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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한국 연극의 새 발화주체 Der neue Sprechsubjekt von den koreanischen Theatern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한국 연극의 새 발화주체

In den letzten Jahren haben die bisjetzt angesammelten verschiedenen politischen und sozialen Konflikten und Unruhen in unseren Gesellschaft gleichzeitig explodiert worden. In dieser Situation, einige Theater versuchen, die politisch und wirtschaftlich unterdrückte Leute auf die B́ühne anzurufen und sie ihre Biografie mit ihren Körpern selbstsagen und handelen zu lassen. Dadurch kritisieren sie die verzerrten System, die unseren Leben steuern.

In der Tat haben solche theatralische Experimente schon mehrmals in Ausland versucht worden. Der sogenannte Begriff “Theater von Experten im Alltag” meint die Tendenzen, die von den Theatergruppen wie ‘Rimini Protokoll’ und ‘SheShePop’ geleitet werden. Es sollte doch angemerkt werden, daß die Schauspielern auf der unseren Bühne nicht nur die Experten im Alltag, sondern auch die Opfer von den konkreten politischen oder wirtschaftlichen Gewalt sind. Sie sind “Homo Sacer” in unseren Gesellschaft. Dieser Aufsatz will deswegen Theater, auf der solche Leute erscheinen, “Theater von Homo Sacer” nennen. In den Theatern, die dieser Aufsatz unterschen will, treten die alte Frauen von ‘Pyeongtaek Military Camp Town’, die Überlebenden von dem ‘Pusan Brother Welare Falicity’ und die entlassene Arbeiter aus dem ‘Cort Cortact Firma’. Sie sind doch keine traditionelle Schauspieler mehr, die ihre Rolle repräsentieren, sondern die Menschen, die ihre unterdrückte Freiheit mit ihren Handeln und Worten vor anderen Leute wiedergewinnen wollen. Dadurch gewinnen auch die Theaterräume neue Bedeutung als öffentlichen Räume, die in modernen Zeitaltern verloren worden haben. Die Körper von Homo Sacer verkörpern die Spuren von unseren pervertierten Gewalten auf der Bühne. Das ist eine von wichtigen Versuchen in unseren Theatern, die mit dem Name Theater die heutigen Gesellschaft kritisieren und den Thaterraum zu einem politischen Ort machen wollen.

KEYWORD
<숙자 이야기> ,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맴돌았다> , <구일만 햄릿> , 호모 사케르 , 자유로서의 말과 행위 , 공적영역 , 사이(inter-est) , 상호작용
  • 1. 서론

    “무대는 곧 세계다”라는 세익스피어의 말은 연극과 시대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대표명제다. 그러나 연극이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하며 또 무대화하는가에 따라 이것이 미학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 정치, 역사적 차원에서 내포하는 의미는 다르다. 급속도로 발달하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을 통해 매개에 매개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실재(The Reality)’가 여러 개의 복수의 실재들(realities)로 증강되는 속도와 그 양태는 갈수록 우리의 예측을 뛰어넘고 있다. ‘하나의 현실’에 대한 공통된 믿음은 사라졌고, 그중 어떤 것이 정말 사실인지, 가상인지, 매개된 것 혹은 환영인지 등의 구분은 사실 불가능하다. 20세기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던 재현의 담론이 21세기 동시대 예술 안에서 결정적으로 설득력을 상실한 이유다.

    이처럼 현실의 상(像)에 대한 보편적 틀이 사라짐에 따라 오늘날 연극은 그 어느 때보다 비판적인 자기반성적 토대 위에서 현실에 접근하고 있다. 이미 우리가 현실이라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특정 담론이나 매체에 의해 연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제 연극이 해야할 일은 반대로 이 연출된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허구성을 무력화하며, 이를 통해서 간과된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성을 적극적으로 현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네덜란드의 실험적인 연출가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반 휴벤(Robert van Heuven) 역시 오늘날 젊은 연출가들이 보여주는 실험의 근거를 이 변화된 현실에서 찾고 있다.

    이처럼 일상 속에서 미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현시하기 위해 오늘날 연극이 선택한 시선은 당연히 해체적이고 전복적이다. 연극이 극장 밖의 현실에 대해 확신하는 바가 적을수록, 그리고 그 현실이 더없이 완벽한 실재로 위장할수록, 관객이 일상을 지각하는 방식에 틈을 내고 그 사이의 공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존재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연극적 작업은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극장 공간은 하나의 대안적인 정치적 공공장소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물론 이때의 정치성은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이야기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 미학과 연계하여 자크 랑시에르 등에 의해 강조되는 정치성은 예술을 통해 특정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적과 나의 이분법에 기반한 감정적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스스로가 평등한 다원적 주체들 사이의 비판과 성찰, 토론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구성하는 장(場)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정치성은 흔히 정치극이라는 전통적 범주에 속하는 연극들이 그렇듯 비단 정치적 이슈를 극적 갈등의 소재로 삼아 이를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현실적 이슈에 대해 관객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시각을 구성할수 있도록 하려면 연극은 과연 그 이슈에 어떻게 접근하고, 공간화할 것인가라는 형식적 차원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결과적으로 무대를 논쟁과 토론, 성찰의 장소로 확장하는 실험으로 이어진다.

    본 논문은 이처럼 오늘날 극장 공간을 하나의 정치적 장소로 제시하는 다양한 실험들 가운데, 특히 전문배우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소위 사회적 타자들이 직접 무대에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날 것 그대로 현시하고, 이를 통해 극장 밖 매개된 현실에 대한 되묻기를 시도하는 작품들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최근 1, 2년 사이 우리 연극에서도 이런 작업들이 부쩍 행해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이들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왜곡된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낳은 불합리 및 모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회계층에 속한다는 점에서 해외의 다른 실험들과 구별지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공연은 정치사회적 혼란과 분열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진 최근의 상황에서 이러한 현실을 향해 한국연극이 선택한 새로운 발화의 방법이다.

    본 논문은 이들 공연을 보다 인문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에서 검토함으로써 대안적인 정치적 공공장소로서의 동시대 한국연극의 또 다른 가능성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동시에, 이러한 시도들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한국연극에서의 새로운 정치성 및 그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논문은 이들의 연극을 “일상의 전문가”2)를 넘어 “호모 사케르”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며, 이들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말과 행위, 즉 퍼포먼스의 의미를 인간에게 있어 “말과 행위”를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강조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극장에서의 행위는 그것이 전문적 배우의 연기가 되었건, 비전문적인 아마추어의 행위가 되었건 관객의 참여 속에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시도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1)Robert van Heuven, “Netherlands: the revolution of expierence”, in: UBU European Stages, NO. 48/49, June 2010, in: http://www.ubu-apite.org/shop/en/ubu-european-stages-in-pdf/46-ubu-european-stages-issue-48-49.html, 04. 04. 2011  2)“일상의 전문가(Experte im Alltag, expert of everyday)”라는 개념은 최근 리미니 프포토콜이나 쉬쉬팝, 폴커 뢰쉬(Volker Lösch) 등 비전문적인 아마추어 배우를 무대에 등장시키는 연출형식에서, 이들 무대에 등장하는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전문적인 연기훈련을 받아 역할을 재현하는 일반적 의미의 배우 및 그 연기론에 대해 스스로 차별화하는 개념으로서, 그 역할과 그 역할이 처한 사회적 상황은 그 자체가 일상인 사람들만이 보다 잘, ‘전문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본론

       2.1. 무대 위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오늘날 연극이 ‘진실된 삶’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존의 미학적인 표현 방식에 대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실재가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은 그 실험의 방향을 미적 이상에 대한 그간의 오랜 갈망을 버리고, 이 완벽해 보이는 실재가 사실 그때그때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담론에 의해 매개된 허구임을 폭로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다. 90년대 이후 공연예술의 지평이 그 어느 때 보다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연극과는 아무 관계없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이주노동자, 연금생활자, 실업자, 병자, 죄수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직접 무대에 서는 공연들이 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3)

    최근 1, 2년 사이 한국연극에서도 소위 “일상의 전문가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이런 연극들이 부쩍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기형적인 한국의 현대 정치사 및 현대정치사 및 특유의 왜곡된 시장구조가 낳은 사각지대에 놓인 특정 계층,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 발화의 내용은 해외의 사례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또한 비판적이다. 예컨대 이들의 존재 위로 우리 사회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심지어 역사의 숨겨진 맥락들이 날것의 상태로 교차된다. 한 예로 기지촌 여성들을 돕기 위한 각종 활동을 펼쳐온 ‘햇살 사회복지회’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해온 ‘행복공장’ 및 연극치료 단체 ‘해’와 함께 2012년 3월부터 4개월간 평택 기지촌 할머니들을 만나 일종의 ‘플레이백 씨어터’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들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을 모아 연극의 한 장면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2013년 서울변방연극제의 참가작이었던 <숙자이야기>다4). 무대에 오른 12명의 할머니들은 모두 70, 80년대 소위 ‘양공주’, ‘양색시’로 불리던 미군기지 주변의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무대 위에서 배고팠던 어린 시절과, 한 푼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이후 어떻게 기지촌으로 흘러들었으며 어떤 냉대와 편견을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왔는가를 그들의 늙고 병든 몸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무대는 이들 할머니들이 그간의 연극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개인적인 상처와 절망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당시 기지촌에 대한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언론의 영상기록 등이 사이사이 보태지면서, 당시 국가가 공식적으로 행한 공권력의 횡포, 예컨대 경제성장과 외화벌이의 이름으로 국가가 행한 성폭력 및 인권유린의 정황들 및 이에 대해 침묵하는 현실들이 아이러니한 질감으로 드러난다. 공연은 이들의 절망과 수치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때의 왜곡된 권력과 현재의 무책임한 망각의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같은 변방연극제 참가작이었던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맴돌았다>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부산지역 최대 부랑아시설로 성장했던 부산형제복지원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태를 다룬 작품이다. 연극은 모두 세 개의 층 위로 나뉘는데, 하나는 ‘유리바다’ 속 드라마이며, 또 하나는 당시 이 부산 형제복지원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한 언론사의 홍보성 영상기록 및 이 사건의 실제 피해자 한종선과 연출을 맡은 장지연의 인터뷰 영상이다. 마지막은 한종선이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 앞에서 증언을 하는 부분이다. 이 공연은 무고한 시민들이 당시 정부가 주도한 소위 사회정화의 명목 하에 무차별적으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는 물론 살해와 암매장까지 당해야 했던 끔찍한 비극들을 기록된 영상과 증언을 넘나들며 고스란히 드러낸다.

    앞의 두 공연이 전적으로 배우들 자신의 연대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면, 2013년 12월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었던 <구일만 햄릿>은 전체적으로는 세익스피어의 원작 <햄릿>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공연이다. 하지만 이 공연의 차별성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모두 기타 제조공장인 콜트콜택으로 부터 2007년 해고당해 아직까지 복직투쟁 중인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비록 이 배우들이 무대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원작 <햄릿> 속의 다양한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역할 이전의 한 해고 노동자로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감정을 유지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극중 인물과 상황에 접근한다. 이로써 이 공연은 <햄릿>이면서 동시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본인의 이야기가 된다.

    형식은 각각 다르지만 이들 무대 위의 인물들은 한 사람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특정 집단 내지 계층, 그것도 과거 또는 현재,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모든 제도적 권력 및 그 외의 공적인 관심으로부터 내몰려짐을 당한 자들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상의 전문가”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할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5)이라 말하면서 이들이 처한 이중적 배제의 상황을 강조한 바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모든 국가권력, 즉 국가의 최고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주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오히려 일방적으로 법을 멈출 수 있는 권한, 법을 멈추고 예외 상황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다. 달리 말해 주권은 법질서를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법을 가동하는, 생명을 법질서 외부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시키는 권한이라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 아이러니한 주권의 본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로 수용소를 들고 있다. 즉 수용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법이 완전히 유보될 뿐 아니라 사실과 법이 완전히 뒤섞여 있다. 수용소 안의 존재들은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 내부에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모든 주권이 설정한 ‘예외’는 단순히 법의 바깥으로 내쳐지거나 법과 무관한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권에 의해 배제된 상태로 주권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것은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같은 것이 불가능한 “비식별역”7)이다. 호모 사케르는 바로 주권에 의해 예외 상태, 즉 비식별 영역에 처함으로써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인간의 법질서 외부에 있기 때문에 죽여도 상관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인간의 법질서를 떠나 신의 질서로 편입될 수도 없는데, 그 이유는 법이 이들을 단순히 외부로 추방한 것이 아니라 배제의 형태로 자신의 법질서에 포함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사케르(sacer)’란 신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남이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8) 그들은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고 심지어 죽여도 무방한 존재, 아무런 권리 없이 단지 생명 그 자체만 가진 벌거벗은 생명이다. 배제된 채 포함되어 있는 존재, 이들이 바로 호모 사케르다.

    아감벤의 이러한 생각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동시에 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가권력의 끔찍한 모순을 보여준다. 물론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되는 존재’라 정의한 아감벤의 정의 자체에 집착하는 대신, ‘배제된 자, 법에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은 법에 의해 배제된 자’로서의 호모 사케르의 특별한 위치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아감벤이 언급했던 유태인 수용소를 포함 일부 전체주의 국가의 수용소에는 해당될 수 있겠지만, 보다 범위를 넓은 현대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이러한 물리적 제제의 방식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초점은 죽여도 되는 존재로서의 호모 사케르가 아니라, 분명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지만,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존권이나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한 상태로 법의 보호영역 밖에 존재하는 자들로서의 호모 사케르에 맞춰질 것이다.

    21세기 변화된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연극이 일상 속에서 간과되거나 배제되었던 사건이나 존재들을 적극적으로 소환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직접 무대에 서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단기간에 이뤄진 경제성장의 신화가 독재와 유신이라는 부정적 권력 시스템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아이러니하게 진행되어 온데다가, 이후 민주화 과정 및 연이은 시장자본주의 시스템조차 자기반성의 단계 없이 숨 가쁘게 유입되면서 곳곳에 혼란과 갈등의 흔적을 남긴 한국 사회에서는, 그간의 권력시스템에 의해 배제된 상태로 밀려난 호모 사케르의 존재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이면을 충분히 드러내고도 남는다. 혼란과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극단으로 진행되고 있는 최근 몇 년 사이, 스스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거울이고자 하는 연극이 이들을 자신들의 중요한 연극적 발화의 거점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 연극의 역사 속에서 풍자와 조롱의 이름으로 무대에서 사회에 대해 날선 시선을 던졌던 이들이 당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노예나 하인들이었다면, 이제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배제된 이들 호모 사케르에 의해 그 풍자와 비판이 동시대 연극의 이름으로 계속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적 타자들이 자신들의 서사를, 그것도 자신들의 몸으로 이야기할 때, 그 무대는 더 이상 예술적 재현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저한 타자의 공간이자 하나의 대안적 장소,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무대 위 이들 배우들의 연기가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연기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박탈당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정치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에 대한 토론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정치적인 발화행위로 봐야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빌자면 이들의 말과 행위는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의 말과 행위다.

       2.2. 인간조건으로서의 “말”과 행위, 사라진 “공적영역”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첫머리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전제조건으로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를 들고 있다.10) 이 가운데 ‘노동’은 인간이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남기 위해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며, ‘작업’은 이를 넘어서서 보다 영속적이고 인공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활동이다. 마지막으로 ‘행위’는 앞의 두 경우처럼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이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공동의 세계에 대해 논의하는 활동을 말한다. 세 개의 활동은 모두 내적으로 연결되어 인간의 삶을 구성하지만, 이 가운데서 아렌트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바로 행위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서, “역사의 조건을 창출”11)하는 능동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다원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바, 이때의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근간으로 한다. 동등성이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차이성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강조한 행위는 그가 다른 사람과 분명 다르고(차이성), 이러한 다름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동등함) 하에 자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렌트는 이것을 동시에 자유(freedom)라고 정의하면서, 이 자유는 행위가 그러하듯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한다. 말과 행위는 이 자유의 핵심 매체다.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은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행위하는 한 (…) 자유롭다.”13)그런데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러한 말과 행위는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사람들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말과 행위는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게 자유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들춰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공간, 그러한 공간을 아렌트는 “공적영역(public realm)”이라 이야기한다. 이러한 공적공간은 말과 행위를 통해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인간의 유기체적 삶의 기본 조건이 되는 지구 또는 자연과 달리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다. 즉 인간의 언어행위와 실천행위를 통해 구성되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세계다.

    그러나 노동이 절대화되고 소유가 사유로 변질되면서 우리는 오늘날 말과 행위를 통해 공유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을 상실했다. 이제 공동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으며 우리는 스스로가 공동의 세계에 의해 구별되거나 결합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가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관계를 맺어주며 서로 분리시키는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15) 이처럼 공동세계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다원성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드러내고 유지할 수 있는 다양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주관적 경험들에 사로잡혀 더 이상 자기와 다른 타인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며, 마찬가지로 타인 역시 그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모든 것을 오직 하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단 하나의 관점만이 통용되면서, 그 어떤 차이성도, 차별적인 정체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아렌트는 전체주의와 그것의 근본악이 저 유태인 수용소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한다. 자신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란, 인간이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인공세계를 건설하려는 목표 하에 결과적으로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자연적 삶의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키는 태도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과학과 기술 시대 역시 바로 이러한 전체주의의 근본악을 재연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기술의 발달로 ‘노동’이 절대화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에 완전히 예속되었고, ‘작업’ 또한 절대화되면서 애초 인공적이고 영속적인 세계를 구현하려던 인간의 노력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하나의 제작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신의 다원성과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말과 행위의 장소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며,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같은 대상에 대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공동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아렌트의 이러한 생각이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극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시장자본주의의 맞물림 속에서, 아렌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강조했던 행위의 가능성 자체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경우 더욱 심각한데, 정치와 경제, 그리고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우리사회 자체를 경직시키면서 그만큼 공적인 대화와 토론의 장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개인이 온전히 자신의 다름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기회 역시 차단시키고 있다. 이처럼 각자의 지극히 사적인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거나 집단적인 무의식에 빠져 기계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할 뿐, 다른 사람의 말과 행위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에 절대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이제라도 인간 조건과 행위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더 이상 행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전제주의를 넘어서서 시장자본주의가 가져온 또 다른 전제주의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오늘날 연극의 새로운 시도가 또 하나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2.3. 공연과 무대의 새로운 지평 - 공적영역의 복원 가능성

    한나 아렌트는 개인이 마음속으로만 느끼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며 ‘보여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유라고 강조한다. 드러나지 않는 자유, 행동과 연결되지 않은 채 생각으로만 그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즉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 즉 정치적으로 보장된 공적공간이 절대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본래부터 연극은 하나의 장소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연기와 보기의 행위로 인해 단순한 예술적 상상력의 미적 산물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한 복합적이고 대안적인 논의들이 발생하는 현실적이고 공적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극의 전제가 자유와 행위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의견에 만나게 되면,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 ‘perform’ 및 ‘performance’는 인간의 조건, 즉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다름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자유를 실 현하는 ‘행위’로서 또 다른 새로운 지평을 확보하게 된다. 예컨대 말과 행위가 인간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할 때, 행위하는 자가 보는 자와 한 장소에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연극은 그 자체로 이미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공적영역으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그렇게 본다면 <숙자이야기>,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맴돌았다> 그리고 <구일만 햄릿> 등,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아울러 그런 말과 행위가 이루어지는 극장은 일상 속에서 억압된 자유가 비로소 발생하고 공유되는 공적영역이자 정치적 공간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들 공연들을 기존의 전통적 관점이 아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이들 공연이 지향하는 것은 사라진 공적영역을 복원하는 것이지 소위 말하는 예술적 ‘완벽함’이 아니다. 따라서 이 공연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연극적 문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의 연기다. 이 공연의 배우들은 모두 무대에 처음 서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연기는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서툴다. 그럼에도 연출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말과 움직임을 한 개인의 자유로서의 말과 행위 그 자체로, 그것도 예술적인 가감없이 전혀 매개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전통적 연기 관습을 포함해서 소위 모든 완벽한 메카니즘에 고의적인 균열을 가하고 그것에 절대 수렴될 수 없는 타자성을 노출시킴으로써, 그 완벽의 허상을 조롱하고 비판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숙자 이야기>에서 <구일만 햄릿>까지 연극치료의 후속작업이었건, 인터뷰의 형식과 영상자료를 가져와 무대의 행위와 병치시키건, 그것은 모두 연출이 무대 위 배우들과 오랜 시간을 두고 함께 대화하고 심지어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의 생각, 경험, 감정들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의 몸은 완벽한 표현수단이 되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몸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을 지향하는 모든 표현의 한계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거기에 그와 모순되는 것들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그 고유한 물질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숙자 이야기>의 경우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 그 시간 속에 얽혀있는 다양한 인물들과 상황들을 오가는 할머니들의 늙고 병든 몸은 그 자체로서는 낯설뿐더러 한없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몸으로 그들의 처녀시절과 기지촌의 온갖 기억들을 더듬어 수행할 때, 그 몸들은 그 동안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그들의 연대기, 그리고 자신을 비로소 드러내는 행위의 기반이다.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맴돌았다>의 경우 무대 위에선 실제 피해자 한종선은 앞서 배우들이 수행하는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연출가와의 인터뷰 영상과 비교해서도 그 질감이 매우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요한 것은 무대 위에 존재하는 그의 몸 자체가 앞서 영상이나 극적 구성을 통해 짐작했던 폭력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사람들 앞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반면 <구일만 햄릿>의 경우,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배우들과 관객의 중간지대에서 매개적인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작품과 달리 발화와 행위의 구조, 아울러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중층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원작 <햄릿>은 오히려 배우들의 서사와 행위를 흡수하기 보다는, 복수와 원한, 절망 등 그것이 갖고 있는 고유한 정서를 배우들이 실제로 직면한 현실과 대비시키면서 소위 거리두기의 방식으로 한층 설득력있게 객관화시킨다. 한 예로 첫 장면에서 죽은 선왕의 망령이 천장에 매달린 다 망가진 기타로 등장하고, 그 형상 위로 선왕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이 기타는 그 자체로 이들 배우들의 한때의 일터이자, 빼앗긴 일터이며, 그들이 돌아가려는 일터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메타포다. 의상 역시 그들이 농성장에서 사용하던 현수막이나 뱃지, 농성조끼들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다. 중간중간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에는 천막 농성장에서 이들이 공연을 연습하는 그간의 과정이 담겨있다. 열심히 대사를 외우고 극중 상황들과 인물의 감정에 대한 연출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만, 끊임없이 난감해하며 심지어 거부감을 보이는 다섯 배우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로써 공연은 어떤 식으로건 배우들과 인물들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현실과 감정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극중 인물과 상황에 접근한다. 그 결과 배우들은 표면적으로는 <햄릿> 속의 인물들을 연기하지만 실제로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로서의 본인을 ‘연기’한다.

    이와 같이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연대기적 재료들을 가감없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배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연과 맺고 있는 개인적인 관계가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즉 이들 공연에서 관객의 관심은 자연스럽 게 배우가 지닌 연기적 능력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Sich-Zeigen)”18) 행위자로서의 능력 자체에 맞춰지게 된다. 즉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현시하고 공연의 상황과 대면하는지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 위의 인물들이 연극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아마추어이지만 말 그대로의 아마추어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완벽한 서사와 연기를 보여주려는 목표를 ‘끝내 달성하지 못한’ 아마추어의 결함을 아쉽게 드러내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움직임이나 발성, 서사 곳곳에서 드러나는 불일치와 모순, 이질성, 심지어 어눌한 실수와 오류 자체를 이들 연기의 고유한 미덕이자 더 나아가 가공되지 않은, 매개되지 않은 실재(The Reality) 그 자체로 드러내보여야 한다.

    그러나 극장이라는 공적장소가 결정적 의미를 갖는 가장 본질적 이유는 그 무엇보다 그 안에 함께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상호작용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주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적영역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 또한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 내지 ‘사이에 있음(inter-est)’19) 이다. ‘사이에 있다(in-between)’는 것은 자신의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공간 내지 사유의 틀을 벗어나 적어도 타자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 관심이 상호작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상호작용은 무대와 관객,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에 대해 못지 않게 다름과 차별성을 드러내고 또 인정하는 상황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 관심은 동정이나 주장, 무조건적인 연대가 아니라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하며 시야를 넓혀가는 역동적인 행동이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공연들의 등장인물들이 일반적인 공연의 관습에 따라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낯선 존재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컨대 완벽하지 않은 배우의 몸, 그리고 그들의 연기와 더불어 그 사이로 불쑥불쑥 끼어드는 기록과 보고의 형식은 관객의 지각에 연속적인 균열을 가한다. 배우들은 직접 관객들 앞에 서서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간혹 역할과 역할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이 대화란 일반적인 연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완결된 대화는 절대 아니다. 어눌한 발성이나 호흡, 그리고 논리적이지 않은 대사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순간에도 배우들이 수행하는 역할만이 아닌 배우들의 존재 자체를 지각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구일만 햄릿>에서는 공연이 본격 시작되기 전 배우들이 모두 무대 앞으로 나와 서서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쳐다본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거리는 배우들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갖는 거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들이 자신들이 하려는 이야기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며, 결코 관객의 관음증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하나의 의지적 행위의 표현이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감정적인 동일시를 차단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관객을 다름아닌 관심, 즉 ‘사이’의 영역에 위치하도록 한다. 이 사이의 영역에서 관객은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배우를 바라보거나,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대 위의 역할과 상황,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배우들 및 그 배우들을 지금 여기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동시적으로 거리를 두는 가운데 스스로가 자신의 시선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이 공연에서는 무대에서 행위하고 보여주는 배우, 배우의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관객의 몸 또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두 평등한 몸 ‘사이’에서 어떤 선입견이나 매개없이 이루어지는 평등한 지각의 방식, 그것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강조한 자유가 실천될 수 있는 ‘관심’ 및 ‘상호작용’의 근간이다.

    이로써 이들 공연은 극장을 미적 허구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인) 교육이나 선전의 공간이 아닌 “윤리적 공간”으로 만든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지배와 권력의 테크놀로지에서 벗어나 “자신과 타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가능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20) 이때 푸코가 말하는 자기란 서구의 근대적 주체와 달리, 그 어떤 지배적 권력이나 담론에 수동적으로 종속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배려하고 자기를 구성하는 미적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미적 주체는 타자에 대한 편견없는 관심 및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해진다.

    3)해외 작품 중 국내에서 공연된 것만 살펴보아도 이미 그 수가 적은 편은 아니다. 그 가운데 우선 거론될 수 있는 것은 2009년 공연되었던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의 <자본론 1>일 것이다.(<자본론 Ⅰ>을 비롯해서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업 전반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이미 김형기, 김성희에 의해 입체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김성희, 「현대연극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브레히트와 현대연극』(2011, 제25권) p. 141~166.,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 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작업을 중심으로」, 『헤세연구』(2010, 제24집), p. 339~361 참조.) 이 공연에는 영화감독이자 라트비아 대통령 고문에서부터 독일공산당 당원으로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 시각장애인이면서 베를린 콜센터 직원 그리고 한국 최초로 『자본론』을 번역한 국내 경제학자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명의 일반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자신의 경험을 각각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2012년에 공연되었던 쉬쉬팝(SheShePop)의 <유서(Testament)>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으로부터 “거래로서의 세대교체”, 즉 “사랑고백을 대가로 부동산을 얻고 노인부양을 제공하는” 원작 안의 시의적인 모티브를 가져와 여기에다 세대 간의 서로 다른 입장 차를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진짜 아버지들을 무대 위로 ‘모셔와’ 허구와 역할이 아니라, 공연의 화두와 관련하여 자기 자신과 아버지들의 실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배치한다.  4)이 공연은 총 1부와 2부로 구성된다. 1부가 기지촌 할머니들이 직접 자신들의 연대기를 무대에서 보여준다면, 2부는 연출을 맡은 노지향의 사회로 관객과 함께 토론연극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체 공연 중 1부만임을 밝혀둔다.  5)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175쪽.  6)위의 책, 322쪽.  7)위의 책, 79쪽.  8)위의 책, 169쪽.  9)Alain Badiou, “Thesen zum Theater”, in: Ders(Hg). Kleines Handbuch zur In-Äesthetik, Turia + Kant; Auflage: 2., 2008, S. 97-103, hier 101f.  10)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2, 55쪽.  11)앞의 책, 57쪽.  12)앞의 책, 240쪽.  13)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in: Peter Baehr(Ed.), The Portable Hannah Arendt. Hammonsworth 2001, p. 446.  14)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02쪽 이하.  15)앞의 책, 106쪽.  16)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p. 447.  17)Jens Roselt, “In Erscheinung treten. Zur Darstellungspraxis des Sich-Zeigens”, Miriam Dreysse und Florian Malzacher(Hg.), Experten des Alltags-Das Theater von Rimini Protokoll, Alexander Verlag Berlin; Auflage: 1., 2007, S. 46-63, hier S. 62.  18)Jens Roselt, 앞의 책, S. 63.  19)이때 inter-est는 ‘사이’를 나타내는 inter와 ‘존재’를 의미하는 esse를 의미한다.  20)미셸 푸코, 이희원 옮김,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2002, 37쪽 이하.

    3. 결론

    매스미디어에 의해 우리의 현실이 매개될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가상화되고 인공적으로 변해간다. 심지어 전쟁이나 기아, 자연재해와 같이 제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 새 하나의 미디어 스펙타클로 변질되며 대중적 환상의 재료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권력과 자본은 우리 삶의 곳곳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침투해 사회의 시각장을 조정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희석시킨다. 그 점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언론 또한 자유롭지 않다. 어느 때 보다 위험한 사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슬라보예 지젝이 강조하는 것처럼 대중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스펙터클을 넘어서서 그 안에 은폐된 실재를 목격하는 일, 그 위장의 작동구조를 간파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힘들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나 정치극, 정치적 연극은 있어왔다. 하지만 실재에 대한 온갖 과잉담론 속에서 정작 실재가 증발되어 버리는 상황에서, 기존의 전통적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점점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서사의 전달, 사회적 이슈를 극적 갈등으로 축소시켜 이것을 배우가 역할을 통해 재현하는 것은 어찌보면 ‘사실’을 또 한번 매개하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그의 『문학의 정치』에서 이처럼 진리를 허구를 통해 전달하는 행위를 “진실임직한 놀이”라 이야기하며 “진실”과 명확히 구분짓는다. 그에 따르자면 진실임직한 놀이는 어떤 운명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예견할 수 있는 유사성의 체계 안에서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감정들을 체계화한다. 그것은 자신을 진리로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 소위 자연적 기호들을 이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현실의 질서와 구분되는 허구들의 질서라는 점에서 다름아닌 반 자연적인, 인위적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예술은 진리의 모든 성격을 지닌 영원한 거짓이다”라는 바뜨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22) 그런 이 유로 그가 “새로운 진리체제”의 이름이라 정의한 진정한 문학(예술)은 “무엇보다 진실임직함이 파기된 진리의 이름, 즉 진실임직하지 않은 진리”다.23) 그리고 그 질서는 다름 아니 사물들 자체에 씌어진 진리의 질서다.

    랑시에르가 진정한 문학의 전제로 제시한 “말없는” 말은 “분절된 담론과 수사학의 수단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사물들의 신체들 표면에 새겨져 있는 말”이다.25)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시이며, 그 어떤 허구 보다 위대하며 정확한 현실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이나 한나 아렌트에 이어 이러한 랑시에르의 의견으로부터 다시 한번 오늘날 연극이 사회적 주제를 이야기함에 있어 기존의 극적 재현이라는 방식을 벗어나, 날것의 실재들을 무대 위로 적극 소환해야 하는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숙자이야기>에서부터 <구일만 햄릿>에 이르기까지 이들 공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소위 진리임직한 모든 허구들, 가상들의 벽을 뚫고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은 소위 진리와 사실을 표방하는 모든 권력의 담론들 속에 은닉되어 있는 역설을 드러낸다. 정치적, 경제적인 왜곡구조가 심한 사회일수록 그 말들이 이들 가상들에 다가가는 방식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한국연극이 ‘일상의 전문가’ 중에서도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된 호모 사케르들의 말과 몸에게 무대를 제공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 가공되지 않은 “미천한” 삶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허상의 이면을 폭로하는 날것의 진리다. 이때 연극의 무대는 더 이상 극적인 재현의 장소가 아니라, 현실 공간 속에서 억압된 존재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들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자유의 공간, 즉 공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관객을 향한 이들의 발화는 관객에게 섣부른 감정적 연대를 촉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과 보고와 같은 다큐멘터리적 요소들을 강화하고, 그 어떤 연출적, 미학적 개입을 배제하여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가능한한 매개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제시하는 등 관객이 무대에 감정적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 통로를 고의적으로 차단하고 교란시킴으로써, 관객을 기존의 규범적이고 습관적인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치와 지각을 생성시킬 수 있는 ‘사이(inter-est)’의 영역에 놓이게 만든다. 이 ‘사이’의 영역에서 관객은 일상적인 지각 틀을 넘어서서 이들 무대 위의 타자들과 새롭게 생산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작품의 이견적(dissensuelle) 형태와 일상적 경험들 사이의 간격을 유지”26)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적영역으로서의 극장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상호작용’이다. 그 상호작용을 통해 무대 위의 호모 사케르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획득하고, 객석의 관객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숙자이야기>와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맴돌았다>, 그리고 <구일만 햄릿>은 정치적인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정치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관객에게 그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그의 몫으로 넘겨주는 것”27), 그것이 바로 연극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21)슬라보예 지젝, 이현우·김희진 옮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 모음, 2011, 34쪽.  22)랑시에르, 자크, 유재홍 옮김, 『문학의 정치』, 인간사랑, 2011, 231쪽.  23)앞의 책, 232쪽.  24)앞의 책, 236쪽.  25)앞의 책, 261쪽.  26)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옮김, 『미학안의 불편함』, 인간사랑, 2008, 77쪽.  27)Jan Deck, “Politisch Theater machen–Eine Einleiung”, in: Jan Deck, Angelika Seiburg, Politisch Theater machen: Neue Artikulationsformen des Politischen in den darstellenden Künsten, Transcript; Auflage:1., 2011, S.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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