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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Merleau-Ponty’s Intertwining as a Theory of Communion 교감 이론으로서 메를로퐁티의 ‘상호 엮임’
  • CC BY-NC
ABSTRACT

The recent revival of phenomenology and aesthetics is deeply connected to the development of neuroscience which studies the nervous system and the brain with particular regard to cognition and memory. How are those fields gathered into building up the basis for the communication not only between human beings but also between humanity and its environment? This paper examines the human mind considered unseparable from the body, with reference to Merleau-Ponty’s two major works: Phenomenology of Perception (1962) and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1968). While reading these texts, I investigate the way he overturns the Cartesian cogito and establishes the body as the ground of perception. According to him, human perception is chiefly obtained through the body rather than consciousness. Influenced by William James, who produced the unique concept of cognition and memory through his experiments with the brain, Merleau-Ponty extends Heideggerian Desein to the field of the embodied mind. James also anticipates Bergson, who regards memory as the product of interaction between consciousness and matter (or the body). The intervention of the body which stores the past experiences makes it impossible for us to capture the present moment in itself. This failure, however, is viewed as positive by Merleau-Ponty because the human body is not only a medium of social interaction, but also that of ecological communion.


KEYWORD
Merleau-Ponty , Phenomenology , Heidegger , Intertwining , Environment , Chiasm
  • I. 서론

    뇌 영상 기술이 발달하면서 최근의 뇌 과학자, 에델만(Gerald M. Edelman)은 인간의 인지를“기억된 현재”(remembered present)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뇌의 수많은 뉴런 가운데는 우리의 경험을 저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가 사물을 인지할 때 의식은 이 저장소를 반드시 거친다. 아니 오히려 뉴런의 경험이 의식에 투사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코 새로운 것을 순수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뇌의 뉴런은 몸이요 물질인데 이 부분이 인지에 개입된다는 것이다. 의식은 이미 몸이 경험한 것을 되새김할 뿐, 매번 새롭게, 순수하게, 대상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발견은 첫째, 의식이 어딘가에 존재하여 순수하게 사유한다는 데카르트 이후 절대 코기토에 대한 반론을 낳는다. 그리고 둘째, 몸의 경험에 의한 인지는 인간뿐 아니라 뇌를 가진 다른 동물에서도 나타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의 기관을 발달시켜왔다는 다윈의 진화론이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에델만은 이것을 뇌의 진화라는 의미에서“뉴럴 다위니즘”(neural Darwinism)이라 부른다.1

    인간의 인지가‘기억된 현재’라는 발견은 사실 전혀 새로운 가설이 아니다. 의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이미 19세기 말,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제임스(William James)의 뇌 과학에 근거한 심리학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뇌 과학자로 출발했던 프로이트의 기억의 방식, 그리고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의 상호관련성에서 실험되고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최근 인지 과학 혹은 뇌 과학은 과거의 것과 무엇이 다르고 왜 다시 부상하며 이런 논쟁과 현상학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특히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몸 담론으로서 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사상을 압축한 용어인‘상호 엮임’(intertwining)이란 무슨 뜻인가.2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전통 형이상학을 전복하고 인간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가.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메를로퐁티의 몸 담론이 사물과의 교감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의 대표적 저서,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과 후기 사상을 압축한『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The Visible and the Invisible)을 중심으로 살펴보려한다. 의식의 물질성을 발견하고 의식은 끊임없이 흐른다고 보았던 제임스는 동생인 헨리 제임스의 심리적 사실주의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문학 기법인“의식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논의되는 메를로퐁티의 심리학은 예술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1에델만의 저서들 가운데“기억된 현재”는Wider than the Sky (2004), p. 4, “뉴럴 다위니즘”(neural Darwinism)은 Bright Air, Briliant Fire (1992), p. 82 참조,  2“상호 역임”은 그의 책,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의 제 4장, “The Intertwinging—The Chiasm”(pp.130-55) 참조. 양자물리학에서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못하듯이 인간과 사물이 서로 엮이는 것을 의미함.

    II. 몸과 의식의 상호 관련성

    우리는 흔히“물이 흐린데도 바닥이 보인다”라고 말한다. 또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내다보면 경치가 뒤로 물러난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나인데, 내가 움직이고 있는데, 밖의 경치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현상으로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은 해안선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해안에 서있는 사람은 배가 멀어지는 것을 본다. 보는 자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상대방이 움직인다고 믿는다. 이런 지각은 왜 일어날까. 지각은 객관적인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주관적이다. 그것은 기차를 탄 나와 경치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의미는 상황 속에서, 주체의 위치 속에서, 태어난다. 그렇다면“물이 흐린데도 바닥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말은 “물이 맑아야만 보인다”는 명제를 진리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을 때 매끄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바닥도‘진짜’가 아니고 물이 흐릴 때 보이는 바닥도 실체는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둘 다 물에 의해 굴절된 바닥이다. 그렇다면 물이 마르고 드러나 보이는 바닥이 실체인가. 그것조차 실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의 시각을 담당한 홍채는 빛과 상호연관 속에서 특정 색깔만을 흡수하고 반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닥을 바라 볼 때 그 울퉁불퉁한 바닥도 나를 응시(gaze)한다. 지각은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물이 맑으면 바닥이 보이고 흐리면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단선적  인“의식”(consciousness)보다는 상대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몸, 즉“본다”(vision)는 감각이 더 정확한 게 아닐까.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반박하면서 이성의 투명성과 순수성에 반기를 들고 감각을 이성보다 우위에 놓는다.

    데카르트 이후 계몽주의에 대한 회의론은 20세기 초에“현상학”이라는 범주로 후설로부터 비롯되고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후설은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대상을 향한 것이기에 지향성(intension)을 지닌다고 하여 추상적이고 보편적 이성에 의심을 표시했다. “지향성”이란 인지가 순수하고 절대적이 아니라 대상과의 상호 관련 속에서 태어나기에 이성은 대상(사물)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이성의 지향성에서부터“사물그자체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things itself)는 구호가 태어난다. 하이데거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존재와 세상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주체는 흙에서 태어나 세상(문명)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자(Dasein)로서 무한한 존재(Being)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잠깐 왔다가는 한정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고정 불변의 이성을 상황, 즉 시간과 장소 속에 놓아 잠정적이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만물 가운데 하나라면 사물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그리고 모든 인식이 대상을 향한다는 후설의 사유는 하이데거에 와서‘세상속의 존재’(being-in-the world)라는 하나의 연결된 끈으로 표기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물성(thingness)을 인정하면서도 인간과 사물을 구별하였다. 그는“오직 인간만”이 다른 사물과 달리 문명의 세상을 창조하고 죽어서야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함으로서 열어놓았던 존재의 심연을 다시 인간중심적 시선으로 닫아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둘을 존재(Being)의 일부로 보았고 몸의 사물성을 인정함으로서 투명한 이성을 거부하였다. 이것이 그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고 시(poetry)로 본 이유다. 언어는 투명하지 못하다. 그 속에 공간, 즉 사물을 지니고 있기에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칭하지 못하고 해석의 여분을 남긴다. 흙으로 빚은 항아리는 예술의 기원을 잘 설명해준다. 항아리는 가운데가 텅 비었기에 존재의 집이요, 거처요, 시다. 그리고 예술이야말로 인간이 사물을 지니고 사물로 돌아간다는 것을 드러내기에 진리(truth)다. 이런 견해는 전통 형이상학을 거부한 점에서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이르기까지 후세 비평가들에게 논쟁의 화두를 남겼다. 현상학은 이처럼 존재론(ontology)과 맞물려있으면서 학자에 따라 조금씩 방향이 다르다. 그렇다면 메를로퐁티의 경우는 이들과 어떻다른가.3

    주체를 독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대상과의‘관계’속에서, 세상과의 상호관련 속에서 사유한 점은 메를로퐁티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자였  다. 그러기에 이전의 현상학자들 보다 마음(혹은 의식)이 연출하는 인지와 기억, 그리고 유아기 심리에 의존했다. 인간의 삶에서 유아기는 사유이전, 언어이전의 몸으로 존재하는 시기이다. 그는 인간의 심리에 총체적 패턴이 있다고 믿은 게슈탈트 심리학을 비판하고 심리가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어 그대로 드러나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메를로퐁티의 상대적, 상호 주관적 관점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에게 영향을 끼친 베르그송의 기억에 관한 이론, 양자물리학의 패러다임, 그리고 제임스 심리학을 잠깐 살펴보자. 제임스가『심리학의 원칙』(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분석했듯이 의식은 숨어있는 실체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앞선 경험에 의해 지배받는다. 의식은 뇌의 뉴런에 새겨진 경험들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되는 현재로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그러므로 몸의 바탕 위에서 현재를 인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먹기 달렸다든가. 의식적 배움이라고 믿는 많은 학습의 영역들이 사실은 반복되는 몸의 경험에 의해 새겨진다는 것이다. 그의 글,「 습관」“( Habits”)은 외국어가 문법이나 구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 언어를 현장에서 사용하는가라는 경험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같은 맥락에서 중독증 역시 단순히 마음을 바꾸어 먹는 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 몸에 새겨진 습관을 다른 습관으로 대치하는 상당한 기간의 반복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물질은 뇌의 기억과 경험을 간직한 뉴런이다. 인간의 기억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에 의해 몸에 새겨진 근원적 기억이 있고 그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회고적 기억이 있다. 습관적 기억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생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본으로 먹이를 구한다든다 위험을 피하는 데 필수적인 기억이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행해지면서 얻게 되는 지각이다. 이에 비해 회상적 기억은 진화된 동물인 인간만이 지닌 더 높은 의식의 부분이다. 이 부분에 의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의식하고 자의적인 인식에 의해 사회적 동물이 되어 언어와 문명을 창조한다. 이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진화론과 초기 심리학은 최근에 와서 뇌 영상과학(fMRI) 기술의 발달로 현대 인지 과학이나 기억에 관한 이론에서 재인식되고 있다. 제임스의 심리학과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그리고 뇌 영상과학과 연결된 인지 과학 등, 최근 담론에서 경험주의가 부상하고 이들 이론이 문학작품의 이해와 창작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뇌영상과학 이전에 양자 물리학의 관점에서 관계론을 개발했다.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측할 수 없다. 양자물리학에서 양자는 빛을 비추면 질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질량을 잴 수 없다. 질량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양자와 빛 사이에는 서로 바라보고 보이는 응시가 존재하기에 객관적 수치를 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시각(몸)은 이미 양자라는 유동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메를 로퐁티가 보는 사물의 진실이요 인지의 현상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보다 한층 더 관계성을 강조한 존재론적 심리학(ontological psychology)이 태어난다.

    심리학에서 출발하기에 그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몸과 인지의 문제로 바꾸어 생각한다. 그는“인지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 그러나 그 기억은 과거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다. 과거는 연상의 구조에 의해 현재의 지각 속으로 고스란히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식 그 자체 속에 배치되어있다. 과거의 경험은 어딘가에 깊숙이 묻혀 있다가 현재시점으로 운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의식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한 지각은 항상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지각 속에 있고 이 지각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늘 변화한다.

    빛과 양자의 질량이 서로 상호관계에 있듯이, 주체는 사물을 대상화하여 생각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이 오히려 주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사물은 기억에서 물질이요 뇌의 뉴런이라는 몸이다. 몸이 의식의 사유를 좌우한다는 예를 그는 회화예술에서 찾는다. 우리는 이차원의 평면 위에 그린 입방체 그림에서 3차원의 깊이를 본다. 평면에서 입체감을 느낀다. 원근법을 즐겨 사용한 르네상스시대 그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늘어선 가로수에서 우리는 깊이를 본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글, 「시각과 마음」“( Eye and Mind”)에서 이런 깊이를 사유의 한가운데에 있는“신비한 수동성”(a mystery of passivity)이라고 말한다(175). 왜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진 입방체에서, 가로수의 그림에서, 3차원의 깊이를 보는가. 시각은 이성적이 아니다. “본다”는 감각은 몸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입방체와 가로수를 볼 때마다 원근의 깊이를 경험하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도 그 깊이를 본다. 그렇다면 시각이 대상을 조망한다고 믿었던 이분법적 근대 원근법은 몸이라는 감각에 의한 것으로 새롭게 해석된다. 몸이 이성의 사유를 지배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또 다른 예는 영화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평면 속에서 실제 삶을 재현한 눈속임수가 아니다. 가장 정확히 육화된 사유, 혹은 몸의 사유를 보여주는 예다. 연속적인 사진들을 찍어 빨리 돌리면 눈은 사진들에서 움직임과 깊이  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은 의식과 몸(혹은 사물들) 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태어나고“지금”이라는 시간성과“여기”라는 장소의 지배를 받기에 끊임없이 변한다.(161). 지각은 독자적인 의식의 사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각은“지각에 관한 사유”이다(44).

    존재는 사물도 아니고 이데아도 아니다. 아니 이 둘 다이다. 그러기에 메를로퐁티는 존재를 무로 보았던 사르트르를 비판한다. 존재는 무(nothing)가 아니라 몸이다. 사물(things)이다. 개인은 몸에 새겨진 경험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기에 대상에 대한 감각은 주관적이고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경험하기, 과정, 시간성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규명하는 단어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화가는 몸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고 몸을 가장 정확히 천착하려한 화가로 세잔을 꼽는다. 세잔은 빛의 각도에 따라 매순간 달라지는 경치를 그대로 화폭에 옮기려했다. 그는 원근법 대신에 감각의 사물성을 최대로 재현하려했고 눈에 비친 모든 사물 속에서 원통형을 보았다. 재현은 화가의 응시와 사물의 응시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인지는 몸 때문에 넘치고 재현은 사물의 응시 때문에 넘친다.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의미가 탄생하기에 이성은 독자적으로 대상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대상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가. 그것은 우리가 몸을 주체로부터 분리하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을 이성으로 부터 떼어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대상을 객관화하려한다. 그림은 바로 이것을 짚어주고 우리에게 감각의 위력을 일깨워준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시로 보았듯이 메를로퐁티 역시 미학을 중시한다. 그는 현상학을 예술과 같은 차원에서 정의했다. 즉, 현상학적 세상은 이미 실존하는 존재의 명징한 표현이 아니고, 현상학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의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예술처럼”진실을 존재 속으로 부각시키는 행위에 관한 철학이다(xxiii). 그가 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같게 본 것은 하이데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와 달리 인간만이 문명을 창조하기에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적임을 강조한 후 몸을 사물과 연결한다. 그러기에 그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완강히 거부한다.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은 몸에 명령을 내릴 수 없고, 영혼은 몸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영혼을 억압한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사물성으로 확장할 뿐 아니라, 의식의 기능을 몸의 경험으로 대체했다. 그렇다면 이성과 언어의 자리에 몸의 경험을 대체하고 어떻게 개인과 타인사이에 사회적 교감이 가능할까.

    3하이데거는 그의 글, “The Thing”179면에서 오직 인간만이 살아서는 세상만을 섬기고 죽어서야 사물이 된다고”말했다. 아감벤은 The Open 에서 하이데거의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을 비판했다.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존재를 세상과 땅 사이에 위치시키고, 인간과 문명은“드러냄”으로 동물과 사물은“감춤”으로 나누었는데 그런 이분법으로 어떻게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71-73).  4Merleau-Ponty는 Phenomenology of Perception, 22면에서 인지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Past is not imported into the present perception by a mechanism of association, but arrayed in present consciousness itself,”이로부터 이 책에서 인용은 괄호 속에 면수로 표기함.

    III. 사회적 교감의 매개체로서 몸

    의식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거부하고 의식보다 몸의 경험을 중시하는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반대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이다. 몸은 개인을 타인과 관계 맺게 하는 매개이다. 이런 예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악수”라는 행위이다. 악수는 언어보다 더 강력하다. 그 이유는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악수를 할 때 우리는 내가 남의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도 남에 의해 손이 잡힌다. 만지고 만져지는 몸의 접촉은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강하다. 인간이 가장 간절한 소망을 기도할 때 두 손을 합장한다. 이것 역시 한 손이 다른 나머지 손을 만지고 만져지는 상호 엮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만지고 만져짐은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 서양인들은 만나는 반가움이나 헤어지는 아쉬움을 표현할 때 언어보다 서로 가볍게 상반신을 끌어안는 행위로 대신한다. 이런 몸짓은 언어보다 더 절실하게 마음을 전달한다. 언어 속에는 몸이 들어있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알려진 성(sex)도 마찬가지다. 메를로퐁티는 성욕이 의식적인 욕망이 아니라 몸이 타인과 관계맺음을 원하는 데서 온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성을 의식의 영역으로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론을 제기한다. 심리적 불안에서 오는 모든 증상들은 주체가 타인과 관계를 회복할 때 치유되는 것이지 의식적인 분석에 의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94). 그는 프로이트가 성을 개인의 심리로 제한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사회적 소통의 매개로 확장할 것을 주장한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로 먼저 인식하지못한다. 어린이는 책상을 책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책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 물건을 인지한다. 언어와 사물은 하나가 되어 즉각적으로 인지된다. 말하자면 언어는 이미 사물 속에 있다. 사물과 분리된 독자적 순수언어는 없다(206). 언어 역시 몸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대상과 함께 존재하고 대상에 대한 의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몸의 반응이고 시간과 장소에 때라 의미가 달라진다. 단어의 의미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말과 동시에 태어난다.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다고 미리 생각한다. 그러나 만난 현장에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말은 타인과의 접촉 속에서, 문맥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고 이런 욕망에 의해 의미는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서로 바라보고 바라보이는 상호 엮임 때문에 언어는 매번 의미가 새로워진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메를로퐁티에게도 언어는 이미 그자체가 시요 예술이다.

    바라보고 보이기에 언어는 의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물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언어는 몸의 기억”이라고 말한다. 순수코기토가 없듯이  순수언어는 없다. 몸이 경험한 것은 언제나 의식에 이미 각인되어 기억하고 대상에 의해 보이기 때문에 상황을 떠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영어를 중국식으로 발음하고 일본인은 일본식으로 발음하고 인도인은 인도식으로 발음한다. 모국어가 먼저 몸에 새겨진 탓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문화는 자국의 문화 위에 덧칠해지기에 한국인은 한국식 민주주의를 낳는다. 이런의미에서 메를로퐁티는 한나라의 언어를 타국어로 순수하게 그대로 번역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순수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타인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몸이라는 친근한 경험들이고 이것이 주체와 세상을 연결한다.

    몸이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끈임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169). 그리고 몸은 그저 공간을 차지하고 공간 속에 존재할 뿐, 말을 하는것은 이성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추상적으로 두되 속에서 사유될 뿐 실천의 영역 속으로 들어서면 장소와 시간을 떠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의 경우, 언어와 이성은 실제 경험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물과 세상과의 관련 속에 기억하고‘말하는 이성’이다. 그러므로 몸은 공간과 뗄 수 없는 공간의 일부분이다. 그는“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특정 세상과 연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원칙적으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속해있다”고 말한다(171). 몸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몸을 소유하고 있다.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공간, 즉 환경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메를로퐁티에 오면“나는 몸으로 존재한다”(I am my body)로 바뀐다. 그렇다면 개인의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플라톤과 칸트는 예술 작품의 창조는 개인의 고유한 천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5 아도르노는 그의 글, 「문화산업: 군중기만으로서 계몽」“( Culture Industry: Enlightenment as Mass Deception”)에서 예술작품을 후기 산업사회의 군중문화(mass culture) 속에서 이해했다. 후기 자본사회에서 작품은 더 이상 고유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군중의 상품으로 존재한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자본의 시녀가 된 창작품은 공동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군중의 환호 속에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독창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132-34). 아도르노의 후기 산업사회 문화논리 이전의 메를로퐁티는 예술작품을 몸, 혹은 사물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주체는 대상을 객관화할 수 없기에 재현은 불가능하다. 재현 속에는 이미 자신의 응시와 대상의 응시가 상호 엮여있고, 이미 그려진 그림에도 화가의 응시와 보는 관객의 응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재현을 거부한 그는 당연히 사실주의를 거부한 인상파 화가 세잔을 선호하였다.

    세잔은 시간에 따라 빛의 양이 달라지고 그러기에 대상의 재현이 달라진다는 것을 화폭에 담으려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경치를 그렸다. 빛의 응시, 나무의 응시는 화가의 응시와 함께 시간마다 장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포착하려했다. 주체 속의 사물성과 대상의 사물성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려했던 세잔은 만물을 입방체로 보아 둥근 사과 속에서도 각진 외형을 보았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그의 그림이 후세에 인정받는 것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그의 글,「 세잔의 의심」“( Ce´ zanne’s Doubt”)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기다려야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승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끝에서 출현하는 그림들에 그가 의문을 던진 이유이고, 자신의 캔버스를 향해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매달렸던 이유다. 그것이 그가 그림그리기를 끝내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들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사상이나 자유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다”(25).

    우리의 과거가 현재 속에 있듯이 우리의 현재는 미래 속에 있다. 메를로퐁티에게 주체와 세상은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이다. 예술작품은 몸과 의식, 사물과 인간사이의 상호 관련성에서 태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몸의 응시는 사회적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곧 시라고 말했지만 메를로퐁티는 몸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다(174). 시는 몸으로 존재한다.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은‘무목적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에 독자에게 가장 정확한 판단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논리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기에 주관적이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이라는 형식을 매개로 독자 스스로 경험에 의해 의미를 얻기에 목적성이 없다. 칸트는 예술이 감각과 의식이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지기에 순수한 의식의 산물인 논리와 다르다고 믿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에 오면 논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역시 몸의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응시를 벗어난 순수이성은 존재하기 않기에 논리 역시 넓은 범위의 예술 속에 포함된다. 메를로퐁티는 예술의 기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정화나 칸트의 판단력 연습이 아니라 화가와 대상이 서로 만나 소통하는 장이라고 보았다. 응시는 시각 속에 존재하는 몸의 경험이고 이것이 사회적 교감의 기능을 한다. 악수와 포옹은 사회적 소통에서 몸이 말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 또한 상황 속의 일부요 몸에 의해 매개되기에 끝없는 과정으로서 소통한다.

    5플라톤은 시인 Ion을 통해 시의 형식보다 시인의 영감을 강조했고,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시인의 천재성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의 형식을 동시에 강조했다.

    IV. 환경과 인간의 교감

    전통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보다 정확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서구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Seeing is believing”)라는 격언이 있고 동양에는“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 百聞이 不如一見”)라는 속담이 있다. “본다”는 것이 곧장“앎”이라는 지식과 연결된 것이다. 메를로퐁티에게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둘 다 감각의 영역이기에 다르지 않다. 둘 다 대상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 시각 속의 몸인 응시가 작동하는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대상의 응시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므로“우리가 본 것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67).6 한 쪽 팔을 절단한 환자가 그쪽 팔이 가렵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본다는 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몸에 없는 팔, 보이지 않는 팔을 가렵다고 느끼는 것은 팔이 있었던 과거의 경험이 심리에 영향을 주고 바로 이 경험이 믿음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89). 팔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서 현재에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보다 과거의 경험과 그 기억이 더 앞지른다. 팔은 기억이고 몸의 의도성이다. 의도성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한다. 사유의 자리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욕망(desire)이 들어선다. 메를로퐁티에게 이성은 의도성, 몸의 응시, 그리고 욕망이다(consciousness is not a matter of I think, but I can (159). 없는 팔이 가려운 것처럼 의식은 몸을 매개로 작용하고 심리는 물리적 현상을 앞지른다. 팔이 없는 데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각은 기억이요 의지요 믿음이 이성적 판단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대상을 인지하는데 몸이 이성 보다 앞지른다면 전통적 인지과학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인지 과학의 입장에서 논의한 드레이퍼스(Hubert L. Dreyfus)는 그의 글, 「메를로퐁티와 최근 인지 과학」“( Merleau-Ponty and Recent Cognitive Science”)에서 인지과학이란“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든지 간에 뇌와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145)이라고 정의한다. 인지는 과거의 경험이 몸에 새겨지고 그것이 현재 상황에 최대로 대응하면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는 경험의 기억과 현재 상황의 접촉이 인지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학습의 훈련은 행동들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중시한다(143). 학습은 재현이 아니라 상황에 감각적으로 대응하는 지속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138).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에 대한 보상의 기억, 실패의 쓰린 경험들이 반복되어 몸에 새겨지도록 만든다(205). 경험을 축적한 감각은 사유하는 의식 이전으로 의식보다 앞지른다. 그러므로 경험하는 현장이 중요하고 시간과공간이 중요하다. 몸은 외적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인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새로운 인지과학은 세상과의 상호접촉 속에서 일어나는 몸의 경험과 과정을 중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철학자의 질문은 인지의 확실성이 아니고, 현미경처럼 현상을 들여다보고 객관적 통찰로 의식을 깨우치는 방식도 아니라고 말한다.7 현상은 질문의 방식으로 의심의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상 그대로의 모습, 그것이 끊임없는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은 그자체가 이미 하나의 끊임없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자체가 질문이라면 그가 창조하는 대상도 질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그 자체로 예술의 완성품인 자연에 몰두해야한다. 자연은 사물성과 육화된 의식의 신비한 만남이기 때문이다. 세잔이 일곱 개의 색깔들로 알려진 빛에서 열여덟 개의 색깔들을 보았듯이 혼돈이라는 감각의 세계에 몸을 던지는 것이 예술가이다. 그는 자신이 소통한 자연을 독자와 나누어 맛본다. 그 나눔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독자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예술은 개인의 독특한 사적인 세계를 공적인 세상으로 확장하는 매개이다. 심리가 곧 몸이라면 심리학은 자연의 사물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고 심리학은 자연과학의 영역과 겹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심리를“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심리 그자체가 몸이고 이미 세상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기에 환경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과 환경은 몸이라는 하나의 에너지로 연결된다(1968: 143).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가 없듯이 만지는 것 역시 감각의 영역으로 차이가 없다. 모든 감각은 환경과의 상호엮임 속에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라보고 동시에 보인다. 만지고 동시에 만져진다. 숲에 가면 나만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나를 바라본다. 눈이 보듯이 사물도 본다. 예를 들어 장님은 지팡이로 본다. 그의 지팡이는 몸의 연장이다. 사물인 지팡이는 그의 감각이 된다. 지팡이는 인간이 물질과 소통하는 가장 흔한 예이다. 물질성, 혹은 사물성은 마음의 일부분이기에 그는 마음이 사회적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살(flesh)이라는 개념이다. 몸은 살이다.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느끼듯이 살은 만물의 공통된 몸이다. 그리고 전도성(reversibility of flesh)을 지닌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동시에 이루러지는 것처럼 만지는 행위는 만져지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전자 없이 후자는 없다. 이 전도성이 키아즘(Chiasm)이다. 그러므로 살은 우주를 구성한 4가지 요소이다. 물, 공기, 흙 그리고 불의 네 가지 요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끝없이 변하면서 만물을 구성한다(1968: 139).

    심리학에서 출발했기에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유아기 경험을 중시했다. 몸의 체험인 이 시기 경험은 성인이 되어 타인과 소통하는 바탕이 된다. 몸의 경험에 뿌리내린 자아이기에 인간은“자연적 자아”(natural self)이고“심리학은 자연과학”이다.8 어린시절 몸의 경험은 성인이 되어 타인과 소통하는 근원이 되기에“사유란 사유하는 자연”이다(414). 사유는 몸의 사유이다. 그렇다면 몸과 자연은 같지 않은가. 순수의식이 아닌 체화된 의식(embodied mind)이 사유한다면 (순수)자의식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변증법적 관계로 본 헤겔식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헤겔은 자아와 세상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연결하였다. 그러므로 그의자의식은 투명하다. 이와 달리, 메를로퐁티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닌 키아즘의 관계로서 인간과 환경의 동등한 공시성을 강조한다. 몸을 통해 서로 보고보이는 관계,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이기에 소통은 끊임없이 여분을 남긴다. 몸은 몸을 통해서만 분석된다. 그러기에 오히려 주인은 의식이나 자의식이 아니라 사물성인 세상이다. 세상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세상의 일부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502). 하이데거가 세상과 존재를 끈으로 잇듯이 메를로퐁티 역시 세상과 주체를 끈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그는 주체보다 세상이 더 우선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몸에서 태어나 다시 몸으로 돌아가는 살의 일부분이다. 몸은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이 살은 인간이 다른 만물과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살에 의해 주체와 세상은 상호 키아즘을 형성한다.

    자연을 대표하는 색깔들 가운데 붉은 색의 꽃을 보면 우리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느낌을 받는다. 파란 하늘이나 바다를 보면 서늘하고 냉정한 느낌이 오고 푸른 숲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감각과 자연의 색깔은 이처럼 서로 교감한다. 물은 차고 불은 뜨겁다. 공기는 부드럽고 흙은 단단하다.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우리의 감각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렇게 서로 교감한다. 우리는 자연 속으로 던져진 존재이다. 자연은 우리 밖에 있지만 주체의 중심인 몸은 이를 알아챈다. 몸은 자연이 서로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기억이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읽듯이 인간은 자신의 유적지(유아기)를 되돌아본다. 그러므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재현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출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탄생 이전에도 있었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세상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는 세상 위에서, 세상 밖에서, 세상을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이미 세상의 부분으로 태어나고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6영어원문: “Nothing is more difficult than to know precisely what we see” Italics in original).  7Merleau-Ponty,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p. 101, 이로부터 이 책에서 인용은 괄호 속에 1968: 면수로 표기함.  8Merleau-Ponty, The World of Perception, p. 10.

    V. 결론―공헌과 한계

    메를로퐁티의 통찰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특히 현대 지성사에서 『지각의 현상학』은 그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저서다. 그의 사상이 최근 다시 부상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 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의 교감, 인지과학, 그리고 미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 최근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몸 담론을 선도하는 마크 존슨(Mark Johnson)은 그의 글, 「무엇이 몸을 만드는가」“( What Makes a Body?”)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몸을 문화적으로만 한정했다고 비판했다(166). 그리고 몸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고 과학적인 관찰의 대상조차 아니라고 말한다. 1980년대 문화연구를 선도한 페미니즘, 푸코의 신역사주의, 그리고 버틀러의 퀴어(Queer)이론에서 몸은 정치적 이념이 각인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몸은 의식을 좌우하는 감각이고, 마음의 주인이고, 살과 피를 나눈 사물의 형제다. 몸은 의미와 사유의 탄생 뿐 아니라 외부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다(163). 그러나 미국 몸 담론은 윌리엄 제임스를 비롯하여 존 듀이, 피어스 등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감각을 의식보다 우위에 두었다.9

    메를로퐁티는 감각을 이성보다 우위에 놓아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전복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차별을 수정하는데 공헌했다면 현재 진행되는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재해석들은 사회적 교감,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의 교감에 집중된다. 그는 심리학자로서 프로이트, 라캉과 차별을 견지하면서 정신분석은 존재론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무의식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잇는 매개라는 것이다(183).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키지 못했기에 방법론의 부재를 남긴다. 그리고 유아기 몸의 소통이 성인이 되어 대상과 교감하는 근원이 된다고 믿은 인성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다른 심리학자들의 불만을 낳기도 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통찰한 현상학적 경험론은 최근의 인지과학이나 뇌 과학 등과 함께 생태 패러다임을 이끄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9존슨은 몸을 살과 피의 생물학적 몸, 생태학적 몸, 경험하는 현상학적 몸, 사회적 몸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와 함께 언어가 몸의 경험과 밀접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감각기관의 경험 패턴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성하는가.”예를 들어 몸의 동작과 위치에서 언어가 파생되는 예를 보자.  “옳다”라는 단어는 오른 쪽을 가리키는 몸의 위치에서 나온다.  10예를 들어 라캉은 누구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면서도 추도사, “Merleau-Ponty: In Memoriam”에서 이런 아쉬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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