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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Equus : The Sublime Object for Sublimation and Jouissance EQUUS : 승화와 향유를 위한 숭고한 대상*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first horse that Alan has encountered is a real object that is pure and perfect. However, it goes down to his subconsciousness after his parents inhibit the horse. While he was being a grown-up, the pure and perfect object is replaced by the figure of Jesus that his mother told him; but his father's inhibition of Jesus replaces Jesus with a drawing of the horse. Equus is a sublimation mechanism that Alan has activated as a defence against the inhibition. Thus, both Jesus and Equus may serve as the slippage of signifiant to Alan; but, in fact, they indicate the ideal ego of an identification object or the ego-ideal of himself. To make a perfect sublimation, the object of identification should proceed toward the object of Other jouissance. And yet, Equus, to Alan, comes to be the cause-object of a catastrophe at the end, which becomes a double threatening himself. The authority of Peter Shaffer can be found in his ability as a writer to precisely illustrate Alan's psychological process through the techniques of psychodrama. Therefore, this paper focuses on analyzing the process of Alan's psychological treatment by means of Lacan’s psychoanalytical concepts-sublimation, Other jouissance, and double-in order to examine the author's thematic consciousness.


알런이 만난 최초의 말은 결여가 없는 순수한 실재적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에 의해 금지되어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후 성장의 과정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전도 받은 예수의 형상으로 대체되었다가, 그마저 아버지에 의해 금지되어 말 그림으로 대체된다. 에쿠우스는 이러한 금지에 대한 방어로서 알런이 작동시킨 승화의 기제이다. 그러므로 알런에게 있어 예수(스)(Jesus)와 에쿠스(Equus)는 단지 기표의 미끄러짐일 뿐, 사실은 동일화의 대상인 이상적 자아 또는 자아 이상에 다름 아니다. 완벽한 승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러한 동일화의 대상이 다른 향유의 대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알런에게 에쿠우스는 종국엔 파국의 원인-대상이 되어 스스로를 위협하는 분신이 된다. 피터 셰퍼의 작가적 면모는 바로 이러한 내면 심리의 형성 과정을 심리극의 기법을 통해 세밀하게 표출해내는 역량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작가의 주제 의식을 확인하기 위하여 라캉의 정신분석학 용어인 승화, 향유, 동일화, 분신 등을 통해 알런의 심리치료의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 것이다.

KEYWORD
Peter Shaffer , Equus , Lacan , psychoanalysis , sublimation , jouissance , double.
  • 1. 예수에서 에쿠우스로

    라틴어로 ‘말’이란 뜻의 “에쿠우스”는 영국 법정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졌던 ‘26마리의 말의 눈알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굿간 소년의 괴기적(怪奇的)인 범죄 실화’를 소재(素材)로 한 작품이다.1) 1970년 당시 화제가 되었을 이 사건은 어찌 보면 분열증이나 강박신경증에 빠진 한 소년의 이해 못 할 행각 정도로나 회자되다가 점점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극작가 피터 셰퍼의 손을 거치게 되면서 이 사건은 <에쿠우스>라는 명작희곡으로 거듭나게 된다.2)

    피터 셰퍼(Peter Shaffer)는 오직 충격적인 순간만 전해들은 이 사건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주인공의 심리 세계를 창조해야 했다. 한편의 극이 되기 위해서는 사건의 극적인 재현보다는 그 사건의 원인이 되는 최초 외상(trauma)의 지점을 추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구상에서 집필까지 2년 6개월이 걸린 구성의 최종 단계에서 어느 저명한 아동 정신과 의사로부터 의학적 조언과 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을 듣게 됨으로써 비로소 희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말은 하나의 작품을 빚기 위하여 그가 기울였을 노고를 십분 짐작하게 한다.3)

    알다시피 <에쿠우스>에는 두 명의 주인공-‘알런’과 ‘다이사트’가 등장한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그러하듯이 다이사트 또한 알런 못지않게 주요한 인물로서 극의 줄거리를 이끌어간다. 관객들이 이 두 등장인물에게 집중하게 되는 것은 제각각 쉽게 풀지 못할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두 주인공의 내면심리로 인한 것이다. 그 첫째는 말의 눈을 찌른 알런의 심리적 동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의문이고, 두 번째는 알런의 심리치료를 마친 다이사트가 왜 역으로 어둠 속에 침잠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다.

    6마리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괴기한 범죄를 저지른 소년의 정신치료를 의뢰받은 시골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알런의 정신을 분석하는 도중에 광적으로 종교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폐쇄적인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희생물이 된 알런을 보게 된다. 알런은 전직 교사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인 어머니와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로부터 내면화된 억압에 의해 리비도(libido) 또는 주체의 향유(jouissance)를 금지당한 것이다. 인쇄공인 아버지는 구식 사회주의의 이념에 경도된 권위주의적인 인물로서 TV를 자본주의의 산물로 치부하며 알런에게 금지하지만, 성인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 것을 알런에게 들키자 변명에 급급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는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기에 아내로부터 강요된 기독교로 인해 알런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깊은 신앙에 빠진 어머니는 알런이 미친 것이 부부의 탓이 아니라 악마가 꼬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적 권위로, 어머니는 종교적 권위로 알런을 압박한다.

    피터 셰퍼는 극의 전반부에 자신의 페르소나인 다이사트를 내세워 알런이 말(에쿠우스)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된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6세 때 처음 말을 타게 된 알런이 부모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진 것, 12세 때 침실에 결려있던 골고다의 예수 그림이 아버지에 의해 치워진 것, 슬퍼하던 알런에게 아버지가 대신 말 그림을 걸어준 것, 그 뒤로 말 그림을 향한 숭고하고도 자학적인 알런의 기이한 의식(ritual) 행위에 이르는 과정이 텍스트의 6장부터 14장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다.

    알런이 10장에서 고백하듯이 여섯 살 때 타보았던 최초의 말 ‘트로쟌’은 결여가 없는 순수한 실재적 대상(real object)으로서 다가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 부모에 의해 금지되어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그것은 이후 성장의 과정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전도 받은 예수의 형상으로 대체되었다가, 그마저 아버지에 의해 금지되어 말 그림으로 대체된다. 에쿠우스는 이러한 금지에 대한 방어로서 알런이 작동시킨 승화(sublimation)의 기제이다. 그러므로 알런에게 있어 예수(스)(Jesus)와 에쿠스(Equus)는 단지 기표의 미끄러짐(slippage)일 뿐, 사실은 동일화의 대상인 이상적 자아(ideal ego) 또는 자아 이상(ego-ideal)4)에 다름 아니다.

    알런이 성경에 기록된 바 예수의 수난으로 귀결되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에쿠우스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프린스의 계보로 전환시켜내고, 또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스스로에게 재갈을 물리고 채찍질하는 위의 인용 장면은 이러한 알런의 자아의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알런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칭클창클’을 물리고 채찍을 맞는 에쿠우스의 이미지로 대체되면서 상상적 동일화를 이루며, 나아가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 받아들여야할 수난(passion)의 의미로 각인되면서 상징적 동일화를 이룬다.

    그렇게 승화된 에쿠우스는 알런의 동일화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으나, 중국엔 파국(catastrophe)의 원인-대상이 되어 스스로 폐기해야할 분신(double)으로 변하게 된다. 피터 셰퍼의 작가적 면모는 바로 이러한 내면심리의 형성 과정을 심리극의 기법을 통해 세밀하게 표출해내는 역량에서 발견된다. 이 글은 그와 같이 이상 증상을 표출하게 된 알런의 내면심리를 분석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아가 알런의 정신치료를 마친 뒤 오히려 어둠 속으로 갇히게 되는 다이사트의 심리적 원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가의 주제 의식을 확인하기 위하여 승화, 동일화, 분신, 향유, 주체 등에 대한 라캉주의의 이해를 병행하기로 한다.

    1)피터 셰퍼, 신정옥 역, 『에쿠우스』, 문학출판사, 1983(초판 1977), 8쪽.  2)<에쿠우스>는 1973년 7월 26일 런던 국립극장 올드 빅(The Old Vic)에서 초연을 거쳐 이듬해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하였다. 1974년 10월 24일 뉴욕 플리머드 극장(Plymouth Theatre)의 첫 공연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순간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한 채로 5분 동안이나 뜨거운 갈채와 환호성을 보냈다 한다. 이와 같은 관객들의 열광과 찬사는 1949년에 공연됐던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피터 셰퍼는 1975년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에 해당하는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위의 책, 7쪽 참조. <에쿠우스>는 1975년 9월, 극단 실험극장에 의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다. 이로 인해 연극계에는 예매제도가 도입되고, 최초로 관객 만 명 돌파, 최초로 6개월 연속 공연 등의 기록을 세우며 소극장 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 그동안 소위 5대 스타-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 등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알런 역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부산에서는 부두극장(현 부두연극단)이 1986년에 <에쿠우스>를 초연한 이래 모두 여섯 차례(1986, 1991, 1998, 2006, 2009, 2011)의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근래 충무로의 스타가 된 김윤석과 KBS 탤런트 김하균 등은 서울의 경우와 달리 다이사트 역을 훌륭하게 수행한 배우들이다. 한편 <에쿠우스>는 연출가 김광보(극단 청우 대표)의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한데, 그는 부산 초연 당시 조명을 담당하였던 부두극장의 단원이었다. 가마골소극장 편, 『가마골연극-에.쿠.우.스』, 해성출판사, 2011, 참조.  3)피터 셰퍼, 「작품 노우트」, 앞의 책, 17쪽 참조.  4)이상적 자아(ideal ego)는 상상적 동일화의 대상으로서 이미지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며, 자아 이상(ego-ideal)은 상징적 동일화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2. 숭고한 대상으로의 승화

    승화란 충동(drive)5)의 직접적인 만족에 대항하는 방어기제로서, 성적인 대상과 목표를 성적이지 않은 목적과 대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승화는 리비도가 예술 창작이나 지적 작업과 같이 명백히 비성적(非性的)인 활동들로 경로화되는 과정이다. 승화는 따라서 과잉 성적 에너지를 위한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도피로서 기능한다.”6) 프로이트는 이러한 승화의 실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를 든다.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사춘기적 격정이 엄습했을 때, 대부분의 정욕적 욕구들은 호기심을 으뜸으로 하는 조숙성의 덕택으로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갈증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으며, 따라서 억압을 피할 수 있었다”7)고 보았다. 이와 같이 승화에 관한 일반화된 통념은 다분히 프로이트적이다. 그것은 충동을 길들이고, 실재를 상징화하며, 향유를 대타자에게 옮기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와 달리 라캉의 승화 개념 속에는 억압이 부재하며 따라서 충동의 억제(inhibition) 또한 없다. 라캉에게 승화는 충동의 대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충동의 만족이란 대상의 획득을 추구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욕망과는 달리 향유하려는 그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향해 가는 혹은 그 대상 주위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운동 그 자체를 향유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충동의 만족이 대상을 향해 가는 운동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충동이 겨냥하는 대상은 충동이 둘러싸고 순환하는 어떤 본원적 공백 혹은 무(無)의 대리물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충동의 만족은 구조 속에서 대상이 갖는 위치를 변화시킨다. 직접적인 만족의 목표가 되는 욕망의 대상과는 달리 ‘그 대상이 목적의 그물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고 그 그물망에 의해 포위되는 한’, 충동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사물(das Ding)로, 즉 상징화에 저항하는 향유의 불가능하고-도달할 수 없는 순수 실체의 존엄성으로 고양시켜 ‘숭고한(sublime)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은 대상을 사물의 존엄성으로 고양시킨다는 것이 결코 ‘대상의 이상화’, 즉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8)

    이처럼 승화를 상징계의 대타자의 장에 안전하게 기입하는 것으로 파악한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캉에게 있어 ‘승화는 나르시스적이고 상상적 대상을 사물의 존엄성에까지 올려준다’9)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때 사물이란 ‘상징화를 넘어서는 ‘기의-너머-의-것, 또는 알 수 없는 x로서’10) 실재그 자체이다. 브루스 핑크는 이러한 차이를 정리하여 프로이트적 승화를 ‘남성적 승화’에, 라캉적 승화를 ‘여성적 승화’에 각각 대입한다. 남성적 승화가 ‘상상적 대상의 상징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면, 여성적 승화는 ‘기표의 실재화’로 특징지어진다. 이를 『세미나ⅩⅩⅠ 』에서의 라캉의 용어들로 정식화해본다면, 남성적 구조를 갖는 이들은 상상계(환상)의 실재(적 대상)를 상징화한다고 말해질 수 있으며, 여성적 구조를 갖는 이들은 상상계의 상징계를 실재화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브루스 핑크는 전자가 ‘시계방향’ 혹은 ‘우-극화된right-polarized’ 담론을 수반하며, 후자는 ‘시계반대방향’ 혹은 ‘좌-극화된’ 담론을 수반한다고 하였다.11)

    라캉의 성구분(sexuation) 공식에 의하면 남성은 아직까지 ‘큰 타자적 향유(jouissance de l'Autre)’ 혹은 ‘다른 향유(l'Autre jouissance)’를 구가할 줄 모르는 상징계 내에 머무르는 존재이다. 이에 비해 여성은 다른 향유를 보장하는 충동의 층위 속에서 ‘예외적 지위를 갖고 있던 욕망의 절대적 대상-원인’을 충동의 대상(부분충동)으로 ‘탈절대화’12)함으로써 향유하려는 그 대상(목표)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해 가는 운동 그 자체(목적)에서 만족을 얻는다.13) 그러므로 여성에게 이 부분대상(들)은 만족을 주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닌 것(pas-toute, not all)’이 되어 상징적 질서로부터 탈존(ex-sistence)함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닌다. 이때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푸코가 말하는 ‘성공적인 주체화와 미학적인 전체로서의 자기의 형성과 동어의’14)인 주체, 또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동화됨으로써 구성되는 주체와는 차원이 다르다. 라캉주의의 용어에 따르면 푸코나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은 ‘주체화’에 해당된다. “주체화란 주체가 언어의 수행력에 복속됨으로써 상징적 통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주체란 언어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심연, 즉 주체화의 효과와 상반되는 차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체는 주체화의 회로를 벗어나는 잔여물과 상관적이며 모든 동일시의 실패의 지점이고 상징적 구조의 본원적인 공백 혹은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이다.”15)

    알런이 말들의 눈을 찌르게 되는 충격적인 행동은 프로이트와 라캉으로 변별되는 승화 개념의 사이, 즉 남성적 승화와 여성적 승화 또는 그 결과로 형성되는 주체화와 주체의 경계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어머니(상상계)로부터 전수받은 예수의 수난상이 아버지(상징계)의 강압에 의해 말 그림으로 대체되지만 알런은 그것을 다시 에쿠우스의 의미로 승화시킴으로써 상징화에 저항하는 숭고한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였다. 다만 그것이 알런에게 있어 추후에 치명적인 증상(symptom)16)으로서 발현하게 되는 것은 승화가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대상의 이상화’, 즉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어야함에도 알런의 경우는 ‘완벽한 승화’17)를 이루지 못하고 대상과의 동일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상과의 ‘분리(séparation)’가 실행되지 않는 한 승화는 불안정한 상태로 머물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절대적 향유’인 것처럼 경험되지만, 때로는 ‘섬뜩한 불안(uncanny anxiety)’으로 엄습하기도 한다. 전자는 승화 개념에서는 ‘여성적 승화’의 상태일 때, 향유 개념에서는 ‘다른 향유’의 상태일 때 실현된다. 후자는 승화 또는 향유의 대상이 주체를 초월하여 분신으로 화할 때 발생한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상태의 승화 작용으로 인하여 알런은 양가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에쿠우스는 알런에게 있어 한편으로는 향유하는 주체의 기쁨을 안겨주는 대상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신이 되어 섬뜩하게 엄습하는 불안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알런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대)타자로부터의 억압을 예수가 겪었던 수난으로 동일화하고, 아래의 인용처럼 그것을 다시 에쿠우스와의 한 몸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삼위일체의 기쁨을 느끼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질’과의 관계에 이르렀을 때에는 ‘대상에 대한 동일화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바로 그 불안정한 승화로 인하여 종국에는 에쿠우스라는 분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게 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5)충동은 주체가 기표의 주체가 되고 상징적 구조로 편입된 이후에 남는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주체가 말하는 존재가 될 때, 그/그녀는 더 이상 동물의 본능적 방식으로 섹스를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실의 자리에서 우리는 주체에 대한 항상적 압력을 부과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주체를 표식하는 어떤 힘과 조우한다. 이 힘은 라캉이 리비도, 충동, 혹은 라멜르라고 다양하게 명명했던 것이다. 레나타 살레츨, 이성민 역,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도서출판 b, 2003, 82쪽.  6)Dylan Evans, An Introducto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Routledge, 1996, p.198.  7)S. Freud, Un souvenir d'enfance de Léonard de Vinci, Gallimard, 1987, p.171.  8)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60 (Seminar Ⅶ), ed. by Jacques-Alain Miller, trans. by Dennis Porter, Norton, 1999, p.111f 참조. 김소연, 『실재의 죽음』, 도서출판 b, 2008, 203-205쪽 참조.  9)J.-D. Nasio, 표원경 옮김, 『정신분석학의 7가지 개념』, 백의, 1999, 128쪽.  10)라캉은 1959-60년 세미나에서 사물(Thing)을 불어 la chose와 독어 das Ding과 구별 없이 사용하였다. 그것은 칸트의 ‘물 자체’와 유사한 개념이다. 사물은 또한 근친상간적 욕망의 금지된 대상, 즉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물의 이러한 특징은 ‘대상 a' 개념과도 상통한다. Dylan Evans, 앞의 책, pp.204f 참조.  11)브루스 핑크,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레나타 살레츨 외 저, 김영찬 외 편역, 『성관계는 없다: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도서출판 b, 2005, 76-77쪽 참조.  12)알렌카 주판치치, 이성민 역,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 도서출판 b, 2004, 327쪽.  13)충동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라깡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충동의 목적(Ziel)을 목표(goal)와 목적(aim)으로 구분해 논의를 진행한다.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아난케, 2005, 21쪽.  14)슬라보예 지젝, 주은우 역,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한나래, 1997, 300쪽.  15)홍준기, 『라캉의 현대철학』, 문학과 지성사, 1999, 58쪽.  16)증상이란 ‘실재의 세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신호’이다. Jacques Lacan, Le Seminaire liver ⅩⅩⅡ R. S. I. in Ornicar? no 2, 1975, p.96, 홍준기, 「자끄 라캉, 프로이트로의 복귀」,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 2002, 18쪽에서 재인용.  17)완벽한 승화는 모든 도착과 신경증의 종결을 의미할 것이다. Dylan Evans, 앞의 책, 같은 곳.

    3. 큰 타자와의 절대적 향유

    위와 같은 알런의 불안정한 승화 작용으로 인해 <에쿠우스>는 특이하게도 두 차례에 걸쳐 극적 정점(climax)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위의 인용은 알런에 의해 신(에쿠우스)의 자질을 부여받은 ‘너제트’와 격렬한 일체를 이루는 극의 첫 번째 정점 대목이다. 만약 이때 너제트가 알런으로부터 일방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받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물신숭배(fetishism)로서 성적 도착증(sexual perversion)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알런은 에쿠우스를 물신으로서만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일체가 되어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향유-엄밀하게 말해서 다른 향유-의 대상으로 자질을 부여한다. 피터 셰퍼는 알런에게 아래와 같은 대사를 부여함으로써 철없는 소년의 단순한 병정놀음이나 성도착적 페티시즘으로 치부하지 않고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의 허영과 위선에 저항하는 신성한 제의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라캉은 향유를 상상계와 상징계가 실재계에 의해 보로메오 매듭(Borromean knot)으로 겹쳐지는 세 영역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벤다이어그램으로 볼 때, 대상 a에 해당되는 잉여향유(plus-de-jouir)는 세 영역이 모두 겹쳐지는 공간이고, 남근적 향유(jouissance phallique)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교집합이며, 큰 타자의 향유(jouissance de l'Autre)는 상상계와 실재계의 교집합이다.

    그중 잉여향유18)는 심리체계 안에 역류되어있는 에너지의 방출이 성감대나 육체의 구멍지대-입, 항문, 질, 음경 등-와 관련을 맺으며, 끊임없이 그 지대를 자극하여 항구적인 성적 자극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남근적 향유는 에너지의 방출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때 흩어지는 에너지로 인해 발생하고, 그 결과 상대적인 완화, 즉 불완전한 무의식적 긴장의 경감을 가져다준다. 그러한 범주의 향유를 남근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방출의 접근을 열고 닫는 경계가 남근이기 때문이다.

    큰 타자의 향유는 긴장이 어떠한 구속 없이 완전히 방출되는 이상적인 경우이다. 강박 신경증 환자에게 그 지점은 죽음을 뜻하며, 히스테리 환자에게는 광기의 공간이 된다. 반면 외디푸스 국면에 있는 아이에게 그것은 근친상간의 신화적인 모습-이것은 욕망이 가장 잘 성취된 최고의 실현으로 간주된다-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라캉이 말하는 근친상간은 불순한 실제적 성적 접촉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신화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때 ‘큰 타자’는 ‘신’일 수도 있고, 어머니, 아니면 환상, 그것도 아니면 전능한 주체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큰 타자의 향유은 절대적 향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디푸스적 신화의 아이가 상상하는 큰 타자는 실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언어로 표상되는 여러 가지 장애-욕망의 완전한 실현을 깨트리는 모든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인간 존재는 기호표현, 특히 남근과 맞닥트려지기 때문이다. 라캉주의에서 남근(phallus)이라는 용어는 남성의 성기(penis)를 가리키지 않는다. 남근은 성적인 차원에 의존하는 모든 것으로서 기호표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큰 타자의 절대적(신화적) 세계가 열리는 문을 조절하는 문지기이다. 이 남근기표로 인해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빗금이 쳐지는 주체는 절대적 향유를 차단당한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만 욕망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신경증자가 최대의 향유-큰 타자의 향유-를 기피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향유하는 방식에는 증상(남근적 향유)과 환상(잉여향유)이 있다. 이는 신경증자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이 범람해오는 실재적 타자19)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지하는 두 가지 수단이다.

    라캉은 이러한 남근적 향유를 남자의 속성에, 그리고 큰타자의 향유를 여자의 속성에 비유하면서, 오직 여자만이 절대적 향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20) 이에 의하면 알런은 남자와 여자의 양가성(ambivalence)을 지닌 인물이다.

    우선 알런이 3주에 한 번 에쿠우스와 만나는 순간은 일체의 남근 기표도 작동하지 않는, 그리하여 그 어떤 증상이나 환상도 발생하지 않는 절대적 향유의 시간이 된다. 알런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밤안개가 ‘타오르는’ 넓은 들판엔 오직 알몸의 알런과 에쿠우스만이 존재할 뿐이다. 알런은 에쿠우스에게 자신의 죄(각설탕)를 바쳐 ‘최후의 만찬’을 행한 후, 가상의 적들을 향해 점차 힘차게 진격을 한다. 그리하여 절정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두 존재는 하나가 된다. 바람 속을 가르며 달리던 알런이 에쿠우스와 한 몸이 되었음을 외칠 때 관객들은 그 상황에 몰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응어리진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정화(purgation)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상징계에 포획되어 원초적 열정을 상실한 채로 일상을 살아가는 관객들이 알런이 재현하는 절대적 향유의 순간에 동화됨으로써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실재와의 만남(tuché)21)’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미사 때 행하는 성찬의 전례에서 빵으로 비유된 예수의 몸을 받아먹은 신자들이 그를 통해 성령과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알런과 에쿠우스가 예수의 몸과 함께하는 삼위일체를 이루고 나면 알런은 천천히 말 등에서 내려 너제트의 발굽에 입 맞추고는, 이윽고 고개를 젖혀 외친다. “아멘!” 신성한 제의(신화)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숭고한 행위는 여기까지이다. 두 번째 정점-에쿠우스의 눈을 찌르게 되는-을 향해 극은 또 한 번의 가파른 상승을 하기 때문이다.

    18)욕망의 대상-원인인 대상 a를 라깡은 또한 잉여향유(plus-de-jouir)라고 부른다. 상징계 속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충동의 완벽한 만족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거세당한 후에 ‘여분’, ‘나머지’, ‘찌꺼기’로 남아 있는 향유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대상 a는 상징적으로 거세당함으로써 완벽한 향유를 박탈당한 후에도 인간에게 여분으로 허락되는 나머지 향유, 잉여향유이다. 홍준기, 앞의 책(2005), 40쪽.  19)슬라보예 지젝은 타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상상적 타자가 있다. 이는 ‘나와 같은’ 다른 사람들, 즉 나와 함께 경쟁, 상호인정 등의 거울 같은 관계에 연루되는 동료 인간 존재들이다. 그 다음으로 상징적인 ‘큰 타자’가 있다. 이는 우리의 사회적 현존의 ‘실체’, 즉 우리의 공존을 조정하는 비인격적인 일련의 규칙들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로서의 타자, 즉 불가능한 사물, ‘비인간적인 파트너’, 상징적 질서에 의해 매개되는 어떠한 대칭적인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타자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 「성적 차이의 실재」, 레나타 살레츨, 앞의 책, 265쪽.  20)팔루스적 향유는 유한하며 비연속적이고 파편적인 반면, 다른 향유는 연속적이고 무한하다. 남자는 자신이 팔루스 함수에 적용을 받지 않는 예외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타자, 타자의 육체, 이성(異性)에 도달하지 못하고 대상 a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여자는 예외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대상 a가 아니라 (대)타자, 타자의 육체에 도달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사랑과 향유 대상은 상징계 너머에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실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다. 여자가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여자의 향유는 존재하지 않는 대타자에 대한 향유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여자는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를 향유함으로써 팔루스적 질서를 초월하며, 상징계를 넘어선다. 홍준기, 앞의 책(2005), 320-321쪽.  21)우선 ‘투케’, 이것은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원인에 관해 연구하면서 사용한 용어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재(와)의 만남’이라 번역했지요. ‘오토마톤’, 즉 기호들의 회귀, 재귀, 되풀이가 우리 자신이 쾌락원칙의 명령 아래에 있음을 보여준다면, 실재는 바로 이런 것들 저 너머에 위치합니다. 실재는 항상 오토마톤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프로이트의 연구 전반에 걸쳐 주된 관심사를 이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크 라캉(자크- 알랭 밀레 편), 맹정현, 이수련 옮김, 『자크 라캉 세미나 11-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새물결, 2008, 88쪽.

    4. 섬뜩한 분신의 출현

    알런의 한계는 승화 행위를 현실과 차단된 시공간에서 비화밀교처럼 은밀하게 행한다는 데에 있다. 만약 알런의 승화가 증상과 환상을 넘어선 절대적 향유의 상태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상징계 속에서 대타자와 맞서야 한다. 그리하여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를 직시하고, 나아가 그 결여의 기표를 향유함으로써 팔루스적 질서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상징계를 넘어 ‘승화된 향유’22)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알런이 마굿간에서 질과의 정사를 시도하려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 알런의 큰 타자인 에쿠우스는 향유의 대상에서 돌연 위치를 바꾸어 남근기표로서 작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체가 아닌 분신(double)으로 돌변하여 알런의 향유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분신의 원형은 주체의 동일성이 외부에 체현된 것으로서 거울 단계에서 주체가 거울을 통해 보는 자기 자신의 상상적 이미지이다. 아직까지 스스로를 비통합적이고 파편적인 존재로 지각하던 자아가 자신의 통합된 이미지를 지각하는 일은 먼저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분신의 치명적인 위협은 분신이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가 될 때 나타난다. 나르시스적 모델이 직접적으로 실현되면 그것은 그 자신의 붕괴를, 응시와 인지의 분열(dissociation)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울 속의 통합된 자기 이미지를 보는 주체의 환희에 찬 시선은 이제 분신 쪽에서 주체를 응시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즉 분신은 본래 주체가 얼마나 분열되고 미발달된 존재인지를, 그 죽음의 차원을 상기시키는 존재로 바뀐다. 더욱이 분신은 단순히 주체의 거울 이미지이기만 위해 폐기하거나 희생해야 했던 그 자신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잉여(대상 a 혹은 X)를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신은 ‘주체 자신보다 더 주체인’, 주체 안에 있는, 주체 이상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체의 욕망의 실재를 포함하고 있는 분신의 출현은 주체에게 ‘산산조각 날 듯한 불안’을 안겨준다.23)

    알런에게 에쿠우스는 바로 이러한 분신으로서 작동한다. 알런이 에쿠우스와 처음 만난 순간은 마치 상상적 실재처럼 다가온다. 알런이 그 최초의 ‘실재와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음미할 여지를 지니지 못한 채 부모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지면서 그것은 트라우마적 실재로서 무의식의 층위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것이 다시 현실의 층위로 불리어지는 것은 마굿간에서 질과의 성관계를 시도하는 순간이다. 알런에게 있어 질과의 성적인 만남은 마치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부지불식의 순간에 조우하게 된 말(트로잔)의 경우와 같이 예기치 않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알런이 17세가 되어 질이라는 이성 앞에서 성적 충동을 느낄 때에는 미끄러져갈 승화의 대상이 없다. 에쿠우스라는 숭고한 대상과 질 메이슨이라는 성적 대상 사이에서 알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극은 절정의 순간으로 치닫는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진입해야할 알런은 더 이상 승화 기제를 작동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욕적인 부모로부터 내면화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self)을 ‘소외’시키며 승화시켰던 동일화의 대상으로부터 ‘분리’24)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다.

    이제 알런은 자아의 환상이 만들어낸 성소를 파괴해야만 하는 숙명 앞에 놓였다. 사실 환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벽함의 상징이던 아버지의 남근도 사실은 텅 빈 것이다. 극장에서 마주친 아버지가 알런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의 완고하고도 엄격한 억압 때문에 알런의 환상이 작동되었던 셈인데, 막상 아버지의 기표가 텅 빈 것임이 드러난 이상, 알런의 환상도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극의 절정에서 알몸으로 자신의 성스러운 분신이자 나르시스적 대상이었던 에쿠우스의 눈을 찌르는 알런의 몸짓이 외설스럽거나 불경스럽지 않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텅 빈 기표인 것처럼 에쿠우스라는 이름도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찌른 것은 너제트와 나머지 다섯 마리의 말들이지만 서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알런은 오직 에쿠우스만을 외칠 뿐이다. 그것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새는 알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22)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성적 주체는 “타자의 향유(jouissance de l'Autre)” 즉, 타자의 육체의 향유를 추구한다. 하지만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상징계에 의해 “거세”당했으므로, 결여 없는 실재-순수한 육체, 쾌락-의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여자의 “다른 향유”란 바로 이런 상징적 거세가 낳은 결여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대타자 속의 결여의 기표에 도달하는 승화된 향유로서 타자에게서 병리적 향유를 구하거나,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쾌락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홍준기, 앞의 책, 348-349쪽.  23)김소연, 앞의 책, 72쪽 참조.  24)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즉 기표의 사슬에 얽매임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 즉 고유한 욕망과 향유를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에 빠져든 결과이다. 라깡은 이러한 상태를 소외(aliénation)라 한다. 라깡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유래하는 ‘병리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체로 탄생해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그는 타자에 의한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분리(séparation)라 부른다. 정신분석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양도함으로써 소외된 주체의 상태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향유를 되찾고 해방과 자유를 다시 획득한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다. 조엘도르, 홍준기 옮김, 『프로이트·라깡 정신분석임상』, 아난케, 2005, 26-27쪽 참조.

    5. 진정한 주체를 위하여

    그리하여 알런은 에쿠우스의 눈을 찌르고, 이어서 자신의 눈도 찌른다. 찌르면서 알런은 이렇게 외친다.

    이것은 그러나 실제로 사건을 감행하던 순간이 아니라 다이사트에게 의뢰된 심리치료의 막바지에 행해진 가상의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알런은 실제로 사건을 저지르던 순간에는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심리치료의 결과 자신의 눈마저 찌르게 되는 것은 비로소 자아로부터의 분리 욕망을 표출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 비극인 <외디푸스 대왕>(소포클레스 작)의 맥을 잇는 것이다. 외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어머니를 향하였던 무의식적 욕망의 사슬을 끊고 대타자의 언어(신탁)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질서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듯이, 알런 또한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이 자행하는 억압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방어기제로 작동시켰던 불안정한 승화를 깨고 상징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다이사트는 예수와 에쿠우스와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던 알런의 도착증세에 대한 치료를 마친다. 그러나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가의 전언은 오직 다이사트의 독백에 의해서만 전달되는데, 그것은 프롤로그 격인 1장과 자신이 꾼 꿈을 설명하는 5장에서 사전 암시되었다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35장에서 그 진의를 드러낸다. “정열이란 의사에 의해서 파괴될 수는 있지만 창조될 수는 없습니다.”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듯이 다이사트는 자신의 의료행위가 사실은 알런의 원초적 생명력을 거세시키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정상적인 사회라는 것이 인간의 정열(passion)에 가해지는 수난(passion)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것. 피터 셰퍼는 바로 이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알런으로 하여금 골고다로 향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칭클챵클을 입에 문 에쿠우스의 수난을 동일시하는 극적 설정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극적 페르소나인 다이사트로 하여금 알런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 기꺼이 자신의 입에 물림으로써 현대 문명사회가 저지르는 억압의 구조를 반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정신분석에 의한 치료가 결국은 실패로 귀착한 것임을 자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50년대 초 라캉이 정신분석을 가르치기 시작하던 초기에 그는 다른 분석가들처럼 증상을 무의식적 요소들이 의식의 차원에 기입되지 않아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분석가-증상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주체-의 개입으로 이 무의식적 요소들을 의식의 언어로 전환시키는 것이 분석가의 치료행위라고 보았다.25) 시골의 정신과 의사인 다이사트는 알런에게 나타난 증상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는 그 치료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자신의 정신분석 행위는 제5장의 독백에서 고백하는 꿈의 내용, 즉 고대 희랍의 신관장(神官長)이 되어 희생양으로 바쳐진 소년 소녀들을 돌에다 태질하고 그 배를 갈라 내장을 패대기치는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두에서 제기하였던 이 글의 두 번째 목표, 즉 다이사트의 심리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라캉은 후기에 이르러 초기에 세웠던 정신분석의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증상에 대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고 끈질기게 남기 때문이다.26) 다이사트 또한 동일한 문제가 알런에게 남아있음을 (알런을 안심시키고 잠들게 한 뒤에) 고백한다.

    라캉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말년인 1970년대에 이르러 상징계 안에서 결여를 겪는 욕망 보다는, 상징계 안에선 출현이 불가능한 ‘실재’와 어떻게 조우해서 향유를 실현할 수 있는지에 몰두하였다. 이는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분석강의」에서 말한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를 오랜 성찰을 거쳐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정신분석의 사명은 충동이 있는 실재계의 차원에 주체가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질서 내지 문화의 질서 안에서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교화되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의 즐거움을 주체에게 찾아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체가 타자의 욕망에 의해 소외된 ‘병리적’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하여 ‘정상적’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상 가로지르기’27)와 ‘증상과의 동일화’28)를 이뤄내야 한다. 이것이 라캉이 수정한 정신분석의 진정한 끝(목표)이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피터 셰퍼가 <에쿠우스>를 발표하던 비슷한 시기에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의 목표를 상징계의 차원에서 실재계의 차원으로 확장하면서 수정하였다. 만약 피터 셰퍼가 작품을 끝맺기 전에, 당시 새롭게 제시되던 라캉의 목표와 방법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어쨌을까. 아마도 다이사트를 통하여 전혀 다른 종결을 맺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알런이 원초적 정열을 거세당하지 않고서도 당당히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 한편, 다이사트 자신도 그러한 보람을 향유하는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추측하면서 글을 맺는다.

    25)왜냐하면 정신분석의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증상의 의미를 말하게 함으로써 깨어진 의사소통의 연결망을 재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하기를 통해 증상은 자동적으로 해소된다. 엘리자베스 라이트 편, 박찬부, 정정호 옮김,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 한신문화사, 1997, 670쪽.  26)증상은 하나의 암호화된 메시지일 뿐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쾌락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것이 해석이 완결된 후에도 주체가 자신의 증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위의 책, 671쪽.  27)요컨대 환상의 통과는 대타자의 비존재, 혹은 타자 속의 결여의 발견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주체로부터 너무 많은 향유를 요구하며, 주체를 억압하고 주체에게 상상적 정체성을 부여했던 대타자를 사후적으로 폐기하는 행위, 즉 대타자의 비존재와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환상의 통과를 통해 주체는 대타자에게로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향유, 실재, 존재에 접촉하며 대타자와의 분리를 달성한다. 조엘 도르, 앞의 책, 42쪽.  28)왜 분석의 끝이 증상과의 동일화인가? 증상은 ‘정의상’ 대타자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상은 대타자의 질서 속의 결여, 그리고 대타자의 한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주체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상징계로부터 배제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상징계 내부에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바로 정확히 그러한 이유로 인해 타자와의 동일화로 벗어나기를 원하는 주체에게 증상은 최종적 탈주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증상과 동일화함으로써 (지배적) 대타자 속에 자리 잡을 수 없는 부분충동의 만족, 즉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같은 책,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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