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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athy, Seeing, and Affective Labor: Mary Shelley’s (Re-)Reading of Adam Smith in Frankenstein 공감, 보기, 그리고 감정노동―『프랑켄스타인』의 아담 스미스 다시 읽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Sympathy, Seeing, and Affective Labor: Mary Shelley’s (Re-)Reading of Adam Smith in Frankenstein
KEYWORD
sympathy , imagination , seeing , ugliness , Adam Smith , David Hume , Affective Labor
  • I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스타인』(Frankenstein, 1818, 1831)의 괴물은 역설의 결정체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새 생명체를 얻기 위해, 무덤과 도살장에서 그 재료가 취해졌고, 아름다운 외관으로 의도된 몸은 비현실적인‘ 추함’의 극치로 표현된다. 프랑켄스타인의“선한”야심이 구체적 몸을 입은 결과이며, 작품 탄생의 맥락에서 보면,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가 1816년 발표한『알라스터, 혹은 고독의 영』(Alastor, Or, the Spirit of Solitude)의“베일 쓴 처녀”(the veiled maid)가 셸리의 이상의 외적인 현현이라 할 때, 바로 그“베일쓴 처녀”의 정 반대지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품었던 미래에 대한 섣부른 낙관에 의해 생겨난 암울한 현실의 은유이기도 하다. 샤모니계곡에서 프랑켄스타인과 만난 괴물은 프랑켄스타인에게 자기와 꼭 닮은 짝을 하나 만들어내라고 요구한다. “반드시 나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시오. 그러면 나는 내 존재에 필요한 공감을 그녀와 교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You must create a female for me, with whom I can live in the interchange of those sympathies necessary for my being, 98). 1818년 판의 제 2부에서 괴물은 존 로크(John Locke)가 말한 백지와도 같았던 그의 정신이 어떻게 사나운 분노를 품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특히 1818년 판의 제 2권, 3장부터 7장까지를 서술하는 괴물은 소설의 잠정적 화자인 동시에 짧고도 기괴한 삶을 쓰는 자서전 작가이기도 하다. 괴물의 자서전은 무지와 혼란, 경이와 감탄, 희망과 절망이 교차된 직조물이며, 그 결과 생긴 무늬에서 독자는 그가 절실하게 원한 것은 공감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미래의)여자괴물로부터 얻고픈 것도‘공감’이었다. 자신의 악은 “강요된 고독”(forced solitude)의 소산이므로, 그는 고독을 벗어나“동등한 존재와 감정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간청한다. 그래야만“감각이 있는 존재의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며, 존재와 사건의 고리에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I live in communion with an equal. I shall feel the affections of a sensitive being, and become linked to the chain of existence and events, 100; 필자의 강조). 사랑도, 성취도, 욕정도 아닌 공감이 그토록 (인간) 본성과 존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일까? 그리고 괴물은 왜 이 공감의“고리”밖에 존재할까?

    이 논문은 메리 셸리의 소설『프랑켄스타인』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이 설명하고 있는‘공감’의 특성과 발현양식에 대한 해석과 논평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프랑켄스타인』에서 메리 셸리는 스미스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도덕감정의 기초라 전제한‘공감(sympathy)’이 감각기관중 특히 시각의 개입에 의해 그 가능성이 차단될 수 있는 매우 불완전하고 미약한 감정상태임을 확인한다. 메리셸리는『프랑켄스타인』에서 공감과 시각작용의 관계를 괴물의 추함을 통해 예시하고, 감정노동을 통해서 감정을 내보이는 당사자와 그를 바라보는 관망자사이의 인식론적 거리가 의식적으로 좁혀지지 않으면 시각의 개입에 의한 공감의 차단은 극복되기 어렵다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발현되는‘공감’에 기대하기보다, ‘감정노동(affective labor)’이 수반될때, 비로소 시각에 지배되는 인간의 공감적 인지능력의 한계, 즉 인지적, 감정적 근시안성을 극복할 수 있음 암시한다. 논리의 전개를 위하여, 흄과 스미스가 사용하는 몇 가지 경우를 분석하고, 이 과정에서 시각, 즉 보는 행위가 중요한 인지적, 감정적, 도덕적 결정에 관여하는 것을 추적한 후, 『프랑켄스타인』에서 공감이 문제가 되는 장면들을 자세히 읽을 것이다. 셸리가 생각하는 ‘공감’이 스미스의 그것에 기반하고 있으나, 공감을 통해 주체와 대상간의 감정적 근접이 이루어지려면‘감정노동’이 요구됨을 이 소설은 천착한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II

    『프랑켄스타인』을 처음 출판할 당시 나이 어린 여성작가였으며 당대 영향력있던 지식인담론의 중심과 주변에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메리 셸리를 당대의 도덕담론의 맥락에서 읽는 일은, 메리 셸리가 공감론에 소설적 주석을 달면서 던지는 질문의 사회적, 인식론적 함의를 성찰하는 일이어서 유의미하다. 메리 셸리가『프랑켄스타인』에서 공감을 천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는 스미스의 도덕심리학이 간혹 노정하는 모호함, 비일관성, 그리고 시각중심성을 지적하는 문학적 작업이며, 궁극적으로는 공감에 기초한 도덕이 인간이 갖고 있는 인식론의 한계로 인하여 불완전하다는 입장을“추”함과 시각, 공감의 관계를 사유함으로써 확인시킨 성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케비스 굿만(Kevis Goodman)에 따르면‘공감’(sympathy)이란 단어가 영어의 어휘에 들어 온 것은 16세기 후반 이었다(444, 28n).『 옥스퍼드 사전 축약본』(The 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나열하는‘공감’(sympathy)의 정의를 간추려 보자. 첫째, “특정 사물간의 (실제 또는 가정된) 친연성”이다. 이 정의는 1579년경에 쓰이기 시작하여, 1603년경에는“두 개의 신체 기관이나 부위 (혹은 두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의미유추도 가능해졌다. 두 번째 의미는“일치, 동조, 조화, 어울림”이고, 세 번 째는 1596년경부터 그 용례를 추적할 수 있는 것 으로서, “느낌이나 성향, 기질의 일치로서 이로 인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즉, “공동의 느낌, 기질의 조화,”혹은“ 다른 존재의 조건에 영향을 받아 그와 같거나 그의 감정에 상응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 또는 그의 감정의 상태로 들어가거나 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동료애”를 뜻한다. 특히“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영항을 받은 상태”로서“동정(compassion)이나 연민(pity)”과 같다. 이미 의미가 약화되었으나, 어떤 명분에대한“호의적 태도”라는 뜻도 있다.1 우리가 요즘 쓰고 있는‘공감’의 주된 의미는 위의 세 번째 풀이가 포괄한다.2

    ‘공감’은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된다. 스미스에게 공감은 상상력이다. 연민이나 동정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상상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의 경험과 감각을 상상해볼 때 자신에게 생겨날 법한 일련의 감정(각)적 반응능력을 총칭한다. 책의 첫 장에서 스미스가 상술하는 공감의 과정을 잠시 인용해볼 만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각을 똑같이 경험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에 있는 이웃을 보더라도 우리는 그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스미스의 해석은 현실적이다. 오로지“상상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의 고통에 근사한 감각이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 스미스가 자연스럽고 즉각적인 것처럼 취급하는 ‘공감’은 우리 정신과정의 몇 단계를 거친 감정이다. (1) 우리가 만일 그의 처지에 있다면 어떤 감각을 느낄까를 상상 속에서 재현함으로써, (2) 그의 감각을 헤아려 보는 것이고, (3) 이 때 우리의 상상력은 그의 고통을 모방해본다. 상상 속에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그의 고통에 근접하는 감정(각)을 얻을 수 있다. 이 감정이 동료애(fellow-feeling)의 근원이라고 스미스는 말한다.

    ‘도덕’이 본질적으로 감성적인 것이라는 스미스의 견해는 데이빗 흄(David Hume)뿐 아니라 샤프츠베리(Earl of Shaftsbury)백작이나 프란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같은 18세기 초반의 도덕철학자들의 전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글렌 모로우(Glenn Morrow)에 의하면, 흄과 스미스는 이같은 전제가 갖는 질곡을 인지하고 있었다. 도덕이 감정에 근거한다면,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어떻게 객관성이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이나 권위를 설명하려면, 도덕적 판단이 자연적인 감각경험의 결과인 쾌락과 고통(pain and pleasure)의 감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Morrow 63-65). 흄은 모든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원칙을 찾고자 했는데, ‘공감’이 그에게는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도덕적 원칙이었다. ‘공감’은 인간의 반응을‘승인할 만한’(agreeable) 것과, ‘승인할 수 없는’(disagreeable)것의 범주로 나눴다. 도덕감정이 주관성을 탈피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이 감정의 교류이기 때문이다(Morrow 63-64; 김용환 60).4

    『인간본성에 관한 논문』(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에서 흄은 공감’이란“[타인의 성향이나 감수성이] 아무리 우리의 그것과 다르거나 상반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받아들일 수 있는 기질”(to receive by communication their inclinations and sentiments, however different from, or even contrary to our own, 316)이라고 설명한다. 흄 역시‘공감’과‘연민’ 구분하면서(Morrow 64, Penelhum 134),‘ 공감’으로 인한 정신의 작용을 설명한다. 예컨대, 두 사람사이에 애정(affection)이‘공감’에 의해 생겨난다 하자. 이 때 내가 상대방의 애정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effects)덕분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얼굴과 대화에서 드러나는 낌새(sign)”에 의해 알게 되고, 이 낌새는 내게 그 애정의 관념을 갖게 한다. “이 관념은 곧 어떤 인상(impression) 으로 변환되어 그 힘과 생생함에 의해 애정이라는 정념자체가 되며, 원래의 감정과 동등한 애정을 생산해낸다”(When any affection is infus’d by sympathy, it is at first known only by its effects, and by those external signs in the countenance and conversation, which convey an idea of it. This idea is presently converted into an impression, and acquires such a degree of force and vivacity, as to become the very passion itself, and produce an equal emotion, as any original affection, 317). 내게 애정이라는 관념이 있더라도, 그것이 생생하게 살아나려면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 등의 낌새가 있어야 한다. 이 관념이 인상으로 변하고 그 다음 내 안에 동일한 정념이 생긴다는 것은 스미스 식으로 말하면, 타인의 정서에 대한 상상을 통해, 내게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경우 경험하게 될 감각이나 정서를 정도를 달리하여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공감’할 수 있기에“같은 민족의 기질이나 사고성향”이 단일해진다고 흄은 생각한다. 이유는 사람들이“친구나 일상의 동료들에 반(反)하여 자기들 나름의 이성과 성향을 고집하기가 어렵기”때문이다(316-17). 흄이 말하는‘공감’은 그 자체로는 어떤 정념이 아니고“타인의 정념에 대한 관념(idea)이 (나의) 정념으로 변환”되는 것이고, “타인간의 정신끼리 서로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이다(Hume 365; Wand 재인용 276).5 그러므로 흄에게‘공감’은 고립된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의 영향을 받아 발전되는 것이며, 이런 이유로 주관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수술준비 과정을 보는 일만으로도 내게 수술 받을 환자의 고통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그 관념이 내가 수술을 받는다면 느끼게 될 아픔의 인상으로 변환되어 내 안에 고통의 정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흄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서로 유사하게 태어났다고 믿는다(318).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념과 상응하는 정념을 타인에게서 찾지 못하는 일은 없으며, 인간이 그 형상과 몸집이 서로 다를지라도 몸의 구조와 조합이 같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서로를 닮는다고 전제한다. “이 유사함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감수성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타인의 감수성을 쉽고 유쾌하게 수용할 수 있다”(this resemblance must very much contribute to make us enter into the sentiments of others, and embrace them with facility and pleasure, 318). 이러한 전제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이 글에서 다룰『프랑켄스타인』에서 거울같이 서로를 비추는 정신의 감응 상태에서 괴물만 소외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집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점,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공감의 작용을 주목한 점에서 스미스는 흄과 유사한 점이 많으나(Morrow 61-62),7 흄의‘공감’은 주로 타인위주의 other-regarding) 감정인 반면, 스미스의‘공감’은 이보다 훨 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Forman-Bazilai 6). 스미스는 사회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공감하는 타인에 의해, 혹은 중립적 관망자(impartial spectator)에 의해 승인받을 만한 덕성의 발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8 스미스에 따르면, 공감이 가능한 행위인지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그 개인의 행위가 승인할 만한 것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되며, 이같은 개인의 행위들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므로‘공감’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감정이다.9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스미스의 설명이 보여주는 두 가지 특질에 주목할 것이다. 첫째, 공감을 느끼기 위해서, 동료애를 경험하게 위해서는 우선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상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 즉 공감은 상상력에 기반 한다는 점과, 둘째, “보는”행위가 핵심적이라는 사실이다.10 상상은 정신적 확장으로서, 몸을 가진 인간의 물리적 조건을 뛰어 넘어,스스로 타인의 처지에 들어가 보도록 한다. 또, 타인이 경험하는 물리적 느낌, 즉 감각적 고통이나 쾌락이 미약하게나마 자기 몸에 재현된 듯이 경험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전적으로 감수성에만 의존하는 것일까? 즉각적인 친연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상상적 노력과 성찰이 수반될 때 타인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예컨대,

    이러한 상상의 능력이 자발적인 것인지, 의지나 분별력에 의해 행해지는 노력인지 스미스는 상술하지 않는다. 저술의 많은 부분에서 스미스는 이 상상의 능력, 혹은‘공감’이 인간 본연의 능력이어서 저절로 발현되는 듯 기술하고 있지만, 어떤 때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공감할 대상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상이 아닐 때에는 의식적으로 그의 상황을 상상해보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결국, 스미스의 글에서는 공감의 능력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는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이 모호성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데, 만일‘공감’의 능력이 타고난 것이라면, 누구에게서나 공감이 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스미스가『도덕감정론』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세세하게 정리한 것은, 바로‘공감’능력의 어떤 경우에 합당하고 적절하게 발현하는가를 추적하고 그 능력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감정을 지탱함을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The Shorter Oxford Dictionary 참조.  2Goodman에 따르면, ‘sympathy’라는 단어는 스펜서 이후 몇 세기동안, 상호간의 이끌림, 친연성, 끌어당김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천체의 음악, 의술, 선하거나 악한 마법”을 묘사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Goodman 미주 28번 참조.  3『도덕감정론』에서의 인용은,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Amherst, NY: Prometheus Books)를 따른다. 앞으로는 본문의 괄호속에 쪽수를 표시한다. 『도덕감정론』이 박세일 번역으로 이미 출판 및 개정출판되었으나, 여기서는 필요한 부분을 필자가번역하였음을 밝힌다.  4흄과 스미스의 공감에 관하여는 김용환, 양선이의 논문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5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minds of men are mirrors to one another, not only because they reflect each others emotions, but also because those rays of passions, sentiments and opinions may be often reverberated, and may decay away insensible degrees.”  6흄의『인간본성에 관한 논문』(A 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의 인용은 A Treatise of Human Nature, ed. L. A. Selby-Bigge (Oxford: Clarendon UP, 1951)를 따른다. 앞으로 인용부분의 출처는 본문 속 인용문의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한다.  7흄과 스미스의 공감에 대한 해석이 샤프츠베리(Shaftsbury)나 프란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같은 18세기 초반의 도덕철학자들과 달라지는 지점에 관하여는 Morrow가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8스미스에게 있어“impartial spectator”는 한 감정적 반응이나 행위를 하는 행위자(agent)나, 그 행위자의 감정과 행동에 원인을 제공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가정한 것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상상속의 인물로, 어떤 부분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상정된다. 박세일은 이 개념을“공정한 방관자”로, 민은경은“중립적 관망자”로 번역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개념 안에는 행위동기나 결과를 판단하는 판단의 개념이 있어, “impartial”을‘공정한’으로 번역하는 것도 크게 벗어나진 않으나, 스미스 저술맥락 전체를 고려할 때, 민은경의 번역“중립적 관망자”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하여 그 번역을 사용한다.  9메리 셸리의 소설『최후의 인간』(The Last Man, 1826)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 논문에서 유선무는“(사회적) 공감”은 사회질서를 고착화시키므로 전혀 새로운 구성이나 전복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해석한 바 있다. 유선무 110쪽 참조.  10공감이 상상력이라는 사실은 데이빗 마샬(David Marshall)도 강조하였으나, 이런특성은 사실 18세기의‘공감적 상상력’(the sympathetic imagination)을 낭만주의 상상력의 뿌리라고 본 월터 잭슨 베이트(Walter Jackson Bate) 등이 오래 전에 이미 해석한바 있다. Bate 참조.

    II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에 따르면, 감정노동이란 특정한 감정적 상태를 생산해내는 노동으로서,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이동한 후, 서비스업이나 엔터테인먼트산업처럼 일련의 감정, 정념을 생산하고 그 결과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에서의 노동형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감정노동은 후기산업사회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주로 담당해온 (가족을 위한) 보살핌의 노동을 포괄한다. “이 노동은 비물질적인 노동이었으니 . . . 그 이유는 그 생산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락함, 건강함, 만족, 흥분, 정념, 심지어는 관계망,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This labor is immaterial . . . in the sense that its products are intangible: a feeling of ease, well-being, satisfaction, excitement, passion-even a sense of connected-ness or community; Hardt 96).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으로 간주되던 양육과 보살핌은 전형적인 감정노동의 형태로서, 20세기 들어 서비스업의 이윤이 조직적으로 추구되기 전까지 여성의 노동으로 늘 당연시 되어온 노동이었다. 감정 혹은 정서(affect)의 가치가“측정 불가능한”(immeasurable) 것이어서, 가치로서의 감정이 자본의 안과 밖, 어디에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주장대로라면, 특정 감정을 생산하는 감정노동역시 그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남아있다.11 바로 이 측정 불가능함은 한 편으로는 감정노동의 일반적 수행자인 여성의 일을 여전히 주변적인 것으로 남겨두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에 의하면,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감정노동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 가능한 전복적 노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Negri 88).12

    그렇다면‘공감’이 어떤 면에서 감정노동인가? 케네스 맥클린(Kenneth MacLean)은‘공감’을 상상력으로 규정한 스미스의『도덕감정론』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퍼시 셸리(Percy Shelley)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이 옹호하는 상상력의 도덕적 차원을 제공했다며, 스미스는 본능적이고 태생적인 감수성으로서의‘공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399-404). 베이트 역시‘공감’은“직관적”이라고 해석한다(Bate 144). 그러나 ‘공감’을 느끼는 과정이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내가 타인의 감정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것이 과연 언제나 본능적으로 일어날까? 데이빗 마샬(David Marshall)은 스미스의 공감이“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601). 마샬은 스미스는‘공감’의 자발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은‘공감’ 혹은‘동료애’가 자동적이고 자연스런 것만은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601). 앞에서도 보았지만, 스미스의 상세한 기술을 주목해보면, 공감 (즉, 함께 느끼고 조응하는 상태)이 가시적인 행위로 표현될 때까지는 복잡한 인지적 작용이 존재한다. 상상 속에서 타인의 감수성속으로 들어가 그 당사자처럼 느끼려면 감정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스미스에게 공감이란“중립적 관망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가 내 감정상태를 승인할 때의 그와 나의 감정이 근접하는 경우를 의미하므로, 행위자의 감정이나 행위를 통한 반응에 상응하는 감정을 그것을 관망하는 사람도 스스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하며, 행위자역시 자신과 유사한 감정이 관망자에게 생겨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또한 상상하고 그 상상의 결과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글렌 모로우가 상기시켰듯이 스미스에게 있어, “중립적 관망자”의 시선은 사회적 준거를 가질 수밖에 없다(73). 바꿔 말하면, 관망자와의 사이에 있는 인식론적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면 특정 감정을 표출하는 나는 타인에게 하나의 스펙터클로만 남을 뿐이다(Marshall 604). ‘공감’이 감수성이면서 순전히 주관적일 수 없는 이유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이성에 근거하여 내 감정상태의 폭을 성찰하고 조율하는 일이 필요하고, 이것은 감정적인 노동, 즉 나 스스로 나의 개인적 경험과 이해관계, 감정몰입의 주관성을 넘게하는 상상적 도약을 요구하는 것이다.

    11감정의 가치측정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George Caffentzis, “Immeasurable Value? An Essay on Marx’s Legacy,”Reading Negri: marxism in the age of empire, ed. Pierre Lamarche, Max Rosenkrantz, and David Sherman (Open Publishing, 2011), 101-25.  12네그리의 선언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적들에게 있어 가치측정이 불가능 하다면, 가치생산자들에게는 가치측정자의 존재가 비현실적이다”(If for the enemy measuring value is impossible, for the producer of value the very existence of a measurer of value is unreal; 88).

    IV

    ‘공감’은 메리 셸리의『프랑켄스타인』주요한 개념적 축을 이루고 있다. “내주된 관심사는 . . .가족애의 아름다움과 보편적인 미덕의 탁월성을 보여주는데국한되어 있다”(my chief concern . . . has been limited to . . . the exhibition of the amiableness of domestic affection, and the excellence of universal virtue, 506)는 서문의 구절을 스미스를 빌어 이해하자면, 가족애란 “습관적인 공감”(habitual sympathy, Smith 323)에 다름 아니고, 보편적인 미덕이란, “중립적 관망자”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행위와 덕목이라 볼 수있다. 반면 소설의 부제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는 이같은 보편적 미덕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프랑켄스타인은 인류보편의 칭찬을 추구하고, 월튼은 자신과 공감해줄 이가 없는 환경을 한탄한다. 퍼시 셸리가 쓴 서문과 소설의 부제 간에는 그래서 괴리가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공감을 갈망하는 인물은 괴물이다. 사실 괴물은 타인과 충분히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스타인을 비롯하여 인간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한다. 왜 그럴까? 등장인물들과 괴물사이의 공감, 즉 함께 느끼는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괴물의 추한 외모다.13

    괴물이 프랑켄스타인에게 자기 삶의 역사를 말하는 2권 제 3장에서부터 8장까지 총 여섯 장에 달하는 분량에서 공감(sympathy)이라는 단어는 빈번히 사용된다. 괴물이 처음으로‘공감’이라 할 만한 감정을 느낀 것은 드레이시(De Lacey)가족의 생활을 엿보면서였다. 어느 날, “존경스러운”외양을 한 드레이시 노인이 악기를 연주하는데, 그“아름답고 구슬픈 곡조”는“점잖은 몸가짐”을 한“소녀[아가타]”의 눈에서“눈물을 흘러내리게”했고, 앞을 못 보는 드레이시 노인은 그녀가“흐느끼는”소리에 노래를 멈추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자기 발 아래 꿇어앉은 소녀를 일으키며 노인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괴물은“독특하고도 압도적인 감각”(sensations of a peculiar and overpowering nature)을 느꼈다. “고통과 즐거움이 뒤섞인”(a mixture of pain and pleasure) 그 감각은 그가“배고픔이나 추위, 따뜻함이나 음식” (hunger or cold, warmth or food)에서 느꼈던 적이 없는“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such as I had never before experienced) 감각이었다고 고백한다(72). 이 장면에서 노인의 구슬픈 곡조와 노랫말에 아가타가 공감하고, 아가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노인이 다시 공감을 표현하고, 이처럼 “고통과 즐거움이 뒤섞인”감정의 섬세한 연쇄적 표출을 보면서 괴물은 연유도 모르는 채 그 감정들을 함께 느낀다. 스미스의“중립적 관망자”처럼 괴물은 삽화와도 같은 이 광경을 보면서 자초지종을 알기도 전에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이들을 엿보면서, 괴물은“그들이 불행할 때면 [자기도] 우울했고, 그들이 기뻐할 때면 [자기도] 그 기쁨을 함께 느꼈다”고 회상한다. “서로 사랑하고 공감하는”(89) 드레이시노인의 가족은 괴물에게, 인간관계는 사랑과 공감에 기반을 둔다는 명제를 알려주었다. 가족 간의 사랑과 존경을 목격하며 괴물은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이미 그들과 공감하였던 것으로 회상한다. 스미스가『도덕감정론』에서 역설하는 공감이 서로 간에 발현되는 것을, 괴물은 이들을 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다. 아울러 인간사회에 소속되려면‘공감’의 능력과 경험을 기본적으로 지녀야만 함을 깨닫는다.

    공감의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서로의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며 조율할 수 있다는 전제를 생각할 때, 피터 브룩스(Peter Brooks)가 지적한 작품 속“사슬” (chain)의 은유는 의미심장하다. 괴물은 짝이 생기면 자신은 비로소“존재와 사건의 사슬”(the chain of existence and events)에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Shelley 100). 공감의 연쇄반응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서 자신만 소외되었다는 지적이다. 브룩스는 이 사슬을“언어의‘의미화 사슬’”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사슬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괴물성의 정의나 마찬가지라고 읽고 있지만(211), 이 사슬은 사실, 흄이나 스미스가 말한, 공감이 거울처럼 서로에게서 발현되는 관계, 즉 공감적 상상의 상호반영에 더 가깝다. 괴물이 오두막의 가족을 보면서 언어를 습득하나, 공감의 경험을 위해 언어가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흄이나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은 감수성에 기반하고, 즉 감정에 일정 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를 통해 공감의 기회와 영역이 확장됨은 부인할 수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 of Young Werther)이나『실락원』(Paradise Lost)을 읽을 때, 괴물은 주인공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주인공에 빗대어 생각한다. “고귀한 감수성과 감정,”“점잖고 가정적인”예절은 오두막 가족의 그것과 유사했으며 동시에 괴물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였다(82).『실락원』의 아무 연고가 없는 아담과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동시에 천국에서 추방된 존재로서 사탄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낙원을 상상할 때, 낙원은 자신과 공감해주는 존재가 있는 곳이었다. “이성의 제재없이 내 생각은 낙원의 들판을 거닐었소. 그 곳에서 정답고 사랑스런 피조물이 내 느낌과 공감하고 내 우울함을 달래주었소”(I allowed my thoughts, unchecked by reason, to ramble in the fields of Paradise, and dared to fancy amiable and lovely creatures sympathizing with my feelings and cheering my gloom, 88).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그에게 낙원을 제공했다면, 지옥은 바로 그 반대, 즉 공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곳이다. “오 얼마나 불행한 밤을 보냈던지! . . . 나는 사탄처럼 내 안에 지옥을 품고 있었소. 아무도 나와 공감해주지 못하기에 . . . 내 주변을 부숴놓은 후 그 폐허를 즐기고 싶었소”(Oh! what a miserable night I passed! . . . I, like the arch fiend, bore a hell within me; and, finding myself unsympathized with, wishing to . . .spread havoc and destruction around me, and then to have sat down and enjoyed the ruin, 92; 필자의 강조). 공감해주는 존재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그가 동참할 수 없는 낙원에 대한 깊은 시샘, 이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마음 속 지옥”을 품게 하였던 것이다(92). 괴물의 불행은 프랑켄스타인을 비롯하여 그 누구에게도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괴물의 내러티브는‘공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내 사악한 정념은 사라질 것이오, 내가 공감을 얻을 것이므로”(My evil passions will have fled, for I shall meet  with sympathy, 99).

    괴물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생전 처음 보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을 경험했다. 드레이시 가족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꼈고,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다. 괴물의 공감 능력은 자신의 모습이 연못에 비춰질때 가장 잘 드러난다. 눈앞에서 본 드레이시가족과 달리, 연못에 비친 자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흉한 용모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쓰디쓴 절망감과 굴욕감”(the bitterest sensation of despondence and mortification)이 밀려왔다고 고백한다(76), 괴물의 이러한 감정은 자신의 절망뿐 아니라“중립적 관망자”가 있다면 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느낄 법한 감정까지 대변한다. 남다르게 추한 자기를 타인이 보았을 때 타인이 느낄 감정을 괴물은 충분히 알고 있기에, 언어를 습득하여 자기의 흉한 외모를 감춰보고자 하는 것이다(Shelley 76). 실제로“점잖은 행동과 부드러운 말씨”로 드레이시 가족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고(77), 프랑켄스타인을 설복시킬뻔 하기도 했다(99). “그의 말은 내게 이상한 힘을 행사했다”(His words had a strange effect upon me)고 프랑켄스타인은 고백한다. 괴물은 상대방이 자기를 보지 않고 자기의 유려한 수사를 들으며 느낄 법한 감정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처럼 추한 존재를 인간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그 때 느낄 역겨움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이 논문의 초고를 완성하고 재임스 해치(James C. Hatch)의 논문“파열의 정서:『프랑켄스타인』에서의 수치, 역겨움, 그리고 공감”(Disruptive affects: shame, disgust, and sympathy in Frankenstein)을 발견하였다. 해치역시 그의 논문에서 괴물이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추한 외모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구절과 유사한 인용을 통해, 『프랑켄스타인』에 나타나는 두 가지 중대한 정서가“수치심”과“역겨움”이며 이 두 감정이“공감의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Hatch 참조.

    V

    다시『도덕감정론』으로 돌아가 그 시작부분을 보자.

    시작부터“보는”감각, “보는”행위는 스미스의 도덕적 판단을 결정하는데 긴요한 수단이 된다. 특히 제 1부의 첫 장에서 스미스는‘자비’(compassion)와‘연민’(pity)같은 유사한 감정들로부터‘공감’을 조금 더 구체화해서 설명한다.

    스미스의 글을 보면, 공감적 상상력의 발현에 시각(화)의 기능은 중요해 보인다. “중립적 관망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중립적 관망자”는, ‘공감’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는 허구적 인물이다(Marshall 592).14 D. D. 라파엘에 따르면, “중립적 관망자”는 스미스의 저술에서 그 의미가 조금씩 변하는데, 때로는 보편적 이성이나, 양심에 대한 은유로, 때로는 말 그대로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불특정한 제 삼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관망자가 실제 관망자냐 허구적 인물이냐, 또는 이들의 눈이 실제 육안이냐 마음의 눈이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흄이나 스미스같은 도덕철 학자들이‘공감’에 관한 논의에서 노정하는 시각에 대한 관심이다.15

    특정 상황과 그 상황이 유발시킨 감정의 표현을 주시하고, 그 결과로 관망자에게 공감이 일어나는지의 여부에 의해, 공감의 대상과 공감을 느끼는 주체, 즉“중립적 관망자”사이에 인식론적 거리가 좁혀지는가가 결정된다. 이 거리를 두고 관망자와 특정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는 서로를“바라보는”관계이므로,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 의하면, 관망자만이 고통이나 기쁨을 느끼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된 그 사람도 관망자를 바라보고 관망자가 자기를 보고 느끼게 될 감정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망자들의 공감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상황을 그의 눈으로 보게끔 하는 것처럼, 그의 공감역시 그 자신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관망자들의 으로 보게끔 이끈다. 특히 관망자가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가 행동할 경우 그렇다”(As their[the spectators’s] sympathy makes them look at it[the sufferer’s situation] in some measure with his eyes, so his sympathy makes him look at it, in some measure, with theirs, especially when in their presence, and acting under their observation, 24;필자의 강조). 스미스에 의하면 공감은 임시동안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가 타인의 고통을 볼 때 내게는 그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계속해서 틈입하므로 공감의 정도역시 희석된다(Smith 23). 스미스는 공감이 불완전함을 인지한것이다. 마치 연극무대 위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관객이 공감을 표현하고, 배우는 관객의 공감과 호응도를 보면서 감정표현을 조절해야 하듯, 사회에서도 고통이나 기쁨을 경험하는 당사자와 허구의“중립적 관망자”사이에는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려는 노력이 발생한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따라서“좀 더 완전한 공감”을 열망할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관망자의 애정과 자기의 감정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써만 가능한 그런 종류의 위로인 것이다”(He longs for that relief which nothing can afford him but the entire concord of the affections of the spectators with his own, 23). 따라서 고통이나 기쁨을 표현하는 당사자는 끊임없이 관망자가 자기 입장에 있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을 상상하고 그것에 자기의 감정을 맞추고자 한다. 데이빗 마샬은 스미스의『도덕감정론』이 일종의 “무대적”성격을 갖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뿐만 아니라, 타인이 나를 상상할 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상태에 들어올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며 그것과 조율하게 된다는 것이다(Morrow 70; Marshall 598). 스미스에 앞서 흄도 역시“인간의 정신은 서로에게 거울과 같아서 서로의 감정을 비춰줄 뿐만 아니라, 정념, 감수성, 견해의 광채가 종종 서로 반사되기도 하고, 또 알지 못할 정도로 사라져 없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the minds of men are mirrors to one another, not only because they reflect each others emotions, but also because those rays of passions, sentiments and opinions may beoften reverberated, and may decay away by insensible degrees, 365). 즉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관망자이고, 서로에게 모두 스펙터클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내가 스펙터클이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Hume 320; Marshall 597). 흄이나 스미스에 의하면, 관망자의 공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각각 자신의 감정을조절하는 것이 사회를 조화롭게 유지한다(Smith 23; Marshall 597).

    14『도덕감정론』제 6부, 2장에서 스미스는“중립적 관망자”를 때로는“가슴속 사람” (the man within the breast),“ 있다고 가정된 중립적 관망자”(the supposed impartial spectator).“ 우리 행동의 위대한 판관이며 재결자”(the great judge and arbitor of our conduct) 등으로 풀어쓰기도 한다. 이“중립적 관망자”의 개념에 관한 설명으로는 로더 릭 퍼스(Roderick Firth)를 비롯하여, D. D. Raphael, The Impartial Spectator (Oxford: Oxford UP, 2007), Alexander Broadie, “Sympathy and the Impartial Spectator”등 참조.  15이 논문의 논지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마샬은 스미스의『도덕감정론』이 관망자 (spectator), 혹은 관망(spectatorship)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VI

    『프랑켄스타인』은 스미스의“중립적 관망자”의 위치로 독자를 불러온다고 해도 좋을 만큼, 고통에 처한 인물들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독자 앞에 제시한다. 맨 처음 괴물과 대면했을 때, 프랑켄스타인은 그 모습을“엄청나고 흉측한 광경”(sight tremendous and abhorred!, 65)이라 표현한다. “그가 다가왔소. 그표정은 경멸과 악의가 뒤섞인 쓰디쓴 고뇌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것 같지 않은 추함으로 인해 그것을 눈 뜨고 보는 것만도 끔찍했어요”(He approached; his countenance bespoke bitter anguish, combined with disdain and malignity, while its unearthly ugliness rendered it almost too horrible for human eyes; 65). 당대 미학적 기준에서 보면, ‘숭고’(the Sublime)와‘아름다움’(the Beautiful), 혹은 영국의 미학담론에 고유한 개념이던‘그림같음’(the Picturesque)의 범주는 관념적으로 정의하고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만, ‘추함’(the Ugly)은 굳이 따로 정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설명하는‘숭고’와‘아름다움’은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의 영혼의 확장이나 상태와 관련이 있기에 더욱 그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가치가 있었다. ‘추함’에 대한 해석이 부재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긍정적인 경험과 함께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니스 자이갠티(Denise Gigante)는『프랑켄스타인』이 당대 미학담론에 거의 부재했던 ‘추함’의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16 자이갠티의 말대로『프랑켄스타인』에서‘괴물성’의 정치적 함의를 밝히려는 노력은 많았으나, 문자 그대로‘추함’에 대해서는 굳이 주목한 학자는 많지 않았다.17 그러나 일단 괴물은 추해서 괴물이다. “오, 어떤 사람도 그 끔찍한 얼굴을 견뎌낼 수 없을 거요. . . . 그 놈이 완성되기 전에 그 놈을 지켜봤어요. 그 때도 추했지요. 하지만 근육과 관절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되니, 그 놈은 단테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Oh! no mortal could support the horror of that countenance. . . . I gazed on him while unfinished; he was ugly then; but when those muscles and joints were rendered capable of motion, it became a thing such as even Dante could not have conceived, 35; 필자의 강조). 월튼은 괴물을 보았을 때, “너무도 끔찍한 얼굴, 역겹고 무서운 흉측함”(so horrible a face, of such loathsome, yet appalling hideousness) 이어서“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I shut my eyes involuntarily)고 했다 (152). 그의 추함에는“너무도 무시무시하고 이승의 존재같지 않은”(there was something so scaring and unearthly in his ugliness) 것이 깃들어 있었다고 쓰고 있다(153). 그 추함의 묘사가 추상적이긴 하나 괴물은 인간처럼 사지를 움직이는 현실의 존재며,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물리적 존재성을 확인시킨다.“ 누렇고”(yellow)“ 눈물 고인 듯,”(watery) 혼탁하며, 안구 속에 함몰되어 눈동자조차 구분이 안 되는 죽은 듯한 그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가.18 이 역시 괴물의 역설이다. 그 거부할 수없는 존재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함은 구체적 언어를 거부한다.

    브룩스의 지적대로 괴물은 인간의“정상적인 측정과 분류”를 교란하여, “보는것, 광학의 의미, 현상적 세계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는 능력과 과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Brooks 201). 이 소설 내러티브의 핵심에는“보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추상적 묘사로 재현되지만, 괴물이 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것이 그가 누구에게도 공감을 끌어낼 수 없는 이유다.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 시각이 거듭 언급되는 이유는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데는 타인의 고통을‘보는’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셸리는 ‘공감’을 유발하는데 시각이 정말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겪은 고통을 짐작하고 동정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의 외양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프랑켄스타인조차 자기는“괴물과 공감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100). 추하기 때문에, 그의‘고립’은 언어 이전의 단계에서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아서, 흄이 말한 대로 동류의식을 유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스미스를 빌어 말하면,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또는 특정 부류의 성격이라고 우리가 익히 보아온 특성과 딴판이기 때문일 것이다(Smith 286-89).19 공감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호소가 여자괴물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과 인과관계를 이룬다는 사실도 시사적이지만, 괴물이 여자괴물을 언급한 후에 비로소 프랑켄스타인의 마음이 잠시나마 움직인다는 것은 더욱 암시적이다. 여자괴물 만들어달라고 함으로써 괴물은 자신을‘남성’으로 정의한다. 여자괴물과의 관계와 차이가 상상되는 바로 그 순간, 괴물은 잠시나마 인간과 유사한 분류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프랑켄스타인이 괴물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 것도 그 순간이지만(I was moved; I compassionated him, 99), 괴물의 흉측한 모습에 다시 마음을 굳게 단속하는 것은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다.

    프랑켄스타인의 동정심이 사라진 것은 괴물이 이 분류체계를 다시 벗어나 “더러운 덩어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모습을 샘물을 통해 보면서 괴물은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으니 (How was I terrified, when I viewed myself in a transparent pool, 76), 그는 자신과 타인을 연결시켜주는 공감의 작용에 바로 시각적 감응이 자리 잡고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몽블랑을 바라보며 비통해진 프랑켄스타인이 불현듯 나타난 괴물에게 극단적 혐오를 표현할 때(Begone! relieve me from the sight of your detested form, 67), 괴물은 실상 그 혐오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장면은 앞을 못 보는 드레이시 노인에게 괴물이 자기 처지를 간곡히 호소 하는 순간을 예고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괴물의 호소를 들은 노인이“인간의 마음이란 분명한 자기 이익의 편견에만 가리지 않는다면 형제애와 자비심으로 가득하다”(the human hearts of men, when unprejudiced by any obvious self interest, are full of brotherly love and charity, 90)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괴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친구들은 자기에 대해“편견”(prejudice)에 사로잡혀 있다는 괴물의 말도 시각 경험의 결과가 공감의 발현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통찰의 결과다. 추함을 분별해내는 시각이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드레이시 노인의 가족들이 들어와 괴물을 발견하면서 괴물이 드레이시 노인에게 기대했던 공감의 고리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참혹하게 파열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괴물이 끝까지 언어의 힘에 기대고자 하는 것도 시각이 공감에 개입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오. 다 듣고서, 당신이 내게 합당하다고 생각한 방식대로, 나를 버리든지 불쌍히 여기든지 하시오. 하지만 내 말을 들으시오”(Listen to my tale; when you have heard that, abandon or commiserate me as you shall judge that I deserve, but hear me 66-67; 필자의 강조). 이 단락에서 괴물은‘듣기‘와 관련된 두 개의 동사(hear, listen)를 다섯 번이나 사용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법정에 선 피고의 최후진술에 비유하면서, 수사의 힘이 시각을 업도하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시각적 고통(pain)이‘공감’의 발현을 방해한다는 것은, 도덕감정의 주관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흄과 스미스의 이론적 노력을 무화시킬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현대의 스미스학자 가운데는 스미스가“중립적 관망자”의 공감능력의 불완전성뿐만 아니라 주관성을 인정하여“중립적 관망자”의 자기중심적 준거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Forman-Barzilai 69-70). 흄과 스미스처럼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어떤 감정이나 행위를 그 결과뿐 아니라 동기에 입각해서 판단할 때, 그“중립적 관망자”가 상상하고 알게 되는 당사자의 행위동기와 행위간의 조화여부는 결국 그의 주관적 경험이나 견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켄스타인』에서 등장인물들이 괴물에게 보이는 적대감은 다른 이유없이 그저 괴물이 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이 동기에 따른 적대감의 표현은 적절한 것일까? 자신의 추함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에게 갖게 되는 혐오감의 표현을 상상하고 공감한 괴물과 달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혐오감과 적대감 때문에 괴물이 겪게 되는 고통과 분노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추하다는 주관적/심미적 감각이 한 개인의 도덕감정을 특정한 방식으로 화석화한다면, 그 도덕감정과 판단은 믿을만한 것인가?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1756) 에서‘추함’이 아름다움의 반대로 간략하게 취급된 데 반해, 『프랑켄스타인』의 괴물은 그 자체로 자신만의 범주를 형성한다. 자이갠티에 의하면, 칸트(Kant)에게 있어 추함의 한 가지는“역겨움”(disgusting)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사물이‘역겨운’것은 그것이‘주장하기’(insist) 때문이라는데, 이 때‘insist’의 뜻은 라틴어 어근에 따르면“움직이지 않고 서있다“(sistere; to stand still), 독일어 어근에 따르면 ”서있다(stehen; to stand)는 뜻을 내포하므로, 역겹다는 것은, 다시 말해‘추한’것은“주체와 주체가 대변(재현)하려는 사물사이에 불쾌하게 서있기”때문이라는 것이다(Gigante 577). 자이갠티의 이러한 해석은『프랑켄스타인』에서 시각적 인지가 공감의 형성에 때로 장애를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시각적으로‘추한’대상은 공감의 주체가 그 대상의 감정에 상상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방해하며“서있기”때문에, 그와는 공감의 상호반영적 관계가맺어질 수 없다. 그“서있는”대상을 넘어보려는 적극적 상상, 즉 의지에 의해 발현되는 감정노동이 따르지 않으면, 인간사회에서의 공감은 언제나 어느 덧 실패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이 메리 셸리의『프랑켄스타인』이 천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꺼지라!”(Begone!)는 프랑켄스타인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괴물은 그앞에 서 있다가, 손을 들어 프랑켄스타인의 눈을 가리지 않는가.

    16자이갠티에 의하면, 버크나 칸트 모두에게‘추함’은 부정적 개념, 즉‘아름다움’의 결여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셸리가 이 작품에서 괴물을‘추함’의 화신처럼 형상화 한 것은 일종의“미학적 불가능성”(aesthetic impossibility)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다. Gigante 567쪽 참조.  17‘괴물성’의 정치적 의미를 특히 당대의 혁명과 관련지어 탐구한 예로 프레드 보팅(Fred Botting)을 들 수 있다.  18자이갠티는 버크(Burke)의‘추함’과‘아름다움’에 관한 장을 빌어, 괴물의 눈이 얼마나 흉한가, 또 이와 반대로 엘리자베스의 눈이 얼마나 청량하게 아름다운가를 설명한다.셸리가 그리는 괴물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당대 미학적 맥락이다. Gigante 571쪽 참조.  19『도덕감정론』제 5부, 제 1장에서 스미스는 평균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끌로드뷔피에(Claude Buffier, 1661-1737)의‘아름다움’의 개념을 주로 소개하고 있으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VII

    『프랑켄스타인』은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 대한 메리 셸리의 주석달기다. ‘공감’이야말로 인간사회의 유지에 기초적인 감수성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전제를 셸리는 공유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자연스런‘공감’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조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던 스미스나, 인간은 서로 유사하므로 공감이 가능하다는 흄과 달리, 셸리는 공감이 때로 시각이 포착해낸 차이를 협상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감정노동임을 보여준다. ‘추한’대상 앞에서 공감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인간의‘공감’능력이란 얼마나 취약하며, 이 능력이 인간사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은 얼마나 헛된가? 근대의 시각중심적 사회에서 공감의 능력이 시각경험에 의해 약화된다면, 시각이 중요해 질수록 공감이 어려워진다는 셸리의 회의를 엿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 불쾌하거나 자기와 다른 대상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인식론적 근시안속에 갇혀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추함에 대하여』(On Ugliness)에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예술사속의‘추함’의 재현에 대한 명상을 마무리하면서, ‘추함’을 인간의 비극과 연결시킨 것도 결국 근본적으로‘공감’이 불가능한 상황의 비극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까(436)? 그리고 독자의“연민”을 구하는 그의 맺음말은 감정노동을 구하는 그의 인간적 요청이 아니었을까? 어쩌면‘추함’은‘공감’의 부재, 혹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월튼이 쓴 편지의 수신자인 마가렛 사빌(M. Saville)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찬 서사의 최종 수신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품내내 아무 것도 육안으로 볼 수 없어, 괴물의 외양을 오로지 월튼의 편지에 기대서 상상해야 하는 그녀는 어쩌면 괴물에게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수도 있다. 괴물을 보고 기겁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독자 앞에 놓여진‘공감’발현의 무대에서 괴물에 대한‘공감’의 능력을 보이는데 실패했다면, 인식론적 근시안을 넘어설 수 있는 인물로 소설 서사의 안과 밖에 걸쳐 절묘하게 위치해 있는 그녀야 말로 독자와 마찬가지로 이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의 중립적 관망자다. 주인공들의 격정이 단순한 볼거리로 남지 않으려면 그녀와 독자가 이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공감하는가

    낭만주의 시인의 자기애와 인류보편에 대한 이상은 역설적으로 맞물려 있다. 그 맞물림을 가능케 하는 것이 그들의 공감 능력이지만, 근대적 시각중심의 사회에서 공감의 능력, 공감에 기반한 도덕성은 쉽게 시각에 의해 교란된다. 유아론과 동료애사이의 협상의 지점에서 결국, 시각이라는 매우 즉각적인 감각경험이 개입할 때, 그들은 과연 어떤 협상을 얻어내고 어느 정도의 감정노동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메리 셸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덕적 도전이다. 메리 셸리는 감정노동이 늘 여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이 심미적 판단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보편적인류애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가 수행해야 할 실천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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