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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Modern Control of Space and the British Empire’s Management of Irish Territory 공간의 근대적 규율과 영국 제국의 아일랜드 영토 경영
  • 비영리 CC BY-NC
ABSTRACT
Modern Control of Space and the British Empire’s Management of Irish Territory
KEYWORD
mapping , picturesque landscape , Anglo-Irish landed gentry , geometric mapping of space , Romantic mapping of space , colonization of space , Ireland
  • I. 들어가는 말

    공간은 그저 고정된 형태를 지니며 인간 밖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만나는 곳이다. 질서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지배와 종속의 변증적 역학이 작용하는 권력으로 충만한 곳이다.1 1750-1800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삼각측정법이라는 과학적, 수학적 측정법을 도입하면서 1800년에 이르면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고지대를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1마일 당 1인치 비율로 새로 측정한 지도들이 여러 지역별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면서“지도제작의 혁명”(cartographical revolution)이라 불릴 정도의 성과를 낸다(Harley 56). 영국은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Royal Greenwich Observatory), 경도위원회(Board of Longitude), 수로측량부(Hydrographic Office)같은 부서를 신설하는데 (Sorrenson 225), 특히 기존의 측량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1791년 독립기구로 분리하여 육지측량부(Ordnance Survey)를 조직하면서 좀 더 일관성있게 지도제작에 나선다. 프랑스가 1750년대 이후로 카시니 드 투리(Cassini de Thury)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주는 전국적인 규모의 지도 제작을 했다면, 영국에서는 윌리엄 로이(William Roy)를 중심으로 1784년부터 본격적으로 중앙정부가 주도하여 지도 만들기에 착수한다. 더 나아가 투리와 로이는 1783년부터 파리와 그리니치를 잇는 국제적 차원의 지형 측량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Widmalm 186-95).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이 삼각측량의 그물망으로 엮이게 된다.

    18세기 중반 이후로 본격화되는 이러한 지형의 기하학화는 공간에 대한 계몽주의적 프로젝트라는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일브론(J. L. Heilbron)은 18세기의 시대정신을“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은 물론 질서를 부여하며 체계화시키는”이른바“양화시키는 정신”(quantifying spirit))이라 규정하고 있는데(2), 우리는 이 개념을 공간에 대한 근대적 규율이란 측면에도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는 1792년 국제회의 석상에서“적도에서 극지대까지 도량형이라는 단일 언어”(language of weights and measures)를 사용하는“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Alder 326). 1886년『영국지형 조사』(The Ordnance Survey of the United Kingdom)라는 저서에서 토마스 필킹톤 화이트(Thomas Pilkington White)가 사용한 용어를 빌면, 공간을 재현하는데“동질화시키는 기하학적 측량”(one homogeneous piece of mensuration)이 유행한다(5). 수학적 엄밀함을 공간 재현방식에 적용한다는 면에서 지리적 지식의 등장은“뉴톤식 혁명의 일환”일 수 있다(Livingstone and Withers 2). 즉 과학적으로 좀 더 엄밀한 지도제작을 통해 공간에 대한 앎의 의지를 드러내는 지리학은 문예비평가나 역사가들이 흔히‘넓게 확장된 18세 기’(long eighteenth century)라고 부르는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를 아우르는 시기에 이뤄진 계몽주의 과학의 지적 전통에 속한다. 비록 근대 이전에 이미 톨레미 등이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재현하는 지도를 제작하였고, 기하학적 좌표 시스템을 공간에 부여하는 방식이 심지어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라도(Turnbull 15, 26), 서구사회는 18세기를 경과하면서 지도 만들기 기술을 자신들이 전유하면서 좀 더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공간 계몽에 나선다. 공간이 해독해야 할 대상으로 탐구되면서 지도제작은 인구조사, 도량형통일 정책 등과 함께 근대국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시화시키는 제도 권력”(regime of visibility)을 구현한다고 볼 수 있다(Branco 32).

    흥미로운 일은 지형에 대한 이러한 기하학적 보편화와 함께 유기적 총체화를 통해서도 공간의 질서를 추구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기하학적 공간규율과 비교하여 이를 낭만주의 공간규율이라 부른다면, 18세기말 이래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여행주의 담론들, 픽쳐레스크식 미학이론, 국립공원, 테마공원 만들기는 낭만주의 공간규율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세기 중반을 경과하며 관광산업이 유행하면서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한 레이크 디스트릭트 같은 지역은 중상류층 여행객들에게 그림같은 풍경을 제공하는 관광지가 되었듯이(Howkins 111-12), 낭만주의 공간 구성 원리는 근대에서 현대를 경과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지역적 특수성을 제거하고 보편화, 표준화시키는 기하학적 공간구성과는 달리, 낭만주의적 공간규율은 여러 공간구성 요소들을 포괄하여 총체화시키는 재현방식을 취한다. 즉 공간의 유기적 서열화를 추구한다. 이런 원리는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자연적인 지역성과 인위적인 국가 프로젝트(엔클로우저 등)간의 대립/조화, 근접법과 원근법이라는 관찰방식의 차이/통일, 숭고와 미라는 두 미적 범주간의 변증적 갈등/공존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알란 베이커(Alan Baker)는 수많은 비평가를 거론하면서 풍경(landscape)의 형성은 처음부터“자연적,”“물리적”대상이면서 동시에“문화·정치적,”“역사적”현상임을 강조한다(109-55). 근대이래로 사람들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멋진 경치(scenery)를 생산하는데 관심을 많이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근대적 공간으로서의“장소”(place)와 근대적 기획으로서의“공간”(space)이라는 분석틀을 제시하는 것은(Peet 61-62) 낭만주의 공간규율을 규명하는데 적절한 연구 방법은 아니다. 이미 자연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하는“장소”에도 유기적 총체화라는 이름으로 공간규율 권력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하학적 공간구성은 객관적 지리과학이고 낭만주의 공간구성은 주관적 인문지리라는 이분법은 이들 모두가 근대적 공간규율의 두 가지 형태임을 부각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핵심을 빗겨가는 분류방식이다. 데니스 코스그로브(Denis E. Cosgrove)는 풍경담론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투영되는 공간통제 전략이라고 정확히 진단하고 있으나 과학적 지리와 인문학적 지리의 근본적 차이를 주관주의 관점의 유무에 따라 나뉜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런 이분법은 마치 과학지리는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 객관적 지식인 것처럼 여긴다는데 문제가 있다. 기학학적 공간구성과 낭만주의적 공간구성은 모두 근대적 공간규율 방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굴절되어 있다. 기하학적 공간규율은 과학, 낭만주의적 공간규율은 그와 반대되는 예술, 아니면 전자는 자연 정복, 후자는 자연 보존을 추구한다는 이원주의 패러다임도 옳지 않다. 또는 전자는 자본주의/중상층/도시/문화, 후자는 전근대/귀족/농촌/자연이라는 구분도 올바르지 못하다. 전자는 규율, 후자는 거기서 벗어난 탈규범적 해방이라는 구분 또한 문제가 있다. 두 가지 형태 모두 근대적 공간 규율의 두 가지 축이다. 좀 더 엄밀히 얘기하면, 기하학적 규율과 낭만주의적 규율은 공간에 특정 형태로 질서를 부여하는 계몽주의 프로젝트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는 지역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표준화시키는 원리인 반면, 후자는 지역적 다양함을 포용하여 전체성의원리와 접맥하여 유기적 총체화를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다르다.

    근대사회 형성과 함께 등장한 이러한 공간 규율은 영국이 정복지에서 시행한 공간 통제에도 그대로 재현된다. 때로는 기하학적 지도제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낯선 땅에 대한 미적 전유를 통해 미지의 땅을 지배한다.

    먼저 정복지 영토에 기하학적 질서를 부여하여 공간을 식민화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인도의 예는 지리학적 지식이 공간식민화에 핵심적 기능을 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802년 시작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윌리엄 램턴 대령(Colonel William Lambton)과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는 인도대륙을 세로로 관통하는‘거대한 삼각측정 프로젝트’(Great Trigonometric Survey)를 주도한다.2 이들은 인도대륙 남단 케이프 코모린(Cape Comorin)에서 히말라야까지 인도대륙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거대한 경선”(Great Arc of the Meridian)을 완성한다(Keay 9). 이 선을 기준으로 가로로 이어지는 선으로는 동쪽으로 마드리스, 서쪽으로 맹글로우(Mangalore), 계속해서 서쪽으로 봄베이(Bombay)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캘커타(Calcutta) 등으로 이어지는 기하학적 그물망을 만든다.3 램턴 대령 후임으로 1830년 측량국장이 된 에베레스트는 1830-1832년에 램턴 대령이 인도대륙의 남쪽에 국한했던 측정범위를 인도 전역으로 확대한다(Edney, Mapping 250-60). 이때 삼각측정술은 인도에 대한“지리학적인 파놉티콘”(geographical panopticon)을 극대화시키기 위한“기술적 해결책”(technological fix)이 된다(Edney, Mapping 322). 따라서“거대한 삼각 측정술”은 지역적으로 산재한 다양한 부족 정치 집단, 종교, 문화(언어)를 통합하여 당시에는 낯선 단일 지역공동체인“인도”(India)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지리적 공동체의 형성은 공간에 대한 민족주의적 계몽으로 합리화되는 제국주의적 정복이다(Keay 82, 84).4 공간규율 영역에서도 영국인은 지도제작 능력이 있기에 자신들은“과학적, 계몽적, 민주적”이고 그렇지 못한 인도인은“비합리적, 신비적, 독재적”이라고 폄하한다(Edney, “Irony”41-42). 스팀엔진을 장착한 기차가 왕래할 수 있는 철도가 건설되는 것과 병행하여 지도제작은인도의 지역적 특수성을 제거하고 보편화를 통한 지배를 이루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다.5

    기하학적 지배와 병행하여 인도라는 낯선 자연에 대해 미적 전유를 통해서도 미지의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 정복지 자연을 멋진 풍경으로 탈정치적 치환을 하여 그것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램턴 대령과 에베레스트가 삼각측정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인도대륙에 기하학적 그물망을 부여했다면, 1784년 캘커타로 출발하여 1794년 스핏헤드(Spithead)로 귀국할 때까지 삼촌-조카 사이인 토마스 데니얼(Thomas Daniell)과 윌리엄 데니얼(William Daniell)은 처음엔 인도 북부, 그 다음엔 남부, 마지막으로 서부지역을 돌며 인도에 대한 미적 전유작업을 한다(Michell 11-18). 픽쳐레스크 미학에 영향을 받은 데니얼 팀은 지형 회화(topological paintings)를 통해 인도 거주 영국인과 런던 시장 모두를 위해 인도 풍경을 판매한다(Michell 19-20).

    본 논문에서는 아일랜드의 경우를 예로 들며 두 가지 형태의 근대적 공간 규율이 어떻게 영국의 정복지 자연에 대한 계몽에도 재현되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아일랜드를 선정한 이유는 공간의 계몽과 정복이 인도의 경우처럼 아일랜드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공간 지배를 위한 보편적 전략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공간의 식민화가 아일랜드라는 지역적 특질에 매개되어 나타난다는 사실 또한 부각하여 영국의 공간지배방식의 역사적 특수성을 아울러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인도 정복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16세기 초반부터 영국 왕이 아일랜드 왕을 겸하게 되면서 자매왕국(sister kingdom)이라는 형태로 식민화되어나간다. 공간의 기하학화와 공간의 탈정치적 미학화라는 두 가지 지배방식이 이 곳에서도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만, 영국정부는 그들이 이식한 앵글로 아이리쉬인이라는 정복지의 식민주의자와 연합하면서 이를 진행시킨다는 면에서 그 독특함이 있다. 17세기 중반 크롬웰의 정복이래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인들이 아일랜드로 대규모로 이주하면서 아일랜드는 인구 구성이나, 정치경제적, 종교적 측면에서도 빠른 속도로 영국화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정부와 이주민들은 군사적 목적 뿐 아니라 표준화된 세금징수 같은 통치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복지라는 낯선 공간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전국적 규모의 지도제작의 필요성을 제안한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영국정부는 19세기 초반 토마스 프레더릭 콜비(Thomas Frederick Colby)를 내세워서 본격적으로 지도제작에 착수하면서 아일랜드 전역을 기하학적 그물망으로 엮어 놓는다. 지도제작이라는 공간의 기하학화는 영토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위한 목적과 병행하여 통계, 과학, 테크놀로지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방식에 공헌한다. 즉 지도제작은 물리적 폭력을 통한 지배와 병행하여 과학-테크놀로지를 통한 사회통제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영국정부와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기학학적 지도제작을 통해 통치, 행정적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아일랜드 자연에 대한 탈정치적 미적 담론을 양산하는 이른바 문화적 지배를 강화한다. 특히 영국계 이주민들은 영국식 픽쳐레스크 미학을 자신들의 개인 소유지에 이식하여 공간의 영국화를 시도한다. 아일랜드의 거친 토탄 지역은 영국인의 전지적 관찰에 굴절되어 황량한 아름다움을 주는 곳으로 재탄생한다. 아일랜드 자연은 영국적 질서를 만나면서 그 픽쳐레스크적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본 논문에서는 공간의 기하학화와 미학화라는 두 가지 지배 방식을 통해 아일랜드라는 공간 식민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1많은 비평가들이 공간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논해 왔는데, 특히 후기구조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여 왔다. Murdock 1-25 참조.  2삼각측정의 원리는 간단하다. 되도록 언덕, 사원, 탑 등 관측하기에 용이한 위치(vantage point) 세 곳을 선정하여 그 곳을 꼭짓점으로 삼는다. 기선(baseline)이라 불리는 밑변—뱅갈로(Bangalore)는 이런 기선으로 기능함—의 길이를 재고 관측하고자 하는 지점으로 향하는 나머지 두 꼭짓점의 각도를 알면 밑변이 아닌 다른 두 변의 길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변의 길이를 측정하면 이를 다시 기선으로 삼아 새로운 관측지점을 설정하면서 동일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Keay 7-8).  3인도대륙 경선은 위도 24도 정도의 경선인데 25도를 웃도는 러시아 경선(Russianarc)보다는 짧지만 12도가 좀 넘는 프랑스 경선(French arc)이나 이보다도 더 짧은 잉글랜드 경선보단 훨씬 길다(White 52-53).  4램턴 대령의 경력은 계몽과 정복의 공모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인도에서 삼각측량 프로젝트를 주도한 그는 1799년 마이소전쟁(Mysore war)과 세링가파톰(Seringapatam) 점령이라는 정복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제국의 군인이다(Roy 26). 사실 지도제작 기술은 영국뿐 아니라 다른 유럽 열강들도 영토 확장을 위해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다음 문명과 과학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지도제작은 이집트에 대한 영토지배를 용이하게 했다. Godlewska 31-53 참조.  5인도의 철도건설과 영국의 인도 지배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선 Headrick 180-91 참조.

    II. 공간의 근대화―기하학적 공간규율과 낭만주의적 공간규율

    영국 제국의 공간 통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국의‘안’에서 형성된 두 가지 형태의 공간규율 유형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밖’에서 진행된 공간의 식민화는 영국의‘안’에서 이루어진 공간의 근대화 과정과 동시에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공간통제는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 틀을 지형에 부여한다. 이를테면, 당대 지도제작에 핵심적 원리인 삼각측량술에서 잘 나타나듯이 선, 각도, 삼각형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사슬구조와 위도와 경도라는 가상의 직선들을 공간에 부여하여 공간을 추상화한다. 이런 유형의 공간재현방식에서는 공간의 질적 특수성(토지개간의 정도, 토질, 삼림의 유무 및 차지하는 비율, 지리적 위치, 지질학적 특질 등)이나 그 공간에 연루된 문화적 요소들 간의 관계는 중요치 않고 공간은 추상화되고 보편화 된다. 공간이 기하학화될 때는 자연 대상도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여“천연자원”이 되는데, 예컨대 “수많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실제 나무들”이“어떤 부피를 지닌 재목이나 땔감을 의미하는 추상적 나무”(an abstract tree representing a volume of lumber or firewood)로 바뀐다(Scott 12).6 질적 특수성을 제거하고 양적 가치로 표준화,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자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내걸었던 구호를 빌자면“단 하나의 왕, 단 하나의 법, 단 하나의 도량형, 단 하나의 측정수단”이라는 기준을 정하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삼는다.7 기하학적 가치에 비중을 두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일관성, 표준화, 규율성이 다양함의 논리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계몽주의관을 드러내는데 이는 기하학적 공간구성과 잘 어울린다(Watson 100).8 즉 공간의 기하학화는 공간에 대한 계몽주의 프로젝트이다.

    낭만주의적 공간 통제는 근대적 공간 규율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초를 경과하면서 중산층이 서서히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에서 도시형성과 산업화를 주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연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750-1815년 사이에 엔클로우저가 가속화되면서 영국 중산층은 농촌풍경에 대한 미적, 문화적 발견에 관한 담론을 극적일 정도로 활성화한다(Bermingham, Landscape 10).

    다양성, 이질성, 대립을 극소화하는 기하학적 공간과는 달리 낭만주의 공간구성은 지형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공간 서열화를 통해 다양성과 총체성의 모순적 공존을 기본 원리로 한다. 17세기 중반까지는“직선, 직각, 장방형”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의 기하학적 공간구성이 영향력이 있었으나 18세기 초를 경과하면서 영국은 서서히 유기적“자연성”을 자신의 공간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시작한다(Busteed 176). 많은 비평가들이 기하학적 공간과 구분되는 낭만주의 공간규율에서는 곡선, 반-파노라마적(anti-panoramic) 근접 관찰, 또는 지역적 다양함이라는 개념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여긴다. 그러나 직선이냐 아니면 곡선이냐, 파노라마적 비전이냐 근시적 비전이냐 아니면 보편화/일반화냐 특수화/개별화냐 라는 이원적 패러다임은 미적 공간 구성을 이해하는데 부분적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그 본질은 아니다.9 낭만주의는 반파노라마적 근시적 관찰과 파노라마적 원시적 관찰, 지역성과 총체성, 특수화와 일반화 사이의 갈등에서 후자를 제거하고 전자의 개념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대립적 요소의 공존 그 자체를 추구한다. 낭만주의 공간 구성에서는 근시적 지역성을 원근법으로 총체화시켜 구성요소들을 공간적으로 서열화하며 삼차원적 깊이를 심화시킨다. 예컨대 18세기 후반이래로 증가하는 픽쳐레스크 풍경화나 관광주의적 서사에서 보듯이 낯선 자연에 대해 전, 중, 후경 등 원근법을 통해 공간에 대한 유기적 서열화를 꾀한다. 픽쳐레스크 미학원리에는 낭만주의 공간 규율의 논리가 배어 있으므로 이를 예로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흔히들 픽쳐레스크는 비평적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음에도“불규칙, 다양함, 소멸, 황량함”을 그 특징으로 규정한다(Copley and Garside 3). 하지만 이런 정의로는 픽쳐레스크가 숭고(sublimity)와 미(beauty)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미적범주임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유브데일 프라이스(Uvedale Price)는 픽쳐레스크의 위상을“숭고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중간지점”(a station between beauty and sublimity)에 있다고 말한다(68).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 도“숭고만으로는 어떤 대상이 픽쳐레스크적이 될 수 없고”“어느 정도 미와 결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Three Essays 43). 간단히 말하면 숭고를 미화하는 것이 픽쳐레스크라고 할 수 있다. 자연그대로의 거칠고 변화무쌍한 숭고한 자연이 총체화의 논리와 접맥하는 과정에서 미적으로 변형된다. 즉, 픽쳐레스크 미학은 숭고와 미가 서로 아이러니한 긴장을 이루는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기 대표적인 픽쳐레스크 미학가 프라이스, 길핀, 워즈워스를 예로 들면 이들 모두 지역적인 다양함과 총체성, 숭고와 미사이의 긴장의 미학을 발전시킨다. 주목할 만한 것은 프라이스, 길핀, 워즈워스 순대로 총체성의 원리를 더욱 강조하여 근접적 관찰과 원근법적 조망 사이의 모순적 긴장은 더욱 두드러진다. 픽쳐레스크가 지닌 이런 역설의 미학을 부각하기 위해 이들의 미학관을 간략히 살펴보자.

    프라이스는『픽처레스크에 관한 에세이』(Essays on the Picturesque, 1794)라는 저서에서 자연의 개선자(improver)는 부분에 집착하는 대신“풍경의 전체적 맥락”(the whole range of scenery)을 관찰하여“더 높은 질서“(higher order)를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개선의 과학”(science of improvement)을 주장한다(10, 12). 실제 자연의 구성요소들을“분류하고, 선택하고, 결합하여”(5) “수많은”“다양성들”(4)을 만듦과 동시에“복잡한 배열”(intricacy, 21)이라는 총체성의 원리를 동시에 염두에 둔다. 따라서 자연을 관찰할 때 프라이스는“원거리”와“근거리”에서 관찰한 풍경들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길 바란다(Daniels and Watkins 22). 길핀은 총체성의 원리를 프라이스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조한다. 『와이강 관찰기』(Observations on the River Wye, 1783)에서 길핀은 와이강가에 있는 구드리치 성(Goodrich-castle)을 관망하는데, “틀에 박힌 직선”(formality of lines), 예컨대 건축물에서 규칙적 패턴을 나타내는“삼각형 모양의 박공벽”이나 ”토지를 사각형이나 장방형으로, 아니면 수학적으로 매우 엄밀한 형태로 분할하는 것”(8, 33, 82), 또는“지나치게 동질적인 것”(too much sameness) 대신에 다양성과 불규칙성을 선호하는데(41), 전체성의 원리를 고려하여 구성 요소들이 관찰지형(area), 차폐물 역할을 하는 전경의 틀(front-screen)과 좌우 틀들(side screens)이“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Observations on the River Wye 18). 길핀은 공간 전유과정에서 전체적 조망의 중요함을 프라이스보다 더 염두에 둔다. 워즈워스에 이르면 자연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와 총체적 관찰과의 역동적 긴장은 더욱 중점적인 화두가 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여행기』(A Guide through the District of the Lakes)라는 산문에서 그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좀 더 질서정연하게 관망”(more orderly arrangement)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감시탑 역할을 하는 그레이트 그레벌(Great Gravel)이나 스카펄(Scawfell)정상에 올라가 랭데일(Langdale)에서 에너데일(Ennerdale) 방향으로 바라보는 마치“바퀴통에서부터 뻗은 바퀴살 같은”(like spoke from the nave of a wheel) 파노라마적 비전, 더 정확히는 바퀴살의 반 정도 폭으로 관찰하는“반 바퀴 비전”(half-wheel vision)을 제시한다(II: 171, 173). 얼핏 보면 파노라마적, 기하학적 관찰방식을 강조하여 지역적 다양함을 상대적으로 덜 고려하는 듯 보이나 워즈워스의 궁극적 목표는 근접적 지역성과 원근적 전체성간의 이상적 결합을 추구한다. 마이클 윌리(Michael Wiley)는 워즈워스가 풍경을 전유하는 방식이 1793년 당시 육지측량부 지도제작자 윌리엄 머지 대령(Colonel William Mudge)이 삼각측정을 위한 꼭짓점으로 활용한 블랙 콤(Black Comb)정상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적 관찰방식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143-76).10 하지만 머지 대령이 추구하는 공간의 기하학적 재편성과는 달리 워즈워스는 원심적으로 펼쳐지는 지역적 다양함과 구심적 총체성간에 변증적 결합을 소망하는 낭만주의 공간 구성을 더 선호한다. 길핀 또한 지나치게 높거나 낮지도 않아서 미적으로“즐거움을 주는 거리”(pleasing distance)에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Observations on the River Wye 16), 워즈워스의 경우가 총체적 조망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하다. 예컨대, 스위스에 있는 14,000피트(약 4267 미터)내지는 15,000피트(4572 미터)나 되는 알프스 산정보다는 최대 3000피트(약 914 미터)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픽쳐레스크식 아름다움을 유발하기에 더 낫다고 한다. 이렇게 적절하게 높이 선정이 이루어지게 되면 알프스 풍경이 주는 통제할 수 없는“숭고함”과는 달리 영국의 자연은“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게 된다(II: 233-34). 공간에 대한 민족주의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이런 비교를 통해 워즈워스는 다양한 자연의 구성요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체적 조망의 중요성을 누구 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관찰방식의 측면에서 보면 픽쳐레스크 미학은 근접적 다양함과 원근적 총체성간의 긴장관계를 통해‘다양성 속에 질서’라는 영국식 풍경 미학을 보여준다. 이런 낭만주의 공간미학은 지역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민족적인 것) 또는 자연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에 모순적 통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또는 정치·경제적 실효성 상실과 미적 재건,11 과거의 보존과 변화를 향한 바람의 공존, 숭고(sublimity)와 미(beauty)사이의 이상적 조합 찾기, 아니면 전근대적 무질서와 근대적 질서사이의 결합을 추구할 수도 있다. 픽쳐레스크 미학은 기하학적 공간 구성처럼 지역적인 것, 과거가 되어 소멸하는 것, 무질서한 것을 억압하여 배제하는 형식이 아니라 이를 포괄하여 미적 총체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기하학적 공간규율과 낭만주의 공간규율은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근대사회 공간규율 방식의 두 가지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전자는 주로 정치, 경제, 행정적 목적을 지니지만 후자는 문화적이며 미적 통제를 담당하는데, 이 두가지 공간규율 모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규율방식의 역학구도를 바꾸면서 서로 갈등하고 상생하는 문화·과학 기술이다.

    6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표준화와 양적 추상화는 방언이 민족 언어로 대체되고, 지역마다 다른 결제 수단을 갖던 봉건제의 화폐유통 방식에서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로 결제수단이 바뀌게 되는 사회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Scott 31).  7위톨드 쿨라(Witold Kula)는 이 문구를『측정수단과 인간』(Measures and Men) 22장 제목으로 삼고 측정수단의 표준화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85-227쪽 참조.  8스미스는 예컨대 방안에 그림이 여러 점 있을 때 각 그림들의 프레임이 동일하거나 그림의 주제가 유사하면 더 좋다고 여긴다. 그는 또한 방안에 그림 한 점이 풍경화라면 다른 것도 유사한 종류의 풍경화를 배열하는 게 낫고, 종교와 관련된 그림이면 다른 것도 동일 내용이 아니더라도 그것과 연관된 그림이 되면 더 보기 좋다고 말한다(179).  9분석 텍스트와 다루는 주제가 비평가 마다 편차가 있음에도 이처럼 극단적인 이원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풍경담론의 예는 적지 않다. 스티븐 프릭케트(Stephen Pricket)는 캔들-윈더미어 철도 건설에 드러난 직선의 힘과 워즈워스가 지켜내고자 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나타난 곡선의 힘이란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낭만주의적 관광주의를 논한다(69-84), 스티븐 데니얼스(Stephen Daniels)는 지도제작에 내포된 파노라마적 비전과 픽쳐레스크 회화에 배인 근시적 비전간의 대립에서 전자의 논리가 점진적으로 후자에 스며드는 과정을 콘스타블과 터너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 “Revisioning”61-72). 앤 버밍햄(Ann Bermingham)은 일반화/추상화와 특수화/개별화의 대립이라는 분석틀로 18세기 말 영국 풍경화를 논한다. 존 로버트 코젠즈(John Robert Cozens)와 토마스 힘(Thomas Heam), 랜서렛 브라운(Lancelot Brown)을 한 쌍으로 하고 유브데일 프라이스(Uvedale Price),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과 윌리엄 마샬 크레그(William Marshall Craig)를 다른 쌍으로 하여 전자는 원거리에서 전체를 조망하여 자연을 일반화/추상화시키는 프랑스적 공간지배 방식을 선호하고 후자는 근거리에서 자연대상의 개별적 특수성을 부각하는 영국적 공간이해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 “System”77-101). 알런 허킨스(Alun Howkins)는 반자본주의적 공동체와 자본 친화적 엔클로우저 라는 개념을 사용해 1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토리적 세계를 담은 회화와 엔클로우저를 수용하는 위그적 풍경화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룬다(97-114).  10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기하학적인 공간규율이 낭만주의적 공간규율보다 더 우세한 경향이 있다. 심지어 풍경담론이라는 형태로 공간을 재현하는 경우에도 기하학적 논리가 각인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존 콘스타블(John Constable)이 1802년과 1805년에 그린 풍경화를 예로 들면, 1802년『건힐(Gun Hill)에서 본 데드햄 계곡 (Dedham Valey)』으로 명명된 그림에선 독자의 시선을 유도하는 나무와 강이 있는 전경과 교회 같은 후경이 조화를 이루지만, 동일 장소에서 본『스타우워 계곡』(The Valley of the Stour)이라 명명된 1805년 그림에선 전경, 후경 등 공간의 서열이 사라지고 파노라마적 비전이 두드러져 근접적 관찰과 그로 인해 유발되는 다양함의 요소가 억제된다(Daniels, “Re-visioning”62-66). 우리는 전기와 후기의 기법이 다른 콘스타블의 풍경회화를 통해 기하학적 공간재현 방식이 얼마만큼 만연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 공간규율방식이 사라지는 운명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1“농촌 빈곤의 미학화”는 경제적 가치는 소멸하지만 미적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예가 된다(Bermingham, Landscape 75).

    III. 공간의 영국적 변형―아일랜드의 예

    영국 본토에서의 공간 통제 방식은 정복지에서도 반복된다. 지도 제작이나 자연풍경 담론에는 이러한 공간 식민화의 논리가 특히 잘 드러나 있다. 영국은 1745년 발생한 마지막 자코바이트 반란을 진압한 후 반란에 적극 가담한 스코틀란드 고지대(Highlands)부족들을 관리하고 국가치안을 견고하게 하려고 전국적규모의 지도 제작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는데, 1747년 당시 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군대에 속해 있던 부 병참감(deputy quatermaster general) 데이비드 왓슨(David Watson)과 그의 부하 윌리엄 로이(William Roy)가 주도 하여 본격적으로 지도 제작에 나선다(White 7-11). 공간의 식민화는 이러한 지도 만들기 외에도 공간의 탈정치적 미학화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알렉산더 포우프(Alexander Pope)는「윈저 숲」“( Windsor Forest”)이라는 시에서 윈저의 풍경을“다양성속의 질서”(order in variety)로 규정하여 영국적 자연의 정체성으로 삼는다(37). 이 논리가 정복지 자연에 적용되면 구심적 질서는 영국의 공간이 되고 무질서한 다양함은 타자의 공간이 된다. 경제적으로 유용한 땅은 영국적 자연이 되고 쓸모없고 황량한 땅은 정복지의 자연이 되어 제국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영국‘안’에서 진행된 두 가지 형태의 공간 규율과 영국‘밖’에서 이루어진 제국의 영토경영 정책의 관계를 아일랜드를 예로 들어 자세히 살펴보자. 아일랜드 자연의 식민화를 규명하기 위해선 그 정복과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450년대 까지만 해도 영국 왕이 통치하던 패일(Pale)지역과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가 관할한 얼스터(Ulster)와 오몬드(Ormond)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반 이상이 아일랜드인 소유였는데, 16세기 말-17세기 초를 경과하며 프로테스탄트 잉글랜드인이나 스코틀란드인의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토착민과 이주민(planter)과의 인구 비율은 눈에 띄게 역전된다. 1610년 이주법령(Articles of Plantation)으로 얼스터에서 500,000에이커 정도나 되는 양질의 땅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정착자에게 귀속되면서 주로 카톨릭 믿는 아일랜드 토착민과 대립하게 된다(Johnson 41,43,46).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지배가 확고하게 되는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사건은 단연코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복이다. 크롬웰은 1641년 아일랜드 반란과 프로테스탄트 학살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1649년 아일랜드를 정복한 후 아일랜드 카톨릭 젠트리층을 클레어(Clare)와 코넛트(Connaught)로 이주시키고 나머지 지역은 전쟁에 참여한 영국 군인과 정착민들에게 분배하는데 군인들은 상당수 땅을 되팔아 그 이윤을 취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도 아일랜드 토착민이 믿는 카톨릭보다 이주민의 종교인 프로테스탄티즘이 대세가 된다. 결국 전체 아일랜드 면적에서 총 1천백만 에이커에서 2천만 에이커 땅이 강탈되어 영국계 이주민들이 소유한 땅은 41%에서 78%로 급상승한다(Johnson 55-57).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적 혈통을 지니지만 동시에 아일랜드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자기 모순적 정체성을 형성하지만 궁극적으로 친영방적 성향을 띤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이들은 비록 영국 본토의 농업자본만큼 대단한 열정으로 토지에 자본을 투자 하지 않더라도 아일랜드 근대화를 이끄는 지도계층이다.12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영국 정착민들은 아일랜드에서 사회적으로 모순적인 위상을 지니면서 영국으로의 종속을 주도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의‘자매왕국’이면서 동시에 식민지로 간주되듯이, 이곳에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영국계 아일랜드인은 원래 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이래로 본국과 이해관계를 달리하기 시작한다는 면에서“혼혈적 민족주의”(creole nationalism)을 발전시켰다(Bell 19).13 이들은 영국적 혈통을 지녔지만 아일랜드의 게일릭 문화에 우호적인 존재론적 모순으로 인해 영국정부와 때론 연합하고 또 때론 갈등한다.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이들의 모순적 정체성은 영국 제국에 단호히 반대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로 나가기보다는 친영방적인 방향으로 향한다.

    아일랜드는 결국 토질에 따라 상대적로 양호한 북,동부, 그 다음으로 무난한 중부, 아주 열악한 남, 서해안 지역으로 삼등분되는데 양질의 토지는 앵글로 아이리쉬인들이 차지하는 구조가 정착한다. 아일랜드라는 공간의 식민화의 측면에서 보면 지역적으로 상이한 토지 생산성의 정도와 정복지 영토 소유의 영국화/식민화의 정도가 서로 맞물리게 된다.14

    이렇게 정복한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지도제작을 통한 체계적인 지형정보 수집과 정복지 풍경의 탈정치적 미적 전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제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간의 기하학적 식민화를 먼저 알아보자. 이미 16세기 말부터 영국 절대왕정은 아일랜드 봉건제를 해체하고“아일랜드 재건”(forging of Ireland) 작업을 한다.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같은 이들은 아일랜드를“빈 공간”(empty space) 또는“타블라 라사”(tabula rasa)로 규정하며 아일랜드의 지역적 특수함을 제거하고 영국적인 정체성을 폭력적으로 이식하려 했다(Smyth 1-9). 콜비는 19세기 초 본격적으로 아일랜드 지형 조사(Ordnance Survey of Ireland)를 주도하며 아일랜드 영토의 기하학화에 큰 힘을 쏟는다.영국에서는 일찍이 1791년에 육지 측량부(Ordnance Survey)가 조직되었으나 아일랜드에는 18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런 중앙의 관할부서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들이 영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지도제작이 필요함을 요구하여 아일랜드 지도 그리기가 본격화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콜비는 1824년에 시작하여 1846년에 마무리하기까지 아일랜드 측량팀을 이끈다. 1824년부터 아일랜드 전 지역을 시찰하며 뛰어난 측량 기술자 드러몬드(Thomas Drummond) 등으로 팀을 꾸려서 1825년 밸패스트(Belfast) 근처 디비스 산(Divis Mountain)을 삼각점으로 하여 1827년에서 1828년 사이에 영국에선 제일 긴 라우 포일(Lough Foyle)지역에 기선(baseline)을 만들고 1846년에 드디어 국토 전역에 대한 측량을 완성하기에 이르는데, 아일랜드는 영국이 정복한 영토 중엔 제일 먼저 나라 전체가 기하학적 삼각 그물망으로 뒤덮힌다(Andrews 40,41,48). 콜비는 1824년 당시 영연방의 다른 지역에서 대세였던 1마일 당 1인치의 비율을 1마일 당 6인치로 표준화하고 다양한 측정방식을 삼각측정법으로 통일한다.15 정복지인 아일랜드에 대한 지적정보가 좀 더 세밀해졌다는 면에서‘지리적 파놉티콘’의 정도가 심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량 결과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가 1801년이래로 정치적으로 결합했듯이“두 왕국이 지도제작에서도 하나가 되는”성과를 이룬다(Andrews 24).

    지도제작은 아일랜드에서 군사적 점령과는 구분되는 지식, 과학,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지배방식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군사적”차원인“국가안보나 영토 확장 못지않게”철도, 운하 건설 등 공공사업이나 세금징수 같은“시민 행정적(civil)”성격이 두드러진다(Doherty 14, 34). 예컨대, 콜비가 주관하는 아일랜드 토지 측량국 차관인 토마스 라콤(Thomas Larcom)은 지도제작과 함께 치안판사의 수, 경찰병력, 군주둔지 인원(병력 수, 해안경비대원 수 등),주민 불만사항들, 범법자 처벌상황, 노동자의 고용과 실직상태, 보험부서의 근무현황 등 각종 통계적 정보를 수집한다(Seymour and Andrews 92). 이는 지도제작을 통해 지질학적, 기후적 통계 같은 과학적 정보를 축적할 뿐 아니라 정치, 경제, 행정관련 정보 수집을 통해 통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전국적 규모의 지도제작으로 영국정부와 영국계 아일랜드인은 세금 징수 등 행정 장악력과 인구관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 나간다. 그렇다고 물론 물리적 지배방식이 사라짐을 의미하진 않는다. 콜비가 아일랜드 지도측량 기술자를 물색할 때 영국의 군사적 팽창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공병대원 찰스 파슬리(Charles Pasley)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아일랜드에 대한 물리적 지배의 성격을 분명 띈다(Hewitt 243-45).그러나 콜비의 지도제작은 이런 고전적 지배방식과 함께 근대적 형태인 지식-기술-과학에 기반한 통치라는 측면이 있다.

    기하학적 공간규율과 병행하여 낭만주의 공간규율 또한 영국제국이 행하는 공간 통제의 또 다른 줄기를 형성한다. 영국여행객들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자연에 대해 탈정치적 미학화라는 공간재현에 참여한다. 기하학적 공간규율과 미적 공간규율은 공간의 식민화란 면에서 공생관계에 있다.

    먼저 영국 여행객들이 아일랜드 자연을 어떻게 재현하는지부터 살펴보자.1800년대 이후로 출판된 아일랜드 여행담에서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아일랜드 여행안내서: 더블린과 위크로우』(Hand-Books for Ireland: Dublin and Wicklow, 1853)에서 헐(Hall)부부는 위크로우 지역을 여행하면서 픽쳐레스크식 관찰방식이 어떠한 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일랜드는 무엇보다 우선 황량하고 미개척의 자연이다. “풀이 거의 없어서 몇 마리 되지도 않은 양들이 목초지 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토탄 지역으로 덮힌 자연그대로의 미경작된 곳“이다(99). 그런데 헐부부가 바라보는 이런 무질서한 숭고의 땅은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재탄생한다. 즉 이 영국 부부의 시선은“드높고 황량한 산들 사이로 숲으로 화려하게 우거져서 풍요롭고 비옥한 계곡”과“그 계곡 사이로 가장 낭만적인 강이 흐르며 그 흐르는 강 곳곳에 끝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쏟아지는 폭포수”로 향한다(99). 이들 관광객은 결국 위크로우를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마무리한다(99). 슐레이터(Eamonn Slater)는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헐 부부가 좀 더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에서 바라볼 때 위크로우가 숭고함(sublimity)과 아름다움(beauty)이 융합된 멋진 풍경이라 평하는 것은 위크로우의 황량함과 풍요로운 아름다움의 결합이 일종의 픽쳐레스크식 전, 후경 풍경과 원근법을 연출하여 미적 조화를 이룸을 의미한다( “Contested Terrain”27). 아일랜드의 황량한 무질서는 영국 부부의 전지적 관찰자 시선을 거치면서 픽쳐레스크식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더 나아가 영국인들은 아일랜드 풍경이 영국에 그 뿌리를 둔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 즉 그들은 아일랜드 자연이 영국에 기원한다는 수사를 즐긴다. 『재미난 편지형태로 쓴 아일랜드 여행기』(A Tour through Ireland in Several Entertaining Letters, 1748)에서 런던 서적상 윌리엄 루퍼스 체트우드(William Rufus Chetwood)는 킬케니 카운티(County Kilkenny)를 방문했을 때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영국 자연에서 근거한 것인 양 우긴다. 체트우드가 동행하는 몸종인 야곱의 말을 빌면 아일랜드는 우리가 왔던“햄프셔는 아니더라도 잉글랜드 어딘가의 풍경을 훔친 듯하다”(have stole this place out of England somewhere, but not out of Hampshire, Williams 135에서 재인용)고 말한다. 영국의 자연을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곳으로 설정한 측면에서 일종의“귀향 효과”(homecoming)(Hughes-d’Aeth 105)를 유발한다.16

    영국 여행객 뿐 아니라 아일랜드‘안’에서 지배계층이 된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그들 영지(demesne)를 픽쳐레스크화하는데 대단한 열의를 보인다. 이들은 1750-1840년 사이에 자기들 영지에 이전의 엔클로우저에 스며든 기하학적 공간변형과는 다르게 픽쳐레스크식 아름다움을 주는“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naturalized) 풍경공원(landscape parks)을 조성한다(Reeves-Smyth 201-203). 픽쳐레스크 미학은 앵글로-아이리쉬 젠트리 계층이 소유한 영지를 정원으로 가꾸는 핵심적인 공간 구성원리가 된다. 슐레이터는 18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픽쳐레스크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들의 영지는“대략 800,000에이커 또는 아일랜드 전체 토지의 4%가 된다”고 한다(235). 예컨대 방만한 지주와 달리 아일랜드 태생 영국계 젠트리인 제임스 컬드웰(James Caldwell)은 아일랜드 자연의 경제적, 미적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퍼머네그(Fermanagh, Ulster)에 위치한 관할영지를“자연스런”영국식 풍경으로 개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Busteed 191-92). 헐 부부가 로우 브레이(Lough Bray)에 위치한 클램프턴(Crampton) 영지를 묘사하는 부분에도 영국에서 이주한 정착민들의 공간철학을 읽을 수 있다. 영지 밖에 있는 거칠고 무질서한 아일랜드의“숭고한”늪(peat bog)이 전체적인 조화의 측면에서 영지 안에 꾸며진 과학, 문명, 질서로 표현되는 영국식“아름다움”에 의해 절제되어 픽쳐레스크식 미적 서열이 부각된다(Slater 236).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는 그들이 정착한 땅을 “미니영국”(Little Englands)으로 꾸미고 싶어한다(Slater 238).

    영국식 공간구성 방식을 따라야 할 규범으로 여기는 것은 아일랜드 농지 구획방식에도 나타난다. 18세기에 아일랜드 토지 개간의 문제는 미와 실용성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논의가 많이 되었다. 영국인이나 친영적 아일랜드인이 보기엔 크래천(clachan)이라는 아일랜드식 소부락, 런데일(rundale)이라 부르는 아일랜드식 공유지, 국토의 1/7을 차지하는 토탄 늪지대, 목초지, 미개척지 등 아일랜드의 전통적 자연 자체는 무질서이며 혼란이기에 이를 없애고 엔클로우저해야 한다고 여긴다.17 그런데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표준화된 토지 구획을 하기 보다는 픽쳐레스크적 미를 가미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Williams 127-46). 영국은 1750년대와 1850년대 사이에 실시된 의회가 주도하는 엔클로우저(parliamentary enclosure)를 통해 개방지, 불모지, 공유지등을 구획할 때 산사나무를 일렬로 늘어 세워 생울타리를 만들면서 그 나무들 사이에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심어 변화를 주었다(Hoskins 151-63). 아일랜드도 영국의 자연을 모방하여 서로 다른 나무들—물푸레나무, 느릅나무, 산사나무 등—로 헤지로우를 하여 변화를 주게 되면, 헐벗은 도랑, 흙더미, 돌벽으로 이뤄진 단조롭고 표준화된 프랑스식 공간 구성보다는 더 낫다고 여긴다(Williams 132-33). 물론 냉정하게 보면, 다양함의 미적 원리를 가미하는 것은 엔클로우저에 배인 기하학적 원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인이나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들은“다양성 속의 질서”를 자신들이 바라는 공간 정체성으로 삼는다.

    여기서 기하학적 공간규율과 픽쳐레스크식 공간규율은 서로 대립하지만 공생 관계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48년에 이미 체트우드는 크롬웰(Cromwell)이 정복 후 건설한 도로와 9피트 높이의 돌로 구획된 2000 에이커 정도의 엔클로우저된 농지가 주변의 픽쳐레스크 경관과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142). 포스터(John Wilson Foster)라는 비평가의 말을 빌자면 한편으론 영국계 아일랜드인이 토지를 소유하고 개간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아일랜드 황무지를 미학화하는 과정이 병행한다(422-23). 경제적 개간과 자연의 미학화라는 미적 개간이 서로 공존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필자가 논하고 있는 개념으로 표현하면, 토지 생산성 제고를 위해 벌이는 엔클로우저라는 토지의 기하학화와 아일랜드 자연의 낭만화가 서로 경제적/실용적 가치의 측면에서 대립하지만 실은 서로 보완하면서 제국의 공간규율의 효율성을 높인다.

    더 나아가 아일랜드 자연을 픽쳐레스크적으로 기획하는 일은 군사적 정복과정과도 서로 공존할 수 있다. 1748년에 체트우드는 이미 블래니(Blarney)에서 코우크 카운티(County Cork) 지역을 관찰하며 과거 정복의 역사과 현재의 미적 아름다움의 상호 공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블래니는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윌리엄 왕에 맞서 싸웠으며 제임스 2세를 지지하여 잉글란드 프로테스탄트 계승자에 반기를 들었던 역사를 담은 곳이다(Chetwood 96). 하지만 이런 지역이 이젠“부드럽게 돌기한 언덕, 나무숲, 관목, 목초지, 옥수수밭”으로 이루어져, “다양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전망들”을 자아내는 미적 공간으로 비쳐진다(96). 정치색이 제거된 블래니라는 지역은 아름답기만 하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정치, 군사적 정복과 탈정치적 미학화는 대립하는 것 같지만 서로 공존한다.

    19세기 이후에는 자연의 황량함이라는 형태로 아일랜드의 미학화 과정은 지속된다. 18세기 말과 19세기를 경과하면서 아일랜드 자연에 대한 미적 변형 담론은 더욱 더 증가하게 된다. 영국계 아일랜드인 뿐 아니라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우호적인 이들이 아일랜드 자연의 정체성을 황량한 아름다움으로 규정한다.레이디 모건(Lady Mogan)으로도 알려진 시드니 오웬슨(Sydney Owenson)은 『야생의 아일랜드 소녀』(The Wild Irish Girl, 1806)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황폐한 아일랜드의 픽체레스크식 경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 한다. “대담한 모습을 보이는 변화무쌍한 경관, 놀랄만큼 넓게 펼쳐진 구름에 쌓인 산,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고 깊은 베일에 쌓여 있는 계곡,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는 미개척지인 황야, 끝없이 펼쳐진 늪지대”는 픽쳐레스크적 풍경을 즐기는 여행객에겐“멋들어진 기쁨”을 준다고 말한다(23-24).이런 공간 미학은 19세기말, 20세기초까지도 계속된다. 싱의“아란 섬”과 예이츠의“이니스프리”풍경묘사에서 보듯이 이들은 1840년대 대기근과 인구이탈로 인해 불모지가 된 땅을 황량한 아름다움으로 변형한다(Foster 422).

    영국인들이 영국의 자연을 아일랜드가 본받아야 할 기준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1600-1800년 사이에 영국 모험가들과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 토속 참나무의 상당수를 베어 아일랜드가 무삼림지역이 되게 한 장본인이다(Williams 129). 더 나아가 1800년 즈음엔 잉글랜드 본토도 고작 1/8 정도만이 삼림지역으로 남아 다른 지역의 풍경과 비교했을 때 미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Williams 131). 사실 영국관광객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경제적 생산성과 픽쳐레스크적 미가 공존하는 이상적 자연을 마치 자신의 속 성으로 규정한 다음 아일랜드가 거기에 못 미친다고 불평하는 꼴이다.

    12아일랜드 지주의 이주와 이들의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노력에 관해서는 Proudfoot 219-33 참조.  13영국계 아일랜드 젠트리인 컬드웰(James Caldwell)은 스코트랜드에서 이주한 후 아일랜드 정체성을 지녔지만 친영국적인 정치 성향을 지닌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집단이라 여기지만 유화적으로 대하는 아일랜드 하층 카톨릭 차지농과 물론 구분되지만 영국 태생 부모세대와도 구별되어 모순적 자기정체성을 지닌다(Busteed 174-202).  14전근대(early modern)시대부터 영국인, 스코틀랜드인의 정착이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어 정치적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하고자하는 “분리주의 의식”(separatist consciousness)이 강한 얼스터 같은 북동부 지역에는 £5000 이상 영지의 65%가 라인스터(Leinster) 북쪽과 얼스터(Ulster) 동쪽에 밀집해 있으며 지주들이 토지경영에 직접 관여한다. 먼스터 동부와 라인스터 북쪽 지역에서는 농지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경영, 생산을 토착 아일랜드인에게 맡겨서 문화적으로 여전히“게일계 아일랜드인들” (Gaeric Irish)이 많다,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식민화가 덜 진행된 리머릭(Limerick), 티퍼러리(Tipperary), 웩스포드(Wexford) 등은 이곳에 상주하는 토지소유자나 근대화된 경영차지농이 거의 없고 토지 가치도 낮으며 토지소유 대신 소유 분절화가 심한 지역인데 카톨릭을 빠르게 수용한다. 가장 열악한 곳은 서쪽 해안지역에 위치한 다니걸(Donigal), 메요(Mayo), 크레어(Clare), 케리(Kerry)인데, 토지 가치가 너무 낮아 지주의 영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들—맨션, 별채, 정원, 공원, 마을, 읍내—이 거의 없다(Hughes 140-42, 146). 이처럼 동부로 갈수록 토지가치가 높고 정치, 경제, 문화적 성향에 있어 친영국적인 경향을 띠는 현상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예컨대 토지구획에 국한하여 말하면 라인스터와 먼스터 동부지역에 위치한 잘 구획된 대규모 농지와 코넛트와 먼스터 서쪽 지역에 있는 가지런하지 못하게 산재한 소규모 농지 사이엔 큰 대조를 보인다. Aalen and Whelan 137쪽 도표 참조.  15아일랜드에서 행한 6인치 지도 제작은 지적측량이 미처 실행되지 못한 다른 지역 예컨대 랭카스터와 요크셔, 스코틀랜드 일부지역이 6인치 비율을 따를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다(White 67,77). 6인치로 통일되는 과정은 White 75; Andrews 24 참조.  16“귀향효과”라는 용어는 토니 휴즈 디 애스(Tony Hughes-d’Aeth)가 흄 니스벳(Hume Nisbet)이 묘사한 호주 자연을 평하면서 한 말이다. 니스벳은 언어-회화적 기법(word-painting)으로 호주에 위치한 밀네 만(Milne Gulf)의 자연 경관을 다음과 같이기술한다: “옅은 잿빛의 기운이 만의 부드러운 표면 위에 드리워지니 마치 스치는 바람에 물결이 살포시 이는 호수와 같다. 영국 북동부 지역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에 있는 더웬워터 호수(Lake Derwenwater)와 바로우데일(Borrowdale)을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 . .”(Hughes-d’Aeth 105에서 재인용).휴즈 디 애스는 니스벳이 호주의 밀네 만을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두 지역에 비유하는 것은 영국의 자연을 타자의 공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기에“귀향 효과”(homecoming effect)를 노린 것이라고 말한다(105).  171600-1840년 사이에 엔클로우저를 포함하여 아일랜드에 진행된 농촌근대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대해선 Aalen 100-109 참조. 지역별로 상이한 토지구획 현황에 대해선 Aalen and Whelan 134-44 참조,

    IV. 공간 통제 넘어서기

    콜비가 주도하는 기하학적 측량이 한창일 때 이를 지켜보는 토착 아일랜드인은 지도, 과학, 테크놀로지, 계몽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영토 정복의 본질을 거의 본능적으로 간파한다. 데리 카운티(County Derry)의 드루머초스(Drumachose)지역을 조사하던 한 측량기사는 아일랜드 토착민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 구절에는 지도제작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영토에 말뚝을 박는 영국 측량기사들에 대한 토착 아일랜드인들의 두려움과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아일랜드주민들은 영국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기하학적 그물망을 덮어씌우기 위해 강제로 인위적인 말뚝을 세우는 짓을 제국주의적 야심과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하지만 토착 아일랜드인의 삼각측정 프로젝트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는 정치적 종속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19세기 아일랜드에서는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도제작술을 저항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테크놀로지로 적극적으로 사용한 예가 있다. 서구에서 지도제작술을 배워 자기들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데 사용한 시암(Siam)의 경우는 지도라는 과학기술이 본질적으로 지배의 도구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시암은 서구가 지도라는 형태로 공간을 기하학화하여 정복지를 관리하려고 할 때 정복의 위협을 받는 나라의 입장에서 바로 그 테크놀로지를 통해 제국의 공간 정복에 맞선 사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39년 이후로는 태국(Thailand)이라 불리는 시암이란 나라에서는 사람들이“지도위에 표현되는 시암”(siam-on-the map)이라는 지오바디(geo-body) 개념을 통해 태국 민족주의(Thainess)을 형성한다(Winichakul 17). 시암왕국의 몽쿠트(Mongkut)왕은 마치 서양의 계몽군주처럼 지리과학같은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으로만 표현하는 서구의 재현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영토를 스스로 그리려고 노력을 한다. 시암정부는 1880년 인도 해안에 대한 삼각측정을 완성하기 위해 왕궁에서 몇 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방콕의 신산이라 여기는 골든 산(Golden Mountain)과 최대 불교 사리탑이 있는 프라 파솜세디(PhraPathomchedi) 두 고지대에 측정 지점을 설치하고 싶다는 제안을 영국으로부터 받았을 때 국가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지역을 개방하라는 이러한 무례한 요구가 영토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감지하지만 수락을 하게 되는데, 이는 삼각측정술을 습득해서 시암도 자국의 지도를 스스로 제작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Winichakul 119-22). 19세기말 시암은 북쪽으로 영국령 버마(훗날 미얀마), 남쪽으론 영국령 말레이시아, 동쪽으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둘러싸여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난립하고 있는 부족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이리 저리 얽혀진 상태였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암은 내적으로 국가 행정의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밖으로는 외세에 맞서 자국의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적 지리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절실했다. 시암은 서구에서 수입한 지도제작술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구열강으로부터자신을 지키는 테크놀로지로 활용하는데, 에드니는 이를“제국지도의 아이러니”(the irony of imperial map)라고 말한다( “Irony”44). 즉 삼각측정에 토대를 둔 근대적 지도제작은 서구 열강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기술이 시암에서는 영국 제국에 맞서는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계몽적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면에서 지도라는 과학기술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앞서 인용구에 언급했듯이 아일랜드인이 느끼는 두려움은 시암의 몽쿠트처럼 적극적인 독립의지를 보이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분명 수동적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최소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몽이 정복과 밀월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면에서 과소평가할 만한 일은 아니다.

    공간의 기하학화에 대한 거부감뿐 아니라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이 의도하는 영토의 탈정치적 미학화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헐 부부가 쓴 아일랜드 여행담에는 토착 아일랜드 농민이나 하층민이 영국의 픽쳐레스크식 공간 규율에서 일탈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헐 부부가 글랜덜로우(Glendalough)를 방문했을 당시 관광가이드 역할을 하는 아일랜드 토착 안내인은 이 영국 관광객 부부가 드러내는 픽처레스크식 자연관과는 다르게 그 곳을“성 케빈의 삶과 연관시켜 정신적, 상징적 측면”을 부각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Slater, “Reconstructing”242). “아일랜드 풍경을 구전적 방식으로 해석”(oral interpretation of the Irish landscape)하여 미로같이 복잡하게 얽힌 문화적, 정신적 차원의“집단적 경험”을 표현한 것이므로 픽쳐레스크적 공간 전유방식에 위배되는“반-픽쳐레스크적”(non-picturesque), “반 시각적(non-visual)”풍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Slater, “Reconstructing”242; “Contested Terrain”47, 48).18 아일랜드 토착 안내인은 헐 부부처럼 자연을 전지적으로 응시하며 자연에 대한 파놉틱한 지배의지를 보이는 관찰자가 아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이란 프레임의 안에 있는 존재이다( “Contested Terrain”47). 이들의 반-픽쳐레스크식 자연관은 영국인과 영국계 아일랜드 정착인의 픽쳐레스크 자연관과 충돌한다. 시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런 구전적 풍경관은 영국에서 온 관광객이나 이주민들이 바라는 아일랜드 자연의 미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선의 욕망이 될 수 있다.

    필자는 픽쳐레스크식 공간 통제에 맞서는 반픽쳐레스크 미학에 대한 이해를돕고자 뉴질랜드 경우를 들면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아우구스투스 얼(Augustus Earle)이 그린“베이 오브 아일랜드를 원거리에서 보기”(Distant View of the Bay of slands, New Zealand, 1827)라는 그림에서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인(Maori)이 어떻게 영국제국의 공간규율을 벗어나고자하는 시도가 가능한 지를 잘 보여 준다. 프란시스 파운드(Francis Pound)의 해석에 의하면 그림의 가운데에 정지한 채 흰 모자를 쓰고 원거리를 응시하는 인물은 낯선 뉴질랜드 자연을 픽쳐레스크라는 서구적 프레임으로 가두려는 전형적인 유럽 관찰자인데 그의 관찰방식은 마오리인에게는 사실“수입된 관습”(imported convention)일 뿐이다(12). 왜냐하면 전, 중, 후경에 대한 원근법적 구성, 근거리에서 점차 원거리로 이동하는 선의 움직임, 시선의 경계를 나타내는 사이드 스크린이 존재하는 픽쳐레스크식 서구 풍경미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의 그림에는 이처럼 여러 구성요소들을 구심화하여 총체화시키는 픽쳐레스크 미학 원리에 반발하는 탈중심적 움직임이 존재한다. 토마스 미첼(Thomas Mitchell)은 얼의 그림이 나무로 울창한 숲 대신 조각한 인물상을 배치하고, 흑백의 단조로움을 번갈아 배열하고, 중경에는 카누 같은 웅덩이를 그려 원근법을 약화시키고, 관찰자에게로 향하는 마오리인의 시선과 목적지로 향해 멀어지는 마오리인들을 병치하여 픽체레스크에 배어 있는 총체적으로 감시하는 전지적 관찰자의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해석한다(24-27). 미첼이 말한 시선의 복잡함은 서구가 자연을‘소유적’으로 관찰하는데 맞서 시선을 탈중심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반-픽쳐레스크 자연관은 근대적/제국주의적 공간 규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안으로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저항적 포스트 모던 공간 재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8슐레이터는 글랜덜로우에 대한 아일랜드 토착민의 반응을“Contested Terrain” 45-50과“Reconstructing‘Nature’”242-43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픽쳐레스크적,”“반시각적,”“구전적”풍경해석은 여기서 비중 있게 다루는 개념들이다.

    V. 나오는 말

    지도제작을 통한 공간의 기하학화는 얼핏 보면 탈정치적이고, 중립적이며 과학적 관찰로 비쳐 질 수 있다. 하지만 지도 그리기는 과학과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자연에 가해지는 공간 통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지도제작의 저변에는 정복지를 제국의 손길이 닿아야 할 빈 공간, 무질서한 자연으로 보면서 기하학적 질서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1824년부터 콜비가 주도한 아일랜드 육지측량은 1마일 당 6인치의 비율로 삼각 측정하여 당시주류를 이루었던 1마일 당 1인치 지도 보다 훨씬 더 자세한 공간 정보를 담아 공간 장악력을 높였다. 콜비의 측량 프로젝트는 과학, 테크놀로지, 통계에 의한 근대적 형태의 지배를 아일랜드에 실현시키는데 일조한다.

    공간에 대한 미적 전유도 낯선 지연을 통제하고자 하는 제국의 시선이 스며든다. 영국인 여행객이나 영국계 아일랜드 지주의 예에서 보듯이, 이들은 본국의 픽쳐레스크 원리를 토대로 미적 차원에서도“미니 영국”만들기에 열중한다. 특히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은 그들 특유의 존재론적 이중성—영국적이며 아일랜드적인 속성의 모순적 공존—으로 인해 아일랜드에서 영국식 픽쳐레스크 미학을 발전시킨다. 거칠고 투박한 아일랜드 토탄 지대는 친영방적 시선으로 바라보니 제국을 구성하는‘다양성속의 질서’의 일부가 된다. 잉글랜드에서의 픽쳐레스크 미학이 아일랜드에선 황량함의 미학으로 거듭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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