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eca, the most influential classical Stoic and Justus Lipsius, the founder of Renaissance Stoicism suggest constancy, an unmovable strength of the steadfast mind based on reason and sound judgment, as a practical way orattitude in life full of both public and private evils. As a member of the Sidney family, Wroth is very much likely to have been influenced in molding her concept of constancy by Senecan and Lipsian Stoicism, which was introduced into England through Sir Philip Sidney’s friendship with Lipsius. This paper explores Wroth’s concept of constancy in Urania as a Stoic ideal in the context of the major Stoic writings of Seneca and Lipsius. While the titular character of the romance Urania shows some inherent attributes of Stoic constancy from the beginning of the romance, Pamphilia as the pattern of constancy gradually perfects the virtue through the ordeals of her love of Amphilanthus and her queenship. Her frequent retirements into private and secluded places are the essential occasions for her disciplining in Stoic constancy through self— examinations of her psychological and emotional disorders and poetry writing. Amphilanthus, a constantly inconstant lover, fully understands the importance of constancy in love as well in life only after his marriage to another woman and Pamphilia’s marriage to another man. At the end of the romance they come to accept the vicissitudes of life in Stoic constancy. In Urania, Wroth transforms the strongly masculine Stoic constancy into a female heroic ideal. Thereby she presents those female characters as important political, ethical and cultural subjects and their constancy as a thread through the labyrinths of love and life.
메리 로쓰(Mary Wroth)는 르네상스 영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드니 가문(the Sidneys)의 한 사람으로, 산문 로맨스와 소네트 연작 그리고 목가적 비희극을 쓴 최초의 영국 여성이다. 특히 로맨스와 소네트 장르에서 로쓰는 두 장르의 전통적인 남성주인공 대신 여성주인공을 등장시키는데, 그녀는 이 성역할 전환을 통해 근대초기 영국 사회에서의 젠더관계, 저자권, 주체 등에 대해 여성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여성주의적 통찰들은 르네상스 영문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그녀가 로맨스와 소넷트에서 제기한 이 문제들의 중심에는 항심(恒心, constancy)1이 있고, 항심은 로쓰에 대한 거의 모든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왔다(Beilin,
항심은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문학에서 빈번하게 다루어진 주제였다. 문학과 예술 분야 뿐 아니라 항심은 격심한 종교적 정치적 갈등들로 인해 부단한 재난과 혼란을 겪었던 근대 초기 유럽인들에게 정치 종교 철학 분야 그리고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되었던 스토아적 덕이요 개념이었다. 항심이 삶의 지침으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은, 스토아주의가 세상, 자연 인간에 대한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련된 삶의 태도 혹은 삶의 방식이었고 그 삶의 방식의 구체적인 덕이 항심이기 때문이다. 항심을 중심으로 하는 르네상스 스토아 사상은 네덜란드에서 립시우스와 친분을 맺은 필립 시드니경(Sir Philip Sidney)을 통해 영국에 전해졌고,3 시드니경이 중심이 되었던 정치적 문학적 동아리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 사상은 1590년대부터 제임스 1세 치하 동안 에섹스 가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의 정치 철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Manning 29). 립시우스적 스토아 사상은 당시 영국의 귀족 지성인들 사이에 상당한 정치성을 가지고 퍼져있었다. 이 점은 에섹스 백작파들에게 불만이 있었던 제임스 1세가 립시우스와 스토아철학에 대해“오만하고 항심 없는 립시우스가『항심론』에서 설득하려는 저 스토아철학의 몰상식한 우둔함”(James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토아철학의 영국 도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시드니가문의 일원으로 특히 세네카와 타키투스(Tacitus)에 매료되었던 아버지(Robert Sidney)를 둔4 로쓰가 스토아철학과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엘렌 램(Mary Ellen Lamb)만이 로쓰의 항심의 스토아적인 요소에 대해 매우 간략히 언급한 바 있을 뿐(Lamb 142, 163-64), 로쓰와 스토아사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당시 대학의 교과 과정, 연구와 논의, 교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문화운동으로 볼 때(Kristeller),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인 로쓰가 인문주의의 여러 사상들 특히 스토아 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알 길은 없다.그러나 로쓰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어서 네덜란드에 있던 아버지는 그녀의 공부를 위해 책을 아낌없이 보내주었고(Roberts,
1“Constancy”는 우리말로 지조, 절개, 불변, 충실, 항구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르네상스 스토아철학에서의 constancy의 개념, 즉 ‘변함없이 충실한 마음의 힘’이란 개념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되는“항심(恒心)”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2초기 그리스 스토아철학 저술들이 거의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세네카는 그 저서가 남아 있는 최초의 스토아학자이다. 그는 양사상사에서 스토아철학을 형성하는 중심인 물로 간주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그를 그리스도교와 가장 잘 부합되는 이교철학자로 간주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고전 스토아철학을 르네상스시대에 부흥시킨 립시우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토아학자이다. 그리고 로쓰가 스토아사상과 접했다면 시대적으로 가까운 립시우스적인 스토아 사상이 고전 스토아철학보다 그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로쓰와 스토아철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고전스토아철학자들 중 세네카를 립시우스와 더불어 다룰 것이다. 3시드니와 립시우스의 교우관계에 대해서는 졸고「유스투스 립시우스의『항심(恒心)에 대하여』에 나타난 신스토아주의」4-5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립시우스의 항심에 대한 설명에서 앞선 논문과 일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스토아적 정원, 명상에 대한 립시우스의 논의는 본 논문에서 처음 다룬다. 4필립과 로버트가 나눈 편지를 보면, 루벵에서 타키투스에 대한 립시우스의 강의를 들은 필립은 동생 로버트에게 타키투스를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Sidney to Robert, October, 1580,”in The Correspondence of Sir Philip Sidney and Hubert Languet, quoted in McCrea 32). 로버트는 립시우스의 타키투스 주해(1585)를 매우 열심히 읽었으며 현재 그의 책은 대영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McCrea 235). 또한 J. H. M. 새먼(Salmon)은 로버트 시드니를 당시 영국에서 타키투스 정치철학과 스토아사상의 결합을 완성한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207-08). 5로쓰의 고전 인문학적 지식에 대해서 로빈 패러바우(Robin Farabaugh)가 시드니 가문의 일원으로서 로쓰의 교육배경을 고려할 때 오비디우스(Ovidius), 플라톤(Platon) 등의 저술들을 읽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추정한 바 있다. 마가렛 해네이(Margaret P. Hannay)도 로쓰에 대한 전기에서 그녀가 궁정에 합당할 만하게 어린 시절부터 지적인 교육, 춤,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Hannay, Wroth 65-72).
스토아철학은6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에서 제노(Zeno)에 의해 창시되어 로마로 건너와 기원전 1세기 경 키케로(Cicero), 기원 후 2세기 경 세네카, 에픽테투스(Epictetus) 등에 의해 크게 유행되었다. 그 후 스토아주의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가 우세해지면서 사상적 영향력을 잃었으나,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과 중세 철학자와 신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14세기 경이탈리아에서 주로 수사학/문학 중심의 교육 운동으로 출발한 인문주의는 농업, 군사, 경제, 정치 등 학문의 전 영역에서 고전 지식을 연구하여 문학적 미학적인 관심을 넘어 현실 생활에 고전 지식을 비판적으로 변용 응용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용적 관점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스토아철학이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사상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 혹은 태도로서 인문주의의 요구와 잘 부합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르네상스 초기에 페트라르카(Petrarca)와 더불어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스토아사상은 에라스무스(Erasmus), 캘빈 (Calvin), 몽테뉴(Montaigne), 데카르트(Descartes), 파스칼(Pascal) 등 16, 17세기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 사상은 이 시기에 “자아의 본질, 인간 이성의 힘, 운명과 자유의지, 감정 등에 대한 논의”(Sellars,
립시우스는 고향인 네덜란드 지역에서 신 구교간의 종교 분쟁과 군사적 대결 등으로 인해 인간 삶의 모든 면에서 비인간적인 비참함, 전쟁, 추방과 도주, 죽음, 기아 등 그로인한 영적 정신적 황폐함을 경험하였다. 그는 정치 종교적 분쟁과 내란과 자연재해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열망을 지키고 현실적 삶의 고난에 대처하는 구체적 삶의 방식과 태도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세네카의 스토아철학과 타키투스의 정치철학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을 융합한 정신과 태도를 현실적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그의『항심론』(1584), 『정치론』(
로쓰의 항심의 스토아적 특성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립시우스와 세네카의 항심의 핵심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8 립시우스의『항심』은 실제로 내란과 분쟁 상황에 있던 네덜란드와 유럽을 무대로 삼고 있는데, 그 세계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세계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들은 지상 피조물들의 지식을 넘어서 작용하고 있는 필연, 운명, 우연, 이들을 통칭한 섭리라는 하늘의 힘들에 의하여 일어나는 매우 운명론적으로 보이는 세계이다. 립시우스는 운명적으로 공적 사적 재난과 불행을 겪었을 때 그것들을 회피하거나 그것들로부터 외적으로 도망칠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침잠하여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권고한다. 그 힘이 바로 항심이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세상은 인간의 통제와 이해를 넘어서 우연, 운명(fate 혹은 destiny)과 그에 필적하는 필연(necessity)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듯 보인다. 그런 세상의 혼란과 갈등, 재난과 불행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덕이요 삶의 태도는 흔들림과 변함이 없이 궁극적인 섭리를 향하는 꿋꿋한 힘으로 표현되는 항심이다. 항심은 이성에 기초한 판단력을 통해 생겨나는 마음의 오롯함으로 “고집”(obstinacy)이나“집요한 완고함”(pertinacity)과는 다르다. 세네카는, 항심의 힘은 사람을“오류에서 해방시키고, 자기 통제력과 깊고 고요한 침착함을 가지고 [내적 외적] 동요로부터 자유롭게”(“constantia”ix. 3)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항심에 대적하는 가장 주요한 적은 의견(opinion)이다. 의견은 교만(pride)이나 허영(vainglory)에서 기인하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의 경박함과 밀접하며 쉽게 사람을 들뜨게 하여 잘못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 고전 스토아철학에서는 항심을 가지기 위해서 동요의 원인인 감정들, 예를 들어 슬픔, 두려움, 기쁨, 기대 등을 억압하거나 없앰으로써 내적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외적인 상황들에 무심한 마음으로 행동하도록 권고한다.9 이러한 스토아주의의 무감각, 감정의 억압이나 제거는 17세기 영국에서 반 스토아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였다(Sams 67).10 이와 달리 립시우스는 마음의 감정들을 없애고 억압하기 보다는 조절하고 통제하여 내외적 상황으로 인해 일어나는 반응들에 대해 절제(moderation)와 중용(mean)을 견지하라고 충고한다(예를 들어 DC 1.2.34; 1.7.43; 1.11.49 등). 립시우스에게 있어서 “덕은 이성의 저울로 모든 것을 재기 때문에, 덕은 중용을 지키고, 행동에 있어서 어떤 지나침이나 모자람에 처하지 않는 것. . . .”(1.4.38)이다. 립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덕의 정의를 항심에 그대로 적용하여“수평의 저울에 있는 마음의 고요함과 항심”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똑바른 균형과 평형”(38)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운명에 휘둘리지 않고 삶에서 행복과 평화를 얻기 위해 견지해야할 삶의 태도, 방식, 덕은 곧 항심과 동일한 것이다.
이성이 항심을 세우는 기초라면 항심을 낳는 것은 인내이다. 항심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혼란 속에서 인내하며 “오랜 성실한 훈련”(Seneca, “constantia” ix. 5)을 통해 키워진다. 항심의 어머니인 인내는“겸손한 마음으로, 외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일들을 불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아 받는 것이다”(DC 1.4.37). 항심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겪고 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불행과 재난들이 궁극적으로 하늘로부터 왔으며 인간의 이해와 지식을 넘어서는 신과 섭리 속에서 모든 것이 일정하고 변함없는 질서 속에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항심은 “온갖 욕망들과 반항적인 감정들 . . . 이승의 온갖 미로들”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는 “테세우스의 실”(DC 1.5.39)과 같은 것이다.
스토아학자들은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덕이고 외적인 재화나 환경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감정들은 잘못된 판단들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들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스토아 현자는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감정이 없고 자신의 환경에 무심하고 심지어 형틀에서 고문당할 때조차도 악명 높게 행복한 사람”(Sellars,
립시우스도 고전 스토아철학의 여가와 명상의 이상을 매우 강조한다. 립시우스의『항심』은 대략 두 권으로 구성되는데 1권에서 항심, 그에 대적하는 힘들, 섭리, 운명 등 스토아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논한다. 2권에서 그것들에 대한 두번째 논의에 앞서『항심』의 두 등장인물들, 립시우스와 랑기우스(Langius)가 정원과 숲을 거닐면서 스토아주의에 있어서 휴식, 은둔의 장소의 중요성과 그 안에서의 사색과 명상의 의미를 논한다. 립시우스는 정원이 스토아적 자기 절제와 항심, 겸손 등의 덕목들을 키우는“뮤즈들의 집, 지혜의 양육소이자 학교”(DC 2.3.80)라는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이 논의를 항심에 대한 두 논의(1권과 2권)사이에 놓은 듯하다. 정원이나 숲과 같은 장소는 모든 근심과 걱정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책임과 의무로부터 물러나 여가를 추구하는 곳도 아니며 그 장소들이 주는 감각적인 아름다움들에 탐닉하기 위한 에피쿠로스적인 장소도 아니다. 정원이라 총칭할 수 있는 이런 장소들은 “허영과 게으름”(78)이 아니라 원기회복과 위안을 찾아“이 세상의 걱정 근심들로부터 물러나 머무는 건전한 장소”(80)이다. 학자들과 사상가, 시인들의 많은 업적들이 바로 이러한 장소에서 탄생되었다. 따라서 “정원의 진정한 목적과 용도는 즉 평정심, 세상으로부터 물러남, 명상, 독서, 저술인데, 이 모든 것들을 말하자면, 원기회복과 놀이의 방식으로 하는”(80) 공간이다. 현세의 고뇌로부터 초연하여 정원에서 정신적 지적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내적 평정과 깊은 사고와 자각들은 “운명의 힘과변화에 대항하여 언제나 내 손에 있는 준비된 무기들”(80)이 된다. 물론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적으로 완전히 자기 통제를 하는 스토아적 현자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주의에 있어 은둔과 물러남은 매우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공적인삶과 그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힘을 키워 그 삶에 투신을 준비하는 삶의 매우 중요한 한 방식인 것이다.11
립시우스는 전통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연상된 정원을 스토아적 이상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젠더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정원관은 스토아철학의 남성 중심성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난세를 이겨내기 위해 인내, 자기 절제, 순종, 불편심(不偏心), 은둔, 침묵 등의 스토아철학의 이상들이 여성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시 성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여성의 영웅적 이상으로 사적인 영역에로의 은둔, 사회와 가정에서의 수동적 순종과 침묵을 강조하였다(Lamb 126-27). 램은 스토아철학이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담론들과 달리여성을“연약하고 죄 많은 타자”로 규정하는 경향이 덜하다(127)고 옹호하지만, 스토아철학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담론이었다. 립시우스의『항심』도 여성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정원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스토아 사상의 남성 중심성이 가장 잘 나타난다. 립시우스의 정원관에 의하면( “letter to Dominic Lampson,” quoted in Morford 151-52;
6앞으로 본 논문에서 stoicism 혹은 stoic philosophy를‘스토아철학’‘스토아주의’ ‘스토아사상’등으로 번역할 것이다. 7이 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핵심 저서들 중 하나로, 16, 17세기동안 라틴어로 무려 32판이나 출판되었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국어들로 번역이 되었다. 영어로는 1595년 존 스트래들링 경(Sir John Stradling)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고 이후 1653년, 1654년, 1670년에 영어 번역판이 출판되었다(Sellars, Constancy introduction, 주 24와 22쪽 ; ___, Poetics 341). 8스토아적 항심을 설명하기 위해 세네카의 저술들 중에서는 『항심론』(“De constantia”),『 여가론』“( De otio”),『 평정심론』“( De tranquillitate animi”) 등을 주로 사용할 것이다. 세네카의 작품들로부터의 인용은 ___,“ De constantia,”in Moral Essays I, trans. John W. Basore (Cambridge: Harvard UP, 1928); ___, “De otio,”“De tranquilitate”in Moral Essays II, trans. John W. Basore (Cambridge: Harvard UP, 1932)에 의한다. 립시우스의『항심론』으로부터의 인용은 로쓰가 읽었을 수도 있는 1595년 스트래들링 경의 번역을 현대 영어로 고쳐 출판한 Johh Sellars, ed., Justus Lipsius: On Constancy. De Constantia translated by Sir John Stradling (1595) (Bristol: Phoenix Press, 2006)에서 한다. 인용할 경우 (DC 권.장.장의 쪽수)로 표기한다. 본 논문에서는 립시우스의『항심론』은 이후『항심』으로 약칭할 것이다. 9스토아철학자들이 모든 감정이나 열정을 거부한 것은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무질서한 감정들을 거부하였고 참된 선에 대한 좋은 감정과 같은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Sellars, Stoicism 115-19). 10샘즈에 의하면, 17세기 영국 사상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흐름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였다. 그로 인해 스토아철학처럼 불변하는 법칙과 조직화된 규정에 의한 윤리체계를 강조하며 개인의 감정과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사상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일었다. 그리하여 스토아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인들이 있는 반면에, 반스토아적 성향의 문인들과 지성인들은 스토아철학에서 강조한다고 보이는 감정의 억압, 무심함의 태도를 가장 비판했다. 물론 이 반감은 스토아철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의 결과에 기인하기 보다는 스토아철학자들이 감정, 열정을 온전히 억압하는 이교도들로서 인간이성의 능력을 과신한다는 통념에서 비롯되었다. 11마크 모퍼드(Mark Morford)에 의하면, 립시우스가 정원에서 누리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스토아적 이상에 적용하여 에피쿠로스 적인 무사안일주의(quietism) 대신 적극적으로 공적인 삶에 투신을 준비하는 장소로서 정원을 설정한 것은 정원사(庭園史)에 있어 립시우스의 공헌이다.
『유래이니어』12의 세계는 운명이 만들어내는 공적 사적인 불행과 재난으로 가득한 세계라는 점에서『항심』의 세계와 매우 흡사한 듯 보인다. 이 로맨스에 등장하는 수많은 국가 간의 매우 위급한 전쟁, 살인, 기아, 자연재해 등 그리고 2부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심각한 정치적 종교적 분쟁은 17세기 유럽대륙의 30년 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언저리에서 위기를 맞은 영국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Roberts,
로맨스의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사랑과 삶에 있어서 항심의 주제가 드러나는데, 작품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유래이니어는 스토아적 항심을 구현하는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로 작품 전체에서 올바른 항심의 충고자로 제시된다. 멜리사 E. 산체즈(Melissa E. Sanchez)는『유래이니어』에서 팸필리아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유래이니어의 선택과 의견이 가장 합리적이고 귀중한 것으로 일관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에서 그녀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한 바 있다(457). 스토아 사상의 맥락에서 로쓰의 항심을 조명할 때에도 유래이니어는 중요한 인물이며, 그녀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항심의 덕을 작품 서두에서 보여 주면서 작품의 스토아적 비전의 방향을 잡고 있다.
작품에 처음에, 목자의 딸인 줄 알았던 자신이 납치되어 버려진 공주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된 유래이니어는 정체성 혼란과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갑자기 바위 동굴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페리쑤스(Perissus)를 만나는데,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상황과 일들 앞에서도 놀라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천성적인 용맹한 기질과 용기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U 1.1.2-3). 리메나(Limena)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고통 받으며 자기 연민에 빠진 페리쑤스를 그녀가 위로하고 설득하는 장면은 그녀의 지혜와 이성적 판단능력이 앞으로, 립시우스의 표현을 빌면, “정신건강에 좋은 충고와 옳은 판단의 분수요 활기찬 샘”(DC 1.5.39)이 될 것을 예견케 한다.그녀의 지혜로운 이성과 판단력은 언제나 이성과 짝을 이룬 스토아적 항심(DC 1.6.40)의 능력이 그녀에게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이후 여러 재난의 상황에서 용기와 사려 깊은 이성적 판단력과 인내심으로 대처하고 또 지혜로운 충고자 역할을 한다. 그녀는 고든 브래든(Gordon Braden)이 르네상스적 자기주장의 대표적인 힘으로 간주한“영웅적인 항심의 남성적인 힘”(76)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페리쑤스가 떠난 후 다시 그 바위를 찾은 유래이니어는 늑대의 공격을 받는 위기에 처하는데, 그 상황에서 “여느 때와 같은 마음의 힘과 고결한 생각”과 더불어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며 삶의 재난을 수용하는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U 1.1.19). 뜻하지 않은 불행한 죽음 앞에서“조용하고 흐트러짐 없는 마음”으로 운명이 가져다준 상황에서“죽음은 악이 아니고 따라서 해도 끼치지않는다”(Seneca,“ constantia”viii. 3)는 확신을 가진 듯 신에게 순명하는 유래이니어는 스토아적 현자의 일면을(DC 1.6.41) 보여준다. 유래이니어의 “마음의 힘”은 바로 죽음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가지고 의연할 수 있게 하는 항심의 힘이다.
유래이니어의 항심은 위기에 처할 때면 언제나 그녀와 주위 사람들을 인도한다. 그녀가 자신의 신원을 되찾기 위해 파실리우스(Parsilius)와 함께 떠나려 했으나 그 기대와 달리 그의 배가 해적들에게 노략질 당하고 종들은 포로가 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도 유래이니어는 사람들에게“이 역경의 바다”(DC 1.12.52)와 같은 삶에서 기쁜 일이든 역경이든 항심을 잃지 않도록 권고한다.
유래이니어는 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운명이 정한 일로 받아들이며 정확한 상황판단을 통해 자기 통제의 지혜를 발휘한다. 그녀가 보여주는 지혜와 판단력은 군주와 같은 지도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그녀는 팸필리아처럼 여왕이 되어 통치를 하지는 않지만, 작품 2부에서 스테리아무스(Steriamus)와 결혼 후에는 그에게“가장 위대한 군주들의 모든 위대한 조언들 보다 더 판단력 있고 더 절묘한”(U 2.1.153) 조언을 하는 정치 자문가의 역할을 한다. 그녀는 항심으로 운명의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데, 정치자 문가로서 그녀의 역량은“운명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인류 복지의 선을 위해 일한다”(Seneca, “constantia”xix. 4)는 것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유래이니어는 사랑에 있어서도 용기있고 절제된 항심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유래이니어가 탄 배가 그녀의 고향인 나폴리가 보이는 해안에서 밤새 끔찍한 태풍으로 사이프러스 섬이 보이는 곳으로 밀려나 밤새 그 섬 해안을 돌게 된다. 그러자 모두 지쳐 누워 쉬거나 잠이 들지만 그녀만이 “결코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이들을 위로하며 ”파실리우스를 “참을성 많은 다정함”(U 1.1.46)으로 위로한다. 그녀도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단지 파실리우스가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에 자신의 두려움을 감춘 것이다. 사랑에 대한 그녀의 항심은 사랑과 재난이 가져다 준“그녀의 고난의 미로”(U1.1.46) 속에서 수동적으로 인내하며 침묵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평정을 잃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내하며 스토아적 현자처럼 자신의 감정과 자신을 절제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유래이니어는 ”사랑과 사회적 제약이 만들어낸 불가능한 상황들의 미로를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하게 해주는 실을 가진 자”(Farabaugh 218)가 되어 간다. 이와 같이 첫 에피소드들에서부터 로쓰는 유래이니어를 통해 여성의 관점에서 변용된 스토아적 항심을 제시하고 있다.
12로쓰의『유래이니어』로부터의 인용은 Mary Wroth,The First Part of The Countess of Montgomery’s Urania, ed. Josephine A. Roberts, completed by Suzanne Gossett and Janel Mueller (Tempe, AZ: Arizona Center for Medieval and Renaissance Studies, 1995); _____, The Second Part of The Countess of Montgomery’s Urania, ed. Josephine A. Roberts, completed by Suzanne Gossett and Janel Mueller (Tempe, AZ: Arizona Center for Medieval and Renaissance Studies, 1999)로부터 하며 (U 부.권.쪽수)로 표기한다. 13삶의 다양한 양상들과 우여곡절들에 대한 비유로 극장, 바다, 항해의 심상들은 립시우스와 로쓰에게서 공통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유래이니어가 삶과 사랑에 대해 항심의 힘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진실한 항심의 참된 모범”이 되도록“운명 지어지고 인가받은”(U 2.2.243) 인물은 팸필리아이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랑에 있어 항심의 화신이다. 앰필란써스(Amphilanthus)를 깊이 사랑하는 팸필리아는 여성적인 수줍음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으로 그 사랑의 표현을 자제하고 그러는 사이 앰필란써스는 계속 다른 여성들과 사랑에 빠진다. 그로 인해 팸필리아가 겪는 내적인 고통은 립시우스를 괴롭힌 전쟁, 기아, 살인, 소요, 혼란과 같은 외적인 재난들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교적 모임에서 벗어나 자주 홀로있곤 한다. 일견 비난 받을 수 있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로쓰는 다음과 같이 팸필리아를 변호한다.
팸필리아는 사랑이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충실한 항심이기에 다른 남자들과의 유희적인 관계를 즐기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또한 절제와 자기 통제이고 선택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뜻과 의지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여 가장 겸손한 마음 자세로 사랑하고 있다. 립시우스가 교만이 항심에 대적하는 의견을 낳는 점을 지적하듯이, 로쓰도 교만이 매우 불확실하고 많은 변화들을 불러일으킨다고 보며(U 1.3.399) 항심에 있어 겸손을 중요한 자질로 간주한다.14 로쓰의 변호는 팸필리아의 사랑의 항심의 스토아적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팸필리아는 자신의 사랑의 감정들을 정원이나 숲에서 홀로 은둔하며 시로 혹은 한탄으로 토로한다.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에 자주 홀로 머무는 그녀의 행동은 그동안 비평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들을 불러일으켜 왔다. 로쓰의 소네트 연작에서도 두드러지는 이 물러남과 은둔의 행위는 공적 사적 영역을 넘나드는 팸필리아의 참여와 거리두기를 통해 로쓰가 당시 공과 사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일 수 있고(Salzman), 이 물러남은 여성인 팸필리아가 자기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시도(Masten) 혹은 “여성의 권위와 자기표현”(Hackett 51)일 수 있고, 여성적 자아형성을 위한 특별한 공간일 수 있다(Fienberg). 반대로 이 사적공간은 팸필리아가 일종의 덫에 빠진 상태일 수도 있고(Villeponteaux), “은둔은 바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규정한 단절과 침묵을”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매조키즘적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Waller 206).
그런데 앞서 설명한 스토아 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물러남과 은둔은 그녀가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항심의 덕을 얻는데 있어 필수적인 시간과 공간이다. 성찰과 명상의 장소로서의 정원이나 숲은 목가적 지상낙원의 장소의 개념과 결합하여 고전 시대부터 자주 논의되어온 주제이다(대표적으로 Ro/ stvig, Giamatti, Rosenmyer, Poggioli 참조). 로쓰의『유래이니어』에도 이러한 장소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 장소들은 고전/르네상스 스토아철학에서 배제된 여성들, 특히 항심의 화신인 팸필리아가 자주 명상과 내적 성찰을 하는 공간이다. 로쓰는 이 작품에서 “항심의 모범”을 배우는 것은 여성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U 2.1.28) 생각하는 앰필란써스(와 스토아철학자들)의 생각에 도전하여, 항심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남성들에게 여성들, 특히 팸필리아를 통해 항심을 표현하는“새로운 방식의 모범을 보이고자”(28) 하는 것이다.
팸필리아는 앰필란써스에 대한 사랑의 고통으로 북적대는 궁정 모임들에서 정원, 숲과 같은 은둔 장소로 자주 물러난다. 팸필리아는 홀로 있는 그 시간과 장소 속에서 사랑에 빠진 자신과 자신의 감정들, 그 사랑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 그리고 시쓰기 등을 한다. 립시우스는『항심』이 궁극적으로 공적 사적 재난과 불행을 겪은 자기 자신을 위한 책이라 고백하였고(DC,“To the reader”29) 셀러즈는 그러므로 그의 저술과정은 항심을 키워나가는 일종의 영신 수련( “Spiritual Exercises”)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팸필리아가 공무와 인간관계들로부터 물러나 은둔하여 홀로 자신의 사랑의 감정들을 토로하고 성찰하고 그것들을 시로 쓰는 행위들도 항심의 모범이 되기 위한 일종의 내적 수련과정, 자기인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홀로 정원의“가장 깊숙한 곳”(U 1.1.91)으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사랑에서 느끼는 두려움, 갈등, 아픔들을 토로하고 사랑의 관계 속에 숨어있는 면모들을 샅샅이 살펴 때로는 자신을 책망하고 때로는 회의하고 때로는 희망을 가진다. 앰필란써스로 인해 사랑의 상처들을 입고 항심의 주요한 적들 중 하나인 연민에(DC 1.8.44; 1.12.52-53) 빠져 한탄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도, 고요 속의 성찰을 통해 사랑의 오롯함을 다시 회복하여 마음의 평정을 얻고 다시 자신의 사랑의 선택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기도 한다(U 1.2.191). 립시우스가 뮤즈의 장소라 부른 고요한 공간에 홀로 있을 때“그녀의 내면의 생각들은 더 바쁘게 움직이고 엮이어”(U 1.2.212) 아름다운 시들이 탄생한다.
그런데 팸필리아에게 있어서 은둔 속에 내적 성찰과 시쓰기를 통해 자신의 사랑의 감정들을 통제하고 절제하기 위한 노력은 단순히 사랑의 항심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세네카가 군주가 될 젊은이들에게 홀로 물러나 성찰하며 덕을 쌓고 공직에 나갈 준비를 하도록 권고하듯이( “tranquillitate”vi. 1-2), 이 내밀한 시간과 공간은 팸필리아가 여성군주로서 주체를 확고히 세워나가는 시간과 공간이 된다. 사랑의 문제는 결국 자기 통치력의 문제이고 나아가 군주로서의 통치력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자책하는 팸필리아의 다음 독백에서 이 연관관계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사랑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남성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군주가 되기에 적합한 [그녀의] 정신”(U 1.2.226)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온갖 다양한 오해, 변화와 고통들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그것을 통해 지도자로서 자기 통제력을 배워야한다. 스토아적 항심을 가진 사람이 “운명과 감정들의 노예적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신께만 복종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왕”(DC 1.6.41)이라면, 군주가 될 팸필리아에게 항심은 왕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할 자질이며 그녀는 사랑을 통해 그 자질을 단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5 세네카의 관점애서 보면, 팸필리아는 공직에서 봉사하기 전에 자주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군주로서의 자질, 자기 통제력을 키워나간다고 할 수 있다.
팸필리아의 고독은 사랑을 통해 바로 이 군주의 자질을 키우는 내적 공간이다.
군주가 된 팸필리아는 함께 사냥하던 무리로부터 벗어나 홀로 숲에서 팸필리아는 사랑이 일으키는 내적인 동요 가운데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사랑의 항심에 머무르는지 아닌지에 대해 엄격하게 자기성찰을 하며 내면적으로 덕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항심 추구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항심의 힘은 곧 그녀의 군주의 자질을 키워주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자기 단련의 과정은 팸필리아에게 있어 결코 순탄하지 않다. 앰필란써스에 대한 사랑의 열정들은 그녀의 내면에서 서로 좌충우돌하며 군주가 된 후 책임을 하기 힘들게 만들 정도로 그녀를 한계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팸필리아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레안드루스(Leandrus)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항심의 덕에 대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다. 세네카가 삶과 시간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데 있어 매우 신중하고도 조심해야한다고 권고하듯이( “tranquillitate”vii. 1-2), 팸필리아는 자신이 올바른 사람을 선택했는지,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희생하며 헌신할 가치가 있는지, 자신의 선택과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 진지하게 숙고한다(U 1.3.464-65). 팸필리아가 사랑의 고뇌로 인해 죽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하자 유래이니어가 타고난 지혜와 판단력으로 팸필리아가 추구하는 항심의 문제점들을 일깨워준다. 그녀는 팸필리아에게 “저판단력과 신중히 자제하던 정신”과“남성적인 정신”(U 1.3.468)의 힘들을 모으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유래이니어는 팸필리아에게 자기 통제력이 곧 군주의 통치력임을 거듭 강조한다.
또한 유래이니어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든 그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오롯한 충실을 사랑의 항심으로 간주하는 팸필리아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 강한 도전을 한다. 유래이니어는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삶의 여러 상황에서 스토아적 항심의 충고자 역할을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팸필리아와 다른 항심의 태도를 견지한다. 그녀는 연인 파실리우스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지만 배신한 사랑에 연연하며 그 사랑을 고수하려고 하는 대신 운명에 따른 “정당한 변화”(U1.2.190), 스테리아무스(Steriamus)를 선택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결코 사랑에 대해 배은망덕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팸필리아처럼 잘못된 사랑에 매여 있는 것은“용기와 판단의 부족”의 결과라고 생각한다(U 1.3.469-70). 그리하여 항심의 충고자답게 유래이니어는 팸필리아가 옳다고 생각하는 항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팸필리아의 상황에 대한 유래이니어의 판단은 매우 명철하다. 우선 그녀는 팸필리아가 한계가 있는 유한한 인간의 덕을 절대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그녀는 팸필리어가 오롯한 사랑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립시우스가 항심의 적으로 간주한 바 있는 고집스런 의견임을 밝힌다. 유래이니어는 그 의견의 경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보다 안정된 항심을 얻게 되며, 이 세상에서 항심은 결국‘보다 항구히’처럼 비교급이 붙을 수 있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한다.
유래이니어의 충고는 운명을 이기는 평정심에 대한 세네카의 충고와 흡사하다.
팸필리아는 세네카가 요구하는 인내심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앰필란써스가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인내로 그의 불충실을 견디어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은 사랑에 대해 항구하고 충실해야한다는 의견을 계속 유지해왔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변화에 대한 무능’이다. 앰필란써스의 사랑이 변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상황을 인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야기하게 된다. 팸필리아가 이러한 상황에서 취해야할 태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선택이나 계획에 매달리지 말고 융통성 있게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평정심있는 항심을 가지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 바로 이어 세네카는 자신이 충고한 항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은둔과 고독을 강조하는데( “tranquillitate”xiii. 2), 마치 이 충고를 따르듯 팸필리아는 유래이니어와 대화를 나눈 얼마 후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 “가장 고독한 동굴이나 바위들”사이에 주로 머물며“오직 슬픈 자신”(U 1.4.484) 하고만 대화하며 지낸다. 이 장소들은 립시우스적인 정원과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명상과 기도의 장소와 연상되는 공간들이다. 고요와 은둔 속에 성찰을 통해 단련된 항심을 키워나간 그녀는 이제 슬픔 속에서도“자신을 잃지 않았고, 그녀의 통치는 여전히 올바르고 용감했으며 . . . 비록 사적인 운명들이 그녀 주위에서 흔들어 대었지만, 그녀는 통치하면서 조금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여 준다”(484). 고독 속에 자신을 단련한 팸필리아는 여전히 사랑으로 슬퍼하고 고통 받지만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련된 그녀의 자기 통제력은 국가 통치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팸필리아 왕국의 어느 젊은 목자가 평하듯이, 그녀는 큐피드의 발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사랑의 어리석음을 알고 자신의 일로 돌아와 다시 생기와 활기를 되찾아 정확한 판단력과 선함, 온유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통치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군주로 살게 된 것이다(570-71).
14헬렌 해킷(Helen Hackett)이 지적하듯이, 사랑과 정치에 있어 팸필리아의 대응 인물이라할 수 있는(53) 네레아나(Nereana)에게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교만(pride)이다. 그런 점에서 네레아나의 에피소드는 팸필리아의 항심에 대응하는 교만이 가져오는 개인적 국가적 재난의 예를 잘 보여준다. 15헬렌 해킷(Helen Hackett)이 지적하듯이, 사랑과 정치에 있어 팸필리아의 대응 인물이라할 수 있는(53) 네레아나(Nereana)에게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교만(pride)이다. 그런 점에서 네레아나의 에피소드는 팸필리아의 항심에 대응하는 교만이 가져오는 개인적 국가적 재난의 예를 잘 보여준다.
작품 1부에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변함없는 오롯한 충실을 추구하는 팸필리아의 항심은 여성 군주로서의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변화와 섭리의 힘이 1부보다 더 우울하고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2부에서 그녀의 항심은 전반적인 삶에 대한 태도로 발전한다. 팸필리아에 대한 타르타리아(Tartaria)의 왕 로도만도로(Rodomandoro)의 적극적인 관심에 질투를 느낀 앰필란써스는 팸필리아와 사랑의 언약식을 행하고(U 2.1.45) 칸디아(Candia)로 떠난다. 떠나는 앰필란써스에 대해“항심(덕들 중에 가장 귀한 덕)은 버려지고, 버려지고, 잊혀지고, 제쳐놓아지고 아 음탕한 정욕과 . . . 저속함으로 인해 잃게 되네”(U2.1.59)라는 화자의 논평은 그의 결정적인 배신을 예견케 한다. 팸필리아도 같은 예감으로 슬퍼하지만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으려고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 정숙하고 흠없는 사랑”으로 “운명, 불행,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여 삶의 재난들을 이겨낼 것”이라고(U 2.1.107)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러나 앰필란써스의 배신을 자신의 꿈에서 보고 또 다시 혼란에 빠지는 팸필리아에게 베랄린다(Veralinda)도 유래이니어와 유사하게, 떠난 사람은 자기 길로 가라고 하고 그녀는 다른 곧은 길을 택하여“그 길을 따라 [그녀] 자신의 마음의 왕국을 다스리는, 세계의 황제가 되라”(U 2.1.112)고 한다. 베랄린다의 충고를 통해서도 로쓰는 팸필리아가 자신의 사랑을 바꾸는 것이 항심의 화신으로 그 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통제 속에 삶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것, 즉 삶에서 진정한 항심을 가지는 길임을 계속 지적하고 있다
앰필란써스가, 어린 시절 가정교사에게 속아 슬로바니아 왕의 딸과 결혼하자 이제 팸필리아는 로도만도로의 결혼제의를 받아들인다. 이 상황은 집요하게 집착하듯 추구하던 사랑의 항심의 틀로부터 팸필리아를 자유롭게 해주는 듯하며,이후 팸필리아는 삶에 있어서 어떠한 상황이든 잘 다스려 항심의 덕으로 삶을 살아가는 스토아적 현자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그녀의 판단력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그녀의 열정들은 스스로 통제되어 있는데(U 2.2.268), 예를 들어 남편이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모험으로 며칠간 더 늦어질 것이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 “그녀는 그 편지를 지극히 잘 받아들여, 그의 부재를 너무 지나치게 슬프게 너무 지나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성이 이제 그녀의 여정의 규율이고 그녀가 의존하여 항해하는 별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U 1.2.282). 물론 팸필리아에게 있어 앰필란써스에 대한 사랑은 결혼 후에도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그 열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없애버릴 수 없는 그녀의 사랑의 감정들은 항심으로 절제와 평형을 이루게 된다. 그 사랑을 아직도 고민하는 팸필리아에게 숲의 님프가 충고하듯이, “절대적인 자기 통제력”(U 2.2.378)은 “정결과 깨끗하고 순수한 애정들”(378)로 그녀는 앰필란써스에 대한 사랑을 절제 속에 간직할 수 있게 한다. 항심이 그녀의 내면에 모순되는 여러 요소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와 같이 로쓰는 여성들의 항심을 두드러지게부각시켜 여성들을 사랑과 정치 나아가 삶 자체에 있어 주체적 모범임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 전체에서 유래이니어나 팸필리어와 같은 여성들이 주로 항심의 모범이 되는 반면,16 대표적인 남성 주인공인 앰필란써스는 팸필리아의 사랑을 번번이 배신한다. 하지만 그도 종국에는 사랑과 삶에 대해 스토아적 태도를 배우게 된다. 앰필란써스는 외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용기의 화신이다. 그도 홀로 있을 때 팸필리아처럼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티씨아(Antissia)로 인해 팸필리아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배신행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숲속에서 홀로 있을 대 그가 처음으로 자기 성찰을 하는 면모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변했음을 보면서, “항심이, . . 유일하게 완전한 덕”(U 1.1.135)임을 인정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를 쓰며“자기 자신과 더 많은 훨씬 더 많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담화를 나누게 된다”(U1.1.136). 앰필란써스도 은둔의 장소에서 이렇게 내면 성찰과 시쓰기를 통해 스토아적 항심의 덕을 훈련하는 순간을 간혹 가진다.
그러나 그 기회들은 극히 드물고, 2부에서 가서야 비참한 자기 인식 속에서 항심과 자기 통제력, 군주의 통치력 사이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거짓말에 속아 팸필리아가 타르티아왕과 결혼했다고 믿고 자신도 슬로바니아 왕의 딸과 결혼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후 방황하며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듯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자신의 경솔함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절망적인 한탄을 한다.
앰필란써스는 자신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도 자기 통제력이 없어 군주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이제야 인정한다.17 팸필리아에 대한 사랑의 약속을 저버린 후에야 사적인 사랑의 영역에서의 자제력과 충실은 곧 공적영역에서의 통치력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 앰필란써스도 팸필리아처럼 사랑의 고통 속에 항심을 단련을 하게 된다. 그는 팸필리아와 로도만도로의 결혼 날짜가 잡히자 이런저런 구실로 그 곳을 떠나려고 하나 용감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으로 그럴 수도 없게 되자 상황을 받아들인다.
앰필란써스는 사랑의 고통 속에서 스토아철학에서 운명이 가져다 준 재난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자세인 인내, 항심의 어머니 인내의 덕을 통해 항심을 키워나갈 것을 결심하고 있다. 팸필리아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자신의 불충실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앰필란써스는 이제야 군주의 통치권과 자기 통제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뼈저리게 깨닫고“오 네 자신을 먼저 다스려라.그러면 너는 통치의 자격이 있으리라”(U 2.2.383)고 절규하게 된다. 이렇게 로쓰는 남성의 지도력 강화와 직결된 실천 철학이었던 스토아적 항심의 이상들을 남성 주인공들에게서는 매우 드물게 간략하게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작품 마지막에서는 지금까지의 항심의 힘에 있어서 성적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려는 듯, 팸필리아와 앰필란써스 두 사람 모두 스토아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앰필란써스와 팸필리아 두 사람 모두 이제 삶의 질곡들에 대해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인내를 삶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로 삼아 주어진 길을 가려고 한다. 비록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삶의 운명과 화해하고 가능한 적게 불평하며 얻을 수 있는 유익과 위안을 발견한 것이다. 죄인들이 처음 족쇄에 묶였을 때는 몹시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필연의 교훈대로 용감하게 그것들을 지면 나름대로 삶의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세네카의 비유처럼( “tranquillitate”x. 1-2), 두사람은 그들을 각자 묶어놓은 운명의 쇠사슬 속에서도 이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충실과 불충실을 결정하는 항심은 이제 삶에 대한 태도, 삶의 방식이 되었다. 작품이 미완성으로 끝나 작품의 완결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작품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인간으로서 군주로서 두 사람의 스토아적 항심의 태도로 볼 때 로쓰가 작품 전체에서 추구 해온 항심의 주제를 여기서 완결 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여러 남성 인물들도 작품 곳곳에서 스토아적 항심의 태도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파실리우스는 유래이니어와 함께 항해하다 그녀가 실종되자 크게 슬퍼하면서도 “하늘의 힘들이 이 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더 고요하게 그것을 인내한다”(U 1.1.50). 셀라리누스(Selarinus)도 에피루스(Epirus) 여왕의 포로가 되었을 때, 울고불고 소란을 떠는 종에게 전형적인 스토아 현자의 태도로 이 재난을 견디라고 충고 한다: “가엾은 아이야 . ..자유를 누리듯이 감옥살이를 나와함께 잘 견디어내어, 피델리우스가 인포르투니우스를 모든 상황에서 충실하게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거라”(U 1.2.305). 2부에서 알바니아 왕자와 그의 사촌 베롤린도(Verolindo)와 네그로폰테(Negroponte)의 왕자 안티도린도(Antidorindo)도 레즈보스(Lesbos) 섬에서 마법에 걸린 왕자들을 구하려다 의도와는 달리 폭풍우에 밀려 지중해 어느 바위에 배가 좌초되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조차 없는 고난의 상황에 매우 스토아적인 자세로 대처한다: “허나 그것이 운명이고 인간 적인 힘이 아닌 것을 알고 그들은 그것을 최대한 견디었다. 누가 감히 하늘의 힘들과 맞붙어 싸우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이 피할 수 없는 것들을 이전에 용기로 견디어 냈듯이 그만큼 용감한 인내로 견디어 내기로 결심하자, 그들은 용이하게 . . . 육지로 통과해 들어갔다”(U 2.1.102). 17로쓰는 그녀가 사랑한 사촌 윌리엄 허버트(William Herbert)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앰필란써스에 대해 최고로 훌륭하고 위대한 군주라는 찬사를 대체로 아끼지 않지만, 여기서 그녀는 허버트/앰필란써스가 사랑에 있어 항심의 덕이 부족하고 그럼으로써 삶에 대한 지혜가 부족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유래이니어』에서 두드러지는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은 로쓰가 항심의 예로 사랑에 대한 오롯한 충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항심의 화신인 팸필리아도 결국 운명이 빚어낸 상황들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그녀의 항심이 변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로쓰의 항심을 지나치게 좁은 의미 속에 가두는 것이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항심은 삶의 질곡 속에서 사랑 뿐 아니라 재난과 불행에 가득 찬삶의 그 어떤 상황에도 동요 없이 수용하고 인내하는 태도, 즉 스토아적 삶의 태도로 승화된다. 이 작품에서 팸필리아와 유래이니어와 같은 여성들이 항심의 대표적인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은 로쓰가 르네상스시대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남성 중심적인 스토아적 삶의 철학에 대해 여성적 관점에서 의미 있는 수정작업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로쓰는 여성의 항심을 사랑과 삶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영웅적 덕으로, 그런 덕을 각춘 여성들을 남성 못지않은 정치적 문화적 윤리적 주체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여성 연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조안 켈리-개덜(Joan Kelly- Gadol)의 “여성에게 르네상스가 있었던가?”(“Did Women Have a Renaissance?”)라는 질문을 로쓰에게도 던져볼 수 있다. 로쓰가 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을 받아 스토아철학을 비롯한 르네상스 시대의 지배적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직접적인 증거들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녀의 항심은 스토아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어 그녀가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적 흐름들과 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본 연구는 그동안 로쓰 연구에 있어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녀와 그녀의 작품들의 인문학적 배경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근대초기/르네상스 여성작가라 주로 불리는 로쓰를 르네상스 인문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가능성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