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is one of those attempts to explore some possibility of agreement between feminist discourse and postcolonial discourses through the approach of postcolonial feminism in the reading of the controversial novel,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and Year of Impossible Goodbyes.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when read from the perspective of postcolonial feminism, reveals ‘domestic nationalism’ of imperial narratives in which the violence of imperial history in Korea is hidden behind the picture of every day lives of an ordinary Japanese family and Japanese women. Furthermore, postcolonial feminist's perspective interprets Yoko family’s nostalgia for their ‘home,’ Nanam in Korea, as ‘imperialist nostalgia’ working as a mask to hide the violent history of colonization of Empire. In this way, postcolonial feminist reading of the story detects the ways the narrative of Empire appropriates women, family image and even nostalgia for childhood. At the same time, this perspective explains the readers’ empathy for Yoko family’s suffering and the concerning women issues caused by wartime rape and sexual violence by defining Yoko as a woman of Japanese Empire, whose life of interstice between imperial men and colonial men cannot be free from violence of rape during anti colonial wars. Year of Impossible Goodbyes as a counter discourse does not overcome the traditional binary opposition of nationalism which quietens gender and class issues. As an attempt to fill in the interstice between the two perspectives of feminism and postcolonialism. postcolonial feminist reading turns out to be a valid tool for the reading of the two novels chosen here.
서인도제도 출신의 여성작가 진 리스(Jean Reas)의 『너른 사가소 바다』(
그렇지만 국내의 한국학 연구자 등을 포함한 역사학계의 열띤 논쟁과는 달리 정작 영문학계는 이들 작품에 관하여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 이유 중 일부는 영미청소년문학 연구가 영문학 연구에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이들 작품을 둘러싼 한국학계의 뜨거운 민족주의의 이슈에 대하여 영문학연구나 영어교육연구자들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분위기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요코 이야기』를 교재에서 퇴출시키기 보다는 린다 수 박(Lynda Sue Park)이나 최숙렬 같은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들을 함께 제공하여 보다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택하고자한 일련의 논의들은 교육에 있어서 교재 선정의 중요성을 새삼 상기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어교육과 영문학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다시 말해서,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그간의 논쟁은 아무리 EFL 상황하의 영어교육이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내용 분석이나 역사적 진정성에 대한 점검을 거치지 않은 채 영어의 난이도나 스타일 분석 혹은 흥미도에만 중점을 둔 영어교재나 영문학교재의 선정이 영어 교육에 끼칠 수 있는 위험을 상기시킨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른바 ‘요코 사태’를 둘러싼 논의의 대부분은 작품을 직접 분석하기보다는 독자반응과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문화 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주로 집단기억을 이루고 있는 ‘민족’을 이슈로 하는 담론들과 또 한편으로는 이 ‘민족’을 구성하는 집단기억을 파열하고 구멍을 내려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양분되어왔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2 이 논의들을 보면 민족주의나 혹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를 이론화하고 객관화하려는 탈식민주의 논의조차도 페미니즘의 관점과의 거리 좁히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새삼 확인된다.
주지하다시피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지향점을 추구했지만, 구체적 현실에서는 양립하기 힘든 간극을 노출시켜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반식민 민족주의의 뿌리를 자를 수 없는 탈식민주의는 젠더문제를 간과한 채 지역이나 민족주의로 흐르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페미니즘은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여성간의 차이를 간과하고 지역과 국가 혹은 탈식민주의 이슈와의 맥락을 충분히 검토하거나 그 논의를 확대시키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탈구조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거리를 견지해온 탈식민페미니즘(postcolonial feminism)3은 바로 이러한 페미니즘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탈식민주의의 기본 입장을 수용하여 젠더의 문제를 지역, 국가와 탈식민의 문제로 확대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노력을 보여 왔다. 그런가하면 탈식민주의나 민족담론에도 보다 진지한 젠더의식을 주문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탈식민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탈식민화, 탈식민주의의 페미니즘화”를 지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탈식민페미니즘의 입장을 이 논문도 수용하면서 문제가 되어온 『요코 이야기』와『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을 꼼꼼히 읽고 이 작품들을 통해 제국담론 내지 민족담론이 여성과 가정을 작동시키는 방식과 제국 여성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한다.
12006년도 미국 교육부와 주 교육청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미국 교사들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 소설이 지적 논쟁을 교실에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추천도서로 남아있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도되었다(The Boston Globe, November 12, 2006). 이러한 주장은 유효하여 Star Bulletin(Feb. 3, 2007)의 기사는, 2007년도에도 이 소설이 지속적으로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국교육부의 조사를 인용하여 140개 학교에서 150부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이 작품은 서서히 교재나 추천도서에서 철회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about.com(http://childrensbooks.about.com/od/forparents/tp/summer_reading.htm)이 제공하는 2011년도의 ‘Top 10 Summer Reading Lists For Kids and Teens’싸이트에서는 한 개의 싸이트인 http://childrensbooks.about.com에서만 유일하게 왓킨스의 2008 뉴욕HarperTrophy판 So Far from the Bamboo Grove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추천목록에는 소수민족문학으로 『요코이야기』보다는 한국의 과거 역사, 문화물을 소개하는 린다 수 박(Lynda Sue Park)의 작품들이 더 눈에 띈다. 『요코이야기』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을 감지하는 만큼 10년 이상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교재로 활용되던 이 작품이 예전처럼 필독도서나 교재로 선정되는 현상이 줄어든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물론 미국 내에서의 이 작품에 대한 논의는 한국과 사뭇 다르다. 아마존 서점이 소개하는 『요코이야기』독자 서평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의 독자반응은 동아시아 역사 교육을 주장하며 이 작품을 비판하는 그룹과 이 작품에 호의를 표하는 그룹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러한 반응은 미국교사들의 반응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 예로, Stephen은 강력한 흡인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근시안적 역사관을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Walach Stephen,,English Journal, Vol. 97, Issue 3(Jan 2008):17-20. 이와 반대되는 입장으로, The Boston Globe(November 12, 2006)는 이 소설이 학생들에게 최고의 교육경험을 주었고 독서애를 점화시킨 작품이며 책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격한 감정이 담긴 떨리는 목소리로 주장하는 교사들에 관해 보도하였다. 3국내에서는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이나 탈식민페미니즘으로 번역되어왔으나 탈식민주의페미니즘이 비판받는 ‘이론의 제 1세계화’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의 탈식민화를 지향하는 함의를 담는 탈식민페미니즘을 번역어로 선택하였다. 졸저, 『탈식민페미니즘과 탈식민페미니스트들』(현대미학사, 2000), 8.
미국 소수민족 청소년문학인 『요코 이야기』의 저자 왓킨스는 5학년에서 8학년 대상으로 매사추세스 주의 교육청이 추천하는 60명의 저자 중의 한명이었다(Stephen 17). 그녀는 같은 주에 거주하였으므로 쉽게 초청할 수 있는 연사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을 경험한 산 증인인 그녀의 입을 통해 이 작품의 반전 메시지를 직접 학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교육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왓킨스의 인기는 상당하여 보스턴 글로브의 교사 인터뷰에 의하면, 졸업생들도 다시 초청연사를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상상할 수 있는 『요코 이야기』의 위와 같은 일반적인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 단원은 다시 한 번 되묻는 것으로 시작하려한다. 과연 『요코 이야기』는 어떻게 미국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고 교재로까지 선정되었을까? 그 “강인한 흡인력”(Stephen 18)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가정과 내셔널리즘의 공모’라는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정은 흔히 여성의 공간으로 분류되어 왔다. 특히 전시 하에서 성인 남성은 가정 밖으로 떠나고 가정은 여성을 포함한 약자만의 공간이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여기에서 선정한 두 작품 모두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요코의 아빠와 오빠는 전장이나 이와 관련된 장소로 나가있고, 집에는 여자들만 남아있다.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도 마찬가지로서, 아버지와 오빠들은 모두 나가 있고, 집안에는 엄마와 화자인 소녀, 아직 나이 어린 남동생, 그리고 일제의 고문을 받아서 죽어가는 할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여성과 약자만 남은 가정은 항상 독자의 연민과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전시상황 아래 여성들이 위험에 노출되고 고통을 겪을 때 독자의 감정 이입은 극대화된다. 문제는 『요코 이야기』가 강간 위험에 놓인 일본인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한국인 공산당 남성을 가해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가해식민지/피식민지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층위를 무시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요코 이야기』에 재현된 가정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체로 작동한다. 즉, 더 없이 평화로웠던 요코의 가정은 전쟁의 피해자로 둔갑하고 일본 제국은 어느덧 피해국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요코와 일본이 피해자로 변모하는 모습은 애미 카플란(Amy Kaplan)의 주장을 상기시킨다.5 카플란은 『미국 문화 만들기에 있어서의 제국의 혼동』(
카플란에 의하면, 제국의 언어는 가정의 수사학으로 포장되어 있다. 가정의 담론과 제국주의자 담론이 민족(인종)차별주의를 공유하고 있는 배타성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카플란은 미국이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식민지의 정치, 경제의 침입과 영토의 확장을 자신들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본 점에 주목한다. 인디언 정복과 관련된 거칠고 폭력적인 백인 남성들의 서부 확장의 ‘운명적’역사는 인기 소설이나 대중 잡지, 그리고 문화적 매체들의 재현에 의해 포근한 가정의 일상과 가족사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거친다. 다시 말해 서 프론티어가 진정한 의미의 미국이 되기 위해서는 당시 “분리된 영역”(separate spheres)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가정성의 신화”(cult of domesticity)로 포장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24-29). 그리하여 매우 여성적으로 보이는 앵글로 색슨계의 미국 여성이 가꾸는 이상적인 가정은 제국주의 역사의 거친 실상을 가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분리된 영역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의 미묘한 결합을 카플란은 “가족 내셔널리즘”(domestic nationalism)으로 표현하고 이것이 백인 중심의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해왔다고 주장한다(37-39). 제국이 한참 진행된 이후, 폭력과 침략의 식민지 역사는 제국주의 종주국의 매력적인 가정이 보여주는 일상의 묘사 속에 가려 그 실상이 지워지는 것이다.
이 같은 카플란의 논의를 왓킨스의 『요코 이야기』에 그대로 적용하면, 이 작품 역시 ‘가족 내셔널리즘’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은 조선 땅에서 정치적, 경제적 제도로서의 일본 제국주의 건설의 폭력적 실상을 가린 채로 그 제국이 이미 ‘일상적인 삶’이 되어버린 한 가정의 모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순진무구한 일본 아이가 반찬 투정을 한다든지 여성에게 어울리는 다도와 꽃꽂이, 시 짓기, 독서, 일본 전통무용 등을 배우고 엄마와 딸들이 부상당한 참전 군인을 병문안하는 모습은 여느 단란한 전통적인 일본인 가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일본인 가정은 가장인 아버지나 오빠가 모두 전쟁터에 나가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연약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엄마를 비롯하여 언니와 화자인 요코가 모두 전쟁의 피해자이며 이북 공산당의 잠재적 강간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이들 가족 서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거나 그 모습이 가해자의 모습으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또한 선한 조선인이라도 주체로서의 목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청소년 문학소설이라면 나올 법한 한인이나 일본인 친구 이야기도 전혀 없다. 일본아이 들만 다니는 일본학교에서의 학예회 이야기만 나올 뿐, 고향에 공존했을 법한 같은 또래의 조선인 소녀나 소년의 이야기는 전무한 것이다. 제국주의의 역사적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평화롭고 단란한 이 일본인 가정에 불어 닥친 불행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이 일본인 가정을 전시의 피해자로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부지불식간에 저자 왓킨스는 카플란이 상정하는 제국의 ‘가족 내셔널리즘’의 전경화에 성공한 셈이다.
『요코 이야기』가 요코 가족을 이차 세계 대전의 피해자 모델로 만들고 있다는 점은 이미 국내 비평계에서 지적되었다. 물론, 우에노 치즈코도 지적하듯이, 일본 여성들이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57). 만주에서 귀환한 일본인들의 체험기도 자신들이 겪은 수난만을 다루므로, 자신들이 일본의 군사력에 의해 보호받는 침략자였다는 인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일본군이 중국 여성을 강간한 역사나 일본군 ‘위안부’들의 수난에 대해서도 “피차 마찬가지였다”거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58).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여성들의 경험을 직접 청취한 일련의 작업을 살펴보면, 일본여성들은 ‘회상된 과거’로서의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특권층으로서의 ‘향수’에 가득 차 있으며, 그‘특권’이 일본 제국의 ‘불공정’한 폭력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치즈코 57). 실향민으로서의 귀환 일본인이 과거 조선에 대해 드러내는 향수가 저자 왓킨스가 『요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는 향수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탈식민주의 담론의 관점에서 조금 더 확대 해석해 본다면, 이는 레나토 로살도(Renato Rosaldo)의 “제국주의자 향수”(imperialist nostalgia)(108)로 설명해도 크게 어긋날 것 같지는 않다.
제국 건설에 한 몫 했던 제국의 선교사나 인류학자들, 혹은 여행 작가들이 현 대화해 변해버린 피식민지의 모습을 그들이 목격했거나 상상하는 원형 그대로의 식민지 이전의 문화로 되돌리고 싶은 염원을 보이는데, 이러한 아이러니한 갈망을 로살도는 “제국주의자 향수”로 부르는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제국주의자 향수는 사실은 과거 제국이 휘두른 폭력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로살도는 꼬집는다.
nostalgia(향수)의 어원은 17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nostos(귀향)와 algia(고통스러운 상태)의 합성어로 시작되었다. 병리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이 용어는 고향에서 멀리 싸우고 있던 스위스 용병 사이에 번진 현상으로, “병리학적 향수병”을 의미했다((Rosaldo 108). 그러나 로살도에 의하면, 제국주의자 향수는 지배의 폭력 과정을 덮어버리기 위한 ‘순진함의 마스크’로서, 표면적으로는 해롭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향수에 관한 논의는 탈식민주의에서 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주요 이슈이기도하다. 향수는 본질적으로 어머니와 어머니가 대변하는 어린 시절의 고향이 그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제국과 민족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가정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여성을 분리된 영역으로 격리하여 고향의 이미지를 제조한다면, 그 고향은 여성에게 사회가 가한 불평등을 가리기 위한 픽션일 뿐이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향수는 로살도의 표현처럼, 지배의 폭력을 덮어버리기 위한 순진함의 마스크가 된다.6
일제 강점기의 조선을 그리워하던 귀환 일본 여성들처럼 『요코 이야기』역시 로살도가 말하는 제국주의자 향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2살 소녀 요코의 순진 무구함을 빌려 한 치의 거리감도 없이 피식민지 조선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주저함 없이 표출시킨 이 작품은 향수가 의미하는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독자들의 보편적 감성을 자극하지만, 실제로는 젠더의식이 결여된 제국주의자의 향수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므로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이 전혀 언급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작가의 조선의 어린 시절에 보이는 강한 향수는 일 본제국의 폭력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소포클레스의 삼부작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부터 나싸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문학을 포함한 미국 현대 문학까지 서구 문학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선대의 죄와 저주 그리고 후대의 속죄라는 정의의 문제는 개인이 역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키는 주요 주제의 하나이다. 이 같은 주제는 영미청소년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미국에서 『해리 포터』(
4일본의 침략 역사를 강조하기 보다는 원폭의 피해자로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죄의 식을 담은 시선이 이 작품의 교재선정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신경희의 관점도 물론 유효할 것이다(신경희 310-37). 5이 단원의 제목에 Amy Kaplan의 The Anarchy of Empire(제국의 혼동)의 한국어 번역을 빌려온 이유는 왓킨스의 피해자 의식을 제국주의의 혼동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다. 6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여성의 부드러운 모성성을 동원하여 가정과 고향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재현하는 내셔널리즘 서사에 관한 연구는 Kedhen Suzanne, Jean Pickering, Narratives of Nostalgia, Gender, and Nationalism (New York: New York UP, 1997) 참조.
한국의 일부 평론은 『요코 이야기』를 국가를 넘어서 전시 상황하의 개인 이야기로 해석할 것을 주문하였다.7 그러나 작가는 결코 개인적일 수만은 없다. 특히 와킨스나 최숙렬처럼 미국 내 소수민 작가의 경우는 더욱 더 소속 집단의 문화와 역사를 재현해야 하는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글은 자기 개인보다는 소속 집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도 소수민족 문학의 집단적 성격에 대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소수 민족 문학에서는 한 작가의 말이 이미 “그 자체로 집단적 행동”일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띤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거장의 개인적 발화가 집단적 발화와 다를 수 있는 상황이 소수 집단 문학에는 가능하지 않다. 소수 집단 문학의 경우에는 문학은 소수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33-39).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의 작가 최숙렬이나 『요코 이야기』의 저자 와킨스는 각기 한국계 미국인이며 일본계 미국인인 소수민족 작가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들뢰즈가 지적한 소수민족 문학의 집단적 성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최숙렬이 『요코 이야기』를 읽고 잠이 오지 않는 고통을 겪으며 대항 소설을 쓸 각오를 다졌던 것은 바로 소수민족 문학의 특성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그 자체로 집단적 의사 표명’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가 없으므로 『요코 이야기』는 저자가 표명한 한국 사랑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검토를 피해갈 길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상당수의 조선인은 군인이거나 강간범 혹은 공산주의자인 가해자로 묘사되어있다. 물론 도피하는 요코의 오빠를 목숨을 걸고 도와준 조선인도 나오지만 말하는 주체로서의 한국 여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요코 이야기』에서 보이지 않는 조선의 여성을 ‘말하고 보는 주체’로 세우려는 시도가 최숙렬의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의 의도라 하겠다. 마치 『너른 사가소 바다』가 『제인 에어』의 피식민지인 버사에게 목소리를 주고 존 쿳시(John M Coetzee)의 『포』(Foe)가 『로빈슨 크루소』(
『요코 이야기』가 미국에서의 한국사 교육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의식하면서 최숙렬이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조선의 풍경 바로 세우기로 보인다. 그 하나가 꽃에 대한 묘사이다. 왓킨스가 일본의 대표적 나무인 대나무를 마치 한국의 풍경인 것처럼 재현하여 일본의 고정된 이미지를 강화시킨 데에 반해 이 작품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꽃으로 소나무, 채송화, 봉선화, 분꽃, 나리꽃, 나팔꽃 등이 소개되고 있다. 할아버지와 함께 등장하는 늙은 소나무는 조선 가부장 역사와 한국 전통의 상징으로서, 할아버지의 기개와 항일운동 등 할아버지가 상징하는 조선의 무구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소나무 밑에서 휴식을 즐기시던 할아버지가 소나무가 일본 경찰에 의해 베어지면 서 곧 쓰러지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소나무의 의미와 할아버지의 상징인 민족혼이 겹치는 부분이다.
그런데 최숙렬의 조선 풍경은 『요코 이야기』이상으로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키는 전통적 젠더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풍경의 중심이 되는 소나무는 할아버지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적 조선을 지시하는 상징물이다. 이에 반해 꽃은 여성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봉선화를 비롯한 다양한 꽃은 주인공 소녀와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해방을 맞이하여 여주인공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앞마당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한국의 전통적 꽃인 분꽃, 나리꽃, 그리고 나팔꽃 등은 해방의 자유와 일본의 풍경에 대한 대 항 담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학교의 풍경 역시 왓킨스가 그리는 제국의 교육과는 전혀 다른 식민지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죽창으로 사람의 형상을 닮은 인형들을 찌르는 것을 배우는 모습이나 초라한 한국 학생들의 도시락, 강제청소, 일본인 교사로부터의 폭력, 자존감의 상실 등이 그것이다. 『요코 이야기』가 한국의 식민지 상황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지시키는 반면, 최숙렬의 풍경은 바로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깨뜨리고 그 곳에 대항 서사를 끼워 넣는 일이다. 일본 교장의 훈시에 맞서 한 조선인 학생이 일본교사와 일본인에 대해 “그만! 그만! 그만! 우리는 너희 놈들부터 먼저 찔러 버릴 테다! 우리는 미국인들을 도와 너희 모두를 파멸시킬 거다!”(
『요코 이야기』에서 한국 군인이 잠재적 강간범으로 나온다면,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는 해방 후 징용에서 돌아온 군인 아들들은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온다. 일본의 패전 이후 군인들이 귀향하지만, 영양 부족과 전쟁의 여파로 속 속 죽어가 온 마을은 병원으로 변한다. 물론 최숙렬은 한국의 역사에 한국인의 책임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가령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으로 소련인보다 더 헌신적으로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한국 공산당들을 통해 ‘자발적 헤게모니’의 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요코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은 최숙렬의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보다 강렬하고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 다. 『요코 이야기』가 착한 한국인도 일부 담고 있는 반면,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의 일본인들은 모두 부정적이다. 인정사정없는 나리타 순사장이나 표독한 일본 여교사를 비롯하여 일본인들은 모두 가해자이며 나쁜 인간들로 점철되어 있다. 왓킨스의 작품에 대한 대항 담론이기에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제국은 한결같이 저항해야할 나쁜 가해자의 모습을 띤다. 대항서사가 피해자와 희생자로서의 민족담론에 집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한국 식민지 문학이나 미국의 한국계 소수 민족 문학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인을 가해자로만 그린 것은 아니다. 한 예로 고태원의 『곰바위의 쓴 과일』(
이 짧은 문구에서 고태원은 다양한 종류의 일본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오갈 데 없는 피난민이나 선생님, 또는 감옥의 다정한 일본인 간수 등으로 일본인을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보지 않은 이 문구는 국가주의를 넘어선 보다 중층적인 피식민지 저항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선 엘리트 집안에 대한 일본의 예우가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처럼 폭력으로만 일관된 것은 아닐 것이다. 김은국(미국명: Richard E. Kim)의 『빼앗긴 이름』(
여성 교육의 관점에서도,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과 『요코 이야기』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딸들을 최고의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돈을 절약하느라 쓰레기통 에서 음식을 주워 먹게 하는 요코 어머니의 교육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한편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 딸의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자세는 일관된 민족주의 지향성을 보인다. 여주인공 숙인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상투를 잘리고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삼촌과 함께 일제가 지른 불에 타 숨졌으며. 할아버지는 독립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납치되어 옥고를 치룬 후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 집안 며느리인 어머니는 일제를 피해 만주로 올라가 남편과 함께 한글 신문을 발간했으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동네의 아낙들에게 글자 해독을 도와주는 동네의 유일한 인텔리 여성이다. 제국 경찰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화자의 어머니는 ‘나리타 순사장을 맞상대하여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묘사된다(YIG 21).
이 인텔리 어머니의 자녀 교육은 시종일관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의 태도를 보인다.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어머니는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여 딸 숙안을 아예 학교를 보내지 않고 공장 일을 돕도록 한다. 아들이 많은 어머니는 딸에게 남자 동생을 돌볼 의무를 강조하며 ‘돌봄’은 딸인 숙안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책임이자 덕목으로 교육된다. 할아버지를 둘러싼 국가적 상징은 여주인공의 교육과 취미와도 연관된다. 가령 할아버지와 함께 한글을 읽고 쓰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 관해 배우는 것을 즐기며 한시 읽기와 붓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대목은 『요코 이야기』의 취미활동에 비해 훨씬 한국적이자 민족주의 교육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의 딸의 교육에 대한 태도에서 식민지하 조선에서 근대에 대한 욕망을 품었던 어머니들이 직면해야 했던 긴장은 찾을 수 없다. 예컨대 박완서의 『말뚝』에서도 드러나듯이, 식민지 조선의 어머니는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기 위해 근대식 교육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딸의 신여성 만들기는 근대화라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수용해야하는 이중적 면모를 지닌 것이었다.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에서의 숙안의 어머니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과감히 딸의 신여성 교육을 포기한 셈이다. 엘리트 여성인 숙안의 어머니의 민족주의적 교육은 그녀를 둘러싼 식민지의 다층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 딸인 숙안의 교육은 밤이 되면, 촛불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한문 공부를 하고 동화책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식민 통치하에서 남성 민족주의 엘리트와 양반을 상징하는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이 사라진 그 시점/공간에서 이들의 역할을 물려받는 어머니는 피식민 주체로서의 전통을 잇고자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학교를 기피하고 할아버지 밑에서 몰래 한글을 배우는 딸 숙안의 교육 역시 민족이라는 큰 우산 밑에서 반식민적인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을 가로지르는 신여성의 정체성과 교육이라는 또 하나의 획과 고민은 찾기 힘들다.
한편, 식민지 한국의 풍경을 바로 세우려는 저자 최숙렬의 일관된 열망은 문학적 재현으로 소화되기 보다는 민족주의 언설로 표현되는 경향을 보인다. 역사 교사인 저자의 역사 지식이 등장 인물의 대화에 그대로 대입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엄마의 입을 빌려 제국을 비난하지만, 저자의 목소리가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작품의 풍경은 미국학생들에게 조선 식민지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작가의 일관된 민족주의 사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9 작가의 이 같은 반식민 대항서사의 대의 속에서 한참 성장기에 있는 여주인공 소녀의 갈등이나 성장통은 뭉뚱그려지고 희석된 감이 없지 않다.
7임기현은 이 작품이 12세 소녀의 순진한 관점을 빌었기 때문에 2차 대전의 의미를 감당할 수 없고 그나마 평화운동가 요코가 있었기에 반전의식의 개입이 가능했다는 비교적 호의적 태도를 보인다(467). 그러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다룬 청소년문학 역시 성인 작가의 관점에서 구성되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소년 문학은 없다는 로즈(Jacqueline Rose)의 주장을 감안할 때, 12세 소녀의 ‘순진한 관점’이 문학재현의 중층적 책임을 전적으로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로즈는 아동문학은 쓰는 과정에서 아동을 배제했다가 아동을 다시 들여놓는, 일종의 “불가능성”이자“유혹”으로 본다(xii). 8이하 출처는 약자(YIG)와 쪽수만 명기함. 9민족주의 사관은 한국의 최근 역사적 경험을 민족적 자의식의 출현과 반외세 투쟁으로 해석하고, 그 결과 주권국가로서 정치적, 문화적 독립을 성취한 것으로 한국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한-일 관계를 식민/피식민의 구도 하에 경제, 문화의 착취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역사관을 담지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해방 역시 일본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로 전유된다. 그 결과 민족은 식민지적 ‘타자’와 착취관계에서 ‘전체’가 되며, 그럼으로써 계급, 성, 지역, 신분 등과 같은 대안적인 집합 정체성은 뭉뚱그려지고 식민지배하의 모든 사회운동은 민족주의적이며 반식민적인 것이 된다.
일본이 가부장주의의 역사가 강한 나라로 인식된 만큼 서양 문학에서 일본 여성은 피해자의 이미지로 굳혀져왔다. 일례로, 영국작가 안젤리나 카터(Angelina Carter)는 일본 여성의 삶을 두꺼운 책갈피에 눌려 모습을 유지하는 나뭇잎에 비유했으며 일본 노파를 거의 식물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한 바 있다.10 이러한 수동적이고 나약한 일본 여성의 이미지는 『요코 이야기』에서 한껏 부각된다. 이렇듯, 일본 여성을 전쟁과 가해 제국의 역사에서 비켜선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관점과 관련하여,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성찰적 여성사(reflexive women’s history)는 일본여성을 역사의 수동적인 희생자로 간주하는 ‘피해자 사관’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역사 주체로 받아들이는 가해자 사관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사인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여성은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라, 적극적 전쟁 협력자였으며 따라서 공범죄를 물어야한다는 것이다(치즈코 187).
성찰적 여성사가 피해자와 객체만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여성에게 주체로서의 책임을 묻는 관점은 『요코 이야기』의 해석에도 어느 정도 유효할 수 있다. 전쟁은 여성을 가정에만 안주하지 말고 국민으로서 공적 영역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요코 가족은 상이군인을 위문하러 간다거나 “제국의 승리”라는 글을 써서 군인에게 전달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둘러싼 공적 영역에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화 프로젝트’는 간디가 이끈 인도의 독립 혁명이나 일본의 동아시아 전쟁에서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당시 상당수의 일본 페미니스트들도 새 시대의 제국의 혁명으로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 논의에 따르면 『요코 이야기』의 인물들은 단순히 전쟁 피해자로만 보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에도 불구하고 『요코 이야기』의 주요 메시지의 하나인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분명 한국내의 민족주의 진영만 빼고는 “강인한 흡인력”을 발휘해왔다. 특히 국내 페미니스트 진영에서는 전시 성폭력의 문제를 민족이나 국가적 차원과 분리시켜 읽을 것을 권고해왔다.11 성폭력의 노출 위험은 국가를 넘어 모든 여성이 전시에 가장 많이 겪는 위험이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을 넘어선 여성의 이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민족이나 국가적 차원과는 분리될 수 없는 중층적 문제이다. 패전 이후에는 제국에 대한 식민지의 보복심리가 강하게 작동하여 피해자에 대한 죄의식이 정당화되거나 희석될 수 있다. 제국의 남성과 식민지 남성 사이에 낀 틈새의 존재인 제국의 여성은 제국과 식민지의 위치가 바뀌면서 피해자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패전이후 한국 땅에서의 일본여성의 강간피해가 거론되는 현시점에서, 이 작품이 전달하는 전시 성폭력은 가해자/피해자, 제국/식민지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에 따른 윤리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反轉, 즉,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고 식민지가 제국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과 삶의 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탈식민페미니즘 독법의 한 방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은 집단이 지닌 기억의 완고한 경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한다.
‘가족 내셔널리즘’의 제국의 서사였던 『요코 이야기』는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보다 냉정한 사회인식과 여성의 한계 상황을 드러낸다. 귀환 일본인에 대한 조국 일본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하다. 요코는 자신의 고국인 일본 땅이 타향과도 같이 느낀다. 두고 온 한국의 이북 땅을 그리지만 그곳 역시 일본인으로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타향일 뿐이다. 요코의 현실적 고통은 갓 도착한 일본 땅에서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는 시점 이후 부터 가중된다. 어느 장면보다도 충격과 독자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머니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묘사가 짧다. 왜 엄마가 죽었는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엄마의 죽음을 둘러싼 전후 상황묘사보다는 엄마의 죽음을 홀로 목격하면서, 자신이 그 순간 훌쩍 커버려 성인이 되었다고 요코는 말할 뿐이다(122). 그만큼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이없이 갑자기 일본 땅에서 죽은 어머니를 두고 요코의 언니가 나남에서 여기까지 와놓고는 왜 이제 죽어요? 라며 절규하는 장면(123)은 어느 장면보다도 독자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밥을 얻어오느라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그녀가 음식이 든 그릇을 길 위로 내동댕이치자 역에 모인 거지와 고아, 구경꾼들이 흩어진 음식에로 달려드는 모습은 전후 일본의 풍경을 전달한다(123).
요코 가족의 와해로 인해 전후 일본사회의 풍경은 더욱 살벌하고 척박하게 다가온다. 작품 전반부에서 보여준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 내셔널리즘의 서사는 일본 제국의 와해와 더불어 붕괴된 셈이다. 제국의 가족이 와해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요코가 당면한 전후 일본 가부장제의 현실이다. 이 소녀들을 돌보고 보좌할 아빠나 오빠가 없기에 길거리에서 죽은 엄마의 시신을 화장시키는 문제를 두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장의사들이나,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지만 시간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며 장지문을 거칠게 닫아걸고 안으로 사라지는 사찰의 승려, 이들 모두 한국 공산당들만큼이나 냉정한 일본사회의 단면을 말해준다. 또한 어른이 없으면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의 풍습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을 학교에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나 요코에게 온 편지를 어린 여학생을 돌봐야한다는 핑계 아래 몰래 뜯어보는 아시다 교장의 행동 등은 요코로 하여금 가족의 와해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게 만드는 일들이다. 아무리 어린 여자라 하더라도 남자 동행인이 없이는 남자가 묵는 여관을 찾아갈 수 없는 현실과 여관에 묵고 있는 마스무라 상사를 만나고 싶은 나머지 언니가 빨리 결혼하여 형부를 대동하 고 갈 수 있을 날을 고대하는 장면 등을 통해 저자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조율할 수 없는 전후 일본의 가부장적 사회를 고발하는 것으로서, 작가의 페미니스트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조선 공산당을 강간범으로 묘사한 만큼이나 일본 역시 모질고 잔인한 사회로 묘사된다. 너무나 야비하고 마치 “지옥 같다”고 말하는 요코에게 모국인 일본 역시‘타자’였던 셈이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요코의 인식은 투정부리던 막내딸에서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인식으로 차츰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국의 여성도 제국의 가족 내셔널리즘의 서사에 호명되고 원용되는 객체가 될 수 있다. 이들의 정체성을 제국/식민지, 가해자/피해자의 틈새를 넘나드는 간극의 정체성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전시 상황의 성폭력 앞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피해자와 타자로서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코 이야기』의 역사 인식의 결핍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요코 역시 타자이고 타자의 고통에 독자가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은 페미니스트 진영의 글 읽기에 빚진 바가 크다. 이러한 젠더적 관점은 평행선으로만 내닫던 두 작품의 연결고리를 찾 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10Angelina Carter, Fireworks: Nine Profane Pieces (New York: Penguin Books,1974). 11박정애, 「『요코 이야기』와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의 ‘기억’문제 비교 연구」. 『여성문학연구』. 21(2009년 6월): 271-306; 임우경, 「『요코이야기』와 기억의 전쟁 :전지구화 시대 민족기억의 파열과 봉합, 그리고 젠더」. 『여성이론』18 (2008년 여름): 106-33.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담론들은 억압적 지배 사회 속에서 주변화되어 온 타자들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온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여성과 식민지는 모두 억압과 폭력의 정치학을 경험해 온 ‘식민화된 타자’라는 점에서 보편적 합의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 두 논의는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만 달려온 경향이 없지 않다. 탈식민페미니즘의 독법은 이들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에서 유효하다. 민족주의와 제국의 서사 그리고 탈식민주의 서사마저 여성을 호명하거나 왜곡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지점을 추적하여 그 서사들의 온전함에 구멍을 내는 과정을 통해 보다 객관적인 역사의식과 탈식민 서사를 추구하는 독해 방식이다.
이 독법은 저자 왓킨스의 의식적 의도와 상관없이 『요코 이야기』가 여성과 여성이 이루는 평화로운 가정의 일상을 전경화하여 독자의 시선을 모으면서 제국의 식민폭력의 역사를 뒤로 가려버리는 전형적 제국서사의 하나임을 드러내었다. 여성 등장인물들의 잃어버린 조선 고향에 대한 향수 역시 가공된 제국주의자 향수의 하나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탈식민페미니즘의 시각은 제국/식민, 제국남성/식민남성 사이에서 고정되지 않은 간극의 정체성을 전시 상황 속 제국 여성의 삶의 조건으로 파악하고, 이로써 제국의 여성의 삶 역시 타자의 삶이 지닌 고통의 무게를 전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 작품에 담긴 ‘제국의 혼동’을 감지하면서도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피해자의 고통을 한국 독자가 분담할 수 있는 여유는 바로 이러한 독법의 시도에서 가능할 것이다.
『요코 이야기』의 대항서사인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역시 탈식민페미니즘 독법의 칼날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한국사의 재정립이라는 반 식민 이 데올로기의 책무 속에서 식민지 전통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는 소녀가 겪었을 법한 젠더 이슈를 민족주의 가부장제의 큰 우산에 가려버리는 한계를 노정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 작품의 풍경은 여전히 남성/여성, 식민/피식민의 확고한 이분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만의 탈식민주의나 반역사적이고 보편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젠더의 정치학 중 그 어느 하나 만으로는 이들 작품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을 EFL 상황에서 영어교재로 선택했을 경우 탈식민페미니즘의 관점에 대한 교사의 충분한 이해가 요구된다. 바로 이 점에서 영어교육은 영어의 차원을 넘어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지적 담론과의 접합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