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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연극 공연의 창발성(Emergenz) Emergenz in der Theaterauffuhrung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연극 공연의 창발성(Emergenz)

Allgemein wird mit Emergenz ein Phänomen bezeichnet, welches plötzlich neu auftaucht, ohne dass es vorhersehbar ist. Obwohl sich für die emergenten Erscheinungen nachträglich eine gewisse Erklärung finden lässt, können sie vor ihrem ersten Auftreten nicht vorausgesagt werden. Der vorliegende Aufsatz zielt darauf, dieses emergierende Phänomen im Theater zu beleuchten, und gliedert sich in folgende drei Teile.

Der erste Teil beginnt mit einer Vorstellung des Emergenzbegriffs und diskutiert ihn, wie er bei Achim Stephan aus unterschiedlichen vorangegangenen Emergenztheorien zusammenstellt worden ist und damit unter dem Aspekt des Verhältnisses zwischen der Mikro- und Makrostruktur weiterhin auseinandersetzt ist. Für Stephan sind am Begriff der Emergenz vor allem die Unterscheidung zweier großer Aspekte von Interesse: Schwacher Emergentismus und starker Emergentismus. Zwei wichtige Eigenschaften, die die beiden voneinander unterscheiden, sind die Irreduzierbarkeit des emergenten Phänomens und dessen Unvorhersagbarkeit. Beide gehören zu den grundlegenden Merkmalen allgemein geltendes Emergenzphänomens und spielen zugleich eine entscheidende Rolle für die theatrale Emergenz.

Zweitens wird der Modus der Wahrnehmung und die Emergenz der Bedeutungserzeugung anhand der Untersuchung von Erika Fischer-Lichte behandelt. Daraus lässt sich schließen, dass die Performativität des Theaters dessen Emergenz verstärkt. Damit fordert die Emergenz des Theaters den spezifischen Modus der Wahrnehmung heraus. Diese Wahrnehmungsmodi veranlassen bei den Zuschauern das Erleben spezifischer Bedeutungen, die nicht von der Bühne her einseitig vermittelt werden müssen, sondern die ihrerseits emergiert werden können.

Die Ko-Präsenz zwischen dem Akteur und dem Zuschauer als bemerkenswerte mediale Eigenschaft für das Theater ermöglicht eine weitere Erscheinung der Emergenz im Theater. Aus der Mitwirkung zwischen den Akteuren und den Zuschauern, also deren Wechselwirkung und Selbstorganisation in der Mikroebene des Theaters emergiert jede Situation und der Verlauf der Aufführung als Makroebene, welche ebenfalls weder geplant noch kontrollierbar sind.

KEYWORD
창발성 , 비환원성 , 비예측성 , 수행성 , 관객 지각 , 의미생성 , 상호작용 , 자기조직화
  • 1. 머리말

    이 논문은 연극 공연이라는 현상 속에서 창발(創發)성을 고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창발은 ‘여러 구성 요소들이 서로 협동하나 그 구성 요소 하나 하나와는 관계없는 집단 성질이’1)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떤 새로운 현상으로 불현듯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emergence’ 독일어로는 ‘Emergenz’로 표기되는 창발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동사 ‘emergere’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물표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어떤 사물이 갑자기 솟아오르는 것’2)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숨겨져 있던 무엇이 미처 예상 못한 상태 에서 갑작스레 출현하는 현상을 일반적으로 창발이라 칭할 수 있다. 물표면 아래를 하부영역으로 물표면 위를 상부영역으로 본다면 어원적 의미의 창발은 하부영역으로부터 상부영역으로 불현듯 출현하는 어떤 현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창발성을 학문적 영역으로 가져와 적용하고자 할 때 이 두 영역은 바로 상위영역과 하위영역간의 관계 개념으로 확장하여 전개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창발 현상은 “하위영역에서 상위영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어떤 것”3)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위영역은 단지 하위영역의 요소들이 모여 있는 체계들”4)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창발 현상 연구는 이 두 가지의 상이한 영역들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 분과 내의 창발성 연구 주제는 바로 그 현상에 근간이 되는 시스템 계들의 미시영역과 거시영역 간의 관계 고찰에서 시작된다.5)

    연극은 일반적으로 종합예술이라 정의될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이미 창발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별 배우들과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인 미시적 요소들은 서로 엮이고 충돌하면서 유기적 체계를 이루는 거시적 영역을 형성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출현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바로 창발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극 현상 또한 미시영역에서 거시영역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불쑥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전후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연극개혁 운동은 서구 연극의 기존 관습인 언어적 표현의 중심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문화적 행사와 타 예술장르와의 결합을 시도하며 연극 표현 양식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이는 연극 개혁 운동가들이 연극을 더 이상 문학의 한 장르로서가 아니라 ‘공연 (Aufführung)’6)으로 생산하고 향유해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노력과 결실은 이후 60년대의 네오아방가르드 운동의 흐름 속에서 재발견되어 다양한 연극 실험들로 발전되고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포스트드라마 연극 양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두 세기를 거치며 발전해온 연극사의 족적은 “진정한 의미에서 수행적 예술”7)이라는 연극의 자기 정체성을 획득해온 역사라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서구 연극사의 전개를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연극의 퍼포먼스화’ 그리고 ‘퍼포먼스의 연극화’의 역사로 주시한 바 있으며 이는 ‘연극의 탈경계화’를 의미하면서 연극 ‘현상’의 미시적 영역을 풍성하게 만든 중요한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극개념의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연극의 종합 예술적 위상이 공고해지는 흐름 속에서 연극의 다양한 미시적 요소들과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연 전반 혹은 그 진행과정이라 할 수 있는 거시적 영역에서 보이는 연극 현상의 창발적 속성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다.

    19세기 자연주의 연극 양식이나 이후 발전한 심리 사실주의 연극 양식이 현실의 재현 혹은 인물 성격 구축의 치밀한 계획과 지난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창발의 순간들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연극은 서로 맞닿은 무대 위 배우와 객석의 관객 간에 일어나는 ‘사건’의 매체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배우와 관객의 공동 현존(Ko-Präsenz)8)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이로 인해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상황들이 예기치 못하게 불현 듯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포스트드라마 이전의 범 연극 양식에서는 작가의 의미나 연출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철저한 계획으로 연극을 완벽히 준비한다고 해도 공연의 내용과 흐름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통제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창발의 순간들을 적지 않게 보여주는 것이다.

    60년대 이후 서구의 실험적인 연극을 포함한 수행성이 강조된 90년대 이후의 포스트드라마적 연극 경향은 뚜렷이 강화된 창발적 속성을 보여준다. 미시 영역 내의 연극적 요소들의 개별적인 행태 및 속성과 공연 전반의 거시영역 간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며 그로부터 야기되는 공연의 진행과 관객 지각 내의 의미 생성은 미처 예측하기 힘들며 돌발적이다. 이는 연극을 구성하고 있는 미시적 요소들과 그 총합인 거시적 공연 현상 간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의 부재가 주요한 기제로 작동하면서 연극 공연을 창발 현상 그 자체로 만들어 주는 듯하다.

    계속해서 연극에서 창발 현상은 배우와 관객 혹은 관객 상호 간의 미시영역과 공연 전체 흐름의 거시영역의 관계 속에서 고찰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창발성 발로의 기제는 상호작용(Wechselwirkung)과 자기조직(Selbstorganisation)의 법칙이다. 집단을 이루는 개별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한 자기 조직을 통해 생성되는 전체 집단의 속성과 진행 향방이 다분히 창발적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종의 “협동현상”9)으로서 배우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과 그들 내의 자기 조직적 과정으로부터 전체 공연 진행이라는 집단성질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우선 창발성 이론이 국내에선 주로 자연과학과 이공계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을 뿐 인문 철학10) 및 사회학 분야에서 관심을 덜 받는 현실을 감안하였다. 이를 위해 인문 철학적으로 창발 이론을 정리한 아힘 스테판 (Achim Stephan)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주요 개념을 별도의 장으로 소개하고 연극 분야와의 접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본 논문의 2장부터 본격적 으로 논의되는 연극 창발성 이해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다음엔 에리카 피셔- 리히테가 관객의 지각과정과 의미 생성 연구에서 거론한 창발 현상을 바탕으로 보다 정치한 논의를 통해 지각과 의미생성의 창발성 개념을 보완하고자 한다. 끝으로 창발 현상의 미시적 요소들의 중요한 특징인 상호작용과 자기조직성을 중심으로 배우와 관객 간의 관계에서 연극의 창발 현상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위와 같이 이 논문에서 창발성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는 동시대 연극을 이해 하는 미학적 접근의 다변화를 꾀하기 위함이다. 기왕의 수행성 미학 논의 과정 속에서 언급되던 창발성 개념을 보완 설명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창발성이 보다 깊이 있고 독자적인 새로운 연극 미학 카테고리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1)최무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책갈피, 2008, 80쪽 참조.  2)Erika Fischer-Lichte, Performativität. Eine Einführung, Bielefeld:transcrlpt Verlag, 2012, p.75.  3)Paul Hoyningen-Huene, “Zu Emergenz, Mikro- und Makrodetermination”, Kausalität und Zurechnung, Berlin:de Gruyter, 1994, p.170.  4)Ibid. p.170.  5)Achim Stephan, “Eine kurze Einführung in die Vielfalt und Geschichte emergentistischen Denkens” Blinde Emergenz: interdiziplinäre Beiträge zu Fragen kultureller Evolution, Heidelberg:Synchron Publishers GmbH, 2000, p.33~47 참조.  6)Erika Fischer-Lichte, Ästhetik des Performativen, Frankfurt am Main:Suhrkamp, 2004, pp.42-57 참조.  7)Erika Fischer-Lichte, “Grenzgänge und Tauschhandel. Auf dem Wege zu einer performativen Kultur” in Theater der seit den 60er Jahren. Gränzengänge der Neo-Avantgarde, Tübingen,Basel:Francke, 1998, p.11.  8)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의 저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연극이론과 관련하여 처음 언급된 공동 현존(Ko-Präsenz)이라는 용어는 피셔-리히테의 수행성 미학 논의에서 그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국어 번역인 ‘공동 현존’은 심재민의 논문을 근거로 사용한다. 심재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수행성, 현상학적인 몸,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77쪽.  9)최무영, 앞의 책, 80쪽.  10)재미 철학자 김재권에 의해 정립된 심신 수반 이론과 관련하여 창발적 속성이 거론되곤 하나 창발 이론에 관해 철학적 관점에서의 본격적인 연구는 필자의 부족함 탓인지 국내 학계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2. 창발성의 기본 개념

       2.1. 유기체적 속성

    창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유기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창발성을 야기하는 토대는 유기체적으로 구성된 어떤 시스템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스테판은 시스템들의 일반적인 속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1) 시스템 속성을 시스템 구성요소들이 가지고 있거나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속성은 공기가 팽창한다는 것 혹은 바람이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팽창과 속도라는 현상의 속성은 공기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질소, 산소 등)들이 팽창하고 속도를 내는 속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속성의 예로는 새가 난다는 것 혹은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새라는 전체 유기체가 날 수 있다는 속성은 새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의 속성과 무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 구성요소들의 속성은 전체 유기체로서 사람이 숨을 쉰다고 하는 속성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창발성은 스테판이 제시한 복합적인 시스템들의 일반적인 속성 두 번째 유형에서 발로하는 것이며, 이러한 속성은 유기체적 혹은 총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속성은 기본적으로 자연 체계에서든 인공 체계에서든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 체계를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공 체계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는 예술문화 현상에서도 이러한 속성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연극이라는 ‘시스템’은 다양한 연극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공연이라는 가변적이면서 유동적인 유기체적 현상을 만들어 낸다. 아울러 배우, 무대, 음악, 소도구 등의 개별적 요소 하나하나가 총체 적으로 결합되어 연극 공연이라는 시스템을 구성하지만 그 개별 행태와 속성이 전체 시스템 연극공연의 그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극 시스템은 창발 현상의 기본 전제인 유기체적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2. 창발성의 공시적 관점?미시구조와 거시구조간의 비환원성(Irreduziblitat)

    창발 현상은 공시적 관점인 미시적 구조와 거시적 구조 간의 관계에서 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 경과에 제약을 받지 않은 채 관찰될 수 있는 시스템 속성과 그 구성요소들의 속성 혹은 그 배치인 미시구조 세계의 관계”12)에서 창발 현상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관계에서 창발성을 발로시키는 중요한 기제는 두 구조 간의 비환원성(Irreduziblität)을 꼽을 수 있다. 거시적 구조라 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은 그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미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테판에 의하면 이 두 구조 간이 환원적이라는 의미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성립한다.13) 첫째로는 거시적 구조인 임의의 시스템 S의 속성 E가 시스템 S를 구성하는 미시적 요소들과 연역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거시적 구조 시스템 속성 E는 미시적 구조와 환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S가 E를 가지고 있을 때 E가 S의 구성요소들의 행동과 속성들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는 첫째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시스템 S의 구성요소들이 독립적으로 혹은 다른 시스템 S-1 내 에서 보여주는 행동에서 그들이 S 내에서와 동일한 행동과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독립적이든 혹은 다른 시스템 S-1 내에서든 그 구성요소들은 S로 환원되는 것이다. 결국 S와 다른 맥락에서도 S구성요소들의 행동과 속성을 통해 S가 E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14)

    반면 비환원적 특징은 위와 같은 환원적 조건들을 정확히 반대로 되짚어 놓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스테판은 시스템 구성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미시구조로부터 거시구조로 발로된 현상인 “시스템 속성들이 행태주의적으로 분석 되지 않을 때”15)와 반대로 ‘미시구조 내의 시스템 구성요소들의 행동이나 속성이 거시구조 내의 시스템 그것과 비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을 때’16) 비환원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시스템 S와는 다른 S-1의 상태 속에 놓여 있는 S의 구성요소들이 보여주는 행동에서 그들이 원래 S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속성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원칙적으로 밝혀지지 않을 때 시스템 S의 속성 E는 S-1에 놓여 있는 S의 구성요소들의 행동이나 속성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다시 말해 비환원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미시구조와 거시구조 간의 공시적 관계에서 상호 간에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채 발로하는 현상들은 정확히 계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처 예견되지 못한 채 떠오르는 창발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시적 관점의 미시적 거시적 관계의 비환원성은 이와 같이 창발성의 중요한 조건이자 특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시적 창발성의 관점을 연극적 차원으로 적용해 보면 쉽지 않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머리말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수많은 연극적 요소들이 미시적 영역을 이루는 가운데 연극 현상이라는 거시적 속성을 만들어낸다. 공연의 양식에 따라 두 영역 간이 얼마나 환원적이냐 비환원적이냐를 논할 수 있겠지만 동시대 연극 특히 수행성이 강한 양식은 공시적 관계의 비환원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연극적 상황의 논의는 본 논문의 2장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려 한다.

       2.3. 창발성의 통시적 관점 - 비예측성(Unvorhersagbarkeit)

    통시적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는 창발성의 중요한 특징은 “새로운 속성의 본질적인 비예측성(Unvorhersagbarkeit)”17)이다. 이 비예측성 문제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적 창발성 연구 영역에서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우주진화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이전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기대되는 시스템 혹은 그러한 속성들이 예측될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들이 화두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진화과정에서 구조이든 속성이든 그것의 새로운 형태 출현은 비예측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 창발성의 통시적 관점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창발성의 공시적 관점의 핵심 특징인 비환원성은 이미 비예측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스템의 속성으로서 어떠한 현상이 구조적으로 연역될 수 없는 비환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현상의 첫 출현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예측성 문제는 창발성 개념을 연극이론 분야로 적용시킬 때 그 논의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피셔-리히테는 어떠한 현상의 출현이 사후적으로 납득할 만하게 보일지라도 사전에 예측되어질 수 없었다면 창발적이다라는 점에 주목하며 연극 공연에서 계획할 수 없는 가변적인 상황들을 창발성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18) 공연의 양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연극 공연의 비예측성은 무엇보다도 관객의 참여 행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관객의 적극적 개입의 여지를 확대하여 공동생산자(Mit-Erzeuger)19)의 반열까지 올리고자 했던 네오아방가르드 연극 이후의 실험적인 연극의 경우 공연 진행의 비예측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피셔-리히테는 이러한 일련의 공연 양식들이 보여주는 공연진행의 불확정성을 단지 ‘의도된’ 우연과 돌발의 상황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창발성 개념을 통해 확장 논의하고자 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활발히 회자되기 시작한 공연예술의 사건(Ereignis)20) 개념은 창발성 개념과 함께 논의될 수 있다. “사건이란 어떤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면서 일회적이고 되돌릴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을 일컫는다.”21) 사건으로서의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창발 현상을 그대로 경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건’은 돌발적이며 일회적인 것으로써 계획될 수도 통제될 수도 그렇기 때문에 예측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창발 현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피셔-리히테는 연극이 ‘공연 (Aufführung)’으로 정의되는 과정 속에서 “사건”과 “창발성” 개념을 중요한 방법론적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22)

    11)Achim Stephan, op. cit., 2000, p. 16-22 참조.  12)Ibid., p. 35.  13)Achim Stephan, Emergenz. Von der Unvorhersagbarkeit zur Selbstorganisation, Dresden:Dresden University Press, 1999, p. 38 참조.  14)비근한 예로 대한민국 S가 한국 민족성 E를 가지고 있는데 대한민국 구성요소인 한국인이 독일 S-1에서 대한민국 S 내에서 보여주는 행동으로 민족성 E를 똑같이 보여 줌으로써 그의 행동으로부터 S의 E가 증명되는 것이고, S-1에 놓여 있는 S의 구성요소 한국인은 대한민국 S로 환원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시스템에 놓여 있는 구성 요소의 행동과 속성으로부터 원래 속한 시스템의 속성들이 도출되는 것이다.  15)Achim Stephan, op. cit., 1999, p. 68.  16)Ibid. p. 68.  17)Achim Stephan, op. cit., 1999, p. 45.  18)Erika Fischer-Lichte, op. cit., 2012, p. 76 참조.  19)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81.  20)Erika Fischer-Lichte, Performativität und Ereignis, Tübingen und Basel:A.Francke Verlag, 2003 참조.  21)Erika Fischer-Lichte, “Diskurse des Theatralen”, Diskurse des Theatralen, Tübingen und Basel:A.Francke Verlag, 2005, p. 21.  22)Ibid., pp. 21-24 참조.

    3. 연극공연의 수행성과 지각의 창발성

       3.1. 지각 대상의 창발성과 자기지시성(Selbstreferenzialitat)

    연극미학에서 본격적인 창발성 개념의 도입은 에리카 피셔-리히테에 의해서 시작된다.23) 수행성 미학 이론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관객의 지각과정을 통해 생성되는 의미가 창발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피셔-리히테는 “연극의 창발 현상이 자극하는 지각의 특별한 방법”24)을 고찰하여 정신영역인 사유체계 내의 지각과정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의미들의 창발적 속성을 논한 것이다. 연극 공연의 수용적 관점에서 지각방법 혹은 그 과정으로부터 생성되는 의미 수용의 새로운 유형인 창발적 ‘감상’ 과정을 연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각이란 엄격히 말하자면 “어떤 것을 지각해 가는 과정과 지각 속에 놓인 어떤 것”25)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대상과 주관적 의식의 조우야말로 지각현상의 필수 조건이란 뜻이다. 이는 지각 현상이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속성을 후설은 “애매모호함(Äquivokation)”26)으로 표현한 바 있다. 즉 지각이란 주관적인 현상도 객관적인 현상도 아닌 그 사이에 놓인 “간현상(Zwischengeschehen)”27)을 일컫는 말이며 결국 의미가 창발적으로 생성되는 거시 구조에서의 지각 현상은 하부 구조라 할 수 있는 미시영역 내의 지각의 대상과 지각과정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연극 감상의 경우 지각 대상인 연극 요소들의 특성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작용이 창발적 지각과정의 중요한 동인이 된다. 왜냐하면 연극 요소들과 그것이 의식되어가는 지각 과정이 미시영역을 이루는 가운데 전체 거시영역 내의 “지각행위(Akt der Wahrnehmung)”28)를 통해 의미가 불현듯 예기치 못하게 발로 하는 것을 창발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피셔-리히테는 연극의 수행성이 지각의 창발적 속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며 이러한 이유로 수행성 미학을 전개하는 가운데 창발성 개념을 도입하여 관객 지각방식의 새로운 유형과 의미생성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수행성이 도드라지는 연극 ‘현상’은 배우가 등장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 그 자신의 현상적 몸을 부각시킨 채 등장하거나 장면의 흐름 속에 딱히 부합되지 않는 낯설거나 때론 ‘엉뚱한’ 행동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은 채 출현하다 이유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양한 소도구나 소품들이 전체 맥락과 상관없는 듯 무대 위에 놓여 있기도 하다. 피셔-리히테가 이미 수행성 미학에서 자세히 분석했듯이 이러한 연극 연출 패턴은 무대 위에 놓여 있는 모든 대상들의 현상적 물질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가시적 혹은 직접적 무의미성”29)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성이 강조된 연극 요소들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료 자체로 고립된 채 다른 요소들이나 전체 맥락 속에서 연관성을 갖지 못한 채 남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 요소들은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성이 강조되어 가시적 혹은 직접적으로 무의미하게 놓여 있는 연극 요소들은 무엇보다도 물질적으로 드러난 그 기표 자체를 통해 관객의 주의를 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행성 미학의 중요한 특징인 ‘자기지시성 (Selbstreferentialität)’이 되는 것이다. 무대 위의 대상들이 자기지시성을 띤다는 것은 기호로서 대상이 전체 맥락 속에서 지시할 기의가 제거되어 기표만 남게된 대상 자체를 지시함을 의미한다. ‘무의미’하게 놓여 있다는 것은 기존 맥락 속에 놓여 있어야 할 대상을 기표화(Insignifikant) 시키는 것이며 이렇게 기표화 된 대상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지각 방식을 요구하며 그들이 부여할 기의가 생성될 여지를 열어주는 것이다. 자기지시성은 미시구조 내의 연극 요소들 속성 혹은 그 ‘의미’를 고립화 시키는 것이며 전체 공연 진행이라는 거시적 구조에서 떠오른 의미들은 이러한 연극적 요소들로부터 환원되지 못하는 비환원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개별 요소들의 수행적 자기지시성은 창발 현상을 야기한 개별 요소들의 행태 및 속성의 중요한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행성이 강조된 연극은 자기지시성을 띤 연극 요소들의 미시영역과 전체 공연의 거시영역 간의 비환원적 특징을 기제로 한 공시적인 창발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3.2. 지각의 능동성과 창발적 지각의 속성

    다음으로 연극의 창발적 현상이 관객의 지각에 미치는 과정과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인과론적 줄거리 혹은 심리사실주의적 전개 등의 ‘드라마적’ 공연 진행 논리에서는 배우에 의해 표현된 등장인물과 다양한 연극 요소들이 기호 의미론적으로 정확히 그들이 지시하는 의미와 연결된다. 즉 연극의 미시영역과 거시영역이 기호 의미론적으로 환원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생성된 의미들은 관객에게 ‘이성적’ 혹은 감성적으로 납득할 만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관객의 지각과정 속에서 그러한 의미들은 어느 정도 기대와 예상이 가능하며 아울러 지각되어 수용된 의미들의 사슬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러한 연극적 문법에서 벗어난 연극 양식들이 보여주는 연극 요소의 고립된 등장은 드러난 현상 그 자체로 물질성 혹은 일상 속에서 이미 주어진 의미가 환기된 채 관객에게 지각된다. 연극 공연의 맥락 혹은 다른 연극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전체 공연 진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미시적인 개별 연극 요소들이 전체 연극을 거시적으로 구성한다 해도 상호 간에 기호 의미론적으로 비환원적인 것이며 이러한 비환원적인 연극은 일방적인 의미 전달을 방해하며 오히려 관객 스스로 의미 를 떠올리게 하는 지각 방식을 보인다. 피셔-리히테는 “물질성/감각성으로 연극적 수단들을 제한하는 것은 배우들에 의해 조성되는 의미가 방해되지만 관 객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에서 의미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30)고 주목한 바 있다. 수행성 측면에서 야기되는 지각 방식은 관객 스스로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지각의 능동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동적 지각 방식을 통해 생성되는 의미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채 불쑥 떠오르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각된 의미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지각되어 생성된 의미들이 모두 인과론적이거나 혹은 언어 논리적으로 해석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항구 주변을 지나다 멀리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를 지각할 때 그에게 지각된 뱃고동 소리는 단지 ‘배가 입항하거나 출항의 신호’로만 그 의미가 국한되어 전달되지는 않는 것이다. ‘부우우응’이라는 청각적 현상 지각이 그에겐 바다와 관련된 개인적인 추억이나 향수 혹은 누군가 떠나보냈던 경험으로 애잔한 슬픔, 또는 반대로 반갑게 맞이 했던 행복한 감회 등 다양한 감정상태로 불현듯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뱃고동 소리 그 자체의 현상적 지각은 이렇듯 다양한 ‘의미’들을 창발적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물질성이 강조된 연극 요소들은 자기시시적 특성을 통해 현상적인 존재 그 자체로 지각된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감지 혹은 의식되어 관객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함유하는 것인데 “지향성은 어떤 의미로 향한 것을 뜻하며 그 향한 것에서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어떤 것이 그러한 것으로서 형성되거나[…] 조성되는 것이 다”31)라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에 지각 대상인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그 지각 자체에서 이미 의미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현상학적 지각 개념의 관점에서는 대상이 지각된 후 어떤 의미가 부가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각된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의미는 지각 행위 속에서 그리고 지각 행위로서 생성한다”32)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지각된 의미는 특정한 감응과 감정상태를 유발하는 “특별한 감각적 인상들”33)과 관계되는 것이며 ‘뱃고동’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분히 창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3. 잠재된 기억의 돌발적 현재화

    연극구성 장면 혹은 서사적 줄거리의 맥락과 단절, 결여 또는 과잉된 채 등장하는 연극 요소들은 관객에게 전해질 그 의미론적 기호에서 기의가 제거되는 효과가 있다. 기표화 된 연극 요소들은 무대 위에서 물질 자체로서 현현하는 것이며 관객에게는 마치 ‘산만하게 난무하는 기표들의 향연장’처럼 보이면서 그들의 관습적인 감상 과정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의가 맥락 속에서 지각되지 않을 때 자리를 박차고 극장을 나가지 않는 한 관객들은 새로운 지각 방식을 요구 받게 된다. 새로운 지각 과정이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능동적 지각 방식으로서 관객들에게 자신만의 기의를 스스로 생성하게 하고 이렇게 생성된 의미는 다분히 창발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관객 지각 행위 속에서 미시적으로 “각 기표들이 충돌하고 섞였다가 흩어지는 찰나적인 순간들”34) 즉 “양적인 것으로부터 질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창발적 순간”35)을 거시적 영역에서 맞게 되며 이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창발적 의미 생성의 순간을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연상(Assoziation) 과정과도 같은 것이라 보았다. 연상은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생각들이나 감정들이 불현듯 떠오르는 창발적 속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그녀는 “연상들은 기억들로서 예전에 체득한 것, 학습한 것, 체험한 것 등의 아주 특별한 주관적 경험과 아울러 상호 주관적으로 유효한 문화적 코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36)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지각행위 속에서 창발되는 의미들의 기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마찬가지로 엘레나 에스포 지토(Elenea Esposito)는 ‘기억은 창발을 가능케 한다’고 명확히 주지한다.37) 의미 생성의 창발은 무에서도 또는 단순히 전달되는 정보와 같은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과거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순한 과거의 반복을 창발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단순히 반복될 수 있는 현상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떠오른’ 현상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이와 관련해서 슬로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들뢰즈의 ‘반복’ 개념을 재구성해서 창발성의 요소를 새롭게 주목하여 “새로움의 창발은 과거의 잠재성과 현재성 사이의 균형을 변화시킨다”38)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의 창발이란 예측하지 못한 잠재적 과거의 돌발적인 현재화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연극은 관객에게 자신의 과거로부터 잠재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기억들을 돌발적으로 현재화시키는 새로운 연극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창발적 연극 체험들은 무엇보다도 관객 자신의 연상을 통해 떠오르게 되는 생각, 감정 혹은 상념들이다. 관객에게 연상되는 새로운 의미들은 단지 언어로만 표현되어 이해 될 수 있는 이성적 사고과정에만 국한될 수 없으며, 알 수 없이 몸서리쳐지는 기분이든 왠지 모르게 솟아나는 흐뭇한 기쁨이나 즐거움이든 딱히 이유 없이 찾아오는 듯한 다양한 감성적 상태 또한 해당되는 것이다.

       3.4. 연극공연의 창발적 지각

    1952년 네오아방가르드의 실험 연극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존 케이지 (John Cage)를 중심으로 미국의 블랙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 구내 식당에서 공연된 해프닝 <무제 사건(untiteld event)>은 연극의 수행성 미학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연극의 창발적 현상과 그러한 지각 경험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 이 역사적 해프닝은 기존에 간과되어 왔던 연극의 수행성을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연극(공연)을 하나의 ‘사건’으로서 최초로 시도한 중요한 전례로 평가받고 있다. 공연은 별다른 대본 없이 음악, 무용, 미술, 시 등의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어우러지면서 서로 간에 인과론 적인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채 진행된다. 극적 인물이나 허구적인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 장르별 행위들이 자유롭게 동시 다발적으로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줄거리나 극적 의미들이 행위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행위들이 관객의 눈앞에서 단지 수행될 뿐 이다. 행위들이 수행되는 시간의 흐름은 현실의 시간 경과와 동일하며 수행된 공간은 일상의 구내식당이면서 아울러 다양한 예술가들의 협연의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행적 ‘사건’의 현장에서 관객들은 기존의 연극관람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관람의 새로운 양식”39) 또는 관람의 “창의적인 행위”40)를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극적 허구의 인물들이 아닌 실재 행위 자들에 의해 수행된 사건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적 요소나 배우 등의 대상들을 현상적인 “재료”41)로서 지각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공연의 지시적 의미들이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적 행위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은 공연의 지시적 기능과 수행적 기능 간의 팽팽한 긴장을 경험하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무제 사건(untiteld event)>은 각각의 장르별 행위들로부터 그들의 총합인 전체 공연과 혹은 반대로도 기호 의미론적으로 명확히 연계할 수 없는 비환원성과 그로인해 야기되는 공연진행의 비예측성을 보여주는 창발 현상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존 케이지의 해프닝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각 장르의 수행적 행위들은 개별 관객들에게 차별적으로 지각되면서 창발적 지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동인이 되기도 한다. 각각의 행위들과 “돌발적인 조우는 관객에게 다양한 연상들과 성찰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갑작스럽게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42)라고 피셔-리히테는 고찰하였으며 이는 다름 아닌 지각의 창발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전통적인 실내 극장을 벗어나 다양한 공공장소나, 운동 경기장, 공장, 공원 등으로 연극 공간의 선택을 다양화하는 경향을 두고 한스-티스 레만은 ‘원심력을 야기할 만한 매우 큰 공간의 거대한 차원으로 인해 다른 연극적 요소들의 지각을 압도하거나 규정한다’43)고 주목하였다. 1977년 독일 연출가 클라우스 미카엘 구뤼버(Klaus Michael Grüber)가 베를린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개최’한<겨울여행(Winterreise)>은 경기장의 거대한 공간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공간성을 잘 활용한 예가 된다.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은 나치시대의 암울한 기억 혹은 그리스 문화의 찬란한 유산으로서 올림픽에 대한 향수 등의 고유한 장소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고유한 장소성은 연극적 상황의 공간성과 교차되면서 공연 공간의 수행성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유사하게 1970년 수많은 인파가 어지럽게 모여 있는 거대한 광장의 장터에서 프랑스의 태양극단(Théâtre du Soleil)은 프랑스 혁명을 민중적 관점에서 다룬 연극<1789>를 선보였다. 인파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곳곳의 무대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프랑스 혁명 당시의 시공간 분위기를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효과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연극 공간 활용과 관련하여 피셔-리히테는 이미 주어진 또는 그렇지 않다면 다르게 사용될 공간 들의 특정한 가능성들이 연구 시험됨으로써 공연의 수행성 강화를 도모한다고 고찰하였다.44) 다시 말해 현실의 장소성과 극적인 공간성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장소의 느낌과 공간의 인식, 그러니까 여기 존재한다는 느낌과 어떠한 장소에 있다는 인식 간에 균열이 일어나는 일종의 위치분열증(Schizotopie)”45)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각과정이 현실의 장소성과 극적인 공간성 사이를 요동치는 가운데 그로 인해 떠오르는 의미들은 미처 예측되지 못하는 창발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극의 수행성 미학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곤 하는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작,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연출의<햄릿머신(Hamletmaschine)>은 무엇보다도 배우 개인의 육체성과 배역 신체성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행성을 잘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윌슨 연극의 연기양식은 주로 단순한 움직임, 느린동작 및 정지동작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관객들은 팸플릿의 정보를 통해서든 극이 진행되는 전체 과정 속에서든 배우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할 지라도 배우들의 표정이나 동작 그리고 움직임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극중 인물들의 그것으로 혹은 그들의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의 주의는 움직임들의 템포, 강약, 힘, 에너지, 방향 등의 배우 신체 각각의 특별한 물질성 또는 그들의 독특한 육체성에 끌리게 됨”46)으로써 무대 위 배우 개인의 현상적 육체성과 등장인물의 기호 의미론적 신체성을 동시에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 개인의 육체성과 등장인물의 신체성 사이에 놓인 배우들의 독특한 움직임은 기호 의미론적으로 비환원적이고 비예측적이다. 단지 매순간 수행된 그 자체가 현실적인 결과물이며 이런 의미에서 자기지시적이고 현실구성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행성 강화의 과정은 “의미생성의 다원화”47)와 동시에 일어난다고 피셔-리히테가 고찰한 바와 같이 윌슨의 배우연기 양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하여 연상, 기억 그리고 상상 등의 다양한 의미들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기폭제가 된다.48) 결과적으로 수행적 행태와 속성을 가지고 있는 배우라는 연극적 요소는 관객의 지각 속에서 연상, 기억 그리고 상상 등의 다양한 의미들을 창발적으로 생성하게 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으로 회자되는 서구의 공연들에서뿐만 아니라 국내 대학로 소극장 한 귀퉁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시대 한국연극의 예에서도 창발적 지각 과정을 확인 할 수 있다. 극단 퍼포먼스 온, 안정민 작, 남상식 연출의 <빨간 미미>(2013. 9. 정보소극장)는 언어적 표현이 중심이 되어 대체로 이해할 만한 흐름으로 전개된다. 다시 말하면 배우들이 표현하는 등장인물과 사용하는 소도구들 아울러 무대 배경 등 기본적인 연극적 요소들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호로서 기표/기의 관계가 명확한 듯하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추상적이며 다소 ‘엽기적’인 대사와 즉시 이해되지 않는 배우의 ‘엉뚱한’ 행위들 그리고 다의적으로 반복되는 오브제 등이 관객으로 하여금 수동적인 지각을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간고등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 고등어는 하나의 연극적 기호로 일반적으로 기표와 기의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식사장면에서 하나의 반찬 혹은 생선가게를 하는 아버지의 주요 판매 생선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고등어는 수시로 등장하고 급기야 차도 위에서 벌어지는 엄마의 ‘최후 만찬’에도 간고등어 오브제가 등장 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간 고등어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전체 줄거리 상 꼭 간고등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 간고등어를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간고등어의 빈번한 사용은 관객에게 어떤 특정 의미와의 연결을 차단시키고 하나의 현상적 재료로써 간 고등어를 지각하게 하는 자기지시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자기지시화 된 간고등어에 대한 지각은 특정한 감각적 인상을 유발하며 관객의 연상을 자극하고 자신의 기억 속으로부터 의미를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때 간고등어를 차려준 어머니의 식탁이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약간 징그러운 생선이라는 불쾌감이 들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바닷가에서 연인과 먹었던 간고등어의 추억이 생각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경험 속에서 연결된 연상들이 떠오르면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곧 의미구성이 되는 것이다. 수행성이 돋보이는 무대 위 사물이나 몸짓, 소리, 조명의 효과들을 통해서 떠오르는 연상들은 본질적으로 관객 자신들의 경험, 지 식 그리고 정서 상태로부터 야기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예술에 난해 함이라는 평을 더할 때 그것은 해석과 이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각 방식과 그 과정의 낯섦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빨간 미미>에 등장하는 술, 담 배, “어금니에 낀 시금치”, “입에서 나는 고양이 시체 썩는 냄새”, 변비, “침으로 범벅해 버린 반찬”, 썩은 내가 나는 생선 머리 국물 등의 연극적 요소 및 과장된 언어들은 비린내 나는 간고등어와 연결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메스꺼움을 유발한다. 이는 마치 모녀들의 ‘미친’ 정신상태와도 같은 유쾌하지 못한 정서, 즉 공연 전체의 거시적 영역에서 창발된 의미로 공연이 끝난 후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 감각적 인상으로 관객에게 깊이 각인되는 것이다.

    23)Erika Fischer-Lichte, op.cit., 2004, pp. 240~280 참조.  24)Erika Fischer-Lichte. Doris Kolesch. Matthias.Warstat(Hrsg.), Metzler Lexikon. Theatertheorie, Stuttgart.Weimar:Verlag J.B Metzler, 2005, p. 86.  25)Jens Roselt, Phänomenologie des Theaters, München:Wilhelm Fink Verlag, 2008, p. 151.  26)Edmund Husserl, Logische Untersuchungen. Zweiter Band. Erster eil: Untersu-chungen zur Phänomenologie und Teorie der Erkenntnis. Den Haag/Boston/Lancaster:Martinus Nijho.(= Hua XIX/1), 1984, p. 359. (Ibid., p. 151에서 재인용).  27)Ibid.,p. 151.  28)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245.  29)Ibid., p. 243.  30)Ibid., p. 242.  31)Bernhard Waldenfels, Bruchlinien der Erfahrung Phänomenolgie Psychoanlose Phänomenotechnik, Frankfurt am Main:Suhrkamp, 2002, p. 24.  32)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245.  33)Ibid., p. 246.  34)이경미, 「현대연극에 나타난 포스트아방가르드적 전환 및 관객의 미적 경험」, 『한국연극학』 37호, 한국연극학회, 2007, 220쪽.  35)Lucas Marco Gisi, “Von der Selbsterhaltung zur Selbstorganisation. Der Biber als politisches Tier des 18. Jahrhunderts” Schwärme. Kollektive ohne Zentrum. Eine Wissensgeschichte zwischen Leben und Information, Bielefeld:transcript Verlag, 2009, p. 250.  36)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248.  37)Elene Esposito, “Ist ein Gedächtnis der Emergenz möglich?”, Blinde Emergenz? Interdisziplinäre Beiträge zur Fragen kultureller Evolution, Heidelberg:Synchron Publishers GmbH, 2000, pp. 75-86 참조.  38)Slavoj Žižek, Körperlose Organe. Bausteine für eine Begegnung zwischen Deleuze und Lacan, übers. Von Nikolaus G. Schneider, Frankfurt am Main:Suhrkamp Verlag, 2005, p. 25.  39)Erika Fischer-Lichte, “Einleitung. Grenzgänge und Tauschhandel”, in Theater seit den 60er Jahren, Tübingen und Basel: A.Fracke Verlag, 1998, p. 4.  40)Ibid., p. 6.  41)Ibid., p. 4.  42)Ibid., p. 6.  43)Hans Thies-Lehman, Postdramatisches Theater, Frankfurt am Main:Verlag der Autoren, 1999, p. 286.  44)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192, p. 195.  45)Bernhard Waldenfels, Ortsverschiebung, Zeitverschiebung. Modi leibhaftiger Erfahrung, Frankfurt am Main: Shurkamp, 2009, p. 45.  46)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145.  47)Ibid., p. 145.  48)상응하게 로버트 윌슨은 “연극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작품을 주시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해야한다”라고 자신의 연극 관을 피력한 바 있다. Robert Wilson, “Franz Kafka meets Rudolf Heß”, Der Spiegel, Nr.10, Hamburger:Spiegel-Verlag, 1987, p. 205 참조.

    4. 배우와 관객 간의 협동현상―상호작용과 자기조직성

    배우와 관객의 공동현존은 공연매체의 중요한 특징인 동시에 연극에서의 창발 현상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창발적 속성의 중요한 토대인 ‘유기체적 속성’은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개별 구성요소들이 비록 시스템 속성과 그 유형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 구성요소들의 총합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별 배우를 비롯한 개별 관객들의 유기체적 총합인 연극 공연이은 기본적으로 창발성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넘어 ‘공동행위자’로까지 규정하고자 했던 네오아방가르드 운동의 실험 연극이나 퍼포먼스 연극 혹은 동시대 거리극의 거시적 향방은 철저히 배우와 관객 간의 협동현상인 미시적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그들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스스로를 조직해 나가는 자기조직화는 또 다른 연극 창발성 발로의 중요한 기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시적 관계는 배우와 관객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군중’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군중의 형태는 프로이드 의미의 군중49)이 아니라 새로운 군중 행태 이론인 ‘집단 지능(Kollektive Intelligenz)’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 지능 이론의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약간 어리석기까지도 한 개별 행위자들이 복잡화를 이루어서 지적인 집단행동에 이르는가”50)를 연구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연구 대상으로 개미와 벌과 같은 소위 사회적 곤충들이 있으며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인한 SNS 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과 오프라인 현실 속에서의 플래시몹이나 촛불 집회 등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집단의 행태는 특정 통솔자 없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조직해 나가는 협동현상을 그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호작용하며 자기조직화 하는 집단 행태는 “원인-작용-결과 혹은 명령체계 사슬 구조 대신 집단 구성원 상호 간의 자극화”51)라는 기제가 작동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조직화는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하는 소통(자극화)에서 “긍정의 피드백이 있고 없음”52)을 판단하여 끊임없이 부정의 피드백을 제거하고 긍정의 피드백만을 수렴해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렇게 긍정의 피드백이 모아지는 가운데 소위 “더 많으면 다르다(more is different)”53)라는 축적의 논리가 작동하여 ‘현명한’ 선택의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생성되는 ‘새로운 것’은 논리적인 결론이나 인과론적인 결과와도 다른 비선형적, 즉 비환원적이면서 예측할 수 없는 창발 현상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협동현상으로부터의 창발성을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피드백 고리의 자기생산성(Autopoiesis der feedback-Schleife)”54)의 개념으로 연극적 상황에 적용시켰다. 피드백은 되먹임이라고도 불리는데 매달린 추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듯 어떤 현상에서 야기된 결과가 다시 그 현상의 원인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행위자들이 항상 행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영향을 주고 관객들이 항상 행하는 것은 배우들과 다른 관객들에게 영향을 준다”55). 배우와 관객의 관계는 끊임없이 주고받는 피드백 고리의 상호 작용과도 같은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공연은 자기 관계적이고 스스로 끊임없이 변해가는 피드백 고리에 의해 생산되고 조정되는”56) 자기생산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 생산적 피드백 고리 원리가 네오 아방가르드 시기의 실험 연극이나 퍼모먼스 또는 거리극 양식에서 두드러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배우 행위에 반응하는 관객의 행위와 동시에 그 관객 반응 행위에 재반응하는 배우의 행위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공연 진행이 전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공연은 완전히 계획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창발 현상이 되는 것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리처드 쉐크너(Richard Schechner)는 그의 극단 퍼포먼스 그룹(The Performance Group)과 함께 실험했던 연극들을 통해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었다. 예를 들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커뮨 (Commune)>(1970-1972)에서 배우는 공개적으로 공연 중에 관객을 선택하여 베트남의 양민으로 역할 놀이를 제안한다. 역할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갑작스럽게 배우의 제안에 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으며 그 반응의 결과에 따라 배우들은 재반응하며 공연이 진행되었다. 그 누구도 공연의 진행 과정을 독단적으로 계획할 수 없었으며 예측할 수도 없었다. 전적으로 배우와 관객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자기조직적으로 매 순간 공연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상호작용을 통한 자기조직적인 창발성은 위와 같은 서구의 소위 전위적인 연극양식뿐만 아니라 가깝게 한국 전통 탈춤이나 마당극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임진택 연출의 마당극 <밥>(1985 초연)은 배우들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작품 줄거리와 관련하여 관객들을 소도구나 소품 등으로 설정함으로써 관객의 반응을 유도한다. 이에 관객들은 즉각 반응의 웃음과 추임새로 받아치며 배우들을 거듭 자극하면서 공연의 진행을 유동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기본적인 서사 진행의 방향은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그 공연을 채우고 있는 매순간 순간의 상황들은 다분히 창발적인 것이다.57) 이와 같은 야외극 공연들은 배우와 관객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관객들 간의 집단적 정서공감을 통해서도 창발적 속성을 활성화 시킨다. 신명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집단 관객은 개인적으로 고립된 카타르시스의 체험을 미덕으로 하는 서구 전통 연극 관람 행태와는 달리 집단적으로 감정을 공유하며 서슴없는 배우와 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연 개입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단적인 신명을 체험하는 관객은 ‘집단지능’의 기능과 ‘더 많으면 다르다’ 현상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배우와 관객의 공존이라는 미시적 구조로부터 거시구조인 공연의 진행 혹은 그것을 채우는 매 장면의 상황들은 창발적인 것이다. ‘새로움’의 창발은 배우 혹은 관객 개인의 속성이나 행동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오직 그들 간의 상호작용과 자기조직을 통해 생성되어 예측 불가하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연극이 통제할 수 없는 창발 현상이라는 인식은 다분히 역사적 아방가르드 시기의 연극 개혁운동에서 시작하여 네오아방가르드 시기를 관통한 서구 연극이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의 역할을 ‘공동생산자’ 반열에까지 올리는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극사적 발전을 통해 일면 배우와 관객은 연극에서 동등한 주체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주체 들은 완전히 자주적이지도 타자 규정적이지도 않은”58) 채 끊임없이 창발적 상황을 만들어 내며 연출에 의해 ‘계획’되어 ‘예측’될 연극을 교란하고 차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 연극의 중요한 특징이며 새로운 공연 체험 미학의 중요한 기저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9)르봉(Gustave Le Bon)의 날카로운 군중 심리 관찰을 수용하여 전개한 프로이드의 군중심리학에 따르면, 인간 군상은 모이면 모일수록 과도한 동질감을 느끼며 이때 군중 속 개인에게서는 과대망상이 발로하고 이것은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급기야 그 무모함과 아둔함이 극에 달한다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군중 심리는 ‘탁월한’ 지도자에 의해 의도될 수 있으며 더욱 활성화된다고 고찰하였다. Sigmund Freud, “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 Gesammelte Werke. Bd.13, Frank furter am Main:S. Fischer Verlag, 1967 참조.  50)Eva Horn, “Schwärme-Kollektive ohne Zentrum. Einleitung”, Schwärme. Kollektive ohne Zentrum. Eine Wissensgeschichte zwischen Leben und Information, Bielefeld:transcript Verlag, 2009, p. 9.  51)Ibid., p. 10.  52)Ibid., p. 11.  53)1972년 노벨상 물리학 수상자 필립 워런 앤더슨(Philip Warren Anderson)이 창발성 이론 전개를 위해 쓴 소논문의 제목으로 창발 현상의 중요한 조건을 함유하고 있다. 부분들이 모이면 단순한 합이 아니라 그 전체를 뛰어넘는 고유한 속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Philip W. Anderson, “More is different. Broken symmetry and the nature of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science” Science. New Series 177/4047 (Aug. 4, 1972), pp. 393-396 (Ibid., p. 12에서 재인용).  54)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p. 58-125, pp. 281-294 참조.  55)Ibid., p. 59.  56)Ibid., p. 59.  57)80년대 중반 마당극 <밥>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공연될 당시에는 작품의 사회 풍자적 색깔과 정치적으로 억압된 분위기 탓인지 공연이 마무리될 즈음 바로 시위 형태로 이어지곤 했다는 당시 공연 참가자들의 증언이 있다. 이는 그야말로 계획할 수도 예측할 수도 아울러 통제할 수도 없는 창발 현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58)Erika Fischer-Lichte, op., cit. 2004, p. 287.

    5.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새로운 연극 미학의 가능성을 짚어 보기 위해 창발성 개념을 소개하고 연극분야와의 접점을 살펴본 후 이를 바탕으로 기왕의 수행성 미학 논의 과정 속에서 언급되던 창발성 미학을 보완하고 확장해 보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발성은 미시적 구조와 거시적 구조 관계 속에서 출현 하는 현상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가지고 있다. 창발성의 토대는 유기체적 속성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구성 개별 요소의 속성과 그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거시적 영역 내의 집단 성질의 유형이 서로 다르다는 유기체적 속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창발성 시스템의 토대가 중요한 이유는 서로 다른 다양한 장르와 요소들이 유기체적으로 결합하여 거시적 현상을 이루는 연극의 태생적 본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각 학문 분야별로 창발성 이론이 복잡하고 세분화되어 있을지라도 중요한 핵심 특징은 비환원성과 비예측성이다. 다시 말하면 거시영역에서 관찰되는 현상이 미시영역의 개별 구성 요소의 행동, 속성 혹은 현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요소들의 ‘원인’으로부터 거시 영역의 현상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비예측성을 함의하는 통시적 특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속성들을 도드라지게 가지고 있는 공연 양식은 수행성이 강조된 연극 양식과 잘 부합한다. 배우를 비롯한 다양한 연극 요소들의 속성과 행동은 거시적인 전체 흐름 혹은 서사적 진행에 무엇보다도 기호 의미론적으로 환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환원성의 기저에는 전체 맥락상의 기의가 제거되어 기표로 ‘고립된’ 개별요소들이 놓여 있는 것이며 이는 바로 수행성의 중요한 특징인 자기지시성이 되는 것이다. 이 자기지시성은 수행성의 중요한 특징인 동시에 창발 현상과 관련하여 미시영역에 놓여 있는 고립된 개별요소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비환원성이 강한 수행적 장면들의 분절 적 출현은 다분히 예측하기 힘든 창발 현상이다.

    이러한 연극 현상의 창발성을 지각하는 관객은 능동적인 지각 방식을 요구 받게 되면서 의미 생성의 창발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인데 무대 위에서 생성되는 의미들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지각 행위를 통해 창발적 의미 생성을 스스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의 창발 현상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돌발적 현재화와도 같은 연상과정이며 반드시 분석적인 사유과정을 통해 반추되어 언어 논리적으로 묘사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지각 행위가 지각된 어떤 것을 바로 그 어떤 것으로 의미화 시킨다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각된 대상과 동시에 불현듯 밀려드는 다양한 감정 상태 또한 창발적 의미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떠오르는 의미는 지각 대상인 연극적 요소들의 창발 현상, 그것의 지각과정 그리고 주관적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는 미시적 영역에 예속된 거시적 영역인 전 지각 행위로부터 발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연극에서 또 다른 중요한 창발 현상은 배우와 관객의 공동현존 관계에서 발로한다. 배우와 관객이라는 개별 요소들의 미시적인 집단 형태에서 무엇보다도 협동현상인 상호작용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거시적인 공연 상황과 진행들이 창발적 속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집단지능이라는 새로운 군중 행태와도 유사한 것이며 전통적인 배우와 관객의 역할 구분을 지양해 나가면서 동등한 연극 참여자로서 견인하고자 했던 지난 세기 연극사의 흐름과도 맥을 함께 하는 것이다.

    연극이란 희곡을 바탕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배치하고 준비하는 연출의 ‘의도’와 ‘계획’이 존재하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공연되는 연극이 다양한 양식적 조건 하에서 약하든 강하든 창발적 순간들을 보여준다는 면을 고려할 때 연극은 다름 아닌 계획과 창발성이 공존하여 상호작용하는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계획하니 창발의 여지가 주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지난 세기를 관통해 온 서구 연극의 수행성 강화는 곧 창발성 강화의 연극사라고도 볼 수 있다는 점을 이 논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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