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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The Aesthetics of the Resurrection of Ecological Imagination:Marilynne Robinson’s Housekeeping 생태학적 상상력의 소생의 미학 ―메릴린 로빈슨의『하우스키핑』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Aesthetics of the Resurrection of Ecological Imagination:Marilynne Robinson’s Housekeeping
KEYWORD
Marilynne Robinson , Housekeeping , ecological imagination , habitability
  • I. 서론

    이 논문의 목적은 메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의『하우스키핑』 (Housekeeping)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주요인물 루스(Ruth)가 비관습적인 살림을 하고 떠돌이의 삶을 사는 실비(Sylvie) 이모를 따라 유동적 정체성을 가 짐으로써 환경, 자연(어머니)을 소생시킬 수 있음을 인식할 뿐 아니라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는 관습적인 가치관의 경계선인 핑거본의 철도다리를 건너감으로써 몸은 부재할지라도 투명한 목소리의 존재로 소생하여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조화시킬 수 있는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음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루스가 실비 이모를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엄마를 대체하는 실비와 결속력을 갖고 자신의 기억과 의식 속에서 그녀의 모든 가족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루스가 생태학적 상상력을 통해 모든 가족을 포용하는 반면, 상징계의 사회질서를 따라 안정성과 고정성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루실은 가족과 결속력을 갖지 못하고 단절과 고립의 존재로 남게 됨을 살펴볼 것이다.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지향하는 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실비와 루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고찰할 것이다.

    미국문학에서 성장소설의 특징은 등장인물이 집의 외부에서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은 미국소설에서 남성의 통과의례의 특징이 되었다. 외면적으로 이 작품도 동일하게 집을 떠나는 전통을 기반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초기비평은 미국문학전통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성장소설로서 읽혀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집을 벗어나는 동시에 집을 재정의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고 자연과 문명의 통합적 관계에서 거주할만한 공간을 제시하므로 새로운 환경비평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집은 불에 타지만 새롭게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집을 떠날지라도 가사와 양육을 전통적으로 지속하는 집을 동경함으로써, 자연과 사회의 조화의 맥락에서 방랑과 회귀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장소설 측면에서 접근하는 초기비평을 넘어, 이 소설을 자연환경 의식과 관련하여 여성의 유동적 정체성의 제시와 논의를 다루는 것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의의가 있다. 로빈슨은 떠돌이로서 후기(postscript)를 이야기하는 일인  칭 여성서술자를 창조하여, 기존소설이 갖지 않는 새로운 정체성을 제안한다. 루스는 인간중심개념을 벗어나 영속성은 비영속성에서 존재는 부재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과 상실의 이미지로 가득 찬 이 소설은  소멸된 만물의 생명과 소생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II.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위한 유동성과 거주가능성의 제시

    로빈슨의『하우스키핑』은 여성과 집에 대한 전통적 개념에 도전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적인 렌즈를 통해 분석되어왔다. 이 소설의 초기 비평가 얼드리치 (Marcia Aldrich)가 어떻게 루스와 실비가 여성의 관계와 비관습적인 행동을 통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모색했고, 말론(Anne Marie Mallon)이 여성이 관습적 의미에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것을 공동사회 경계선 내부에 고정되는 것이며 집이 없이 떠도는 것을 질서와 안전을 초월하는 것으로 비유함으로써 자유로운 존재로서 재생을 제시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사회 주변부에 속한 여성 등장인물이 공동사회를 떠나 그들의 결속력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여성의 젠더 역할을 넘어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에 비해 이 연구는 초기 비평인 페미니즘, 생태여성주의의 자연/문화의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서 이 작품이 생태주의와 환경 비평적 관점에서 장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바탕으로 자연과 문화의 통합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음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자연문학처럼 생태학적 관점의 소설인 에코픽션(ecofiction)은 인간과 장소의 새로운 관계, 즉 인간이 자연을 정신적 차원으로 이해하고 대지를 존경심과 경외심으로 다루어야 함을 주장한다. 자연문학이 개인과 자연 관계에 초점을 두는  반면, 에코픽션은 사회적 차원을 부가한다. 대부분의 자연문학은 자서전적이며, 저자는 자연과 직접적 경험을 서술한다. 에코픽션은 개인과 자연뿐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점에서, 주요인물이 사회와의 갈등 해결에 주로 초점  을 두는 전통적인 소설과 유사하다. 이것은 인간과 환경에 관련해서 사회적인 갈등을 해결하고, 개인과 사회와 자연을 조화시킴으로써, 두 장르의 관심사의 통합을 추구한다. 에코픽션은 어떻게 개인과 사회가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  는가를 보여주므로 인간의 삶에 호소력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

    카진(Alfred Kazin)은『한 작가의 미국』에서 모든 미국작가들의 이면에는 “‘자연’이라는 영속적인 배경,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에 있어온 대지가 존재”(8)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와 자연이 미국 문화와 문학에서 모순적이므로 사회와 자연의 조화를 성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허먼 멜빌의『백경』은 흰 고래(자연)에 의해 포경선 피쿼드호(사회)가 파괴되는 것으로 끝난다. 마크 트웨인의『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그의 숙모 샐리(Aunt Sally)에 의해 문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자연으로 나아가기 위해 전등불을 꺼야한다’는 헉(Huck)의 가정으로 결론짓듯이, 사회와 자연의 조화의 열망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미국의 전원시를 다시 쓰는 것이다. 자연시의 우세한 이데올로기는 남성적인 개척행위에 대해 자연을 여성적인 희생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루스의 서술은 자연과 어머니에 파괴적인 우세한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자 한다. 여  성 떠돌이와 비관습적 살림방식에 관한 루스의 서술은 여성적인 자연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력의 환상이 남성의 눈을 멀게 했고 분별력을 잃게 했음을 제시한다. 루스는 남성적인 폭력에 반대하며‘여성적인 자연과 어머니’를 포용한다. 로빈슨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이 문명사회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집은 나뭇잎에게 기꺼이 개방되어야 하며 인간과 자연이 집에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이 작품에서 루스와 실비가 핑거본의 다리를 건너서 집이 없음과 일시성을 받아들이며 실체가 보이지 않고 목소리로만 살아남은 존재로 재생함을 보여주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성을  뛰어넘어 비(非)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새롭게 상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생태학적 인식”(Love 230)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생태비평의 두 개념인 생태여성주의와 장소의 생태학적 인식에서 차별성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생태여성주의가 자연/문화의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자연/문화의 통합적 관점을 보여준다. 장소의 생태학적 인식에서도 일반적으로 특정장소에 인간이 정착하는 것이 필수조건으로 제시되는것에 비해 이 작품은 루스와 실비가 정착성과 고정성을 탈피하여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생태학적 인식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 장소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맥락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인식은 뷰엘(Lawrence Buell)이 문화와 자연 둘 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통합적 사고의 가능함을 제시하는 데서 나타난다. 지리학적 개념으로 구분되는 ‘장소’(place)와‘공간’(space)은 단순한 반의어가 아니다. 장소는 공간적 위치 점유를 수반하는 반면 공간은 기하학적 혹은 지형학적 추상작용을 함축한다. 장소는 구체적 지역과 불가분의 관계로 자연과 물질적 환경이며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의된다. 그래서 인간은 공간보다는“장소에 부속”(Buell 63)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소는 보이고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뷰엘은 세계역사가 공간이 장소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본다. 처음에 지구는 형태가 없는 공간이었으나, 정착과 거주를 통해 공간이 창조되었다. 그러나 현대역사는 이 과정을 역전시켰다. 초기 인간사회와 반대로 공간과 사회의  개념적 융합이 파기되었다고 보는 경제적 상호교환에 기초를 둔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장소와 사회는 단일성으로 융합되었다. 미국역사의 과정은 식민지 정착의 목적을 위해 직선적인 격자 속으로 새로운 국가의 거대한 내륙지방이 새겨  넣어짐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은 공간과 장소 둘 다를 상실했고, 식민지 정착 이전의 집이라기보다 수용소 같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송환되었다. 미국 식민지 정착-문화에 의한 정복은 공격적인 산업 자본주의가 실행된 과거  몇 세기 동안에, 세계적으로“추상적인 공간”(Buell 64)을 많이 낳았다. 이런 변화로 인해 장소에 부속되는 것은 하찮고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과학과 기술혁명으로‘장소’는 기하학적으로 공간의 차원을 선으로 그리는 좌표의 하나의 위치로 축소되었다.

    대조적으로 최근 환경비평에서 장소는 모더니즘의 과도함, 그것의 공간적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저항의 태도를 보여준다. 장소에 대한 주장은 주체가 정착하는 장소에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인간이 자신이 속한 장소에 결합된다  는 것으로 자연과 장소의 의미는 재생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로 장소와 결합한다는 생각이 미래에 다시 권위를 가질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소와 인간의 관계에 최근의 논의는 사회적 문맥화에 초점을 둔다.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  으로 나누고 자연과 여성의 몸을 일치시키는 관점에서 보는 페미니스트와 생태 여성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문화와 문명에 연관시키기보다는 자연환경과“장소로서 몸”(bodies-as-places)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자연 그 자체로 일치시키는 관점은 플럼우드(Val Plumwood)가“장소에 관한 의식은 장소에 대해 정서적인 동시에 비평적인 접근을 요구”(233)한다고 경고했듯이 반론에 부딪친다. 몸과 장소의 부속관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소관념에 내재하는 다루기 어려운 모호성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몸과 장소의 결합관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쉽게“감상주의적 환경 결정론”(Buell 66)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최근 환경비평은 자연과 장소 속의 생명(life-in-place)에 존경심을 갖는 것에서“자연과 문화가 분리보다는 상호관련성”(Buell 67)을 갖는 것으로 봄으로써 자연과 문화가 통합되는 과정으로의 진화를 보여준다.

    기존의 생태비평은 장소 속에 생명의 서술을 강요하며, 지역적으로 장소에 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문학적 텍스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다. 인간과 장소의 부속관계는 영토가 확대될 때 관계가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속한 장소에 귀속하고 지역에 책임을 갖는 좋은 요소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강한 의식과 감수성을 갖는 문화는 오로지 하나의 장소에만 단일한 관계를 가지므로 고정된 삶의 양식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근의 환경 비평은 문화와 문명의 장소가 시대를 진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최근의 주장은 인간은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으며 중립적으로 상호 교환될 수 있는 문명의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인간은 자연과 문화를 통합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최근 이론은 물질적 환경이 주로 문명적으로‘구축된’것이든 혹은‘자연적인’ 것이든 주관적 인식과 사회적 통합성을 이루는 관점에서 장소에 관한 인식변화와 계속적인 희망을 보여준다.

    로빈슨은 배(ship)의 수사법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통합적 사고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기존의 집의 고정적 이미지를 벗어남으로써 여성들이 공간에 속박되는 관습적인 방식을 전복하며 수정한다. 푸코(Michel Foucault)가「다른 공간에 관해서」“( Of Other Spaces”)에서 묘사하듯이, 배는 떠다니는 공간, 장소가 없는 장소로서 유동성과 안정성, 내부와 외부, 장소의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선을 횡단하므로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생활의 실제』에서 독자를“거주가능”(xxi)하게 만들기 위해 작가는 텍스트를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을 위한 본보기로 변화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로빈슨은 공간을 변형시키기 위해 텍스트를 사용함으로써 거주가능성을 한 단계 더 나아가 주장한다. 거주가능성은 공간에서 주체가 심리학적, 정서적, 사회적욕구를 만족할 때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위안, 안전, 안정성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고정적인 집의 전통적 가치관을 벗어나, 인간이 유동성을 공간에 결합시키는 방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배의 은유법을 통해 볼 때 이 작품은 집의 공간에서 거주가능성을 모색하며, 어떻게 배가 여성의 삶에서 집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재형상화 한다. 로빈슨은 지면에 기초를 두지 않은 집, 하나의 특정 장소에 고정되지 않는 집을 창조함으로써, 기존의 집의 정의를 해체한다. 이 소설은 집의 공간적 변형의 재현에 중점을 두며 거주가능성을 지향한다.

    로빈슨은 집의 양식을 추방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으며, 덜 고정적으로 정의 된 집에 의해 열리는 가능성의 탐색에 관심을 갖는다. 이 소설은‘배의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집의 관습적 개념에 도전하고 푸코 방식의 변형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1로 집의 공간을 재정의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거주가능성은 일시적으로 실현되므로 결국 실패로 끝나는 듯해 보이지만 창조적인 전향을 가능하게 한다. 거주가능한 공간은 파괴되기 위해 창조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의 묘사에서 삶을 위한 상상력의 중요성을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는 배의 움직이는 특성은 집을 헤테로토피아로 만든다. 배의 중요성은 정체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다른 운송수단과 달리 물의 유동성에 관련되는 배의 관점에서 로빈슨의 집은 거주가능성을 가진 이동적인  공간이 된다. 실제로 무질서한 헤테로토피아적 집의 지속적인 거주가능성이 불가능할지라도, 이것은“방주처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희망과 다양성”(Ho¨hler 67)을 담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배의 유동성을 상상력으로 활용한다면 이런 수정된 집의 공간은 등장인물들을 거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배의 은유를 통한 공간적 잠재력은 그들이 창조하는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주체와 공간의 관계를 수정하는 것에 있다. 이 작품은 거주가능성은 반드시 새로운 공간창조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가 공간에 유연성을 가질 때 가능함을 제시한다. 실비와 루스는 집의 불안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살림방식을 유연성을 가지고 포용한다. 이 소설에서 공간과 장소의 관계는 변형되는 것이므로, 지면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 나은 공간을 끊임없이 찾기보다 상상력을 통한 거주 가능한 공간으로 수정과 재정의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또한 이 작품은 배의 은유법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문명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공간을 구축해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안한다. 배의 수사법은 한편으로는 취약성과 일시성에 다른 한편으로 탐색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지구가 환경적 위기에 처한 낙원으로 보였을 때 방주는 다양성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희망을 담는 역할을 했다. 배는 집단기억과 상상력의 저수지의 역할을 하고 공간 확장과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을 상징함으로써, 배의 이미지는 서양문화의 가장 강력한 서술의 중심부에 있었다. 라틴어 acra에서 유래한 방주(ark)는 상자(case) 혹은 구획된 격실(compartment)을 의미하는 단어로‘닫힌 공간의 존재’ 이다. 방주는 그것의 거주자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인공적인 내부공간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배의 은유법은 닫힌 구조로서 자연과 문화 요소와 멀어질 때 어떤 문제점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비와 루스가 문명과 맞붙어있는 관점에서 떠돌이로 방랑한다는 것은 배의 은유가 문명과 자연 환경에서 물질적으로 단절되고 고립된 인공구조물이 되어서는 안됨을 제시한다. 그것은 닫힌 고립된 공간과 자아 충족적인 체계로서는 지속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방주는 외부공간과 단절된 완벽성을 지향해서는 안되며, 자연의 풍요함이 아니라 체계적 다양성을 따르고자 한다면 오히려 생명의 지속성을 상실하고 쇠퇴함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오만에 의한 선택은 결국 운명적 최후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자연과 문화의 통합적인 맥락에서 배와 방주를 생명의 구조선의 의미를 갖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헤테로토피아는 비(非)헤게모니적인 상황에서 역할을 하는 장소와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미셀 푸코에 의해 제시된 지리학적 관념이다. 그것은 여기 혹은 저기에 존재할 수 없는 타자성(otherness)의 공간이다. 그것은 물질적이 동시에 정신적인 의미를 갖는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완벽한 질서를 갖는 이상향의 관념 혹은 이미지라면, 푸코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타자성의 장소에서 의미를 갖는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질서 있는 완벽한 관념적 공간인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공간이다. 푸코는 이중의 의미를 나타내는 헤테로토피아를 몇 가지 공간형태로 나타낸다. - 일탈 공간의 헤테로토피아는 비정상의 개인들을 두는 기관 병원, 정신병자 보호소, 교도소, 요양소를 의미한다. - 제식 혹은 정화 공간의 헤테로피아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가 받아야 하는 성소이다. - 환상 공간의 헤테로토피아는 환상과 상상력을 통해 타자성의 공간을 실제의 장소로 창조하는 것이다. 푸코는 차이의 긍정을 위한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와 독재주의와 억압으로부터 도피 수단으로서 많은 헤테로토피아를 갖는 사회를 권유한다. 그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헤테로토피아를 배의 은유법으로 나타내며, 배가 없는 사회를 스탈린주의 (Stalinism)를 분명히 언급함으로써 억압적인 사회라고 본다. 이 개념은 다문화적 도시에서 표출되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이와 정체성의 중심문제들이 동시대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의 이해를 돕는 것으로 사용된다. 헤테로토피아의 실체로서 장소의 관념은 소수성과 젠더의 차이, 다양성, 유동성, 일시성을 수용하는 관점에서 지리학, 사회과학, 생태학, 환경비평에서 관심을 얻고 있다.

    III. 실비아의 집의 정착성과 고정성

    이 작품은 미국인의 진보의 정신이 깃든 서부로의 정착을 통해 남성들이 이루어 온 개척역사의 결과가 무한한 발전이 이룬 것이 아님으로 드러나듯이, 남성 중심의 기존 서술방식을 탈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인습의 전복은 서술관  점이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가족의 가장인 에드먼드 포스터(Edmund Foster) 에서부터 그의 유족인 여성들, 부인 실비아, 세 딸들인 실비, 몰리, 헬렌, 그리고 그녀의 딸들, 루스와 루실(Lucille)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남편  과 아버지들이 이 소설의 프롤로그로서, 여성들의 삶이 전개되기 전에, 첫 장에서 불가사이하게 사라지므로, 이 소설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의 이야기를 위해, 아버지의 역할에 의해 결정된 남성 중심적 플롯인, 에드먼드의 오이디푸스적인  서술을 탈피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내 이름은 루스”(Housekeeping 3: 이후 인용부터 페이지만 기입함)처럼, 구약성서에서 이교도 출신이지만 유대인 가문과 결혼한 루스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종족에게 돌아가는 대신 유대인의 땅에서 시어머니 나오미(Naomi)를 충실하게 따른다. 이방인 루스의 중요성은 나오미에 대한 충실함(faith) 덕분이다. 로빈슨이 루스를 선택한 이유는 적절한 상호관련성이 있다. 이 작품의 루스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여자 친척인 떠돌이 실비이모를 충실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방랑은 궁극적인 목표를 갖는다. 그것은 시어머니의 나라, 유다왕국으로 되돌아가는 방랑이다. 이 소설도 방랑이 서부로의 방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실비와 루스가 자연과 사회를 조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함을 보여준다. 로빈슨은 어머니/딸 관계에서 여성들을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여 유동성과 일시성(transience)의 시학으로 새롭고 풍부하게 표현한다.

    고아 이야기의 장르를 근본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살림은 특정한 중요성을 갖는다. 고아 이야기는 부모에 의해 버림받고 친척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는 아이들에 관한 것으로 어떻게 이런 고아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정된 삶  을 성취하는가의 성장과정을 묘사한다. 집(home)은 디킨스(Charles Dickens)의『황폐한 집』(Bleak House, 1852-1853)에서 대저택에 의해 제공된 안정성과 안전성을 상징함으로써, 이 장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집은 보호 장소의 역할을 하며 그 외부의 적대적인 세상과는 뚜렷하게 분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로빈슨은 고아 이야기의 주요 요소를 사용할지라도,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집과 자연의 분리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구분의 지속적인 파기와 대체를 극화한다. 로빈슨은 사회와 자연의 잠재력 있는 합일성을 위해 고아 이야기를 개작한다.

    고아 이야기처럼, 이 작품은 할아버지 에드먼드 포스터인 조상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개척시대에 서부로 이주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몽상가였다. 그에 관한 설명은 미국의 원시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도 침범되지 않은 대지  를 위반한 사람이라는 서술맥락을 따른다. 그는 미국인의 진취적인 정신을 구체화한다. 성공, 인정, 진보에 관한 그의 야망은 중서부에서 지평선밖에 볼 수 없는 움집에서 성장한 젊은 시절에 형성된다. 그는 산을 보고자 했던 열망 때문에  서부 행 기차를 타고 산이 많은 아이다호주로 오며, 철도회사에 취직해서 결혼하며 세 딸의 아빠가 된다. 그가 핑거본에 정착하는 것은‘철도가 자연성 (wilderness)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역장 지위로 신속히 승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일반대중위로 출중하게 성공하는 개인의 야망을 나타내는 철도의 상징에 대한 에머슨적인 사용을 일깨운다.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한 일꾼으로 성공에 집착이 강한 사람이어서, 처음엔 철도회사에서 경비원과 통신원, 화물기차 감독원, 다음엔 역장을 보조하는 일을 거쳐, 역장자리에서 근무하다 스포캔에서 일을 보고오던 중“굉장한 구경거리가 될 정도의 기차 탈선사고”(5)로 기차전체가 차가운 호수 속으로 처박힘으로써 세 딸을 아버지가 없이 남겨둔다. 미국의 개척에 대한 역설적인 모습은 그의 서술에서 잘 나타난다.

    에드먼드는 자연에 도전함으로써 마을 외곽 언덕의 꼭대기에 정착하며 목수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에도 임의대로 집을 짓는다. 봄마다 그는 자신이 넥타이를 매고 멜빵과 양말대님을 한“과묵한 감리교 신자”(17)임을 잊어버릴 정도로 야생화 채집에 몰두한다. 그가 자연의 약탈물을 찾아다니는 것은 탐험대상의 손발을 자르고 파괴하고 지식의 전리품을 위해 마구 뽑는 방식의 일례이다. 그는 야생화를 단순히 꺾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죽을, 집에 다시 심기 위해 흙과 함께 뿌리째 뽑아오곤 했다. 그래서 실비아는 죽은 짐승들로부터 얻은 전리품을 매단 채 자신이 그것들보다 더 대단함을 자랑하는 사내를 보고 그의 원시성을 문명적으로 교화시키길 원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자랑스러워하는 에드먼드에서 여성의 삶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추진시키는 사건은 그가 탄검정색의 특급기차 번개호(Fire Ball)의 탈선과 철도다리에서 호수로의 추락이란 것은 반어적이다. 그것은 국가적으로 보도될 정도로 큰 뉴스였음에도 잠수부들이 호수의 기차잔해에서 건져 올린 유품들은 단지 세 가지인 여행용 가방, 좌석쿠션, 양상추였고“그 중 하나는 썩기 쉬운 것”(7)로 파편적 일시적이며 가치 없는 것뿐이다. 역장 에드먼드를 태운 문명의 대행자를 상징하는 기차는 대지를 제국주의적으로 뚫고 들어간 것처럼, 핑거본이 창조된 원천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호수, 여성화된 자연 속으로 뚫고 들어갔음을 나타낸다.

    에드먼드의 가부장적인 유산은 그가 지은 집, 즉 죽음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는 성골함(reliquary)에 존재하며, 그 집안에서 유족인 여성들이 산다. 집 짓는 것은 남성의 예술적 제식의 은유적 표현이며 자연을 상징적으로 소유하는 것에  관련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집을 돌보는 사람인 여성에겐 적용되기 어렵다. 여성들은 아버지의 부재 경우 상징계보다 어머니와의 친밀한 관계로 확장된다. 그의 죽음은 딸들을 사회적“성공과 인정받는 일, 성적 향상”(13)의 문제들에서 풀려나게 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프로이드 측면에서 가정의 관습적인 이데올로기의 변형을 야기한다. 아내와 딸들에게 본성을 회복시키며, 여성중심의 삶에서 어머니와 세 딸들을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로 회귀하게 한다. 엄마와 딸들의 이런 관계는 상호적인 닫힘의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아버지의 책무 아래에서 오랫동안 억압된 것은 그의 부재 이후 드러남으로써, 실비아와 딸들은 새로운 친밀함을 갖는다. 딸들을 상징계로 묶는 끈이 절단되어지자 딸들은 어머니와 재결합되고 하나의 의식으로 융합된다. 그가 살아있을 때 2층은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하는 것이지만, 그가 죽은 후 아이들이 여전히 위층에서 잠을 자고 실비아가 아래층에서 잠을 잘지라도, 집 전체의 구분, 벽, 바닥이 용해된다. 이것은 “어머니와 딸들의 융합”(Smyth 285)에 의해 예증된다. 그러나 그들이 집의 구조에 둘러싸여있듯, 사회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직관성을 선행한다. 어머니에게 회귀하는 것은 사회에서 버림받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구조로서 집의 중요성이 축소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중심의 삶에서 실비아는 살림과 양육의 가장 전통적인 상호관련성을 구체화한다. 그녀가 딸들을 양육하는 것은 살림의 일상적인 제식으로 일어난다. 어머니와 딸들의 결속력이 일시적으로 완전할지라도, 어머니와 살림의 밀폐된 자궁 같은 방식은 마침내 딸들에게는 폐소공포증적인 의식을 갖게 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할머니의 살림방식은 집안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구분을 유지하는 데에 확고부동한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 헬렌이 죽은 후 두 손녀들을 돌볼 때도 똑같이헌신적인 사랑으로 희생한다. 물질적인 구조인 집은 할머니의 살림의 중심적 존  재이다. 핑거본에서 집은 자연, 물의 요소로 항상 포위되어있다. 마을은 눈보라, 정전, 홍수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구조물과 사회를 축소시킬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파괴한다. 자연은 수동적 순종적 유순한 전원이 아니라  인간들이 구축하는 사회질서를 무시하는 악의 있는 힘으로서 불쑥 끼어들어온다. 할머니에게 삶은 자연의 파멸과 쇠퇴의 힘에 저항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집의 물질적인 구조를 손상되지 않게 유지하고, 자연요소가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  하도록 부지런히 일한다. 그녀는 집을 내부세계, 환경을 외부세계로서, 즉 이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할머니에게 살림은 일상적으로 신체를 돌보고, 자연으로부터 재난을 막는 방어 수단으로서 그 자체를 세우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발을 하얗게 빨고 머리를 땋고 닭고기를 튀기고 침구를 정리하는 일은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신발은 내일이  면 다시 닳아버릴 것이고, 머리도 다시 땋아져야하며, 닭고기도 다음 식사를 위해 다시 요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영속가능하며 아무것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집안일은 가족을 함께 모을 수 있다는 하나의 목  적에 집착하고 의존함을 보여준다.

    실비아의 죽음 이후 소녀들을 돌보는 릴리(Lily)와 노너(Nona) 고모할머니는 자연과 분리된 채 사회 가치관에 종속되고 동질화된 정체성을 갖는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들은 둘이지만 한 몸과 같은 노처녀자매로서 살림과 양육에 미  숙하다. 백합(lily)이 서양의 순수한 여성을, 노너(nona)가 기면성 뇌염의 질병을 의미하듯이, 그들의 결합된 이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병든 백합’을 상징한다. 그들은 대화할 때 전적으로 하나로 혼합된 두 여성으로 둘 다 동일하게 일치하는 의견을 말한다. 그들의 대화는 두 개의 생각이 하나의 실로 꼬여지는 제식을 보여준다. 그들이 각자 하는 말은 한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그들은 두 사람이지만 하나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므로 외면상으로만 개인이며 실제로는 유령처럼 보인다. 그들의 양육의 실패는 추방당한 자인 실비이모를 집으로 소환한다.

    이 과정에서 생전에 살림의 대과업에 충실했던 실비아의 죽음은 할아버지를 죽게 했고 그녀를 과부로 만든 기차 탈선사고보다도 커다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진정한 애도보다 의의나 중요성을 갖기에 기괴한 사건이었음에도“마을 역사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40)으로 평가 받은 기차 탈선사건을 떠올린다. 에드먼드와 실비아의 죽음에 대한 마을의 반응은 불공평한 평가를 잘 반영한다. 실비아의 부고기사는 기차 탈선사고와 에드먼드 사진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녀의 사진도 싣지 않으며 장례식 시간도 생략한다. 부고기사는 남편과 관련해서 실비아의 사회적 중요성을 정의하므로 여성들의 침묵당한 이야기를 영속시킨다. 릴리와 노너 할머니는 장례식 후 실비아의 부고기사도 없애버린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여성은 단지 그들이 살림을 유지하는 집과 동일시됨을 보여준다. 여성의 일, 살림, 육아, 바느질, 식사 준비, 집안 돌보는 일은 남성중심의 문화에서는 보잘 것 없다고 가치절하 됨을 반영한다. 할머니의 기본적인 정보조차 실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익사로 죽은 헬렌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 미리 단정하며 그것을 실비아에 대한 감동적인 찬사라고 여긴다. 할머니와 엄마의 존재가 부정되고 여성의 이야기가 침묵 당하는 것은 루스에게 무척 놀라움을 인식하게 한다.

    이와 같이 자연과 집을 구분하는 데 확고한 태도를 희생했던 할머니의 살림방식은 취약성을 갖는 것으로 드러난다. 할머니의 노년의 취약성은 자신의 신체의 노쇠함에 대한 슬픔보다는 살림의 대과업에 혹독하게 헌신했음에도 세 딸들에  대한 상실감으로 더 깊이 상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할머니는 가족을 한데 모으고 완벽한 살림을 수행하는 것도 자연과 집을 엄격히 구분하는 일도 완전히 성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IV. 실비의 살림방식의 유동성

    이 작품은 고정적 집의 개념을 벗어나‘집인 동시에 배’(houseship)로 미래지향적인 전향을 하는 것을 포용한다. 로빈슨의 유동적 공간은 상상력의 영역을 상징하는 물의 유동적 속성으로 연결된다. 로빈슨은 관습적인 집이 상징하는 정착성을 배의 유동성에 비유함으로써 대립성이 아닌 양가성을 인정하며‘지면을 기초로 하지 않지만 거주가능한 집’을 지향한다. ‘집인 동시에 배’의 공간은 여성이 가정 혹은 자유, 집의 전통적 역할 혹은 비관습적 방랑 중 획일적 선택을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자연을 정신적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인간과 장소의 관계에서 새로운 방향설정을 제시한다. 처음에는 사회와 자연의 뚜렷한 구분을 나타내지만, 나중에는 그 구분이 부질없는 환상임을 믿는, 루스의 의식변화를 묘사한다. 이것은 사회와 자연에 대한 루스와 실비의 살림방식의 변화를 통해 극화된다.

    봄이 되기 직전 실비가 입고 오는 작은 은방울 꽃(lily of valley) 브로치가 꽂힌 초록색 드레스는 실비가 생태학적 상상력의 자연공간에서 온 것을 연상시킨다. 집은 자연과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변형된다. 집의  안정성과 고정성의 해체가 실비의 도착부터 언급될지라도, 유동성과 일시성은 훨씬 이전에 나타난다. 에드먼드가 지은 가부장적인‘아버지의 집’은‘완성되고 안정된 구조’로서 시작하지 않는다. 계단은 위층/아래층, 어른/아이들의 주거공간을 분할하는 것이지만 천장에는 외풍을 막는 동시에 환기를 위한 장치인 들창문(trapdoor)이 달려 있다. 덫으로 가둠과 떠남을 계속 환기시키는 서술에서, 들창문은 집의 유동성을 의미한다. 들창문은 구조내부의 천장도 문도 아닌‘떠나기 위한 기계장치’이다. 그가 경사진 바닥을 감안해 옷장과 궤짝 앞다리를 다른 것보다 길게 만든 것, 침대 다리 두개를 받침대에 올려놓았듯, 집은 이데올로기를 담기에 결함이 많은 수단임을 보여준다. 경사진 바닥과 임의적인 창문과 들창문 배치도 집의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집은 실비에 의해 변화되는 동시에 자체의 불안정성을 갖는다. 집은 실비의 귀향 이전에 변화하며 과수원에“해마다 더 작아지고 벌레가 많아진 사과, 살구, 자두가 열리고 잡초가 무성해졌기”(48) 때문이다. ‘미완성된’집은 그속의 거주자를 반영한다. 집은 역동성이 있고 정적인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부재로 집의 우세한 이데올로기는 축소된다. 할아버지가 집을 지었음이 첫 문단에 명시되지만, 여성 거주자들은 그의 목공품인 집을 손상시킨다. 그래서 집은 에드먼드에 의해 지어졌을지도, 실비아를 위해 지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소녀들에게“과수원은 팔아도 집은 팔지 말라”(27)며 집의 안정성을 강조했지만 실비의 도착은 그것을 뒤흔든다. 실비의 떠돌이 습관은 유동성으로 주거지에 포함된다. 실비가 온 후 홍수로“집안이 온통 물바다”(64)가 되듯 집은 물의 유입으로 유동적인 구조가 된다. 실비의 살림방식은 집/호수, 집/숲의 경계선을 허물며 집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홍수에 잠긴 집, 헛간, 외양간, 창고는 무수한 방주(ark)처럼 보인다. 2층에서의 그들의 주거 활동은 부엌에서 했던 것이며 침실이 거실을 대신한다. 홍수는 건축 공간 원래의 용도를 변화시킨다. 어린이들만을 위해 마련된 2층은 어른과 아이의 공유공간이 된다.

    실비아와 대조적으로 실비의 살림방식은 집안과 외부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실비는 바람, 나뭇잎, 귀뚜라미를 집안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내부와 외부 구분을 파기한다. 그녀의 살림은 모든 세상을 포함하는 것이며, 단순히 집의  껍데기 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실비아의 방식은 자아와 환경의 구분을 단정한다. 그 관점에서 주체는 밤, 추위, 어둠, 곤충, 동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의 구조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환경과 거리감을 두는 것이다. 실비의 방식  은 집의 경계선을 약화시키고,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이모가 살림을 시작한 무렵부터“집은 과수원과 그날그날의 날씨와 아주 훌륭한 조화”(86) 를 이루듯, 내부와 외부 경계선이 무너진다. 이모는“물과 공기 중에 솔벤트 효과가 있다고 믿음”(85)으로써, 행주를 표백제와 물속에 담가 놓고, 찬장 문을 열어 바람을 쐬게 하고, 주방천장과 문을 물로 씻어낸다. 공기를 쐬게 하려고 이모는 화창한 봄날 할머니의 진보라색 대형소파를 앞마당으로 끌어내어 분홍색으로 탈색될 때까지 그냥 놓아두기도 한다.

    이모가 할머니 방에서 지낼 때 루스가 할아버지가 만든 가구를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내구력과 할머니의 임시성의 예술적 창조성을 이해하고 가족을 연결하는 루스의 중요한 의식과정을 보여준다. 할아버지 작품인 장롱과  화장대와 침대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에 칠한 흰색 페인트에 흡수되어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루스는 그의 예술품을 보면서 할아버지처럼 남성들이 자연을 지속적으로 위반해온 것을 수정한다. 동시에 루스는 여성의 예술적 본보기인“할머니의 유물인 화장대 맨 아래 서랍에 가득 채워진 물건들의 암호 같은 배열”(Booth 290)로 자연스럽게 이행하여 관심을 갖는다. 루스는 할머니가 서랍에 실꾸리, 양초, 밀랍 천사, 짝이 맞지 않는 양말, 벨벳의 하트모양 바늘겨레, 사진들을 보관해둔 것을 발견한다. 루스는 내용물이 마구잡이로 모아놓은 것에 반해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전체적으로 그 수집품 이면에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90)이라 보고, 각양각색의 수집품에서 해석가능한 의미와 정보를 모으고자 심사숙고한다. 루스는 사진설명문 기법으로 수수께끼의 해석에 접근한다. 그녀는 할머니의 수집품 중 하나인 중요해 보이는 팸플릿으로 시작한다. 그것에서‘허난성에만 수천만’의 인쇄된 구절 아래에 소년, 남자, 아기와 엄마, 노파, 여자와 새끼돼지의 일련의 사진들을 본다. 이 모순된 사진의 짧은 해설문을 추론함으로써 루스는 남성의 창조력과는 구분되는 여성의 수집 기법을 확언한다. 루스는 페이지 밑에‘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성경구절이 몰리이모의 선교사로서 출발을 설명함을 이해한다. 루스는 보트에서“그물을 던지는”(91) 몰리이모가 신사, 돼지, 노파, 짝이 맞지 않은 양  말들이 뒤범벅된 것을 끌어올렸으리라 보고 모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리라 믿는다. 그물망에는 유구한 세월동안 배제된 엄청난 사람들 무리가 호수바닥에서 솟아오를 것이므로“엄마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92)라고 본다. 그래서 루스는‘원래의 텍스트를 제공해준 할머니,’‘포획한 것을 끌어올리는 몰리,’‘결혼 이후 성이 피셔(Fisher)가 된 실비,’‘호수밑바닥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생되는 헬렌’을 감동적으로 포함하는 뜨개질과 그물망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결합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조각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92)라고 반문하듯, 루스는 할아버지의 예술품과 할머니의 수집품을 의미  있는 그물망으로 서로 엮어 짬으로써 재해독하고 개작한다. 비유적으로 깊은 밑바닥의 서랍에 넣어둔, 할머니에게 소중했을 파편적인 물건들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한데 모은다. 한정된 작은 장소를 차지하는 수집품인, 여성의 텍스트는 고  정된 외형이 아닌 느슨한 것으로서 재배열과 다시 이야기하기가 가능하므로 그자체로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수집품은 에드먼드의 목수일과 그림보다 더 보잘 것 없는 흔적이지만, 루스는 여성의 예술성을 발전시킨다. 더욱이  루스가“정형적인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대리석에서, 나의 손목에 있는 정맥의 푸른 그물망에서, 조개껍질의 진주 빛의 안쪽 벽에서”(90) 이미지를 상기하는 것은 루스의 중요한 역할을 일깨운다. 루스는 조부모님의 예술성을 연상시키는 두 소재 사이에 그녀의‘손목의 정맥의 푸른 그물망’을 끼워 넣는다. 대리석이 에드먼드의 예술품이 내구력을 제시할지라도, 조개껍질 이미지는 할아버지가 신혼 때에 주운 시계 안쪽 벽에 실비아를 위해 그려준 해마그림을 그녀의 상상력으로 해석했던 일시성을 상기시킨다. 둘 사이에 삽입하는 루스의 정맥의 그물망 이미지는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으므로 더 풍부한 잠재력을 갖는다. 이것은 루스가 예술성에서 할아버지의 내구력과 할머니의 일시성을 해석하고 둘 사이를, 가족 모두를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스와는 대조적으로, 루실은 가족, 특히 이모의 방식에 다르게 반응한다. 루실은 공동사회에 소속되려는 평범한 부류의 사람으로“일정한 목적에 따라 다른 사람을 주시”(93)한다. 루스와 루실의 무단결석으로 일시적인 떠돌이가 될 때 둘의 반응도 차이를 보여준다. 무단결석자(truant)가 고대 불어 방랑자 (vagabond)에서 유래되었듯, 무단결석자로서 그들은 부랑자와 유사함을 나타낸다. 루스는 그녀와 루실이 다리 밑에 임시주거지를 짓는 부랑자에 속하며 무서운 파괴력과 속력을 갖는 기차로부터 달아나온 떠돌이와 같다고 상상함으로써, 자신들이 라프와이 보호구역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왔고, 부랑자들이 시찰중인 의회의원일 수 있다고 창작한다. 이 작은 서술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더 커다란 서술로 확대된다. 더 나아가 루스는 호수의 모든 사람들, 가족의 부활을 꿈꾼다.

    루스는 서로의 관계를 유동적으로 연결하는 측면에서 할머니, 엄마, 할아버지, 자매, 가족 모두 포함시켜 부활을 꿈꾼다. 루스는 자연에 우위의 태도를 가졌던 할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벗어나 포용한다. 기차전체의 소생, 호수 밑바닥의 모  든 가족의 회복과 부활을 꿈꿀 때, 루스는 포괄적인 따뜻함으로 포용한다. 그녀는 부랑자/그들, 부랑자/마을사람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가족으로 상상한다. 성장과 성숙을 루실은 수치심으로 루스는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는 차이를 보  여준다. 그들이 여름동안 숲과 호수에서 일심동체로 함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였음이 드러난다. 루스가 숲이 좋아서 간 반면, 루실은“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99) 갔던 것이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루스는 추위 때문이라면 루실은 어둠 덕분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핑거본 거리를 지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비의 자율적인 살림은 여성의 사회지위의 관습적 정의와 가치절하에 대한 저항이다. 실비의 방식은 남성들이 만든 구조물에 자연을 종속시키는 패러다임을 역전시킨다. 실비는 집이 정신적, 시적인 가치를 가지며 인간이 구축한 집의  쇠퇴함을 인정한다. 집을 쇠퇴, 어둠, 동물의 불법침입으로부터 지킴으로써, 야생의 자연과 짐승이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가정주부와 달리, 실비는 그런 침입을 권유한다. 그래서 루스가“집안에 있는 이모가 배의 선실에 있는 인어와 유사”(99)하다고 비유하는 것은 실비가 개척의 의미로 집에 사는 것으로 연결된다. 인어들은 배에 속하지 않는다. 인어는 존재가능한 곳에서는 초자연적힘과 매력을 소유하지만, 이 힘은 인어가 바다에서 분리된 순간 상실된다. 인어가 선상 혹은 지상에서 살 수 없듯이, 실비는 살림을 꾸려가는 것에 부적합하며, 그 문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실비가 집에 있을 때, 그녀는 보관(kept)되며, 관리(the keeping)를 하지 않는다. 실비가 살림을 전복하는 방식은 경계선 허무는 것이다. 루스가 인정하듯, “이모가 이곳에서 떠돌이처럼 살 수만 있다면 여기를 떠나지 않아도 될 것”(103)같아 보인다. 실비는 짐을 풀고 정착하는 안정성을 거부함으로써, 집안에서 거주가능성을 창조한다.

    실비는 집의 오래된 양식을 해체한다. 실비는 어둠을 외부로 몰아내지 않으며, 창문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어둠이“수족관 유리처럼 빛나면서 물결처럼 보이는 창문”(86)너머 놓이듯 내부와 외부는 유사성을 나타낸다. 저녁에 루스와 루실은 현관을 지나“순수한 밤에서 순수한 밤으로”(99) 걸어 들어온다. 대부분의 창문에는 창유리가 없다. 식료품 저장실에는 귀뚜라미, 처마 밑에는 다람쥐, 다락방에는 참새가 있듯이, 외부자연은 집 내부로 들어온다. 집의 부엌창문의 의미는 변화하고 확장된다. 실비아의 보살핌을 받을 때, 밤에“하얀 커튼이 어둠을 가려주는 환한 주방”(11)이 됨으로써 창문은 낮에만 사용된다. 이에 비해 실비가 어둠과 환한 불빛의 불균형을 싫어하므로, 그들은 전등불을 끈 채 어둠속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결과적으로 거기엔 커튼이 필요 없다. 실비와 루스는 창문을 통해 어둠을 응시하며 중간지대에 존재한다. 문지방과 문턱의 해체는 주의력의 경계선을 확장시킨다.

    실비를 통해 루스는 자연과 삶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유동적 정체성을 갖는다. 대조적으로 루실은 이모의 방식을 거부한다. 어둠속에 있을 때, 루실이 일어나 순식간에 전등불을 켜서 온 방을 환하게 만들자 모두 놀란다. 창문이 캄캄해지  면서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주방이 갑자기 드러난다. 가장 볼썽사나운 것은 루실 생일 날 케이크를 너무 가까이 놓아 절반이나 타버린 식탁 쪽 커튼이다. 이모가 『훌륭한 살림』이란 책으로 불길을 잡았지만 새 커튼을 달지 않은 상태이다. 루실이 갑자기 전등불을 켠 행동은 루실이 가족에게 공공연한 불만과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후 루실은 이모의 살림방식을 용납하지 않고, 저녁식사시간에 불을 켜놓자고 우기고 도자기에 격식을 차린 식사를 요구한다.

    루실은 떠돌이 살림하는 이모에게 불만을 가지며“일시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103)이면 모두 다 싫어한다. 이모가 머리빗과 치약을 침대 밑의 마분지 상자에 보관하고 노동자의 습관을 지속하는 것은 루실의 예의범절 감각을 거슬리게 한다. 어느 날 공원벤치에 누운 이모를 보자 루실은 곧바로 집으로 달려가“불을 켜놓은 채 주방에서 청소하느라 야단법석”(107)하면서, 실비에게 강하게 반발한다. 집안청소는 집의 경계선을 분명히 유지하려는 것으로, 일시성과 파괴력을 철저하게 막고, 자연의 엔트로피적 흐름에 저항해 승리하려는 시도이다. 불이 환히 켜진 집에서 살고자하는 루실은 이름이 라틴어 빛(lux)과 빛나다(lucere)에서 유래하듯“빛의 영역의 거주자”(Geyh 109)로 보인다. 닫힌 형태의 원을 완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루실은 거울의 꿈속에서 나르시스처럼 사는 인물로 보인다. 루실이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외관을 실재라 믿으므로 외관이 그녀를 지배한다.

    루스와 루실이 숲에서 밤을 지새운 에피소드는 둘이 나눠지는 전환점이 된다. 소녀들은 낚시하러 가지만, 너무 늦어 어두워져 호수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임시주거지를 짓는다. 둘은 이 경험에 대해 매우 다르게 반응한다. 루실은 문밖의  모래 위에 자기 이름을 쓰고 내부와 외부를 확실히 구분하고, 야생동물의 위협으로부터 임시가옥의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대조적으로 루스는 완전한 어둠속에서 자아와 환경의 분할은 환상에 불과하며 둘은 하나의 실재임을 이  해한다. 눈에 보이는 외관이 허상임을 인식함으로써, 루스는 가족을 모두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어둠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는다. 대조적으로 루실은 여명이 밝아오자 임시거처를 떠나 집으로 향한다. 둘은 이모에게 대조적  으로 반응한다. 루스가 편안한 잠이 들었다 깨어난 반면, 루실은 아기인 자신을 이모가 담요로 감싸 질식시키는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루스는 실비를“그녀의 본보기, 멘토, 대리 어머니”(O’Connell 16)로 수용하는 반면 루실은“거기는 이모네 집”(123)이라며 루스를 마을의 사회공간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루스가 상실한 것과 기억을 이모의 집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므로 루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루스는 할머니의 과수원에서 고사목(枯死木)이 된 사과나무가 잎이 나길 기다리며 서 있는 것에서 작은 변화를 기대하며, 소멸한 것은 상실되거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므로“모든 소멸한 것들에서 생명”(124)을 느낀다. 루스는 건물토대까지 자란 싱그러운 잔디가 물결치듯 바람에 스치며 그 위로 집이 떠오르고 있듯, 집의 변화를 바라본다. “집이 조만간 둥둥 뜨기 시작할것 같았다”(125)하듯 실비가 살림하는 동안 집은 지표 위로 떠오른 방주 또는 배의 유동적 이미지로 재현되는 거주가능성을 인식한다. 이에 비해 루실은 소유권 (property)과 예절바름(propriety)의 사회적 연관성을 이해하며, 사회적 고상함에 존경심을 갖고 마을사람들에게 동화하고 사회규칙, 세련된 에티켓을 수용하려한다. 이런 면에서 루실은 훌륭한 가정주부의 화신으로 고정성과 영속성을 바란다.

    루실은 자연을 자신의 대담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 실용적으로 차용한다. 일례는 여성의 예술품 만들기의 실패의 예로서 루실이 옷을 만들 때 에드먼드가 사전에 보존해둔 채집한 야생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루실은‘핑킹가위’(pinking shears)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도록 루스에게 요구한다. 그 때 루스는 오래된 사전 속에 할아버지가 말려놓은 야생화들이 알파벳 이름 아래에 정리된 것을 발견하며, ‘핑킹가위’의 정의보다는 꽃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언어에 관한 두 비전을 갖게 한다. 하나의 경우에‘핑킹가위’즉 언어, 단어의 무리는 사물을 가리키며, 실용적인 작업을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마을과 어울려 살기 위한 루실의 노력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의 경우에 루스에게 언어, 단어들은 아름답고 풍부한 표현을 위한 보석의 무리이며, 꽃들을 포함하는 어휘를 가리킨다. 사전에 단어들이 있는 장소에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P에는 다양한 색의 팬지꽃, R에는 온갖 장미꽃들과 들장미가 들어있듯이, 각 알파벳 아래에는 수많은 꽃잎들이 들어있다, 루스는 할아버지의 채집목록의 암호체계를 곧바로 해독함으로써, 미나리아재비(buttercups)같은 야생화도 정원의 꽃으로 키우려했던 할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한다. 반면 루실에게 사전은 그녀의 야심찬 옷 만들기 기획에만 관련될 뿐이며 꽃, 언어, 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무 관심이 없고 도구적인 언어로서 의미만 필요하다. 루실은 수많은 꽃잎들을 난로에 넣어버리라고 한다. 루스가“다른 책에 넣어둬야겠다”(127)고 하자, 루실이 두 손으로 수많은 말린꽃을 짓뭉게 버림으로써 둘은 격심하게 다투며 결국 둘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루실은 할머니의 구식 전기재봉틀로 혼자서 일하던 어느 날 미완성의 드레스 뭉치를 난로 속에 집어던져 태워버리고는“이제 다른 친구가 필요하다”(130)고 선언한다. 루실은 보스턴으로 가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루실은 파티에서 돌아온 후 실비가 신발을 신고 침대에 누운 것을  보고 집을 나가 공적인 살림분야 전문가인 노처녀 로이스(Royce) 가정 선생님을 자발적으로 찾아가 양녀가 된다. 이것은 루실이 이모의 방식과 확실히 단절하려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루실이 집을 떠남으로써 견고하게 보였던 가족  은 결국 무너진다.

    이와 같이 실비가 집에 온 후 그녀의 아버지가 지은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집은 실비와 자연의 결합된 행위를 통해 해체되는 집이 된다. 그녀의 이름이 숲(wood)을 의미하는 라틴어 삼림(sylva)에서 유래하듯 실비는 숲으로 동일시되  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은 나중에 루스와 실비가 방문하게 될 숲속의 무너진 집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그 집은 실비가 있는 동안 방주이며 정박한 배로서 물의 유동성과 연결되는 집이 된다. 집은 자연과 문명의 구분이 해체되는  집이며 정착성과 안정성의 질서 회복을 위해 그대로 환원되지 않는다.

    V.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동경하는 유동적 정체성의 제시

    실비와 루스의 새로운 관계는 실비가 숲속의 무너진 집으로 루스를 데려가는 호수로의 여행 동안 견고하게 된다. 이 여정동안, 루스는 실비와 동일한 세계관을 부여받고, 사회와 자연을 별개로 보는 이원적인 개념을 파기하게 된다. 루스  는 자아와 자연의 연속성을 인식하는 삶을 구조화한다. 이 여정은 그녀가 지향 해야할 삶의 방식으로 이끈다. 루스와 실비는 그들과 환경의 최소한의 분리만을 인정하고, 가볍게 세상을 돌아다닐 것이다. 그들은 집 혹은 소유물의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자연에 가깝게 살기를 추구할 것이다.

    무너진 집으로 갈 때 루스는 이모의 그림자로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처럼 웅크린 채 가듯 이 여정은 루스의 새로운 탄생을 예측하게 한다. 무너진 집은 오랜 세월 후에 핑거본의 고정된 집의 미래 모습이며 동시에 호수의 유동성에  의해 문명의 지배력이 역전됨을 보여준다. 문명화된 집의 흔적인 현관층계가 그대로 남아있는 무너진 집은“순백의 서리바다”(153)로 서리꽃의 장관을 이룸을 보고, 루스는 소금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갈증을 풀기 위해 서리꽃으로 피어난 것이라 상상한다. 루스는 갈망과 소유는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이므로 상실했을지라도 간절히 원하면 감각과 기억으로 되돌아옴을 인식한다. 실비는 이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헬렌이 어머니의 현관문 계단에 아이들을 버리는 행위를 재실행하듯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루스를 떠나지만, 루스가 진정으로 떠돌이가 되길 원하는지의 테스트 혹은 통과의례로서 루스를 일시적으로 내버려두고 명상하게 한 후 불가해하게 다시 돌아온다.

    이모가 사라졌을 때 루스는 이모가 어린애들이 올 것이라 한 이유를 깨닫는다. 루스는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서리꽃이 핀 여인의 형상은 엄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함으로써 아이들과 그 형상을 자신과 엄마 관계로 일치시킨다.  또한 루스는 자매와 친구가 있고, 불 켜진 집안에서 견고한 관계를 유지하는 젠체하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외로운 사람들을 보지 못함을 인식한다. 그런 의미 에서 루스는 자신이 오래 전에 집에서 쫓겨났고 여동생 루실도 이제 없으므로  무너진 집 아이들처럼 자신도 춥고 외로운 아이임을 깨닫는다. 루스는 거주자들이 겨울에 눈과 추위로 파묻혔듯이, 그 집 안에 갇힌 많은 아이들을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아이들의 구조자”(158)로서 상상한다. 루스는 견고해 보이는 집과 외관이 환상이며, 자신이 무너진 집의 폐허 속에 있는 아이일 수 있음을 동일시한다. 그 이유는 루스가“할머니 집에서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다 믿지 못할 것”(160)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소파와 번역서와 책이 가득 찬 책장에서 비롯된 루스의 인상으로서, 그것들이 부서지기 쉬운 구조물위에 놓인 위태로운 무게이므로 집의 구조물의 취약성을 인식한다. 루스는 2층이 아닌 작은 집으로서 유동성을 갖는 집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루스는 간절히 원한다면 엄마는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로 회귀함을 인식한다.

    실비와 할머니가 각각 루스를 감싸안아주는 두 장면에서 루스의 태도의 차이점은 유동적인 연결성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이모가 다시 돌아와 루스를 코트로 덮어 감싸 안을 때 루스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춘 채 이모에게 기댄다. 루스는  그녀의 광대뼈가 이모의 가슴뼈에 닿도록 안아주는 것에 거북하지만 편안함을 느낀다. 이에 비해 루스는 할머니가“원피스 앞가슴에 핀을 꽂은 사실을 잊으신채 나를 품속에 너무 꼭 끌어안곤”(160)했는데 핀 때문에 할머니에게 얌전히 기대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두 개의 감싸 안음은 똑같이 불편하지만, 루스는 할머니의 옷에 꽂은 핀이 찌르는 것에 훨씬 더 아픔을 느낀다. 핀으로 고정하는 할머니의 살림방식은 가족을 한데 모으고, 재난을 막고, 몸을 돌보기에는 취약함을 나타낸다. 할머니에겐 가족을 지탱하기에“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도구”(25)밖에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아기를 구원할 수 있고, 핀이 모든 사물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비해 실비와 루스는 어색할지라도 뼈와 뼈가 서로 기대는 친밀함을 공유한다. 이 메타포는 편안함과 위안을 주는‘뼈의 친밀감’으로 발전한다. 루스와 실비는 유동성으로 연결되고 결속력을 갖는다. 핑거본으로 돌아오면서, 루스는 상징적인 제 2의 탄생을 하며 실비의 아이가 된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탄생이 진정하고 자유로운 것이 된다. 루스는“물과 우리가 무척 유사함”(163)을 깨달음으로써 유동성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실비가 당시 특급기차 사고를 회상하면서“호수에 사람으로 가득 차있다”(169)고 한 것은 루스에게 그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루스가 이야기를 수정하는 계획은 노아(Noah)의 아내의 들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그녀에게 뼈는 홍수 속에 가라앉은 모든 친지들을 나타낸다. 열차를 탄 후, 루스는 화물칸 문가에 기대어 호수를 내다보는 실비와 방주에서 대홍수를 내다보는 노아의 아내 사이에는 명백한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묘사한다. 실비이모는 방주의 덧문을 열면서 대홍수 속에 있을 수많은 친지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노아의 아내와 일치된다.

    ‘뼈들의 춤’은 루스가 노아의 아내가 대홍수동안 경험했을 수 있는 죽음충동을 묘사하기 위해 창안하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죽음이 몸을 뼈로 축소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친밀한 관계로서 아름답고 우아한‘춤’을 부여하는 것이다. 극단적 고립의 행위는 가족을 구조하려는 계획, 부재하는 가족에 합류하고 싶은 소망으로 조정된다. 이 여정에서 표면적인 세상아래에 있는 실체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볍게 살도록 재정비해준다. 실비는 루스를 호수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화물기차를 타게 함으로써 떠돌이의 삶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화물칸을 타고 핑거본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 둘 다 떠돌이로 여겨진다.

    실비의 떠돌이 방식은 공동사회에 대한 위협이므로, 마을사람들은 이 여정에 관해 알게 될 때 실비에게서 보호권을 빼앗기 위해 즉각 법적조치를 진행한다. 보안관이 집을 찾아오는 이유는 배를 훔친 일 혹은 무단결석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화물열차를 타고 핑거본으로 돌아왔다는 점”(177)으로 이모가 루스마저 떠돌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핑거본은 외부세계에 비해 전통과 역사가 깊지 않은 작은 마을이므로 체제를 고수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소중한 삶의 터전에 떠돌이 생활은 마을의 도덕성에 부딪친다. 마을부인들은 실비가 거실을 공적인 사회공간으로 유지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실비가 모아두는 것이 살림의 요체이고 물건을 쌓아두는 것을 절약의 증거로 여김으로써, 살림을 오해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쌓아놓는 것(keeping)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실비는 살림의 주요목적이 분류와 배제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비가 거실을 저장과 보관을 위한 사적 주변공간인 지하실과 다락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거실을“낡은 통조림 깡통, 누런 종이봉투, 신문, 잡지 더미”(180)로 가득 쌓아두고 있음이 드러난다. 거실바닥과 소파는 외부자연과 사회공간의 경계선의 모호함을 나타내듯, 고양이들이 물고 온 새의 파편들로 어질러져있으므로 적절한 집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실비가 루스를 보호할 수 없다고 믿고, 루스를 사회체제 속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때 루스의 서술은 전통적인 집에 반대하는 거주가능한 집, 개선된 집으로서 또 다른 공간, 배와 방주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행한다. 마을부인들의 방문 직후, 루스는 유동성을 갖는 집에 관해 심사숙고한다. 노아의 방주를 만들기 원하  는 것은 실비의 비관습적 방식의 논리적 귀결이다. 루스는 집의 공간의 절멸이 아닌 변형을 제안한다. 여기서 노아는 기존의 집을 완전히 삭제하지 않고 집의 파편으로 또 다른 주거공간을 짓는다. 새로운 집의 중요성은“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Wilson 306)이며, 집의 대체물로 배와 방주가 아닌 집이 겪어야 하는 변화이다. 그것은 자유, 이동성, 유연성의 이미지로서 움직이며 필요하다면 구름높이 뜰 수 있는‘피난처인 동시에 집’의 새로운 고안을 강조한다. 집은 역청으로 칠해져야하며 나침반과 용골을 가져야 한다. 로빈슨은 배의 유연성과 적응성을 집으로 이동시키고자 방주와 배의 은유법으로, 물과 공존할 수 있는 집을 강조한다. 유동성과 계속적인 대체의 상징으로 물은 핑거본의 지형적 자연경관과 내부공간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소설 전체에 충만해 있다. 로빈슨은 안정된 집에 내재한 불안정성과 공존할 수 있는 집, 자유로움과 주거가능성을 갖는 ‘방주인 동시에 집’을 제안한다.

    그러나 사회질서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실비의 집에 커다란 압력을 준다. 루스를 잃을 두려움 때문에 실비는 거실의 깡통과 신문을 치우고 집안정리를 하며, “주방식탁에 데이지 조화 꽃병”(187)도 올려놓는다. 그럼에도 보안관이 청문회가 열릴 거라 통보하러 옴으로써 가족의 붕괴는 피할 수 없다. 할머니가“떠돌이 노동자는 외투 속에 아이들을 홱 낚아채어 간다”(96)고했던 경고는 루스를 “판사가 나타나 검은 외투 속에 채어 데려가는 것”(190)으로 드러난다. 실비가 반어적 풍자적으로 살림을 회복하는 것은 상징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바뀐다. 집을 떠나는 날 밤, 이모는 모아둔 신문, 잡지, 도서관 책들을 모두 불태운다. 그날 밤 루스는 몸과 세계의 전도된 관계에 관한 개인적 우화를 창안한다. 밝게 전등불이 켜진 집으로 과감히 들어가는 소녀 이야기는 몸에 언어를 연결시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관한 루스의 새로운 통찰력을 설명한다. 루스는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존재가 되며, 이번에는 어두운 과수원에서 이모가 자신의 교육의 연장을 위해 다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창문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채 과수원 너머에 우뚝 서있는 집을 정원에“정박 중인 배”(203)로 볼 때, 루스는 이제 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배가 법적인 공간인 정원과 거주지에 여전히 속박되어 있으므로, 배의 지속적인 안정성은 거주가능성을 막는다. 방주가 될 수 없는 집은 거주 불가능하다. 루스는 불 켜진 집안에 있는 소녀를 상상하면서, 과수원 밖에서 그녀의 변형을 사색한다. 그녀가 집안에서 창문 밖을 내다볼 때 는 자신의 반사된 모습만 볼 뿐이므로, 집밖에서 그녀가‘공기 같은 존재’로 굶어죽는 것은 공기처럼 그녀의 목소리만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소녀인 루스는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집은 어둠의 모든 존재를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빛에 의해 속박된다. 루스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상황에 놓인다. 그녀는 빛의 엄격한 경계선 속에 안전하게 놓인 루실과 동맹하거나 엄마, 할머니, 이모와 합류할 수 있는 과수원에 남  아있을 수 있다. 집의 창문, 방주의 덧문에서, 루실과 핑거본의 보안관에 의해 강건하게 옹호되는 밝게 불 켜진 경찰관구에서 보면‘세상은 상실된’것이다. 루스는 이모가 호수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듯이, 그녀가 창안한 이야기에서 환히 불 켜진 집안으로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는 소녀가 됨으로써 노아의 아내가 홍수를, 이모가 호수를 보며 느낀 것을 동감한다. 루스는 과수원에 숨을 때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바꾸어갈 수 있음을 이해한다. 상상력에 의하면‘존재하지 않는 것’도 소생시킬 수 있고, 자아는 역설적으로 확장되며 사라지지 않는다. 루스는 추위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뿌리 깊은 집의 위안을 미련 없이 버리고“떠돌이의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것”(Booth 283)을 의미한다. 루스가 마을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함으로써 그들이 조치를 취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된다. 보안관이 찾아와“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애플파이”(206)와 좋은 가정환경을 약속하면서 그녀를 유인할 때, 루스는 그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마침내 실비의 살림은 반어적인 전환점을 갖는다. 마을사람들의 의도적 분리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떠돌이의 삶을 시작한다. 이것은 분리와 억압을 도피하는 수단이며 그들의 존재의 선언이다. 여행(travel)이 계획과  목적지를 갖는 것이므로 그들은 여행을 위해서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루스와 실비는“여행자가 아님”(216)을 분명히 한다. 그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캄캄하고 추운 밤 핑거본의 집을 떠날 때 철교를 건너는 것은 이 소설의 첫 장면, 에드먼드가 호수 속으로 치명적으로 추락한 것을 역전시킨다. 루스는‘춤’의 개념으로 다시 이행함으로써 엄마와의 연관성을 확립한다. 노아의 아내가 친지에 대한 동정심으로‘뼈들의 춤’에 참여하고 싶어 했을 것이듯이, 루스가 완벽한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춤으로 비유할 수 있다. “길고 느릿느릿한 무용수의 걸음걸이”(211)로 이모를 따라 다리를 건널 때, 루스는 엄마가 데려간 바다를 생각한다. 헬렌의 묘사에서 원의 이미저리는 실비-루스-다리-헬렌을 함께 실로 잇는 것으로 확립된다. 루스는 바다 물속에 서 있었던 엄마의 다리의 흔들림이 무용수의“우아하면서 느릿느릿하며, 슬픈 춤”(213)같았음을 회상한다. 루스가 실비를 춤추듯 흔들리며 따라가는 것은 헬렌이 물속에 서있었던 것과 일치된다. 모든 경계선, 여기/저기, 전/후 감각이 사라지는 호수다리 이미지는 떠돌이의 세계로 루스가 나아감을 암시한다. 루스가 소멸하고 사라지는 순간은 죽음과 탄생 둘 다를 포함한다. 그들이 떠돌이로 태어나는 것은 사회와 관련 있음을 보여준 다. 철도 다리를 건너는 순간 죽은 것으로 가정됨으로써, 그들의 존재는 공적으로 상실된다. 이모가“두 사람 호수에 익사”(213)라는 신문 기사를 옷깃에 핀으로 꽂아 다니며 기정된 사실을 인정하듯이, 그들의 역사는 마을사람들에게 완결된 것이다. 그들은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으며 자연과 문화 사이를 교차하며 여급이나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서부를 떠돌아다니며 지낸다.

    로빈슨은 집이 없음이 아니라“집의 이데올로기가 교정되어야 함”(Smyth 290)을 주장한다. 남성의 탐색서술의 절정부분인 집으로의 회귀는 귀향보다는 빈번한 방문 혹은 짧은 순간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루스에 의해 상상되는 마지막 두 장면들은 그들이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제시한다. 첫 장면은 서부를 다니는 길에 루스는 핑거본의 집에 사과나무도 키우고 정원도 잘 가꾸고 집을 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둔 루실이 살고 있을 거라 상상한다. 실비와 루스가 죽은 것이므로“이제 그 집은 루실의 것”(217)이라며, 루스는 루실이 다시 정돈한 집의 부엌창문 밖의 어둠 속에 서있는 것을, 무릎위에 어린 딸들을 안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을 상상한다. 루실의 딸들이 루스의 투영된 이미지를 보며 그들의 엄마의 것으로 생각할지라도, 루실은 유리창에서 자신의 이미지 대신 루스를 감지한다고 상상한다. 루실이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곳에 살기만 한다면, 그들은 언제나“루실의 집 창문밖에 서있을 것”(218)이다. 그들은 집에 나뭇잎, 바람, 호수의 흔적을 남겨두고 떠났다 돌아오길 반복하며 집과 자연의 조화를 시도하고 루실의 기억 속에 살아있길 원한다.

    루실이 핑거본에 없다면 루실은 도시로 가서 성공했으리라 상상한다. 핑거본의 사적인 집의 공간인 루실의 부엌 장면은 공적인 공간인 레스토랑의 장면으로 병치된다. 루실은 정장을 차려입고 보스턴의 한 식당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물  컵이 테이블 위에 남긴 물의 동그란 원의 2/3의 남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원의 닫힘을, 원을 완성하기 위한 루실의 노력은 결코 루스와 실비를 되돌아오게 하지 못한다. 루실이 존재 혹은 현존으로 묘사될지라도, 실  비와 루스는 부재 혹은 비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공적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스턴에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실비와 루스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실비와 루스가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연결되고  결속력을 보여주지만 루실 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루실은 가장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루실이 김이 서린 물 컵 위에다 이름의 머리글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거나 갈매기에게 주려고 굴 크래커 비닐봉지를 핸드백 속에 집어  넣듯이, 루실은 이름의 머리글자를 지우려함으로써 사회의 공적인 정체성을 삭제하며 동시에 갈매기를 위한 굴 크래커를 집어넣음으로써 떠돌이의 삶도 따르지 않는 이중적으로 자아를 부정한다. 루실은‘부재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실비와 루스를 보고, 듣고, 기다리고, 만날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의 역설적이고 모호한 결말부분에서 마지막 두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로빈슨은 어머니와 연결성을 이루고 소멸한 것을 되살리는 생태학적 상상력의 존재의 상징으로서 실비와 루스를 회귀하게 하고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자연,  사회, 인간의 조화를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제시한다. 반면 로빈슨은 마지막에 루실처럼 사회의 공적인 정체성도 만족하지 않고 실비와 루스와 연결되지도 못하고 기다림의 희망도 갖지 않는 부정과 거부의 태도를 가장 절망적인 것  으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루스와 실비를 절대적으로 추방하고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태학적 상상력이 그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지막에서 루실의 이중부정의 제스처와 달리 그들의 회귀는 이중 긍정의 제스처로 보이므로 유동성과 연속성의 구성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사회 영역에서 실비와 루스를 자연의 생태학적 상상력의 존재로 언제라도 기억하고 수용한다면 집의 거주가능성으로의 변형, 사회와 자연의 조화 가능성은 긍정적으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VI. 결론

    여성을 위한 선택은 집안에서 방랑 혹은 정착으로, 실비의 떠돌이 혹은 루실의 안정된 정체성에서 둘 중 하나의 선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로빈슨이 유동적 정체성을 제시하는 것은 여성 주체가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둘 다의 방향에서 다리를 계속적으로 건너고 다시 건너와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정된 자아로서 집 안에 머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부장적인 구조를 넘어 유토피아의 영역으로 완전히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  다. 이런 문맥에서 실비와 루스는 가정(home) 대신에 집(house)을 선택할 수 없으므로 집 대신 기차를 대체해야 한다. 배처럼, 기차는 여행과 이동의 수송수단이다. 그러나 기차는 지면의 선로에 훨씬 더 가깝게 속박된 것이다. 기차는 선  로를 떠난다면 재난과 비극이 일어난다. 또한 기차는 대지의 지배와 정착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갖는 남성적인 공간이다. 기차와 집은 가부장제에 똑같이 지배 받는다. 한편 그들이 기차를 선택하는 것은 남성적인 공간을 완전히 떠나지 않  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는 정착과 주택으로서 운송수단일 뿐 아니라 그 외의 것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래서 로빈슨은 집 혹은 기차 중의 한공간을 동시에 이런 공간들의 잠재력을 가진 배, 지면에 속박되지 않는 집의 장  소 둘 다를 선택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양가적인 영역을 제안한다.

    여성들을 관습적으로 가사일과 관련성을 갖는 존재로 규정한다면 여성 떠돌이는 집이 없는 존재, 집의 외부에 있는 존재이므로, 이 작품은 집의 정의가 변화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여성의 방랑을 재형상화 한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  루스와 실비가 집을 떠나는 것은 집의 기존 가치관을 해체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 패러다임을 수용한다면, 역전과 전복을 의미하는 은유로서 일시성과 유동성은 여러 주거형태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며, 떠돌이 여성의 정체성은 반드시 집 없는 사람을 가리킬 수 없고, 집은 우세한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실제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라 단정할 필요가 없다. 방랑과 집이 없음을 집과 안전성의 대립쌍으로 보는 것은 집으로의 교화를 강할 뿐이다. 이 작품은 집 혹은 방랑 중에서 획일적 선택을 요구하지 않으며, 생태학적 상상력을 소생시키고 유동성을 집의 공간에 연결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와 자연의 조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숙명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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