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lieu de s’arrêter sur la morale selon laquelle il faut être bon et il ne faut pas être mauvais, notre intérêt porte sur la recherche pour savoir d’où viennent le bien et le mal. Surtout nous partons à paritr de la question: “Pourquoi l’être humain est amené à penser qu‘un phénomène ou une personne est bon ou mauvais?” Selon l’obsevation de Mélanie Klein faite sur de jeunes enfants qu’elle a analysés, le nourrisson perçoit le sein maternel comme “bon” s’il ressent une satisfaction, et comme “mauvais” s’il n’approuve pas de gratification au niveau de son désir. Donc, le bien et le mal ne sont que la création du psychisme vis-à-vis de ce premier objet d’amour. Et ce dualisme psychique va prendre d’autres objets divers au fil de la vie ultérieure. “Le mauvais sein” engendre ce qu’on peut définir comme attributs du mal : détérioration envieuse de l’objet, l’avidité(dont le but est l’introjection destructive), l’envie(qui est une projection vers l’exérieur), jalousie. “Le bon sein”, comme attributs du bien: gratitude, créativité, bonheur. L’analyse psychanalytique a révélé que, non seulement le mal seul peut entraîner le schizoïde, mais aussi l’effort contre nature de ne privilégier que le bien tout en excluant le mal crée un refoulement. Puisqu’une certaine dose d’agressivité est essentielle dans le travail productif, le bien ne peut pas exister sans le mal. Les deux frères dans 〈Azur et Asmar〉 de Michel Ocelot montrent chacun les deux aspects du bien et du mal. Dans 〈Heungbu et Nolbu〉 et 〈Kongdjui et Patdjui〉, les deux frères et les deux soeurs incarnent respectivement le bien et le mal. Mais ils sont présentés toujours ensemble comme le signalent les titres de ces contes traditionnels. Car les deux frères en fait, symbolisent deux personnalités dans une seule personne qui est notre être haumain. Cela implique que le bien et le mal n’existent pas séparément l’un de l’autre, ce qui correspond à la découverte de la psychanalyse.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는 대수학 책”1)이라 부른 역경은 도(道)의 패턴을 --(음)와 -(양)이란 디지털 코드로 표시한 책이다. 음양이라 하면 상식적으로 여남,2) 물질과 에너지, 달과 태양, 동양과 서양 등으로 나뉘어, 우주의 만물이 이렇게 디지털 코드로 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볼 것 같으면, 한 여성 안에 여성성만 100퍼센트 있다고 단정할 수 있지 않다. 이는 음이 다시 음양으로 나뉘는 것과 같다. 소위 여성성이나 여성적 태도, 성향 등에서 남성적 특성의 비율이 같이 존재하되 그 차이는 개인마다 다르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디지털’이 의미하는 바는 시사점이 있다: “실제 세계에서 발하는 소리, 빛, 냄새, 맛, 감촉 등의 자극은 감각기의 아날로그-디지털 변환 작용에 의해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된다. 우리의 두뇌에 의해서 인식되기 이전의 실제 세계는 단계별로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어 있다. 연속된 실제 세계는 아날로그 세계라 하고 두뇌를 비롯한 신경계의 인식작용으로 단계별로 끊어서 인식된 세계는 디지털 세계라 한다.”3)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원적 구분 또한 끊어서 인식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여성과 남성 각각의 모든 유형을 다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남자 사이의 통계적 차이점은 존재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에 대하여 천착해 온 프랑수아즈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해부학적, 용모상의 차이점은 인류역사의 최초부터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여 왔고 그러한 차이점이 바로 이원론의 원칙에 입각한 우리의 사고방식-추움/더움, 무거움/가벼움, 수동적/능동적, 낮음/높음, 약함/강함…-의 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도 언어적, 개념적 시스템이 구체성과 추상성을 대비시키는 이원적 양면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확신한다.4) 그러므로 번식을 위한 생식이 만일 다른 모습이었다면 인간은 다른 모습으로 사고하였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이 여성과 남성의 두 가지로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여기서 구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음양론이 보다 멀리 나아간 관찰을 하고 있다. 남여나 개념상의 이원론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만물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고 게다가 그 이원론적 요소 각각의 성질 또한 계속 이진법 적으로 나뉘어 규정됨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남여로 나뉘지만 한 인간의 인체는 다시 이진법 적으로 나뉘어, 좌우 앞뒤 대칭으로 되어 있다.
역경의 괘를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진 복희와 여와는 하체를 DNA처럼 감고 있다: “복희와 여와가 서로 꼬여 있는 것은 인간 세포의 DNA를 이루는 두 가닥의 폴리뉴플레오차이드 사슬이 꼬여 이중 나선형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복희가 DNA를 의식하고 역경을 만들었을까?”5) 즉 여성, 남성의 구분 외에도 인체 세포의 DNA도 두 가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과연 우주 만물이 음양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의 연구에서는 〈흥부와 놀부〉, 〈콩쥐 팥쥐〉 이야기를 다룰 것인데, 형제나 자매가 왜 또 하필이면 두 형제, 두 자매로 나뉘어 형상화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음양법칙을 떠올리게 된다.
철학에서 이원론(dualisme)이란, “근본적으로 외재적인(en exteriorite) 방식으로 서로 상정된 최종의 두 원칙에 의거한 현실의 질서, 추론의 방식이다. 이원론을 근거로 한 존재론은 서로 배타적이고 대조적인 원칙들을 양산하는 가치판단이나 윤리적 의미와 겹쳐진다. 그 예로는 존재와 무, 빛과 어둠, 선과 악 등이 있다. 선악이원론(manichéisme)은 이러한 사고체제의 극단적 형태로서, 기독교 전통의 한 가운데에서 탄생한 형태이다.”6)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철학의 특징인 형이상학성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본다. 우리의 인격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 한 사람 안에 내재한 요소들인 선악 개념은 과연 물질적인 요소와는 따로 떨어진, 순전히 정신적인 개념일까? 선악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 개념인가?
〈흥부와 놀부〉, 그리고 〈콩쥐와 팥쥐〉는 남여와 선악이란 이분법이 같이 어우러져, 두 형제와 두 자매를 중심으로 한 권선징악의 대표적 전래동화이다. 즉, 두 이야기 모두 각각 선악을 대표하는 두 명의 형제와 자매로서, 남성과 여성의 경우를 골고루 보이고 있다. 여기서 선악 개념은 한 성 안에서만 분리되어 있지, 남성과 여성을 갈라 한쪽은 선, 한쪽은 악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이는 혹시, 디지털 코드로 끊기어 표기된 선악이 실제로는 연결된 것이기에 한 개인 안에 선악이 같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면에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흥부와 놀부를 분리된 두 개체로 보지 않고, 한 개인 안의 두 면모를 과장하여 의인화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권선징악 이데올로기의 대표로서 흥부와 콩쥐는 선을, 놀부와 팥쥐는 악을 표상한다. 단지 표상할 뿐이다. 흥부와 콩쥐가 비현실적으로 착한 것은 그 과장으로 인하여 감동과 함께 어떤 교훈의 계기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렇게 전적인 선, 전적인 악으로만 뭉쳐진 인간이 아날로그적 실제에서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한 개인 안에서 흥부의 마음이 나오다가도 다시 놀부의 마음으로 변할 때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어떤 정신을 의인화(personnification)하여 그 근원적 형태는 알 수 없더라도 문학적, 예술적 형태로 남아있는 신화(mythe)처럼, 전래동화의 인물도 선/악이란 정신을 임의적으로 나누어 의인화한 것으로 우리는 본다.
설령 선악과를 먹도록 한 이브는 악으로 대표되는 뱀의 꼬임과 결부되고 이에 반하여 아담은 선을 표상했지만, 결국은 아담도 악의 과실을 먹었으므로 온전한 선은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아담으로 표상되는 온전한 선이 악에 의하여 더럽혀졌다는 설정 자체부터 아날로그적 실제 세계와 괴리가 있다. 그리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알도록 하는 과실은 생식기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연결된다. 선악구별에 성적 욕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창세기의 내용을 굳이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연구에서는 리비도나 욕구(envie)와 관련된 사랑과 미움을 지적해 낸 멜라니 클라인의 임상적 관찰결과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한국 전래동화에서의 선한 인물, 악한 인물에 주목할 때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이 밝혀낸, 젖먹이가 인식하는 ‘좋은 젖’, ‘나쁜 젖’을 직관적으로 떠올렸음을 고백한다. 좋은 젖, 즉 좋은 대상에서 선한 마음이 생겨나며, 나쁜 젖, 즉 나쁜 대상물에서 악한 마음이 생겨나 이것이 각각 소위 선, 악이란 개념을 만든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우리는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확인, 검토하려 한다.
선과 악은 창세기에서부터 남녀의 구분과 관계된 성(性)의 요소와 결부되어 있다. 그로부터 나오는 죄의식(culpabilité) 또한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데(‘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문에서 보듯), 그 원형은 바로 욕망과 관계된 죄의식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에서 무의식적 욕망이 종교를 탄생시킨 원리임을 밝혔다. 종교의 죄의식과 관계된 무의식에서 프로이트는 특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하고 있다. 서양의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사랑(‘선의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 합니다’)과 동양의 전래동화에서 강조하는 선은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에 속함을 우리는 본론에서 볼 것이다. 그리고 미움은 악마, 사탄의 마음으로 기독교는 생각하고 있고 그 악과 동양의 전래동화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악 또한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에 속함을 우리는 본론에서 볼 것이다. 선과 악은 욕구(envie)라는 뿌리를 같이 하고 있음이 클라인의 관찰결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의 전래동화에 대한 국내의 연구에서 선악은 권선징악이나 인성론적 측면에서 당연시될 뿐, 그 이상의 논의로 나아가 있지는 않다. 심청전이나 콩쥐팥쥐, 단군신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비추어 분석한 논문7)들은 있다. 우리는 선악이란 이분법적 개념을 그 자체로 처음부터 존재하는 사고로 당연시하지 않고, 왜 선악을 구분 짓는 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정신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본론에서 주로 참고로 할 클라인의 관찰 내용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생식기(期)보다도 그 이전의 구순기에 관한 것이 더 비중이 크다. 그럼으로써 선악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성격형성의 근원을 파헤쳐보도록 한다. 아동을 직접 분석하여 확인한 멜라니 클라인의 작업은 성인 분석을 기초로 아동기의 무의식을 추적해낸 프로이트의 발견을 보다 확실히 하고 정확히 다듬는 선상에 있다.
전래동화에서는 흥부, 콩쥐의 선한 면이 그려지고 놀부, 팥쥐(혹은 콩쥐의 계모)의 악한 면이 그려지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선한 인물은 환경이 어떻든 불평 없이 항상 감사하며 악한 인물은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한 인물을 질투한다. 성경을 보아도 사랑이란 시기하지 않으며 매사에 감사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유한다. 사탄은 하느님을 시기하여 지옥으로 떨어졌다. 흥부나 콩쥐, 하느님이 질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질투가 있기 마련인데, 과연 디지털화된 코드에 속하는 ‘선’의 개념에서는 어떠한 심리적 형성요소가 작용하여 질투를 처리하는가?
악은 왜 선을 질투하는가? 악한 마음에 질투는 당연히 내재한 요소인가? 질투는 왜 악으로 상정되는가? 그와 반대되는 선은 왜 질투와는 관계가 없는가?
질투와 함께 ‘탈취’도 악한 인물을 규정짓는 공통적 요소이다. 놀부는 흥부도 당연히 받아야 할 부모의 재산을 다 빼앗아 소유한다. 팥쥐와 그 계모는 콩쥐가 가지고 있던 옷이며 버선들을 빼앗아 독차지한다. 우리는 본론에서, 멜라니 클라인의 관찰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원형이 되어 전래동화 속 인물의 성격유형으로 발현되고 있는지 분석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1)이성환, 김기헌 공저, 『주역의 과학과 도』, 정신세계사, 2006, p.5. 2)‘음양’ 의 순서에 맞추어 ‘남여’라 아니하고 ‘여남’이라 표현하였다. 이후의 ‘물질과 에너지’ 등도 마찬가지이다. 3)이성환, 김기헌 공저, 위의 책, p.35. 4)Catherine Vincent, “Masculin féminin” Le Monde - Sagas d’été, 2009년 8월 29일, p.2. 5)이성환, 김기헌 공저, 위의 책, p.35 6)Les notions philosophiques, Publiée sous la dirention d’André Jacob, Paris, Puf, 1990, p.710. 7)참고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의 생애 초기부터 생존과 직결된 욕구(envie)의 대상물은 어머니 젖으로서, 멜라니 클라인(1882-1960)에 의하여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gratitude)과 관련되어 연구되었다(1957). 이전의 정신분석학이 욕구를 결핍(privation)의 상황에서 페니스에 대한 욕구의 형태로만 한정지어 접근한 반면, 클라인은 욕구와 감사의 마음8)을 상반되면서도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확대하여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보상, 욕구충족(gratification)이 있을 때 욕구는 감사의 마음과 섞이게 된다. 이에 클라인은 무의식적 욕구가 성격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욕구가 과도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신분열적 망상(schizo-paranoïde)이란 비정상적 병리학의 경우도 자세히 연구하였다.9)
우리는 이런 감사의 마음을 흥부나 콩쥐의 자세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일견, 아무런 욕심이 없을 것 같은 ‘착한’ 인물은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지만, 무엇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저변에 어떤 욕구가 있어 그것이 충족된 데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 욕심 많은 놀부와 팥쥐는 당연히 욕구가 많다. 그러므로 ‘착한’ 마음으로 대표되는 ‘선’은 ‘심술 궃은’ 마음으로 대표되는 ‘악’과 그 욕구라는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유아의 감정생활이 성인이 되어서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클라인의 작업은, 환자의 과거 유년기와 무의식을 탐구하는 일이 성인이 되어서의 인격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프로이트 가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머니 젖은 본능적으로 음식의 근원, 보다 확대되어 생의 근원으로 유아에겐 느껴진다. 이렇게, 보상을 주는 젖과의 심적, 신체적 친밀관계는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수반한다. 그런데 출생이라는 사건은 박해받았다는 생각과 강렬한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러한 최초의 형태로 인하여 불안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불안을 야기하는 출생사건은 태내에 있을 때 경험한 불쾌한 경험에 연장되어 일어나는 것인데, 이때 태내 안에 있었던 안정감과 결합된다. 이는 이후 좋은 젖과 나쁜 젖이라는, 어머니와의 이분법적 관계를 예고하는 구도이기도 하다.”10) ‘좋은 젖’을 토대로 생겨난 감정과, 그와 대비되고 비교되어 나오는 ‘나쁜 젖’에 대한 불안은 ‘태내에 있었던 안정감’과 결부된 노스탤지어, 즉 “옛날에는 (혹은 그 시대에는) 좋았는데…”라는 유형의 느낌을 만들도록 하는 심리적 원형이다. ‘잃어버린 낙원’ 또한 마찬가지로 사춘기 이전의 잠재기(7-8세 경)를 노스탤지어로 이상화시키는 정신구도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아담과 이브가 누리던 에덴동산은 이전 단계-성에 대하여 ‘몰랐던’ 예전-를 안정감과 결부시킨, 지고의 선이 구현된 공간이다. 그리고 사과를 따먹은 이후 맞은 사춘기는 새로운 인식단계로 여겨져, 불안한 느낌과 함께 ‘나쁜 젖’, 즉 죄로 얼룩진 타락의 상태로 치부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좋은 젖을 인식하는 것은 이후 성인이 되어 흥부, 콩쥐의 마음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고 나쁜 젖을 지각하는 것은 놀부, 팥쥐의 마음의 무의식적 근원이라고 본다. “‘좋은(bon)’이란 자질은 대상물(objet), 감정, 자세에 부여된 성격이며 나쁜(mauvais) 것은 그와 반대로서, 심술궂음(méchanceté), 악(le mal), 성질 나쁨(maligneité), 악의(malveillance)이”11)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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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팥쥐, 놀부는 왜 팥쥐, 놀부가 되었나? - ‘악함’의 무의식적 근원
“어머니 젖에서 느낀 욕구와 미움은 주체의 인성발달에 새겨져 있다. 욕구와 미움은 정신분석 치료 시에도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전적인 요소이다.”12) “감사의 마음과 사랑을 침식해 그 기저에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욕구이며 그 욕구가 모든 인간관계의 최초 원시적 형태인 어머니와의 관계를 침해하는 일차적 요인”13)이라고 클라인은 말한다. 어머니란 최초의 관계가 주체의 인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생활에 근본적 역할을 함은 수많은 정신분석학의 연구를 통하여 이미 정립된 사실이다. 그런데 클라인은 여기에 욕구란 요소를 더욱 파헤쳐 그것이 어떻게 유아에서 작동하는 요인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아동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인격형성에 본질적 기여를 하였다. 클라인은 욕구란, “파괴에의 욕동(pulsions destructives)이 구순-가학적(sadique-orale)이고 항문-가학적(sadiqueanale)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욕구는 근본적으로 선천적, 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14) 우리가 유아에게서 볼 수 있듯, 젖꼭지를 빠는 “구순 욕동(pulsions orales)의 강렬함은 선천적 요인이다.”15)
놀부와 팥쥐가 타인에게 보이는 행동에서 우리는 파괴적 욕동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팥쥐는 콩쥐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그리고 콩쥐가 죽은 자리에 뻗은 연 줄기를 뽑아 아궁이에 넣고 불살라버린다. 다음은 놀부의 파괴적 욕동이다.
놀부와 팥쥐의 성격은 반감(antipathie)으로 대표되는 부정적 감정의 전이(transfert de sentiment négatif)와 같은 기제(mécanisme)에서 연유한다고 우리는 본다. 최초의 대상물인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정동들은 아동들에게서 쉽게 관찰되듯, 주위 타인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직접적으로 영항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때 전이의 감정 내용의 원형은 바로 젖먹이 때의 것이다. 전이란, “주체가 분석가에게 쏟아내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감정이다. 이를 해석하여 최초의 대상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불안이 해소되고 보다 긍정적인 전이가 일어난다. 부정적 감정은 분석가에게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성격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17) 그러한 심리적 대처방식이 놀부/팥쥐의 악한 자세, 흥부/콩쥐의 선한 자세인 것이다.
“인생 초기부터 유아에게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이의 투쟁이 있고 그러한 투쟁은 자신과 대상물이 욕동에 의하여 무화될 것이라는 위협을 낳는다. 아이는 젖과 어머니가 자신으로부터 파괴적 본능을 멀리 제거해 주고 박해감으로 인한 불안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을 면해주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이의 투쟁,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위협은 아이가 어머니와 갖는 초기 관계에서 근본적인 요소가 된다.”18) 파괴적 본능과 불안의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며, 그러한 고통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는 악을 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악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소서’라는 주기도문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하느님(즉 젖과 어머니)이 자신으로부터 악(파괴적 본능)과 그로 인한 불안을 멀리 제거해 주기를 기도로 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선악이란, 하나의 환상이 분리된 것으로서 그 둘이 충돌하면 정동적 갈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에서 파괴적 본능으로 구현된 악은 해학과 골계란 승화작용에 의하여 그 불안의 요소가 감소되고 있다. 더욱이, 악을 배타적으로 제거하려 하지는 않고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의 식으로 선과 악을 같이 놓고 보아 그 두 가지 면을 그대로 같이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록 권선징악적으로, 놀부는 망하고 팥쥐는 “네 마리의 소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였”지만, 〈흥부전〉의 경우 악을 그 실체가 정해진 것으로 보지 않고 또한 내 마음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외부적 대상물로 보지 않아, 결국은 마음속에서 악이 저절로 사라지도록 하는19) 수행의 전통이 돋보인다 :
놀부가 뉘우치고 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악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흥부와 놀부는 각각 우리 마음 안의 사랑과 미움, 감사와 선망, 삶의 욕동과 죽음의 욕동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경험에 이렇듯 피할 수 없는 불평, 불만의 씨가 섞이고 이는 사랑과 미움 사이의 선천적 갈등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존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이의 갈등을 강화시키며 좋은 젖과 나쁜 젖이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준다.”21) 좋은 것(사물, 사람)과 나쁜 것이 있다는 느낌은 좋은 인물과 나쁜 인물을 설정하는 인간의 성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신분석학적 주체를 작중 인물이 아닌, 저자로 보는 것으로서 현재 우리의 논의와는 약간 시각이 다른 것이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인생의 전반적인 일에서 ‘행복한 경험에 피할 수 없는 불평, 불만의 씨가 섞이’는 경험을 한다. 예컨대 이런 일이 있어서 좋았는데 저런 일 때문에 기분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할 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합적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깨끗이 나누어, 좋은 젖과 연계된 행복한 마음을 흥부나 콩쥐로 표상하고, 나쁜 젖과 연계된 불만의 감정을 놀부나 팥쥐로 상정하여 그 허구적 인물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이 우리 연구에서의 전래동화이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 선천적으로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사랑과 동시에 파괴적 욕동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 선천적이라는 뜻이다. 비록 그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인생 초기부터의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22) 행복한 경험에 불평의 씨가 섞이는 것이 아날로그적 실제라면, 그러한 선과 악이 흥부의 자세와 놀부의 자세로 나누어 형상화된 것은 디지털적 표기방식이다. 즉 한 개인 안에 흥부의 마음과 놀부의 마음은 같이 존재한다. 사랑과 파괴성은 개인마다 비율이 다르지만 콩쥐의 마음과 팥쥐의 마음은 우리 안에서 같이 작용한다.
‘사랑과 미움 사이의 선천적 갈등’이 강화된 인간 내면을 묘사하는 데에는 상반된 기질의 두 인물을 대치시키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이에,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은 사랑과 미움 중 한쪽만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 놀부와 팥쥐의 악
1. a. 놀부와 계모의 심술은 ‘욕구에 의한 충동’이 반응한 것이다.
“어머니 젖에 대한 가학적 공격은 파괴적 욕동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때 욕구가 있어 이러한 공격이 특별히 더 강해진다. 내가 행한 임상에 의한 유아의 환상에 의하면, 아이는 어머니 젖과 몸을 다 비워내고 어머니안에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파괴하고 어머니 몸 안에 나쁜 변을 넣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이후 ‘대상물을 시샘하여 하는 파손(détérioration envieuse de l’objet)’이라고 명명할 성향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23) 모든 대상물을 파손하고 망쳐놓는 놀부의 “괴상”한 행동은 클라인도 지적하는 바, “대상물을 시샘하여 파손”하는 유아기적의 파괴적 욕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흥부놀부〉 이야기의 다른 판에서는 이미 위에서 예로 든 것 외의 심술의 예가 보인다.
최초의 대상물이 어머니 젖과 몸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의 대상물은 일상의 여러 재료를 취하게 된다. 위의 예에서 보이는 놀부의 타인들의 여러 상황들이 그 대상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놀부의 심보가 나오게 되는 소재가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지 놀부가 그랬을 수도 있고(그러한 인물이 허구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심술이란 정동(affect)이 어떠한지를 잘 표현해 주는 상징적 소재로 볼 때도 정신분석학의 관찰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한 주체는 일상의 모든 상황이나 소재에 맞닥뜨리자마자 과거에 채워지지 않았던 욕구에 의한 심리구도가 발동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놀부 식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괴상‘하지만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대상물을 시샘하여 행하게 되는 파손’이란 무의식적 원형의 과정을 천착해 보면 놀부의 모든 심술은 그러한 심리구도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인은 욕구, 선망(envie)을 “욕망할 만한 것을 다른 주체가 소유하여 그것을 즐기지는 않나 두려워하는 주체가 느끼는 화”29)로 정의한다. “욕구적 충동은 그 물건을 빼앗거나 망쳐놓는다.”30) “집 빼앗기, 올벼 논에 물 터놓기, 잦힌 밥에 흙 퍼붓기, 패는 곡식 이삭 빼기, 논목에 구멍 뚫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곱사등이 엎어놓고 밟아주기, 앉은뱅이 턱살 치기, 옹기장사 작대 치기, 잠자는 내외에게 소리 지르기, 수절과부 겁탈하기, 통혼에 방해하기”31) 등의 놀부 행적은 모두 남이 가진 것 혹은 장차 남이 가질 것에 대한 욕구, 선망이며 그것은 한국 전통적으로 심술이란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놀부의 심술은 그저 악의 내재적 성질이 아니라, 욕망할 만한 대상물(objet)을 빼앗거나 망쳐놓는 ‘욕구에 의한 충동(impulsion envieuse32))’이 원인임을 알수 있다. 그것은 부자가 된 흥부네 집에 들어간 놀부의 반응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팥쥐 계모34) 배씨의 심술 또한 욕구에 의한 충동으로서, 콩쥐의 행운을 빼앗거나 망쳐놓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김 진사 댁 아들의 배필로 콩쥐가 선택되어, 입을 옷을 짓기 위하여 콩쥐는 밤에 바느질을 해야 한다. 계모 배씨는 처음에 콩쥐가 바느질 하는데 필요한 등잔 기름을 없앤다. 개똥벌레 불빛으로 바느질 하는 것을 알자 이번엔 “콩쥐가 안보는 틈을 타서 개똥벌레가 든 싸리 집을 불붙는 아궁이 속에 던져 버렸다.”35) 뿐만 아니라 배씨는 콩쥐에게 나무를 시키면서 누더기 옷을 입히고 좋은 옷을 다 빼앗는다. 그네 뛰는 단오 날의 즐거움도 망쳐놓고 빼앗기 위해 콩쥐에게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길어 놓아야 하는 일을 시킨다. 콩쥐의 외가댁 잔치에도 계모는 팥쥐만 데리고 가며 콩쥐에게는 베를 다 짜고 겉피 석 섬을 쓸어 놓고 오라는 불가능한 숙제를 낸다.
“욕구는 어머니 젖을 파괴하기를 목표 삼는데 그치지 않고 어머니 젖안에 모든 나쁜 것-나쁜 변, 자기 몸의 나쁜 부분-을 도입하여 젖을 변질시키고 파괴시키려고까지 한다.”36) “아이 밴 여자 배 차기,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 우물 밑에 똥 누기”37)의 놀부 행각은 비상식적이라 터무니없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 무의식적 원형이 뚜렷한 상정이다. 이는 파괴적 욕동이 현실적으로 놀부의 이러한 행동으로 발현되었다는 1차적 해석으로 읽어도 되고 아니면 파괴적 욕동이 성인이 되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소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도 된다.
1. b.놀부와 팥쥐의 탐욕 - 박탈된 것을 탈환함
“감사의 마음과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의 발달에 욕구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자. 유아는 박탈되었던 것이 자신에게 베풀어지기 위해 다시 탈환된 것으로 느낀다. 그래서 젖은 이렇게 자신의 좌절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38)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을때 놀부는 자기에게 이미 충분한 재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사가 뒤틀린다. 흥부의 재산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것이 박탈되어 간 것으로 놀부는 무의식적으로 느끼기에 그런 것이다. 어린이들이 자신의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다른 아이가 무엇을 갖고 있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자기에겐 그것이 박탈된 것이라고 느끼며 그래서 자신도 그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유아적의 박탈된 젖에 대한 심리구도가 성인이 되어서도 재료만 달리할 뿐 그대로 전개됨을 우리는 놀부에게서 볼 수 있다. 이에 놀부는 그렇게 박탈된 것을 다시 탈환해야 한다. 놀부의 탐욕은 남의 “집 빼앗기”39)에서도 나타난다. 흥부가 재산을 횡재한 사실은 놀부에겐 박탈로 인식되어 자신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박탈된 것이 자기에게도 베풀어져야 한다는 전도망상에서 나온 행동이다.
1박탈되었으므로 자신의 좌절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규정되는 젖은 다시 탈환되어야 한다. 이는 팥쥐의 염치없는 반응에서도 보인다.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면42) 아기는 어머니의 몸을 탐험하고자 하는 환상을 갖는데 그것은 아기의 공격적 성적 욕구, 호기심, 탐욕(voracit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한 환상으로 인하여 아이는 커서 예컨대 신대륙 개척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개척자에게 있어 새로운 영토는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어머니 탈환을 표상한다. 식민지 개척과 소유의 이면에 자리한 이러한 무의식적 심리 구도는 팥쥐나 놀부의 행적 이면에도 그대로 깔려있다는 것이 우리의 논지이다. 즉, 팥쥐나 놀부가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은 곧 잃어버린 최초의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란 공백을 메우려는 무의식에 기인한다.
탐욕이란 이렇게, 정신분석학적 관찰에 따르면 박탈된 젖을 탈환하는 심리적 구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그저 부리면 끝이 없다는 탐욕(avidité)은 클라인의 관찰에 의하면 “거부할 수 없이 강한데, 채워지지는 않는 욕망의 표시이다. 그러한 욕망은 주체가 필요한 것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대상(물)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선다. 무의식의 수위에서 탐욕은 본질적으로, 어머니 젖을 비우고, 고갈시키고 먹어치우려 한다. 이는 탐욕의 목표가 파괴적 내부투사(introjection)43)임을 말해준다.”44) 이러한 관찰을 대변하듯, 놀부의 탐욕은 채워지지 않아 박이란 박은 모두 비우고 고갈시켜 먹어치우거나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자 한다. 여러 박 중 하나를 놀부가 먹어버리는 설정은 파괴적 내부투사를 거의 직접적으로 표상한다.(어머니 젖을 먹어치움=박속을 먹어치움) 박 안에서 나온 온갖 불운으로 “생짜로 경을 치른” 후에도 “겨우 정신을 수습하자 다시 동산으로 올라가서 보니 아직도 박 두통이 남아 있기에 한통을 또 따가지고 내려와서 째보를 달래어 켜 보는데 박 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평평한 박 뿐이므로 놀부가 ‘이 박은 먹음직 하니 우선 배고픈데 국이나 끓여먹고 기운이 나거든 남은 박은 우리 둘이서 타 보세.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진감래라 하지 않았나’ 하고 어서 국이나 끓여 먹자고 재촉하니 놀부 계집 박속을 썰고 양념을 갖추고 큰 솥에 물을 넣어 불을 지피고 무르녹게 끊인 다음 온 집안이 한 사발씩 달게 먹고 나니, 무슨 가야금이라도 뜯으며 풍류 하는 것 같이 그저 온 집안 식구가 당동당동 소리가 절로 나며 괴롭혔다. […] 놀부는 분한 김에 마저 덩굴 밑 박 한 통을 따다 놓고는 초라니 말이 생각이 났다. ‘금이 들기는 어느 박통엔가 들었다.’ 하더니 과연 이 박이로다. 공연히 딴 박만 타 가지고 고생만 했고나”라며 계속 일확천금을 노린다. 팥쥐는 감사의 부인이 된 콩쥐의 자리까지도 노려 콩쥐를 죽이고 콩쥐 행세를 한다.
“욕구에 찬 주체는 만족이 불가능하며 항상 불만족이다. 왜냐면 그에게 뿌리 깊게 박힌 욕구는 항상 쉽게 어떤 대상을 찾아 거기에 쏠리기 때문이다.”45) 비단 놀부나 팥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체를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곤 한다.
다음의 클라인의 보고에서 우리는 욕심의 무의식적 근원을 보게 된다: “임상 경험에 의하여 나는 먹을 것을 주는 젖은 신생아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닌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젖은 우유와 사랑의 무한한 근원이며 신생아는 그것을 자기만족을 위해 확보해 둔다. 그렇게, 어머니 젖은 아이가 욕구하는 첫 번째 대상물이다. 이러한 감정이 있기에 미움과 요구는 더욱 강렬해져만 가고 그래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교란된다.”46) 놀부와 팥쥐의 경우로 표상된 인간의 욕구는 바로 유아기 때 그 심리적 원형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흥부와 놀부〉 〈콩쥐팥쥐〉는 인간의 욕구를 잘 묘사해 놓은 작품이다.
“욕구가 극단적으로 과도한 형태로 되면 망상병과 같은 양상을 띤(paranoïde) 요소들과 정신분열증적(schizoïde) 요소들이 주로 두드러지게 된다.”47) 놀부와 팥쥐는 이렇게 병적인 경지로까지 가기 직전에 있지만, 소위 ‘정상인’과 병리학적 ‘환자’ 사이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 젖에 대한 이러한 최초의 욕구는 이후 젖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페니스를 받아들여 배에 아기를 갖고 낳고 먹이는 어머니의 다른 면으로 그 대상이 이동한다.”48) 그리고 이후 성인이 되면 욕구의 대상은 더욱 확대됨을 알 수 있다.
“탐욕과 선망(envie)은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둘을 간단히 분리할 수 없다. 단 탐욕이 내부로의 투사(introjection)49)와 연결된 것이라면 선망은 외부로의 투사(projection)50)51)와 연결된 것이 본질적 차이이다.”52)
1. c. 놀부와 팥쥐의 질투
소위 ‘나쁜 젖’에서 야기되는 불만족, 좌절은 악한 마음으로 규정되기 쉬우며 그 근원에는 심술, 탐욕, 질투가 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주로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다.
소위 ‘좋은 젖’에서 야기되는 만족, 충만감은 선한 마음으로 규정될 때가 많은데, 이때는 욕구가 이미 만족된 경험을 하였기에 탐욕이나 질투의 비율이 낮다.
“질투(jalousie)는 욕구에 기초한다. 그런데, 욕구가 어머니와의 배타적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고 유일한 한 사람과 주체가 맺는 관계를 암시하는 반면 질투는 적어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주로 사랑을,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을 강탈당하거나 강탈당할 것 같다고 주체가 느끼는 것이다.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빼앗거나 받았을 때 주체에게 질투가 일어난다. 빼앗긴 ‘것’은 좋은 젖, 어머니, 사랑하는 대상이며 그것을 어떤 다른 사람이 탈취한 것이라고 주체는 여긴다.”53) 흥부가 가진 재화와 콩쥐의 옷가지며 행운은 놀부와 팥쥐에게는 빼앗긴 ‘좋은 젖’이다. 이것이 놀부와 팥쥐의 질투심의 근원이다. 단 심술이나 탐욕의 대상은 물건인 반면, 질투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 팥쥐는 콩쥐의 행복(감사의 부인이 됨)에 질투를 내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콩쥐를 죽이고 자신은 무당의 마술로 콩쥐 얼굴로 변하여 콩쥐 행세를 함). 놀부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 훼방 놓기가 일쑤이다(애태우기, 통혼에 방해하기, 우물 밑에 똥 누기, 잠자는 내외에게 소리 지르기). 이는 질투로부터 비롯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 욕구의 대상물 - 재화와 성
우리는 놀부와 팥쥐의 경우, 그 최초의 대상물인 젖이 성인이 되어서는 각각 재화, 옷으로 되어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 대상물이 성일 때의 경우로 상징적 독해를 해보고자 한다.
“어머니 젖에 대한 욕구는 남성의 경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욕구가 너무 강렬하여 구순기적 감사를 느낄 수 없을 때에는 미움과 불안이 질로 이전된다. 정상적인 생식기적 발달에 따른다면 남아는 어머니를 사랑의 대상물(objet)로 계속 간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깊이 혼란되면 어려움이 나타나 여성들에 대한 생식기적 자세에 영향을 미친다. 이에는 성적불능, 생식기적으로 충동적 보상, 성적 혼잡, 동성애 등이 있다.”54)
2.a. 놀부의 성적 불능
어머니 젖에 대한 충만한 만족과 감사를 느낄 줄 모르는 것은 놀부의 탐욕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객관적으로 가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줄 모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깊지만, 그것은 성적 불능과도 같은 심리적 구도이다. 이는 재료로써 주어지는 대상물이 재화가 아니라 생식기적 욕구의 대상일 때의 특색이다. 재화에 관한 한 놀부는 만족을 모르는 정신적 불구자이다.
2.b. 놀부의 충동적 보상
제비다리를 고쳐주면 횡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새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자신이 지은 복과는 걸맞지 않는 보상을 바라는 행위로서, 생식기적으로 근거 없이 충동적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적 조건을 상징하고 있다.
2.c. 놀부의 성적 혼잡
놀부가 지닌 재산은 이미 충분하다. 그런데 거기에 더 많은 재화로 인한 기쁨을 추구하려한다. 이러한 심리는 여성들에 대한 생식기적 자세에서 성적 혼잡을 상징한다.
2.d. 놀부의 동성애
“동성애적 죄의식의 근원 중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미움으로써 등을 돌렸다는 느낌, 아버지의 페니스 혹은 아버지 자체와 혼화됨으로써 어머니를 배반하였다는 느낌에서 비롯한다. 오이디푸스 단계중에서도 그리고 일생의 그 이후단계에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배반하였다는 이러한 느낌은 남성들과의 우정을 혼란시킬 수 있다. 그 우정이 완전 동성애적 양상을 띠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또 한편으로,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죄의식이나 그 여인이 전제로 하는 불안은 회피반응을 초래하여 동성애적 성향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55)
최초의 대상물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이 있고 그로부터 회피하는 놀부는 ‘자기가 가진 재산’이라는 대상에서 회피하여 다른 범주의 대상을 찾는 동성애적 심리구도의 소유자이다. 놀부에게 있어 그 다른 대상이란 흥부가 소유한 물건이다. 흥부에게 갈 유산도 놀부는 넘보아 제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놀부는 흥부가 욕망의 대상물에 대하여 어떤 마음자세를 갖고 있는지는 보지도 못하고, 그저 흥부가 가진 것에 대하여만 관심이 많다: “이 박 켜거들랑 금은보화 사태같이 나오너라. 흥부같이 살아보리라.”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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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콩쥐, 흥부는 왜 콩쥐, 흥부가 되었나? - ‘착함’의 무의식적 근원
반면, 가난에도 불구하고 흥부에게는 “자식이 해마다 태어나 층층이 있었”다는 기이한 설정은 여성성에 대한 욕망을 보상하는 건전하고 정상적인 발달단계를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젖에 대한 과도한 부러움은 여성의 모든 특성들 -특히 아이를 갖는 능력-로까지 쉽게 확장될 수 있다. 정상적 발달 과정에 따른다면 한 남성은 애인이나 부인과 행복한 관계를 맺고 그녀가 주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채워지지 않았던 욕망을 보상하려 한다. 이러한 관계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예컨대 그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의 욕망과 조기 좌절을 보상하는 가능성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느낌은 어머니의 여성성에 대한 부러운 초기 감정을 중화시켜 준다.”57) 여성성에 대한 욕망을 30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자녀58)로 보상했으니 흥부가 욕심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욕심 없음은 곧 착함으로 귀결된다. 흥부가 갖은 고난에도 견지하는 건전한 정신건강은 이러한 무의식적 과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면 놀부의 자녀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채워지지 않았던 여성성에 대한 초기의 부러움이 보상될 길이 없어 놀부의 탐욕은 더해만 간다.
욕구와 직결된 ‘선함’은 다음의 클라인의 연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별로 씁쓸한 기분 없이 체념할 줄 아는 능력, 그러면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하는 능력은 그 주체가 아기 적, 최초의 인생에서 어머니를 정도 이상으로 소유하고자 하지 않으면서도 어머니 젖을 즐길 줄 알았음을 뜻한다.”60) 즉, 선악 개념은 순전히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생 초기의 생존본능 그리고 그 대상물과 직결된 심리구도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구순기적으로 충실하고 전적으로 감사를 느낄 줄 아는 능력은 어머니와의 만족스런 관계가 있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며, 이는 오르가슴을 전적으로 만족하며 느낄 줄 아느냐의 가능성을 좌우한다. 클라인에 의하면, “좋은 젖은 어머니의 착함(bonté maternelle), 인내심, 한없는 베풂의 원형이며 창조성의 원형이다. 바로 이러한 욕동상의 필요와 환상이 최초의 대상물을 풍부하게 하여 이 최초의 대상물은 희망, 신뢰, 선에의 믿음의 근원이 된다.”61) 유아기에 이러한 경험을 한 주체는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외부 환경에서 주어지는 대상(물)들에 대해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선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젖이 태초에 야기한 ‘착한’ 사람, 착한 마음은 바로 흥부와 콩쥐로 상정되었다.
제비가 준 씨앗을 들고 흥부는 말한다 : “아마도 이것이 박씨로세 수후의 배얌도 구슬을 물어다가 살린 은혜 갚았으니 보은하러 물어 온가 네라서 주는 것을 흙이라도 금으로 알고 돌이라도 옥으로 알고 해라도 복으로 알지.”62) 극한의 가난에 찌든 흥부는 ‘은혜 갚는 일이 고작 이까짓 박씨냐’ 라며 불평하지 않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생각한다. 즉 어떠한 대상물에서도 욕구에 대한 향유와 기쁨을 누리는 능력이 뛰어나다. 바로 여기서 흥부의 ‘희망, 신뢰, 선에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클라인은 “우리 무의식 깊숙이에, 우리가 우리 부모들에게 느낀 불평불만(의 씨)을 어느 정도라도 지울 능력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마음이 편할 수 있고 타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63)라고 말한다. 욕망의 대상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 최초의 대상으로부터 감사와 동시에 미움, 불만의 씨가 항상 잠재해 있다. (소위)정상인의 경우,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충분하더라도, 최초의 대상물인 부모에 대해서는 불평의 씨를 무의식적으로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놀부도 될 수 있고 흥부도 될 수 있다. 흥부의 선함은 그 극단적인 면으로 인하여 오히려 교훈적일 수 있는데, 어쨌든 사랑의 능력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다:
욕망의 최초의 대상이 야기하는 불만족의 씨를 잘 지우고65) 항상 감사하는 흥부의 능력은 놀부가 자신에게 가한 핍박에 아랑곳 않고 형으로서 극진히 대접하는 것,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는데도 그것에 괘념치 않는 것 등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놀부는 동생을 내쫓고, 흥부가 배고파 양식을 구걸하러 갔을 때 놀부는 오히려 흥부를 매질하여 쫓아 보낸다. 형수나 보고 가려고 부엌으로 갔을 때 밥을 푸고 있던 형수는 주걱으로 흥부의 뺨을 후려친다. 볼에 붙어 있던 밥풀을 입으로 쓸어 넣은 후 하는 말, “아주머님은 뺨을 쳐도 먹여가며 치시니 감사한 말을 어찌 다 하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흥부는 아내에게 형의 행패를 바로 말하지 못하고 형 내외가 준 돈과 쌀을 도둑들 만나 빼앗겼다고 꾸며 말한다. 부자가 된 흥부의 집을 구경하러 온 놀부의 행패에도 흥부는 개의치 않고 극진히 대접한다. 흥부의 지대한 선함에서 우리는 유신교에서의 신의 끝없는 사랑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쨌든 이 모든 문학적 창작 요소들은 최초의 욕망으로 인하여 야기된 불평의 씨를 지우는 능력이 좋은 예를 보여주는 탁월한 상징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흥부의 ‘착함’을 ‘이럴 정도도 있는데, 착해야 한다.’라는 교훈적 담론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능력의 수준66)이 끝없이 개발되고 전개될 수 있다’는 현실적 진리로 읽고자 한다.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욕구가 중화된다.67)
“먹을 것을 주는 ‘좋은’ 젖은 어머니와의 사랑 관계를 태동하며 생의 욕동을 대표한다. 좋은 젖은 또한 창조성이 최초로 발현되는 것으로 지각된다. […] 생명을 주는 좋은 대상물을 내재화하여 그러한 대상물에 자신을 동일시하면 창조성에의 본능이 생겨난다.”68) 내재화된 좋은 대상물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흥부의 정신세계는 제비다리를 고쳐주는 자발성과 창조성을 발휘하기에 알맞은 토양이다. 그리고 계모 배씨가 콩쥐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시킬 때마다 등장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는 소, 두꺼비, 새, 직녀별은 콩쥐의 창조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대목으로, 이는 콩쥐의 상상, 환상의 소산일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서는 콩쥐가 기대하지도 않고 있는데 등장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어떤 의도성의 결과로 보인다.69) 흥부의 창조성이 드러나는 대목을 보자:
흥부의 창조성과 함께 제비의 소생으로 ‘생의 욕동(pulsion de vie)’ 또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놀부는 흥부의 이러한 일을 듣고서 그대로 모방하는데 이는 흥부의 창조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계기이다:
팥쥐 역시 콩쥐의 꽃신을 그대로 자기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콩쥐가 결혼한 신랑까지도 그대로 똑같이 취하려 한다. 이렇게, 선한 인물의 창조적 행위를 악한 인물이 그 겉모습만으로 모방하려고 한다는 설정이 공통점이고 그래서 선, 사랑, 착함과 창조성의 관계는 흥미로운 일이다. 악한 인물은 무의식적 욕망을 처리하는 방식이 선한 인물과 완전히 다르다. 즉, 놀부의 행위는 제비다리 치료의 외형만 취하고 내심 제비에 대한 생각은 없고 그저 욕망을 취하려고 해를 가하는 행위이다. 반면, 흥부의 제비에 대한 생각은 사랑을 주는 행위이다. 팥쥐의 계모 역시 꽃신을 취하려고 콩쥐가 신어보아야 할 것을 미리 팥쥐에게 신어보도록 한다. 그 신의 임자를 찾으러 관원들이 집에 오도록 (수동적으로나마 혹은 의도치 않게) 왼쪽 꽃신을 개울에 빠뜨린 사람은 콩쥐이므로 주도적 창조성은 콩쥐에게 있다. 그리고 나무하러 갔다 오는 길에 두어 번 본 진사 댁의 도령을 사모하는데, 결국은 그가 사또이며 콩쥐는 결혼하게 된다. 이러한 결혼을 팥쥐는 얼굴모양까지 바꾸어(현대판으로는 성형수술에 해당함) 그 사또의 아내가 된다.72) 이면의 동기가 욕망의 대상물을 취하는 것이되,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이가 ‘차지했다’고 여기는 것을 모방하여 취하는 것이 놀부와 팥쥐의 공통점이다. 부러움과 욕구를 갖고 있는 이상 창조성은 파괴됨을 클라인은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이야기를 통하여 들고 있다.73) 즉 세상을 창조해 낸 하느님을 사탄은 질투하고 시기하여 하늘의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다가 하늘에서 추락한다. 실추되고 타락한 사탄은 지옥을 만들어 하느님과 겨루고 하느님이 창조한 것들을 파괴하려하는 세력이 된다.
“파괴적 비판은 신랄하고 유독한데 이는 어머니 젖에 대한 질투, 파괴적 자세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한 공격은 창조성에 반대되어 나아간다.”74) 놀부는 부자가 되었다는 흥부의 소식을 듣고, “이놈이 도둑질을 하였나,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하니…”75)라며 터무니없이 흥부를 끌어내리고 비난한다. “선망(envie)은 초자아적 모습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 초자아적 모습은 특히 박해성이 강하여 창조적인 모든 행위나 생각과정을 옭아맨다.”76) 그리고 “많이 가진 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헐뜯는 것은 공격적 가학성이다. 비록 그러한 기쁨이 간접적으로 밖에 표현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77)라는 조운 리비에르의 관찰은 놀부가 이런 말을 하는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반면, 흥부와 팥쥐는 항상 다른 이들의 행복에 기뻐한다. “다른 이들의 행복과 창조성을 후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선망, 요구, 학대의 고통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욕구가 낳는 불행감에서 자유로이 풀려난 이들은 평화롭고 고요히 만족하여 살며 결국 정신적으로도 건전함을 느낀다.”78)
제비다리 고쳐주는 일과 꽃신을 슬쩍 남기는 일(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는 아무리 의도치 않은 일로 그려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적극적 자발성에 더 무게를 둔다)로 대표되는 콩쥐와 흥부의 창조성의 결과는 하필이면 ‘생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을 보장받음’이 공통적이다.79) 이를 경제적, 사회적 계급 상승으로 해석하는 시도도 있지만 우리의 연구에서는 “[창조성의 발현으로 느껴지는 좋은 젖의] 이러한 기초적 관계에서 아이는 욕망하는 것을 포상으로 받을 뿐 아니라 생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감정을 느낀다.”80)는 무의식적 심리구도가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그대로 발현된 것으로 본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에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바램도 어머니 젖이 야기하는 ‘생이 유지되기를 희망함’과 무관하지 않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81) 또한 그 원형은 어머니 젖이다.
또한 두 형제와 두 자매 이야기 모두 착한 인물의 창조성과 함께 그들의 (결말 이전의) 가난함도 부각시키고 있다. 가난함이란, 객관적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주어진 것에서 기쁨을 향유할 줄 알고 만족하여 감사하는 자세를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명을 주는 ‘좋은 젖’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창조성에의 본능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보았다. 그런데 창조성과 직결된 ‘좋은 젖’ 즉 ‘생이 유지된다는 느낌’ 역시 인간 무의식에 직접적인 요소일 수 있다: “배고픔은 깊은 두려움 -정신적 기력상의 고통이나 신체적 모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배고픔은 죽을 것이라는 위협으로 느껴지기”82)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원형적 두려움이 있기에 전래동화에서는 배고픔과 결부된 가난을 그리도 극명히 드러내고 어머니 젖에 대한 최초의 욕망과 관련된 욕구의 메커니즘에서 갈린 선과 악이 주요 쟁점이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 인간 모두가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부족, 결핍, 궁핍에 대한 두려움”83)은 젖에 대한 유아기적의 체험에서 유래하는데, 독자는 흥부의 경우를 보며,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하의 심한 가난을 대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우리의 작업은 권선징악 식 도덕적 권장의 담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권선징악에서 선악은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이 우주 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의 보편법칙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윤리적 문제와 가깝다. 마음 씀씀이라는 염파(생각의 파장)와 얻게 되는 재화(혹은 생기는 일) 사이의 관계가 실증적으로 밝혀질 날을 고대한다.
그런데 항상 선이 승리함은 멜라니 클라인의 관찰과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체념하면서도 동시에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주체는 초기 유아적, 어머니 젖을 기쁘게 향유할 줄 알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소유욕을 갖지 않은 경우이다. 인생 초기에 어머니와 맺은 행복한 관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미움과 불안을 누그러뜨리며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지지와 힘을 준다. 성인이 되어 겪는 상실과 박탈에 대해서도 쉽게 보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이였을 때 이렇게 안정 속에서 좋은 대상물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러워하고 샘내는 주체에게 이 모든 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욕구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84) 놀부와 팥쥐는 흥부와 콩쥐를 시샘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가난해지며 있는 것마저도 다 빼앗긴다. 놀부와 팥쥐가 망하기 전에는 부자였으며 남부러울 것 없었다는 상정은 흥미롭다. 어머니 젖 혹은 욕망의 대상물은 항상 주어져 있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느냐 불만과 소유욕을 느끼느냐의 대조적 자세는 이렇게 분리되어 갈리는 것이다.
“커다란 불행과 정신적 고통을 맛본 사람을 내적 자원(ressources)을 찾아내는데, 그것은 정신적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자세는 지난날의 기쁨에 대한 감사를 찾아내는 자세이며 현재에서 또 계속 주어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자세이며 그러므로 평화의 자세이다.”85) 두 형제, 두 자매의 이야기에서 흥부와 콩쥐는 온갖 수난과 고초를 당하면서도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을 뿐더러 결국에는 물적,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풍부해진다. 이는 우리의 인생에서 정신적 고통이나 난관을 경험했기에 더욱 진귀한 영감의 원천을 찾아내어 향유하는 경우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는 지난 날 어머니 젖을 충분히 향유한 기쁨이 원형이 되어 현재의 역경에서도 감정상의 장애가 없는 경우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하여, 나이든 사람이 젊음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적응하여 젊은이들의 삶에 관심을 보이는 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실망했다거나 지나친 소유욕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에 한하여, 자식이나 손주들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사는 부모의 경우일 수도 있다. 인생에서 실컷 자신의 기쁨과 경험을 지녀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인생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잘 믿을 줄 알게 된다.”86) 그래서인지, 소유욕 적고 인생의 기쁨을 즐길 줄 아는 흥부 내외는 “부귀 다남하여 나이 팔십을 누리고 자손이 번성하여 다 각각 옥답으로 재산이 대대로 풍족하니, 그 후 사람들이 흥부의 덕을 칭송하여 그 이름이 백년 지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였다.”87)
“아이 적 체험한 행복, 그리고 좋은 대상물에 대한 사랑은 인격을 풍부히 하여 승화와 향유 능력의 기초가 된다. 그러한 초기 관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증오와 불안을 누그러뜨리며 나이든 주체에게 지지와 위안을 지속적으로 베풀어 준다.”88) 주기도문에서 “악에 빠지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는 이렇게, 잠재해 있는 증오와 불안에 빠짐을 두려워 한다는 증거이다. ‘착함’이란, 노력해서 맺는 결실이라기보다는 이렇듯 인생 초기의 관계에서 결정된 심리구도의 발현일 수 있다. 최초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경우, 인생에 걸쳐 증오와 불안에 시달릴 수 있는데 이때 착해지고자 하는 노력은 근본적으로 그 생각의 뿌리에까지 작용하지 않을 때 피상적 가면에 불과하게 된다.
“어린 아이가 안정적으로 자신의 좋은 대상물을 만들게 되면 이후 성인이 되어서 당하는 결핍과 상실에 대한 보상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모든 일은 샘내는 주체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체는 만족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그의 질투심(ses sentiments d’envie)은 계속 강해져만 갈 뿐이다.”89) 놀부와 팥쥐에게 다 빼앗김을 당했던 흥부와 콩쥐의 역경이라는 전래동화의 설정은 결핍과 상실이라는 정신분석의 주요개념과 맞닿아 있다.
“욕구가 야기하는 불행감에서 벗어나야 만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정신적으로도 건전할 수 있다. 지나간 기쁨에 감사하며 현재에 주어지는 것을 즐기는 자세는 평온의 자세이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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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선과 악의 아날로그적 공존 - 〈아주르와 아스마르〉
우리는 좋은 젖과 나쁜 젖으로 이분화 하여 생각하는 도식적 사고를 경계한다. 그것은 여태까지 우리의 논지였고 정신분석학적 고찰에서도 드러나 이미 살펴본 사실이다. 다음의 보고에서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하자: “박탈 하에서는 박해 불안과 탐욕이 커지며 아이의 머릿속엔 고갈되지 않는 젖에의 환상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욕구가 어떻게 자리 잡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지 않는 젖은 아이에겐 나쁜 젖이 된다.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젖이 우유, 사랑, 보살핌을 보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그러한 젖은 좋은 젖이 된다. 인색한 이 젖을 아이는 탐내고 미워하기 시작한다.”91) 여기서 우리는 흥부의 마음과 놀부의 마음이 같은 대상을 두고 시시각각으로 교차될 수밖에 없는 생물적 조건을 보게 된다. 더욱이, “만족을 주는 젖도 탐내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젖이 그렇게 쉽게 우유를 주어 아이에게 보상을 베풀기 때문에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마치 그러한 베풂이 그 전엔 불가능했기라고 하듯 말이다.”92) 그러므로 만족을 느끼다가도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탐내거나 불평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이렇게 혼합된 양상은 하나의 모델이 되어 우리의 형제자매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반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태도에까지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93)
기독교의 선악 구분과 전래동화의 권선징악에서 보듯, 선악은 태고 적부터 인간의 관심을 사로잡아 온 개념이다. 그것은 현대인의 경우에도 지속되어, 선악을 뚜렷이 구분한 영화는 어린이, 성인을 막론하고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사실이다. 〈뽀롱뽀롱 뽀로로〉(성탄 기념 특집)94), 〈터미네이터〉, 〈킹콩〉, 등의 영화와 게임 <미녀구출작전>에는 사악한 적,악당(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 예술성은 차치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건 성인을 대상으로 했건 대중의 인기를 끄는데 성공한 영화들이다. 선악의 주제가 그리도 일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흡인력이 강한 이유는, 그것이 유아기 적부터 체화된 욕망의 기제로부터 비롯된 정동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 우리 인간은 화(colère)란 위험한 상태를 외부의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러한 상태를 그 사람과 같은 것이라고 동일시 할 필요를 느끼며, 편하고 행복한 상태만 우린 자신과 동일시할 필요를 느낀다.”95)라는 클라인의 또 다른 지적에서, 대중을 끌어들이는 소위 ‘상업영화’에서 왜 주인공인 ‘나’는 선한 인물이고 타자인 ‘너’는 악한 인물96)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악한 인물을 보면서 아동 관객은 선한 인물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젖먹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어 온 ‘나쁜’ 대상(젖)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원한다. 그리고 악한은 결국 선에 의하여 패배되어야 관객은 만족하고 안도할 수 있다. 아이는 “파괴적 욕동과 박해에의 불안”에 끌리면서도 “그것을 없애고 싶어 하”97)기 때문이다.98) 그래서 악한이 나오는 만화영화는 항상 아동들에게 인기가 있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인물과 자질 설정은 바로 어린 시절의 무의식의 구도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에, 그 소재만 달리할 뿐 성인이 되어서도 심리적 구도는 여전히 유년기적에 형성된 지도를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구도를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상상계적 환상에 머무는 것이며 이는 미망 내지는 전도망상에 속하는 것이다.99) ‘이것은 나쁘다’라고 굳게 집착하여 믿고 있다가 ‘내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였다’를 아는 일은 실재계를 볼 줄 아는 일이며 깨달음이다. 선악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우리의 연구는 그러한 앎을 위한 작업이 되고자 소망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년기의 심리적 구도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일종의 퇴행일 수 있고 바로 거기서 소위 ‘상업 영화’의 미성숙성-적어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이것을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생각 하는가’에 대한 탐구에 관한 한-의 원인이 드러난다. 참고로, 이러한 작품에서는 적수(경쟁 대상인 아버지)로부터 (괴물 혹은 악한 즉 아버지에 의해 마비된 혹은 잠자는)공주나 여인(어머니)을 구해 내어 행복하게 잘 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도 또한 첨가되고 그 소재에 짙게 배어 있어 우리 인간 각각의 무의식을 자극한다.100)
기독교에서 선악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과 같이 현대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선인 나(주인공)와 악인 너(무찔러야 할 적, 외계인, 악한)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타적 분리는 인간의 실제 모습과 거리가 있다.
“사랑과 연결되고 혼합되지 않은, 분리된 공격성은 극단적 파괴의 형태로 분출된다. 그런데 그 분리된 공격성이 부정(négation)되었을 때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존재수단을 획득하기 위한 공격성은 즉 종족보전을 위한 성(性)이며 이는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101) 놀부나 팥쥐가 보이는 공격성은 결국 종족 보전을 위한 에너지와 같은 맥락에 있으므로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랑과 혼합되지 않은 경우 악은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하여, 선만을 위하여 악을 배타적으로 부정할 때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놀부와 팥쥐를 꼭 흥부와 콩쥐와 연결시켜, 악을 (마녀사냥 하듯) 이단시하지 않은 지혜를 볼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는 미움과 이기주의를 억제하는 제도가 있어왔다. 여기서 나는 종교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종교가 적절한 방식으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해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근원적으로 어린시절에,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우리 안에 욕구와 공격성을 일깨웠다.”102) 즉 인간 안에는 욕망의 대상물에 대하여 좋은 것이라는 선의 개념과 그와 함께 공격성인 악이 함께 자리하는 것이다.
“원시적 종교에서는 이러한 연결이 두드러지고 있어서, ‘좋은 것’ 즉 하느님을 죽이고 먹는 동시에 경배되고 숭앙되었다. 기독교 시대 이전에서부터 이러한 두 성향을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기독교이다. 전 세계의 주된 종교가 된 기독교는 욕구와 모든 공격성을 사랑과 분리하려는 철저한 시도이다. 이러한 목적에 다다르기 위하여 기독교는 남을 위한 이타적 사랑을 이상적으로 찬양하였고 동시에 인간 영혼과 심리에 여러 문제점이 있는 현실을 부정하였다. 공격적, 성적 욕동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무시, 비판, 경시하였다. […] 이는 자신 안에 있어서 두려운 것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일반적 성향이며 지금도 그러하다. […] 인생이 지속되는 한, 공격성과 성은 인간 본성에 속하는 부분이어서 바람직하든 좋지 아니하든 간에 그 양상은 발현될 수밖에 없다. 공격성과 성이 인생에 참여함을 거부하고 영원히 배제하려 할 때 공격성과 성은 증오와 파괴성의 통로로 분출된다. 이러한 시도는 박해, 탐욕, 고행, 금욕주의,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 등 종교적 생활에서 모습을 드러내었고 인간의 생활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103)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인식한 듯, 한국의 전래동화에서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를 같이 놓고 있다. 선과 악을 서로 배제시키지 않고 한 쌍으로 항시 붙여 놓는 것은 선만을 강요하는 억압을 양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래동화는 그러한 이야기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통하여 (선만을 강요당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 균형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거리가 있는 비유이지만, 서로 상반된 성질의 고사리와 도라지를 같이 먹도록 한 접시에 놓는 것처럼 말이다.
흥부와 놀부, 콩쥐 팥쥐는 각각 ‘부’와 ‘쥐’자 돌림이고 한 형제, 한 자매로 같은 성이다. 즉 두 인물로 분류되어 있지만 각각의 인물은 한 인간 안에 들어 있는 두 가지 인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선악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두 면이다. 이러한 전래동화의 설정은, 젖먹이 때 생존과 직결된 욕구의 존재 자체가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두 가지를 이미 예고하고 있다는 멜라니 클라인의 발견과 일치한다. 즉 선악 개념은 욕구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다. 그러므로 욕구가 없다면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악만 취하면 불행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편집 망상의 경우 탐욕이 더욱 심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선만을 따로 떼어내어 강조하는 기독교의 폐단을 인식하는 듯, 현대의 서양 영화에서도 악과 선으로 나누어진 인물로 구현하는 일을 해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04) 우리 안에 사랑과 선, 공격성과 악에의 정동(情動, affect105))이 같이 있음을 직시하고 공격성의 건설적 발현 또한 인정하기에, 작중 인물을 선악의 뚜렷한 대비로 나누어 놓지 않고 보다 현실에 가까운 인물로 창조해 내려는 시도가 있다.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의 애니메이션 〈아주르와 아스마르(Azur et Asmar)〉 (2006)를 보자. 한 유모 밑에서 자란 두 형제106)는 서로 질투하며 경쟁이 붙어 다투다가도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 돕는다. 이렇게 아주르도, 아스마르는 각각 선이나 악을 전적으로 표상하고 있지 않고 각각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즉 선악이 원론(manicheisme)을 통하여 선에만 우위를 두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탈피하는 해체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혁명, 전복의 가치와 변증법에 의하여 선, 악이 혼융되고 있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이야기에서는 놀부의 행적을 마녀사냥 하듯 배타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흥부와 (적어도 서술상 양적으로) 평등하게 상세히, 해학으로 그리고 있다. 선악을 두 인물로 형상화하되, 분리로써 어느 한쪽도 희생시키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이때 흥부 역시 놀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돌림자 이름에서부터도 그렇다. 선만 강조하면 억압을 생산하고, 악만 발달하면 정신분열증(schizoïde)으로 되기 쉽다는 정신분석학의 관찰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럴 때에는 혁명이나 전복, 해체라는 가치가 필요하지 않다.
“사랑의 능력이 특별히 발달된 사람에게도 공격성은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생산적인 일에(승화라고 표현함) 공격성이 광범위하게 쓰여, 풍부한 활동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반드시 있다.”107)
8)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1968. 원제는 Envy and gratitude, our adult world이다. 이 책의 제목을 우리는 <선망과 감사>라고 하기로 한다. envie라는 단어가 욕구를 기반으로 한 부러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클라인의 이 저작 안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론에서 우리는 envie란 단어를 때로는 욕구로, 때로는 선망으로 번역할 것이다. 9)Mélanie Klein, op. cit. pp.9-10. 10)Ibid., p.15. 11)Mélanie Klein, op. cit., p.222. 12)Ibid., p.24. 13)Ibid., p.11. 14)Ibid. 15)Ibid. 16)백두성 편저, 『한국 고전 명작』, 학일 출판사, 1994, p.57. 17)Mélanie Klein, Psychanalyse d’enfant,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5, p.61. 18)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16. 19)무엇에 대하여 악하거나 나쁘게 ‘잘못’ 생각하는 마음이 수행으로 인하여 변하고, 그럼에 따라 고통스럽다고 여겼던 외부적 대상도 저절로 사라지는 불교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는 천수경에서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아약항화탕, 화탕자고갈, 아약향지옥, 지옥자소멸, 아약향아귀 아귀자포만, 아약향수라 악심자조복,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라는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백두성 편저, 위의 책, p.68. 21)Mélanie Klein, op. cit., p.16. 22)Ibid. 23)Mélanie Klein, op. cit., pp.21-22. 24)무덤을 옮겨 장사를 다시 지내는 것. 25)바깥주인과 안주인이라는 뜻. 부부. 26)혼인할 의사를 타진함. 27)남의 혼인을 이간질함. 28)유준필 엮음, 『판소리 열두 마당』, 도서출판 들불, 1994, p.14. 29)Mélanie Klein, op. cit., p.18. 30)Ibid. 31)백두성 편저, 위의 책, p.57. 32)Mélanie Klein, op. cit., p.18. 33)백두성 편저, 위의 책, p.64. 34)팥쥐 계모는 팥쥐와 외모나 성격이 비슷하여 팥쥐의 분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35)백두성 편저, 위의 책, p.104. 36)Mélanie Klein, op. cit., p.18. 37)백두성 편저, 위의 책, p.57. 38)Mélanie Klein, op. cit., p.17. 39)백두성 편저, 위의 책, p.57. 40)백두성 편저, 위의 책, pp.63-64. 41)백두성 편저, 위의 책, p.102. 42)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1, pp.143-146. 43)Introjection: 안으로 투사함. 주체 특히 어린이는 이러한 무의식적 과정에 의하여 사물이나 사람을 자아나 초자아에 상상적으로 합체시킨다. 내적 투사는 동일시의 원형이다. 그리하여 부모나 교육자의 금지를 내적 투사한 것이 도덕적 의식이 된다. (Jean-Pierre Chartier, Introduction à la pensée freudienne,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1, p.174.) 44)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18. 45)Ibid., p.19. 46)Ibid., p.21. 47)Ibid. 48)Ibid. 49)놀부와 팥쥐의 경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때에는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하는 상태이다. 50)정신분석학에서 투사란, 자신이라고 혹은 자신 안에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을 밖으로 되던지는 것으로서 욕동에 대한 프로이드의 개념에 그 원칙이 있다. 주체가 욕망을 느낄 때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로 돌리는 방어기제이다. 투사는 특히 망상증 환자(paranoïaque)에 의하여 사용된다. 51)놀부와 팥쥐의 경우, 자신에게 욕망이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욕심을 내어 무엇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이 투사라고 할 수 있다. 52)Mélanie Klein, op. cit., p.18. 53)Ibid., p.18. 54)Ibid., p.45. 55)Ibid., pp.45-46. 56)유준필 엮음, 위의 책, p.29. 57)Mélanie Klein, op. cit., p.46. 58)박성의 편주, 『한국고대소설전집 7』, 예그린 출판사, 1978, pp.153-237. 59)백두성, 위의 책, p.58. 60Mélanie Klein, op. cit., p.49. 61)Ibid., p.17. 62)박성의 편주, 위의 책, p.182. 63)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1, p.163. 64)유준필 엮음, 위의 책, p.14. 65)기독교식의 표현으로는 ‘용서’가 아니겠는가. 66)예컨대 요가 동작을 실행할 때 그 완성도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흥부와 놀부〉에서 극한적 요소는 놀부의 욕심과 심술의 정도, 놀부의 박 안에서 나오는 재난과 그 흉물스러움의 어마어마한 정도, 흥부의 가난의 정도, 이후 박 안에서 나오는 재화의 끝없는 가치 등으로 구현되어 있다. 67)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48. 68)Mélanie Klein, op. cit., p.46. 69)이는 꽃신을 빠뜨린 일을 마치 의도하지 않은 실수인 척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논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럼으로써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적극적으로 일을 도와주고 추진해 나아간다는 느낌을 선사해 주는 여성의 적극적 창조성이기도 하다. 70)백두성 편, 위의 책, p.61. 71)백두성 편, 위의 책, p.65. 72)이상 콩쥐 팥쥐 이야기의 내용은 백두성 편, 위의 책의 pp.99-113.을 참조하였음. 73)Mélanie Klein, op. cit., p.47. 74)Ibid. 75)백두성 편, 위의 책, p.63. 76)Mélanie Klein, op. cit., p.47. 77)Joan Rivière, “La haine, le désir de possession et l’agressivité”, in 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1, p.51. 78)Mélanie Klein, op. cit., p.48. 79)흥부는 막대한 재화를 얻어 생계를 보장받는다. 콩쥐는 감사의 부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옷까지도 다 빼앗았던 팥쥐 계모로부터 독립하여 생계를 보장받는다. 참고로, 여기서는 (옛날) 남성과 여성의 사회, 경제적 위치와 역할 구별 또한 드러나고 있다. 80)Mélanie Klein, op. cit., p.46. 81)“처음에 보존 본능과 성적 욕망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던 젖과 우유는 이제 생각 속에서 사랑, 즐거움, 안정을 의미하게 된다.” (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èque Payot, 2001, p.127.) 82)Ibid. 83)Joan Rivière, op. cit., p.23. 84)Mélanie Klein, op. cit., p.49. 85)Mélanie Klein, op. cit., p.48. 86)Ibid.. 87)백두성 편, 위의 책, p.68. 88)Mélanie Klein, op. cit., p.49. 89)Ibid. 90)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èque Payot, 2001, p.51. 91)Mélanie Klein, op. cit., p.48. 92)Ibid. 93)Mélanie Klein, L’amour et la haine, Paris, Petite bibliothèque Payot, 2001, p.95. 94)쵸콜렛또 백작이 뽀로로와 그 친구들이 가져가는 토핑(topping)임무를 훼방 놓으려 하고 아예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토핑은 내 거야!” “이제 그만 토핑을 나한테 주시지. 안 그러면 이 녀석[크롱]을 사탕 시럽에 던져 버릴 거야. 사탕 시럽에 들어가면 딱딱하게 굳어서 영원히 움직일 수 없게 될 거다.”) 탐욕은 바로 놀부의 심보와 구도가 같다. 겨울마녀도 토핑을 빼앗으려 한다. 토핑은 원래 쿠키 왕국 성탄절 잔치에 갖다 주라고 산타가 뽀로로와 그 친구들에게 맡긴 것이다. 95)Mélanie Klein, op. cit., p.68. 96)〈뽀롱뽀롱 뽀로로 〉는 월트 디즈니의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의 인물과 이야기 구도에서 근본적 설정을 많이 따오고 있다. 선한 인물/악한 인물의 대립구도가 대표적이다. 사악한 겨울 마녀는 착한 포비를 움직일 수 없는 작은 인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움직임은 유아가 자립을 시작하는 계기로서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이를 앗아간다는 것은 아이에겐 불행한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버리는 ‘나쁜 사람’의 소행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동 관객이 포비를 자신과 동일시할 때 생산되는 감정에서 연유한다. (어머니에의) 의존이 미움의 감정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다음의 관찰을 참고로 하자: “욕구는 내재적으로 어머니의 창조성을 훼손하고 파괴하기를 노린다. 그러한 창조성에 아이는 의존해 있는데, 이러한 의존이 아이의 미움과 증오를 강화시킨다.” (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192.) 97)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25. 98)그래서인지 주기도문에서는 “악의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소서”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만큼 악의 존재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즉 미움이나 파괴적 공격이 항상 마음 기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의식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주기도문의 위의 문장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선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갈구한다. 99)이렇게 ‘자신이 상상하는 바’를 경계하고 어리석음의 지표로 보았던 동양과는 달리, 상상적인 것을 정신적 풍부로 여기는 서양에서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꽃피워오고 있다. 반면 실상을 보는 깨달음을 중시한 동양에서는 예술적 풍요로움은 없지만 일상적 불행은 상대적으로 감소해 있는 모습을 보인다. 상상계를 미망과, 실재계를 실제와 연결시키는 가정은 다른 지면을 빌어 연구되어야 할 문제이다.클라인의 지적과 관련하여, 어떤 대상을 악하게 본다는 것은 자신 안의 부정적 요소를 타인에게 투사한 결과이다. 즉 지각 대상(객체)은 나(지각 주체)의 내면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러니 내 안의 것이 사라지면 대상물의 속성도 변한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라는 연기설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연구는 불교에까지 이르지 않기에 이에 대한, 객관적 출처자료에 의한 증명은 삼가기로 한다. 100)용감한 젊은이가 괴물과 맞서 싸워 성 안의 공주를 구해내는 유럽의 동화들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동화 안에 표현된 경우는 브뤼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의 Psychanalyse des contes de fées, Paris, Robert Laffont, 1976.을 참조하기 바란다. 미셀 오슬로의 〈왕자와 공주(Princes et princesses)〉 (2000)에서도 같은 구도를 볼 수 있다. 단, 여자를 구한다는 전통동화의 줄거리는 자칫 여성을 연약한 존재로 비하시킬 우려가 있음을 자각한 듯, 현대판 동화인 〈왕자와 공주〉의 여러 이야기 안에는 페미니즘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101)Joan Rivière, op. cit., p.76. 102)Ibid., p.74. 103)Ibid., pp.74-75. 104)내적 평화를 위하여 수많은 성직자들이 노력하였지만 정신분석에 의하여 인간의 감정생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의 길을 열어준다고 조운 리비에르는 말한다. (Joan Rivière, op. cit., p.81.) 105)정동이란, 유쾌한 혹은 불쾌한 감성적 상태를 가리킨다. 보다 오래가는 지속성을 암시하는 기분(sentiment)과는 달리 정동은, 욕동적 에너지의 양을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정의한다. (Jean-Pierre Chartier, op. cit., p.170.) 106)이때 북아프리카인 유모는 아스마르의 친모이고, 아주르는 눈이 파란 프랑스인이다. 아주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아주르의 아버지는 모질게 유모와 그의 아들 아스마르를 내쫒는다. 청년이 된 아주르는 유모가 어릴 적부터 들려준 이야기의 요정 ‘진’을 찾아 바다 건너 모험을 떠난다. 폭풍우를 만나 도착한 낯선 섬에서 아주르는 성공한 부자가 되어 있는 유모 제난과 아스마르를 만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무의식적 구도 역시 잘 나타나 있는 경우로서, 아주르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 떠나고, 엄격한 아버지는 아들의 그러한 사랑의 직접적 경쟁자는 아니기에(제난은 아버지의 부인이 아니라 유모일 뿐이다.)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는 않으며, 또한 아들을 죽이지도 않고 그저 유모를 아들로부터 떼어낼 뿐이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보다는 생식기 이전의 구순기라는 전(前)생식기를 중심으로 선악 개념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의 전래동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참고 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107)Joan Rivière, op. cit., p.97.
정신분석 비평은 첫째, 작가의 창작심리나 둘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 셋째, 작품을 읽고 반응하는 독자의 심리를 정신분석적 방법으로 분석,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작업 역시 정신분석 비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클라인은 <오레스티에 대한 성찰>108)에서 작중 인물들의 상징적 역할을 어린 아동들의 정신분석에서 나온 발견내용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다. 전래동화에 나타난 인물들의 선악의 측면에 관심을 갖는 우리의 연구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를 정신분석학적 주체로 보아 그 성격 형성의 원인을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우리의 작업은 둘째의 범주에 속하는데, 간간이 첫째나 셋째의 범주109)도 언급되고 있다.
신화, 민담, 설화, 전설과 같은 집단 창작물을 연구하는 의의 중의 하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속적으로 인간의 상상력 속에 깊이 자리한 이야기 구조의 보편성에서 바로 무의식의 내용이 어떠한지가 증명된다는 점이다. 신화의 인물이란 어떤 정신을 의인화한 결과이며 이는 동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전래동화는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며 여러 사람들이 저자로서 참여한 경우 집단무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민담은 한민족의 무의식적 내용의 발현을 미학적인 형태로 바꾸어 놓은 작품이다. 이에 정신분석, 정신의학적 차원에서 전래동화를 연구하는 일은 일단 인간 보편의 무의식을 확인하는 작업이자, 선악이라는 윤리적 문화적 이념에 가려져 충분히 접근되지 못한 한국 민족 집단의 의식과 무의식을 밝혀내는 작업이다.110)
이 때, 우리는 선악이 욕구가 원인이 되어 파생된 감정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선악 구분은 주체의 천성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발달상황에 내재적인 것이다.”111)라는 확인에 의하면, 선악이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원인이 있는 결과물인 것이다. 극단으로 대립되어 보이는 두 개념이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론은 Ⅰ부는 악을, Ⅱ부는 선을, Ⅲ부는 선악을 다루는 변증법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때 욕구라는 뿌리에서 왜 셋이나 넷도 아닌, 선악이라는 두 가지로 갈리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 관찰과 확인 이외의 답을 아직 구할 수 없다. 이 역시 서론에서 언급한 음양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철학의 이원론에 의하면, 선악의 형이상학적인 면만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고 어머니 젖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클라인의 작업에 기반 한 우리의 확인은 철학에서 말하는 이원론과 정반대의 양상이다. 이원론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보자: “근원적 연결이 없는 두 원칙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순적인 그 두 요소 사이에는 연결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러한 시각 하에서 이원론은 담화 상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가지 논리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잠재적으로 항시 통하는 것을 함축하는 인간경험을 거론하려 할때에는 이원론적 자세나 이론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112) 사물이건 개념 이건 배타적 이원론으로 분류하려고 계속 시도하다 보니 이렇듯 현실과 맞지 않는 모순이 생겼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자꾸 따라가면 아날로그적 현실, 즉 ‘실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113)으로 빠지게 된다.
등장인물의 ‘선한 마음’ ‘착한 마음’에 대하여 정신분석학적으로 비평함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그에 머물지 않고 선악이란 이분법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두 형제’, ‘두 자매’의 이분법 역시 선악의 아날로그적 실상과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작업에서 정신분석, 특히 멜라니 클라인의 보고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작중 인물에 대하여 우리가 판단하는 선악 개념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왜 이것을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생각하는가?”란 화두에 클라인의 정신분석이 명쾌한 답변을 선사해 주었다. 어떤 의도나 목적을 위하여 당위의 형식으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가 윤리114)라면 그러한 가정 하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설 자리가 별로 없다. “왜?”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 우리의 연구는 어떤 현상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야기된 원인을 천착하는 작업이다.
108)Mélanie Klein, Envie et gratitude, Paris, Gallimard, 1968, pp.187-219. 109)첫 번째 범주로는 Ⅰ부의 7번째 단락이 있다. 세 번째 범주로는 Ⅱ.2.의 마지막 단락, Ⅲ부의 9번째 단락이 있다. 110)이 단락의 내용은 류인균, 『한국 고소설에 나타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심청전〉, 〈콩쥐팥쥐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의 결론 부분을 참조한 것이다. 111)Mélanie Klein, op. cit., p.223. 112)Les Notions philosophiques, op. cit., p.710. 113)작은따옴표로 강조한 이 부분은 불교에서 흔히 쓰는 용어로 표현해 본 것이다. 불교에서도, 자신의 어떤 기준점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자세를 지양하며 그러한 정신적 유연성은 색즉시공으로 정의된다. 이 때 한가지 기준점으로만 세계를 인식하는 일은 바로 아날로그적으로 연속되어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114)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선해야 한다.” “악하면 벌을 받는다.” 등일 것이다. 또한 효를 강조함으로써 조선왕국은 노인복지문제를 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