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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지 크레올사회의 형성과 소수자* La formation des societes creoles lors de la colonisation francaise et leurs minorite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프랑스 식민지 크레올사회의 형성과 소수자*

On se propose d'élucider ici le mode d'appellation inventée par le groupe dominant colonialiste pour minoriser le groupe esclave dominé dans la colonisation française des Petits Antilles, dans l'approche lexicale des catégories de métissage.

Pour ce faire, on présente tout d'abord le processus de formation de la société créole à deux phases : la société d'habitation où le préjugé de couleur n'apparaît pas encore et la société de plantation mise en place d'une vie sociale créole, qui commence à façonner le préjugé de race. Et puis on montre la répartition de la population de couleur selon le statut juridique(esclaves ou hommes libres) et le niveau social, en essayant de montrer les correlations entre la couleur de l'esclave et sa qualification. Cela s'explique par la politique discriminatoire menée par le groupe dominant et par une stratégie des gens de couleur qui y répondent. Ceux-ci s'acharnent à obtenir un métissage se rapprochant du Blanc pour se faire reconnaître en tant que groupe privilégié, différent des Nègres et apte à passer dans la classe des Blancs.

On tente enfin d'illustrer selon la couleur ou le degré de métissage certains termes tels que noir, mulâtre, métis, nègre, créole, etc., qui traduisent le préjugé racial et l'idéologie de l'infériorité façonnés par le regard occidental.

Une telle approche nous amène à conclure qu'il existe des liens entre la couleur, le statut juridique et le niveau social dans la population de couleur et que la hiérarchie raciale se caractérise donc par une hiérarchie sociale et une diversité phénotypique.

KEYWORD
societe creole , esclave noir , hommes de couleur , Les Antilles , minorite
  • 서론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도 소수자 혹은 소수집단 minorité은 차별, 배제, 강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차별은 흔히 인종, 색깔, 종교, 언어, 민족, 태생과 같은 영역의 문제로 이해되지만, 오늘날은 성적 소수자, 사회적 소수라는 표현을 자주 들을 수 있듯이 소수의 문제가 관련되지 않는 영역은 거의 없어 보인다. 분명 소수의 개념은 통계적 의미에서 다수majorité의 상대적 개념이지만, 단순히 수적으로만 이 모든 영역의 소수자들의 문제를 이해할 수는 없다. 어원으로 보면 minorité의 또 다른 의미는 미성년이다. 물론 성년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자 경계적 개념이다. 경계를 어디에 설정하느냐에 따라 상대적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미성년은 수적인 의미에서 성년의 소수가 아니다. 오히려 미성년이라는 어휘는 성년에 비해 열등한 상태에 있음을 내포한다. 미성년의 열등성이라는 내포적 의미는 식민사회에서 백인지배자들이 미개한 인종에게 문명을 전한다는 미명하에 마치 성년이 미성년을 교육하고 훈육하듯이,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예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베리아인들이 식민지 정복과 함께 발명해낸 많은 명명법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그대로 차용하였다. 신세계, 아메리카, 서인도, 인디오 같은 명칭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명칭 모두 서구적 관점에서 정복자가 아메리카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대상을 타자화하는 명명법”3)이다. 이렇듯 자의적인 이름 붙이기는 17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정복에서도 예외없이 나타난다. 식민 정복에서 이들 정복자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분류는 기본적으로 인종주의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통계학적 차원의 다수와 소수의 정의를 벗어나서, 식민지 초기 크레올사회의 소수자는 누구였는지, 소수자를 만드는 집단은 누구였는지, 또 이러한 사회적 위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하였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프랑스령 앤틸리스인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지역으로 연구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며, 일부 어휘의 사전적의미 분석을 통하여 어떻게 유럽인들이 피부색깔의 차이에 따라 소수자를 만들었는지를 예시하고자 한다. 먼저 식민지 크레올사회 형성과정과 특징을 살펴보고, 이어 프랑스령 앤틸리스의 소수자들은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색깔이라는 기준으로 수많은 타자들을 만들기 위해 ‘발명’된 어휘들, 특히 noir, nègre, créole, métis, mulâtre 어휘들의 의미가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분석해볼 것이다.

       1. 프랑스 식민지 크레올사회의 형성과 특징

    오늘날 세계의 크레올어권 지역은 주로 도서지역에 해당한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월터 D. 미뇰로의 의미에서4)-- ‘서인도’라는 이름으로 ‘발명’한 새로운 땅은 유럽인과 원주민 혹은 흑인노예의 혼혈을 통해 태어난 크레올 사람들의 땅이 되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서인도제도라고 부르는 섬들은 프랑스에서는 앤틸리스Les Antilles5)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크레올어를 대신하여 흔히 섬의 언어la langue des îles라고 자주 말하듯이, 크레올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섬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섬이라는 공간은 유럽 강대국의 식민지 정복 이후 인간에 의해 변모되었고, 섬의 지형적 문화적 변화는 인간의 정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카리브해의 경우처럼 이미 인디언들이 거주하던 땅이었기도 하지만, 인도양의 경우처럼 거의 사람의 흔적이 없었던 무인도에 가까운 섬도 있었다. 따라서 크게 이 두 지역의 식민지 상황과 경험은 처음부터 다른 출발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이주한 사람의 종류와 이주의 이유가 달랐다는 점에서 이 두 해역의 사회문화적 특징은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이 두 해역의 식민지 크레올사회의 공통된 요소는 쇼당송R. Chaudenson6)에 의하면 2단계의 사회 형성(대략 1635년에서 1848년)에 있다. 먼저 식민자들은 섬 지역에 도착하여 농업을 통한 경작을 시작하였고, 이로써 ‘경작지사회’societe d'habitation7)의 1단계를 거치게 되었다.8) 초기 경작지 사회의 형성과정에서는 주로 백인과 노동력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흑인 노예들이 구성하는 사회를 형성한다. 정착 당시 백인 한명 당 흑인 한명의 비율로 소규모 생산 단위의 산업구조를 시작한다.9) 주로 생존에 필요한 커피, 담배, 등이 주요 생산품이었다. 토지 개간과 더불어 다양한 출신의 사회그룹들 간의 통합을 위하여 주인과 하인 간에는 비교적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초기 식민사회에서 색깔의 편견은 거의 없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흑인과 백인간의 결합이 서로간의 대립을 야기하지 않았다.10) 초기 농장 사회는 이후 2단계 ‘플랜테이션 사회’societe de plantation로 넘어오면서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흑인노예들의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인디고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삼각무역을 통한 플랜테이션 경영이 발전한다. 이때 백인과 흑인의 비율이 한명당 150명 비율로 수적으로 말하면 백인이 소수가 되고 흑인이 다수가 되는 불안한 지배관계가 설정된다.11) 이 시기가 크레올사회의 형성이 시작되는 시기이며, 언어적으로는 크레올어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늘어나는 흑인노예와 백인간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서 1685년에 흑인법전Code Noir12)이 만들어지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2. 크레올 사회의 사회계층과 소수자들

    이주 1세대들의 정착단계에 해당하는 초기 식민사회는 지배자인 백인 농장주와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 피지배자인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노예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중간계급이 없는 양극화된 사회였으며 혈통은 계층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점점 혼혈을 통해 중간 혈통들이 다양해지면서 혈통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출신도 가족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혈통 기준은 점차 가시적으로 구별 가능한 신체적 특징, 주로 피부색깔의 기준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크레올사회를 이해하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피부색이다. 백인과 흑인의 이중 구도가 혼혈에 의해 백인, 흑인, 혼혈인13)의 삼중구도로 변한다. 이때 삼중구도라는 의미는 실생활에서 유색인hommes de couleur 내부의 다양한 색깔의 프리즘에 따라 서로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셋 이상의 의미이며, 세분화된 인종적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14)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서는 크게 백인, 흑인, 물라토라는 어휘로 인종을 구분한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유색인의 범주는 흑인과 물라토이다.15) 인종 구분에 다시 법률상의 신분, 즉 자유인인지 노예인지에 따라 복잡한 조합으로 사회계층을 세분할 수 있다. 가령 백인(본국 백인 관료, 현지 백인 식민자), 자유유색인(주로 순수흑인을 제외한 다양한 물라토), 노예유색인, 자유흑인(주로 섬 태생의 노예), 흑인노예(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노예), 탈주노예Noirs marrons16) 등으로 구분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백인은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로서 총독이나 지방장관, 각 지구의 사령관, 고위공무원, 군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백인관료는 섬의 지배자로서 사법, 재정, 행정을 담당하였다.17) 현지 백인 식민자는 경제적 규모에 따라 대백인Grands Blancs 혹은 소백인Petits Blancs으로 구분되었다. 대백인은 귀족출신의 대농장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소백인은 축적한 부는 없지만 단지 백인출신인 사람들이다. 마르티니크의 경우, 섬에서 태어난, 따라서 백인 식민자의 2세대에 해당하는 백인크레올을 베케Beke18)라고 불렀다. 이들은 플랜테이션 사회에서 신흥 백인 지배층이 되었다면, 또다른 백인크레올인 베케-비타코Beke-bitako는 빈곤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과들루프의 경우, 백인 식민자는 넓은 땅과 많은 노예를 소유한 대백인과 소박한 주거를 소유하고 유일한 부가 피부색이었던 주로 브르타뉴나 노르망디의 선원을 소백인으로 불렀다. 2세대에 가면 소백인들은 마티뇽 백인Blancs-Matignon19)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백인 이외 자유인의 범주에는 자유 신분의 물라토와 흑인이 있다.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의 피가 반반 섞인 크레올인이다. 식민지 초기에 백인여성들이 부족하였고, 이로 인해 혼혈이 증가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혼혈의 경우, 흑인노예 여성과 백인 남성사이에 불법적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685년에 흑인법전이 나오기 전에는 물라토는 태어나자마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법전 이후 흑인 남편이 자유여성과 결혼하여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자식은 엄마의 조건을 따르도록 한다. 즉 아버지가 노예이더라도 엄마처럼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아버지가 자유인이고 엄마가 노예이면, 자녀는 노예가 되었다.20) 그러나 아버지이자 주인인 백인은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흔하였다. 주인들은 과들루프 총독의 승인을 얻거나 세금을 내고 이들을 해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유색인의 수가 증가하는 데 기여했다. 혼혈인에게는 백인이나 유색인들과 친족관계를 맺는 것은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다. 유색인들의 법률상 조건은 조상들 중에 백인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었다.21)

    다른 한편 흑인이 자유를 얻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노예들은 스스로 주인에게 몸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해방되거나 탈주노예나 반란자들을 고발하거나 섬의 수비대원이나 유색인 회사에서 8년 정도 일하면 해방될 수 있었다.22)

    흑인노예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크레올 지역에서 태어난 노예와 다른 땅, 주로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노예의 구별이 있었다. 전자의 그룹은 백인 주인과 가까이 하고 자유를 얻기 쉬운 그룹이었다. 직업교육을 받고, 자기계발의 기회를 가진 계층으로서 재간꾼 흑인노예 negre a talents라 불렸다. 이들은 십장, 마부, 요리사, 집사, 간호사, 몸종, 가내 하인 등의 직업을 가졌다.23) 특히 대혁명 이후 1794년에 노예제도가 잠시 폐지되었을 때, 혁명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재간꾼 흑인노예들은 자유인으로 해방되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이미 섬에서 태어나 크레올어를 말할 줄 알고, 서양식으로 옷을 입은 기독교인이 된 흑인크레올이다. 반대로 후자의 그룹은 고된 장기간 여행 끝에 노예선에서 내린 굶주리고 벌거벗은 소위 ‘문명화가 덜 되어 보이는’ 노예들이라는 의미로 보살les Bossales24)이라 불렸던 흑인노예들이다. 이들은 주로 농장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노동력으로 사용되었기에, 벌판에서 일하는 노예라는 의미의 쟁기노예negre de pioche, 텃밭노예negre de jardin, 들판노예negre de champs이라 표현으로 불렸다.25) 크레올노예와 보살노예는 쇼당송의 표현으로는 noirs creoles/ noirs immigres로 구분되듯이,26) 다양한 구성원들의 이주에 따라 크레올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들 흑인간의 계층도 복잡하게 구분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다음 도표는 피부색과 자유인이 되는 비율간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도표1>] 1789-1792년 바스테르Basse-Terre의 노예와 자유인들의 피부색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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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1792년 바스테르Basse-Terre의 노예와 자유인들의 피부색27)

    도표에서 보듯이, 카프르는 혼혈이지만 피부색이 네그르와 가깝다는 점에서 자유를 얻는 수의 비율이 적은 반면, 물라토, 메티스와 카트롱은 피부색이 밝아지는 혼혈에 따라 자유를 얻게 되는 비율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도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물라토가 백인과의 혼혈을 통해 메티스나 카트롱이 되는 수치가 흑인과 혼혈이 되어 카프르가 되는 수치보다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라토가 흑인보다는 백인과의 결혼을 선호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혼혈을 통하여 자유인이 되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흑인들이 백인의 피부색에 집착하는 것이 백인들이 주입시키는 열등 콤플렉스에 갇혀 있었다기 보다는 노예라는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이와 같이 크레올사회는 색깔의 사회이다. 백인 지배자들이 만드는 무수한 혼혈을 지칭하는 표현들 속에서 타자와 우리를 경계지으면서 흑인들이 색깔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아페르간F. Affergan이 “상징적 분류classement symbolique”28)라고 지적하듯이, 앤틸리스에서 식민지 정복자들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피부색을 여러 가지 어휘로 세분화하였다. 달리 말하면, 피부색과 관련한 어휘가 실제 사람이 구분할 수 있는 피부색 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29) 이는 흑인들의 열등성을 강조하고 흑인들이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배 속에서 흑인은 표현형phenotype30)으로서 지각되는 피부색 때문에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갖지만 식민사회에서 끊임없이 피부색을 바꾸려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물라토와 백인에 가까워지고자 하였다. 파농Fanon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비유하듯이,31) 하얀 피부를 열망하는 크레올인들의 모습은 신체적 정신적 차원에서 식민적 상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어휘 분석 : 피부색깔로 명명되는 단어들

    “무어인과 싸우면서 혈통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 집착했던 이베리아 식민자들은 다른 종족과 피를 섞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32)는 점을 고려해볼 때,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인과 아메리카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명명하기 위해 ‘메스티조’라는 어휘를 발명했고, 이는 그들이 인종적 차이, 즉 피부색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하였음을 말해준다. 이후 프랑스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에 해당하는 ‘물라토’라는 어휘를 만들었다.

    16세기 유럽 식민지 확장이후 18세기 아프리카 노동력 착취에 이르는 동안, 피부색깔에 따라 ‘발명’된 일련의 단어들은 강한 내포적 의미를 갖는다. 사전 자료 조사에 근거해보면,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 정복이 앞섰던 이베리아인들의 이름붙이기는 그 의미의 확장과 축소를 동반하면서 거의 그대로 프랑스어에 차용되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출현하게 되는 주요 단어들, 특히 noir, nègre, métis, mulâtre, créole에 한정하여 이들 어휘의 사전적 의미를 토대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가 타자화하는 명명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어휘 분석을 위해서는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어휘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4가지 프랑스어 사전33)을 주로 참고로 하였다.

    3.1. noir 와 negre

    17세기 출판된 Furetiere 사전(1690년 출판)에서는 blancnoir는 단순한 물리적 심리적 흑백이거나 어둠과 밝음의 대립 개념일 뿐 사람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당시 흑인과 백인의 접촉이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일반인들에게 통용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18-20세기(1789-1960시기의 어휘수록) 프랑스어의 사용을 담은 Le Tresor 사전을 비롯하여,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전인 GLLF(1971출판)와 Le Robert(1993출판) 사전에서는 백인종의 남녀를 Blanc/Blanche로,34) 흑인종의 남녀를 Noir/Noire로 정의한다. Le Robert 사전에서는 16세기 흑인을 가리키는 명사 Noir(1556)와 백인종의 사람을 의미하는 Blanc(1545)이 출현한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16세기에 흑인을 의미하는 noir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아프리카 흑인 혹은 흑인노예를 의미하는 negre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는 점이다. negre는, noir와 마찬가지로 라틴어 niger에서 유래하는데, 15세기 흑인종의 사람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negro에서 16세기경(1529년)에 프랑스어로 차용된 단어이다.35) 여기서 우리는 스페인사람들이 발명한 negre를 프랑스에서 흑인노예를 대량으로 신대륙에 수입하던 시기에 동일한 의미로 차용하여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예로 끌려와 플랜테이션 농장이나 주인의 하인으로 쓰였던 흑인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noir와 달리, negre에는 항상 경멸적 인종차별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특히 negre blanc(백인증이 있는 흑인)이나 negre pie(얼룩배기 흑인)라는 표현은 당시 흑인들이 피부색의 농도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19세기에 흑인들이 말하는 부정확한 프랑스어를 의미하는 petit negre는 흑인이 쓰는 언어를 폄하하는 표현이다. negre의 파생어들도 점점 인종차별적 의미를 갖게 된다. 가령 여성형 negresse(1637)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하며, negre보다 경멸적인 의미를 갖는다. negrillon(onne)(1714)는 짙은 갈색빛 피부의 어린아이에게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명사 negro에는 negre 자체가 경멸적으로 느껴지면서 모욕적, 인종차별적 의미가 추가되었다.36)

    3.2. metis와 mulatre

    사전적 의미에서 프랑스어의 métis는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에서 차용되었다. 포르투갈어의 mestiço는 주로 브라질에서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을 가리키는 토착어였으며, 스페인어 mestizo는 스페인 인과 인디언 태어난 자식을 의미한다. 이는 17세기와 18세기 유행한 프랑스의 두 단어 meticemestice의 형태는 각각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에서 유래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어에서 métis는 좁은 의미로는 주로 백인과 유색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혹은 넓은 의미로는 두 종류의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1559)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띤다. 이러한 정의는 17세기 프랑스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사회가 인디언보다는 대량의 흑인노예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세대를 걸쳐 피부색깔에 따라 다양한 유색인들의 범주가 생겨났기 때문에 의미상의 확대가 일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식민사회의 혼혈 인종을 말할 때는 métis 보다는 백인과 흑인사이에서 태어난 메티스37)라는 의미의 mulâtre라는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métismulâtre를 포함하는 여러 인종의 혼합으로 태어난 자식들을 의미한다면, mulâtre는 메티스의 한 종류로 이해할 수 있다.

    mulâtre는 16세기에 포르투갈어 mulato(1524)에 -âtre 접사가 추가되어 차용되었다. 이때 mulato는 스페인어의 노새 혹은 잡종 동물을 의미하는 mulo에서 유래하며, 사람과 관련해서는 흑백혼혈인을 가리킨다. 이 의미가 그대로 프랑스어에 차용되었다.38) 여기서 주목할 것은 mulâtre가 동물의 잡종성에 비유할 정도로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혼혈아를 괴물적인 인종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métismulâtre든, 서인도의 섬 공간에서 유럽과 다른 인종간의 만남은 동등한 지위간의 아름다운 조우가 아니라 인종과 인종, 남성과 여성의 충돌과 지배였으며, 여기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에 태어난 불명확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피부색이 경제적 사회적 차별까지 상징하는 척도가 되어 사회구성원들을 분류하고 구별해 내고 있다.

    3.3. creole

    métismulâtre와 마찬가지로 인종간 혼혈을 의미하는 créole은 오늘날 생물학적 혼혈의 의미보다는 문화적 관점에서 크레올어 혹은 크레올문화, 파생어인 크레올리테créolité, 크레올화créolisation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어의 créole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스페인어 criollo(1598)에서 유래한다. criollo의 의미는 스페인 식민정복자들이 이 어휘를 발명했을 때는 혼종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에서 태어난 순수백인종의 스페인 사람’이었다. 이 정의에서 특이한 점은 스페인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이 스페인 땅이 아닌 다른 지역 태생의 동향인을 구별하기 위한 의미적 제한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의문은 본국과 섬이라는 출생지역의 차이를 구분하는 새로운 어휘의 발명이 왜 필요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어에는 두 인종의 혼혈을 의미하는 métismulâtre에 해당하는 어휘가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순수혈통의 문제가 아닌 다른 관점의 구별로 이해된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수입품이 아닌 해외 섬에서 생산되는 모든 생산물을 가리키기 위해, 가령 크레올 토마토tomate créole 혹은 크레올 암소vache créole와 같이 사용하듯이, noir créole이나 blanc créole은 어느 지역 태생인지를 구분하는 출신의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39) 블로흐와 바르트부르O. Bloch-W. Von Wartburg의 어원사전(Dictionnaire étymologique de la langue française)에 따르면, 이 criollo가 의미가 다양한 포르투갈어 crioulo에서 차용되었다. 즉 ‘브라질에서 태어난 메티스, 네그르’, ‘유년시절부터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 등을 의미하였다. 고대 포르투갈어에서는 닭에 관해 말할 때, 어디서 사온 닭이 아니라 집에서 태어난 토종의 의미가 있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스페인어의 criollo나 프랑스어의 créole에서 식민지는 크레올인들의 토착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단 포르투갈어에서 흑인 혹은 혼혈인을 의미하는 어휘가 백인이라는 의미로 스페인어에서 바뀌었다는 점이다. Littré 사전에서 여기에 대한 의문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어의 criollo의 기원이 명확하지 않으며 카리브해 지역의 어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 학술원에서는 앤틸리스의 정복자들이 스페인어의 criollo를 노예인 네그르들의 표현에서 차용하여 만들어 전파한 어휘라고 언급한다. 네그르들은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조국 기네Guinée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크레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를 스페인인들이 차용하면서 백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령 앤틸리스의 크레올사회를 이루는 크레올인들은 누구인가?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크레올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면, 이는 ‘인종 혹은 사람’이라는 범주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크레올은 백인일 수도 흑인일 수도 물라토일 수도 있는 크레올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종들을 포괄한다.40) 이베리아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식민지 초기에 명명한 크레올 사람들은 백인크레올Blanc créole, 흑인크레올Noir créole의 사전적 의미를 고려할 때, 유럽도 아프리카도 아닌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따라서 créole의 의미는 métismulâtre같은 인종적 개념보다는 출신지역 또 출신지역과 관련한 문화를 내포하는 의미로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créole은 인종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개념이다. 실제로 크레올사람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흑인, 백인, 물라토 모두를 가리키며, 크레올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에 다양한 지방들이 있고, 고유한 전통문화를 가령 브르타뉴문화, 프로방스 문화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처럼 크레올문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인종이건 크레올지역에 사는 사람은 크레올인이고 결국 이 지역에서는 크레올인이라는 정체성이 경계가 분명한 고정적 개념이기보다는 유동적인 개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노예제 이후 유입된 이주노동자인 인도인들이 쿨리coolies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자리를 잡고,41) 프랑스 기아나에 라오스 출신의 몽족이 크레올사회에 한 일원으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람의 이동과 이주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사회구성원의 포섭에 있어서 정체성은 재구성되고 있는 듯하다.

    3)이성형, 2003, p. 135 인용.  4)월터 D. 미뇰로, 김은중 옮김, 2013 참조.  5)Les Antilles라는 단어는 스페인 서부에 위치한 유령의 섬인 앤틸리아Antillia에서 유래한다. 앤틸리스는 대 앤틸리스와 소 앤틸리스로 구분된다. 대 앤틸리스는 카리브해의 4개의 큰섬(쿠바, 자메이카, 히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 포르토-리코에 해당하며, 소 앤틸리스는 버지니아섬에서 남부 그레나다에 이르는 많은 작은 섬들을 일컫는다. 프랑스령의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는 소 앤틸리스에 속한다. 참고로 용어의 번역과 관련하여, 프랑스어의 Les Antilles가 이미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앤틸리스로 표기되어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영어식 표기법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6)Robert Chaudenson, 1992. p. 93 참조.  7)여기서 사용된 용어 habitation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토지, 건물, 노예와 가축을 포함하는 경작지를 가리키며, 참고로 habitant은 이 경작지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다. Frédéric Régent, 2007, p. 341 참조.  8)물론 카리브해의 경우 일부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아라크족, 카리브족, 타이노족 등)과의 잔혹한 접촉으로 시작된 정착의 단계를 빠트릴 수 없다. 소 앤틸리스의 경우, 초기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전쟁 혹은 과도한 노동력 착취,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병원균과 열대병에 의해 사실상 모든 섬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Jean Benoist, 1972, p. 19 참조.  9)마르티니크의 경작지사회 Georges Daniel Véronique, 2013, p. 3 인용.   10)보니올에 따르면, 흑인법전 제정 이후 백인과 흑인간의 색깔의 편견을 만들게 된다. Jean-Luc Bonniol, 1992, p. 51 참조.  11)마르티니크의 플랜테이션사회 Ibid.   12)흑인법전의 의도는 백인주인과 흑인노예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백인 주인과 노예의 결혼을 금지하고, 여성노예의 자식은 주인의 소유로 함으로써, 흑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13)Frédéric Régent은 피부색에 따른 다양한 인종 표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혼혈의 정도와 상관없이 ‘흑인과 백인 조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개인’을 가리키기 위해 sang-mêlé라는 총칭적인 표현을 선호하였다. Frédéric Régent이 사용하는 sang-mêlé를 혼혈인이라는 표현으로 본고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14)Frédéric Régent은 대혁명 전후에 과들루프에서 수집된 혼인서, 유언장, 매매계약에 필요한 공증 자료들을 분석하여 사람들의 피부색과 법률적 지위 및 사회계층의 상관성을 증명하였다. 공증문서에는 주로 노예와 자유 유색인들을 가리키는 혼혈 카테고리를 nègre, nègre créole, câpre, mulâtre, métis, quarteron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었다. Frédéric Régent, 2001, p. 42. 본 도표에서 보는 1세대 백인과의 혼혈이 물라토, 2세대가 메티스, 3세대가 quarteron이다. 실제로는 3세대에 해당하는 tierceron가 있는데,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는 백인과 메티스의 혼혈의 3세대를 quarteron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백인과 quarteron 사이에서 태어난 mamelouk이 4세대가 되며, 다시 5세대는 café au lait, 흔히 petit-blanc이라 부르는 혼혈인 세대가 된다. Jean-Luc Bonniol, 1992. p. 80 참조.  15)상통J.-P. Santon에 따르면, 백인은 처음부터 자유인이기에 자유라는 의미의 수식어인 libre를 붙이지 않는다. 반면 유색인은 노예이거나 자유인일 수 있었다. 1833년 이후부터 유색인의 의미에 변화가 생기는데, 노예제가 붕괴되면서 노예와 (백인 혹은 유색의) 시민이라는 사회법률적 의미로만 구별하게 된다. 유색인은 혈통적으로 보면 조상들 중 흑인이 있는 비백인non-blanc을 의미하는 한편, 좁은 의미에서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반부터 ‘유색인’이라는 표현은 생물학적으로 흑인을 총칭하기 보다는 점차 물라토의 의미로 사용되고, 물라토와 비슷하게 중간계급에 이르는 네그르를 포함하는 의미로 넓게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유색인이라는 표현은 사회적 상승을 하고 있는 교육받은 물라토라는 의미, 즉 엘리트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유색인이라는 범주는 흑인 일반대중과 구별하여, 밝은 피부를 가진 교육받은 중간계층을 이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오면 유색인과 흑인 간에 뚜렷한 구분이 생긴다. Jean-Pierre Santon, 2001, pp. 54-55 참조.  16)농장에서 탈주하여 숲으로 숨어들어 은닉했던 흑인그룹이 있었다. 주로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에 많은데 이들은 누아르 마롱Noirs marrons이라 불렸다. marrons이라는 단어는 스페인어 cimarron에서 유래하며, ‘거주지를 이탈하는 사람, 말 등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유가 없는 노예들 중 감옥이나 주인을 피해 탈주한 이들을 마롱이라 불렀다. Jacqueline Zonzon & Gérard Proste, 1996, p. 55 참조.  17)시엘 아르 제임스 지음/우태정 옮김, 2007, p. 64 참조.  18)‘베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과거 부두에서 화물을 검역하던 '부두의 백인 Blancs du quai'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19)1797년 Moule, Morne-à-l'Eau의 꼬뮌에 정착한 첫 번째 대표자의 이름 Matignon-Delor에서 유래한다. http://www.tlfq.ulaval.ca/axl/amsudant/guadeloupe.htm  20)André Castaldo, 2007, p. 42 참조  21)Frédéric Régent, 2001, p. 43 참조.  22)Ibid., p. 42 참조.  23)유색인의 경우, 흑인노예보다 숙련 노동자로 일하는 비율이 더 높았고, 동일한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흑인보다는 혼혈인들을 선호하였다. 이는 백인이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적 심리적으로 그들과 우리라는 경계에서 ‘우리’에 가까운 그룹으로 인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직업 활동을 크게 세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다음 순서대로 백인피부색에 가까운 그룹이 주로 고용되기 쉬운 직업군이었다. 1. 주인의 집에서 가정 일을 돌보는 직업(가정부, 세탁부, 요리사, 가발제조공, 하녀 등), 2. 경작지의 관리자와 직공(경리,제당공, 식초제조공, 통제조공,...) 3. 부락의 직공(석공, 목수, 재단사...) Frédéric Régent, 2007, p. 47 참조.  24)Bossale이라는 어휘는 스페인어 bozal/negro bozal에서 유래하는데, 그 어원인 boza는 ‘짐승의 입을 막는 부리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 식민자에게 bozal은 마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를 말하지 못하는 이민족은 미개한 바바르barbare 라고 불렀듯이,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 일 년이 채 안된 노예를 이르는 표현이었다. 반면 대립적 개념으로 ladino는 충분히 언어능력을 갖춘 일년 넘게 일한 노예라는 의미였다. 이 표현이 프랑스어에 그대로 차용된 것이다. Robert Chaudenson, 1992, p. 86 참조.  25)Ibid., p. 115 참조.  26)마찬가지로 Frédéric Régent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을 흔히 기네흑인Nègre de Guinée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아프리카의 기네 출신의 노예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출신을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을 이르는 총칭적인 이름이다. 단순히 네그르라는 표현만으로 부르면, 이는 크레올인인지 아프리카인인지를 알 수 없는 포괄적 의미가 된다. Frédéric Régent, 2001, p. 42와 2007, p. 341 참조.  27)Fédéric Régent, 2001, p. 43 인용.  28)Francis Affergan, 2001, p. 37 참조.  29)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와 마찬가지로 당시 프랑스 식민지령이었던 산토 도밍고(오늘날의 아이티)의 예는 아주 흥미롭다. 산토 도밍고의 경우 백인과 흑인 그리고 혼혈인을 128개 어휘로 구분하였다. 당시 백인의 관점에서 유색인은 순수백인을 제외하고 순수흑인을 포함하여 127가지 혼혈인들을 의미한다. 유색인의 미묘한 차이를 세분화하는 아이티의 예는 혈통과 피부색을 결합한 구별 방식을 잘 보여준다. 시엘 아르 제임스 지음/우태정 옮김, 2007, p. 69 참조.  30)표현형이란 생물학에서 한 유전자형이 발현되는 개별적 형질들의 총체를 말한다. 『동아 프라임 불한사전』, 두산동아, 1998.  31)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2003 참조.  32)이성형, 2003, p. 135 인용.  33)다음 사전을 본문에서는 약식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Le Dictionnaire Universel d'Antoine Furetière (이하 Furetière) Grand Larousse de la langue française (이하 GLLF) Le Robert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langue française (이하 Le Robert). Le Trésor de la Langue française (이하 Le Tresor) Littré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 (이하 Littré)  34)백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blanc은 실제로 인종적 편견을 내포하는 의미를 사전 속에서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본 어휘 분석에서는 제외시켰다. 단 대백인과 소백인의 구분은 예외적으로 백인들 내부에서 타자화 하는 명명법으로 이해된다. 소백인이라는 의미의 petit-blanc은 경멸적 의미로 오세아니아 과거 식민지의 백인그룹을 말하여, 더 넓은 의미로는 식민지 백인 프로레타리아 그룹 혹은 빈민한 하류층 백인 그룹을 의미한다. Le Trésor 참조.  35)Le Robert 참조.  36)현재는 nègre의 경멸적 의미가 사라지고, 인종차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noir가 nègre의 단어를 대체하여 점점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흑인을 의미하는 형용사 표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다. 가령 race nègre(1814)은 오늘날 race noire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20세기 특히 흑인세계의 문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négritude(1933)라는 단어를 에메 세제르Aimé Cesaire와 셍고르Senghor가 사용하고, 20세기 중반 탈식민주의 운동으로 인해 문화적 특수성을 인식한 이후로는 인종차별적 의미로 nègr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회피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흑인들 스스로가 흑인의 문화와 정신에 대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적어도 흑인들 스스로가 nègre를 사용할 경우, 인종차별적 의미가 없다.  37)Furetière 사전에서는 이와 다른 정의를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mulâtre는 남아메리카의 흑인과 인디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métis는 유럽인과 인디언 혈통의 혼혈인으로 정의한다. 오늘날은 mulâtre는 métis와 동의어로서 더 많이 사용된다. Le Robert 참조.  38)Le Robert 참조.  39)이런 의미에서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프랑스어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크레올은 경멸적 인종차별적 의미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언어적 관점에서, 19세기 학문적으로 인종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크레올어가 식민지 흑인 혹은 물라토의 언어라는 인식과 함께 유럽어를 변질시킨 망가진 언어라는 경멸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최은순, 2009, pp. 218-219 참조.  40)우리나라 사전에서 créole의 개념 정의는 상당히 모호하다. 명사로는 ‘식민지 태생의 백인(특히 서인도제도)의 베케’라는 의미, 형용사로는 ‘백인이 식민지 태생의,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열대식민지 국가의, 크레올의, 크레올어의’라는 정도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서는 우리가 앞서 말한 흑인과 관련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단지 créole이라는 단어는 백인과 관련되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그 지역의 언어라는 의미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동아 프라임 불한사전』, 1998 참조.  41)1835년부터 인도인 계약노동제가 실시되고, 이후 백인과 흑인의 후손들 이외에 ‘쿨리’라고 불리는 혼혈 인도인이 생겨났다. 최근 인도양의 크레올지역에서는 모리셔스의 시인인 Khal Thorabally에 의해 쿨리튀드coolitude라는 새로운 정체성 담론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도의 이주노동자들이 크레올지역에 자신들의 음식문화와 카스트제도와 같은 고유문화를 이식시켜 크레올문화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사회의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우리는 크레올사회에서 소수자는 누구이며 또 그들은 어떻게 구별되고 명명되었는지를 인종관련 어휘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였다. 크레올사회는 인류 역사상 새롭게 만들어진 인종과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전대미문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크레올사회의 특수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각기 다수와 소수 혹은 주류사회와 이주사회 라는 대응관계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크레올사회는 이주사회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양상과는 다르다. 한편으로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노예를 지배하는 구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흑인노예가 기존 주류 사회로 편입하는 방식이 아닌 백인 지배집단과 함께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이러한 사회형성의 특수성으로 인해 식민사회는 혼혈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 형성 초기에 백인 지배계층이 소수였고 백인여성의 이주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인종 간에 혼혈은 불가피하였다. 따라서 흑인에서 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표현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플랜테이션 사회가 형성되는 시기 즈음에 흑인인구가 급증하면서 백인 지배자들은 다수의 흑인노예들을 소수화 하는 지배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식민지배자들이 백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물라토나 크레올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화된 노예들에게 자유의 기회를 주는 방식은 식민사회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백인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앞서 분석한 noir, nègre, métis, mulâtre, créole과 같은 용어는 어휘가 갖는 외연적 의미가 흑인의 열등성을 은유하는 내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차별과 편견의 서구적 시각을 보여주는 어휘들이다. 사전적 접근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어휘의 ‘발명’이라는 단계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식민지배자들의 명명법의 방식을 살펴보는 데는 그리 무리가 없어 보인다.

    피부색은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말하고 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크레올 사람들에게 하나의 유산으로 피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신체적 열등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크레올사회에서 이러한 열등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적 정체성 담론이 주창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제르Césaire의 네그리튀드와 글리상Glissant의 앙티야니테antillanité에서 베르나베Bernabé, 샤뫄조Chamoiseau, 콩피앙Confiant이 주창하는 크레올리테créolité, 가장 최근에는 인도양에서 시작되고 있는 쿨리튀드coolitude에 이르기까지 크레올사회는 이제 더 이상 외부로부터 타자화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스스로가 재구성하는 역동적이고 유연한 정체성의 공간으로 이해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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