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체 메뉴
PDF
맨 위로
OA 학술지
Innovation of Chekhov Theatre During the Thaw in Soviet Russia 소비에트 해빙기 체호프 무대 해석의 혁신과 의미*
  • 비영리 CC BY-NC
ABSTRACT
Innovation of Chekhov Theatre During the Thaw in Soviet Russia

해빙기는 소비에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정신문화가 꽃피었던 시기로, 연극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해빙기 문화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극은 시대정신을 반영했고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토론의 가능성을 열어나갔다. 이러한 점은 체호프 연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체호프의 무대해석은 해빙기의 자유로운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스탈린 시대의 경직된 해석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체호프 연극의 새로움은 서정성, 시정, 분위기의 연극 등으로 설명되었던 스타니슬랍스키의 해석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던 네미로비치-단첸코의 해석을 모두 극복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형식주의라고 비판 받으며 금기시 되었던 모든 양식적 실험들과 연극주의적 접근이 체호프 희곡을 통해 시도되고 구현되었다. 해빙기 체호프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이 자신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파열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갈등은 표면에서 거칠게 드러나며 이전의 체호프 공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신경증적인 인물들이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이 되기 시작한다. 이와 맞물려 체호프 공연의 오랜 분위기였던 애수, 서정성, 낭만성, 노스탤지어 등의 정서도 이 시기 공연에서는 제거된다. 작품의 분위기는 건조하고 냉소적이었으며, 때문에 ‘신랄한 체호프(zloi Chekhov)’, ‘잔인한 체호프(zhestokii Chekhov)’는 이 시기 체호프 공연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사가 된다. 또 다른 특징은 무대 공간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양식화의 문제이다. 이 시기 체호프 공연의 무대미술은 인물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또 연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특히 집에 대한 사실적 모사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실주의 무대로부터의 탈피이기도 했지만 안식처로서의 집의 의미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듯 해빙기는 체호프의 무대 해석에 새로운 가능성과 전환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혁신과 새로운 시각은 이후 체호프의 다양한 접근에 대한 시작이자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KEYWORD
Anton Chekhov , The Thaw in Soviet , , , , M.Knebel , G.Tovstonogov , A.Efros , O.Efremov
  • 1. 서론

    소비에트의 해빙기는 ‘소비에트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 사회 전반에서 양적 질적 변화를 보여준 시기이다.1) 그러나 정치적 변화와 함께 해빙과 결빙이 반복되었던 까닭에 그 결과가 구조적 변화로 드러났다기보다는 다소 징후적 성격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했지만 짧고 강렬했던 해빙기의 문화는 이후 1960-70년대 소비에트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냈으며, 특히 이 시기 청년 세대였던 소위 ‘셰스티데샷니키(shestidesiatniki 60년대인들)’가 이후 포스트-소비에트를 이끌었던 직간접적 주역이 된다는 점2)에서 소비에트 문화 사회 전반에서 이 시기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러한 점은 연극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아가 연극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해빙기 문화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소비에트 문화 정책 내에서 민중예술, 대중예술로서 연극이라는 예술장르가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불어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합법적으로 대중이 모이는 것이 가능했던, 공연문화가 지니는 특별한 사회적 의미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극장의 대부분의 레퍼토리가 동시대 이슈를 다룬 현대물보다는 고전물이 많기는 했어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동시대의 문제와 이슈를 읽어냈고 정치 사회적 현안에 대한 토론의 가능성을 열어나갔던 것이다.

    체호프의 희곡에 대한 무대 해석 역시 해빙기의 자유로운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무대 위의 체호프 작품의 운명은 그의 희곡이 특별히 강한 정치적 색채나 사회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스탈린 집권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적지 않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3) 혁명 직후 막시스트 비평가들 사이에서 체호프 희곡들은 그 문학적 의미는 인정받으면서도 소비에트 대중의 레퍼토리로 적합한가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4) 때문에 1920-30년대에 걸쳐 체호프의 작품을 새로운 삶에 적합한 러시아의 고전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인가, 그의 작품을 소비에트의 무대에 올려도 좋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의심들이 끝없이 제기되었다. 서정적이며 비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체호프의 희곡이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혁명 정신을 고양해야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이유였다.5)

    이러한 비판에서 체호프를 구해낸 것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네미로비치-단첸코였다. 1940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그의 연출로 올라간 <세자매>의 성공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체호프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해 주었고 그 결과 무대 위에 체호프 작품을 부활시켰다.6) 그러나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서 해석된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세자매>는 체호프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해석 안에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예술극장식 해석’은 1950년대 후반까지 체호프 공연의 모범, 나아가 표준(etalon)으로 여겨지면서 “법칙” 내지는 “불변의 것”이 되어 이후 체호프 무대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7)

    그러한 체호프의 무대 해석에 새로운 가능성과 전환을 보여준 것이 해빙기의 공연들이다. 도그마화된 모든 것에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비평과 미학을 돌아보았던 이 시기는 이와 같은 경향에 힘입어 체호프의 무대 해석에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오늘날 체호프의 다양한 접근에 대한 시작이자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본 연구는 해빙기의 전반적인 문화사회적 변화 속에서 연극계의 변화와 쟁점들을 정리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세대의 연출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체호프 무대 해석의 혁신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것은 서정성, 시정, 분위기의 연극 등으로 설명되었던 스타니슬랍스키의 해석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던 네미로비치-단첸코의 해석을 모두 극복하는, 즉 반(反)예술극 장식 해석이라는 내용적 주제적 측면에서의 새로움과도 관련되지만, 더불어 스탈린 시대에 형식주의라고 비판받으며 금기시 되었던 모든 양식적 실험들과 심리주의적 해석을 벗어난 연극주의적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시기에 들어 이러한 가능성을 체호프 희곡을 통해서 어떻게 시도하고 구현했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된다. 이를 위하여 본고는 이 시기 체호프 공연들의 전반적 특징과 개별 공연들이 성취한 바를 현상적으로 기술하고, 그것이 이후 체호프공연에 제시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1)해빙기(解氷期)는 시기적으로 통상 스탈린 사망(1953년)과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된 시점(1956년)을 시작으로 하여, 소위 ‘프라하의 봄’으로 지칭되는 브레즈네프에 의한 1968년 체코 침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해빙’이라는 용어는 1954년 5월 잡지 ..기치(旗幟 Znamya)..에 실린 에렌부르그(I.Erenburg)의 소설 <해빙(Ottepel’)>으로부터 유래했다. 경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탈피하여 주인공의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새로운 시기 ‘해빙기’의 상징적 작품이 된다.  2)이 시기에 등장한 세대들이 결국 포스트-소비에트 문화의 직간접적 주역이라는 점은 해빙기가 소비에트 사회문화 전반에 가져온 의미, 그 징후적 특징들이 결론적으로 성취한 바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해빙기를 단순히 스탈린 격하 운동에 힘입어 새로운 정치권력을 잡고자 했던 흐루쇼프의 권력투쟁의 현상적 결과물과 이에 따른 일시적인 정치적 시해로 폄하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해빙기의 의미와 소비에트 내외 비평가들의 해빙기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서는 이장욱, 「해빙기 비평의 두 층위 - 해빙기 문학연구 1」,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제26집 참조.  3)실제로 체호프는 정치적인 분위기와 다가오는 혁명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에도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 “나는 자유주의자도, 또 보수주의자도, 점진적 발전을 주장하는 자도, 승려도, 그렇다고 무관심주의자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A.P.Chekhov, Poln. sobr. soch. T. 14. М., 1949, p.177.).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혁명 직후 체호프에 대한 막시즘 평론가들의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작품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고자 했던 작가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의 변화에 힘입어 달라지는데, 예컨대 베르드니코프(G.Berdnikov)는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호프는 살티코프-셰드린과 같은 혁명가-민주주의자도, 고리키와 같은 혁명의 전신자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는 정치와는 무관했고 심지어 그의 창작 경력의 마지막 기간에는 다가올 러시아의 발전의 실제적 역사적 관점에 대해 막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체호프의 창작은 유기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G.Berdnikov, A.P.Chekhov. Ideinye tvorcheskie iskaniya(izd.2-e). L., 1970. p.537-538.)  4)I.P.Kokhno, Lunacharsky i formirovanie marksistkoi kritiki, Minsk, 1979. 참조. http://lunacharsky.newgod.su/issledovania/lunacharskij-i-formirovanie-marksistskoj-kritiki  5)예컨대 당시 교육인민위원으로 혁명 후 소비에트 문화정책을 결정했던 문학비평가 루나차르스키(A.V.Lunacharsky)는 체호프의 작품에는 슬픔, 우울함의 모티프들이 지배적이라고 말하면서 체호프 작품의 지식인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비관성과 무력함을 부정적으로 지적한다(A.V.Lunacharsky, Poln. sobr. soch. T.7, pp. 21.22). 더불어 체호프 식의 드라마들을 읽고 있으면 ‘인생은 항상 어둡고, 주인공들에게는 존재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는 죄의식이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불행한 인물을 묘사하는데 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한다(A.V.Lunacharsky, Severnyi krai, 1902, 12월 3일, № 318 참조).  6)네미로비치-단첸코는 자신들의 체호프 공연이 지나치게 센터멘털했다고 인정했으며 1918년 인민계몽위원회 회의장에서 ‘체호프를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극장이라는 낙인으로부터 예술극장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실제로 부르주아 유산 중 훌륭한 것은 받아들이고자 했던 교육인민위원 루나차르스키의 의지와 맞물려 예술극장을 지켜내게 된다.(혁명 직후의 예술극장과 체호프 작품의 운명에 대해서는 K.Rudnitsky, Spektakli raznykh let, M. Iskusstvo, 1974. pp.90-101., L.Senelick, The Chekhov Theate, Cambridge Uni. Press, 1997. pp.110-116. 참조).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후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자신의 손으로 체호프 작품을 다시 무대 위에 부활시킨다. 그의 <세자매> 공연은 ‘소비에트 체호프 공연사의 새로운 단계’로 평가되면서 예술극장 뿐 아니라 소비에트 무대 위에 체호프 작품을 복귀시켰다.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세자매>와 그 영향에 대해서는 김혜란, 「1940년 네미로비치-단첸꼬의 <세자매> 공연과 전후의 낙관적인 체홉 공연들」,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17, 2004. 참조.  7)체호프 공연사 연구자 샤흐-아지조바(T.Shakh-Azizova)는 1940년 작 <세자매>는 이후 체호프 공연에 있어서 일종 ‘법칙’이었다고 말한다. 또 스멜랸스키는 에프로스의 <갈매기>를 논하면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작품은 갈매기 무대해석에 있어서 ‘불변의 것’이었다고 언급한다. T.Shakh-Azizova, Polveka v teatre Chekhova 1960-2010, Progress-Traditsiya, 2011. p.17., A.Smeliansky, “Kak nachinalsia novyi Chekhov”, Chaika, Baltiisie sezony, 2010, p.11.

    2. 해빙기와 소비에트 연극계의 변화

    해빙기는 소비에트 기간 중 정신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낭만적이었던 시기로 이에 힘입어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작가와 작품을 배출하면서 그 꽃을 활짝 피웠던 시기이다.8) 이 시기 들어 새로운 저널들이 창간되었고, 그동안 금지 되었던 작품들이 해금되었으며, 만젤쉬탐, 바벨, 불가코프, 플라토노프, 메이에르홀트 등도 복권되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서구와의 다양한 문화 교류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작가와 작품의 복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경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난 예술 작품의 창작 가능성과 형식적 실험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적 시각에도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했다.9)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존 연극관에 대한 문제제기를 촉발한 것은 1956년 <철학의 문제들(Voprosy Filosofii)> 5월호에 <희곡과 극장의 후진성에 관한문제(K voprosu ob otstavanii dramaturgii i teatra)>라는 글이 기고되면서이다.10) 이어서 사실주의 미학만이 전부였던 연극계에 다시 메이에르홀트의 메소드를 비롯한 ‘우슬로브노스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점화되었고11) 이는 형식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시기 연극에 있어서 형식의 문제는 희곡의 내용적 해석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쟁점이기도 했는데, 그러한 형식주의 실험의 가능성과 새로운 연극미학의 시작을 가장 급진적으로 보여주었던 연극적 사건이자 현상은 유리 류비모프(Yu. Lyubimov)와 타간카 극장(Teatr na Taganke)이었다.12) 타간카 극장의 연출가 류비모프는 당시 연기론과 연극론의 기본이었던 체험적 연기술,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을 거부하고 자신의 공연을 통해 연극적 연극, 극장주의, 우슬로브노스치를 소비에트 무대에 가져오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소비에트 러시아무대 위에서 금기시 되었던 브레히트의 희곡과 브레히트의 방법론을 창단 작품으로 선택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이 작품에서 류비모프는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한, 오직 회색의 캔버스 천만이 둘러쳐진 텅 빈무대를 제시했는데13), 당시로서 이러한 무대 형식은 그 자체로서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매우 위험한 행보이기도 했다.14)

    등장과 함께 류비모프와 그의 극단은 해빙기의 상징적 극단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시기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연극미학이 모두 우슬로브노스치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이 시기 그 근원으로부터 비판되거나 반박되지 않았다. 비판을 받았던 것은 도그마화된 사실주의, 경직화된 사실주의,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가려버린 가짜 사실주의, 몽상적인 낙관, 거짓된 휴머니즘과 영웅주의, 시대와 단절된 꾸며진 현실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빙기 문화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진실성(iskrennost’)’과도 관련이 있다.

    해빙기는 지난 시기동안 일상과 역사 모두에서 은폐되어왔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강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스탈린 시대를 지나오면서 모든 정보는 차단되었고, 민중이 알아야 할 바는 비공개로 처리되거나 정보는 독점된 채 왜곡되어 공개되었다. 이를 다시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 진실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하며 민중은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 바로 해빙기이다. 이러한 의식은 특히 학계, 예술계, 언론 출판계 등 정신문화계에서 강한 의지로써 나타났는데, 연극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사회적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작품을 통해 대두되었다.

    기존의 가치관에 맞서는 새로운 가치관,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던 시대적 특징은 젊은이들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기도 했다. 타협에 맞서고 불의와 싸우는 정신을 지닌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해빙기의 대표적 극작가 빅토르 로조프(V.Rozov)는 “바로 삶의 전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소비에트 젊은이들로 하여금 앎에 대한 열렬한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중략) 최근 우리의 사회주의 청년 사회 사이에서 특별하고도 역동적으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불의와 허위, 야단스러움과 고루한 관료주의에 대한 타협의 거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다”15)라고 증언한다. ‘불의와 타협의 거부’, ‘진실에 대한 추구’, ‘수동적인 소시민성과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 ‘시대의 양심에 대한 고민’, ‘객관성에 대한 강렬한 요구’ 등은 새로운 세대의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16)

    이러한 분위기는 연극을 통해 동시대적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드러났는데,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하는 극장이자 셰스티데샷니키의 상징적 극장은 ‘소브레멘니크(Sovremennik, 동시대인)’이었다.17) 모스크바 예술극장 산하 연극학교 출신의 젊은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한 이 스튜디오 극단은 1956년 빅토르 로조프 작, 올렉 예프레모프(O. Efremov) 연출의 <영원한 생명(Vechno zjivye)>을 자신의 창립 공연으로 올린다. 이 작품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 타협 없이 제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반영하여 당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시대의 상징이 된다.18) 창립 공연 이후에도 이극장의 레퍼토리를 채운 것은 로조프를 비롯한 시모노프, 볼로딘, 스보보딘, 로쉰 등 대부분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동시대성’, ‘현대성’의 문제는 이 극단의 명칭이자 특징이었다. 리얼리즘이 공식적 미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정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진정한 현실의 문제’, ‘동시대의 문제’는 말할 수 없었던 지난 시대를 비판하면서, 이들은 연극을 통해 현실의 문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문제, 나아가 그러한 현실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이 극단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주제이자 사명이 된 것이다.

    소브레멘니크 극장의 의미는 사실주의에 대한 재검토, 즉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의 ‘새로운’ 부활에도 있었다. 배우 중심의 극단이었던 그들은 자신의 연극미학이자 메소드로 여전히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중요성을 내세웠는데, 다만 기존의 연극적 분장, 연극적 무대장치, 연극적 발성, 연극적 무대의상 등 과장되고 요란한 무대적 관습들은 제거하고자 했다. 연극적 분장이나 의상을 거부하고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무대 연기를 추구한 그들의 ‘새로운 리얼리즘’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참회를 하는 듯한’, ‘자연스러운’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기존의 연기방식과 다른 이들의 연기방식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극단의 지나치게 조용한 발성에 대해 ‘속삭임의 리얼리즘’이라는 비아냥조의 명명을 하기도 했다.19) 그러나 소브레멘니크가 재평가한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와 연극미학은 살아있는 사람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의 진실을 무대에 가져오는 것에 적합했으며, 자신들이 선택한 동시대 작가들, 즉 로조프나 볼로딘이 말하고자 한 삶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소브레멘니크는 무엇보다도 ‘진실성’이 여전히 무대 위에서 유의미하며 중요하다는 점을 증명해 냈다.

    이렇듯 해빙기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정신적 분위기는 연극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시기 연극은 기존의 연극관을 재검토하고 다양성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적극적이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시대정신과 시대적 의미를 발언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게 된다. 또 새로운 세대의 연출가들이 등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극단이 창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안톤 체호프의 무대 해석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960년대 소비에트 무대는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경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하에서 도그마화 되어가던 체호프로부터 벗어나 내용상 형식상의 혁신을 모색하게 된다.

    8)1950년대 말 러시아에는 외국인과의 접촉이 쉬운 대도시들, 즉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리가, 탈린 등을 중심으로 서구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팝 레코드, 신문, 잡지 등이 암시장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되었고,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직접 조립하거나 테이프 레코더를 통해 불법 복제한 음반을 교환하기도 했다. 소비에트의 젊은이들은 1950년대에 처음으로 록큰롤을 들었고 이 음악은 빠른 속도로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나갔으며, ‘비트세대’, ‘앵그리 영맨’ 등과 함께 언급할 수 있는 소비에트 젊은이의 문화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9)1953년 『신세계(Novyi mir)』지에 실린, 스탈린 시절의 문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포메란체프(V.Pomerantsev)의 <문학의 진실성에 대하여(Ob iskrennosti v literature)>는 새로운 예술관을 수면 위에서 토론해 볼 수 있게 한 일종의 촉발제 구실을 하였다. 더불어 그 글이 실린 『신세계』지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신세계』지의 운명은 해빙과 결빙이 반복되었던 이 시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포메란체프, 에렌부르크 등 일련의 ‘자유주의자’ 들의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편집장이었던 트바롭스키는 다시 검열이 강화되던 50년대 후반한때 해임되었다가 다시 2차 해빙이 시작되었던 60년대 초 다시 복직되기 때문이다. 이후 소비에트의 체코 침공이 감행되면서 해빙기의 종식을 고하던 시기, 1969년 『신세계』의 편집진들은 완전히 축출된다.  10)B.A.Nazarov, O.V.Gridneva, “K voprosu ob otstavanii dramaturgii i teatra”, Voprosy Filosofii, 1956. 5. 참조.  11)R.Simov, “O teatre perezhivaniya i predstavleniya”, Teatr, 1956. 8. 참조.  12)소비에트 해빙기 타간카 극장의 의미와 초기작 <사천의 선인>에 대해서는 졸고, 「스탈린 사후 해빙기 소비에트 러시아 연극의 대중 :1960년대 러시아 연극계의 변화와 타간카 극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연극연구』 6, 한국연극사학회, pp.111-134. 참조.  13)“빈 무대에(벌써 새롭다!), 가장 자리로 작업대-보행로와 밝은-회색의 캔버스 천이 둘러쳐진 곳에 두 명의 배우가 있다. 한 명은 기타를 들고, 다른 한 명은 아코디언을 들고 있다. 측면에 챙 달린 모자에 자켓을 입은 세 번째 배우가 자리했다. 둘이 강건하고 거친 멜로디를 노래하면, 그러면 세 번째 배우는 역시 기타와 함께 ‘거리극’의 미학적 강령을 포고한다.” Smeliansky A, Predlagaemye obstoyatel’stva, Artist.Rezhisser.Teatr, 1999. p.88.  14)이 작품은 타간카 창단 전, 바흐탄코프 극장 산하 슈킨 연극학교에서 학생들의 공연으로 처음 발표되었는데, 공개 직후 당시의 교수진들이 이 작품을 금지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극의 내용이 아닌 형식 때문이었다. 브레히트 식의 연극성, 즉 형식주의적 접근은 학교의 존폐를 흔들 수 있을 만큼의 위험한 시도였기 때문이었다.  15)Rozov V. Moi Shestidesiatye... P’ecy i stat’i, M., 1969. p. 320-322. 참조.  16)1960년대 연극계를 설명하면서 세넬릭은 이 시기의 모토는 ‘완전한 객관성(thoroughpaced objectivity)’이었다고 말한다. L. Senelick, The Chekhov theatre, Cambridge uni. press, 1997. p.203.  17)‘현대성’ ‘동시대성’은 연극예술에서 뿐 아니라 이 시기 자체를 설명하는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이다. ‘현대성’의 문제가 해빙기 문화예술계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혜승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작품의 현대성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변화를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예술에서 사실주의 정신의 회복은 ‘앎의 의지’라는 시대정신과 맞물리면서 현실을 ‘공상적’인 전형에 굴복시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혜승 「해빙기 예술관의 변화」, 『슬라브연구』 제18권 제2호, 2002. P.230. 참조.  18)소브레멘니크가 로조프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연극학자 스멜랸스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들은 데뷔를 위한 희곡을 오랫동안 찾았다. 그리고 빅토르 로조프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했다. 그들이 선택한 희곡이 다루고 있는 그리 오래전이 아닌 파시즘과의 전쟁은 단순히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도덕적, 양심적 선택의 시간이었다.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스튜디오의 배우들은 자신들 세대의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A.M.Smeliansky, Predlagaemye obstoyatel’stva, Artist.Rezhisser.Teatr,, 1999. p.36.  19)그때까지의 연기법과 달랐던 소브레멘니크의 스타일은 지지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의 연기’, ‘진실된 연기’로 평가되었지만, 반대자들에 의해서 ‘속삭임의 리얼리즘’이라는 부정적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때까지의 연극적 관습과 달랐던,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조용한 연기법 때문이었다. 스멜랸스키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소브레멘니크’의 배우 억양은 그때까지의 지배적 발성에 거스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대자들은 극장의 발성 스타일을 가리켜 바로 ‘속삭임의 리얼리즘’이라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고 말하며, 그러나 바로 이 ‘속삭임의 리얼리즘’으로부터 새로움이 시작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위의 책, p.35. 참조.

    3. 1960년대 체호프 무대 해석의 혁신

    스타니슬랍스키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체호프 작품의 해석 뿐 아니라 창작 그 자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작가는 자주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희곡 중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위해서 썼다. 그러나 체호프의 극장이자 오늘날에도 체호프 해석의 모범으로 연구되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해석이 그 당시에도 항상 지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갈매기> 초연 때 트레플레프를 연기했던 메이에르홀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체호프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나와 연출가로서 상징주의 연극으로의 길을 걸으면서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자연주의적 메소드, 이에 입각한 체호프 해석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스타니슬랍스키가 외형적인 사실적 디테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고 배우들의 동선과 앙상블에 과도하게 개입한 나머지 체호프 작품의 정수를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체호프 작품의 정작 중요한 전체적인 조화를 깨뜨린 대표적 예로 메이에르홀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공연한 <벚꽃동산>의 3막을 든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의견과 해석을 제시하는데, 다분히 상징주의적으로 체호프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이에르홀트가 해석하는 3막의 분위기는 여러 가지의 음조가 뒤섞인 교향악이다. 벚꽃 동산의 매각과 그에 대한 라넵스카야의 근심은 섬광과 같은 포르테의 음조이다. 여기에 더해 피아니시모로 울리는 애수적 멜로디가 있는가 하면, 모든 일에 무심한 듯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시체와 같은 춤추는 무리들이 만드는 불협화음이 배경음으로 존재한다. 이 서로 다른 음조들은 3막 내내 묘하고 그로테스크한 조화를 이루며, 어느 순간 한 가지 음조가 전면으로 나섰다가는 다시 후면으로 사라지고 다시 어느 순간 도약하기를 반복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낸다. 누군가 ‘영지가 팔렸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춤을 추고, 또 다시 다른 인물이 등장해 ‘팔렸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춤을 춘다. 그렇게 3막의 끝까지 진행되는 이 장면을 메이에르홀트는 “죽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즐거움”21)이라고 표현한다. 메이에르홀트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본질로 보지 않았다. 그는 같은 글에서 “체호프에게 <벚꽃 동산>의 인물들은 수단이지 본질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이 점을 놓치고 모든 인물을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측면으로 분석했기에 <벚꽃 동산>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는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당신의 희곡은 마치 차이콥스키의 심포니처럼 추상적입니다.”22)라고 쓰기도 했다.

    바흐탄코프 역시 모스크바 예술극장식의 체호프 해석에 반대했다. 특히 그는 스타니슬랍스키가 <갈매기>에서 구현한 체호프의 ‘서정성’에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작가가 규정한 장르에 반하여 <갈매기>를 비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이른 죽음으로 인하여 바흐탄코프가 소망했었던 <갈매기> 연출은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해석을 설명하면서 “체호프에는 서정성이 없다. 그것은 비극성이다. 사람이 권총 자살을 하는 것, 이것은 서정성이 아니다. 이것은 세속성이거나 또는 행동이다. 세속성도 행동도 서정성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세속성에도, 또한 행동에도, 자신의 비극적 가면들이 있다.”23)라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해석에 반대하면서, 체호프 희곡 해석의 정석처럼 여겨졌던 사실적 디테일, 인물들의 심리분석, 희곡의 서정성 등을 거부했던 바흐탄코프나 메이에르홀트의 해석은 연출 노트로만 전해질 뿐 당시 무대화되지 못했다.24) 그들의 의도와 해석은 점차 기억되지 않았고 체호프 해석의 모범이자 정전으로 여겨진 것은 오랫동안 모스크바 예술극장이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해석은 ‘법칙’이자 ‘불변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를 가져오고 체호프 해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 바로 해빙기 체호프 공연들이었다.

    1960년은 특히 ‘우리시대에 체호프의 작품과 공연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 진지하게 제기되고 체호프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붐을 이루었던 해이다. 이는 해빙기라는 맥락도 있었지만 안톤 체호프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소비에트 연극계는 해빙기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체호프 무대적 해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소비에트 레퍼토리에서의 체호프 해석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샤흐-아지조바(T.Shakh-Azizova)도 지적했듯, 수치상으로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이 훨씬 많았지만, 바로 이 새로운 움직임이 이후 소비에트 체호프 해석 “변화의 전반적 방향을 결정”25)하게 된 것이다.

    해빙기 새로운 방식으로 체호프 작품을 공연했던 연출가들은 바보치킨((B.Babochkin), 크네벨(M.Knebel’), 톱스토노고프(G.Tovstonogov), 에프로스(A.Efros), 그리고 이미 정체의 시기로 돌아선 1970년에 자신의 첫 체호프 작품을 연출한 예프레모프(O.Efremov) 등이다. 해빙기라는 공통의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는 해도 개별 연출가들의 개성만큼이나 각각의 작품은 다른 모습과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체호프 해석의 새로운 몇 가지 공통점을 논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시기 체호프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에 대한 해석과 그들 간의 갈등을 드러내는 양상에 있다. 인물들은 자신의 정신적 내적 파열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위기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갈등은 표면에서 거칠게 드러나며, 이전의 체호프 공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렬하고 신경증적인 인물들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이 되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삶이 눈앞에서 점점 희망 없는 것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들이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고 그것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때문에 ‘피아니시모’라든가 ‘섬세함’과 같은 체호프 작품에 대한 해석은 이 시기 작품에서 정면으로 부정된다.

    이와 맞물려 체호프 공연의 오랜 분위기였던 애수, 서정성, 낭만성, 노스텔지어 등의 정서도 이 시기 공연에서는 제거된다. 작품의 분위기는 건조하고 냉정하며, 다분히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소적이다. 이 시기 공연들은 삶의 아이러니와 지독한 부조화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이유로 ‘신랄한 체호프(zloi Chekhov)’, ‘잔인한 체호프(zhestokii Chekhov)’는 이 시기 체호프 공연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사가 된다.

    또 다른 특징은 무대 공간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양식화의 문제이다. 이 시기 체호프 공연의 무대미술은 인물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또 연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미술의 특징이었던 일상의 묘사나 따뜻한 가정의 내부에 대한 묘사는 이 시기 새로운 연출가들에 의해 거부된다.

    그런데 이 시기 작품에서 ‘집’ 혹은 ‘가정’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실적 모사에 대한 거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이 따뜻하게 살아가는 안식처로서의 의미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샤흐-아지조바(T.Shakh-Azizova)는 이 시기 체호프 무대 해석에 있어 ‘삶은 감옥’이라는 모티프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26) 집은 체호프의 인물들에게 편안치 않은 이미지,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간인 것이다. 나아가 이 시기 공연에서는 <갈매기>의 호수도, <세자매>의 아름다운 나무들도, <벚꽃 동산>의 벚꽃 동산도 종종 등장하지 않기 시작한다.

    이렇듯 달라진 체호프 해석의 시대를 가장 먼저 예시한 작품은 1960년 모스크바의 말리극장에서 보리스 바보치킨(B.Babochkin) 연출로 올려진 <이바노프>였다. 세넬릭(L.Senelick)은 이 작품을 ‘이후 십년 동안 점점 더 자주 듣게 될 ’잔인한‘이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는, 러시아에서의 첫 번째 작품이다.’27)라고 설명한다.

    사실 바보치킨의 연출은 형식적으로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적 해석에 있어 ‘잔인한’ 체호프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이바노프는 바보치킨이 직접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의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의 잔인함, 그에 따라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이라 바라보는 시선은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이룬다.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이 작품에서 주장되지 않는다. 삶은 냉정하고 엄격하며 불행하다.

    바보치킨의 연출이 내용상 잔인한 체호프의 시작과 같은 작품이라 한다면 1965년 마리아 크네벨(Mariia Knebel’)29)의 <벚꽃 동산>은 형식상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리아 크네벨은 모스크바 예술극장 스튜디오 학생 신분을 거쳐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배우로서 연극적 이력을 시작했기 때문에 안톤 체호프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그녀에게 특히 매우 가깝고도 중요한 의미였다. 크네벨의 해석에서 1960년대식의 잔인한 체호프는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도 체호프 인물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삶에 대한, 또 체호프의 인물에 대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의 새로움은 ‘잔인한 체호프’에 있다기보다는 극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무대에 있었다.

    피메노프(Yu.Pimenov)가 무대미술을 담당했던 이 공연에서는 라넵스카야의 저택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져 온 벚꽃 동산도 재현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암시적인 스타일로 대체 되었다. 무대 위에는 벚꽃 동산 대신 가벼운 소재로 만든 아름다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집안살림에 딱히 용도가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 커튼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이미 오래전에 실용적인 용도는 잃어버린, 곧 사라져 버려야 할 운명의 벚꽃 동산이라는 존재를 연상시켰다.

    이러한 방식의 표현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특히 다분히 형식주의적으로 보였던 표현방법은 적지 않은 비난을 가져왔다. 특히 크네벨이 모스크바 예술극장 스튜디오 출신이자 오랫동안 그 극장의 배우였다는, 말하자면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적자라는 이유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같은 반응에 대해 크네벨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크네벨 공연의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무대미술을 통해 체호프 무대의 오랜관습이었던 사실적 묘사를 탈피했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더불어 작품 해석을 통해 구현한 내용적 추상성에도 있었다. 연출은 당시까지 체호프 공연에서 보편적으로 구현되었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체호프 작품의 초시간적 맥락, 보편적이고 영원한 주제를 가져오려는 시도를 했다. 그가 체호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주제는 ‘한없이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의 의미’이었다.

    크네벨에 의하면 누구나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벚꽃 동산이 있다. 그것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 생각할 만큼 소중한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계속되며 심지어 그것 없이도 여전히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그것이 잔인한 현실이자 삶의 진실이다. 그리고 크네벨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난 후에도 계속 살고 싶어지는 그 삶이 사실 우리가 잃은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 말한다. 크네벨이 자신의 <벚꽃 동산>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바로 이것,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이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긍정은 어찌 보면 네미로비치-단첸코의 낙관주의와도 상통한다. 때문에 샤흐-아지조바는 크네벨의 이러한 해석이 소위 트로피모프의 웅변으로 대표되는 강제된 낙관주의 없이도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말하며, 그녀가 그러한 강제되고 인위적인 낙관주의를 “밝은 슬픔(cvetlaya grust’)”으로 대신했다고 평가한다.32) 이러한 점은 크네벨의 공연을 60년대식 ‘잔인한 체호프’의 주제로부터 조금 다른 방향에 놓이게 한다.

    소비에트 연극계의 가장 대표적 연출가인 톱스토노고프(G.Tovstonogov)는 레닌그라드 볼쇼이 드라마 극장(BDT)의 무대에서 수많은 러시아 고전들을 공연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체호프는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그가 볼쇼이 드라마극장 무대에 올린 체호프 작품은 단 두 편으로, 그 하나가 1965년작 <세자매>이며, 다른 하나가 1982년작인 <바냐 아저씨>이다.33) 그러나 이것이 체호프에 대한 그의 무관심 때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체호프를 공연하고 싶다는 욕망과 이 작가가 자신에게 얼마나 각별한가를 여러 글에서 피력하기 때문이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체호프 작품이 놀라울 만큼 적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체호프가 매우 중요하고 무거운 작가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이 공연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톱스토노고프가 체호프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적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제에 어떤 해답을 내 놓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세간의 각별한 주목을 받게 만든 작품이었다. 톱스토노고프는 이미 일련의 탁월한 고전 해석을 통해 그 안에서 현대적 의미를 찾는 일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35) 그런 그가 볼쇼이 드라마 극장에서 한 번도 공연한적이 없었던 체호프의 작품을, 그것도 다른 작품도 아닌 네미로비치-단첸코가 공연하여 이전까지의 체호프 해석의 교과서로 여겨진 <세자매>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 연출가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공연 방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준비가 되었다는, 그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임을 암암리에 기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자매>를 무대에 올리는 순간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세자매>와 비교하게 될 것임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톱스토노고프는 체호프를, 특히 <세자매>를 공연하기로 결정하면서 이 작가와 작품이 위대한 고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체호프가 ‘우리 시대에 체호프가 필요하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작품이 아닌 <세자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톱스토노고프의 <세자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고전을 통해서 본 동시대성, 시대정신이었다. 그가 <세자매>를 통해 주목한 것은 의지의 마비 상태’에 가까운 ‘사람들의 비극적인 무위’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무능, 무관심에 대한 정당화를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특징적인 능력에 반대하는”37) 공연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한다. 즉 그는 행동해야 하는 지식인에 대한 촉구, 그들의 양심에 대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인물을 분석하면서, 톱스토노고프는 체호프가 자신의 인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이중적 태도에 주목한다. 그는 “체호프는 자신들의 인물들에 대하여 동정심만을 느끼는 것도, 그들을 사랑만 하는 것도 아니며, 더불어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분노한다.”38)고 말한다. 톱스토노고프는 자신의 공연의 3막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모든 갈등의 극단적 격화와 사건의 격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물들의 마음속에 쌓여갔던 모든 것과 감춰져 왔던 모든 것은, 이제 그 경계를 모르는 거대한 힘으로 폭발한다.”39)라고 설명하는데, 샤흐-아지조바는 이것이 그의 <세자매> 전체에 해당되는 설명이라고 해도 될 것이라 말한다.40) 즉 그의 작품은 60년대의 다른 체호프 해석들과 비교해 볼 때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위기에 놓인 인물들’이라는 관점과 ‘갈등의 격화’, ‘사건의 격화’라는 측면에서 60년대 체호프 공연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리허설 방식이나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만으로 본다면 그것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식의 자연주의적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드니츠키는 “톱스토노고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전통으로부터 전혀 분리되려고도 거절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이러한 전통을 따를 완전한 준비가 되어있음을 드러냈다.”41)라고 말한다. 특히 형식적인 면에서의 급진성은 그의 작품에는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심리주의적 리얼리즘의 방식에 속한 연출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물의 운명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미장센과 시정화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이 점에 대하여 세넬릭은, 톱스토노고프의 작품은 네미로비치의 자연주의적 접근법보다 더 ‘연극적이고 이미지적(imagistic)’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체호프 무대에서 보기를 원했던 ‘내적인 조화라든가 더 이전의 무대들이 보여준 삶의 시정화(poeticization)’가 결여되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톱스토노고프의 <세자매>는 ‘동정심’과 ‘잔인함’의 변증법이었다고 표현한다.42) 샤흐-아지조바는 당시 이 작품의 리뷰에서 “공연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의해 익숙해진 서정적이고 음악적인 어조를 제거한 것이었으며, 대조들, 날카롭고 농축된 색채들, 긴장되고 신경증적인 리듬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43)라고 서술한다.

    <세자매>의 무대미술 역시 어느 정도 변화되는 체호프 공연의 경향을 반영했다. 무대미술은 소피야 유노비치(S.Yunovich)가 맡았는데, 그저 일상을 드러내는 층위 장식들은 모두 사라졌고, 인물이 겪고 있는 내적인 변화와 갈등, 몰락해 가는 집안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삶이라는 문제가 시각화 되었다. 즉, 제1막에서의 프로조로프 집안의 모습은 밝고 생동감 넘치는 것이다. 집안에는 온통 흰 색의 꽃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막이 진행될수록 집안은 점차 차갑고 어두워진다. 특히 이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대 안쪽에 외롭게 걸려있던 ‘그네’였다. 이제는 완전히 불필요하고 제 자리도 아닌 곳에 놓여있는 그네는 이 작품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 즉 그들의 말라버린 삶, 눈앞에서 쇠락해 가고 있는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44)

    소비에트 체호프 공연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출가 중 한 명은 아나톨리 에프로스이다. 아나톨리 에프로스(A.Efros)가 1960년대 해빙기 무대 위에 올린 두 편의 체호프 작품은 이 시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 첫 작품은 1966년작 <갈매기>로, 모스크바의 렌콤(Moskovskii teatr im. Leninskogo komsomola)에서 초연되었다.

    <갈매기>를 공연하고자 하는 그의 구상은 공연이 실제로 올라간 것보다 훨씬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그가 의도했던 것은 새로운 젊은 세대와 구세대 간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이 의도는 이후 더 복잡한 아이디어들과 얽히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그는 기존의 모든 공연적 전통으로부터 단절을 원했다. 그는 <갈매기> 공연에 임하면서 ‘우리는 마치 <갈매기>를 처음 대하며 가장 처음 올리는 것처럼 올릴 것이다’46)라고 말한다. 실제로 에프로스는 체호프 작품의 모든 전형들, 체호프 무대 해석의 전통들, 클리셰들, 특히 그의 작품의 그 유명한 ‘서정성’과 결별하고자 했다.

    이러한 에프로스의 생각은 당시 소비에트 연극계의 새로운 바람이었던 브레히트 연극 미학의 영향, 더 구체적으로는 류비모프의 타간카 극장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마치 브레히트 방식과 같은 헐벗은’47) 방법을 시도하고자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프로스가 주목한 것은 어느 정도는 단순화된 ‘빈공간’의 미학이지 브레히트식의 소격효과(실제로 류비모프에게는 중요했던)나 무대 사건에 대한 감성적 접근을 배제한 이성적인 접근 같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감성적 접근이었으며, 나아가 격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무대가 보여준 ‘헐벗은 방법’의 시각화는 당시의 관중들에게 류비모프의 브레히트 작품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갈매기>의 무대 미술은 랄레비치(V.Lalevich)와 소수노프(N.Sosunov)가 맡았는데, 그들은 그동안 <갈매기>공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호수도 달빛도 재현하지 않았다. 인물들이 사는 공간은 높고 단단한 나무들로 둘러쳐 경계 지어져 있었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그 널빤지들로 방의 벽을 만들기도 하고 음식을 먹거나 로토 게임을 하는 가구를 만들기도 하면서 다양한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널빤지만으로 구성된 무대는 과거의 <갈매기> 무대가 종종 보여주었던 가정 내의 따뜻함도, 편안함도 느낄 수 없었다. 루드니츠키(K.Rudnitsky)는 이것은 뭔가 음울하면서도 교수대를 연상시키는 것48)이었다고 묘사하며, 또 샤흐-아지조프는 트레플레프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 ‘춥다, 춥다, 춥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49) 이러한 무대는 시각적으로 단숨에 “비극을 향하여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50)라는 인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한편, 에프로스의 ‘격정성’ 역시 체호프의 서정성과 체호프 지식인 인물들의 통념적 대화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물들은 톱스토노고프의 작품들보다 더 극단적인 정신적 위험 속에 살아가는 듯했다. ‘고전적인 체호프 식의 대화’는 이곳에 없었으며 히스테릭한 인물들은 서로에게 거칠게 대하고 소리 지르며 논쟁했다. 이것을 에프로스는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소통’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과거에는 <갈매기>의 해석의 열쇠가 인물들이 서로 서로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모두는 제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상호간의 몰이해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의 드라마는 다르다. 사람들은 소통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서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51)라고 설명한다. “소통 없는 소통”은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그들은 격렬하게 자신의 개인적 의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단절이 아니다. 그저 지향이 다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지독한 비극이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이러한 잔인함의 절정은 4막의 니나 자레츠나야의 장면에서 잘 드러났다. 니나 자레츠나야는 과거 트레플레프의 모놀로그를 연기했던 때를 기억하면서 “마치 부드럽고 우아한 꽃과 같은 감정이었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에서 그녀의 언어는 비명이자 영혼에서 내던지는 소리 같았다고 회고된다.52)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에프로스가 감지한 동시대의 체호프 인물들의 모습이었다.

    에프로스의 해빙기 두 번째 체호프 공연은 1967년작 <세자매>로, 말라야 브로나야 극장(Moskovskii dramaticheskii teatr na Maloi Bronnoi)의 무대 위에서 초연되었다. 샤흐-아지조프는 에프로스의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세자매>는 <갈매기>에서 연출가가 처음 드러낸 체호프의 모티프를 발전시키는 종류의 작품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어느 정도 <갈매기>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면, <세자매>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고 불안하며 유동적인 것이었다.”53)라고 이 두 작품의 차이를 구별한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것이었다.54)

    <세자매>의 무대미술은 두르긴(V.Durgin)이 맡았다. 무대 안쪽의 배경막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정원의 윤곽이 보였고, 벽이 없는 방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뭔가 안정되지 않은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무대에는 검은 천이 배경처럼 여기 저기 드리워져 있었고 조명기구들은 모두 노출되었기 때문에 매우 앙상하고 거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무대 한쪽에 모여 있는 가구들, 금속성의 잎을 달고 있는 나무, 시계 바늘이 없는 시계 등, 모든 사물들은 제 역할을 잃거나 폐기되기 직전이거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었다. 네미로비치-단첸코의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다가왔던 프로조로프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이 작품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렸거나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였다. 대신 이상한 금속성의 황금색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무대 중앙에 있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추억일 수도 있고, 혹은 그의 불행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55) 것들에 대한 연상을 가져왔다. 이 모든 무대 구성이 이 작품을 사라져버리는 삶에 대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세자매>는 이미 해빙기에 주어졌던 많은 가능성들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체감하던 시기였다. 이미 결빙으로 돌아서던 시대에 <세자매>를 공연하면서, 연출가가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정서라고 생각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와 대치하면서, 또 프로조로프 집안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인물은 나타샤였다. 그녀는 남편과 세 자매의 수동성을 참을 수 없어하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 놓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일을 하는 모습은 정확하지만 건조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3막에서의 체부티긴의 춤으로 이것을 에프로스는 ‘절망의 춤’56)이라고 불렀다. 술에 취한 채 무대로 뛰어 들어온 체부티긴은 욕설을 퍼붓다가는 축음기의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거의 경련에 가까운 춤을 추던 중 태엽이 다 되어 축음기가 멈추게 되는데, 이에 그는 당황하여 춤을 멈추고는 이윽고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달려들어 음악을 연주하게 만들고 춤을 추었는데, 마치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장면은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했다. 루드니츠키는 이 장면에 대해서 체호프 작품의 중심 모티프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삶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에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라 평가했다. 그는 “음악에 의해 발작적으로 조정되는 마리오네트, 이 음악이 없이는 생명 없고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인형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분노와 항변의 목소리를 내었고,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설명과 정당성을 요구했다.”57) 라고 장면의 의미를 설명한다.

    마지막 장면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장면과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올가의 마지막 대사는 점점 잦아들면서 울렸고, 1940년 네미로비치-단첸코가 희망과 긍정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의 <세자매>에서 삭제했던 체부티긴의 마지막 대사 ‘트라라⋯ 붐비야⋯ 기둥에 앉아있네⋯ 나는⋯ 다 마찬가지야! 다 마찬가지야!’는 다시 복원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프로스의 <세자매>는 소비에트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음울한 것으로 여겨졌고, <세자매>는 <갈매기>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전에 대한 왜곡이자 체호프에 대한 몰이해라는 논란과 비판으로 인하여 결국 1968년 봄, 이 작품은 상연이 금지된다.58)

    해빙기의 종식이 확연해지고 오랜 정체의 시기가 지속될 것임을 예감했던 1970년 여름, 해빙기의 대표적 스튜디오 극단이었던 소브레멘니크 극장(Moskovskiiteatr “Sovremennik”)도 자신들의 첫 체호프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59) 이 작품은 올렉 예프레모프(O.Efremov)가 연출한 첫 체호프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트리고린의 역을 맡아 연기했다.

    소브레멘니크는 해빙기의 상징과 같은 극단이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연극학교의 젊은 배우들로 시작된 스튜디오 브레멘니크는 그 자신들도 해빙기의 새로운 세대였지만 그들을 지지했던 관객들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창단 초부터 자신들의 이름에 맞도록 주로 동시대 작가들, 즉 로조프(V.S.Rozov), 볼로딘(A.M.Volodin) 등의 희곡들을 무대에 세웠고 러시아 고전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프레모프가 <갈매기>를 선택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후예인 이들의 <갈매기>에 기대를 보냈고, 어떤 의미에서 로조프와 볼로딘의 작품이 상당히 ‘체호프적’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실제로 소브레멘니크의 <갈매기>는 그동안 극단이 그동안 보여주었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60년대 인들의 좌절과 환멸,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반영했다. 세넬릭은 소브레멘니크 극장에서 수년간 보여주었던 모든 사소한 음모들, 원한과 환멸 등이 체호프 텍스트에 그대로 접목되었고 60년대의 혼란스러운 특성이 체호프 텍스트에 그대로 주입되었다고 말한다.60) 이와 더불어 배우 중심의 극단이자 스타니슬랍스키 메소드의 후손이라는 극단의 특징도 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났는데, 연출가는 인물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들의 각각의 삶이 어우러져 체호프 희곡의 다성악적 특징이 구성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기존의 로조프나 볼로딘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소브레멘니크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갈매기>에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작품의 무대 미술은 바르힌(S.Barkhin)이 맡았는데, 다른 60년대 작품들과는 달리 체호프 작품에 요구하는 집, 정원 등이 무대 위에 묘사되어 있었다. 다만 물건들과 자연들에 둘러싸여 있는 속에서 무언가 ‘군중 속의 고독’ 같은것이 파생되었다. 실제로 예프레모프가 이 작품에서 핵심으로 여긴 것은 부조화, 혹은 불협화음이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부조화, 세계 및 시대와의 부조화, 자기 자신과의 부조화’가 그의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그런 속에서 인물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는 ‘고독’이었다. 에프레모프는 “각자는 그 자신 안으로 침잠한다.”61)고 설명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들은 종종 자신의 숨겨두었던 은밀한 내적 고백들은 발언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을 진정 듣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해석이 가장 극단적으로 잘 드러난 것은 2막의 마지막 장면이다. 극의 모든 인물들이 무대 위로 나와 먹고 마시고 말다툼하고 서로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대사하고 연기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인물들 각자는 모두 제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만 관심을 둘 뿐 주변에 대해서는 좀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의 ‘눈앞에서’ 레플레프는 사냥총으로 첫 번째 자살 시도를 한다. 때문에 당시의 비평은 이 장면의 총소리를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하는 것 같은 총소리”62)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특징적 장면은 마지막 장면으로 예프레모프가 만든 에필로그였다. 이 장면에서 니나 자레츠나야가 등장하여 그 이전의 장면과는 다른 차원의 매우 ‘연극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트레플레프의 독백을 낭독한다. 샤흐-아지조바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것은 단순히 <갈매기>에만 해당되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이후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간 예프레모프가 올릴 일련의 체호프 작품에 대한 전조이기도 했다고 말한다.63)

    한편, 이 작품은 에프로스의 <세자매>가 러시아 체호프 공연 사상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성적인 모티프를 전면화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티프를 강조하면서 세넬릭은 인물 해석에서 강조된 바, 즉 불감증적인 남편 때문에 애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나타샤, 변덕스러운 반처녀(demi-vierge) 이리나, 상스러운 포식동물 같은 마샤, 지나치게 억압되어 있고 또 억압하는 올가 등을 주목한다.65)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상황과 성격을 이루는 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그녀들의 욕망, 겉으로는 좌절된 지식인, 자신들의 정신적 이상향을 잃어버린 지식인의 굴절된 삶이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그 자신들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심연 깊숙이 자리 잡은 성적인 불만족인 것이며, 이를 에프로스는 어느 정도 무대 위에 구현한 것이다.66)

    이와 같이 1960년대 소비에트 무대의 체호프 작품은 모스크바 예술극장 이후 체호프 공연의 정석으로 여겨졌던 많은 요소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들 작품은 인물에 대한 해석, 작품의 주제 및 갈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이전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지만, 특히 그러한 해석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형식적 문제에 있어서 혁신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러한 혁신은 당시 상당히 과감하고 용감한 행보였다. 이들 공연은 이후 체호프 희곡을 더 확장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체호프 희곡의 연극성을 찾아나가는데 기여했다.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소비에트가 무너진 199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체호프 공연이 보여주고 있는 급진성의 많은 부분들을 이 시기 작품들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해빙기 체호프 공연이 지니는 의미를 보여준다.

    20)Vs. Mayerkhold, Stat’i, pis’ma, rechi, besedy, t.1., Iskusstvo, 1968. p.118.  21)위의 책, p.85.  22)위의 책, p.85.  23)E.Vakhtangov, Teatralnye stranitsy, M., 1969. p.356, T.Shakh-Azizova, Polveka v teatre Chekhova 1960-2010, Progress-Traditsiya, 2011. p.20. 재인용.  24)메이에르홀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결별한 후부터 스타니슬랍스키의 요청으로 상징주의 연극 실험을 위해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스튜디오를 맡게 되는 1905년까지의 기간 동안 지방 도시로 내려가 ‘새로운 드라마의 동지회(1902-1905)’를 창단하고 체호프 공연을 비롯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의 레퍼토리들을 공연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체호프 공연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해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25)T.Shakh-Azizova, 앞의 책, p.21.  26)위의 책, p.22.  27)L. Senelick, 앞의 책, pp.202-203.  28)B.Babochkin, V teatre i kino, M. 1968. p.200., T.Shakh-Azizova, 앞의 책, p.30. 재인용.  29)연극학자이자 모스크바 국립 연극원(GITIS)의 교수이기도 했던 마리아 크네벨은 1918년부터 미하일 체호프 스튜디오에서 수학한 그의 제자이었다. 그녀는 1924년부터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로 활동하였고, 연출가로서 활동의 영역을 넓힌 것은 1935년의 일로 모스크바의 예르몰로바 극장(Moskovsky Teatr im. Ermolovoi)에서였다. 미하일 체호프에 대한 언급과 연구가 가능해지고 1980년대 들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미하일 체호프의 전집이 발간되었을 때 그의 메소드와 교육 방법에 대하여 그녀 자신의 경험과 분석으로 서술한 것도 그녀였다.  30)M.Knebel’, Vsia zhizn’, BTO, 1967. p.568.  31)위의 책, p.570.  32)T.Shakh-Azizova, 앞의 책, p.37.  33)레닌그라드 볼쇼이 드라마 극장에 앞서 톱스토노고프가 체호프 작품을 연출한 것은 1933년의 일로 그것은 트빌리시의 청소년 극장에서 공연된 <청혼>이었다. 이후 약 30여년이 지나도록 톱스토노고프는 체호프 작품을 연출하지 않는다.  34)“나는 오랫동안 체호프를 올리지 않았다. 전 생애를 통해 그것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체호프는 그저 위대한 러시아 작가-극작가, 그저 세계 고전 중의 하나가 아니다. 새로운 연극의 위대한 창시자, 통찰자, 20세기 연극의 콜럼버스이다. (중략) 나는 여러 번 체호프를 공연하려고 시도했다. 좋은 배우, 시간, 기회 . 모든 것이 이를 위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중단시켰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세자매>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교해 그 이상을 이야기하는 것, 나는 할 수 없었다. 네미로비치-단첸코보다 더 잘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누가 위대한 공연의 애처로운 복사품 이나 혹은 완벽한 작품의 변형에 불과할 의미 없는 시도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G.Tovstonogov, “Razmyshleniya o klassike”, zerkalo ctseny, Iskusstvo, 1980. 인터넷 버전. http://martynychev.ru/books/167/g-a-tovstonogov-zerkalo-stseny-chast-1a 참조.  35)특히 그가 볼쇼이 드라마 극장 무대 위에 올린 1957년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공연은 단순한 연극사적 사건이 아닌, 당대의 시대정신과 도덕성을 형상화한 해빙기 정신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36)G.Tovstonogov, 앞의 책, 인터넷 버전. http://martynychev.ru/books/167/g-a-tovstonogov-zerkalo-stseny-chast-1a 참조  37)G.Tovstonogov, Krug myslei, L., 1972. p.152.  38)위의 책, p.162.  39)위의 책, p.220.  40)T.Shakh-Azizova, 앞의 책, p.35.  41)K.Rudnitsky, Spektakli raznykh let, Iskusstvo, 1974. p.127.  42)L. Senelick, The Chekhov theatre, Cambridge uni. press, 1997. pp.204-205.  43)T.Shakh-Azizova, Truda, 1965. 7 ; Prem’ery Tovstonogova, Artist.Rezisser.teatr, 1994. p.169.  44)L. Senelick, 앞의 책, p.34.  45)A.Efros, “Iz arkhiva Efrosa 1964 god”, Chaika, Baltiisie sezony, 2010. p. 122.  46)Moskovskii komsomoleta, 1966. 1월 23일자, T.Shakh-Azizova, Polveka v teatre Chekhova 1960-2010, Progress-Traditsiya, 2011. p.60 재인용.  47)A.Efros, Repetitsiya-Liubov’ moia, Panas, 1993. p.161.  48)K.Rudnitsky, 앞의 책, p.147.  49)T.Shakh-Azizova, 앞의 책, p.60.  50)위의 책, p.61.  51)T.Shakh-Azizova, Polveka v teatre Chekhova 1960-2010, Progress-Traditsiya, 2011. p.61. 재인용.  52)위의 책, p.61.  53)위의 책, p.63-64.  54)“희곡은 매우 격하게 연기되었다. 모든 머뭇거림은 말다툼으로, 모든 오해는 스캔들로, 어색함은 흥분의 불꽃으로 바뀌었다.” K.Rudnitsky, Spektakli raznykh let, Iskusstvo, 1974. p.153.  55)T.Shakh-Azizova, 앞의 책. p.64.  56)A.Efros, Repetitsiya-Liubov’ moia, Panas, 1993. p.243.  57)K.Rudnitsky, 앞의 책. p.158.  58)M.G.Zaionts(Edit.), Teatr Anatoliya Efrosa : Vospominaniya ctat’i, Artist.rezisser.Teatr, 2000. p.378.  59)이 작품은 그가 소브레멘니크에서 연출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올렉 예프레모프는 소브레멘니크를 나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 이적하고, 소브레멘니크는 스튜디오 시대를 종식하게 된다. 올렉 예프레모프가 극단을 떠나면서 많은 배우들도 함께 떠나기도 했는데, 때문에 당시 저널들은 ‘언젠가 한 극단의 창단을 알렸던 <갈매기>가 오늘은 한 극단의 종식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스튜디오 시대의 종식과 함께 소브레멘니크도 해체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극단 소브레멘니크는 갈리나 볼체크(Galina Volchek)를 중심으로 재정비되어 활동을 지속해 나간다.  60)Senelick, 앞의 책. p.217.  61)Efremov interviewed by V.Maksimova, Senelick, p.218. 재인용.  62)Shcherbatov, “ etogo goda”, Komsomolskaya Pravda, 1970. 7. 5., Selenick, p.218. 재인용.  63)1970년의 <갈매기>에 이은 예프레모프의 체호프 작품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197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 위에서의 <이바노프>이다. 이후 그는 <갈매기>(1980), <바냐 아저씨>(1985), <벚꽃 동산>(1989), <세자매>(1997) 등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무대 위에서 올린다.  64)T.Shakh-Azizova, 앞의 책, p.79.  65)Senelick, 앞의 책. p.215.  66)체호프 작품 인물들의 사랑을 성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90년대 이후의 체호프 공연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다. 종종 그들의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시들어 가는 젊음을 거부하려는 육체적 몸부림이자, 여성적 혹은 남성적 매력을 재확인하려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젊은 육체와 나이든 육체는 종종 대조되고 몸과 성에 대한 모티프는 표면에서 표현된다. <세자매>에서 성적인 모티프가 전면으로 드러난 대표적 작품으로는 네크로슈스가 1986년 연출한 공연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자매들의 주변 남성들-군인들은 근육과 힘을 과시하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제복을 강조하면서 ‘남성성’을 드러내며, 자매들은 그것을 선망하고 열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결론

    해빙기의 자유로운 문화적 분위기는 연극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세대의 연출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체호프 무대 해석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 체호프 연극의 새로움은 오랫동안 체호프 연극의 법칙이자 정석으로 여겨졌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식의 해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서정성, 시정, 분위기의 연극 등으로 설명되었던 스타니슬랍스키의 해석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던 네미로비치-단첸코의 해석을 모두 극복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형식주의라고 비판받으며 금기시 되었던 모든 양식적 실험들과 연극주의적 접근이 체호프 희곡을 통해 시도되고 구현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잔인한 체호프’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해빙기 체호프 공연의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인물들이 자신의 내면적 위기와 갈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때문에 공연의 정서는 거칠고 건조하고 냉소적이 되며, 인물은 종종 신경증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둘째, 이 시기 체호프 공연의 무대미술은 갈등을 시각적으로 또 연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이것은 지난 시대에 금기시 되었던 무대 공간 구성에 있어서의 양식화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관련하여 체호프 무대 공간의 전형이기도 했던 ‘집’ 혹은 ‘가정’에 대한 무대 재현이 종종 거부되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적 모사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지만 안식처로서의 집, 가정의 의미가 가능하지 않다는 시대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시도는 동시대 작가, 시의적 의미를 지닌 작가로서 체호프 읽기였는데, ‘현대성’의 반영,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 개인에게 요구되었던 ‘도덕과 양심’의 문제라는 해빙기 정신문화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 체호프 해석의 새로움과 혁신은 당시 많은 비판을 가져오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비난은 체호프의 의도를 반하는, 연출가의 지나친 자의적 해석, 동시대 이슈를 강제적으로 넣으려 한 나머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오독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일차적으로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체호프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체호프 무대 해석을 보면 이러한 비판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오늘날의 체호프 공연들이 보여주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점들 중 많은 부분이 이미 해빙기 체호프 공연들에서 시도되었거나 그 싹을 보였다는 점은 이 시기 공연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더해준다.

    특히 이들 공연들은 체호프의 작품이 지닌 연극성을 재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무대적이고 연극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 동시대성의 관점에서 고전에 접근하는 문제, 체호프의 정수 내지는 핵심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 등에도 나름의 연극적 답변을 제시하였다. 결론적으로 해빙기 공연들은 체호프의 무대 해석의 전환을 알리는 하나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러한 혁신과 새로운 시각은 오늘날 체호프의 다양한 접근에 대한 시작이자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참고문헌
  • 1. 김 혜란 2004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Vol.17
  • 2. 이 장욱 2007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Vol.26
  • 3. 이 진아 2003 [『한국연극연구』] Vol.6
  • 4. 이 혜승 2002 [『슬라브연구』] Vol.18
  • 5. Efros A. 2010 Chaika google
  • 6. Efros A. 1993 Repetitsiya-Liubov’ moia google
  • 7. Gromova M.I. 1999 Russkaya sovremennaya dramaturgiya google
  • 8. Knebel’ M. 1967 Vsya zhizn’ google
  • 9. Meyerkhold Vs. 1968 Stat’i, pis’ma, rechi, besedy, t.1. google
  • 10. Rozov V. 1969 Moi Shestidesiatye...P’esy i stat’i google
  • 11. Rudnitsky K. 1990 Russkoe rezhissyorskoe iskusstvo. 1908-1917 google
  • 12. Rudnitsky K. 1974 Spektakli raznykh let google
  • 13. Rudnitsky K. 1990 Teatral’nye siuzhety. google
  • 14. Senelick L. 1997 The Chekhov Theater google
  • 15. Shakh-Azizova T. 2011 Polveka v teatre Chekhova 1960-2010 google
  • 16. Smeliansky A. 1999 Predlagaemye obstoyatel’stva google
  • 17. Smeliansky A. 2010 “Kak nachinalsia novyi Chekhov”, Chaika google
  • 18. Tovstonogov G. 1972 Krug myslei. Stat’i, rezhissyorskie kommentarii, zapisi repetitsii google
  • 19. Tovstonogov G. 1994 Prem’ery Tovstonogova google
이미지 / 테이블
(우)06579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Tel. 02-537-6389 | Fax. 02-590-0571 | 문의 : oak2014@korea.kr
Copyright(c) National Library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