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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Study of Dorothy Wordsworth’s Later Conversation Poetry 도로시 워즈워드의 후기 대화시 연구*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 Study of Dorothy Wordsworth’s Later Conversation Poetry
KEYWORD
Dorothy Wordsworth , the conversation poem , self-effacement , poetic identity , gender discourse
  • I. 들어가는 말

    1990년대 이후 낭만주의 연구의 큰 방향성 중 하나는 빅토리아(Victoria) 시대 이후에 문학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당대의 여성 작가들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재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기에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의 영역을 확장했던 많은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 중에서 특히 도로시 워즈워드는 현재까지의 여성 낭만주의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문제인 남성 낭만주의와 여성 낭만주의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작가이다.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 세계는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와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와의 대화적 관계 속에 놓여 있고, 이 관계 속에서 이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창작된 작품들이 어떤 특질을 공유하고 또 어떤 측면을 변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집중적인 비평적 관심을 모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

    여성 낭만주의 비평의 선구자 역할을 한 마가렛 호먼스(Margaret Homans)와 앤 멜러(Anne Mellor)는 오랫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의 성취를 논의하기 위하여 정전(canon)화된 남성 낭만주의 작가들과 대별되는 이들의 특징을 강조한 바 있다. 호먼스는 라깡(Lacan)의 언어 이론을 여성주의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라깡의 정신분석학에서 중심이 되는 아들의 경험에 대비되는 딸의 경험에 대해 서술한다. 호먼스에 의하면, 상징계(the symbolic order)에 들어서면서 어머니와의 유대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들과 달리, 딸은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 상징적 언어(symbolic language)와 더불어 오이디푸스 전 단계(preoedipal stage)로부터 이어져 온 “글자 그대로의 언어”(literal language)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호먼스는 여성적 언어는 비유적(figurative)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이고 명확한 특질을 가지고 있고 장르의 측면에서 살피자면 시보다는 산문에 어울리는 언어라고 결론짓는다(Bearing 13-16). 앤 멜러는 호먼스처럼 정신분석학적인 이론을 내세우지 않지만,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호먼스와 매우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즉, 멜러는 남성 낭만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공상적이고 초자연적인 경향을 띠는데 비해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은 모방 미학(mimetic aesthetics)에 근거한 사실주의와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A Criticism” 45).

    호먼스와 멜러의 이론은 새롭게 발굴된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 이들의 성취를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당대 문단의 상황 속에서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재고하는 데 있어서는 몇 가지 불만족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여성의 언어 사용을 직접적이고 명확한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주의적인 표현 양식이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고유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사실상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의 작품 중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시보다는 산문이라는 결론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많은 여성 낭만주의 작가들이 훌륭한 산문을 창작했고 당대의 엘리트 문화를 주도했던 남성 작가들과는 다른 종류의 성취를 이룬 것이 사실이지만, 성(gender)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궁극적으로 시와 산문 사이의 장르적 구분으로 전화되기에 이르는 것은 지나치게 당대 문단의 상황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도로시 워즈워드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역시 여성 낭만주의의 성취를 시보다는 산문에서 찾고자 하는 비평적 흐름에 따라 그녀의 시보다는 일기(journal)로 대표되는 산문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로시 워즈워드의 일기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은 그녀 나름의 예술적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예전에 그녀의 일기가 단순히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 일종의 배경 지식을 제공해 주는 자료로 취급되던 상황과 비교한다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녀의 시에 대한 관심이 이에 비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렇게 산문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이 모아진 것과 더불어 그 동안의 도로시 워즈워드 비평을 요약해 주는 경향은 그녀의 작품 세계가 당대 남성 낭만주의의 부정적 특징으로 흔히 지목되는 유아적(唯我的)인 면을 비판하거나 보완해 주는 면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도로시 워즈워드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주로 “자기 말소”(self-effacement)라는 개념을 큰 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듯하다. 영국 낭만주의의 역사에서 도로시 워즈워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선도적으로 제기해 온 연구자인 수전 레빈(Susan Levin)이 말하듯이, 그녀는 “통상적으로 겸손에서 나오는 항변을 훨씬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재능을 폄하하며”(4), 이런 경향은 산문과 시를 포함한 그녀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윌리엄 워즈워드를 위시한 당대의 남성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종종 나타나는 자아도취적 측면 때문에 최근 들어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면, 이런 비평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공동체와 외부 세계에 대한 세밀한 애정을 표현하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도로시 워즈워드의 “자기 말소”적인 경향을 높이 사는 비평가들은 낸시 차도로우(Nancy Chodorow)나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등의 여성주의 심리학 이론에 근거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어머니로서의 역할 수행에 관심을 두는 차도로우의 이론은 여성들이 공동체 내에서 관계 중심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 주는 것에 주목하면서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투과성이 있는 자아 경계”(permeable ego boundaries)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93). 캐롤 길리건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여성들의 성장 과정과 그에서 유래하는 관계성의 양상을 살피면서 남성들의 행위가 개인화(individuation)와 개인적 성취를 목표로 이루어진다면 여성들의 행동 유형은 주로 사랑과 보살핌에 기반을 둔 타자와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17).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이어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에 나타난 “자기 말소”적인 특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은 생태주의적인 입장에서 그녀의 작품에 접근하기도 한다. “녹색 낭만주의”(Green Romanticism)라는 개념을 처음 제기한 조나단 베이트(Jonathen Bate)로부터 시작하여 칼 크뢰버(Karl Kroeber)와 제임스 맥쿠식(James MaKusick) 등의 낭만주의 연구자들은 낭만주의 시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생태 비평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 논의한 바 있고, 이들의 저서들에서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은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케네스 세벨리(Kenneth R. Cervelli)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생태학』(Dorothy Wordsworth’s Ecology)에서 이전의 생태 비평가들이 그녀의 중요성을 충분하게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자아의 돌출적인 노출 없이 자연세계와의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시로 흔히 거론되는 「혹스헤드에 떠도는 섬」(“Floating Island at Hawkshead”)에서 주변의 다른 생명체들을 지탱해 주면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작은 섬의 모습 은 공동체와 자연 세계 속으로 자신을 완전히 내어 놓은 여성 작가 도로시 워즈워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일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징은 여성주의 비평가인 멜러에게서 “유동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자아”를 훌륭하게 체현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Romanticism 156), 생태 비평가인 세벨리 역시 「혹스 헤드에 떠도는 섬」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도로시 워즈워드의 “자기 말소”적인 경향이 그녀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큰 특징이며 장점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외부 세계와 공동체를 중심에 둔 인식과 글쓰기를 실천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거의 부정하다시피 했던 과정은 결코 일관되게 행복하거나 편안한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녀의 시들, 특히 도로시 워즈워드가 병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인생의 후반기에 창작된 시들 중에는 때로 자신에게 부여된 삶과 글쓰기의 소극적인 방식에 대한 자의식, 그리고 그에 대한 조심스런 문제 제기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특히, 주로 남성 작가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던 도로시 워즈워드의 경우, 선험적으로 규정된 여성적 글쓰기의 영역 내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데 만족해야 했던 당대의 상황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창작 역량을 스스로 제한하도록 이끌었고 이런 삶의 과정에 대한 자기 평가는 그녀의 후기 대화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 대화시라는 시 형식은 우선 도로시 워즈워드가 조망하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대화시에 주목하는 것은 이 시 형식을 창안했던 그녀 주변의 남성 시인들인 코울리지와 워즈워드와의 대화적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도 유효한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도로시 워즈워드에 대해 그 동안 축적되어 온 비평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녀의 후기 대화시를 살피면서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당대의 글쓰기 공간에 대한 그녀의 문제 의식, 그리고 그 공간에서 여성 시인으로서 스스로의 창조성을 구현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 재고해 보고자 한다. “자기 말소”적인 자아의 부인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 세계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같은 글쓰기는 한편으로 그녀의 선택이기보다는 당대의 여성 작가로서 외부적으로 부과 받은 조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본 논문의 전반부에서는 「내 조카딸의 문집을 위한 시」(“Lines intended for my Niece’s Album”)와 「무정형의 운문」(“Irregular Verses”)을 중심으로 여성으로서의 삶과 글쓰기에 대한 도로시 워즈워드의 인식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그 후에 본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조애너 H에게 이야기하는 시」(“Lines Addressed to Joanna H”)와 「내 병상에서의 사색」(“Thoughts on My Sick-Bed”)을 중심으로 그녀의 시에서 오빠인 윌리엄 워즈워드와의 대화적 관계가 전개되는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도로시 워즈워드의 창조적 역량이 새롭게 발현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II. 여성 문인의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

    윌리엄 워즈워드가 시인으로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보냈던 1790년대와 1800년대에 도로시 워즈워드는 시보다는 주로 산문을 통해서 자연 경관과 공동체에 대한 섬세한 문학적 인식을 표현한 바 있다. 그녀의 『그래스미어 일기』(Grasmere Journals)는 오빠인 윌리엄 워즈워드와 함께 하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관찰한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세밀하고도 애정 넘치는 기록을 담고 있고, 이 일기와 윌리엄 워즈워드의 정전화된 시들 사이에 놓여 있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은 이미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기간 동안에 도로시 워즈워드가 창작한 시들은 주로 자신의 조카인 어린이들을 청자로 하여 자연과의 친화적인 관계를 가르치고 정서적 안정감을 부여하기 위하여 쓰여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시적 화자는 어린이들과 자연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전통적인 자장가 형식과 유사한 작품 구성을 통해서 청자인 어린이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효과적으로 확립해 가는 면모를 보여 준다.

    반면 18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다양한 형태의 시를 창작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들 중의 많은 수는 당대에 젊은 여성들이 일종의 기념품(keepsake)으로 간직하기 위해 구성했던 “문집”(album)에 수록하기 위해 쓴 작품들이다. 이 당시에 젊은 여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문집에 포함된 많은 시들이 주로 그 문집의 주인공인 여성에 대한 찬사와 가벼운 농담들을 담고 있었던 데 비하여, 도로시 워즈워드가 주변 여성들의 문집에 담기 위해 창작한 작품들에서는 이와 상당히 다른 특징들이 자주 발견된다. 레빈이 잘 정리하듯이, 젊은 여성들을 청자로 한 도로시 워즈워드의 시에서는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상황을 탐색”(124)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곤 하며, 이 때 젊은 여성들의 현재 모습은 시인의 과거를 상기시켜 주고 그에 대한 기억을 복원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생을 통해 축적된 여성적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비슷한 경험을 앞두고 있는 자신의 청자와 더욱 심화된 정신적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여러 여성들의 문집에 수록된 도로시 워즈워드의 시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그녀가 자신의 조카딸이며 윌리엄 워즈워드의 딸인 도라(Dora Wordsworth)의 문집을 위해 창작한 「내 조카딸의 문집을 위한 시」이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문집의 표지로 채택된 초록색이 지니는 함의에 대해 사색하면서 이 당시 그녀의 글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젊음과 노년, 불멸성과 변화, 그리고 자연과 인간사 사이의 대조를 바탕으로 한 시상을 전개한다.

    초록색이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자연의 왕성하고 역동적인 힘이 젊은 여성인 도라 워즈워드에게 기쁨과 삶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문집의 초록빛 표지에서 역설적인 슬픔을 발견한다. 이는 더 이상 녹색의 빛깔을 띠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문집이라는 기념품이 전제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에 대한 전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문집에 글을 수록한 문인들이 멀지 않은 미래에 무덤 너머에서 교훈을 전달하게 될 것임을 감지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젊은 여성인 자신의 조카딸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지된 시간의 한 점처럼 이 초록빛 기념품을 간직하게 될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이 문집이 “변화무쌍한 세월 속에 변하지 않고 남아서”(Through changeful years unchanged shall stand, l.32) “젊은 가슴의 희망들”(hopes of youthful hearts, l.33)과 “밝고 예지적인 계획”(bright visionary scheme, l.34)을 “천상의 꿈”(a celestial dream, l.36)을 담은 “생생한 빛깔”(vivid hues, l.35)로 언제까지나 전달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문집이 앞으로 지니게 될 불멸성에 대한 인식은 이 지점에서 도로시 워즈워드에게 시쓰기에 대한 극단적인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당대의 계관 시인의 딸이라는 문단에서의 위치에 걸맞게 도라 워즈워드의 문집은 이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하였을 뿐 아니라 후에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과 아놀드(Matthew Arnold) 등 빅토리아 시대 문인들의 시들까지도 사후적으로 포함하게 된다.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문집의 높은 위상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이 문집의 저자들 중 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앞에 놓고 당대의 여러 여성 시인들이 종종 표현한 것과 같이 스스로의 “부족함”(inadequacy)에 대한 고통스런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대목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성을 보전하는 문집 속에서 시인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할 수 없다는 자괴감을 표현한다. 그녀의 삶과 글쓰기가 타인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은 윌리엄 워즈워드의 명성에 따라 부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일 뿐이며,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후에 실제 도라 워즈워드의 문집에 수록된 이 시의 판본에서 43행의 “그대 부모의 이름”이라는 구절을 “그대 아버지의 이름”(thy Father’s name)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이 일생 동안 오빠의 창작 과정에 보조적인 존재로 살아 왔던 과정에 대한 자의식을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게 된다.

    「무정형의 운문」은 도로시 워즈워드가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누었던 제인 폴라드(Jane Pollard)의 딸인 줄리아 마샬(Julia Marshall)을 청자로 하고 있는 시로, 이 작품 속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당대의 여성 작가가 직면하고 있었던 상황을 시와 산문이라는 장르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여 준다. 시의 첫머리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시를 써 달라는 줄리아의 요청을 받고서, 그녀는 시라는 장르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유를 제인 폴라드와 자신이 공유했던 예전의 시간을 회상하는 가운데에서 찾으려 한다.

    여기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시를 장식적인 요소와 연관시키면서 산문이 지니는 소박하고 단순한 특질이 과거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소녀적인 상상, 그리고 그런 상상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교우 관계의 형성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12행에서 언급하는 “박차”나 “고삐”는 시 쓰기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감정적이고 형식적인 과장이나 절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도로시 워즈워드는 소녀시절 자신이 품었던 표현의 욕구가 이런 예술적 가공의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잠시 후 19-20행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소박함이 우리의 변함없는 주제였고,/ 어떤 예술적 노력도 우리의 계획을 장식하지 않았다”(Simplicity our steadfast theme,/ No works of Art adorned our scheme,—)는 것이다.

    호먼스는 도로시 워즈워드가 이 부분에서 시와 진실 사이에 잘못된 대립을 설정하고 따라서 시 쓰기에 대한 열망을 지워 버린다고 평가하지만(Women Writers 68), 사실 여기서 시와 대립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소박함”(simplicity)이다. 당대의 문단에서 “시”로 규정되던 작품들이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규범적이고 형식적인 예술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다면, 그녀가 절친한 친구인 제인 마샬과 함께 나누었던 어린 시절의 공상들은 이러한 시적 기제들을 사용하여 가공하지 않아도 될 만한 직접성(immediacy)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도로시 워즈워드의 “소박함”에 대한 주장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반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에링 외즈 드미르(Erinç Özdemir)는 이 부분에서 여러 층위에 걸쳐 일종의 분열(division)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데, 그 중 첫 번째 분열은 과거의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 화자의 욕망과 현재 그녀가 수행하고 있는 시 쓰기의 과업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561). 소녀 시절에 그러했듯이 소박한 진실을 전달하기 위하여 선택해야 하는 매체(medium)가 산문이라면 시적 화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줄리아를 청자로 한 시를 창작하고 있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현재적 존재는 지극히 모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즈드미르가 주장하는 더욱 중요한 분열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었던 소녀 시절의 “소박한”꿈과 계획들이 실상 “소녀다운”(girlish)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자의식에서 나온다. 그녀가 제인 폴라드와 “의무”(duty, l.44)에 이끌려 슬프게 헤어진 후 제인 폴라드는 가정을 꾸리면서 “유용함의 길”(the paths of usefulness, l.47)을 걷게 되며, 도로시 워즈워드는 “지나간 세월의 깊이”(the depth of years gone by, l.97)에서 우러난 이 시가 자신의 나이든 친구에게 “예민한 아픔”(tender pain, l.98)을 주어 눈물과 한숨을 짓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레빈이 관찰하듯이, 이 대목에서 도로시 워즈워드가 자신의 시를 “이 초라한 추모의 가락”(this poor memorial strain, l.96)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들의 꿈의 죽음, 그들의 희망의 절멸”(133)에 대한 깊은 애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가장 행복한 마음은 슬픔에 주어지고, 가장 슬픈 마음은 너무도 깊은 기쁨을 느낀다”(The happiest heart is given to sadness; The saddest heart feels deepest gladness, ll. 101-102)는 구절은 윌리엄 워즈워드가 시적 영감의 소멸에서 오는 절망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했던 「결단과 자립」(“Resolution and Independence”)의 비슷한 구절을 암유하면서, 실종되어 버린 창조적 가능성에 대한 여성적 해석을 시도한다. 소녀 시절의 꿈을 잃어버린 채 여성으로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세월, 그리고 그 속에서해가 갈수록 무르익어 가는 슬픔은 마침내는 초월적이고 역설적인 기쁨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제인 폴라드의 삶에 대한 관찰이 과거 소녀 시절의 “소박한” 꿈과 계획에 대한 사후적인 평가의 한 단면을 구성한다면, 도로시 워즈워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는 이 시를 더욱 더 회한 섞인 어조로 이끌어 가게 된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산문을 자아 표현의 매체로 선택한 것이 “소박한 진실”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이 대목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자신의 표현 욕구를 시가 아닌 산문을 통해 발산하게 된 것이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외부적으로 부과된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시인(the Poet)이라는 단어가 대문자로 표기된 것은 그 단어가 지니는 특정한 사회적 의미, 그리고 화자와 그 단어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표현하고 있다. 성장과정 전체에 걸쳐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적인 시선에 대해 그녀가 형성하게 된 자의식은 일종의 억압기제로 작용하여 자연스럽게 시상에 젖어 “노래가 떠오를” 때조차 시 쓰기를 단지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억눌린 야망”으로만 남아 있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수잔 울프슨(Susan Wolfson)이 언급하듯이, 이 부분에서 “노래가 떠올랐다”(the numbers came)는 구절은 윌리엄 워즈워드의 『서곡』(The Prelude) 첫 권에 나오는 비슷한 구절을 연상시키면서 시인으로서의 정신적 성장을 다룬 오빠의 자서전적 서사와 대조적인 서사를 구성하게 된다(142). 도로시 워즈워드의 경우에 이 서사는 시를 향한 열망이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소망이 좌절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또한, 바로 다음 대목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시 쓰기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이 당대 사회에서 여성성이라는 범주가 규정되었던 방식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부분에서 시 쓰기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억제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드러내면서 남성적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던 시라는 장르적 경계를 감히 함부로 넘나들 수 없었던 자신의 상황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그녀의 소녀 시절에 생물학적 어머니는 이미 작고한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상적인 어머니의 존재는 성장 과정 내내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이라는 범주에 걸맞는 행동 양식을 요구했으며, 이 준거를 거스르는 행위는 언제나 어머니의 처벌이나 모욕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통제력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시 쓰기의 야망을 추구할 수 없었던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써 온 운문이 시로서 가지는 위상을 부정하는 것 같은 다음 구절로 이 작품을 마무리한다.

    얼핏 보기에 이 마지막 대목은 자신의 시를 스스로 가치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이 시의 창조성을 기존에 남성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예술적 기준과는 다른 방식으로 웅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녀가 남성 작가들을 모방하면서 애써 운문으로 만들어낸 “공들인 각운”이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다소 어색하고 부족하더라도, 도로시 워즈워드의 시는 개인적인 관계의 진정성에 그 기반을 두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맥박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청자와의 공감을 형성하기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겸손하게 붙여진 듯한 「무정형의 운문」이라는 이 시의 제목 역시 당대의 남성 중심적인 문단을 지배하던 정형성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에서 나오는 새로운 창조적 에너지를 전달하겠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어느 정도 가능할 듯 하다.

    III. 윌리엄 워즈워드와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창조성의 모색

    최근 낭만주의 비평에서 윌리엄 워즈워드가 누이동생인 도로시를 자신의 시 속에서 형상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폭넓은 비판이 이루어져 왔다. 앨런 리처드슨은 워즈워드가 “감수성의 원천”을 누이동생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찾으며 자신의 시학을 위해 도로시의 여성적 자질을 전유한다고 관찰한다(16). 말론 로스(Marlon B. Ross)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워즈워드는 매우 남성 중심적인 자아 개념을 시 속에서 드러내고 있으며 도로시는 “영감의 원천”이자 워즈워드에게 “자기 실현을 향한 의지의 지렛대”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30). 또한 엘리자베스 페이(Elizabeth Fay)는 “윌리엄의 신화적 기획 속에서 아가씨로서의 위치는 도로시를 그의 창조적 노력을 위한 시신(詩神)이며 보조적인 존재로 만들게 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15).

    특히, 가장 널리 알려진 워즈워드의 대표작인 「틴턴 사원」(“Lines Written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의 경우에 시인이 도로시를 스스로의 시적 기획에 필요한 순간에 호출한 후에 현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도로시를 지우고 대신 그녀의 정체성을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온 바 있다. 예컨대 대니엘 왓킨스는 “너의 목소리에서/ 나는 내 예전 마음의 언어를 발견하고/ 네 야성적 눈에서 내뿜는 빛에서/ 내 예전의 즐거움을 읽는다” (in thy voice I catch/ The language of my former heart, and read/ My former pleasures in the shooting lights/ Of thy wild eyes, ll. 117-20)는 구절에 등장하는 “발견하다”(catch), “읽다”(read)와 같은 동사가 상당히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37). 도로시의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시인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효하며, 위의 동사들은 워즈워드가 도로시의 타자성을 자신의 시적 기획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로시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워즈워드의 해석과 분석에 종속되는 텍스트가 되어서 그의 자서전 속에 기입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에 도로시 워즈워드는 오빠에 대한 지극한 애정 속에서 여성적 자질을 매개로 남성적인 시적 기획을 완성하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후기 대화시는 흥미롭게도 「틴턴 사원」을 다시 쓰면서 워즈워드의 시 속에서 자신이 형상화되었던 방식을 수정적인(revisionary) 각도에서 재구성한다. 본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후기 대화시 중 「조애너 H에게 이야기하는 시」와 「내 병상에서의 사색」을 중심으로 이 시들이 윌리엄 워즈워드의 대화시와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을 파악하고 도로시 워즈워드의 여성적 창조성이 이 시들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대화시가 궁극적으로 도로시의 타자성을 충분히 텍스트 속에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었다면, 이제 도로시는 자신의 시 속에서 예전에 지워졌던 정체성을 되찾음으로써 「틴턴 사원」에 대해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대화시라는 시적 형식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은 도로시 워즈워드에게 여성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그녀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이며, 나아가서 「틴턴 사원」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적 맥락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틴턴 사원」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시간과 기억은 도로시 워즈워드의 대화시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고, 이런 주제를 그녀 스스로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도로시 워즈워드는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 대해 논평을 제공할 뿐 아니라 대화시라는 시적 형식의 새로운 가능성까지 함께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와 그녀의 후기 대화시 사이에 지나치게 대립적인 관계를 설정하거나 도로시 워즈워드가 이 시들 속에서 자신의 오빠를 정면으로 비판하여 일종의 독립 선언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평적 논의를 펼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 이런 방식의 논의는 윌리엄 워즈워드 자신이 「틴턴 사원」을 비롯한 여타의 시들에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여동생의 긍정적인 자질조차도 매우 평면적으로 단순화시켜 버리게 될 위험을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제임스 소더홀름(James Soderholm)은 「틴턴 사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도로시의 “황홀한 자기 충족성”(ecstatic selfsufficiency)에 윌리엄 워즈워드가 얼마나 매혹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313). 또한 존 파웰 워드(John Powell Ward)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워즈워드의 시가 가지는 힘은 여성적 자질에 대해 그가 행사하는 문화적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권위와 여성성에 대한 시인의 명백한 취약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서 나오는 것”(612)이라고 말한다. 즉, 워즈워드가 도로시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여성성이 지니는 긍정적 자질들을 환기시키는 저변에는 자신의 남성적 자아, 또 그로부터 비롯되는 시학의 불안정성에 대한 자의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디스 페이지(Judith W. Page)가 설명하듯이, 최근에 여성주의 비평가들이 공격하는 워즈워드의 “독선적인 숭고성”(egotistical sublimity)에는 “관계를 향한 역설적 열망”이 이미 함께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겠다(6).

    따라서, 울프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도로시 워즈워드가 오빠의 시를 다시 쓰는 과정은 단순히 두 시인 사이의 차이를 기입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기보다는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 이미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는 양가성(ambivanlence)과 대화(dialogues)를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146). 두 남매 시인의 시가 어느 정도의 대화적 요소,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 확립을 향한 염원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도로시 워즈워드의 대화시에서는 타자와의 공동체적 관계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전체적인 시상 전개를 이끌어 간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조애너 H에게 이야기하는 시」의 경우에 오랜만에 다시 방문한 자연 경관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한다는 점,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서 기억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틴턴 사원」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가로놓인 변화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는 두 시가 서로 상이한 인식을 보여 준다.

    「틴턴 사원」에서 자신의 성장이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워즈워드와는 달리,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시의 청자인 조애너의 부재가 과거와 현재를 구별 짓는 주요한 변화라고 말한다. 현재의 자연 경관 자체는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바 없지만, 예전에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개똥지빠귀(the thrush)의 노래는 그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대상이 상실된 현재에 시인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워즈워드의 시는 과거의 자연을 시인의 내면에 되살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자연과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타인과 함께 맺었던 예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거나 주목하는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워즈워드에게 자연과의 성공적인 교감은 대체로 홀로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타인의 존재를 호출하는 순간은 타자의 공감을 통해 이런 교감을 승인받거나 혹은 타자의 매개를 통해 시적 화자와 자연 사이의 교류를 추구하고자 할 때에 한정되어 있다. 반면에,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시의 첫머리부터 타자와 함께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자연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나아가서, 「조애너 H에게 이야기하는 시」의 마지막 부분은 「틴턴 사원」의 결말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쓰고 있다.

    도로시 워즈워드가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틴턴 사원」과 동일하게 일종의 기원문으로 되어 있고 또한 기원문을 통해 타자에 대한 시적 화자의 바램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한편으로 이 두 시인이 같은 종류의 발화 행위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방식 또한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워즈워드의 기원문이 시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도로시와의 상호적인 교감에 의존하면서도 누이동생인 도로시에게 궁극적으로 시인을 “기억”하는 특정한 임무를 부과하는 데 비해, 도로시 워즈워드가 자신의 기원문을 조심스럽게 구성하는 방식은 타자를 자아의 의지와는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는 모습을 좀 더 분명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도로시 워즈워드가 청자로서 오빠의 시 속에서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면, 그녀가 새롭게 구성한 대화시 속의 청자인 “아가씨”는 상대적으로 화자의 의지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존재로 규정된다. 청자를 이렇게 시적 화자의 통제 밖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타자로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틴턴 사원」의 텍스트에서 작동하던 시적 화자와 청자 사이의 관계성의 역학 관계를 어느 정도 재고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자신의 대화시를 새로이 창조하고 자신의 시 속에 등장하는 다른 “소녀”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도로시 워즈워드는 과거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속에서 “소녀”(the maiden)로 화석화되어 온 자신의 자아를 간접적으로 재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페이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지점에서 도로시 워즈워드는 “호출된 여성이면서 타자를 호출해 내는 여성”(a woman addressed who herself addresses others, 112)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과거의 텍스트, 특히 「틴턴 사원」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 병상에서의 사색」은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하듯이 「틴턴 사원」에 대한 수정적이고 대화적인 관계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작품이다. 이 시의 개작 과정은 도로시 워즈워드가 시를 쓰면서 지속적으로 워즈워드의 시를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처음에 “이 조용한 방의 죄수이지만,/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들은 나의 것이네”(A prisoner in this quiet Room,/ Nature’s best gifts are mine—, Levin 221)라고 되어 있던 구절에서 “조용한 방”이라는 표현은 후에 「틴턴 사원」에 나왔던 구절과 완전히 유사한 “이 외로운 방”(this lonely room)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이 부분은 종국에 다음 구절로 변화되어 워즈워드와의 관계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외로운 방”이라는 구절의 명징성과 기억이라는 정신 작용에 대한 명상 등의 특징들은 오빠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더불어 「내 병상에서의 사색」과 워즈워드의 「틴턴 사원」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파멜라 우프(Pamela Woof)는 이런 점들을 비교하면서 도로시 워즈워드의 시가 오빠의 시에 비해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평가를 내린다. 즉, 워즈워드가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던 것에 비해, 눈과 정확한 기억에만 의존하는 도로시 워즈워드는 세상의 무게에 대항할 만한 힘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109). 따라서 우프에 따르면 도로시는 자연 대상들을 “인식할 뿐 아니라 반은 창조할 수 있었던 ”(could half-create as well as perceive) 워즈워드에 비해 열등한 시인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우프의 이런 평가는 워즈워드 자신이 주장하는 시인론에 입각한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며, 사실 워즈워드의 「틴턴 사원」에서 인식 대상을 부분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축복일 뿐 아니라 때로는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외적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제공하는 대신,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여 감각적 인식의 과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문제는 더욱 복잡한데,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이미 멀어진 인간 정신은 예전에 가졌던 인식의 경험을 정확하게 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사실 워즈워드의 많은 시들은 감각적 인식과 기억의 문제를 놓고 이런 긴장과 갈등을 매우 통찰력 있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고, 이런 점에서 역설적인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틴턴 사원」에서 워즈워드는 자신의 과거 자아를 다시 회복하고자 기억에 호소하지만, 결국은 기억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도로시 워즈워드의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됨으로써 이런 의구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이는 오빠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와는 달리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자연과의 교섭이 이루어졌던 경험을 연상해 낼 수 있는 그녀 고유의 창조적인 역량을 전달해 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분에서 도로시 워즈워드가 매우 예외적으로 “나”(I)라는 1인칭 단수형을 사용하여 자신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시들, 그리고 산문들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그녀의 글쓰기가 “우리”(we)라는 복수형의 주어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이 대목에서 이렇게 “나”라는 대명사가 사용되는 것은 도로시 워즈워드가 이 시기에 와서 시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새로운 자기 인식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외즈드미르는 이 시의 2연과 8연에서 반복되는 “숨겨진”(hidden)이라는 표현이 윌리엄 워즈워드의 루시 시편들(Lucy Poems)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하면서(570), 이를 통해 도로시 워즈워드는 자연과 동일시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인 루시와 같은 모습이 과거 자신의 자아를 표상한다는 평가를 간접적으로 내리고 있다고 본다. 그녀의 내면적인 세계, 그녀 고유의 정체성은 이제까지 잠재된 상태로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제 말년을 맞아 병상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녀는 “나의 숨겨진 삶,/ 더 이상 숨겨지지 않는 의식에”(to my hidden life,/ To consciousness no longer hidden, ll. 39-40) 자연물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자신의 목소리로 내면적 인식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라는 공동체적 주체의 일부가 되는 데 만족해 왔던 도로시 워즈워드는 이 시점에 와서 1인칭 단수형의 시적 화자인 “나”라는 주체를 텍스트의 전면에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긍정이 평생 동안 그녀가 견지해 왔던 공동체적 글쓰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하기에는 이 시기에 창작된 텍스트가 양적으로 매우 부족하지만,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나”라는 시적 화자의 분명한 존재는 이 시기 도로시 워즈워드의 작품 세계에 나타난 중요한 변화의 한 징후로 볼 수 있겠다.

    IV. 나오는 말

    1829년에 조카를 방문하려고 오랜 기간 여행을 하다가 열병에 걸린 후, 도로시 워즈워드의 건강은 1855년 그녀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젊은 시절 도로시 워즈워드의 삶은 오빠의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고, 또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녀는 촉망 받는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글쓰기를 도와 시적 영감을 제공하고 교정과 비평 작업에 참여하는 등의 일들로 늘 바쁜 일상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평생에 걸쳐 자신을 둘러싼 타인들과 공동체의 삶에 유용할(useful) 수 있는 길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던 도로시 워즈워드의 인생에서, 육체적인 건강의 쇠락과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창출된 개인적 회고의 시간들은 후반기에 창작된 작품들에서 자아와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탐색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듯하다. 병고로 인해 요양 중인 상황은 일생 동안 가사 노동과 다른 사람의 글쓰기에 자신을 종속시켜 왔던 그녀의 위치를 처음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이제 도로시 워즈워드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시적 인식의 주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녀의 후기 대화시에는 당대 여성 문인들에게 시 쓰기라는 과업이 가져다 주었던 자의식에 대한 성찰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시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던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한 회한 역시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시 워즈워드는 오빠가 자주 사용했던 대화시의 장르를 차용하여 그녀 나름의 창조적 역량을 발현하고 이전의 작품들에서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자아의 존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면모 또한 보이게 된다. 질 에넨(Jill Ehnnen)이 흥미롭게 설명하듯이, 이 시점에 와서는 이제 더 이상 오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창조성을 발현할 수 있는 협업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82) 도로시 워즈워드는 후기 시에서 좀 더 분명하게 1인칭 단수형의 화자인 “나”라는 주체를 텍스트의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녀의 후기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동안 도로시 워즈워드 비평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이 되어 왔던 “자기 말소적인 경향”에 대한 논의가 그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다는 점이다. 타자와 자연과의 관계맺음에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초기 시와 산문들은 그 자체로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만, 이 작품들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성 역할과 글쓰기를 둘러싼 담론들, 그리고 그에 의해 규정되었던 그녀의 개인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인칭 단수로서의 시적 자아의 존재를 이전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도로시 워즈워드의 후기 대화시에는 당대에서는 모순 형용에 가까웠던 “여성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모색의 경로가 담겨 있으며, 이 시들에서 전해지는 삶과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열망이 종국에는 외로운 병상에서 조용히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은 미나 알렉산더(Meena Alexander)가 말하는 것처럼 당대 여성 작가들이 처해 있었던 비극적 운명을 매우 현실적인 형태로 보여 준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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