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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La recherche du sens de la vieillesse dans le thea?tre francais. 프랑스 희곡에서 형상화된 ‘노년’의 의미에 대한 고찰
  • 비영리 CC BY-NC
ABSTRACT
La recherche du sens de la vieillesse dans le thea?tre francais.

프랑스 희곡에서 형상화된 노년의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서, 먼저, 필자는 희곡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으며, 당시 사회 의식을 비판하거나 변화를 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관념론적 서구 철학의 중심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étique』의 큰 영향 하에 있던 신고전주의 시대, 17세기 프랑스의 상류사회에 파고든 가짜 신앙, 대귀족들의 퇴폐상, 경박한 사교생활 등 그 사회에 팽배해있던 권위적 위선을 비판했었던 몰리에르(Molière)의 희곡작품들, <상상병환자, Le malade imaginaire>, <타르튀프,Tartuffe.>에서 나타나는 ‘노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살펴보고자한다. 왜냐하면 몰리에르가 당시의 사회적 위선을 비판하며 인간의 진실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대한 그의 의식은 여느 다른 고전 작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필자는 부조리 극에서 특히 이오네스코(Ionesco)의 <왕은 죽어가다,Le roi se meurt >에서 나타나는 ‘노년’과 ‘늙음’의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거칠지만, 프랑스 희곡에서 현대 철학적 사유의 영향과 함께 백인/흑인, 선/악, 남/녀, 그리고 노년과 젊음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사라지면서 쓰여진 현대희곡작품을 살펴보면서 작품속에서 나타나는 노년에 대한 의미의 변화되는 흐름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그래서, 현대 희곡들 중 장-폴 벤젤(Jean-Paul Wenzel)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Loin d'Hagondange >, 장-뤽 라갸르스(Jean-Luc Lagarce) <난 집안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J'étais dans ma maison et j'attendais que la pluie vienne >를 통해서 나타나는 ‘노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프랑스 현대 희곡 속에 나타난 변화된 ‘노년’의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KEYWORD
vieillesse , Moliere , Ionesco , Jean-Paul Wenzel , Jean-Luc Lagarce
  • 1. 들어가는 말

    프랑스 희곡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노년’의 의미를 고찰하는 연구는, 먼저 희곡작품들의 범위를 어떻게 잡는냐에 따라, 그리고 작가들의 ‘노년’에 대한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사실 무척 방대한 연구 작업이다. 이런 연유로, 본 논문의 연구범위를 어떤 경계안에서 어디까지로 해야할 지 정해야 함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먼저, 필자는 희곡사에서 노년에 대한 우리 의식에 변화를 준 개념들, 즉 작가들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적 개념에 의해 야기된 개념을 경계로 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극사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향으로서 크게 전통극과 그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있는 부조리극 그리고 포스트모던 철학의 영향과 함께 나타나는 현대희곡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래서, 조금은 거칠지만, 프랑스 희곡에서 현대철학적 사유의 영향과 함께 백인/흑인, 선/악, 남/녀, 그리고 노년과 젊음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사라지기 이전의 고전 희곡작품의 경우와 부조리극인 이오네스코의 작품 그리고 현대희곡작품을 살펴보면서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노년에 대한 의미의 변화되는 흐름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들 연구를 위해 좀더 많은 작품들을 살펴보았으면 더욱 풍성한 연구가 되었겠지만, 주어진 시간의 한계로 인해 프랑스 고전극, 부조리극, 현대 희곡 몇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인의 형상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이번 연구에서는 만족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필자는 먼저 관념론적 서구 철학의 중심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영향이 지대했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고 편협된 해석으로 인해 엄격한 문학적 규칙의 시대인 17세기의 몰리에르의 희곡작품들, <상상병환자>, <타르튀프>에서 나타나는 ‘노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상류사회에 파고든 가짜 신앙, 대귀족들의 퇴폐상, 경박한 사교생활등 그 사회에 팽배해있던 권위적 위선을 비판했었다. 이어서, 필자는 부조리 극에서 특히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에서 나타나는 ‘노년’과 ‘늙음’의 의미를, 그리고 현대 희곡들 중 장-폴 벤젤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장-뤽 라갸르스 <난 집안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를 통해서 나타나는 ‘노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프랑스 희곡 속에 나타난 ‘노년’의 의미망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몰리에르 <상상병환자>에서 나타나는 노년 : 추, 조롱의 대상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Jean-Baptiste Poquelin, dit Molière)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물들의 성격을 꿰뚫어 통찰할 뿐 아니라, 당시의 권위적인 귀족과 타르튀프와 같은 위선적인 성직자를 비판하며 인간의 진실성을 추구한 작가이다. 물론 그가 비판한 것은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사회에 일고 있었던 프레시오지테(préciosité) 경향에도 가해졌으며, 이 경향은 거칠어진 풍속을 정화하고 재치있고 세련된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랑부이예 후작부인(Madame de Rambouillet, 1588-1665)을 필두로 상류층의 사교문학적 경향에 편승하고자 하는 가짜 재사들의 모습을 비판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 <학식을 뽐내는 여인들>도 있다. 이러한 그의 비판의식은 나이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의 <상상병 환자>에서 등장하는 아르강은 집안의 아버지이자 ‘나이든’ 인물로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다 자신의 상상을 통해 자신이 병에 걸렸다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의사의 진료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받는 처치란 관장과 영양제일 뿐이다. 아르강에 대한 성격은 극의 처음에 드러나는 지문과 약값을 깍으며 약사 플뢰랑에게 줄 돈을 계산하는 그의 독백을 통해 그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면서도 구두쇠적 경향을 지닌 늙은이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자신의 진찰료와 약값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큰딸, 안젤리끄를 의사, 또마 디아프와뤼스와 결혼시키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극 속에서 늙은이, 아르강은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자신의 딸 안젤리끄와 그의 연인, 끄레앙트에 비해, 편협적이고 경직된 사고를 가진 인물로서 나타난다. 게다가, 그의 경직된 사고는 그의 후처 벨린느의 계산된 친절을 알아채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타르튀프>에서도 오르공의 어머니이자, 마리안느의 할머니인 페르넬르 부인이 위선자 타르튀프만을 좋아하며, “그분이야 훌륭하시지, 그분의 말이라면 따라야해. 너같은 망나니가 그분에게 시비를 거는걸 보면 화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구나”/[…]/ “그분이 간섭하는 건 모두 제대로 된거야. 그분은 너희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려는 게야. […]”라고 자신의 손자 다미스에게 말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이에 반해 손자 다미스는 타르튀프가 “비열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의 할머니에게 말한다는 점에서, 극에서 할머니, 페르넬르 부인의 편협적이고 경직된 사고가 더욱 강조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경직된 사고와 구두쇠적 경향과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늙은이로서 등장하는 아르강과 편협적인 사고의 페르넬르 부인은, 극 안에서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며 위선적인 것을 꿰뚫어보는 젊은 이에 반해 조롱의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고전 극에서 드러나는 노년의 인물들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비록 몰리에르가 당시의 사회적 위선을 비판하며 인간의 진실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늙음’을 부정적 성격으로 인식하고 추한것으로 다루었음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게다가, <크롬웰서문>2)(1827)을 썼던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신고전주의의 “사실임직함(vraisemblable)”을 위해 거부하는 현실적 사실의 폭력적이고 추한 부분 역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서의 그로테스크 형식을 새로운 현대 정신으로 내세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크롬웰서문>에서 그는 가장 비속한 것에서 숭고함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이러한 그의 그로테스크 개념은 기존의 낡은 정신에 대한 공격으로서 추의 미학을 일견하였다. 하지만, 위고의 이러한 새로운 정신은 노인, 혹은 늙음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큰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1830년 그의 『에르나니, Hernani』가 공연되면서 고전주의 체계(장소와 시간의 일치를 깸, 단 그는 사건의 단일성은 인정)를 뒤흔들면서 낭만주의 승리를 담보했던 이 작품에서, 위고는 여전히 늙은 공작인 고메즈(Don Ruy Gomez)를 젊은 에르나니와 도냐 솔에 대립적 인물로 위치시킨다. 극에서 스페인 왕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돈 카를로스와 에르나니가 동시에 도냐 솔을 사랑했지만, 왕이 이 둘의 사랑을 허락하여 이들이 결합하여 신방에 들어가려는 순간 고메즈는 이전에 에르나니가 그의 생명을 구해준 댓가로 준 뿔피리를 분다. 고메즈는 에르나니와 도냐 솔의 사랑을 질투하고 독약을 에르나니에게 내리게 되고, 이에 도냐 솔이 그 독약을 반쯤 마시고 쓰러진 후 에르나니가 그 나머지 독약을 마시고 죽게 한다. 이렇듯 위고가 고전주의적, 시간, 장소의 개념을 깨고 그리고 그로테스크와 추의 개념을 기존의 개념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으로 가져왔다 할지라도 그의 이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나이든 인물’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운 젊음과는 대립적인 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록 고메즈 역시 자살하긴 했지만. 결국, 비록 <크롬웰서문>에서 새로운 현대정신으로서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숭고개념과 함께 놓는 획기적인 사상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안에서 늙은이의 모습은 여전히 추하다. 이렇게 고전극 안에서 ‘나이든 사람’은 추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서 나타나거나, 아니면 대부분 부모의 기능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로마 시대에도 존재했었는데, 이는 풍자 시인이었던 유베날리스(Decimus Lunius Luvenalis)의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일그러지고 추한, 알아볼 수 없는 얼굴, 피부 대신 그 보기 흉한 가죽만이 남아 있으며, 축 늘어진 두 뺨, 타바르카의 우거진 숲 속에서 어미 원숭이가 늙은 주둥이 주위를 긁을 때 생기는 것 같은 주름살들”3)이라며 노인의 신체 변화를 추하게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혹은 받아들이기 힘든 노년의 모습은 부조리 극에 와서 다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1)Molière, 민희식역, 『상상병환자』, 범우사 2007년, 198-201쪽.  2)Victor Hugo, “Préface de CROMWELL”, Classique Larousse, 1827, pp. 19-40, 이진성역, 『문예사조』, 1994년, 문학과 지성사, 107-128쪽.  3)Simone de Beauvoir, La Vieillesse, Gallimard, 1970, 홍상희, 박혜영 역, 책세상, 2002, 169쪽.

    3.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 : 불편한 진실로서의 ‘노년’

    이제 우리는 5-60년대의 부조리극에서 이오네스코의 극에서 형상화된 ‘늙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이오네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 조건의 본질적인 문제인 늙음, 고독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고전 희곡 속에서 젊음과 달리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되던 ‘노인’ 인물은 이제 그들의 모습을 수긍해가는 인물로서 변화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왕은 죽어가다>에 나타나는 베랑제 1세 왕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다 서서히 수긍해가는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점에서 희곡에서의 죽음을 앞에 둔 사람, 혹은 ‘노년’의 변화된 모습을 드러낸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죽어가다>에서 이 왕은 특별한 그 누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의미하면서4) 작가는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모순을 이 작품을 통해 그려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이 처음에는 “제의 (La cérémonie)”라고 불리었다5)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극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인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제의적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오네스코는 이 작품에서 베랑제를 통해서 작가 자신이 느껴왔던 죽음에의 공포와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극에서 드러나는 서로 다른 경향의 두 왕비, 마리와 마그리트가 바로 베랑제의 두 심리를, 아니면 좀더 정확하게 작가 이오네스크의 두 가지 심리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극에서 마리는 끊임없이 베랑제 왕의 죽음을 거부하게 하고 그에게 삶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기를 당부하며 그의 왕권의 포기를 강요하는 마그리트와 시의 그리고 근위병들을 체포하라고 한다. 반면에 마그리트는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 존재의 부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베랑제는 백성들이 그를 기억하도록 모든 공공장소에 자신의 동상을 세울 것을 바라며 자신의 죽음이후 이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삶의 집착을 버릴 것을 요구하면서 “아직도 밧줄에 칭칭 묶여있군요. 풀어드릴께요. 아니, 잘라드릴께요. 아직도 당신한테 매달려 당신을 붙잡고 있는 손이 많아요.”6) 라고 말하며 그의 삶에의 집착을 끊도록 돕는다. 그런데, 이 관점은 그동안의 “늙음” 혹은 시간과 함께 죽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면서 안간힘을 쓰는 노년을 조롱하거나 추하게 드러내었던 관점에서 벗어나, 극에서 ‘노년’의 인물이 이들 받아들이는 과정을 인간적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그래서 극에서 마그리트와는 달리, 마리는 왕의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그녀의 능력을 상실한다. 결국, 마그리트의 관점을 통해서 베랑제에게 강요되는 죽음의 사실은 왕을 차차 그의 모든 욕망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끌고 가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베랑제에게 가해지는 이 요구는, 달리 말해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단절해내어야 하는 ‘노년’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 만약 그러하다면, 이 논리 역시 어쩌면 지나치게 또 다른 의미의 노년의 이념화로 행해질 수 있음을 배제 할 수 없다. 만약 베랑제가 자신의 모든 욕망을 모두 걷어낸다면, 이를 통해 말해지는 노년의 인물은 이 모든 현재의 삶을 해탈해내야 하는 인물로서만 말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오네스크의 극에서 ‘늙음’은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사실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노년은 삶을 해탈한 사람으로서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우리 동양사회에서 노년을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기준이며,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우리 일상의 삶에서 배제해내는 부분일 것이다. 사실, 이 단계에서는 젊음과 노년의 경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관점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성에 대해, 그래서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노년의 모습을 오로지 ‘인간적인 모든 욕망을 초극한’ 사람으로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이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배척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4)“L’homme est roi, le roi d’un univers. Chacun de nous est là comme au coeur du monde et chaque fois qu’un homme meurt il a le sentiment que le monde entier s’écroule, disparaît avec lui C’est pourquoi la mort de ce roi se présente comme une suite de cérémonies à la fois dérisoires et fastueuses” Le monde, 19 décembre 1962, 김문경, 『Eugène Ionesco의 Le Roi se meurt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고찰』 숙명여자대학 석사논문, 2001년, 15쪽에서 재인용.  5)Martin Esslin, Le théâtre de l’absurde Buchet, Chastel, 1962, p.180.  6)Ionesco, Eugène, Le roi se meurt, 오세곤역, 평민사, 1995, 82쪽.  7)시몬느 드 보부아르, 『노년』, op. cit., pp.10-12..

    4. 현대 희곡작품 : 늙음/젊음 이분법적 경계의 해체

       4.1. 현대희곡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논의들을 이끌어 온 이면에는 예술가인 작가들의 의식을 지탱하는 철학사상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60년대 말엽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7-80년대 현대희곡의 글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스트모더니즘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post-’ 인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모더니즘을 살펴보고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를 우리의 연구 맥락 안에서 간략하게나마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모더니즘은 19세기에 있었던 부르주와 사회가 신봉하는 사회경제적, 도덕철학적 전통이나 인습을 모두 공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토대를 둔 리얼리즘, 즉 삶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하는데 목적을 둔 리얼리즘에 반기를 둔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예술적 모토를 바로 반재현주의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묘사하는 것은 목표로 하며 주관성과 그것에 기초를 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이들 작가들에게 가치와 진리란 오직 ‘나’한테서 비롯된다고 확신되었다. 그래서 이들 모더니즘 작가들은 20세기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며, 첫째,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에서 허무주의와 공허감, 둘째,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긴장, 셋째,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능동적인 자유의지를 통해 삶을 선택한다. 넷째, 이들은 소외와 고립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왜냐하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사회의 규범이나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개인이 치러야할 값비싼 대가는 바로 소외와 고립이기 때문이다.”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무신론적이며 실존적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인간이성에 근거한 합리성과 절대지식에 기초하여 인류의 발전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였던 이러한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우슈비츠 사건이나 핵폭탄 그리고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야기된 자연파괴와 같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왔다. 결국, 모더니즘은 더 이상 인류해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성에 중심을 둔 계몽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서구 관념론이 지니는 이분법적 도식이 가진 한계, 즉 위계적 폭력을 행하는 중심논리를 배격하면서 기존의 주변부에 위치하던 여성, 흑인, 제3세계 등과 같은 것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래서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의 무의미성과 함께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메타담론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경향을 띄며 더 이상 개인의 삶이 이념, 즉 큰 이야기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 소시민적인 일상적 삶의 작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성 대신에 상대성, 보편성 대신에 특수성, 필연성 대신에 우연성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불확정성에 근거하는 단편화를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의 한계, 즉 위에서 언급한 계몽주의의 절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이런 철학적 배경과 함께 쓰여진 7-80년대의 프랑스 현대희곡에서는 더 이상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늙음이 추하거나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이들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서 이젠 인간 자체의 문제로서 논의되고 있음을 장-폴 벤젤의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와 장-뤽 라갸르스의 <난 집안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두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4.2. 이분법적 도식이 해체된 현대 희곡에서 나타나는 ‘늙음’

    4.2.1.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Loin d’Hagondange>

    장-폴 벤젤(Jean-Paul Wenzel)9)의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Loind’Hagondange>(1975) 작품을 살펴보기 전에, 이 제목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진”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젊은 시절 자신의 직장이 있었던 아공당주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위치할 수밖에 없는 노년의 모습을 공간적 거리감으로 표출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아공당주 시의 한 제강소에서 일했다가 은퇴한 노동자 부부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14 따블로로 이루어져 있다.

    극의 줄거리는 68세의 조르주와 남편보다 다섯 살 많은 73세인 그의 부인 마리는 은퇴 후 그들이 일했었던 도시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에서 그들의 노년의 삶을 3년째 보내고 있다. 외판원 프랑스와즈의 말처럼, 그들은 집과 함께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구비해놓았지만, 일하는 것으로서만 젊은 시절의 시간을 보내온 이들 부부는 은퇴 후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들 자신이 아무 곳에도 필요하지 않다는 상실감과 그들에게 주어진 긴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그래서 조르주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홈통을 수리하고 쇠로 파이프 진열장을 제작하며 점심식사도 할 시간이 없다며 스스로 자신을 일에 얽매어 놓는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시골의 삶을 보내게 되는 마리는 꽃들을 돌보고 집안을 청소하며 어찌해야할 줄 모르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힘들어한다. 결국,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이 부부는, 영국인이면서 프랑스연극 학자인, 브래드비(David Bradby)의 표현처럼, 새로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영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원”10)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존에 급급해 살아왔기에, 달리 말해, 그동안 노동이외에 다른 그 무엇인가를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습관적 삶에서 벗어난 이 삶이 평화롭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하며,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갑자기 주어진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당혹해하는 이 노부부의 혼란스런 상황은 이들이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어떤 소통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말해지지 않고 침묵되어지면서 드러나는 많은 불협화음만이 있다.

    특히 마리는 끊임없이 남편과의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남편 조르주는 거기에 답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말은 잘려지고 공허하게 사라진다. 이런 상황은 세번째와 네 번째 따블로에서도 나타나는데, 마리가 그들 사이의 대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는 달리 조르주는 계속해서 다른 말을 하면서 그들의 대화는 잘려진다.

    게다가 위 예문의 마지막 조르주의 대사에서 그가 이번 달 잡지가 오지 않은 사실을 말하며 “되는 게 없군”이라는 말을 하면서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함을 알 수 있다. 그 순간 당혹스러워하는 마리는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못하고 잔을 깨뜨리면서 조르주와 함께 그녀의 불편한 심리를 드러내게 된다. 이때 조르주는 그 잔이 자신의 것인데 깨졌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드러내며 나가버림으로써 그들의 어긋나고 불편스러운 현재의 상황들이 가시화된다. 마리의 외로움은 그래서 아홉 번째 따블로에서 외판원 프랑스와즈가 왔을때 그녀를 맞이하는 마리의 행동을 통해 그녀 외로움의 무게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마리는 외판원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를 찾으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한다. 이러한 사실은 외판원인 프랑스와즈가 가고 난후, 마리가 “문을 닫고 모든 불을 끄고 곤돌라 등, 벽난로 등, 촛대 등, 음악도 끄고 나서 의자에 앉아 울기 시작한다는 지문을 통해 그녀의 외로움이 더욱 분명하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들의 욕망들은 드러나지 않는 침묵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조르주 역시 자신의 삶 55년간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이 가치있는 것이진 의문을 제기하며 상실감에 젖는다. 이런 그의 상실감은 10장-1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마리가 조르주의 생일이라고 케잌을 만들어 그의 작업실로 와서 생일 노래를 부르며 케잌의 촛불을 끄라고 하며 그의 작업실에서 그가 일하는 것을 앉아 지켜보겠다고 하지만, 조르주는 끝까지 그녀를 쫒아내고자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르주는 은퇴와 함께 자신이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배제되었다는 상실감을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더 엄격하게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작업실에 마리의 출현은 자신의 상상적 공간을 그녀가 파괴함으로써 현실의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그를 두렵게 하기에 그 스스로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드러낸다. 결국, 조르주가 스스로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함은 또 다시 마리를 외롭게 하는 그래서 우연히 방문한 외판원에게서라도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보고자 부질없이 수다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그녀 모습을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결국, 제목에서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극은 아공당주에서 젊은 시절, 그들의 생생한 삶과는 멀리 떨어진 이 노부부의 유리된 삶을 드러내고 있다. ‘늙음’으로 인해 가지는 존재의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조르주와 이런 남편과 그리고 바쁜 일상의 삶으로 인해 자주 이 부부를 찾아오지도 못하는 자식들 로부터 가지는 마리의 외로움은, 단순히 한 노부부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배제된 노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노년의 모습은 추하지도 조롱의 대상도 아니며, 그리고 “흰머리에 후광이 비치는 현명함”을 가진 그래서 “고상한 인간조건”을 지배하는 중성적 모습이 아니라, 바로 ‘인간적 존재’ 그 자체로서 드러나고 있다. 극을 통해 작가는 항상 젊음의 주변부에만 머무르고 있던 노년의 모습을 중심으로 떠오르게 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이들의 문제를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의식하게 한다.

    4.2.2. <난 집안15)에 있었지 그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J’ tais dans ma maison et j’attendais que la pluie vienne>

    장-뤽 라갸르스(Jean-Luc Lagarce)16)의 이 작품은 “J’étais dans ma maison et j’attendais que la pluie vienne” 라는 원제목을 지니는 데, 이때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의 습관적 표현으로 집에 있었다는 표기는 ‘à’ la maison임을 상기해보면, ’dans’ 이라는 전치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어떤 공간 ‘안에 머무르고 있는’ 수동적 태도를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언어습관에서 벗어나 ‘안, dans’이라는 전치사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극을 살펴보고자 한다.

    극의 줄거리는 아버지와 싸워 집을 나간 남동생을 ― 인물에 따라, 오빠를, 아들을 그리고 손자를 ― 마냥 기다리려 왔었던 다섯 명의 여자는, 다시 돌아온 남동생의 침대주위에서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를 지킨다.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왔고 그를 살아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못했던 그녀들은 결코 어떤 소식도 편지도 받지 못했고 기다림을 포기해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었다. 이 남동생은 지금 집안에서 그동안의 방황에서, 그의 여정에서 지친 몸을 어린 시절의 그의 방 침대에 누이고, 자고 있지만, 실상 그는 거의 죽어간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돌아온 그의 귀환은 그녀들에게 그동안의 그녀들의 심정을, 후회를 토로하게 하면서 이 다섯 명, 가장 나이 많은 여자, 어머니, 장녀, 차녀, 가장 나이 어린 여자의 대사가 다양한 변주로서 드러난다.

    먼저, 극에서 드러내는 인물들의 의식을 그들의 대사들을 통해 살펴보면, 돌아온 아들을 대상으로 혼자 말하는 어머니의 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 ? 당신들은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 쪽을 붙들지도 않았고, 또 한 쪽을 붙들지 않았다고 비난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17) 라는 그녀의 변명은 그녀들이 아들이 나갈 때 혹은 아버지를 상대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머무르고만 있었음을 그리고는 그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후의 대사에 의해 좀 더 분명해져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이 어머니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그녀들이 직접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에 의해 그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듣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게다가 장녀와 차녀는 집을 나갔다 돌아온 남동생으로부터 꿈꾸었던 삶이 진실인지 대답을 듣기를 원하며, 또 다른 한편으론 그녀들이, “얼마나 헤매고 살았는지, 얼마나 우리끼리, 여기, 박혀 살았는지, 그 애를 기다리면 절망에 빠져있었는지, […]”19)를 토로한다. 이렇게 장녀와 차녀가 오히려 돌아온 남동생이 그동안 자신들에게 소식하나 주지 않고 모른 척 한 것을 비난하고 그가 자신들의 존재를 멸시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행동하지 않음을 합리화한다. 그래서 극에서 장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어머니는 결코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인내하는 이로서 그리고 할머니는 그냥 단념하는 이로써 표현한다는 점에서 장녀의 생각은 여전히 절대적 주체의 관점 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극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돌아온 아들이 또다시 깨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며 그의 말을 듣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라 불릴 수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여자는 단념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제일 먼저 이 돌아온 손자를 맞이했을 뿐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소극적인 상황에 대해 가장 똑바로 인식하고 있음을 그녀의 대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아들의 부재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빨리 늙어가고 있었어”라고 할머니는 말한다. 이는 끊임없이 아버지와의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던 아들의 존재, 다시 말해, 객관적 타자의 부재와 함께 이제 아버지가 할 일은 ‘늙어가는’ 것뿐, 즉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극의 끝부분에서 장녀의 변화된 말을 통해서도 다시 드러나는데, 남동생이 죽게 되면, “상 중”이 될 것이며, 그녀는 아니 그녀들은 모든 욕망을, 욕망의 뿌리조차 잃게 될 거며,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극에서 남동생이 귀환한 오늘, 비로서 다섯 여자인 그녀들은 회환의 목소리를 표출하면서, 마냥 집안에서 기다리기만 했었던 그녀들이 그의 죽음을 아파하면서 어떤 의식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음을 작가는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작가, 라갸르스는 극을 통해서 외형적 늙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 ‘늙음’을, 즉,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만의 “절대주체”를 주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써 작가는 이 늙음을 표현한다. 할머니는 오히려 다른 젊은 장녀나 차녀에 비해 더욱 젊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할머니만이 그녀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는 그래서 정확하게 다시 우리 모두에게 말한다. “우리는 […] 그냥 희망만 하고 있었어, 희망한다는 그 말, […] 그 말은, 말일 뿐이지, 그렇지 뭐, 약간은 우스운 말이지 뭐.”2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희곡 두 작품은, 소위 6-70년대의 탈형이상학적 개념과 함께 드러나는 이들 작품에서는 더 이상 ‘노년’, ‘늙음’의 모습이 전통적 이분법적 도식으로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노년의 모습을 조롱의 대상으로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 주요 영웅의 부모의 기능으로서가 아닌 한 독립적 개인으로, 다시 말해, 이제 ‘노년’의 모습은 극의 주요인물로서 존재함을 위의 작품,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게다가, <난 집안에 있었지…>에서는 오히려 더 젊은 정신으로 다가오는 ‘가장 나이 많은 여자’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8)김욱동, 『포스트모더니즘』,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8년, 31쪽.  9)1947년 생떼띠엔느(Saint-Etienne)에서 출생, 1979년 올리비에 페리에(Olivier Perrier)와 장-루이 우르댕(Jean-Louis Hourdin)과 연합극단 창립. 배우, 연출가, 극작가이다, <아공당주로부터 멀리 떨어져>는 그의 처녀작으로 1975년에 쓰여짐.  10)David Bradby, Modern French Drama 1940-1990, 이선화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435쪽.  11)Jean-Paul Wenzel, Loin d’Hagondange, Actes Sud, 1995, 이선형역, 연극과 인간, 2011년, 14쪽, 17쪽.  12)Op. cit., 27-29쪽.  13)이탤릭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임.  14)Op. cit., 32-33쪽.  15)이탤릭체는 필자가 강조한 것임.  16)장-뤽 라갸르스는 1957년 프랑스 오트-쏜느 지방 에리쿠리에서 태어났다. 1979년 자신의 희곡<카르타고, Carthago encore>가 “프랑스문화(France Culture)”방송에서 낭독되어 소개되면서 그의 극작가로서의 행보가 시작된다. 이 작품은 1994년에 쓰여진 희곡이다. 1995년에 <먼나라, Le pays lointain>을 끝으로 그는 에이즈로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7)Lagarce, Jean-Luc, J’étais dans ma maison et j’attendais que la pluie vienne, Ed., Les solitaires Intempestif, 임혜경역, 연극과 인간, 2007년, 20쪽.  18)Op. cit., 21쪽.  19)Ibid., 59쪽.  20)Op. cit., 49쪽.  21)Op. cit., 53쪽.

    5. 나가는 글

    우리보다 훨씬 먼저 노년인구의 증가를 겪은 프랑스의 작가 중의 한명인 비나베르(Michel Vinaver)는 그래서 자신의 작품, <킹, King>, 2 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장년을 50세에서 69세까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게다가 엔조 코르만(Enzo Cormann)의 <언제나 뇌우, Toujours l’Orage>(1995)에서 76세의 테오 스타이너가 등장한다. 이 극의 일차적 줄거리는 연출가인 골드링이 리어왕을 베를린에서 공연하기 위해 배우 일을 관두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테오를 찾아와 리어를 연기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이 둘은 함께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실제적 이야기는 바로 이들의 대화 과정에서 테오는 자신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현재의 인물 혹은 독자나 관객에게 잊혀져가는 과거의 사실, 이차대전 당시, 살아남은 유태인의 죄책감을,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하고, 그리고 골드링은 자신의 억제되었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프랑스 현대희곡에서 드러나는 노년의 모습은 항상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의 삶의 모습으로서 그가 지닌 과거의 많은 사실들을 인정해내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프랑스 현대희곡에서는 더 이상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늙음이 추하거나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이젠 인간적 존재로서 다가오며 서로 상보적인 관계 속에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노인에 대한 편견은, 1970년에 이미 프랑스의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던 그 시기,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노년』의 글에서 말한 이미지와 겹쳐진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노년의 삶을 ‘인간적’ 삶에서 배제하면서 노년을 중성적 존재로 보고 있지는 아닌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

    이 말은 이미 우리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노인을 인간적인 모든 욕망을 초월한 자로서 단정함으로써 그러하지 못한 노인들에게 쏟아붓는 많은 편견의 문제를 가진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이들을 인간적 욕망을 갖지 않는 자로서 치부해버리고, 이들로부터 인간적 존재, 인간의 약점과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연극이 노인에 대한, 늙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근거로 잘못된 의식들을 끊임 없이 견제해나가는데 그 역할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 사려된다.

    22)시몬느 드 보부아르, op. cit.,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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