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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A Study of Theaterization of Anton Chekhov’s The Cherry Orchard as Performing Text in Moscow and Saint Petersburg after Perestroika 공연 텍스트로서의 안톤 체호프 <벚나무 동산> 무대화 연구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 비영리 CC BY-NC
ABSTRACT
A Study of Theaterization of Anton Chekhov’s The Cherry Orchard as Performing Text in Moscow and Saint Petersburg after Perestroika

현대연극에서 체호프는 다양한 무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선보여져왔다. 20세기 초반 ‘연출가’가라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으로 기존 연극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시각이 작품 안에 새롭게 배열되면서 체호프의 무대는 그야말로 현대연극 무대에서 새로운 연극언어의 발생지가 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체호프 작품의 무대화는 체호프의 명성에 비례하듯 빈번하지만 그중에서도 <벚나무 동산>의 무대화는 그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이다. 특히나 러시아 연극사에 있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수많은 <벚나무 동산>은 연극사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벚나무 동산>의 사회적 배경은 19세기 말 러시아에 몰아닥친 금융 자본주의와 그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미성숙한 귀족들의 행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체호프가 <벚나무 동산>을 집필할 당시의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회 격변기 속에서의 세대 간의 갈등과 같은 면모에서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의 상황과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이에 당대의 연출가들은 <벚나무 동산>에 자신의 사회적 시각을 녹이고 미학적 실험을 얹어 다양한 <벚나무 동산>을 내어놓은 것이다. 본고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연된 <벚나무 동산> 중 평단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 9편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작품을 분석함에 그 목적이 있다.

KEYWORD
Chekhov , The Cherry Orchard , Russian modern theatre , the comedy of situations , Perestroika
  • 1. 서론

    현대연극은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를 통해 진지한 연극미학적 실험을 계속해 왔다. 때로 그것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Московски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театр)과 스타니슬랍스키(Константи 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 1863-1938)로 대변되는 사실주의적 전통에 충실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연출가들의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통하여 체호프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체호프의 무대화는 이와 같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체호프가 글로 설명해 놓은 것과는 색다르게 선보여져 왔다. 그리고 이는 관객들에게 각각의 무대마다 다른 다채로운 모습의 체호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현대연극에서 희곡과 무대 및 연출가와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가 더욱 더 긴밀하게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활자로 된 희곡의 충실한 재현을 추구하던 연극은 20세기 초반 ‘연출가’라는 새로운 권력의 출현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몇몇 실험적인 연출가들은 원작의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희곡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연출가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를 무대 위에 펼쳐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자아와 세계관, 예술적 기조를 바탕으로 기존 연극에선 볼 수 없었던 역사관과 사회관은 물론 텍스트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작품 안에 녹여내었다. 또한 동시에 무대예술로서의 연극을 위한 양식적·미학적인 실험도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연극은 세계와의 깊고 주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장이된 것이다.

    본고 「공연 텍스트로서의 안톤 체호프 <벚나무 동산> 무대화 연구」는 이와 같이 연출가의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관객들에게 새롭게 선보인 다양한 인물과 무대에 관한 연구이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정치적 격변기에 무대에 등장한 체호프의 인물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관객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 연구는 그 목적과 주제를 집중시키기 위해 연구 범위를 1차적으로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이후 러시아 무대에서 공연된 <벚나무 동산(Вишневый сад)>으로 한정하였다. 그 까닭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체호프의 다른 희곡들에 비해 <벚나무 동산> 공연이 그 어느 때 보다 확연히 늘어난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1991년 러시아 무대에서 체호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벚나무 동산>이 무대화된 횟수는 단연 압도적이다. 과연 역사에 종언을 고한 소비에트의 폐허에서 ‘1991년’이라는 시간과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연극무대는 소비에트 패망의 현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통해 어떠한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일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다양한 <벚나무 동산>이 공연된 현상은 <햄릿(Гамлет)> 현상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햄릿>은 1926년 미하일 체호프(Михаил Чехов, 1891-1955)의 연출작 이후 스탈린 집권 내내 공연되지 않았다. 그 후 1953년에 스탈린이 서거하자 니콜라이 아흘롭코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Охлопков, 1900-1967)를 필두로 러시아 각지에서 갑자기 <햄릿> 공연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스탈린 집권 당시 억압되었던 정치·사회적 발언을 표출하기에 고뇌하는 인물의 대명사인 ‘햄릿’이 주인공인 <햄릿>은 더 없이 좋은 텍스트였다. <벚나무 동산>은 <햄릿>과 마찬가지로 연출가의 정치·사회적 시각을 작품 속에 세련되게 녹여내기에 적격인 작품이다. 때문에 필자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벚나무 동산>이 스탈린 사후의 <햄릿>과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해의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연극이 사회 변화와 함께 그 변이의 과정을 같이한다는 기본적 전제 아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급증한 체호프의 무대화는 러시아 사회 전반의 어떤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표-1>] 1991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공연된 체호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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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공연된 체호프 작품

    그러나 본고는 <벚나무 동산>의 무대화를 단순히 정치·사회학적인 맥락에서의 분석에만 국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사회학적인 맥락에서의 분석은 물론 이와 더불어 첫째, 체호프의 희곡을 통해 현대연극이 어떠한 연극미학적 실험을 거듭했는지 살펴보고 둘째, 체호프의 무대화에 있어서 텍스트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을 현대연극이 어떻게 밝혀내었는가를 고찰하고자한다. 때문에 본고는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하는 커다란 정치적 흐름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된 <벚나무 동산>을 연구과제로 삼으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최근 20년 동안 무대화된 <벚나무 동산> 중 웰메이드한 아홉 작품을 선별하여 연구대상을 선정하였다. 연구 대상 작품은 <표-2>와 같다.

    1991년은 체호프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무대화된 해이지만 본고의 연구대상을 이 해의 작품들로 한정시키기엔 그 의미가 다소 무색하다. 1991년에 무대화된 <벚나무 동산>만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이 5편의 작품이 러시아 연극사가 기억하고 기록할 만큼 무대 미학적 차원에서의 명작은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 5편의 작품에만 연구의 범위를 국한시킬 경우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으로만 연구의 흐름이 흘러가게 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표-2>의 연출가들은 러시아 연극 지형에 있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들이며, 이들의 <벚나무 동산>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모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호불호를 떠나 객석은 각 무대가 체호프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뜨겁게 반응했으며, 위 작품들은 러시아 연극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극무대와 연출가가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인식했으며, 이를 무대 위에 어떠한 방식으로 풀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표-2>] 연구대상 작품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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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대상 작품 개요

    연극은 동시대성이 강한 장르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무대 위에 펼쳐진 현대사회의 커다란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와 개인의 적응과 분화, 혼란을 빠르게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는 비단 러시아처럼 먼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의 연극계에서도 무대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비평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어 왔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혼란한 시대에 나타난 연극을 분석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대의 반응을 비평할 수 있는 시각 또한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2. 공연 텍스트로서의 <벚나무 동산>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은 1904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의 역사적인 첫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현대연극의 관심 밖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작가가 살았던 당시보다 체호프에 대해 더욱도 지대한 애정과 관심을 들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출가들은 체호프를 통해 자신의 연극양식을 실험해 보기도 했고, 당대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 내보이기도 했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난해하지는 않지만 쉽지도 않다. 체호프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체호프는 여전히 많은 의문과 질문에 쌓여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 또한 끊임없이 무대에서 체호프를 탐험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겪으며 현대 연극무대의 중심에 체호프를 올려두고 있다. 그들 또한 체호프가 써놓은 말과 침묵 속에서 ‘저마다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검은 잉크로 새겨진 글자와 행간 사이에서 인간과 삶에 대한 신비를 풀고자 애쓰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가장 큰 격변이었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시간 속에서 체호프의 텍스트는 단순히 공연을 위한 대사와 지문을 넘어 몇몇 진보적 연출가들에 의해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극사의 큰 변혁을 가지고 온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무엇인가? 그 변혁의 시간이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에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더군다나 이러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박하고 지난했던 격변기의 시간에 왜 체호프는 장르로서의 ‘코미디’에 집중하였는가? 이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체호프 무대화에 대한 분석에 반드시 선행해야할 질문일 것이다.

       2.1. 페레스트로이카, 그 변혁의 물결

    1985년 4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Михаил Горбачев, 1931- )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표방하며 선언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재건’, ‘재편’, ‘개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와 비판이 허용되었고 인권이 개선되었으며,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시도되었다. 국가와 집단을 우선시하던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가 개인과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 경제 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개혁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일어났다. 러시아 종교계는 러시아정교 정신의 부활을 열망했고, 이는 1988년 6월 3일 러시아 정교 10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고르바초프와 피멘 대주교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정부와 러시아정교는 그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동반자의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문화 예술분야에도 많은 변화가 진행되었다. 먼저 문학 부분에서 소비에트 시절에 금서로 분류되어 출판할 수 없었던 작품들이 해금되었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의 재발견을 통해 러시아의 정신적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파스테르나크(Борис Пастернак, 1890-1960)의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는 무려 30여년 만에 재출판 되었고, 이어 불가코프(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1891-1940),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 1889–1966),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 1918-2008) 등의 작품들이 해금되었다.

    연극 분야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예술감독 체제의 레퍼토리 극장에서 예술감독과 극장장 체제의 이원화였다. 예술감독은 예술적인 부분 즉, 작품 선정과 레퍼토리 구성에 대한 책임을 맡고, 극장장은 예산과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극장에 대한 최고 책임 업무를 분담하여 2인체제로 극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예술감독을 정부의 당 지도부가 직접 지목하여 극장을 운영하게 했다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예술감독과 극장장을 직접 선출하는 형식으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예술감독은 레퍼토리를 선정하는 데 있어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가지고 온 연극 분야의 또 다른 변화 중의 하나로 1986년 СТД(소비에트 연극인 협회)의 결성을 들 수 있겠다, 이는 극장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가 극장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대신 지원금을 삭감하겠다는 것이며, 따라서 극장은 정부로부터 독자성을 얻은 만큼 어느 정도의 자립 생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극장의 자립생존은 기존하던 극장의 대대적인 극장운영의 변화를 가져온 것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들에 크고 작은 ‘스튜디오 극장’들이 설립을 자극하게 된 계기가 된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단체장을 선출하고 극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되자, 자신들이 직접 단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극장들은 자신들의 예술이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극적 탐구와 실험을 진행했으며, 이는 러시아연극에 신선한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극장들은 러시아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한 연극작업을 하며 러시아 현대연극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 가운데서도 모스크바 유고자파드 극장(Театр на Юго-Западе), 타바코프 스튜디오 극장(Театр п/р О. Табакова), 니키스키바로타 극장(Театр У Ники тских ворот)은 한국을 내한한 바 있는 극단들이다. 또한 비교적 규모가 있는 극단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장(МДТ-Театр Европы), 데레보 극단(Театр DEREVO), AXE 극단(АХЕ-инженерный театр) 등도 우리나라를 내한한 바 있는 극단들이다. 이들은 세계의 유수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등 현재까지도 그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비에트의 사회는 혼란스러운 갈등과 큰 격변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기존의 은폐와 밀실 일변도였던 정책이 어느 정도의 개방과 공개를 통해 진실성을 찾게 되면서, 문화예술 부문에서 괄목할만한 발전과 부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이전보다 많은 자유의 허용으로 인해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젊은 신생 스튜디오 극장들의 활동으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연극작업이 러시아 안과 밖에서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2.2.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 속 ‘상황의 코미디’

    페레스트로이카가 발생하기 약 80년 전,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이 탄생할 무렵에도 러시아는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즉 <벚나무 동산>은 사회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러시아 현대사를 살펴보면,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이 초연된 1904년엔 일본이 뤼순 군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다음해인 1905년에는 급기야 ‘혁명’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이른바 ‘1905년 혁명’이라 불리는 이 혁명의 시작은 1905년 1월 22일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 노동자의 모임’을 조직한 러시아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퐁(Георгий Гапон Apollonievich, 1870-1906)은 노동자를 비롯한 인민들의 정치·경제적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제출하고 니콜라이 2세와 면담하기 위해 겨울궁전으로 행진하자고 인민들에게 제안했다. 그리하여 1월 22일 이른 아침, 15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은 성상과 차르의 초상을 들고 겨울궁전 앞에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차르는 부재중이었다. 이 평화적 시위대는 해산을 명령받았지만 계속 궁전을 향해 전진했고, 혼란에 빠진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고 말았다. 광장은 피로 물들었고, 이 하루 동안에만 1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학살 소식은 곧 러시아 전체로 알려져, 전국에서 항의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그렇게 러시아혁명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혁명의 조짐은 사실 190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체호프가 한창 <벚나무 동산>을 집필하고 있을 무렵 러시아는 차르가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체제에 점차 균열이 가고 있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앞장선 반정부세력의 정부에 대한 공격이 갈수록 크고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체호프가 이러한 시대의 분위기를 몰랐을 리는 만무하였을 것이다.

    1903년 11월 2일, 얄타에서 체호프는 단첸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벚나무 동산>을 쓰기 위해 3년을 준비했습니다!”로 시작한다. 체호프는 이 편지에서 <벚나무 동산>에서의 ‘동산’이라는 러시아 말 ‘сад’을 ‘с <ад>’라고 썼다. 이는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동산이라는 ‘сад’의 с 와 ад를 띄어 쓰면서 ‘동산’이라는 뜻이 교묘히 ‘지옥에서’라는 뜻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 편지글은 체호프가 작가로서 느끼는 창작에 대한 고통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동산’을 ‘지옥’으로 읽히도록 한 이 짧은 문구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이 숨겨진 알레고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그대로 펜에 옮겨 작품을 비극적인 색채로 그려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4대 장막극(<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 모두를 ‘코미디’라고 주장했다. 체호프는 <벚나무 동산>을 쓰기 시작한 1901년에 자신의 부인이자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배우인 올가 크니페르 체호바(Ольга Книппер-Чехова, 1868–1959)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가벼운 희곡’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1904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작품의 코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때의 코미디는 실없이 익살을 부려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극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체호프가 언급한 ‘코미디’는 이른바 ‘개념의 코미디’, ‘생각의 코미디’, ‘상황의 코미디’로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코미디’라는 말 자체에서 풍기는 가벼운 느낌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벚나무 동산>에서 나타나는 코믹성은 ‘덜 자란 어른’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벚나무 동산>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신체적으로는 완전히 성장한 어른이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라네프스카야는 남은 재산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깥에 나가 외식을 하고, 그때마다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웨이터들에게도 팁으로 은화를 건네준다. 게다가 구걸하는 행인에게 금화를 적선하기도 한다. 피르스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늙은 가예프를 쫓아다닌다. 등장인물들 중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사람은 로파힌뿐이다. 하지만 로파힌이 아무리 벚나무 동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 <벚나무 동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어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로파힌뿐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벚나무 동산’은 개념적, 상황적으로 ‘어린이 동산’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라네프스카야가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꼬마들 방’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깥의 현실은 이들의 환상이 지속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집안의 재정은 파산 직전이며 벚나무 동산 또한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진 상황이다. 로파힌이 경매일 이전에 벚나무 동산을 벌목해 세를 주면 집까지 모두 팔려버려야 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말라’면서 벚나무 동산에 얽힌 옛이야기와 향수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나 벚나무 동산이 매각되는 경매일은 8월 22일로 확정되고, 그날은 점점 다가오지만 이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다. 체호프가 말한 코믹성은 여기서 가장 빛을 발한다. 그것은 ‘덜 자란 어른’에게 닥쳐온 ‘부조리한 상황’에서의 코믹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덜 자란 어른들을 보았을 때, 부정적이거나 나쁜 쪽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벚나무 동산>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스타니슬랍스키는 작품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코믹한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순수성’에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사회적인 때를 몸에 묻히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이다. 아이들은 계산할 줄 모른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진실 되며, 거짓을 모른다. 하지만 무대 위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객석에 앉은 우리는 이미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고, 손해와 이익을 구별하는 계산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진실성을 관객들은 함부로 비웃을 수 없다. 누구인들 때 묻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에서 <벚나무 동산>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무대 위 등장인물들의 어린아이 상태를 동경하게 된다. 순수한 모습을 하고 있는 벚나무 동산의 등장인물들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들 사이에서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연민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 벚나무 동산은 등장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꿈의, 상상의 동산인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동산은 쉽게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파괴했다가 재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꿈은 잃어버리면 끝이다. 이러한 연유로 4막의 끝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도끼 소리,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벚나무 동산을 벌목하는 도끼 소리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순수함과 꿈에 대한 절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드라마의 시각에서 보면 <벚나무 동산>은 비극적인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서 보통 자신도 모르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여 그에 동참해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방황하다 낙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개인의 역사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은 바로 이처럼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풍경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벚나무 동산이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로파힌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벚나무 동산은 평생 동안 함께해 왔던 곳으로서 단순히 부동산 가치로 치환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동산의 벚나무들을 이들은 차마벨 수 없는 것이다. 벚나무 동산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전부이자 희망과 추억의 표상이다. 때문에 벚나무 동산의 벚나무들을 베어 넘기고 빈 땅을 세를 주어 돈을 벌자는 로파힌의 생각은 이들에게 낯설고 저속하게만 느껴진다. 라네프스카야와 그녀의 가족들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그저 경매일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로파힌의 눈에는 이러한 그들이 아무 생각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로만 보인다. 땅과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인 상황은 <벚나무 동산>이 집필된 무렵은 물론이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의 상황과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체호프는 당시 전환기에 나타난 이러한 대결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한쪽의 패배와 변화를 비참과 파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혁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재건과 재편,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결을 마치 보드빌이나 소극에서 나타나는 사건처럼 그려냈다. 체호프는 극한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향수에 빠져 어린 시절의 환상을 다시금 느끼려고 하거나 당면한 문제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마치 마법처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꿈꾸는 것들을 바로 ‘코미디’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벚나무 동산>에서 새로운 시대의 현실적인 인물인 로파힌과 과거의 인물인 라네프스카야 가족들의 ‘대립’과 ‘모순’이 바로 체호프가 말하는 ‘상황의 코미디’이다.

    이러한 보드빌 또는 소극적인 상황의 설정은 체호프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단막극 <청혼>에서 로모프는 정말이지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버려진 습지에 대한 논쟁 때문에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청혼을 하지 못하는 코미디적 상황에 처한다. 또 <곰>에서 스미르노프는 이자를 갚지 못하면 자신의 영지가 차압당하는 상황에서 미망인 포포바와 빚 독촉 중에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의 코미디가 체호프가 <벚나무 동산>을 집필하고 있을 당시 작가가 처한 상황과도 닮아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희곡을 쓸 당시 그는 병중에 있었다. 체호프에게 몸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 코미디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황의 코미디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체호프의 편지에서 나타난 ‘지옥 속에서’라는 표현은 창작의 고통과 현실에 대한 은유, 그리고 육체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903년 체호프는 또 다른 편지에서 ‘드라마가 아닌 코미디, 부분적으로는 소극이 완성되었다’고 썼다. “즉 <벚나무 동산>은 처음부터 작가에 의해 희극, 보드빌, 소극의 연극 전통을 기반으로 창작되었던 ‘삶의 코미디’였던 것이다.”1) 체호프에게 예술적·사회적·신체적인 고통 속에서 코미디를 쓰고 있는 자신의 삶은 코미디 그 자체였으며, 나아가 체호프는 이와 같은 부조리한 ‘상황의 코미디’를 작품의 장르로 정한 것이다.

    1)이주영, 『체호프 희곡 전집 III』, 역자의 글, 309쪽.

    3.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무대화된 <벚나무 동산> 분석2)

    20세기 초반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태어난 <벚나무 동산>은 마찬가지로 격동치는 변혁의 시기였던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가장 많이 무대화되면서 큰 관심을 받아왔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시대와 구시대의 대립,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사람들과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대립이 작품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출가들은 체호프의 텍스트 속에 숨겨진 이러한 진실과 그 ‘상황의 코미디’를 각기 나름대로 연구하고 분석해 무대 위에 풀어 놓았다. 본고가 분석하고자 하는 아홉 가지 <벚나무 동산>은 수많은 <벚나무 동산>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작품들로, 모두 주목할 만한 연극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들을 고찰함으로써 각자 다른 사회와 연극에 대한 연출가들의 시선이 어떻게 무대 위에 표현되었는지를 살피고, 이를 통해 <벚나무 동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지점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3.1. 비극적 세계관의 암울한 초상

    <벚나무 동산>의 주인공은 몰락한 지주 남매이다. 이들은 특별히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평범한 귀족이다. 평범한 이들의 비극은 언제나 상황에서 온다. 평화가 깨지는 지점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극적 상황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몰린 인물들은 고통을 겪고 나름의 방식대로 이를 이겨나간다. 순진한 귀족들이 노닐던 평화로운 동산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혼란을 강조하며 비극적 세계관을 무대화한 연출가들로는 레프 도진, 레오니드 헤이페츠,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 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그 어떤 일련의 무대화 된 <벚나무 동산> 보다도 암울하고 또 암울하다. 이들의 암울한 무대는 <벚나무 동산>의 본래적 태생이 ‘비극’이었음을 강조하는데, 하루하루 숨 가쁘게 변화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주는 비극적 세계관은 큰 공감대를 형성했다.

    레프 도진(Лев Додин, 1944- )은 19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드라마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그는 체호프의 장막 희곡 다섯 작품을 모두 무대화하였는데, 1994년 <벚나무 동산>을 시작으로, 1997년에는 <제목 없는 희곡>을, 2001년에는 <갈매기>를, 2003년에는 <바냐 외삼촌>을,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10년에는 <세 자매>를 무대화하며 자신의 체호프 시리즈를 마무리 한다. 그리고 2010년 10월 그는 ‘레프 도진적인 체호프’이라는 타이틀 아래 자신이 작품화했던 다섯 작품의 무대 모형을 연극공연박물관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체호프 작품으로 그가 처음 연출한 <벚나무 동산>은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되고”3) 반년이 지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 드라마 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으로, 에두아르드 코체르긴(Эдуард Кочергин)이 무대미술을 맡았다. 코체르긴의 “무대는 제단의 그림들, 성상들, 영사막들, 창문들, 어두운 거울들이 사슬처럼 뒤섞여 있는 복합적인 장소이다.”4) 이러한 각각의 틀은 무엇인가를 투사하거나 그 자신이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작품의 곳곳에서 극의 내러티브와 상응하는 또는 별개의 파편화된 이미지를 던지며 극의 진행을 이끈다. 이따금 거울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등장인물들의 실루엣을 비추기도 하고 제단의 그림들과 성상들은 작품의 비극적 무게감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인 코체르긴의 비극적인 아우라로서의 무대는 천장의 샹들리에가 무대 중앙에 매달려 있다가 작은 타원형의 연못 위에 자리 잡으면서 정점에 달한다. “그 연못은 다름 아닌 물에 빠져 죽은 라네프스카야의 아들을 위한 상징적인 묘비이다.”5)

    무대 뒤편에는 작은 램프가 흰 꽃 만발한 벚나무에 빛을 드리운다. 이것은 코체르긴이 고안한 거울을 통해 무한대로 복사되며 무대를 아름다운 벚꽃의 동산으로 변화시킨다. 거기에 안개가 드리우며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은 완성된다. 그러나 동산은 그 특성상 마치 안개처럼 아침이 밝으면 금방 사라질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동산의 아름다움은 마치 신기루처럼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작품이 시작할 무렵 연못에도 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점차 물은 사라지고 쓰레기들이 모이더니 나중에 연못은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통으로 변한다. 가구들도 처음에는 나름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어지럽게 놓이고 쓰러지기도 해서 마치 버려진 집을 연상하 게 했다. 가득 참이 공허가 되고, 아름다움이 추함이 되고,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어버리는 도진의 ‘동산’은 어떤 큰 재해나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인물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다.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과 불행의 손이 등장인물들을 압도해간”6) 것이다.

    도진의 비극적 세계관의 투영으로서의 <벚나무 동산>에서 구원의 손길은 있는가? 도진은 그 옛날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일 했던 농장의 주인이 된 로파힌에게조차 구원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가 산 것은 이미 황폐해진 동산일 뿐이다. 그가 벌어 들인 것은 가득참이 아닌 공허함이며, 아름다움이 아닌 추함이며, 깨끗함이 아닌 더러움으로서의 동산이기 때문이다. 순백의 꽃잎은 이미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 차디찬 눈송이 위에서 그 사멸의 시간을 다할 뿐이다. 도진의 <벚나무 동산>에서 아름아운 동산, 풍요로운 동산은 ‘찰나’였으며, 그 이후는 아마득한 비극의 세계일뿐인 것이다.

    도진의 이러한 <벚나무 동산>에 대한 비극적 시각을 살펴볼 때, 연출가는 모든 것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구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도진에게 있어 이 세계는, 구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하는 이 거대한 변혁의 쓰레기는 인간의 삶을 장밋빛 희망으로 이끌기는커녕 거대한 쓰레기통으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는 제쳐둔 채 사소한 일상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도진은 이러한 견지에게 등장인물에게 전혀 우호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지않다. 그는 등장인물들에게 추호의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다. 도진은 다소 단호하고 비교적 적나라하게 자신의 관점을 무대화했다. 마치 당신들은 게으르고 쓸모없는 짓거리나 하는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한 도진의 연출은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도진의 <벚나무 동산>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동산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라는 것들은 실질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대한 소모적인 발버둥일 뿐이다. 그들은 정작 해결해야할 커다란 문제는 내버려둔 채 주변의 소소하고 작은 문제에 집착해서 싸우는 부족하고 못난 인간들일 뿐이다.

    썩어 들어가는 현대사회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표현은 해외에서는 많은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앞서 밝혔듯이 도진의 <벚나무 동산>은 프랑스 초연 후 러시아에서 공연된 작품이었다. 때문에 이 “연극은 마치 수출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7) 도진의 <벚나무 동산>이 러시아 평단으로부터 우호적인 평가를 얻지 못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등장인물에 대한 도진의 부정적인 시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진의 무대 위에서 표현된 세기말적 풍경과 염세주의적 인생관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한 부분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레오니드 헤이페츠(Леонид Хейфец,1934 -)는 모스크바 모사베타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헤이페츠가 연출한 <벚나무 동산> 또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무대화 된 <벚나무 동산> 중에 비극적 세계관의 암울한 초상의 선상에 거론될 수 있는 작품이다. 모사베타 극장의 무대미술가 블라디미르 아레피예프(Владимир Арефьев)는 <벚나무 동산>의 무대를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형상화했다. 무대 위에는 “그 어떠한 꽃도 없다, 그리고 지난 시대의 화려한 문화의 아름다움도 없다.”8) 그의 무대에는 그 어떠한 ‘꿈의 동산’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진의 <벚나무 동산>에서처럼 ‘찰나’조차의 꿈과 환상의 동산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객석이 어두워지고 무대에 빛이 들어오면, 밝고 넓은 방이 보인다. 방의 한쪽 벽면에는 한때 아늑했을 법한 벽난로가 있고, 그 앞에는 망가진 안락의자가 뒹굴고 있다. 벽난로와 안락의자의 ‘따스함’과 ‘안락함’은 이미 오래된 지나간 시간이며, 그것은 ‘과거’이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헤이페츠의 <벚나무 동산>에서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 남매의 부귀영화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헤이페츠의 공연은 그동안 만나왔던 <벚나무 동산>과 비교해도 눈에 뛸만큼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 연극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만 생각하며 사는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시간과 공간을 아주 느린 속도로 조용히 떠나보낸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버린 마지막 장면에서 피르스의 죽음 또한 조용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조용하다기 보다는 ‘적막’하고 쓸쓸하다. 피르스는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무대에서 빗자루를 들고 천천히 무대 바닥을 쓸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동안 연극 <벚나무 동산>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피르스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9)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아나톨리 아도스킨(Анатолий Адоскин)이 연기한 피르스는 모두가 떠나간 이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했으며 자신의 죽음 또한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생명은 탄생한 순간 죽음을 예정 받는다. 헤이페츠는 죽음을 반항하거나 거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삶의 공간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새롭게 자리 잡는다. 헤이페츠는 이 모든 사건들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이자 사회의 변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무대 위에서 아주 느리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그 사건들에 대해 충분한 사색할 수 있도록 하한 것이다.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가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에서도 헤이페츠의 느림의 미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연출은 ‘느린’템포를 제대로 의도했을 것이다. 두 남매는 무대의 앞쪽에서 관객들을 오랜 시간 침묵으로 바라본다. “무대화된 <벚나무 동산> 역사 이래 가장 긴 시간 동안 앉아.”10)있었던 듯한 헤이페츠의 두 남매는 <벚나무 동산> 초연작이었던 1904년 올가 체호바와 카찰로프가 분했던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 남매의 동산과의 긴 작별보다 더 길고 더 조용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침묵의 시간을 통해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시간이 너무도 많이 지나가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침묵 속의 이들의 후회는 헤이페츠의 <벚나무 동산>을 비극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

    헤이페츠의 <벚나무 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물론 이것은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이 가지는 일반적인 세대 간의 갈등, 즉 신세대와 구세대, 즉 로파힌과 라네프스카야의 갈등이다. 이 두 세대는 공동의 문제를 함께 의논해서 풀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도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노인의 늙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둘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둘은 소통불능이며 몰이해이며 나아가 절대 가까울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이해관계의 평행선이다. 헤이페츠는 이 둘의 갈등을 통해 영원한 세대 간의 갈등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천재 연출가라 불리는 네크로슈스(Эймунтас Някрошюс, 1952- )가 2003년에 연출한 <벚나무 동산>은 3번의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장장 6시간 동안 펼쳐지는 공연이다. 이 공연은 수많은 <벚나무 동산> 중 가장 장시간에 걸친 공연이며, 연극사적으로도 매우 긴 공연에 속한다. 인내심을 요하는 기나긴 관극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관객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천재 연출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매료되어 반나절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 따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평론가 알료나 카라시(Алена Карась)는 자신이 쓴 비평문의 제목을 ‘6시간 동안의 실신’이라고까지 이름 붙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비평문에서 카라시는 무엇보다도 조화로운 배우들의 앙상블과 놀라운 연출가의 연극적 상상력11)을 언급하며 이 기나긴 작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론가 마리나 다비도바(Марина Давыдова)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비도바는 이 긴 <벚나무 동산>에 대해 “덥고 답답한 객석에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순간이 있기에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12)고까지 호평한 바 있다.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현재성’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처음,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난 일”13)이었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1막 끝 부분에 로파힌이 ‘음악을 연주하라’고 말하는 순간, 고막을 찢을 듯이 자극적인 높은 주파수의 음악소리가 들리는 식이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실 속, 시골 영지 문화의 몰락을 네크로슈스는 비극으로 해석해 풀어냈다.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에 대해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코미디라고 말했고, 모스크바 예술 극장은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리고 네크로슈스에 와서 <벚나무 동산>은 위대한 비극이 되었다.”14)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에서는 “끊임없는 절망의 비명 소리”15)가 들렸고, 인물들의 공포와 비극이 펼쳐졌다. 마치 놀란 토끼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도망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도 종이로 만든 토끼 모자를 쓰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이 토끼 모자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 자란 성인들이 토끼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풍경은 벚나무 동산이 현실이 아닌 지나가버린 과거의 것이며, 등장인물들의 추억 속 공간은 이제 곧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암시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했다.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에는 토끼를 비롯한 동물을 이용한 상징이 자주 나타난다. 때문에 평론가 마리나 라이키나(Марина Райкина)는 자신의 비평문에 『벚나무 동산-동물 동산』16)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또한 평론가 마리나 자이온츠(Марина Зайонц)도 『토끼사냥』17)이라는 제목의 비평문을 통해 작품의 동물 상징에 대해 주목했다.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순수함,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물들 중 특히 참새소리가 가장 많이 삽입되었는데, 이러한 참새들의 소리는 처음에는 조용히 들리다가 점점 커지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고막을 찢을 듯 한 소리로 변한다. 참새소리는 소음 가득한 벚나무 동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며, 벚나무 동산의 어두운 미래와 위험을 암시적 표현이기도 했다.

    <벚나무 동산> 속 몰락과 죽음의 테마는 2막에서 더욱 확장되어 나타났다. 체호프의 텍스트 속 2막 지문을 살펴보면,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채 버려진, 기둥이 기울어진 낡은 예배당. 그 옆에는 우물이 있다. 예전에는 틀림없이 묘비였으리라 짐작되는 커다란 돌이 몇 개 있고, 낡은 벤치가 있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연출가 네크로슈스는 이 무대 지문의 의미를 확대시켜서 “전통적인 장례의식으로 표현했다.”18) 무대 소품으로 관이 등장했고, 라네프스카야는 그 관을 힘겹게 끌고 다니기도 했다. 관을 등에 진 라네프스카야는 마치 죽은 어린 아들을 만나기 위해 저승을 헤매는 사람처럼 보였다.

    네크로슈스는 이 혼란한 세기말을 살아가는 모든 인물들을 비극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죽음의 기조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로파힌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로파힌의 의식 속에서도 죽은 이들이 존재한다. 3막의 끝부분에서 로파힌은 자신이 벚나무 동산을 소유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덤 속에서 저를 보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버지와 조상이 하인으로 일했던 이 동산을 내가 샀다’고 외친다.

    한 세기가 마감되는 세기말적 상황에서 연출가는 로파힌도 비극적인 인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다른 <벚나무 동산>과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이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동안의 <벚나무 동산>에서 벌어진 신구세대의 갈등이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로파힌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여주었다면, 네크로슈스의 결말은 이와 달랐다. 네크로슈스는 이 팔딱팔딱 뛰는 심장의 젊은이도 결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네크로슈스의 작품에 따르면 로파힌의 승리와 기쁨은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고, 세계는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로파힌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시키도록 만든다. 네크로슈스의 <벚나무 동산>의 비극은 “무엇보다도 로파힌의 비극”19)이며, 이는 세기말을 살아가는 현대의 모든 젊은이의 비극으로 확장된다. 이처럼 로파힌의 미래 역시 구세대와 마찬가지로 암울한 일상과 몰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네크로슈스의 해석을 통해 사회와 세계에 대한 그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네크로슈스의 비극적 현실 인식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으로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네크로슈스는 비극 속에 싹 트는 희망이나 절망적 암흑 속에서 비치는 한 줄기 서광 따위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대적 비극을 정면 돌파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회도 삶도 결국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냉철한 진리를 장장 6시간에 걸쳐 서늘하게 풀어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의 에둘러댐도 없이 일관되게 극을 관통하는 비극적 정서와 세계관은 네크로슈스의 무대를 미학적으로 더욱 빛나게 한다.

       3.2. 시대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 시선

    <벚나무 동산>은 체호프의 마지막 장막극이다. 당대의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 작품에서 몰락한 귀족 남매인 가예프와 라네프스카야의 비극에 중점을 두었지만, 사실 체호프는 비극성보다는 새롭게 일어서려는 신세대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벚나무 동산>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읽고 이를 무대화한 연출가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갈리나 볼첵, 알렉세이 보로딘, 마르크 자하로프가 그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애정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벚나무 동산>을 새로운 사랑 이야기로 재해석했다. 사랑하는 사람, 좌절하지 않는 인간을 통해 시대와 세대의 변화에 대한 화합과 조화를 긍정적 색채로 무대화한 것이다.

    1976년에 <벚나무 동산>을 무대화했던 갈리나 볼첵(Галины Волчек, 1933- )은 1997년에 모스크바 사브리멘닉 극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벚나무 동산>을 다시 연출했다. 사브리멘닉 극장의 <벚나무 동산>은 왈츠풍의 경쾌하고 가벼운 음악과 함께 시작한다. 로파힌은 라네프스카야와의 만남에 들떠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랑에 빠진 남자로 등장한다. 그는 곧 두냐샤의 인기척을 듣고 이러한 자신의 속내를 들키려고 하지 않는 듯, 잠든 척 엎드린다. 촛불을 들고 등장한 두냐샤는 로파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가 모포를 덮어준다. 두냐샤는 잠든 로파힌을 바라보며 그를 향한 사랑에 안절부절 못한다. 두냐샤의 등장 또한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갈리나 볼첵의 <벚나무 동산>은 시작의 사건만 보더라도, 비극적 세계관의 암울한 초상으로 대변되는 위의 일련의 세편의 <벚나무 동산>과는 대척점이 있다.

    연극의 시작 사랑에 들뜬 두 남녀의 안절부절못한 모습에서도 상상할 수 있겠지만, 볼첵의 <벚나무 동산> 속 인물들은 위의 레프 도진의 작품을 비롯한 일련의 비극적 세계관의 형성화로서의 <벚나무 동산>과는 다르게 인물들에 있어 새로운 시대와 변화에 부정적이지 않다. 볼첵의 등장인물들은 삶의 모든 우울한 불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인물들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주변의 변화를 설렘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이 누울 관을 끌고 등장하던 네크로슈스의 라네프스카야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볼첵의 라네프스카야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행복하고 순수하며 어린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도 곧 불행한 상황이 닥치게 되고, 그들은 이것을 모두 극복하고 행복을 지속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현실성이 없는 엉뚱한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체호프가 코미디라고 말한 상황의 코미디가 발생한다. 볼첵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스스로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세기말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파멸이 아닌 새 시대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닥쳐왔을 때, 인간들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종종 코미디적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고 여긴 것이다. 가장 빼어난 명장면 중 하나는 라네프스카야가 파리에서 온 전보를 읽을 때일 것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가벼운 바람이 불어 전보가 담긴 편지를 날린다. 그리고 라네프스카야는 그것을 잡아 가볍게 찢어서 다시 공중에 날렸다.” 20) 직접적인 절망의 상황에서도 라네프스카야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자존심과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자부심으로 인간성의 회복과 절망의 극복을 보여주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애써 싸우며 행복을 지켜나갔고, 객석은 그들의 쓰라린 마음과 굳은 의지를 올곧이 전해 받는다. 볼첵의 <벚나무 동산>은 체호프가 말한 ‘상황의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할만하다.

    알렉세이 보로딘(Алексей Бородин,1942-)은 2004년 모스크바 청소년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이 작품의 표면적 특징은 객석을 무대 위로 올린 것이다. 관객들은 안락한 객석을 버리고 무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 무대 위에 임시 객석이 설치되었고, 가예프의 집은 무대 왼쪽, 보통 소품이 보관되는 자리에 설치되었다. 가예프의 집 안에는 나무로 된 현관문과 흰색의 가구들, 당구대와 책장이 놓여 있다. 무대미술가 스타니슬라프 베네직토프(Станислав Бенедиктов)는 벚나무 동산의 모형을 무대 위에 선보여 동산을 상징하기도 했다.

    보통 <벚나무 동산>이 공연되는 대극장의 규모에 비해 보로딘의 무대는 굉장히 협소한 편이었다. 배우들은 가까이서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고, 대화를 나누었고, 스쳐 지나갔다. 좁은 무대 덕분에 그들은 서로의 호흡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보로딘은 <벚나무 동산>에 대해 “현재 상황에 대처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사랑과 삶을 표현하려 했다”21)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연극적인 실험이나 파격적인 시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자 했고, 이를 위해 넓은 무대 대신 작은 집에 배우들을 등장시켜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무대 위에서 보다 상세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벚나무 동산의 경매가 임박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 그들의 뛰는 심장과 사랑의 감정을 연출가는 작은 무대의 이점을 활용해 매우 섬세하게 표현했다.

    보로딘은 <벚나무 동산>을 해석하는 키워드를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보았다. 가예프의 집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로서의 가슴 아픈 사랑이기도 하고, 유령이 되어 벚나무 동산을 배회하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의 사랑이기도 하다. 이처럼 각 인물들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연출가는 이러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자신의 사랑을 상징하는 벚나무 동산을 차마 베어 넘기지 못하는 라네프스카야를 과연 비실용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자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만약 라네프스카야가 동산을 임대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면 행복했을 것인가? 그녀가 사랑을 팔아넘기고 얻은 부가 과연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보로딘은 관객들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냈다.

    보로딘의 <벚나무 동산> 속 인물들은 현실 대신 사랑을 선택한다. 그들은 설령 자신들이 떠나게 될 지라도 자기 손으로 사랑을 죽이는 선택은 하지 못한다. 이들의 삶은 비록 무력하여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말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충만해 있다. 이들은 현실 부적응자나 실패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삶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마르크 자하로프(Марк Захаров, 1933- )는 2009년 모스크바 렌콤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자하로프는 원작의 많은 부분을 편집해서 이 작품을 1시간 55분짜리 연극으로 만들었다. <벚나무 동산>은 체호프의 희곡 텍스트를 그대로 공연한다면 통상 3시간 이상 걸리는 작품이다. 자하로프는 그 적지 않은 공연 시간을 절반 가까이 줄여낸 것이다. 자하로프는 현대연극에서 연출가가 원본 그대로 작품을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동시에 불필요한 일이며, 따라서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또 어떤 부분은 첨가하는 등 마치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듯이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의 <벚나무 동산>도 연출가의 이러한 지론이 제대로 실현된 경우라 하겠다. 사실 이것은 러시아 무대에서도 전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은 100여 년 동안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편집되고 각색되면서 다채롭게 재해석되어 왔을 뿐더러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는 라네프스카야와 하인 야샤와의 사랑 이야기로 재해석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자하로프의 파격적인 연출은 그가 가진 작품에 대한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주효했다. 자하로프는 <벚나무 동산>을 집주인 라네프스카야와 로파힌의 강렬하면서도 노골적인 사랑 이야기로 재해석했다. 둘의 사랑은 기존의 <벚나무 동산>에서는 금기시되어왔던 음밀한 모습을 하고 있기 까지 하다. 극중에서 이것은 “가예프가 조카딸 바랴에게 자신의 여동생 라네프스카야가 로파힌과 비밀스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귀띔”22) 하면서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로파힌이 라네프스카야를 거칠게 밀치면서 비밀스러운 부분을 만지기까지.”23)하면서 그 음밀함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자하로프는 이러한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로파힌이 벚나무 동산을 산 이유를 해석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라네프스카야를 위한 것이자, 귀족부인이었던 자신의 주인이었던 여인에 대한 신분적 열등감을 없애기 위한 남자로서의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이를 비롯해 자하로프는 원작의 많은 부분을 각색하고, 과감히 잘라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에피호도프의 삭제이다. 자하로프는 에피호도프에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를 들어냈다. 그리고 벚나무 동산에 숨겨져 있던 라네프스카야의 불행하고 음울한 사건의 설명도 거의 없애버렸다. 그녀는 자하로프의 <벚나무 동산>에서 더 이상 남편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이자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절망의 어머니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연출의 과감한 원작 텍스트에 대한 손질은 자하로프의 <벚나무 동산>을 원작과 사뭇 다른 작품이 되도록 한다. 자하로프는 공연 프로그램에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을 연출가 자하로프가 재구성함’이라고 명시하여 본인의 작품이 기존의 <벚나무 동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작품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과감성 있는 각색에 대해 평론가들은 <벚나무 동산>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며, 때문에 원작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과감한 각색은 연출가가 생각하고 있는 작품의 주제와 콘셉트를 강하게 부각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자하로프는 벚나무 동산에 얽힌 과거의 사건과 주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무대 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인물의 관계에 집중하기를 원한 것이다. 자하로프는 과거 대신 현재에 주변 대신 중심에 주목했으며, 이를 위해 그의 무대는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지금 관객들이 어느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리한 연출가였다.

    자하로프의 <벚나무 동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무대이다. 전통적으로 <벚나무 동산>에서 무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무대를 통해 연출가의 작품 해석 방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벚나무 동산과 그 시골 영지의 집을 어떻게 무대화하느냐를 통해 연출가의 의도를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평론가들은 자하로프가 세운 무대 위의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무대 위에는 실질적으로 그 어떠한 ‘집’이 존재하지 않는다.”24) 무대는 삭막하고 건조했다. 심지어 <벚나무 동산>이라는 작품 제목이 무색하게 “꽃피는 나무에 대한 어떤 흔적도 없다.”25)

    무대미술가 알렉 쉐인치스(Олег Шейнцис)의 제자 알렉세이 컨드라치예프(Алексей Кондратьев)는 아름다운 벚나무와 번영했던 시절을 짐작하게 하는 화려한 내부 장식 대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베란다’를 설치하여 인간의 소외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표현하려고 했다. 이 베란다는 연극의 진행 과정에 따라 열리거나 닫혔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서 피르스는 바로 이 베란다 문 사이에 끼어서 죽음을 맞이했다. 자하로프는 피르스의 죽음을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거대한 문 사이에 낀 채 서서히 파멸해 나가는 비참한 최후로 그려냈다. 이때 이 베란다의 양쪽 문은 벚나무 동산의 집을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두 개의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피르스는 맞닿은 두 개의 시대 사이에서 문자 그대로 ‘끼어서’ 죽은 것이다. 이는 또한 두 세대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피르스의 죽음 이후, 베란다의 양쪽 문은 먼지와 소음을 내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무대 위에서 하나의 삶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전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삶도 그들이 살았던 집도 마치 존재한 적조차 없는 듯 했다.”26) 그러나 이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시대를 가르던 경계가 허물어졌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하로프는 작품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대교체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세대 간에 애정은 흐르고 있지만, 삭막한 현실은 과거의 흔적들을 산산이 부수어 놓고 있다는 것을 무대를 통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 마치 폐허와 같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로파힌이 상징하는 젊은 세대의 혁명이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한 시대의 삶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지금의 삶도 미래에 마찬가지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하로프의 비극적 세계관을 엿볼 수도 있다. 그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더욱 중요한 요소는 두 세대 간의 사랑과 상호 유기적인 소통에 대한 가능성이다. 라네프스카야와 로파힌은 과거의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비록 상대방에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세대 사이의 사랑은 결국 불협화음을 일으켜 한 명은 떠나고 다른 한 명만이 남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자하로프는 혁명을 긍정하는 세대와 아직 과거에 매여 있는 세대의 모습을 소통 불가능한 고립이 아닌 유기적인 상호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그 사랑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이더라도 사랑이 존재하는 한 소통의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하로프가 ‘재구성한’ <벚나무 동산>은 비록 삭막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긴 했지만 단순하게 비극적인 암울한 색채의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3.3.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형식적 실험

    <벚나무 동산>은 구세대와 맞서는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이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를 새로운 연극 형식적 실험으로 풀어낸 연출가들이 있다. 외형적 새로움으로 텍스트 내면에까지 새로움을 심어준 연출가들로는 마르크 로좁스키, 아돌프 샤피로, 드미트리 크리모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벚나무 동산>은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외적 요소로써 새로움을 가미했다. 한마디로 항상 색다름을 추구하는 연출가의 노림수가 주효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또 다른 의미의 연극적 페레스트로이카라 할 수 있다. 연극 형식적 ‘재건’, ‘재편’, ‘개혁’으로 당대의 현실과 작품의 주제를 한꺼번에 관통해 표현해 낸 것이다.

    마르크 로좁스키(Марк Розовский, 1937- )는 2001년 모스크바 니키스키 바로타 극장에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로좁스키의 <벚나무 동산>에는 연출가의 서브텍스트가 거의 모든 장면마다 숨겨져 있다. 대표적으로 몇 장면을 꼽아보자면, 첫 장면에서 두냐샤는 로파힌이 읽고 있던 책을 비밀리에 꺼내서 읽는다. 라네프스카야는 로파힌과의 첫 대면에서 그의 부성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겨우 떠올린다. 대학생 페챠는 아냐에게 미래를 향해 전진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자신은 그 자리에 누워버리는 식이다. 이런 익숙지 않은 체호프 인물들의 행동은 모두 연출가와 배우들의 면밀한 희곡 분석에서 찾아진 서브텍스트에 기인하는 것이다.

    로좁스키는 “배우들에게 거의 모든 대사에 대해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 서브텍스트를 배우들은 장면 장면마다 연기하려고 노력했다”27)고 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행간에서 발견한 서브텍스트를 극중 행동으로 옮기는 로좁스키식 체호프는 사실 극을 지루하게 연장시키고, 하여 극의 코믹성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로좁스키는 그럼에도 체호프가 구지 자신의 희곡을 ‘코미디’로 장르를 설정한 것에 집중하며, 서브텍스트를 극중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코미디로서의 <벚나무 동산>에 대한 기본적 사항을 시종일관 견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문제는 이러한 체호프의 코미디를 유머와 개그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인데 그 방식 자체가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느리고 진지한 연기와 전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 결과에 이른다. 연출가의 콘셉트와 작품의 코믹성이 충돌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로좁스키의 <벚나무 동산>에서 주목할 만한 면은 새로운 체호프의 인물들의 제시다. 더 이상 이곳엔 100년 동안 줄곧 체호프의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 섰던 러시아의 몰락한 지주와 인텔리겐치아는 없다. 라네프스카야는 심지어 대낮에 술을 마시고 아무 남자와 키스를 하는 시골의 술집의 작부 같기까지 하다. 벚나무 동산 또한 영화로웠던 과거를 자랑하는 귀족의 영지가 아니라 러시아의 시골 농장 정도로 규모가 작아졌다.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로좁스키의 연출가적 재량이 긍정적으로 발휘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현대의관객들에게 100년 전 귀족 사회에 대한 모습은 익숙하지 않으며,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고민과 작품 안에 숨겨진 메시지가 완벽하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러시아혁명으로 전통적인 계급사회가 무너진 이후, 선천적인 귀족들의 정서와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관객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로좁스키는 <벚나무 동산> 속 인물들을 보통 사람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새로운 시대라는 변화의 과제를 제공한 것이다. 로좁스키의 무대 위 인물들은 객석에 앉은 사람들과 비슷한 존재들인 것이다.

    로좁스키는 이러한 새로운 체호프의 인물군상의 제시를 통해 무대 위에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출 전략은 언제나 현재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극의 장르적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영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로좁스키의 무대를 통해 동떨어진 시대의 옛날 사람을 지켜본 것이 아니라, 현대인과 다를 바없는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작금의 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연출가 로좁스키가 <벚나무 동산>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아돌프 샤피로(Адольф Шапиро, 1939-)는 2004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1904년 <벚나무 동산> 100주년 기념으로 무대화 된 <벚나무 동산>을 연출했다. 샤피로의 <벚나무 동산>은 작품 자체에 앞서 지금까지 연극무대에 한 번도 서본 적 없는 레나타 리트비노바(Рената Муратовна Литвинова)라는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를 라네프스카야 역에 캐스팅 하여 작품 시작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공연이다.

    <벚나무 동산>의 안주인인 라네프스카야 역할은 러시아에서 연극을 하는 모든 여배우들이 선망하는 꿈의 역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쉼 없이 무대에 서면서 라네프스카야를 꿈꿔왔던 연극배우가 아니라, 한 번도 연극을 해 본 적 없는 여배우가 그 역할을 따낸 것이다. 이 뜻밖의 캐스팅은 러시아 연극계에 파란을 일으켰고, 리트비노바에게 쏟아졌을 무대 뒤 시기와 시샘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게다가 처음으로 서는 연극무대는 그녀에게 마치 남의 집에 얹혀사는 듯 한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출가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리트비노바를 라네프스카야 역으로 캐스팅한 것이었다. 자신이 안주인인 집이지만, 오랜 파리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라네프스카야가 벚나무 동산에서 느끼는 심정은 바로 리트비노바가 무대에서 느끼는 감정과 같았을 것이다. “샤피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벚나무 동산> 속 라네프스카야가 본래의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점이었다. 그는 바로 이 점에서 무대라는 공간에 낯설었던 레나타 리트비노바를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연극무대에서 외부세계의 사람이며 (무대에 익숙한 연극배우들과는 달리) 연극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8)

    배역 캐스팅에 있어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가의 노림수는 무대 위에서 십분 결과를 발휘했다. 라네프스카야 역할에 대한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은 어느 정도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낸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연극평론가 라리사 유시포바(Лариса Юсипова)는 “연출가 에프로스는 로파힌 역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네크로슈스도 마찬가지로 로파힌 역의 예브게니 미로놉을 주인공으로 <벚나무 동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아돌프 샤피로에 의해 라네프스카야의 <벚나무 동산>이 만들어졌다”29)고 평한 것은 그러한 호응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리트비노바가 연기한 라네프스카야의 외모와 스타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그녀의 무대와 어울리지 않은 발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리트비노바의 “성대는 매우 약했는데, 특히 고음의 대사를 할 때마다 (대극장이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목소리가 갈라지고 째지는 듯 한 소리”30)가 <벚나무 동산>의 몰락한 귀족부인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언뜻 생각하면 작품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리트비노바의 갈라지고 째지는 목소리는 자칫하면 비극으로 흘러갈 수 있는 라네프스카야의 침울한 연기를 막아준 점은 분명 있다. 그녀는 시종일관 귀찮고 어려운 질문을 로파힌이 퍼부을 때 마다 가늘고 소녀 같은 높은 음색으로 짧은 감탄사를 내 뿜으며 그 잔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는데, 라네프스카야의 어린아이 같은 면과 그녀가 처한 상황의 코미디를 부각시키는 역할에 어느 정도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아돌프 샤피로의 <벚나무 동산>에서 ‘상황의 코미디’는 배역 선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연극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보여주었으며, 연출가가 배우를 선택할 때 단순히 연기력이나 외모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테마와 연출적인 콘셉트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는지를 숙고해야 한다는 점도 깨닫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연출가가 배우와 함께 역할을 창조해나가는데 있어서 그의 장점과 단점을 비롯한 모든 면을 역할과 작품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의 중요성도 증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샤피로는 무대 위에서 배우의 모든 것을 거짓 없이 드러냈으며, 이를 통해 체호프가 추구한 ‘상황의 코미디’를 빼어나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드미트리 크리모프(ДмитрийКрымов, 1954-) 는 2010년 모스크바 드라마 예술 극장에서 체호프의 장막 희곡을 각색한 <타라라붐비야>를 연출했다. 기실 본고, 「공연 텍스트로서의 안톤 체호프 <벚나무 동산> 무대화 연구」를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2010년 1월 체호프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방문한 모스크바에서 드미트리 크리모프 연출의 <타라라붐비야>를 감상하면서이다. 이 작품은 모스크바 체호프 국제연극제와 모스크바 드라마예술학교가 공동제작한 체호프 탄생 150주년 기념 작품이었다. <타라라붐비야>는 지난 100년 동안 현대 연극연출가들이 체호프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대 위에서 어떤 식으로 새롭게 형상화했으며, 체호프를 통해 어떤 연극미학적 실험을 수행해 왔는지를 퍼포먼스 형태로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80여 명의 배우들이 참여한 대작 <타라라붐비야>는 거대한 군중집회를 연상케 했다. 각기 다른 신체 조건과 표정, 그리고 제각각 다른 무대 위에서의 나름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지난 100년간 체호프의 연극무대에 등장했던 수십 명의 라네프스카야와 트리고린과 수많은 트레플레프들이 이 공연에 등장했다. 한마디로 <타라라붐비야>는 체호프의 희곡이 다양한 현대 연극연출가들의 손을 거쳐서 어떻게 해석되고, 연출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주제의식을 표현해왔는지를 퍼포먼스 형태로 보여준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라라붐비야>의 또 다른 제목을 ‘현대연극과 체호프’, 혹은 ‘100년 동안 무대화된 체호프의 다양한 얼굴들’이라고 해도 될 만큼 확실한 작품 의도를 드러냈다.

    크리모프는 무대미술가 출신 연출가답게 무대연출도 파격적이었다. 기존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벗어난 무대는 마치 패션쇼장을 연상케 했다. 크리모프는 극장 가운데에 가늘고 긴 무대를 만들었고, 양옆으로 관객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 무대의 양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어서 배우들이 등 퇴장할 수 있었다. 약 80여 명의 배우들이 체호프 작품의 인물들을 형상화하며 길고 좁은 포디움 무대 위를 행진했다. <갈매기>의 트리고린이 행진하는 장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트리고린들이 무리지어 행진했는데, “뚱뚱하고, 날씬하고, 늙고, 젊은”31)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어떤 평론가는 이를 ‘행진’이아니라 ‘공습’이었다고 평론하기도 했다.

    <타라라붐비야>에서 라네프스카야, 가예프, 아냐, 바랴를 비롯한 모든 등장 인물들은 오래된 외투와 털옷을 입고 낡은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난다. 무대는 직선을 향해 움직였고, 맞은편 끝에 도착해서 멈추었다. 무대 양끝에는 거대하고 단단한 문이 기둥처럼 서있었다. 긴 머리의 “피르스는 온몸으로 문을 열기 위해 양끝으로 달려가 몸부림을 쳤지만 그는 문을 열 수가 없었다.32) 그것은 마치 새장 속의 새가 새장을 뚫고 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과 같았다.

    드미트리 크리모프의 <타라라붐비야>에서 행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공연은 1시간 20분 동안 중간 휴식 없이 펼쳐졌다. 숨 가쁘게 진행되어도 짧은 공연이었지만 연출가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무대 위의 정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극 중간에 몇 분 동안 무대가 텅 비는 장면이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면서 어린아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리샤이다. 라네프스카야의! ….”33) 8살 때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살아나 등장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 밝고 명랑하게 움직이는 아이를 관객들은 매우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흰 우산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아이의 엄마인 라네프스카야가 아니라 그녀의 엄마였다. 크리모프는 라네프스카야가 엄마를 생각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어서 “소년은 가예프의 100년이 넘는 고가구 속에서 어떤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내서 바로 놀이를 시작했다.”34) 소년 그리샤와 흰 우산을 쓴 여인은 <벚나무 동산>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연출가의 상상에 의해 형상화된 인물이다. 마치 라네프스카야의 한을 풀어주는 듯 한 그리샤의 활기 넘치는 등장은 크리모프의 상상력이 번득이는 명장면이었다.

    연출가 드미트리 크리모프는 <타라라붐비야>를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많은 배우들을 등장시켰고 다양한 체호프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크리모프는 자신만의 상상에 함몰되어 섬세함과 깊이를 잃어버렸다. 다양한 유형의 외적인 형상화를 보면서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 어떤 작품의 어떤 등장인물이리라고 상상하고 맞춰보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그 이상의 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장면이 꽤 많았는데 그중 가장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는 화물차 장면이었다. 등장 소품 중에 기차화물칸이 등장하는데 화물칸 옆에 커다랗게 우스트리차(굴)라고 씌어져 있었다. 이는 크리모프가 체호프 일대기를 조사한 자료에 근거하여 나온 장면이다. 자료에 의하면 “체호프의 시신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운구 될 때 기차 화물칸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신선한 굴 운송 열차)”35)

    크리모프는 <타라라붐비야>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희곡 텍스트 속에 활자화된 상태로 놓여있는 체호프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배우의 몸과 언어를 통해 연극무대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체호프를 그리고자 했다. 크리모프의 <타라라붐비야>라는 기념비적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을 살아 숨 쉬게 했던 수많은 라네프스카야를 만나보게 된 것이다.

    2)공연에 대한 작품 분석은 연구자의 실제 공연관람과 보유하고 있는 동영상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3)Смелянский А, Предлагаеые Обстоятельства Артист, Режиссер, Театр 1999, стр. 273.  4)마리아 셰프초바 지음, 심정순·김동욱 공역,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리허설에서 공연까지』, 동인, 218쪽.  5)위의 책, 같은 쪽.  6)위의 책, 219~220쪽.  7)Смелянский А, Предлагаеые Обстоятельства Артист, Режиссер, Театр 1999, стр. 273.  8)Соколянский А, Сушеная вишня, 24 января, Ведомости, 2001.  9)Филиппов А, Хорошо подстриженный сад, 12 февраля, Известия, 2001.  10)Сизенко Е, Долгое прощание, 25-31 января, Культура, 2001.  11)Карась А, Шесть часов обморока, 11 июля, Российская газета, 2003.  12)Давыдова М, Вишневый детский соловьиный сад, 11 июля, Известия, 2003.  13)СоколянскийА, Играй отчетливей, 11 июля, Время новостей, 2003.  14)Вишневская И, Безнадежно больные доктора Чехова, 23 июля, 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 2003.  15)Карась А, Шесть часов обморока, 11 июля, Российская газета, 2003.  16)Райкина М, “Вишневый сад” - это зоосад, 11 июля, МК, 2003.  17)Зайонц М, Охота на зайцев,15 июля, Итоги,2003.  18)Ямпольская Е, Отель “Агония” (четыре звезды ), 11 июля, Русский курьер, 2003.  19)СоколянскийА, Играй отчетливе, 11 июля, Время новостей, 2003.  20)Райкина М, Галина Волчек как правило вне правил Н.Л.О, 2004, стр. 482.  21)Каминская Н, Неуважение к шкафу, 22 января, Культура, 2004.  22)Заславский Г, Без леденца, 28 сентября,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2009.  23)위의 글.  24)Годер Д, Только вопросы, 25 сентября, Время новостей, 2009.  25)Агишева Н, Садовое товарищество, 28 сентября, Огонек, 2009.  26)Заславский Г, Без леденца, 28 сентября,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2009.  27)ДолжанскийР, Марк Розовский насаждает Чехова, 8 сентября, Коммерсант, 2001.  28)Карась А, Тени забытых предков, 7 июня, Российская газета, 2004.  29)Юсипова Л, Пробегающая красота, 4 июня, Ведомости, 2004.  30)Соколянский А, В отсутствие ведущего, 7 июня, Время новостей, 2004.  31)Давыдова М, 35 тысяч тригориных, 1 февраля, Известия, 2010.  32)Каминская Н, Сто одним бароном больше? 11 февраля, Культура, 2010.  33)ЗаславскийГ, Всё есть, 4 февраля, НГ, 2010  34)Галахова О, Дмитрий Крымов. Дефиле для сна о Чехове 29 января, РИА Новости, 2010.  35)Галахова О, Дмитрий Крымов. Дефиле для сна о Чехове, 29 января, РИА Новости, 2010.

    4. 결론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 사회에 커다란 변혁의 파도를 일으켰다. 경제와 사회, 종교와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작품들과 예술가들이 해금되었고, 극장에서도 독자적인 작품 활동의 권한을 얻게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그동안 굳게 막혀있던 문화예술의 둑이 터지고 새로운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와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벚나무 동산>은 1900년대 러시아혁명의 진통 속에서 태어난 작품으로서 신시대와 구시대의 대립,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사람들과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대립이 작품 깊숙이 녹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작품 속에서 비극적인 색채로 그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코미디’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체호프가 언급한 코미디는 이른바 ‘상황의 코미디’로, <벚나무 동산>에서 나타나는 코믹성은 ‘덜 자란 어른’에게 닥쳐온 ‘부조리한 상황’이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간직한 어른들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쳐오고, 그들은 이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라네프스카야의 가족들은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그저 경매일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로파힌의 눈에는 이러한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세대 간의 대립적인 상황과 뿌리 깊은 갈등은 어느 시대에서나 흔치않게 발생하는 일이지만 이 상황이 역사적 격변기와 맞물리면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은 여러 가지 사회적 요소들과 혼효되어 증폭된다. 이러한 혼란과 갈등의 맥락은 <벚나무 동산>이 쓰인 무렵은 물론이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호프의 텍스트를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로서 연출가들은 자신의 주관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이를 무대 위에 펼쳐 놓았다. 각기 다른 자아와 세계관, 예술적 기조를 지닌 연출가들은 공통된 텍스트를 다룬다 할지라도 저마다 그 생김이 다른 작품들을 내놓는 모습을 보였다. 본고의 연구 대상인 9명의 관록 있는 연출가들은 <벚나무 동산>과 변화무쌍한 당대의 현실을 재해석하기 위해 비극적 세계관을 무대화하기도 했고, <벚나무 동산>을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마치 연극적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새로운 형식적 실험으로 당대의 현실과 작품을 새롭게 재구성하기도 했다.

    도진은 비극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희망 없는 시대’를 무대 위에 올렸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발버둥치는 모습을 죽음과 파멸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이페츠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세대의 변화에 따른 몰락은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피르스가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천천히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으로 압축된다. 그는 영원한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의 불가능성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설정하고, 이를 침묵과 느림의 미학으로 그려냈다. 네크로슈스는 <벚나무 동산>을 위대한 비극으로 만들었다. 그 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물들을 비극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세기가 마감되는 세기말적 상황에서 그는 작품 전체를 죽음과 공포의 테마로 감쌌고, 이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로파힌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벚나무 동산>의 비극은 “무엇보다도 로파힌의 비극”36)이었으며, 이는 세기말을 살아가는 현대의 모든 젊은이의 비극으로 확장되었다.

    이전의 작품들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행에 빠졌다면, 볼첵의 <벚나무 동산> 속 인물들은 새로운 시대와 변화에 부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볼첵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스스로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세기말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파멸이 아닌 새 시대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바라보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인간성의 회복과 좌절의 극복을 시도한 것이다. 보로딘은 <벚나무 동산>을 해석하는 키워드를 다름 아닌 ‘사랑’으로 보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충만해 있다. 이들은 현실부적응자나 실패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삶과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자하로프는 원작에 많은 각색을 가하면서 <벚나무 동산>을 라네프스카야와 로파힌의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였다. 각 신구세대를 대표하는 두 등장인물의 사랑을 통해 자하로프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세대의 교체가 대립과 반목, 적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로좁스키의 <벚나무 동산>은 새롭다 못해 생경하지만 바로 그 점이 역설적으로 작품을 더 친숙하게 만든다. 로좁스키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귀족에서 일반 평민으로 만들었다. 현대의 관객들에게 100년 전 귀족 사회에 대한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좁스키는 <벚나무 동산> 속 인물들을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고, 그들이 새로운 시대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돌프 샤피로는 레나타 리트비노바라는 여배우를 라네프스카야 역에 캐스팅했는데, 그의 선택은 ‘상황의 코미디’라는 체호프의 콘셉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른 여배우들의 질투라는 현실적인 어려움부터 신체적인 조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을 고려한 연출가의 배우선택은 체호프의 코미디를 확연하게 살려냈다. 크리모프 연출의 <타라라붐비야>는 80여명의 배우들이 참여하는 거대한 집회와 군중들의 모임을 연상케 하는 카니발적인 거리 행진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체호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으로 지난 100년 동안 현대 연출가들이 체호프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대 위에서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재형상화했으며, 체호프를 통해 어떤 연극미학적 실험을 수행해 왔는지를 퍼포먼스 형태로 보여주는 공연이다.

    이처럼 8, 90년대의 러시아 무대에서 연출가들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변화와 더불어 세기말적 상황에서 어떻게 한 세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같은 고민이 숨겨져 있는 <벚나무 동산>의 재창조를 통해서 지금 여기, 동시대의 모습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체호프의 텍스트 안에 숨겨진 인간의 운명과 시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현실을 비추고자 한 것이다.

    연출가들은 이 과정에서 고전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기 보다는 자신의 해석과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연극적 양식과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로 인해 각각의 작품들은 너무나도 다른 해석과 개성적인 표현방법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현대연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희곡과 무대와 연출가의 유기적인 상호관계가 더욱 뚜렷하게 그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처럼 무대 위에서 새로운 신념과 연극적 형식, 그리고 적극적인 표현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식 또는 사조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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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테이블
  • [ <표-1> ]  1991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공연된 체호프 작품
    1991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공연된 체호프 작품
  • [ <표-2> ]  연구대상 작품 개요
    연구대상 작품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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