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argues that the hard-boiled detective fiction is not a commercialized imitation of the classical detective novels but a revisionist detective fiction. Producing a radically different type of detectives from the traditional ones, the hard-boiled detective fiction provides a new, opposing paradigm of criminality, class, and asculinity to the classical detective fiction. Classical detective novels, through the heroic portrayal of high-class detectives capturing and punishing lower-class criminals, reassure class hierarchy. Hard-boiled detective novels, however, representing the ruling classes as the root of social oppression and political corruption, define the power elite as criminals. Whereas the classical detective fiction displays aristocratic masculinity, the hard-boiled detective fiction embodies working-class masculinity. The classical detective is generally represented as a genteel dilettante solving the mysteries of crimes, in his leisure time, through logical reasoning and scientific techniques. The hard-boiled detective, however, solves crimes by using violence and earns his living from catching criminals. The hard-boiled detective also maintains an absolute ndependence by keeping a distance from all forms of authority and connection. The representation of hard-boiled detective as a tough, rebellious, independent guy can be interpreted as a reaction to the advent of corporate capitalism and the rise of labor control in the 1920s.
1920년대 초반 미국에 등장한 이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Hard-Boiled Detective Fiction)은 고전추리소설에 폭력적 요소와 성적 자극을 추가하여 상업성을 극대화한 추리소설의 저급한 아류로 평가되어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고전추리소설 장르에 대한 곡해에 기반을 둔 추리소설에 대한 모방”(30)에 불과하다는 매컬리어(John McAleer)의 견해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전율”을 주기 위해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오래된 공식에 지하세계의 냉정한 잔혹성”(235)을 덧입힌 고전추리소설의 유사장르라는 윌슨(Edmund Wilson)의 주장은 이러한 시각을 대표한다. 특히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게재되었던 매체가 권위 있는 문학지가 아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펄프 픽션(Pulp Fiction)을 게재하던 펄프 잡지(Pulp Magazine)였다는 사실은,1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저속하고 부도덕한 문학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고전추리소설에 대한 저속한 모방이 아니라, 이 시기 미국사회의 해체현상과 그로 인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전환을 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추리소설이었음을 밝히려고 한다. 포(EdgarAllan Poe)에 의해 시작되고 코난 도일(Conan Doyle)에 의해 완성된 고전추리소설은 그렐라(George Grella)의 지적대로 “이성적으로 인식 가능한 세계”(111)를 전제로 한다. 범죄는 합리적으로 작동되는 사회체제를 파괴하려는 불순한 시도로 간주되고, 탐정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 기존체제를 위협하는 범죄자를 체포함으로써 무질서와 비합리성을 질서와 합리성으로 대치시킨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외부세계는 무질서와 불확실, 부패와 혼돈으로 가득한 임의적인 공간으로 재현된다. 인간의 이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근대적 신뢰는 1차세계대전이후 붕괴되었고, 세계는 합리성이 아닌 임의성에 의해 지배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전지적이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탐정에 의한 범죄의 논리적인 해결이라는 고전추리소설의 편리한 공식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세계에는 적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공인된 창시자”(Haycraft 168)인 해미트(Dashiell Hammett)의 소설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전범을 확립한 챈들러(Raymond Chandler)의 말로우(Philip arlowe) 연작을 중심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범죄, 계급, 젠더, 경제, 노동 담론의 작동방식에 대해 고찰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시도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범죄, 계급, 남성성 담론에 대한 검토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고전추리소설의 저급한 아류가 아니라, 고전추리소설의 보수적인 담론형성체계에 균열을 일으켰던 전복적인 수정추리소설이었다는 재평가로 귀결될 것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등장한 시기는 자본가계급이 공권력과 결탁해 노동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하던 “미국 자본주의의 식인풍습”(Cochran 40)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또한 이 시기는 “움직이는 조립라인에 근거한 노동양식”(Jessop253)인 포드주의(Fordism)의 도입으로 인해 노동자의 자율성이 급속히 위축되던 때이기도 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노동자계급의 좌절과 분노를 이전의 고전추리소설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범죄와 탐정에 대한 재현을 통해 반영한다.
고전추리소설에서는 많은 경우 범죄가 계급적 지배규범에서 벗어난 위반행위로 규정되고, 탐정이 범죄자를 제거함으로써 계급적 질서가 회복되는 것으로 재현된다. 상류계급 출신 탐정이 하류계급 출신 범죄자를 체포한다는 고전추리소설에서의 일반적인 설정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고전추리소설은 지배계급의 규범을 거스른 자는 체포되어 처벌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지배체제를 안정시킨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도 범죄성은 계급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범죄성을 구현하며,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은 범죄의 피해자로 재현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법률과 법률의 대리기구인 경찰마저도 사회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지배계급을 보호하거나 그들과 결탁하는 것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계급적 전복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에 의해 개별 범죄가 해결되거나 특정 범죄자가 체포되어도 질서는 회복되지 않는다. 개별 탐정의 분투에 의해 해결되기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범죄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구조화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처럼 “세상의 도덕적 확실성을 회복시키는 . . . 전지적이고 편재적인 omnipresent)” (Haltunnen 132) 영웅으로는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정의와 질서의 회복과 같은 고결한 명분을 위해 헌신하는 영웅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범죄를 수사하는 직업인이나, 의뢰된 사건의 해결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사업가로 재현될 뿐이다.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이 합리적 사유와 과학적 분석을 통해 범죄를 해결하는 지적이고 귀족적인 남성으로 재현된다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무식과 뚝심, 야수적인 민첩성, 육체적인 힘, 폭력적 기세”(Belton 195)에 의존해 범죄를 수사하는 거친 사내로 재현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거칠고 폭력적인 남성성은 많은 경우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해 남성의 헤게모니가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문학적 응전으로 해석된다.2 그러나 이 글에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폭력적인 남성성은 노동계급이라는 특정계급의 남성성에 국한된 것으로 간주되고, 노동계급 남성성에 대한 강조는 노동계급 남성의 위기감과 좌절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징후로 해석될 것이다. 이 글은 폭력과 섹스를 통해 대중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저급한 통속소설로 분류된 이후 본격적인 문학연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3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인 동시에, 계급과 남성성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연구의 핵심적 의제로 설정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펄프픽션”은 1920년에서 1955년 사이에 값싼 펄프 종이에 인쇄되어 간행되던 대중소설을 지칭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1920년대 초반『블랙 마스크』(Black Mask)를 통해 최초로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펄프잡지였던『블랙 마스크』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지로 대중의 흥미를 자극했고 잡지의 상당부분을 광고로 채웠다. 태생적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폭력과 섹스를 통해 판매부수를 늘려 광고효과를 극대화 시키려는, 저급한 잡지에 실린 부도덕한 싸구려 소설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Lee Server, Danger Is My Business: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Fabulous Pulp Magazines (San Francisco: Chronicle, 1993)를 참조할 것. 2제니퍼와 닐랜드(Fay Jennifer and Justus Nieland)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거친 남성성이 남성들의 참전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기위해 동원된 여성들이 종전 이후에도 전통적인 여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적 성취 욕구를 드러내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구성된 것으로 본다(148).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야수적인 남성탐정을 “공격적이고 독립적인 여성”(130)에 대항하기 위해 창조된 인물로 간주한 호슬리(Lee Horsley)와 “여성권력에 대한 두려움”(5)으로 해석한 그로스만(Julie Grossman) 역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자이다. 그러나 오클리(Ronald Oakley)의 지적처럼 직장에서 일하는 미국 여성의 숫자가 본격적으로 증가한 것은 2차 대전 이후(298)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거친 남성성이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본격화된 노동의 통제와 관리로 위기에 처한 노동계급의 남성성을 수호하기 위해 구성된 것으로 볼 것이다. 3이러한 상황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각색한 느와르 영화(Film Noir)가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이론가들에 의해 새롭게 발견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느와르 영화의 재발견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촉진시키는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연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정전 작가의 소설에 나타난 하드보일드적인 스타일에 관해 언급하는데 머무는 양상을 보인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텍스트에서 발견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스타일에 관해 검토한 깁슨(Walker Gibson)의『거친, 달콤한, 딱딱한』(Tough, Sweet, and Stuffy)과 시몬즈(Julian Symons)의『피투성이 살인』(Bloody Murder), 워폴(Ken Worpole)의『부두 노동자와 탐정』(Dockers and Detectives)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진행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연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설의 영화적 수용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말링(William Marling)이 시도한 해미트와 챈들러와 같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가에 대한 논의는 그 대표적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텍스트를 단독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소설의 영화화 과정과 영상물에 대한 논의에 더 비중을 두는 양상을 보인다. 2000년대에 들어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연구에서 느와르 영화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향은 더 심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필립스(Gene D. Phillips)는 챈들러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문학적 평가보다는, 챈들러의 원작을 영화화하거나 그가 시나리오 작가로 함께 했던 와일더(Billy Wilder)나 히치콕(Alfred Hitchcock) 같은 영화감독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챈들러에 대해 평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대한 느와르 영화연구의 영향력은 변화된 장르명칭을 통해서도 확인된다고 할 수 있다. 말링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대신에 “미국 느와르 소설”(American roman noir)(ix)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호슬리(Lee Horsley)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느와르 범죄소설”(noir crime fiction)(6), “문학적 느와르”(literary noir)(6), “느와르 서사”(noir narrative)(11), “느와르 스릴러”(noir thriller)(12) 등으로 호칭한 것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범죄성을 계급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 범죄에 대한 전복적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범죄는 지배계급이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규정된다. 자본가는 자본의 증식만을 목표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노동자를 착취하는“일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Chandler,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자본가계급을 흡혈귀적인 존재로 재현함으로써 이들 계급의 수탈적이고 기생적인 삶의 방식을 우의적으로 폭로한다.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의 노동력과 생명력을 빨아먹으면서 생존하는 흡혈귀와 같은 존재로 재현된 대표적인 경우로는 챈들러의 『깊은 잠』(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법과 권력은 사회구성원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자본가와 결탁하여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을 탄압하는 정의롭지 못한 지배기구로 재현된다.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가 기댈 수 있는 정의로운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복적 시각은 “최초의 장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Porter 176)인 『피의 수확』(
자본가계급과의 유착을 통한 공적 권력기구의 범죄 집단화로 인해 야기되는 법률과 공권력에 대한 적개심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보편적인 정서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누이동생』(
합법적인 조직과 비합법적인 조직, 공적인 법률의 대행자와 조직범죄단의 구성원 모두를 타락한 범죄자로 동일하게 규정하고 양자 모두를 제거해버리는 『피의 수확』의 결말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범죄관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정화되지 않는다. 범죄 집단의 조직원들과 부패한 공무원이 제거된 퍼슨빌시는 이제 기업주윌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종결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세계에서는 범죄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위반이나 일시적 탈선이 아닌 계급구조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 개별 범죄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순전한 근육과 돈의 정부”(Slotkin 99)인 자본가계급의 지배체제는 동요하거나 붕괴하지 않는다.
III. 영웅에서 사업가로―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탐정 재현
범죄에 대한 계급적 재현을 통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드러내는 고전추리소설과의 차별성은 탐정의 재현방식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고전추리소설에서 탐정이 취미나 지적인 게임의 일환으로 범죄 수사에 참가하는 것으로 설정된다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은 범죄수사라는 위험한 직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로 재현된다. 이러한 탐정 재현양상의 급격한 변모는 범죄를 인식하는 방식의 근원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범죄가 개인의 해결범위 밖에 위치한다고 인식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세계에서는 탐정이 특정 범죄자를 체포한다고 해도 공동선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은 사회질서를 복원시키는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범죄를 수사하는 “보잘것없고 얄팍한”((MacShane 70) 직업인으로 왜소화되어 재현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은 “돈도 없고 . . . 전망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Chandler,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챈들러는 「살인이라는 단순한 기술」(“The Simple Art of Murder”)에서 고전추리소설은 탐정을 “불가능할 정도로 세련됨과 우아함을 지닌”(232) 인물로 재현했다고 비판한다. 챈들러는 냉소적인 어조로 자신이 창조한 탐정 말로우는 고전추리소설의 탐정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말 정도의 사회적 양심을 가지고 있는”(
해미트가 창조한 스페이드(Sam Spade)는 고전추리소설과는 극단에 위치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탐정 재현방식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 여부만을 수사의 기준으로 삼고, 오직 그 기준에 의해 행동함으로써 “비정하면서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
귀족적인 기품과 숭고한 도덕성을 소유한 영웅으로 재현되는 고전 추리소설의 탐정과는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냉소적인 노동자나 비정한 사업가로 재현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범죄는 사회구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탐정의 개인적 헌신과 희생으로도 범죄의 근원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이 “멈춤과 진행을 알려주는 표지판 정도의 도덕적 고매함을 지닌”((MacShane 70) 존재로 축소되고 왜소화된 것은 그 좌절감과 무력감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토도로프(Tzvetan Todorov)는 『산문의 시학』(
1920년대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노동의 재구성은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대로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와 인간을 창조하려는 가장 거대한 집단적인 노력”(302)으로 기록된다. 노동계급 남성에게는 오랜 기간 그들의 계급적 정체성을 형성했던 외향성, 적극성, 공격성 대신에 수동성, 유연성, 순종성 등이 강요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이 “무산계급 출신의 거친 사내” (Belton 194)로 재현된 것은 노동계급 남성의 야성을 제거하려는 “가장 거대한 집단적인 노력”에 맞서 노동계급의 전통적인 남성성을 수호하려는 문학적 시도로 볼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탐정의 재현을 통해 폭력성외에도 자율성과 독립성을 남성성의 주요 덕목으로 규정한다.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이 체제의 수호자로 재현된 것과는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체제에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단독자로 재현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이 많은 경우 수직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지닌 경찰 조직에서 이탈한 전직 경찰로 설정된 것은 이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특정 단체나 조직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사건의뢰를 수락하거나 거절하며, 자신의 독립적인 행동규범에 입각해 범죄를 수사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개발도상국가 미국』(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은 관찰이나 측정과 같은 정교한 수사방식을 통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범죄에 접근한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증거를 수집하고 관찰을 통해 범죄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별다른 신뢰를 갖지 않는다. 고전추리소설의 대표적 탐정인 셜록 홈즈가 114가지의 담뱃재 형태에 관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 윌리엄스(Race Williams)는 “내게 있어 타버린 담뱃재는 누군가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Daly 24)라고 단언한다. 대신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육체를 사용해 범죄와 관련된 대상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피의 수확』에서 오프는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도 괜찮다. 만일 당신이 살아남기에 충분할 정도로 거칠다면. 눈을 계속 크게 뜨고 있다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맨 위에 떠오르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85)라고 진술한다. 그의 진술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수행하는 범죄수사 방식을 잘 요약한다. 스페이드 역시 “거칠게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패너를 기계 안에 집어던지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터프함에 대한 찬양”(Nolan 7)은 탐정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거친 언어와 폭력의 정당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고전추리소설의 탐정이 사용하던 예의바르고 지적이며 문법적으로 정확한 언어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여성적인”(Chandler,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은 독립적인 행동규범을 지닌 단독자로 재현됨으로써 자율적인 남성성을 부각시킨다. 자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모든 형태의 권위와 압력에 저항하는 “자족적이고 자신감 가득한, 통제할 수 없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독립적인 남성성의 수호는 여성의 유혹에 대해 탐정이 실천하는 자기통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탐정은 자신의 독자적인 직업윤리를 지키기 위해 성적인 유혹을 거부하는데, 『깊은 잠』에서 말로우가 실행하는 자기억제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의뢰인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말로우는 자매인 비비안(Vivian Sternwood)과 카르멘의 계속 되는 유혹을 물리친다. 말로우는 비비안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하고 자라고 내게 돈을 주지 않았소. . . 나는 일을 하오. 나는 노는 게 아니오”(141)라고 말한다. 그는 카르멘에게도 “이것은 직업적 자부심의 문제요. 직업적 자부심 말이오.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 일하오. . . 그는 내가 딴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 같소”(146)라고 말한 후 그녀를 자기 방에서 쫓아낸다.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채택한 화자시점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홈즈가 아니라 왓슨(Watson)이 화자로 등장하는 셜록 홈즈 연작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이, 고전추리소설에서는 대개의 경우 탐정 본인이 아니라 주변 인물이 화자가 되어 서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탐정 자신이 화자가 되어 직접 사건을 서술할 뿐, 범죄와 의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탐정의 활약을 기록하고 찬미하는 다른 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의 수확』은 “내가 최초로 퍼슨빌(Personville)이 포이즌빌(Poisonville)로 불리는 것을 들은 것은”(3)이라는 오프의 서술로 시작해서 “나는 상사로부터 혼이 났다”(216)는 본인의 말로 끝을 맺는다. 『깊은 잠』역시 말로우가 자신의 의상을 묘사하는, “나는 진한 푸른색 셔츠와 타이에 손수건이 꽃인 담청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검정구두와 진한 푸른색 수가 놓인 검정색 모직양말을 신고 있었다”(3)는 서술로 시작해서 “나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231)는 말로우 본인의 목소리로 종결된다. 탐정이 화자가 되어 그의 시점에서 서사를 전개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서술방식은 탐정의 독립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고전추리소설에서의 체제 지향적이고 귀족적인 남성성을 거칠고 독립적인 노동계급의 남성성으로 대체한 것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고전추리소설과의 차별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재현을 통해 부각되는 폭력적이고 자율적인 남성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통제되고 표준화된 노동으로 훼손되고 위축된 노동계급의 남성성을 수호하기위해 구성되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의 거칠고 독립적인 남성성에 대한 강조는 독점자본주의체제하에서 노동계급 남성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민주주의의 불만』(Democracy’s Discontent)에서 샌델(Michael Sandel)은 “인민간의 계약으로부터 관리로”(118)라는 미국사회의 대전환이 일어난 시기가 양차대전 사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사회에서 발생한 정치적 부패와 타락, 조직범죄의 증가, 독점자본주의의 등장과 노동통제의 강화로 인해 세계는 합리적 이성에 의해 해석되고 예측될 수 있다는 고전추리소설의 인식론은 효력을 상실했다. 세계는 단지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계급적, 법률적, 정치적 권위와 정당성은 사라졌다고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전환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재현은 세계관의 변화를 반영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돌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 범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수사에서의 주도권과 독립성을 쟁취하기위해 치열하게 경합한다. 하지만 과학적 합리성으로 범죄와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고전추리소설의 탐정과는 달리 이들은 범죄의 근원에 도달하는데 실패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탐정은 “어두운 방안에서 그곳에 없는 검정색 모자를 찾는 맹인”(Hammett, “The Black Hat That Wasn’t There” 140)처럼 수사의 통제력과 방향성을 상실한 무력한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급격한 전환은 사회질서와 정의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결말을 통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탐정의 개입에 의해 혼란과 불의로부터 질서와 정의로의 이행으로 서사가 종결되는 고전추리소설과는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의 분투에 의해 개별 범죄가 해결된 경우라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아니라, 다가올 더 거대한 불의와 혼돈에 대한 불안으로 서사가 종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오프가 의뢰받은 사건을 해결한 후에도 승리감을 맛보지 못하는 『피의 수확』의 결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퍼슨빌시가 다시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가시 없는 장미정원”(190)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프는 여기에 대해 극도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모든 것이 좋아지고, 깨끗해진” 도시가 오프에게는 “다시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203) 곳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세계에는 범죄의 해결을 통한 사회적 통합과 화해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범죄성의 근원에 가닿기에는 극도로 무력한 존재가 되었고, 노동의 자율성은 수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이제 회복해야할 사회적, 정치적, 계급적 이상과 질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음울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