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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은시대 연극미학 연구* A Study on the Silver Age Theatre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은시대 연극미학 연구*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the theatrical essence of the russian Silver age. This age is full of the aura of theatricality, known as the Renaissance of Russian theatrical art. The period of Silver age, betwee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refused the traditional values of the past and tried to construct a new world-view, as well as pursue the social reforms and artistic changes. The theatre was located in the center of this age. The theatre of Silver age expended effort on the reflection of a changed reality with new artistic language and a new critical mind. Russian New drama was the core concept which accomplished the theatrical missions of Silver age and experimented the possibility of theatre's future values. Russian New drama, which abounded in wild experimental spirits and intense rebellion, provided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20th century theatre with aesthetic direction and artistic vitality.

KEYWORD
은시대 , 연극적 르네상스 , 러시아신극 , 심리주의 , 연극의 시대
  • 1. 서론: 은시대의 재조명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은시대는 상징주의를 중심으로 한 시(詩)운동의 전성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시대정신의 발현이 주로 운문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눈부신 시학 발전 양상이 러시아의 ‘황금시대’에 버금갈 만큼 풍성하고 다양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히 연극의 혁신과 변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당한 가치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 성과에 대해서도 세기 전환기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연극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열망을 모더니즘 시학의 영토확장으로 파악하거나,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실험정신의 한 방편쯤으로 폄하하는 경향조차 있었다. 은시대 대부분의 시인들이 연극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극작활동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시의 승리를 의미할 뿐, 연극의 특수성으로 공과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1)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은시대에 대한 연구경향은 조금씩 변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은시대 연극 현상을 주도한 러시아신극(новая драма)이 “일종의 예술적 발견이었고, 20세기 극작술 전반의 발전 경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현상”2)이라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유럽 드라마사의 주요한 발전 경향에 실제적인 단초를 제공했다”3)는 주장이 나왔다. 은시대를 거대한 극장으로 파악한 비슬로바(А. В. Вислова)는 은시대가 화려하게 반짝이는 무대장치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 정의부터 연극성의 모멘텀을 함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 실제로 구세기와 신세기가 교접하는 이 세기전환 시대는 한마디로 엄청난 ‘연극 시대’5)였다. 세기말의 데카당트 분위기는 세계의 종말을 주도하는 초월적인 힘의 존재를 예감케 했고, 새로운 세기의 시작은 변화와 개혁의 본능을 충동질했다. 새 시대의 혁신적 무드와 다가오는 변혁의 아우라 속에서 전 사회는 낡은 옷을 걷어내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을 위해서 몸부림쳤으며, 그것을 예술적으로 융화하고 표출하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 가상의 체험이나 예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연극이 그 첨단에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변화의 운동과 정조를 직접 관객 앞에서 제시하는 연극은 사회와 대화하고 호흡하는 가장 앞선 장르였던 것이다. 연극에 대한 화두는 은시대의 중핵적 지위를 차지했고, “인간은 무대 위에서만 자신의 진실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6)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 이 위대한 연극시대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지 않아 시기규정이나 개념정의도 확정되지 않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은시대 연극미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논문도 아직 없는 실정이다. 작년에 사망한 미국 망명학자 로넨은 은시대가 “20세기 초와 관련된 예술적, 정신적 번성기로서, 지리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거의 동일시되는 지역에서 발생한 문화 현상”7)쯤으로 애매모호하게 이해되고 있음을 한탄한 바 있는데, 그 상황은 지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3부작으로 구상된 ‘은시대 연극미학’ 연구 중 그 첫 번째로 은시대의 개념과 시기, 출현배경과 맥락 등을 살펴보겠다.

    1)대표적인 경우가 역설적이게도 은시대 연극미학에 대한 본격적 이론서인 비슬로바의 『Серебряный век как театр』(М.:ВИНИТИ, 2000)이다. 저자는 정확히 말하면 연극미학이 아니라, 연극문화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연극적’인 것의 보편화, 편재화를 은시대 문화의 본질적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제도로서의 연극이나 장르로서의 연극 등 연극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다. 은시대 연극성을 다룬 최초의 저서로서, 짧지만 강렬한 반향을 일으킨 그녀의 저서는 시학적 연극성에 대해서는 굵은 획을 그었지만, 연극의 연극화(театрализация театра)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 못했다.  2)Бугров Б. С. “«Новая драма» как этапное художественное явление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100 лет Серебряному веку: Материалы междунар. науч. конф. М.: Макс пр есс, 2001. С.4.  3)Журчева О. В. Жанровые и стилевые тенденции в драматургии ХХ века. Сама ра: Изд‐во СамГПУ, 2001. С.31.  4)См.: Вислова А. В. Серебряный век как театр. М.:ВИНИТИ, 2000. С.162.  5)Бабичева Ю. В. “«Новая драма» в России начала XX века,”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дра матургии: Вторая половина XIX – начало ХХ века. Л.: Наука, 1987. С.481.  6)Гашкова Е. М. “От серьеза символов к символической серьезности(театр и теа тральность в ХХ веке),” Метафиз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ыпуск 5. Культура. А льманах Лаборатории Метафиз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при Философском факуль тете СПбГУ, 1997. C.90.  7)Ронен О. Серебряный век как умысел и вымысел. М.: ОГИ, 2000. С.30.

    2. 은시대의 개념과 형성과정

       2.1. 위대한 연극시대

    은시대의 연극은 예술미학적 층위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확립했으며, 복잡다단했던 당대 삶의 모든 측면을 반영했다. 문화 영역 전반에서 연극의 테마와 개념이 주도권을 쥐었고, 많은 극장들이 새로이 문을 여는가 하면, 공연장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공연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다양한 연출가들이 풍부한 배우층을 활용하여 색다르고 기발한 연극적 탐색을 시도했고, 드라마의 혁신을 비롯해 미학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많은 연극이론들이 출현했다.8) 연극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의 유일한 출구로 기능했으며, 변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분출하는 통로였다. 연극이 제공하는 다양한 형식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세기전환기 특유의 역동성과 긴장감을 표현했다. 연극과 ‘연극적인것’(театральное)은 모든 예술장르에 침투하여 새로운 문화의 방향성과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주도적인 위상을 확보했다. 폭발적인 연극계 움직임과 동시에 카바레-극장과 소품공연극장(Театр миниатюр)들도 우후죽순 생겨났고, 1906년에는 최초로 전러시아극작가-음악작가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9) 그 외에도 많은 연극 잡지들(예를 들어, 『Театр и искусство』, 『Театрал』, 『Маски』 등)이 창간되었고, 『Мир искусства』, 『Весы』, 『Аполлон』 같은 혁신적 예술 잡지들도 연극에 큰 관심을 할당했으며, 일반 잡지와 신문에서도 연극계 소식란과 연극섹션은 필수가 되었다. 연극 비평가가 전문 직업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연극비평과 연극이론에 관심을 돌렸고, 특히 당대 작가 대부분이 한 편 이상의 극작품을 집필해봤을 정도였다.

    이처럼 은시대는 명실상부한 “러시아 연극예술의 르네상스”10)였다. 연극의 개념 속으로 인간개조의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지향이 도입되었으며, 연극은 당대의 삶을 포착하고 주도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성격을 부여받았다. 사람들은 “삶과 예술의 열린 대화, 직접 대화가 가능하며, 동시대인이 모든 것을 함께,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11) 연극 장르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은시대 연극 미학의 대표자들은 연극이 오늘날 세계상을 표현하는 주도적 형식이며 모두들 드라마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확신했다. 연극을 중심으로 한 예술의 재편은 주로 상징주의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나, 리얼리즘 진영 또한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고리키와 안드레예프가 주도하는 잡지 『지식』(Знание) 계열 작가들도 자신들의 연극이론을 개진하면서 밀도있게 무대 실천에 투신하였고, 형식상 상징주의보다는 리얼리즘 미학에 가까운 체호프의 극작12)도 연극과 드라마의 대세를 증명하는 기반이 되었다.

       2.2. 개념의 기원

    은시대란 용어는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에 나오는 역사 발전단계 개념, 즉 인류의 역사를 황금시대, 은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시대로 분류할 수 있다는 설정에서 유래한다. 이것이 라틴문학사에 적용되어 ‘황금시대’(70 B.C. - A.D. 14) 다음에 오는 시기, 즉 최고 전성기 다음에 오는 문화·문학 개화기란 의미로 은시대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은시대는 18-133년까지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 50? - 130?),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 40? - 104?),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Arbiter, 20 - 66) 등의 작가들에 의해 눈부신 문학적 성과를 달성했던 시기를 지칭한다. 러시아문학에서는 푸시킨의 친구이자 문학비평가였던 플레트뇨프,(П. А. Плетнев)가 1820년대를 ‘황금시대’라 호칭한 것이 이러한 시대구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황금시대란 용어는 19세기 전반부 문학의 화려한 개화를 상징하는 독자적 수식어로만 사용되었을 뿐, 더 이상 시대분류를 위한 용도로는 쓰이지 않았다. 이런 시대구분법이 러시아 문학에 다시 등장한 것은 이바노프-라줌니크(Р. В. Иванов-Разумник)가 자신의 논문 「관점과 어떤 것」(Взгляд и нечто, 1925)13)에서 20세기 초반 문학을 서술하면서 황금시대와 은시대의 분류법을 사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초기 상징주의 작가들과 1890-1900년대 리얼리즘 작가들(체호프, 부닌, 고리키)을 황금시대 작가들로 규정하고, 은시대 작가군으로는 1910-1920년대 후기 상징주의자들과 에렌부르크(И. Г. Эренбург), 이바노프(Вс. В. Иванов), 세라피온 형제들(Серапионовы братья)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후 시인이자 비평가 퍄스트(В. А. Пяст)는 회고록 『만남』(Встречи, 1929)14)에서 모든 시대는 발전과정상 황금시대와 은시대를 거치기 마련이라고 주장하면서 약 20년을 간격으로 대분되는 황금시대와 은시대가 하나의 문화발전 단위를 형성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19세기 문학의 경우, 황금시대 시인들은 1800-1810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 은시대 시인들은 1817-1824년에 태어난 작가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동시대 작가들에 관해서는 1860년대 태생이 황금시대 작가군, 1880년대 태생이 은시대 작가군이라고 분류했다.

    이처럼 일반적 시대구분 명칭이 아니라, 세기전환기의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역사적 개념으로 은시대가 사용된 것은 망명객 오추프(Н. А. Оцуп)에 의해서였다. 그는 논문 「러시아 시의 ‘은시대’」(‘Серебряный век’ русской поэзии)15)에서 폴 발레리가 인류문화사 중에서 3대 기적 중의 하나라고 평한 러시아 19세기 황금시대의 특징을 논하면서, 황금시대에 이어 상징주의와 아크메이즘이 주도하는 은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이 뒤에 비평가 베이들레(Вл. Вейдле)는 논문 「세 개의 러시아」(Три России)16)에서 1917년 혁명 직전의 20년을 은시대로 규정하고, 그 시대 문학의 특징으로 고대문화의 복원과 언어적 감수성, 시구의 음악성을 꼽았다. 1962년 회고록 『은시대의 문단』(На Парнасе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에서 마콥스키(С. К. Маковский)가 이 용어를 책 제목으로 사용17)하면서부터 서구 러시아문학 연구가들 사이에는 ‘은시대’가 광범위하게 애용되었다. 20세기 말 러시아에서 은시대 문화에 대한 폭발적 관심이 대두되는데,18) 이는 지난 세기를 평가·정리하는 차원인 동시에 100년 전의 세기 말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대비시켜보려는 충동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물론 20세기 말부터 전세계적으로 문화학과 문화산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도 독특하고 심오한 문화시대였던 은시대 연구에 눈을 돌리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2.3. 시대상황과 배경

    은시대란 개념은 특정 예술사조의 주도나 강령을 앞세운 집단화된 운동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재구된 용어이기 때문에 시대적 경계를 확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보면 러시아 문화와 예술에서 새로운 현상들이 등장하는 1880-1890년대부터 많은 문화활동가들이 망명길에 오르는 1920년대 초까지를 은시대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초기 연구에서는 은시대를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채 20년이 안 되는 시기를 규정하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그 시기를 1880년대 초중반부터 1920년대 초로 30년 가까운 시기를 은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은시대의 대표적 철학자 베르댜예프는 “세기 초는 대대적인 지적, 정신적 고무가 발생한 시기로서, 격렬한 실험이 시행되고 창조적 역량이 깨어났다... 20세기 초는 러시아 정신적 문화의 르네상스이자, 철학적, 문학-미학적 르네상스이며, 종교적, 신비주의적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시기였다. 러시아 문화는 이 시대와 같은 세련미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19)라고 말하면서 20세기 첫 10년이 은시대의 정점을 찍는 시기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1900년대를 중심으로 전후 20년에 벌어졌던 주요한 예술적, 사회적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은시대 출현의 맥락을 찾고 그 형성과정을 추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19세기 말의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18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이 해에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예술적 사건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로 인해 보수반동정치가 강화되자 역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와 예술적 자유의 문제가 사회문화적 주제로 본격 등장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은 위대한 리얼리즘의 시대인 19세기가 저물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은시대를 장식한 상징주의의 맹아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세기의 전환이 시대정신의 전환으로 이어진다는 가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보통 정치적, 문화적 정체기(Безвременье)라 부르는 1880년대에는 급격하고 극단적인 사회인식의 변화가 발생한 시기였다. 러시아의 봉건적 신분질서는 크게 동요했고, 구시대적인 귀족사회의 일상과 생활방식은 빠른 속도로 몰락했다. 그와 동시에 신분적 제약과 사회적 폐쇄성이 사라지자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진보적 활동가의 활약이 확대되었다. 물론 빠르게 성장하는 부르주아 관객들의 속물적 취향에 영합하는 저속한 경향도 빠르게 세를 확장했다.20) 1880-1890년대에 와서 크릴로프(В. Крылов), 시파진스키(И. Шпажинский), 타르놉스키(К. Тарновский) 같은 작가들이 생산한 수많은 ‘웰-메이드 플레이’(хорошо сделанные пьесы)에 의해서 러시아 극작 전통(주로 심리주의와 철학성)은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연극 장치들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그들의 희곡은 극작술의 규범에 따라 제작되었지만 진지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지 못하고 판에 박힌 작품으로 전락했다. 은시대의 연극혁신은 상당부분 이 ‘웰-메이드 플레이’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러시아 극작 전통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 전통의 아류 위조품에 대한 거부였던 것이다.

    1892년은 상징주의 선언문에 해당하는 메레지콥스키(Д. С. Мережковский)의 작품집 『상징들』(Символы)이 출판되고, ‘몰락의 원인과 현대러시아문학의 새로운 흐름에 관해’(О причинах упадка и о новых течениях современной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란 제목으로 그의 상징주의 사상을 집약한 강의가 진행되던 시기이다. 이 강의에서 메레지콥스키는 리얼리즘의 지배적 경향에 반기를 드는 새로운 문학운동의 등장을 선언하면서 예술의 혁신이 절실함을 피력한다. 이 새로운 문학운동이 가진 핵심 성격으로 그는 ‘신비주의적 내용, 상징, 예술적 감수성의 확장’을 꼽는다. 1892년을 장식한 또 하나의 문학적 사건은 고리키의 데뷔였다. 이후 러시아 문단에서 고리키가 보여준 활약과 비중을 고려할 때 그의 이름은 시대변화의 신호이자 새 시대로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과 역사, 개체와 집단의 갈등을 지고한 휴머니즘의 용광로 속에 녹아낸 그의 극작세계는 체호프가 닦아놓은 20세기의 진입로 끝에 마련된 ‘개선문’21)과도 같았다. 20세기에 진입하여 연극 논쟁에 새로운 자극제를 투여한 것은 브류소프가 1902년 『예술세계』(Мир искусства, № 4)에 게재한 「불필요한 진실」이라는 논문이었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페테르부르크 순회공연에 자극을 받아 이 논문에서 브류소프는 극예술에서 조건성은 불가피한 본질이고 모방을 숭배하는 절대적 사실성이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문은 당대 평단과 연극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모더니즘 연극의 선언문’22)처럼 간주되어 많은 사람들의 글 속에서 한동안 지속적으로 인용되었다.23)

    ‘피의 일요일’로 상징되는 1905년 혁명과 그 처참한 실패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극단적 혁명의 필요성과 절박성, 그 임박한 가능성에 대해서 사유하게 만들었고, 그 저항과 분노의 고스란히 극장 레퍼토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24) 1905년 혁명 이후 잡지 『Знамья』를 중심으로 활동한 극작가들(고리키, 안드레예프, Е. 치리코프 등)은 사회적, 예술적 당면과제의 직접적 반영을 주창했고, 서정드라마(Лирическая драма) 노선을 견지한 상징주의자들(И. 안넨스키, 브류소프, 블로크 등) 또한 파격적인 혁신을 도모한다. 이 시기에 메이예르홀트는 코미사르젭스카야극장에서 새로운 표현형식과 기법으로 당대 삶에 밀착된 예술언어를 찾기 위해 질주했다. 1905년 혁명의 좌절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정치적 패배감과 역사적 진보에 대한 회의를 안겨주었고, 기성 체제의 높은 벽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극복가능성의 탐색이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 은시대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의 지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상태’25)였다. 구시대가 종결되었지만 그렇다고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은시대 세대는 자신의 예술적, 미학적 경향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이념적 진공상태에서 은시대는 세련된 정신적 체험이라는 욕망을 실현하고자 유럽의 문화에 도취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학과 새로운 철학, 종교에 심취함으로써 우울하고 암담한 러시아의 현실을 망각할 수도 있었다. 세기 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박하게 진행되는 모든 사건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탄생시켰고, 이것은 곧바로 문화적, 예술적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카오스적인 현실이 예술적 혁신과 탐색의 정당성을 확보해주었고, 과격하고 파격적인 실험정신에 날개를 달아주는 동력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새로운 연극미학과 혁신적 예술 탐색을 위한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킨 사건은 19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된 논문모음집 『연극: 새로운 연극에 대한 책』(Театр: Книга о новом театре)26)이었다. 여기서 필자들(루나차르스키, 아니츠코프, 고른펠트, 베누아, 메이예르홀트, 솔로구프, 출코프, 라팔로비치, 브류소프, 벨리)은 현대 연극과 미래의 연극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염원을 표명하는 동시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야심찬 기획의도를 게재한다. 이들의 주장 사이에는 일관된 통일성은 없었으나, 전통적 리얼리즘 연극이 위기에 봉착했고 시급히 새로운 발전방향을 탐색해야 한다는 절박성에 있어서는 한입을 모았다.

    1900년대 만개하기 시작한 은시대의 문학적, 예술적 성과들은 1913년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가다가 1920년대 초에는 그 활동이 눈에 띄게 격감한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1914년 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볼셰비키혁명, 1918년 사설 출판사의 강제폐업과 비(非)볼셰비키 정간물의 폐간, 1921년 최고의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블로크(А. А. Блок)의 죽음과 아크메이즘의 창시자 구밀료프(Н. С. Гумилёв)의 총살 등이 있다. 그리고 1922년 안드레이 벨리와 알렉세이 레미조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고리키 등이 여러 이유로 해외로 출국을 한 상태에서 혁명에 찬동하지 않는 인텔리겐치아들이 대대적으로 망명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4. 은시대의 시기규정

    은시대 연극의 미학적, 예술적 기원에 대해서 바비체바는 마이닝겐극단의 러시아 순회공연이 펼쳐진 1885년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27) 마이닝겐극단의 공연은 배우 앙상블 원칙의 확립, 공연의 모든 요소를 단일한 구상 속에 종속시키는 통일성, 군중장면의 완벽한 하모니 등을 보여주며 러시아 예술활동가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며 반향을 이끌어냈다. 특히 스타니슬랍스키는 “작품의 정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연출 기법들”28)에 큰 감화를 받는다. 마이닝겐극단의 순회공연은 러시아연극의 발전에 필요한 과제와 그 전망에 대한 많은 토론과 논쟁을 야기했으며, 1897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러시아무대활동가대회(Всероссийский съезд сценических деятелей)를 거치며 일단락된다. 은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세련된 장식성을 내포한 연극적 표현물이라고 간주하는 비슬로바는 은시대의 출발을 1890년대 전반으로 폭넓게 잡고 있다.29) 세기 전환기는 결산과 새로운 시작의 시기로서, 러시아문학을 비롯해 유럽문화가 고전적 세계관을 마감하고 이후의 예술 발전에 모태가 될 많은 공정과 실험이 시도되는 시기였다. 비록 정확하고 단정적인 시점을 지정하기는 힘들지만, 당대의 예술가들은 모두 자신의 시대가 혁신과 변화의 시기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새로운 예술경향 탐색에 헌신한 그들은 이전의 예술적, 문화적 경향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정신적 체험의 전달에 적합한 예술 언어를 찾아 다양한 실험을 시행했다. 이러한 창조적 실험은 극작술과 무대적 실천에 있어서도 당연히 적용되었고, 그로 인한 격렬한 문화적 변화는 곧바로 삶 자체의 변화로 이어졌다. 비슬로바에 따르면 이런 변화와 혁신의 분위기는 1920년대 연극계에도 여전히 감지되고 있었다.30)

    프롤로프의 경우는 은시대의 개막시점을 러시아 국내적 맥락과 외부의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한다. 그는 세기말이 19세기 러시아 황금시대의 축적물에 의해 거대한 탄성을 부여받던 시기라고 말하면서 1895년을 은시대의 시작점으로 설정한다.31) 이 시기에 즈음하여 고리키의 문학과 체호프의 드라마가 등장하고, 모스크바예술극장이 개설32)되는가 하면, 드라마와 연극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흡입하는 영화예술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유럽의 새로운 연극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에 대한 이념적, 형식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번역본이 러시아에서 출간되기 시작했고, 삶과 죽음, 개인과 집단의 문제 등 철학적 테마들이 대두되었으며, 현대인의 고독, 지식인과 일반인의 정신세계와 심리 등 은시대 연극의 장르구성과 직간접적 관계가 있는 현상들이 하나의 통일된 흐름을 만들어갔다.

    로디나의 경우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사회적 분위기에 입각해서 은시대의 시기를 규정한다. 그녀는 민중의 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는 1898년을 출발점으로 보고 혁명이 발생한 1917년을 그 종결점으로 파악한다.33) 1890년대 말은 사회적 불화와 정치적 절망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공통된 사회적 이념이 상실된 시기였다면, 1900년대 초는 경제적, 사회적 개혁에 대한 요구가 전민중적 차원에서 격렬하게 들끓기 시작했고, 그러한 요구를 수행할 구체적 세력도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구시대의 반봉건적 잔재와 새로운 자본주의적 환경이 배태한 첨예한 모순들로 인해 혁명의 기운이 점차 고조된 시기였으며, 사회적, 이념적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긴장성이 응축되어 현실 자체가 이미 드라마적인 상황이었다.

    은시대의 종결과 관련해서 하자노프는 1913년을 기점으로 은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11년 개혁가 스톨리핀의 사망,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 혁명 등의 연대기적 사건들을 반추해볼 때 은시대의 창조적 역량은 1913년 무렵에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판단한다.34) 반면 바비체바, 비슬로바, 프롤로프 등은 은시대 정신의 약화가 1920년대에 이뤄졌다고 보고 있으며, 특히 스트라시코바는 은시대의 연극적 성과들이 20세기 극작술 전반을 아우르며 포스트모더니즘 실험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한다.35) 비슬로바 또한 은시대 드라마 작품 수가 양적으로는 적지만 20세기 문화적 맥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다음 세대 예술에 가장 의미 있는 효과를 보여주었다고 분석한다.36) 이런 주장들을 종합해볼 때, 은시대는 188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드라마와 무대예술의 혁신을 주도했던 예술적 경향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은시대의 연극 경향이 구체성을 거부하는 특유의 속성과 장르적 비(非)고정성과 ‘장르적 관성’을 극복하기 힘든 태생적 한계37)로 인해 그 생성과 소멸의 연대를 기록하기 힘든 측면은 반드시 지적되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은시대 연극미학이 19세기와의 단절을 위해 선택한 것이 더 먼 과거로서 고대희랍의 비극 형식이라는 점, 그리고 심리주의적 분위기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의 지향성이 19세기 리얼리즘 시대부터 러시아 극작술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점 등은 은시대 연극이 변별성 있는 독자적이고 구체적인 장르로 고착되는 것을 저해하는 요인들이었다.

    8)Вислова, C.94.  9)Там же, C.29.  10)Там же, C.40.  11)Шах-Азизова Т. К. “Введение,” История русского драматического театра: В 7 T. M., 1982. Т. 6. С.10.  12)4대 장막극 중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갈매기>에서 상징주의 드라마를 집필하는 극작가(트레플레프)와 연극에 종사하는 두 배우, 유명한 소설가 등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연극계 종사자들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것은 은시대 연극의 광범위한 개화가 체호프의 예민한 작가적 촉수에 포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3)Ипполит Удушьев [Иванов-Разумник]. “Взгляд и Нечто. Отрывок (К столетию «Горя от ума»),” Современ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Л., 1975. Ронен, 88에서 재인용. 이후 은시대 용어의 기원에 관한 내용은 주로 Ронен을 참조하였다.  14)Пяст В. Встречи, Сост., вступ.ст., коммент. Р. Тименчика М., 1997. С.6-7.  15)Оцуп Н. «Серебряный век», Числа. Сбор. под. ред. Н. Оцупа. Кн. 7-8. Париж, 1933. С.174-178.  16)Вейдле В. “Три России,” Современные записки. 1937. № 65. 인터넷검색(2013. 04. 20) http://kfinkelshteyn.narod.ru/Tzarskoye_Selo/Uch_zav/Nik_Gimn/NGU_Otsup_Servek.htm.  17)이 책에서 마콥스키는 은시대란 용어가 철학자 베르댜예프(Н. А. Бердяев)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혼의 고통과 경계 너머로의 지향이 우리 시대, ‘은시대’를 관통했다."라고 쓰면서, 베르댜예프가 푸시킨의 ‘황금시대’에 견줘 이 시대를 은시대라고 명명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베르댜예프의 어떤 저서에서도 은시대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스파로프(Б. Гаспаров)는 “마콥스키는 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으로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를 꼽고 있으나, 나는 베르댜예프의 어떤 텍스트에서도 그 표현을 찾아낼 수 없었다.”(Ронен, 39에서 재인용)라고 주장하면서 마콥스키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렇지만 베르댜예프가 은시대의 명명과정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베르댜예프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를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русский культурный Ренессанс)라 평가하면서(Бердяев Н. Самопознание. М., 1990. С.129), 이 시기를 삶의 변화와 문화의 혁신이 가능했던 시기로 규정했다. 사실 은시대 초기 연구자들은 은시대란 용어 자체가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가리키는지 불명확하고, 이 시대 예술문학에 어떤 원칙이 내재해있는지 규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은시대란 명칭이 푸시킨 시대의 황금시대 문학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불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마콥스키와 엣킨트(Е. Г. Эткинд), 니바(Ж. Нива)에 오면 은시대란 개념은 황금시대의 아류나 이류의 의미를 벗고 그 자체로 세련성을 의미하는 독자적 용어로 정착된다. 황금시대 이후의 문학, 혹은 황금시대보다 열등한 예술이라는 가치평가적 개념이 사라진 후 은시대란 용어는 베르댜예프가 이 시대를 정의한 ‘르네상스’란 의미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18)Вислова, 4.  19)Бердяев Н. “Русский духовный ренессанс нач. XX века и журнал «Путь»,” Н. Бердяев. Философия творчества, культуры, искусства. В 2 т. Т.2. М., 1994. С.301.  20)Тиме Г. А. “Массовая драматургия 1880-1890-х годов,”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драматургии. Вторая половина XIX - начало XX века: до 1917 г. Л., 1987. С.361.  21)Бялик Б. А. “Драматургия М. Горького,”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драматургии. Вторая половина XIX - начало XX века: до 1917 г. Л., 1987. С.606.  22)Герасимов Ю. “Брюсов и условный театр,” Театр и драматургия. Л., 1967. С.254.  23)특히 브류소프의 연극이론에 깊이 매료된 메이예르홀트의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다.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이 말해도 전혀 틀린 게 아닐 것이다: 러시아에서 발레리 브류소프는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사족을 쓰며 재현하려 안달한 그 불필요한 진실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인물이다. <...> 또한 그는 드라마 무대화의 다른 방식을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다.”(Мейерхольд Вс. “Театр (К истории и технике),” Театр: Книга о новом театре. Сборник статей. СПб.: Шиповник, 1908. С.150, 153.  24)Петровская И. Ф. “Особенности театрального репертуара 1901-1907,” Русский театр и драматургия эпохи революции 1905-1907 годов. Сб. науч. трудов. Л., 1987. С.114.  25)Милюков П.Н. Очерки по истории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ы. Директмедиа Паблишинг, 2007. Т.2, С.320.  26)이 글에 실린 저자들의 미학적 입장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더 이상 극예술이 사회적 문제의식과 연계된 19세기적 극작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즉 사회평론으로서의 연극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편이었다. 이에 반해 같은 해 발간된 논문모음집 『연극의 위기』(『Кризис театра』, сб. ст. М.: Проблемы искусства, 1908)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했는데, 연극의 노골적인 정치화로 귀결되는 내용으로 인해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후 발간된 『연극에 관한 논쟁들』(『В спорах о театре』, сб. ст. М.: Книгоиздательство писателей, 1913)은 지난 10년간의 논쟁을 소모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연극 본래의 가치로 복귀하자는 전통주의적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듬해 발생한 1차 세계대전 때문에 이 논문집은 본의 아니게 1900년대의 격렬했던 연극 논쟁을 결산하는 연구서가 되어버렸다.  27)Бабичева, C.481.  28)Станиславский К. С., Собр. соч. т. 1, М., 1954. С.132.  29)Вислова, C.12.  30)Вислова, C.196.  31)Фролов В. Жанры советской драматургии. М.: Советский писатель, 1957. С.81.  32)1898년 모스크바예술극장(최초 이름은 모스크바예술대중극장이었고, 1901년부터 모스크바 예술극장이란 명칭을 사용한다)의 창설은 세기말 최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 극단의 탄생이나 ‘연극 사실주의’(сценический реализм)의 출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창설은 20세기 연극계의 지형도를 예견하고, 현대적 연극미학의 출현과 예술 전반의 혁신을 예고하는 대사건으로서, 19세기 말 러시아의 예술적, 문화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연극계뿐만 아니라, 유럽연극계도 전반적으로 진보적 사회 위상을 가진 극장의 부재, 부르주아 관객들만 지향하는 극장 세태, 수준 낮은 오락적 작품이 득세하는 현실, 공연 수준의 평균적 하락 등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이러한 연극의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모스크바예술극장을 창설한다. 이로서 러시아 연극사는 전무후무한 도약을 기록하는 새 단계로 진입하고, 모스크바예술극장은 체호프와 고리키의 희곡을 통해 배우예술, 연출술, 공연제작의 새로운 원칙들을 공식화하게 된다.  33)Родина Т.М. “Введение,” История русского драматического театра: В 7 т. М.: Искусство, 1987. Т.7. С.14-15.  34)Хазанов Б. “1913 год,”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ХХ век: Серебряный век. Под ред. Жоржа Нива, Ильи Сермана, Витторио Страды, Ефима Эткинда, М.: Прогресс‐Литера, 1995. С.405.  35)Страшкова О.К “Смыслы и формы новой драмы к истории и теории русской драматургии. Концепция исследования,” Вестник, №35, СГУ, 2003. С.68. 스트라시 코바는 은시대의 연극경향을 대표하는 ‘새로운 드라마’(Новая драма)가 사멸되었다기보다는 1920-1930년대 다양한 연극경향 속에 용해되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새로운 드라마’가 소련 당국의 문학 정책에 의해 사멸했다는 정치적 해석 대신에 장르적 정착을 거부하는 특유의 자체 속성으로 인해 여러 드라마 형식 속에 녹아들면서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36)Вислова, C.13.  37)Страшкова, C.68.

    3. 러시아신극의 개념과 특징

       3.1. 러시아신극의 등장

    19세기 말은 이전의 전통적 세계이해와 세계관과 단절되는 파열의 시대였다. 세기말은 항상 지난 100년간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과 예술적 피로가 평가와 결산의 카오스에 내몰리게 마련이지만, 은시대 세기전환기는 그 강도가 훨씬 더 격렬했고, 그 규모는 훨씬 더 거대했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고전적 계몽철학과 과학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실증주의 사유는 복잡하고 급박하게 변하는 시대상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고, 역사적 진보와 역사발전에 대한 확신, 공동체의 개선과 향상에 대한 기대는 좌절되었다. 과학과 이성을 맹종하는 실증주의 철학에 대한 저항으로 니체의 철학이 득세했고, 유물론적 세계관을 대신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실존주의 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세기말 예술은 파편화된 낡은 세계상을 극복할 새로운 총체성의 확보에 매진하게 되었고, 리얼리즘의 권위에 도전하는 다양한 예술 유파들이 탄생의 맹아를 키우고 있었다. 은시대 예술탐색의 본질은 새로운 미학적 가치와 시대정신을 함유한 통합적 세계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은시대 예술은 새로운 예술미학의 탐색을 충동질했고, 그 핵심은 ‘불가해하고 상대적인 시대의 본질’38)을 표현하는 데에 있었다. 은시대의 연극미학은 기존의 부르주아 문화가 가진 상업주의나 실용주의,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불가해하고 불안정하며 절대적 가치를 상실한 상대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하고자 신비주의와 종교적 아우라에 심취했다.39)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세계이해 대신에 인간과 세계 간의 직관적이고 초월적인 관계 체계를 설정하고 새로 건설될 종합과 통합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려고 했다.

    상징주의가 은시대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그 성쇠를 함께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상징주의 연극이 은시대 연극경향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낡은 예술의 청산과 새로운 예술의 건설이라는 미학적 위기상황은 리얼리즘 연극과 모더니즘 연극 모두 공유하는 문제의식이었다.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은 현실의 변화뿐만 아니라, 변화된 현실에 적합하도록 예술 자체의 변화까지도 요청하게 된다. 현실과 예술의 관계는 변화했으며, 낡은 방법으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하거나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술에 있어서 전면적 개혁의 요구는 새로 모습을 드러낸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리얼리즘 내부에서도 첨예하게 진행되었다. 예술과 현실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연극은 현실 자체를 표현수단으로 삼기에 무엇보다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그렇기에 위기 담론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연극 몰락의 담론은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완전히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불안감이 유발됐고 해결책을 위한 탐색이 충동질되었으며, 곧이어 연극의 발전으로 귀결되었다.”40) 세기말 연극 위기담론 속에서 진행된 은시대 연극미학의 혁신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경향 창조자들의 연극이론, 연출, 극작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 연극 르네상스의 풍미를 형성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은시대 연극 활동가들은 고리타분한 19세기형 리얼리즘을 격퇴하고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극작 형식을 추구했으며, 무대 행위와 문학텍스트 간의 관계, 사실성과 조건성의 문제, 연극과 드라마의 미래, 총체극(соборный театр)과 신비극(мистический театр)의 문제, 철학적, 실존적 개념의 형상화 방법 등의 주제로 다양하고 심도 있는 논쟁을 수행했다. 은시대 연극미학 속에 등장하는 이런 무대·극작 논쟁들은 20세기 연극예술이 떠안은 모든 문제들을 대부분 망라하고 있다. 한마디로 은시대는 연극과 드라마가 정말 사라질 것이냐 존속할 것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와 존재한다면 과연 연극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자기규정의 문제를 내용 자체로 삼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문학·예술이론가들은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은시대의 예술미학에 ‘혁신적 리얼리즘’(обновленный реализм), ‘새로운 리얼리즘’(новый реализм), ‘확장된 리얼리즘’(расширенный реализм), ‘숭고한 리얼리즘’(одухотворенный реализм) 같은 다양한 명칭을 부여하면서 그 본질과 정수를 찾으려 노력했다. 비록 작명 차원에서 리얼리즘의 프레임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향후 네오리얼리즘(неореализм)이란 용어의 등장을 고려해볼 때 이 ‘새로운’ 리얼리즘은 고전적 리얼리즘과도 다르고, 모더니즘 운동과도 일정 부분 교집합을가진 통합적 개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41) 이런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는 연극 미학적 용어가 바로 ‘러시아신극’42)이다. 러시아신극은 구체적 실체를 가진 역사적 개념이긴 하지만, 새로운 창작방법을 지시하는 장르적 구속성을 가지거나 규범화된 창작원리를 소유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신극은 극작술의 혁신 분위기를 체감하고 있던 은시대 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드라마, 즉 무대사건이 전통적인 갈등격화로 치닫지 않고 마감되거나, 외적 사건보다는 내적 심리에 집중하는 드라마를 말한다. 정치적 반동과 자본주의의 모순이 득세하는 세기전환기에는 인간 간의 상호관계가 파괴되고 개인의 고립화가 심화되어갔다. 사회통합이 좌절되고 개인의 주체성이 크게 훼손되자 인간의 품성은 균일화, 표준화되기 시작했고, 갈등과 대립은 회복 불가능한 심연속으로 빠져들었다. 행위의 주동력을 상실한 채 범박한 수준으로 전락한 삶을 사는 개인들의 모습은 드라마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개성을 박탈당하고 행위의 능력과 자격을 상실한 무기력한 삶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행위와 무성격’43)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신극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시대정신을 포괄하는 미학적 용기가 되었다.

       3.2. 러시아신극의 정의와 특징

    은시대 규정의 어려움만큼이나 러시아신극의 규정도 쉽지 않은데, 바비체바는 톨스토이와 체호프를 러시아신극의 선구자로 보고 나이됴노프(С. Найденов)와 고리키, 안드레예프(Л. Андреев), 블로크(А. Блок), 브류소프(В. Брюсов), 레미조프(А. Ремизов) 등의 이름을 그 뒤에 나열하고 있다. 러시아신극을 유럽의 뉴-드라마(New drama)44)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주르체바는 입센, 스트린드베리, 하우프트만, 메테를링크 등 북유럽 극작가들과 함께 체호프, 상징주의 드라마작가들(안넨스키, 블로크, 안드레예프, 솔로구프) 등을 거론하고 있다.45) 바비체바는 러시아신극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1) 심리주의의 심화, 2) ‘영혼의 움직임’에서 시작된 행위의 구축, 3) 전인류적 수준으로 격상된 드라마 갈등과 추상적 철학 범주나 개념을 드라마의 이미지 체계 속에 도입하는 철학화의 경향 등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46) 주르체바는 러시아신극의 극작 특징으로 상징의 사용, 삶의 일상적 흐름과 무사건성, 외적 갈등의 해결불가능성, 상호텍스트성에 입각한 다양한 텍스트 질료 혼용 등을 꼽고 있다.47) 특히 주르체바가 러시아신극을 분류하는 두 가지 범주로 ‘리얼리즘적 상징주의’와 ‘환상적 상징주의’를 거론한 것은 그만큼 러시아신극의 의미규정성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48) 사실 러시아신극 작가들은 극작 원칙에 대한 공통된 관점이 없었으며, 다양하고 모순적인 시도와 실험을 작품 속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모순까지도 드러내는 데에 몰두했다. 응집보다는 확산, 분석보다는 종합, 고정보다는 분리가 러시아신극에 보다 가까운 미학 원칙인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신극의 강령적 선언서인 『연극: 새로운 연극에 관한 책』에서도 필자들은 상호모순적인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메이예르홀트는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메테를링크의 부동(不動)극(неподвижный театр)이 그다지 새로운 기법이 아니라, 고대희랍비극에서부터 존재하던 형식이라고 주장49)하는 반면, 브류소프는 메테를링크의 부동극이 겉모습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다.50) 그 당시 메이예르홀트는 브류소프의 연극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수용하면서 예술적스승으로 숭배하고 있었다.51) 이런 모순이 리얼리즘과 상징주의를 포괄하는 필진구성 중에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메이예르홀트와 브류소프 사이에서 드러났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3.3. 경향의 종합으로서 러시아신극

    흔히 은시대의 문학장을 설명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이 모더니즘의 등장과 그로 인한 리얼리즘과의 대립구도이다. 하지만 은시대 연극 경향을 종합해보면 이런 전통적 관점이 그리 유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세기에 발생한 수많은 문학 유파가 과거의 전통, 특히 휴머니즘과 19세기의 고전적 리얼리즘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결별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20세기야말로 가장 다양한 예술적 전통에 동시적으로 주목”52)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러시아 네오리얼리즘에 관한 연구 성과를 보더라도 은시대의 문학장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결로 보기보다는 둘 간의 결합과 종합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53) “진정한 상징주의는 진정한 리얼리즘과 일치한다.”54)라는 벨리의 지적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대립과 모순의 관계보다는 ‘상호개입과 결합의 관계’55)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신극은 이러한 은시대의 종합적 특징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신극은 유럽의 뉴-드라마와는 달리 리얼리즘 연극계와 반리얼리즘 연극계 공히 전개되었다. 양 측 모두 드라마 창작원칙의 혁신이라는 과제가 놓여있었고, 이와 관련하여 무대공연 체계 자체의 혁신도 병행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신극이 유럽의 영향 하에서 발흥한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 리얼리즘 연극의 전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신극은 이분법적 진영 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난점이 있다. 심지어 바비체바는 러시아신극의 핵심적 특징인 영혼의 활동과 심리주의는 이미 러시아 리얼리즘 드라마 속에서 개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6) ‘영혼의 변증법’이라 불리는 심리에 대한 집요한 추궁은 그리보예도프와 푸시킨의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고골, 투르게네프, 오스트롭스키에 와서는 이미 높은 수준을 달성했다. 수호보-코빌린의 비극적 환상극이나 진지한 심리주의를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시킨 А. 톨스토이의 역사드라마들, 살티코프-셰드린의 드라마 풍자 등은 끊임없는 혁신을 거듭해온 19세기 러시아 드라마사가 심오한 인간 이해와 구원의 열정을 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신극이 견지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철학적 이념성, 숭고한 이상(идеал)의 염원 등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늘 추구하던 가치였고, 실증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그에 대한 예술적 대안은 이미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때부터 이어져오던 러시아적 특성들이다. 한마디로 러시아신극은 입센, 바그너, 니체 등 유럽의 연극개혁가의 사상에 러시아적 심리주의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뉴-드라마 운동은 전유럽적 문화 현상이긴 했지만 러시아신극은 유럽의 최신 극작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립적 방식으로 개성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체호프가 입센의 극작 스타일을 혐오하며 그의 삶에 대한 이해를 폄하했다는 일화57)는 러시아신극이 유럽의 뉴-드라마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의 비중이 더 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38)Журчева, C.4.  39)Там же.  40)Шах‐Азизова, C.9.  41)켈디시에 따르면 네오리얼리즘은 리얼리즘 내부에 존재하는 특수한 흐름이자 모더니즘 운동과도 접점을 지닌 경향으로서, 이전의 자연주의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경향이다: Келд ыш В.А. “Реализм и неореализм,” Русская литература рубежа веков (1890-е – нача ло 1920-х годов). Кн. 1. М., 2000. С.262.  42)‘새로운 드라마’로 직역되는 Новая драма는 조어법 자체가 고유명사로 특화시키기 힘든 일반성을 지닌 용어이기에 ‘신극’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러시아에서는 1960년대, 1990년대(심지어 2000년대 이후에도) 등 새로운 연극혁신이 이뤄진 시기마다 Новая драма란 용어가 등장했기 때문에 역사적 Новая драма를 변별하기 위해서는 억지스럽지만 특화된 번역어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단, 한중일 근대연극사에 등장하는 ‘신극’(新劇)과 혼동의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는 ‘러시아신극’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신극’이라는 개념은 샤흐-아지조바(1966)와 진게르만(1979)에 의해서 소개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Бабичева, С.486. 러시아신극은 용어 차원에서는 희곡을 의미하는 драма를 포함하고 있지만, 모더니즘 연극의 특수한 미학적 지향, 즉 초장르적인 종합적 지향과 삶창조적 실천미학의 차원에서 보면 희곡집필은 곧 작가의 종합적 창조퍼포먼스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공연으로서의 ‘연극’ 개념까지도 포섭한다고 봐야 한다. 이후에 러시아신극 용어는 희곡텍스트와 공연물에 대한 구분 없이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것이다.  43)Костелянец Б.О. Драма и действие. Лекции по теории драмы. М.: Совпадение, 2007. С.36. 러시아신극은 성격의 충돌로 인한 격렬한 갈등과 투쟁이라는 드라마 행위의 전통적 법칙을 파괴시켰다. 예를 들어, 체호프의 <벚꽃동산>에서 의지의 충돌을 의미하는 고전적 ‘행위’는 더 이상 드라마의 구조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벚꽃동산>에서 사건과 갈등을 주도하는 ‘행위’의 주체는 ‘인물’이 아니라, 벛꽃동산이라는 ‘흐로노토프’(바흐친)와 그 시공간에 새겨진 ‘분위기’ 자체가 된다.  44)대략 1890-1914년 사이에 입센, 스트린드베리, 메테를링크, 하우프트만 등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 등장한 사회 드라마를 의미한다. 윌리엄 아처, 윌리엄 포엘,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 조지 버나드 쇼, 할리 그랜빌 바커 등이 그 대표자들이며, 주로 현대인의 도덕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빅토리아 시대 풍의 디테일한 무대 대신에 추상적이고 단순한 무대미학을 추구했다. 영국에서는 그리 응집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터넷검색(2013. 04. 20) http://www.dictionarycentral.com/definition/newdrama.html  45)Журчева, 7-8. 주르체바는 러시아신극을 유럽의 뉴-드라마 운동의 직접적 영향 하에서 형성된 경향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소벤니코프는 체호프를 유럽의 뉴-드라마 작가들과 동렬에 올려놓음으로서 러시아신극이 뉴-드라마 운동의 지류가 아닌 주류 중 한 분파임을 주장하고 있다: Собенников A.C.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символ в драматургии А.П. Чехова: Типологическое сопоставление с западноевропейской «новой драмой». Иркут ск, 1989. С.65.  46)Бабичева, C.486.  47)Журчева, C.23.  48)사실 주르체바의 분류법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는 네오리얼리즘(리얼리즘과 상징주의의 종합) 논쟁을 도외시한 채 러시아신극을 상징주의의 프레임 속에 한정시킬 위험이 있고, 사실성과 환상성이라는 그녀의 분류 범주도 은시대의 전체적 미학경향에 그리 정합적이라고 볼 수 없다.  49)“정적인 극이 요구되는 것이다. 정적인 극이란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연극이 존재했었다. 가장 뛰어난 고대비극들, <에우메니데스>, <안티고네>, <엘렉트라>, <오이디푸스 왕>, <프로메테우스>, <코에포로이> 등은 모두 정적인 비극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소위 ‘줄거리’라 불리는 물적 행위뿐만 아니라 심리적 행위마저 부재했다.” Мейерхольд В. Э.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В 2 ч., М.: Искусство, 1968. Ч. 1, С.125.  50)“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조차도 본질적으로 이 사실(행위 없이는 어떤 드라마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 역자주)을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부동극을 위해서 행위극에 반하는 작품을 많이 썼던 메테를링크의 초기 드라마도 그러하다. 초기 드라마들의 부동성과 무행위성은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모든 인물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시간 내내 동일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 속에는 행위의 가능성이 자라고 있고, 피날레에서는 파국에 의한 결말을 맺게 된다.” Брюсов В. “Реализм и условнос ть на сцене,” Театр: Книга о новом театре. Сборник статей. СПб.: Шиповник, 1908. С.256.  51)메이예르홀트의 주도로 1905년 만들어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스튜디오-극장’은 사실상 브류소프의 이론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당시 메이예르홀트는 스튜디오-극장의 창작원리를 설명하면서 계속해서 브류소프의 이름을 거론한다. 물론 이후에 메이예르홀트는 브류소프가 조건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화시켰다고 비난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1930년 12월 25일에 행한 「‘메이에르홀드극장의 창작 방법론’ 토론회연설」(Мейерхольд В. Э.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В 2 ч., М.: Искусство, 1968. Ч. 2. С.229-240)을 보라.  52)Стеценко Е.А. “Концепция традиции в литературе XX века,”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ориентиры зарубежной литературы XX века. М.: ИМЛИ РАН, 2002. С.52.  53)이때 ‘리얼리즘’은 19세기의 전통적 리얼리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징주와의 리얼리즘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양 극단과도 같다.”라는 안드레이 벨리의 지적에서 보듯이 은시대의 리얼리즘은 상징주의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국내의 네오리얼리즘 연구에 관해서는 송정수(「생성과 통합의 시학」, 『노어노문학』 23(4), 한국노어노문학회, 2011), 이희원(「네오리얼리즘의 과학과 시학의 종합」, 『슬라브학보』 27(1), 한국슬라브학회, 2012), 김홍중(「혁명기 러시아 문학과 네오리얼리즘」, 『노어노문학』 23(1), 한국노어노문학회, 2011)을 보라.  54)Белый А. Символизм как миропонимание. М.: Республика, 1994. С.372.  55)Михайлов А.Д. “Особенности литературного процесса XX в.,” Теоретико-лите ратурные итоги XX века. М., 2003. С.49-50.  56)Бабичева, C.486.  57)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헤다 가블러>의 연습을 참관하던 체호프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배우들의 질문에 “이보세요, 입센은 정말 극작가도 아닙니다.”라고 응수한다(Ста ниславский К. С. Собр. соч., т. 5, с. 343). 또한 <들오리>에 대해서는 “입센은 삶을 몰라요. 삶에서는 저런 식으로 되지 않아요.”(указ. соч., 352)라고 말했다고 스타니슬랍스키가 전하고 있다.

    4. 결론을 대신해서

    러시아 은시대의 연극계 지형은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찬란했다. 지리적으로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부분적으로는 모스크바)에서 길게 잡아 4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그라진 현상이었지만, 그 섬광의 강도와 확산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다양하고 심도 있는 실험과 시도들이 넘쳐난 은시대 연극장은 20세기 백년의 연극사를 예언하고 규정한 인큐베이터와도 같았다. 바로 그 인큐베이터 안에서 20세기적 주인공과 20세기적 주제, 문제의식, 갈등, 파국 등이 자라난 것이다.

    은시대는 스타니슬랍스키, 네미로비치-단첸코, 메이예르홀트, 바흐탄고프, 타이로프, 예브레이노프 등 한 시대에 한 명도 힘들 정도로 위대한 연출가들이 무리지어 등장했고, 수를 셀 수도 없는 많은 천재적 작가들이 앞 다투어 극작 활동에 뛰어들었다. 은시대의 극작 및 연출 실험들은 20세기 활동가들에게 영감의 모천이 되어 전세계 연극예술을 꽃피웠지만, 정작 그에 대한 연구는 예상보다는 많지 않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 은시대 연극 르네상스를 탄생시킨 시대적, 정신적, 문화적 배경과 그 양상을 살펴보고, 은시대 연극과 러시아신극의 시기와 개념을 규정하는 문제를 짚어보았다. 이는 은시대 연극 미학 연구의 도입부에 해당하며, 향후 연속적인 연구를 통해 구체적 미학 성격과 철학적, 예술적 특성을 분석하고, 개별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짚어보는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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