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voyage américain de Baudrillard est la pratique critique qui implique la pensée et la théorie philosophiques. Baudrillard a essayé de trouver des objets visionnaires et miraculeux en Amérique au delà de la théorie. Pour lui, l’Amérique est la lumière et la modernité en état pur. L’Amérique n’est ni un rêve, ni une réalité, c’est une hyperréalité parce que c’est une utopie qui dès le début s’est vécue comme réalisée. Certainement la conception du projet de Baudrillard connecte son écriture à la large trajectoire d’analyse des formes des objets. Il est peut-être intéressant de découvrir le fait que le projet du voyage américain de Baudrillard consiste à écrire ce travail. Pour Baudrillard, “le travail part de la certitude que tout est déjà là, et qu’il suffit d’en trouver la clef.” Car cela n’indique pas une forme d’écriture mais un problème. Evidemment, l’écriture et la cartographie d’Amérique de Baudrillard ne seraient pas facile. Il y a des matériaux suffisants, mais il est aussi nécessaire de trouver une clef. Cela suggère au moins une mode possible de la lecture d’Amérique. C’est-à-dire la lecture d’Amérique doit être faite non symptomatiquement, mais comme un miroir de la pensée et de l’écriture de Baudrillard. Baudrillard a tenté la critique ironique plutôt que la profondeur et l’analyse dialectique dans Amérique. Il a offert une perspective qui recherche l’Amérique comme la modernité extrêmement développée ou l’hypermodernité, puis il a analysé les phénomènes sociaux américains et cartographié la critique culturelle américaine. Sa critique culturelle américaine peut être valorisée par rapport à une contribution sur la théorisation des phénomènes sociaux américains, ou critiquée par rapport à une mesure de mystification et de déformation de la réalité sociale américaine. En un sens, même la théorie paradoxale et ironique de Baudrillard est une forme de perspective théorique et de cartographie. On doit remarquer que Baudrillard lie son discours théorique à une nouvelle sorte de discours par ses observations et ses critiques. Donc, il est nécessaire de maintenir une attitude qui lit critiquement Amérique plein d’ironie, et qui pense philosophiquement à sa cartographie américaine.
1980년대 이후의 보드리야르는 새로운 사유 방식의 한 예로서 숙명적 이론을 제창한다. 이는 흔히 보드리야르의 형이상학적 전환이라고 불린다. 이 전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보드리야르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인식론적으로 냉소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졌으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에 기울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오늘날의 사회이론과 문화이론에 중요한 도전과 기여를 한다는 평가도 있다.
보드리야르의 가장 악명 높은 책 『아메리카
끊임없이 현대성을 탐구하는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미국의 풍경을 냉정하고 아이러니컬하게 조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아메리카, 곧 미국은 현대성 속에서 태어난 사회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초현대성(hypermodernité)이며, 따라서 그 밖의 세계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날의 미국을 미래의 기호풍경(signscape), 즉 유럽과 다른 모든 곳의 미래가 될 하나의 초과실재(hyperréalité)로 이해한다.
『아메리카』에 실린 보드리야르의 짧은 글들은 그가 기호에 지속적으로 매료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을 기호의 성좌로, ‘별의 아메리카’로 해독한다. 말하자면 그는 미국의 복합성과 모순을 ‘기호들의 유희’ 혹은 ‘기호들의 순환’으로 파악한다. 기호에 의한 이러한 전망은 『아메리카』의 어디에서나 드러나며, 보드리야르는 “미국이 전체에 관한 정보가 그 요소들에 포함되어 있는 거대한 홀로그램”1)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리에 의거하여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론적 대상에 대한 일반화를 수행한다. 그에게 미국은 “현재에 존재하는 유일한 원시사회”2)이고 ‘실현된 유토피아’이며 문화적 사막이다. 그는 미국을 해석하는 핵심적 은유로 사막을 이용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사회는 무의미의 사막으로 특징지어지며, 그의 미국여행은 의미의 미묘한 증발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눈에 비친 아메리카는 의미나 가치가 결여된 순수 기호의 유희인 한 나라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보드리야르가 미국을 사막‧빈 공간‧무의미로 기호학적 환원을 수행하는 것은 도시보다 사막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속도와 자동차 운전을 사물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적 선택의 결과이다.3) 자동차로 미국을 질주하는 것은 순수한 속도와 순수한 여행과 무관심 속에 지나가는 순수한 기호들의 의미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보드리야르의 미국여행은 대체로 사막과 풍경과 속도에 대한 그의 경험, 미국의 도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특징들에 대한 그의 경험을 반영한다. 특히 미국의 사막은 우리 미래의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는 풍경으로 보드리야르를 매혹시킨다. 보드리야르에게 미국의 실현된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막의 기호와 이미지이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 보드리야르의 사유가 끝나는 곳은 ‘영원한 사막’이다. 사막은 미국자체, 그것의 풍경, 도시, 고속도로, (비)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의 형상으로 서 있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여행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의미‧깊이 등의 현대성의 중요한 준거체들을 발견한다. 이는 바로 탈현대의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다.
극단적으로 전개된 현대성 혹은 초현대성으로서의 미국4), 그리하여 탈현대의 세계가 된 미국사회는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철학적 사유로 이론화하는 시뮬라시옹 현상들을 나타내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아메리카를 범람하여 미국사회의 경계들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보드리야르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극단적으로 발전한 현대성을 탐색하고 조명한다. 즉 그는 아메리카를 종횡하면서 탈현대의 세계로 접어든 현대성의 실현을 발견한다. 그러나 탈현대의 미국사회에 대해, 그는 비판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시선을 던진다. 즉 극단으로 나아간 미국의 현대성에 대해, 그는 아이러니컬한 비판을 하면서도 찬미하고, 찬미하면서도 아이러니컬한 비판을 한다.
이 글에서는 형이상학적 사유세계를 구축하는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를 어떻게 읽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 즉 보드리야르가 미국여행을 통해 어떻게 미국문화를 비평하는지, 그의 이러한 미국문화비평이 미국의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실제로 보드리야르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메리카』읽기를 둘러싼 논의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보드리야르의 사유와 글쓰기와 관련하여 이 논란의 핵심 사항들을 다시 점검하고 정리해 볼 것이다. 이러한 검토와 분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미국은 “현대성의 원판이고 영속적인 시뮬라 시옹 속에서 그리고 기호들의 영속적인 현실성 속에서 살아간다”5)는 보드리야르의 견해에 주목하면서 그의 형이상학적 사유세계를 통찰하고 비판할 것이다.
1)Jean Baudrillard, Amérique, Grasset, 1986, p. 59. 2)같은 책, p. 21. 3)Douglas Kellner, Media Culture: Culture Studies, Identity and Politics between the Modern and the Postmodern, Routledge, 1995, p. 317 참조(약호 MC). 4)『아메리카』에서 현대성(modernité)이라는 용어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책에서 이 용어의 적용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에 따르면 이 용어는 변동이 있는 모호한 말이다. 그는 이 용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특히 보드리야르는 탈현대성(postmodernité)과 관련하여 현대성의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 그는 초정치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재를 환기시키기 위해 현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미국의 경우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초현대성(hypermodernité)이라는 말이 보다 정확할 수 있다고 말한다. (Jean Baudrillard Live, ‘America As Fiction’, edited by Mike Gane, Routledge, 1993, p. 133 참조.)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켈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탈현대성이라는 범주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미국을 현대성과 동일시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은 현대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재현했다. 그러므로 그가 미국에서 끊임없이 경험했던 ‘세계의 종말’은 현대성의 종말로 독해될 수 있고, 신세계의 여명은 새로운 탈현대성의 도래로 독해될 수 있다.”(MC, p. 318.) 이 글에서 우리는 보드리야르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탈현대적 세계로서의 미국을 분석할 것이다. 5)Amérique, p. 151.
『아메리카』는 보드리야르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혹은 그의 미국여행 후에 쓰여졌다. 그의 글쓰기는 미국여행을 연장시켰다. 그러면 『아메리카』를 쓰고자 했던 보드리야르의 욕망은 낡은 유럽에 대한 싫증 때문에 생긴 것인가? 그는 사르트르처럼 이 낡은 유럽과 절연하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미국의 사막에 빠지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인가? 설사 그가 자신의 여행이 유럽과 미국을 비교하려는 욕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의 『아메리카』는 유럽의 비판적 전통의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여행에 관한 생각들을 아메리카의 형이상학으로 이론화된 현대사회비평으로 나타낸다.
보드리야르의 미국여행은 그의 철학적 체계의 이해 없이는 거의 파악될 수 없다. 미국을 여행하기 전에, 그는 쉬운 범주화에 맞서는 혼란스럽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인상적인 사회적 모델을 생산했다. 이는 미디어 비평가, 사회학자, 기호학자 혹은 정치이론가의 작업이 될 수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때때로 광기나 재능과 결부되는 일종의 근거 없는 확신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는 미국을 자신의 이론으로 가득 채우려는 자기도취적 의도로 미국을 여행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사회를 연구하는 동시에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문화적 체계로서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상실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이론 외에는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역사‧미학‧정치‧문화의 종언을 선언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새로운 문화적 질서를 알리는 일이 맡겨졌다.
보드리야르는 문화는 기호와 이미지에 의한 시뮬라시옹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의사소통기술의 확장과 미디어의 현존과 더불어, 인간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기호와 이미지에만 반응하는데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자신의 논리를 확장하는 인간은 자기자신의 시뮬라 시옹이 되었으며, 실재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보거나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기호와 이미지이다. 따라서 문화와 역사는 깊이가 없고 표면만이 있을 뿐이다.
보드리야르에게 미국은 항상 미래의 모델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그 탄생 이후로 새로운 것을 넘어 그 자체를 확장해온 나라였다. 미국은 초역사적인 변화의 기이한 속도와 더불어 그 자체를 증식시키고 복제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은 보드리야르의 사유의 모든 것을 실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우리는 사물을 상상하고 사물을 분석하며, 사물에 대해 성찰하는 기예를 소유한다”6)고 보드리야르는 기술했다. 반면 미국에서 세련되고 끈기있는 모든 기술은 산업, 즉 기계화된 조립라인이 되었고,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되었다. 미국은 그 효과 속에서 전체를 고려하는 새로운 문화를 표명했다. 미국사회는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을 멈추고 기호와 이미지를 생산할 뿐이었다. 문화적 지배의 새로운 형태로서의 시뮬라시옹은 구세계의 종언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렸다. 보드리야르는 유럽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꿈들로부터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신은 신세계를 발견했던 세대들과 똑같은 순진한 열성을 지니고 아메리카를 바라보아야 한다.”7) 그에게 미국은 본래의 상태에서 손상되지 않은 순수한 민주주의적 문화모델이었다. 유럽의 ‘역사적 미묘함과 개념적 상상력’에 싫증이 난 보드리야르는 ‘가상의 공간과 정신’이 지배하는 어떤 나라의 유쾌한 자유를 열망했다. 그는 답답하고 진부한 대학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그들의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사막과 길 위에서 나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사상사로부터 그들의 자료를 끌어낼 때,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거리의 삶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나의 자료를 끌어낸다.”8)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재를 알고 있는 그는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아메리카를 여행했다.
보드리야르의 미국여행은 언제나 혼자 운전하고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미 예상되었듯이, 그는 인간들을 탐구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아메리카는 글자 그대로이고 비유적으로 황량했다. 그의 실제적인 주제는 풍경‧이미지‧형태였다. 어떻게 보면 아메리카를 아는 것은 사막을 아는 것이었다. 사막의 기복들은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좋은 생각을 제공해 준다”9)고 보드리야르는 기술했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기계 문명의 쇄도 이후, 인간의 문화는 원래의 상태에서 휠씬 더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메리카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광물의 표면’에 있는 시뮬라시옹화된 문화의 이미지이다. 문화에 대한 이전의 모든 개념들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된 듯하다. 문화의 어떤 의미심장한 개념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문화의 순수한 형태, 문화의 지질학적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보드리야르가 아메리카에서 어떤 민족지학적 충동을 느꼈든 간에 그것은 곧 형이상학적 사유가 되었다.10) 『아메리카』의 한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표명했다. “나는 사회적인 것의 미래의 파국을 지질학에서, 줄무늬 진 공간들, 소금과 돌의 부조들, 화석의 강이 흘러내리는 협곡들, 침식과 지질학으로서 존재하는 완만함의 태곳적 심연 등이 증언하는 그 깊이의 뒤집힘에서 찾으려고 했다.”11)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탐구는 사회와 역사의 표면 밑을, 자연의 유기적인 개념 밑을, 시간 속에서, 순수함의 본래의 상태 속에서 정지되고 결정(結晶)되고 보존된 문화의 광물적 형태 밑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의 견해로는, 미국문화는 다른 모든 문화적 형태가 가져온 형태, 즉 “현대세계의 가능한 모든 변이형들의 분석을 위한 이상적인 재료를 구성한다.”12)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문화는 직접적으로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자연을 정복하지도 않았고 자연에 의해 길들여지지도 않았다. 그들의 지배력과 힘은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바로 그들의 창조의 또 다른 것이었다. 보드리야르에게 미국여행은 무한한 환상을 통한 여행이었다. 미국 안에서는 산과 사막들은 가장 극단적인 실재(초과실재)였기 때문에 허구, 가장 극단적인 허구였다. 그곳에서 인간은 시뮬라시옹의 감각을 유지하는 한 자유롭게 떠돌게 된다. 미국의 자연은 지질학적으로 인간에 앞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호학적으로도 인간에 앞서 존재한다. 오히려 그것은 지질학적으로 생성된 기호 체계에 가깝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그랜드캐니언을 묘사한 것인데, 여기에는 유럽의 전형적인 풍경과는 전혀 다른 미국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말하자면 유럽의 낭만적인 장엄함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풍경의 기념비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은 거대한 규모로 구성되고 일련의 의미와 기호 체계를 이루는 반면, 인간은 그러한 체계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메리카』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제시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장엄한 풍경을 해석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비판한다. 그의 논의에서 자연은 이미 문화이며, 문화는 다른 의미작용 체계를 고려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오늘날 자연은 문화적 혹은 기술적 목적을 위해 도구적으로 조작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산업화와 도시화의 계획들이 과거와 완전히 절연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함에 따라, 자연은 이러한 계획의 이면에 혹은 이러한 계획에 압도당한 채 존속하고 있다. 가령 사막은 빈방 안에 놓인 텔레비전 세트와 같아서 누구도 사막의 중요한 기호들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사막은 도시와 문화와 반대되는 자연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은 시뮬라시옹이 문화적 신기루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 문화적 신기루는 결국에는 사막만을 남겨두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막은 탈현대적 미국문화에 널리 스며든 배경이자 과거와 미래를 인식하는 관점,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이다.”14)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이 사막은 무한하고 무수한 문화적 공식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공식들이 사라지더라도, 사막은 여전히 물리적으로 그 자리에 현전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탈현대적 도시들은 사막에 비유될 수 있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도시 공간을 재창조하고 또 어디론가 계속해서 이동한다. 이러한 모습은 모래가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며 사막의 지질학적 형태를 계속해서 지우고 변형시키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도시들은 또한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반면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잠재적인 기호체계가 됨으로써 사막은 욕망을 선행한다. 여전히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비판할 때조차, 보드리야르에게 “사막은 문화에 대한 황홀경적 비판, 사라짐의 황홀경적 형태”15)일 뿐이다. 실제로 보드리야르에게 미국문화의 매력은 정확히 말해서 미국문화 밑에 있는 것 속에 있다. 땅에는 너무도 많은 상징이 있고, 숲에는 너무도 많은 암시가 있으며, 대기에는 너무도 많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미국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모델을 발견하면서 미국의 새로운 문화형태에 반응했다. 그는 인간문화의 탐구에서부터 광물적 상태 속에서의 순화된 문화형태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어떤 시적 감수성을 지니고 미국문화를 재해석했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탐구는 미국문화를 통한 자신의 탈현대적 여행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자동차 스크린‧백미러를 통해 보여지듯이 미국문화의 섬광을 통해 미국사회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행자로서 자동차 스크린을 읽는 것은 텔레비전 스크린의 경험처럼 여행의 시각적 경험이다. 어떻게 보면 풍경을 통해 여행하는 것은 깊이 없음을 초래한다. 자동차 스크린을 통해 읽는 것은 일련의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자 초과실재를 통한 초연하고 냉소적인 여행이다.16) 『아메리카』는 미국사회를 대충 훑어보고 풍경을 통해 여행하는 경험, 문화를 즐기는 여행자의 경험을 보여준다. 보드리야르의 응시는 냉소적이고 초연하고 재치있는 듯하다. 이는 학식의 부담을 피하는 응시이다. “문제는 자동차의 사회학이나 심리학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모든 학문들을 다 모은 것보다 사회에 관해 더 잘 알도록 운전을 하는 것이다.”17)
이러한 응시의 결과는 어떤 광휘를 드러낸다. 보드리야르는 ‘감정적 여행’의 유형으로 사회적 허구의 생산을 통해 이 탈현대적 경험을 획득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때때로 그의 이론의 결여, 진지함의 결여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스크린 이미지를 통해 아메리카를 탐색하는 보드리야르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장소와 은유로서의 사막의 이미지는 특히 도시적 미국의 이미지만큼 강렬하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글쓰기 자체는 자신이 기술하고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석하고 해부하는 세계를 반영한다. 보드리야르의 형이상학은 아메리카의 꿈을 규명하거나 아메리카의 꿈과 부합됨으로써 이론과 현실의 갈라진 틈을 메운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보드리야르는 비범한 작가이다. 『아메리카』의 문체와 반사성(réflexibilité)과 작가적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아메리카』를 읽는 것은 어렵다. 그러면 보드리야르의 상상력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 문체와 형식이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내용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문체의 형태와 문체에 대한 자의식은 무엇보다 「별의 아메리카」의 상상력에서 두드러진다. “별의 아메리카. 순수 순환의 서정성(⋯) 성운. 자동차의 수평적인 그것, 비행기 고도의 그것, 사막들의 지질학적인 그것.”18) 둘째, 메시지는 의미의 점증적인 확장에 의해 구축된다. “식욕부진의 문화: 메스꺼움의, 배설의, 인간의 토해냄의, 거절의 문화.”19) 셋째, 보드리야르는 과장법에 의해, 다시 말해서 과장에 의해 목적을 실현하는 초과실재와 동등한 것에 의해 자신의 효과를 실현한다. 그의 과장법은 충격을 주기 위해 사용되지만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성의 모든 신화는 미국적이다.’ ‘아메리카 전체는 하나의 사막이다.’
따라서 『아메리카』는 어떤 연속성 속에서 읽혀져서는 안된다. 독자는 논증이나 논거제시에 신경쓰지 않고 이 책을 통해 여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 문장이나 절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각 문장이나 절의 구성단위는 때로는 의미심장하다. 문체와 재치 있는 말을 즐기고, 위트를 찬탄하고, 그의 상상적 여행의 전체적 양상을 즐기거나 터무니없는 은유에 놀라면서 그의 글쓰기를 통해 여행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은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논의를 읽어내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텔레비전 스크린을 보는 것과 자동차 스크린을 통해 풍경을 보는 것 사이의 유사성을 읽어낼 수 있다. ‘별의 아메리카’의 스펙터클은 “자동차 전용도로 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크라이슬러 스테레오의 진공관이 꽝꽝 울리고, 열기가 파도치는”20) 뜨거운 풍경 속에서 여행의 물리적 경험에 의해 마법적으로 만들어진다. 보드리야르의 화려한 문장들은 미국의 상업적 담론의 간단하고 명료한 말과 유사한 듯하다. 그것들은 자동차 스크린을 스쳐 지나가는 광고판처럼 오히려 스크린을 스치는 의미의 항목들이다. 그리고 의미는 소화할 수 있는 큰 덩어리 속에서 해체된다. 이렇게 보드리야르의 탈현대적 미국여행을 읽어내는 것은 『아메리카』의 표현형식과 명백한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이 책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같은 책, p. 50. 7)같은 책, p. 196. 8)같은 책, p. 125. 9)같은 책, p. 14. 10)Dima Cioran, The Ethnographer as Geologist: Tocqueville, Lévi-Strauss, Baudrillard and the American Dilemma, Jean Baudrillard(3), edited by Mike Gane, Sage, 2000, p. 31 참조. 11)Amérique, pp. 16-17. 12)같은 책, p. 58. 13)같은 책, p. 13. 14)Richard J. Lane, Jean Baudrillard, Routledge, 2000, p. 115. 15)Amérique, p. 18. 16)Bryan S. Turner, Cruising America, Jean Baudrillard(3), edited by Mike Gane, Sage, 2000, p. 90 참조. 17)Amérique, p. 108. 18)같은 책, p. 55. 19)같은 책, pp. 78-79. 20)같은 책, p. 9.
『아메리카』는 보드리야르의 형이상학적 상상계가 투영된 현대성 비판의 기행문 형식의 에세이다. 이 책에서 보드리야르는 현대성의 발전된 단계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확립되는 복잡한 인식론에 상당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새로운 사물의 형태들인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 이론을 넘어서 환상적인 사물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요컨대 그는 미국여행을 통해서 미국의 특이한 것을 발견하려고 한다.21)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의 출발점은 『아메리카』의 시작하는 글 「소실점」이다. 「소실점」의 첫 구절은 경고로 시작된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22)이 첫 구절에 담긴 함의는 미국여행의 두 가지 핵심적 요소들을 나타낸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쓰여진 기호를 보드리야르가 전유하는 것은 문화적 분석에 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한다. 이 함축적인 공식적 표명을 수반하는 메시지 자체는 그의 여행의 이유로 해독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사물의 특성이 가장 스펙터클하게 실현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아메리카, 곧 미국은 서구 세계가 그 자체를 향해 가속하고 있는 미래를 응시하고 지켜볼 수 있는 거울로서 제시된다. 미국의 도시들, 특히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학적 접근의 의도에 따라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허용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은 오히려 세계의 패러다임적 지리와 그 공간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 공간 안에서 보드리야르가 다른 곳에서 계획한 모델의 특성들이 가장 순수한 형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여기서 풍경은 사진처럼 존재하고, 사건은 텔레비전처럼 존재한다. “아메리카는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초과실재(hyperréalité)이다.”23) 따라서 아메리카에서 완벽한 시뮬라크르, 즉 모든 가치들이 내재하고 물질적으로 전사되는 시뮬라크르가 발견된다.
보드리야르에게 아메리카, 곧 미국은 현대성 속에서 태어난 진정한 탈현대 사회이다. 그는 미국여행을 통해서 미국의 탈현대적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인 것‧정치적인 것‧의미‧깊이‧진리 등의 현대성의 중요한 준거체들을 목격한다. 이는 바로 탈현대의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이 “사라짐의 특권적 장소 뿐만 아니라 현대성의 다양한 도상들의 소실점을 보게 된다.”24) 그리하여 그는 아메리카의 형이상학으로 이론화된 탈현대 사회의 문화비평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따라서 미국문화비평에 대한 그의 지도 그리기는 탈문화화 속에서 미국문화의 파국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미국여행을 통해 시뮬라시옹의 현단계에 적합한 획기적인 진전을 발견하며 “지질학에서 사회적인 것의 미래의 파국”25)을 찾아내는데 전념한다. 그러므로 그가 아메리카 공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이전에 알려진 모든 것을 없앨 수 있을, 다가올 것들의 형태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미국여행은 대체로 사막과 풍경과 속도에 대한 그의 경험, 미국의 도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특징들에 대한 그의 경험을 반영한다. 보드리야르가 느끼는 미국여행의 시뮬라시옹은 ‘속도의 형이상학’, 오늘날 미국의 사막과 생활과 관련이 있다. “내가 자유로워졌을 때, 나는 사막으로 떠났다. 나에게 사막은 진정한 무대였다”26)라고 보드리야르는 말한다. 이렇게 보드리야르의 미국여행은 뉴멕시코의 뾰족뽀족한 산맥과 텍사스주 언덕을 넘고 사막을 가로질러 속도를 내면서 시작된다. 라스베이거스와 솔트레이크 시티 사이의 어딘가에, 말하자면 자기도취적 탐닉과 청교도적 억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보드리야르는 사막의 지질학적 기념비성과 마법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스펙터클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에 선행하는 기호들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27) 풍경의 힘의 근원은 그 기호들이 “의미없고 자의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사람들이 그 기호들을 해독하지 않은 채 가로지른다”28)는 사실에 있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적인 것의 부정과 사라짐의 이상적 도식을 위한 패러다임으로서 사막을 제시한다. “사막은 모든 사회성, 모든 감상성, 모든 성적인 것을 멀리 물리치는 숭고한 형태이다.”29) 아메리카를 질주하면서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사라짐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하는 그의 시각에서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막과 같은 아우라, 말하자면 현실의 삶의 모든 흔적이 사후효과로서의 죽은 이미지만을 남겨놓은 채 사라져버리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쨌든 보드리야르는 사막과 원시성을 아메리카를 이해하는 일차적인 범주로 선택하고 있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상상계를 통해 미국을 설명하는 그는 이미 『숙명적 전략
보드리야르에게 사막은 의미의 죽음을 탐색하는 선도자 같은 존재인 듯하다. 사막은 일종의 무한한 전망이며 자연상태보다는 오히려 헐벗음의 극단적 형태이다. “사막은 반문화의 가장 극단적 형태이다. 그것은 문화의 모든 상부구조를 쓸어내는 한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초공간, 사물과 의미의 완전부재, 정신적인 지질구조이다.”31) 그것은 속도, 자동차, 열기, 피상적이고 물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방사에 의한 율동적인 사막이다. 이 실험적인 장(場)은 보드리야르에게 ‘극단적 무관심’에 이르게 했다. 말하자면 보드리야르의 눈에는, 사막은 사물의 무관심이 지배하는, 그리고 인간 ‘주체’가 낯선 침입자에 불과한 풍경을 드러낸다. “사막: 냉혹한 지성의, 극단적 무관심의, 화석으로 된 빛나는 그물망. 그것은 하늘의 무관심일 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물결의 무관심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공간과 시간의 형이상학적 열정만이 결정화(結晶化)되어 있을 뿐이다.”32) 이렇게 미국의 사막이 보드리야르를 매혹시키는 것은 사막의 무관심과 건조함과 침묵이다. 사막의 건조함은 유럽의 점액질의 문명화된 기질과는 반대되는 것이고, 사막의 침묵은 공허를 방사하는데, 이 공허는 그 속에서 우리 미래의 기호들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파국의 가능성을 목격하는 있는 화석화된 풍경에 특유한 것이다.33) 어떻게 보면 사막은 하나의 함정, 즉 공간의 함정, 가상(apparence)의 함정이다. 정신의 모든 가치들과 범주들은 이 함정에 빠져들며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사막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의 추상의 결과로 생긴 순수 형태이다.”34)
의외로 보드리야르는 자신이 관찰하는 원시적인 풍경들에는, 즉 데스밸리와 텍사스주 언덕들에는 이미 무수한 미디어 재현을 통해 사회적 의미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반면에 사막의 태양 속에서 모든 것은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고 보드리야르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속도는 자동차의 운전방식을 재현한다. 자동차의 운전은 깊이로서의 시간의 순간적인 경험, 역사를 넘어 풍경의 경험을 용이하게 한다. “자동차로 달리는 것은 스펙터클한 형태의 기억상실”35)이 된다. 더 이상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사라짐의 미학’과 ‘의미의 증발’이 존재한다. 보드리야르의 자동차 운전은 침묵‧부재‧사라짐‧순수함이 불확실한 것처럼 불연속적인 의미를 지닌 어휘들에 의해 연료를 얻게 된다. 물론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 속에서 이들의 정확한 의미를 조사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이데올로기적 공상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인데, 『아메리카』는 이 이데올로기적 공상의 사라짐에 할애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보드리야르의 서정적 반복은 마치 자신이 아메리카의 신화적 표면들(사막‧도시‧공간‧속도‧이동 등)을 즐기면서 스스로 만족하듯이 감정적 경험을 위해 때때로 분석적 깊이를 포기하는 듯하다.
보드리야르가 도시를 향해 사막을 떠날 때, 미국의 도시 공간들은 ‘사회적인 것의 미래의 파국의 완성된 형태’로서, 그리고 신화적 사막의 재현으로서 해석될 뿐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이 도시를 둘러싸는 사막과 구별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로스앤젤레스는 사막의 부재를 반영한다. 도시는 모든 인간적 의미의 전멸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지도그려진다.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는 후기자본주의의 위기가 잊혀질 수 있는 장소들(어바인‧뉴실리콘 밸리‧소크 생물학 연구소‧대학 캠퍼스‧보나벤처 호텔‧디즈니랜드)에 특권을 부여한다. 보드리야르의 간단하고 명료한 말-‘산다는 것이 너무 용이하다’-은 자본주의적 지리의 한계를 잊어버림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지리의 한계란 로스앤젤레스의 하층계급이 점유하는 공간, 착취공장산업의 현장, 경찰과 집단폭력, 마약문제와 붕괴하는 하부구조 등을 뜻한다.
보드리야르가 뉴욕에 도착할 때 하이퍼리얼한 탈산업적 지리의 이면을 반향하는 어떤 기억들의 암시는 거의 없었다. 보드리야르는 미국 도시가 직면하는 위기들을 계속 잊어버린다. 뉴욕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금융센터의 하나로 남으며 강력한 미디어회사의 본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눈에는 뉴욕의 핵심은 부패한 듯하다. 뉴욕은 전통적으로 제3세계와 결부된 야비함과 탈취의 무대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부구조를 악화시키는 불법거주자 캠프‧ 집없음‧실업 등이 눈에 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리야르가 무시해버리는 것은 바로 도시의 이러한 양상들이다. 뉴욕은 ‘세계의 중심’, ‘완전한 전기불빛’의 장소로서 묘사된다. 보드리야르는 거리를 산책하며 그를 둘러싸는 무대와 기호들을 즐긴다. “미국의 거리는 항상 활기차며 생동적이고 운동학적이고 영화적이다.”36) 물론 완곡하게 도시의 시급한 사회경제적 난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지방색의 사례로 분류된다. 보드리야르는 도시 위기를 미학화하려고 애쓴다. 그의 눈에는 도시는 자신의 파국의 연극을 상연한다. 이는 퇴폐의 효과가 아니라 도시 자체가 지닌 권능의 효과이다.
그러면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충동은 무엇인가? 『아메리카』전체에 걸쳐서 관념과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서로 상쇄되는 듯하다. 보드리야르가 좋아하는 수사학은 모순어법이다. 아메리카는 ‘낙원’, ‘실현된 유토피아’로서 그리고 기호의 유혹적이고 탈현대적인 공원으로서 묘사된다. 아메리카는 “풍요‧권리‧자유의 유토피아, 사회적 계약과 재현의 유토피아”37)이다. 반면에 아메리카는 또한 “재현의 종언, 주체의 종언, 모든 가치의 중화, 문화의 죽음의 반유토피아”38)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메리카에서는 유토피아가 실현되어 왔고, 반유토피아가 실현되고 있다. 사실 아메리카에는 실현된 유토피아의 마술적 역설과 아이러니가 남아 있다. 환상없는 이 유토피아는 실현된 평범함의 유토피아이자 현대성의 숙명이다. 이와 같은 반해석학은 경우에 따라서는 도발적이며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아메리카』와 아메리카로부터 무의미를 향해 항상 연결되고 있다. 결국 보드리야르는 사막의 침묵을 갈망하고 시뮬라시옹화된 풍경과 기호를 초월한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듯하다.
『아메리카』는 ‘소실점’으로 시작되며 ‘영원한 사막’ 혹은 사막 속의 부재라는 침묵하는 중심점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서 기호들은 사라짐의 미학과 의미의 사막화에 의해 포화상태가 된다.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아메리카는 탈현대적 지도 그리기와 함께 이 지도 그리기의 연속을 나타내는 ‘거대한 홀로그램’, ‘특수조명효과’, 하이테크 은유로 된다. 아메리카는 사물들이 초과실재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 곳이다. 아메리카의 물질성은 기호와 이미지들의 자기지시적 유희로 분해되는데, 이는 바로 『아메리카』가 지향하는 목적이다.39) 아메리카에서는 수정된 견해의 합의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모든 사회관계, 자본과 욕망의 순환, 모든 위기와 갈등, 약속과 희망 등은 기호학적 환상의 백열상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현대가 사물에 대한 물신숭배로 특징지어진다면, 탈현대는 특권을 부여받은 기호와 이미지의 물신화를 향한 점증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는 탈현대 문화전체에 걸친 명백한 경향의 절정에 이르는 듯하다. 말하자면 시뮬라시옹 속에서 질식 상태로 되기 위해 아메리카의 확실한 모든 것이 기호와 이미지로 변하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아메리카』는 탈현대 신화의 종착지일지도 모른다.
21)배영달, 『보드리야르의 아이러니』, 동문선, 2009, pp. 247-248 참조. 22)Amérique, p. 9. 23)같은 책, p. 57.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도 미국여행을 한 후 『초과실재속으로의 여행 Travels in Hyperreality』이라는 비평적 에세이를 출간했다. 에코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초과실재의 개념은 거의 동일하다. 보드리야르의 핵심개념들 중의 하나인 초과실재는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산출되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고 우월한 실재를 뜻한다. 국내에서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는 초과실재, 과잉실재, 파생실재, 과실재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초과실재라 명명한다. 24)Douglas Kellner, Jean Baudrillard: From Marxism to Postmodernism and Beyond, Polity Press, 1989, p. 168(약호 MPB). 25)Amérique, p. 16. 26)Jean Baudrillard, Le paroxiste indifférent, Grasset, 1997, pp. 147-148(약호 PI). 27)Amérique, p. 14. 28)같은 책, p. 78. 29)같은 책, pp. 141-142. 30)Jean Baudrillard, dirigé par François L’Yvonnet, L’Herne, 2004, p. 103. 31)PI, p. 148. 32)Amérique, p. 19. 33)MPB, p. 169 참조. 34)Amérique, pp. 247-248. 35)같은 책, p. 25. 36)같은 책, p. 41. 37)같은 책, p. 194. 38)같은 책, 같은 쪽. 39)Brian Jarvis, Everything Solid Melts into Signs, Jean Baudrillard(3), edited by Mike Gane, Sage, 2000, p. 178 참조.
『아메리카』는 보드리야르의 연구자들에 의해 폭넓게 논평되긴 했지만, 그 개념들에 대한 논의는 다소 부정적이고 서로 엇갈리는 측면들이 있다. 보드리야르의 대표적 연구자들로는 더글라스 켈너(Douglas Kellner)와 마이크 게인(Mike Gane)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아메리카』 읽기는 첨예하게 대립된다. 켈너는 아메리카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분석이 ‘터무니없다’고 지적하고, 실제로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보드리야르의 견해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켈너가 지적하는 문제점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보드리야르는 켈너가 텍스트를 인용하는 바로 그 무렵에 미국을 자본주의의 요새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켈너는 이 특별한 책을 위한 진정한 가이드는 아닌 듯하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떻게 읽혀져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가?
보드리야르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여행자 그 이상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여행의 매혹은 평범함을 초월하는 유혹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문화의 황홀경적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순수한 여행과 풍경과 속도라는 관념 속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현대성의 발전된 단계에서 그가 주체와 사물 사이에서 확립하는 사유가 매우 분명해진다. 이러한 사유는 그의 ‘아메리카’지도 그리기 속에 자리잡는다. 『아메리카』는 기행문 형식의 에세이로서, 특히 미국 경험에 대한 유럽적 해석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광범위한 문화적 동질성의 상실 속에서 미국문화의 파국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는 유럽 지식인의 노트로서, 그리고 현대성과 탈현대성의 신랄한 비판가의 노트로서 읽혀질 수 있다. 이에 반해 켈너는 이 책을 “보드리야르 자신의 환상의 초형이상학적 투영”40)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켈너에게 보드리야르가 분석하는 미국의 어떤 양상들은 수수께끼이며, 켈너는 미국을 그 밖의 세계의 모델로 제시하는 보드리야르의 계획에 주목하지 않는다. 켈너는 이 책이 문화적 사막으로서의 미국의 불완전한 개념을 나타낸다고 지적하면서, 이 책에 담겨 있는 어떤 풍자를 인간이 ‘침입자’가 되고 있는 사막의 단순한 설명으로 바꾸어 놓는다. 켈너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 게인은 보드리야르 작업의 징후적 읽기를 시도하는 켈너의 논의에는 때때로 보드리야르의 사유 세계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다.41)
그러면 여기서 보다 구체적으로 켈너의 논의를 추적하면서 그의 견해를 살펴보자. 켈너에 따르면 보드리야르의 최종적 결론은 아메리카에서 무관심이 의미를 물리치며 아메리카는 ‘욕망의 종언’의 시대에 매혹할 뿐이라는 것인데, 이는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의 최종적 실패이자 그의 사회적 분석과 비판의 실패로 간주된다. 따라서 켈너의 관점에서 보드리야르의 글쓰기는 평범하고 완전히 본질주의적인 것이 된다. 말하자면 보드리야르가 기술하는 원시성으로서의 아메리카의 개념은 민족주의적이고, 사막의 이미지는 평범하며, 사막에 여자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도발적 암시는 성차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설명이 ‘레이건화되고 여피화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켈너는 자신의 아메리카 읽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민 노동자도 멕시코계 미국인 빈민굴도 없고 어떠한 중앙아메리카 난민도 베트남 난민도 없으며 심지어 어떠한 흑인조차도 없다 (⋯) 레이건주의를 동일한 효과로 만드는 것은 미국의 복합적 현상의 다양한 양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42)
켈너의 이러한 혹평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게인은 켈너의 아메리카 읽기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며, 그의 많은 관찰들은 보드리야르의 텍스트 읽기에 의해 확증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게인에 의하면 켈너는 징후적 읽기를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 이는 켈너가 『아메리카』를 결코 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읽기가 『아메리카』의 이론적 구조와 결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언급된 『아메리카』 읽기에 대한 보다 세부적이고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맨 먼저 보드리야르가 아메리카를 원시문화로 이해할 때 이것을 민족주의적이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듯하다. 켈너는 실제로 어떠한 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켈너가 ‘원시성’의 개념이 보드리야르에 의해 순진하고 경멸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켈너 자신이 보드리야르의 텍스트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 속에서 아이러니의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둘째, 보드리야르는 사막의 기호와 이미지가 어떤점에서 독창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문제는 자신이 이 기호와 이미지로 무엇을 실현하는가이다. 셋째, 사막에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적절하다는 표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보드리야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너 같은 비평가의 일탈하는 표현의 사용을 때때로 감추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이 점에 대해, 게인은 “켈너는 텍스트 전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텍스트가 도달하는 아이러니컬한 결말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43)고 지적한다. 그러면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인종적 억압을 중시하지 않는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그는 멕시코계 미국인 노동자들의 삶의 아이러니컬한 문제를 논하면서 “그들의 땅을 훔친 미국인들”44)에게 자각을 촉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레이건주의에 대해서도 단순히 레이건의 미소의 반영을 넘어서 위트와 풍자로 묘사한다. “ ‘이 나라는 좋다. 나는 좋다. 우리는 최상이다.’ 그것은 또한 레이건의 미소이기도 하다. 그의 미소에서 미국 국민 전체의 자기만족은 절정에 도달하며, 또 그의 미소는 유일한 통치원리가 되고 있다.”45) 그리고 아메리카가 ‘실현된 유토피아’라는 아이러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분명히 보드리야르의 아이러니컬한 사유이다. 켈너 같은 비평가들은 왜 그의 이러한 사유를 파악하지 못했을까? 켈너의 『아메리카』 읽기는 보드리야르에 대한 켈너의 의식적 경멸을 나타내는데, 보드리야르에 맞서 그는 자제의 최소 형태, 즉 최소의 지적 엄격함도 보여주지 못한 듯하다. 게인의 주장처럼, 여전히 단순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적어도 텍스트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46) 이제 우리는 켈너와 게인의 입장을 넘어서 무엇보다도 미국문화를 비판적 시각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읽어내고 ‘아메리카’의 지도 그리기를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는 보드리야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40)MPB, p. 170. 41)Mike Gane, Baudrillard: Critical and Fatal Theory, Routledge, 1991, p. 179 참조(약호 CFT). 42)MPB, pp. 171-172. 43)CFT, p. 180. 44)Amérique, p. 10. 45)같은 책, p. 68. 46)CFT, p. 181 참조.
보드리야르는 단순히 기존의 시각을 따르면서 미국을 여행한 유럽의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기행문 형식의 담론을 취하면서 그 전제들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풍경과 사막과 거대 도시들을 관찰했다. 그의 미국여행은 형이상학적 사유와 이론이 담긴 비판적 실천이었다. 유럽의 전통 속에서 미국문화는 보드리야르에게 일종의 지진과 같은 형태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말하자면 “구세계와의 단층에서 태어난 프랙탈적인 틈새기의 문화, 촉각적이고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고 피상적인 문화”47)였다. 요컨대 기호와 이미지에 의한 초과실재(hyperréalité)와 시뮬라시옹의 문화였다.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 즉 그의 미국문화비평은 단순히 현대주의적이지 않고 초현대주의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미국문화비평은 그 내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현대주의에 저항하고 탈현대주의 혹은 초현대주의를 지향한다. 게인에 의하면 그의 미국문화비평은 탈현대적 축제의 일부도 아니며 절충적이지도 않다. 게인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켈너는 『아메리카』 읽기를 통해 아메리카가 보드리야르의 탈현대적 축제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다.48) 이 글에서는 때로는 게인의 견해를, 때로는 켈너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탈현대적 세계으로서의 미국을 분석하였다.
『아메리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보드리야르의 미국문화비평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도 않으며, 켈너의 정통마르크스주의를 뒤엎는 사회주의적 비평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미국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의 상황으로부터의 불행한 이동이라고 보드리야르는 강조한다.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이론을 후기자본주의의 설명으로 이용하려는 켈너와 제임슨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행히도 자본주의의 발전을 후퇴시킨다고 넌지시 말한다. 확실히 미국의 상황에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석은 미국의 상황에 고유한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측면이 때문이다. 게인은 켈너 자신이 “습속과 심성의 깊은 아메리카”49)를 고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아메리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70년대 말에 나는 이론을 넘어서 어떻게 해서든 환상적이고 놀랄 만한 사물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아메리카는 순수한 상태 속의 빛과 현대성이었다. 그것은 꿈도 실재도 아니며 초과실재와 실현된 유토피아였다.”50) 분명히 보드리야르 자신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는 사물의 형태를 분석하는 보다 폭넓은 궤도 속에 자신의 글쓰기를 연결하는 것일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가 이러한 작업을 기술하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차가운 기억들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깊이나 변증법적인 분석을 지향하기보다 는 오히려 아이러니컬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전개된 현대성 혹은 초현대성으로서의 미국을 탐색하고 미국의 사회현상을 분석하면서 미국문화를 비평했다. 그의 미국문화비평은 미국의 사회문화적 현상과 경험을 이론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냐에 따라 높이 평가될 수도 있고, 미국의 사회현실을 신화화하거나 왜곡하는 정도에 따라 비판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드리야르의 역설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이론조차도 이론적 전망과 지도 그리기의 한 형태이다.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이론적 담론을 문화적 관찰과 비평, 아포리즘과 결합하는 새로운 종류의 담론을 산출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고유한 담론이 내포되어 있는, 그리고 아이러니와 역설로 가득한 『아메리카』를 그의 글쓰기와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읽는 동시에 그의 ‘아메리카’ 지도 그리기를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은『아메리카』를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 될 것이다.
47)Amérique, p. 27. 48)MPB, p. 168 참조. 49)Amérique, p. 16. 50)Jean Baudrillard, America, Verso, 1988, p. 5. 51)Jean Baudrillard, Cool Memories, Galilée, 1987, p.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