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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Rhetoric of Revelation and the Politics of Prophecy: A Reading of Ginsberg’s “Howl” and “Kaddish” 계시의 수사와 정치학―긴즈버그의「울부짖음」과 「캐디쉬」를 중심으로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Rhetoric of Revelation and the Politics of Prophecy: A Reading of Ginsberg’s “Howl” and “Kaddish”
KEYWORD
Allen Ginsberg , “Howl” , “Kaddish” , rhetoric of revelation , mad-ness , shaman-prophet-poet
  • I. 계시의 수사와 미국시 비평

    미국 현대 시인 중에서 긴즈버그(Allen Ginsberg)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시단에서의 영향력, 시대적 상징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계에서 외면되고 있는 시인도 드물다. 물론 그가 사망한 1997년 이후 몇몇 학술회의 등을 통해 비트세대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작업이 있긴 했었지만 간헐적인 논문 생산에 그치고 본격적인 논의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양상이다.1 학자들의 긴즈버그에 대한 최근 평가는 대개 형식이 없다거나 시가 단순한 호언장담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비판들이 대부분인데,2 이는 펄로프(Marjorie Perloff)가 지적하는 대로 긴즈버그의 문학적 성취와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비평계의 무지와 무관심의 반영일 뿐이다(201). 사실 긴즈버그나 비트세대에 대한 무관심이나 부정적 평가는 정치와 시학의 접점을 상실한 21세기 미국 문학계의 현재적 상황에서 연유하며, 인간의 능동성과 시적 언어의 혁명적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탈구조주의 이론들에 침윤당한 미국 학계 패러다임의 소산이다. 본 논문은 긴즈버그의 대표적인 두 편의 시「울부짖음」“( Howl”)과「캐디쉬」“( Kaddish”)를 읽으면서 그의 계시의 수사와 예언자적 시인관의 특질을 살펴보고, 저간 논의들의 한계를 넘어서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해보려 한다.

    주류 평단에서 제외되어 있는 긴즈버그의 현주소는 일차적으로 예언적 언어에 대한 현대 비평의 부정적 태도에서 연원한다. 미국 계시적 수사의 전통은 청교주의에서부터 시발하는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허친슨(Anne Hutchinson) 의 반율법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휘트먼(Walt Whitman)의 화려한 낭만주의적 성취를 거쳐 20세기 긴즈버그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계시적 수사에 대한 미국 문학계의 비판적 태도는 에머슨과 휘트먼에 대한 정치적 평가에서 유래되어 예언적 시인 전반에 대한 평가로 확대된 상황인데, 에머슨에 대한 일련의 비판은 이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이다. 에머슨은 과거와 전통, 문화적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독립선언으로서 자연을 매개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며 신과 만나는 체험을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그가‘대령’(Over-soul) 혹은 인간을 초월한 힘과 만나는 비전의 순간이 핵심이 된다.3 사실 에머슨이 말하는 계시란 이를 지지할 어떠한 제도나 성서적 권위도 없으며 단지 황홀한 인식의 순간을 지시할 뿐인데, 역설적이게도 이 순간이야말로 에머슨이“모든 것을 보는”미국문화 생산의 예언자적 권위를 세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자립」“( Self-Reliance”)에서“우리는 옛날의 음유시인이나 현인들이 창공의 광휘를 보는 것보다 더 열심히 마음 속에 빠르게 지나가는 섬광을 감지하고 관찰하는 것을 배워야한다”라고 말하면서 외재적 전통이나 역사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발견할 것을 권고한다(129). 그러나 에머슨의 비전에 근거한 개인주의가 전통이나 역사를 무시한 채 어떻게 진리혹은 사회의 보편적 합의와 만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 에머슨은 악이 긍정적 힘이 아니라 단지 비전의 부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전을 체험하게 되면 악은 저절로 선으로 변할 것이며, 더구나 사람들이 비전을 통해 공통의 진리를 보게 되기에 더 이상 사회적 분열은 없다는 안일한 시각을 드러낸다.4 에머슨의 순진한 이상주의에 대해 역사주의 계열 비평가들은 맹렬한 비판을 가했는데, 윌슨(Rob Wilson)은 에머슨의 계시를 매개하는‘자연’이 국가와 동일시되고 특히 20세기 들어 상업화되기 시작하면서, 서정적 자아의 비전의 순간이란 실지로는 무력한 개인이 자율성과 자기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환상 속에 자본주의 사회의 막대한 권력 앞에서 느끼는 전체주의적 황홀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36). 피즈(Donald Pease) 또한 에머슨의 비전이 19세기 미국의 상업주의와 팽창주의란 국가 정책을 이상적 용어로 다른 가상적 세계 속에 기술해 놓은 것이라고 말하며(46), 같은 입장에서 로우(John Carlos Rowe) 역시 에머슨의 초월주의가“새로운 산업 경제의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적 추상화의 실천들을 합법화한다”고 지적하면서 계시의 수사를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간주한다(5).5 사실 이들의 지적은 부분적으로 타당하기도 한데, 거대한 미국의 비전을 노래한 휘트먼의 경우가 그 대표적 예이다. 휘트먼의 계시의 수사는 다양성과 민주주의 가능성을 실현 실현할 장으로서 미국의 탄생과 통합을 노래했지만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적 모순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후기에 들어 현실 정치와 유리된 추상적 국가 개념에 안주해버렸고, 이러한 휘트먼의 모습은 계시의 수사에 대한 역사주의자들의 의심과 비판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역사주의 계열의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 계시의 수사가 가능케 하는 현실 비판과 급진적 상상력, 인간의 능동성과 언어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사실 이는 역사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미국 비평계를 지배해 온 후기구조주의 언어관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 언어관을 대표하는 데리다(Jacque Derrida)에게 있어서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가능케하는 원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이다. 즉 데리다에게 있어서 언어는 의식의 자기 현전성이나 의미, 시간성을 성립시키는 흔적의 구조이자 데리다가 비판해 마지않는 로고스중심주의를 체하게 해주는 절대적인‘타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텍스트가 내세우는 논지가 스스로 배치되는 순간, 즉 텍스트의 자기 모순성을 폭로하는 것이 데리다의 주된 해체 전략이며, 이러한 체전략에 의해서 예언자적 시인이 애초에 의도한 인간/세계의 범주는 의식/언어로의 축소과정을 겪게 되고, 마찬가지로 인식 주체, 언어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계시의 수사는 인식론적 확실성이나 자아의 견고성에 의문을 표하는 주체의 곤경으로 결론 맺게 된다. 인간/세계가 의식/언어의 범주로 조정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주, 객관의 철저한 분리이고, 이는 상상력과 비전의 통합적 힘을 믿으며 능동적으로 세계와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시인의 노력을 기껏해야 허위의식으로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한계는 맑시즘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역사주의 계열의 비평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들은 인간 주체가 선행하는 구조적 효과에 의해 위치지워진다는 결정론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물질적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 인식상의 특질인 상상력이나 비전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따라서 이들의 주요 독법은‘환치’(displacement)나‘지움’(erasure) 등의 개념으로 예언적 시인들의 텍스트에서 역사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나 배제를 읽어내는 것이다. 이들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알튀세(Louis Althusser)에게 있어서 주체는‘호명’(interpellation), 즉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오인의 구조에 갇히고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 내에서 주체로서 구성되며, 이는 사람들이 재  현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자아 개념을 통해 주체의 위치에 고정되고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6‘호명’개념에서도 드러나듯이 과정과 실천을 강조하며 그 실천의 범주로서 능동적 주체를 상정하는 맑시즘과 역사주의 계열의 비평조차도 주체와 언어에 대한 결정론적이며 환원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능동적 주체와 언어관을 전제하는 예언의 언어와 계시의 수사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긴즈버그의 계시의 수사는 에머슨과 휘트먼의 예언적 전통에 힘입으면서 동시에 현대 비평이 지적하는 이들의 한계를 과제로 떠안게 된다. 즉 이들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극복하면서 어떻게 개인의 비전을 보편적 진리와 맞닿게 할 것이며, 또 이를 어떻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가 쉽지 않는 숙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 문화적 모순이 심화되고 확대된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계시의 수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현실인식과 과감한 형식적 실험을 요구하게  되며 시대의 압력을 뚫고 나갈 강력한 언어적 힘의 창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긴즈버그의 언어는 우선적으로 현실과 밀착되고, 이른바 1950년대‘순응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실현된다. 이하 본 논문은 현대 미국시 비평의 반계시적 경향과 거리를 두면서 긴즈버그의 언어와 그 내적 역동성을 시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조망하고, 「울부짖음」과「캐디쉬」를 중심으로 어떻게 긴즈버그가 기존 전통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시의 수사를 구성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이와 함께 두 편의 시를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며 계시의 수사가 지니는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해보도록 하겠다.

    1긴즈버그 사후의 가장 괄목할 변화는 비평계가 여성 비트 시인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 두 권의 비평서(Brenda Knight, ed., Women of the Beat Generation: The Writers, Artists, and Muses at the Heart of a Revolution (Berkeley: Conari, 1996); Richard Peabody, ed., A Different Beat: Writings by Women of the Beat Generation (London: High Risk, 1997))가 나오면서 여성 비트 시인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1998년 MLA에서는 여성 비트 시인에 대한 연구와 함께 비트 시인과 인종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주목을 받았다.  2예컨대 보어(Bruce Bawer)는 긴즈버그의 시가 과도하게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자기탐닉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어떤 주제도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혹평한다. 로젠블라트(Roger Rosenblatt) 역시 긴즈버그에게는 철학적 성장이 없고 깊이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 맥키넌(Lachlan Mackinnon)도 마찬가지로 긴즈버그에게 “진정한 문화”가 결여되어 있어서 자신의 생활 외에는 쓸 거리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외의 다양한 비평가들의 긴즈버그에 대한 폄하는 펄로프 223-24쪽을 참조할 것.  3“빈 터에 서서 상쾌한 공기에 머리를 감고 무한 공간으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소한 자기중심성은 사라진다. 나는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무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보편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뚫고 순환한다. 나는 신의 일부분이며 그 조각이다”  (Emerson 6).  4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은 에머슨의 생각이‘상대주의’(relativism), 즉 진리는 없고 모든 개인들이 저마다 다른 가치와 견해를 가진다는 입장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통해 자연의 법칙과 보편적 인간성을 이해하게 되는‘주관주의’ (subjectivism)에 근거하고 있다고 변호한다(61). 그러나 리차드슨의 견해에서도 자연의 법칙과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온전하게 추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또 그렇다하더라도 과연 자아가 투명하게 그러한 진리치를 반영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5역사주의 계열 비평가들 중 예외적으로 버코비치(Sacvan Bercovitch)는 에머슨을 옹호하는데, 그는 에머슨이 상정하는 개인이 일개 자연인이 아니라 대표적 미국인이며 미국이라는 국가가 에머슨에게 있어 궁극의 지평이라고 말함으로써 에머슨을 두둔한다(174-75). 버코비치는 계시의 비전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미국이란 국가로 대치하는데, 여기에서의 문제점은 국가 자체가 계급, 인종, 성 등 다양한 입장에 따라 가장 합의하기 어려운 개념 중 하나이기에 여전히 개인의 진리 인식 문제가 남아있을 뿐더러 에머슨이 의도하지 않았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짐으로써 인식론적 문제가 정치적 문제로 환치되어버렸다는 것이다.  6맑시즘과 주체, 언어와의 관계는 Rosalind Coward & John Ellis의 Language and Materialism: Developments in Semiology and the Theory of the Subject의 5장 “Marxism, Language and Ideology”참조. (London: Routledge, 1977) 61-92.

    II. 순응의 시대와 광기―「울부짖음」

    1950년대 들어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경제적 번영은 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로 하여금 미국이 정치투쟁 없이도“탈중심적 권력과 정치적 다원주의, 혼합 경제 시스템을 갖춘”복지국가, 이데올로기가 종언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게 만들었다(Bell 373). 따라서 이 시기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계급투쟁보다는 당대 사회의 심리 구조와 의식에서의 변화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정치 혁명을 문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쟁취하려했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많은 미국 시인들은 정치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들의 시를 정치적 억압에 대항하는 매개로 바라보았고, 긴즈버그, 로월(Robert Lowell), 리치(Adrienne Rich), 머윈(W. S. Merwin), 블라이(Robert Bly), 레버토브(Denise Levertov), 바라카(Amiri Baraka)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 계시의 수사와 정치학—긴즈버그의「울부짖음」과「캐디쉬」를 중심으로 533 시기 시인들은 운율이나 압운을 지키는 형식적이고도 이성적인 시에 반기를 들면서 즉흥적이고도 친근하며 정서적이고도 비이성적인 시를 시도한다. 이들은 형식주의와 이성적 질서를 무의식과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이자 구시대 권위적 문화의 산물로서 정치적, 국가적 억압의 또 다른 양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은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대상화시키고 통제하며 기술적 효율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도록 훈련시키는 기능이자 더 나아가 군산복합체의 거대 미국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감정’(feeling)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감정에 대한 강조는 시인들이 언어를 단순한 의사전달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로 바라보면서 정서적 차원에서의 효과가 정치적 잠재력과 연결될 가능성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시인들은 미국 민주주의에서의 자유란 사실상 매우 제한된 자유에 지나지 않으며, 대다수 시민들은 정부의 권력과 상업주의에 편승한 언론에 의해 길들여지고 순응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내적 차원을 박탈당한‘일차원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보았고(Marcuse 10-11), ‘감정’은 바로 이러한 인간 소외와 분열을 치유하며 자기 회복과 재통합으로 가게해주는 하나의 정치적 대안이자 비판적 허구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감정에 충실한 자기 고백적이며 정서적, 반이성적인 수사가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 중에서도 긴즈버그의 언어는 개인의 정서적 토로와 정치성, 예언적 비전을 합치시켜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비전에 찬 언어를 구사한 대표적 예라할 것이다.7

    긴즈버그의 계시의 수사는‘순응의 시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결합되어 있으며, 시대의 모순을 새로운 언어를 통해 타개하려는 긴즈버그의 노력은 다음의 글을 통해 명확하게 나타난다.

    「미국 독립 기념일 선언문」“( Independence Day Manifesto”)이란 부제를 달고 1959년 쓰인 이 글은 긴즈버그의 시대 진단을 잘 보여주는데, 그는 20세기 중 반 미국이“신경쇠약”에 걸려있다고 말하면서 그 원인으로 폭력적인 국가기구,관료주의, 비인간적인 과학기술 등을 든다. 그는 시인이 이렇듯 병든 집단의식 속을 파고들어가 틈을 내고 단절을 촉진시켜 변화의 기제로서 시를 작동시켜서 권력과 제도에 의해 차단되고 망각된 인간의 신적 본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인의 임무가 공적 영역과 개인의 의식 양자에 침투해 있는 편재적 허위의식을 뚫고 들어가 리얼리티를 건져내는 것에 있다고 보는데, 현대의 허위의식이“거대한 음모”라고 부를 만큼 유래 없이 강력해진 만큼 시인의 비전도 이에 상응하여“균열”을 내고“틈”을 만드는 적극적이고도 심지어 폭력적인 모양새를 띨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긴즈버그의 계시의 수사가 정서적, 고백적, 비이성적 언어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그가“신경쇠약”에 걸린 미국의 집단무의식에 균열을 내어“세계의 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특별히 사용하고 있는 전략은 광기이다. 그에게서 광기는“거대한 국가적 무의식”에 균열을 내는 수단이자 갈라진 틈 사이로“새로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필요조건이다. 많은 긴즈버그 연구자들은 그의 광기를 어떻게 계시의 수사나 정치성과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데, 그의 광기를 개인적 이상 징후나 정치적 한계를 숨기는 도피의 기제, 혹은 시인으로서의 실패를 드러내는 증거로 보는 것들이 그런 예이다.9 그러나 그에게서 광기는 개인적 고백을 급진적 정치성과 연결시키고 사적 비전을 보편의 진리와 만나게 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사실 긴즈버그만큼 언어가 사회적 모순관계에 결정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을 철저히 인지했던 시인도 없으며, 서정적 자아의 토로를 유효한 정치적 언어로 전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현대 시인도 드물다. 이런 면에서 광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언어를계시의 언어로 전화시키고 사적인 토로를 충격적 진리의 현현으로 바꾸는 긴즈버그만의 특수한 매개 방식이라 할 것이다.

    「울부짖음」에서 긴즈버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광기의 재현을 통해“거대한 국가적 무의식”에 일어난 균열과 틈을 드러내면서 전체 사회와 시대의 비전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 시의 첫머리는 바로 이러한 광기 어린 다수의 비전에 대한 통찰로 시작한다.

    다수의 비전의 경험자들의 기다란 목록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이들의 절망과 분노가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 세대, 그리고 한 시대의 것임을 알게된다. 1955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과 그의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긴즈버그는 일기에서“나는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역사적 의식의 변화와 일종의 문화 혁명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J xi)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집단의 중요성과 그 정치적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시 속에 단순한 개인의 서정적 토로를 넘어서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의 전망을 담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양한 지역, 배경, 내용을 지닌 여러 광인들의 목록을 통해 긴즈버그는 에머슨이나 휘트먼 같은 선대 시인들이 빠졌던 함정, 즉 고양된 비전을 정치비판과 결합시킬 때 예언적 수사가 흐를 수 있는 유아론과 주관적 오류, 도피주의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다수의 전망에 근거한 보편적 비전을 창출하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시의 첫 행은 전형적인 계시적 수사답게“나는 보았다”(I saw. . .)로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예언자적 시인을 지칭하는 일인칭 단수대명사는 첫머리에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면서 시인은 곧 자신이 보는 것과 일치된다. “I saw”는 로월  의 초기 시「무지개가 끝나는 곳」“( Where the Rainbow Ends”)에서도 똑같이 서두에 사용되는데, 긴즈버그의“I”는 로월보다 더 시인과 밀착해있고, 본다는 행위 역시 단순히 감각적 인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상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명확한 인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예언자적 언어를 구사하는 로월의 시보다 더 계시적이다(Paul Breslin 23). 긴즈버그의 이러한 계시적수사를 두고 오스트라이커(Alicia Ostriker)는 긴즈버그야말로 예언자로서의 외양과 역할을 공공연히 자임했던 유일한 현대판 블레이크(William Blake)라고 평가하며(112), 파스(Ekbert Fass) 역시 긴즈버그의 시가“숨겨진 신성”을 찾으려는“광적이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탐구”라고 말한다(443). 같은 맥락에서 포르  투게즈(Paul Portuge´ s)도 긴즈버그의 예언자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그의 시가 종말론적 비전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44). 오스트라이커는 예언자적시인의 특징으로서 첫째, 신성에 대한 비전을 체험한다는 점, 둘째, 자신의 작품을 문학적 성공보다는 지상에서의 비전의 실현을 위해 바친다는 점, 셋째, 기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저항적이라는 점을드는데(113), 이런 정의에 기반하자면「울부짖음」은 예언자적 시인이 창조한 광기에 찬 비전의 재현이자, 지배 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계시의 시이다.

    이 시의 첫 행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역사적 운명을 공유하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그 희생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는 같은 세대“최고의 사람들”이“광기에 의해 파괴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광기는 이 세상에 편재한 위험하고 불길한 힘으로서 최고의 사람들을 선택하듯이 골라 파괴시킨다. 이“최고의 사람들”을 수식해주는“발가벗은 채 히스테릭하게 굶어가며”라는 3개의 형용사는이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굶거나 여타의 결핍을 경험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다음행에 연이어 나오는“기계 같은 밤 별처럼 빛나는 발전기와의 그 옛날 천상의연결”을 찾으려 하는, 즉 영적 가치와 초월에 배고파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있다. 이들은 이중적으로“발가벗고”있는데, 사회적 관습과 가식을 벗어던진다는 의미에서 발가벗었고, 또 이로 인해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상처받기쉽기에 발가벗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울부짖음」에 나타난“최고의 사람들”은 사회와 시대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또 자발적으로 발가벗으며 이들의 삶을 억압하는‘순응의 시대’의 폭력과 모순을 체현한다. 따라서 시는 자연스럽게 이들을 미치게 만든 시대와 사회에 대한 포괄적 비전으로 발전되는데, 이는 2부에서 몰록(Moloch)에 대한 억압된 분노가 표출되면서 본격화된다.

    몰록은 원래 가나안의 불의 신이자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한, 성서의 여러 곳에서 비난받는 우상 중 하나이다(Ostriker 121). 긴즈버그는 몰록을 문맥에 따라 자본주의(“Moloch whose blood is running money”), 산업화“( Moloch whose mind is pure machinery”), 공격성“( Moloch the vast stone of war”), 감정을 희생시킨 이성( “Mental Moloch,”“Moloch the loveless”) 등다양한 의미로 변주하며 사용하는데(CP 139), 이를 통해 현대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곳에 편재한 비인간성과 억압이 남김없이 드러나게 된  다. 몰록은 모든 곳에 편재해 있으며 건물이나 기계의 이미지, 혹은“눈먼 자본! 악마적 산업! 공허한 국가!”(blind capitals! demonic industries! spectral nations! CP 140)란 추상적 형태로도 나타난다. 물론“최고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이미 사회 자체가 하나의 정교한 감옥이기에 어떠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은 미침으로써 오히려 정상성을 증명하고 자신들의 광적 비전 속에 이 사회가 억압하고 왜곡하고 잊고 있었던 진실들을 충격적으로 펼쳐 놓는다.

    위 인용문의“발가벗다”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울부짖음」에는 다량의신체적 용어들이 제시되는데, 굶주린다거나 섹스하거나 울부짖는 등 신체와 관련된 다양한 행위들이“최고의 사람들”의 묘사에 동원되면서 이 시의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행동들을 형성한다. 물론“minds”가 주로 정신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환유이기는 하지만 긴즈버그는“minds”를 육체적이고 본능적으로 다루며, 반대로 몸은 영적으로 다루면서 신체적 허기와 벌거벗음을 영적인 갈망과동일한 가치로 만들어버린다(Paul Breslin 24). 사실 제목‘울부짖음’만 보더라도 이는 이성적이고 절제된 언어가 아니라 압도적인 절망과 분노에 의해 추동된소리이고, 인간의 발화라기보다는 비언어적, 동물적 발성에 가깝다. 이는 행위와 표현의 소리이며 가장 본능적인 몸의 신호이기도 하다. 긴즈버그의 독특성은 이렇듯 원초적인 차원에서 에너지를 불러일으키고 전달하고 최종적으로 독자에게 에너지를 이관시키는 것에서 나타나는데, 이 에너지는 그의 시에서 덩어리진 목록(clotted catalog) 기법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두운과 유운으로 연결된 약약강(anapest)과 약강약(amphibrach)격의 지속적인 전진 리듬을 보이는 휘트먼과는 달리, 전진하다가 돌아와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에너지가 부딪치고 충돌하며 폭발하는 효과를 만드는 언어 사용법이다. 펄로프는「울부짖음」의한 행을 예로 들어 긴즈버그 언어의 특질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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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드러나듯이 긴즈버그는 유성음 d와 무성음 g, 혹은 유음 l과 마찰음 s등 연속해서 발음하기 힘든 소리들을 휴지 부분에 묶어놓음으로써 독자들이 불가피하게 멈춰서 숨을 고를 수밖에 없게 만든다(Perloff 209). 이는 소위“onespeech-breath-thought”라고 불리는, 긴즈버그 특유의 발화와 숨과 생각을 함께 묶어, 언어, 몸, 의식을 역동적 움직임 속에 동시에 전개시키는 방식이다 (Trigilio 792). 그는 문장 내에서 어떠한 논리 없이 돌진하면서 작시법을 위반하고, 구문과 문법, 구두법을 탈선하며, 우리의 이성이 습관적으로 나눠놓는 언어적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함께 묶어버린다. 이렇듯 기존의 언어 질서에서 해방된 끝없는 소리들의 밀도 높은 마찰과 부딪힘이 긴즈버그 특유의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결합될 때 독특하면서도 강력하고 열정적인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그 에너지는 호흡과 함께 독자에게로 이관되어 자연스럽게 시인의 비전을 전달하게 된다.10

    「울부짖음」에 나타난 여러 비전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2부 8행과 9행에서 시인이 몰록과 자신과의 관계를 깨닫는 순간에 나타난다. 시인은“이해할 수 없는 감옥”(the incomprehensible prison)같은 몰록의 내부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상상하다가“몰록이 내 영혼에 일찌감치 들어와 있는”(Moloch who entered my soul early!) 것을 보게 되면서 몰록의 이름은“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Moloch whose name is the Mind!”CP 139). 몰록에 대한 거부가 단순한 정치투쟁만으로 가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저항하는 대상이 이미 자신에게 내면화되어 있다고 할 때 그야말로“마음”을 벗어나 해탈하거나 미치는 것 말고는 몰록에게서 해방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광기는 깨달음의 전단계이거나, 몰록으로 상징되는 편재적 권력과 허위의식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론 브레슬린(Paul Breslin)이 지적하는 대로 긴즈버그에게서 광기는 파괴적인 사회를 무력하게 내면화한 것을 말하는지 혹은 그러한 사회에 순응하는 것에 대한 저항적 거부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브레슬린은 긴즈버그의 이러한 애매한 태도가 양자를 다 아우르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긴즈버그가 정치와 예언의 수사를 결합할 때의 어려움을 광기로 봉합하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27).  그러나 브레슬린의 견해는 계시의 수사를 정치적 언어와 분리된 것으로 상정하면서 현실과 비전의 세계를 대척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협의의 시인과 시에 대한개념에서 출발하였기에 불가피한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전제와는 달리 긴즈버그에게서 계시와 정치, 현실과 비전은 분리될 수 있는 이원적 가치가 아니며, 이 양자는 끊임없이 역동적 영향관계 속에 공존하며 그의 비전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라이커는 긴즈버그가 블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기는 하지만 원시문화의 주술사(shaman)적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기존의 예언자상과도 차별된다고 말한다. 즉 전통적 구약의 예언자가 처벌과 단죄의 언어를 보여준다면 긴즈버그는 치유와 통합이라는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술사적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127). 엘리아데(Mircea Eliade)의『샤머니즘』(Shamanism: Archaic Techniques of Ecstasy)에 의하면 주술사들은 치유를 위해 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여 함께 고통 받으면서 미칠 정도까지  투쟁하며 자신과 대상을 함께 치유하는“인간 영혼의 위대한 전문가”(76)이다. 이들은 또한 공동체의 갈등과 혼란의 시기에 그 불균형 상태를 해소시키는 위기의 해결사로서 세상의 광기를 끌어들여 고통 받으며 자신과 세계를 치유한다. 이러한 치유적 주술사의 개념으로 긴즈버그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의 광기를 단순히 정신 이상이란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면화된 이 세상의 비정상성을 기록하면서 치유하며 저항하는 광범위한 기능과 의미를 포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긴즈버그가 보여주는 다양한 광기의 의미들은 브레슬린이 비판하는 것처럼 현실 인식이 첨예하고 치열하지 않다거나 정치와 종교의 범주적 혼란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전제한 예언자적 시인의 개념이 이미 처음부터 이러한 복합적 내용을 포괄하고 있어서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실지로 아시아와 북미, 인도네시아의 원시사회에서 처음으로 주술사들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서구연구자들은 이들을 정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히스테릭하거나 발작적인 인간들로 분류했지만, 후속 인류학적 연구들은 이들이 활기차고 지적인 인간들이며, 이들의 광기는 사회의 잠재적 혼란을 가시화시켜 극복 가능하게 만드는 적극적 기제라는 것을 증명하였다(Ostriker 127).「 울부짖음」에서 나타나는 긴즈버그는이 세상의 광기로 고통 받고 상처받으며 투쟁하는 전형적인 주술사-예언자-시인의 모습인데, 「울부짖음」에 대한 다음의 긴즈버그 글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더욱 명료하게 전달한다.

    긴즈버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시가 소외된 존재들을 연민으로 지켜보면서 그들의 광기까지도 동일시하는 지극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는 자신의 사회비판 역시 고통 받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그가 이 세상의 구원과 이를 위한 실천에 복무하는 전형적 주술사-예언자-시인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울부짖음」의 3부는 바로 광기가 파괴시킨 자들을 수용하고 위로하는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3부에서는 1부 첫머리에 나왔다 사라진“I”가 다시 돌아와 조용하고 관대하고 부드럽고 친근하게“내가 너와 함께 있어”(I’m with you)라고 말하며 친구 솔로몬(Carl Solomon)의 광기를 수용한다. 솔로몬은 뉴욕, 발티모어, 시카고, 캔자스, 콜로라도 등 미국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최고의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인물인데, 그에게는 종교적 순교자의 이미지와 정신병원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현실이 함께 겹쳐 있다. 솔로몬은“살아있는 인간 예수”(living human Jesus)이며“파시스트 국가의 골고다 언덕”(the fascist national Golgotha)에 대항하는 정치적 혁명아로 묘사되지만 한편으로는“오십 번 이상의 전기 충격” (fifty more shocks)도 정신을 돌아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미쳐서 자신이 열두명의 비서를 죽였다고 떠들어댈 정도의 중증 정신이상자이기도 하다(CP 141). 화자가 솔로몬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어머니의 그림자”(the shadow of my mother CP 140)를 보는 것처럼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솔로몬은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세계에 무능력한 일개 광인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인의 사랑을 통해 이 세계의 치유와 갱생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가늠대이기도 하다. 그의 광기를 남김없이 수용하고 보듬는 시인의 사랑으로 인해 급기야 솔로몬과 광인들은 마지막「울부짖음의 주석」“( Footnote to Howl”CP 142)에서“성스럽게”(holly) 변화되며, 이러한 신성한 비전과 한 개인에 대한 진정어린 이해, 따뜻한 위로와 소생의 언어는「울부짖음」을 단순한 정치적 저항시나 고발문학을 넘어서 시인의“연민”과“자비”가 실현되는 치유의 시로 보게 만든다. 이런 입장에서 이하 본 논문은 긴즈버그의 전기적 시「캐디쉬」를 읽어보며 긴즈버그의 주술사적 예언자 시인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떠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 또 그의 신성에 대한 비전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의 계시의 수사의 특성과 의미를 평가해보도록 하겠다.

    7긴즈버그의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문학적 언어와의 과감한 단절을 통해 성취되는데, 그에게 비판적인 평론가들조차도 그가 문학사적으로 기존 엘리엇과 엘리엇의 비평적 후계자인 신비평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형식주의적 흐름과의 단절을 시도한 점, 즉 그의 “강력한 시”가“1950년대까지 유행하던 잘 만들어진 상징주의 시들에 대한 대안을 세운 점”을 높이 평가한다(James Breslin 402).  8이하 긴즈버그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약어로 표시하고 괄호 안에 쪽수를 함께 명기함. CP (Collected Poems 1947-1997 ), P (Deliberate Prose: Selected Essays 1952-1995 ),J (Journals Mid Fifties 1954-1958 ), EG (To Eberhart from Ginsberg: A Letter about Howl, 1956 ).  9이러한 평가들의 구체적인 예로는 Paul Breslin 31, Vendler 9 참조.  10이러한 그의 언어의 효과는 단적으로 그가 성취한 대중성에서 드러나는데, 그가『울부짖음』(Howl) 이후 시대의 총아로서 1950년대, 1960년대 정치적 행동주의에서 1970년 대 영성주의까지 학생과 지식인 독자의 성장과 변화를 주도했다거나, 그의 인기가 절정을 지난 1985년에만도 315,000부의 시집이 팔릴 정도로 지속적인 인지도를 유지했다는 점 등은 그의 언어가 지닌 놀라운 대중적 호소력을 입증한다(Paul Breslin 22). 이런 면에서 본다면 긴즈버그에 대한 몰이해에는 그의 언어가 가진 파급력에 대한 비평계의 외면과, 긴즈버그의 전설적 인기와 그의 언어적 성과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 비분석적 태도, 또 근본적으로는 대중성을 학문적 담론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고질적 엘리트주의 등에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III. 치유와 비전―「캐디쉬」

    「캐디쉬」에서 긴즈버그는 그의 비전을「울부짖음」에서처럼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다루지 않고 구체적인 가족사 속에서 접근하는데, 이는 그의 계시의 수사가 손쉬운 이상주의나 일면적 가치에 경도되는 것을 막아주는 또 다른 견제 장치이기도 하다. 긴즈버그의 어머니 나오미(Naomi Ginsberg)는 젊은시절 공산당원이었고 미국 정치체계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남편의 개량적 사회주의를 거부할 정도로 급진적인 지식인이었다(Quinn 79). 그녀는 정신 이상이 되었을 때조차도“히틀러, 할머니, 허스트, 자본주의자들, 프랭코, 데일리 뉴스, 20세기社, 무쏠리니, 살아있는 죽은 자들”(Hitler, Grandma, Hearst, the Capitalists, Franco, Daily News, the ’20s, Mussolini, the living dead CP 229)이 자기를 상대로“우주적 금융적 살인 음모들”(cosmic financial murderplots CP 226)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독이나 세균 등 다양한 형태의 살해를 상상하며 두려워한다. 어머니의 과격한 정치성이 의학적 정신병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린 긴즈버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체험이었지만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그 경험을 과장하지도 또 이상화하지도 않으면서 갈등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 시에서 어머니의 광기는 시적 비전도 정치적 계시도 아니며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함께 겪는 가족들에게는 회피하고픈 고통의 현실일 뿐이다. 이는 전작「울부짖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광기를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자기 패러디이며, 긴즈버그의 비전이 에머슨이나 휘트먼처럼 유아론적 자기 정당성 속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효과적 견제 장치가 된다.

    「캐디쉬」는 어머니에 대한 많은 회상으로 이뤄져있는데, 그 중 어린 긴즈버그가 어머니를 데리고 의사를 방문했다가 그녀의 발작으로 인해 쫓겨난 후 그녀를 주체할 수 없어 근처 숙박업소에 버리고 달아나면서 죄의식과 불안으로 떠는 일화가 나온다.

    이 대목은 어머니에 대한 긴즈버그의 태도, 회피와 집착, 애증의 복합적 감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긴즈버그는 어머니의 광기를 감당할 수 없어 버리고 달아난 후에도 어머니가 무사하기를,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중적 감정 속에 고통 받는데, 이러한 애정과 반감이 교차되는 시각은 이후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헛소리 할 때, 배설을 하거나 악취 나는 음식을 만들 때, 그녀의 나체를 아들에게 보이거나 폭력적으로 변하는 온갖 광기의 사건마다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어린 긴즈버그가 도망가고 싶을 만큼 나오미의 광기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동시에 항상 다시 돌아가 위로하고 치유하고픈 가슴 아픈 집착의 대상이기도 했다. 폴 브레슬린은 긴즈버그가 자신을 어머니의 광기에 의한 희생자로 그려내는“멜로드라마”를 연출하면서 광기를 개인적, 정치적 의미에서의 혼란에 대한 면죄부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1). 벤들러(Helen Vendler)같이 호의적인 평자도 마찬가지로 이 시가 불안정한 미완성의 고백이라고 바라보는데(9), 이들 평론가들의 문제는 첫째, 광기가 긴즈버그에게 있어서 자기변명이나 면죄부가 아니라 오히려 계시의 수사와 연결된 적극적 전략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는 점, 둘째, 텍스트에 나타난 긴즈버그의 심리적 방어기제나 모호하게 처리된 전기적 내용을 근거로 고백의 진실성 여부에만 집착하여 사적 고백의 정치성을 외면하고 이 시를 단순한 자서전적 고백이나 자기변명으로 축소시킨다는 점이다.긴즈버그에게서의 광기는 단순한 서사적 방편이나 자기 회피의 기제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언어를 다루고 시를 창작하는 방식 모두에 걸쳐 있는 구체적이고도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면서 이들을 억압하는 시대의 질곡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분노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어머니의 광기라는 결정적 체험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며, 그의 예언자적 시인관과 비본질론적 진리관, 그리고 독자를 흔들어놓는 에너지로서의 언어관이 시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체험 때문인 것이다. 긴즈버그 연구자들이 잊고 있는 것은 이 시가 철저한 시인의 자기 응시이자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일깨우면서 어머니의 광기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집요한 화해의 시도라는 점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전기충격으로 만신창이 된 어머니의 몸과, 살해 음모와“신비적 자본주의”(mysterious capitalisms CP 225)의 환각 속에 고통 받았던 어머니의 마음에 죽어서나마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캐디쉬」에서의 그의 고백은 어머니와 자신을 화해시키고, 더 나아가 시인과 이 세상을 화해시킨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형식인‘캐디쉬’를 통해 시인은 충격과 상처를 끌어안고 그 속에서 비전과 초월을 찾으려 한다. 이는 자신도 함께 광기 속으로 들어가 고통 속에서 이를 치유하는 전형적인 주술사로서의 시인의 모습이며, 이 과정에서 광기가 연원한 사회나 정치, 역사에 대해 울부짖을 수는 있으되, 이 울부짖음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고통 받는 대상,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치유를 불러들이는 회복의 시도이며 이 과정에서 비로소 예언적 비전이 성취되는 계시의 수사가 완성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캐디쉬」를 예언자적 전통 속의 계시의 수사로 볼 때, 우리는 이 시에서 나타나는 신성에 대한 비전은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캐디쉬’가 유태교에서 죽은 자를 기리는 기도로서 죽음을 애도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이중적 기능을 하기에 일부 평자들은 이 시가 긴즈버그가 전통 유태교로 복귀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Grossman 105). 그러나 이 시에서 긴즈버그는 전통적 형식을 들여오지만 사실상 유태교 유일신의 절대적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철저히 예언자적 권위의 근거 자체를 허무는 반전통적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두고 코헨(Mortimer Cohen)은 이 시가 유태교 전통을 비정통적 방식으로 사용했으며 정당하지 않은 가치를 삽입했다고 비판한다(101). 실지로 이 시에서 긴즈버그는 어머니를 애도하면서도 전통적 신을 불러들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불변의 로고스에 대한 본질론적 정의 자체를 해체하려 시도한다. 그는 여호와를“이름 없는 하나의 얼굴을 한, 영원히 나를 넘어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죽음 속의 아버지”(Nameless, One Faced, Forever beyond me, beginningless, endless, Father in death CP 220)라고 부른다. 그는 이 시에서 신보다는‘하늘나라’(Heaven)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는 유태교에서의 유일신을 불교적 공(空)의 개념으로 대치함을 의미한다. 이 공은 실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비우는 정체성이며, 그의 하늘나라는“빛도 어둠도 아닌, 무 속의 축복이며 나날이 없는 영원”(One blessed in Nothingness, not light or darkness, Dayless Eternity— CP 220)이다. 이렇듯 긴즈버그는 서구의 로고스를 불교의 무신론적 인식론으로 대치하면서 상이한 세계관들의 충돌 속에 시를 창조하고 엄격한 종교적 율법에서 욕망을 해방시키며 성서와 유일신이라는 기존 예언자적 권위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급진성을 보인다. 긴즈버그의 이러한 입장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머니가 죽은 후 아들에게 남긴 편지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이“새로이 나타난 이상한 예언들”이라는 것은 열쇠가 있다는 단순한 문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변주되고 있는 것을 일컫는데, 반복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열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열쇠가 창문이나 햇빛, 빗장 중 어디에 있는지, 과연 열쇠가 있기나 한 것인지 모든 것이 애매하기만 하며 나오미가 이 편지를 온전한 정신으로 썼는지의 여부도 상당히 모호하다. 편지 중간“앨런, 결혼하고 마약을 끊으렴”이란 문장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진심어린 애정과 염려가 담긴 사실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나머지 문장은 시적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언어의 모호성과 다의성을 증가시킨다. 긴즈버그의 새로운 예언이란 이렇듯 언어로 쉽사리 포섭되거나 본질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며 자신이 발견한 비전이 다시 물화되는 것 자체를 막는 고정되지 않는 일련의 기호이다. 긴즈버그의 반본질론적인 계시의 수사는「캐디쉬」의 연장이자 대단원으로서 뒤에 붙인「찬송가」“( Hymmnn”)라는 시에서도 드러난다.

    출판된 시집에서 긴즈버그는 위와 같이「찬송가」의 마지막을“주님”으로 끝내지만 1989년 녹화된 시낭송 때에는“까악”으로 끝맺었다(Triglio 788). 마지막처리의 두 가지 방식은 긴즈버그가 지속적으로 결말의 고정성을 흐트러뜨리면서 이 시를 어떠한 의미로도 환원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주님”은 나오미 무덤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의 울음이나 창가의 햇빛과 동등한 가치로 처리되며 다른 현상계의 구성 요소처럼 하나의‘소리’가 되어 절대적 의미가 비워진 자리를 채운다. “주님”이나“까마귀”는 바로 이‘텅 빈 충만’이라는 역설을 드러내는 기호들이며 어느 것도 부정되지 않지만 동시에 어느 것도 본질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역동적이면서도 열려 있는 진리의 속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초월성과 내재성이 교차되는 신성에 대한 비전이야말로 그의 계시의 수사가 근거하는 지점이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또 항상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급진적 운동성의 원천이다. 이는 우리가 긴즈버그를 계시의 수사를 새롭게 꽃피운 20세기 미국의 예언자 시인으로 보는 이유이자 그의 언어를 단순한 유아론이나 비이성적 넋두리로 폄하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평가인지 깨닫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IV. 마무리하며

    이상 긴즈버그의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계시의 수사의 실제적 내용과형식, 그리고 긴즈버그 특유의 예언자적 시인관과 언어관을 살펴보았다. 긴즈버그에게서 비전은 철저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며 한 개인과 집단, 시대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그의 시는 후기구조주의에서의 축소된 의식/언어의 범주를 거부하며, 세계의 변화에 참여하는 능동적 언어의 힘을 전제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세계는 후기구조주의에서처럼 분리된 범주가 아닌, 적극적으로 일치하며 서로를 회복시키는 상생의 관계인 것이다. 또한 그의 비전은 에머슨이나 휘트먼에게서 드러난 유아론적 자기 정당화를 극복하면서「울부짖음」에서처럼 집단적 체험을 통해서거나「캐디쉬」에서처럼 가족사를 통해 철저히 객관화되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반본질론적 진리의 언어로 드러난다. 긴즈버그는 순응의 시대의 편재적 모순과 허위의식에 대항하여 예언적 언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광기라는 극단적이고도 강렬한 내용을 선택하며, 이는 그의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여 시대의 진단으로 이어지는,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이는 예언적 시인의 상상력과 비전을 기껏해야 허위의식으로 바라보는 역사주의가 긴즈버그 평가에 있어 얼마나 일면적이고도 환원적이며 부적절한 모델에 불과한지 보여준다.

    긴즈버그의 계시의 수사는 주술사-예언자-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나 독자를 감응시키는 에너지로서의 언어관, 그리고 스스로의 예언자적 권위도 무너뜨리는 비본질론적 진리관으로 요약된다. 긴즈버그의 새롭고도 파격적인 시는 언어를 세계로부터 분리한 후기구조주의의 편협한 범주를 넘어서고, 인간의 능동성을 의문시하는 역사주의의 결정론적 시각을 광정하며, 동시에 치열하게 스스로를 반성하고 재구성해가는 격렬한 운동성을 보유한다. 따라서 그의 시를 단순한 고백시나 피상적인 정치시로 보는 것은 긴즈버그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면적 접근들이며, 그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내밀한 사적인 고백과 공적인 목소리를 통일적으로 조망하는 시각, 주체와 언어, 세계를 역동적 에너지 속에 아우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긴즈버그 연구는 시인의 안과 밖을 포괄하려는 진지한 노력보다는 후기구조주의 언어관이나 역사주의 계열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침윤된 편향되고 왜곡된 해석이 주를 이뤄왔다. 이는 미국 문학계가 정치와 시학의 만남 자체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언어의 해방적 기능과 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어가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축소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예언적 언어와 계시의 수사가 점점 더 그 의미와 기능을 인정받기 힘들어지는 현실을 반영한다. 본 논문은 긴즈버그의 계시의 수사를 이러한 편향과몰이해로부터 구해내 다시금 새롭게 보려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 지금 우리의 학문 풍토와 패러다임의 한계를 다시 한번 반성해보려는 시도이다. 이는 긴즈버그의 시가 이론의 무덤과 회의적 지성 아래 빛을 잃어가는 언어의 본래적 역동성을 상기시키는 가장 강력한 텍스트 중 하나이자, 언어를 살리는 것이 곧 시대를 살리는 길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우리에게 새롭게 일깨우는 가장 호소력 있는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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