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t est l’action de la projection. Le roman, la peinture, la musique, le film et le drame sans cesse font de la projection. Les actions de l’art des acteurs et du public se font aussi dans la projection. L’espace du théâtre est celui de la projection. Entre l’acteur et l’acteur, entre l’acteur et son rôle, entre l’acteur et le spectateur, entre le spectateur et le spectateur, l’énergie de la projection se produit et circule. Le spectateur perçoit la scène avec cinq sens et se réfigie dans d’autre réalité ou dans la fantasie sucrée et s’expose à des conflits. Pour sentir de grandes émotions, il est nécessaire de l’empathie et avec ça l’émotion du spectateur se projette vers la scène. En faisant connaissance avec ces circulations des émotions, il s’identifie au personnage sur scène. L’art du théâtre possède intrinsèquement de la fonction de la guérison. La catharsis que le public se sent, signifie d’effets de la guérison. Dans le théâtre-thérapie que le thérapeute collaborent collectivement à une séance dramatique, tout le monde peut avoir des nouvelles visions à travers les transformations de la volonté. Alors quand le théâtre-thérapie est sur les rails, l’identification, le transfert et la projection enclenchent au niveau de l’inconscient. Pour la projection, on a besoin de l’objet. “La projection constitue à attribuer à autrui ses propres motifs, émotions, idées ou pulsions inacceptables.” Au niveau de la projection, on en veut à l’autrui le désir inacceptable dans la réalité. Le mécanismes de défenses est semblable au principe fonctionnel du théâtre Le participant au théâtre-thérapie devient en même temps l’acteur et le spectateur. Dans cette double fonction, il fait apparaître ses conflits internes. Donc, quand on met avec pertinence les projections multiples en valeur, les valeurs de guérison du théâtre-thérapie s'agrandissent. Dans le théâtre-thérapie, la projection a but pour la clairvoyance, la connaissance de soi-même et finalement des profonds changements positifs. Ce n’est pas le ensevelissement derrière la protection consciente, mais c’est en effet pour l’accomplissement des émotions positives.
예술은 투사 행위다. 소설, 그림, 음악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끊임없이 투사를 행하도록 한다. 예술가의 예술행위나 관람자 또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언제든지 투사가 작동한다. 연극 공간은 투사의 공간이다. 배우와 배우 사이, 배우와 역할 사이, 배우와 관객 사이,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종횡으로 투사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순환이 일어난다. 관객은 무대를 오감으로 지각하면서 또 다른 현실이나 달콤한 환상으로 도피하는가 하면 실제 삶 속에 존재하는 관계와 갈등과 주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관객이 공연을 통해 벅찬 감동을 경험하는 것은 충실한 감정이입을 전제로 하지만 그의 감정은 가슴에 머물지 않고 다시금 극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무대를 향해 투사된다. 그리하여 어느덧 적대적인 인물과 우호적인 인물에 대한 제각기의 깊은 정서를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게 된다. 연극예술은 자체적으로 치유의 기능이 있다. 감동적이고 생생한 연극을 관람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야말로 치유를 의미한다. 연극치료는 치료자와 참여자가 공동으로 극적 방식에 참여하여 변화를 이끌어 내고 세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지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연극치료가 행해지는 순간 무의식의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동일시와 전이 그리고 투사다. 투사는 누군가라는 대상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수용 불가한 욕망을 객체에게 돌리는 것이 투사인 것이다. 주체가 객체를 향해 나가는 방어기제는 연극예술의 작동 원리와 유사하다. 즉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의 이중성과 흡사한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연극치료의 참여자는 역할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고 때로는 관객이기도 하면서 내면의 갈등을 표상화 시킨다. 따라서 다층적 투사를 적절하게 활용할 때 연극치료의 치유적 가치는 배가된다. 연극치료에서 투사는 통찰과 자아인식, 궁극적으로 인식의 변화와 실천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자기만족이나 의식적인 보호물에 숨어 버리기가 아니라 떳떳한 자세로 긍정적 정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1)Halprin, Daria, 김용량 외 옮김, ‘1965년, Eastern Institute Workshop에 참석한 멤버들에게’, 『동작중심표현예술치료』, 시그마프레스, 2006, 35쪽.
연극은 자체적으로 치유적 기능이 있다고 한다.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비합리적 사고를 재인식하며 자신을 직시하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연극의 어떠한 요소들이 치유적 동인이 되는 것일까? 연극치료란 과연 이러한 연극의 치유적 요소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한 치료형태인 것인가? 연극은 그 고유한 특성, 즉 현재 이곳에 존재하는 배우와 관객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연극적 성격을 기반으로 생생한 자기 탐구와 변화를 경험하도록 한다. 배우, 관객 그리고 무대인 연극의 삼대요소는 이곳이라는 공간에서 연행자와 그를 지켜보는 관객과의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연극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연극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연극치료 또한 이 같은 메커니즘에서 멀지 않다. 연극치료는 치료자(배우)와 참여자(관객)가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와 몸짓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변화를 이루어 세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지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일방이 아닌 양방의 주고받음이 이루어지는 연극치료의 공간에서, 무의식의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동일시와 투사다.
정신분석학의 방어기제2) 가운데 연극치료가 주목하는 것은 전이와 더불어 동일시와 투사다. 이들은 각각 분명한 개념을 지니면서도 피차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방어기제로써 무의식적 산물이며 상상력의 작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더하여 타인이라는 객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체가 객체를 닮음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동일시이며, 주체가 현실에서 수용될 수 없는 욕망을 객체에게로 돌리는 것이 투사다. 객체를 향해 ‘나’라는 주체를 대입시키는 방어기제는 연극에서 배우와 역할 및 관객과 배우 혹은 그 역할 사이의 작동원리와 흡사하다. 이들 방어기제의 특징인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는 무대에서 열연중인 배우의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라고 하는 배우와 내가 맡은 인물이 어떻게 합일을 이룰 것인가. 나의 신체와 목소리로 표현되고 있는 극 속의 인물은 누구인가. 나인가 내가 아닌가. 이따금 한 남자배우는 현실에서 누구의 친구며 누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비극적인 햄릿 왕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무대 뒤로 퇴장하는 순간 역할에서 벗어나 직업 배우로 되돌아온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는 자신과 역할 사이에서 동화와 이화가 밀물과 썰물처럼 되풀이됨을 맛본다. 그가 커튼콜에서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일시 전이 그리고 투사3)가 쉼 없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기를 멈추었다가 자신을 찾아가는 곳, 자신을 잊었다가 자신을 알아차리는 무대는 가장 황홀한 소통과 치유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상의 관점을 통해 본 글은 연극의 특성을 기본으로 하는 연극치료에서 투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개념과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1)Jones, 이효원 옮김, 『드라마와 치료』, 울력, 2005, 171쪽. 2)정신분석학의 성격구조에서 이드(원초아)와 자아 및 초자아의 관계를 보면, 개인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와 도덕에 위배된다고 느끼는 이드의 충동들, 이를테면 성적인 충동이나 공격성의 욕구를 느끼게 되면 초자아는 이를 억누르게 된다. 표출과 충동 그리고 억누름이 충돌할 때 개인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 불안을 해소시키고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개인은 무의식적인 노력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다양하게 세분화된 방어기제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불안이 생겨날 때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한다. 방어기제는 정상적인 정신활동이기 때문에 이를 적절하게 운용한다면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되면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3)동일시와 투사는 지향하는 방향이 반대다. 동일시는 자기를 대상자로 보는 것이지만 투사는 대상자를 자기로 보는 것이다. 공연에서 동일시와 투사는 쌍방향으로 동시에 작용한다. “동일시와 투사의 과정이 너를 나로 만들고 나를 너로 바꾼다.” Landy, 이효원 옮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극치료』, 울력, 2002, 159쪽.
방어기제로써 동일시는 개인이 타인의 태도와 행동과 닮아가면서 불안을 완화시키고자 하며, 경우에 따라 불안의 요인이 되는 누군가와 닮은 행동을 하려는 태도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외모나 가치관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가치를 찾고자 하는 동일시의 성향이 강하다. “동일시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이다.”4)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연극 혹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윤리적·인격적·신체적으로 강한 주인공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아 존중감을 확립한다.5) 그런데 동일시에서 중요한 개념은 모방이다. 자발적인 모방 의식에서부터 동일시는 가능해진다. 아리스토델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의 모방은 본능적이고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되며 비극은 인간의 행동과 생활 그리고 행과 불행을 모방하여 표상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예술 특히 연극은 인간의 모방 본능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공연이나 심리치료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할 때 그 시발점은 모방이 된다. 이를테면 젊은 배우가 노인 역할을 맡았을 때 노인 역할에 대한 연구는 모방에서 비롯되며 모방을 통해 노인 역할과의 동일시를 꾀한다. 결국 배우란 주어진 역할과 완벽한 동일시를 이루려는 사람인 것이다. 이 동일시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감정이입을 위한 동일화 작업과 유사하다.6) 이로부터 연기자는 역할과 감정을 공유하는 전적인 동감이 가능하며 실제를 체험하기도 한다. 피아제는 아동의 인지발달에서 모방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랜디 역시 모방이 아동의 “역할 취득의 능력을 키우고 건강한 정체성을 발달시키게”7)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한편 동일시와 더불어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전이는 연극에서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연극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나도 그것을 수긍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연기자가 비어있는 무대에 서서 “아! 아름다운 바다야!”라고 말하면 그곳은 순식간에 바다가 된다. 나의 변신, 인물의 변신, 장소의 변신은 전이가 작용하기에 가능하다. “전이의 과정을 통해 친구가 어머니가 되고 치료사가 아버지로 변하는 것이다.”8) 그런데 이 전이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현실을 재창조하도록 한다. 처음 본 사람인데 왠지 호감이 가는 것, 어떤 역할에 특히 집착하는 것은 전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집을 두고서도 누군가는 거기서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중성적인 외부의 대상에 개인의 과거 경험을 옮겨 놓는 것을 말한다. 전이 체험은 현재를 통해 과거를 거듭 사는 데자뷰로서 과거를 현재로, 또 퍼슨을 페르소나로 변형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극적이다.”9)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 그 사람이 나에게 의미 있는 역할로 바뀌는 것은 전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는 자체적으로 전이의 원리가 작용한다. 특히 대상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 전이는 더욱 부각된다. 배우가 유독 어떤 역할이 자신에게 잘 맞거나 기억에 남거나 그에 더욱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역할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그것이 배우의 과거의 경험이나 정서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 역할이 특정한 배우에게 자극적 요소가 되었다는 것은 전이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전이의 원리를 연극치료에 적용시키면 참 여자의 과거나 문제의식을 명료화할 수 있다. “전이의 긍정적인 기능은 내담자가 살아온 삶의 한 순간을 극화하여 치료사가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치료사는 드라마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거나 과거와 현재 또는 하나의 현실과 또 다른 현실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세움으로써 내담자가 전이와 재현의 양 측면을 모두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끈다.”10)
4)위의 책, 157쪽. 5)동일시는 특히 정서적이거나 도덕적인 분야에서 더욱 잘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아이에게 경찰차를 쥐어주면 아이들은 곧바로 자기가 가족 평화의 수호자라는 확신에 빠져든다. 위의 책, 223쪽 참조. 6)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기자가 정서의 기억을 통해 역할과 동일시를 이룰 때 진정한 연기가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역할-타인과의 감정 공유의 능력을 키우고자 했던 “magic If”의 연기메소드는 동일시를 위한 훈련기법이다. 7)Landy, 앞의 책, 157쪽. 8)위의 책, 159쪽. 9)앞의 책, 159쪽. 10)위의 책, 160쪽.
예술은 투사 행위다. 인간에게 있어 먹을거리를 해결해주는 일차적 생산물이 아님에도 예술은 투사적 기능 덕택에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노래를 하면서 그리고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끊임없이 투사를 한다. 드라마의 비극적인 주인공의 안타까운 처지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성은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과 동일시와 전이가 이루어진 틈 사이로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성이 주인공과 한 마음이 되어 속 시원히 울었다면 투사적 정화를 경험한 것이 된다. 더욱이 예술가가 예술행위를 몸소 체험할 때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 예술가의 행위를 바라볼 때 언제든 투사는 작동한다. 이를테면 미술치료에서 참여자는 스스로 종이에 뭔가를 그림으로써 자신을 투사한다. 음악치료 역시 발성과 호흡을 통해 소리를 냄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찾아낸다.
관객이 공연장을 찾는 이유가 꼭 재미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물론 연극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기꺼이 관객이 되려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무대를 향한 나의 시선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무대는 일종의 거울이다. 나의 눈은 극적 인물로 향하고 있지만 그들은 반사체가 되어 곧바로 나의 모습을 투영한다. 월셔도 『역할연기와 정체성』(1982)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 사람들이 꾸준히 공연장을 찾는 이유는 거기에서 자신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장은 우리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바탕을 이룬다. 자기 자신을 보러 가는 것은 본다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개인에게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11) 이미 언급한바 연극은 자체적으로 정화와 치유의 장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정의 정화를 비극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것은 어느 예술보다도 연극이 정화 기능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극적 치유의 기능에 대해서는 많은 연극치료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제닝스는 “사람들을 일상생활에서 배우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이야기와 장면 속으로 옮겨 놓을 때 연극은 그 자체로 치유일 수 있다”12)고 언급한다.
그런데 연극이 치유의 예술일 수 있는 까닭은 연극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투사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연극 무대가 아무리 사실적이고 사실적인 연기를 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그곳이 상상력과 창조력이 작동하는 허구의 세계라는 점이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관객은 무대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연극적 ‘관례’에 의해서건 “불신의 자발적 중지”13)로부터건 관객이 허구의 세계를 인정할 때 그곳은 나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공간, 즉 투사의 장소가 된다. 홀랜드는 “왜 우리는 연극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일까 혹은 그것이 변화와 무슨 관계일까 하고 질문하면서, 우리는 공연이라는 외부의 현실에서 우리 안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한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그가 말한 공연으로부터 내적인 우리의 모습을 탐색하도록 하는 것이 투사이다.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이 모두 투사에 참여한다.”14) 배우가 역할과 동일시되었을 때, 관객이 스스로를 무대의 인물에 덮어씌우기를 하였을 때, 즉 투사를 실천할 때 자신을 직시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연극은 땀을 흘리는 실제 배우와 대면하면서 살아있는 투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예술이다. 직접적인 참여와 소통으로 날것의 투사가 두드러지는 예술이 연극과 같은 공연예술인 것이다.15) 연극이 진행 중인 공간은 투사의 공간이다. 배우와 배우 사이, 배우와 역할 사이, 배우와 관객 사이,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종횡으로 투사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받아들이고, 또 다시 발산되는 순환이 일어난다. “살아 있는 연극이 객석에 앉아 있는 살아 있는 우리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16) 관객은 무대를 오감으로 지각하면서 또 다른 현실이나 달콤한 환상으로 도피하는가 하면 실제 삶 속에 존재하는 관계와 갈등과 주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감정의 완만하고 격렬한 흐름을 경험한 관객이 극장 밖으로 나설 때는 변형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생각과 결심을 한 상태가 된다.17) 관객이 공연을 통해 벅찬 감동을 경험하는 것은 충실한 감정이 입을 전제로 하지만 그의 감정은 가슴에 머물지 않고 다시금 극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무대를 향해 투사된다. 그리하여 어느덧 적대적인 인물과 우호적인 인물에 대한 제각기의 깊은 정서를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게 된다. 한편 배우는 관객의 에너지를 느끼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뜻밖의 정서를 발산하게 되고 어제의 공연과는 전혀 새로운 연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주고받음, 즉 투사의 작용과 반작용의 순환적 결과로부터 관객은 예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게 되고 배우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감정의 최고조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현대연극에서는 배우와 관객의 직접적인 대면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사실주의 연극에서 관객은 단순히 응시적 태도를 지닌 수동적 존재였다면 서사극이나 잔혹극 또는 실험극에서는 관객을 제 이의 배우 혹은 배우 자체로 보려는 경향이 크다. 참여자로서 관객-배우가 될 때 투사는 더욱 강렬해지는데 실험극이야말로 투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18) 이제 관객은 과거의 관객과는 달리 어두운 객석에 묻혀 관음적인 시선을 밝은 무대를 향해 던지지 않는다. 무대의 인물이 고스란히 투영된 관객은 등장인물에게 투사를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듯 자기를 향해 돌진한다.
배우가 하나의 역을 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연기론과도 관계가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의 자기와 역할이 하나로 통합될 때 가장 훌륭한 연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디드로나 브레히트는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을 때 최고의 연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연출가들은 이 역설적인 두 관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시각을 첨가하여 새로운 연기론을 설계한다. 그런데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배우가 자신 원래의 개성과 정체성을 완전히 죽이고 새로운 역할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목소리와 신체처럼 생물학적으로 이미 주어진 외적인 조건뿐 아니라 그가 지닌 내적 성격은 그만의 고유한 역할을 창조하도록 한다. 따라서 배우의 긍정적인 자세는 역할 속에 들어갈 때 자신을 벗어던지기보다는 자신을 파악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기반으로 한 냉정한 연기란 동화로 인해 생겨나는 몰입과는 정반대의 개념일까? 그렇지 않다. 자기라는 출발점에서 시작된 마라톤은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몰입의 상태로 빠져든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비정상적으로 가빠진 호흡과 열기가 가득 찬 몸짓은 온전히 달리기의 세계 속에 빠져든다. 이 때 혼신의 힘을 다해 역주하는 마라토너는 꿋꿋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주체는 사라진 상태가 된다. 의식 없이 몸이 스스로 달리는 상태는 배우가 주어진 역할과 전적으로 통합된 상태인 것이다.
배우가 역할에 몰입한다는 것은 전적인 동일시의 단계를 넘어 투사에 이르는 투사적 동일시19)를 의미한다. 희곡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신이 맡은 등장인물에게 자기를 대입시키는 것은 동일시의 상태일 것이며, 무대에서 연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내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인지 인물이 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은 투사가 작동한 덕분이다. 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 역할 벗기를 시도할 때 허탈감이 엄습하는 것은 동일시와 투사로 인해 익숙해진 역할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연극치료의 마무리 단계에서 점진적인 역할 벗기로 투사적 몰입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런데 만일 배우가 맡은 역할이 우연히도 자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어떠할까? 자신의 과거 혹은 경험과 일치하는 역할을 맡았을 때 배우는 특이한 전이의 감정을 느낄 것이며 이 때 투사는 더욱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부인되거나 억압받거나 외면당한 배우의 감정 혹은 인성의 어떤 측면들이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의해 표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20) 존스는 배우의 투사의 한 예로 셰익스피어 왕립 극단의 배우인 브라이언 콕스가 리어왕을 연기하면서 투사로 인해 어떻게 인성적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가불가>(이현화 작, 채윤일 연출)에서도 배우의 투사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의 시작에서 배우들은 일상과 연극을 혼용하듯 불 켜진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분장을 하거나 대사를 읊조린다. 그들 중 극중인물 남자1은 다양한 역사 속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점차 극 속에 빠져든다. 극이 진행되면서 배우이자 극중인물인 남자1의 투사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대단원에 이를 때쯤 남자1은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현실과 연극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것은 현실 속의 나와 연극 속의 역할을 혼동한다는 뜻이며 투사가 확실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남자1은 실제로 칼을 내리쳐 다른 역할을 살해하고 만다. 또 다른 작품 <카덴자>(이현화 작, 채윤일 연출)의 등장인물에는 여자관객이 있다. 이 인물은 실제로 객석에 앉아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연기자들에 의해 무대로 끌려 나와 고문을 당한다. 여자관객은 마치 관객인 양 무대에서 행해지는 고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자관객은 무대의 인물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만다. 메타연극의 기법 속에서 배우와 관객과 역할 사이에 완벽한 동일시가 이루어지면서 역할의 죄를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일상과 닮아 있는 무대는 구체적이고 유연한 투사의 장소다. 이야기와 몸짓으로 또 다른 현실을 그리는 공연 중인 무대에서 투사가 입체적인 펼쳐진다. 관객이 무대의 인물을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무의식을 무대 위의 인물에 전이시킬 때 투사는 더욱 극적이 된다. 예를 들어 고인이 된 아버지에 대한 깊은 회한을 갖고 있는 한 관객이 늙은 아버지와 아들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그는 순간적으로 극중의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고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전이시킬 것이다. 그는 전이된 감정으로 인해 공연 내내 아버지 생각에 몰두하게 되고 격한 감정이 생겨나면서 눈물을 쏟아낼 것이다. 극적 행동에서 생겨난 동일시와 전이로부터 관객은 분노와 용서, 후회와 자책의 투사적 감정을 체험하는 것이다. “배우를 지켜볼 때 관객은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몰입하기도 하고 동시에 거리를 두어 멀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극중 인물과 관계를 맺거나 혹은 인물들을 통해 체험되는 서사적 행동과 관계를 형성한다. 이 두 과정을 동일시와 투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23)
앞서 언급한 <카덴자>의 공연에서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 공연에서 전기고문에 시달리는 여자관객을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한 남자관객이 “안 돼!”라고 외치면서 실신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24) 현실과 무대를 혼동하고 극적으로 감정을 이입한 그 관객이야말로 투사를 완벽하게 경험한 관객일 것이다.
11)Jones, 앞의 책, 171쪽 참조. 12)Jennings, 앞의 책, 25쪽. 13)Jennings외, 앞의 책, 186쪽. 현대 연극사를 보면 사실주의 연극이 크게 부흥한 이후에 생겨난 전위극 및 실험극들은 가능하면 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에서 탈피하여 연극적인 관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극장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문학의 연극에서 연출의 연극 혹은 배우의 연극으로 바뀐 것이다. 말하자면 관례나 불신의 자발적 중지를 더욱 과감하게 활용하면서 관객을 적극적으로 극적 상황에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가 수동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극 태도를 지닐 때 관객은 무대라는 거울에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비춰볼 수 있다. 14)Jones, 앞의 책, 218-219쪽. 15)소설이나 영화는 약간 다르다. 이차원의 종이나 스크린이나 화면을 바라볼 때 생기는 투사는, 몸으로 움직이거나 그려내는 미술이나 음악, 무용이나 연극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화의 경우 생생한 이미지 덕택에 밀도 있는 현실감을 맛볼 수 있지만 직접적인 참여는 불가능하다. 즉 픽션과 현실의 엄격한 경계로 인해 투사의 밀도가 약화되는 것이다. 소설가로 출발한 사르트르가 연극이 지닌 관객과의 교감 및 즉각적인 피드백에 매료되어 희곡을 썼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6)Jennings, 앞의 책, 26쪽. 17)위의 책, 26쪽. 18)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 연극적 기법을 많이 활용하는 것은 바로 연극의 이곳-지금의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체성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옹호하면서 현재의 문제에 집중하는 게슈탈트 심리치료 역시 연극의 투사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9)여기에서 투사적 동일시는 투사와 동일시가 동시에 작동한다는 뜻이 강하다. 대상관계이론에서 누군가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타인의 반응을 조정하는 대인관계 행동유형의 투사적 동일시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20)Jones, 앞의 책, 219쪽. 21)위의 책, 같은 면. 22)<카덴자> in 『이현화 희곡 시나리오 전집2』, 100-101쪽. 23)Jones, 앞의 책, 171쪽. 24)연출가와 필자와의 인터뷰. 2012. 5.
자기의 무의식을 다른 대상에게 덮어씌우는 투사의 정신적·심리적 과정은 연극치료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연극치료에서 투사는 방어기제의 심리적 작동 방식이 아닌 연행적 행위로써 자신과 허구의 인물 간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극장에서 관객은 자신을 극중 인물의 딜레마와 감정적인 상황에 투사한다. 이와 비슷하게 연극치료에서 참여자는 가상의 인물이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사물을 가지고 놀거나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신화를 연행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정체성을 취함과 동시에 자신이 여러 양상을 극적인 내용에 투사한다. 집단과 자기 속에 작은 극장을 하나 짓는 것이다.”25)
연극치료에서 투사는 치료적 극화의 균형 잡힌 형식을 창조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투사를 극적 형식과 연결시킴으로써 참여자가 내면의 갈등을 외적으로 재현하는데 참여하고 창조하고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랜디가 말한 치료적 극화이다.26) 연극치료에서 참여자가 행하는 재현은 자체적으로 투사적이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참여자가 역할을 통해 혹은 역할을 향해, 내면의 비합리적 문제를 발견하고 표출하는 일련의 과정은 투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기 것임에도 부정하고 싶은 감정, 자기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심정은 심리치료나 연극치료에서 동일한 맥락이지만, 투사가 극적인 형식으로 넘어갈 때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 연극치료에서 투사가 제대로 작동하는 위해서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투사는 참여자의 내적 감정의 특성과 영향력을 취하여 드라마를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기능해야 한다. 다음 단계로 역할, 가면, 인형, 사물놀이 등의 극적 형식을 통해 투사의 정체를 탐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극치료에서 투사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연극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 그리하여 허구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수긍하게 되었을 때 다음 단계인 다양한 극적 방식으로 투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참여자는 투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문제를 표현하고 탐험할 수 있게 된다.”27)
일련의 연극학자들은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기본을 이룬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이 점은 연극뿐만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도 그 세계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극이 다른 예술에 비해 자신의 이해와 파악에 있어 좀 더 효율적인 까닭은 실체가 내 앞에서 말하고 울고 웃으며 나의 감정과의 동질화 및 생생한 동감을 일궈내기 때문이다. 현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비록 비사실적이라고 하더라도 무대를 허구적으로 바라보는 관객은 없다. 현실과 허구의 변주로 짜인 무대는 나의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이 외부의 현실은 곧장 나의 안으로 향한다. 홀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공연이라는 외부의 현실에서 우리 안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때 작동하는 것, 즉 연극에서 자신을 바로 보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투사인 것이다.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 모두는 언제나 투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28)
일반적으로 동일시와 투사는 표리 관계로 작동한다. 타인이 나에게로 향하는 동일시와 반대 방향인 투사는 타인에게 나의 심리적 상황과 감정을 덮어씌운다. 타인에게서 출발하여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동일시라면 나에게서 출발하여 타인에게 덮어씌우기를 하는 것이 투사인 것이다. 동일시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음에 반하여 투사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 주안점이 둔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감정을 타인에게 덮어씌운다는 것은 내가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그렇게 바라본다는 뜻이 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어진다는 것이다.29) 새 소리를 들었을 때 개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새소리는 울음소리로 또는 노랫소리로 들릴 수 있다.30) 이런 관점에서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일종의 투사작용이며, 연극치료 역시 극적 행위 속에서 실상과 허상, 내면과 외부의 역동적 관계, 자기와 역할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창조적 투사를 활성화시키는 치료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31)
연극치료에서 투사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존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32) 첫째 연극치료에서 극적 투사는 내적 갈등을 외현화하는 과정이다. 외현화는 참여자가 자신의 경험을 극적 내용이나 연행에 투사할 때 더욱 활성화된다. 즉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극화하거나 유사한 문제를 제기하는 기존의 이야기(설화, 민담, 전설 등)를 각색하여 행동과 움직임이라는 연극적 요소를 가미할 때 참여자에게 투사는 더욱 능동적으로 행해진다. 나아가 극적 언술과 행동은 새로운 관점을 창조함으로써 자기 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투사된 내용의 역할 연기를 통해 자기 탐험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극적 투사는 참여자의 주제 탐험의 수단으로서 극적 과정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사실상 현실에서 극적 허구의 세계로 단번에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낯선 환경 속에서 목소리를 변형시키거나 일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참여자로서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참여자는 극적 과정으로 진입하고 몰입을 해야만 비로소 문제의 실체가 파악될 수 있다. 진입과 몰입은 현실의 인물이 극중 인물에 다가섬을 뜻하는데 이 경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투사다. 셋째 극적 표현은 참여자의 문제를 새롭게 재현하도록 한다. 연극의 실천은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현실의 창조다. 따라서 참여자가 문제를 지닌 한 인간을 연극적으로 재현할 때 그는 거리를 유지한 채 극 속의 자기와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극 속의 인물(또 다른 자기)이 고정된 인물이 아니라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다는 점이다. 참여자는 극중 인물에 투사를 함으로써 현실에서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정서들을 보다 쉽게 노출시킬 수 있다. 이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거리두기에서 생겨나는 안전함이다. 투사를 행하는 참여자는 현실-극이라는 이중의 세계 속에서 비현실의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심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된다. 넷째 투사를 통해 참여자의 내면 상태와 그 외적 표현 사이에 극적인 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참여자가 역할에 투사를 하여 대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와 자기 사이의 속삭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자기가 큰 소리로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더구나 몸짓과 움직임이 수반되었을 때 극적 대화는 더욱 현실적이다. 다섯째 참여자는 표현과 탐험을 통해 문제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여섯째 이로부터 새로운 관계 안에서 문제의 재통합이 일어날 수 있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연극치료의 후반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한 후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단계와 그로부터 문제를 재통합하고 치유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제닝스는 인간의 발달단계를 극적인 측면에서 체현(Embodiment), 투사(Projection) 그리고 역할(Role)의 3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체현-투사-역할의 3단계는 아동발달단계의 초석으로서 심리적·신체적·정서적 발달의 모태가 되는 극적 발달단계다. 이 극적 발달은 자기와 타자의 존재를 확립하고 분별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의 신체와 정신과 관계를 맺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자기와 타자의 정체성 형성 없이는 관계 형성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EPR은 정체성의 확립을 뜻하며 정체성은 심리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구조체를 의미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일상적 현실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을 키울 뿐 아니라 ‘자기됨’과 ‘타자됨’을 분명하게 이해한다.33)
체현과 투사 그리고 역할의 학습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집단적인 사회활동에 적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체현은 자기에 대한 탐구이며, 투사는 외부와의 관계 맺기이고, 역할은 타인과 외부세계로의 완연한 이동인 까닭에 EPR은 자기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타인과 외부세계로 영역을 넓혀가는 단계가 된다. 요약하면 첫 번째 단계인 체현은 언어 이전이자 신체적으로 걷기 이전의 시기다. 두 번째 단계인 투사는 돌을 지나면서부터 걷기 시작하고 행동반경이 확장되고 언어 능력이 향상되는 시기로써 아동은 사회성을 학습한다. 세 번째 단계인 역할은 폭발적인 어휘의 증가와 더불어 주변 사계에 대한 호기심과 관계의 확대로 사회성이 진일보한 단계다.
이 단계 중 투사는 시기적으로 프로이트의 항문기와 겹친다. 이 시기에 아동의 리비도는 항문 부위에 모아지며 대소변을 통해 쾌락을 느끼게 된다. 배설은 내부의 것이 외부로 향한다는 점, 정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체적 투사가 된다. 또한 이 시기는 에릭슨의 제 2단계, 자율성 대 의혹의 시기다.34) 이시기에 아동은 새로운 것에 더욱 관심을 갖고 조직 활동도 왕성해진다.35) 아동은 인형, 공, 블록 등의 장난감을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하며 본격적인 모방이 시작된다. 대소변을 가림에서 자율성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는 에릭슨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항문기를 좀 더 발전시킨 것이다. 나아가 자율성과 자기 강화 또는 사회성과 의지, 본격적인 모방은 투사를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다. 투사는 ‘나’(I)의 확립과 존중이 생겨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는 피아제의 감각운동기와 전조작기에 해당한다. 감각운동기의 아동은 사고가 시작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 정신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동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데 이때 투사 기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양육자나 주변 사람과의 분리는 자율성과 의지를 획득하고 자신을 인지하는 과정으로 이는 새로운 관계 형성을 의미하며 자아의 탐색 과정이 된다. “투사는 자신과의 분리다. 그것은 관계 형성의 기초가 된다.”36) 다음 단계인 전조작기는 전개념기와 직관적 사고기의 두 단계로 구분되는데 내용상 전개념기 역시 제닝스의 투사단계에 해당한다. 전조작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언어발달은 곧 인지발달이며 사물이나 사건을 내재화할 수 있는 능력이자 기억과 표상 능력이다. 이 시기의 아동은 자기중심성, 상징놀이, 물활론, 도덕적 타율성, 꿈을 외적 사건으로 생각하기, 보존개념의 부족 등으로 특징지워진다. 투사단계인 전개념기의 사고적 틀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기중심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동은 점차 외부의 사물에 흥미를 보이며 투사를 하거나 투사 놀이(projective play)를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곰 인형을 가지고 단순히 놀이를 하는 것에서 진일보하여 “고양이 기분이 나쁘다, 어릿광대가 배고프다, 곰 인형과 토끼가 해변에 간다든가 하는 좀 더 복잡한 시나리오로 나아간다.”37) EPR에서 체현 단계에서 투사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외적인 사물에 자신의 감정을 덧씌우기를 할 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난감도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입이 가능한 대상으로 변하면서 진정한 투사놀이가 시작된다.
한편 제닝스는 투사놀이에서 ‘이야기’와 ‘음악’의 중요성을 언급한다.38) 감각과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체현 단계에서 영아가 내는 소리를 간단한 명사들의 모음이라고 한다면, 투사 단계는 명사와 동사가 곁들인 단문이 될 것이며, 역할 단계에 이르러 복잡한 문장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투사에서 이야기는 옹알이로부터 어휘의 사용과 확장을 의미하며 다음 단계인 역할에서 필수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때 음악과 미술은 투사놀이의 도우미 매체가 될 것이다. 흥얼거림이나 리듬에 맞추어 소리내기 이외에도 사물과 사물이 부딪치며 내는 원시적이고 리듬적인 타악기의 소리는 투사놀이를 원조한다. 덧붙여 음악의 사용은 몸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 줄 것이다. “리듬과 멜로디에 따라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어느 덧 자신에게 아주 익숙했던 본래의 신체적 움직임을 되찾게 되고 이러한 움직임의 목적은 자신의 본래 모습에 보다 쉽게 다가가고 이를 인식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39) 투사놀이는 음악 뿐 아니라 미술적 요소의 활용도 가능하다. “투사적인 놀이에는 그림 그리기, 색칠하기,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 만들기, 찰흙 놀이, 조각 그림 맞추기 등이 있다. 아이들은 투사적인 놀이를 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자기 바깥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40)
연극치료에서 인형, 꼭두인형, 가면은 흔히 사용되는 투사의 대상물이며 색종이, 찰흙 등도 자주 활용된다. 사실 연극이 무한한 상징과 은유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곳 존재 자체만으로도 투사는 가능하다. 상자, 빈 의자 나아가 빈 공간도 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투사가 쉽게 형성되는 것은 도상적 성격이 강한 대상물로써 인간의 형상을 닮은 가면이나 인형과 같은 것이다. 참여자는 인형이나 가면을 “가지고 노는 과정에서 거기에 투사된 특질들을 인식하면서 내담자는 혼란스런 감정이나 행동을 유발한 자기 내면의 특질들을 발견하게 된다.”41) 닮음은 동일시 뿐 아니라 투사를 이끌어 내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랜디는 연극치료에서 대상물에 대한 투사를 중시한다. “투사기법이란 사람의 여러 양상들을 인형, 장난감, 꼭두인형, 가면과 같은 대상에 투사하는 연극치료 접근법을 통칭한다.”42) 이 때 투사작업은 “퍼슨보다는 페르소나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허구와 상상의 영역으로의 이동을 내포한다. 따라서 참여자는 극적인 투사 작업을 하면서 나와 나 아닌 것의 역설을 살게 된다.”43) 즉 배우가 역할에 투사하듯, 관객이 배우에게 투사하듯, 참여자는 인형이나 가면에 투사를 하게 된다. 참여자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투사를 하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어떤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또한 투사의 대상이 비인격적일 때 인격화라는 상상력이 필요하며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투사 대상과 대면하고 있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페르소나)이나 주어진 역할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초점 조절이 성공하게 되면, 참여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나와 일종의 사회적 가면을 착용한 페르소나 혹은 역할이 동시에 현존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 그리하여 숨기고 싶은 나의 이중적 자아, 융이 말한 그림자나 프로이트의 이드 등과 중첩 또는 반향이 되면서 이를 똑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존스는 투사의 기능은 참여자의 내적 감정의 특성과 영향력을 취하여 드라마를 가능케 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하고, 투사의 정체를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역할, 가면, 인형, 사물놀이 등의 극적 형식을 통해서라고 밝히고 있다.44)
25)Jones, 앞의 책, 172쪽. 26)Landy, 앞의 책, 217쪽 참조. 27)위의 책, 218쪽. 28)Jones, 앞의 책, 219쪽 참조. 29)Osami Fukushima·성정애 지음, 김세곤 옮김, 『자기이해를 위한 심리학』, 공동체, 2007, 30-32 쪽 참조. 30)이처럼 개인의 주관적 시선, 개인적 정서에 따른 외부 현실의 지각은 예술 창조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존스는 투사를 통한 예술 창조의 예로 뭉크의 <절규>를 들고 있다. 뭉크는 해변을 산책하면서 우연히 일몰의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때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면서 마치 “자연을 찢어내는 크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 화가의 불안과 절망의 감정을 바닷가에서 펼쳐진 일몰의 장면에 투사하였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절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과 절망의 감정을 그림으로 투사하여 이를 재현하고 탐험하였던 것이다. 31)Jones, 앞의 책, 214-215쪽 참조. 32)앞의 책, 173쪽 참조. 33)Jennings, 앞의 책, 79-80쪽 참조. 34)아동은 상충되는 것들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자율성을 학습한다. 신체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된 아동은 행동반경과 탐색영역도 넓어지고 음식 섭취도 자율적으로 이루고자 노력한다. 자율적인 된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이 강화되는 것으로 언어 사용에서도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주장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신체적·인지적 환경에서 배설은 자기 신체의 통제능력을 의미하며 배설로 인한 부모의 칭찬과 꾸지람은 사회적 기대나 압력을 분명하게 깨닫는 계기가 된다. 배설을 스스로 실행하게 되었을 때 생겨나는 자신감은 자율성의 결과이며 그 반대는 자신감이 결여된 의혹이 된다. 반대로 배설의 실패로 부모나 사회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 수치감과 회의감이 생겨난다. 에릭슨에 따르면 아동은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자율성의 성장 동기인 의지가 강화된다. 의지는 판단력과 분별력으로 충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 수치심을 주고 자괴감에 빠트릴 수도 있다. 발달장애 아동을 치료할 때 우선적으로 배설의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35)박미리, 『발달장애와 연극치료』, 학지사, 2009, 90쪽. 36)Jennings, 앞의 책, 72쪽. 37)위의 책, 72쪽. 38)위의 책, 같은 쪽. 39)박미리, 앞의 책, 89-90쪽. 40)Jennings, 앞의 책, 73쪽. 41)Landy, 앞의 책, 217쪽. 42)앞의 책, 217쪽. 43)위의 책, 같은 쪽. 44)Jones, 앞의 책, 218쪽.
펄스가 언급했듯이 가장 건강한 투사의 형태는 예술이다. 그 중 연극은 특히 투사의 예술이라 할 만큼 다중적이고 생생한 투사가 종횡으로 투여되는 장소다. 따라서 연극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연극치료에서 투사기법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치료의 참여자는 역할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고 때로는 관객이기도 하면서 내면의 갈등을 외현화시키므로, 다층적 투사를 적절하게 활용할 때 연극치료의 치유적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연극치료에서 투사는 통찰과 자아인식, 궁극적으로 인식의 변화와 실천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자기만족이나 의식적인 보호물에 숨어 버리기가 아니라 떳떳한 자세로 긍정적 정서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연극치료에서 극적 투사는 내면의 감정적 상황과 외부의 형식과 존재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를 창출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현상이다.”45)
랜디가 연극치료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 역할 역시 투사작용을 기반으로 한다. “로버트 랜디의 확장된 극화는 투사기법 중 가장 심화된 접근방식이다. 허구적 인물과 그들의 극적 관계를 통해 개인의 특성, 가상의 가족 혹은 공동체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극적 투사는 무엇보다 각 개인과 집단의 역할을 포함한다. 그리고 역할은 인간 행동의 전반을 포함한다. 행동이란 육체적이든 음성적이든, 또는 정신적이든 간에 모든 인간의 반응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때 나타나는 투사적 이미지는 참여자의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46) 이렇게 볼 때 역할을 향한 투사는 연극치료의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자신의 양심과 자존감을 회복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소통의 방식이 학습되면 스스로 정서적인 안정감이 생겨난다. 사회적 역할 혹은 극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시킬 때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충만해지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확대된다. 이는 랜디가 역할이란 자신과 타인의 사고와 감정을 아우르는 그릇이라고 정의한 것과 상통한다.”47) 나아가 이 점은 역할 수행을 위해 투사를 전제조건으로 밝힌 제닝스의 EPR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투사란 역할을 수행할 때 언제나 생겨나는 정신적 현상이다. 각자 역할을 지닌 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할 때 투사가 생겨난다. 상대에 따른 열등감, 질투, 호감이나 비호감 등은 투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때 건강한 투사가 이루어진다면 그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투사의 방식은 은유로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하며 은유적 투사의 작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인관계에 있어 심리적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아르토가 잔혹극에서 주장하는 절대적 통합이든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추구하는 거리두기든 양극단에 머물고 있는 이들 두 연극론은 신기하게도 투사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투사야말로 역할연기를 통해 적정한 거리를 인식하면서 발가벗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역할 또는 페르소나 또는 과거의 나와 일치를 이루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45)앞의 책, 172쪽. 46)이가원, 「투사적 이미지를 활용한 연극치료에 관한 연구」, 용인대학교 석사논문, 2011. 39쪽. 47)이선형·배희숙, 「예술치료를 위한 역할개념 연구」, 『한국연극학』 제 43호, 2011, 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