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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노년드라마와 카르페 디엠* The Old-age Drama and Carpe diem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노년드라마와 카르페 디엠*

This paper purports to define the concepts and categories of the old-age dramas in Korea. The old-age question is one of the most acute social issues in the contemporary Korean society owing to its rapidly aging population. Nowadays it emerges a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socially-structured contradictions, even comparable to the traditional class-bound one, the age-old socio-political denominator.

In this context, this study focuses on the dual functions of the Korean old-age dramas. On the one hand, they pursue dramatic reenactment of contradicting realities of the aging society; they feature a theatrical search for the solution to overcome the ensuing predicaments, on the other. This duality is also one of the main characteristics of a Korean documentary movie, “My Love, Do Not Cross the River”. It vividly shows not only the ideal companionship and the truthful relationship of a Korean elderly couple but also their touching acceptance of inevitable farewell.

Finally, in conclusion, this study presents the findings from its heuristic exploration into the virtual society of the elderlies in the Korean dramas: Carpe Diem(seize the day) makes us Carpe Vitam(seize the life).

KEYWORD
노년드라마 , 고령사회 , 노년의 역사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보이후드’ , 카르페 디엠
  • 1. 사회의 고령화와 노년드라마의 탄생

    세상만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것은 이야기다. 서술체가 아닌 등장인물의 대화를 본체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드라마다. 최근 노년을 주제로 한 여러 드라마가 등장했다. 모든 시대 노년은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시대에 새롭게 노년이 드라마틱하게 재현되는가?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노년이 정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나이가 65세 이상인 사람을 노인이라 말한다. 일찍이 국제연합(UN)은 1999년을 노인의 해로 선언하고, 세계 각국에 노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UN에서는 고령화 비율(aging rate)을 기준으로 사회의 고령화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전체 인구 중 노인 인구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Aged Society),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Super Aged Society)라고 분류한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인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대수명의 연장도 압축적으로 이뤄냈다.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는 반만 년 역사의 꿈을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한국은 2000년 7월에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7.1%를 차지함으로써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이대로 가면 2017년에 고령사회의 길로 접어들 추세이며, 2026년부터는 초고령사회가 되리라고 전망한다. 이러한 전망도 평균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하면 더욱 앞당겨 질 것이다. 이 같은 인구학적 비상사태를 타개할 대책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오래 사는 것, 곧 100세까지 사는 것이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마침내 이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시점에서 노년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이 노년드라마가 등장한 일차적 이유다. 노년이 인생드라마의 끝장에 해당하므로 대부분의 노년드라마는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비극을 즐기는 이유는 어려운 국면에 봉착했지만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몰락하는 영웅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묘미는 반전이다. 우리는 그런 반전의 기대를 갖고 살기 때문에, “인생은 연극이다” 또는 “인생을 영화처럼, 영화를 인생처럼”이라는 말을 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밤이 돼서야 날기 시작한다.”는 말처럼, 인생의 종착점으로서 노년은 지난 삶에 대해서 성찰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노년은 성찰의 여유로운 시간이 아닌 사회의 고령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비참한 인생 막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노년드라마란 노년이 막장드라마가 돼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생겨났다. 우리시대 노년이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와 갈등을 서사의 골격으로 삼고, 노년이라는 삶의 국면에서 나타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재현하는 것이 노년드라마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로서 노년드라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노년드라마의 개념과 범주에 대한 고찰부터 할 필요가 있다.

    2. 노년드라마의 개념과 범주

    노년드라마의 개념과 범주를 정하는 데 일차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것이 문학에서 노년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다.1) 한국 현대 노년소설의 연구사를 정리한 류종렬은 노년소설은 시대적으로는 1970년대 산업화시대 이후의 현대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생겨난 새로운 소설유형으로, 노년의 작가가 생산한 소설을 지칭했다. 이와 더불어 소설의 내용적 측면에서 노년의 삶을 이야기의 중심주제로 다루고, 서술의 측면에서는 노인을 서술 자아나 초점 화자로 설정하여 서사를 구성한 소설이라고 정의했다.2) 그는 또 주제의 방향에 따라 노년소설을 2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현대사회에서 산업화, 도시화, 인구의 노령화에 따른 가족의 해체와 이에 따른 세태의 비정함을 드러내서 노인 삶의 소외를 문제로 부각시킨다. 둘째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노년의 원숙성과 지혜를 보여주거나 존재의 탐구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다. 전자가 문제라면, 후자는 답이다. 하지만 노년이 정상적 삶의 과정이 된 우리시대에서 과연 후자가 전자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답이 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딜레마다. 이 같은 딜레마가 노년소설 정의와는 다른 노년드라마에 대한 개념과 범주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다.

    위에서 류종렬이 내린 노년소설 정의는 노년이 아닌 작가도 노년소설을 쓸수 있다는 점을 무시했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다. 김윤식은 어느 날 갑자기 노인성 문학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이 등장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나라 문학 판에 이미 노인 작가군(65세 이상)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65세 이상의 작가들이란, 그들이 어떤 소재와 주제로 창작을 하더라도 그것은 원칙적으로 노인성 문학 범주에 드는 것”이라고 했다.3) 하지만 그는 65세 이하의 작가들도 노인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인성 문학을 작가의 연령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눴다. A형은 65세 이상 작가가 쓴 작품을 지칭한다. 여기서는 노인문제 뿐 아니라 청년문제도 다루어질 수 있지만 원리적으로 작가의 의식이 노인성의 사정거리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노인성 문학이라는 것이다. B형은 65세 이하의 작가들이 노인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룬 경우다. 이 경우는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시대성을 반영하여 작가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창작된 작품이므로 원칙적으로는 본격 문학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노년이든 죽음의 문제를 다루든 그것을 문자의 세계로 바꾸어 표현할 때야 비로소 문학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노인성 문학은 결국 문학의 범주 안에서 빛을 발할 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4)

    김미현은 기본적으로 김윤식의 문학론에 입각하지만, 생물학적 나이에 의거해서 노년소설을 정의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노인이 아닌 사람들이 오히려 노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작가의 연령이 노인성 문학을 나누는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양상으로서 노인성이라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이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노래했듯이 인간은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사실이 문학이 노년 문제를 다뤄야만 하는 본질적 이유다.5) “죽음은 허구이고, 삶은 진실이다. 바로 그것이 … ‘노인 문학’이나 ‘노년 문학’이 아닌 ‘노인성 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6) 우리는 이미 노인으로 태어났고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인간 실존적 문제를 문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노인성 문학’이라는 것이다. 결국 김미현은 “문학을 위해 노인성을 문제 삼는 것이지 노인성을 위해 문학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노년문학을 ‘노인성 문학’으로 규정했다.7) 이 같은 ‘문학 지상주의’에 근거한 노년문학 정의는 2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 문학을 위해 노인성을 다루는 ‘노인성 문학’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노년으로 산다는 것이 정상인 시대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데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 고령(화)사회에서 노인성은 인간 존재론적인 양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을 가진다.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지구 환경의 지배를 받다가 환경을 변화시키는 정복자로 변모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 말씀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로 수정할 만큼의 문명사적 진보를 이룩했다.8) 이 같은 지구역사의 신기원에 착안하여 네덜란드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 크루첸(Paul J. Crutzen)은 2000년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시대 용어를 제안했다.9)

    이 같은 거대사적인 변화와 함께 인간의 평균 기대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인구학적 구조의 대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당장 우리에게 닥친 문제다. 1900년까지 세계 평균 기대수명은 30세였다. 로마시대의 기대수명은 25세였다. 거의 천 오백년 동안 평균 수명이 5살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은 셈이다. 그런 인류가 지난 100년 동안 마침내 오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꿈을 성취했다. 머지않아 인류는 평균 기대 수명 100세라는 꿈을 현실로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꿈의 실현이 축복만은 아니라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회색빛 신세계’의 도래를 앞두고 있다.10)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노년층의 도래는 인류문명의 서광이 아니라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같은 ‘회색 쇼크’라 불리는 21세기 특유의 노년 문제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노인성이라는 존재론적인 양상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성찰하는 문학이 나와야 한다. 요컨대 ‘문학을 위한 노년’이 아니라 ‘노년을 위한 문학’으로 노년문학을 재정의 할 필요가 있다.

    둘째, 김미현은 우리가 삶을 문제 삼기 위해 죽음을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에, 노인성 문학은 “죽음은 허구이고, 삶은 진실이다”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11) 하지만 그런 전제는 노년문제의 본질을 못 보게 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과연 생은 유이고 죽음은 무이기 때문에, 생은 유의미하지만 죽음은 무의미한 것인가? 죽음은 허구고 삶은 진실이라는 노인성 문학의 전제는 탈주술화된 근대 합리주의가가 만들어낸 허구다. 전근대 사회에서 죽음은 신과 자연의 영역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질병의 진단과 치료뿐만 아니라 수명 연장과 죽음의 예측이 가능해지면서 질병과 죽음을 인간이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그런 맹신이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사장시켰다.

    늙는다는 것 그리고 죽음은 자연의 순리다. 노년과 죽음에 관한 지식을 축적해온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만이 그 순리에 저항하면서 사는 존재다. 과학과 의학은 죽음을 정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노년을 병으로 취급하고 죽음을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종말로 보는 세계관이 생겨났다. 이 같은 세계관을 문자 세계로 구현하는 ‘노인성 문학’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근대적 사생관을 해체하고 전통시대의 사생관을 복원하는 노년 문학도 필요하다. 이것이 앞에서 류종렬이 말한 긍정적인 측면에서 노년의 원숙성과 지혜를 보여주거나 존재의 탐구와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는 노년소설에 해당한다.12)

    하지만 우리시대의 딜레마는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시대의 노년에 대한 관념과 이상으로 고령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노년이 삶의 이례적인 현상이 아닌 정상이 된 우리시대의 특이성이다. 물론 늙음과 죽음이라는 삶의 비극을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문제로 구현하는 문학작품으로 카타르시스적인 승화를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류 문명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 역사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해야 한다. 노년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우리시대에서 노년문제는 더 이상 개인 당사자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존망을 가름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과 연관돼 있다. 따라서 이 같은 문명사적인 문제의식으로 노년드라마의 개념과 범주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메시지의 생산자가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를 포함한 제작자라면, 배우는 매체이고, 관객은 수용자다. 노년드라마는 일차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노년에 관한 것이라는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생산자인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 매체인 배우, 수용자인 관객의 대부분이 노년층이라는 충분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같은 노년드라마 개념에 입각하면, 노년드라마의 범주는 3 가지로 유형화 할 수 있다.

       2.1. ‘노인의 드라마(Drama of the old)’

    고령(화)사회를 맞이하여 노인 배우가 늘어남으로써 ‘노인의 드라마’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경향성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배우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순재다. 그리고 젊은 날 스타였던 여배우가 컴백해서는 아줌마 역할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세대 할머니’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말에 갑자기 타개한 김자옥이다.

    여러 얼굴을 가진 배우지만 나이 듦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바꾸지 않고는 배우로서의 역할을 지속할 수 없다. 수명의 연장으로 노인이 된 배우가 많아지면서 이들에게도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노인의 드라마’가 점점 더 많이 제작되는 구조적 요인이다.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보는 기준은 19세기 말 사회복지 정책을 처음 실시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정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때부터 은퇴하여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는 나이를 65세로 정했다. 그런데 그 당시 평균 기대수명은 43세였다. 지금은 2배 가까이 늘었지만 은퇴 연령은 예전 그대로다. 따라서 고령(화)사회를 맞이하여 노인의 나이를 재조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노인의 나이를 늘려서 정년의 나이를 연장하면 발생하는 문제가 일자리 부족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조부모, 부모, 자녀의 3대가 함께 구직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사회의 고령화로 인하여 그리고 그런 현실을 반영하여 노인 배우가 주된 역할을 맡는 ‘노인의 드라마’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질 전망이다

       2.2. ‘노인을 위한 드라마(Drama for the old)’

    사회가 고령화 되면 될수록, 노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을 위한 드라마’ 또한 당연히 늘어난다. 드라마 시장에서 ‘노인을 위한 드라마’와 ‘노인의 드라마’는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노인을 위한 드라마’의 수요를 ‘노인의 드라마’의 공급이 못따라 가는 현실이다.

    이 같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상태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노인 드라마 유형이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이 드라마는 자애롭고 관대한 어른이라는 전통적인 노인 상(像)을 완전히 파괴했다. 여기서의 이순재는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폭주노인’의 전형이다.13) 이런 ‘폭주노인’ 캐릭터는 신세대의 시선으로 그려진 희화화된 노인이다. 희화된 노인을 주역으로 한 “가족 시트콤은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무난한 내용으로 주로 수직적 관계에 있는 가족, 다시 말해 조부모, 부모, 자식에 이르는 인물들이 벌이는 해프닝”을 통해서 아버지나 가장의 권위를 조롱이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14) 이는 ‘노인의 드라마’라고는 할 수 있어도 ‘노인을 위한 드라마’라고는 인정해 줄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연극계에서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황금연못>, <해롤드 앤 모드> 등 노인 관객을 타켓으로 한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져 성공을 거둠으로써 재공연 되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2.3. ‘노인에 의한 드라마(Drama by the old)’

    진정한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노인의 시선과 관점으로 제작된 ‘노인에 의한 드라마’가 나와야 한다. 배우의 대부분은 젊은이다. 젊은 배우가 머리를 물들이고 가면을 쓰고 노인 연기를 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곧 노인이 가발을 쓰고 청년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실제로 그런 70~80대의 노인으로 구성된 ‘어르신 극단’이 2014년 6월에 결성되어, 11월에 첫 공연을 해서 화제를 일으켰다. 발단은 그 해 3월 충북 진천군 백곡마을에서 열렸던 음악회가 계기가 되었다. 음악회를 준비했던 문화기획자 채희정(38·여)씨는 마을 노인 회장 유방열(82) 할아버지에게 “연극을 해보시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예술대학에 입학했다가 “3대 독자가 광대짓 하게 놔둘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로 중퇴했던 유 할아버지는 “꿈을 이룰 기회”라고 반겼다. 원래 대본은 표준어였다고 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평생 써온 사투리를 몇 달 만에 바꿀 수 없었다. 연습할 때면 ‘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란 대사는 어김없이 “정신 있는겨, 없는겨”로, ‘그냥 놔두란 말이야’는 ‘아, 노란 말여’로 바뀌었다. 결국 이들에 맞추어 충청도 사투리로 대본이 개작됐다. 또 노인들은 말하는 것이 느려서 본래 40분이었던 공연시간도 한 시간 가량으로 늘어났다.15) 모든 것이 점점 빨라지는 우리시대에서 느리다는 것은 뒤떨어짐이고 단점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돌진적 근대화가 가속시킨 ‘빨리 빨리’의 속도가 어떤 재앙을 초래하며, 그런 삶의 태도가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행의 늪에 빠뜨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7080 어르신이 공연하는 연극은 근대화과정에서 상실된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심미안을 복원하는 치유의 기능을 한다.

    지방보다는 서울에서 먼저 실버 세대가 주축이 되는 연극을 통해 노년인구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극 운동이 일어났다. 극단 그림연극은 2008년부터 노년인구를 대상으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그 결실로 2013년에는 한국 최초로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프로무대에 데뷔하는 ‘시니어 씨어터’ <내 나이가 어때서?>를 공연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1일과 2일에는 송파구민회관에서 ‘꿈꾸는 노년은 아름답다!’는 주제로 ‘제1회 송파시니어씨어터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본 행사는 은퇴와 함께 제한되었던 실버세대의 사회참여와 세대 간의 소통을 ‘연극’을 가교로 해서 다시 잇는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16)

    ‘노인의 드라마’, ‘노인의 의한 드라마’, ‘노인을 위한 드라마’의 3 유형은 서로 연관돼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셋이 어떻게 삼위일체를 이뤄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느냐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 드라마가 ‘노년’ 드라마의 차원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노인의 드라마’, ‘노인에 의한 드라마’, ‘노인을 위한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는 노년이다. 노인이 ‘늙은 사람’을 지칭한다면, 노년이란 ‘늙어감’ 또는 ‘나이 듦’을 의미한다. 문학에서 노인이 아니라 노인성을 주제로 했던 것처럼, 드라마는 노인이 아니라 노년 그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나이 들고 늙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늙어 가느냐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문제를 성찰할 목적으로 문학가들은 ‘노인성의 문학’을 노인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문학으로 규정하고, 노인성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위해 노인성을 형상화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 한계는 노년 문제를 노인 특유가 아니라 인간성 일반의 문제로 보편화함으로써, 고령(화)사회의 도래라는 우리시대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미누아는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구 노년의 역사를 서술한 후, 노인에 대한 높은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노년의 전형을 만들어서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으로는 현실로 존재하는 노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년에 대한 전형이 이상화되면 될수록 사회는 그 전형에 비추어 노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향성이 생겨난다. 그 결과 노년의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의 귀감의 역할을 하는 전형이 실제로 존재하는 노년 삶의 문제를 은폐하고 무시함으로써 노인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17) 이제는 노년에 대한 추상적인 모델을 상정하고 노인들을 그 이론적인 이미지와 비교하여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방식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노인들을 전체 사회집단의 일원으로 포용함으로써, 사회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그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다.

    필자는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노년 현실에 대한 드라마적 재현과 새로운 노년 상(像)을 구축할 목적으로 노년드라마의 개념 정립을 시도한다. 이러한 개념정립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시대 노년 현실과 문제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치밀한 분석부터 해야 한다. 오늘의 노년 현실과 문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탄생이래로 축적된 역사가 21세기 인간 수명의 한계를 초월하는 특이점(singularity)에 거의 근접하면서 증폭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오늘날 노년이 드라마틱한 현실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부터 할 필요가 있다.

    1)노년소설의 개념과 범주를 규정하려는 시도로는 변정화, 「시간, 체험, 그리고 노년의 삶–이선의 <이사>와 <뿌리 내리기>를 대상으로」, 한국문학에 나타난 노인의식, 『한국문학에 나타난 노인의식』, 백남문화사, 1996, 176〜177쪽; 최명숙, 『한국 현대 노년소설 연구』, 경원대대학원, 박사논문, 2006, 11〜14쪽; 전흥남, 『한국현대노년소설연구』, 집문당, 2011; 류종렬, 「한국 현대 노년소설 연구사」, 『한국문학논총』 50 (2008), 501〜536쪽.  2)류종렬, 위의 글, 501쪽.  3)김윤식·김미현 엮음, 『소설, 노년을 말하다』, 황금가지, 2004, 250쪽.  4)위의 책, 280쪽.  5)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문학과지성사, 1989, 45쪽.  6)김윤식·김미현, 위의 책, 281쪽.  7)위의 책, 282쪽.  8)월리엄 맥닐, 홍욱희 옮김, 『20세기 환경의 역사』, 에코리브르, 2008.  9)Paul J. Crutzen, “The Geology of Mankind”, Nature, Vol. 415 (3 January 2002), p. 23.  10)테드 C. 피시먼, 안세민 옮김, 『회색쇼크: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반비, 2010.  11)김윤식·김미현, 위의 책, 281쪽.  12)이청준, 『축제』, 열림원, 1996; 김원일, 『슬픈 시간의 기억』, 문학과 지성사, 2001; 최일남, 『아주 느린 시간』, 문학동네, 2001.  13)후지와라 토모미, 이성현 옮김, 『폭주노인』, 좋은책만들기, 2008.  14)전성희, 「TV 드라마에 나타난 노인 이미지와 노년에 대한 인식–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중심으로」, 『드라마연구』 제35호(통합 제13권), 2011-2012, 55〜86쪽, 인용은 61쪽.  15)“연극에 빠진 진천 백곡마을 7080 어르신들”, 『중앙일보』, 2014년 9월 6일.  16)http://www.bisansw.or.kr/_rb_m/_view.html?Ncode=b7&number=1456&page=5.  17)조르주 미누아, 박규현·김소라 옮김, 『노년의 역사: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양 역사에 나타난 노년』, 아모르문디, 2010, 543쪽.

    3. 노년에 대한 역사적 고찰

    모든 시대에 노년은 있었다. 하지만 노년은 언제나 사회 속의 노년으로 존재했다. 노년의 풍경화는 사회와 함께 변해왔다.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노년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적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인구에 의해 부양받는 사회의 주변부로 있었다. 적어도 고령화 사회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늙는다는 것, 곧 노년은 개인적인 문제였지 사회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노년이 사회문제화 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노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의 역사를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노년의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18) 주체로서의 노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노인의 지위는 결코 자신이 정복해 취득한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를 지배하는 성인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범주로서 노인은 한 번도 이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19) 여성에게는 남성이라는 권력관계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적대자가 있다. 이에 반해 노인의 경우는 그런 적대세력이 없었다. “노인은 활동 능력이 있는 한 그 집단의 일원으로 통합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집단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나이 든 성인일 뿐이다. 능력을 상실하면 그 때에서야 ‘딴사람’으로 보이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여자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순수한 물체가 되는 것이다. 여자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노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이다. 그는 아예 교환 화폐도, 재생산자도, 생산자도 아니며, 단지 점에 불과하다.”20)

    그러다가 오늘날 노년이 정상이 된 시대가 도래 하면서 집단으로서 노년의 위상이 새로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 같은 문제제기와 함께 노년, 곧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의식화가 생겨났다. 계급의식을 각성하는 것으로부터 사회구조적으로 조건 지워진 집단으로서 계급이 탄생했던 것처럼, 하나의 사회 집단으로서 노년은 노년문제를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의식화하면서 나타났다.21)

    “문제가 없으면 역사는 없다”는 루시앵 페브르의 말처럼, 우리시대 노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노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시작됐다. 노년의 역사는 일차적으로 노년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를 해체했다. 그 신화란 전통시대 노인은 공경 받았는데, 근대 이후엔 천대와 경멸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영국의 역사가 팻 테인(Pat Thane)은 노년에 대한 사회사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전통 시대를 ‘노인의 황금기’로 규정하는 고정관념은 근대인이 만들어낸 편견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들에서도 오늘날보다 대체로 훨씬 가난했지만 많은 노인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과거에는 평균수명이 낮았던 이유는 매우 높은 유아 및 어린이 사망률 때문이다.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도 위험한 생애의 초기를 넘긴 사람은 60세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전통시대 많은 노인들이 가족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던 실질적 이유는 자녀들이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경우가 드물지만, 모든 연령층의 사망률이 꽤 높았던 과거에는 젊은이가 노인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18세기에는 유럽인의 1/3 정도가 60세가 되었을 때 한 명의 생존 자녀를 두었다. 이에 비해 21세기에는 노령자의 자녀수는 과거에 보다 적지만, 사망률이 낮아서 그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자녀들과 접촉할 수 있다. 더구나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진 가족이라도 언제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노년의 고독이 증대됐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테인은 가난하고 자녀가 없는 노인은 어느 시대에나 고독했으며, 특별히 우리시대 노년들이 더 고독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시대 노인이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반대로 불행한 잉여인간이었던 적은 없었다. 세비야의 대주교 이시도루스(Isidorus of Seville)가 고전고대의 노년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노년의 이미지와 경험의 다양성은 어느 시대나 유사했다. “노년은 많은 것을 동반한다. 일부는 좋은 것, 일부는 나쁜 것이다. 좋은 이유는 노년이 가장 폭력적인 주인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쾌락의 한계를 정하고, 욕망의 힘을 분쇄하며, 지혜를 증대시키고, 현명한 조언을 허락한다. 그러나 나쁜 까닭은 노령이란 그것이 초래하는 신체의 장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혐오 등의 측면에서 가장 비참하기 때문이다.”22)

    세네카의 말대로 “모든 이에게 노년은 하나의 유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시대 노년문제의 특이성은 인간 삶의 과정에서 노년에 직면하는 일반적인 문제들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보편화가 일어남과 동시에, 노년 경험의 다양성이 어느 시대에서보다 증대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알지만 답이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딜레마다. 결국 인류가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축적한 노년을 잘 살 수 있는 지혜들을 모아서 노년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노년의 역사를 조망한 팻 페인은 책 첫 장에 인용한 키케로의 말로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좋다고 여기는 처방을 내렸다.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23)

    18)시몬 드 보부아르, 홍상희·박혜영 옮김, 『노년: 나이 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책세상, 2002.  19)위의 책, 120쪽.  20)같은 곳.  21)노인 집단의식화와 노인혁명에 대해서는 김기봉, 「“만국의 노인들이여 단결하라”–시몬드 보부아르 『노년』의 테제와 연관해서」, 『철학과 현실』 2012년 봄호(통권 제92호), 131〜139쪽; 홍승표, 『노인혁명』, 예문서원, 2007.  22)팻 테인 엮음, 안병직 옮김, 『노년의 역사』, 글항아리, 2012, 55, 58쪽.  23)키케로, 천병희 옮김,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숲, 2005.

    4. 노년에 대한 드라마적 성찰과 카르페 디엠

    팻 테인이 사회사적인 연구를 통해서 근대에 만들어진 노년에 대한 편견과 허구를 해소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 결과가 약간 허망한 이유는 우리시대 노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과거의 실제 사실이 무엇이었는지 만을 밝히는 사회사적 연구의 한계다. 중요한 것은 의미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문화사가 주목하는 것은 노년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관념과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느냐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노년과 죽음의 문화사를 썼던 엘리아스의 지적은 통렬하다.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24) 근대 이전의 인간이 죽음을 극복이 아닌 수용의 자세로 맞이하고 종교와 제의라는 형식을 통해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면, 근대 이후의 인간은 과학을 통해 죽음이라는 자연을 정복하는 현세 중심적 삶을 산다. 그 결과를 김열규는 “죽음이 죽었다.”25)는 말로 표현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아는 인간만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근대는 노년과 죽음을 추방하고 젊음과 삶을 칭송했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로 노년의 현실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하지만 ‘영혼의 치유사’라 불리는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나이 듦을 무시하라고 부추기는 격언들은 실질적으로는 효력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 느끼는 만큼만 나이를 먹는가? 아니다. 대부분 그보다 더 나이를 먹는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도, 우리의 감정은 아무것도 변화시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감정은 그 사실을 속여서 모르는 척하도록 할 뿐이다. 물론 모든 착각이 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속 편한 격언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항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되면, 결국 환멸만 더 커지게 된다.”26)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화방지(Anti-Aging)가 아니라 노화의 기술(Art of Aging), 곧 “나이 든다는 것에 맞서 살아가는 대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나이 듦의 기술”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기 위한 삶의 기술들은 저마다의 자기 방식으로 자극을 줌으로써 인생이 아름답고 긍정할만한 가치를 기닌 채 잘 흘러가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설사 이 시기 낱낱의 고유한 삶은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삶이 잘 유지될 수 있게는 해줄 것이다.”27)

    최근 계속해서 우리시대가 직면한 노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노년드라마들이 등장하여 화제를 낳고 있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노년이란 인생의 겨울이다. 겨울이 지나면 한해가 끝나는 것처럼 삶의 종말로서 죽음이 찾아온다.28) 이 같은 노년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노부부의 일상적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줌으로써 2014년 연말을 장식한 영화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다. 어떻게 부부가 76년 동안 연인으로 한결같이 살 수 있었으며, 그렇게 살았던 부부가 죽음의 이별을 했는가? 첫사랑이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때라면, ‘끝 사랑’은 같이 죽어갈 사람을 찾은 경우다. 첫사랑은 사랑의 시작이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의 여운 때문에 영원히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된다. 마지막 사랑을 하는 ‘끝 사랑’은 사랑의 완성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죽음의 이별을 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추억하며 다시 만나는 것을 꿈꾸지만,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하기를 원하는 ‘끝 사랑’은 어떻게 이별할 것인가를 고뇌해야 한다. 미련을 남기는 사랑이 청춘의 첫사랑이라면, 미련 없이 잘 떠나보내는 것이 노년의 끝 사랑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신드롬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첫 사랑이 평생의 연인으로 지속되어 끝 사랑까지 이어졌다는 기적이다.

    노년이 일상이 된 시대에서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삶의 동반자는 부부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시간의 시금석을 통과한 관계가 부부다. 이전에는 가족을 위해 부부가 존재했다면, 오늘날에는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이 존재한다. 사회의 고령화가 진척될수록 점점 가족에 대한 부부의 우위는 커진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처럼, 끝까지 남아 있는 가족은 부부 밖에 없고, 자식이란 품 안에 있을 때만 가족일 뿐이다.

    노부부의 일상을 찍은 다큐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76년을 해로한 부부가 어떻게 이별할 것인가? 이별 식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영화에서는 인상적인 이별 의식이 행해진다. 죽은 자의 옷을 태운다. 죽음은 산 자와의 이별이지만, 죽은 자와의 재회다. 할아버지가 강을 건너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시장으로 가 죽은 아이들의 내복을 샀다. 3살짜리 3벌, 6살짜리 3벌, 남자애와 여자애 옷 각각 3벌씩이다. 가난때문에 살아 있을 때는 입히지 못했던 예쁜 내복을 할아버지가 죽어서 애들을 만나면 주라며 새 옷을 불에 태운다. 이승에서 저승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질이 비물질로 전화되어야 한다. 죽음이란 물질인 내 몸이 없어지는 것, 곧 갖고는 강을 건널 수 없는 육체의 옷을 벗는 일이다. 결국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인생이다.

    죽음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강을 건너는 일이다. 강을 건너기까지 이승의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을 두 번 건널 수 없다. 오직 현재만이 있다. 그 현재를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 젊은 시절이라면, 노년이란 그런 젊었을 때의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죽음의 종말 앞에서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 때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는 삶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만을 충실히 사는 시간이 노년이라면,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명언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카르페 디엠의 잘 알려진 의미는 “현재를 잡아라”다.

    2014년 화제를 일으킨 또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이후드 Boyhood>(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다. 이 영화는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을 촬영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메이슨은 6살 아이로 시작해서 대학생으로 성장한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다. 흔히 생의 모든 순간은 사라지고 결국 사진만이 남는다고 말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순간을 포착하는 카르페 디엠의 예술이다.

    그런데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생이 된 메이슨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는 대신 새로 만난 룸메이트와 그의 여자 친구 그리고 그녀의 친구와 함께 산에 오른다. 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룸메이트의 여자 친구의 친구는 말한다. “흔히들 순간을 붙잡으라고 말하지만, 난 이 말을 거꾸로 해야만 할 것 같아.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그녀는 카르페 디엠의 의미를 뒤집었다. 이러한 전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에서 메이슨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우 대조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아버지는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백수건달이지만, 어머니는 자식 딸린 이혼녀로 공부를 시작해서 심리학 교수까지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3 명의 남자와 이혼하고도 2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가 내일이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기 위해 이삿짐을 챙기는 아들에게 “네가 처음 찍은 사진을 기념으로 가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들은 그 사진을 내팽개친다. 그러자 어머니의 감정이 마침내 폭발한다. 그녀는 울부짖는다.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에서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과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산 정상에서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라는 말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강물을 두 번 건널 수 없듯이, 인간은 시간을 잡을 수 없다. 강물에 나를 맡겨야 수영을 할 수 있듯이, 순간이 나를 잡는 삶을 살 때 인간은 현재를 향유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을 잡고자 하지만, 늙으면 시간이 나를 잡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이 말을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2세>에서 멋지게 표현했다. “지금까진 내가 시간을 함부로 썼는데 이제 시간이 나를 함부로 대하네.” 결국 노년의 사라짐을 보여준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소년의 성장을 보여준 영화 <보이후드>는 시간에 관한 동일한 메시지를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으로 이야기했다.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웜홀(wormhole)’의 삶을 살게 하는 명언이 ‘카르페 디엠’이다. 원래 이 말은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에서 유래했다.29)

    현재를 즐기기 위해서는, 내가 순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나를 잡게 해야 한다. 인생의 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인 노년은 이것을 깨닫는 때다. 고은은 ‘그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30) 이처럼 노년이라는 인생 연극의 막장에서 사라지는 때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 곧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 비로소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노년드라마다.

    24)노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 2011, 12쪽.  25)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궁리, 2001, 160쪽.  26)빌헬름 슈미트, 장영태 옮김,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10가지 길』, 책세상, 2014, 10〜11쪽.  27)위의 책, 13쪽.  28)생태학적 관점에서 노년과 죽음을 다룬 드라마에 대해서는 이은경, 「죽음과 노년에 대한 문학적 연구 —김태수 희곡작품을 중심으로」, 『드라마연구』 제36호(통합 제14권), 2012–02, 133〜161쪽.  29)본래 ‘카르페’(Carpe)란 단어는 ‘뽑다’를 의미하는 ‘카르포’(Carpo)의 명령형이다. 하지만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는 이 말을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 이용하다” 의미로 사용했다(http://ko.wikipedia.org/wiki/%EC%B9%B4%EB%A5%B4%ED%8E%98_%EB%94%94%EC%97%A0).  30)고은, 『순간의 꽃』, 문학동네, 2001,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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