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Aufführung geht es um die Grenze zwischen Nord- und Südkorea. Die Bühne scheint den Kontrast der beiden Systemen von Nord und Süd zu zeigen. Auf der einen Seiten verkaufen sich selbst Südkoreaner unter dem bulgär-kapitalistischen System, auf der anderen Seiten sich Nordkoreaner wie Maschiene unter dem radikalen kommunistischen System verhalten. Aber in der Tat leben die Menschen unter den beiden versperrten radikalen Systemen unmenschlich. Die Struktur der Aufführung beruht sich auf die Asymmetrie der Energien: einerseits eskalisiert sich die Konkurrenz der beiden Systemen, andererseits fallen die Subjekte, die sich von der Konkurrenz abgewichen sind, in die Ohnmacht. Das Moto der Aufführung von Schwester Mokran bezieht sich auf das Gedicht von Ingeborg Bachmann, d.h. Von einem Land, einem Fluß und den Seen. “Daß uns nichts trennt, muß jeder Trennung fühlen.” Das Motor läßt sich konkretisieren, indem sich die gesellschaftlichte Realität des Südkorea d.h. hier und jetzt von Zuschauern verfremdet zeigt. Auf der Bühne tritt eine Grenzgängerin Mokran als Hauptrolle auf. Sie ist zwar von Nordkorea geflohen, aber kann sich nicht dem südkoreanischen System anpassen. Deshalb kann sie nicht weder zu Nord noch zu Süd gehören. Diese Spaltung der Identität fällt Mokran zugrunde. Der Untergang von Mokran ruft das Mitleid der Zuschauer hervor. Die Aufführung zeigt sich, daß man die Grenze zwischen der Bühne und dem Zuschauerraum überschreiten kann. Mokran und Taesan üben den Einfluß aufeinander. Diese Charaktierisierungsund Bühnentechnik lassen sich die Ästhetik der Grenzüberschreitung veranschaulichen.
두산아트센터의 경계인 시리즈로 공연된 <목란언니>(김은성 작, 전인철 연출, 2012년 3월 9일부터 4월 7일 공연)는 분단현실이 자아낸 비극을 탈북자 목란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남과 북의 엄혹한 현실적 경계를 문제 삼을 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심리적 경계를 넘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목란언니>에서 경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연극적 미학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분석하였다. 무대는 사방으로 트인 마름모꼴의 주 무대와 마름모꼴 두 개의 꼭지점에 설치된 두 개의 보조무대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의 마주보는 보조무대는 남북체제의 대비되는 상황을 예각화하여 보여주고 주 무대에서는 체제 대치에 의한 난장판의 사회상황을 낯설게 부각시킨다. 공연에서는 관객과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사방으로 트인 무대와 관객의 에너지를 공유하게 하는 역동적 동선을 통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넘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연극 <목란언니>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물화되어가는 남한사회의 인간 군상들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그 상황에 북에서 넘어온 청초한 인물 목란이를 대조시켜 보여준다. 인물형상화와 인물구도는 목란이라는 인물에게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도록 설정된다. 그러한 목란이 조대자의 자식들에게 새로운 영향을 주게 되고 특히 첫째아들인 태산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목란이 남한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북으로 다시 돌아가려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오염’ 되어 가는 것을 관객은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결국 목란은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홍등가에 불시착하지만 절망의 바닥에서도 태산과 나누었던 공감을 기억하게 된다. <목란언니>에서는 남과 북의 경계가 빚어내는 잔혹한 현실을 목란이의 파멸과정을 통해 형상화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찾아낸다. 무대 위에서 목란과 태산이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듯이, 극적 상황 속의 경계인 목란과 객석의 관객이 공감함으로써 남과 북의 경계를 넘을 심리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잉에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시 <어느 뭍, 강, 호수로 부터>는 극중 인물 허태강의 입을 통해 변주되어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는 철학 강의 중에 교수로서 학생을 향해 이 시를 읊고 있지만, 사방으로 트인 무대 위에 학생은 없다. 대신 배우의 호흡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에 있는 관객이 그 강의의 청자가 된다. 두산아트센터의 경계인 시리즈 중 하나인 <목란언니>(김은성 작, 전인철 연출, 2012년 3월 9일부터 4월 7일 공연)의 모토는 “갈라지지 않으려면 각자가 균열을 느껴야 한다. / 똑같은 허공에서 똑같이 베인 자리를 느껴야 한다.”1)로 설정된다. 말과 몸짓 이념 계층 등등으로 수없이 그어진 경계들은 빠른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겹쳐지고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공연은 바로 그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공연에서 특별히 문제 삼는 것은 남과 북의 경계이다. 관객이 그 경계를 직시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상처들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결국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다양한 연극적 기호들이 공연에서 중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3월 15일과 30일에 두산아트센터에서 있었던 공연 <목란언니>의 무대구조, 의사소통구조, 인물형상화 그리고 인물구도를 분석함으로써 경계 넘기의 미학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천착해 내려한다. 남과 북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철책으로 생겨난 유형·무형의 경계와 균열들이 무대에 어떻게 형상화되고 그것들을 넘을 수 있는 소통의 통로가 어떻게 제시되는지 분석해내려는 것이다.
1)바하만, 잉에보르크, 차경아 역, <어느 뭍, 강, 호수로부터>, 『소금과 빵』, 청하, 1986, 99쪽 참조. <목란언니>의 작가 김은성은 대본에서 이 시를 손질 했다고 밝히고 있다. 원본과 번역본 그리고 대본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방대한 분량의 이 시를 김은성은 아주 작은 부분을 발췌하여 <목란언니>의 맥락에서 경계의 의미를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목란언니>의 무대는 그 스스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백히 드러낸다. 마름모꼴의 주 무대에 연한 4개의 접촉면에는 계단식의 작은 객석이 설치되어 있고, 마름모꼴 중 마주보는 두 개의 꼭지점에는 작은 보조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작은 보조무대 하나의 중심에는 김정일 초상화가 커다랗게 붙어 있고 양옆으로 붉은 색 벽면에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는 조명이 비추고 있다. 맞은 편 보조무대의 중심에는 조대자 가족의 망치가 들어 있는 함이 설치되어 있고 김정일의 초상화와 대비되게 작은 사진들 즉 조대자의 시아버지 시할아버지 등 작은 사진들이 붙어 있다. 이 무대의 조명은 푸른색이 주조를 이룬다.
이 두 개의 작은 보조무대는 마주 보면서 시각적으로 대비를 명시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상황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한편 무대에서는 조목란의 아버지 조선호가 관객에게 등을 보이고 침묵하면서 초상화를 계속 그리고 있고, 다른 무대에서는 조대자의 첫째 아들 허태산이 멍한 시선으로 식빵을 무의미하게 뜯어 먹고 있다. 한편에서 재입북한 탈북자 리명철이 당의 은혜를 찬양하는 연설이, 다른 편에서는 김정일이 탈북 당시 하나님께서 내린 은총을 역설하는 것이 교차편집처럼 동시 진행된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조목란의 어머니 남금자가 어버이 수령은 태양이며 젊은이들은 장군을 중심으로 도는 위성이라 지칭하며 기계적인 무용동작을 지시한다. 다른 편에서는 조대자가 망치를 들고 가문 대대로 전해진 살기 위한 투쟁을 역설한다. 이 마주 보는 작은 무대의 장면들은 영화의 몽타주처럼 남북 체제의 대비를 명백히 드러내고 그로 인한 남북의 경계를 강조하여 명시한다. 충돌 몽타주가 그러하듯 그 두 개의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대조를 이루지만, 심층적으로는 의미의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있다. 관객에게 등을 보이며 침묵으로 시종일관하며 김정일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조선호나 초점 잃은 시선으로 식빵을 뜯어 먹고 있는 허태산은 남과 북의 경계가 만들어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주체들에 다름 아니다. 어버이 수령을 예찬하는 리명철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열광하는 김정일 모두 맹목적인 광신자들이라는 점에서 짝패이다. 김일성을 태양으로 신봉하는 도구적 예술가인 남금자와 천민자본주의의 맹목적 생존전략을 체화하고 있는 조대자를 배우 황영희가 일인이역으로 담당하고 있음은 두 인물이 동전의 양면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보조무대는 남과 북의 체제를 대비시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결국 두 체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 있는 쌍생아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중국에 불시착한 목란이 노래 부르는 장소가 바로 남한을 형상화해온 조대자 가족의 망치함이 있는 곳이고 공연 내내 커튼으로 감추어져 있던 거울이 드러난다. 그 다이아몬드형의 거울 조각들의 조합을 통해 분열된 목란의 모습뿐 아니라, 맞은편에 형상화되는 북의 체제를 되받아 반사하며 해체시킨다. 이렇게 무대는 조각난 거울에 담긴 남과 북 그리고 인간시장이 있는 그 어디든 모두 서로 닮아 포개져 있는 상황과 그 안에서 분열되어가는 경계인을 문제 삼고 있다.
마름모꼴의 중앙무대는 ‘조선팔도의 난장판’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즉 무대는 조대자의 룸살롱, 그의 자식 허태산, 허태강 그리고 허태양의 원룸들, 대학교 강의실, 초등학교 교실, 탈북자 김정일 배명희의 임대아파트, 그리고 실향민 어버이연합 큰잔치와 통일 민주연합 청년대회가 열리는 강당 등 남한에서의 삶의 공간으로 변주된다. 인간의 노동력을 자본으로 환산해주는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는 인력 뿐 아니라 몸 자체를 파는 매춘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매춘의 대모 조대자가 중앙무대와 마름모꼴의 한쪽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의 틀을 공연의 중심에 놓겠다는 공연개념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대자가 등장하여 룸살롱의 다국적 아가씨들을 향해 화류계의 은어들로 가득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무대 위에 아가씨들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이 아가씨들의 위치에 놓인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낯설게 다가오지만, 공연이 진행되면서 천민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 속에 노동력을 팔고 있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관객이라면, 자신의 삶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게 하기 위한 장면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무대의 특성상 때때로 극적 환영을 깨고 관객을 향해 직접 소통을 시도하는 매개적 소통구조2)가 강조된 형태의 공연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는 관객에게 직접 말 걸기의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배우의 시선과 몸짓이 때때로 관객에게 직접 향하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매개적 소통을 시도했다. 이는 상당히 절제된 표현방식이면서도 심리적인 경계 넘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예컨대, 허태강의 강의나, 실향민 어버이연합 큰잔치 혹은 통일 민주연합 청년대회 등에 학생이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혹은 청년들을 등장시키는 대신 배우들은 마치 관객들이 그런 청중인양 시선을 던지며 반응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북한가요 ‘반갑습니다’나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의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박수를 치면서 상호 호응을 하게 된다. 실향민 어버이 연합 큰 잔치 장면에서 관객은 실향민은 아니지만 배우와 관객으로 만나니 반갑다는 의미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통일 민주연합청년은 아니지만 택시요금 5만원도 안 되는 평양에 갈 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공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다. 이렇게 연극의 내부적 의사소통과 관객이 속한 외부적 의사소통이 교차하는 이중의 의사소통구조3)의 활용으로 공연은 극의 초두부터 극적 환영과 현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마름모꼴 주 무대는 객석과의 접촉면을 극대화하였고, 객석도 도합 100여석으로 제한하여 무대진과 관객의 에너지 교환이 밀착되도록 유도한다. 게다가 무대가 사방으로 트여 있어 관객은 배우들의 앞모습과 옆모습 뿐 아니라 뒷모습까지 샅샅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관객 스스로도 어둠 속에 숨어 있을 수 없어 무대와 객석이 모두 드러나는 공간을 형성한다. 배우들은 나선형의 동선을 활용하여 관객과의 고른 시각 접촉을 시도한다. 그 나선형의 동선은 배우 하나하나에게 요구될 뿐 아니라, 집단 등장일 경우는 무대와 객석의 접촉면을 돌며 움직임의 역동성을 유도해낸다. 예컨대 인물들의 삶이 몽타주처럼 병렬적으로 진행되다 극의 중요한 순간에는 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모티브 대사나 노래 몸짓들을 동시에 쏟아내며 주 무대와 객석의 접촉면을 나선형으로 돌며 그 흐름 속에 관객들을 포함시킬 정도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화한다.
무대 마름모꼴의 한쪽 면과 객석 사이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음악감독 채수린이 위치한다. 그녀는 공연 내내 아코디언 연주로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극 전체의 리듬을 조율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무대와 객석의 경계에서 음악으로 공연에 기여하는 채수린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연극 <목란언니>가 채수린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안내서에 나와 있는 작가 김은성의 헌사4)와 연출 전인철의 언급5)은 채수린이 극적 환영과 현실 사이에 놓인 존재임을 명시한다. 극장 안에서의 그녀의 위치는 따라서 다층적인 의미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악사로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에 앉아 있는 채수린은 극중의 핵심 사건의 실제 모델로서 현실과 극중 환영의 사이 공간에 놓인 인물이 되고, 동시에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드러내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무대구조와 의사소통 방식 그리고 음악감독 채수린의 역할 등을 통해 연극 <목란언니>는 남과 북, 무대와 객석, 현실과 극중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명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2)Pfister, Manfred, Das Drama, München: W.Fink, 1982, 20ff. 3)Poschmann, Gerda, Der nicht mehr dramatische Theatertext, Tübingen:Niemeyer, 1997, 299쪽 참조. 4)“이 작품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아코디언, 채수린 선생에게 바칩니다.”(공연안내서, 9쪽), 5)“<목란언니>의 여러 소재는 채수린 선생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북쪽 사람들의 일상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주신 채수린 선생께 정말 감사드립니다.”(공연안내서, 11쪽, 연출 전인철)
<목란언니>의 표면적 대비는 남과 북의 체제에서 선명히 부각되고 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엄혹한 경계를 가시화한다.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내며 펼쳐져 있는 그 광대한 이중의 철책과 지뢰로 매설된 DMZ만큼이나 남과 북의 체제 경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대는 그것을 표면에 가시화한다. 그러나 이작품을 떠받치고 있는 심층구조는 남과 북의 체제가 파생시키는 조선팔도의 난장판과 그 속에서 무기력해져가는 주체 사이의 에너지 불균형이다. 그러기에 작가 김은성은 침묵 속에 갇힌 조선호와 초점을 잃은 허태산이 발하는 정적인 에너지와 빠른 템포의 난장판 사이의 “언발런스가 이 연극의 숨은 뼈”6)라고 명시한다. 조선팔도의 난장판을 작가와 연출가는 다음과 같이 남과 북 모두의 체제에 속한 다양한 인간들의 동시다발적인 외침과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넘는 나선형의 동선으로 형상화하여 관객에게 역동적인 에너지로 전달되도록 한다.
조선팔도의 난장판이라 명명한 것에도 알 수 있듯, 서로의 대치구도 속에서 북한은 더욱 경직된 폐쇄회로 속에 갇히고 남한은 극단적인 경쟁 속에 인간들이 물화되어 가는 상황이 나타남을 낯설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 난장판 속에 발맞추어 돌아가지 않고 그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있는 조선호나 허태산 같은 주체들은 침묵에 갇힌 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극중에서 조선호의 내면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허태산의 우울증은 전면에 나타난다. 조선호와 허태산의 정적인 에너지는 조선팔도에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삶의 난장판이 지닌 역동성과 대비를 이루면서, 남과 북 체제가 공히 지니는 균열과 모순을 낯설게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관객이 속한 ‘지금, 여기’ 즉 남한 사회의 모순에 초점이 모아진다.
관객이 속한 이곳 우리의 삶은 바로 조대자와 그의 자식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조대자는 모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우선 개인적 차원에서 그녀는 어미로서 아비 없는 세 자식을 눈물과 억척으로 길러낸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어느 어머니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자식들을 안고 입맞춤하거나 태산의 우울증에 함께 절망하고 그를 살려내기 위해 온갖 헌신을 한다. 태강과 태양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다. 태양에게 이르는 말처럼 아무리 큰 산과 강이라 하더라도 여성은 그들을 품어 안는 빛이고 볕임을 가르치고 실천한다(대본 18쪽). 태산의 입을 빌면 그가 7살 때 어머니인 조대자가 같이 죽자고 했다고 한다. 남편이 죽었을 때 어린 세자식과 남은 어미의 절망적 심경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후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그 자식들을 살려내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 조대자는 가혹한 자본주의의 경쟁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으며 그러기 위해 다른 이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착취해온 포주에 다름 아니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라는 명분아래 그녀는 우선 자기 자신을 자본주의의 희생물로 바친다. 정당한 노동을 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쉽게 빨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술 팔고 몸 팔아 자본을 축척해왔음이 그녀 스스로의 언급과 자식들의 언급을 통해 밝혀진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 자성은커녕 이제 매춘의 대모가 되어서는 룸살롱의 아가씨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즉불로 녹여버려” 돈을 끌어 모으라고 훈계하고, 자랑스럽게 자신이 그 무서운 블랙맘마임을 강조한다.
한번 찍은 먹이는 반드시 먹는 독성 강한 거대한 뱀 조대자는 매춘이라는 인간시장에 자신만만하게 똬리를 틀고 아가씨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내몬다. 그러한 사회적 차원의 삶의 방식은 개인적 영역에도 상당히 영향을 준다. 즉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과하는 바람에 실직 위기에 놓인 태강에게 삶이 바로 무한경쟁의 마라톤임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면서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교수로 재취업하도록 5000만원을 챙겨준다.
협동이라든가 인간다운 삶의 리듬, 성찰할 공간 등은 그녀에게서 전혀 고려할 것이 아니다. 밟히지 않기 위해 먼저 뛰어가 따라잡고, 뒤에 처지는 자들은 그곳에 계속 있게 머물게 해서 점점 더 많이 앞서가고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이 삶의 룰임을 그녀는 자식에게 주입하고 있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헬레네 바이겔이 억척어멈을 연기할 때처럼, 배우 황영희는 조대자를 형상화하는데, 그 인물의 그악스러움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낯설게 하기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녀의 말은 우선 대본에도 지시되어 있듯이 ‘온갖 말’ 즉 다양한 사투리를 때에 따라 활용하면서 카멜레온과 같은 생존전략을 가시화한다. 깡마른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 외투에 호피 무늬 옷깃과 뒷 주름을 첨가함으로써 들판의 하이에나처럼 살아온 그녀의 삶을 사회적 게스투스(Gestus)7)로 드러낸다.
그녀의 삶의 방식을 압축하는 기호인 소도구 ‘망치’도 게스투스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대 이곳저곳을 두드리며 자식들을 위협하는 게스투스는 그녀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삶아 왔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망치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그것이 계속 대물림을 해가는 극적 상황을 통해 그녀 개인의 삶을 축약하는 기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 분단이후에는 남한의 공동의 삶을 압축하는 기호로 확장된다. 조대자는 시아버지인 허만우가 그 망치로 민족의 지도자인 김구의 은신처를 짓고 “일본놈을 때려잡”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 후 조대자의 남편 허풍걸이 사우디에 노동하러 갈 때 지니고 갔다가 그곳에서 사고로 죽고 난 후 망치는 조대자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고에 의해 망치는 민족이 위기에 처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자기 방어적 폭력을 수행하던 도구였고, 그 후 남한의 경제개발과정에서 노동력 수출을 통해 외화벌이를 하는데 기여한 산업역군의 기호를 함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망치가 조대자에게 넘어오면서부터는 인간을 물화시켜면서 자본을 축적해온 남한의 천민자본주의를 축약하는 기호로 확장된다. 그러나 “회장님(강국식) 밖에 없”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기세등등한 조대자가 강국식에게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강국식이 “개미들 옆구리 털어서 태평양으로 다이빙 해버”(47쪽)리는 바람에 조대자는 빈털터리가 되고 불법의 고리에 물려 도망자 신세가 된다. 태강에 의해 “미국 아저씨”라고 불리는 강국식이 성조기로 된 망토를 걸치고 등장하는 점은 그녀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세계적 자본주의 고리에 엮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천민자본주의의 첨병인 조대자도 결국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의 고리 속에서 몰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태산이와 같이 죽으려 했던 절망의 바닥까지 다시 내려가게 된다. 극의 마지막에 불안한 도망자가 되어 약이 없으면 잠을 잘 수도 없는 초췌한 모습으로 태산 곁에 웅크려 누운 조대자를 관객은 바라보게 된다. 전쟁에 참여하여 이득을 보고 그것을 통해 자식을 먹여 살리려던 억척어멈이 늙어 빠진 몸으로 자식 셋을 모두 잃고도 앙상하게 남루해진 이동주보를 끌며 “다시 장사하러” 떠나는 모습처럼8), 조대자도 자신의 실패와 절망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공연은 조대자라는 인물을 낯설게 형상화함으로써 성찰 없이 끝없이 달려 나가는 주체들과 그들이 속한 잔혹한 무한경쟁의 사회구조 자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를 함축하는 거대기호로서의 어머니 조대자는 세 자식을 길러내었다. 우리는 여기서 태강의 다음의 대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시대를 조대자가 대표한다면, 시대의 감시자들로서 그녀의 세 자식이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 박사인 허태산과, 철학교수인 허태강 그리고 소설가인 허태양 셋이 바로 조대자의 자식들인 것이다. 시대를 감시해야할 그들은 그러나 우울증에 빠져 산송장 같이 지내거나, 철학과를 폐과하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었거나 작품을 출판하지 못해 자서전 대필가로 전락해버린다. 조대자가 자식들에게 압도적인 지위를 지닌 것처럼, 자본이 압도하는 사회 속에서 시대의 감시자들은 제 기능을 상실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조대자 가족 내의 균열은 남한 사회의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낯설게 보여주어 성찰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태강의 입으로 인용하는 잉에보르크 바하만의 시처럼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가 “갈라지지 않”기 위해, “각자가 균열을 느끼”며 스스로를 비판하여 경계 넘기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6)김은성, <목란언니> 공연대본, 1쪽. 이후 대본인용은 본문에 쪽수만을 밝히겠음. 7)게스투스는 사회적 몸짓으로 브레히트가 배우가 인물의 사회적 특성을 명시하여 보여주도록 강조하여 사용한 용어이다. vgl. Brecht, Bertolt, Gesammmelte Werke in 20 Bänden (Hrsg.v.Suhrkampverlag, Frankfurt a.M., 1982), Bd.16, s.895f. 8)Brecht, Bertolt, GW., Bd.18, s.92.
재독 철학자 송두율은 자신을 일컬어 경계인(境界人, Grenzgänger)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지방에 출몰하던 마적을 의미했으나, 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 사이를 넘나들며 두 세계를 소통시키던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border rider’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 의미로 정착되었다”9)고 경계인을 정의하였다. 특히 이쪽 아니면 저쪽에 속할 것을 강요하는 남북분단 체제에서 두 체제를 가로 지르며 상생의 길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그는 경계인으로 자체했던 것이다. 그러한 자발적인 경계인과 달리 <목란언니>의 조목란은 “비자발적 경계인”10)이다. 그녀는 북한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북한의 체제에 비판적이어서 남으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밀수사건에 연루되어 북에 남아 있으면 자신과 가족이 정치범으로 몰릴까봐 어쩔 수 없이 탈북한 것이다.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사회적응에 좌절하며 실향민으로 부유하게 된다.
조선팔도의 난장판을 형상화하는 극의 서막이 끝나고 본격적인 극적 사건이 시작될 때, 관객은 김정일의 임대아파트에 흐트러져 누워 있는 조목란을 보게 된다. 이어지는 김정일의 호통과 배명희의 다독임으로 목란의 상황이 재구성된다. 즉 평양 금성학원을 나온 엘리트인 목란이 탈북한지 얼마 안 되어 정착금과 아파트 보증금 모두를 사기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절망하여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배명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상황임을 관객은 알게 된다. 남과 북의 경계를 넘어오긴 했으나,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의 바닥까지 내던져진 상태의 목란과 관객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돈만 있으면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김정일의 이야기에 목란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게 된다.
경계를 넘어온 목란이 경험한 남한은 “거기발싸개 같”(9쪽)11)은 지리멸렬하고 남루한 곳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곳을 부정하고 자신이 떠나온 ‘내 조국’ 북한으로 되돌아가고자한다. 공화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같이 ‘내 조국’에서 살고 싶은 염원(10쪽)이 목란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는 극중 인물조목란의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탈북한 사람들의 41.3%가 소속감을 느끼는 나라를 북한으로 생각한다는 조사결과를 보아도 개연성이 충분하다.12) 그리고 그녀가 ‘내 조국’ 즉 북한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고군분투가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경계인 목란이라는 중심인물이 살아가는 동인이다. 그 과정에서 목란은 조대자와 그의 자식들과 만나게 된다.
목란은 산목련으로 커다란 푸른 잎 그늘 속에 하얀 꽃봉오리로 있다 만개하면 붉은 꽃술을 드러내는 청초한 꽃이다. 김일성이 특별히 좋아했고 1991년에는 북한의 국화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런 꽃의 이름처럼 목란이란 인물은 단아하고 청초한 이미지의 북한처녀를 대표한 아름다움을 함축하게 된다. 북한 주변부에서 그 체제를 비판하던 인물이 아니라 북한에서도 ‘평양 엘리트’였던 북한 체제가 키워 낸 꽃이 바로 목란인 것이다. 목란이 부르는 노래 ‘려성은 꽃이라네’, ‘아직은 말 못해’ 등도 북한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성의 전형을 형상화한다. 도시의 총각보다는 금골에서 돌을 캐는 동무가 마음에 들지만 말하지 못하는 수줍어하는 여성, 가정의 살림을 알뜰살뜰 돌보는 여성을 이상화하는 이 노래에 목란은 비판적 거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금빛으로 장식된 김일성 동상에 대해서도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낼 수 있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란 남한 젊은이와는 다른, 어리숙하고 청초한 이미지에 배우 정운선의 외모와 음성은 잘 조화를 이룬다. 동그랗고 동양적인 얼굴윤곽과 도톰하고 단아한 몸매를 지닌 정운선이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을 덮는 연보랏빛 스커트를 입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거나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모습은 목란의 청초한 이미지를 살려 내기에 충분했다.
극 전반부에 목란은 조대자와 그녀가 속한 룸살롱의 아가씨들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날카로운 얼굴윤곽과 검은 의상에 군화 같은 부츠를 신은 조대자의 외모와 화류계의 은어로 가득한 언어는 조목란의 청초한 외양과 순박한 평양말과 대비를 이룬다. 그러기에 목란은 허태산의 포르노적 수사 “빨아”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지를 들고 빨래를 하러 나가게 되는데, 이때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이때의 웃음은 언어유희에 의한 아이러니에서 출발하지만 목란의 순수함에 대해 관객이 마음을 함께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이렇게 조대자와 룸살롱의 아가씨들의 혼탁한 검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목란의 오염되지 않은 순결함은 대조를 이루면서 관객의 동조를 이끌어낸다.
북으로 돌아갈 돈을 벌기 위해 목란은 아코디언을 들고 조대자의 룸살롱에 찾아오지만, 그곳이 술집인 것을 알고는 떠나버린다. 이렇게 극의 초두에 목란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정당하지 않은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당당함을 지닌다. 조목란이 일을 시작하는 곳은 룸살롱이 아니라 허태산의 원룸이다. 그녀는 태산의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간병을 시작한다. 그 곳에서 목란은 태산 뿐 아니라 태강 그리고 태양과 조우한다. 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에서 닦이지 않은 태도와 셈법 그리고 몸짓은 태산 태강 태양에게만 신선한 것이 아니라, 그 세 남매와 닮은 관객에게도 그러하다. 다른 체제에 와서 주눅이 들만도 한데, 당당한 목란의 태도는 관객에게 상당한 호의를 불러일으킨다. 그 당당함은 태산이 곁에서 잠들 것을 요청할 때에도 태권도 삼단이라며 제압하고, 태양이 북한의 체제에 대해 비아냥거릴 때에도 맞서고, 태강의 상투적인 유혹적 몸짓에 저항하는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녀의 순박함과 당당함에 이 세 남매는 매료되고 영향을 받는다. 태산이 그녀로 인해 우울증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비야냥거리던 태양이 목란을 좋아하게 되고 그녀에게서 작품의 영감을 받는다. 태강은 목란과 함께 한국을 떠나 함께 살고 싶어 하게 된다.
관객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비판적으로 형상화된 조대자에게서는 남한사회 자체의 문제점이나 기성세대를 보게 되고, 그녀의 자식들과는 동질감을 느낀다. 태산, 태강, 태양의 삶의 방식은 현재 남한 사회 속에서 잘 살아내려 하지만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눈높이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남매의 시선으로 관객은 목란을 바라보게 된다. 나와는 다르지만, 나에게 없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목란을 아름답게 여기는 시선이 이 세 남매의 시선이고 이는 이상적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낯설고 아름다운 목란이라는 존재에게 태산 태강 태양이 차츰 영향을 받고 좋아하게 되듯이, 관객도 그와 유사한 심리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극의 중심에 위치하며 관객의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도록 설정된 목란이 엄혹한 남과 북의 경계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몰락해가는 과정은 관객의 연민을 자극한다. 목란의 극적 행동의 동인이 북한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임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 경계를 넘으려면 현 체제에서는 불법을 저질러야 하고 그 불법적인 거래에는 많은 돈이 요구됨과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유사시에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그 거래를 성사시켜줄 오천만원의 출처는 바로 조대자이다. 목란이 아무리 정당한 노력을 해서 월급을 받는다 해도 그 셈법 자체가 이미 조대자가 룸살롱의 아가씨들을 착취하는 방법을 닮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월부터 12월 즉 10개월 동안 매달 300만원을 줄 것을 연말에 한꺼번에 주는 대신에 오천만원을 주겠다는 약속 자체가 목란을 10개월 이상을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 동안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발을 묶는 방법은 이미 조대자의 사업수완에 포함된 것이다. 그 그물에 조목란이 일단 걸리게 된다. 그리고 10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온 때, 조대자는 목란에게 결정적인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너, 앞으로 태산이랑 계속 살래? 아니면 오늘 짐 싸서 나갈래?”(45쪽)
이 요구는 목란에게 양심을 팔거나,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할 것을 내포한다. 목란은 이 지점에서 깊은 갈등에 빠진다. 그 막다른 골목에서 망설이다 목란은 등 돌리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조선호가 있는 북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목란이 무대 위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양심을 내려놓고 조대자가 파 놓은 함정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깠숨니다. 계속 이깠숨니다.”(45쪽)
그리고 조대자를 엄마라 부르며 그 집안의 ‘망치’를 물려받는다. 망치를 집어든 조목란은 난장판을 형상화는 나선형의 인물군상의 동선에 합류하게 된다. 이제 바야흐로 조선팔도의 혼이 나간 난장판에 조목란은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12월이 되자 목란은 도망가 버린 조대자를 찾아 미친 듯이 무대를 누빈다. 자신이 가르쳐준 태산의 아코디언 연주를 시끄럽다고 야단치고 조대자 어디 갔냐고 반복해서 태산을 몰아친다. 뿐만 아니라 태양을 찾아가서는 집세를 빼거나 시나리오 집필비라도 해서 오천만원을 내놓으라고 ‘망치’로 위협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청초하고 화사하고 당당한 목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광기에 빠져 있는 목란은 짙은 회색의 남루한 털외투를 입고 망치를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대본에는 있지만 공연에서는 발설하지 않은 목란의 두 가지 언술은 의미심장하다. 극의 초두에 “거지발싸개 같은 이 땅에서는 하루도 살기 싫”(9쪽)다던 목란이 극 말미에 가서 거울 속의 자신이 “거지발싸개 같은 년 ”(50쪽)이 되어 버렸음을 인식한다. 북한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양심마저 내던지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목란은 차츰 오염되어 거지발싸개 같은 수렁 속에 빠져 그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목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는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남한의 비인간적 사회구조와 그에 속한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공연이 계획하고 있는 이상적 관객의 시선은 태산의 다음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극의 에필로그에서 관객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북한으로 향한 목란이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중국 홍등가에 불시착한 모습을 보게 된다. 허벅지까지 트인 딱 달라붙은 붉은 원피스를 입고 거울을 보고 붉은 루즈를 바르는 목란의 게스투스는 조대자의 룸살롱의 아가씨와 동일한 몸짓이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조대자의 젊은 날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조대자와 목란이 차이점이 있다면, 목란이 홍등가에 있게 된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천만원을 김정일에게 넘기고 출국 서류를 넘겨받고 남한을 떠난 그녀가 중국에 불시착한 이유가 공연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관객은 아마도 브로커 중 누군가의 속임수로 목란이 그곳에 팔려갔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란은 절망하고 있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태산과의 공감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다른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한 목란이 중국어로 ‘사랑의 미로’를 흐트러진 눈빛으로 부를 때 관객은 깊은 연민을 느끼며 그녀가 다시 한 번 절망 속에서 일어서기를 바라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조목란이 유목란과 의미심장한 조우로 극이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저 멀리 조선호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고, 가까이 허태산이 있는 이 사이공간이 무대에서 형상화하는 공간이다. 바로 관객이 있는 지금, 여기를 그렇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 사이공간에 조목란과 유목란의 분열된 자아가 있다. 이곳에서 잊을 수 없고 돌아가고 싶은 ‘내 조국’을 멀리 바라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조목란은 향수어린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휘청휘청” 흔들리는 자아로 살아가게 되듯이, 영문도 모르는 사이 부모를 잃고 언어를 잃어버린 유목란은 “멀뚱멀뚱”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주눅 들어 지내고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조목란이 홍등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유목란이 망치를 향해 다가가는 장면은 이 두 인물의 오버랩을 통해 그러한 목란이가 하나가 아니라 복수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목란이들’의 운명을 변주하며 강조하기 위해 극중극이 설정되기도 한다. 태양이 목란에게 영감을 받아 오영환과 완성한 영화 <북한여자 려목란>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연은 남과 북의 분단이 만들어낸 경계에 의해 정박할 수 없는 유민이 된 존재들 즉 ‘목란이들’을 형상화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연민어린 시선을 보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목란과 애정선을 형성하고 인물은 허태강이다. 그러나 공연은 그 둘의 사랑이 성장하고 남과 북의 체제에 의해 좌절되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그 애정선을 보조줄거리로 삽입하고, 공연의 주 줄거리로 목란과 태산의 교감을 설정한다. 목란이와 같은 경계인에 대한 우정 어린 공감을 공연이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의 중심에는 남한의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목란과 태산이 위치한다. 그들은 극의 초두에 같은 에너지로 출발한다. 주 무대에 있는 두 개의 기다란 벤치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지만 김정일 아파트의 침대로 형상화되는 벤치는 허태산의 원룸의 침대로도 사용된다. 그리하여 목란이 음독자살에 실패하여 누워있다 일어나는 그 벤치에서 허태산도 손목 긋는 자살시도가 미수로 끝나 일어난다. 이 두 장면은 목란과 태산의 처음 상황을 오버랩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닮은꼴로 시작하는 목란과 태산은 각기 다른 동기로 일어나게 된다.
목란은 이미 언급했듯 ‘내 조국’인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하눌에 사다리라도 놓”을 기세로 벌떡 일어난다. 갑자기 장전된 높은 에너지로 출발하는 목란이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잔혹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오염되고 결국은 제3국에 불시착한다. 반면에 태산은 목란의 공감을 바탕으로 아코디언을 배우며 결국 자신을 추스르고 어머니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일어선다. 이렇게 공연은 한편으론 목란의 파멸과정을 통해 우리가 속한 현실이 그만큼 잔혹함을 직시하도록 하며, 다른 한편으론 태산을 통해 희망의 빛을 암시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목란과 태산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상호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경계 넘기의 시발점을 제시한다.
프롤로그부터 조선팔도의 난장판과 균열을 일으키는 인물로 설정된 태산은 멍한 시선으로 관객을 응시하거나 침대에 누워 말도 안하고 있는 산송장과 같은 존재로 무대에 존재한다.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미 자살시도를 했고, 다시 그럴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설정된다. 조대자는 그에 대한 연민으로 고군분투하고 태강과 태양을 불러 모아 그를 도울 것을 명령하고 위협한다. 그의 우울증의 원인은 실연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가 느끼는 존재의 허무는 7살 때 그의 어머니가 이불 속에서 같이 죽자고 속삭였던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한 태산과 목란이 공감하는 것으로 상호영향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지닌 목란과 태산은 공감함으로써 소통의 통로를 찾게 된다. 태산은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그 느낌. 온몸으로 중력을 느끼면서 빨려 들어가는 그 느낌”이라며 “숨 쉬는 게 파도”라고 한다. 그러한 느낌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 남한 사회에 대해 이 둘이 느끼는 염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태산이 느끼는 상실의 종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사랑의 흔적은 함께 마셨던 빈 깡통, 깍두기를 담아 주었던 빈 통, 연인의 손길이 남아 있는 쇼핑백 손잡이 등등이다. 그에게는 그때 받았던 물건의 상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그 물건에 담겼던 마음이 너무 소중하여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대단히 비자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바탕을 거부하고 바이킹 같은 삶의 현실을 통감각으로 인지하는 태산은 목란이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목란과 태산의 상호영향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음악이 기여한다. 목란이 ‘사랑의 미로’를 북한식으로 개사한 ‘해 솟는 백두여’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자 태산이 관심을 표하고 말문을 여는 것으로 이 둘은 대화를 시작한다. 태산이 원래의 가사를 가르쳐주자 목란은 태산이 잠들 때 그 노래를 다시 부른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목란이 중국 홍등가에서도 이 노래를 부른다는 점도 괄목할 만하다. 남한에서의 많은 경험 속에서 목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태산이 가르쳐준 ‘사랑의 미로’이다. 같이 살자던 태강이 그녀의 기억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산이 지닌 순정성이 목란에게 각인되어 남아 있는 것이고, 그녀가 절망의 바닥에서도 살아갈 한줄기 희미한 빛이 된다.
태산에게도 목란의 음악은 깊은 영향을 준다. 목란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태산은 마음을 내려놓고, 목란에게서 아코디언연주를 배우며 일어선다. 그리하여 태강과 태양이 도피하거나 적응하는 것으로 시대의 감시자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과는 달리, 태산은 ‘똥과 오줌의 역사’라는 인간 역사의 바닥을 집고 일어서게 된다. 극의 말미에 가면 그는 도망자가 된 어머니 조대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며 잠을 재우고,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목란이가 주었던 위로의 자장가와 목란의 중요한 소도구인 아코디언이 극의 말미에는 태산에게 옮겨와 자신과 절망하고 있는 어머니를 위로할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란과 태산의 공감과 상호영향은 너와 나의 순정한 만남이 결국 남과 북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극의 모토처럼 “똑같은 허공에서 똑같이 베인 자리를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경계 넘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9)송두율, 『경계인의 사색』, 한겨레신문사, 2002, 5쪽. 10)조보라미는 그녀의 논문에서 남북의 대립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할 수 없게 된 인간 군상들을 ‘비자발적 경계인’이라 규정하면서 분단희곡의 인물유형들을 분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그녀의 논문 「분단희곡에 있어서 ‘경계인’의 위상과 의미」(『한국극예술연구』, 제 32집, 2010, 313-314쪽) 참조. 11)이 표현은 공연에서 생략되었다. 12)『경향신문』, 4월 6일자.
공연 <목란언니>는 마주보는 보조무대와, 남한 자본주의의 첨병인 조대자가족과 탈북자들을 대비시키는 인물구도를 통해서 남과 북의 경계를 예각화하여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사방으로 트인 주 무대를 등장인물들이 휘돌며 관객과 에너지를 심도 있게 공유하도록 함으로써 경계 넘기의 소통을 시도한다.
관객이 속한 지금․여기 남한 사회의 무한경쟁과 비인간적인 삶의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 조대자가 벌이는 인간시장 즉 매춘사업을 부각시킨다. 그러한 환경 속에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꽃의 이미지를 한 목란이란 인물을 던져 놓는다. 청초한 이미지의 목란은 조대자 가족과의 인물구도를 통해 긍정적으로 형상화되고 이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환경 속에서 그러한 목란이 정체성을 상실하며 오염되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관객은 그녀의 환경 즉 남한사회와 남과 북의 경계가 얼마나 잔혹한가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가 그렇게 그리던 조국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의 또 다른 인간시장에 내동댕이쳐진 결말을 바라보며 관객은 연민에 빠지게 된다.
엄혹한 남과 북의 경계에서 어느 곳에도 정주할 수 없는 ‘목란이들’이 유민으로 전락하는 삶의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이 공연에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 놓은 출구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목란과 태산이 만나 공감을 바탕으로 소통의 통로를 열고 서로 영향을 주어 멀리 떨어져서도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관객들도 공연을 통해 목란이와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과의 심리적인 동화과정을 경험함으로써 내적인 경계를 허물어갈 수 있을 것이다. 탈북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고 마음속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커튼콜이 끝나고 음악감독 채수린에게 조명이 집중되면 그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아코디언에 온 마음을 담아 연주한다. 그 연주 속에 그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숨을 걸고 탈북을 했던 상황과 남한에서의 힘겨운 삶의 여정이 응축되어 있음을 관객은 짐작할 수 있다. 남과 북의 경계선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 그 위험천만한 경계를 넘을 일도 되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연은 남과 북의 만남이 추상적이거나 제 3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관객이 처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남한에 온 탈북자와 관객의 만남은 일상에서 마음속의 경계만 걷어내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실재성을 지닌다. 그리고 통일을 과정으로 인식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체제간의 통합이전에도 이미 이러한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직접 만나 교류하고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가능함을 공연은 선취하여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가 “향수에 겨워 경계를 넘어 서게 되”는 날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