “Gestural Cinema?: Giorgio Agamben on Film”, Film-Philosophy, Vol.8 No.22, July 2004: http://www.film-philosophy.com/vol8-2004/n22noys 참조.  34)Ibid.  35)Gustafsson/Grønstad, op.cit. 참조.

    5. <자유의 언덕>에서 몸짓과 꿈

    이 장에서는 홍상수 영화 <자유의 언덕>을 앞서 살펴 본 아감벤의 영화론에 비추어 고찰하고자 한다. 아감벤의 논의를 바탕으로 <자유의 언덕>으로 돌아오면, 모리의 내레이션-쓰기-읽기가 이 영화의 ‘몸짓’과의 관계 속에 지닌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의 두드러진 언어적 장치인 보이스-오버 내레이션과 그 텍스트로서의 편지의 존재, 그리고 관객/독자의 자리에서의 편지-읽기의 행위 등 일련의 ‘언어활동’은 이 영화의 ‘몸짓’과 어떤 상호작용을 할까? 모리의 내레이션, 즉 그의 ‘쓰기’가 그의 ‘몸짓’들의 시나리오라면, 그것은 의지적 기억의 작용일까, 아니면 의지적 기억을 넘어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는 어떻게 비자발적 기억이 현현하는 ‘몸짓’을 나타내고 있을까? 궁극적으로 <자유의 언덕>은 ‘몸짓’의 영화인가, 아니면 ‘마술적 고립’에 놓인 이미지인가? <자유의 언덕>이 ‘몸짓’의 영화라면, 그것은 언어활동으로서의 내레이션을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가?

    이 여러 물음들은 몸짓과 꿈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일차적으로 모리의 내레이션은, 앞서 살펴본 대로, 의식적으로 쓰인 편지-텍스트의 발화로서 발화자의 의지적 기억을 서술하는 것, 즉 그럼으로써 몸짓들을 의지에 의한 ‘마술적 고립’으로서 추억 속에 가두어 재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간단히 이 영화를 모리의 추억담으로 이해하는 방식37)이 그것이다. 하지만 보다 깊이 들어가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비)리얼리티의 질감을 염두에 둔다면, <자유의 언덕>의 재현들은 마치 ‘꿈’에서 꿈의 내용을 쓸 때 무의식이 그러하듯, 의지적 기억을 넘어서 ‘번쩍이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을 단순한 사실적 사건들의 제시도, 한 인물의 주관적 회상의 형상화도 아닌, 그 두 가지를 모두 거치고 뛰어넘어 꿈과 같은 비자발적 기억의 현현으로,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꿈의 각성까지도 암시하는, 그리하여 순수한 몸짓의 현현으로 보아낼 수 있다.

    의지적 기억에 의한 서술이 ‘몸짓의 사물화와 말소’와 더불어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마술적 고립’ 을 낳고, 그와 반대로 비자발적 기억의 서술이 꿈에서처럼 ‘현현’하면서 ‘번쩍이는 이미지’로서 몸짓을 살려내고 그를 통해 ‘기억 너머 전체’로 이끈다고 할 때, <자유의 언덕>에서의 모리의 내레이션은 그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짐으로써 독특한 리얼리티의 결을 만든다. 영화의 모든 인물들의 행동들은 <자유의 언덕>에서 ‘마술적 고립’ 안에 갇혀 말소된 몸짓일 수도 있고, 반대로 ‘비자발적 기억의 현현’으로서 ‘번쩍이는 이미지’인 몸짓, ‘꿈의 몸짓’일 수도 있다. 꿈 그 자체가 의지적 기억과 비자발적 기억이 뒤섞인 집합체인 것과 비슷하게, <자유의 언덕>은 ‘몸짓의 꿈’과 ‘마술적 고립’ 사이에서 유유히 움직이고 있다. 모리가 서울에 머무는 이주 동안의 모든 일들은 모리가 의지적으로 기억해 서술함으로써 ‘추억’의 특성을 지니지만 또한 그의 서술이 단지 현실의 경험을 의지적 기억 속에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 기제에 의해 나오는 ‘꿈’의 이야기와 같다면, 그때 그것은 ‘번쩍이는 이미지’로서의 ‘몸짓’을 만드는 ‘꿈’의 텍스트이다. 영화가 ‘몸짓의 꿈’이라고 할 때, <자유의 언덕>은 그 점에서 흥미로운 긴장 속에서 몸짓을 꿈처럼 풀어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의 언덕>의 모든 사건들은 모리의 관점에서 그의 내레이션-그의 편지-의 내용을 편지가 뒤섞인 순서대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가 독특한 결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그 모리의 내레이션이 지닌 이중적 속성에 있다. 실제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와 무관하게, 모리의 내레이션-그의 편지-이 ‘마술적 고립’을 부르는 의지적 기억의 서술인가, 또는 ‘번쩍이는 몸짓’의 잠재성을 풀어내는 꿈의 작업인가가 여기에서 중요하다. 모리의 내레이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같이 지님으로써 영화의 (비)사실성을 만든다. 즉, <자유의 언덕>은 (표면적으로는) 모리라는 한 남자의 관점 안에 갇힌 이야기-의지적 기억의 회상으로서의 마술적 고립 상태 -인 동시에, 꿈처럼 번쩍이는 몸짓들을 의지적 기억 너머로 불러내는 꿈-쓰기의 텍스트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꿈-쓰기’와 같은 발화를 하고 있다면, 이 언어활동은 마술적 고립을 벗어나 움직이는 비자발적 기억의 활동으로서의 몸짓을 위한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모리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잠을 자는 것38)은 그가 ‘꿈의 내레이터’일 가능성을 크게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영화에서 (꿈에서와 같이) 말소된 몸짓을 이미지의 고립으로부터 해방시켜 번쩍이는 몸짓들로 만드는 주문일 수 있다. 모든 ‘쓰기’는 쓰는 이의 관점의 지배를 받고 그의 의지 하에 놓이지만, 동시에 쓰기 자체의 작동기제에 의해 꿈이 그러하듯 쓰는 이의 의식 너머로 나아가 비자발적인 것을 현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유의 언덕>의 내레이션은 몸짓을 의지적 기억에 의한 사물화에서 해방시켜 꿈으로, 그리고 그 꿈의 바깥으로까지 풀어내는 장치로서 이 영화에 나타나는 ‘몸짓’들과 관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리의 내레이션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츰 ‘꿈-쓰기’로서의 특성을 강하게 암시하며 이미지의 고립에서 몸짓의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사건의 순서가 - 편지의 종이들이 - 뒤섞인 것은 이 이야기 전체가 꿈과 같은 것임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징표이다. 마치 꿈에서 사건들이 뒤죽박죽 순서가 뒤섞여 나타나듯, <자유의 언덕>의 내러티브는 시간의 자연적 순서를 뒤섞고 있으며, 시간에 대한 자유로운 관념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모리와 영선의 대화를 통해 서술되고 있기도 하다. 모호하게 처리된 결말, 즉 모리가 권과의 해피엔딩을 맞는지 아니면 ‘자유의 언덕’ 카페 주인 영선과 남는지,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가 ‘꿈’인지, 알 수 없는 결말 역시 모리의 내레이션의 ‘꿈-쓰기’로서의 속성을 나타낸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꿈’으로서의 영화를 가장 명백히 인식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 결말일 것이다. 영화 내내 모리가 그토록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던 권이 모리의 출국 전날 불현듯 그의 숙소에 나타나 함께 일본으로 가면서 (‘우리는 함께 일본에 가서 아이들을 낳고 잘 살았다’는 내용의) 모리의 동화적 해피엔딩을 연상시키는 내레이션이 곁들여지고, 그에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선이 모리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잔 뒤 맞는 다음날 아침이 보이는, 그럼으로써 직전 장면의 해피엔딩을 독특하게 무화시키는 이 결말이 그것이다. ‘편지’의 순서가 뒤바뀌어 나온 전개이기는 하나, 급작스런 동화적 소망성취 뒤에 이어져 보이는, 앞서의 장면을 무화시키는 듯한 결말은 이제까지 - 비록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으나 - 몰입해서 모리의 경험을 보던 관객에게 비로소 이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가 지닌 ‘모호성’에의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논리적 유추 너머, 관객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사건을 제시하는 영화적 리얼리티의 결이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는 표면 이면에 매우 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몰입해 보았던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오히려 모두 꿈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로부터의 ‘각성’을 하게 되는 순간이 이 지점이기도 하다.

    그때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지닌 이중적 속성이 인지되며, 그럼으로써 <자유의 언덕>이 재현하는 모든 인물들의 몸짓들이 비로소 내레이션이라는 ‘언어활동’ 밖으로 풀려 나온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리얼리티의 균열 혹은 성격 변화가 내러티브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가 재현하는 모든 인물의 행동들을 아감벤적 의미에서의 ‘몸짓’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의 자연주의에 가까운 사실적 행동 묘사의 리얼리티가 순간 비사실성(non-reality)으로 성격의 전환을 맞고, 그때 모든 인물의 행동들이 비자발적 기억이 현현하는 해방된 몸짓으로 보이게 된다. 그것은 바로 꿈이 몸짓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지속적으로 ‘꿈’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추구해 왔고, 동시에 매우 자연스러운 ‘몸짓’들을 기록하면서 ‘몸짓의 꿈’으로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나타내 왔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언덕>은 그러한 홍상수의 인간-몸짓-기록의 미학 (나아가 윤리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이 보이는 특유의 무목적적 행위들, 오직 ‘몸짓’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지리멸렬하고 반복적이며 확정적 의미의 표현보다는 소통가능성만을 타진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들은,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한 매개의 영역’에서 ‘소통가능성을 소통’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을 나타낸다.

    그러한 홍상수 영화 속의 ‘몸짓’은 매우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묘사되면서 사물화되지 않은 몸짓의 ‘잠재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내러티브적 장치들을 통해 ‘꿈’으로서의 속성을 암시 받으면서, 의지적 기억에 붙들린 이미지가 아니라 비자발적 기억이 현현하는 번쩍이는 이미지로 인지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실은 매우 비사실적인 속성을 동시에 갖는다. <자유의 언덕>이 ‘몸짓의 영화’로서 지닌 이러한 비-리얼리티를 우리는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이는 곧 영화 매체성의 경험이다. 매우 사실적인, 그러나 꿈처럼 비사실적인 (비-)리얼리티의 결과 질감은 <자유의 언덕>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마지막 쇼트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편지를 읽는 권이 편지 가운데 한 장을 일찍이 잃어버렸다는 것은 여기에서 <자유의 언덕>이 언어로부터 벗어나 몸짓이 되는 지점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자유의 언덕>은 영화 전체가 내레이션의 지배를 받고 그럼으로써 ‘언어활동-안에-있음’의 상태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언어활동의 공백에 몸짓이 있으며, 언어활동 자체가 잃어버린 편지 같은 것임을 이 작고도 중요한 내러티브의 장치가 암시한다. 이는 영화 세계 내의 행동들을 내레이션 밖의 ‘몸짓’으로 (재)인식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모든 것이 꿈일 수 있다는 인식을 통해 꿈속에 ‘각성’의 요소를 도입하는 효과를 낸다.

    <자유의 언덕>은 내레이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 몸짓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는 빈 칸이 많다. 모리가 애타게 그리는 권에 대하여 영화는 그저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말할 뿐, 모리와 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권이 어떻게 훌륭한 사람인지, 가장 중요한 관계의 내용은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가 가장 많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외국에 와서 2주 간 머물며 옛 연인과 재회하고자 하는 한 사람이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서 텅 빈 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의 모습들, 여러 사람들의 몸짓들이다. 게스트하우스와 그 주변 동네를 중심으로 만나는 그들은 서로 외국어로 간단한 의사소통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특별한 목적 없이 서로 만나고 어울리며 짧은 기간 동안 꽤 친해지고 서로와의 소통가능성을 소통한다.

    <자유의 언덕>은 풀어헤쳐진 몸짓들이 꿈에서처럼 깨어나는 영화이다. 모리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매체성 속에서 ‘몸짓의 꿈’으로서의 <자유의 언덕>을 향한다.

    36)안토니오 타부키, 『꿈의 꿈』, 박상진 옮김, 문학동네, 2013, 79쪽.  37)선행연구 가운데 홍상수의 <밤과 낮>의 보이스-오버를 주관성의 창구로만 보아 그 영화를 “궁극적으로 고백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도피-회귀의 연애담”(고현철, 앞의 책, 102쪽)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본 논문은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기능을 더 파고들어, 그것이 행하는 더 깊은 작용을 밝혀낸다.  38)홍상수 영화들에서 ‘잠’은 인상적으로 자주 등장해 왔다. 예를 들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문호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학교운동장에서 깜빡 졸다 깨거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해원이 도서관에서 잠시 잠들었던 사이, 앞서의 쇼트가 꿈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장치들을 홍상수는 즐겨 사용해 왔다. <자유의 언덕>에서 이러한 스타일은 확장되어, 주인공 모리는 어느 하나의 쇼트가 아닌 영화 전체를 꿈으로 느끼게 하려는 듯, 그 누구보다 ‘오래’ 잔다. 영화의 배경이 잠자는 곳인 숙소, 게스트하우스인 것도 이에 연관해 생각할 수 있다.

    6. 맺음말

    몸짓의 잠재력을 풀어내는 ‘몸짓의 꿈’과 의지적 기억에 지배당해 몸짓이 사물화된 ‘마술적 고립’ 상태의 이미지 사이에서 <자유의 언덕>이 어느 쪽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는가 하는 것은 <자유의 언덕>의 모리의 내레이션이 어떠한 속성을 지녔는가 - ‘꿈-쓰기’인가 아니면 ‘의지적 기억’의 서술인가 -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영화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이 두 극성 사이에서 진동하며 미묘한 리얼리티의 질감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자유의 언덕>의 내레이션이 이 두 가지 속성의 혼재 속에서 ‘꿈-쓰기’와 ‘몸짓의 해방’ 쪽으로 방향성을 두고 있다고 보고, 이를 조르조 아감벤이 「몸짓에 관한 노트」에서 논한 영화론에 비추어 고찰하였다.

    조르조 아감벤의 ‘몸짓으로서의 영화’에 관한 논의를 생각할 때,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은 ‘몸짓의 꿈’을 지향하는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캐릭터-내레이터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관객을 의지적 기억의 재현으로부터 비자발적 기억의 현현으로 그리고 끝내 언어활동으로서의 내레이션 자신을 무화시키며 ‘몸짓의 나라’로 보내기 위한 장치의 역할을 한다. 홍상수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내러티브적 실험은 실은 내러티브 자체를 정교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내러티브로부터, 즉 이야기로부터 해방시켜 ‘몸짓의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이 볼 때, 영화 <자유의 언덕>은 추억으로 굳어진 마술적 고립의 이야기이기보다는, 기억을 유동적으로 뒤섞고 빠뜨리고 새롭게 씀으로써 사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리는 가운데 이야기/기억 자체가 무화되고, 비로소 마치 꿈에서처럼 비자발적으로 풀려 나오는 몸짓들이 전시되는 매체에 가깝다. 그 속에서 이 영화가 담아내는 ‘몸짓’들은 단순히 재현된 사실이나 이야기에 담긴 리얼리티가 아닌, 사실/비사실, 기억/비기억의 경계를 무화하며 삶 그 자체를 담아내는, 존재론적 질감을 지닌 새로운 종류의 (비-)리얼리티를 가진 것으로 감지된다. 이 영화가 꿈꾸고 머무는 ‘자유의 언덕’은 말하자면 이러한 ‘몸짓의 나라’로서의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화가 통상적인 내러티브의 기능을 방해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매체를 보도록 하는 방식을 탐구”40)하는 아감벤의 영화론과 맞닿는다.

    영화 매체는 아감벤의 매체학적 생정치학(mediological biopolitics)의 관점에서 ‘몸짓의 예술’로서 새롭게 바라보아질 수 있다. 영화를 인간의 몸짓을 담는 매체로 보고 개별 영화에서 몸짓의 잠재성을 발견하는 고찰은 궁극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으로 이어지며, 이는 조르조 아감벤 외에도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 등 일련의 유럽 현대철학자들이 영화 매체를 사유하는 관점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 매체에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위한 단초이자, 매체학적 영화 연구를 동시대 철학적 사유와 연결하는 방법론이 되어준다. “아감벤의 몸짓은 모든 종류의 매체 대상물들을 생정치학적 관계들의 물질화 방식, 즉 그러한 관계들을 확언하고 경합시키는 방식, 어떻게 그들이 새로운 영향들을 발휘하고, 촉발시키고, 사용하는가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수단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우리를 매체에 대한 존재-행동학적 접근으로 이끈다”41)는 전망은 아감벤의 영화론이 영화 매체 연구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 적절히 일러주고 있다.

    39)아감벤, 앞의 책, 90쪽.  40)Alex Murray, Giorgio Agamben, New York, Routledge, 2010, p.94.  41)Deborah Levitt, “Notes on Media and Biopolitics”, The Work of Giorgio Agambe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8, p.207: “Agamben’s gesture opens the way [...] to a means of exploring media objects of all kinds in terms of the ways in which they materialise biopolitical relations; the ways they affirm and contest such relations; and how they enact, provoke and deploy new affects. [...] it sends us toward an onto-ethological approach to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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