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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New Indications of the Historical Plays During the Post-Independence Period 해방기 역사극의 새로운 징후들* ―3?1절 기념 연극대회 참가작과 ‘과정으로서의 역사쓰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New Indications of the Historical Plays During the Post-Independence Period

본고는 해방기 역사극의 연속성과 단절의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이 시기 역사극의 역사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해방기에 발표·공연된 역사극 중에서 현전하는 작품,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국 역사극의 역사에 문턱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지는 세 작품을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김남천의 <삼일운동>(1946),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1946),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그것이다. 세 작품 모두, 1946년과 1947년에 실시된 ‘3.1절 기념 연극대회’에 올려진 대작들이다. <위대한 사랑>이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극의 범주에 무리없이 포함될 수 있는 반면, <삼일운동>과 <기미년 3월 1일>을 ‘역사극’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1946년 당시에 두 작품이 ‘역사극’이라는 분명한 레테르를 달고 공연되거나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연구자가 두 작품을 ‘역사극’의 범주에서 연구하려는 입장이 바로, 해방기 역사극 개념의 역사성을 재구하려는 연구시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세 작품은 해방 이후 ‘역사기념이라는 기획’하에 창작되고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식민지시대 역사극과는 다른 탄생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국가가 정한 ‘국경일’에 ‘3.1기념 연극제’라는 공식 행사에서 공연된 작품들, 즉 해방기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2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창작 공연한 이 작품들을 ‘해방기 역사극’의 범주 안에서 고찰하였다. “개념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고 단지 특정 맥락 속에서 그것들이 사용된 방식의 역사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해방기라는 새롭고 이질적인 시공간에서 ‘역사극’이 식민지 시대 ‘역사극’과의 연속성을 담지하면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주목하였다. 해방기 역사극 담론에서는 식민지 시기 역사극을 반복 재생산하는 대중 역사극의 한편에서 ‘리얼리즘과 역사’의 재회를 강조한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었다. 세 작품은, 완결된 객관적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재현하고자 하는 역사극쓰기의 새로운 욕망을 보여준다. 역사를 취재하고 기록하고 역사적 증인을 내세워 그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입장,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냈지만 사실적 장치와 관련한 진실성의 지표를 통해 사실-효과를 만들어내는 시도 등이 그것이다.

KEYWORD
Post-independence Period , historical plays , reality-effect , Kim Nam-cheon , Ham Se-deok , Jo Yeong-chul , Theater Festival for the March 1st Movement Commemoration
  • 1. 들어가며 : ‘역사기념’이라는 기획, 그리고 역사극의 개념

    본고는 해방기 역사극의 연속성과 단절의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이 시기 역사극의 역사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한국 역사극에 대한 선행연구 대부분은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갖는 ‘역사극’ ‘개념’에 대한 별다른 모색 없이, 기존 연구의 역사극 정의를 반복 인용하거나 ‘역사 소재의 극’이라는 광의의 개념 정의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터너의 역사소설 분류법1)을 차용하여 역사극을 구분지어 보자면, 텍스트 밖의 과거 실재를 재현하는 ‘기록적’ 역사극에서부터 극적 장치에 의해 사실-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중점을 두는 ‘창안적’ 역사극까지, 그 범위와 양상은 넓고도 다양하다. 때문에 연극 내재적 시각에서 한국 역사극의 개념과 역사성을 해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본고는 “개념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고 단지 특정 맥락 속에서 그것들이 사용된 방식의 역사만이 존재할 수 있다”2)는 전제 하에, 해방기라는 새롭고 이질적인 시공간에서 ‘역사극’이 식민지 시대 ‘역사극’과의 연속성을 담지하면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주목할 것이다.

    해방기 3년의 시간동안 연극계는 약 60여 편의 희곡이 발표되었고, 500회가 넘는 공연이 이루어질 정도로 연극계가 호황이었다.3) 이 시기의 ‘역사극’ 역시 해방기의 과제인 과거청산과 민족문화건설 수립에 기여하는 진보적 연극으로 호출되었다. 본고는 해방기(1945~1948)에 발표·공연된 역사극 중에서 현전하는 작품,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국 역사극의 역사에 문턱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지는 세 작품을 텍스트로 선정하였다.4) 김남천의 <삼일운동>(1946),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1946),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그것이다. 이 세 작품이 조선문학가동맹과 조선연극동맹 소속 작가들이 창작한 좌익편향의 작품임을 고려할 때, 우익쪽 작가의 역사극도 함께 고찰해야만 균형있는 연구시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기에 우익계열 연극인들의 대응이 늦었고 작품창작에 있어서도 양적으로 열세였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현전하는 역사극 작품이 없기 때문에 연구에 난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1947년이 되어서야 3·1절 기념공연으로 ‘3·1 만세운동’을 소재화한 유치진의 <조국>이 공연되지만, <조국>은 극적 완성도에 있어 결함이 발견되는 단막극으로 ‘역사극’와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논의거리가 충분히 않아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유치진은 해방 이후 역사극 <자명고>, <원술랑> 등을 창작, 공연하였는데, 그가 보여준 역사극 상상력과 멜로드라마적 양식은 식민지 시대의 역사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5)는 점에서 역시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한편 해방기 역사극 중에서 양적으로 우세한 작품군은 무엇보다도 식민지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온 대중극으로서의 역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단종애사>, <대원군>, <미륵왕자>, <사명당>, <안중근사기> 등으로 대표되는 김춘광의 역사극을 비롯한 다수의 역사극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대중연극’과 ‘역사 소재’의 오래된 결탁이 해방기에도 위력을 발휘하였다.6)

    이들과는 또 다른 계열에서 창작된 역사극이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상의 세 작품이다. 세 작품 모두, 1946년과 1947년에 실시된 ‘3·1절 기념 연극대회’7)에 올려진 대작들이다. <위대한 사랑>이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극의 범주에 무리없이 포함될 수 있는 반면, <삼일운동>과 <기미년 3월 1일>을 ‘역사극’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1946년 당시에 두 작품이 ‘역사극’이라는 분명한 레테르를 달고 공연되거나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연구자가 두 작품을 ‘역사극’의 범주에서 연구하려는 입장이 바로, 해방기 역사극 개념의 역사성을 재구하려는 연구시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역사극이란 역사와 연극의 만남, 곧 역사의 내용을 연극의 형식으로 담아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르다. ‘역사’와 ‘연극’의 만남의 목적과 방식, 조건이 각 시대마다 다르다는 전제에 합의한다면8), 해방 직후 주체적 해방투쟁의 역사를 3·1운동에서 찾고자했던 <삼일운동>과 <기미년 3월1일>은,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전유한 ‘해방기의 역사극’임에 분명하다.9) 당대의 연극비평과 매체의 기사들은 이 작품들을 거론하면서 ‘史實’, ‘3·1운동의 역사적 생활체험’, ‘우리 민족의 위대한 鬪爭史’등과 같은 언표들을 사용했다. 심지어 3·1운동을 겪지 못한 세대들이 해방기 새 시대의 주역으로 대두한 상황에서 민족의식 고취와 앙양을 위해 연극화 할 필요가 있다는 입론이 있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맥락들은, 창작자와 수용자가 ‘역사극’이라는 공식적인 표명을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연극담론 안에서 역사극(역사를 다룬 연극)으로 해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1946년부터 ‘3월 1일’이 미군정 법령에 의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는데,10) 해방 이후 최초의 국경일이 환기하는 국가적 ‘기념의례’는 역사의 현재화(actualizaton)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 세 작품은 해방이후 ‘역사기념이라는 기획’하게 창작되고 공연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식민지시대 역사극과는 다른 탄생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국가가 정한 ‘국경일’에 ‘3·1기념 연극제’라는 공식 행사에서 공연된 작품들, 즉 해방기의 역사를 새로쓰기 위해 26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창작 공연한 이 작품들을 ‘해방기역사극’의 범주 안에서 고찰하려는 것이다.

    8.15 광복과 함께 맞아들인 해방기는 무대 위에서 식민지 기억을 역사화하는 특정한 방식이 최초로 시도된 시기였다. 그 첫 시도가 ‘1919년 3·1 만세운동’을 관통하며 이루어졌다. ‘제1회 3·1절 기념 연극대회’에 올려진 김남천의 <삼일운동>과 함세덕의 <기미년 3월 1일>은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정면에서 다루었고, ‘제2회 3·1기념 연극제’에 올려진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은 ‘동학혁명’을 소재로 했다. 김남천과 함세덕의 작품은 3·1운동과 문학적 상상력, 해방기 좌우익의 연극과 정치성 등을 논하는 연구의 장에서 다수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역사극’이라는 범주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되지 않았다.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은 당시 매체광고와 연극비평이 언급한 수준에서 소개되었을 뿐 그동안 작품이 전하지 않았는데, 2010년 박명진의 발굴과 함께 소개되었다.11) 이 세 작품은 당대에 고평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문제적인 작품들로, 본고는 역사극의 렌즈를 통해 조망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극에 대한 기존의 정의와 특징을 척도로 해서 이 작품들을 예단하고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각 작품들이 창작된 맥락과 작가의식, 작품이 공연된 상황, 작품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역사극적 시도들을 통해, 해방기 역사극의 특이점을 찾아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해방기에도 ‘역사극’은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수요가 많은 문화상품이었다. 연극비평들은 “역사극 범람”이나 “사극의 유행”으로 이시기 연극계의 동향을 짚어냈다.

    송영은 1945년 9월 28일 조선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을 조직했었고, 좌익연극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결성된 조선연극동맹에 속했 있던 대표적인 좌익연극 운동가였다. 그는 해방기의 ‘역사극 범람’ 현상을 지적하면서, “反民主 封建 팟쇼戰線에 加力”하는 역사극을 비판했다. 이때의 역사극은 해방기에 풍미했던 대중사극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우 역시 상업주의와 영합한 김춘광의 역사극류를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영일은 1946년 8월에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해방이후 연극계를 총괄하며 “박영호의「번지없는 部落」,「북위삼팔도선」, 함세덕씨의「산적」,「기미년 삼월일일」, 김남천씨의「삼일운동」, 박로아씨의「삼일운동과 만주영감」, 박영호씨의「임진왜란」, 조영출씨의「독립군」,「논개」, 韓弘奎씨의「獄門이 열니는 날」, 김사량씨의「호접」,「봇똘의 군복」등등”을 “민주주의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창작활동”이자 “자랑할 수 있는 창작희곡”으로 꼽았다.14) 또 “1946년의 연극 활동은 三一캄파니어를 분기점으로해서 그 운동 자신이 지니는 落後性을 예각적으로 露顯”했다고 평가하고, “금년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로 나타난 것이 역사극15)의 進擊한 設定”이라고 언급했다. 특히 “참으로 사실주의 정신에 투철하려는 역사극이 창작되었다는 것은 귀중한 收穫의 하나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극의 방향이 고전의 계승이라는 기본적인 노선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에 결과된 저속한 야합은 아니었었다. 그리고 생생한 사회적 원천에서 받아드린 생활인상을 과거의 역사적 테두리 속에다 과학적으로 推移하여 그 역사적 시류속에 規定하는데 좇아서 異質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관념을 꾀뚫은 진보적 리알리즘에 의거한 창작방법”16) 이었다고 평가했다. 본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세 작품이 당시에 받은 평가를 보면, 안영일이 “참으로 사실주의 정신에 투철하려는 역사극”이라고 평가했던 작품들과 거의 유사한 평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과 정황은 다음 절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Joseph W. Turner, The Kinds of Historical Fiction, Genre,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1979, fall. 공임순,『우리의 역사소설은 이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책세상, 2000, 130~136쪽에서 재인용.  2)케임브리지 학파는 개념을 인간의 경험 세계, 즉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불변하는 단단한 실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내뿜고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유동적인 언어적 구성물론 본다. 이 문장은 이들의 관심을 선언적으로 드러낸 스키너(Quentin Skinner)의 입장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인호,『개념사란 무엇인가』, 역사비평사, 2011, 40쪽에서 재인용.  3)이석만, 『해방기 연극연구』, 태학사, 1996.  4)박로아의 <삼일운동과 만주영감>, 박영호의 <임진왜란>, 조영출의 <독립군>, <논개>, 김태진의 <이순신>(일명 임진왜란), 김영수의 <민중전>, 함세덕의 <태백산맥> 등도 해방기에 공연된 역사극이지만 아쉽게도 대본이 남아있지 않다.  5)김성희,「국립극단을 통해본 한국 역사극의 지형도-1950년부터 1979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2011년 한국드라마학회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2011, 36쪽.  6)해방기 대중역사물과 대중사극에 대한 연구가 아직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는데, 추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7)‘3·1절 기념 연극대회’를 둘러싼 당시 정치사회적 정황과 좌우익 연극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이상우,「해방직후 좌우대립기의 희곡에 나타난 현실인식의 양상」,『한국극예술연구』제2집, 한국극예술학회, 1992. 양승국,「해방직후의 진보적 민족연극운동」,『창작과비평』, 1989년 겨울호, 191~214쪽. 양근애,「해방기 연극, 기념과 기억의 정치적 퍼포먼스」,『한국문학연구』제3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2009.  8)이것은 본 연구자가 2009년부터 참여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의 “한국 역사극의 역사” 공동연구 프로젝트팀의 입장이기도 하다. ‘역사극’처럼 “역사성을 가진 개념은 정의내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역사와 연극의 만남으로 성립하는 역사극이 비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 되는 이유는 역사 개념 자체가 역사적인 맥락속에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2009년 기초연구과제「한국역사극의 역사」연구계획서, 4~5쪽.  9)곽병창이 선행연구「세 편의 3·1절 기념 희곡에 대한 비교 고찰 -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과 유치진의 <조국>, 김남천의 <3·1운동>을 중심으로」(『현대문학이론연구』5호, 현대문학이론학회, 1995)에서 이 세 작품을 “역사극의 범주에 드는 작품”(85쪽)이라고 언급은 하였으나 구체적인 서술은 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은 세 작품의 갈등양상과 현실인식을 비교분석하는 데 주력하였다.  10)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3월 1일은 ‘삼일절’이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 되었다. 김민환,「한국의 국가기념일 성립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0. 참조  11)박명진,「해방기 조영출의 공연 희곡 연구–<위대한 사랑>을 중심으로」,『한국극예술연구』제32집, 한국극예술학회, 2010. 발굴 대본은『한국극예술연구』제33집, 한국극예술학회, 2011, 326~409쪽에 실려 있다. 이후 본고에서 <위대한 사랑>을 인용할 경우, 여기에 실린 공연대본의 면수임을 밝혀둔다.  12)宋影,「演劇運動의 現段階」, 『獨立新聞』, 1946.5.1.  13)李台雨,「신파와 사극의 유행」,『경기신문』1946.12.12.  14)안영일,「고민하는 연극 - 해방 1주년을 맞이하며」,『예술신문』1946.8.(양승국 편,『한국근대연극영화비평자료집 13』, 태동, 1991, 373쪽)  15)여기서 언급한 역사극은 김태진의<임진왜란>, 조영출의<논개>, 김영수의<閔中殿>, 박로아의 <녹두장군> 등이다.  16)안영일, 「예술일년의 회고와 전망 - 민족연극의 총관」, 『서울신문』 1946.12.17. 이 글의 상당부분이 『1946년판 예술연감』(예술신문사, 1947)에 수록된 안영일의 「개관-연극계」에 그대로 재수록 되었다.

    2. 해방이 소환한 역사, ‘3·1 운동’

       2.1. 진보적 리얼리즘과 역사극의 만남, 김남천의 <삼일운동>

    해방 이후 가장 먼저 결성된 ‘조선연극건설본부’(1945년 8월 16일 창립)와 9월 27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산하 단체로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은 1945년 12월 20일 ‘조선연극동맹’으로 통합되었다. 두 개의 문화단체가 양분되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 남한에서의 좌익문화운동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남로당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연극동맹’은 종합예술제와 3·1운동 기념행사를 주최하며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46년 3·1운동 기념행사는 주지하다시피 좌우익이 분열되어 각각 따로 행사를 개최하였다. 조선연극동맹은 서울신문사와 공동주최로 ‘민족연극 건설’을 목표로 한 ‘3·1절 기념 연극대회’17)를 개최하였다. ‘제1회 삼일운동 기념 연극제’에 참여한 작품은 다음과 같았다.

    이 행사에는 ‘진보적 조선연극의 수립’에 선편을 쥔 ‘조선연극동맹’과 좌익연극인들의 역량이 총투입되었다. 김남천의 <삼일운동>은 조선연극동맹 소속연극인 김태진이 김남천에게 청한 것으로, 김남천은 열흘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작품을 썼다고 한다.19) 아마도 김태진이 구체적으로 ‘3·1 기념연극제’에 올릴 ‘3·1운동’소재의 작품을 청탁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작품은 ‘3·1운동’을 기념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전유하고자 했던 좌파 계열의 역사적 관점 하에서 기획되었고, 그 기획과 청탁에 따라 창작된 것이다. 이 당시 김남천은 『자유신문』에 소설 <1945년 8·15>를 연재하고 있었다. 희곡 <삼일운동>과 관련한 김남천의 창작의도와 입장을 확인할만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소설연재에 앞서 발표된 ‘작가의 말’은 해방기 남로당의 문예노선과 김남천의 새로운 문학창작방법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소설 <1945년 8.15>는 1946년 6월 28일까지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는데, 이후 조선연극동맹 주최 ‘八․一五 記念 演劇公演大會’에 김남천의 <8.15>가 그의 각색을 거쳐 공연될 예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21) 이 후 신문매체에서 8.15기념 연극공연대회에 대한 후속 기사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행사 자체가 불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 10월 15일부터 연재된 소설 <1945년 8.15>는, 해방 이후 첫 연재소설이라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소설 <1945년 8·15>는 남로당의 문예노선을 선도했던 김남천의 문학적 입장과 의욕이 그대로 담긴 작품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이 1946년 2월 8, 9일 양일간 개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김남천은「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자체 내의 커다란 계기로 하는 진보적 리얼리즘"의 수립이 주요 논조였다.22) 이 소설은 창작을 통해 진보적 리얼리즘의 한 예를 제시했다면, <삼일운동>은 그것의 희곡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정황은 김남천에 대한 조선연극동맹 측의 지지, 특정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호출하는 방식, ‘3·1운동’과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무대화되면서 역사와 연극이 만나는 장면, ‘기념’이라는 근대의 공적 제도가 연극을 전유하는 방식 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해방기 역사극의 새로운 맥락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희곡 <삼일운동>은 3막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의 고향인 성천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했다. 1막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기미년 2월 초순경을, 2막은 기미년 3월 1일부터 5일간을, 3막은 기미년 3월 하순경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1막에서는 최진순과 박관영의 약혼관계를 통해 기독청년단과 천도교 청년단의 갈등을 보여주고, 종교간 갈등이 심화되는 3·1운동 직전의 분위기를 묘파했다. 그러던 중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고영구’가 4년 만에 국내에 잠입하는데, 그는 3월 1일에 전국적인 거사로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전달한다. 고영구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한다면 교파를 떠나 일치단결하여 거사에 참여해달라고 당부한다. 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며 교파나 개인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말에 열혈 청년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교사 현우성이 고영구의 뜻을 따르겠다고 다짐한다. 2막에서는 3·1만세운동 당일에 종교와 계급,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합심한 조선인들이 국권회복의 결의를 다진다.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독립만세 소리, 독립선언문 낭독은 이날의 분위기를 재현한다. 만세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헌병대로 가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고 협상을 시도하지만 헌병대의 발포 명령이 떨어진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희생을 최소화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 충돌하는데, 헌병대가 교회당에 방화를 시도하자 민중들의 의기가 거세지면서 교전이 벌어진다. 이후 체포된 칠성이 영감, 현우성, 최진순 등이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3막에서는 3·1 만세운동으로 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었던 마을에 고영구가 돌아온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이후 3·1운동을 민중운동으로 확대해야 한다며 지속적인 운동을 촉구하는데, 일본헌병의 앞잡이인 길호일의 밀고로 발각되고 만다. 도주하는 고영구를 지키기 위해 군중들이 헌병대원을 막고 길호일을 추격하지만, 고영구는 헌병대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만다. 분노한 민중들이 친일파 밀정 길호일을 처단하고 헌병대를 공격하러 나설 것을 결의하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삼일운동>은 “3·1운동이 전개되기 직전부터 시위, 탄압, 구금, 고문, 더 큰저항으로 이러지는 일련의 과정”23)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에서 극적 행동을 이끌어가는 ‘고영구’가 반복적으로 확대하는 항일운동의 주도적 이념은, ‘민족통일’을 통해 획득해야만 하는 ‘독립’이다. “천도교와 기독교와 군내 유지가 한몸이 되었고, 농민과 학도와 청년과 부인네가 한 정신”24) 되어서 부르는 ‘독립가’, 그리고 “대한독립만세”25)의 외침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이자 동력이다. 차승기는 작품 모두(冒頭)의 ‘作家前書’에서 김남천이 ‘태극기와 붉은기’를 환기시킨 것은 <삼일운동>이 “해방 이후 민족통일전선 구축의 절심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26)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이 해석에 동의하며 다른 논거를 덧붙이자면, 1947년에 발간된 단행본『삼일운동』에 실린 희곡 <삼일운동>의 작품 말미에 부기된 “一九四六年二月十五日 「民戰」結成大會日完”27)이라는 기록이다. 김남천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민족혁명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좌익과 중도파를 망라한 29개의 단체들이 결성한 통일전선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 참여하고, ‘민전’의 상무위원을 지냈다.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당일에 <삼일운동>원고가 완성되었음을 작품 말미에 표기해 둠으로써, 희곡 <삼일운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출구에 1946년의 상황에서 민족통일전선 구축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삼일운동>은 특히 투쟁의 과정에서 민족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3·1운동 준비과정과 시위, 탄압, 내부의 갈등과 결속, 투쟁의 과정 등을 통해 ‘대한(大韓)’이라는 하나된 공동체에 대한 자각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극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민족의 지도자로 설정된 ‘고영구’의 죽음에서 끝이 나지 않고 “여러분 우리의 독립은 아직 완수된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렸던 토지와 국권을 다시 찾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돌아가시고 혹은 옥에 가친 여러 동포의 뜻을 받아 이 사업을 완성합시다.”28)라는 선동과, “조선 민족 해방만세”라는 구호 속에서 끝이 난다.

    <삼일운동>은 현실정치 하에서 실패로 끝나버린 26년 전 독립운동을 재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교묘하게 해방 정국 하의 조선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조선의 진정한 독립과 관련해서 ‘끝나지 않은 역사’,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를 인식하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바로 ‘통일’ 과 ‘해방’, ‘광복’, ‘연합’이라는 기표를 사용하는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어느 순간 “조선민족 통일만세”29)로 바뀌고, ‘조선 독립’이 ‘민족 해방’과 ‘광복’30)으로 살짝 자리바꿈한다. 또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되 해외의 혁명가와 동포들의 운동과도 연합되어야”31)한다며 고영구가 역설(力說)하는 장면 등은 1919년과 1946년의 조선 상황을 표나지않게 오버랩시키면서, 끝나지 않은 역사투쟁, 과정으로서의 역사인식를 드러낸다. ‘통일’과 ‘연합’은 해방기의 정치·문화적 상황을 직시하게 하는 중요한 열쇳말들로, 이 기표가 발화되는 순간 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식민 과거의 독립과 해방 직후의 독립을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역사는 실증해야하는 과거적 사실이 아니라, 종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특히 1막 2장의 ‘아리랑’, 2막 1장의 ‘애국가’와 ‘독립가’, 3막 내내 무대에 깔리는 ‘독립가’는 관객들로 하여금 “역사와 기억을 공유하는 구체적인 감각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을 구경꾼이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32)가 되게 하는데 일조한다.

    약간의 기록만 남아있거나 기록 자체(삼국유사처럼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모호한 사료)가 고증과는 거리가 먼 사료 속의 인물, 즉 김유신, 관창, 의자왕,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등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극을 볼 때33), 관객들은 연극 속 허구적 캐릭터로서의 주인공과 역사적 실존 인물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극작가와 연출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즐기려고 한다. 반면 역사를 기록이라는 입장에서 연극화한 작품을 볼 때, 관객의 수용입장은 전자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본인의 기억과 경험을 역사적 사실(기록)과 대응시키면서 ‘판단’하려고 할 것이다. 또 비교적 가까운 근래의 역사가 현재적 상황에 어떤 후일담과 여파를 남겨놓고 있는지 헤아려보려는 시도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삼일운동>은 ‘역사서’가 아닌 허구로서의 문학작품이지만 남천이 “투쟁기록의 뜨라마”34)로 쓰려고 했고 ‘리알한 필치’35)로 3·1운동의 역사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3·1기념 연극제 기간 중에 발표된 평론 <역사와 연극>은 3·1운동이라는 ‘역사’와 연극이 만났을 때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필자인 박남수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하지 못한 30대 미만의 한국인들에게, 연극제에 올린 공연들은 역사를 ‘선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책무’를 했다는 것이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식민지하 민족운동의 기억과 감각을 상기시키는 과거의 사건이지만, 해방기의 청년세대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극제에 올려진 다수의 연극이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거리와 냉정한 인식을 확보하지 못한 채 그날의 흥분과 과장된 민족의식을 표출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김남천의 <삼일운동>을 고평했다. 삼일운동의 근원과 발전을 사적(史的)으로 분석하고 정리한 후에 집필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2. 현실에 육박한 기록,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은 “우리 民族 鬪爭史上 不滅의 날인 己未年 三月 一日을 回顧하며 아울러 完全 解放과 自由獨立에 이바지”하려는 ‘낙랑극회’의 기획 하에 탈고되었다.37) 다음에 인용할 기사는 극단 낙랑극회가 수 개월전부터 기획하던 『己未年 三月 一日』의 전5막 대본을 작가 함세덕이 탈고하였다는 내용과 더불어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어떤 사전준비를 하고 있는지 소상히 알려주고 있어 흥미롭다.

    함세덕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현재(1946년) 생존해 있는 오세창, 권동진, 이갑성, 함태영 등과 당시 관계한 남녀학생 주모자 이십여 인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 “실담(實談)”을 들었고 고등법원 판결문과 일경 스파이 기록 등 희귀한 문헌을 입수하여 작품을 썼다. 기자는 이 연극이 “일반이 모르는 삼일운동의 내막면”까지 보여준다고 하니, 역사의 이면을 밝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함세덕은 역사적 사실을 ‘취재’하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하고 ‘기밀문서 등을 열람’하는 등, 역사적 사건 자체에 대한 전면적 사실 조사를 하고 역사극 창작에 임하였는데, 그 과정을 알림으로써 텍스트 외부의 작창 과정까지 서사화했다.39) 이것은 역사극 창작에서 ‘허구성(작품성)’을 우위에 두었던 식민지 시기 역사극40)과는 분명히 차이나는, 새로운 역사극 창작태도였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 소재 작품 중에서도 드물지만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가 역사서와 기존의 기록 등을 살핌으로서 사실 확인과 고증의 절차를 거쳤음을 표명한 작품들이 있었다. 박영호는 <김옥균의 사>(1944)를 창작하기 위해 김기진으로부터 제공받은 사료와 일본측 문헌을 참고했음을 밝혔다.(박영호,「김옥균의 사」,『해방전 공연희곡집 1』, 이재명 편, 평민사, 2004, 270면) 유치진은 <북진대>(1942)를 집필할 당시, 1904~1905년 사이 일진회의 활동과 이용구의 ‘대동합방론’을 알기 위해 다수의 사료들을 참고로 했음을 밝혔다.(유치진, 「北進隊 餘話」,『國民文學』1942년 5, 6월합호, 28~29면.) 그러나 박영호와 유치진이 역사서와 평전 등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역사극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지는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완성된 작품 역시 하나의 완성된 극적 허구였다.

    이에 비해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은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사실 확인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연극 안에서는 최대한 극적 허구를 배제한 채 지루할 정도로 사실을 그대로 재현했다. 거사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민족 지도자들 간의 긴 공방과 토론41), 기미독립선언서의 전문 낭독 등은 극적 흐름을 분절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함세덕은 사전준비와 고증의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역사의 사실(fact)에 대한 신뢰를 얻고자 한 것만은 아니었다. 포착된 역사적 장면과 사건을 최소한으로 가공하고 최대한 사실 그대로 무대화함으로써 마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기록관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공연42)대본에서 작가가 허구적으로 꾸며낸 1막과 허구와 사실이 병치 된 5막을 제외하고, 실명(實名)과 실화(實話)을 바탕으로 극화된 2,3,4막의 해설부분을 보면 작가가 공연대본의 수신자인 배우와 무대장치가 등에게 보내는 전언이 있다.

    이상 공연대본의 해설부분은 연기를 하는 배우와 무대를 만들어야하는 장치가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46) 함세덕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무대화하는데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을, 실제 ‘사실’로서의 배경과 무대형상화의 ‘허구’로 구별하여 말한 이유는 극작가 자신이 3·1운동을 극화한 이 작품을 어떤 태도로 창작했는지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때문에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3·1운동이라는 민족적 거사가 도모되고 준비되었던 실제의 역사적 시공간을 인지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이 보여준 새로운 역사극쓰기는 이렇게 한국 역사극의 역사에서 ‘기록으로서의 역사극’의 첫 사례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함세덕은 3·1운동 관계자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해방 이후에 접근가능해진 기밀문서 등을 통해 삼일운동의 내막을 밝히는, 표면적인 사실 이면의 현실에 최대치로 근접하는 작품을 썼다. 이렇게 역사와 연극이 만나는 독특한 방식은 작품의 구조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기미년 3월1일>은 전체 5막을 극적 긴밀도가 떨어지는 파노라마식 구조로 전개하였다. 당시 민족대표들의 활동과 학생들의 활동을 동일한 층위에 두고, 3·1운동에 미친 두 개의 힘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동력이 지도자들과 기성세대만이 아닌, 아니 오히려 지도자들의 역량보다 학생계층 안에 내재한 역사의식과 판단 안에서 찾고자 했다. 이 작품의 부제가 “학생과 삼십삼인”인 것도 3·1운동을 해석하는 함세덕을 시각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역사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재해석하기 위해서이다. 과거 사실을 의미화하고 파편화된 조각들을 엮어 이야기하는 역사의 재구성 작업에는 상상력이 반드시 개입하기 마련이다. <기미년 3월1일> 역시 사실성과 허구성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함세덕은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실존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을 병치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김남천의 <삼일운동>과 유사하게 <기미년 3월1일>도 1919년 3월 1일 거사 이전에 있었던 사전 운동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의 결집 역량에 주목했다. <기미년 3월 1일>은 3·1운동이 벌어지기까지 민족지도자 33인이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이 과정에 학생들이 결합하는 과정을 재현하였다. 5막 구성은 시간적 순서를 따르지만 각막의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종막에서 민족지도자 집단과 학생들이 3·1 만세운동의 시공간에서 결집하는 방식으로 짜여있다. 1막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할 무렵인 1918년 10월 미국계 성화여학교에서 학생들 주도로 독립을 위한 서명날인 사건이 벌어진 것을 극화했다. 결국 총독부 당국에 의해 주모자인 정향현이 구속 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2막에서는 1919년 1월에 정향현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 최순천이 강기덕을 찾아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함께 도모할 동지가 된다. 3막의 배경은 1919년 2월경 최린의 집으로, 각계 인사를 규합해 3월 1일 거사를 벌일 것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3·1 독립선언을 하기까지 각계인사들이 어떻게 규합하고 반목했는지를 공을 들여 재현했다. 4막에서는 거사 전날 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하는 자리에 친일경찰 손규철이 등장해 들통이 날 뻔 하지만 사이풀과 여러 인사들이 손규철을 제압하면서 문제가 해결된다. 5막은 1919년 3월 1일 당일에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재현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발포 명령으로 파고다공원은 아수라장이 되고, 향현을 비롯한 학생들이 일제의 총탄에 희생되면서 막이 내린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3·1 만세운동 당일의 역사적 장면으로 수렴되지만, 극적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 당시의 구체적 상황을 재구(再構)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만 김남천의 <삼일운동>이 ‘민중’이 주체가 된 ‘3·1운동’을 재현했다면, <기미년 3월1일>은 역사의 또다른 주체 세력인 ‘학생’에게서 3·1운동의 역사성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공연 당시에는 1919년 3·1 운동에 관여한 학생층 관련 인물이면서, 작품 속 주요인물 중의 하나인 ‘강기덕’이 무대에 올라와 강연을 했다.

    <기미년 3월1일>은 역사 속 지도자급 인물들의 실명과 신분을 변용없이 그대로 극적 세계로 옮겨 놓았는데, 그 중에는 생존하여 해방기 정치의 장에서 주요 요직에 있는 지도자급 인물도 다수 있었다. 때문에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이 서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극의 “등장인물들은 연속적인 역사 앞의 불연속적인 대상에 불과”48)한 것이 일반적인 역사극의 특징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역사와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공연이 시작하기 전이나 막이 내리고 연극적 환영이 소멸된 이후가 아니라, 공연 ‘막간’에 강기덕의 연설이 배치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을 추론하게 한다. 역사 속 실존인물이면서 무대 위의 허구적 인물인 강기덕의 연설이 막간에 실시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 역사와 현재를 상호유기적으로 고려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대 위의 연극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가의 창작(허구)이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을 사실 그대로 보고 있는 듯 꼼꼼하게 재현해냈다. 역사의 실제장면에 최대치로 육박하려는 태도와 시선은 마치 과거의 기록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으리라고 본다. 사실과 허구의 구별은 연극의 주제나 내용, 연극이 전달하는 정보의 정확성 여부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시되는 방법(형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미년 3월1일>은 극작가 함세덕이 직접 연출하였는데, 그는 무대 위에 재현된 사건이 실제 사건이라고 의식할 수 있게끔 ‘역사의 증인’ ‘강기덕’을 무대에 불러냈다. 그것은 렌즈의 접사와도 같이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려는 함세덕의 전략이었고, 이런 전략은 극작술과도 연동하였다.

    제5막의 ‘독립선언문’ 전문 낭독과 남강 이승훈의 장광설은 극적인 시간 압축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극적 긴장감과 연극적 재미를 포기해야하는 장면이었다. 이것은 일제시대부터 함세덕이라는 작가가 보여준 극작술의 수준을 고려할 때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극작술의 미숙이 아니라 재미나 대중성을 포기하더라도 역사의 ‘현장성’과 실감을 무대와 객석에 만들어내려고 했던 의도적 극작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미년 3월1일>은 마치 1960년대의 ‘기록극’이 기획, 제작되는 방식을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7)당시 매체에서는 ‘삼일운동 기념 연극제’와 ‘3·1절 기념 연극대회’를 혼용해서 쓰고 있다.  18)「演劇同盟의 多彩한 行事」,『中央新聞』1946.2.18.  19)「좌담회 - 三一紀念公演과 연극의 緊念問題」,『신세대』2호, 1946년 5월호, 58쪽.  20)「연재예고 : 작가의 말」,『자유신문』1945. 10. 5.  21)「文化短信」,『中外新報』1946.6.17. “△ 朝鮮演劇同盟에서는 加盟團體를 動員하여 八 ․ 一五 記念 演劇公演大會를 大々적으로 開催하기로 되여 準備 中인데 이번 大會 參加團體와 公演作品이 다음과 같이 決定되였다.” △ 朝鮮藝術劇場 金南天 作 並 脚色「八 ․ 一五」 △ 서울藝術劇場 未定 △ 革命劇場 朴英鎬 作 「날개」△ 自由劇場 未定 △ 靑葡萄 李象佰 作 『무궁화』 △ 解放劇場 未定 △ 綠星 未定 △ 樂浪劇會 未定  22)김남천,「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건설기의 조선문학』, 백양당, 1946, 169쪽.  23)차승기,「기미와 삼일 - 해방직후 역사적 기억의 전승」,『한국현대문학연구』제28집, 한국현대문학회, 2009, 320쪽.  24)김남천,『삼일운동』, 아문각, 1947, 201쪽. 이 후 작품인용은 이 책의 쪽수를 표기한 것이다.  25)<삼일운동>, 199쪽.  26)차승기, 앞의 논문, 321쪽.  27)<삼일운동>, 267쪽.  28)<삼일운동>, 266쪽.  29)<삼일운동>, 199쪽.  30)<삼일운동>, 205쪽.  31)<삼일운동>, 256쪽.  32)양근애, 앞의 논문, 236~240쪽.  33)식민지 시대의 역사극이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34)<삼일운동>, 152쪽.  35)김영수는「3·1 연극대회의 성과(2)」(『매일신보』, 1946. 4. 1.)에서 다른 작품들이 “역사를 회고케 함에 그치고 말”았지만 김남천의 <삼일운동> 은 “작가의 ‘리알’한 필치와 아울러 세련된 연출수법의 융합”을 보여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36)박남수,「역사와 연극」,『한성일보』, 1946.3.9.  37)「三一運動 紀念公演 - 樂浪劇會에서 計劃」,『중앙신문』, 1946.1.20.  38)「(학예소식) 己未 三月 一日 劇團 樂浪劇會서 公演」,『東亞日報』, 1946. 01.22.  39)이런 태도는 함세덕이 제주 4·3 항쟁을 형상화한 희곡 <산사람들>(1949~1950)을 창작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 김동윤,「함세덕 희곡 <산사람들> 연구」,『한국문학논총』제55집, 한국문학회, 2010. 역사적 사건 혹은 동시대적 사건을 소재로 하여 희곡을 창작하는 함세덕의 이런 일련의 창작방법론에 대해서는 상론을 요한다고 하겠다.  40)식민지 시기 역사소설/역사극 담론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없고 독창적으로 뒤짚어 보는 역사해석이나 허구성이 필요하다”는 ‘허구성 우위론’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식민지시대 역사극이 검열을 피하면서 민족현실의 알레고리로 작동했거나, 30년대 후반 이후 내선일체담론과 국민연극론에 포획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성희,「한국역사극의 기원과 정착-역사소설/야담과의 교섭과 담론적 성격을 중심으로」,『드라마연구』제33호, 한국드라마학회, 태학사, 2010을 참조할 것.  41)김재석은 1940년대 후반기 함세덕의 창작희곡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토론의 장면화’가 1920년대 카프 계열 사회극에서 적극 활용되었던 것이며, 함세덕은 계몽과 선전의 효과를 얻기 위해 선택했다고 보았다. 김재석,「1940년대 후반기 함세덕 희곡 연구」,『어문학』제92집, 한국어문학회, 2006, 336~338쪽.  42)함세덕의 <기미년 3월1일>은 노제운 편,『함세덕 문학전집 2』, 지식산업사, 1996에 수록 된 공연대본을 텍스트로 삼았다. 이후 작품인용은 이 책의 면수를 표기한 것이다.  43)<기미년 3월1일>, 92쪽.  44)<기미년 3월1일>, 125쪽.  45)<기미년 3월1일>, 159쪽.  46)만일 이 텍스트가 공연대본이 아니라 매체에 발표된 희곡이었다면, 수신자에(관객을 상정한) 독자가 포함될 것이다.  47)「樂浪 三月 一日 公演」,『自由新聞』1946.4.23.  48)안치운,『연극과 기억』, 을유문화사, 2007, 311쪽.

       3. 겹쳐진 역사의 유희,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은 1947년에 조선연극동맹에 주최한 제2회 3·1절기념 연극제에 올려진 작품이다.49) 제1부 작품으로 함세덕의 <태백산맥>50)이 2월 27일부터 3월 6일까지 공연되었고, 제2부에 공연된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은 3월 7일부터 13일까지 공연되었다. 공연 <위대한 사랑>의 광고가 3월 5일부터 매체에 등장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두 가지 버전의 광고는 역사극 <위대한 사랑>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단 <위대한 사랑>은 ‘춘향전’의 내용에 ‘동학혁명’의 역사를 적용하여 창작한 작품으로, 객관적 사실이나 기록으로서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역사극이다. 그리고 대중연극의 상투적인 광고문안과 흡사하게 느껴지는 “모든 고난의 풍운 속에서 조선의 청춘을 告하는 사랑의 서정시”로서의 <위대한 사랑>은,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중심 얼개로 하면서 주인공의 좌절과 분노, 원망의 감정을 극도로 조장하여 관객의 감정과잉을 활용하는 멜로드라마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위대한 사람>은 이조 말엽 계미·갑오년 간, 전라도 고부를 배경으로 한 5막6장의 장막 역사극이다. 충청감사의 자제인 정도령과 심판서와 기생 향월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학선이 주인공이다. 1막에서 정도령은 심학선을 찾아와 폭정을 일삼는 조정의 무리들로 인해 귀양가서 참사한 심판서의 소식을 전한다. 이일을 계기로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학선의 어머니 향월은 둘 사이를 말린다. 정도령은 “양반의 아들이지만 양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천대받는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53)으로 알려져 있어 민중들의 신망이 높다. 정도령은 학선에게 ‘파랑새’노래를 가르쳐주고 ‘수운선생’의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관리들의 폭정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은 ‘동학당’이 어서 일어나주기를 바라고, 정도령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탐관오리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긁어 제 배를 채우는 무리를 없애”자며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외친다. 2막에서 학선은 새로 부임한 사또가 기안(妓案)에 착명(着名)하라는 명을 내려 곤경에 처한다. 정도령은 학선의 머리를 올려주고 부부의 연을 맺지만,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첫날밤을 보내지 못하고 떠난다. 3막에서 학선은 사또 앞에 붙들려가고, 사또는 폭정을 탓하는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동학당’으로 몰아서 구금하고 형벌을 내린다. 4막에서는 정도령이 죽었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기 시작하는데, 정도령의 하인인 만석이가 정도령의 뼈가 든 함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러나 함 안에 든 것은 정도령이 보낸 총탄이었고 정도령은 무사히 돌아온다. 미행한 사령과 군노들에게 학선이 체포되고, 정도령은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 5막에서는 공개 처형이 있는 날, 학선이 처형장에 선다. 거대한 군중들이 군집해있는데, 사또가 나오자 월향과 군중들이 분노를 표출하고 사또는 발포명령을 내린다. 총에 맞은 학선을 본 군중들이 동요하고 이 때 나타난 정도령이 성난 민중들을 지휘한다. 사령과 군중이 대치하여 접전을 펼치는 상황에서 정도령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학선은 정도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낭군이 가는 길을 따르겠다고 한다. 죽창을 든 군중들이 전라감영을 향해 전진하면서 연극은 끝이 난다.

    연극 <위대한 사랑>은 당대에 비판과 호평을 동시에 받은 문제적 작품이었다. 일단 당시의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과 ②가 ‘문학청년의 치기’나 ‘타진할 것도 없는 작품’이라고 격렬히 비판하고 있는데 반해, ③과 ④는 ‘발전적 리아리즘에 입각한 창작방법의 우수한 소산’ 이나 ‘대단한 성공’이라는 고평을 내놓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각각 다른 기준에서 비판과 고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대한 사랑>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창작극이라고 하지만 <춘향전>을 본뜬 작품이라 창작성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각에서 볼 때, 고전 <춘향전>에서 기본 골격을 가져왔기 때문에 ‘동학혁명’을 다룬 ‘역사극’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역사와 고전작품에 지나치게 많이 기댄 이 작품을 ‘창작극’이라고 하기에는 ‘창작성’에 있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작가가 선택한 감상적 낭만주의와 혁명적 리얼리즘이 당시 ‘조선연극동맹’의 ‘연극대중화론’의 실천적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사랑>이 펼친 대중적 전략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위대한 사랑>에서 보여준 역사 가로지르기, 즉 18세기와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조영출이 직조해낸 역사극은, 이전의 역사극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역사극의 역사감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의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의 유희’ 혹은 ‘역사 가지고 놀기’58)가 시도된 초기 사례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랑>이 ‘사실로서의 역사’로부터 초월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허구적 역사극인지, 대중적인 역사극이 누락하기 쉬운 진보적 역사의식을 담겠다는 진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혁명적 리얼리즘 연극인지, 대중들이 무리없이 관극할 수 있는 연극을 창작하기 위해 작가가 <춘향전>이라는 손쉬운 선택을 한 것인지를 가늠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해방기에는 이 점이 ‘연극의 대중화전략’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했고, 순전한 창작극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악극과 대중가요를 만들었던 조영출의 대중취향이 ‘역사성’과 ‘허구성’에 대한 지나친 강박을 버리게 했고, 그 때 역사왜곡과는 다른 층위에서 <위대한 사랑>과 같은 ‘놀이화된 역사’가 출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위대한 사랑>은 ‘사실(史實)’과 ‘창작성’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야 하는 역사극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역사의 사실-효과가 흥미롭다. <춘향전>은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인데, 여기에 19세기 말의 동학혁명(1894년)이 포개지면서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런데 이 “겹쳐진 역사”가 해방기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급투쟁’, 노동자와 농민 항쟁으로 치환되면서 1946년의 해방조선 안에 안착하였다. 실제로 1946년 10월에는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시민과 일부 좌익세력이 시위, 파업을 일으킨 ‘10월 항쟁’59)이 일어났다.

    이 작품을 멜로드라마로 볼 여지도 있고, 민족해방기의 진보적 연극으로 볼 수 있는 맥락도 공존하지만 어쨌든 연극의 클라이막스는 결말부분이다. 여기서 사랑은 혁명으로 승화되고, 죽창을 든 민중들의 행렬은 해방 이후 민족 건설의 시기에 인민 대중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그런데 제2회 3·1기념행사가 있기 얼마 전인, 1947년 1월 30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주내용은 연극을 정치선전에 이용하려는 자들이 많다, 연극영화를 통한 정치선전을 금지한다, 연극 내용에 정치나 사상이 들어갈 경우 공연을 중단시킬 것이며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원고의 검열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제2회 3·1기념행사에서 공연된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은 농민이 악질 관헌에게 반항하는 대목 등 대본 일부가 검열에 의해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장환은 함세덕의 <태백산맥>이나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현대가 아닌 과거를 배경으로 작품을 쓴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 부분은 가차 없이 삭제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47년 6월부터 7월까지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서는 총 200여명의 예술가를 동원하여 4개 부대를 편성한 후, 문화에 굶주린 인민대중을 위한 문화공작단 파견운동을 실시했다. 여기에는 연극동맹, 음악동맹, 영화동맹, 무용예술동맹, 문학가동맹, 미술동맹, 사진동맹 등 총 8개 단체가 참여했다. 제1대는 원래 4막 5장이었던 <위대한 사랑>을 시간관계상 3막으로 줄여서 이서향 연출로 공연했다.62) 서울에서 검열에 통과했음에도 지방에서 공연할 때 공보과의 원고 재검열은 계속되었다. 부산에서 있었던 검열사건을 오장환은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극중 여주인공이 동헌 마당을 쳐들어오다가 총을 맞고 죽는 남주인공을 보고 “내 사랑 내 낭군이 가는 길을 내 어이 못 가겠소. 나에게도 죽창을 주시오” 하는 장면인데, 그(공보과장-필자)의 말을 들으면 죽창은 10월 항쟁서 인민들이 많이 사용한 것이므로 기억이 너무 생생하니 이 말을 빼라는 것이다. 죽창이 안 되면 맨손으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러면 칼을 달라고 하라는 공보과장의 명답으로 죽창은 그 후 칼로 출세를 하게 하였다.”63)오장환의 회고와 관련된 장면은 다음 대단원의 장면일 것으로 생각된다.

    박명진이 발굴한 위 대본을 보면 ‘죽창’과 ‘칼’이 동시에 발화되고 있는데, 결국 ‘박첨지’가 ‘학선’에게 준 것은 ‘죽창’이었다. 오장환은 이 마지막 장면을 실제 공연할 때는 ‘죽창’대신 ‘칼’로 대체했다며, 미군정하에서의 연극검열을 언급했던 것이다. 미군정기의 검열 기제가 역설적으로 역사극의 사실-효과를 증명해보인 셈인데, 이 작품은 춘향전과 ‘동학혁명’이 포개진 허구의 역사, 객관적인 사실과 기록에서 거리가 먼 멜로드라마적 역사극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객들의 현실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동학혁명의 정신인 계급해방과 계급투쟁 의식은 1947년 해방기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유효한 문제의식이었다. <위대한 사랑>은 1890년대와 1946년의 차이나는 시공간을 ‘계급투쟁의 역사’로 꿰어냄으로써 ‘과정으로서의 역사쓰기’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관객은 “재현된 인물과 역사를 매개로 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상상의 세계를 제공받”65)았을 것이다. 1890년대 농민(민중)들의 삶을 다룬 이 연극에서 1947년의 농민들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허구적인 무대도 사실적인 것이 된다. <위대한 사랑>은 1947년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았지만 당대 관객의 공통감각에 의지한 사실적 장치(죽창, 혁명)들을 이용해 혁명 동참의 의지를 고취시키고 있다.

    49)해방기 연극계의 지형도와 조영출의 활동,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이 해방직후 연극건설기 프로파간다 연극으로 갖고 있는 특징 등에 대해서는, 박명진,「해방기 조영출의 공연 희곡 연구-<위대한 사랑>을 중심으로」,『한국극예술연구』제32집, 한국극예술학회, 2010.를 참조할 것.  50)함세덕의 <태백산맥>은 아쉽게도 현전하지 않는다.  51)「三․一 演劇祭 第二部로 七日부터 『偉大한 사랑』 上演」, 『自由新聞』, 1947.3.5.  52)「(광고) 『偉大한 사랑』 」, 『매일신문』, 1947.3.5.  53)<위대한 사랑>, 331쪽.  54)朴露兒,「三․一 演劇祭 總評」, 『新星』, 1947.4, 29쪽.  55)이문형, 「朝鮮演劇의 今後展望-三一祭 「偉大한 사랑」을 보고」, 『중외신보』, 1946.3.12.  56)HH生, 「演劇短評-偉大한 사랑」, 『독립신보』, 1947.3.20.  57)J生, 「劇評」, 『문화일보』, 1947.5.13.  58)김기봉,『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프로네시스, 2006. 김유미,「서사의 방법과 역사극의 새로운 방향 -<왕세자 실종사건>을 중심으로」,『공연문화연구』18권, 한국공연문화학회, 2009.  59)서중석,『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6, 52~76쪽 참조. 김윤식,『해방 공간의 문학사론』, 서울대출판부, 1991.  60)<위대한 사랑> 407쪽.  61)오장환,『남조선의 문학예술』, 조선인민출판사, 1948. 김재용 편, ≪오장환전집≫, 실천문학사, 2002, 556-557쪽에서 재인용.  62)김재용 편, 앞의 책, 560쪽.  63)김재용 편, 위의 책, 568쪽.  64)<위대한 사랑> 408~409쪽.  65)안치운, 앞의 책, 2007, 312쪽.

    4. 나오며

    본 연구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역사극의 개념과 범주를 추적하고 그 안에서 해방기 역사극의 역사성을 재구(再構)하려는 방법론적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확정된 역사극 개념을 전제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유동적인 개념을 좇아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모호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역사극의 개념을 구성해보려는 연구방법은 편의주의적인 예단을 통해 역사극을 연구하는 기존 연구입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의 경계는 식민지시대를 거쳐 해방기에 이르는 단층과 지속의 긴 계보학을 그려왔다. 해방 이후의 역사극은 식민지 시기 역사극과 레퍼토리·양식적 특징 등의 측면에서 연속성을 담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시기 역사극과는 다른 새로운 통합과 증식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일단 위의 세 작품을 통해 해방기 역사극의 역사성을 ‘계급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말기 역사극의 역사성을 ‘민족과 제국’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3·1절 기념 연극대회’에 올려진 역사극은 ‘계급성’을 통해 혁명과 건국과 해방의 역사를 구성해내고 있다. 이것은 이 기획의 주체 세력이 ‘조선연극동맹’이었던 사실에서도 이미 간파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희곡 <님>66)을 가지고 연극제에 참여한 연극동맹 소속 박영호는「연극과 삼일운동」이라는 비교적 긴 평문을『중앙신문』에 2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다. 비록 <님>의 희곡이나 공연대본이 남아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박영호가 3·1운동을 연극화하는 데 있어 어떤 의식과 의도를 가지고 임하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박영호는 레닌의 말을 빌어 “各 民族 內에는 두 個의 다른 民族이 잇”다며 3·1운동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는 “民族鬪爭에 對한 階級的 觀點을 準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批判的인 解釋과 原理的인 追求가 업시 三一蜂起를 作品的으로 取扱한다면 그것은 年代 업는 옛날이야기에 不過하고 無論理 反民主的인 民族野談”으로 전락할 것이고 경고한다. “三月 一日에 對한 歷史性과 다시 그것에 對한 現實的인 再理解에 잇고 突然히 史實에만 사로잡히여 全體보다 部分에 도취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은 史實보다 똑바른 構想을 通한 作品”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사는 곧 계급사였기 때문에, 민족운동으로서의 3·1운동 안에서 두 개의 민족적 계급성을 분리하여 비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한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좌익 이데올로그인 박영호가 주장하는 연극관이면서, 조선연극동맹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역사해석 방식이기도 했다.

    한편 역사극의 새로운 형식과 창작방법에서도 변전된 ‘역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유치진을 위시하여 식민지시기 역사극 대부분이 ‘낭만적 로맨티시즘’과 ‘멜로드라마적 경사’를 보여준다면, 해방기 역사극은 식민지 역사극을 반복 재생산하는 대중 역사극의 한편에서 ‘리얼리즘과 역사’의 재회를 강조한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완결된 객관적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시도였다. 3·1운동 준비과정과 시위, 탄압, 내부의 갈등과 결속, 투쟁의 과정 등을 통해 ‘대한(大韓)’이라는 하나된 공동체에 대한 자각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극화하는 방식(김남천의 <삼일운동>), 역사를 취재하고 기록하고 역사적 증인을 내세워 그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역사극 창작방법(함세덕의 <기미년 3월 1일>), 허구의 역사극이지만 사실적 장치와 관련한 진실성의 지표를 통해 사실-효과를 만들어낸시도(조영출의 <위대한 사랑>) 등이 그것이다.

    본고가 이상의 세 작품을 통해 해방기 역사극 전체를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미약했지만 질적으로 새로운 역사극 상상력(창작태도, 열린 역사에 대한 전망 등)을 보여준 일련의 해방기 역사극들이 현대 역사극의 다양한 시도들67)을 선취해 내고 있음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1960년대 이후 현대 역사극의 새로운 양식과 미적 성취가 오롯이 서양연극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 창작된 역사극들과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추론케 한다.

    본 연구자가 2011년이라는 탈식민적 현재 시점에서 1946년과 47년에 창작·공연된 연극을 대상으로 그 연극들이 1919년의 역사적 사건을 무대화하는 전략과 문화사회적 맥락을 연구하는 데는, 세 층위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이 복잡한 메커니즘을 ‘역사화’작업의 필요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다음의 글은 본고의 입장을 뒷받침한다는 판단에서 인용에 부친다.

    66)<님> 역시 다음 기사에 따르면 “기미운동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3·1운동 기념”작품이다.「革命劇場 公演 『님』」,『中央新聞』, 1946.3.7.  67)역사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관객의 주체적 판단을 촉구하면서 극중극과 교육극의 형식을 시도했던 신명순의 <전하>(1962)는 역사극과 서사극의 결합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며, 윤대성의 <망나니>(1969)는 전통적인 탈놀이와 서사극기법을 통해 새로운 역사극 형식을 만들어낸다. ‘기록극’으로서의 역사극은 이재현의 <포로들>(1972)이 처음 본격적으로 시도되었고 이후 윤대성의 <출세기>, 박조열의 <조만식은 아직도 살아 있는가>(1976) 등이 창작되었다.  68)Lawson, A. & Tiffin, C.(1994), "Conclusion : reading difference", in C. Tiffin & A. Lawson eds., De-Scribing Empire : Post-Colonialism and Textuality, London Routledge, 230~235. 헬렌 길버트·조앤 톰킨스 지음, 문경연 역,『포스트콜로니얼 드라마』, 소명출판, 2006, 4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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