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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물질적 상상력의 시학 Poetics of Material-Imagination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물질적 상상력의 시학

I’d like to admit that we can not overlook Eimuntas Nekrosius’countribution, a theatre director of tiny country of Lithuania, to change worldtheatrical pivot from western European countries to eastern parts. One critic say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it is the first event to watch Lithuanian theatre in eastern European theatre, particularly Nekrosius’ theatre. And especially his theatres on Shakespeare can be represented as a symbol of development of the theatre."He suggests new alternative way in theatre as having experiments on symbolic communion happened between the text and actors’ psychological visual exploration. He is highly acclaimed as a theatre director who founds new poetics of staging Chekhov and Shakespeare.

In this study, I aim to analyze a variety of his theatrical images based on the phenomenology of material-imagination of Gaston Bachelard. Bachelard classifies the imagination in terms of distinct characteristics of poetry and painting, and regards that the imagination can be created by its various intrinsic images. In fact, what he points out as image of poetry and painting is very close concept to theatrical staging image, so I consider that it is appropriate method to use Bachelard’s theory to approach Nekrosius’ theatre.

Before staging Shakespeare, Nekrosius has been though staging Checkhov, Gogol, Chingiz Aitmatov or etc. After then, he decided to undertake new expedition to stage Shakespeare’s texts. Basically I am going to look into the characteristics of mise-en-scene of Nekrosius in this paper, and in order to understand it, it is crucial to comprehend what he chose as a text to stage. That is why I am also going to look into the alteration of choosing a text before and after Shakespeare.

KEYWORD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 , 셰익스피어 , 바슐라르 , 물질 , 물질적 상상력.
  • 1. 서론

    세계연극의 지형도가 유럽에서 우회하여 동쪽으로 좌표이동을 하게 된 원동력은 소비에트 연방의 작은 속국이었던 리투아니아의 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Э. Някрошюс)의 영향이 크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발틱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의 연극, 그 중에서도 네크로슈스의 연극은 동시대 유럽 연극계의 첫 번째 사건이었으며”2) 그의 대표작품이라 평가되는 셰익스피어 삼부작은 발전을 거듭하는 세계연극의 최후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나 유럽의 현대연극은 네크로슈스 무대가 선보이는 텍스트와의 상징적 교감, 그것을 통한 배우 심리의 시각적 탐색이 연극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가 읽는 체홉과 셰익스피어는 고전작품의 새로운 시학의 세계를 정립하였다고 평가하며 네크로슈스의 무대를 스스로 자신들의 위기를 인정하는 계기로 삼기까지 한다.

    본고는 무대 위 네크로슈스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바슐라르(G. Bachelard)의 ‘상상력의 현상학’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바슐라르의 경우 상상력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를 시와 미술이라는 장르적 특수성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의 ‘창조됨’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나, 그가 언급하는 시와 미술에서의 이미지가 무대의 그것과 친연하다는 점에서 연극무대가 방출하는 이미지들을 바슐라르의 상상력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필요충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상상력의 소통이 필요한데, 그것은 결국 “허황된 공상이 아닌 견고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강이자, 이 상상력의 강이 이어주는 지점은 서로 떨어져 있다고만 여겨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상력이 머무는 자리이며, 이를 연계시켜주는 것이 바로 상상하는 자들 간의 소통”3)임을 강조한다. 바슐라르가 상상력의 울림이라고 언급하는 시인과 수용자 간의 ‘소통’의 개념은 객석과 무대사이의 울림을 태생적 특질로 하는 연극무대에서의 ‘소통’과 ‘수용’의 개념과 이해적 맥락을 같이할 것이다. 이 점에서 바슐라르가 말하는 이미지와 상상력, 그리고 연출가의 수행자 텍스트가 행하는 무대적 상상력과 그것이 방출하는 이미지 사이에는 상당한 교접의 지형이 있다. 더군다나 그러한 소통하는 자들 사이의 ‘울림’이 미술과 문학처럼 창작자의 상상력이 발동한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현존하는 상태에서 동시에 울림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바슐라르의 미적감동과 울림은 무대 위에서 더욱 그 존재가치가 증명된다.4)

    1952년 리투아니아의 작은 시골 실루바(Шилува)의 줴마이찌야(Жемайтия)에서 태어난 네크로슈스는 대학을 입학하기 전 근 20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리투아니아 북서쪽에 위치한 줴마이찌야는 대표적인 인종지학, 민속지학적 연구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리투아니아 민족의 이교적 전통이 가장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순수 리투아니아 혈통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시골도시는 15세기까지 계속된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자신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해 가장 끈질긴 염원을 드러낸 것으로 유럽사는 평가한다.

    줴마이찌야는 최근 네크로슈스의 무대 상상력과 이미지의 원천으로 유럽 현대연극사에서 종종 거론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무대가 선보이는 새로운 무대적 상상과 이미지의 시학이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교도적이고 인종지학적인 측면과 연계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와 관련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지만, 그의 무대 위에 펼쳐지는 기억과 꿈은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리투아니아라는 민족의 공간과 시간이 무대 위에서 재구축된 것이며 그것이 특별한 희곡 텍스트와 교접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나타난 네크로슈스 무대의 수많은 이미지들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친 연출가 개인의 삶의 공간과 시간, 그것의 의식적․무의식적 경험들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네크로슈스 무대 위에 올려 진 수많은 물질은 바슐라르의 언급처럼 ‘사실적인 설명’보다는 “오직 감정적인 구도 위에서만 이해 가능한”6)것이며, 하여 그의 작품 속 물질들의 원시성을 ‘정서적 관심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바슐라르는 예술작품 속 물질들을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러 버린다면, 그것들이 물질적 상상력에 주는 놀라운 자극의 은혜를 곧장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7)라고 말하며, 예술작품 속의 물질을 단순히 형태적인 차원에서 판단하는 일로는 예술이 주는 몽상의 세계를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적 불에 대한 직관들을 떼어내 버린다면, 그 즉시 모든 시와 모든 꿈이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8)고 했는데, 네크로슈스의 작품 속 물질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할 것이다.

    본고는 네크로슈스의 작품 중에서도 그의 연출방법론이 명징하게 나타나는 셰익스피어 삼부작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셰익스피어 삼부작에 등장하는 ‘물’과 ‘불’, ‘얼음’ 등과 같은 물질들은 바슐라르가 예술작품 속 물질이미지와 시인의 상상력을 언급하면서 거론한 물질 그 자체이자, 근본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물질적이라고 할 때 그 기본적 물질로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바, 네크로슈스 무대의 물질을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읽는 것은 그의 무대에 대한 연구에 있어 선행되어야할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체홉, 고골, 징기스, 아이트마토프(Ч. Айтматов)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무대화하던 초반기 연극행보에서 네크로슈스는 셰익스피어를 거치며 새로운 텍스트로의 탐험을 시도한다. 그 최근의 과정에서 네크로슈스는 리투아니아 민족의 대서사시와 성경, 괴테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텍스트 선택의 변화 과정에서 볼 때, 셰익스피어는 그가 ‘텍스트 이후’로 가는 일종의 경계가 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네크로슈스의 무대 텍스트의 선택에 대한 이해는 그의 연출세계를 거대한 지형도 위에서 조망하기 위해 반드시 살펴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선행연구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본고는 셰익스피어를 기점으로 하는 네크로슈스의 무대텍스트 선택의 변화에 대해 앞서 살펴보고자 한다.

    1)바흐틴,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6, 258쪽.  2)М. Давыдова, “Смерть в Венеции”, Время новостей 12/01, 2000.  3)유제상, 「‘물의 신화’와 상상력에 관한 연구-G. 바슐라르의 『물과 꿈』을 중심으로」, 『글로벌문화콘텐츠 통권』, 글로벌문화콘텐츠 학회, 2010, 153쪽.  4)“바슐라르가 프로이드 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상상력 연구가 정신분석학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바슐라르가 구상하는 이미지의 역동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즉 프로이드식의 정신분석학적 상징이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인 성적 개념임에 비해 바슐라르식의 이미지는 훨씬 능동적인 기능을 지님으로써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바슐라르가 생각하는 이미지도 물론 무의식 속에 의미를 갖지만, 그 속에는 상상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필요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 심리현상이나 무의식의 깊은 심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비해 바슐라르는 이 현상적 중측적 이미지 속에서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보여 주고자 한다.” 홍성호,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과 흙의 이미지」, 『대한건설학』 36집 3호, 대한건설학회, 1992, 62쪽.  5)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 「리투아니아 녹턴」.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는 공간으로서의 리투아니아를 좋아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리투아니아에 관한 시선집이 있을 정도이다. 시인은 자주 이곳에서 시인이자 수필가인 토마스 벤츨로바와 화학자인 라무나스 카틸류스와 만났고, 시인을 만나러 다른 지역의 지인들이 러시아가 아닌 리투아니아로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6)바슐라르, 김병욱 옮김, 『불의 정신분석』, 이학사, 2007, 76쪽.  7)바슐라르, 이가림 옮김, 『꿈꿀 권리』, 열화당, 1980, 64쪽.  8)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79쪽.

    2. 텍스트와 텍스트 이후

    네크로슈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국립음악원(Литовская академ ия музыки и театра)에 입학하며 고향 줴마이찌야를 떠난다. 과묵하고 생각이 많은 청년 네크로슈스에게 이 국립음악원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찾아 세상과 소통하도록 하는 일종의 창구역할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약 1년 정도의 음악원 생활을 마무리 하며 그가 찾은 곳은 체홉의 세자매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모스크바, 모스크바였다. 러시아 공연예술교육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 국립연극원(Россий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еатра льного искусства)에서 네크로슈스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연출가들이 대거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배웠던 것처럼 자신의 연극행보를 위한 첫 발걸음을 띈다. 5년 담임지도교수체제로 교육되는 러시아 연출교육의 방식대로 그는 당시 마야코프스키 극장의 예술 감독이었던 안드레이 곤차로프(А. Гончаров)로 부터 연출수업을 사사 받는다. 네크로슈스의 무대와 러시아연극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첫 번째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9) 더군다나 곤차로프는 마야꼬프스키 극장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아방가르드적 색감과는 다르게 스타니슬랍스키, 아흘로꼬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정통 사실주의연극의 한 좌표이지 않는가.

    졸업과 동시에 네크로슈스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1978년 빌뉴스 청소년 극장(Литов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олодежный театр)에서 연출 작업을 시작하여 1992년까지 활발한 창작 행보를 이어간다.10) 당시 이 극장의 예술 감독인 타물랴비추테(Д. Тамулявичуте)를 자신의 연극적 스승이라 언급할 정도로 빌뉴스 청소년 극장과 네크로슈스의 관계는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뉴스 청소년 극장에서 1992년까지 자신의 연극적 스타일을 시험해 나가는데, 이 무대에서 연출한 작품들로는 모스크바 국립연극원의 졸업 작품이었던 <꿀맛(Вкус меда)>(1977)을 시작으로 <문 뒤(за дверью)>(1980), <사각형(Квадрат)>(1980), 그리고 <피로스마니, 피로스마니(Пиросмани,Пи росмани)>(1981), <베로나에서의 사랑과 죽음(Любовь и смерть в Вероне)>(1982), <백년보다 긴 하루(И дольше века длится день)>(1983),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1986), <코(Нос)>(1991) 등이 있다.

    15년 남짓한 빌뉴스 청소년 극장의 작업에서는 메노포르타스 극단(Мено Фортас)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90년대 이후 작품 스타일과 연출방법론의 징후들이 포착되는데, 빌뉴스 청소년 극장에서 자신만의 연극적 스타일을 유감없이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세계연극이 네크로슈스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물론 그의 셰익스피어 삼부작 때문이겠지만, 그의 70~80년대 대표작품은 현재 네크로슈스의 무대언어의 실험과 그것의 형성 과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 아닐 수 없다. 텍스트와의 심미적 교감을 통해 탄생된 오브제의 적극적 활용, 무대 위에 존재하는 역할들의 내면 심리의 시각적 형상화, 미니멀한 무대와 작품 저변에서 반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음악의 사용, 배우의 신체에 대한 지극한 관심 등, 현재의 네크로슈스의 작품을 평가하며 언급하는 모든 것들 또한 이 시기의 작품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나 1986년 무대화한 <바냐 아저씨>는 러시아 학술원이 출간한 『20세기 백편의 연극』에 선정될 정도로 유럽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책은 네크로슈스의 <바냐 아저씨>가 주제적 측면의 독창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무대언어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체홉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한다.

    네크로슈스는 스스로 자신을 “셰지샤트니키, 혹은 그들과 동년배의 연출가(Я–шестидесятник, я родом из того времени)”12) 라고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셰지샤트니키란 20세기 초반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절대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모욕당하던 시간, 세상을 그들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인민들을 위로하던 60년대 소비에트 지식인의 표상13)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사회적인 면뿐만 아니라 무대를 터전으로 삼고 있는 연극이라는 장르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데, “60년대 소비에트 무대의 셰지샤트니키들은 사회 곳곳의 권력관계는 저항을 통해 변화되기 마련이라는 꽤 실천하기 녹록찮은 과제를 부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들의 책임이자 윤리”14)라고 믿으며 연극의 정치적 글쓰기를 수행하였다.

    지금까지 네크로슈스의 무대를 정치적 글쓰기에서 바라본 경우는 없었지만, 네크로슈스의 이러한 고백은 그의 무대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제스처를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세자매(Три сестры)>(1995)는 네크로슈스의 그러한 정치적 제스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 중의 하나로 언급할만 하다. 극의 마지막에서 세자매는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를 되뇌며, 향수와 그리움으로서의 극행동이 아닌 관객석을 등지고 몸을 숙여 다리 가랑이 사이로 모스크바를 모욕스럽게 불러낸다. 가야는 하지만, 가고는 싶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한 작은 속국에서 너무나도 먼 곳인 모스크바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감정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일종의 유토피아이자 모욕의 장소이며, 그곳은 고향이자 타향인 곳이다.

    네크로슈스는 세지샤트니키들 중에서도 에프로스(А. Эфрос)와 그루지아의 연출가 스투루아(Р. Стуруа)의 무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이는 류비모프를 필두로 하는 타간카 중심의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적 연극과는 거리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를 볼 때, 에프로스와 스투루아가 추구하였던 연극에 대한 실험 정신, 그 중에서도 클래식 텍스트를 통한 동시대 사회의 존재론적 질문을 이끌었던 사유의 무대에 대한 경배와 그것에 대한 예술적 지향의 차원에서 스스로 자신을 셰지샤트니키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클래식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천착은 그의 무대가 러시아연극과 연관하는 접점을 확인할 수 있는 두 번째 중요한 지점이 된다. 그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연극세계의 영원한 고향으로 고골, 아이트마토프, 체홉,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들을 언급하였는데, 위대한 텍스트로부터 혹은 위대한 텍스트와의 비평적 투쟁을 통해 자신의 연출방법론을 실험한 것이다.

    클래식 텍스트와의 비평적 교감을 통한 무대 만들기, 그 중에서도 프로무대 데뷔작이었던 <코>는 고골의 독특한 문학적 양식이 네크로슈스의 작품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고골의 작품들 중에서도 <코>는 <외투>, <초상화>, <네프스키거리>, <광인일기>와 더불어 페테르부르크 작품 군으로 “특정한 공간, 즉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외에도 리얼리티와 환상의 이중성을 통해 독특하게 고골적인 세계 감각을 실현”15)시키고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고골의 문학적 양식으로 불리는 그로테스크는 단순하게 작품의 분위기가 이끄는 음산한 기운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반응이 전혀 익숙하지 않는 결과를 도출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플롯을 비롯한 모든 사건의 경과가 “언제나 독자의 예측을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며, 사건은 있되 그 사건이 텍스트 내의 세계에서 인식되는 방식이 관례적인 기대를 무산”17) 시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남들처럼 평범하게 응시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의 상황에서 약간은 삐딱하게 곁다리로 보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지는 새로운 시각의 형성에 다름 아니며 그 순간 고골의 그로테스크는 생산된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생성은 독자의 익숙한 상상에 딴죽을 걸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의심하게 하고 결국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하게 되는데, 고골의 문학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네크로슈스의 무대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이미지의 향연도 고골의 그것처럼 텍스트를 똑바로 보는 익숙한 방식과 시선으로부터의 탈출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게 하는데, 그가 셰익스피어와 체홉으로부터 전혀 다른 해석을 이끌어 내게 하는 무대적 원동력이 된다. 그 중에서 메노포르타스(Meno fortas)18) 초창기 작업에 해당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Гамлет)>(1997)은 다원화된 세계연극의 한 줄기 양식이자 장르로 인정받게 된다.

    리투아니아의 록가수 마몬타바스(А. Мамованатас)가 분한 햄릿은 붉게 염색한 머리에 귀걸이를 하고 검은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10대 청소년으로 등장한다. 막이 열린 <햄릿>은 죽음의 향연에 대해, 잔혹하게 얼어붙은 시간에 대해, 배신과 끝없는 고독에 대해, 결국은 이 모두를 합쳐 사랑이 없는 세상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스릴러로 재탄생했다. 무대 위에서 햄릿의 가슴을 파고드는 얼음비는 주요한 이미지를 다각도로 생산해내는 가장 중심된 물질이었다. <햄릿>을 시작으로 물질을 통한 셰익스피어 시학에 대한 실험은 그가 그동안 고민하고 무대 위에서 실험했던 자신의 연극스타일과 시스템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된다.

    네크로슈스는 <햄릿>의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꺼내든다. 1999년 러시아의 발틱 페스티벌을19) 통해 공개한 <맥베스(Макбет)>와 2001년 <오델로(Отелло)>는 온 세계가 기다리던 네크로슈스 식 셰익스피어에 다름 아니었다. 맥베스의 잘린 머리를 주물통에 넣어 뜨거운 돌로 만들고 마녀들이 그 머리를 다시 물에 넣어 식히는 과정은 네크로슈스의 물질을 통한 셰익스피어 시학의 구현을 다시 한 번 명징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오델로>와 연이어 이탈리아의 배우들과 체홉의 <갈매기(Чайка)>(2001)를 무대화 한 네크로슈스는 돌연 새로운 텍스트에 도전한다. 그것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도 체홉도 아니었다. 돈넬라이티스(К. Донелайтис)의 <사계(Времена года)>(2003)와, 성경의 한 구절에 해당되는 <솔로몬의 노래(Песнь песней)>(2004)는 고골, 아이트마토프,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체홉을 거친 네크로슈스가 당도한 새로운 텍스트들이었다.

    리투아니아의 성자와 시인들이 쓴 18세기 서사시의 스타일을 하고 있는 돈넬라이티스의 <사계>는 소수민족의 운명을 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살아 숨 쉬는 대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하루하루, 한 편으로는 평화롭고 또 한 편으로는 두려운 일상이 펼쳐진다. 이 작품에는 그 어떤 사건이나 줄거리 혹은 드라마적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대신해 이곳에는 자연에 대한 시적인 묘사와 농부들이 대지에서 일하는 장면들, 자연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골 촌부들의 잔잔히 풍경이 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농부들은 사계의 어느 것 하나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들에겐 빛도 어둠도 따뜻함도 차가움도 풍요도 공허도 모두 놀랍고 기적과 같은 자연의 섭리이다. 이 사이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어스름한 모습과 어둠을 밝히는 촛불, 촌부들의 검은 치마와 흙 묻은 남정네들의 셔츠가 카메라로 포착한 순간처럼 연극 속에 나열될 뿐이다.

    <솔로몬의 노래>는 『구약성서』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 왕의 여덟 개의 노래 중 솔로몬 왕 자신과 수넴 여인(Shulammite)의 대화체로 만들어진 4개의 노래를 기본으로, “그가 자신의 입술로 나에게 키스한다.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 보다 낫다”라고 하는 여성의 기쁨에 찬 외침으로 시작한다.

    두 연인은 이야기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예민하고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거짓 없는 본능으로부터, 동물적 본능과 감각에 맞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말하고 움직인다. 신이 창조한 태초에 ‘말’이 없었듯, <솔로몬의 노래>에서는 연출의 자유스런 상상의 이미지들이 무대에 그려질 뿐이다. 그 사유의 대상이 희곡이 아니고 성경이듯이 극의 ‘사건’은 <사계>처럼 성격이 아니라 분위기로, 주인공들의 성격은 말이 아니라 감성으로 변화한다. 사실 솔로몬의 노래가 성서의 일부분이라고는 하지만, 「아가서」는 신과 인간이라는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라는 또 다른 관계의 틀로 이해되고 있다. 네크로슈스가 솔로몬의 노래에서 주목하는 것은 올바른 두 인격체가 서로의 완성을 찾아 가는 ‘원초적 조화의 경험’이다. 그것은 네크로슈스에게 있어 ‘고향’이고 ‘가족’이며 ‘집’이다. 광활한 우주, 그 기초로서의 ‘집’인 것이다.

    <사계>에서도 보았지만, 네크로슈스는 유독 셰익스피어 이후 이러한 ‘대지’와 ‘집’에 집착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그가 무대화한 리투아니아의 대 서사시 <사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연출가는 기쁨과 설렘에 벅찬 두 연인의 노래를 정확히 리투아니아의 땅 위에 올려 두었다. 무대미술을 맡은 굴따예뱌(Н. Гультяева)는 셰익스피어와 체홉에서처럼 거친 질감의 재료들을 무대 위에 펼쳐놓는데, 이는 마치 농부의 창고에서 꺼냄직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 거친 질감들은 별다른 논리적 연관 없이 연출의 직관에 의해 연결된 에피소드 속에서 빌뉴스의 대성당을, 그 속에서 들리는 파이프 오르간의 화음을 만들어 내며 사랑이 충만한 대지 위의 평화를 그려낸다.20)

    텍스트의 발전에 입각해서 본다면, 연극무대의 클래식 텍스트인 고골, 아이트마토프와 체홉 그리고 인간이 만든 텍스트의 정점으로 평가되는 셰익스피어를 완벽하게 무대화 한 네크로슈스가 선택한 위의 일련의 새로운 텍스트 <사계>나 <솔로몬의 노래>는 갑작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 삼부작을 완벽하게 무대화했다는 것은, 당시 50줄에 드는 연출가에게 사실 그렇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텍스트에 대한 전진이 무엇보다 큰 고민으로 다가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연출가들의 생물학적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굵직한 클래식 텍스트를 완벽히 섭렵한 그는 아마도 셰익스피어 이후 희곡이라는 혹은 무대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텍스트의 자장 안에서 상당히 외로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성경으로 또 고대 리투아니아의 서사시로 방향을 틀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솔로몬의 노래>는 네크로슈스가 셰익스피어 이후, 즉 언어로 이루어진 활자화된 ‘텍스트 이후’에 손에 들을 법한 최적의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완벽하게 무대에서 구현한 네크로슈스에게 있어 이후 셰익스피어를 능가할 텍스트는 성경 외에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셰익스피어 이후, 즉 ‘텍스트 이후’의 네크로슈스의 무대텍스트의 탐색은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평가 가능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다음에 어떤 텍스트가 필요할까? 그가 종종 셰익스피어 삼부작에 대한 평단의 관심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떤 텍스트를 원하는가? 하는 대중의 질문에 종종 셰익스피어로부터 많이 피곤하고 이젠 지겹다고 말했듯이,21) 다시 체홉과 셰익스피어일 수는 없다. 과연 ‘텍스트 이후’의 또 다른 새로운 텍스트는 존재하는가? 성경으로 인간 밖의 세상을 탐독하고 온 그에게 무대는 어떤 텍스트를 선사할 수 있는가? <솔로몬의 노래> 이후, 세계연극계가 그의 신작에 대한 관심 이전에 그가 손에 잡을 텍스트가 무엇일까를 먼저 궁금해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화답이라고 하듯,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네크로슈스는 괴테의 <파우스트(Фауст)>(2006)22)와 도스 토예프스키의 <백치(Идиот)>(2009)를 가지고 다시 연극무대를 찾아온다. <솔로몬의 노래> 이후, <파우스트> 그리고 <백치>로 귀의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원인을 찾기란 불가능할 수 있겠지만, 셰익스피어를 거쳐 성경에 당도했던 네크로슈스에게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어떤 작가들에 비해 수긍 가능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와 <백치>는 인간이 당도할 수 있는 가장 철학적이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근간에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네크로슈스의 페르소나인 바그도나스(В. Багдонас)가 연기한 파우스트는 신과 동일하길 원하는데, 사실은 신이 꼬아놓은 그물에 얽혀 버린, 마치 숙련된 인형 조정자의 손에 달려 조정당하는 인형처럼 비극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강하고 비극적인 기질을 지닌 영웅이자, 동시에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매 순간 점프를 해대며 밧줄로부터 벗어나려는 파우스트와 또 공연 내내 무대 위의 죄인을 벌하겠다는 것을 약속이라도 하듯 불을 머금고 있는 구유는 파우스트의 비극적 운명을 더욱 가시화하는 일종의 매개체가 된다. 여기에 시종일관 들리는 소음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들은 헤매는 파우스트에게 다가오는 재앙의 소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서 자신이 있는 곳을 저주받을 만큼 답답한 감옥이요 골방이라고 표현한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는 슈타센과 크렐링23)의 그림 속 파우스트처럼 시종일관 지친 모습이다. 그러나 네크로슈스는 파우스트가 겪는 온갖 종류의 이 헤맴을 인간이 인식의 대한 갈증의 극한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에게 있어 파우스트는 앎과 삶의 관계를 구명하려 노력하는 인간상의 대표자인 것이다.

    토프스타노고프 (Г. Товстоногов) 연출의 <백치>에서 이노겐티 스목투노프스키(И. Смоктуновский)가 연기했던 전설적인 믜시킨 공작은 공기 중에서도 감지되는 ‘세상의 봄’ 같은 인간이었다. 토프스타노고프는 그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연극으로서 <백치>를 손에 들었었다. 네크로슈스는 <백치>에서 스목투노프스키가 연기한 서른살 청년보다 더 어리고 젊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를 믜시킨으로 무대에 세우면서 이 ‘봄’을 시각적으로도 극대화 한다. 24) 네크로슈스는 “믜시킨 공작과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장식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많다. 그저 우리가 그들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때로는 그들을 멀리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이다”25)고 언급하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의견에 그가 일백프로 동조하고 있음을 밝힌다. 네크로슈스가 그 어떤 믜시킨 보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믜치킨을 무대에 세우며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우리가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우리는 그가 될 수 있는가? <파우스트>가 인식에 대한 갈증의 극한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면, <백치>에서 네크로슈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믜시킨 공작26)을 무대 위에 전시하며, 도스토예프스키와 그가 창조한 인간들에 대한 특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네크로슈스의 최근작인 단테의 <신곡(Божественная комедия)>27) 또한 <솔로몬의 노래>이후 그가 택했던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간 밖의 세상을 탐독하고 온 그에게 무대가 선사할만하다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파우스트>와 <백치>를 이어 <신곡>으로 이어진 네크로슈스의 ‘텍스트 이후’의 행보에서 무대 미학적 측면에서의 좋고 나쁨, 실패와 성공을 논할 필요가 없다. 텍스트의 정점으로서의 셰익스피어 이후 네크로슈스에게 필요한 것은 정점에 달한 연출가에게 남은 일종의 ‘철학’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문화의 중심된 창조물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는 단테의 <신곡>에서 네크로슈스가 찾은 그 ‘철학’은 사랑이다. 연출가는 무대에서 오직 시인과 베아트리체의 사랑에 집중한다. 이를 위해 롤란다스 카즐라스(P. Казлас)가 연기하는 시인은 과거나 자신이 잃어버린 것과 화해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떠나간 여인에 대한 낭만적 향수에 빠져있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시인도 아니다. 네크로슈스의 <신곡>에서 “지옥을 바로 오늘날의 범상한 일상의 세계이다”28) 라고 볼 때, 시인은 인간사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랑,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찾으러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열정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측면에서 <신곡>은 <파우스트>와 <백치>로 이어지는 네크로슈스의 인간탐구에 대한 마지막 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새로운 소비에트 의회는 1991년 9월 6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선언한다.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많은 연합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잃은 것은 이데올로기와 물적 자원만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정치적 진통이었겠지만, 연극에 있어서 연합 국가들의 독립은 현대러시아연극의 지형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독립국가 예술가들의 여권은 새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정치적 노선 과는 별개로 작업의 공간으로서 모스크바는 매혹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노선과 예술적 노선의 모호한 줄다리기 아래서 러시아연극은 연방 국가였던 예술가들의 예술적 좌표에 대해 다소 모호한 반응을 보인다. 결국은 키워주고 길러주고 가르쳐준 곳은 ‘여기’ ‘이곳’이라는 것이다. 네크로슈스가 셰익스피어 삼부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아가던 90년대 후반은 이러한 그들의 모호한 태도가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네크로슈스와 러시아연극을 연결하고자 하였고, 네크로슈스의 신작에 대해 연출가의 조국인 리투아니아보다도 더 빨리 반응하기도 하였다. 그가 스타니슬랍스키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스타니슬랍스키 펀드가 준비한 <벚꽃동산>의 연출가로 지목된 것도 이러한 러시아 연극과 네크로슈스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볼수 있겠다.  10)빌뉴스 청소년 극장에서의 20여 년의 작업은 네크로슈스에게 배우 라테나스(А. Латенас), 바그도나스(В. Багдонас), 스모르기나스(К. Сморигинас)와 무대미술가 야초프스키스(А. Яцовскис), 굴따예바(Н. Гультяева)와 함께 공동창작 집단을 만들게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네크로슈스는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자신의 무대미학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리듬과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술을 실험해 나갔으며, 불과 물과 흙과 같이 자신의  무대를 채우는 자연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11)Спектакли двадцатого века, Россия: Издательство “ГИТИС”, 2004, 444쪽.  12)http://www.krugosvet.ru/enc/kultura_i_obrazovanie/teatr_i_kino/NYAKROSHYUS_  13)전정옥, 「타간카(Taganka), 1964-2011」,『한국연극학』 45호, 한국연극학회, 2011, 204쪽.  14)위의 책, 204쪽.  15)쿠델린 , 「고골의 역사적 관점의 특징에 부쳐」, 『러시아 문학의 이해』, 한국슬라브학회, 민음사, 1993. 171쪽.  16)앞의 책, 178쪽.  17)위의 책, 178쪽.  18)20년간의 빌뉴스 청소년 극장에서의 작업을 바탕으로 네크로슈스는 자신의 극단을 만들게 되는데, 리투아니아 연극의 백년대계를 이끌고 있는 메노포르타스가 그것이다. 네크로슈스는 메노포르타스 극단의 설립과 함께 무대화한 셰익스피어 삼부작을 통해 자신의 시스템을 일종의 양식으로 정립토록 하는 중요한 이정표를 만들어 간다.  19)발틱하우스 페스티벌을 통해 네크로슈스는 두 번째 자신의 셰익스피어 작품뿐만 아니라, 자신의 극단인 메노포르타스를 소개하기에 이른다.  20)솔로몬의 노래는 <가을>과 <봄>에 이은 <사계>의 하나로 이해 가능할 법도 한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벅찬 감정의 소용돌이라는 측면에서 여름으로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21)Г. Ситковский, “Не слабее чем "Фауст" Гетеs”, Коммерсант 10/2, 2006.  22)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는 괴테가 「파우스트」 창작의 배경으로 삼은 「욥기」의 구성과 닮은 <천상의 서곡>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의 헌사와 무대에서의 서연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없다. 즉 구원받는 파우스트, 원숙함으로 채워진 파우스트가 아니라 회의하고 방황하는 인간으로서의 파우스트가 네크로슈스의 중심이다. 즉 네크로슈스의 파우스트는 신에 대한 인간의 위대한 정의 이전의 파우스 트인 것이다.  23)프란츠 슈타센이 그린 <서재에서 고뇌하고 있는 파우스트>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거대하고 두꺼운 책을 앞에 두고 있다. 아우구스트 폰 크렐링(August von Kreling)이 그린 <어둠침침한 골방 서재를 바라보는 파우스트>의 눈앞에는 온갖 책들과 문서와 빛바랜 종이와 방 안 가득 찬 실험기구들이 널려 있다.  24)М. Тимашева, 「БУДЬТЕ КАК ДЕТИ」, 『Петербургский театральный журнал』, NO.4(58), 2009.  25)old.newstube.ru media/nyakroshyus-vezet…peterburg…  26)네크로슈스는 <백치>로 도스토예프스키와 처음 대면한다.  27)<신곡>은 네크로슈스의 기존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인 마류스 네크로슈스가 무대를 아내인 나제즈다 굴따예바가 의상을 맡았다. 메노포르타스 극장과 러시아 스타니슬랍스키 펀드를 비롯한 세계유수의 연극제작단체의 지원으로 무대화 된 본 공연은 2012년 4월 27일 빌뉴스에서 막을 올린다.  28)Ольга Егошина, “Любовь, что движет солнце и светила”, Новые Известия 5/11, 2012.

    3. 물질적 상상력의 시학

       3-1. 네크로슈스 무대에 있어서의 ‘물질’

    바슐라르는 우주의 본질을 ‘물’로 본 탈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이 발전시킨 4원소 론을 문학과 연관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작가의 상상력이 물질과 결합할 때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항구성”29)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바슐라르에게 있어 물질이란 시인을 자유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시적 몽상의 필수조건”30)이 된다. 바슐라르는 특히 모든 시인과 문학가들에게는 각자 선호하는 물질 원소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물질이 가지고 있는 내면성의 포착을 통해 유발되는 시인의 상상력을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며,31)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상력은 이러한 물질의 내면성에 의해 그 기능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바슐라르의 이러한 시인과 물질의 관계를 연극무대라고 하는 특정한 장르에 적용할 경우, 그것은 무대적 상상력을 발휘토록 하는 무대 위의 수많은 오브제들과 연출가들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의 견지에서 바라본다면, 네크로슈스의 무대는 시적 몽상의 필수조건으로서 ‘흙’, ‘물’, ‘불’, ‘나무’, ‘돌’과 같은, 인간이 발 딛고 살고 있는 대지의 원형적 물질과 관계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네크로슈스의 무대 중에서도 특히 그의 연출 방법론이 집약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셰익스피어 삼부작은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 연극무대 위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선 <햄릿>에서 ‘물’과 ‘불’일 것이며, <오델로>에서는 ‘물’과 ‘바다’,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돌’과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이 물질들은 강력한 시각적 지원을 등에 업고 문맥적 필연성과 당위성 안에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물질들은 시각적으로 관객의 뚜렷한 관심의 대상에 이르게 되는데, 결국 이 물질들이 기존의 셰익스피어 텍스트와 그다지 친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를 자아내게 된다.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에 전시된 ‘물질’들은 일반적이고 사전적인 층위에서 물질이 가지는 기본적이고 단순한 가치를 능가하여 새로운 형상으로의 수많은 전이를 통해 무대 위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에게 있어 발견된 물질은 극복과 초월의 과정을 거쳐 현실 세계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상 즉 의미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여, 네크로슈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텍스트와의 교감을 통해 발견한 물질들과 그 물질들이 텍스트와의 접목을 통해 어떠한 초월과 극복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형상으로 무대 위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극평론가 김방옥은 셰익스피어 삼부작의 오브제들이 지니는 물질성에 주목하며, “다양한 오브제의 창의적 활용, 그것들이 텍스트 해석과 맞물려 창출한 네크로슈스 만의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유희성”33)이 그의 현대성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네크로슈스 무대의 가장 중심된 연출적 콘셉트로 통하는 이 ‘물질’은 사실 일반적인 무대 위에서 오브제로 기능하는 ‘물질’과는 차별되는 좀 더 복잡한 층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네크로슈스 무대의 ‘물질’은 첫째,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물질적 상상력, 즉 몽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인이 항구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질임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일종의 오브제로서의 ‘물질’, 희곡텍스트로부터 유추되는 즉 희곡으로부터 상상되는 ‘물질’이라는 독특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삼부작의 경우 텍스트로부터 상상해낸 특별한 ‘물질’임과 동시에, 시인의 내면 속 망탈리테와 무의식의 저변이 시인의 상상력의 세계를 발동시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꺼내든 물질이기도 하다

    둘째,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에 존재하는 물질들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이 물이건 얼음이건 흙이건 돌이건 중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이며 그저 물질의 속성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로서의 얼음일 뿐이지, 날카롭거나 둥그스름한 모양의 얼음이 아니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이러한 물질은 형태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원시적인 것이며, “더 본질적인 것”34)이다. 바슐라르는 대상의 형태와 색깔은 상상력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고 선입견을 만들어 준다고 하였는데,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의 ‘물질’은 형태가 없는 물질로 서만 존재하므로 그것은 물질 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이미지들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존재의 전환”35)이자, “깊게 꿈꾸기 위한 물질”36)이며, 바흐틴이 말하는 “물질의 극복”37)이며, 들뢰즈의 글로 쓰여진 음악처럼 “언어 이전에 오며,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느낌”38)이자, 물질을 통해 수용자들과 텍스트의 저변에서 의사소통하는 ’예술가의 임무‘가 발동되는 순간이다.

    셋째로 그의 물질은 ‘자극’, ‘터치’, ‘접촉’과 같은 방식으로 관객들을 직접적으로 반응케 한다. 유령이 햄릿의 발밑에 얼음덩이를 가져다 놓고 그것의 추위와 차가움이 햄릿의 뼈와 살에 스며들게 했을 때 객석은 무대 위에 펼쳐진 ‘물’과 ‘얼음’과 추위로부터 떨었어야 했다. 그리고 <오델로>에서 객석은 분노하는 바다에 내몰렸던 데스데모나만큼 바다의 크기와 소리로부터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위협의 크기를 함께 체험하였다. ‘얼음’과 같은 물질들은 그저 무대 위에 전시된 오브제를 능가하여 “물체(질)들이 배우들의 피부와 닿았을 때의 육체적인 체험”39)을 공유하며 관객들이게 직접적인 ‘자극’과 ‘터치’의 형태로 전해지게 된다.

    넷째, 네크로슈스 무대에서의 물질들은 바슐라르의 상상력 연구에서처럼 ‘양가성’을 지니며 문맥적 특수성 안에서 다양한 이미지의 변모를 열망한다.

    바슐라르가 언급하는 물질의 양가적인 속성처럼, 네크로슈스의 무대에서 몽상의 필수 조건으로서의 ‘물질’ 또한 전혀 다른 의미체계를 넘나들며 이중적으로 활동한다. 오델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에 흐르는 ‘물’은 삶의 원천인 동시에 죽음의 상상력을 지니며, 햄릿의 ‘불’은 열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이며 분노를 전하는 하나의 뜨거운 온도가 된다. 그리고 맥베스의 코트 주머니 속에 쌓여가며 그를 짓눌렀던 ‘돌’은 대지의 근원인 흙의 또 다른 형태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삶이 주는 무게감이자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에 대한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다섯째,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그들 내면의 감정적 기류, 그 미세한 울림과 정교한 흐름에 기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울림과 흐름에 반응하는 배우들의 신체행동이 역동적이고 구체적이며 시각적이라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뿐이지, 배우들의 ‘존재’는 그들 내부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적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정통 심리극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네크로슈스의 상징화된 세계에서 축출된 다양한 물질들은 배우의 심리를 반영하거나 그들의 감정적 형태를 돕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맥베드와 뱅코우가 등에 지고 들어오는 마가목, 그 위에 걸려있는 흰색의 종잇조각들이 미래에 대한 그들의 희망 같은 것이라면, 무대 위에 등장하면서 그 두 사람의 얼굴에 비쳤던 승전의 기쁨을 기억할 것이다. ‘바다’를 열어 자유와 공포라는 두 가지 상반된 원형의 세계를 ‘사랑’의 존재여부로 연결하였다면, 그 바다 앞에서 ‘사랑’의 진정성을 잃어버린 오델로의 ‘혼동’, 죽은 햄릿을 안고 이리저리 눈보라를 피해 옮겨 다니던 아버지의 ‘절망’과 얼음물이 머리와 어깨, 가슴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열병에 걸린 듯 중얼거리며 복수를 다짐하던 아들 햄릿의 ‘분노’에서 우리는 이러한 면을 발견한다. 연출가 네크로슈스의 몽상의 필수조건으로서의 물질들이 배우의 심리적 문법과 합쳐지며 더없이 시적이고 철학적인 무대언어로 발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여섯 번째 특징은 네크로슈스의 이러한 물질들이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관객과의 적극적인 울림을 시도한다는 것일 것이다. 바슐라르의 언급대로라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물질을 통한 상상력의 활동은 무분별하게 비논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수용자의 공감과 울림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무대’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연출의 상상력이 빚어낸 물질이 텍스트와 교접하여 관객과의 감정적 울림을 공유하는, 즉 연극의 진정한 매력이 발동하는 순간일 것이다.

       3-2. 셰익스피어 삼부작의 물질성

    네크로슈스는 극단 메노포르타스의 창단과 함께 <햄릿>을 무대화 하면서 자신의 20년 연출사를 통해 지속해왔던 무대적 상상력의 실험을 공식화 한다. 여기서 ‘공식화’라고 하는 것은 <햄릿>을 통해 자신의 무대적 실험을 양식화·시스템화 하고, 그에 대해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통과의례의 과정일 것이다. 현대연극사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중에서도 <햄릿>은 어떠한 양식을 실험하여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특별한 텍스트가 되어왔는데, 네크로슈스의 <햄릿>은 20세기 후반 세계연극사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이라는 평가할만하다.

    무대의 시작은 ‘덴마크는 감옥이다’라는 햄릿의 대사처럼 어둡고 침침하며 습하고 적막하다. 김방옥은 “철로 만든 오브제들은 주로 현왕 클로디어스와 함께 등장”42)한다고 언급하며,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로 “대관식 장면에서의 물잔, 쇳덩어리 공, 극중극 장면에서 그가 고문당하는 쥐덫으로 쓰이는 육중한 압착식 인쇄기, 그가 편지를 태우는 화분, (놋쇠나 철로 제작된) 무덤을 상징하는 죽음의 벽돌”43) 등을 언급한다. 김방옥의 설명처럼 ‘쇠’ 혹은 ‘철’이라고 하는 물질은 네크로슈스의 <햄릿>안에서 그것의 형태와 상관없이 주로 클로디어스와 관련된 대상으로 등장하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만든 감옥으로서의 덴마크를 가시화 하는 주된 물질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우선 ‘쇠’ 혹은 ‘철’이라고 하는 물질이 야기하는 육중하고 억압적이며 어둡고 차가운 감각적 이미지로부터 기인한다. 쇠는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엘시노르의 적막을 공포스럽게 깨우고, 날카로운 촉수를 드러내며 공중에 매달려 아래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한 무게감의 형태로 클로디어스의 주위를 감싸며 절대 변할 수 없는 엘시노르의 어둠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쇠의 감각적 이미지를 세계연극사 위에 나열된 <햄릿> 무대사의 선상에서 바라본다면, 네크로슈스의 무대는 1954년 아흘로꼬프가 연출했던 <햄릿>을 연상시킨다. 아흘로꼬프는 무대와 관객을 철장으로 나누고 ‘쇠’라고 하는 물질이 주는 억압감, 그리고 그것이 내는 육중한 소리를 통해 덴마크 왕실이 감옥임을 방증하는 시각적·청각적 메타포로 사용하였다. 아흘로꼬프의 감옥은 차가운 냉전의 굴레에 얼어붙었던 반세기 조국 러시아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 아니었다.

    물질로서의 ‘쇠’의 이미지와 클로디어스의 관계는 극중극 장면에서 그 의미장의 절대치를 발한다. 햄릿은 극중극을 준비하며 무대 중앙에 거대한 압착기를 등장시킨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압착기 안에 준비된 의자에 햄릿은 호레이쇼와 번갈아 앉으며 무거운 쇠가 짓누르는 압착기의 공포를 장난스럽게 관객들에게 전한다. 여기서 둘의 장난은 클로디어스에게만 공포로 다가오고 그는 애써 자신이 앉은 의자를 압착기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보지만, 결국 압착기 안에 스스로 들어가게 되고, 무겁고 둔중한 쇠가 짓누르는 양심의 무게를 못 이기고 뛰쳐나온다. 그리고 햄릿은 압착기에서 뛰쳐나오는 클로디어스의 얼굴로부터 살인자의 표정을 감지하며 자신의 연극이 성공적으로 수행 되었음을 확인한다.

    바슐라르는 그의 저작 「쇠의 우주」에서 쇠라고 하는 단단한 물질의 세계로 파고 들어가는 조각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쇠라는 물질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불과 단단한 물질, 그리고 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급한다.

    바슐라르는 이것이 “쇠의 복잡한 혼”45)이자 “비싼 대가를 치러 얻은 힘과 견고성”46)이라고 하였는데, 바슐라르가 언급하는 양심의 문제와 직결된 ‘비싼 대가를 치러 얻은 힘’이란 클로디어스의 경우 친족살해, 도덕과 윤리에 대한 비인간적 배반, 나아가 그의 내면적 고통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양심’의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비싼 대가를 치러 얻은 희열의 정점인 대관식에서 클로디어스는 양심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기이하게 큰 쇠로 만든 잔에 축배를 들며, 딱딱하고 차가운 철로 만든 흔들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햄릿의 극중극을 기다린다.

    클로디어스와 함께 등장하는 ‘쇠’가 억압과 육중함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의 ‘죄’와 관계하고 있다면, 인간으로서 그가 느끼는 ‘죄에 대한 고백’과 관계하고 있는 물질이 있으니 바로 ‘물’이다. 일반적으로 물은 신화나 문학 일반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프리스의 『이미지, 심볼 사전』에 나오는 물은 1. 혼돈의 물 2. 세례의 물. 3. 과도적 단계(삶과 죽음의 매개)의 물 4. 정화, 성찰의 물 등 다양한 이미지로 수렴되는데, 클로디어스의 죄에 대한 고백은 정화와 성찰의 ‘물’로 극 속에 이미지를 파생시킨다. 네크로슈스의 <햄릿>에서 클로디어스는 햄릿이 쓰고 연출한 곤자고의 살인을 관람한 직후, 거대한 유리잔에 물을 가득 담아 자신의 불안한 얼굴과 눈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 유리잔 속에 담긴 물의 굴곡진 투사는 클로디어스의 얼굴을 일그러뜨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 속 악마를 직접적으로 보게 하여 고통스런 성찰의 과정을 이끌어 내도록 한다. 그것은 일그러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투영이자,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투영에 다름 아니다. 이때의 물은 스스로에 대한 심판의 물이자 성찰의 물이 된다.

    ‘물’은 클로디어스의 성찰의 물 이외에도 네크로슈스의 <햄릿>에서 가장 다양한 의미의 창출을 시도하며 능동적인 운동성을 가지고 극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때의 ‘물’은 ‘비’와 ‘얼음’과 같은 물의 또 다른 형태로 갖가지 모양을 갖추고 극 속에 주어진 상황과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한다. 극의 시작, 불안하게 걸려 있는 날카로운 톱니바퀴를 지나 마치 차가운 새벽녘의 운무처럼 내려앉는 ‘비’는 네크로슈스의 <햄릿>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축축한 물질성으로서의 ‘물’이다. 이때 모든 등장인물은 시베리아의 혹한에나 입었을 법한 두꺼운 외투를 입고 등장하는데, 엘시노르 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떨어지는 빗속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어 칼로 살을 베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관객들에게 엘시노르 성의 얼어붙은 시간을 전한다.

    네크로슈스의 무대 위의 물질로서의 ‘물’은 특히나 주인공 햄릿과 관련하여 가장 다양한 의미장을 발동시킨다. 여기서 ‘물’, 또는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얼음’은 주로 선왕의 손을 거쳐 햄릿에게 전달된다. 아버지는 두꺼운 모피로 된 외투에 얼음 블록을 들고 아들 앞에 등장하는데, 외형부터 그는 유령이기 보다는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다. 외투를 의자에 걸쳐 놓고 아들 앞에 선 유령의 모습은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단단하고 냉철한 군주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 햄릿은 마치 혹독하고 엄한 훈계를 들으러 아버지 앞에 선 연약하고 겁먹은 어린 아들로 등장한다.

    극의 시작에서 아버지가 들고 온 얼음은 어린 아들에게 행하는 가혹한 훈육의 잣대로 등장한다. 얼음은 물과 다르게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이 얼음의 생김새는 중요치 않다. 그저 얼음은 존재의 전환을 이루어 무대 위에 강력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뿐이다. 선왕은 아들의 맨발을 얼음 위에 올려놓고 아들의 온몸에 차가운 얼음의 기운을 부어 넣는다. 이를 통해 햄릿의 피는 차가워지고, 햄릿은 아버지가 주고 간 얼음을 깨트려 그 속에서 얼어붙어 단단해진 칼을 꺼낸다. 또 햄릿은 아버지가 가지고 온 얼음 샹들리에 밑에 얇은 종이 블라우스를 입고 서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을 온 몸으로 받으며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고통을 체험한다. 이때의 ‘얼음’, ‘차가운 물’은 복수의 칼을 겨눌 수 있을 만큼의 체온을 만들어 주는 물질로서 등장한다. 결국, 아버지가 가지고 온 물질로서의 얼음은 햄릿의 분노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의 냉혹한 가르침이자, 햄릿의 내면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훈육책이 되는 것이다.

    햄릿과 선왕,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얼음’, ‘차가운 물’은 장면의 의미창출을 넘어 극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하는 중심물질로 작용한다. 네크로슈스의 <햄릿>은 우선 주제적 측면에서 기존의 <햄릿>에 대한 무대사의 편견이기도 했던 무거운 주제들을 벗어 던진다. 물질로서의 얼음을 사이에 둔 햄릿과 선왕의 관계로부터 촉발되는 <햄릿>의 주제는 둘의 관계를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상정함으로서, 그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비극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하여, 극의 시작에 선왕이자 유령은 ‘어두움’, ‘죽음’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가 아닌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음을 맞게 된 한 아버지로 등장하고, 이러한 아버지 앞에 서게 된 햄릿 또한 다른 어떤 현대 연극무대 위의 햄릿에 비해 젊고 반항적이며, 그러면서도 아직 나약하고 세상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어린 아들로 분한다.

    네크로슈스는 이를 위해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록가수 마모반타스를 햄릿 역으로 초대하였다. 마모반타스는 짧게 깎은 머리에 검은색의 스웨터를 입고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깨끗한 영혼으로서의 미성년을 연기한다. 마모반타스가 연기한 햄릿은 지금까지 세계연극사의 무대에 등장한 다양한 햄릿의 이미지, ‘왕자’, ‘철학자’, ‘영웅’이기 전에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미성년’이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유하던 ‘철학자’이기 전에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어머니의 죄상을 파악한 ‘충격’으로부터 어린 햄릿은 처음으로 세상에 ‘악’이 존재함을 알고 경악한다. 따라서 <햄릿>에서 그가 본 악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는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꺼내든 분노가 된다.

    네크로슈스의 젊은 햄릿은 위에서 언급한 ‘감옥’으로서의 엘시노르처럼, 셰익스피어의 <햄릿> 무대사에 있어 1954년 아흘로꼬프가 연출한 <햄릿>의 형상과 닮아 있다. 아흘로꼬프의 <햄릿>에서 햄릿은 세상에 ‘악’과 ‘어두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어린 햄릿의 ‘경악’을 보여주었다. 또한 햄릿은 아버지의 보호 밑에서 잘 자란 청년이었고 그가 바라 본 아버지의 죽음과 삼촌인 클로디어스와의 관계는 그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접하는 ‘악’의 실체였다. 실제로도 20살 정도의 젊은 배우였던 에드워드 마르쩨비치가 연기한 아흘로꼬프의 햄릿은 그래서 쉽게 성나다가도 한 편으로는 생물학적으로 어린 나이와 나약함 때문에 괴로워하던 아직 덜 자란 소년이었다.48)

    햄릿과 유령의 사이에 등장한 물질로서의 ‘얼음’은 결국 <햄릿>의 종막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까지 다다른다. 극의 마지막에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부둥켜안은 북 위로, 또 아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얼음물에 절규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꺼운 외투를 벗어 아들의 주검을 감싸고 얼음물이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아들을 옮기지만 아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얼음비를 피할 길이 없다. 절규하며 무대를 종횡하던 아버지는 결국 무대의 중앙으로 와서 햄릿이 안고 있는 북을 두드린다. 그것은 바로 포틴브라스의 개선문 소리다. 이 북소리는 덴마크 왕실의 비극을 알리는 포효와도 같다. 네크로슈스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사이의 얼음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엘시노르 성에 불어 닥친 비극의 원인으로 돌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뜨거운 피를 식게 만든 얼음 그 자체였으며, 결국 자신의 왕국을 망가트린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햄릿>에서 물질간의 결합은 물질과 물질의 결합일 수도 있으며 물질과 배우의 몸과의 결합을 통해서도 또 다른 결과물을 생성한다. 얼음과 칼, 얼음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피부, 그리고 단단히 얼어붙은 칼과 인간의 얇고 부드러운 혀의 조합이 그러할 것이다. 선왕인 아버지가 가지고 온 얼음 속의 날카로운 칼은 쇠로 만든 칼보다 더욱 날카롭고 위협적인 분노를 양산한다. 아버지가 가지고 온 분노로서의 얼음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피부와 결합 하면서 점점 부피가 줄어드는 분노의 크기만큼 인간의 피부 속에 침투하여 몸 속에 흐르는 분노의 냉혹함을 상상케 하는 식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두 물질이미지의 결합이 창출한 새로운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네크로슈스의 <햄릿>에서 날카로운 쇠와 공기라고 하는 물질이 결합한 햄릿과 레어티즈와의 결투 장면은 대표적으로 언급할만하다. 네크로슈스는 무대에서의 일반적인 결투 장면과는 다르게 ‘쇠’라는 물질과 엘시노르 성에 가득 찬 비극적 공기라는 또 다른 물질의 결합이 촉발하는 새로운 물질을 통해 비극적 종막으로 치닫고자 하였다. 그것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청각적 물질, 즉 ‘소리’이다. 네크로슈스의 <햄릿>에서 햄릿과 레어티즈는 실제로 결투하지 않는다. 그들은 손에 검을 들고 그저 엘시노르 성에 가득 찬 냉혹한 분노의 공기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레어티즈와 햄릿이 휘두르는 칼은 마치 고음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서로에게 물리적인 상처 한 번 내지 않았지만 레어티즈를 시작으로 성 안의 사람들은 하나씩 쓰러진다. 즉 네크로슈스에게 있어 엘시노르 사람들은 물리적 상처와 피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클로디어스에게 있어서 ‘쇠’라고 하는 물질이 창출한 이미지에서도 보았듯이 온갖 위험과 커다란 자기희생을 거쳐 만들어진 힘과 냉혹한 분노의 물질로서의 ‘얼음’이라는 물질이 감싸고 있던 엘시노르의 비극적 음영의 가지고 온 종말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슐라르는 시인의 상상력에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는 한 가지의 질료가 있다고 언급한다. 그는 그것을 “질료 중의 질료요, 어머니 질료”50)다 라고 하였는데, 네크로슈스의 셰익스피어 삼부작을 통해서 볼 때, 그에게 있어 질료 중의 질료는 우선 ‘물’일 것이다. 발트 해를 끼고 자란, 많은 시간 발트 해의 운무가 도시를 축축하게 감싸는 리투아니아의 환경적 요인도 분명 네크로슈스 무대에서 물질로서의 ‘물’의 쓰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겠지만, 셰익스피어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 <오델로>에서 물질로서의 ‘물’은 텍스트가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던 물질로서의 ‘물’과 접목되며 더욱 명확한 의미장으로 작품 속에 수렴된다.51)

    네크로슈스의 <오델로>는 다섯 시간의 공연 시간동안 눈먼 사랑이 낳은 질주형 비극을 선보인다. <오델로>에서도 연출가는 다양한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 셰익스피어 텍스트에 대한 특별한 상상의 자장을 펼쳐낸다. 물론 <오델로>에는 물질들이 야기하는 이미지들이 충분하게 가득 들어차 있고, 이것은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양동이는 배가 되고 배는 다시 관이 된다. 돛은 해먹이 되고 그네가 되며 수의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물질이 극 속에 마련된 세련된 메타포가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즉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배우들의 심리적 상태에 부여하는 감정의 색감과 굴곡 그리고 그 감정들 간의 상호교류에 작용하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오델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특히 등장인물들간의 관계와 심리가 중요하며, 사랑과 질투와 시기라는 아주 강한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네크로슈스는 이러한 물질들의 극 속 운동성을 통해 오히려 스타니슬랍스키의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으로 방향타를 설정하게 된다.

    <오델로>에서도 <햄릿>처럼 중심된 물질은 우선 ‘물’이다. ‘물’은 <오델로>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물질들 중에서도 연출가가 제시하는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물질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물질은 <햄릿>에서 직접적으로 무대 위에 전시되었던 물질로서의 ‘물’과는 차별된다. 연출가는 배우들의 행동과 소리를 통해 상상의 바다를 만들었다.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 네크로슈스의 ‘바다’는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그것과 정확히 의미적 맥락을 같이 한다.

    사실, 바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에서 들리는 가장 강력한 소리이자 유일한 소리이다. 희곡 속에서 ‘바다’는 우선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으로서 <오델로>의 배경이 되는 사이프러스일 것이다. 그러나 네크로슈스는 바슐라르가 언급한 것과 같은 바다의 상반된 두 가지 이미지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여기서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는 공포와 죽음의 대상으로서의 물, 그리고 생성과 생명의 물질로서의 물이라는 양가적 의미로 사용된다.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가 가지는 양가적 의미 사이에 바로 네크로슈스가 <오델로>에서 제시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

    김방옥의 언급처럼, 네크로슈스는 데스데모나를 비롯한 젊은 일행들이 “피아니스트의 경쾌한 반주에 맞춰 추는 춤이나, 바람에 부풀은 돛이나, 흔들리는 그물침대나, 부표와 같이 주로 수평으로 움직이는 오브제들로 기호화” 된 ‘젊음’과 “어린 아내를 포함한 이들 젊은 패거리들을 갑판 한 쪽에 서서 시종 질투의 눈빛으로 응시하는 육중한 몸매의 오델로”의 늙음을 무대 위에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오델로의 ‘늙음’은 “ 젊음의 경박한 흔들림에 대비되는 세로의 긴 기둥 모양의 자(尺)나 쇠로 된 칼, 철문, 놋쇠 잔, 접시, 무거움 말구유 등으로 기호화” 되는데,53) 이것은 의심과 분노, 결국은 살해로 급박하게 이어지는 <오델로>의 질주하는 비극의 동력장치가 되는 점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늙음과 젊음의 시각적 대비를 제외하고, 네크로슈스의 오델로는 오직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무대 위에 존재 한다는 점에서 여타 무대 위에 전시되었던 오델로와 차별된다. 이를 위해 네크로슈스는 베니스의 무어인이라는 오랫동안 무대에서 지속되었던 인종적·문화적·성격적 편견을 말끔히 없애며 우람한 백인남성으로 분한 오델로를 무대 위에 새롭게 전시한다. 네크로슈스의 오델로는 오직 생물학적 차이로서의 남녀의 위치에서 데스데모나와 이 양가적 의미를 소유하고 있는 바다 위에 동등하게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는 이들 사랑의 실재하는 모습에 따라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양가적 감정을 풀어내며, 광활하고 끝이 없는 자유로운 바다와 죽음과 두려움의 상징으로서의 바다라는 자신의 이중적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먼저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사랑은 이 바다를 생명의 근원이자 풍요의 상징, 삶의 에너지로서의 상징으로 존재케 한다.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진 오델로에게 이 ‘바다’는 평화로운 해협, 넓디넓은 풍요로운 자연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편안한, 프로이트가 말한 ‘대양적 감성’의 현현체이다. 오델로는 집을 뛰쳐나온 데스데모나에게 한 잔의 물을 건넨다. 컵에 담긴 물을 받아 든 데스데모나는 그것을 마신다. 컵에 담긴 물은 그녀를 취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노곤함이 그녀의 주위를 감싼다. 극의 시작에서 사랑에 빠진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에게 물질로서의 물,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는 천상의 물, 대지의 풍요를 가져 오는 물,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생명의 물로 간주되던 ‘신화 속의 물’과 다를 바 없다. 이 바다는 고유한 소리의 형태로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열정이 극한의 수위까지 다다랐을 때 해변을 넘어 마치 사이프러스의 모든 것을 덮을 만큼 차올라 무대를 밀고 들어온다. 피아노의 포르테 선율에 몸을 싣고, 무대 위에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실체를 전하러 등장한 오델로와 엄격하게 닫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 듯이 등에 방문을 메고 등장한 데스데모나에게 이 바다의 소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델로의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은 바다를 변하게 한다. 사랑이 의심으로 변한 오델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에 파고든 물질로서의 ‘물’,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는 분노한다. 바슐라르는 ‘대양의 노여움 보다 더 통속적인 테마가 있을까’라고 질문하며 “조용한 바다가 갑작스런 노여움에 사로잡”힐때, 바다는 분노의 모든 은유, 발광과 격노의 모든 동물적 상징을 받아들인 다”54) 라고 바다에 대한 양가적 이미지 중의 하나를 제시하였는데, 바슐라르의 분노하는 바다는 오델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에 끼어든 의심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오델로는 얇은 데스데모나의 허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출렁이는 바다에 그녀를 빠트리려고 한다. 그리고 무대를 넘어 차오르던 열정의 바다와는 달리, 이 바다는 한없는 공포의 상징으로 데스데모나에게 다가온다. 여기서 물은 “죽음의 물, 어두운 물, 잠자는 물, 헤아릴 수 없는 물”55)이 된다. 바슐라르가 물 옆에서는 모든 것이 죽음 쪽으로 기울어지며, “물은 밤과 죽음의 모든 힘과 연결된다 56)고 한 것처럼, 결국 <오델로>에서의 물은 데스데모나와 오델로를 죽음으로 이끈다. 이때의 바다는 큰 소리와 파도라는 자신의 형태의 변화, 그리고 달빛과 합쳐지면서 불길한 색깔로 두 사람을 위협하고, 폭풍과 죽음의 바다로 돌변하며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파괴하며, 급기야는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파괴한다. 성난 바다가 파괴한 폐허의 공간 안에서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종막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 바다는 굉음을 내고 인간 삶 속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와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 버린다. 그리고 인간 삶을 구성했던 모든 질서를 집어 삼킨다. 인간의 모든 것은 이 바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그리고 이 날카로운 바다는 미처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진한다. 네크로슈스의 <오델로>에서 이러한 파괴의 바다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데스데모나를 오델로가 목 졸라 살해하는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비극적 종막으로 돌진한다. 평화로운 해협으로의 ‘바다’와 파괴와 죽음의 ‘바다’ 사이에, 즉 물질로서의 ‘물’, 물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바다의 이 상반된 양가적 이미 사이에 절충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공간에서 ‘죽음’은 사뭇 폭력적이고 또 공포스러운 것이다. 데스데모나는 육중한 오델로의 손이 짓누르는 무력에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 오델로에게 매달린다. 그럴 때마다 오델로의 손은 강하게 그녀의 목을 조른다. 데스데모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오델로의 가슴에 매달리는 행위를 반복한다. 바슐라르의 설명처럼 이 장면에서 “물의 심리학 속에서, 광란하는 흥분의 다른 형식을 사용할지도 모를 비슷한 폭력”57)이 발견되 는데, 이때의 폭력은 힘을 행사하는 오델로의 손이자, 그에 반응하는 데스데모나의 죽음의 목전에서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붉은색 드레스의 데스데모나가 더 이상 오델로의 가슴에 안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파괴의 바다는 의외로 너무나도 빠르게 다시 잔잔해 진다. 잔잔해진 바다는 다시금 인간에게 이성이 활동하는 순간을 부여할 것인데, 오델로는 주검으로 변한 아내의 시체를 앞에 두고 한참동안 말이 없다. 침묵하는 오델로의 얼굴에 후회와 참회와 절망과 모든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한참 뒤 그는 아내의 주변에 꽃이 핀 화분을 장식한다.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놓아본다. 이러한 오델로의 행동은 꽤 오랜 시간 계속된다. 한 연극평론가는 이러한 <오델로>를 두고 전형적인 스타니슬랍스키식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이라고 평한다. <햄릿>과 비교했을 때, <오델로>에서는 배우간의 심리, 인물의 심리, 인물간의 심리,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미움과 질투가 자리58)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바다’는 오직 셰익스피어적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연출가의 새로운 해석을 강조하는 다른 형태의 물질이 있으니, 그것은 물질로서의 배우의 몸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곡선이자 특별한 움직임인 ‘춤’이다. 네크로슈스는 배우의 몸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을 일종의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물질로 만들기 위해 특별한 ‘몸’을 무대 위에 전시한다. 걷고 뛰는 일상적 행동조차도 특별한 의미장을 가지는 물질 형태로서의 ‘몸짓’으로 만들 수 있는 무용수의 ‘몸’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특별한 물질로의 몸, 정확하게는 몸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 ‘춤’은 셰익스피어적 사랑의 실체를 극대화 하는 연출의 중요하고도 탁월한 선택으로 극 속에 수렴된다.

    오델로와 데스데모나는 작품 속에서 두 번의 춤을 춘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춤은 아니다. 무대 위에 전시된 특별한 ‘몸’은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움직임을 마치 ‘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두 번의 춤은 모두 일종의 결투를 연상시킨다. 첫 번째 춤은 사랑에 의심이 끼어들기 시작하는 순간에 나타난다.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를 무대 앞으로 데리고 간다. 오델로의 손에 잡힌 데스데모나의 얇은 허리는 소리로 펼쳐진 광활한 바다 앞에서 바람처럼 일렁인다. 데스데모나는 절망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한 손으로 오델로의 허리춤을 감싸고 자신의 특별한 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곡선을 그려낸다. 이것은 죽음의 춤이자 살인의 춤이며, 질투의 극한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물질로서의 ‘춤’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춤은 오델로가 데스데모나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춤처럼, 이 절망적이고 비극적이며 공포스럽고 폭력적인 살인의 장면은 연출가에 의해 선택된 특별한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으로 인해 그것이 ‘춤’의 형태로까지 다다를 수 있는 효과를 자아내게 된다. 오델로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데스데모나의 목을 감싸고 좌우로 흔든다. 데스데모나는 오델로의 손에 지휘당하며 바람처럼 휘둘리다 무대 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살인의 장면은 폭력적이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특별한 물질로서의 몸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춤은 이 장면에서도 아름다움이라는 특별한 미를 방출시킨다. 그녀의 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춤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되는 것이다. 네크로슈스에게 이 특별한 몸이 만들어 내는 물질로서의 춤은 셰익스피어적 사랑, 그 사랑이 야기한 시기와 질투와 살인의 가치를 증폭시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통상적인 감정으로서의 시기와 질투,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살인이 가지는 편견과 그 편견이 가지고 오는 통속은 특별한 몸이 만들어 내는 물질로서의 ‘춤’으로 인해 말끔히 걷히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삼부작의 마지막은 <맥베스>로 이어진다.59) 흑백의 색감이 만드는 비극의 전조는 이전 작품이었던 <햄릿>보다 더욱 뚜렷하다. 마치 삶 뒤편 죽음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빛 한 점 투과하지 않는 절대적 어둠의 공간에서 마녀들의 놀이가 시작된다. 마녀’로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한다는 점은 여타 <맥베스>와 다를 바가 없지만, 연출가는 우리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특별한 마녀들을 불러내며 연극사의 수많은 몰락하는 악당의 이야기와 차별을 선언한다. 그들은 우선 젠더로서의 매력적인 여성들이다. 길고 우아한 검은색 치마를 입고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이 여자들의 외양은 마녀이기 전에 리투아니아의 전형적인 젊은 촌부를 떠올리게 한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들은 숨넘어갈 듯이 웃고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지독히 장난스럽다. 이 새로운 마녀들은 네크로슈스식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해석과 주제를 전진시키는 하나의 엔진으로 <맥베스>의 막을 연다.

    막이 열리면, 추수가 끝난 어스름한 가을 들판에서나 들릴 듯한 금조의 울음 소리 아래 세 마녀가 무대를 종횡하며 뛰어다닌다. 그녀들의 뜀박질은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들의 놀이처럼 활기차면서도 담대하고 미스터리하다. 춤을 추듯 뛰어다니던 세 여인은 무대에 놓여있는 거대한 솥단지 위로 마치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보기 위한 것처럼 몇 번 뛰더니, 솥단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물구나무를 서서 안을 향해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솥의 깊숙한 공간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촌부들의 목소리는 크고 길게 무대 위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하고 몰락하는 악당에 대한 마녀들의 예언은 세상의 비밀스런 공간까지 파고든다. 여기서 이 아름다운 마녀는 일종의 물질이다.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60) 이미지를 발산시키는 물질이다.

    이에 반해 맥베스는 동정을 유발할 정도로 나약하고 겁 많은 존재로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권력을 향해 끝없이 치닫는 맥베스는 이곳에 없다. 물론, 극의 시작 부분 전장에서 승리한 맥베스의 기쁨 따위도 네크로슈스의 <맥베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지쳐있고, 고독하며 자신의 행동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땀을 연신 훑어내면서 마녀들을 기다리던 맥베스의 두려운 눈은 이 연극이 종국에는 자비로 연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를 위해 네크로슈스는 자신의 극단에서 “가장 시적이며 긍정적인 매력을 소유한 배우 카스타스 스모린기나스(К. Сморигинас)에게 맥베스 역할을 맡긴다”62) 그래서 그는 오히려 “멕더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그제야 평화와 안식을 되찾은 편안한 표정으로 단두대에 머리를 들이민다. 그러한 맥베드의 표정은 마치 고통 속의 희열, 다시 말해 불완전한 육신의 쾌락 너머에 있는 향락인 주이상스를 체험하는 자의 표정이다.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 줄 대상은 결국 죽음뿐이라는 것, 태어나기 이전의 존재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 기나긴 욕망의 여정 속에서”63) 깨닫는다. 그래서 연극사 속에서 수많은 맥베스와는 다르게 네크로슈스의 맥베스는 동정과 감정이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특별한 악당으로 전환된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속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죄인이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독특한 경험을 관객들은 하게 되는 것이다.

    네크로슈스의 <맥베스>는 주제적 측면에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으로 그 의미가 구체화 된다. 이러한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네크로슈스는 새롭게 전시하는 인물들을 통해 돌, 나무, 쇠, 거울과 같은 자연 속에서 취한 질료들을 무대 위에 펼쳐 놓는다. 맥베스를 중심으로 하는 삶의 영원성과 시간의 관계는 ‘나무’라고 하는 특별한 물질을 통해 구체화 된다. ‘나무’는 돌이나 물과는 달리, 촉감과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로부터 이미지가 만들어 지기보다는 생명을 함유하고 있는 자연 속 특별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더 근접할 것이다. 이에 네크로슈스는 <맥베스>에서 러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 과실이 달린 랴비나, 마가목을 등장시킨다. 전장에서 승리한 맥베스는 전리품으로 등에 붉은색 과실이 달린 랴비나를 메고 등장한다. 나무에 달린 붉은색 열매는 “인간의 삶과 의욕과 성취와 변영의 생명력”64)이라고 하는 기호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과실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열매는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만 남는다. 아름다고 풍성한 열매는 인간 삶의 유한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하여, 네크로슈스의 <맥베스>에서 권력에 스스로 포박당한 맥베스의 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앙상한 가지만 있다. 이때 나무는 허망한 권력애, 그리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기호로 등장하는 것이다.

    <맥베스>의 무대 뒤에서 시종일관 흔들리며 공간의 정막을 지켜내는 통나무는 “자연가운데/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나무이다”라는 김현승의 시처럼, 일종의 인간으로 등장한다. 프랑스의 조각가 알랭은 나무 안에 애초부터 어떤 형상이 들어있고, 그것을 조각가가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슐라르도 역시 “인간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혼돈된 복합적인 힘들이 곧바로 서려고 애쓰는 존재”65)라고 하였다. 나무는 여기서 곧 인간이 된다. 위로 서려는 의지,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인간과 닮은 형태를 통해 나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베스> 속 던컨 왕과 벵코우의 살해 장면에서 나무를 찍는 행위는 치명적인 ‘죄’의 순간과 같은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물질로서의 마가목처럼, 육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흔들거리는 통나무 또한 맥베스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는 특별한 의미장을 파생시킨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흔들거리던 통나무는 결국 맥베스의 죽음이 목전에 다다르자 서서히 멈추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나무는 맥베스와 함께 그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것 같았던 맥베스의 삶과 욕망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한계에 다다르고 결국은 적막 속으로 모두 함께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의미하는 물질이 나무라면, 부정적 기운으로서의 ‘죽음’, ‘살해’와 같은 의미장을 도출시키는 물질은 바로 ‘쇠’이다. <맥베스>에서 등장하는 모든 쇠는 불을 품고 있다. 특히 그것은 구체적인 물건인 ‘도끼’로 등장한다. 따라서 <맥베스>에 등장하는 도끼는 단순히 날카로운 도구로서의 도끼가 아니라 불을 품고 있는 것이자 살해의 도구가 된다. 그것은 생명을 멈추게 하는 일종의 끝판왕이다. 맥베스가 던컨 왕과 뱅코우를 살해할 때 그는 살인과 관계되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행동 대신, 바닥에 뉘어져 있는 육중한 대들보에 도끼를 찍는다. 맥베스 부인의 죽음 또한 대들보에 도끼가 박히는 것으로 표현되며, 집단적 살인이 벌어지는 전장에서도 죽음은 도끼로 나무를 찍는 행위로 대신 한다. 인간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불을 품은 쇠라는 물질을 통해 생명으로서의 에너지를 방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죽어서 맥베스의 사악한 욕망을 들추는 던컨 왕을 비롯한 망령들도 등에 도끼를 꽂은 채로 등장한다.

    네크로슈스의 <맥베스>는 다른 셰익스피어 삼부작 보다 대지로부터 끌어 올린 물질들이 더욱 빈번히 사용된다. 그러한 대지로부터 올라온 물질의 선상에서 <맥베스>의 주제와 근접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물질로 ‘돌’을 들 수 있다. 물질로서의 ‘돌’이 지니는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무거움이다. 이 무거움은 나무처럼 쉽게 불타 없어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썩는 것이 아니다. 이 무거움은 쇠처럼 불로서 녹아 다른 형태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은 부서지거나 다른 형태로 변하더라도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일종의 근원적 무게감에 다름 아니다. 네크로슈스는 이 물질로서의 ‘돌’을 걱정과 근심, 양심의 무게, 죄에 대한 중압감 같은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존재로 등장시킨다. 구체적으로, 전장에서 돌아와 전리품을 바치는 맥베스에게 던컨 왕이 하사하는 선물은 놀랍게도 돌이다. 이때 돌을 받아 든 맥베스에게 이 물질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불안, 근심과 대등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물질로서의 돌이 가장 명확한 물질적 상상력의 운동성을 발휘하는 순간은 네크로슈스의 맥베스가 마지막으로 마녀의 예언을 듣기 위해 숲으로 찾아가는 장면에서다. 맥베스는 불안하게 무대의 한 켠에 웅크리고 앉아 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돌을 가득 담은 석가레들이 불안하기 걸려 있다. 그 자체가 이미 맥베스를 짓누르는 일종의 죄에 대한 양심의 무게라고 할 만한데,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맥베스의 주위로 석가레에 불안하게 담겨 있던 돌이 쏟아져 내린다. 근심의 축척은 이내 맥베스에게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피할 사이도 없이 마녀들은 긴 코트 자락에 크게 만들어진 주머니에 이 근심들을 하나둘 씩 넣어 걷지도 못할 정도의 무게감을 맥베스에게 전가한다. 던컨 왕에게서 받은 하나의 돌은 스스로 번식하여 일종의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맥베스>에서는 <오델로>에서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물질로서의 ‘춤’처럼, 특별한 배우들의 행동이 물질적 상상력의 운동성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대표적으로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에게 살인을 결심토록 부추기는 장면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히 왕이 되고픈 남성적 욕망은 살인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남편에게 살인을 결심하게 하기 위한 육체적 자극을 가르친다. 그녀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맥베스의 육체가 살인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활동적이고 자유분방한 마녀로부터 그녀가 배운 것은 추락의 느낌을 육체적으로 감지하는 것이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무대 중앙에 놓인 넓고 높은 탁자에 올라가 남편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아래로 뛰어 내린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던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을 탁자 위로 초대한다. 맥베스는 뭔가 불안한 모습으로 아내의 행동을 그대로 모사하기 시작한다. 높은 탁자로 레이디 맥베스가 다시 올라가고 맥베스는 아내를 따라 탁자로 오른다. 그리곤 다시 뛰어 내린다. 부부는 이러한 동작을 수없이 반복한다. 두려움에 떨던 맥베스는 이내 뛰어내리는 행위를 즐기게 되고 급기야는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소리를 지르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내리며 추락의 느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던 절대 ‘악’을 실행하기 위해 맥베스는 이렇듯 다짐과 결심뿐만 아니라, 추락의 느낌을 통해 육체적인 준비의 과정까지 거치게 된다. 그리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맥베스 행동은 점점 속도와 숫자를 늘여가고 맥베스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고 있었던 모든 용기를 모아 “나는 준비되었소!”라고 외친다. 맥베스의 살인에 대한 결심은 단순히 오랜 고민에서 나온 주먹을 불끈 쥔 결심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물질의 형태로 가시화된 ‘뛰어내림’이라는 육체적으로 준비된 결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르는 발갛게 타오르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쇠를 차가운 물에 담그는 것은 불의 기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전하는 방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대장장이의 소위 담금질이라는 것은 냉수로 불이라는 야수를 쇠속에 가두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햄릿>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준 복수의 칼도 그런 의미에서 분노로서의 불의 기운을 감추고 있는 쇠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대장장이의 담금질, 냉수로 불이라는 야수를 쇠 속에 가두는 행위가 그대로 재현된다.

    극의 마지막에 맥베스의 잘려진 머리는 활활 타오르는 대장간의 화마 속으로 들어간다. 어두워진 무대 위 대장간의 검붉은 불의 이미지는 사실 단순하지 않다. 마지 커다란 붉은 점처럼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이 불의 이미지는 죽음을 상기시키듯 공포스러우면서도 신비한 매혹의 공간이기도 하다.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분화구 속으로 뛰어든 엠페도클레스처럼, 맥베스의 잘려진 머리는 대장간의 화마 속에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붉은 기운을 흘리며 객석 앞에 전시된다. 그것은 마치 때론 전장에서 승리한 영웅의, 또 때론 수 많은 걱정과 근심에 짓눌린 나약한 인간의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맥베스의 욕망과 분노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일종의 충격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냉수로 불이라는 야수를 쇠 속에 가두는 마녀의 담금질이 이어진다. 잘려진 맥베스의 머리를 찬 물에 담그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들은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오르는 욕망의 불을 가둔 맥베스의 쇠처럼 굳어진 머리를 구경하고 속죄의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편안히 뉘여 준다. 죽이려고 한 자도 죽음을 당한자도, 마녀도 사람도, 선도 악도 모두 눕는다.

    마치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누워있는 그들의 마지막은 이곳이 세상의 종막 아포칼립시스의 희망 없는 ‘검은 막’으로 보이게 한다.67) 그러나 과연 이것은 세상의 종막인가? 바슐라르에 의하면 멕베스의 분노를 담은 쇠가 물에 식혀지는 것은 일종의 “영세의 은유” 가 될 수도 있다. 바슐라르는 “영세에 쓰이는 물이 그 더러운 물질을 상상적으로 정화” 한다고 말하며, “구약성서 시편 51장 7절을 인용하여 그의 주장을 예증”68)한다. 우연찮게도, 영세의 은유를 예증하기 위해 바슐라르가 인용한 구약의 시편은 ‘나를 씻어주십시오, 다시 순백의 눈처럼, 희게’라는 맥베스의 독백과 친연한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멕베스>의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성가의 소리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다’라고 시작하는, 바슐라르가 인용했던 시편 제51편의 <미제레레>이다. 그렇다면, 희브리인들이 우슬초에 물을 묻혀 물방울을 뿌림으로써 더러움을 정화했던 것처럼, <멕베스>에서 불이라는 분노를 품고 쇠가 되어 식혀진 멕베스의 머리는 일종의 영세의 은유가 될 수 있을 텐데, 이것이 네크로슈스의 수많은 물질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맥베스>가 기존의 무대에서의 <맥베스>와 차별되는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29)이미선, 「슈토름 작품에서의 물의 이미지-바슐라르의 물과 꿈과 관련하여」, 『헤세 연구』 제 22집, 한국헤세학회, 2009, 209쪽.  30)위의 책, 같은 쪽.  31)위의 책, 같은 쪽.  32)곽광수, 『가스통 바슐라르』, 민음사, 1995, 42~43쪽.  33)김방옥, 「오브제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과 그 현상학적 보완-네크로슈스의 <햄릿>, <맥베드>, <오델로>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35권, 한국연극학회, 2008, 146쪽.  34)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33쪽.  35)위의 책, 33쪽.  36)위의 책, 33쪽.  37)바흐틴, 앞의 책, 258쪽.  38)이진경, 『노마디즘』 1권, 휴머니스트, 2002, 31쪽.  39)<햄릿> 공연 팜플렛.  40)채숙희, 「Gaston Bachelard의 시학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와 죽음의 몸상」, 『프랑스 어문교육』 제 30집, 한국프랑스 어문교육학회, 2009, 395쪽.  41)곽광수, 『가스통 바슐라르』, 53쪽.  42)김방옥, 앞의 책, 151쪽.  43)위의 책, 같은 쪽.  44)바슐라르, 『꿈꿀 권리』, 60쪽  45)위의 책, 64쪽.  46)위의 책, 57쪽.  47)「셰익스피어 비극의 대가 리투아니아 네크로슈스」, 플레이 디비, 2006년 10월 25일, 연출가와의 인터뷰  48)아흘로꼬프 <햄릿>에서 원래 햄릿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예브게니 사마일롭이었다. 그러나 연출은 첫 공연이 있은 직후 햄릿 역을 에드워드 마르쩨비치로 바꾼다. 햄릿 역의 사마일롭은 첫째로 젊지 않았고, 둘째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마일롭은 의심과 행동을 분배해서 행동했다. 아흘로꼬프가 찾는 햄릿은 가장 젊은 햄릿,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으로서의 햄릿이었고, 그것이 미소년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마르쩨비치에 와서 연출의 바람을 만족시킨 것이다. 네크로슈스의 햄릿은 이 아흘로꼬프의 햄릿 중에서 예브게니 마르쩨비치의 햄릿과 닮아 있다.  49)유제상, 앞의 책, 154쪽.  50)채숙희, 앞의 책, 404쪽.  51)<오델로>는 네크로슈스의 셰익스피어 삼부작의 창작 연대순으로 볼 때 가장 마지막이다.  52)이미선, 앞의 책, 221쪽.  53)김방옥, 앞의 책, 12쪽.  54)바슐라르, 『물과 꿈』, 320쪽.  55)위의 책, 133쪽.  56)위의 책, 170쪽.  57)위의 책, 257쪽.  58)М. Давыдова, “Смерть в Венеции”.  59)작품이 완성된 시점으로, <맥베스>는 <오델로>에 이어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네크로슈스는 <리어왕>을 연습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 거의 완성의 단계에 있었던 작품이었으나, 연출가 스스로가 작품에 대해 불만족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 네크로슈스의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햄릿>와 <오델로>, 그리고 <맥베스> 삼부작으로 마감된다.  60)「셰익스피어 비극의 대가 리투아니아 네크로슈스」, 연출가와의 인터뷰, 앞의 책.  61)위의 책.  62)М. Дмитревская, 「ТРАГЕДИЯ УСПОКАИВАЕТ」, 『Петербургский театральный журнал』, No.4(22), 2000.  63)김성희, 「정신분석비평을 통한 공연텍스트 읽기 -네크로슈스의 <맥베드>를 중심으로」, 『문명연지』제 9권 제 1호, 한국문명학회, 2008, 104쪽.  64)김방옥, 앞의 책, 53쪽.  65)바슐라르, 정영란 옮김, 『공기와 꿈』, 이학사, 2000.  66)채숙희, 앞의 책, 399쪽. 불은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물질들의 속성처럼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모든 현상 중에서, 불이야말로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 부여를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이다. 불은 ‘낙원’에서 빛난다. 불은 ‘지옥’에서도 타오른다. 불 은 온화함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불은 부엌이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불은 불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 아이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너무 불꽃 가까이 놀려고 들면 그 어떤 불복종도 처벌한다. 불은 안락의자이자 존중이다. 불은 수호신이자 무서운 공포의 신이요, 선한 신이자 악한 신이다. 불은 스스로에게 모순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보편적인 설명 원리들의 하나인 것이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26쪽. <맥베스>에서의 불과는 다르게 예를 들어 <오델로>에서 키프러스 섬의 젊은이들이 극의 시작 가지고 노는 불은 삶과 즐거움이요 젊음의 욕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67)М. Дмитревская, 「ТРАГЕДИЯ УСПОКАИВАЕТ」, 『Петербургский театральныйжурнал』.  68)곽광수, 「물의 이미지」, 『대한건설학회지』 36(2), 대한건설학회, 1992, 19쪽.

    4.결론

    이제, 네크로슈스 무대 위의 이러한 다양한 물질들은 관객들과 과연 어떻게 상호간의 적극적 이해를 통한 교류를 이행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남는다. 네크로슈스는 “객석에서 아주 똑똑하고 현명한 박수소리가 들릴 때 나는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저 즉흥적인 배우의 애드리브나 눈속임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연출의 생각들이나 어떤 방향성을 알아내고 무대 위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관객, 그저 이어지고 이어지는 줄거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세밀한 연기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들”69)이 무대를 즐길 줄 아는 올바른 관객이라고 말한다. 현명한 박수를 칠 수 있으며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관객이란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자의 경탄하는 마음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이미지를 향한 열정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시인의 입장에서의 경탄하는 마음과 이미지를 향한 열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관객과의 실제적이고 즉흥적이며 현장적인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의 과정을 특징으로 하는 무대의 경우, 시인으로서의 연출가가 만들어 내는 물질이미지는 이미지가 펼쳐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미지를 향한 경탄의 마음과 이러한 경탄에서 촉발된 열정적인 참여는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경탄과 열정을 위해 무엇보다도 이미지와 이성적 의식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이미지가 한 곳에 머물러 한 가지의 의미망을 창출하기 보다는 “미래를 지향”71)할 때 한 가지 물질로 하여금 수많은 이미지의 창출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네크로슈스가 무대로 불러들인 물질들은 대지로부터, 엠페도클레스가 발견한 우주의 기본적인 물질로부터 유추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인간 상상력의 보편적 궁극성처럼, “우리들 각자의 상상력은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며 인류 전체의 모든 상상력들은 하나의 똑같은 궁극성을 가짐으로써 서로 교감”72)할 수 있으므로, 개개인의 경탄과 열정은 결국 하나의 ‘이해’로 상호간의 적극적 소통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인들의 “상상력이란 아름다움에 관계되는 것”73)이며, 결국 물질로부터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상상력의 이미지가 ‘미’의 형태로 예술 속에 펼쳐지게 되는 순간이다. 수많은 실재하는 물질들이 전시되는 무대의 경우, 바슐라르가 설명하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관계되는 상상력은 그 존재가치가 여타 장르에 비해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연극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 상상력의 시학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네크로슈스의 무대는 물론 그 중심에 서 있는 중요한 좌표이다.

    69)О.Егошина, “ Режиссер Эймунтас Някрошюс «Обо мне говорят как о губителеартистов»”, Новые Известия, 10/4 2006.  70)홍명희,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현상학」,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 24집, 프랑스문화예술연구회, 361쪽.  71)위의 책, 361쪽.  72)곽광수, 『가스통 바슐라르』, 52쪽.  73)위의 책,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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