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essay attempts to read Melville’s Moby-Dick as a prefiguration of American pragmatism, especially Jamesian version of it. Underlying this project is the assumption that the American Romance and James’s pragmatism partake in the enduring tradition of American thoughts and imagination. Despite the commonality in their roots, the continuity between these two products of American culture has received few critical assessments. The American Romance has rarely been discussed in terms of American pragmatism in part because critics have tended to narrowly define the latter as a kind of relativistic philosophy equivalent to practical instrumentalism, political realism and romantic utilitarianism. Consequently, they have favored literary works in the realistic tradition for their textual analyses, while eschewing a more imaginative genre like the American Romance. My contention is that James’s version of pragmatism is a future oriented pluralism which is unable to dispense with the power of imagination and the talent for seeing unforeseen possibilities inherent in nature and culture. James’s pragmatism is in tune with the American Romance in that it savours the attractions of alternative possibilities created by the genre in which the imaginary world is imbued with the actual one. The pragmatic impulse in Moby-Dick finds its finest expression in the words and acts of Ishmael. Through this protean narrator, Melville renders the text of Moby-Dick symbolic, fragmentary and thereby pluralistic in its meaning. With his rhetoric of incompletion and by refraining from totalizing what he experiences, Ishmael shuns finality in truth and entices the reader to join his intellectual journey with a non-foundational notion of truth and meaning in view. Ishmael also envisages pragmatists' beliefs that experience is fluid in nature and the universe is in a constant state of becoming. Yet Ishmael as the narrator of Moby-Dick is more functional than foundational.
이 논문의 목적은 미국 서사 문학의 전통적 형식으로 알려진 19세기 미국의로맨스와 미국의 철학인 프래그머티즘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논의에 포함 될 주된 내용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프래그머티즘적 비전이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로맨스 작가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모비딕』(
프래그머티즘이 미국의 자생적인 철학인가에 대한 물음이 지금까지 여전히 영·미 철학계의 쟁점으로 남아있듯이 미국의 로맨스가 과연 미국적 특징들을 나타내는 예외성을 가지는 가에 대해서도 일치된 의견이 없다. 그러나 본 논문은 프래그머티즘, 특히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과 미국 소설의 로맨스적 전통이 양자 모두 미국의 상상력과 지적 성향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전제로 양자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고찰하고자한다. 이러한 전제는 미국의 로맨스가 프래그매틱한 비전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미국적인 문학전통이라고 한다면, 프래그머티즘은 그러한 로맨스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인 철학이라는 가설을 포함한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제임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듀이(John Dewey: 1859-1952)를 위시한 다수의 미국 철학자들이 프래그머티스트라고 불리며, 그들이 말하는 프래그머티즘은 별도의 논의의 장이 필요할 정도로 서로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을 행동과 변화를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다원주의, 개선론적 상대주의로 정의 내린다. 그리고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 표방하는 이러한 입장이 멜빌의『모비딕』에서 예시, 작동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모비딕』을 논의의 대상으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지금까지 프래그머티즘과 미국문학 작품과의 관계를 논한 비평적 노력이 있어왔지만, 『미국의 특성 가로질러 생각하기: 이데올로기, 지성 그리고 새로운 프래그머티 즘』(
이처럼 문학 텍스트의 실제적 분석을 바탕으로 프래그머티즘과 미국의 문학과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비평적 시도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대다수의 평자들은 19세기 미국의 로맨스 작가들이 아닌 스타인(Gertrude Stein), 프로스트(Robert Frost), 스티븐스(Wallace Stevens) 와 같이 제임스와 사제지간이거나, 또는 하버드 출신의 학연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거나, 동시대 작가였던 헨리 제임스(Henry James), 하우월즈(William Dean Howells), 트웨인(Mark Twain)의 리얼리즘 전통의 소설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다.3 이러한 경향은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을 변화와 미래의 결과를 중시하는 미래지향적 다원주의로 간주하기보다는 그것을 진리의 실제적인 유용성 또는 경제원칙에 천착하는 일종의 실용적 도구주의, 낭만주의적 공리주의 또는 정치적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행동원칙으로 축소 해석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 대한 보다 확장된 해석을 바탕으로 그것이 헨리 제임스, 하우월즈, 트웨인의 사실주의적 전통의 소설들과 구분되는, 미국의 대표적 로맨스 중 하나인『모비딕』에서 어떻게 예시되고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이후부터는 헨리 제임스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윌리엄 제임스를 제임스라고 칭함. 2Consequences of Pragmatism(1982)에서 로티(Richard Rorty)나 Pragmatist Aesthetics: Living Beauty, Rethinking Art(1992)에서 슈스터맨(Richard Shusterman)의 경우 프래그머티즘과 문학적 텍스트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듀이의 프래그매틱한 철학과 미학적 이론을 20세기의 후반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접목하려는 메타 비평에 편중된 경향이 보여주었으며 피쉬(Stanley Fish)는 프래그매틱한 패러디엄을 미국문학 텍스트가 아닌 밀턴(John Milton)의『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1688)과 같은 영국의 후기 르네상스 작품에 적용한다. 3예를 들어 레빈(Jonathan Levin)은 미국 문학과 프래그머티즘를 관련지어 논의하는『변화의 시학』(Poetics of Transition: Emerson, Pragmatism & American Literary Modernism:1999)에서 헨리 제임스, 스타인, 스티븐스의 세 작가를 논의 대상으로 국한한다. 리처드슨(Joan Richardson)도『프래그머티즘의 자연적 역사』(A Natural History of Pragmatism: 1999)에서 레빈과 마찬가지로 위의 세 작가만을 별도의 장에서 논의 한다.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제임스가 프래그머티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미 존재했다. 제임스 또한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이 당시의 많은 이들에게 잘못 인식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그러한 현상의 원인의 하나가 프래그머티즘이란 명칭자체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 퍼스가 프래그머티즘이란 명칭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철학적 비전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것처럼 제임스 또한 자신이“프래그머티즘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불행한 선택이었다”라며 후회했다(
따라서 제임스가 직접적으로 그의 저서나 강연에서 멜빌의 작품을 거론한 적은 없지만 빈번하게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의 시를 비롯한 다른많은 문학 작가의 작품들을“구체적인 예”로 사용하여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을 설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5
제임스는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부친 덕분에 셰익스피어, 호손, 디킨즈, 스토우 부인과 같은 많은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후일 심리학자, 철학자가 된 이후에도 동생 헨리 제임스의 소설뿐만 아니라 당대의 중요한 문학 작품들을 자주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가 문학에 대한 문외한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멜빌의『모비딕』을 읽었다는 기록은 물론, 그와 개인적인 친분, 지적인 교류가 있었다거나 사상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정황이나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까지 알려진 제임스와 멜빌이 관련된 기록은 제임스가 강연을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 열차 속에서 멜빌의 최초 로맨스 작품『타이피』(
철학자로서의 제임스의 삶 자체는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이 표방하는 참신성과 변화를 추구하고 실천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가 그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당시의 비판적 반응과 몰이해에 대하여 8가지의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 반박하고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도 그의 주장이 기존의 가치관과 진리에 대한 통념으로부터 얼마나 일탈적이었던 가를 짐작하게 해준다.7 멜빌 역시 과거의 전통이나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작가로서 끊임없이 자기변신과 문학적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제임스와 다르지 않다. 『모비딕』을 집필하던 당시 근거리에 살던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멜빌은 독자들의 취향에 영합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냉대를 받고 금전적인 어려움을 받을지라도, 세상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쓰고 싶은 작품을 쓰겠다는 결의를 밝힌 바가 있다.8 결국 그의 야심작『모비딕』은 그가 예견했던 것처럼 당시 일반 독자들에게 뿐만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외면당한 채 오랫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런점에서 프래그머티즘이 제임스에게 있어서 과거를 답습하지 않은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철학이었다고 한다면 멜빌에게 있어서『모비딕』은 그가 후세들에 의해 식인종들에 대한『타이피』와 같은 흥미위주의 단순한 모험담을 쓴 이야기꾼으로 기억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이었던것이다.9
지금까지『모비딕』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이야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 로티가 주장한 것처럼“원칙 없는 철학,”10 즉 반(反) 철학적인 철학이듯이, 『모비딕』또한 전통적인형이상학적 통념들을 수용하기 보다는 그것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반(反)형이상학적인 형이상학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멜빌은 모어우드(Sara Huyler Morewood)에게 보낸 편지에서『모비딕』을 그의“어긋난 발상”(wayward speculations)의 결과물이라고 했다.11 그는 제임스와 마찬가지로『모비딕』에서 나레이터 이쉬미얼을 통하여 선험적,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이 다원적이며 잠재적인 것임을 제안한다. 진리의 보편성과 확실성, 불변성을 중시하는 서구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진리의 가변성과 불확실성을 역설하는 제임스와 멜빌의 태도는 카벨(Stanley Cavell)이 에머슨이나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와 같은 19세기 미국 사상가들의 텍스트에서 발견한“형이상학적 반란”(metaphysical riot)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12 제임스와 멜빌의“형이상학적 반란”은 우주가 여전히 창조와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적, 그리고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적인 발상에 기초한, 변화와 미래를 염두에 둔 일종의 대안적 사유방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는“대안적인 이론적 공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과 양립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 중에서 주관적인 이유로선택 한다”라며 기존의 이론적 공식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기 보다는 복수의 다양하고 새로운 대안적인 이론들에게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드라이든이 지적했듯이 멜빌 또한 작가로서“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사기꾼』 (
『모비딕』의 첫 번째 장인「여명」(The Loomings)은 소설의 나레이터이며 주요 작중 인물인 이쉬미얼이 육지의 삶에 대한 환멸과 자신의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표출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바다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같은 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쉬미얼은 자신이 바다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지리멸렬한 육지의 삶으로 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경이롭고 새로운 세계의 관문”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6).14 그는 또한“다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유혹되지 않겠지만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게 영원한 갈망을 느낀다. 나는 금지된 바다를 보고 원시의 해안에 상륙하기를 좋아한다. 선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공포스러운 것을 신속히 감지하고 그것이 허용 해준다면 그것과 친밀해지고도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친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라며 새롭고 다양한 경험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16). 이쉬미얼의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것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는 그가 포경선 피쿼드(the Pequod)호에 승선하기 전 우연히 만난 야만인 퀴퀙(Queegueg)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쉬미얼은“다른 사람들을 흠칫하게 할 그[퀴퀙]의 특징들이 자석처럼”자신을“끌어당기는 힘을 행사 한다”(53)라며 퀴퀙의 타자성에 매료된다. 그는 또한“퀴퀙이란 사람이 요조와 라마단에 대해서 몹시 기괴한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 . . .만족해 하고있으니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지 않는가?”라며 퀘쾌크의 이교도적인 종교행위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78). 이 부분은『다양한 종교적인 체험』(
이쉬미얼의 타자성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또한 제임스가“『프래그머티즘』이전에 발표한 그의 심리학과 관련 된 다수의 글에서 처방하고 있는 올바른 생각, 효과적인 정신적 성장, 낯선 것들과 유연하게 동화하고 새로운 현상들을 생산적이고 발전적으로 어우르는 행동방침”을 선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Bauerlein 46). 이쉬미얼이『모비딕』의 1장에서“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공포스러운것”에 이끌리면서도“선을 무시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그가 새로운 경험을 수용하면서도 도덕적 고려도 없이 모든 것을 참으로 수용하는 상대주의적 태도와 다르게 그것이 가진 선함, 유용함을 고려사항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제임스의 프래그머틱한 태도와 일치한다.15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러한 기준을 가진 이쉬미얼이 모비딕에 대한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무고한 선원들을 희생시키려는 에이햅 선장의 부당함에 대하여 왜 침묵하는 가 이다. 물론 에이햅에 대한 이쉬미얼의 태도는 그가 퀴퀙에게 보여주었던 우호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흰 고래에 대한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기 위하여, 또는 자연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의 근원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의 광기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이쉬미얼의 태도는 그의 정체성과 나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재고 하게한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을 포함한 스텁(Stubb), 플래스크(Flask) 등과 같은 다른 선원들 역시 이쉬미얼과 마찬가지로 에이햅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고 그의 흰 고래에 대한 복수극에 동참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에이햅선장의 무모한 계획에 대하여 제동을 걸려고 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에이햅의 행위와 생각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이나 찬반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이쉬미얼과는 대조적이다. 심지어『모비딕』에서 이쉬미얼과 에이햅이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도 없다. 물론 스타벅 보다 위상이 낮은 말단 선원인 이쉬미얼이 선장 에이햅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현실적으로 많지 않았을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에이햅의 말과 행동을 묘사하고 전달 할 뿐 그것을 가치판단 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의문은 이쉬미얼이 어떤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진 인물인가를 분석하기보다는 『모비딕』에서 나레이터로서의 그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멜빌은『모비딕』에서 이쉬미얼이 퀴퀙을 새로운 경험의 일부로 환영했듯이 에이햅 또한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닌 또 다른 경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쉬미얼이 퀴퀙에 대해서는 자신의 우호적인 감정을 숨김없이 표출하면서도 에이햅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쉬미얼의 편견에 영향 받지 않고 에이햅을 독자들이 직접 주체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려는 작가 멜빌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이는 멜빌이 독자들에게 퀴퀙이 아닌 에이햅을 보다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모비딕』을 단순한 해양 모험담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로 만드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모비딕』에서 베일 속에 가려진 자연의 의미와 절대자의 의도에 대한 에이햅의 분노와 좌절감은 한 개인의 반응을 넘어서 멜빌이 속했던 19세기의 미국인들의 종교적 상상력과 관계된다. 건에 따르면 에이햅은, 세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하여 자기 성찰을 하게 했던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19세기 미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캘빈주의적 상상력이 도착적인 형태로 변하여 신에게 직접 모든 의문에 대하여 답을 하라며 도전하는 인물을 대변한다.16 건은“프래그매틱 비평은 특정한 정책을 옹호하지 않지만 명시가 가능한 정책은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Gunn 37). 그는 또한“그것은 [명시 가능한 정책] 차이들을 서로 대화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민주적인 선호에 의하여 구별 된다. 그래서 상충하는 사안들이 인간 사회를 파괴하기보다는 잠재적으로 그것이 창조적이 되게 하고 공적영역을 피폐하게 하기보다는 확장하고 긴밀하게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Gunn 37).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모비딕』에서 이쉬미얼과 에이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양자가 직접적으로 대화를 하거나 논쟁을 주고받는 장면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건이 주장하듯이 대립적인 입장들이 변증법적인 대화를 통해서 창조적변화를 가져오거나 공적인 영역을 확장하고 긴밀하게 해주는 결과를 도출할 수있는 기회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어렵다. 왜냐하면 멜빌은 그러한 대화가 이쉬미얼과 에이햅 사이에서 이루어지기보다 독자와 텍스트 간에 발생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모비딕』에서 이쉬미얼이 수차례 이야기의 진행을 멈추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참여적 독서를 유도하는 것 역시 작가 멜빌의그러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에이햅에 대한 독자들이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찬반이 교차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모비딕』이 출간 된지 백년이 지난 1950년대의 신비평 또는 형식주의적 비평이론에 영향 받은 베잔슨(Walter E. Bezanson)의 논문「『모비딕』: 예술 작품」“(
건은 이쉬미얼이 처음부터 신의 텍스트인 자연이 보여주는 불가해한 의미에 대하여 그러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그렇게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쉬미얼 역시 처음에는 다양성에 대한 경험을“신성과 악마성,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생명과 죽음, 남과여”라는 이분법적인 틀 속에서 파악하려는 에이햅과 같은“시대에 뒤떨어진” 일원론적 의식을 공유했다는 것이다(Gunn 140). 그러나 이쉬미얼의 의식의 변화를 주장하는 건의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쉬미얼의 불가해하고 이질적이며 다양한 경험에 대한 개방적이며 유연한 태도는『모비딕』의 시작 부분에서 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쉬미얼은 제 1장「여명」에서“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친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모든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그러한 열린 의식은 그가 보여준 퀴퀙과 에이햅이라는 공포스럽고 이질적인 인물들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에서 행동으로 표출된다. “오래된 의식”에서“새로운 의식”으로 이쉬미얼의 의식 변화를 주장하는 건의 견해는 그를 언어로 구축된 기능적 인물로 해석하기보다는, 불변의 본성을 가진 본질적 존재로 간주한 결과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모비딕』에서 이쉬미얼의 자아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본질적 또는 실체적 자아와는 구별할 필요가있다. 즉 그는 자아를 인식행위의 주체로 보는 본질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입각한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로크가 생각하는 자아라기보다, 포이리어가 말한“친숙한 인간의 현전이 사라진 장소”인 텍스트라는 무한한 공간에서 실재 세계와 환상의 세계,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수행적 자아라는 점에서 제임스가 말하는 경험 속의 자아와 유사하다(
『모비딕』에서 이쉬미얼이 참여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경험의 세계는 고래잡이라는 물리적 행위와 고래와 고래잡이와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명상하는 지적편력의 경험으로 구성된다. 그는『모비딕』전반부에서는 작중 인물과 일인칭화자라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지만 백경에대한 추격이 본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과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듣고 목격하고 전달해야하는 물리적 행위가 텍스트의 흐름을 점차 지배함에 따라 일인칭 나레이터로서 이쉬미얼의 기능은 더 이상 작동을 멈춘다.『모비딕』72장에서 이쉬미얼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일인칭 나레이터로서 자신이 더 이상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포경행위와 에이햅을 포함하는 다른 선원들의 외적, 내적 움직임까지 목격하고 그 내용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토로한다. 그는“고래를 잘라서 처리한다는 떠들썩한 일에는 선원들은 늘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한다. 지금 여기 손이 모자라는가 하면 금방 저기에 손이 모자란다. 어디든 한곳에 머물 수가 없다. 같은 순간에 온갖 곳에서 온갖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 광경을 묘사하려고 하는 이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요구된다”며 일인칭 나레이터로서의 자신의 한계와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 전지전능의 시점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270). 브로드코브는 이러한 상황하의“나레이터 이쉬미얼은 비(非)자아와 너무도 깊이 개입되어 작중 인물로서의 자아를 실종하는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한다(139). 실제로 이쉬미얼은 화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자아 를 상실하는 경험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104장에서 이쉬미얼은“리바이던”(Leviathan)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대한“글쓰기가 . . .무의식 중에 나의 글씨를 플래카드에 쓰는 대문자처럼 쓰게 한다”며일인칭 나레이터로서 그의 행위가“무의식중에”이루어짐을 말해준다(379). 그러나 이 장면에서 주목 할 점은 모비딕이라는“거대한 주제”(subject)가 이쉬미얼의“팔을 지치게 하고, 몸은 실신상태로 만들지만”그의 ”팔은 길게 뻗쳐서 넓게 모든 고래와 인간과 거성과의 연대기를 포함해, 지상의 모든 흥망성쇠 뿐만 아니라, 저 우주와 그 주변까지도 그려 내려고한다”라며 일인칭 나레이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에서 해방되어, 더욱 확장된 경험의 영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레이터로의 변신을 시사한다(379). 이런 점에서 볼 때 브로드코브가 앞서 이쉬미얼의 일인칭 화자로서의 자아상실을 위험한 것, 즉 부정적인것으로 간주한 것은 재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쉬미얼이 절대자인신의 텍스트인 자연으로부터 발견하는 의미의 부재, 불확실성을 다양성과 변화, 창조의 가능성으로 재인식을 하듯이, 일인칭 화자로서의 자아 또는 역할의 상실또한 그 자신과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깊은 경험의 세계를 열어주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쉬미얼의 일인칭 나레이터의 시점에서 전지전능한 기능을 가진 나레이터로의 변신은 그가 목격하고 경험하게 되는 사건들의 범주가 시공에 제약 받는 한 개인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서 무제한 확장됨과 동시에 그가 묘사하는 작중 다른 인물들의 외적인 말과 행동 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와 보다 다양한 사건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모비딕』에서 이러한 서사적 형식의 일탈을 독자들에게 보다 다채롭고 깊은 경험의 세계를 열어주기 위한 멜빌의 서술적 전략이라고 간주한다면, 그의 전략은 나레이터의 시점 변화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멜빌은 다양한 인종과 국적으로 구성된 피쿼드 선원들의 취중 독백을 소개하는 40장「한밤중, 앞갑판」(Midnight, Forecastle)에서와 같은 극형식의 도입, 고래학을 다룬 장들에서의 학술적 논리전개, 9장에서의 매플(Mapple)목사의 설교 등과 같은 이질적인 장르를 로맨스라는 서사형식에 결합하여 작중인물들의 살아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전달한다.
『모비딕』의 99장「더블룬」(The Doubloon)에서도 멜빌은 돛대에 부착된 더블룬에 대하여 선장 에이햅을 포함한 다수의 피쿼드 선원들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반응과 해석을, 극형식을 빌려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더블룬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 한 후 다른 인물들이 그것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 하며 그들의 독백을 엿듣는다. 이런 식으로 동일한 더블룬에 대한 에이햅, 스타벅, 모굴 노인, 스텁, 퀴퀙, 플래스크, 페달라(Fedallah), 핍(Pip)과 같은 다양한 인물들의 더블룬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나레이터 이쉬미얼의 개입 없이 차례대로 직접 소개된다.
에이햅이 스페인 더블룬을 상금으로 내건 근본적인 목적은 그것으로 피쿼드 선원들의 물질적인 욕망을 부추겨서 바다의 괴수 모비딕을 죽이려는 자신의 욕망을 앞당겨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이햅의 그와 같은 의도와는 다르게 더블룬은 고래잡이 선원들에게 물질적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많은 이질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으로 해석된다. 에이햅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는 더블룬 속에 새겨진 거대한 세 개의 산봉우리에 관심을 보이며“산봉우리, 탑, 그 밖에 뭐든지 크고 높은 것은 항상 자아의 강열함이 있다” 며 그것들을 유아독존적인 자신과 동일시한다(359). 스타벅은 산봉우리들을“삼위일체”의 표시로 읽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나타낸다(360). 스텁은 스페인 더블룬 속에 새겨진 사람의 일생을 상징하는 십이궁도에 시선을 집중하여 그것으로부터“하늘에 쓰여 있는 설교”(361)로, 플래스크는 더블룬을 단지“960 개피의 시가 담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으로 된 둥글게 생긴것”(361)으로, 배화교도 페달라에게는 더블룬이“태양”(362)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우리는 더블룬의 의미가 그 속에 고정된 실체로 내재된 자명한 어떤 것이 라기보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이 만들어 내는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허구임을 알게 된다. 스텁은 이 장면에서 세상은 하나지만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듯이 더블룬이라는 텍스트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르게 해석된다고 말한다(362).
피들슨(Charles Fiedelson)은“더블룬은 상징적 의미의 실체에 대한 증거이다. . . .그러나 그것이 의미로 탄생할 때는 파편화 된다”고 진술한다(32). 피들슨의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응시의 대상이 다양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으로부터 생성된 각각의 의미들은 각각 파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하나의 대상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때 그 대상은 상징 또는 상징적인 것이 되며 상징이 생성하는 개별적 의미는 모두 파편적 또는 파편이라고말할 수 있다. 『모비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상징주의와 상징주의가 보여주는 의미의 파편적 양상은 미래지향적 다원론을 선호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제임스가 하나와 다수(One and Many)의 관계에 대하여 큰관심을 가졌으며 일관적으로 하나가 아닌 다수의 가치를 옹호하는 다원주의자 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임스가 프래그머티즘 철학에 기여한 가장 큰 부분도 바로 그가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임스는“세계는 서로서로 평행으로 달리는 부분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미국 서사문학의 전통적 특징인 미국의 로맨스를 사회속의 인간을 다루는 사실주의적 소설이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하여, 미국의 문화와 경험을 담고 있는 교훈적 알레고리라고 주장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 전적으로 잘못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특히 미국 로맨스의 특징을 알레고리적이라는 주장은 쿠퍼(James Fenimoor Cooper: 1789-1851)의 로맨스나, 호손과 멜빌의 초기 작품들에게는 해당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모비딕』과『주홍글자』와 같은 후기의 대표적 작품들에게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로맨스가 미국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알레고리에서 상징주의로의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벨(Michael Davitt Bell)이 미국의 주요 로맨스를 논의하면서“로맨스와 상징주의라는 두 용어는 사실상 동의어”라고 주장한 것은 미국 로맨스와 상징주의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 할 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42). 『모비딕』에서 흰 고래 백경이나 호손의『주홍글자』에서 등장하는 알파벳“A”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강요하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저항하는 심볼들이다. 물론 멜빌의『모비딕』이나 호손의『주홍글자』에서 발견되는 상징들이 가진 의미의 다양성 자체만을 내세워 그것이 미국적 로맨스를 유럽이나 영국의 로맨스와 구별해주는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전혀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에밀리 브론테 (Emily Jane Bronte..)의『폭풍의언덕』(
『모비딕』에서 가장 중심적인 상징은 거대한 흰 고래 모비딕이다. 멜빌은 이바다의 괴물과 고래잡이에 대한 스토리를 시작하기 이전 페이지에서 부터 동서고금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수많은 텍스트들로부터 발췌한 고래에 관한 내용들을“도서관 사서의 사서”라는 퍼소나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고래의 의미가 수세기에 걸쳐 다양하고 파편적인 형태로 인류의 마음속에 각인되었음을 확인시켜준다(2). 그리고『모비딕』이야기가 전개 된 이후, 32장「고래학」(Cetology)을 시작으로 해서 텍스트의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이쉬미얼은 해부학적 또는 백과사전적인 방대하고 세분화된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소개하며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쉬미얼이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할 만큼 광범위한 고래와 고래학에 대한 사실들을 소개하고 논의한 이후에 그가 던진 한 마디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수행한 지적 편력은 고래학에 대한“기초 작업을 위한 기초 작업”(the draught of a draught)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128). 그는 또한“완성하지 못한 부분은 완공되지 않은 콜로뉴대성당 꼭대기 첨탑 위에 기중기가 우뚝 선채로 남겨져 있는 것처럼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 두어 후손들이 마지막 돌을 올려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고 한다(127-28). 이것은 그가 발견한 고래와 고래학 계통에 대한 사실들과 의미는 여전히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는 부분적, 파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가 육지 사람들이“모비딕을 어떤 해괴한 우화 또는 그보다 몇 배 더 혐오스러운, 하나의 참기 힘든 알레고리로 비웃지 않도록”고래와 포경업에 대한“역사적 또는 다른 명백한 사실들”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힌트”(hint)만을 준다는 사실 또한 상징으로서 모비딕의 복잡성과 파편적 이미지를 더해주는 결과를 가져온다(177).
『모비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상징주의와 파편적 상상력은 개선론과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성향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휠러(Kathleen Wheeler)가 주장하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문학작품에서 발견되는 상징적 파편이 가지는 특징과 낭시(Jean-Luc Nancy)와 라쿠러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가 말하는 독일의 낭만주의적 파편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휠러는 그녀의 저서『낭만주의, 프래그머티즘 그리고 해체주의』(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파편적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미래지향적 경향은 그들이 이전 17, 18세기의 기계론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간주하는 유기론적인 문학관을 반영함과 동시에 우주가 여전히 창조의 과정을 종료하지 않았다고 믿는 프래그머티즘의 믿음과도 연속성을 가진다. 물론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신념은“모든 시는 언제나 되기 과정의 상태에 있다”(175)라고 천명한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적 비평가이며 시인인 쉴리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의 유명한 낭만주의문학의 명제에 기초한 유기론적 문학관과는 배경을 달리하는 다윈의 진화론적인 요소가 농후하다. 그러나 양자가 가지는 변화의 가능성과 미래의 결과에 대한 관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듀이는 제임스의“프래그머티즘은 역사적 경험주의의 연장으로 제시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과거 현상을 주장하기 보다는 결과적인 현상에 주목 한다”고 지적한다(46). 그는 또한 프래그머티즘의“결과의 가치에 대한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고려하게 한다. 그리고 미래를 고려하게하는 이것은 진화가 종료되지 않은, 여전히 되기 과정에 있는 우주라는 개념으로 이끌어준다”라고 주장한다(50). 제임스는“프래그머티즘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합리주의는 과거의 영원성으로 뒤돌아가는 것이다”(
건은 위와 같은 미래지향적인 프래그머티즘의 비전이 문학적인 형식을 취할때 열린 결말의 언어적 실행으로 나타난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특징을『모비딕』에서 발견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모비딕』32장「고래학」에서 이쉬미얼은 일관적으로 자신의 지적 편력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들이나 고래잡이라는 물리적 경험들에 대하여 어떠한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거의 모든 탐구대상이나 담론의 주제에 대하여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나의 보잘것없는 노력이다. . .나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완전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잘못된 것이므로. . .단지 여기서 고래학에 대한 계통을 밑그림만 제시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118)라며 독자들이 자신이 소개하는 고래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과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최종적인 것 또는 완전한 것으로 수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쉬미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거나 지금까지 밝혀진 고래와 고래학에 대한 모든 사실들의 무용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헨리 제임스와 윌리엄 제임스가“탐구하려는 마음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은 그 과정에서 개별적인 한 순간을 분리해서 그것을 전체의 이미지로 정지시킴으로써 탐구활동에서의 지속적인 구성과 재구성의 과정을 저지하고 싶어 하는 유혹“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그들의 글에서“보행식 탐구법”(ambulatory methods)을 실행한 것과 같은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Gunn 144). “보행식 탐구법”은 건이 말하는“프래그머티즘적인 이야기”의 목적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적 이야기의 목적은 결말에 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관련된 모든 주장과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관련자들의 입장을 다 들어보기 전에 이야기를 종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것[결말의 도달]을 무한하게 정지시키는 것이다”(Gunn 148). 멜빌도 이와 같이“그의 독자들을 단일한 주제에 묶이게 되는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 . . 『모비딕』의 독자들은 어느 일정한 감정 상태에서 그것에 집착하게 될 정도로 오래 머무는 행위나 변화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되는것을 금지 당한다”(Mckintosh 25). 변화의 필요성은 멜빌과 제임스 모두가 강조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는앞서 지적 했듯이 진리의 불변성과 확실성을 견지하는 전통적인 정초주의적 철학의 인식론에서 벗어나 진리와 실재뿐만 아니라 세계가 창조의 과정을 종료하지 않은 채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멜빌과 제임스의 이러한 믿음이 과거로부터 축적된 모든 진리와 가치들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과거의 진리나 믿음을 불변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신봉하려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가 그러한 습관을 경계하는 주된 이유는“진리들은 과거의 진리들로부터 만들어진 것”(
제임스는 그의 「프래그머티즘의 진리에 대한 개념」(“Pragmatism’s Conception of Truth”) 마지막 페이지에서 수차례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 논문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제임스가 그의 진리에 대한 이론을 당시 합리주의자들이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답답해하면서“지금이야 말로 그들이 상상력을 발휘 할 때”라고 한 것은 그 역시 상상력의 중요성을 인정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필요성은『모비딕』에서 이쉬미얼이 그의 독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쉬미얼은 그가 전달하는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면서도 그것들을 독자들이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재조명 할 것을 요구하며『모비딕』25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 . . 확실한 사실들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들을 획득하고도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해줄 어떤조리 있는 상상을 전적으로 억제하는 것을 두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태만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102). 그는 또한“설령 우리가 입증하고 확고히 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설을 말할 수 있다”며 독자들이 탐구과정에서 확실성의 추구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 할 것을 독려한다(313). 제임스 또한 프래그머티즘은 “이론들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며“어떠한 가설도 환영 한다”라고 말했다(
제임스가 프래그매틱 방법론은“인지 가능한 실제적 결과들을 추적하여 밝히기 위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라고 한 발언은 그의 동료 프래그머티스트인 듀이의 상상력에 대한 이론과 일치한다(
여기서 건이 말하는“스타일”은 실재에 대한 온전한 경험을 위하여 요구되는 상상력의 재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모비딕』과 같은 로맨스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건과 마찬가지로 벨 또한 상상력을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의 일부로 편입시킴으로써 로맨스와 리얼리즘은 별개라는 오랜 통념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로맨스와 사실주의의 차이에 대한 논쟁에서 내려진 결론은 미국의 로맨스는 인생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감수성의 교감 속에 있으며 최상위의 실재(the highest reality)는 마음이 상상적이 될 때 성취되는 것으로 헨리 제임스가 정의 내린 것과 같은 일종의 리얼리즘”이라고 주장한다(154). 호손이『주홍글자』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세관 스케치」“( The Custom-House”)에서, 그리고『일곱 박공의 집』(
제임스 또한 프래그머티즘은 추상적인 것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리를 논하는 방법론의 일종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는“구체적”이란 말을 단순히 현상적인 세계의 사실, 사물 사건을 묘사하기 위한 수식어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구체적”이란 말은 상상력의 산물임과 동시에 상상력의 작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적 경험에도 적용되는 표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프래그머티즘과 종교」“( Pragmatism and Religion”)라는 제목의 글 서두에서 제임스가“모든 것을 구체적인 예들의 도움을 받아 논의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며 휘트먼의「당신에게」라는 시를 소개하고 그것을 통하여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선호하는 다원주의적 독서법을 설명한 것은, 그가 예술적 경험을 여타의 다른 경험과 구별하기 보다는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듀이와 마찬가지로 문학적인 경험을 비실재적인 경험이라며 배제하지 않음을 증명해준다(
제임스는 그가 인용한 휘트먼의 시 에서“당신”이란 말의 의미는 일원주의적, 다원주의적, 두 유형의 독서법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자신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에 집착하는 전자의 정태적인 독서법 보다는 역동적이며 변화와 다양성을 지향하는 후자, 즉 복수의 가능성(possibles in the plural)들을 의미하는 다원주의적 독서법을 선호한다고 밝히고 그 이유를 그것이 일원론적 독서법보다“프래그머티스트들의 기질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터(John J. Stuhr)는“프래그머티즘은 반 이론적 태도가 아니라 프래그매틱한 방법을 만들고 또한 그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이론”이라고 정의 내린다(198). 그는 또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은 방법론이며 진리에 대한 이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태도 또는 기질이라고 주장하며 프래그머티즘 기질의 형성 조건을 개선론(meliorism), 다원론(pluralism), 최후의 결과에 대한 믿음(faith)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스터의 프래그머티즘적 기질의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한 설명은『모비딕』과 프래그머티즘과의 연속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본 논문이 논의한 내용을 축약해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스터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스트의“개선론은 낙천주의와 염세주의와는 다르게 세상의 제 문제들에 대한 구원이 불가피한 것으로도,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으로도 보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개선론은“희망과 고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며“희망을 가장 중요한 작업 수행 태도”로서 중요시하지만“지금 보다 또는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어떤 것들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러한 자극제나 능력이 없다면, 희망이란 경험을 할 수없는 것이다. 개선론은 희망과 상상력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에 대한 경험들을 창조하고 배양하는 것에 대한 뚜렷한 관심을 보인다”(204).
스터가 주장하는 이와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의 개선론적 성향은 실재의 세계에 상상의 세계 또는 제임스가 강조한“가능성들”(possibles)의 세계를 편입시키는 로맨스의 속성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는“프래그머티즘은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이며 모든 이론을 유연하게하며 가장 동떨어진 관점도 기꺼이 수용하고 인습적인 것을 유동적으로 만들며 낮선 상태를 상상하는 습관”이라고 주장했다( “Teaching”178). 스터가 두 번째로 지적하는 프래그매틱한 기질의 또 다른 조건인 다원론 또한 의미와 진리 그리고 자연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부분적이며 파편적인 모든 다양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는『모비딕』의 이쉬미얼의 의식 세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스터에 의하면, “다원론은 절대주의와 허무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가치들(진리를 포함하여)은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물”이며“언제나 원근법적, 개인적이며 부분적으로 보고 개인의 생각과 이상은 그 자체로 경청 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 한다”(204).
스터가 프래그머티스트의 기질의 조건으로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것은 최종적결과에 대한“신념”이다.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지향하는 최종적 결과에 대한 신념은 언제나 미래의 결과를 고려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현재와 과거의 모든 경험과 행위, 사건들의 진리와 가치를 미래의 가상적인 시점에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추론과정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상상력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상력은 개선론과 다원론과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조건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최종적 결과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터는 또한“프래그매틱 기질의 조건들이 희망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의지에 부분적으로 의존하지만 그러한 조건들은“보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으로 문화적인 조건, 정치적인제도, 경제적인 구조, 의미생성 체제, 생태학적인 실태”등과 같은 물리적인 외부 조건에 더욱 의존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프래그머티즘을 보다 공적인 영역과, 현실적인 제 문제들에 보다 큰 관심을 둔 철학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204). 여기서 스터가 말하는 프래그매틱한 기질은 다분히 도구적 기능을 강조하는 듀이적인 프래그머티즘을 암시한다. 그러나「호손과 그의 이끼들」에서 멜빌이“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 자체이며 당대의 색조를 반영한다”고 언급했듯이 그의『모비딕』또한 당대의 현실과 동떨어진 단순한 흥미위주의 해양 모험담을 넘어서는, 당대의 문화적 산물임과 동시에 상상력의 허구이다.21 이쉬미얼을 통하여 백과사전적으로 소개되는 포경 산업은 당시 미국 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국산 오크나무로 건조된 피쿼드호에 승선한 다양한 배경과 국적을 가진 고래잡이 선원들은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진입한 19세기 중엽 당시의 미국 현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4제임스는 이보다 앞서 1908년경에 발표한“A Definition of Pragmatism.” Pragmatism: Reader. Ed Louis Menand. (New York: Random House, 1997): 56. 서두에서 프래그머티즘이란 용어가 지나치게 막연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설명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한다. 5William James: Pragmatism and The Meaning of Truth. Intro. A.J. Ayer. (Cambridge: Harvard UP, 1978): 131.에서 제임스는 일원론적인 독서법과 프래그머스트들의 기질에 가장 합당한 다원론적인 독서법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휘트먼의「당신에게」“( To You”)라는 시를“구체적 예들”(concrete examples)의 하나로 소개한다. 6Robert D. Richardson. William James: In the Maelstrom of American Modernism.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376. 7William James: Pragmatism and The Meaning of Truth. Intro. A.J. Ayer. (Cambridge: Harvard UP, 1978), 266-82. 8Herman Melville, Moby-Dick. Eds. Harrison Hayford and Hershel Parker. (New York and London: Norton, 1967), 557. 99 Ibid 559.『 모비딕』을 집필하는 당시 멜빌은 호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자신이 후세들에게“식인종들과 함께 살았던 작가,”또는 생강 케이크와 함께 어린아이들이 읽도록 주어질『타이피』와 같은 흥미위주의 해양 모험담을 쓴 작가로 기억 될 것을 우려하는 마음을 표출 한 적이 있음. 10“원칙 없는 철학”은 로티가 프래그머티즘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와의 상보성을 논하는 글 제목으로서 프래그머티즘을 지칭한다 Richard Rorty, “Philosophy without Principles.” Against Theory: Literary and the New Pragmatism. Ed. Michell, W.J.T. (Chicago and London: U of Chicago P, 1985), 132-38. 11Herman Melville, Moby-Dick. Eds. Harrison Hayford and Hershel Parker. (New York and London: Norton, 1967), 564 12카벨은 그의『월던의 감각들』(The Senses of Walden. 5th ed. (Chicago: U of Chicago P, 1992), 33.에서 에머슨과 소로와 같은 미국의 사상가들의 글쓰기 경향을 염두에 두고“왜 미국은 스스로를 철학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는가? 또는 미국이 자신을 위대한 문학의 형이상학적인 반란의 형식으로 드러내었는가?“(why has America never expressed itself philosophically? Or has it-in the metaphysical riot of its greatest literature?)라고 질문한다. 13Herman Melville, Moby-Dick. Ed. Harrison Hayford and Hershel Parker. (New York and London: Norton, 1967), 552. 14Herman Melville, Moby-Dick. Eds. Harrison Hayford and Hershel Parker. (New York and London: Norton, 1967), 16. 이 후 이 책에서의 인용은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함. 15제임스가 자주 언급하는“good”이란 말에는“선”하다는 형용사적 의미 이외에도 “통용되는”“작동되는”“이로운”이라는 뜻이 함의되어있다. 16Giles Gunn. Thinking Across the American Grain: Ideology, Intellect, and the New Pragmatism(Chicago: U of Chicago P, 1992), 138. 17Walter E. Bezanson, “Moby-Dick: Work of Art.”Moby-Dick: Centennial Essays. Eds. Tyrus Hillway and Luther S. Mansfield. (Dalas: Southern Methodist UP, 1953), 31-58. 18리처드슨이 멜빌과 호손을 자신의 프래그매티즘의 자연적 역사의 논의에서 제외한것은 그들의 작품에서는 신을 자연으로 대치하지 않은 비자연적 존재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들의 작품에서는 신을 살아있는,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정태적이며 아이콘적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Joan Richardson. A Natural History of Pragmatism(New York:Cambridge UP, 2007), 12. 19James, William. “Does‘Consciousness’Exist?” in Essays in Radical Empiricism(Cambridge: Harvard UP, 1976), 3-19. 20이 말은 Cornel West가 그의 저서『미국의 철학 회피』(The American Evasion of Philosophy: A Genealogy of Pragmatism. Wisconsin: U of Wisconsin P, 1989)에서 본문 이전 페이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서 인용한 내용을 재인용했음. 영어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음. “If one must philosophize, then one must philosophize; and if one must not philosophize, then one must philosophize, in any case therefore, one must philosophize.” 21Herman Melville, Moby-Dick. Eds. Harrison Hayford and Hershel Parker. (New York and London: Norton, 1967), 543.
멜빌은『모비딕』에서 에이햅 선장을 통해 미국인들의 내면에 잔존하고 있던 켈빈주의의 자기 성찰적 상상력과 계몽주의적 시대정신과의 마찰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모비딕』을 에이햅이란 한 개인의 비극적 이야기를 넘어서 19세기 미국인들의 좌절된 열망을 다룬 비관적인 이야기로 해석 할 경우, 스터가 프래그머티스트들의 개선론에서 가장 최상의 작업태도라고 주장한 “희망”은『모비딕』의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모비딕』이 에이햅이라는 반민주적인 한 개인의 광기로 인하여 수많은 선원들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이야기 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의 결말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인식하는 한, 다시 말해서『모비딕』을 비극적 이야기로 인식해야만 그것이 비극이 아닐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인식은 유아독존적인 개인주의의 결과로 빗어진『모비딕』의 비극적 결말을 미래를 고려하며 최종적 결과를 중시하는 프래그매틱한 관점으로 재조명 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는“프래그매틱한 방법은 어떤 해결책이라기보다 보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