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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Truth about ‘Deformed’ Love in Carson McCullers’ The Ballad of the Sad Cafe 카슨 매컬러스의 ‘불구적’ 사랑에 관한 통찰― 『슬픈 카페의 노래』를 중심으로*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a truth about love -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a person’s passionate love and that same person’s loneliness and suppressed desires, a relationship that Carson McCullers (1917-1967) portrays in The Ballad of the Sad Cafe. McCullers, one of several brilliant writers from Southern America, managed to overcome her cruel situation and showed deep insight into the human condition, particularly in regard to the relation between love and isolation. The Ballad of the Sad Cafe, like her other works, examines the spiritual isolation and the agony of love that three lovers experience. The love in this story is a triangular relationship among the three main characters, Amelia, Lymon and Marvin Macy.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love described in this story are that each character falls into blind and passionate love for the person he/she loves, no matter how the beloved responds. Love also changes the lover, not the beloved, revealing the completely opposite nature of the lover. The opposite nature and the inner secrets that the love reveals about the lovers reflect their frustrated and suppressed desires, which is femininity and motherhood for Amelia, non-violent masculine power for Macy, and physical attraction and power for the hunchback, Lymon. These suppressed desires are rooted in the deep sense of frustration that they had to experience in their childhood. In short, the seemingly unconditional love of the main characters is not an ideal, altruistic love, but a reflection of their inner desires. This story, however, does not seem to criticize this kind of love but simply tries to give an honest picture of what love might be. It also admits that ‘deformed’ love is still better than no love (and consequently no stimulus) because what really damages and causes decay in human beings and in a community, is the state of boredom.


KEYWORD
love , isolation , loneliness , confinement , the suppressed desires , deformity
  • I. 들어가면서

    카슨 매컬러스(Carson McCullers 1917~1967)는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캐서린 앤 포터(Katherine Anne Porter)와 함께 20세기 미국 남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1917년 미국 남부 조지아(Georgia)주의 콜럼버스(Columbus)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문학과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등록금을 잃어버린 후에는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에 매진한다. 하지만 음악은 평생 매컬러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고, 음악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 (The Heart is a Lonely Hunter)과 「신동」( “ Wunderkind”)을 비롯하여 그녀의 작품들 곳곳에 나타난다. 심한 열병과 수차례의 뇌졸중으로 서른 살에 시력을 잃은 매컬러스는 왼쪽 신체가 마비되어 걷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형언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런 육체적 무력감과 고통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해 깊이 질문하고 사고하며 독특한 통찰을 끌어내었고, 이런 고뇌와 사고의 편린은 소설, 단편소설, 희곡, 에세이, 시 등 다양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서른 살 이후에는 창작 활동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신체가 불편해졌으나, 매컬러스는 1940년 스물 셋의 나이에 발표한 최초의 장편소설 『마음은』으로 이미 “천재적 작가이자 당대 미국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소설가”(Graver 587)라는 격찬을 받고, “독창적인 시적 감수성”(Ibarrola 572)에 있어서 로렌스(D.H. Lawrence)와 포크너에 비견되며, 미국 문단에서 천재성을 지닌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인간 개개인의 “정신적 소외”(The Mortgaged Heart 259)가 자신이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라고 밝힌 바 있는 매컬러스 작품의 독특성은 전형적인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감정 및 관계를 탐구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회문제보다는 기이한 인물들의 내면세계에 천착하는 매컬러스의 작품들은 그의 천재성이 인정받은 것에 비해 미국문학연구의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미국문학사의 주요 특징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약속의 땅’인 신대륙에서 이상적 사회건설을 꿈꾸며 시작되었고, 미국문학은 이의 실현을 향한 미국사회의 부단한 노력과 좌절, 갈등과 모순의 과정과 함께 하며, 미국과 미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실험해왔다. 즉, 미국문학은 언제나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사회, 정치, 종교, 경제, 인종 등의 문제에 반응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절주의라는 전통을 세우며 미국의 사회문제에 거리를 두고 내면생활의 탐구에 집중한 랄프 왈도 에머슨(Emerson)이나 헨리 소로우(Thoreau) 같은 경우에도 부와 권력을 좇아 정신적 이상을 잃어가는 미국의 모습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역시 미국 사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매컬러스가 작품 활동을 하던 1940년대와 1950년대는 특히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거대한 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자부심과 극단적인 불안”(High 175)을 동시에 경험하기 시작한 때로, 당시 미국 작가들은 미국사회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심리적 문제들에 다양하게 반응했다. 한편 실험적 문학으로 당시를 주도했던 포크너를 비롯하여, 유도라 웰티(Eudora Welty),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등 상대적으로 “덜 현대적”(High 176)이었던 남부 작가들은 미국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작품화보다는 매컬러스처럼 자아 탐색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하지만 매컬러스는 그 어떤 작가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소외, 보편적 외로움”(Schorer 85)을 주제로 삼아 철저하게 인간내면을 응시한다. 매컬러스 역시 『마음은』에서 차별받는 흑인들의 상황 등 사회문제를 암시하고 있고,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도 아밀리아(Amelia)로 대변되는 소자본가와 마을 노동자들을 대비시켜 극단적 이익추구나 부익부 빈익빈 같은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풍자하지만, 이는 모두 소외된 인간관계와 내면에 대한 탐구의 일환이다. 미국문학전통뿐 아니라 남부 작가 중에서도 매컬러스에 대한 심도 있고 지속적인 연구가 미비한 것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고찰하며 매컬러스 재평가 작업을 시도한 이바롤라(Ibarrola)는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매컬러스의 작품 세계가 인종, 젠더, 계층 등 미국사회의 민감한 문제들과 대체로 무관하다는 점을 꼽는다. 즉 미국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소수계층과 집단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정당한 권리확보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하던 시대에 “이런 그룹들의 성적, 인종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작가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571)는 것이다. 이처럼 매컬러스는 독특한 문체와 뛰어난 작가적 감수성, 평탄치 않은 개인적 삶과 더불어, 미국사회와 역사에 대한 반응을 배제한 채 인간본성을 탐구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바로 이 점이 미국의 역사 및 사회적 쟁점과 함께 해온 미국문학의 전통과 연구에서 매컬러스의 상대적 소외를 초래해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매컬러스 작품에 대한 세밀한 고찰은 미국문학전통의 주요 흐름 속에서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던 작가에 대한 재평가의 일환이면서, 소외와 사랑에 대한 매컬러스의 통찰을 향유할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매컬러스가 창조하는 인물과 작품의 주제인 사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불구성’이다. 1930년대 후반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여섯 사람의 어긋나는 사랑과 좌절, 죽음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인 『마음은』에는 귀머거리와 정신적 장애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1951년 발표된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는 곱사등이가 주요 인물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고민과 외로움, 사랑 등으로 괴로워하며, 그들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집착적이거나 서로 어긋나며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의 배경, 주인공의 불구성, 관계의 양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두 작품은 유사하지만, 『마음은』이 매컬러스의 대표작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연구도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진 반면, 『슬픈 카페의 노래』는 부차적 위치에 머물러 왔다. 그럼에도 매컬러스 평생의 작품주제였던 소외와 사랑을 그 어떤 작품보다도 깊고 철저하게 탐색하며 인간 내면에 관한 보편적 통찰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에드거 알렌 포우(Edgar Allen Poe)나 찰스 브록든 브라운(Charles Brockden Brown),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으로 대표되는 미국고딕소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고딕소설은 이성주의적 질서와 형식보다는, 황폐한 고성 같은 우울하고 어두운 장소, “성적, 심리적 태도, 공포와 고통과 충동과 혐오감을 자아내는 사건과 분위기”(정진농 314)등을 설정하여 인간의 감정과 혼돈스런 내면을 탐구하고자 한다. 음산한 마을, 외모나 성격이 기이한 인물, 그들의 불가해한 감정과 행동, 폭력성 등 『슬픈 카페의 노래』의 외롭고 음울한 분위기는, 고딕소설의 통상적 특성을 잘 보여주면서, 등장인물의 내면탐색의 전조 역할을 한다. 또 미국 남부에 위치하면서도 “세상의 다른 모든 곳에서 동떨어진 듯 외롭고 슬픈”(7)2 마을은 신비적인 분위기를 창조하며 설화적인 문체, 발라드의 특성과 함께 이 이야기가 인물들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보다 보편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신화적 요소와 인간 내면에 대한 철저한 응시 때문에 매컬러스의 작품은 칼 융(Carl Jung)의 집단무의식의 원형이론을 바탕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융에 대한 가장 명료한 자서전 작가로 인정받는 베넷(E.A. Bennett)은 “심리학에 남긴 융의 가장 큰 공헌은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의 독특한 특징을 인지한 점”(116)이라고 평가하는데, 융은 “남자의 무의식속에는 여성에 대한 집단적 이미지”(A collective image of woman existed in a man’s unconscious)가 존재하며, “이런 이미지에 따라 여성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런 원형적 이미지를 아니마(the anima)라고 부르며, 아니마에 상응하는 원형적 이미지가 아니무스(the animus)로 여성이 무의식 속에 갖고 있는 남성에 대한 집단적 이미지를 말한다. 이 두 개념을 바탕으로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인 아밀리아와 라이먼(Lymon), 마빈 메이시(Marvin Macy)의 집착적이고 어긋나는 사랑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잘못된 대상에게 투사되어”(Park 261) 부정적으로 작용하면서 낳게 된 비극적 결과로 해석된다. 이 이야기에 묘사되는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의 삼각관계는 이성으로 설명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비합리성과 즉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무의식적 성격을 띤다. 또한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실제 장소라기보다는 소외된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세 주인공의 관계 역시 보편성을 내포한 원형적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드러나는 사랑의 양상은 그 원형적 특성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세 주인공이 보여주는 부정적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그들의 개인적 삶의 경험에서 유래하며, 각자의 억압된 욕구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가 함께 논의될 때 보다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발달한 정신 분석학의 영향과 에릭 프롬(Eric Fromm)을 필두로 1950년대 이후 유아기의 경험과 무의식적 억압이 사랑에 대한 태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꾸준히 연구되고 대중화되어 낯설지 않은 문제이지만, 이런 이론의 발전에 앞서 매컬러스가 작중 인물들과 화자의 해석을 통해 쏟아놓는 사랑과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은 놀랍다.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지만 일방적이며, 그 헌신과 집착은 사랑의 대상을 만나기 전의 깊은 고독에서 유래하고, 개인적인 소외의 경험과 이로 인해 억압된 욕구의 표출이다. 본고에서는 『슬픈 카페의 노래』의 중심모티프인 세 주인공의 삼각관계에서 사랑의 감정과 고독, 억압된 욕구로 속박된 인간내면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고찰함으로써, 매컬러스가 평생 천착했던 소외와 사랑의 본질을 탐색해보고 삶에 대한 매컬러스의 통찰력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이후부터는 『마음은』으로 표기함.  2이 논문에서 『슬픈 카페의 노래』의 번역문은 필자의 번역임.

    II. 사랑의 비합리성과 불가해성

    이 작품의 중심축은 아밀리아, 라이먼, 메이시 세 주인공의 얽힌 사랑으로 아밀리아는 자신의 집에 나타난 떠돌이 라이먼을, 라이먼은 아밀리아의 전남편 메이시를,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일방적이고 집착적으로 사랑한다. 세 인물이 보여주는 삼각관계의 구도는 남부의 작은 마을과 외부 세상, “마을 한 가운데 있는 가장 큰 건물인”(7) 아밀리아의 집으로 구성되는 배경에서부터 암시되는데, 아밀리아의 집은 마을 사람들의 일방적 관심의 대상이다. 공간적으로 아밀리아의 집이 마을의 중심일 뿐 아니라 아밀리아와 두 주인공도 마을 사람들의 주의를 독차지한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가난한 노동자들이라는 것과 아밀리아가 양조하는 기막힌 술에서 삶의 위로를 찾는다는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온통 아밀리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것이며, 그녀의 집이 카페가 된 후에는 그들의 기쁨과 슬픔, 위안, 활기와 우울함이 카페에 달려있고, 아밀리아가 특별한 관계를 맺는 라이먼과 메이시도 그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이에 반해서 세 사람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아밀리아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그들에 대한 순수한 연민이나 관심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보기에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라이먼도 아밀리아에게 카페를 열어달라고 종용하고 마을 사람들과 사귀지만,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자기과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며, 마을 사람들은 아밀리아가 두려워 그의 행동을 무조건 받아준다. 마빈 메이시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 그를 사랑으로 키워준 양모와 형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요컨대, 이 작품이 천착하는 고독과 일방적인 사랑은 카페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적 구도와 세 주인공에게 집중되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 상징적으로 예시되며,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 삼각관계가 드러내는 사랑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비합리성과 불가해성으로, 전혀 사랑에 빠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사랑받을 조건이 가장 없어 보이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치열하게 사랑한다는 점이다. 이익을 취하는 데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부자에다 강인하고, 남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아밀리아는 그녀가 서른 살이 되던 어느 봄 날 저녁, 가게에 나타난 남루한 떠돌이이자 꼽추인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다. 장대하고 과묵한 아밀리아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허리쯤 오는 라이먼은 탐식가이며 수다스럽고, 분란을 좋아한다.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허풍을 떨며 자기 과시를 즐기는 라이먼을 위해 아밀리아는 그 때까지 고수하던 규칙을 깨고 카페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고, 라이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조물주만이 속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31) 관계이지만, 아밀리아는 날이 갈수록 헌신적이 되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라이먼에게 잘해주고”(31), 라이먼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진다. 한편 아밀리아 덕에 육 년 동안 호사를 누리던 라이먼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귀향한 아밀리아의 전남편 마빈 메이시에게 첫 눈에 반한다. 메이시와의 결혼사실은 아밀리아가 라이먼에게 털어놓지 않은 유일한 비밀로, 메이시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근육질과 잘생긴 얼굴로 뭇 아가씨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한편 사악한 성품으로 악명이 높던 마을 청년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죽인 사람의 귀를 말려서 지니고 다니는가하면, 재미삼아 다람쥐들의 꼬리를 자르고, 마약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며, 자신에게 반한 아가씨들을 망치는 등 가학적인 잔인성과 폭력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이런 메이시도 아밀리아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꽃다발과 은반지를 들고 아밀리아를 찾아가 구혼하는데, 뜻밖에도 아밀리아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밀리아는 색이 누렇게 바래고 짧은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에 등장하는가 하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혼자서 가버리고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메이시를 쫓아냄으로써, 그의 사랑을 잔인하게 짓밟는다. 메이시는 열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한편 복수를 맹세하는 편지를 아밀리아에게 남기며 마을을 떠나고, 예전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되찾아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복역하지만 석방되어 귀향하게 된 것이다. 메이시는 라이먼을 꼽추라고 업신여기며 폭력을 가하고 경멸하지만 라이먼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추종하고 숭배한다. 아밀리아가 왜 라이먼을 사랑하는지 마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호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밀리아는 그 이유를 물어보는데, 라이먼은 “그가 교도소에 가봤기 때문”(63)이라고 답한다. 아밀리아의 사랑처럼 라이먼의 사랑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나 조건과는 거리가 멀고, 상대를 처음 만난 즉시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성적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랑의 무의식적, 비합리적 본질을 강조한다. 이런 불가해한 사랑에 대해 화자는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데,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세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전달할 뿐 아니라, 위에서 보듯이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종종 “생각하세요”(26), “기억하세요”(34)등의 명령형을 사용하여 독자에게 중요한 점이나 주의할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철학자 같은 여유를 지니고 자신의 견해를 펼친다. 이런 화자의 개입은 “시학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객관적인 사건의 문맥에서 이탈하는”(Kohler 55) 문체라고 지적되듯이, 작품 내 통일적인 사건전개를 방해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독자로 하여금 사건에서 잠시 떨어져 세 주인공의 불가해한 사랑과 그 본질에 대해 묻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런 화자의 역할에 대해 존 맥낼리(John McNally)는 “매컬러스가 창조하는 화자의 역할은 매우 복합적인데, 독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상인 동시에, 독자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McCullers has fashioned a very complicated fictive narrative from whom the reader receives the details of the story and about whom he is left to speculate)(40)라고 설명한다. 즉 사건뿐만 아니라 화자와의 상호작용으로 독자를 초대하여 독자가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 및 내면으로 파고들어 탐색하는 작업에 더 몰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펼치는 화자의 사랑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작품에서는 ‘사랑을 할 만한 사람’과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무너지고, 사랑의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포드햄(Fordham)은 사랑의 대상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의 무의식적 이미지의 투사라는 융의 이론을 빌려 “통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아니무스는 여러 남성에게 투사가 되는데, 이런 투사가 이루어질 때, 여성은 그 남성이 자신이 보는 모습대로라고(즉 투사된 아니무스에 가려져서) 믿게 된다. 이런 경우 그 여성이 그 남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56)라고 설명한다. 즉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형성된 이미지에 비추어 사랑하는 사람을 보려하며 이 때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에 대한 합리적 기준이 거부될 뿐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상식적인 방식이나 노력도 실패한다. 결혼식 후 첫날밤을 학수고대하던 메이시는 아밀리아가 자신을 모욕하고 거부하자,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급 선물을 사주고 자신의 모든 재산까지 아밀리아에게 양도한다. 미국처럼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물질은 욕구 충족이 중요한 매개이자, 사랑을 표현하고 얻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사랑은 절대로 ‘얻는 것’이 아니며 비싼 선물과 재산은 오히려 사랑을 잃게 만든다. 이런 모습은 아밀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정작 메이시의 선물 공세에는 끄떡도 않던 아밀리아도 라이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는 물질에 의존한다. 라이먼에게 가장 좋은 방과 음식, 카페의 주도권을 넘긴 것은 물론, 그가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마다 아버지의 유품과 자신의 귀중품들을 차례로 주는데, 이렇게 몇 년이 흐른 후에는 그녀가 가진 것은 거의 라이먼의 소유물이 된다. 하지만 라이먼의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려하고, 가시적인 물질이 그 첫 번째가 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한편,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감각적으로 상대를 자극하고 일시적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물질적 사랑의 표현이 결코 상대의 내면을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화자는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은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33)고 말하면서 둘 사이에 놓인 내면의 거리를 암시하는데, 본질적으로 그 내면의 거리가 물질적 다리로 이어지거나 좁혀질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며, 사랑과 물질의 상관관계에 관한 현대사회의 통념을 전복시킨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사랑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33)라는 화자의 해석이 암시하듯이, 사랑은 받는 사람보다는 하는 사람의 내면에 불을 붙여 그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작용을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35) 아가씨들을 모욕하고 무시하던 메이시는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밀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변한다. 아밀리아에 대한 사랑을 공언하기 전에, 그는 “동생과 양모에게도 잘하고 월급을 저축하고 절약을 배우며”(37), 일요일 예배와 종교집회에 참석하고, 욕설과 싸움도 하지 않으며, 숙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법도 배우는 등 이년동안 “완전히 새 사람으로 탈바꿈한다”(37). 아밀리아 역시 라이먼을 사랑하면서 “태도와 생활방식이 상당히 바뀐다”(31). 카페를 여는 것 외에, 늘 입던 멜빵바지 대신 엄마가 남긴 빨간색 드레스를 입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밀리아가 그동안 철저히 무시해왔던 여성성과 감정에 마음을 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무표정이던 얼굴에는 웃음이 돌고, 예전처럼 동네 사람들을 속여 돈을 챙기지도 않는 것 역시 사랑에 눈을 뜨면서 아밀리아가 보여주는 변화이다. 플라톤(Plato)에 의하면 원래 양성적이었던 인간이 신에게 대항할 만큼 힘이 커지자 제우스가 둘로 쪼개어 남자와 여자가 되었고, 그 이후부터 양편은 나머지 반쪽을 찾아다니게 되었으며, 사랑은 양성의 결합에 대한 갈망의 표현으로 본다. 융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개념으로 인간의 양성적 본질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것에 이어 정신분석학자 칼 스턴(Karl Stern)도 “온전한 인간은 양성적이다”(Man in his fullness is bisexual)(38)라고 주장한다. 매컬러스 역시 “본래 모든 인간은 남성이자 여성이다”(By nature all people are both sexes)(The Heart 273)라고 믿는데, 이 작품에서 사랑은 지극히 남성적인 아밀리아와 파괴적인 남성인 메이시의 여성성을 발화시켜 잠시나마 그들이 보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런 여성성은 그들의 평소 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전혀 뜻밖이며 낯선 모습들로, 인간내면은 표면적인 모습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과 사랑은 그 복잡성에 자신을 열게 하는 촉매제라는 것, 또 어떤 사람이든 사랑할 수 있다는 보편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그 가능성이 발화하는가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기준의 설정도, 상식도, 예측도 어려우며 사랑은 사랑의 대상, 방법, 결과 모두에 있어 합리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임을 시사한다.

    III. 고독과 통제의 욕구

    사랑의 대상은 실제로 한 사람의 내면에 쌓인 사랑의 능력을 깨우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화자의 설명은 사랑이 근본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사랑은 잠시 아밀라아와 메이시의 극단적 남성성을 완화시키고 여성적 면모를 발화시켜 양성성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들의 삶은 대부분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서 단절된 삶이다. 이들이 왜 사랑의 감정을 ‘적절히’ 표출하지 못하고 사랑의 관계에서 단절된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비합리적이고 심지어 파괴적인 사랑에 빠지는가에 대해 이 작품은 개개인 안에 내재된 소외와 고독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특히 여기서 소외와 고독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통제의 욕구와 연결되며, 사랑은 마음속에 단단히 걸어 둔 통제의 빗장을 열고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기에 억제된다. 사랑이 억제되고 분출되는 계기를 만나지 못할 때 인간은 고독하며, 내재하는 고독을 마주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 강한 통제와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 그 틀 안에서 살아가기 쉬운데, 아밀리아의 경우가 그렇다. 죽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건물과 유산에다가 탁월한 재능과 사업 수완을 가진 아밀리아는 그 마을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9)이다. “큰 키에 골격과 근육도 남자 같고”(8), 사팔뜨기의 눈만 아니면 잘 생겼다고 할 만한 얼굴에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 주에서 최고의 술을 만들고, 기술 좋은 목수이며,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유능하게 다 하는 아밀리아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공짜나 외상으로 술이나 물건을 주는 일은 절대 없을뿐더러 빚 대신 이웃의 유일한 재산인 재봉틀을 서슴없이 빼앗는다. 한마디로 그녀의 아버지처럼 “혼자 사는 사람”(a solitary person)(9)으로 아밀리아는 아무도 필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이런 아밀리아의 유능함과 강인함은 그녀의 유일하게 무능한 점인 인간관계와 대조된다.

    아밀리아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툰 이유에 대한 위의 설명은 실리 중심적이며 권위적인 아밀리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즉, 아밀리아가 사람들을 대하는 기준은 이익과 통제이다.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더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면 가시적으로 ‘가장 쓸모 있는’ 돈을 벌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사실 아밀리아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필요한 것을 최고로 만들어 내는데 탁월하다. 널려진 재목으로 단시일에 외부 화장실을 세우고, 돼지잡기에 좋은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여 질 좋은 소시지를 만들어 최고가에 팔고, 늪지에서 자신만의 비법으로 최상의 술을 양조하며, 독이 될 수도 있는 갖가지 식물과 약초를 배합하여 효험 있는 약을 제조해낸다. 혼자서 돈이 되고 유용한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모든 것을 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아밀리아는 실리위주의 미국문화를 상기시키는데, 이는 동시에 그녀의 지배욕구와 관련된다. 의사로서의 아밀리아는 인색하고 냉정한 평소 그녀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환자를 무상으로 치료해주고 환자들에게 쓰기 전에 자신에게 임상실험을 해서 약의 안전과 효과를 점검하며, 아이들에게 줄 약에는 단맛을 가미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잠든 후에 치료한다. 마을의사의 역할은 아밀리아가 타인을 배려하는 유일한 면이지만, 사물처럼 사람도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고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실현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병자는 치료 후 더 ‘쓸모 있게’ 된 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그들의 가시적인 호전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재확인하고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게 묘사되는 아밀리아가 유달리 “부인병”(a female complaint)(23)에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할뿐더러 말만 들어도 피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다른 면에서도 아밀리아는 자신의 경험 밖의 문제는 회피하고, 이미 익숙하고 자신 있는 일에만 집중한다. 어느 날 이상기후로 남부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오고, 아밀리아는 창문을 잠그고 집을 봉쇄하여 아예 눈을 보지 않는데, 이는 낯선 것을 거부하는 습성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해 본적이 없고 따라서 확실한 판단이나 통제가 힘든 사건과는 단절하고 살아가는 아밀리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규칙과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하고 ‘낯선’ 경험을 차단한다. 아밀리아와 라이먼의 관계를 보며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 놀란 일은 라이먼이 아밀리아를 그저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생전 그에게 아밀리아는 “꼬마”(Little)(45)였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아밀리아를 이름으로만 부르며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녀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모두 ‘거래’이며 좋은 술을 파는 일조차 “어떤 기쁨도 못 느끼는 거래”(27)일 뿐이다. 또 아밀리아는 인색하면서도 사소하고 불필요한 소송을 즐기며 돈을 쓰는데, 소송은 자신의 의견이나 능력, 경험 등을 확인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밀리아는 지독스레 이윤만 추구하고 오만한 ‘범접하기 힘든 강인한 독신녀’로 그려지는데, 이는 극단적인 감정적 무감각과 규칙의 준수, 자기 확신을 통해 고독과 불안을 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자아가 뜻대로 어떤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힘들 때에 “현실을 부인, 왜곡, 위장함으로써 불안을 경감시키기 위해”(홀 128) 방어기제를 사용하는데, 억압이 그 중 하나이다. 억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자기 통제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면모에 대해 캘빈 홀(Calvin Ha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밀리아가 친밀한 사적 관계를 차단하고 규칙에 의해 일상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내적문제와의 대면을 피하는 데 반해, 라이먼은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할 만큼 적막함과 어둠을 싫어하며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자신의 인기와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는 성향에서 그의 내면적 소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편 메이시는 극단적 폭력 행사를 통해 자신의 외적인 힘을 증명함으로써 내면의 외로움을 피하고자 한다. 세 주인공 모두 조화된 관계를 맺는 것에 힘들어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통제와 지배, 인기와 힘에 의존하여 외로움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세 사람의 행동은 방식은 다르지만, 홀이 지적하듯이, 그 원인이 그들 안에 더 깊이 내재해 있는 상처와 억압임을 암시한다.

    IV. 마조히즘과 사디즘―억압된 욕구표출의 두 양상

    사랑이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의 문제이듯이, 세 주인공의 외로움도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겪은 삶의 상처로 인한 내면적 소외 및 속박의 문제와 닿아 있다. 이 작품에서 좋은 위스키는 사랑에 비유되는데, 레몬즙으로 쓰여 보이지 않는 글씨가 불에 대면 보이듯이 좋은 술은 그 불과 같아서 “한 인간의 영혼에 쓰인 메시지”(15)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영혼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술처럼 점화된 사랑도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데, 이 작품에서 세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면 평소 모습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반대속성을 드러내고, 이는 그들의 내면에 억압되어 잠재된 욕구와 연관된다. 성장기동안 아밀리아는 여성과 여성성으로부터 소외되고, 라이먼은 외적 매력과 신체적 힘으로부터 소외되며, 메이시는 긍정적 힘을 지닌 아버지와 부성으로부터 소외되는데, 이런 내면적 소외가 어떻게 외적 행동과 관련되는지는 마빈 메이시와 동생 헨리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두 사람의 부모는 책임감 없이 낳은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 폭력과 학대를 일삼다가 유기하는데, 버려진 아이들은 대부분 죽거나 실종된다. 마빈과 헨리만이 양모를 만나 따뜻한 보살핌과 애정 속에 자라지만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 헨리는 소심하고 부드러우며 남성성이 결여된 심약한 인물로, 마빈은 여성성이 결핍된 폭력적인 인물로 성장하는데, 화자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그 뿌리임을 이야기한다.

    프로이드의 인격발달이론을 정리하면서 홀은 성장과정에서 “고통스럽거나 기분 나쁜 긴장을 배설하지 못했을 때 오는”(110) 좌절감과 이로 인한 결핍 및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동일시의 과정을 겪는데, 이 동일시는 한 사람의 총체적 인격이 아닌 “어떤 특징을 보고 그 점을 동일시하는 것”(116)이라고 말한다. 이런 좌절감과 불안의 해소를 위한 동일시의 방법 중 하나는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로 자기와 닮은 대상을 발견하고 자기 카텍시스(자기애)를 확대하는 것”(119)이다. 같은 조건에서 자랐지만 극명하게 다른 두 형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결핍된 것은 파괴적이지 않으면서 강인한 힘을 지닌 사람과 맺는 관계이다. 이런 결핍은 마빈에게는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극단적 방식으로 남성적 힘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성향을 발달시키고, 헨리의 경우에는 소극적 태도로 스스로를 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아밀리아에 대한 마빈의 사랑은, 자신처럼 힘을 갖추고 유능하지만, 파괴성을 배제한 남성적 힘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자 동일시의 양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메이시가 강인한 모습의 아밀리아에게는 반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아밀리아의 ‘여성스러운’ 모습에는 매력을 느끼기는커녕 경멸에 가까운 무관심을 보이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면에서 아밀리아에 대한 메이시의 열정은 아밀리아의 ‘총체적 인격’에 대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좌절된 힘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방편으로서의 동일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이해하기 힘든 또 하나의 사실은 사랑 받는 사람이 사랑을 주는 사람을 멸시하고 증오하며 배신한다는 것인데, 브라우튼(Broughton)은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노예이며, 사랑 받는 사람은 폭군이다”(38)라고 요약한다. 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한가에 대한 질문에 화자는 사랑이 타인을 속박하고자 하는 욕구와 속박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사이의 갈등을 내포함을 암시한다.

    즉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낱낱이 알고 “가능한 모든 관계”(34)를 맺으려는 욕구 때문에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의 증오를 낳고, 사랑을 몰랐을 때의 고독과는 다른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33)에 괴로워하게 된다. 이는 헌신적이고 이타적으로 보이는 사랑도 고독과 소유의 욕구에 지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라이먼에 대한 아밀리아의 사랑은 헌신적인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과 같으며, 나이가 확실하지 않은 라이먼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이 같다. 그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세상과 즉각적인 친밀감을 형성할 줄 아는 “보통 어린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성향”(an instinct which is usually found only in small children)(26)을 지녔다. 메이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은 “습지의 꼬마유령”(the child of a swamphaunt)(60)과 비교되고, 메이시를 부르는 그의 애달픈 목소리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the voices of children)(67)같으며, 심심풀이로 페인트칠하며 만족해하는 표정에도 “아이 같은 유치함”(something childish)(66)이 있다.3 불안정한 떠돌이며 아이 같은 라이먼에게 아밀리아의 집은 안정과 보호를 제공하는 자궁 같은 역할을 하며, 아밀리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은 미성숙한 아이를 연상시킨다. 아밀리아 역시 어디를 가든지 라이먼의 동행을 원하고 라이먼이 철저히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소유하고자 한다. 또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어도 라이먼은 아밀리아 엄마의 이복 자매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이렇게 보면 라이먼은 아밀리아의 삶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어머니와 연관된 존재인 동시에, 아밀리아의 숨겨진 모성성을 발화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랑은 아밀리아의 억압된 속성을 표출하고 남성성에 ‘묶여있던’ 그녀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사랑의 대상인 라이먼과 자신을 속박한다. 라이먼과 함께 살면서 아밀리아는 예전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참아낸다. 여행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바다를 보려고 여행하는 사람들”(63)을 경멸하는 그녀가 라이먼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동차를 사고 유흥을 위해서 도시로 나들이를 간다. 라이먼을 등에 업고 부리는 메이시의 온갖 무례함을 꾹 참으며, 심지어 라이먼이 메이시를 자신의 집에 들이는 것도 묵인한다. 왜 아밀리아가 메이시와 라이먼을 쫓아내지 않고 노예처럼 행동하는지 마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고, 화자는 “한번 누군가와 살게 되면 혼자 살아야 하는 상황은 엄청난 고문”(72)이라고 설명한다. 외롭지 않기 위한 아밀리아의 인내는 점차 스스로를 해치게 되는데, 메이시를 즐겁게 해주려고 자신을 경멸조로 흉내 내는 라이먼에게 상처받고, 두 남자에게 편안한 침대를 내주고 소파에서 자며, 메이시를 죽이려고 독을 넣은 음식을 자신이 먹고 앓게 되는 등 “최악의 일”(64)을 반복하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녀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65).

    라캉(Lacan)은 인간이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면서 필연적인 상실감을 내재화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사랑의 속성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연구한 에릭 프롬은 인간의 실존적인 분리경험과 이로 인한 내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합일을 추구하는 종교적, 문화적 의식 및 개인적 행태가 추구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하려 하는 것”(19)이라고 주장하는데, 복종을 통한 합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마조히즘(masochism)이며, 반대로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여 “자신을 팽창하고 강화하려는”(20) 성향이 사디즘(sadism)이라고 설명한다. 크라프트-에빙(Krafft-Ebing)이 명명한 사디즘은 원래 “성 대상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경향”(70)을 말하며, 반대로 마조히즘은 성 대상에게 고통을 받으려고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알골라니아’(algolagnia)가 “고통으로 인한 쾌락과 잔학성을 강조하는”(70) 보다 좁은 의미의 용어로 쓰이게 되면서, 마조히즘은 “모든 종류의 복종과 비하가 주는 즐거움”(71)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인간의 성충동에 초점을 맞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해석하는 프로이드에 이견을 보이며 보다 보편적 관계 안에서 이 두 성향을 논의하는 프롬은 사디즘의 폭력성과 마조히즘의 수동성 모두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의 도피”(18)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며, 이 둘은 “한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는 … 개인의 통합성이 결여된 관계”(20)의 다른 두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프로이드 역시 이 두 성향은 “해당 인물에게 항상 동시에 존재”(73)한다고 주장한다. 세 주인공의 내면적 결핍과 고독, 이로 인한 내적 욕구는 이들의 상호관계에서 통합성이 결여된 일방적이며 맹목적인 사랑의 형태로 발현되고 각자에 내재한 극단적 두 성향을 표출한다. 아밀리아와 메이시, 라이먼은 모두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타인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통해 힘을 확인하는 사디즘적 성향을 보이다가 사랑에 빠지면서는 어떤 경멸이나 불이익, 핍박도 감수하는 마조히즘적 태도를 보인다. 아밀리아는 메이시에게 폭군인 반면 라이먼에게는 노예 같고, 라이먼은 아밀리아 위에 군림하지만 메이시에게는 철저하게 굴종적이며, 메이시는 라이먼과 다른 사람들에게 극도로 폭력적인 반면 아밀리아에게는 무력하고 순종적이다가 가학적으로 변한다. 프롬은 또 “자신의 통합성”(one’s integrity)이 결여된 마조히즘과 사디즘적 사랑을 통한 합일은 일시적이며 진정한 욕구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녀의 눈이 라이먼에 “외롭게 묶여있듯이”(fastened lonesomely)(29) 마음도 그에게 속박되어 있는 아밀리아의 헌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먼의 건강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의 등은 더 구부러지고 머리는 더 커지면서 ‘불구성’이 심해진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아밀리아의 헌신의 뿌리는 무엇인지, 그 맹목적 사랑이 낳는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한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메이시와 라이먼의 사랑은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힘으로부터의 분리경험과 이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서 힘을 우상화하는 성향과 연결된다. 친부모에게 온갖 학대를 당하며 ‘약한 자’로서의 무력감을 철저히 겪은 메이시는 성장하면서 극단적 폭력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힘을 확인하는 한편 ‘약함’을 경멸한다. 이는 어릴 적 아무런 보호와 방어 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공포에 대한 상처가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추종과 사랑 역시 힘에 대한 라이먼의 좌절된 욕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라이먼과 메이시가 만났을 때 둘은 “범죄자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는 그런 시선”(57)을 교환한다. 라이먼이 메이시를 부러워하며 숭배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체적 결핍과 대조되는 메이시의 건장한 신체와 잘생긴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메이시가 자신이 못해본 온갖 종류의 폭력과 죄악을 저질러보고 교도소에도 다녀왔다는 폭력전과이다. 홀은 동일시의 두 번째 형태는 실패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처럼 “목표달성을 위한 동일시로서 본인이 바라는 목표에 이르고 성공한 사람을 대상으로 그를 본뜸으로써 동일시하는 것”(115)이라고 정의하는데,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사랑은 메이시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억압되고 좌절된 힘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폭력을 통해 지배욕을 실현하려는 욕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라이먼의 배신으로 아밀리아가 메이시와의 결투에서 진 후, 두 남자가 카페를 떠나면서 무자비한 난동을 부린 점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 때 라이먼은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던 힘에 대한 욕구를 마구 분출한다. 이처럼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인적 상처와 억압된 욕구는 왜 세 사람의 사랑이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학대하거나 자신이 학대받는 것을 견디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형태를 취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칼스턴은 “기술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받는 것에 대한 신경증적인 두려움이나, 다정함, 보호에 대한 공포 등을 수반하는데, 이는 공통적으로 모성과의 갈등이 요인이다”(27)라고 한다. 어머니의 부재와 이로 인해 결핍된 모성과의 관계는 아밀리아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라이먼과 메이시 역시 모성의 부재 및 갈등을 겪으며 자란다는 점에서, 모성과의 조화로운 관계의 부재는 세 주인공의 소외와 억압의 양상, 특히 사랑 받는 것에 대한 거부를 설명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겠다. 요컨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세 주인공의 사랑은 자신의 사랑의 대상에게만 향하는 일방적이고 집착적인 사랑이며, 이 사랑의 양상이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대조적인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결국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한 고독과 상처, 이로 인한 두려움과 억압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3모든 이탤릭체는 본인의 강조임.

    V. 나가면서

    아밀리아와 메이시, 라이먼의 일방적이고 열정적이며 파괴적인 사랑이 휩쓸고 간 한 슬픈 카페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보다 사랑의 조건에 관한 상식과 합리성을 철저하게 깨뜨린다. 사랑의 가능성은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진 지문과도 같아 아무리 사랑할 것 같지 않은 사람 안에서도, 아무리 사랑 받을 조건이 없어 보이는 사람 안에서도, 어느 순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값을 매기는 어떤 상식도 거부할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인간에 값을 매기고 평가하는 어떤 기준이나 관습, 통념도 거부하는 듯하다. 카페가 마을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한 노동자로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나 자신이 결국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66)을 잠시나마 잊고, 아밀리아가 제조한 최고의 술로 몸과 마음을 덥히며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들이 노동시장에서처럼 “인간 삶의 보잘것없음”(65)을 상기시키는 교환가치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만나는 곳이라는 점에서 카페는 『마음은』에서처럼 중요한 상징성을 띤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표면적 판단기준을 부수고 한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비밀이 사랑의 감정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을 숭고한 이타성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헌신적으로 보이는 사랑이 더 깊숙이 눌려있는 인간의 고독과 상처를 투영하며, 세 주인공의 사랑도 각자의 소외되고 억압된 갈망을 깨우는 힘으로서, 아밀리아는 메이시에게 유능하고 긍정적인 남성성에 대한 갈망을, 메이시는 라이먼에게 신체적 힘에 대한 욕구를, 라이먼은 아밀리아에게 억압된 여성성을 점화하는 대상이다. 또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랑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도 아니며, 세 주인공 모두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자신에 대한 수용이나 그 대상을 넘어선 타인들에 대한 사랑으로는 확대되지 못한다. 철저히 자신의 사랑의 대상에게 갇힌 사랑이자, 내적 결핍과 억압된 욕구에 지배되어 프롬이 성숙한 사랑의 요소로 지적한 ‘통합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불구적’사랑의 모습을 보이며, 이 사랑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대조적인 양상으로 표출된다.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토록 헌신한 후에 배신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떠난 라이먼을 기다리며 폐인처럼 살아가는 아밀리아를 볼 때 그래도 사랑이 할 만한 것인가라는 회의와 두려움에 대해서, 이 작품은 그래도 사랑은 필요하며 어쩌면 그렇게 때문에 그 사랑이 삶의 진실일 수도 있다고 제시한다. 자아 중심적 사랑을 낳는 인간의 외로움과 내적 억압 및 속박이 인간 삶의 일부이며, 고통과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외로움’에 괴로워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흔들고 깨우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음울한 분위기는 사실 사랑의 고통보다는 ‘권태’(boredom)의 상태인데, “인간의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것이 권태”(84)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더라도 사랑이 드러내는 진실에 대면하는 것이 삶이며, 사랑은 고정된 관념과 기준들이 지배하는 삶에서 전혀 다른 면을 포착하게 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이 마을에서 “좋은 사람들”(20)이라고 명명되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아밀리아의 외적 힘이 아닌 내적 약함을 보며, 이 약함이 약점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임을 통찰하는 사람들이다. 한 인간에 대해 고정되고 단단한 하나의 감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a mixture of exasperation and a deep, unnameable sadness)(20)의 복합적이며 상충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이 사랑의 자아 중심적 본질을 파헤치며 삶의 우울한 단상을 드러내지만,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열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도 상처 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수용의 시각 때문이다. 이 작품의 중심공간인 카페는 단절과 고독, 뜻밖의 사랑과 이로 인한 인간의 변화, 술과 모임, 사람들의 온기와 대화, 외로운 사랑과 복수, 열정과 경멸, 호기심과 속임수, 목숨을 건 육탄전과 방관, 배신과 절망, 폭력과 이별, 절망과 기다림 등 삶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안온함이 카페를 채우는 순간에도 불안과 긴장이 맴도는 곳이지만, 이곳이 바로 삶이 있고, 이야기가 생성되는 곳이며, 이곳에서 점화된 사랑은 ‘불구적’이라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촉발시키는 힘이다.

    화자가 소개하는 “열 두 명의 죽을 인간”(The twelve mortal men)(84)에 대한 에필로그는 언뜻 읽으면 앞의 이야기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슬에 ‘속박당한’ 죄수들의 모습은 주인공들의 내면적 속박과 미묘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 삶의 단면을 상징한다. 마치 서로 관계로 묶여 함께 살다가 언젠가는 함께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듯, 타의에 의해 묶여 있는 열두 명의 죄수는 함께 왔다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함께 돌아간다. 하지만 세 주인공의 물리적 자유가 그들의 내면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듯이, 그들의 신체적 속박이 내적 속박을 뜻하지는 않는다. “총을 든 간수,” “온종일 진흙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 찌는 듯한 햇빛, 땀 냄새”(84)등 아무런 자유도 찾을 수 없는 듯한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다른 목소리가 어울리며 곧 모든 죄수들이 합창을 한다. 음악이 매컬러스에게 희망의 원천임을 생각할 때 하늘과 땅을 울리는 이들의 합창은 상징적이다. 그들이 서로 묶인 상태에서 창조해내는 노래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여서가 아니라 서로 얽히고 묶인 가운데서 화음을 내는 것이 삶임을 시사한다. 매컬러스가 가장 천착했던 문제인 사랑과 소외에 대한 이 이야기는 극심한 신체적 불편함과 ‘불구성’으로 인해 외로움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매컬러스 자신이 길어 올린 서늘한 통찰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랑이 서로의 내면의 고독과 속박, 억압과 상처에 닿아있는 ‘불구적’ 사랑이라도 사랑은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이며, “인간을 정신적 소외라는 운명에서 구할 힘을 지니며”(Evans 120), 인간의 외적, 내적 불구성을 태우는 유일한 불도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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