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littérature du Siècle des Lumières en France se caractérise avant tout par son aspect philosophique. Les philosophes des Lumières tels que Voltaire, Rousseau et Diderot ont trouvé un support adéquant à la propagation de leurs idées pholosophiques dans la littérature notamment dans le genre musique aussi.
Pour le monde de la musique en France, il y a eu quatre fois de querelle de l'opéra. Surtout la querelle de Bouffons est très célébre comme le symbole de la querelle du 18ème siècle. Pour cela, Pourquoi la querelle de Bouffons a bouleversé toute la France au siècle des Lumières? En revanche pourquoi les autres querelles de l'opéra n'a pas provoqué des réactions sérieuses? Quelle est la différence entre la querelle de Bouffons et les autres querelles? Voilà, c'est le point du départ de notre travail dans cet article. Afin de bien analyser la situation au sein de la querelle de Bouffons et les autres, il faut bien étudier sur la situation politique et celle de sociale du 18ème siècle en France. Rousseau et Rameau sont l'un des plus grands compositeurs français au millieu du 18ème siècle, mais ses opéras et ses idées faisaient toujours l'objet de débat. Surtout à travert les recherches de Rameau pendant près de 40ans, on peut constater ses efforts énormes pour suivre les systèmes de formules scientifiques même pour l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théorie de la musique. Bien sûr que Rousseau est aussi le même cas. Rousseau, philosophe et dramaturge, a eu pour vocation de substituer la morale religieuge et traditionnelle par une morale laïque, dite moderniste. Le projet du drame et celui de
D'abord, Rameau, son premier oeuvre,
프랑스 역사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은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18세기를 꼽는다.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에 영향력과 파워를 과시했었던 절대군주이자 태양왕으로 군림했었던 루이14세(1638-1715)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계몽사상(philosophie des Lumières)이 확립되었고 새로운 시민계급이 대두됐으니 이를 18세기의 획기적인 변화중 하나로 꼽아도 큰 무리가 없다. 절대 권력과 함께 문화, 예술의 애호가였던 루이14세는 예술가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과 함께 적극적인 문화, 예술 활성화 정책을 유지했었다. 18세기 들어 이런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프랑스는 정치, 사회, 문화예술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가 바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꽃피기 시작한 18세기였다. 이처럼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18세기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프랑스 음악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거셌는데 루이 14세 시절부터 확고한 자리를 잡아온 프랑스 전통을 중시하던 고전주의자들과 계몽주의 영향아래 백과전서 발간에 관여하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갈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18세기 초반인 1703년부터 시작된 음악계의 논쟁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바람을 타고 18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1752년 파리에서 공연됐던 이탈리아의 페르골레지(Pergolesi)의 오페라 작품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1)로 인해 프랑스 음악계는 ‘프랑스 오페라가 우월한지’ 혹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우월한지’를 놓고 뜨거운 논쟁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논쟁을 흔히 ‘부퐁논쟁’(La Querelle des Bouffons)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부퐁 논쟁은 백과전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기득권으로 군림하던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결함을 논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프랑스 오페라의 단점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대급부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언급하게 됐으며 이것이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처럼 오페라를 둘러싼 갈등은 과거의 논쟁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물론 철학적, 정치적 그리고 사상적 요인까지 포함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이 논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다양한 논쟁 관련 서적을 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부퐁논쟁이 단지 음악적 논쟁만이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8세기 미학사와 철학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던 나라가 프랑스였기에 음악미학의 주요 문제들도 프랑스에서 주로 논의되었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부퐁논쟁을 비롯한 여러 차례에 걸친 음악적 논쟁이 벌어졌던 것인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음악에만 한정됐던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는 당시 떠오르는 사상이었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초한 정치관과 철학관 그리고 당대의 미학관들이 ‘오페라’라는 가면을 쓰고 경합을 벌였었던 것이다. 즉 당시에 벌어졌던 수차례의 음악적 논쟁2)의 배경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들 사상이 특히 득세했던 시기가 바로 18세기였다. 흔히 18세기의 오페라 논쟁을 말하면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을 먼저 생각하지만 실상 18세기 초부터 있었던 논쟁은 부퐁논쟁 한 번만이 아니고 한 세기 동안 무려 4차례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1752년부터 벌어졌던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이 철학가, 음악가, 백과전서파의 일원인 루소와 기성 프랑스 음악계의 유명인인 라모의 대립3)으로 말미암아 유명했는데 이 시기는 프랑스에서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로 인해 가장 치열한 사상적, 정치적 다툼을 벌이던 시기였기도 했다. 또한 1752년 부퐁논쟁이 촉발되기 몇 년 전인 1751년 백과전서4)의 첫 번째 발간이 이루어져서 1772년까지 이어지게 됐는데 백과전서의 이런 등장도 역시 부퐁논쟁5)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음악적인 이유뿐만이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여러 차례의 오페라 논쟁 중에서도 유독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은 그토록 치열했었고 나아가 음악계 논쟁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됐는데 과연 당시 음악적인 요소 외에 어떤 사항들이 이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본 논문은 출발한다. 18세기 초반인 1704년과 1733년에도 부퐁논쟁과 비슷한 음악적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당시는 별 문제가 없이 순조롭게 지나갔는데 왜 유독 1752년의 논쟁은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까 하는 의문도 역시 중요한 출발점이다. 미리 언급한다면 1752년 당시는 프랑스 정치계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파리고등법원 사이에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퐁논쟁이 그토록 치열했었던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또한 본고에서는 부퐁논쟁의 상징이기도 한 라모와 루소는 왜 서로 반목했었는지, 그리고 그런 치열했던 음악적 논쟁의 배경에 어떤 정치적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음악적 논쟁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장이 될 것이다.
1)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는 오페라 부파의 선구적 작품이자 유럽의 다른 희극 오페라들의 발전에 촉매 역할을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1733년 그의 오페라 세리아 <자랑스러운 죄수Il Prigioniero Superbo>의 막간극으로 작곡되어 8월28일 나폴리의 산 바르톨로메오(St. Bartolomeo)극장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후 이 작품은 1752년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다시 공연되어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2)이경희, 계간 『낭만음악』, 제12권 제2호 2000년, 봄호, 5, 음악사에서 ‘오페라 논쟁’이라고 하면 누구나 ‘부퐁논쟁’을 쉽게 연상하지만 실상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들어 4차례의 오페라 논쟁을 겪게 된다. 이 4차례 오페라 논쟁의 성격은 물론 계기와 사람들도 달랐다. 각각의 논쟁의 중심인물도 달랐는데 1차 논쟁은 라그네(Raguenet)와 르쎄르(Lecerf), 2차 논쟁은 륄리(Lully)와 라모(Rameau)가 중심이었고 3차 논쟁, 즉 부퐁논쟁은 루소(Rousseau)와 다시 라모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으며 이들 논쟁의 결과로 결국 글룩(Gluck)과 피치니(Piccini)의 4번 째 논쟁에 이은 오페라 개혁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3)재인용, 강희석, 『프랑스학 논집』, 제77집, P.3, 1733년 10월 1일 왕립음악아카데미에 의해 팔레 루아얄에서 초연된 <히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충격이었다....중략... 막이 오르자마자 겨우 들릴만한 소리가 입석에서 생기더니 점점 더 커졌다는 당시 증언처럼 공연은 순조롭지 않았다. 공연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는데 라모는 륄리가 그토록 많은 세월 동안 구축해 놓았던 것, 확고한 것으로 생각했던 프랑스 오페라를 파괴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쟁은 1737년에 이르러 더욱 격렬하게 활기를 띠게 되며 그 와중에 라모는 인기 있는 작곡가로 부상한다. 대단한 창작력을 보이며 전성기를 보낸 라모는 1752년부터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의 파리 공연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4)백과전서와 백과전서파 : 프랑스에서 『백과전서Encyclopédie』의 집필과 간행에 참여한 계몽 사상가들의 집단을 백과전서파라고 불렀고 이들이 만든 책이 백과전서였는데 과학, 기술, 학술 등 당시의 학문과 기술을 집대성한 대규모 출판 사업으로 1751년 제1권이 출판되고, 이어 1772년까지 본문 19권, 도판 11권의 대사전이 완성되었다. 5)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의 프랑스 공연을 계기로 프랑스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격론이 벌어졌으며 1752년부터 1754년까지 2년 동안 프랑스 음악계를 양분했던 치열했던 논쟁이었다. 음악계는 물론 프랑스 왕정까지 나서서 두 파로 나뉘어졌는데 루이15세를 중심으로 퐁파두르 부인, 프레롱 등이 중심이 된 프랑스 오페라파와 루소를 비롯해서 디드로, 돌바크, 그림 등 당시 백과전서파들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 오페라파로 양분되게 됐다. 흔히 친왕파와 친왕비파라고도 불렸던 이 논쟁은 오페라를 포함한 음악만의 문제가 아닌 근대파와 고대파의 논쟁과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내포하고 있었던 다툼이었다.
18세기 중반의 음악적 논쟁과 배경을 살펴보기 전에 18세기 이전 프랑스 음악계에 관한 동향을 볼 필요가 있다. 절대왕정의 약화와 몰락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확산과 합리주의, 정치권과 철학관의 변화가 결국 정치, 사회는 물론이고 음악계의 변화를 촉발시켰는데 그렇다면 18세기 이전 17세기 프랑스 음악계의 동향은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7세기 중반이었던 1660년경 이전까지는 프랑스 오페라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도 오페라가 아닌 비극이나 혹은 비희극에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프랑스 음악계와 연극계의 반응은 조금 과장하면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에 관심을 갖는 자체만으로도 프랑스 비극과 비희극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졌던 게 사실이었다. 17세기 당시(1677) 나왔던 오페라에 관한 책으로서 가장 유명했었던 셍테브르몽(Saint-Evremont)의 『버킹검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à la Duke de Buckingham』를 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 대한 차이점과 비교를 언급하면서 궁극적으로 프랑스에서 오페라를 선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프랑스의 최고 인기 장르중 하나인 비극을 직접적으로 망치고 있다고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할 정도였다.6) 특히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오페라는 기존 연극에 비해 기계장치를 많이 사용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기계장치의 사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작 연극의 내용이나 진행 등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한 편의 극 안에 음악이나 노래가 끊임없이 들어있는 것도 기존 연극에 비해 오페라를 높게 보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서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는 특히 극 안에 들어있는 음악의 존재와 함께 매우 낮게 취급되었었다.
18세기 들어 계몽주의의 활성화로 인한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변화는 프랑스 연극의 경우 17세기까지 많은 각광을 받았었던 비극이 몰락하고 대신 그 자리를 새로운 장르인 ‘드람(drame)’이 채우기도 했다. 문화의 경우 계몽주의로 인한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이고 다양한 변화는 프랑스 음악의 변화로도 나타났는데 특히 오페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7세기, 루이14세 시절 인기를 끌었던 것은 궁정에서 행해졌었던 궁정 오페라였는데 흔히 ‘서정비극(Tragédie Lyrique)’ 이라고 불리던 그것이었다. 당시 이 장르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극의 처음 시작부터 온통 루이14세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그 서막을 열었던 것이 큰 이유가 됐다. 루이14세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칭송, 왕의 찬란한 위업, 고귀한 신분 그리고 극적 소재의 선택, 고귀한 신분을 가진 등장인물 게다가 루이14세가 좋아하고 친히 배우까지 했었던 발레가 나오는 궁정 오페라의 전형을 잘 보여줬기에 17세기 당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17세기 연극에서 루이14세를 찬양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됐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절대왕정의 권위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절대왕정의 영향력이 정치는 물론 문화 전반에 까지 공고하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큰 인기를 끌었었던 궁정 오페라였던 서정비극도 18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비껴갈 순 없었다. 18세기 들어 공고했던 절대왕정의 권위가 도전받게 되자 당장 연극과 오페라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왕에 대한 찬양이 서막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7) 이처럼 18세기 들어 새롭게 시작된 절대왕정의 약화와 몰락 그리고 계몽주의에 의한 시민계급의 대두라는 정치적 변화 앞에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서정비극도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들어 변화한 새로운 음악의 변화는 18세기 내내 지속, 유지됐으며 특히 4차례에 걸친 오페라 논쟁은 음악가들은 물론이고 귀족이나 정치가, 철학가등 당대 지성과 상류층을 상징하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폭넓은 논쟁으로 비화했다. 이같이 오페라에 관련된 음악가들뿐만 아니고 당시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음악적 논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음악적 상황은 물론이고 당대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그런 논쟁을 유발시켰고 많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극이 우선이냐’ 혹은 ‘음악이 우선이냐’ 같은 음악적인 문제를 놓고 벌어졌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외국인들까지 가세하는 전 국가적인 문제로 확대됐다. 이탈리아의 희극 오페라였던 ‘오페라 부파(Opéra Buffa)’가 여러 나라들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프랑스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를 야기했다. 흔히 프랑스 궁정오페라의 막과 막 사이에 공연하는 막간극의 형태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가 들어갔는데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신성한 왕권의 권위에 대한 불손과 도전으로까지 여기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오페라 부파의 특성을 이해하면 된다. 흔히 오페라 부파는 극의 내용이 희극적이면서 익살스러운 풍자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형태의 극이다. 이처럼 오페라 부파가 제시하는 가벼우면서도 풍자성이 강한 스타일과 내용의 단순함은 당시 사회적 변화와 개혁 그리고 진보를 염원하던 프랑스 백과전서파를 비롯한 대중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는데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특히 이런 분위기는 더 나아가 프랑스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전반에 대한 일종의 자아비판을 요구하면서 갈등의 싹이 커져갔다. 특히 프랑스 오페라를 이끌던 라모의 작품들을 비롯해서 프랑스 음악에 대한 그림(Friedrich Melchior Von Grimm) 의 비판이 가해지게 되면서 문제가 더욱 커지게 됐다.8) 루소를 비롯한 달랑베르 그리고 디드로 등이 주축이 된 프랑스 계몽주의의 흐름 안에서 음악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직접 음악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으며 특히 마블리의 경우 오페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은 프랑스 음악이론에 대한 초석을 놓았던 라모의 음악체계9)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며 논쟁을 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유독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친 것은 다른 나라들보다 유난히 강했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계몽주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국 18세기 들어 이러한 오페라를 위시로 한 음악의 변화와 논쟁은 궁정 오페라의 몰락을 틈타 계몽주의의 득세와 함께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10) 라는 일명 18세기의 프랑스 국민 오페라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의 18세기는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고 음악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 중심에 바로 오페라에 대한 치열했던 논쟁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6)이경희, 「18세기 이태리 오페라 미학」, 『음악과 민족』 제19호, 민족음악학회, 2000, p. 196. 7)Cuthbert Girdestone, Rameau, sa vie, son oeuvre, ouvr. cit, 1997, p.142, 왕의 찬양으로 극의 서막을 장식해야 한다는 오랜 전통은 1733년에 와서는 더 이상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왕의 찬양이 차지했던 자리는 고대 신화속의 인물이나 우의적 인물들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돼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그린 짧은 스펙터클이 오페라 앞에 오며 서막을 장식하였다. 8)Charles B. Paul, Music and Ideology : Rameau, Rousseau and 1789, 『 Journal of the Ideas』, 1981, p. 396. 9)Journal de Trévoux(1722), p. 1734. 당시 라모의 음악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화성학이론 Traité de l'harmonie(1722)'으로 데카르트적인 관점을 갖춘 것이었다.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라모에 대해 과학자이면서 악기 발명자이기도 했던 베르트랑 카스텔 신부는 “자연은 라모가 숫자로서 발견한 그 체계를 우리에게 주었다”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10)스티븐 페팃, 『오페라의 유혹』, 이영아 역, 예담, 2004, P. 37, ‘오페라 코미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것은 18세기 초반인 1715년이었는데 부퐁논쟁이 시작된 후에 작곡된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는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오페라 코미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에 가까운 이 오페라는 신이나 왕보다는 변변찮은 보통 사람들을 주로 이야기 했다. 그 후 약 50여년 동안 오페라코미크는 오페라계를 완전히 장악했고, 과거에 있었던 희극적인 요소는 점점 그리고 많이 줄어들었다.
부퐁논쟁을 비롯한 오페라 논쟁은 음악적 우월성에 대한 논쟁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내용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는 말을 위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17세기까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던 음악적 논쟁이 유독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표면화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17세기에는 별로 부각되지 않았었던 음악적 논쟁이 18세기 들어 이처럼 표면화됐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양한 이유들 중 가장 비중 있는 것은 역시 비록 음악극을 소재로 했지만 그 바탕에는 17세기 내내 공고했었던 절대왕정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에 원인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부퐁논쟁의 시작이 18세기 초반인 1740년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힘입은 백과전서파들이 프랑스 궁정오페라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음악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오페라의 논쟁은 실상 정치적으로는 ‘왕비파(Coin de la reine)’와 ‘국왕파(Coin du roi)’의 다툼이기도 했는데 왕비파는 루이15세의 왕비를 선두로 백과전서파와 계몽주의 사상가들 그리고 신지식인들이었고, 국왕파는 루이15세를 위시로 한 그의 애첩 퐁파두르 그리고 17세기 내내 기득권층이었던 귀족들과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 논쟁은 또한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있던 백과전서파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입장에 있던 구시대 세력(Ancian Régime)의 알력이기도 했다.11) 그렇다면 여기서 살펴볼 것이 루이14세 시절부터 강력한 권위를 구축했었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만약 절대왕정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공고해졌다면 혹은 17세기를 지배했던 기득권 세력의 힘이 그대로 유지됐다면 프랑스 음악계에서 치열한 논쟁과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논쟁이었던 부퐁논쟁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절대왕정의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가 18세기 들어 가속화되며 종국에는 음악분야에서의 논쟁으로 까지 연결됐으니 절대왕정의 약화와 영향력의 감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음악적 논쟁의 중요한 배경이 됐던 절대왕정의 기세와 권위가 무슨 계기로 인해서 흔들리게 됐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은 18세기 음악적 논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면을 보면 프랑스는 큰 변화를 맞이했는데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루이14세의 퇴장과 루이15세(1710-1774)시대의 개막이었다. 루이15세가 어려서 오를레앙 공 필립(Louis-Philippe d'Orléan, 1725-1785)의 섭정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섭정이라는 권력을 잡은 오를레앙은 루이14세와는 다른 정치적 선택을 했는데 절대왕정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기존 귀족층의 정치적 권리와 권한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또한 왕궁을 루이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에서 파리로 옮겼는데 이것은 다른 의미로 과거의 강력했던 왕궁, 즉 절대왕정의 약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오를레앙의 섭정시대는 루이14세의 절대왕정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귀족들의 권한 축소에서 새로운 시대의 자유와 잃었던 권리의 회복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를레앙을 비롯한 섭정 세력들과 귀족들의 정치적인 무능이었다. 이들의 무분별한 방종, 쾌락주의, 정치적인 무능은 프랑스 국민들의 실망감으로 표출됐고 결국 왕정과 교회세력 같은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처럼 절대왕정의 상징이 사라진 프랑스에서 곧바로 이어진 섭정이라는 새로운 정치는 프랑스인들에게 일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자 시작이 됐으며 이런 시대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인해 공고하던 절대왕정이 급속히 약화되고 몰락하게 됐던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궁핍함인데 경제적인 문제, 즉 국가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겪은 재정적 어려움은 루이16세(1754-1793)의 재위 기간이었던 18세기말로 갈수록 더 심각해졌지만 루이15세와 루이14세 시대부터 시작됐었기 때문이었다. 루이14세가 권력을 휘두르던 당시에도 전쟁으로 인한 재정악화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궁핍을 가져왔었고 이것은 결국 절대왕정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은 오를레앙의 섭정이나 루이15세의 통치기간에 해소되지 못했으며 점점 어려워지던 프랑스의 재정악화는 루이16세 시대에 즈음해서 심각해졌던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한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갔고 막다른 궁지에 몰린 루이16세가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세금개혁, 즉 조세개혁이 유일했는데 이 카드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층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 중 불과 2프로가 채 되지 않았던 특권층은 물건 구입에 대한 세금감면 등 면세와 같은 특혜를 누리면서 부와 명예를 독식하고 있었다. 반면 인구의 98프로에 해당하는 평민들은 먹고살기도 어려운 상황에 무거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기에 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낼 모임(삼부회)에서도 종교인, 귀족 등 1, 2 계급과 달리 평민들이 속한 제3 계급은 원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할 방법이 평민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18세기말의 상황이었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삼부회는 무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소집조차 안 되고 있었다.12) 18세기 들면서 루이14세의 퇴장 이후 왕권의 약화라는 정치적 변화와 함께 심각한 재정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귀족들과 파리고등법원 등의 세력들이 약화되고 있는 왕정의 권위에 맞서면서 급격한 절대왕정의 몰락을 부채질 했던 것이다. 그 외에 사상적인 변화도 절대왕정의 몰락에 이바지 했는데 사상가들은 특권층들의 폐단에 직접 대항하고 잠들어있던 프랑스인들의 의식을 깨우는 작업에 열중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들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정치적인 불합리와 부패한 권력, 귀족들을 비롯한 특권층들의 면세제도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약해져 가는 왕권은 물론이고 권력 집단으로 군림하던 교회세력에 대한 비판까지 하면서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게 됐다. 게다가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가들의 도전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과시하지 못했었던 부르주아 계급들도 지적인 능력, 재물, 기술 등을 겸비하게 되면서 점차로 힘을 기르기 시작했고 이들은 사회에서 의사, 법관, 사업가, 학자등의 직업을 바탕으로 혼란한 사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이 되길 원했었다. 이 당시의 이러한 상황은 루이16세 시절 재상이었던 리슐리외(A. J. de Richelieu)의 말을 들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3) 이처럼 루이14세라는 절대강자의 퇴장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 일어났던 정치적인 변화와 재정적인 어려움 게다가 사상가들이 들고 나온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 앞에 굳건히 유지돼 오던 절대왕정은 약화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됐다. 영원할 것 같던 절대왕정의 권위와 위세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사회 각 부분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불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터져 나오게 됐고 이러한 불만과 다툼은 프랑스 음악계도 피해갈 수 없었기에 18세기 들어 오페라를 중심으로 라모를 지지하던 기존 세력과 루소를 지지하던 새로운 세력 간의 치열했던 논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1)Yoshihiro Naito, Formation des idées musicales de Rousseau- 「Lettre sur l'opéra italien et français, Libertas,」 No 12, décembre 1998, p.204 12)앙드레 모로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기린원, 1994, p. 284. “삼부회는 무려 175년 동안이나 정식으로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3 계급은 정치적으로도 완전 배제되었다.” 13)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염무웅, 반성환 역, 창작과 비평사, 2008, p. 20, “루이14세 시대에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못 냈는데, 루이15세 시대에는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나 거리낌 없이 떠들고 있습니다.”
부퐁논쟁은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음악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하게 펼쳐졌었다. 그 이유는 이 논쟁으로 인해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양 되면서 프랑스인들의 애국적 성향까지 개입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음악적 논쟁이 광범위하게 영역을 확대했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고 일반 국민들의 관심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결국 파리가 양분됐고 오페라 극장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넘어섰다는 말이다. 물론 음악적 논쟁이 모두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당시 지식인들 중에서도 음악과 관련한 논쟁을 평가절하한 이들도 있었다. 백과전서파의 일원이었던 달랑베르는 물론이고 노엥빌(Noinville)도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1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하는데 음악적 논쟁을 제공했었던 이탈리아 부퐁들의 파리 공연이 1752년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1723년에 부퐁들의 파리 초연이 있었고 1729년 여름에도 역시 부퐁들의 파리 공연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부퐁논쟁처럼 큰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었다. 1752년 부퐁논쟁 발발 몇 년 전인 1746년에도 역시 동일한 부퐁들의 공연이 있었지만 이때도 역시 비록 인기는 얻었고 공연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의 큰 관심과 반향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었다. 이처럼 동일한 이탈리아 부퐁들의 파리 공연을 상대로 프랑스 국민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의 반응이 18세기 초반과 중반이었던 1752년에 이르러 극도로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프랑스 사회는 물론이고 프랑스 국민들의 정신적 변화에 큰 일조를 했었던 백과전서
14)Denise Launay, La Querelle des Bouffons: texte des pamphlets, Genève, Minkoff Repnet, 1973, vols 3, p. 38 재인용.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견해들 때문에 그렇게 적나라한 싸움을 할 필요 없다. 만약 철학적인 의미이거나 아니면 신학에서 중시하는 주요 주제를 가지고 하는 논쟁이라면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음악 아니면 저런 음악 중에서 어떤 음악이 좀 더 재미있거나 아니면 좀 더 재미없거나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닌가?” 15)도널드 그라우트, 『서양음악사』, 민은기 역, 이앤비플러스, 2007, p. 96. 16)김진균, 『음악예술의 이해』, 계명대출판부, 2003, p. 158. 17)Wahl, Jean, 『프랑스 철학사』, 김연숙 역,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87, p. 164. 18)「Journal de Trevoux」, October, 1722, p. 1734. 이헤령, 재인용. 라모의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저술은 음악에서 1722년에 화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Traité de l'harmonie 였다. 과학자로서 악기 발명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카스텔 신부(Pere Louis Bertrand Castel)는 “자연은 라모 선생이 숫자로서 발견한 바로 그 체계와 생각을 우리에게 부여했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19)Launay, Denise, La Querelle des Bouffons; texte des pamphlets, Genève, Minkoff Reprint, 1973, vols3. p.169
프랑스 음악에 대한 루소의 생각을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1750년을 기점으로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1750년 까지는 당대 프랑스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라모를 비롯한 기득권층에 대한 루소의 음악적 반감이 크지 않았는데 이후 루소의 생각이 달라지면서 결국 라모와 피할 수 없는 치열한 음악적 논쟁을 벌이게 됐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서 종국에는 음악적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 의미까지 포함하는 ‘부퐁논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18세기 사상사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루소는 왜 1750년을 기점으로 해서 프랑스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게 됐던 것인가. 왜 1750년 까지는 라모의 음악관(프랑스 음악과 화성의 중요성)에 대해 비판은커녕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양새를 띠었던 루소가 1750년 이후 생각이 바뀌면서 오히려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고 프랑스 음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을까. 또한 루소는 무슨 이유로 1753년 자신의 『프랑스 음악에 대한 편지La
20)J. J. Rousseau, 『참회록』, 박순만 역, 집문당, 1988, p. 8 21)로버트 워클러, 『루소』, 이종인 역, 시공사, 2001, p. 28. 22)이흥수, 『음악교육의 현대적 접근』, 세광출판사, 1999, p, 42. 23)Samuel Baud-Bovy, Jean-Jacques Rousseau et la musique française, Analyses de la société J-J Rousseau, Tome 37ème, 1969-1971, p. 259. 24)『Correspondance Complète de J-J Rousseau』.Edition critique, établie et annotèe par R. A. Leigh. tome I, no, 49. 당시 파리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이자 루소의 새로운 음악 악보법을 심사했었던 사람들은 메랑(De Mairan), 델로(D'Hellot) 그리고 푸쉬(De Fouchy)가 주요 회원들로서 루소에게 질문을 하는 역할이었고 계몽주의자였던 달랑베르는 심사위원들과 함께 자리했으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라모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자문이나 조언을 주로 하는 위치에 있었다. 25)Rousseau, Confessions, Oeuvres complètes. tome I, Paris Gallimard, p. 294, “나의 새로운 악보법에 관한 날카롭고 정확한 반박은 라모의 반박이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라모는 즉시 내 의견의 약점을 간파하고 반박했다. 라모는 “당신의 악보(기호)는 음의 장단을 쉽게 구분하고 음정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좋다. 그러나 이 악보(기호)가 머리를 많이 쓰게 한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머리가 연주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기존의 악보 위치는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악보의 경우 나는 쉽게 악보를 읽을 수 없다. 당신의 악보가 말하는 숫자를 하나하나 주워 나가는 것 외에 눈으로 쉽게 읽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모의 날카로운 지적과 반박에 대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으며 나는 그의 반박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6. 종교적 문제가 야기한 1752년의 정치적 상황과 갈등
위에서 언급했던 장세니즘의 허용여부를 놓고 벌어졌었던 파리 고등법원과 왕실의 대립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왕과 왕실에 대한 종교적 갈등은 종교의 문제를 넘어 왕실의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차원으로 발전하며 정치적 갈등양상으로 번지게 됐다 그러면 장세니즘의 허용으로 인해서 고등법원과 왕실 사이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심각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문제가 됐던 <우니게스투스>칙서에 대해서 파리 고등법원은 프랑스 전통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초인 1714년 고등법원에 등록되었고 1730년, 루이15세 치하에서 교회는 물론 프랑스의 법률로까지 선포되었었다. 이처럼 고등법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왕정이 장세니즘을 금하는 <우니게스투스>칙서를 지지하자 두 세력 간에 갈등과 대립이 생겨났던 것이다. 고등법원의 생각에 이것은 곧 프랑스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전반기 동안 고등법원은 왕실 반대파들을 주동해서 강력한 갈등양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등법원이 주도하던 왕실과의 갈등과 대립이 가능했던 것은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이 왕실에 대한 항명권을 고등법원에 부여했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에 대해 항명할 수 있는 고등법원의 권리는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18세기 초반에 파리에서 사역하던 주임사제들이나 성직자들이 이미 <우니게스투스>를 거부하고 있었다. 종교문제로 인한 고등법원과 왕실의 대립과 갈등은 두 권력집단을 넘어 전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되기에 이르면서 대립은 더욱 심화된다. 프랑스 대중들을 선동해서 왕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왕실은 1730년 파리 고등법원을 추방하게 되고 이런 조치로 인해 프랑스는 7. 라모와 루소가 중시하던 서로 다른 음악적 요소들혼돈과 무질서한 상태로 나가게 된다. 왕실에 의한 강제적인 추방과 진압으로 인한 무질서 상태는 상당히 오랫동안 프랑스 정국의 불안요소로 군림하게 됐고 이런 현상은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 특히 1749년 파리의 대주교였던 크리스토프 보몽Christophe de Beaumont을 따르던 주교들이 가세하면서 갈등은 더 심해지게 된다. 이들 주교들이 들고 나온 것은 미사를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우니게스투스>칙서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해성사 후에 당연히 주는 ‘고백증명서'(Billet de Confession)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왕실과 일단의 추종자 주교들의 행태에 맞서서 고등법원은 왕실의 무분별한 사치와 불평등한 과세계획, 그리고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이유로 더욱 강력하게 맞서기 시작하며 18세기 중반 프랑스 정국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1752년 무렵 고등법원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미사와 고백증명서 발부를 거부하는 것을 프랑스의 공적인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로 인정하는 포고 (arrêtté)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물론 주교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고등법원의 포고에 대해 미사같이 지극히 영적인 것을 문제 삼는다고 해서 반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왕실과 고등법원의 갈등양상이었던 것이 이제는 마치 고등법원과 성직자들 간의 대립처럼 보이게 됐다. 왕실은 고등법원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배후조종자와 다름없었다. 성직자들과 고등법원의 갈등이 격화되자 왕실은 1752년 말, 보몽 파리 대주교를 자신의 영지로 추방하고 이어서 1753년에는 고등법원도 추방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장세니즘의 허용여부를 놓고 벌어졌던 왕실과 고등법원의 대립은 주교들과 성직자들이 가세하게 되면서 일반 프랑스인들의 주목을 끄는 사회적인 갈등양상으로 확대됐는데 사실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왕실과 고등법원의 의도와 저의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실은 주교와 성직자들을 끌어들이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으며 성직자들은 왕실의 편을 들어주는 대가로 왕실에서 제공하는 무상기부금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법원 역시 루이15세 치하에서 마치 불쌍한 제3신분의 지지자를 자처하면서 프랑스인들의 호의적인 여론을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왕실에 맞서 종교,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움직이는 세 축인 왕실과 고등법원 그리고 성직자들의 갈등과 대립은 엘리자베스 쿠에 의하면 비록 30여 년이라는 시차는 있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도 한다.26) 왕실과 고등법원 그리고 성직자들이 벌이는 정치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혼란양상은 정치문제를 넘어 드디어 문화적인 문제로 확대되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디드로의 백과전서였다. 1751년 첫 권이 발간된 백과전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 권력계층 전반에 대한 비난과 분노 그리고 저항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1751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백과전서는 1752부터 1754년까지 대략 일 년에 한 권씩 발간되면서 위압적인 권위로 뭉친 모든 기관이나 제도 그리고 교회의 권위조차도 다시 보게 만들면서 프랑스인들에게 새로운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26)Elisabeth Cook, La Querelle des Bouffons dans la vie culturelle française du 18ème siècle, CNRS, 2005, p. 146.
부퐁논쟁의 양대 상징이던 라모와 루소는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 중시하는 요소들이 상이했고 이런 음악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결국 세 번째 음악논쟁인 부퐁논쟁을 촉발하고 격화시키게 됐다. 1750년 까지만 해도 확실하게 라모의 음악관에 동조하던 루소는 그로부터 2년 후 라모에 대한 동조에서 비난으로 그리고 프랑스 음악 우위에서 이탈리아 음악 우위로 생각의 변화를 보인다. 게다가 알베르 얀센에 의하면 이 당시 루소는 음악과 사상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기도 했다.27) 그렇다면 라모와 루소는 음악적인 어떤 부분을 중요시 여겼었고 왜 그토록 상이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이점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라모는 바로크 후반기에 활발했던 작곡가 겸 음악이론가로 바흐(Bach), 헨델(Handel)과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1722년에 나온 화성에 관한 그의 첫 논문이었던 『자연원리로 환원된 화성론
27)Albert Jansen, Jean-Jacques Rousseau als Musiker, Genève, 1971, p.146. 1750년 겨울 즈음에 루소는 프랑스적인 음악극의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스스로의 생각에 부족했던 음악적 지식과 확고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의 혼란 속에서 강한 내적인 혼돈을 겪고 있었다. 29)『학문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é parmi les hommes, 1754, 그리고 이후에 루소가 쓴 저술에서 그는 인위적인 문명과 인위적인 사회에 의해 망가지고 훼손된 인간의 본래의 본성을 제대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9)Kintzler, catherine, Rameau et Rousseau: Le choc de deux esthétiques, Ecrits sur la Musique, Stockholm, p. 144, 1979. 30)이기홍, 『문학과 음악』, 부산문예, 1984, p. 21. 31)J. W. Bernard, Elèments de musique, théorique et pratique, suivant les principes de M. Rameau, JMT 24, 1980, p. 40. 32)Origine de Sciences, 1762. 33)단순한 화성적 반주와 선율로 이루어진 음악을 중시했던 루소의 음악관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오페라였던 <마을의 점장이 Le Devin du village> 다. 양치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오페라는 춤이나 합창 등의 프랑스 음악의 전통을 잘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잘 접목시켜 많은 음악적 교육이나 음악적 지식을 갖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쉽게 노래하고 접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루소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은 문명이나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과학이나 문명은 인간의 적이라고까지 했으며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는 원인이 문명과 과학의 발전과 완성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문명의 발전에 대한 루소의 생각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특히 그가 쓴 『학문예술론
34)최정웅, 『루소의 교육사상』, 배영사, 1999, p. 35. 35)같은 책, p. 42. 36)Paul Marie Masson, Histoire de la musique I, Paris, Pléiade, 1970, p. 1658. 37)J.J.Rousseau, Lettres du 17 janvier 1749 à Mme de Warens, Correspondance Complète, tome II, pp.112-113.
프랑스 서정 비극이 등장한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의 음악에 대한 우월성 논쟁은 18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될 만큼 중차대한 문제였고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나았다. 흔히 부퐁논쟁이라고 해서 한 번에 그친 줄 알았던 음악적 논쟁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와중에 생성됐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바람을 타고 음악을 넘어 정치, 사회적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됐다.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라모를 비롯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과 이에 맞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루소와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들이 치열하게 맞섰던 부퐁논쟁을 비롯한 무려 4차례에 걸쳐 벌어졌었던 오페라 논쟁은 단순한 음악적 논쟁과 다툼만이 아니었다. 특히 세 번째 오페라 논쟁이었던 1752년의 부퐁논쟁은 다른 논쟁들에 비해 더욱 치열한 다툼양상을 보였고 또한 오래 지속됐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논쟁의 무대로 끌어 들였는데 이것은 당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치열하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부퐁논쟁에 몇 년 앞서 활동을 시작했던 백과전서파들이 이 논쟁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확고한 계몽 사상가이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루소나 디드로, 달랑베르 등의 일명 개혁주의자들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수성을 지지하면서 논쟁에 가세하자 이미 계몽주의에 맛을 들인 대중들이 함께 하게 됐다. 이것은 사실 표면적으로만 오페라라는 음악에 관한 논쟁이었지 실상은 기존에 있던 기득권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개혁의 요구였는데 이것이 바로 비록 표면적으로는 오페라 논쟁이지만 부퐁논쟁이 당시 18세기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18세기 당시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 가던 계몽주의 에 힘입어 다른 분야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 오페라 논쟁에 가세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 음악 전체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실 서양 미학사의 역사에서는 18세기 중반 프랑스 음악의 위상은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그리 우월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1703년, 즉 18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오페라 논쟁과 같은 치열하고 지속적인 이론적 공방을 하면서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 전반에 대한 위상을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8세기 후반을 지나 19세기로 이어지면서는 다른 예술보다 우위에 서게 됐던 것이다.38) 사실 부퐁논쟁에 가세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보면 이런 오페라 논쟁이 음악에 대한 우열을 가리기 위한 다툼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라모를 비롯한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세력은 몰락해 가는 구 귀족을 중심으로 흔히 말하는 ‘앙시앙레짐, 즉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현상 옹호적 입장에 있었고, 반면 루소를 위시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백과전서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백과전서파들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새로운 내용과 규칙을 가진 사회적 진보를 주장하고 원하던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이자 보수주의자들인 프랑스파와 진보세력인 이탈리아파들 간의 치열한 논쟁과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이것이 바로 부퐁논쟁이 단지 음악적 논쟁이 아닌 시대적 산물의 결과로서 갖는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부퐁논쟁이 정치, 사회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어서 부퐁논쟁이 끼친 음악적인 의미와 결과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음악의 내적 성숙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연성과 표현성의 부족, 그리고 언어적인 억양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선율 등 내적인 어려움과 한계에 봉착했던 프랑스 음악극은 18세기 중반 촉발된 부퐁논쟁을 겪으면서 오페라 코미크 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할 수 있었고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오페라를 발전시키면서 프랑스 음악계의 발전 또한 함께 어 우러지게 됐던 것이 바로 부퐁논쟁이 가져다 준 또 다른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38)이경희, 「근대 예술 체제의 성립과정에서 시, 미술, 음악의 위상변화」, 한국예술연구소, 1998, p.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