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ite the ubiquity of love in the work of Sarah Kane, the theme has been overshadowed by the violence that characterizes her early plays. This essay differentiates Kane from her contemporary “in-yer-face” playwrights, arguing that violence in Kane operates as a means of securing love. Antonin Artaud’s concept of cruelty, often (mis)understood in a physical sense alone, provides a clue to the nature of Kane’s violence and its relation to love. The essay focuses on Cleansed and Crave, both written in 1998, one about love’s redemptive possibility, the other about its pure impossibility. What makes Cleansed hopeful is its violence that works as love’s obstacle, creating the illusion that once it is removed love would be possible. The absence of violence in Crave on the contrary lays the illusion of love bare, making it Kane’s most despairing play. Kane’s oeuvre draws a trajectory of love from hope to despair; as a whole it stages the impossibility of love. To love the other requires the relinquishing of the self, making love logically impossible by depriving the verb of its subject. Love, if possible, would offer the bliss of unity, tearing out the constraint of the Symbolic Order. Kane’s only alternative is death, as is expressed in Crave and 4.48 Psychosis.
“나는 거의 항상 사랑에 관해서 쓴다”라는 사라 케인(Sarah Kane)의 단언에도 불구하고(Saunders, “Just”107-08), 케인의 극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접근한 연구는 많지 않다.
“도발극”(in-yer-face theatre)은 알렉스 씨어즈(Aleks Sierz)가 1990년대 영국연극의 새로운 극작 경향을 설명하며 도입한 표현으로, 씨어즈는 케인의 『폭파』를 대표적인 도발극 작품으로 꼽는다(
이러한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케인이『갈망』이전에 쓴 극들은 전형적인 도발극이다. 리뷰와 비평에서 이미 수차례 반복해서 나열되어온『폭파』의“역겨운 오물의 향연”(Tinker, n. p.)은“자위행위, 펠라티오, 프로타주, 배뇨, 배변 (아, 저 익숙한 배설물!), 동성 강간, 눈알 추출, 식인행위의 장면”(Billington, n. p.)을 포함한다. 케인이“희극”(comedy)이라고 여긴『페드라의 사랑』(
그런데, 이 극들이 전달하는“메시지”가 과연 어떤 것이기에 관객들이 극단적인 도발을 견디어야 하는가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케인은『폭파』의 초연에 대한 언론의 악평이“저널리스트들의 자기영속적 히스테리이지 관객들의 반응이 아니었다”고 작품을 변호하지만(Saunders, About 51), 굳이“중년의 중산층 백인남성”(52) 저널리스트가 아니더라도 케인의 극에 산재하는 섹스와 폭력의 역겨움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은 마치“쿨”하지 못한 보수성의 징표처럼 여겨질 뿐더러, 모리스(Peter Moris)가 지적하듯 자살이후 케인이“평온하게 박물관에 모셔진 뒤샹의 변기처럼”우상화되는 분위기에서(Saunders,
그러나 케인의 작품은 정치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이다. 케인에게 정치성이 부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이라는 말이다. 이니스는 케인의 극이“개인적인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을 극대화한 경우로 본다(Innes,
아르토(Antonin Artaud)의 잔혹극 개념은 케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데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케인과 아르토의 잔혹극이 연결되는 지점은 우선 초기 극들에 나타나는 폭력과 잔혹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케인과 아르토의 유사성은 이 표면적 폭력 이상이다. 흔히 아르토의 잔혹극을 신체적, 물리적 가혹행위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아르토는“잔혹”(cruelty)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야만적인 물리적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Artaud 101). “육체의 고통이 없는 순수한 잔혹”도 있을 수 있으며, 이때“잔혹은 엄정성, 굽힐 수 없는 의도와 결심,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결단력을 의미한다”(101). 잔혹은“인류가 사랑, 범죄, 마약, 전쟁, 폭동 등을 통하여 추구하는 인생의 초월적 경험”과 같은 것이다(122). 아르토의 잔혹극은 서구 합리주의의 비판이며, 라캉적으로 말하자면 상징계를 찢고 실재를 드러내는 극이다. 잔혹극은“삶의 열정적이고 경련적인 개념을 연극에 복원시키고자 창조되었으며,”유혈과 물리적 폭력은 필요한 경우 사용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122). 아르토가 말하는 잔혹은 문명에 억압된 존재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극의 신화와 제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Innes,
월러스(Clare Wallace) 역시 아르토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케인이 90년대 영국 극작보다는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극과 더 유사하다고 주장한다(88). 씨어즈는 케인이 말하는 체험성(즉 관객이“생각과 감정에 직접 신체적으로 접 촉할 수 있도록”것)을 도발극의 특징으로 들지만(
이처럼 케인은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영화처럼 폭력을 미화하거나, 본드나 레이븐힐처럼 폭력을 통해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케인의 폭력은 마치 예수의 수난처럼 인간성을 입증하기 위해 존재한다. 쏜더스 역시 케인 을 동시대 도발극 작가들과 구별하면서, “케인 극의 극단적 상태와 상황은 [이들과] 정반대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는데, 즉 우리에게 충격을 주어 인간성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Saunders,“ Out”76). 케인의 지속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케인의 극 다섯 편은 사랑을 통해 삶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실패와 절망으로 끝나는 여정이다. 케인의 정전은 폭력성으로 점철된『폭파』,『 페드라의 사랑』, 『정화』와 언어 실험적인『갈망』, 『4.48 사이코시스』(4.48
1998년 네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을 사이에 두고 나타난『정화』와『갈망』은 완전히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극의 분위기와 주제도 전혀 다르다. 『갈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신체적, 성적 폭력의 부재와 정제된 시적 언어의 사용이다. 이 때문에 어떤 평자들은『갈망』을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케인은 이러한 해석에 의아해한다. 1998년 타버트(Nils Tabert)와의 인터뷰에서 밝히듯『갈망』은“여태껏 [케인이] 쓴 가장 절망적인 것”이며, “사랑에 대한 믿음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된 과정 동안 쓰였기”때문이다(Saunders,
『정화』의 직접적인 창작 배경은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저서『연인의 담론』(
이전의 잔혹한 극들은 외부적 폭력을 통하여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확인을 지연시킨다. 『폭파』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인 예이다. 『폭파』에는 40대 중년 저널리스트 이언, 20대 여성 케이트, 군인만이 등장하지만, 이 세 인물의 관계와 액션은 전 인류와 사회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상징적이고 축약적이다. 이언이 케이트에게는 가해자이나 군인에게는 피해자이듯 인간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쇄 사슬을 형성한다. 장면 5에서 죽은 아기를 묻고 케인이 음식을 구하러 나간 후, 혼자 남은 이언은 자위하고, 스스로 목을 조르고, 배설하고, 미친 듯 웃고, 악몽을 꾸고, 피눈문을 흘리며, 힘없이 누워있는 장면이 빛과 어두움의 교차 속에서 스냅사진처럼 펼쳐진다(57-60). 마침내 이언은 파묻은 아기를 꺼내어 먹고 그 구덩이에 들어가 목을 내밀고 누우며, 죽는다(
『페드라의 사랑』의 불가해한 마지막 대사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순간이 더 있었더라면”(if there could have been more moment’s like this. 103)—사랑 때문에 자살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아를 상실한 페드라, 히폴리터스의 사형을 막으려다 친부 씨시어스(Theseus)에게 강간당하고 죽어간 스트로피(Strophe), 변장한 스트로피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한 씨시어스, 이 세 구의 시신 옆에서, 자신 역시 성기가 잘리고 창자가 꺼내져 죽어가며 독수리의 밥이 되기 직전 히폴리터스가 하는 대사이다. 라신(Racine)의 비극을 개작한 이 극은 페드라의“전적인 자기 포기”(selfabnegation)과 히폴리터스의“전적인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라는 사랑의 두 극단적 반응을 통해 자아와 사랑의 역설적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Greig xi). 온갖 섹스와 폭력의 와중에도 냉담하던 히폴리터스의 자기 보존은 마지막장면에서 깨어진다. 히폴리터스의 마지막 대사는 그가 갇혀 있던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와 접촉하는 잔혹의 순간이며, 상징계적 질서를 넘어서는 라캉적 향락(
『정화』는 사랑과 자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그렉에 의하면 사랑의 전면적“자기-포기”를 극화한다(Greig xi). 로드(Rod)와 카알, 그레이스와 그레이엄, 로빈(Robin)과 그레이스, 팅커(Tinker)와 스트립댄서의 스토리라인은 각각 쓴 후 해체되고 재배치되어, 뷔히너(Georg Bu¨chner)의『보첵』(
동성애 커플인 로드와 카알의 이야기는 사랑의 힘을 확인하는 주된 스토리라인을 형성한다. 카알은 로드에게 반지를 끼워주며“너를 항상 사랑할 거야,”“너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야,”“네게 결코 거짓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자(110), 로드는 냉소적으로 응답한다.
실상, 카알은 팅커가 막대기를 항문에 찔러 넣어 어깨까지 꿰뚫는 고문을 가하며(116) 연인의 이름을 묻자 육체적 고통 앞에 자신도 모르게 로드의 이름을 외침으로써 배신 아닌 배신을 하게 된다(117). 로드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 자 팅커는“커다란 가위를 꺼내 카알의 혀를 자른다”(118). 배신을 힐난하는 로드에게 카알이“용서한다고 말해줘”라고 진흙 위에 쓰자 감시하던 팅커가 와서 두 손을 자르며(129), 카알이 로드를 위해“사랑의 춤”을 추자 팅커가 양 발을 잘라버린다(136). 카알의 한없는 사랑 앞에 마침내 로드는“오직 지금만이 있어”라고 말하며 카알을 안고 운다(142).
팅커가 로드를 끌어내며“로드, 너와 쟤 중 누가 되어야 할까?”라고 묻자“나 야, 카알은 안돼, 나야”라고 답하고, 팅커는 로드의 목을 그어 죽인다(142).『 정화』는 각기 다른 네 쌍의 사랑을 교차해 나가는데, 케인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영원한 사랑을 긍정하는 로드의 변화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케인의 말처럼“『정화』는 결코 폭력에 대한 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Saunders,
『갈망』은 이러한 영원한 사랑의 믿음이 환상에 불과함을 시인하는 절망의 표현이다. 상징계를 파열시키는 사랑의 무한대적 향락은“가능하면 적게 즐기라”는 리비도의 경제학과 현실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셰익스피어, 하이네(Heine), T. S. 엘리엇, 베켓, 까뮈(Camus), 체홉(Chekhov), 에드가(David Edgar)까지 다양한 텍스트를 직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는『갈망』은 언어의 음악성을 실험하는 작품이며, 네 개의 목소리로 연주되는 사중주와 같다. 『갈망』에서 말의 소리와 리듬에 의해 만들어지는 음악성은 그 말의 의미만큼 중요하다. 주요 대사는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옮겨가며 되풀이되어 발설되어 시도동기처럼 극의 분위기를 주조하고, 어떤 문장들은 네목소리에 의해 나누어서 발설되면서 이 목소리들이 결국 한 사람의 내면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가령 극을 시작하는 C의 첫 대사“당신은 내게 죽은 사람이야”(You’re dead to me. 155)는“당신”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남겨둠으로써 인간관계전반을 부인하는 효과를 갖는다. “당신”은 다음 대사를 읊는 B일수도, C와의 과거가 있는 A일 수도 있고, C가 곧 구체적으로 말하듯 그녀의 어머니일수도 있다( “I told my mother, You’re dead to me.”156). 이 대사는 C에 의해 다시 반복되고(168), M에 의해 다시 상기되며(196), 극의 마지막에서 다시 C에의해 불변의 진실로 봉인된다.
『갈망』은 사랑이 불가능함을 확인하며, 사랑 대신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풍경을 그린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네 목소리는 사랑의 기억과 욕망, 좌절로 고통스러워한다.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데, 사랑이 나를 파괴하였다”는 A의 대사(174)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적용된다. “사랑이 온다면”(M: If love would come. 160, 166), “사랑의 행위”(B: An act of love: 167, 196), “내 생애의 사랑”(B: Du bist die Liebe meines Lebens: 172), “진짜 사랑”(B: A real love:190),“ 사랑해줘”(B: Love me. 184),“ 사랑해”(C: I love you. 190),“ 그녀를 사랑해 그녀를 보고 싶어”(C: I love her I miss her. 193),“ 아직 널 사랑해“(A: I love you still. 183) 등 이들은 강박관념처럼 사랑의 기억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러한 갈구는 2페이지에 달하는 A의 긴 대사에서 절정에 달한다.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 네게 내 옷을 주고 네 신발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주고 네가 목욕하는 동안 계단에 앉아 있고 목을 마사지해 주고 발에 입 맞추고 손을 잡고 밥 먹으러 가고. . . . ”(169-170).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Lucky)의 장광설을 연상시키는 A의 대사는 연인과 함께 하고 싶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숨가쁘게 나열하며“어떻게든 어떻게든 어떻게든 너를 향한 나의 압도적인 불멸의 강력한 무조건적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가슴을 풍요롭게 하는 마음을 확장시키는 계속되는 결코 끝나지 않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자 한다(170). 타자에 대한 절실한 갈망의 표현인 이 대사는“분명 감동적이지만”(Saunders, Love 107), 소아성애 도착자인 A의 전력은 이 대사에 일종의 아이러니를 입히며, A의 폭풍 같은 대사에 숨을 몰아쉬고“그만”(this has to stop)을 반복해 외치는 C의 반응은 사랑에 내재된 폭력성을 암시한다. 사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C: 내 감정적 느낌을 신체로도 느끼고 싶어. 굶주림./ M: 만신창. A: 망가짐.”(179); “M: “그러나 우리가 사랑한 적이 있다고 나는 결코 말하지 않을 거야./ B: 그녀를 찾았다/ A: 그녀를 사랑했다/ C: 그녀를 잃었다/ M: 끝.”(196);“ C: 기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M: 욕망에서 자유롭게,/ C: 가만히 누워, 아무 것도 건들지 마,/ B: 아무 말도 하지 마./ A: 보이지 않게.”(198).
『정화』가 사랑의“지금”을 극화하며 사랑의 강도를 보여준다면, 『갈망』은 그“지금”이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로드의 냉소적인 말처럼 사랑은 일순간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폭력에 저항하는 동안은 사랑의 내적 지구성을 의심할 겨를이 없다. 궁정풍 사랑(courtly love)이“성적 관계의 부재를 보상하는 세련된 방법으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마치 우리 자신인듯 가장하는 것”처럼(Lacan,
“이렇게 계속 될 순 없어요”(This can’t go on)—샤를로테(Charlotte)가 베르테르(Werther)에게 던지는 이 말은“마법과도 같은 첫 만남의 경이로움이 지나고 나면, 사랑의 상황은 곧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에”모든 연인이 당면하는 문제이다(Barthes 140). 다시, 자살은 사랑의 불가능을 은폐하는 편리한 방편이 된다. 케인이 목숨을 끊기 직전에 완성된『4.48 사이코시스』와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연관성이 간과되어 온 것은 이 극이 케인의 자살록(suicidal note)으로 축소되는 것을 피하려는 이유도 적지 않다. 괴테의『베르테르』에 기초한 극을 써달라는 한 극단의 요청에 케인은 이미『4.48 사이코시스』를 쓰는 중이며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답한다(Hattenstone n.p.). 『4.48 사이코시스』는『갈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니셜조차 없이 인물 구분이 아예 없어지고 몇 개인지 모를 목소리의 텍스트로 구성되며 대사와 무대지문마저도 구분되지 않는다.
케인이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서 해방되어 애초에 가졌을 합일과 충만감을 되찾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드 보스(Laurens de Vos)가 말하듯 케인 작품의 호소력이“상징적 질서의 위반”에 있다(135).
<영 남 대>
*이 연구는 2008년도 영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한 것임. 1케인의 자살 이후, 케인의 작품이 사랑, 특히“순수한 사랑의 불가능”에 대한 것이라는 평가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고(Hattenstone n.p.), 케인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케인 작품의 핵심으로 보지만“( Love is in all the plays.”Macdonald 125;“ Most of the work ... is about love. Yet they are impossible loves.”Kenyon 148), 이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연구는 부재하다. 2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케인은 2001년 출판된 전집에 포함된 다섯 편의 극과 짧은 영화대본『스킨』(Skin) 이외에 출간되지 않은 세 편의 모놀로그를 남겼다. 이 모놀로그들은『폭파』이전에 쓰였으며 브리스톨과 에딘버러 프린지페스티벌 등에서 공연되었다.모놀로그에 대한 연구는 Rebellato 28-44를 볼 것. 3케인이 도발극 작가들과 구별되는 고전적인 작가라는 주장은 이미 쏜더스(Graham Saunders)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본 논문은 사랑과 폭력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쏜더스의 논의와 차별성을 갖는다. 4이 인용의 출처는 1998년 Nils Tabert와의 인터뷰로, Graham Saunders, About Kane: The Playwright and the Work(London: Faber and Faber, 2009)에 실려 있다. 이 편저는 케인에 대한 소개, 케인의 인터뷰 및 기사, 케인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2부는 편집자의 주관에 의해 주제별로 발췌되어 있기는 하지만 케인의 목소리를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편저에서 인용할 경우 글쓰기의 편의상 원 출처는 생략한다. 5케인의 작품은 Sarah Kane: Complete Plays(London: Methuen, 2000)에서 인용하며, 괄호 안에 해당 대사 혹은 장면의 페이지수를 적는 것으로 한다. 6예를 들어, 씨어즈는 케인의 초고에 나타난 인종적 언급들을 살펴보며『폭파』의 폭력성과 인종문제를 논한다(Sierz“Looks”). 애스턴은『폭파』, 『정화』, 『갈망』에 나타난 “사랑의 구원적 가능성”에 주목하지만, 궁극적으로 케인이“남성성의 파괴적이고 잔인한 힘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Aston 89, 97). 케인의 폭력을 푸코적 처벌의 스펙타클(spectacle of punishment)로 해석하는 애스턴의 논의는 사랑을 상상계적이고 여성적인 것으로, 폭력을 남성적이고 상징계적인 것으로 이분화하는 문제점이 있다. 국내의 케인 연구 또한 정치적 해석이 주도적이다. 『폭파』와 폭력의 문제에 대한 논문은 박일형(2004), 정병언(2009), 최성희(2010); 푸코의 훈육 개념에 기반하여“포스트모던한 정치극”으로의『정화』를 해석한 논문은 김영덕(2007)을 볼 것. 7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하면 인간은 리비도의 사용을 최소화하려는 경제 원리를 따르며, 쾌락 원칙은 쾌(Lust)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자아보존이라는 현실 원칙에 의해 보완된다(301-06; 594-97). 82000년 런던 로열코트극장의 초연에서는“희생자. 가해자. 방관자.”(231)에 착안하여 두 여자와 한 남자로 대사를 나누었다. 9드 보스는 아르토의 서브젝틸(subjectile) 개념으로『4.48 사이코시스』를 분석하며, 케인이 초기극의 물리적 폭력에서 후기극의 언어에의 폭력으로 전환하는 것이 상징계를 벗어나“분열된 주체의 재합일”을 이루기 위해 언어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라는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de Vos 12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