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mary purpose of the present essay is to survey the relationship between Chaucer’s fatherhood and English nationalism. Chaucer as a nationalist poet with essential Englishness is a product of the pre-modern nationalist project initiated between the late thirteenth century and early fourteenth century. In this period, as Turville-Petre regards, the English nationalist identity started to rise in language and literature. Thus this essay surveys the pre-modern nationalist discourse before Chaucer and how it influenced Chaucer to spawn his own nationalist discourse. The latter half of this project, as a reception study, surveys the nationalist receptions of Chaucer in the nineteenth century, when the connection between Chaucer studies and jingoistic nationalism was highly circumstantial. In terms of Chaucer’s reception, the nineteenth-century was a crucial period: during this period the nationalist discourse and Chaucer studies firmly combined and Chaucer was envisaged as a boastful nationalist poet. The essay’s discussion generally revolves around Chaucer’s fatherhood and his exclusive Englishness; “Chaucer the father” is nationalist rhetoric which mediates thirteenth century post-colonialism and nineteenth-century colonialism.
“위대한 번역가”(Great Translator), “철학적 시인”(Philosophical Poet), “고딕 시인”(Gothic Poet), “영국의 호머”(English Homer), “신의 풍요”(God’s Plenty)를 가진 시인, “명확한 이성의 지팡이”(Lucid Shafts of Reason). 이들은 오백년 이상의 수용의 역사를 통해 후대 시인들이 초서에게 붙여준 별명들이다.1 이러한 별명들은 초서의 이미지가 그의 독자들과 시대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였으며 ‘저자’로서의 초서가 하나의 수용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과 역사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초서의 변함없는 별칭은 바로 그가 “영문학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초서의 이러한 부성은 드라이든(John Dryden)의 『고금우화』(
하지만 “영문학의 아버지로서의 초서”는 시인 자신이 묘사해낸 아버지들의 모습처럼 비판적으로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한다. 그의 『캔터베리 이야기』(
어쩌면 ‘부성’이 지니는 문제는 프로이트 이후에는 더 이상 새로운 화두가 될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초서가 지닌 “영문학의 아버지”라는‘저자로 서의 기능’(author function)에 비추어 본다면 좀 더 흥미로운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저자의 권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글로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자란 무엇인가?」(“What Is an Author?”)를 읽는다.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 글에서 푸코 자신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게는 특별한 담화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들이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라는 무한한 담화의 장을 개척한 기원적 저자라는 것이다(114). 이러한 이론적 맥락에서 레러(Seth Lerer)는 초서도 이러한 “기원적 저자”의 범주에 든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영문학의 아버지로서 초서가 영문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담화의 장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11). 하지만 초서를 “영문학의 아버지”로 부르는 후대 수용은 하나의 해석적 환원에 해당한다. 그것은 『베오울프』(Beowulf)와 같이 초서 이전에 쓰인 고대영어 작품은 물론이고, 초서 동시대의 시인이었던 랭란드(William Langland)나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이러한 해석적인 문제와 더불어 본고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후대 시인들의 초서의 부성에 대한 집착은 영국의 ‘국가민족주의’(nationalism)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초서를 “영문학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작가의 경우 초서가 영국 민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고유성’—이 두 단어는 모두 영어의 ‘the proper’혹은 라틴어의 ‘proprius’와 연관성을 지닌다—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4 바워스(John Bowers)가 이야기 하듯 중세 후기에 발현된 영국 민족주의의 목표 중 하나는 공동체 의식을 폴리스(polis)에서 파트리아(patria)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도시와 같이 구성원들이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사회에서 국가와 같이 추상적인 공동체로 옮기는 과정이기도 했다(57). “파트리아”는 “조국” 혹은 “부국”(fatherland)으로 번역되는데, 따라서 이의 성립은 민 족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강한 부성의 탄생을 시사하기도 한다.5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초서의 “부성”을 영국 국가민족주의의 탄생과 결부시켜 연구한다. 먼저 우리는 13세기 말부터 주로 탈식민주의의 일환으로 발전된 영국의 민족주의에 비추어 초서가 생산한 텍스트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고의 후반부에서는 영국의 팽창적 민족주의와 긴밀히 연관을 맺는 19세기의 초서 수용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섯 세기나 떨어져 있는 상이한 시대에 발전된 서로 다른 성격의 영국 국가민족주의를 초서에 비추어 연구하게 되는데, 민족주의자로서의 초서는 이 두 역사성의 간극과 차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부성의 수사(修辭)로서 기능한다.
1Deschamps Brewer 1권 41, Usk Brewer 1권 42, Lydgate Brewer 1권 44, Ascham Brewer 1권 99, Dryden Brewer 1권 160, Wordsworth Brewer 1권 247. 본고(특히 후반부)는 수용연구의 성격이 강하다. 초서의 후대 수용은 스펄전(Caroline F. E. Spurgeon)과 부루어(D. S. Brewer)의 초서 수용전집—『오백년간의 초서 비평과 인유』(Five Hundred Years of Chaucer Criticism and Allusion, 1357-1900), 『초서, 비평적 유산』(Chaucer: the Critical Heritage)—에서 주로 인용하였다. 스펄전의 책은 1권이 1부, 2권이 2, 3부로 되어있는데, 책의 각부들은 각기 독립적인 쪽 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권수가 아닌 부수를 기준으로 책을 인용하였다. 2초서의 15세기 수용을 강조하는 세스 레러(Seth Lerer)는 “계관시인 그리고 영문학의 아버지로서의 초서는 15세기 필경사, 독자들, 그의 시의 모작자들의 구성물”(3)이라고 말한다. 가령 리드게이트는 그의 『트로이의 서』(Troy Book)에서 “고귀한 초서 영국의 시인. 영국 시인들 가운데는 처음이요, 그의 금로(金露)를 입은 수사법은 훌륭하여라” (Spurgeon 1부 24)라고 찬양하였다. 3리드게이트 이후 초서의 “부성”은 호클리브(Thomas Hoccleve), 캑스턴(William Caxton), 시드니(Sidney), 스펫(Thomas Speght), 드라이든, 고드윈(William Godwin), 해즐릿(William Hazlitt), 사우디(Robert Southey), 헌트(Leigh Hunt), 아놀드(Matthew Arnold) 등에 의해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주목할 점은 우리 동시대의 대표적인 초서 학자 중 한명인 리 패터슨(Lee Patterson) 조차도 “초서는 우리 탈중세 시대에 살았던 최초의 시인이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시인이요 영문학의 아버지이다”(15)라고 말한다. 따라서 초서의 부성은 현재 진행중인 셈이다. 4초서와 영국 국가 정체성을 연결 짓는 후대 작가들은 많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에 경우는 국가민족주의자로서 초서가 지닌 고유성과 소유성을 강조한다. 가령 캑스턴에게 초서는 “존경할 만한 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영어로 된 웅장한 연설의 기원자이자 윤색자”(Spurgeon 1부 58)이다. 또한 드라이든은 “초서는 . . . 처음으로‘우리의’황폐한 언 어를 장식하고 확장시켰다”(Spurgeon 1부 273)라고 평하며, 네어스(Robert Nares)는 “초서, 가우어, 리드게이트, 호클리브는 ‘고유히’ 영국적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때로부터 우리의 언어는 더 이상 색슨족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Spurgeon 2부 138)라고 강조한다. 5스미스(Anthony D. Smith)는 국가 정체성 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민족성의 핵”(ethnic core)”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결국 상상적인 “거대 가족”으로서의 국가 정체성 형성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 근원적 믿음에는 항상 상상적인 “공동의 조상”(common ancestry)이 존재한다(19-42).
콜튼(G. G. Coulton)은 “유럽이 하나의 가톨릭교회와 라틴어라는 하나의 식자층 언어만을 가지고 있는 한 국가민족주의는 발전할 수 없었다”(15)라는 말로 중세 민족주의에 대한 담화를 연다. 사실 이는 여전히 우리가 중세 민족주의의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일지 모른다. 국가민족주의에 관한 사람들의 통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18세기 이후의 현상이라는 것이다.6 전근대 시대의 ‘국가’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며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7 하지만 최근에 전근대시대의 국가민족주의가 이론적으로 설득력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 예로 터빌-피터(Thorlac Turville-Petre)와 같은 학자는 『국가로서의 영국: 1290년에서 1340년 사이의 언어, 문학 그리고 국가 정체성』(
터빌-피터의 책은 13세기 역사 기록자이며 지도 작성자였던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로부터 시작한다. 터빌-피터에 의하면 패리스는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국 국가정체성의 타자로 이해하기 시작한 저자였다. 가령 패리스는 1237년에 “영국이여, 한때는 지역 중 으뜸이요, 열방의 안주인이었으며, 교회의 거울이었으며, 종교의 귀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조공 바치며, 타락한자들에 의해 수탈당하고, 천박한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1)고 한탄하였다. 패리스의 한탄에서 “타락한자들”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의 애가(哀歌) 자체는 역설적으로 라틴어로 쓰였지만, 이는 불어를 사용하는 귀족들과 로마 교황권의 영국에 대한 수탈을 염두에 둔 것이다. 터빌-피터에 따르면, 이때에 상용어로서의 영어는 국가 정체성을 정의함에 있어 공동체를 포함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타자를 배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연히 영국민들은 대부분 영어를 이해할수 있기에, 영어는 포용적 기능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으므로 영어는 이들을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배타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20-21). 이러한 점에서 영어가 국가정체성을 정의하는 하나의 표식으로 자리 잡았다면, 그것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들과 교황권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영국 사람들의 목소리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의미화 하는 일종의 탈식민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렇듯 13세기를 지나 14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영국 민족주의는 주로 일상어로서의 영어에 문화, 지정학, 혈통 등이 복잡하게 절합된 다채로운 국면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때로는 포용을 통해 때로는 배척을 통해 공동체를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14세기에 와서 초서의 작품에 발현되었다. 피어설(Derek Pearsall)은 초서를 “호전적인 국가민족주의의 자존심”으로 내세운 것은 후대 비평가들의 수용에 의한 것이며, 초서의 작품을 통해서는 다만 “언어적으로 구성된 외국인에 대한 혐오”(284) 정도만 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비판적으로 되새겨 볼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초서의 “외국인 혐오”(xenophobia)가 터빌-피터가 말한 국가 공동체를 배타적으로 정의하는 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스펜서(Edmund Spenser)를 비롯해 많은 후대 시인들이 초서를 지칭하여 “영어의 순결한 원천(源泉)”(Spurgeon 1부 133)이라고 했을 때 그의 “순결”함은 패리스가 강조했던 배타적인 영어 사용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스펜서와 같은 초서의 후대 시인들은 초서의 작품에서 영어가 타자들 특히 그들의 언어를 배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족 언어의 순수성에 주목하려는 민족주의적인 수용과 관련을 맺는다. 사실 현재 초서의 정전에서 불어를 포함한 다른 외국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바워스가 지적하였듯 초서가 발전시킨 탈식민주의 서사로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초서는 분명 두 개의 언어를 사용 할 수 있는 화자들—즉 기사, 수습기사, 여수도원장, 상인, 법률가—에게 한번도 프랑스어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다(55-56). 그리고 영국제도(諸島) 안의 타자들 가령 웨일스인, 스코트랜드인, 아일랜드인들은 아예 재현에서 제외되어 침묵한다. 그가 『선장의 이야기』(
주목해야 할 것은 초서의 런던어를 제외한 영국 지방 ‘방언’들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장원관리인의 이야기』에 나타난 단 한차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초서의 저작에서 다른 지역의 방언이 등장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소환리의 이야기』(
우리는 이러한 “내부 식민주의”라는 견지에서 초서의 런던과 런던방언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초서의 런던은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진다. 먼저 배런(Caroline Barron)이 지적하듯, 중세 말 런던은 이탈리아, 네델란드, 프랑스, 가스코뉴,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온 외국인 상인들로 북적되던 국제적인 거대도시였다(46). 따라서 분명 런던은 ‘다성성’을 지닌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런던은 배타적인 공간이기도 했는데, 런던은 그 자체의 사법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돌로 된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물리적으로 독립된 공간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성외부의 타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함으로써 그 존재를 정의하였던 것이다. 런던의 이러한 포용적이면서도 동시에 배타적인 면모 중에 초서의 저작들이 주로 강조하는 바는 후자, 즉 배타적인 면모이다. 초서의 『요리사의 이야기』(
가령 초서의 ‘1381년 봉기’에 대한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는 『수녀원 신부의 이야기』(
초서의 시는 또한 런던외의 지역에서 온 “외부인들”(foreigners)을 타자화 하는 경향을 보인다.9 터빌-피터에 따르면, 이미 14세기 초에는 문화적 이질성을 가져오는 지역색들과 방언에 대한 불안감이 태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국가정체성 정립의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특히나 중세 후반에 노포크(Norfolk)는 가장 불쾌한 지역으로 간주되었고 언어적 모욕의 대상이 되곤 했다(142-43). 이러한 지역주의는 #12302;총 서시』에 나타난 노포크 출신 장원관리인에 대한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초서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성마른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죽음만큼 두려워하였다”(I.587, 605). 이러한 지역적 타자에 대한 불안은 초서의 시에서 다시 “배타성”으로 드러난다. 초서의 순례자들 중 바스의 여인, 옥스퍼드 대학생, 웨어(Ware) 출신의 호지 등은 지방출신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주목할만한 것은 이들의 입을 빌어 ‘복화술’(ventriloquism)을 시도하는 시적화자로서 초서의 태도인데, 시인은 이들의 입을 빌릴 때조차도 해당 지역의 방언을 사용하거나 지역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초서는 단 한차례 북영국의 방언을 그의 저작에 재현하는데, 그것은 노포크의 보데스웰(Baldeswelle)출신의 장원 관리인이 그의 이야기에서 캠브리지 대학생들을 흉내 낼 때 나타난다. 이와 관련된 풍자적 의미는 초서의 지역주의와 관련되어 이미 연구가 되었다(Garba´ ty1-8). 말하자면 다른 지역의 언어가 냉소적인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초서의 런던어는 국가의 중심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과정은 다른 지방의 문화와 삶을 억누르는 일종의 ‘내부 식민주의’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민’-‘외부인’의 이항적 도식은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그의 순례객들을 구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부루어(D. S. Brewer)가 지적하듯이 초서가 그들의 순례자들을 구분하는 법은 주로 “신사”(gentry)와 “무뢰한”(churl)의 구분 즉 도덕적 잣대에 기초한다(“Class” 298). 하지만 초서의 이러한 구분에 있어 런던 외부의 지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거의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령 『캔터베리 이야기』의 「필사본 묶음 I」은 이러한 사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데, 방앗간 주인, 장원 관리인, 요리사 등과 같은 파블리오 이야기의 화자들 중 최소 장원관리인과 요리사는 각각 노포크와 웨어(Ware) 출신인 “외부인”들이며, 방앗간 주인도 패터슨의 역사적 재구성에 따른다면 런던 외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창조했을 확률이 높다.10 물론 우리가 『요리사의 이야기』와 같이 중단된 서사를 통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없지만, 이야기는 몸을 파는 아내를 둔 불량 견습공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중단된 서사는 웨어와 같이 런던 외곽지역으로부터 온 지역적 타자가 그의 시각으로 런던 내부의 갈등을 재현하였을 확률이 많으며, 특히 월러스(David Wallace)에 의하면 요리사의 교향인 웨어는 1381봉기 때를 비롯하여 중세 말 폭동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167). 초서가 만약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이들 지역적 타자들 특히 악명 높은 지방으로부터 온 화자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면, 그의 민족주의는 런던이라는 국가의 ‘중심’의 관점에서 발전시킨 적대적 지역주의를 포함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에 주로 탈식민주의의 일환으로 태동하였던 민족주의는 14세기말 초서에 와서는 그 성격이 변해 ‘내부 식민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큼 배타적적인 정체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피어설의 주장 즉 국가민족주의 견지에서 볼 때 초서의 저작들 자체는 “탈정치적”이고 “편향적이지 않다”(297)라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초서의 이러한 ‘배타적’인 또한 내부 식민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후대 작가로 하여금 그를 영문학의 “아버지”로 인식케 하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의 다음 부분에서는 13세기 말에 태동한 민족국가 운동이 초서 후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 수용되지를 살펴볼 것이다. 13세기말의 민족주의는 14세기의 초서의 ‘서명’을 거쳐 19세기에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화한다.
6민족주의에 연구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들인 앤더슨(Benedict Anderson), 홉스봄(Eric Hobsbawm), 겔너(Ernest Gellner)등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7가령 초서와 관계된 식민주의 비평에 있어 선구적인 책인 『초서의 문화적 지리학』(Chaucer’s Cultural Geography)에 묶여 있는 에세이들은 중세 국가민족주의에 대하여 전혀 일관적인 해석들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가령 책의 주편집자인 린치(Kathryn Lynch)를 포함하여, 딜러니(Sheila Delany), 쉬바노프(Susan Schibanoff)등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견지에서 중세 식민주의 담화를 파악하며, 대체로 국가민족주의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이다. 하지만 악바리(A. Suzanne Akbari)와 같은 학자는 오히려 중세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부정적이며, 중세 식민주의 담화가 “국가”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고 이야기 한다(103). 또한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피어설(Derek Pearsall)과 같은 학자는 홉스봄과 겔너와 같이 국가민족주의가 18세기 이후에 도래했다는 학자들의 이론을 따라 초서 자신이 발전시킨 것은 국가민족주의라기 보다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였으며, 초서의 글쓰기는 민족주의에 비추어 볼 때 “탈정치적”이며 “편향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한다(297). 8터빌-피터의 저작은 『국가로서의 중세 영국을 상상하기』(Imagining a Medieval English Nation)라는 책에 기고한 비평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터빌-피터 자신이 책의 결론이 되는 후기를 담당하였다. 이는 이미 언급된 자신의 저서를 보충하는 성격을 지닌다. 9실비아 쓰럽(Sylvia Thrupp)에 따르면, 중세 말 런던 사람들은 법률적 지위에 따라 구분되었다. 첫번째 범주는 “자유민들”(the enfranchised)이었는데 이들은 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후 세금과 의무를 짊어지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자유민이 아닌 사람들은 “외부인들”(outsiders, foreigners)이었다(2-3). 자연스럽게 시민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소수의 특권층을 이루었고 외부인들은 도시가 주는 특전으로 부터는 유리되어 있었다. 10패터슨이 지적하듯 방앗간 주인의 서사적 봉기가 1381년 봉기를 재현한다면, 이들의 모습에는 봉기의 주역이었던 해닝필드(Hanningfield, Essex)의 방앗간 주인 혹은 얼포드의 방앗간 주인 존(John Meller of Ulford)의 혁명적 모습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256).
인용문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14세기 후반 초서가 발전시킨 언어 순혈주의는 16세기의 스펜서, 17-18세기의 드라이든을 거쳐 19세기 작가들에게 전달되었다. 스펜서가 초서를 가리켜 “영어의 순결한 원천”이라고 명명한 후로 캐넌(Christopher Cannon)이 “기원의 신화”(myth of origin)라고 불렀던 것이 늘 초서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드라이든은 초서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서의 이야기들이 영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도 역시 초서는 그로부터 “영어의 순결성이 시작된” 작가였다(Spurgeon 1부 284). 또한 드라이든은 초서를 시작으로 영문학 정전의 정립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가령 그는 “스펜서는 한차례 이상 그의 몸에 초서의 혼이 옮겨졌다는 사실을 암시했는데, 이는 초서의 죽음 이백년 후에 그가 초서에 의해 탄생되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밀턴 역시 스펜서가 그 자신의 원조임을 인정하였다” (Spurgeon 1부 272)라고 말한다. 따라서 드라이든은 초서로부터 스펜서를 거쳐 밀턴에 이르는 중세말엽으로부터 초기근대(early modernity)까지의 영문학 정전의 정립을 시도한 것이다. 만일 밀턴의 작품이 스펜서의 복제이며, 스펜서가 초서의 모작에 불과하다면, 초서가 결국 영문학의 원본이며, 이러한 반복적 문학 생산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초서가 자신을 고전 자들—“버질, 오비드, 호머, 루칸”—사이에 위치시키길 원하였다면, 분명 그러한 희망은 드라이든이 『고금우화』에서 초서의 시를 호머, 오비드의 저작들과 같이 묶음으로써 이루어졌다. 하지만 드라이든의 민족주의적 수용은 또한 초서를 스펜서와 밀턴 같은 영국 작가들 사이에 위치시키길 원하였던 것이다.
스펜서와 드라이든의 비평은 초서의 19세기 수용에 영향을 미쳤으며, 13-14세기 때 주로 방어적 기제로서 태동한 언어적 민족주의는 오랜 시간을 지나 이 시기에 아주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물론 19세기를 단일한 역사적인 블록(bloc)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19세기는 단연 초서 수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먼저 이 시기에는 초서에 대한 담화가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가령 고전적인 초서 수용전집인 스펄젼의 『오백년간의 초서 비평과 인유』의 경우 다른 모든 시기를 합친 것보다 19세기 수용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브루어의 두 권짜리 수용전집 역시 1837년으로부터 193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상권보다 두꺼운 하권을 할애하고 있다. 19세기 들어 글쓰기와 출판이 급격히 팽창했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이는 놀라운 것임에 틀림없다. 19세기에 들어서 초서의 작품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퍼니발(Frederick Furnivall)이 엘리스미어(Ellesmere)와 헹워트(Hengwrt) 필사본을 연구, 편집하기 시작함으로써 초서의 정전이 점차적으로 확고히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들의 식민주의 팽창에 따라 자랑할 만한 민족의 문호가 필요하였던 영국내의 국수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있어 초서는 드디어 “영문학의 아버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스펜서와 드라이든의 경우에서 보듯 초서는 19세기 이전에도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영국의 민족성과 결부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의 초서의 입지는 그다지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예로 시드니(Philip Sidney)에게 초서는 비록 “용서될 수 있더라도 여러 가지 결핍을 안고 있는” 시인이었다(Spurgeon 1부 121-22). 그리하여 초서는 시드니의 독서목록에서 빠져야 했다. 엘리자베스 쿠퍼(Elizabeth Cooper)의 경우는 초서가 아닌 랭란드를 영국 최소의 시인으로 간주하였고(Brewer 1권 198), 사무엘 존슨에게 영국 최소의 시인은 가워(John Gower)였다(Brewer 1권 208).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초서는 이상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시의 문헌적 가치와 정통성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찾아 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만이 “초서의 시는 저속하고 하찮으며 그의 명성은 오직 그의 시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고풍스러운 속성 역시 초서가 “『농부 피어스』(
리 헌트(Leigh Hunt)의 『시인들의 잔치』(
이 무명의 『에딘버러 리뷰』(
1848년에 쓰인 매콜리의 초서의 비평은 더 이상 방어적 기제로서의 발전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로 보기에는 어렵다. 매콜리에게 초서는 인용문에서 보듯 영국의 대륙 땅에 대한 지배욕을 표현하는 수사였다. 바워스 같은 학자들이 『캔터 베리 이야기』가 랭카스터 왕조의 대륙에 대한 제국주의적 팽창에 맞물려 수용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볼 때(53-66), 매콜리의 초서 읽기는 최근 초서 비평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비교적 정확히 중세후반 초서와 연계된 언어 제국주의를 이해한다. 몇 년 이후에 밀만(Henry Milman)은 “초서의 사고, 성격, 언어는 영국적이었다—이것은 결단코, 확정적으로 거의 자랑스럽게 영국적인 것이었다”(Spurgeon 3부 24)라고 평한다. 초서가 드디어 “호전적인 국가민족주 의의 자존심”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팽창주의와 결부된 호전적 민족주의는 19세이 이후 초서의 텍스트를 편집하고, 번역하는 것과 더불어 제도화된 초서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야 비로소 워즈워스, 헌트와 함께 혼(Richard Horne)은 『현대어 초서 시』(
11터빌-피터에 따르면 초서 이전의 중기영어 작가들은 제한된 지리적 범위에 국한된 글쓰기를 하였고 자신들을 “국가적 시인”이라고 주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서의 경우는 그러한 지역적, 지리적 범위를 넘어 “국가적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주장하였는데, 인용문은 그러한 사실의 근거가 된다 (216-17).
초서와 영국 민족주의를 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결코 한 시기만을 논해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시인의 선대와 후대를 동시에 살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초서와 영국 국가민족주의를 13-14세기 그리고 19세기라는 이질적인 두 시기와 그 역사성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처음의 시기는 일종의 탈식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가 대두되는 시기였다. 반대로 후자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맞물려 호전적 민족주의가 발현되었다. “아버지로서의 초서”는 이 두시기가 발전시킨 상이한 민족주의를 중계하는 하나의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13세기말로부터 14세기까지 주로 탈식민주의의 일환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의 권위를 대신할 모국어가 필요하였다면, 14세기 말엽의 시인으로서의 초서는 이 필요성의 발전, 생산물이었다. 하지만 초서의 민족주의는 후에 16-18세기의 수용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다른 성격을 지닌 팽창적 식민주의와 결합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가 주는 하나의 역설이다. 13세기 말 이후로 발전된 영국의 국가민족주의는 여러 번 서명되며 여러 가지의 의미로 전달, 수용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13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서 있는 민족주의의 전달자로 의 초서가 가지는‘저자로서의 기능’(author function)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흥미롭다. 먼저 그것은 초서 그 자신이 창조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민족의 목소리’로서 기능하여, 13-14세기에 발현된 ‘민족주의의 산물’혹은 19세기의 영국 민족이 그 집단적인 목소리를 찾은 ‘민족성의 은유’로 이해되어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초서가 13-14세기에 태동한 일종의 탈식민주의를 19세기의 팽창적 식민주의로 뒤집어 전달하는 민족주의의 ‘역설적’수사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