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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Le symbolique de l'espace theatral d’Eugene Ionesco 외젠 이오네스코 극공간의 상징성
  • 비영리 CC BY-NC
ABSTRACT
Le symbolique de l'espace theatral d’Eugene Ionesco
KEYWORD
l'espace theatale , univers interieur , dramaturgie , symbolique , decor
  • 1. 들어가기

    희곡의 공간은 그 형태와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구별된다. 그것은 극작가가 희곡에 제시한 공간으로 독자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된다. 즉 가공의 상연을 창조해내는 상상력은 희곡을 읽는 데 필연적이다. 따라서 무대공연을 위한 작업은 연출가와 무대장치가의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무대는 희곡이 재현되는 공간이며 극중 인물이 행동하고 갈등하며 변화하는 장소인 것이다. 또한 무대는 배우의 연기에 의해 재창조된다. 그런 이유로 극 공간은 희곡읽기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추상적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상연과 결부되어 있다. 연출가는 공간의 선택이 차후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상연의 리듬이 극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연출가가 텍스트에 지나치게 의존해 무대에서 인지하기 어려운 작업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모한 시도일 것이다. 희곡속의 시‧공간적 표지는 미학적 기호다. 그것은 극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허구의 소우주를 구성하며 확고한 원칙에 따라 허구를 구조화한다. 이야기를 다양하게 이끌고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연출가의 미의식에 따라 그리고 독자나 관객의 상상 속에서 재현의 토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의 공간은 의미를 생산하는 조직이며 구조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장소 혹은 그 이미지가 되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상상적 세계를 암시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사물과 인물들 등 공간을 채우는 내용물에 따라 은유와 환유, 상징의 메커니즘 속에서 의미망을 형성한다. 모든 “공간의 기호는 기능적이며 이미지화된 언어”1)이다. 공간의 자료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유추를 통해 무대상황과 무관한 어떤 성격을 제시하거나 인간조건의 양상, 미지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 글은 이러한 희곡의 공간을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어떻게 작품 속에 형상화했는지,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극작품 읽기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 작업의 과정은 인물과 공간의 상관성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이며, 무대지시문의 분석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이오네스코는 무대의 인습을 벗어나 반연극적 공간 창출에 주력했다. 그는 인물의 심리나 사건 중심의 언어 연극에 대한 반발로써 시청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연극에 몰두했다. 따라서 그의 극텍스트 속의 잠재적 공간을 유추하고 상상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반연극의 극작술, 나아가 작가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극적 공간은 열린 공간이므로 해석의 여지도 무한하다. 이 연구는 희곡에서 출발하여 연출 즉 무대의 물질적 작업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무엇보다도 환상의 창조를 위해 은유, 몽환, 상징의 공간을 주로 사용한다. 그의 무대는 언제나 애매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오네스코는 무대가 단순히 장소의 재현이 아니라 영혼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를 원했다.

    1)신현숙, 『희곡의 구조』, 문학과지성사, 1990, p.141.

    2. 명암 : 조명의 연기

    미셀 꼬르뱅이 “고전 시대에는 공간 속에서 연기했지만 오늘의 연극은 공간과 함께 연기”2)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듯이 연극의 공간은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 때 무대는 인물의 내면을 반영하며, 그 변화는 인물의 변신을 암시한다. 무대가 어두운 빛으로 덮여있다면 주인공의 성격이나 마음상태가 음울하거나 절망, 불안감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인물의 정서적 변화는 언제든 무대장치로 대체될 수 있다. 특히 극이 진행되는 동안 조명은 인물의 태도나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인물의 사고(思考)나 감정을 조명의 밝기를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명암은 무대장식술의 중요한 기호이다. 빛을 통해 공간을 의인화할 수 있어서 주인공의 말에 앞서 이미 고통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다. 이점은 희곡 속의 몇 가지 예를 통해 확인된다.

    『공중보행자Le Piéton de l'air』3)의 첫 장면에 대한 무대지시는 주인공의 현재적 삶의 상태를 보여준다. 베랑제는 은퇴 후 시골에서 생활한다. 이 극은 실내가 아니라 밖에서 전개된다. 그의 집은 평화로운 자연 속에 있다. 그러나 그 평온한 분위기가 깨지면서 그의 태도도 바뀐다. 어느 날 베랑제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집은 파괴되고 그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는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아내와 딸에게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그 풍경은 베랑제의 반대편에 펼쳐진 그림 속에 묘사되어 있는데, 무대장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부자연스럽다. 극작가는 이 풍경이 주인공 베랑제의 시선 속에만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은빛 다리가 화폭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른 세계l'Autre Monde로 통하는 통로이다. 베랑제는 장애물을 건너뛰느라 분주하다. 이 때 붉은 풍선이 무대 안쪽 천장에서 서서히 내려온다. 그것은 베랑제의 비상(飛翔), 즉 그의 비행 욕구를 나타내는 이미지다. 마침내 자전거가 나타나고 베랑제는 재빨리 거기에 올라탄다. 공중으로 비상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이카로스, 베랑제의 기쁨은 절정에 달한다. 그가 비상했을 때 “빛나는 공 혹은 불꽃을 단 로켓이 보인다. 그것은 눈에 띄었다 사라졌다하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멀어져간다.”4) 등장인물과 무대장치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공, 다리, 자전거 등으로 구체화된 하늘로의 도피, 빛으로의 도피 욕망이 주제로 부각된다.

    베랑제가 공중을 걷다가 땅으로 추락했을 때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다. 무대는 어두워지고,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이미지가 감돈다. 붉게 물든 핏빛의 섬광이 하늘을 밝히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조명이 다시 밝아졌을 때, 그것은 풍경에 회색의 처량하고 어스름한 분위기를 주는 다른 색깔이다. 이오네스코는 우리가 무대장치의 안쪽에서 어떤 폭발하는 폐허, 성당, 연기 나는 화산 등을 볼 수 있도록 암시한다. 베랑제가 세상의 종말 이야기와 더불어 고통스러운 모험담을 펼쳐놓기에 앞서, 무대는 그에게 정신적 혼란과 깊은 상처를 준 암흑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 극은 베랑제, 아내 조세핀, 딸 마르트 등 세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붉은 빛을 향해 나아가면서 “모든 것이 불꽃놀이일 뿐”5)이라고, 즉 환상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끝난다. 등장인물이 환상적 비행은 조명의 연기와 함께 연극성을 창출하는 데 중요하다. 빛의 밝기를 통해 인물의 심적상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의무의 희생자Victimes du devoir』의 슈베르, 『아메데Amédée』6)의 아메데 역시 공중을 비행하다가 추락한다. 그들은 자유가 주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듯 육체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젖어있다. 그들에게 육체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파괴되어야 할 족쇄이다. 그러나 짧은 순간의 해방감은 언제나 현실로 회귀하여 추락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오네스코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삶과 죽음, 기쁨과 고통이 순환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대에서 빛과 어둠의 교체로 표현된다.

    명암의 변증법은 『증거없는 살인자Tueur sans gages』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빛의 도시”7) 속의 어둠, 즉 형이상학적 악의 존재를 고발하는 드라마인데 무대는 텅 빈 공간 속에 빛이 전부다. “텅빈무대. 무대장치도 없다...매우 강렬한 흰 빛...Pas de décor. Scène vide...une lumière très forte, très blanche.”8) 두 인물 베랑제와 건축가는 도시를 산책하고 있지만 그 장소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베랑제의 서정적 감정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야!... 무슨 기적 같단 말야!…이 멋있는 잔디며 꽃이 만발한 화단… 채소처럼 먹음직스러운 이 꽃들… 꽃처럼 향기로운 채소들…게다가 푸른 하늘, 도무지 이 세상에선 보지 못했던 이 푸른 하늘…이 기막힌 날씨하며!”9) 두 사람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 정원, 골목에 대한 인상을 주고받으며 텅 빈 무대를 걷는다. 건축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무대장치 요소들은 침울하고 불길하게 보 인다. 그것들은 곧 사라진다. 무대장치의 부재는 “빛의 도시”의 현실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곳의 베랑제가 황홀경에 빠져 있지만 진정 빛의 도시는 존재하는가? 베랑제는 꿈을 꾸고 있는가? 무대는 다양한 조명으로 경이로운 인상을 준다. 무대장치는 오로지 빛뿐이다. 빛은 이오네스코에게 각별한 경험, 자서전적 경험과 관련 있다. 이 빛은 삶의 생동감, 기쁨, 황홀, 행복감의 뜻을 지닌다. 이오네스코의 빛에 대한 체험은 그의 모든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월의 어느 날... 나는 작은 도시의 낮고 하얀 집들 앞을 산책하고 있었다....갑자기 주위가 변했다. 비현실과 현실이 뒤섞여 있었고, 그 두 세계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엉켜있었다. 집들은 더욱 하얗고 깨끗하게 변했다. 빛 속에는 무엇인가 완벽하고 새롭고 순결한 것이 있었다. 미지의 세계였다. (...) 빛이 용해시킨 세계, 빛이 재구성한 세계였다. 기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와 넘쳤다. 그 자체가 뜨겁고 빛과 같았다. 절대적인 현존, 바로 그것이었다.”10) 이처럼 희곡을 감싸고 있는 빛은 이미 예고된 듯하다. 빛은 베랑제의 기쁨을 물질화한 것이다. 그의 심오한 느낌을 외부 세계로 투사한 것이다. 빛은 그가 체험한 환희가 허무에서 창조된 경이로운 세상임을 지각하도록 암시한다. 여기서 무대는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인물의 밖에 있는 심상(心象)이다. 『공중보행자』에서의 폭발음처럼 갑자기 하나의 소음이 평화를 교란시킨다. 베랑제의 기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위에 돌이 떨어진다. 이 현상은 불길한 징조를 암시한다. 돌이 출현한 냉혹한 현실은 빛의 도시의 상상적 차원과 대립한다. 더욱 격렬한 또 다른 소리들은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나타낸다. 베랑제의 기쁨은 살인자를 만나면서 무너진다. 베랑제와 건축가가 빛의 도시에서 벗어났을 때, 베랑제는 공중을 비행하던 보행자와 마찬가지로 무력감에 빠지며 꿈은 사라진다.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진다. 그는 두툼한 외투를 입는다. 조명이 바뀐다. 그것은 무대공간의 변화가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2)Michel Corvin, Contribution à l'analyse de l'espace scénique dans le théâtre contemporain, dans Travail Théâtral, no XXII, pp.62~80, 1976. “Au temps classiques, on joue dans un espace, aujourd'hui on joue avec l'espace.”   3)E. Ionesco, Le Piéton de l'air, Théâtre III, pp.121~122. 이 희곡은 1963년 2월8일 L'Odéon-Théâtre에서 Jean-Louis Barrault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4)Ibid., p.177.   5)Ibid., p.198.   6)Amédée ou Comment s'en débarrasser. 이 희곡은 1954년 4월14일 파리의 바  빌롱 극장에서 장-마리 세로의 연출로 초연되었다.   7)La Cité radieuse는 이상도시 혹은 이상국가처럼 절대적으로 악이 부재하는 관념 속의 장소를 의미한다.   8)E. Ionesco, Tueur sans gages, p.13.   9)Ibid., p.14~15.   10)E. Ionesco, Journal en miettes, p.97.

    3. 강박증 : 물질의 증식

    무대 공간에 인물의 강박증을 어떻게 투사할 것인가. 이 경우 이오네스코의 공간에 대한 묘사는 물질적 상상력으로 구현된다. 『빈틈La Lacune』11)에는 병적으로 지위와 인증서에 집착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학술원 회원인데 과시욕으로 질식할 지경이다. 그는 학위증을 수집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의 풍경은 화려한 거실로 표현된다. 학술원을 상징하는 녹색의 안락의자와 함께 거실은 학위의 전시장이다. 거기에 최고의 지성을 증명하는 아카데미 회원의 다양한 학위들이 있다. 그의 가슴에 매달린 훈장들은 허리까지 차있다. 거실의 공간에는 걸려있는 학위증들로 이동하기조차 어렵다. 주인공은 매일 밤 그것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지난날의 영광을 회상하며 살롱의 벽을 열병하는 것이다. 그는 지식욕과 명예욕의 강박증에 사로잡혀있다. 희곡의 제목 ‘빈틈’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나타낸다. 그것이 주인공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이 극의 희화화의 정점은 학술원회원이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져서 국가원수에게 시험의 무효를 주장하며 전화하는 장면이다. “엄마가 내게 마지막 수업을 금지했다. Ma maman m'a défendu de frequenter les derniers de la classe.”12) 극은 모두가 우리를 비웃는다고 외치면서 그가 학술원 회원을 상징하는 칼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 희곡의 학위증처럼 『새로운 세입자Le Nouveau locataire』13)의 무대장치 역시 인물묘사의 기능을 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운명을 예측하는 거울로 사용된다. 이오네스코는 이 희곡의 무대장치와 연기가 일치하도록 의도적으로 배려했다. 공간과 인물이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다. 무대는 세입자의 아파트로 극적 행위의 장소다. 그의 모든 몸짓과 말은 가구들을 배치하는 목적을 띤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인물의 연기가 무대장치, 이어서 사람들이 운반할 가구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사실적일 것을 강조했다. 주인공은 가구를 운반하는 행위를 주관하는 이상한 의식(儀式)의 집행자이다. 그는 두 명의 이삿짐 운송업자의 도움을 받는 제관처럼 그 의식을 엄숙히 수행한다. 그는 아파트의 문들을 조직적으로 가로막으려 한다. 그는 끊임없이 옮겨오는 가구들을 점점 좁아지는 원형으로 배치한다. 방에 가구들이 들어차자 중앙에 소파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왕좌로 간주하고 거기 앉아서 명령한다. 마침내 병풍 세 개가 벽을 만들어 그를 가둔다. 두 번째 이삿짐 운송업자가 마술사처럼 손뼉을 쳐서 천장을 연다. 널빤지가 천장에서 떨어진다. 그것들이 세입자를 덮친다. 그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 갇혀 질식한다. 지옥 같은 원과 가구들에 파묻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옮겨지는 가구들이 그의 턱까지 쌓인다. 이삿짐 운송업자는 무대를 떠나기에 앞서 상징적 의미로 꽃다발을 보낸다. 고인에 대한 마지막 경의 표시다. 그는 세입자가 영원히 어둠속에 있도록 불을 끈다. 새로 이사 온 집이 무덤인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과거도, 성격도, 비극적 죽음(자살)의 이유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맡긴 죽음의 공간을 정비하는 작업을 할 뿐이다. 무대공간만이 유일하게 인물의 정보 기능을 한다. 물질과 사물이 인간성 혹은 인간의 정신을 질식시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오네스코는 극작가이지만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들은 대개 희곡으로 개작되어 연극무대에 올려졌다. 그 가운데 「깃발」14)은 『아메데』라는 3막의 희곡으로 각색된다. 소설의 화자인 나와 아내 마들렌, 이들과 함께 아파트에 기거하고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오네스코는 이 이야기가 꿈에서, 즉 아파트 실내에 누워있는 시체에 대한 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나와 마들렌은 십년 전부터 아파트에 시체를 숨긴 채 살고있다. 그 시체는 아내 마들렌의 연인이었던 남자다. 내가 격분하여 그 “아름다운 청년”을 죽였고, 사체는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방인 침실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시체가 “기하학적 진행”을 하듯 증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자란다. 시체는 머지않아 아파트를 무너뜨릴 정도로 거대해질 것이다. 나는 밤에 어둠 속에서 창문 밖으로 시체를 끌어냈다. 그것이 어찌나 큰지 몸통을 끌어냈는데 발은 여전히 복도에 있었다. 시체를 옮기던 중 길모퉁이에서 경찰관에게 발각되었다. 경찰에 의해 체포되려는 순간, “시체의 수염이 갑자기 낙하산처럼 펼쳐지더니 나를 땅에서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나는 마치 꿈속에서처럼 은하수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깃발처럼.” 소설속의 화자는 연극에서 아메데 뷔치니오니라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괴함과 환상은 무대장식에서 더욱 허구적으로 드러나는데, 시체의 증식과 함께 버섯의 증식이 그렇다. 이야기 속의 사건들은 연극적 공포 속에서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시체는 원죄를, 원천적인 오류를 물질화한 것이며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점차 나와 아내, 즉 부부의 삶을 갈라놓는 시간을 물질화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메데』의 사물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끔찍하다. 버섯과 시체는 이 희곡의 본질을 이룬다. 주인공은 악의 상징인 사물의 존재에 맞서 싸운다. 무대는 비현실적이지만 풍자적이다. 그것은 아메데 부부의 삶을 반영한다. 아메데와 마들렌은 무려 십오 년 동안이나 아파트의 식당에 격리되어 산다. 옆방에 남자의 시체가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으로 죽임을 당한 것일까. 부부는 누군가가 먹을 것을 넣어줄 것을 기대하며 창문 아래로 바구니를 보낸다. 그것은 그들이 외부와 접촉하는 유일한 행위다. 시체는 부부를 떼어 놓는다.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증폭한다. 그것은 시체의 증식으로 표현된다. 아파트 내부에서 점점 커가는 시체를 상상해보라. 그것이 공간을 갉아먹으며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방은 “젊은 부부의 침실”이다. 또한 그것은 독버섯을 피어나게 한다. 독버섯은 두 사람을 괴롭히는 죄의식을 상징한다.

    막이 오르면 식당의 버섯들이 보인다. 시체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식당과 방 사이의 문을 부수며 나타난다. 커다란 시체의 발이 보인다. 이오네스코는 이 작품의 초연 때 시체의 발이 커야한다고 연출가 장-마리 세로에게 말했다. 연출가는 1미터 50센티의 발에 난색을 표했다. 그는 75센티정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2막은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식당의 버섯들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무대 왼쪽 시체의 정강이 근처에 많다. 오른쪽에는 가구들로 빼곡하다. 시체가 성장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옮긴 것들이다. 아메데와 마들렌은 새로운 세입자처럼 가구들 속에 파묻혀있다. 공간이 좁아 이동하기 힘들다. 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공간을 정비한다. 시간이 갈수록 참을 수가 없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마치 공간이 육체의 고통과 융합된 듯하다. 그들은 마들렌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마들렌이 “그건 내 심장 뛰는 소리예요.”라고 말하자 아메데는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고 해도 당신의 심장 소리와 문소리를 구별할 수 없을 거야.”15)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그들의 내적 고뇌가 어떻게 공간 속에 청각영상으로 투사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경우 무대장치는 인물의 대사를 보완함은 물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전통극에서 말로 표현된 것이 여기서는 음성적 무대장치로 전달되는 것이다. 음향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심장 뛰는 소리는 무대장치들이 흔들릴 정도로 커야 한다.”16)

    2막 끝에서 아메데는 시체를 창밖으로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정강이가 길고 머리가 커서 창문을 통과하기 어렵다. 마치 아기가 출산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재현한 듯하다. 그것은 아메데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아메데는 그 동안 삶을 방해하고 그를 괴롭혔던 과거, 병적인 회한에서 해방된다. 시체는 처음부터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집안의 모든 것과 함께 한다. 소설의 화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비상하듯이 3막에서 아메데는 하늘로 비상한다. 시체의 목은 붕대로 감겨 있다. 시체의 머리가 빛의 깃발로 변했다. 빛과 불꽃이 아메데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피날레를 수반한다. 이오네스코는 장-피에르 세로의 두 번째 연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보다 상상력이 뛰어나다. 오데옹 극장에서 아메데는 공간의 모든 차원을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연극이 끝날 무렵, 등장인물이 공중을 비상할 때 그는 이 사실을 축하하는 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무대 한가운데 어떤 거대한 빛을 발하는 공이 걸려 있었다. 그 공은 회전하고 있었으며, 객석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거기에 별들이 있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이 있었다. 일종의 별들의 축제였다. 장-피에르 세로의 연출은 마술이었다.”17) 아메데의 마음의 여정은 무대공간의 변화를 통해 형상화된다. 버섯이 번식하는 부패한 식당, 시체의 증식은 아메데와 마들렌의 관계를 반영한다. 집의 붕괴는 이별의 고통을 상징한다. 아메데의 비상과 이교도의 상승은 다시 찾은 해방감을 진정시킨다. 무대공간에 이러한 내적 모험이 투사되는 것은 꿈의 이미지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11)이 희곡은 1막의 코미디로 1966년 3월7일 L'Odéon-Théâtre에서 Jean-Louis Barrault 연출, Jacques Noël의 무대장치로 공연되었다.   12)La Lacune, Théâtre IV. p.211.   13)이 희곡은 1953년 9월14일에서 16일까지 불과 3일만에 완성됐다. 초연은 1955년 스웨덴에서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공연되었고, 두 번째 공연은 다음 해에 영국에서 영어로,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957년 9월10일 Théâtre d'Aujourd'hui에서 Robert Postec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14)1954년 『누벨 르뷔 프랑세즈 Nouvelle Revue Française』 2월호에 실린 작품으로 La Photo du colonel이란 제목으로 묶여 발간되었다.   15)Amédée ou Comment s'en débarrasser, Théâtre I, pp.299~300. “Si on frappait pour de bon à la porte en ce moment, ce ne serait pas facile de distinguer les battements à la porte de tes battements de coeur.”   16)Ibid., p.300.   17)E. Ionesco, Entre la vie et le rêve, Edition revue et augmentée, Belfond, 1977, p.92.

    4. 망상과 죽음의 시각화

    유사한 무대상황이 『두 사람의 망상Délire à deux』18)에서 되풀이된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와 ‘그’라는 두 인물들이 17년 동안 아파트에 갇혀 싸우며 산다. 무대는 아파트의 방이다. 극적 공간은 위협적이며 불안하다. 한창 전쟁 중인 거리가 보인다. 처음에 전쟁은 멀리서 다음에는 점점 다가오는 폭발음들로 표현된다. 이 커플은 주기적으로 싸움을 중단한다. 그녀와 그는 포위되어 있어서 외출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행동은 전쟁의 참담한 결과를 방에 나열하면서 박자를 맞춘다. 연극이 끝날 즈음 집은 완전히 파괴된다. 이 때 전쟁 소음들은 축제의 소리로 대체된다. 전쟁이 끝나자 그와 그녀는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런데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매우 즐거워하는 군인의 얼굴, 바캉스를 즐기고 돌아오는 두 이웃이 나타난다. 그들의 태도는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그들은 두 사람에 의해 푸대접을 받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지금껏 완강하게 거부하던 외부 세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는 즉각 피해복구를 시작하며, 구멍을 막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칩거한다. 그가 평화의 시절이 와서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는 외부의 다른 것을 환기시킨다. 바람, 감기, 세균 등. 전쟁은 오직 등장인물들의 상상 속에서, 제목이 암시하듯이 두 사람의 망상 속에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에서 비롯한 전쟁에서 벗어나자 다른 테마를 찾는다. 비현실적 연출은 전쟁의 환각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끊임없이 포탄들이 떨어지며,그 자체가 독특한 느낌을 창출한다. 깨진 찻잔,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 인형의 머리들 등. 극을 감싸고 있는 환상적 분위기는 그와 그녀가 미쳤는가라는 질문 속에 들어있다. 이 전쟁에 관한 소극에서 무대공간의 점진적인 파괴는 등장인물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망상을 물질적으로 보여 준다.

    외부에 대한 강박관념은 『살인놀이Jeux de massacre』19)에서 광기로 나타난다. 페스트가 도시를 휩쓸고 있다. 집 주인은 페스트에 감염될까 두려워 아파트에 칩거한다. 그는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모든 틈새를 막는다. “모두 틀어막아....썩은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악마같은 바람은 아무리 두꺼운 벽도 뚫고 들어오거든.”20) 출입구는 방문객이 귀찮아할 정도로 언제나 소독되어 있다. 그는 외부와 싸우기 위해 갑옷을 입었다. 몸이 갑옷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그의 강박증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의식(儀式)은 외부로부터 집을 봉쇄하는 데 있다. 이 현상은 『끔찍한 사창가 Ce formidable bordel』21)에서도 볼 수 있다. 역시 외부세계가 침투할지 모르는 모든 출구들을 봉쇄하려는 인물이 등장한다. 도시에서 맹위를 떨쳤던 혁명은 그의 태도를 정당화해준다.그는 혁명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집안에 갇혀 두려워한다. 그것은 자기의 보호벽에 구멍이 뚫리는 공포이다. 이오네스코는 구멍에 대한 두려움에 비정상적인 성적 특성을 부여한다. 주인공은 잠자는 여자 친구의 성기를 응시하며, “저런, 대단한 흠집이로군.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다니! 가엾은 여자”22)라고 말한다. 그는 구멍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거세 공포인 것이다. 여기서 공간은 마치 등장인물의 몸이 연장된 거대한 물질처럼 보인다. 그 물질은 등장인물과 동일한 고통, 동일한 착란상태를 드러낸다.

    『의자들』의 무대는 고뇌하는 공간이다. 두 노인이 등장한다. 그들 역시 망상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향하는 코미디 배우와 같다. 무대는 장기판 모양으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초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의자들을 옮긴다. 이 작업은 끝없이 반복된다. 유일한 탈출구인 자살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처음에 의자들은 몇몇 한정된 사람들(첫번째 부인, 육군 대령, 벨과 그녀의 남편 등)을 위한 좌석용으로 옮겨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차별적인 군중을 나타낸다. 의자들 그 자체가 연기자다. 사물화 된 인물인 셈이다. 그들의 역할은 들러리와 무대장치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인물의 물질적 자료가 된다. 그것들이 노인들의 망상을 유발시킨다. 이오네스코는 의자의 무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연출가에게 말한다. “텅 빔을 창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증폭하고 침식시키기 위해 열고 닫히는 문들의 반복과 움직이는 사물들, 소리들, 빛들, 판토마임 방식의 움직임들, 제스처들이 필요하다. 오직 현존성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부재함을 창조해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며 모든 역동적인 오브제들은 그 자체로 희곡의 운동이다.”23) 의자들은 방문객들의 현존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연극이리용의 셀레스텡 극장에서 공연되었을 때, 부인과 육군대령 등의 도착을 기다리던 관객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어떤 배우도 앞의 인물들의 역할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그러한 연출이 재정적 이유 혹은 지방에서의 공연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파리에서 공연할 당시의 배우들 전체가 리용에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음향에 따른 무대장치는 희곡의 애매성을 가속화한다. 초대손님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들이 노인들의 환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물 위에서 배가 미끄러지는 소리, 초인종 소리 등 관객에 의해 지각된다. 조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대 손님들이 도착함에 따라 점점 강해지면서”24) 분위기를 바꾼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괴상하고 환상적인 세계로 인도되어 두 노인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인지, 지각한 것을 못 보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노인들이 자살한 후, 보이지 않는 군중들이 웅성거린다. 웃음, 중얼거림, “쉬, 조용히.”, 빈정거림, 기침소리 등. 군중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사라진 후, 살아 있는 군중의 현존성을 소리로 물질화 하는 것은 조화롭지 않다. 관객의 정신에 더욱 큰 의혹을 던져주기 위한 속임수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두 인물의 광기가 실천되는 장소가 된다. 인물들은 마지막까지 수수께끼로 남는다. 즉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관객의 몫인 것이다.

    『왕은 죽어가다Le Roi se meurt』의 무대는 궁전의 닫힌 공간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육체와 함께 붕괴되는 우주로 축소되어 있다. 죽음에 직면한 베랑제 왕의 고뇌는 왕실의 벽에서부터 나타난다. 공간과 육체는 완벽하게 공생관계다. 둘은 죽음에 이르는 환자로서 서서히 해체된다. 극적 공간은 매 순간 죽음의 징후들을 보인다. 희곡의 첫 장면부터 재난과 같은 예외적 사건들이 발생한다. 즉 번성하던 도시가 갑자기 사막으로 변하고 동식물이 죽어간다. “우리나라에선 농작물이 썩고, 사막이 대륙을 잠식하고 있으며...로켓 역시 아예 발사가 안 되거나, 궤도를 벗어나 추락합니다.”25) 이런 현상은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다. 왕국의 노후화가 가속화된다. 지진이 발생하고, 절대자인 군주의 명령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이다. 작가는 시간과 더불어 왕과 왕국의 죽음, 즉 죽음의 진행을 공간 속에 시각화한다.

    이 희곡은 극의 밀도와 조형성, 단순한 구성, 지적인 내용, 도덕적‧심리적 진실성 등으로 이오네스코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극은 벽에 틈이 생긴 왕실에 병이 퍼지면서 시작된다. 이러한 무대공간의 퇴화는 악화되는 왕의 건강상태를 반영한다. 천문학자이자 의사인 인물이 이중의 변화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한다. 그는 왕과 궁전의 두 진단서를 가지고 있다. 왕의 몸은 세계와 밀접한 소우주이다. 공간은 거대한 환자의 몸이다. 이 희곡에서는 환상적인 것이 우의적인 목적으로 쓰인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세상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물질화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에게 이와 같은 공간의 해체는 죽음이 세상의 종말의 광경임을 의미한다. 왕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무대장치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왕은 장님, 귀머거리가 되어 외부의 사물을 지각할 수 없다. 공포에 떠는 왕의 심장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왕실의 붕괴로 귀결된다. 왕의 죽음과 사라짐은 무대장치가 사라지고 난 후에 찾아온다.

    이오네스코에게 인간과 우주의 관계는 그 자신의 오랜 죽음에 대한 경험과 연결된다. 그는 『발견Découvertes』에서 이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나는 네 살 무렵 죽음을 알았고 세상이 나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나와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예민하게 불행을 의식했던 것은 일곱, 혹은 여덟 살 때였을 것이다. 당시 난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때 처음 나의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26) 『왕은 죽어가다』는 작가의 말대로 “죽음을 체험하는 에세이”인 동시에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은밀한 욕망이 들어 있다. 즉 자아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망, 거울의 단계에서 비극적으로 상실했던 어린 시절과의 일체감을 복원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는 왕과 함께 세상이 사라진다고 상상하면서 최후의 소멸이 완성된 후 이 회복을 납득할 것이다. 이 융합은 오직 파괴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 희곡의 무대는 인물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공간은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이다. 그것은 인물의 희망과 환멸, 광기가 기록되어 있는 장소이다. 괴상한 의식(儀式)들이 실행되는 공간, 즉 외부로부터 오는 강박관념, 등장인물에게 갈라진 틈을 막도록 강요하고 스스로를 가두도록 하는 죽음의 강박증이 실행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세의 고뇌를 체험하는 고독한 자, 환각에 사로잡힌 자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변한다. 공간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인물묘사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오네스코가 인물들의 묘사에 심리적 차원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무대장치가 인물을 특징짓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작술에서 무대장치는 말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시각 이미지가 언어적 표현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다.

    무대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것은 이오네스코의 세계가 불확실성과 의혹들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등장인물의 환상적 세계를 반영하는 섬세한 임무를 띤다. 환상은 이상함, 몽환, 경이로움을 창조한다. 그 점은 이미 정신분석학에서도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즉 다른 무대 l'autre scène에서 연기하는 ‘그’는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연극의 차원과 마찬가지로 그의 차원은 순전히 상상적이다. 거기에 이오네스코 희곡의 무대장치를 구성하는 환상의 내적 공간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극작가는 그저 죽어가는 한 인간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어가는 세계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존재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주제를 통해 자신의 가장 위대한 희비극,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한 극시를 완성했다.

    18)1962년 Studio des Champs-Elysées에서 Antoine Bourseiller 연출로 초연.   19)이 희곡은 독일 Düsseldorf에서 1970년 1월22일 초연, 같은 해 9월11일 파리 Théâtre Montparnasse에서 Joge Lavelli 연출로 공연되었다.   20)Jeux de massacre, Théâtre, V. p.32.   21)1973년 11월14일 Théâtre Moderne에서 Jacques Mauclair연출, Jacques Noël 무대장치로 초연되었다.   22)E. Ionesco, L'Homme aux valises suivi de Ce Formidable bordel!, Théâtre, Gallimard, 1975, p.165.   23)Notes et contre-notes, p.264.   24)Les Chaises, Théâtre, I. p.180.   25)Le Roi se meurt, Théâtre, IV. p.26.   26)『발견』, 박형섭(옮김), 새물결, 2004, p.81.

    5. 포위와 욕망 : 인물들의 관계망

    극적 공간 혹은 무대는 인물들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공간이나 장소가 인물간의 관계망을 투사할 수 있을까. 무대에서 인물들의 등‧퇴장과 위치 등은 연출의 설계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사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동작은 극작가의 지시문을 토대로 하여 연출가의 연기지시로 결정된다. 이오네스코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포위된 장소에 놓여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물에 의해서든 사람들에 의해서든 포위된 존재는 부자유, 속박, 고독, 죽음을 상징한다. 가령 코뿔소에 둘러싸인 베랑제, 의자에 포위된 노부부, 버섯이 증식하는 아파트에 사는 아메데 부부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는 가족들에 둘러싸인 주인공, 포위당한 존재가 어떻게 반항하고 복종하는지 그 관계를 알아볼 것이다. 『자크 혹은 복종Jacques ou la soumission』27) 은 부르주아 가정의 결혼에 대한 인식의 비판이다. 극은 주인공 자크가 “베이컨을 곁들인 감자les pommes de terre au lard”28)를 좋아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하는 가족들의 압력에 마침내 굴복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자크가 어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의미인데, 그 세계는 양심과 타협하는 행동, 위선, 비열함, 그리고 저속함을 나타낸다.

    자크는 무대중앙의 안락의자에 앉아 가족들로 둘러싸여있다. 매우 지친 모습이다.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 모두 자크 Jacques라는 이름을 지녔다. 자크는 코가 세 개인 처녀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괴상한 남자다. 그는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에게 잔인하게 지배당한다. “아, 배은망덕한 아들아, 너는 내가 너를 내 품에 안고 있었을 때를 잊고 있구나, 그리고 사랑스런 어린 송아지처럼 인상을 찌푸리도록 하기 위해 너의 작은 이빨들을 뽑고 발가락에서 발톱을 뽑아냈을 때를 말이다.”29) 그녀는 아들이 베이컨을 곁들인 감자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알고자 한다. 그가 이 요리에 동의하는 경우 가정의 모든 일이 순조롭고 갈등은 사라진다. 로베르트Roberte 가족이 도착한다. 로베르트는 세 개의 코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크로부터 거절당한다. 자크의 거부 의사는 자신이 “베이컨을 곁들인 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베르트 부부는 “두 번째 외동딸”인 로베르트 II가 있다. 그녀는 자크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자크는 그녀가 충분히 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반항한다. 세 개의 코를 가진 로베르트 II는 자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유혹한다. 희곡이 끝날 즈음, 두 사람이 포옹하자 모든 가족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며 원을 만든다. 그들은 “돌면서, 희미한 고양이 울음소리, 이상한 신음소리, 그리고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소리를 낸다.”30) 극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모든 것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느낌, 불편함,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31)이 장면은 마치 고대 사회에서 씨족이 승리를 상징하듯 제의적 춤을 연상시킨다. 로베르트가 홀로 남고 모두 사라진다. 그녀는 자크를 삼킨 잔혹한 여자이며, 자크 대신 가족의 중심이 된다. 자크와 아버지의 방은 문으로 통한다. 무대공간과 드라마 공간 사이에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 문으로 자크에게 소외의 눈길을 보낸다. 문이 무서운 징계의 장소가 된다. 그것은 아들이 자기 방에 유폐되기에 앞서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하는 문이다. 그 문은 금지의 기호이기도 하다. 방에 갇힌 자크는 문을 넘어올 수 없다. 이 작품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두 지점이 문제가 된다. 중앙과 문과 함께 무대공간을 이용하는 것,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그들이 차지하는 무대의 위치 등 모든 것은 자크가 패하는 운명적인 싸움, 자크를 짓누르는 억압, 공격성의 관계들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자크 혹은 복종』의 속편인 『미래는 달걀 속에 있다L'Avenir est dans les oeufs』32)에 포위의 행위가 재등장한다. 이 드라마 역시 생산에 대한 강박증과 소비사회의 저속함을 풍자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정 내의 의무를 수용하는 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부조리한 방식으로 고발한다. 자크와 로베르트는 3년 전에 결혼했다. 그 이후 그들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아무런 결과도 없이 “아롱거린다chatoient.”33) 자크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사망소식을 전했을 때 죽음의 불행을 인식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에서 그렇다. 할아버지의 초상화로 표현된 장례식에서는 문상과 통곡이 끝난 후 자크는 혈통을 잇는 임무를 떠맡는다. 자크와 로베르트가 출산의 고통을 암시하듯 “꼬꼬댁 ! 꼬꼬댁! 꼬꼬댁!”34) 소리를 지르며 알을 낳는다. 부모들은 아이가 생긴다는 엉뚱한 생각에 열광하며 자크에게 알들이 담긴 바구니를 가져다준다. 자크는 안락의자에 앉아 아기를 낳으라고 훈계하는 누이와 아버지에 둘러싸여 있다. 가구와 탁자, 긴의자 등이 알을 낳는 도구로 사용된다. 거기에서 자크는 재생산의 기능을 한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의자들이 알을 낳는 탁자를 둘러싸고 있다. 두 가족의 구성원들은 그의 용기를 북돋아준다. 자크는 알에 둘러싸여 행복한 감정에 빠진다. 온통 즐거운 분위기다. 이 극의 연출가는 극을 끝내는 데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기쁨의 상태에서 막을 내리도록 하거나 혹은 배우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무대의 기계장치를 이용해 배우들의 연기가 중단되는 일 없이 마루가 꺼지면서 점차 아래로 가라앉는 수법이다. 이 방식으로 인물들이 사라지는 것은 단지 막을 내림으로써 배우의 모습을 지우는 것과 효과가 다르다. 인물들이 밑으로 가라않는 것은 이오네스코의 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매몰에 대한 고뇌의 시각화다. 『결혼할 청년Le Jeune homme à marier』35)에서도 『자크 혹은 복종』의 논쟁이 반복된다. 의자가 무대 중앙에 놓여 있다. 결혼을 앞둔 청년이 앉을 자리이다. 이 의자는 나중에 텍스트 안에서 "안락의자”36)로 불릴 것이다. 막이 오르면 모든 가족들이 의자의 주변에 모여 있다. 젊은이는 소개받은 신부감들을 전부 거절한다. 자크가 그랬던 것처럼 유혹의 장면이 끝나면 주인공은 신부의 팔에 안긴다. 이 세 희곡들에서 안락의자 혹은 의자는 무대 중앙에 놓여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둘러 싸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복종과 사라짐의 장소를 의미한다. 『수업La Leçon』에서는 학생이 공부하는 책상이 무대중앙에 놓여있다. 그것은 장차 희생자의 제단이 될 것이다. 책상이 수업의 장소이자 범죄의 장소인 것이다. 교수는 학생을 살인하기 위해 유혹하면서 그녀를 에워싼다. 그는 여학생 주위를 돌며 최면을 건다. 승리감에 도취된 듯 환희의 춤을 추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해독제Antidotes』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업』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 의미는 욕망의 힘이 될 것이다. 즉 극단으로 치닫는 비이성적인 강한 욕망인 것이다. 본능은 교양보다 더 강하다.(...) 교수가 여학생에게 아무리 지속적으로 산수와 문헌학을 가리키려고 해도 소용없다. 문헌학이 범죄로 이끌고 간다!”37) 무대에서 책상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대 오른편 안쪽에 있는 문으로 아파트의 복도로 연결된다. 또한 문은 극작술의 공간으로 교수의 연구실과 하녀가 일하는 부엌으로 통하는 경계선이다. 『주인Le Maître』38)은 무대 위 등장인물들의 위치를 통해 욕망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텅 빈 무대는 네 개의 중요한 지점으로 구성된다. 무대 안쪽의 문. 모든 기대와 기다림이 투사되는 장소다. 그 문은 외부로 통하는 길이고 주인이 도착하는 입구이다. 막이오르면 무대 중앙에서 아나운서가 관객에 등을 보이고 있다. 그는 안쪽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른쪽과 왼쪽의 문. 하나는 숭배하는 남자Admirteur, 다른 하나는 숭배하는 여자Admiratrice가 문지기 노릇을 한다. 그들 역시 무대 안쪽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공허한 무대는 이 세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됨으로써 채워진다. 시선은 안쪽의 문을 향한다. 세 인물은 말없이 부동자세로 서있다. 관객은 인물들의 장소에서 운명을 읽을 수 있다. 아나운서가 주인의 도착을 알리자 행동이 개시된다. 각자의 퇴장은 희망이지만 곧 환멸이 뒤따른다. 아나운서는 무대 안으로 가다 멈춘다. 주인을 부르며 문을 통해 나간다. 마치 염소의 울음처럼 “주-우-인-니-임”하고 외친다. 두 사람의 숭배자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욕망을 실현할 뿐이다. 그 욕망은 욕망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죽음의 욕망이다. 주인은 얼굴이 없는 사람이다. 아나운서는 거꾸로 퇴장하는 액션을 취하면서 두 숭배자들과 함께 무대 안쪽에 다시 나타난다. 세 사람은 극의 첫 장면 때와 같은 장소에 있다. 아나운서는 그가 보았던 모습대로 주인을 그린다. 희망과 함께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희곡이 끝날 때까지 이러한 반복된 행동이 빠르게 진행된다. 아나운서가 숭배자들과 함께 오른쪽으로 퇴장한다든가 혹은 무대 안쪽으로 퇴장하고 숭배자 한 사람은 오른쪽, 다른 사람은 왼쪽으로 퇴장한다. 이러한 교묘한 연기는 더욱 격렬하게 작품으로 되돌아오며, 더욱 은폐되도록 욕망이 다른 방법들을 차용해 온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운동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좀 더 빨리 무대를 통과하는 것으로 끝난다. 젊은 남녀가 무대를 차지하고 있을 뿐 텅 비어 있다. 그들은 각자 무대 양쪽으로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서 합류했다가 함께 퇴장한다. 혹은 한쪽에서 나타나 서로를 뒤쫓으면서 다른 쪽으로 사라진다.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찾아다니는, 그러나 곧 상대방을 잃어버리는 젊은 연인들의 꽁무니 쫓기는 주인을 찾아다니는 아나운서, 숭배하는 여자와 숭배하는 남자의 뒤쫓기와 대위법적으로 겹쳐진다. 처음에 이 두 종류의 추구는 교대로 나타나다가 나중에 서로 겹친다. 움직임의 리듬이 점점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무대에 마지막으로 등장할 때 등장인물들은 무대중앙에 모두 다섯 명이 남는다. 아나운서는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주인의 도착을 알린다.숭배하는 남자와 젊은 여자는 오른쪽 벽으로 달려가고 숭배하는 여자와 젊은 남자는 왼쪽 벽에 엎드린다. 두 사람이 포옹한다. 숭배하는 남자와 숭배하는 여자는 아나운서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엇박자로 움직인다. 주인은 무대 안쪽으로 입장한다. 공허한 기다림이 절정에 달한다. 그는 무대 가운데에서 머뭇거리다가 왼쪽으로 간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언제나 기만하고 달아나는 욕망의 대상의 이미지인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기다림과 뒤쫓기를 반복하다 기만당한 모습이다. 주인의 도착을 고대하던 숭배하는 여자와 숭배하는 남자는 그가 얼굴 없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서로를 찾아다니던 사랑하는 젊은 남녀는 패가 잘못 전달된 것을 모르고 한사람은 숭배하는 여자이며 다른 한사람은 숭배하는 남자라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변신하는 모습은 마치 발레처럼 세심하다. 무대 위의 운동을 나타내는 도식들은 상징의 망으로 읽힌다.

    이처럼 이오네스코 연극에서 포위는 인물을 희생시키는 수단이다. 주인공은 무대 중앙에서 죽을 때까지 공격을 받는다. 중앙이 희생의 장소라면 무대에서 극적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문은 다른 인물들이 지배적 힘을 구사하는 장소이다. 문의 다른 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려는 욕망은 여러 인물들에게서 표현되는 것인 바, 원시적 장면의 환상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듯하다. 인물들의 등‧퇴장은 상황변화를 지시하는 순간으로 드라마를 구별하는 기준점이다. 『주인』에서 등장과 퇴장의 연기는 인물의 욕망을 더욱 추상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은 포위되어 타자들의 욕망을 위한 공격의 대상이 되며, 때로 학대하는 공간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그는 통로를 막아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방어하려고 한다. 만약 이오네스코의 작품에서 무대장치가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면 무대 위의 인물들은 갈등을 표출한다. 이 점은 이오네스코의 연극에서 무대장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인물의 내적 세계를 공간에 투사함으로써 전통적인 등장인물의 개념을 벗어나고 있다.

    27)Jacques ou la soumission, Théâtre, I. 이 희곡은 1955년 10월 Théâtre de la Huchette에서 Robert Postec 연출, Jacques Noël의 무대장치로 초연되었다. 당시 Jacques Noël은 Robert II에게 코가 셋인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했다.   28)그것은 부르주아 가정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Jacques는 “J'adore les pommes de terre au lard!”를 반복한다.   29)Ibid.., p.98.   30)Ibid.., p.127. “On entend leurs gémissements de bêtes, puis on ne les voit plus. On n'entend plus que leur gémissements, leurs soupirs.”   31)Ibid., p.127. “Tout cela doit provoquer chez les spectateurs un sentiment pénible, un malaise, une honte.”   32)1957년 Théâtre de la Cité Universitaire에서 Jean-Luc Magneron 연출로 초연.   33)Théâtre, II. p.207. 프랑스어 ‘chatoyer’는 ‘아롱거린다’는 뜻.   34)Ibid., p.221.   35)이 희곡은 1965년 2월 덴마크 텔레비전에서 Per Nörgärd의 음악과 함께 방영되었다.   36)Jacques et la Soumission에서 Jacques가 앉았던 의자.   37)E. Ionesco, Antidotes, p.221.   38)1953년 9월 Théâtre de la Huchette에서 Jacques Poliéri연출로 초연되었다.

    6. 나가기

    극적 공간은 희곡 속의 세계가 이미지화된 것이다. 극적 공간은 항상 움직인다. 그것은 텍스트가 함축하고 있는 어떤 공간적 관계들을 연출을 통해 형상화할 때 비로소 구체적이고 가시적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무대 공간과 연출은 텍스트의 극적 공간과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극공간은 허구의 공간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시의 공간과 다를 바 없다. 그 구성은 극작가가 독자나 관객의 상상력을 위해 부여한 지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상연된 공간과 다를 수 있다. 상징화된 극적 공간과 지각된 무대공간은 우리의 시야에서 끊임없이 뒤섞인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면서 형성되기 때문에 이 둘 사이를 엄격히 구별하기는 힘들다. 이 때 극적 환상이 개입한다. 눈으로 본 것과 정신 속에 형성된 것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오네스코가 구상한 극공간은 일상적 삶속의 몽환적 요소를 강조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인간의 의식, 혹은 자아의 심적 현실이 공간에 투사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곳은 극중 인물이 살아가는 장소인 동시에 인물의 꿈, 환각, 상상의 내적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는 희곡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극공간이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며, 그 변화가 인물 간의 관계, 갈등, 강박증, 욕망 등의 변화를 수반하고 있음을 알았다. 무대에 대한 작가의 물질적 상상력은 연극의 기호로 이어진다. 이 연구는 주로 희곡 속의 무대적 상황을 중심으로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 작가의 극작품의 공간을 탐구한다면 내적 공간으로서의 또 다른 공간, 즉 배우의 내적 공간을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무대에 드러난 모든 공간은 배우의 몸을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등장인물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의식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제공한다. 이러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 작가가 의도한 “무대 위에 투영된 나 자신의 내면의 우주상”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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