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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드라마투르그의 역사와 정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찰 A Research about the history of dramaturgs and its political and social functions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드라마투르그의 역사와 정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찰

The term of dramaturg was introduced 20 years ago in Korea. But we are not accustumed to the concept of the dramaturg. The role of the dramaturg has its roots in the practice of mainland German theatre. Since the major intellects appointed Gotthold Lessing as the world’s first officially dramaturg, a dramaturgs has been considered as a person to direct plays, translate foreign dramas, commission works, prepare essays for inclusion in theatre programs, and usher. Then dramaturg across Europe continue to debate their function and possible functions within the theatre, while being employed across a range of performance forms and theatre development activities.

The meaning of the terms dramaturg is relative and determined by the particular cultures and institutions in which individuals operate, and the function of dramaturg depends on the ecomomic and political conditions of production. But there is only one fixed point; dramaturgs have played important role in the reform of theatre.

In this paper, I gave weight to view the history of dramaturg mainly in Germany. I treated the case of Lessing, Goethe, Brecht in Germany and Tynan in England. Especially I tried focus on the social and political functions of the dramaturg. There are two issues relevant to political tendency of the dramaturg. For one thing, dramaturg is related to a political ideology, and for another, dramaturg acts as a mediator. Since the 20th century, dramaturgs were working actively in the political theatre. Especially Brecht’s dramaturgy stresses the relationship between a work and its social context, and he wanted to contribute to a social reform by making revolutionary theatre. Brecht’s influence is remarkable on European political theatre of the 1960s and 1970s. A dramaturg must perform a delicate balancing act between different sides in the conflict. (ex. art and policy, theory and practice) In the process, dramaturg often experience reconciliation and conflict.

The role of dramaturg all depends on the circumstances, but it is obvious that work for development of the theater is the essential role of dramaturg. Therefore, the contemporary dramaturgs should have an eye for beauty to find out characters of our theatre, and the dramaturg should reflect the spirit of the age at working in the contemporary theatre.

KEYWORD
드라마투르그 , 레싱 , 괴테 , 브레히트 , 타이넌 , ?놋쇠 구입? , 『함부르크 연극론』
  • 1. 들어가며

    드라마투르그(dramaturg)1)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2) 연출가를 도와 대본을 분석하거나 각색을 하고, 프로그램북에 ‘작품 소개의 글’을 쓰는 정도로 그 역할이 알려졌다. 주로 평론가나 문학전공자 등 이론가들이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는데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드라마투르그 활동 사례가 소개되었지만3) 그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고, 일반인은 물론 연극인들에게도 드라마투르그는 한 동안 낯선 존재였다.

    그럼에도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고, 최근 국내의 공공극장4)에 드라마투르그가 정식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대학에서도 드라마투르그 관련수업이 개설되었으며 극단의 상임 드라마투르그도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드라마투르그의 임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 서구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그 역할이 시대별, 나라별로 각각 달라서 개념을 정의하기 보다는 개념사를 정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중에 연극사를 살펴보면 기존의 연극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고 연극 발전에 공헌한 드라마투르그의 업적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연극의 변화와 변혁의 지점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약진이 눈에 띤다.

    그렇다면 드라마투르그라는 명칭과 역할은 언제 왜 생겨난 것일까? 이 논문은 최초의 공식 드라마투르그로 알려진 독일의 레싱(Lessing, Gotthold Ephraim, 1729~1781)이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드라마투르그로 임명되었던 상황을 짚어 보는 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극작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레싱은 국민극장의 개관 이후 3년여 동안 극장의 내부비평가이자 극장 레퍼토리 선정 및 관객개발 그리고 관객교육의 업무를 수행하며 독일 국립극장의 기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레싱 이후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이 유럽 전역에 천천히 확산되는 듯했으나 한동안은 독일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1세기 이후에 그랜빌 바커(Granville Barker,1877~1946)를 거쳐 196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국립극장의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n, 1927~1980)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다.5) 미국은 1970년대에 이르러 드라마투르그가 도입된다.6)

    시대와 장소에 따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다른 것은 그 작업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항상 양자 사이에서 중간자 또는 매개자의 입장으로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정치, 사회적 배경이 만들어 놓은 연극 환경 속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입지는 달라져왔다. 그들은 국가의 정책이나 시대의 이데올로기와도 충돌해야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인식능력을 잃은 채 이끌려 다니기도 했고, 때론 작품이나 극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의 연극 현장에서 드라마투르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은 번역극이나 고전작품의 분석, 그리고 창작극의 개작이다. 그렇다보니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고자 할 때 당장 작품을 어떻게 분석하고 연출가와 배우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를 염려한다. 이러한 염려는 노력과 경험이 쌓여야만 해결할 수 있다. 방법을 습득한다고 해서 단기간에 성과를 얻기는 어렵다. 따라서 비법을 알아내려 애쓰기 보다는 그에 앞서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론과 현장, 현실과 이념, 정책과 예술 사이에서 그 시대의 관행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연극을 진화시켜 온 드라마투르그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론 그 방식이 혁명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논리적 분석과 예술적 창조성을 적절하게 발휘하는 드라마투르그의 모습을 연극사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드라마투르그의 상(像)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 논문은 매번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만남에 적응해야 하는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여건에서 드라마투르그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무엇인지, 숱한 변화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기 위한 작업이다. 먼저 드라마투르그의 기원부터 이데올로기 논쟁이 치열하던 1970년대까지의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활동 양상을 통해 정치사의 격변기 속에서 시대와 무관하지 않았던 드라마투르그들의 행적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현장과 이론사이의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중재자 또는 매개자로서의 드라마투르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의미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연극계에 드라마투르그가 올바르게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 위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1)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Dramatourgos = drama (deed or act) + ergos (work or composition) So, originally the ‘dramatourgos’ meant a composer of drama, i.e. the playwright. Bert Cardullo, “Enter Dramaturg’s”, in What is Dramaturgy?, Peter Lang, P. 3.  2)1991년 4월 13~18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장민호 연출로 공연된 유치진 추모공연 <소>의 드라마투르그를 맡은 김창화에 의해 ‘극작술 연구가’로 번역 소개되었다.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이다. “지난 1935년 초판과 1959년 판을 토대로 동랑의 연극언어를 최대한 살리면서 생활언어를 가미해 공연대본을 새로이 구성한 이번 작품은 독일 뮌헨대학에서 연극학박사학위를 받고 올봄 귀국한 김창화씨가 드라마투르기(극작술연구)를 맡아 한층 완성도 높은 무대를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연합뉴스』 1991. 4. 12.  3)허순자, 「미국연극에서의 Production Dramaturg:그 사적 배경과 개념, 기능에 대한 진단」, 『한국연극학』 4호, 1992. 허순자, 「독일 및 영᠊᠊ 미 연극에서의 드라마투르기 발전」, 『연극교육연구』 12호, 2006. 김미희, 「드라마터지 역할 연구 (유럽의 드라마터그를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논문집』, 제4집, 2001. 93~118쪽.  4)남산예술센터  5)독일의 드라마투르그가 영국에서는 문예감독, 또는 문학자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literary mannager”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6)미국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용되는데 독일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형태로 출발한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에 대해서는 ‘4. 연극개혁과 드라마투르그 활동’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2. 드라마투르그의 기원과 정치 사회적 배경

       2.1. 시민계급의 성장과 드라마투르그의 출현

    드라마투르그의 출발이 왜 독일의 함부르크였고, 왜 레싱이었는가? 드라마투르그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는 것은 드라마투르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드라마투르그의 탄생 배후에는 연극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일부 연극인들의 강렬한 개혁의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의 독일은 300여 개의 군소 영주국과 몇 개의 자유 제국도시로 나뉘어졌고, 영주들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절대군주국가 체제였다. 항구도시였던 함부르크는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상업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문화의 유입지이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가 이 도시를 통해 들어와 독일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때 함부르크의 산업 및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탄생한 시민계급이 독일 근대문화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영주들은 거대해 지는 행정조직을 감당하기 어려워 교수나 성직자 등 엘리트 층에게 의존했는데 이들이 시민계급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비록 상당한 지분은 귀족들의 것이었으나 시민계급은 궁정과 귀족으로부터 자신들의 세계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자체적인 윤리의식을 마련해가며 새로운 문화의 주체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교회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이성이 사고와 행동의 척도가 된 계몽주의시대다. 그럼에도 18세기 초반까지는 교회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교회는 연극을 비하했다. 후일 레싱과 목사 괴체의 ‘함부르크의 종교논쟁’7)은 ‘연극논쟁’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레싱은 1757년에 쓴 「최근 문학에 관한 편지-제7편-」에서 독일의 열악한 연극 환경과 독일인의 연극에 대한 몰이해를 한탄하고 있다.

    1790년대까지 독일은 민중을 위한 유랑극단과 귀족들의 전유물인 궁정극장이 양립하고 있었다. 일부 지성인들은 이들 극장을 통합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오로지 예술을 위한 시민 극장을 만들고자 했다.9) 당시의 계몽주의적 발상은 전국민에게 연극을 통해 교양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프랑스 연극과 비견할 수 있는 독일 희곡과 연극을 생산하는 것이었고, 궁정 문화와 시민문화의 소통, 그리고 수많은 절대군주국으로 분할된 독일의 민족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10) 국민극장의 개관으로 민중을 위한 극장연극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까지의 유랑극단 체제의 연극에 변화가 일게 된 것이다. 원래 유랑극단의 공연은 즉흥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연습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극장에서 문학작품을 공연하게 되면서부터는 희곡을 읽고 연습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규칙들이 생겼고, 이에 따라 배우들의 연기술을 새롭게 정리하고—연출가가 없던 시절이니- 배우를 감독하며 교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일부 극작가들이 떠맡았는데 이것이 곧 드라마투르그의 출발이 된 것이다. 극장연극의 활성화가 드라마투르기(극작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희곡텍스트를 그대로 공연하는 연극, 계몽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는 공연양식이 태어남으로써, 즉 희곡을 중시하는 연극의 문학화 현상으로 인해 좋은 극작가뿐 아니라 희곡을 선별하고 개작할 수 있는 희곡전문가(드라마투르그)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연극의 문학화와 지성화로 인해 생긴 드라마투르그는 역할을 위한 역할이 아닌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 자연스럽게 등장한 임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역할의 바탕에는 고트쉐트의 다음과 같은 의지가 배태되어 있다.

    드라마투르그는 드라마투르기(극작술)의 발전 과정에서 생긴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독일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와 이로 인한 극형식 변화의 과정에서 생긴 드라마투르그는 독일인들의 민족적 염원이 깃든 국민극장을 토대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임무가 확장되어 희곡의 선택과 개작뿐 아니라 극장의 정책, 더 나아가서는 정치 사회적 의제에 기여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2.2.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창설과 레싱의 드라마투르그 임용

    1767년 국민극장이 개관되면서 프리드리히 뢰뵌(Johann Friedrich Löwen, 1727~1771)이 극장장, 레싱이 드라마투르그로 초빙되었다.12) 당시 희곡과 문학 분야에서 거침없는 비평을 쏟아내던 레싱을 영입한 것은 교육적으로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켜 독일 연극의 혁신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라고 매리 럭허스트(Mary Luckhurst)는 레싱의 임용에 의미를 부여한다.13)당시 레싱은 고트쉐트(Johann Christoph Gottsched, 1700~1766)의 연극 개혁에14) 반기를 들고 시민연극론을 주창했다. 신분조항을 부정하며, 시민도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음을 주장한 레싱의 연극론은 절대주의에 대한 정치적 도전이기도 했다.

    레싱의 드라마투르그 임무는 극단의 상주 비평가로 알려져 있으나 레싱이 드라마투르그로 임명된 후 오히려 그의 비평 작업은 시들해 졌다. 극장의 재정난으로 레퍼토리가 계획대로 공연되지 못한데다 객관적이고 공개적인 비평을 꺼렸던 배우들과 마찰을 빚게 된 것이다. 그의 저서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Hamburgische Dramaturgie)』에 실린 비평들 속에는 레싱이 비평에 대한 항간의 통념에 울분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다. 항간의 통념이란 “우리의 연극은 권위적인 비평을 견뎌내기에는 아직 너무 연약하다. (중략) 무대는 규칙이 아니라 범례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헐뜯는 것이 스스로 찾아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15) 라는 것이었고, 레싱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레싱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근간은 그의 저서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17)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레싱이 1767년부터 1년 동안 발표한 연극평과 함께 그의 연극론이 실려 있다. 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재해석하고, 당시 독일의 프랑스 신고전주의 수용에 있어서 잘못된 해석을 비판했으며, 프랑스 희곡작품에 나타난 결점들을 지적했다.18) 자국의 독자적인 극문학의 특성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레싱의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 나는 책이다.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에 실린 비극론(74~79편)이 바로 레싱의 관객교육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비극론은 시민 교양교육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레싱의 연극개혁 의지와 국민극장의 정치적 의제가 만나 극장 및 연극개혁에 불을 지폈다. 교회가 담당하던 민중의 교육을 극장이 담당하게 되었다.19)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은 순수한 도덕교육이었다. 레싱은 근본적으로 연극을 도덕을 고양시키기 위한 매체로 보았다.20) 따라서 연극의 목표는 인간의 도덕적 교화인데, 그가 말하는 교화는 교훈을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레싱은 연극을 통해 관객의 감정 이입 능력을 높여, 감성을 통한 지각 능력을 촉구하고자 했다.

    계몽주의자로서의 레싱은 인간의 성숙도나 완성도의 기준을 사회적 행동에 두었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이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동정심(연민)’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훈련으로 가장 적합한 장르를 그는 비극이라고 믿었다. 비극을 통해 연마한 동정심을 관객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 레싱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극의 주인공이 시민계급인 관객과 친근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순수한 도덕성과 따뜻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고 더불어 유약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레싱의 비극은 관객의 환상을 최고도로 끌어올려 무대 위의 세계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관객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있는 것이다.”21)레싱의 연극미학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미학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절대주의 하에서 레싱의 개혁은 한계가 있었고, 국민극장은 재정난으로 2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22) 그럼에도 레싱의 작업은 파급효과가 컸다. 뒤이어 독일 내에 상설극장이 생기기 시작했다.23) 짧은 기간이나마 그의 업적은 연극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고, 주변국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활발히 확산되지는 못했다. 레싱 이후에 유럽에서 최초로 임용된 드라마투르그는 비엔나에서 1814년에서 1832년 사이에 활동한 요셉 쉬레이포겔 (Joseph Schreyvogel)이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투르그의 확산이 늦어진 이유는 당시 유럽의 풍토가 연극의 지성화에 대해 문화적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이보다 각국의 열악한 환경이 더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에서는 연극이 국가의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었고 영국과 미국은 국립극장의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다. 제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투르그가 개인 극단이 아닌 국립극장에 고용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임용은 국가의 예술 정책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독일의 국공립 시립극장의 드라마투르그는 임용과 해임뿐 아니라 작업의 방향도 극장 정책과 나란히 가야한다. 국가로부터 안정된 임금을 받는 대가로 정부 또는 지역도시의 정치적 의제에 협조하고 있다.24)

    7)이 논쟁은 레싱과 목사 괴체의 종교논쟁으로, 레싱이 종교를 초월하여 ‘관용’에 대해 설파한 이신론자의 글을 출판, 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의 교리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며 논쟁을 유발했던 레싱은 그 후 출판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논쟁 중에 괴체가 연극에 대해 비하하고 배우의 신분을 손상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서 논쟁이 더 뜨겁게 달궈졌다.  8)Lessing, 「Briefe, die neueste Literatur betreffend」, in Lessins Werke in 5 Bänden. Berlin u. Weimar, 1978. 3 Bd.,17.Breife.  9)독일 연극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고트쉐트(Johann Christoph Gottsched, 1700~1766)의 제자 슐레겔에 의해 국민극장 창설이 처음으로 제기된 후, 1768년 국민극장 창설 요구가 구체화되었다.  10)Fischer-Lichte, Erica: Kurze Geschichte des Deutschen Theaters, Tübingen; Basel ;Franke, 1993, p. 109.  11)고트쉐트, 송윤엽 외 역, 「‘죽어가는 카토’ 서문」, 『독일 연극이론』, 연극과 인간, 2000, 117쪽.  12)극장에 상주하는 비평가로서 뿐 아니라 레퍼토리 선정, 공연기획 등 극장의 제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레싱 이전이나 이후 사설극단에도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있었다. 극단의 배우들을 위하여 작품을 쓰고, 외국의 대본을 찾아 번역하고, 극단의 한정된 배우 숫자에 비해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고전작품들의 축약본을 만들었다. 이 역할은 오늘날의 드라마투르그와 유사하지만 극단의 전속극작가라고 볼 수 있다. Martin Esslin, “The Role of the Dramaturg in European Theater”, in What is Dramaturgy?, Peter Lang, 1995. p. 43.  13)Mary Luckhurst: “Gotthold Lessing and the Hamburg Dramaturgy”, in Dramaturgy: A Revolutions i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 25.  14)고트쉐트가 지향한 드라마는 이성에 입각하여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기능을 중시했다. 정서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드라마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봉건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극을 귀족화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15)송윤엽 외 역, 「함부르크 연극론 제96편」, 앞의 책, 217쪽.  16)위의 책, 217쪽.  17)레싱의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의 비극론은 다음 저서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고트홀트 레싱, 윤도중 역, 『함부르크 연극론』, 지만지, 2009. 윤도중, 「레싱: 문학을 통한 계몽」, 『괴테연구』 15집, 2003, 155~157쪽.  18)레싱의 『함부르크 드라마투르기』는 오늘날까지 연극과 희곡비평 분야의 기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실상 연극이론서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희곡론의 범주에서 볼 때 “규범적인 시학이 아니고 연극실무에 수반된 비판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다른 시론들과 구분된다.” (이원양 저, 『독일연극사』, 연극과 인간, 2002, 81쪽.)그러나 연극 비평서로 보면 공연의 실제 과정과 괴리된 공연미학적 이론과 텍스트 비평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연극론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제목과는 달리 이론보다는 당시 공연된 작품에 대한 비평들이 대부분이고 지금 우리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작가와 작품들이어서 독자들에게 실망을 주기도 한다.” (송윤엽 외 역, 「5.해설, 렛싱의 『함부르크 연극론』」, 앞의 책, 240쪽.)  19)당시 독일국민의 높은 문맹률을 감안하면 국민의 교양교육은 독서에 앞서 연극이 용이했을 수 있다.  20)레싱은 연극 뿐 아니라 문학 전분야의 교화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는 도덕이나 윤리적 교훈을 주며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윤도중, 앞의 논문, 156쪽.  21)송윤엽 외 역, 앞의 책, 246쪽.  22)“함부르크 극장은 민족 문화적 상징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로 세워졌으나 실상 몇몇 재력가의 자본과 관심으로 이루어진 사적 계획의 한계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위의 책, 240쪽.  23)1776년에는 빈, 1779년 만하임, 1786년에는 베를린과 뮌헨, 그리고 괴테의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24)뮌헨 캄머슈필레의 드라마투르그로 재직했던 뵈른 비커(Björn Bicker)는 시립극장에서의 경험을 말하면서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할당의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Björn Bicker, “Die Kunst der Teilhabe”, in Die Kunst der dramaturgie: Leipzig, Henschel verlag. P. 193.

    3. 연극개혁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

       3.1. 바이마르 궁정극장과 괴테의 극장개혁25)

    레싱에 이어 독일에서 공식적인 드라마투르그로 임용된 인물로서 프리드리히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와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이 짧고 강렬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하며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 해 주고 독일 국민극장의 세계화에 이바지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업무는 오늘날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범례가 될 수 있다.

    괴테가 연극 실무를 시작한 것은 1776년 바이마르 궁정 동호인극단의 단원이 되어 배우로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는 1782년까지 극단장직을 맡았다. 그 후 궁정극장이 창립되고 26년 동안 그는 궁정극장의 극장장으로 활동했는데 극장의 제정, 조직, 규율 등 제도정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극장의 레퍼토리 개발, 관객 개발 등을 도맡았다. 당시 통속극이 유행했고, 궁정극장에도 음악이나 발레를 곁들인 공연이 주가 되었는데, 괴테의 재임기간에는 언어극의 비중이 3분의 2이상을 차지했다. 번역극, 번안극, 그리고 창작극으로는 쉴러와 괴테의 희곡들이 중심이 되었다. 괴테가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축하기로 한 것은 관객의 교양을 높이기 위함이다.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관람객은 영주의 가족, 귀족, 군인, 시민계급의 지식인층, 교사, 대학생이 주가 되었고 하층민도 관람할 수 있었다. 하루 저녁 관람객이 500명 이상이었는데 절반이 장기 예약 고객이었다. 괴테는 고전을 번역하여 이들을 위한 레퍼토리를 확대했고, 독일 연극을 민족극 차원이 아닌 세계연극의 경지에 올리고 싶어 했다. 괴테의 세계연극 레퍼토리는 오늘날 까지도 독일극장의 모범이 된다.

    당시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독일에도 미치는 듯했으나 괴테와 쉴러는 이에 대해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원래 사회 개혁에 관심이 있었으나 프랑스의 공포 정치에 경악하고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려던 움직임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은 정치적 관심을 배제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전작품으로 관심을 옮겨갔고 번역극뿐만 아니라 창작극에서도 시사적인 현실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극장의 관객교육의 방향을 도덕교육에서 벗어나 미적 교양을 함양시키는 데 주력했다.

    괴테의 연극 업적 중 괄목할만한 것은 쉴러와의 협업으로 만들어낸 ‘바이마르 연극양식’이다. 이는 운문으로 된 대사를 리듬에 맞춰 낭송하고 양식화된 몸짓이 동반되는 새로운 연극미학이다. 배역유형을 폐지하고 연출 및 앙상블 중심의 연극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철저한 배우교육이 뒤따랐다. 당시에는 스타 중심의 연극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스타마케팅도 성행했다. 괴테는 이를 지양하고 모든 출연자가 작품의 전체를 알도록 대본 독회를 강화하여 작품의 질을 높이고 배우들의 교양도 높이려 했다. 괴테는 오늘날의 연출가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를 독일 연극사에서 최초의 연출가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극양식의 개발, 관객교육, 세계문학 레퍼토리 구축 등 그의 역할이 바로 오늘날 독일 드라마투르그 업무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26) 또한 귀족 중심의 궁정극장에 신분과 상관없이 관객이 드나들게 되었고, 극장에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직접적인 사회 참여는 아니었으나 다양한 레퍼토리와 함께 다양한 관객층의 개발로 국민의 미적 수준을 높이는 문화교육을 실천한 것이다. 괴테와 쉴러가 활약한 바이마르 궁정극장은 얼마 후 국민극장이 된다. 이들의 작업은 독일 근대연극, 좀 더 넓게는 유럽의 근대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괴테는 작가로서 유명할 뿐 그의 연극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작가에게 창작이 아닌 활동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곤 한다. 괴테나 레싱을 일반인들이 연극 전문가로 알고 있지는 않다.

       3.2. 연극론과 제도개혁 : 브레히트, 타이넌

    그밖에 독일의 대표적인 드라마투르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김없이 연극 개혁론을 펼쳤다. 드레스덴 극장의 드라마투르그였던 루드비히 티크는 이른바 낭만주의 연기술27)이라는 이름으로 배우의 연기에 혁신적인 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당시 티크는 희곡에만 관여를 할 수 있었지 배우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티크는 이 일에 한계를 느끼고 드레스덴 극장을 떠나는데, 그 후 베를린 왕립극장 연출가로 부임하여 무대장치를 개혁하는 업적을 이룬다. 베를린 자유극장을 창립한 오토 브람(Otto Brahm, 1856~1912)은 당시 까다로운 검열을 뚫고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 의 <직조공들>이라는 작품에 집단 민중 장면을 넣어 독일 연극사상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집단으로 출연하는 연극을 공연하여 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당시 관객의 수준은 이 작품을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동정하는 차원에 그치는 정도이긴 했으나 그의 시도는 대단히 도발적인 것 이었다. 베를린의 도이췌스 테아터와 레씽 테아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오토브람은 자연주의 연극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몇몇 극작가, 비평가, 배우들과 뜻을 모아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를 결성해 하우프트만작품 외에도 당시 검열의 대상이었던 입센과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의 작품들을 무대화함으로써 독일무대에서 자연주의 연극의 뿌리를 내렸다. 독일의 연극개혁 운동가이며 『연극의 혁명(1901)』이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던 게오르그 푹스(Georg Fuchs, 1868~1949)도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며 자신의 개혁 의지를 펼쳤는데, 그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는 관객도 공연에 참여하는 ‘피동적인 예술가’라고 주장했다.28)

    20세기의 문턱을 넘으면서, 근대에서 현대로 접어드는 전환기는 아방가르드 예술운동과 마르크스주의가 나란히 또 겹치면서 다양한 연극실험들이 일어난다. 사회주의 연극을 표방하던 연출가들이 대다수 무대실험에 집착했는데, 당시 독일에서는 혁명적인 희곡과 연극이 일정한 시기에 거의 공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에르빈 피스카토어(Erwin Piscator, 1893~1966)는 드라마투르그 군단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정치선동극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그는 무대 위에 영상 및 플랙카드 등 기록자료들을 제시하여 과도한 무대장치를 시도했고 피스카토어의 드라마투르그들은 그의 선동극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드라마투르그였던 브레히트는 기존의 작품들을 정치 선동극에 적절하도록 개작하는 대열에 합류했었는데, 피스카토어 극장의 과중한 무대장치에 대해 연출의 의도가 형식에 압도된다며 피스카토어의 과도한 실험을 비난했다.29) 서로 다른 연극관으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했지만 서사극이론을 비롯하여 브레히트가 피스카토어에게 받은 영향은 사뭇 크다. 여러 명의 드라마투르그가 함께 작업을 하던 방식은 브레히트의 베를리너 앙상블30)로 이어진다. 브레히트는 드라마투르그와 공동 창작을 본격적으로 시도 했는데 극작가와 드라마투르그 사이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31) 이는 브레히트가 극작가와 드라마투르그를 구분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극 구상의 전과정을 드라마투르그와 함께 했다는 의미다.32) 그는 드라마투르그에게 대본작업 외에도 모든 스텝의 업무-음향, 조명, 분장에이르기까지-를 익히도록 하여 무대 상연과 관련된 전 분야에 관여할 수 있도록 했다.33) 그렇다고 해서 브레히트가 드라마투르그의 이론적인 부분을 축소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 ‘드라마투르그 교습소’까지 만들어서 전방위적 드라마투르그로 훈련시킨 것은 드라마투르그가 연출가에게 최고의 협업 이론가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4)

    브레히트의 「놋쇠구입, Der Messingkauf」35)이라는 글이 드라마투르그 연구의 필독으로 추천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이 드라마투르그의 작업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놋쇠구입」은 브레히트가 자신의 서사극이론에 대한 쟁점들을 대화형식으로 풀어놓은 글인데, 철학자와 배우가 등장하여 각각 학문과 예술의 대변자로서 논쟁을 펼치고 드라마투르그가 드라마와 연극의 전문가 입장에서 이들을 중재한다. 연극이나 드라마의 사건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드라마투르그는 이미 철학자의 입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연극에 대해서도 대항자의 입장은 아니기에 그의 중재는 객관적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36)이 토론은 “현실과 학문에 대한 철학자의 요구와 예술에 대한 배우의 요구를 접속시켜 그 상치되는 점이 합의를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을 시사”37)함으로써 브레히트의 연극이 내세우는 ‘변증법적’ 방식을 취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드라마투르그는 연극과 드라마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연극사를 정리하고 연극들을 비교하면서 기존 연극제도의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과 도발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연극의 역사적 조망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연극이 어떤 연극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드라마투르그는 현실인식의 필요성을 유도하고, 철학자는 브레히트의 새로운 연극관의 합당함을 인정하게 된다.38)

    과거의 연극이 묘사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환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을 수 있음으로 브레히트의 새로운 연극(서사극)의 목적은 바로 그 베일을 벗겨내어 숨겨진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학문과 예술이라는 서로 상치된다고 여겨지던 분야를 합치시키고, 연극에서 현실을 찾는 것이 예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현실을 예술에 담으려면 그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예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토론을 통해 인식하도록 한다.40)

    브레히트의 ‘새로운 연극’과 함께 출현한 것이 새로운 “관극기술”이다. 이는 역사적, 사상적, 예술적인 측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놋쇠구입」의 후기를 보면 “관극 기술”과 관련된 부분이 집중적으로 언급되어있다. 관객이 연극을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관극 자세를 요구한다. 브레히트 연극의 효과는 무대에서가 아니라 객석에서 일어난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인식, 당시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였겠지만 좀 더 포괄적인 견지에서 보면 브레히트의 관객은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의 변화는 바로 세상의 변화다. 따라서 브레히트적인 드라마투르그는 연극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열에 합류하는 연극인이기도 하다. 폴커 카나리 Volker Canaris는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브레히트 드라마투르그의 바로 위와 같은 특성이 오늘날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자리매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싱과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그 모델을 수용하고자 했던 영국의 타이넌42)의 사례도 혁신적인 개혁시도로 볼 수 있다. 비록 당시에는 실패였으나 그의 작업노트43)는 후대 드라마투르그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타이넌이 구상했던 드라마투르기는 레싱과 그랜빌 바커(Granville Barker,1877~1946)44), 브레히트를 기반으로 한다. 1950년과 1960년 타이넌은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 Ensemble)을 방문했는데, 타이넌이 드라마투르그 업무의 현장 지식을 습득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유럽 대륙을 방문하고 나서, 영국과는 달리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이 일반화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은 1949년이 되어서야 국립극장 건립을 위한 안건이 의회에 제출되었고, 1962년 국립극장 위원회를 구성하여 1963년에 로렌스 올리비에가 최초로 국립극장 감독, 그리고 타이넌은 국립극장 최초의 문예감독(Literary Manager)으로서 9년간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타이넌은 국립극장 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럭허스트는 “그가 대부분의 업무를 작은 사무실에서 홀로 이뤘기 때문에 그의 업무가 눈에 드러나지 않았고, 드라마투르그 작업이 영국 연극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45)인 것으로 진단한다. 그런데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권위적인 위원회의 지나친 관여와 그로인한 충돌이었다.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타이넌은 정부가 지원만 제대로 해준다면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상업주의로부터 탈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타이넌은 국립 극장이 세워지게 되면 많은 실험적인 작품과 신인 작가의 작품 및, 작품 전체의 앙상블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국립극장과의 충돌 그리고 대중의 몰이해로 타이넌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타이넌이 수행한 관객교육의 핵심은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타이넌은 매주 올리비에와 두 명의 조연출과 함께 공식 좌담을 갖기도 했다. 국립 극장의 초기 3년 간 무대에 오른 38개의 작품 중에서 세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타이넌의 선택이었다. 타이넌은 국내외의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하고자 했던 그랜빌 바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으며, 크게 네 가지 범주에 따라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고전 작품의 부흥, 재공연 될 가치가 있는 최근 작품, 신 작품, 해외 작품이 바로 그의 기준이었다. 그의 바람 중에는 1955년 이후 영국에서는 단 한 번도 공연된 적 없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를 성공시킨다.

    타이넌이 관객 개발을 위해 시도 했던 일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대중에게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고자 했던 점이다. 친절한 설명과 사진이 곁들어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이로써 관객과 무대 사이에 존재했던 높은 벽이 어느 정도 제거되었고, 특히 외국 작품을 관객이 좀 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이 텍스트와 공연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초기에는 성공한 듯 했으나 앙상블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영국에서 그의 시도는 지속되기 어려웠다. 그밖에도 타이넌의 도전은 당시의 금기를 깨는 영역까지 침범했다. 청소년들의 성에 관한 노골적인 묘사가 드러난 작품을 공연하려고 했으나 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타이넌은 국립극장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진보적인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위원회는 당시 정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정부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은 연극이론으로 세상의 변혁을 추구한 것이었지만 타이넌은 직접 제도와 부딪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25)괴테의 연극 작업에 관한 내용은 다음 저서들을 참고하였다. 이원양, 앞의 책. Valterrian Hugo Tornius, Goethe als Dramaturg, Ein Beitrag zur Literatur-Theatergeschichte, Verlag von E. M. Geemann in Leipzig, 1902.  26)괴테는 그토록 애정을 가지고 헌신을 한 극장에서 멀어지고 만다.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연극에 ‘개’를 출연시키게 되었는데 괴테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임하게 된다. 당대의 보수적인 연극관은 이 같은 연극을 ‘비속한 자연주의 연극’으로 치부했다.  27)내면연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계산된 연기와는 반대로 감정연기다. 당시 페르디난트 플렉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티크가 감동하여 낭만주의 연기술을 주장했는데, 낭만주의 연극관을 바탕으로 고전주의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당시의 실험적 연기술이었다.  28)Manfred Brauneck: Theater im 20. Jahrhundert Programmschriften, Stilperioden, Reformmodelle, Reinbeck b. Hamburg: Rowohlt, 1986. P. 76.  29)Bertolt Brecht: Gesammelt Werke, Band15, Frankfurt a.M. 1967, P.291. 피스카토어의 연극이 관객의 ‘선동’을 위한 것이었다면 브레히트의 연극은‘설득’을 위한 것이었다.  30)파시즘체제에서 망명을 떠났다가 구동독에 자리 잡은 1949년에 브레히트가 그의 부인이자 배우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창단했다.  31)브레히트의 <남자는 남자다> 등의 작품들이 그가 드라마투르그 활동 중에 썼고, 그 외에도 다른 드라마투르그들과의 공동창작으로 탄생된 작품들이 많다. 브레히트는 1923년 뮌헨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드라마투르그 경험을 했다. 그 후 막스 라인하르트의 도이췌스 테아터를 거쳐 1927년에서 28년까지 피스카토르의 드라마투르그 군단에서 활동했다.  32)Joel Schechter, “In the Beginng There Was Lessing...Then Brecht, Müller, and Other Dramaturgs”, in Dramaturgy in American Theater, ed. Susan Jonas et al. Orlando:Harcourt, 1997, P. 21.  33)오늘날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형태다. 드라마투르그가 극장에 소속되어 부분적인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과의 연극작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연출가, 극작가 등과 상호 협조적으로 일을 하면서 리허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텍스트를 출판하고 여론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등 극단의 공연과 관련된 포괄적인 업무를 맡는다. 이는 브레히트 이전부터 갖추어진 형태이나 이 용어가 독일연극에서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70년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갈망이 강렬해지면서 드라마투르그의 활용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극단별로 작품별로 드라마투르그가 따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라 칭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벤트에 따르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드라마투르그를 무조건 활용하려는 경향이 생겼고, 드라마투르그를 극단의 최고이론가 자리에 앉혀놓곤 했는데 실질적으로 연극의 헤게모니를 위한 수반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란 이름으로 드라마투르그에게 극단의 상석을 차지하도록 하는 현상을 염려했다. Joel Schechter, op.cit., P. 22.  34)op.cit., P. 21  35)놋쇠 장수가 악단에 찾아와 트럼펫을 구입하는데 그가 사려는 것은 악기로서 기능을 가진 트럼펫이 아니라 놋쇠의 재료 가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극장에 와서 원하는 것은 연극의 예술로서의 가치보다는 연극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트럼펫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놋쇠는 현실이다.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종래의 연극에 대한 비판이다.  36)Klaus-Detlef Müller, “Der Philosoph auf dem Theater, Ideologiekritik und ‘Linksabweichung’ in Bertolt Brechts ,Messingkauf”, in Zu Bertolt Brechts Parabel und episches Theater, Herausgegeben von Theo Buck, Klett-Cotta, 1979, P. 93.  37)김기선, 『서사극이론』, 한마당, 1999, 445쪽.  38)Klaus-Detlef Müller, op.cit., P. 93.  39)김기선, 앞의 책, 293쪽.  40)위의 책, 445쪽.  41)Volker Canaris, “style and Director”, in The German theatre, ed. Ronald Hayman, 1975, P. 250.  42)일찍이 연기와 연출 경험을 통해 비평의 기반을 닦았던 타이넌은 공연에 대한 실질적인 비평을 갈망하여 20대 초반의 나이에 당대의 연극 비평에 일침을 가하고 비평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자 했다.  43)1998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업 노트가 영국 도서관에 공개됨으로써 타이넌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44)영국의 국립극장 설립을 주장했던 영국 드라마투르그의 개척자이다. 비평, 연기, 극작, 경영 등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45)Mary Luckhurst, op.cit., P. 153.

    4. 드라마투르그의 정치성

       4.1. 매개자로서의 드라마투르그

    타이넌의 개혁 시도는 큰 의미를 갖는다.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그의 능력과 의욕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드라마투르그의 성과는 독자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외적인 문제들이 걸림돌로 작용하면 그 결실을 맺기 어렵다. 극작가와 배우, 연출가와 극작가, 극장과 극작가 등 수많은 대치어들 사이에서 드라마투르그는 매개자가 된다. 공공극장의 드라마투르그는 극작가와 극장사이에서 뿐 아니라 당국과 언론, 배우와 중개인 그리고 근로자와도 협상을 해야 하고 많은 방문객 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공문서 관리도 해야 한다. 텍스트작업에서도 드라마투르그는 과거와 현재, 언어와 언어사이의 중재자가 되어왔다. 연극학자 막스 헤르만(Max Hermann)은 드라마투르그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로서 시대번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드라마투르그는 고전을 분석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며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삶으로 번역해야 함을 강조했다.46) 고전연극을 공연함에 있어 과거의 언어를 현재적 의미로 되살려야 하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의 막중한 임무가 됨으로써 드라마투르그는 과거와 현재의 매개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매개자로서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상당히 어렵다.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의 글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위 글이 시사하는 바는 드라마투르그가 매개자 역할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이 상당히 곤혹스러운 것임을 내비치고 있다. 앞의 타이넌의 사례 역시 드라마투르그의 난처한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타이넌은 독일의 드라마투르그 모델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수용하려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그의 실패 요인에 대해 평가하기를, 처음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한 번에 변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매개자로서의 그의 처신이 서툴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럭허스트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타이넌은 드라마투르그의 개념이 생소한 당시의 영국의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앙상블 작업 보다는 개인 활동에 익숙했던 영국에서 드라마투르그가 연출 영역에 파고 들려고 했던 것은 무리였다. 영국과 독일 간 문화적 격차를 인정했어야 했다. 타이넌은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는데 독일과 영국의 상황이 다름은 간과했다. 결국 타이넌의 실패는 타이넌 개인의 불찰도 있었으나 당시의 시대적 논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은 1980년부터는 시장 경제의 논리에 따라 소비자인 관객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드라마투르그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영역은 바로 관객을 대하는 부분이다. 연극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브레히트의 경우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레싱과 괴테의 연극개혁이 관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 타이넌이 결정적으로 힘을 얻고 잃었던 부분도 바로 관객과의 소통이었다는 점은 깊이 새길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투르그가 관객몰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북에 작품을 소개하여 공연의 이해를 돕는 것이 간접적인 소통이라면, ‘관객과의 대화’를 마련하는 직접적인 소통의 시도를 자주 하는 것이 필요하다.

       4.2. 독일 드라마투르그와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시대성을 인식했던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기 외에도 드라마투르그와 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은 일련의 정치극 공연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독일의 제3제국과 구동독의 드라마투르그들에게 주어졌던 가혹한 임무는 드라마투르그가 공연외적인 부분에서도 정치적 상황과 긴밀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독일의 제3제국 시절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는 ‘제국 드라마투르그’를 임명하여 모든 연극의 정치적인 검열을 맡겼다. 파시즘 정권 이후, 구동독의 공산당 정부에서도 연극에 대한 정치적인 검열은 계속되었다. 브레히트 사후 최고의 연극개혁자로 알려진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1929~1995)는 1970년대 베를리너 앙상블에서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는데 그가 동독의 드라마투르그에 대해 회상하면서 “드라마투르그란 것은 나치 시절 괴벨스가 만들어낸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 동독의 드라마투르그는 한 마디로 연극 검열을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구동독에서는 늦어도 공연이 올라가기 6개월 전에 작품을 보고하고 승낙을 받아야 했다. 문화부 장관 앞에서 브리핑을 하는 것은 드라마투르그의 몫이었다. 드라마투르그는 검열을 위해 작품을 선택한 이유와 어떻게 공연할 것인지를 자세히 적은 작업계획서를 준비하고, 대본 외에도 인용자료와 사진 등의 파일을 미리 정리해 두어야 한다.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업무는 구동독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체계적이고 사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독의 이 같은 상황을 견디지 못한 드라마투르그나 연출가들이 인근 국가에 가서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동독 체제에 순응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하이너 뮐러는 “그들은 독일인이다”라는 말로 일축했는데, 독일식의 체계적인 업무에 적응된 그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근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의 경우도 드라마투르그가 공연에 임박해서야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될 것이다.49)

    구동독의 연극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매체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이너 뮐러나 폴커 브라운 등의 극작가들은 사회주의 사회에 머물면서 사회주의를 비판했는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공연을 통해 대변했다. 이들은 브레히트 시스템으로 교육받은 이들은 공연이 올라가는 순간에 작품의 최종적인 입장을 결정하기도 했다. 구서독의 경우도 당시 과거청산의 시기를 겪으면서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강렬한 가운데,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자본주의간의 이념대립이 팽팽했다. 구서독의 좌파작가들은 작품으로 작가의 이념을 대변하곤 했다. 극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직접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면서 작품이 무대화 되는 과정에서 재창작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상황이나 사회적 이슈 등을 고려해 이념적 손질을 하기도 했다. 1960, 70년대 독일 기록극의 이론을 정립한 구서독의 극작가 페터 바이스(Peter Weiss, 1916~1982)는 자신의 작품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여 공연에 따라 주요대사나 결말을 바꾸어 작품의 이데올로기를 최종적으로 선택하곤 했다. <마라/사드>의 경우 동독 공연에서는 마라의 입장에 서독의 공연은 사드의 입장에 방점을 두었다. 그밖에도 자신의 초기 실험극들에서도 대사를 바꾸거나 결말을 고쳐서 자본주의 비판과 파시즘 비판을 공연에 따라 조율하기도 했다.

    1970년대 유럽은 좌, 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벗어나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신좌파 운동이 활발했다. 독일의 연극계도 분단의 문제를 넘어 제3세계, 반미, 반핵 등 반전운동으로 68혁명의 정신을 이어갔다. 1977년 헤르만 바일(Hermann Beil)이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슈투트가르트 극장의 <파우스트> 전작 공연은 파우스트 박사를 현대의 과학자로 만들고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시대적인 고민을 드러냈다.50) <파우스트>에 대해 괴테는 일찍이 이념을 불어 넣은 작품이 결코 아니라고 그토록 주장을 했건만 이념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독일인들은 끊임없이 이 작품에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독일인의 관념적인 사고의 토양에는 항상 이념이 뿌리를 내려야 했다. 이념에 천착하는 독일인들의 경향이 드라마투르그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4.3.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드라마투르그

    이데올로기 논쟁이 시들해 진 80년 이후부터 독일의 드라마투르그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분명하다. 그러나 국, 공립극장에 고용되어, 질서정연한 행정시스템 하에서, 예술가이자 관료로서 여전히 예술과 정책 사이에 놓이게 된 그들의 입장이 마냥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90년대 초반 마틴 에슬린은 독일의 체계적인 드라마투르그 시스템이 무미건조한 관료조직을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우려한 바 있다. 행정적인 정신으로 작품을 처리할 가능성에 대한 염려다. 또한 그는 드라마투르그에게는 전문성이나 학자적 소양도 필요하지만 융통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51) 예술과 극장정책 사이에서 끊임없는 중재와 타협을 반복하는 가운데, 드라마투르그는 관계정립을 위한 정치성을 벗어버릴 수 없다.

    드라마투르그라는 임무가 독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실태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고, 독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정석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독일의 극장 체제를 이해한다면 독일의 사례가 연구 자료는 될 수 있으나 실천에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독일의 경우 인구가 5만 명 이상인 도시에는 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는 영구 극단들이 있다. 극장이 약 120개 정도 되는데 이들 국립, 주립 혹은 시립 극장들은 모두 레퍼토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드라마투르그의 기능은 원래 장기적인 예술정책을 가진 극장의 존재와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다. 한국 극장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부분이다. 독일의 이 같은 시스템은 바이마르극장 시절에 탄탄하게 구축되어졌다. 괴테가 당시에 이루어 놓은 세계연극의 레퍼토리는 아직도 독일극장들에서 모범적인 것으로 통한다. 필자가 앞서 독일 드라마투르그의 역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독일의 국, 공립극장의 레퍼토리가 정해지면 사전에 관객의 예약을 받는데, 6~8개의 공연을 한 번에 예약할 수 있다. 예약된 공연을 위해 드라마투르그들은 작품을 선택하고 배역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예약 관람의 적절한 연속성과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이 원활해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극장이 있는 도시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물론 특정 도시를 위한 연극을 만들 수는 없다, 도시 주민 외에 여행객도 관람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립 극장의 드라마투르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극장에 대해 “도시의 극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마치 문학텍스트를 읽듯 도시를 탐구하고 분석한다.52)극장을 도시의 명소로 만드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의 역량이 될 수 있다. 그 극장만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다. 그밖에 도시의 시민대표들과 교류를 통해 극장의 홍보활동을 하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다. 물론 각자 담당 분야가 다르기는 하지만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은 결국 공연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예술과 현실사이를 오가며 업무를 진행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로그램북을 편집하는 것도 드라마투르그의 몫인데, 독일의 프로그램북은 공연에 대한 참고자료와 설명이 자세하다. 우리나라의 팜플렛 수준이 아니라 소형책자 한권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실린 글은 후에 공연에 대한 연구 자료로 인용되기도 한다.53)

    이처럼 독일의 드라마투르그 업무가 체계적이고 전문성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극장에서 2~3년간의 실습과정을 거친 후 드라마투르그로 배출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독일의 대학과 아카데미에 드라마투르그 양성 과정이 생겼다. 이들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개의 언어를 습득하고, 고전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글쓰기에 능하고, 재능있는 작가를 발굴해낼 수 있는 비평 감각이 있는 남녀들을 길러 내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준비하는 드라마투르그라는 업무가 안정된 직업으로 이어 질 수 있느냐는 것은 의문이다. 최근 독일도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이 늘었다. 국, 공립 극장에서의 고용 비율이 낮아진 것과도 연관된다. 드라마투르그라는 직업의 성격은 연극이나 연극미학이 변화함에 따라 확장되거나 변화해 왔다. 따라서 새로운 공연양식들, 음악극이나 탄츠테아터, 포스트 드라마 장르, 실험극들에 따라 새로운 업무가 정해진다. 독일은 지금 이들을 다시 세분하고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 전시, 콘서트 등에서도 드라마투르그가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연극의 드라마투르그들과는 다른 직업이 되는 것이다.54)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독일 드라마투르그에게는 문화적인 헤게모니가 엄습하고 있다. 국 공립극장으로부터 벗어난, 그리고 업무의 성격이 다양해진 독일의 드라마투르그는 이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프리랜서가 되어 고용과 해임의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드라마투르그의 전형은 미국의 사례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드라마투르그는 1970년대 수용되었다가 충돌을 겪으며 밀려났으나 90년대 후반부터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타이넌의 국립극장 문예감독의 작업사례가 널리 알려지면서 미국의 극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이후 미국의 공공극장에서 정규직 드라마투르그를 임용하기 시작했다. 예술감독이 재원 조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뉴욕의 비영리단체들은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드라마투르그나 문예 감독을 고용하게 되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주업무는 예술감독의 보조로서 작품을 선택하는 일이다. 구체적인 지침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있다.

    한동안 미국의 대중연극에 의해 거부당했던 유럽의 드라마투르그 모델이 최근 10여 년 전부터 다시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의 대중연극이 실패했음을 전제하고 이에 대한 대안적 모색을 강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56) 이 역시도 연극개혁을 위한 시도이다. 앞서 언급했듯(각주 34) 미국과 영국에서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이 70년대 정치극에서 활발했는데, 그 이후 한동안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 오히려 방해가 되는 존재로 전락하기도 했던 것이다. 영국의 경우는 1970년대 사회주의 연극과 페미니즘연극에서 브레히트식의 정치적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수행했다.57) 이 역할은 작품에 특정 이념을 불어 넣도록 각색을 하는, 각색자로서의 드라마투르그 모델을 보여준다. 이 또한 이데올로기 시대가 부여한 드라마투르그의 임무이기도 했다.

    냉전의 종식 후 이념을 벗어 던지고, 다양해진 매체들과 어우러져, 다양한 관객취향을 따르며 변화하고 있는 공연들은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그의 역할 외에 또 다른 방식들을 요구한다. 따라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기능이 더욱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로인해 염려스러운 것은 이념의 부재가 가치관의 부재로 이어지며 중심 없이 부유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4.4. 한국 드라마투르그의 사회적 역할

    이제 막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으나 대부분 개인극단에서 활동을 하며, 대다수가 연출가 개인의 조언자로 머물고 있다. 드라마투르그와의 협업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음에도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영향력은 미흡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정치, 사회적 기능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서두에 언급했듯 드라마투르그의 작업 기술에 관한 고민을 하기에 앞서 이 역할이 갖는 의미에 대한 숙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에 선진 사례와 견주어 한국 드라마투르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드라마투르그는 독일의 극장 관행에 의해 탄생하고 발전했다. 따라서 드라마투르그 역할의 본질은 극장과의 연관 하에서 탐색하는 것이 옳다. 이 논문에서는 레싱, 괴테, 타이넌의 예로서 극장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도 한국의 연극 현장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의 극장 드라마투르그는 이제 출발이다. 우리의 실정은 극단에서 극장으로, 서구의 발전사를 역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한국 근대 연극사를 살펴보면 극장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유사한 작업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동양극장의 문예부를 꼽을 수 있다. 박진이 책임을 맡고 소설가 출신의 최독견을 비롯하여 이서구,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김영수 등 8명의 전속 작가들은 소설을 각색하고, 원작을 각색 또는 개작하며 한 달에 각각 1편의 대본을 만들어 동양극장의 레퍼토리를 감당해 냈다. 대중극 공연으로서의 그들의 작업이 사업적인 부분에 치중하여 당시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연극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연극을 대중의 필수품처럼 만들었고, 대중오락이 미흡했던 시절 동양극장은 대중의 안식처 역할”58)을 하는 등 동양극장이 연극사에 남긴 의의를 생각하면 이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크다.

    동양극장의 대중극 활성화는 관객몰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극장이 부도를 겪은 후에는 「연극연구소」를 만들어 강사를 초빙하고 이론지도 및 실기지도를 진행했다. 그밖에 연극의 장르 개발에도 기여했는데, 홍해성이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함께 이루어 낸 업적 중의 하나가 막간극을 없앤 일이다. 당시 청춘좌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취하고 싶어 했다. 홍해성의 노력은 청춘좌의 무대를 대중극임에도 일정 수준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밖에 연극의 다양한 장르들을 소개함으로써 이를 선전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끌어들였다. 흥행위주의 이슈를 열심히 발췌해낸 것이다. 이는 18세기 독일 국공립극장의 드라마투르그들이 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 당시 봉건주의, 절대왕정 하에서 독일의 극장은 대중들의 현실도피처이기도 했다. 한국 역시 식민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극장의 기능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양극장이 당대에는 흥행위주의 작품을 생산해 낸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나 대본을 바탕으로 설계된 그들의 대중미학은 관객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위안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이처럼 극장을 바탕으로 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활동은 관객층을 보다 넓게 확보할 수 있어서 양질의 연극을 저변확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극장 드라마투르그의 도입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드라마투르그의 업무가 현재의 예술감독의 업무와 혼용될 가능성이 있다. 필자가 미국의 극장을 예로 들어 드라마투르그를 예술감독의 보조로 채용한 사례를 소개했는데(4.3.), 드라마투르그와 예술감독의 업무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또한 독일의 극장에서 분업화 된 드라마투르그 모델들(공연담당, 편집 담당, 관객홍보담당 등)이 부분적으로 소개됨으로써 드라마투르그와 기획자의 역할이 혼돈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 자칫 혼란스러워 질 수 있는 극장 드라마투르그의 업무에 대한 구분과 역할분담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국립이나 시립 등 정부 시책의 영향이 미치는 극장에서는 독일이나 영국의 사례처럼 드라마투르그가 예술과 정책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을 수도 있다. 이것도 역시 피할 수 없이 도래하게 될 현실이다. 냉전시대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공연 외적인 요인과의 조절과 타협이 필요하다. 자칫 행정관으로 탈바꿈 할 가능성도 있다. 아직 드라마투르그의 양성기관이 없는 한국에서는 임용에 있어서도 그 기준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한 규정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드라마투르그가 당대의 정치적 이슈와 접촉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반드시 극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브레히트 이후 1970년 대의 정치 이데올로기 하에서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위상이 높았던 것은 정치극 또는 사회적 이슈가 강한 연극들에 드라마투르그의 참여가 왕성했기 때문이다. 이념극이 퇴조하면서 한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이들의 위상이 추락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드라마투르그가 극단 중심의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있을까?

    이 역시도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신파극을 수용, 정착시켰던 단체 중 하나인 ‘문수성’의 작업을 통해 극단 드라마투르그의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 예로서 조일재(1863~1944)59)와 윤백남(1888∼1954)을 들 수 있다. 조일재는 소설을 번안하여 연재하고 문수성은 번안을 통해 신파극계 전체에 주된 레퍼토리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문수성은 신파극의 번역과 번안으로 연극계와 문학계에 영향을 미친 ‘인텔리 출신의 본격적인 신파극단’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일재는 윤백남의 민중극단에서도 각본 담당을 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드라마투르그와 거의 흡사하다. 조일재는 후에 윤백남과 영화계에서도 활동하면서 번안과 각색을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창작이 아닌 중간자적 역할의 존재감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창작이 아닌 번안이라는 점과 일본 신파의 모방적인 수용인 일종의 ‘문화적 번안’이라는 점에서 제한 된 평가를 받았다.”60) 조일재의 작업은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당대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윤백남은 임성구 계열의 조선 신파극을 개량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신파극에 대해 대본이 미비하고, 연기와 의상 등 무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지적 했고, 제3자를 이용한 줄거리 전달 방식도 비판했다. 후에 윤백남은 이기세와 함께 예성좌를 조직했는데 이례적으로 극단업무의 분업을 시도했다. 당시에 단장은 이기세가 맡았고 윤백남은 연극 각본과 각본의 개량을 담당했다. 그는 사전대본 제작을 실행하여 극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서구 근대극 번안공연을 통해 수준 높은 대중극 공연도 선보였다. 일본 유학파들 보다 이른 시도였다.61)

    윤백남의 작업은 대본의 예술성을 높이고 극적 짜임새를 갖추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는 평판을 받는다. 그의 업적은 당시의 관객에게 근대문화의 체험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윤백남은 한국연극사 최초의 연극론인 「연극과 사회」를 저술했으며 「민족성과 연극에 취하야」라는 연극론에서는 민중극론을 세워 전통과 대중의 결합이라 할 만한 논리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연극이론을 바탕으로 희곡 <운명>을 창작하여 민중극운동의 구체적 방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번역, 번안, 각색 외에 예술본위의 연극을 펼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으로서 윤백남은 ‘드라마리그’의 조직을 제안했다.62) 예술성이 높은 대중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윤백남의 의도였다. ‘문수성’의 작업과 윤백남의 업적은 공공극장이 아닌 사설극단과 개인의 진취적인 연극개혁사례를 보여준다.

    한국 연극사에서 드라마투르그의 사회적 역할을 찾아본다면 관객개발과 연극 개혁이다. 이들이 서구의 드라마투르그 모델을 수용했다는 기록은 찾지 못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십분 발휘하여 당대 연극의 문제점을 개선하였다. 필자가 이 논문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드라마투르그의 가장 필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당대 연극의 빈틈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동시대 한국 드라마투르그가 극단과의 작업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투르그로서 극단과 협업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염려하는 것이 작업의 절차에 관한 것이다. 대개는 연출가의 주도에 따르는데, 대본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친 후 연습에 참석하고, 전체 스텝회의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식이다. 물론 일의 순서나 개입의 정도는 극단에 따라 다르다. 영국에서는 연출가 중심의 연극 체제에 드라마투르그가 참여하는 것이 침해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한 마찰이 드라마투르그의 정착을 방해했고, 결국은 텍스트에 한정하는 작업인 ‘리터러리 매니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도 드라마투르그는 ‘낯선 자’, ‘불청객’으로 취급되어 한 동안 배척당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드라마투르그와 연출가의 협업은 비교적 순조롭다. 그것은 연출가와 드라마투르그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아서이다. 연출가가 드라마투르그를 선택하고, 연출가의 주도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마투르그가 작품에 대해 주관이나 입장을 고수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연출가 중심의 연극 작업에서 드라마투르그가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취적인 개선을 시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드라마투르기를 공부한다는 것은 장차 자신의 자료에 대해 매번 의심받고 거절당하는, 그러한 극장 일에 발을 들이는 것”63)이라고 했다. 드라마투르그의 입지를 아주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46)Max Herrmann, “Über die aufgaben eines Theaterwissenschaftlichen institutes”, in Theaterwissenschaft in Deutschsprachige Raum, 1981, PP. 18~19.  47)이남복, 『연극 사회학』, 현대미학사, 1996, 185쪽.  48)Mary Luckhurst, op.cit., P. 191.  49)Joel Schechter, op.cit., P. 23.  50)Reinhardt Stumm, “Dramaturgy in Stuttgart: An Interview with Hermann Beil”, in What Is Dramaturgy?, P. 50.  51)Martin Esslin, op.cit., PP.43~44  52)Björn Bicker, op.cit., P. 193.  53)국내의 공연에서도 점점 프로그램을 내실화하고 있다.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일지를 상세히 기록하는 등 공연과 관련된 자료가 비교적 풍성하게 게재되는 경우도 있다.  54)Michael Börgerding, “Theater zwischen Kunst und Wirklichkeit” in Die Kunst der dramaturgie, PP.202~203.  55)David M. C, Stephen Langley: Theatre Management: Producing and Managing the Performing Arts, 2007. pp. 70~85.  56)김미희, 앞의 논문, 95쪽.  57)Cathy Turner and Synne K. Behrndt, “Names and Identities”, Dramaturgy and Performance, Newyork: Palgrave macimillan, 2008, pp. 70~85.  58)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신론(상)』, 태학사, 2011 참조.  59)매일신보 기자. 소설가 ,번역문학가, 신극운동가. 1912년 11월에 『매일신보』에 「병자삼인」(病者三人)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지상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이자 희곡의 구성 원리를 제대로 갖춘 본격적인 희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60)우수진, 「조일재 신파극 그리고 번안의 시대의 극작가」, 『한국현대연극100년—인물연극사』, 연극과 인간, 2009, 29쪽.  61)윤백남의 업적은 아래 글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백두산, 「윤백남, 식민지 조선 대중문화의 개척자」, 앞의 책, 35~49쪽.  62)위의 책, 47쪽. 참조.  63)Michael Börgerding, op.cit., P. 202.

    5. 나오는 글

    이 논문에서는 드라마투르그라는 역할이 처음 시작된 독일을 중심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역사와 정치 사회적 배경의 연관성을 짚어 보았다. 최초의 드라마투르그인 레싱에서부터 괴테, 브레히트, 그리고 영국의 타이넌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통해 드라마투르그의 기능에 대한 본질을 탐색해 보고자 했다. 먼저 근대 연극사에서 드라마투르그가 극장과 연극개혁의 중심에 서서 관객의 변화를 이끌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던 사례를 살펴보았고,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팽팽하던 시절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시대상황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임무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중재자요 매개자의 입장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에 따라 역할의 성격도 달라져 왔다. 텍스트에만 관여하는 작업에서부터 극장의 행정적 업무, 그리고 극단의 공연에 총괄적으로 관여하는 임무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투르그는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특히 그 관계 맺음 속에는 국가의 정책이나 정치적 의제들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들도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투르그의 정치적 성향은 두 가지 각도에서 비춰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정치극과 그 궤를 같이 하여 사태를 고발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사회적 상황과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제반 여건 하에서 분쟁에 처했을 때 이와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관계 정립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드라마투르그가 극장이나 극단, 그 어떤 곳에서 일을 하든 이 직업의 특성 상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이 논문에서 살펴 본 드라마투르그의 역사는 이에 대한 증거이며, 연극과 사회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투르그의 역사를 통해 확인했듯 드라마투르그는 당대의 연극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을 책임져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모범적인 방법만 모색할 것이 아니라 동시대 연극의 빈틈을 찾아내는 심미안을 키워야한다. 레싱과 브레히트의 드라마투르그 작업이 갖는 큰 의미는 그 시대의 연극을 진일보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이 연극에 대해 고민하고 연극론을 개혁했다는 데에 업적의 가치를 둘 수 있다. 그 바탕에는 당연히 그들의 시대관이 깔려있다.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연극에 대한 이해와 시대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논문은 드라마투르그가 정치적 또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 서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과의 관련성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드라마투르그가 갖추어야 할 능력과 드라마투르기 기술에 대한 탐색은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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