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a Ginkas was a student of Georgy Tovstonogov in 1967, the renowned iconic Russian theater director and the leader of Saint Petersburg Bolshoi Academic Theatre of Drama, who led the Russian theater for the last century. Tovstonogov’s directing theories inherit the genealogy of Stanislavski in the history of the Russian theater, so Ginkas’ theatrical background is purely Russian. However, behind his works lies another genealogy, nation or nationality beyond Russia which enables one to understand the consistency of his stage works: he is a Jewish Russian theater director that as a kid, survived the deadly holocaust, that is, a ghetto in Kaunas, the Jewish district in Lithuania formed by the Nazis, along with three other kids. He was Jewish and an artist at that who holds special memories about the truths about death more clearly than others, which is on the life-death juncture or is embodied in daily life. His ‘past’ and ‘memories,’ and a complicated identity between ‘nationalistic character’ and ‘peripheral character’ had a direct influence on his stage. Standing on the peripheral as a Jewish Russian theater director, he has raised existential questions of life that could be dealt by those standing on the life-death juncture through works of Dostoevskii, Shakespeare and Pushkin. However, this time, he put Chekhov’s work, which is even his short story, on the stage: <Life is Beautiful, according to Chekhov!> which is a collection of <The Lady with the Dog>, <The Black Monk> and <Rothschild's Violin>. Ginkas, thus, intends to come up with the all questions he has raised on the stage. This study is in the form of reviewing individual works of his. However, it aims to make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theatrical language that he imagined to dramatize his themes on the stage.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wo-fold: first, by looking into his overall theatrical background that focuses on young theaters in Moscow, the study discusses on the utility and roles of a stage as space; and second, the study discussed on the 'wisdom found in fable' as a facet found in short stories of Chekhov in order to conduct the performance analytical research on Chekhov’s short trilogy <Life is Beautiful, according to Chekhov!>. Through these two researches, the study delved into stage aesthetics strategies as a means to bring out the author’s wisdom found in fables as Ginkas put Chekhov’s trilogy on the stage. As aforementioned, this study targets several works found on the path of the director, but they serve as a prototype to view Ginkas’ works as a whole and as an classic example of many recent dramatized novels.
러시아의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 가운데 한 명인 카마 긴카스는 스타 니슬랍스키를 잇는, 지난 세기 러시아 연극을 이끌어 온 국보적 연출가 게오르기 토프스타노고프로부터 연출수업을 사사받았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연극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러시아 연극의 전통으로 볼 때, 긴카스의 연극의 토양은 순수하게 러시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긴카스의 작품 이면에는 러시아 이외에 또 하나의 족보, 혹은 국가, 혹은 민족성이 있는데, 이는 긴카스의 무대가 시종일관 견지하는 자세 혹은 사유의 틀을 파악하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바로 나치에 의해 조성된 리투아니아 유대인 지구 카우나스의 게토, 그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아이 중의 하나였던 유대계 러시아 연출가로서 의 긴카스가 그것이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속에 확연히 내재하고 있는 죽음의 실체를 보통의 인간들보다 또렷이 경험한 특별한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 복잡하고 거친 민족의 역사가 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새긴 기억들, 그리고 이중의 ‘민족성’과 ‘경계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은 그의 무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대계 러시아 연출가라는 경계인의 위치에서 연출가 긴카스는 그동안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 푸쉬킨이라는 묵직한 작가들을 통해 자신의 무대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들이 할 수 있는 깊은 삶의 존재론적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그런 그가 체호프를, 그것도 평범한 일상의 삶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무대화 하였다.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긴카스가 택한 체호프의 단편소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이다. 러시아 현대연극은 긴카스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을 앞에 두고 의아한 표정들이 역력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체호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긴카스의 40년 무대사와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의 의하면!>이라는 슬로건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체호프는 전혀 긴카스적이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카스는 체호프를 통해 그동안 자신의 무대 위에서 일관되게 제기했던 질문들을 정리하려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다. 본 연구는 개별 작품에 대한 리뷰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이를 통해 긴카스가 무대 위에 풀어 놓았던 특별한 주제와 그것을 무대 위에 현현화 하기 위해 상상했던 연극적 언어의 전반적인 이해로까지 나아가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의 연구 목적을 수행하였다. 첫째, 모스크바 젊은 관객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카마 긴카스의 전반적 작업배경에 대한 소고를 통해 그에게 있어 무대라는 공간의 효용과 역할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둘째, 긴카스가 무대화 한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에 대한 공연분석적 연구를 시도하기 위한 배경연구로서 체호프 단편소설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의 ‘우화적 지혜’에 대해 논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연구를 통해 긴카스가 체호프 단편 삼부작을 무대화하면서 원작의 우화적 상상력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무대미학적 전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고의 연구대상은 한 연출가의 창작 행보 가운데 발췌된 몇 편의 개별 작품이지만, 긴카스의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표본으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거니와, 소설의 무대화라는 최근의 무대 작업들에 대한 모범적인 예시를 제공할 것이다.
러시아 학술원이 편찬한 『20세기 연극』1)은 지난 세기 연극무대를 통시적으로 정리한 이른바 ‘연극사’에 관한 저술이다. 일반적으로 연극사의 기술은 정치·사회의 흐름으로서의 역사 기술 방식을 따라 시간의 흐름에 의한 순차적인 구성을 보이거나, 문예양식의 변이를 중심으로 사조별 기술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연극』은 일반적인 연극사 기술과는 차별화된 독창적인 연극사 기술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일백년 세계연극사의 화려한 지형도를 만들어 낸 연출가들의 개별 ‘작품’이다.2)
이 책의 본래적 의도는 지난 세기 연극을 특징짓는 ‘연출의 연극’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된 것으로, 위대한 연출가들의 개별 작품 속에 내재된 미학적이고 연극학적인 해석이 그 시대의 연극사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일종의 표본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20세기 연극』은 일백 편의 작품에 대한 연극비평적, 연극미학적 접근을 시도하여 각 작품이 갖는 시대적이고 연극학적인 특징을 일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작품이 존재했던 시대의 무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토록 한다. 그런 면에서 『20세기 연극』은 각각의 작품에 대한 리뷰이자, 시간적인 연속상의 순서를 따라 연결한다면 일백년 연극무대의 성찰과 반성과 희열을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가 된다.
『20세기 연극』의 연극사 기술 방법은 익숙지 않은 것이지만, 그 의도와 방법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출론’은 한 연출가의 무대행보를 빼놓지 않고 ‘모두’ 관찰하여 그 속에서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연극』의 기술 방법과 ‘연출의 연극’이라는 개념을 상정한다면, 연출가의 대표적인 작품 몇 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도 연출 방법론의 개괄이 가능하다는 이론이 도출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출발지점에서 러시아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 카마긴카스(К. Гинкас, 1941- )의 작업에 집중한다. 유대계 러시아 연출가라는 경계인의 위치에서 긴카스는 자신의 무대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삶의 깊은 존재론적 질문들을 쏟아내 왔다. 그랬던 그가 체호프(А.Че́хов, 1860-1904)를, 그것도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무대화 하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Дама с собачкой>(2001), <검은 수사(Черный монах)>(1999)3), <롯실드의 바이올린(Скрипка Ротшильда)>(2004)이 그것인데, 긴카스는 이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일관되게 제기했던 질문들을 정리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본 연구는 이 개별 작품에 대한 리뷰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연구의 목적은 『20세기 연극』처럼 긴카스가 무대 위에 풀어 놓았던 특별한 주제와 그것을 무대 위에 현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연극적 언어의 전반적인 이해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본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의 연구 목적을 지닌다. 첫째, 모스크바 젊은 관객 극장(Московский Театр Юного Зрителя, МТЮЗ)을 중심으로 긴카스의 전반적 작업 바탕에 대한 소고를 통해 그에게 있어 무대라는 공간의 효용과 역할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둘째, 긴카스가 무대화 한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Жизнь прекрасна. По Чехову!)> 분석을 위한 배경연구로서, 체호프 단편소설에 나타나는 ‘우화적 지혜’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연구를 통해 긴카스가 체호프 단편 삼부작을 무대화하면서 작가의 우화적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한 무대미학적 전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본 연구의 대상은 연출가의 행보에서 발견되는 몇 편의 개별 작품이지만, 이는 긴카스의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표본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설의 무대화라는 최근의 많은 연극작업에 대한 모범적인 예시로서도 기능할 것이다.
1)А. Бартошевич и др, Спектакли двадцатого века, М. Изд-во ГИТИС, 2004. 2)『20세기 연극』에는 1901년 네미로비치 단첸코(В.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 1858-1943)가 연출한 <세자매(три сестры)>를 시작으로 2000년 러시아 연출가 포멘카(П. Н. Фоменко, 1932- )의 <가정의 행복(Семейное счастие)>에 이르기까지 총 100편의 작품이 시간적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3)<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은 러시아 내에서 각종 연극시상식의 작품상과 연출상을 휩쓸었고, 러시아 무대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축제에서 러시아 연극의 우수성과 긴카스 작품의 시성을 널리 알린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국내의 긴카스와 체호프 무대화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안지영, 「긴카스와 체호프, 긴카스의 체호프 - 카마 긴카스의 체호프론과 체호프 삼부작 연구」,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Vol.35, 한국러시아어문학회, 2010, pp.89-119. 가 있다.
2. 체호프와 긴카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유하다.
모스크바 젊은 관객 극장의 예술감독인 러시아 연출가 카마 긴카스는 196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볼쇼이 드라마 극장(Большо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을 중심으로 지난 세기 러시아 연극을 이끌어 온 국보적 연출가 게오르기 토프스타노고프(Г. Товстоно́гов, 1915-1989)로부터 연출수업을 사사받았다. 토프스타노고프는 스타니슬랍스키를 잇는 정통 러시아 연극의 족보를 이루는 연출가인데, 이런 연유에서 긴카스의 연극 토양은 순수하게 러시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이면에는 러시아 이외에 또 하나의 족보, 혹은 국가, 혹은 민족성이 있다. 나치에 의해 조성된 리투아니아 유대인 지구 카우나스(Kaunas)의 게토, 그 죽음의 공간(Holocaust)에서 살아남은 네 명의 아이 중의 하나였던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의 긴카스가 그것이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속에 확연히 내재하고 있는 죽음의 실체를 보통의 인간들보다 또렷이 경험한 특별한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과거’와 ‘기억’, 그리고 이중의 ‘민족성’과 ‘경계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은 그의 무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긴카스는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민족적 배경을 실제 삶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이면에는 특수한 민족적 상황에서 태어난 연출가로서의 긴카스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빅토로 로조프(В. Розов, 1913-2004)의 <전통집회(Традиционный сбор)>(1967)를 시작으로 하는 긴카스의 작품들에서, 그가 기억하는 민족의 부박한 역사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원초적 담론을 풀어내는 내부적 기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언제나 긴카스 무대의 언저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긴카스가 게토에서 지냈던 시기는 태어난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이 전부였다. 한 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품안에서 지낸 죽음의 공간 게토는 사실 긴카스에게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면서 ‘남은 자’들을 통해 그 공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은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두 경계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 사유의 대상으로 치환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의 사형(Казнь декабристов)>, <푸쉬킨. 결투. 죽음(Пушкин. Дуэль. Смерть)>, <맥베스(Макбет)>,<‘죄’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К. И. из Преступления)>, <죄를 연기함(Играем преступление)>등의 작품에서 보이듯이 이러한 고민은 긴카스에 있어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 카테고리를 해결하는 열쇠로 연극무대에 풍부하게 배치되어왔다. 다시 말해, 긴카스에 있어 민족과 역사는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사유의 지층을 이해하는 ‘초월적 기호’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노골적으로 작품 속에 펼쳐지기도 했는데, 바로 <추방의 꿈(Сны изгнания)>이다. <추방의 꿈>은 작품 창작과정이 독특하다. 긴카스가 지도교수로 있는 므하트 스튜디오(Школа-студия МХАТ) 연출과 학생들의 ‘그림을 통한 상상력’ 에뜌드 수업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통해 획득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연상들을 하나의 일관된 극적 텍스트를 지닌 작품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추방의 꿈> 속에는 샤갈의 익숙한 레퍼토리들이 등장하는데, 하늘을 나는 산양이나 인간과 감화하는 동물들을 가면극으로 푼 것은 물론이거니와 <에펠탑의 신랑과 신부>를 성서 속의 아담과 이브로 치환하여 팬터마임으로 형상화하거나, <초록의 바이올리니스트> 속 고달픈 예술가의 형상을 유대인 민족 잔치의 한 부분으로 극화한다.
극의 제목에서 ‘추방’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헤어짐이 아닌, 고향 땅을 버려야 하는 상처투성이의 역사일 것이다. 샤갈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카소로부터 ‘저 염소와 닭 좀 그만 그렸으면 좋겠다’는 핀잔을 듣기까지 했던, 그 날아다니는 수탉과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염소, 아름다운 신랑 신부, 순진한 아이들은 ‘고향’이라는 절대적 명제로 긴카스의 무대에서 대상화된다. <추방의 꿈>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표상된, 흩어져 있던 여러 가지 샤갈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관념 안에 흡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했던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연극인생의 중반을 넘어 종막으로 가는 길목에서 체호프를 손에 들었다. 이전에 나타난 긴카스의 텍스트 선택의 특이성을 볼 때, 체호프는 전혀 긴카스적이지 않았고 긴카스적일 수도 없는 것이었으므로 모두들 의아해 했었다. 푸쉬킨(А. Пушкин, 1799-1837)과 도스토예프스키(Ф.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5), 셰익스피어를 거치면서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통해 연출가의 일관된 주제를 제시하고자 하였던 과거 그의 무대사를 볼 때, 체호프의 단편 속 ‘일상’과 그 일상의 ‘희노애락’은 긴카스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낭만적이고 감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긴카스는 체호프의 장편 희곡인 <갈매기(Чайка)>나 <벚나무 동산(вишневыйсад)>도 아닌, 그 일상성이 희곡보다 더 확연하게 강조된 단편소설을 가지고 와서 그것도 세 편을 연작으로 무대화한 것이다.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긴카스가 택한 체호프의 단편소설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이며, 각각 1부, 2부, 3부로 나뉘어져있다.
긴카스의 이러한 행보는 보편적인 삶의 투영으로서의 체호프 작품을 시리즈로 선보이며, 그가 무대에서 탐구해왔던 인간과 삶의 실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은 어디인가? 왜 인간의 삶은 이토록 부조리한가?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는 그동안 긴카스 무대에서 만져졌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의 거친 질감을 배제하고, 그것을 순수하게 인류의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치환코자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본다면,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에 대한 긴카스의 관심은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긴카스는 우리 일상과 닮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엇인가를 깨닫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무대 위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체호프’이었던 것이다.
우화는 성경의 우화(비유담, parable)에서 그 유래가 발견된다.6) 간접적인 비유의 방식을 택하는 우화는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성경의 우화가 문학장르로 굳어진 것이 우리가 이른바 우화라고 부르는 성질의 것이다. 이때 우화는 텍스트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 서술적 측면, 해설적 측면, 실용적 측면에서 그 의미와 유용성을 파악할 수 있다.7)
여기서 서술적 담론이라 하는 것은 곧 ‘스토리’다. 텍스트의 외피를 이루는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이자 이야기의 틀거지다. 우화를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효용적 측면에서 이야기 할 때, 서술적 담론은 전적으로 발신자의 영역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우화, 그리고 그것의 스토리는 발신자에게 있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쉽고 용이하게 수신자에게 전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에 다름 아니다.
반면에 해석적 담론은 발신자의 영역인 서술적 담론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의 영역이 된다. 이것은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그것으로부터 촉발되는 발신자의 하고 싶은 말을 뜻한다. 모든 문학과 예술 전반에 있어 이 해석적 담론은 문학의 동적구조물로서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나, 우화에 있어 그것은 가급적 일반화되고 보편화될수록 서술적 담론의 성공을 보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실용적 담론은 전적으로 수신자의 것이다. 실용적 담론의 목표는 해석적 담론으로부터 유추된 메시지로부터 수신자에게 일상생활에 적용할 일종의 규율을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이 행동의 규칙이 바로 우화가 종국에 도달해야 할 목표이며,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이 행동의 규칙의 발견을 통해 생산적인 협력 관계로 돌입하는 것이다. 물론 우화의 세 가지 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용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로 편입된 우화는 이야기 구성방식의 하나로 직접적인 실용적 담론의 형태 없이도 우화로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세련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것은 발신자의 명령적인 진술 없이도 서술적 담론 안에서 포착되는 다양한 ‘기호’들을 통해 해석적 담론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화가 노골적인 실용적 담론과 해석적 담론의 형식을 거둬들이고 문학 속에 자유롭게 도입된 현상을 일컬어, 문학에서의 우화란 ‘하나의 명백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결론짓는다.8) 여기서 말하는 명백한 의미란 우화가 전하는 추상적 관념이자 주제이며, 이는 곧 우화의 존재가치이자 그것이 다다르고자 하는 초목적이다. 우화가 편입된 다른 문학텍스트란 우선 ‘소설’을 의미한다. 전혀 다른 방향타를 갖고 있는 두 개의 장르인 우화와 소설이 친교 되는 지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것을 두고 우화소설, 우화적 소설, 또는 우화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둘러 소설 속에서 보이는 우화적 특징에 대해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우화적 양식을 차용하여 그것을 소설에 대입할 경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의 제시가 지나치게 노골적인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보편성이라는 면에서는 어떤 목적을 이룰지라도 소설로서의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화적 양식을 차용한 소설일수록 세련됨이 더욱 더 요구되어 지는 것이다.
소설이 우화적 양식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 그것은 대부분 장편보다는 단편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우화라고 하는 생태적 특질 상, 서술적 담론 즉 스토리의 형태가 복잡하거나 주제 파악을 위해 서사를 오래 따라가야 한다면 관념적 주제의 제시는 뒤로 연기될 수밖에 없고 그 주제 또한 일반화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단편소설 속에는 특별한 스토리를 통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 전달을 욕망하는 작가의 의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삶의 부조리한 실체’라는 일관된 체호프의 주제는 특히 단편소설 속에서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우화적인 상상과 규칙을 통해 작가의 관념적 주제를 전달하는 지점이 그것이다.
체호프의 단편소설들, 그 중에서도 긴카스가 무대화 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순수한 장르로서의 우화도, 혹은 우화의 규칙을 빌려온 우화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우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볼 때, 체호프는 작품에 우화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 우화적 특성을 염두에 두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일반적인 단편들이 삶의 소소한 일상을 ‘나열’하고 ‘제시’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은 나열과 제시를 넘어 작가의 추상적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고는 체호프의 이러한 의지를 ‘우화적 지혜’, 또는 ‘우화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체호프의 우화적 지혜는 우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의 제시에 있다.9) 체호프의 단편소설은 삶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명백한 실용적 담론을 견지하는, 문학 속에 자유롭게 도입된 우화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는 예가 될 수 있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은 부조리한 삶의 실체에 대해 깨닫는 자, 그의 ‘내면의 세계’를 작가가 직접적인 ‘말’로 서술하며 추상적인 주제를 드러낸다. 비록 그것이 우화처럼 명료하지는 않더라도 체호프는 단편소설 속의 등장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추상적 관념의 명백한 제시를 의도한다.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는 말한다, “어째서 이 세상에는 사람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삶이 보람도 없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그런 기이한 질서가 존재하는가?”
체호프의 우화적 지혜는 둘째, 초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인 공간의 설정에 있다.10) 체호프의 단편 속 공간은 현실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체호프는 공간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이 공간이 전적으로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공간이 아니도록 하였다. 이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깨달음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물론 <검은 수사>의 코브린을 ‘허위관념에 휩싸인 어리석은 자’의 전형으로,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야코프를 ‘죽음에 문턱에서 삶의 존재를 깨달은 자’라는 전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11) 그러나 체호프 속 인물들은 우화 속 인물들에게서처럼 명확한 관념의 전형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들이 작가가 전하려는 주제를 위해 사회적이고 역사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소설 속의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우화 속의 초역사적인 인물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추상적 관념이 소설의 모든 수용자들에게 일반화되어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체호프 단편 속 인물들의 전형성은 우화적인 색채를 띤다.
마지막으로 체호프의 단편은 희곡에 비해 서사의 길이가 짧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우화와 친화성을 갖는다. 우화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는 서사의 진행이 길어질수록 그 일반화와 구체화가 희박해진다. <롯실드의 바이올린>만 보더라도 주인공 야코프가 삶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단 이틀 만에 벌어지는 일이며, 소설의 길이는 채 1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체호프는 거대한 인류의 역사 앞에 잊혔던 개인의 일상과 고민을 불러냈다. 그들은 어떤 정치적인 전복을 꾀하거나 사회적 혁명 같은 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일상적인 고민과 회의가 헝클어진 실타래 속에서 부대끼는 루저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체호프는 나침반이 사라지고, 일순간 홀로 부유하는 ‘개인’의 혼동과 그 패배의 무드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작가가 궁금해 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 삶은 어떤 것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이 삶은 그들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포기했으며, 도대체 그들의 무엇이 우리와 닮아 있는가?
게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였던 긴카스에게 이 질문은 황망한 이론도 잡을 수 없는 철학도 아니었다. 그에게 이 질문은 구체적이고도 절절한, 실재하는 물질로서 다가왔을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무대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처한 인간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들을 풀어 온 긴카스에게 체호프의 이 일상은 ‘삶에 대한 잔혹한 우화’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호프의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을 엮어 무대화한 카마 긴카스의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은 일종의 “인간 영혼의 깨달음의 역사”14)라고 볼 수 있다. 긴카스는 이를 ‘삶의 부조리한 실체’라는 일관된 주제로 엮어낸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이미 ‘체호프’이며, 종국에는 긴카스가 자신의 무대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주제 또한 그것이었다.
긴카스는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무대화 하면서 ‘소설의 희곡화’에 대한 가능성과 그것의 미학적 현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체호프의 주제를 적극적으로 무대 위에서 풀어내기 위해 긴카스는 다양한 연극적 장치와 전략을 강구하였는데, 이러한 긴카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체호프의 작품이 전하는 삶에 대한 잔혹한 우화를 더욱 확연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체호프의 우화성과 그것을 무대 위에서 현현한 긴카스의 무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제 3장 카마 긴카스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우화성에 대한 논지로 이어진다.
4)존 프리드만, 최영주 옮김, 「러시아 연극은 심심풀이가 아니다. 다섯 개의 독백과 하나의 대화2 - 까마 긴까스와의 인터뷰」, 월간 『한국연극』 10월호, 한국연극협회, 2006, p.114. 존 프리드만은 긴카스가 연출한 <‘죄’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에서 주인공 카테리나 역할을 맡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성격파 여배우 악사나 미시나(Оксана Мысина)의 남편이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러시아에 거주하며 연극평론가로서 주로 모스크바 내에서 출간되는 영자신문에 러시아 연극관련 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존 프리드만의 긴카스 인텨뷰는 약 10여 년에 걸친 그의 긴카스 무대에 대한 탐독과 연출가와의 인터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책 집필의 결정적 원인은 긴카스의 배우인 그의 아내 악사나를 통한 긴카스와의 개인적 인연과, 악사나가 연기한 <'죄'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에 대한 관객으로서의 또한 비평가로서의 그의 개인적 열광 때문이었다. 원전은 Ginkas, K. & Freedman, J, Provoking Theatre, Hanover: Smith & Kraus, 2003, pp.1-340. 이다. 5)긴카스가 무대화 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연구로는 이진아, 「도스토예프스키 연극과 페테르부르크 테마 - 카마 긴카스의 페테르부르크 3부작을 중심으로」, 『노어노문학』 제17권 2호, 노어노문학회, 2005, pp.227-254. 가 있다. 6)김덕희, 「우화의 미학. Hawthorne의 The Scarlet Letter」, 『여름학술발표집』, 신영어영문학회, 2000, p.110. 7)위의 책, p. 110. 8)위의 책, p.112. 9)사전에서 정의하는 우화란 교훈적인 내용과 주제를 직접적인 언급이 아닌 사물이나 동물 등에 빗대어 전하는 것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들을 구체적인 형상을 빌려 알기 쉽게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적 관념이란 곧 우화가 전하는 주제이다. 반면, 소설의 주제는 우화에서처럼 하나의 추상적인 관념이나 일반화된 주제로 수렴될 만큼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것은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는 인물의 다양한 성격과 주제로 다가가는 창작자의 특별한 스타일 등, 복잡한 소설의 하부구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동적구조물’로서 수용자의 해석의 다양성이 허락된다면, 우화는 동적구조물로서의 수용자의 해석의 다양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10)추상적인 관념의 일반화를 위해 우화는 초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인 공간을 만드는 반면, 소설 속 공간과 시간은 항상 역사 안에서 현실적인 모양으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우화적 서사가 진행되는 공간은 구체적인 역사의 시간 밖에 존재하는데, 우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념적 주제의 전달이지 그것이 어디서 일어났는가라는 문제는 필요치 않고 중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화의 공간은 제시되지 않거나, 어느 곳도 가능한 초역사적인 공간이 된다. 그래서 공간이 사회성과 역사성을 초월할수록 우화성은 더욱 강조되고, 추상적 관념의 전개는 명확해진다. 11)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우화는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소위 말하는 선과 악, 참과 거짓 같은 관념의 ‘전형성’을 부여한다. 주인공들은 선이라는 관념의 전형, 악이라는 관념의 전형, 또는 게으른 자라는 관념의 전형, 부지런한 자라는 관념의 전형이 된다. 때문에 우화 속 인물의 성격은 단순하며 서사의 진행에 있어 특별한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성격의 변화는 추상적 주제가 주인공에게 일종의 깨달음의 형태로 나타났을 때 오직 한 번뿐이다. 반면 소설 속 주인공은 역사 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성격을 각각 획득하게 된다. 12)이상룡, 「일상성의 변주와 서술되지 않은 서술: 체호프의 단편 소설」, 『외국문학』 제54호, 열음사, 1998, p.4. 13)존 프리드만, 최영주 옮김, 「러시아 연극은 심심풀이가 아니다. 다섯 개의 독백과 하나의 대화2」까마 긴까스와의 인터뷰」, 월간 『한국연극』 10월호, 한국연극협회, 2006, p.110. 14)О. Егошина, Смертельная музыка, Новые известия, 10.03.2004.
3. 카마 긴카스 연출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우화성
소설의 주된 표현방식은 ‘서술’이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대화성이 극대화되어 마치 희곡을 읽어 내려가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키는 소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소설은 서술이라는 특별한 표현 방식을 통해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전개하고 갈등을 펼쳤다가 마무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에 반해 무대텍스트로서의 희곡은 오직 대화에만 의존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전개해야하는 엄격한 장르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소설텍스트와 무대텍스트의 구체적이고도 확연한 차이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두 텍스트 간의 ‘넘나듦’이 무대에서 심심찮게 이루어지고 있다. 소설을 무대화하기 위한 희곡화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업이란 것은 소설의 주된 표현방식인 ‘서술’을 무대텍스트의 장르적 규칙인 ‘대화’로의 수정, 혹은 변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의 희곡화 작업은 일종의 희곡 ‘다시 쓰기’에 다름 아니다. 서술이 대화로 변경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대화로 소설의 서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데서 오는 서술의 문체와 내용의 변화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곡이 얼마나 소설 속의 서사에 충실한 가에 대한 정도의 문제를 들어 충실한 각색(faithful adaptation)과 변형적 각색(transformative adaptation)으로 나누어 왔다.15) 충실한 각색은 소설 원작의 인물과 플롯의 구성과 주제가 무대텍스트에 그대로 적용된 경우를 말하며, 변형적 각색이란 소설보다 원작을 무대에서 탐색하는 연출가의 의지를 부각시키며 플롯의 구성과 인물의 변용을 통해 새로운 형식과 주제의 탐험을 시도한 경우를 의미한다. 하지만 변형적 각색이건 충실한 각색이건 간에 소설의 ‘서술’을 ‘대화’로 수정, 변형해야 한다는 것은 두 각색의 유형 모두에게 적용된다.
긴카스가 무대텍스트로 삼은 체호프의 단편소설 또한 일반적인 소설처럼 ‘서술’이 주된 표현 방식이다. 체호프는 서술이라는 방식을 통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속 구로프와 안나의 운명과도 같은 첫 만남을, <검은 수사> 속검은 수사의 회오리바람 같은 등장을, <롯실드의 바이올린> 속 야코프의 삶에 대한 후회를 보여준다. 그런데 일반적인 소설의 시점과 비교했을 때, 체호프의 산문들은 그 시점이 독특하다. 예를 들어 <검은 수사>를 살펴보면, 체호프가 택한 서술 방식은 코브린의 내면에 대한 작가적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전지적 작가시점이면서, 한 편으로는 코브린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건이 서술되는 1인칭 시점이다. 스튜어트 맥두걸은 이러한 시점을 ‘3인칭 제한적 내레이션’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3인칭 제한적 내레이션이 무대 위에 발화할 때 우리는 서사극의 개념을 가지고 오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것은 서사극적인 장치의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관념적이고도 추상적인 주제를 전하기 위한 작가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체호프는 10장 남짓한 단편소설 분량의 특성을 극복하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래서 그는 3인칭이자 1인칭인 특별한 소설의 양식을 통해, 깨달음의 순간에 달한 주인공의 내면적 변화를 상세히 기록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위 <검은 수사>의 코브린의 말은 3인칭 제한적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예이다. 이는 완벽하게 전지적이지는 않지만 코브린의 내면에 대한 서술이 가능한 선에서 전지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코브린의 내면의 변화, 즉 깨달음의 순간이자 작가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3인칭 제한적 내레이션을 통해 주인공의 깨달음이 ‘직접’ 제시되는데, 이를 두고 다른 작가적 주제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우화적인 주제 전달 방식으로서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의 일반화 원칙이 작용한다.
일반적인 소설의 희곡화 작업의 예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긴카스는 체호프의 이 특별한 ‘서술’을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목적 아래 ‘대화’로 바꾸는 작업을 일차적으로 진행하였을 것이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은 분량의 특성상 압축과 생략 그리고 암시와 같은 작가의 의도를 함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소설의 희곡화에 앞서 이러한 작가의 특별한 주제 전달방식을 어떻게 무대 위에 풀어내느냐가 연출가의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장르론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무대화한 긴카스의 연극작업은 소설의 희곡화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들을 뒤엎는다. 그의 ‘각색’은 충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형된 것으로 보기에도 애매하다.
충실한 각색과 변형된 각색 모두 소설의 서술을 희곡의 본래성에 충실하기 위한 의무적 조항인 대화로 우선 변형시킨 것이라고 볼 때, 긴카스는 애초부터 희곡의 장르적 입장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긴카스가 택한 체호프의 단편소설 무대화의 첫 번째 전략은 산문텍스트 즉, 소설의 표현방식인 서술을 ‘그대로’ 무대텍스트 속으로 수용한 것이다. 연출가는 체호프가 만들어 놓은 소설 속 대화뿐만 아니라 서술을 날 것 그대로 전혀 상처내지 않고 무대로 불러들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와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분량을 살펴보면 <검은 수사>가 20여 페이지 정도이고 나머지 두 작품은 10여 페이지이다. 긴카스는 이 체호프의 산문텍스트를 전문 그대로, 아무런 가감 없이 무대 위로 가지고 왔다. 하여 긴카스 무대 위에 오른 체호프의 소설은 ‘소설’이되 소설이 아니며, ‘희곡’이되 희곡이 아니다. 원작의 시작과 그것을 무대텍스트로 바꾼 긴카스의 <검은 수사> 대본을 비교해 보면 그 모습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단편소설 <검은 수사>와 그것을 무대텍스트로 삼은 긴카스 연출의 <검은 수사>의 대본을 비교해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긴카스는 체호프의 서술을 각각의 역할들이 ‘나누어’ 발화하게 하였을 뿐이다. 각각 배우들의 대사를 모으면, 그것은 단편소설 속의 서술 내용 그대로가 된다.
긴카스가 무대화한 <검은 수사>에서 모든 등장인물의 대화는 서술체로 끝난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는 의미에서 대화이나 전적으로 ‘대화’가 아니며, 소설의 주된 표현방식인 서술체로 끝났으나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그 서술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서술’도 아닌 것이다. 20페이지분량의 체호프의 소설은 긴카스의 무대에서 이렇듯 작가가 쓴 문장을 그대로 꼬박꼬박 ‘읽어 나가는’ 형태로 2시간 남짓 공연된다. 그리고 2시간 남짓이라는 공연시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긴카스의 <검은 수사> 속에 펼쳐지는 체호프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도 천천히 무대 위에 살아 숨 쉰다.
이렇듯 소설텍스트를 그대로 무대로 착출한 긴카스의 연출적 전략의 배경에는 첫째, 긴카스에게 체호프의 ‘말’들은 무대 위에서 서사의 전개를 위해 그 형태를 바꿀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술이 대화로 수정되면 원작의 서술 그 자체의 문체와 내용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이 ‘무너짐’은 긴카스에게 단순하게 원작의 서술 형태가 무너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어’와 ‘문장’ 자체가 주제이자 철학인 체호프의 ‘본래성’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래 구로프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서술’은 그 자체가 체호프의 ‘말’이자 ‘주제’이자, 작가의 ‘철학’인 것이며, 긴카스는 이것을 단어와 문맥의 연결, 내용의 흐트러짐 없이 무대 위의 ‘대화’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긴카스의 체호프는 “설명이 달린 작은 희곡”19)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체호프의 단편들 중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와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죽음’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 처해진 주인공의 ‘현실’로 끝나며, 그 종국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주어진 상황과 내면의 갈등과 굴곡이 그 어떤 단편들보다도 비극적인 뉘앙스를 전하는 작품이다. 더군다나 삶의 부조리한 실체에 대한 우화적 깨달음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가 직접적으로 체호프의 ‘말’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이다. 소설텍스트를 그대로 무대로 착출한 긴카스의 연출적 전략의 두 번째 배경에는 체호프의 ‘말’들이 희곡이라는 양식의 ‘대화’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센티멘탈적 감성을 서술체의 직접적인 사용을 통해 극복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서술체라는 특성상 그것은 감성보다는 이성, 주관적이기 보다는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긴카스의 체호프 삼부작에서 배우들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체호프의 말들은 그 의미가 지니고 있는 감상적 뉘앙스를 ‘담담하고’ 마치 객관적인 담론의 형태처럼 무대 위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긴카스는 체호프의 소설텍스트를 무대화 하는 첫 번째 연출적 전략으로 산문텍스트를 그대로 무대로 착출하였다. 이러한 연출적 전략의 배경에는 작가의 언어가 곧 철학이자 주제라는 긴카스의 체호프의 산문에 대한 이해와, 우화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단편소설이 대화의 형식을 따를 때 발생하는 센티멘탈적 습성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긴카스는 산문텍스트를 무대 위에 그대로 착출하면서 일종의 ‘합창’의 형식을 빌려, 배우들이 한 문장을 나누어 읽으면서 체호프의 ‘말’들을 정지시키고 연기하고 늘리는 특별한 방식을 강구하였다. 이는 체호프의 산문을 무대화 하는 긴카스의 두 번째 연출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긴카스의 체호프 산문텍스트 무대화 전략으로서의 ‘나누어 읽기’는 마치 코러스처럼 자신의 감정과 상황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감정과 대화에 직접 관여하며 그들을 대신해서 ‘부연’하고 ‘설명’하며 ‘강조’한다. “배우들은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잡아채면서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는데, 한 사람이 어떠한 문장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문장을 마무리 하는 식이다.”20) 그들은 무대에서 두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배우들은 극 속의 인물로서 자신의 삶을 진정성 있게 살다가도, 순간적으로 마치 작가적 위치에선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해설자로 가볍게 넘어간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대사는 각각이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합창’을 통해 하나의 의미가 완성되게 된다.
긴카스가 연출한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긴 정지 상태와 함께 만들어 지는 단어들은 등장인물이 마치 우리에게 각각의 단어들을 보여”22)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마치 금방 글자를 깨친 아이들과 노인들의 말버릇을 흉내 내는 것처럼, 그들은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단어들을 발음하고, 그들의 말들과 말 사이는 자주 정지되고 늘여진다. 위에 제시한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와 마르파의 대사에도 보이듯이, “그녀의 얼굴에 담긴 생각을 야코프는 보았다”는 직접적인 서술에 긴카스는 휴지를 두고 말들을 정지시켜, “그녀의 얼굴에 담긴 생각을…… 야코프는 보았다”라고 늘였다.
긴카스는 강조할만한 단어를 찾아 그것을 나누고, 휴지를 두어 말들을 정지시키고, 그리고 그러한 휴지와 말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긴카스가 무대화 한 체호프의 단편소설 속에는 문장보다 단어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빈 공간에서 더 큰 의미가 생산된다. 나누고 강조하는 단어들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맥락으로 이해되어지는 일반적인 화용론적 의미수용의 단계를 능가한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생각을”과 “야코프는 보았다”사이의 ‘정지 상태’는 마르파의 죽음에 대한 비극적 아우라와 야코프가 아내의 얼굴에서 읽은 자신에게 찾아올 잔혹한 시간에 대한 예시에 다름 아니다. 또한 마르파의 대사 사이의 휴지, 즉 “일이 안 좋게 흐른다는 것을”과 “마르파가 곧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사이가 정지되고 늘여지면서 발생하는 빈 공간에는 마르파에게 다가오는 비극의 강도가 끝없이 증폭된다.
체호프는 일종의 작가적 주제이자 철학으로서의 삶의 잔혹한 실체를 세계라는 타자와 대결하는 일상 속의 자아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체호프의 다양한 자아들을 통해 긴카스가 이해한 체호프는 “깊은 심연의 비극작가이자 철학자”23)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처한 인간들, 또 그 속에서 체호프의 주인공들이 깨닫는 삶의 부조리함은 긴카스에게 있어 ‘비극’ 그 자체였던 것이다. 긴카스는 체호프가 이러한 비극적 삶의 실체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속에 명백하게 제시하기 위해 우화적 지혜를 동원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무대화하기 위해 체호프의 단편소설 속의 서술체를 그대로 무대로 착출하는 전략을 우선 강구하여 소설의 희곡화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긴카스 작품에 무대 미술을 도맡아 하고 있는 무대미술가 세르게이 바르힌(С. Бархин, 1938- )은 오페라, 발레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전방위 예술가이다. 연극무대에 있어 바르힌 무대의 특별함은 그가 새롭게 찾아내는 ‘장소’의 기발함에 있다. 유형의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기 이전, 그 상상력을 채울 공간을 먼저 찾는다는 데서 바르힌의 공간연출은 변별성을 지닌다. 그가 찾아낸 공간은 일반적인 ‘무대’의 개념을 깡그리 무너뜨린다. 그는 사각의 프로시니엄 무대를 떠나 극장의 구석으로 뒤뜰로 로비로 또는 거리로 자신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종횡무진 한다. 바르힌이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을 위해 찾아낸 공간 또한 지금까지 그 어떤 무대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인데, 바르힌의 이 공간은 긴카스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의 우화성을 극대화 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며 극 속에 유용하게 녹아든다.
동물이나 식물을 불러들이지 않고도 소설이 우화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주제적 측면에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그 ‘어떤 것’을 제시해야 하고, 가급적 그것은 일반화된 주제로 수용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소설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우화적 공간’의 차용이다. 공간의 우화성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의 제시를 현실적 잣대를 적용해 비논리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잘못 파악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
우화적 공간은 초역사적이며 탈사회적인 특징이 있으므로 ‘여기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공간은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 파악을 위해 ‘그곳이 어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여 소설 속의 공간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며 때론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실재할 수 있는 공간이며, 비록 상상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모두 현실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공간임을 암묵적으로 동조해야 하는 것이다.
체호프는 이 같은 일반적인 소설에서의 공간처럼, 분명 일상적인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주인공들을 무대로 초대했다. 그러나 체호프의 공간은 전적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이것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 전적으로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환상의 공간이라고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이 체호프의 단편소설 속 ‘우화성’이 획득되는 지점이다. 체호프는 공간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묘사를 첨부해 이것을 아주 간단히 가능하게 했다.
소설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공간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시골보다 못한 자그마한 도시”, “대부분 노인들만 살고 있”는 도시는 사실 ‘삶’이자 ‘일상’이다. 그것은 현실의 공간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 현실의 공간을 설명하며 “그들은 분통이 터질 정도로 아주 드물게 죽어 나갔다”라고 덧붙인다. 논리적인 연결고리로 보았을 때 노인들만 살고 있는 도시는 드물게 죽어나갈 수 없으며, 더군다나 체호프는 “분통이 터질 정도로”라는 강조구를 넣어 이 도시가 전적으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라 할 수 없음을 예측하게 한다. 이 공간에 대한 체호프의 ‘강조구’가 바로 우화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분통이 터질 정도로 아주 드물게 죽어나”가는 마을은 소설이 제시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 공간에 특별하고 동화적인 측면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노인들만 살지만 잘 죽어나가지 않은 도시일 뿐이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도 우화적이다.
<검은 수사>에서 코브린이 묘사하는 페소츠키 씨네 정원도 일상의 공간으로서 보이지만, 작가의 직접적인 설명이나 혹은 주인공이 받아들이는 공간에 대한 인상으로 인해 신비하고 동화적인 느낌을 준다. 그곳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곳이며, “마치 왕국에 온 듯 한”느낌을 자아내는 공간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두 중년의 남녀가 만난 휴양지 얄타는 “무척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연보랏빛 바닷물 위로 달빛이 금색 선을 긋고” 있는 현실의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곳이며, 구로프가 살고 있는 곳은 영상 3도에도 눈이 내릴 수 있는 동화 같은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별함’은 체호프의 단편 속 공간을 현실로부터 우화로 인도한다. 특별함은 곧 공간이 초역사적이게 하는 시발점이 되고, 이 특별한 공간은 우화적인 서사 전개의 타당성을 위한 일종의 규칙을 만든다. 이 공간은 이어지는 소설 속의 비현실적인 장면과 극의 전개, 혹은 주인공의 급격한 깨달음에 대한 논리성을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 체호프의 단편소설 속 우화적인 상상력 또는 우화적 지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체호프 공간의 우화적 상상력 또는 우화적 지혜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가 긴카스와 무대미술가 바르힌의 전략은 공간에 대한 실험으로부터 시작된다.25) 공간의 탁월한 발견은 이 작품이 갖는 우화적인 색채를 드러내, 소설 속 삶이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이고 신비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자아내게 한다.
먼저 <검은 수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바르힌은 “실제 무대 공간 넘어 어두운 심연의 원근법”26)을 이용하였다. 체호프 단편 삼부작 중에서 가장 먼저 무대화된 <검은 수사>에서 긴카스와 바르힌은 넓고 깊은 므튜스 극장의 대극장을 포기하고 극장의 2층 좁은 발코니로 올라간다. 그러나 사실 무대는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어졌다. 2층 발코니에 차려진 객석과 좁은 무대, 그리고 거기서 보이는 1층의 무대와 객석이 모두 <검은 수사>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연의 원근법이라고 하는 것은 ‘검은 수사’의 공간이자 인간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을 무대 위에 시각화시키기 위한 공간연출의 콘셉트를 일컫는 말이다. “지평선 위로 회오리바람 또는 소용돌이처럼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검은 기둥이 솟구쳤다. 윤곽은 선명하지 않았으나 (...) 맹렬한 속도로 움직여 이곳”으로 당도한 검은 수사의 등장은 <검은 수사>가 품고 있는 공간의 우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긴카스는 이 땅부터 하늘까지 검은 기둥이 솟구치는 심연을 시각화하길 원했고, 그래서 그는 1층 객석의 넓은 공간과 깊이를 통해 이를 실현한 것이다.
마치 <갈매기>에서 나오는 “춥다…… 공허하다…… 두렵다”27)는 말처럼 검은 수사의 공간은 멀고 먼 암흑의 지평선에 위치한다. 그것은 검은 나락이자 미지의 공간이며 삶의 끝처럼 깊고도 암울하다. 그곳에서 검은 수사는 현실과 꿈의 공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거나, 코브린이 보는 앞에서 검은 나락 속으로 뛰어 내리는 등, 2층의 발코니과 1층의 대극장 무대를 끊임없이 종횡무진 한다. 검은 수사가 등장하는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는 코브린이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은 페소츠키가 평생을 일군, 코브린에겐 동화 속 공간이나 다름없는 능금 정원이다. 긴카스와 바르힌은 공작 깃털이 갈대처럼 우거진 숲을 2층 발코니에 만들었다.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정원은 코브린이 “밝고 경이롭고 초자연적인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는 순간에 정원을 향해 토해내었던 “정말 아름다운” 환상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코브린은 검은 수사를 만나고 그로부터 “신이 선택한 자라고 불려야 옳을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된다.
그러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진행되는 코브린의 서사로 인해 아름다운 공작 깃털의 무대는 점점 무질서해진다. 공작 깃털이 배우들의 발걸음에 쓰러지면서 무대는 마치 폐허처럼 변하고, 코브린과 검은 수사의 만남이 계속될수록 정원은 황폐해진다. 타냐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처럼 코브린이 아버지를 죽이고 정원을 황폐하게 하고 그래서 온 가족을 멸망하게 한 순간, 공작의 깃털은 아름다움에서 폐허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코브린이 황폐화시킨 타냐와 그녀 아버지의 정원’ 그 자체에 대한 메타포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작의 깃털은 “악마의 상징”28)이기도 하며, 반대로 공작 깃털의 아름다움이 폐허로 되는 순간에 코브린은 허위의식으로부터의 탈피, 즉 깨달음에 이른다. 결국 <검은 수사>의 대비되는 두 공간은 일상을 죽음으로 만들어야 얻을 수 있는 환희와 삶의 소소한 행복 사이에서 사투를 벌였던 코브린의 내면적 자아를 투영하는 것이다. <검은 수사>에서 긴카스와 바르힌의 공간은 그 자체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를 전달하는 우화적 지혜의 소산, 혹은 일상의 삶을 우화로 인도하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또한 <검은 수사>가 공연되었던 2층 발코니에서 무대화 되었다. 긴카스와 바르힌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로맨틱한 여름바다를 위해 1층의 무대를 푸른색 조명으로 처리하고, 무대 위에 배한 척을 띄웠다.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코브린을 허위의식의 세계로 초대했던 검은 수사의 미지의 공간이었던 심연은, 이제 낭만적이고 시적인 얄타 해변의 수평선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삶의 모호함, 알 수 없음, 미지의 세계, 인간이 알 수 없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삶의 실체에 대한 무대미술가의 시각적 메타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때론 검은 수사의 출현처럼 두려운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먼 얄타의 해변이 보이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긴카스는 체호프가 단편소설에서 전하고 있는 작가의 관념적 주제로서 이 삶의 속성을 ‘무대’를 통해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일상과 닮은 체호프의 공간은 우화로 우화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 속 공간은 체호프에 의해 선택된 수많은 형태의 자아들이 세계와 갈등하고 고통 받고 그리고 깨닫는 특별한 공간이 되기를 의도한다. 즉 체호프의 공간은 주인공의 갈등과 고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성찰’의 공간이며, 이를 통해 독자들이 설명적 담론을 유추할 수 있는 우화적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 우화적 지혜가 드러난 공간에서 체호프가 선택한 다양한 자아들은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초역사적·탈사회적인 공간은 극의 관념적 추상성을 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면서, 짧은 단편 속에서도 주인공의 급격한 깨달음이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복선’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체호프가 제공하는 실용적 담론의 형태로서 삶의 이중성, 삶의 부조리함, 즉 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주제를 극명하게 도출하기 위한 작가의 지혜에 다름 아니다.
긴카스는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마지막인 <롯실드의 바이올린>을 위해 2층 발코니에서 1층 대극장 무대로 내려왔다.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의 단편 중에서 작가에 의해 우화성이 가장 극대화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의 깨달음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우화 그 자체이다.
그 자체가 우화인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무대는 온통 죽은 사람이 들어가서 누워 있어야 할 관 천지다. “삶을 위한 것이라곤 나무로 만든 책상과 전등사이의 아주 좁은 공간뿐이다.”29) 즉, 무대의 많은 부분은 죽음이다. 그런데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장의사 야코프가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 아직 주인을 못 찾은 관들은 마치 항구에 정박한 배들처럼 보인다. 밝은 천연색 나무빛깔이 고운, 야코프가 만든 크고 작은 형태의 관들은 아름답게 무대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야코프는 고개를 숙이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이 따위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넋두리 한다.
장의사 롯실드는 자신의 죽음이 다다른 자리에서 삶의 심연 혹은 삶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인간의 부조리한 실체를 극명하게 증거할 수 있는 ‘죽음’과 평생을 함께 했었다. 어리석은 자, 야코프이다. 무대에 들어찬 관들 사이에 우두커니 앉아 그는 이제야 삶의 실체를 경험한다. 인간의 후회는 늦을수록 더 잔인하고 잔혹하며, 그 강도는 깊고 결과 또한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 단편 삼부작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야코프의 깨달음과 후회가 그러하다. 그는 40년 동안이나 매일 지나쳤음에도 보지 못했던 것을 그제야 보기 시작한다. 관들 사이에서 내뱉는 어리석었던 자 야코프의 삶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은 그 자체가 작가의 주제이다. 긴카스와 바르힌의 이 무대는 그리고 그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야코프의 존재는 작가의 관념적 주제를 마치 하나의 정지된 화면 속의 사진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검은 수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보았듯이, 야코프의 삶을 우화로 전진케 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긴카스가 무대화한 항구 같은 야코프의 관들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의미는 죽음이자 공포이다. 마치 긴카스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의 주제가 ‘삶은 아름답다’이나 실제 이야기 속의 주제나 주인공의 종막은 비극적인 것처럼, 야코프의 관들은 아름다우나 그 의미는 잔혹하다. 그런 의미에서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삶의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종합이자 정리라고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삶’만 쓴다는 체호프의 말처럼,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평범한 인간들의 삶처럼 겉으로 보았을 때 마치 밋밋하고 굴곡 없는 삶의 서사를 지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밋밋한 서사를 이어가던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불현듯 삶이 거짓되며 자신이 속한 세계가 진실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세계라 인식”31)하는 순간에 당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순간에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허위의 삶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 시도의 과정은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의 단편 삼부작의 주인공들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고통’과 ‘회환’과 ‘절망’과 그리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는 대가를 요구한다. 긴카스는 이것을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끔찍한 것들이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삶이며, 그 자체가 인간의 실존이라 연출가는 충언한다. 더불어 긴카스는 다름 아닌 그것이 무대 위의 연출가로서의 자신이 의무라고 고백한다.
우화 속 인물들의 성격은 단순하며 이 인물은 그 자체가 어떤 관념의 전형성을 대표한다. 그들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허구이거나를 대변하는 전형의 인물들인 것이다. 이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의 명확한 제시를 위한 일종의 우화의 양식이자 규칙이다. 우화의 전형적인 인물유형은 일반적인 문학 속 인물들의 전형성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우화의 전형성은 초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인 반면, 소설 속의 전형은 특별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역사 안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호프가 창조한 인물들은 “세계와 자아의 갈등(부조리)과 화해(조화)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일방적으로 귀속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늘 서성거리거나 어느 도정에 서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33) 그들은 희망과 절망, 진실과 위선, 외형과 본질, 삶과 죽음,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는 인류의 보편적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체호프 작품 속의 인물들에게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체호프의 ‘머뭇거리는’ 인물들 속에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세계와 대결하는 보편적 양상이라고 보았을 때, 체호프의 인물들은 세계와 갈등하는 자아로서의 전형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삶의 허구와 진실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인간존재’로서의 전형성이다. 이 머뭇거림이 바로 체호프가 창조한 삶의 부박한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또는 부조리함이라는 세계의 관념을 대표하는 인간의 전형성이 된다. 머뭇거리는 인간이라는 전형성은 체호프 작품 속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세계의 본질 그리고 그 안에서 부대끼는 전형적인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우화적인 인물처럼 초역사성을 획득할 수 있다.
체호프의 ‘머뭇거리는 인물들’은 세계와 부딪히고 대결하는 모습을 통해 몇가지 양상을 띤다. 이 인물들이 세계와 대결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것이 종국에 목표로 하는 지점은 같다. 삶의 참된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실체는 어떠한가?
긴카스가 무대화 한 체호프의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 속 주인공들이 현실과 관계 맺고 있는 양상, 즉 주인공들이 세계와 부딪히고 대결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먼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구로프와 안나는 세계에 의해 ‘고통 받는 자아’다. 그들은 일상이 얼마나 야만적인 습관들이며 일상의 사람들이 얼마나 야만적인 사람들인지, 그리고 일상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의미 없는 매일 밤이었고, 가치가 없는 날이었는지 처절한 후회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젊기에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그들은 이 세계와의 대결 구도에서 고통스런 결론을 내린다. “누구나 볼 수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과 “소중하고 흥미로우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 속에서라면 그가 진실하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두 개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이 세계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잔혹한 현실에 대한 패배 혹은 극복이라기보다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고통 받는 자아의 전형이 선택한 ‘인정’이다. 즉 잔혹한 세계의 실체에 대한 인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2부에 해당되는 <검은 수사>의 코브린은 세계와 ‘갈등하는 자아’이다. “체호프의 후기 작품세계에서는 주인공이 현실 세계와 원활히 소통하지 못해, 갈등의 불씨를 안은 채로 무의미하게 공허한 삶을 사는 자아의 양상”34)을 보여주는데, <검은 수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구로프와 안나처럼 세계와 억지로라도 화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대결하지도 못하면서, 완전하게 ‘머뭇거림’ 그 자체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파우스트 박사와 같이 현실에서 학문적으로 성공을 거둔 코브린은 이 세계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그런 하찮거나 아주 평범한 이득을 위해 많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 느낀다. 그래서 코브린은 검은 수사로 대변되는 ‘허위’, ‘보이지 않는 세계’, ‘환상의 세계’에 침잠한다.
코브린의 행동들은 일종의 세계와 갈등하는 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무료하거나 허위이거나 의미 없음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코브린이 환상에 침잠할수록 그의 일상의 세계는 점점 황폐해지고 질서를 잃어가며 이웃들을 파멸로 이르게 한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처럼 검은 수사가 인도하는 곳으로 대담한 여행을 하고 돌아온 코브린은 폐허가 된 일상을 보고 절규한다, “삶 속의 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나, 인간의 젊음이란 얼마나 기쁨이었나!”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장의사 야코프는 세계와의 불화를 삶의 마지막 종착지에서 ‘화해하려는 자아’이다. 그는 죽음이 목전에 당도한 곳에서 삶의 실체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삶의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졌고, 또 사라질 것이라는 것. 세상이란 단 한 번 주어진 삶이 보람도 없이 흘러가 버리는 기이한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 야코프의 그것은 억지스런 삶의 실체에 대한 ‘인정’은 아니다. 체호프의 원작에서 그가 연주했던 바이올린, 그리고 긴카스의 무대에서는 야코프가 평생 동안 관을 만들었던 톱 속에서 모든 사람이 감동하는 음률이 연주되는 것은 그의 종막이 평화로운 ‘화해’로 끝났음을 방증하는 일단이 된다.
우화의 전형적인 인물유형의 관점에서, 인물들의 종막이 ‘인정’이건 ‘갈등’ 이건 ‘화해’로 끝났던 간에, 이 모든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잔혹한 삶의 실체 속에서 ‘머뭇거리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유형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머뭇거림 속에서 결국은 무엇인가를 깨닫는 자들이다. 구로프는 얄타로의 짧은 여행을 통해, 코브린은 환상의 세계에 대한 침잠을 통해, 그리고 야코프는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의 목전에서 각기 무언가를 깨닫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 그 자체이지, 그들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론적 맥락 위에서의 깨달음이 아니다. 그들의 깨달음은 마치 우화에서 관념적인 주제가 드러나는 지점처럼, 초역사적이며 탈사회적인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들은 우화적 깨달음을 얻은 자아의 다양한 양상들인 것이다.
원작에서 코브린과 구로프는 비슷한 연배인데, 긴카스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구로프를 코브린 보다 젊고 낭만적인 이미지의 배우로 기용하였다. 긴카스의 ‘젊은’ 구로프로 인해 체호프 단편 삼부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검은 수사>,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인간 삶의 파노라마로 연결된다. 긴카스는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이라는 명제 아래, 인물들의 이 머뭇거림을, 그리고 세계와의 대결의 양상들을 일종의 ‘삶의 파노라마’로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긴카스의 무대 위 각각의 그들은 인간의 생태적인 나이에 맞는 고민들을 하고 있는 중이며, 그러한 그들의 고민은 그들의 생태적인 나이의 전형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구로프는 순수한 ‘젊음’이자 청춘의 이미지다. 체호프는 구로프가 “마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머리가 이미 세기 시작했다”고 했을 정도로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긴카스가 연출한 구로프는 중절모를 쓰고 긴 검은색 외투를 걸친 멋지고 반듯한 젊음으로 등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작의 구로프가 <바냐 외삼촌>의 보이니츠키에 가깝다면 긴카스가 연출한 구로프는 오히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에 가까이 있다.35) 그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이 바로 그 진실한 사랑의 순간이라 믿는 순수한 젊음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안나 또한 체호프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금발의 여자로 베레모를 쓰고”, “표정 걸음걸이 의상 머리모양까지 점잖은 신분으로, 남편이 있으며”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체호프의 설명으로 미루어 본다면 안나는 이미 젊음의 시간을 지나 중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긴카스가 연출한 안나는 무대를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먼 얄타를 응시하며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 하는 젊고 에너지 넘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다마(Дама, 부인)’이기보다는 ‘제부쉬카(Девушка, 아가씨)’에 가깝다. 체호프의 원작에서 안나는 <갈매기>의 아르카지나에 가깝지만, 긴카스가 연출한 안나는 <갈매기>의 니나이며, <세자매>의 이리나인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구로프와 안나를 마치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와 니나, 적어도 <세자매>의 마샤와 베르쉬닌으로 분하게 함으로써, 긴카스는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주인공들을 각각 나이에 맞는 고민들로 세계와 대결하게 만들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안나와 구로프는 ‘사랑’이라는 젊음의 증거로, <검은 수사>의 코브린은 지나온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자각으로,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는 죽음이 목전에 당도한 이에게만 찾아오는 ‘죽음’에 관한 사유로 세계와 대결하는 것이다.
이는 긴카스가 체호프 단편 삼부작을 인간 삶의 파노라마로서의 우화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선택한 연출적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긴카스 작품에서 이들은 <갈매기>로 시작하는 인생의 파노라마로서 체호프의 장편 희곡들 속에서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구로프와 안나는 세상이 허락지 않는 사랑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바냐와 옐레나이기도하고, 트레플레프와 니나이기도 하다. <검은 수사>의 그들은 불혹의 시간을 지나며 삶의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바냐와 세레브랴코프 혹은 아스트로프와 비슷한 존재론적 맥락을 지닌다.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야코프는 <벚나무 동산>의 가예프와 라네프스카야처럼 삶의 종착역에 당도했다. 그들은 더 이상 트레플레프도 세자매도 쏘냐도 아니다. 이처럼 체호프 단편 삼부작의 인물들은 체호프 전체 작품의 전형적인 인물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긴카스가 체호프 삼부작을 통해 체호프 작품 전체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체호프라는 작가가 갖는 세계관과 그의 예술관까지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긴카스는 체호프 주인공들의 특별한 인물로의 전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우의 ‘역할사’를 가지고 왔다. 배우의 역할사라는 것은 한 배우가 맡았던 다양한 역할들의 ‘연혁’을 의미하는데, 레퍼토리 시스템을 특징으로 하는 러시아 연극에 있어 배우의 역할사는 일종의 배우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 이미지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배우가 다양한 역할의 경험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의 어떠한 성격이 반복되며 얻게 되는 배우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우의 역할사는 긴카스의 무대에서 체호프 작품 속의 인물에 대한 전형성을 보장한다. 이 전형성 또한 특별히 사회와 역사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우화적이고도 초역사적인 것들이다. 긴카스는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체호프 단편 삼부작 속의 역할에 절묘하게 대입해 극의 우화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바로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 역할을 맡은 발레리 바리노프(В. Баринов, 1946- )이다. 그는 모스크바 군인 극장(Центральный Акад емический Театр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과 말느이 극장(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Малый театр)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형적인 대극장 배우이다. 그는 최근 20년 동안 톨스토이(А. Толстой, 1817-1875)의 <차르 이반그로즈니 (Царь Иоанн Грозный)>에서 유리예프 (Захарьин-Юрьев) 역할을, 오스트로프스키(А. Остро́вский, 1823-1886)의 <엄청난 돈(Бешеные деньги)>에서 쿠추모프(Кучумов) 역할을, <노동의 댓가(Трудовой хлеб)>에서 카르펠로프(Корпелов) 역할을, <푸치나(Пучина)>에서 바로프초프(Боровцов) 역할을 맡아왔는데, 이러한 바리노프의 역할사는 그에게 전형적인 러시아 남성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의 육중한 외모에 역할이 섞이면서 그는 전형적인 러시아 남자의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배우의 역할사가 촉발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긴카스는 배우로서 바리노프가 갖고 있는 이 전형적인 무대 위에서의 이미지를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야코프 역할에 대입시켰다. 바리노프의 역할사는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의 무뚝뚝하고 우직한 러시아 남성으로서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야코프는 묵직한 걸음걸이로 무대를 천천히 돌아다니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하며, 그리고 고개를 반쯤 숙인 얼굴로 아내를 쳐다보고, 유대인 롯실드를 핍박한다.36) 그의 이러한 행동들과 바리노프의 역할사에서 촉발된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야코프의 성격이 극대화되는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다.
체호프는 자신이 소설 속에 구현한 인물묘사의 원칙에 대하여 인물의 성격과 그들이 세계와 대화하는 방식이 “인물들의 행위에서 그것이 이해되도록 노력해야한다”37)고 언급했는데, 이런 점에서 체호프가 소설 속에 구현한 인물들의 외향과 외향적 행동은 작품의 전반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제이다. 긴카스는 바리노프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외형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물을 설정하여, 체호프 소설 속에서의 인물의 외향적 행동을 부각시킨다.
바리노프가 연기하는 야코프에 비해 야슬로비치(И. Ясулович, 1941- )가 연기하는 롯실드는 빼빼마르고 핏기 없는 쇠락한 육체이다. 검은색 숄을 머리에 두르고 가늘고 떨리는 듯한 높은 톤으로 말하는 이 연약한 육체의 마르파는 야코프와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시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다고 부탁하러 온 유대인 롯실드에게 하는 바리노프의 공격적인 행동들, 관을 제작해 주고 생긴 손실을 꼼꼼히 기입하던 장부에 “마르파 이바노브나 관 값으로 2루블 40코페이카”라고 쓰며 굵은 저음으로 내뱉던 한숨, 관을 만들 때 쓰는 기다란 나무판자 위에 마르파를 얹어 병원으로 달려가는 육중한 몸집의 야코프와 그 위에 깃털처럼 얹혀 흔들리던 마르파의 모습, 평생 구박만하던 롯실드에게 톱(바이올린)을 멋없이 퉁명스럽게 내밀던 손. 무대 위에서 행해진 이 모든 야코프의 행동들과 그와 대비되었던 주변 사람들의 행동들은 그 자체가 극의 주제가 된다.
<검은 수사>에서 코브린 역할을 맡은 세르게이 마카베츠키(С. Маковецкий, 1958- )는 바흐탄고프 극장(Академический театр им. Е.Вахтангов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로, 그는 신사적이지만 유약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물론 마카베츠키의 이 이미지는 그동안 그가 맡아왔던 무대 위의 역할사가 부여한 것이다. <검은 수사>이후에 공연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트리고린과 <바냐 외삼촌>에서 보이니츠키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 무대에서 중년의 고민과 갈등을 풀어내는 대표적인 배우로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세르게이 마카베츠키가 연기한 코브린은 마치 파우스트처럼 학문에 대한 연구와 저술에 일생을 바친 학자로, 그는 자신을 후원해주는 후원자가 살고 있는 마을로 휴양차 내려온다. 그는 이미 이러한 학문적 열정에 지쳐 있다. 긴카스의 무대에서 코브린의 정신적 피로감은 육체적인 지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소설과는 다르게 페소츠키의 능금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정열이 쇠락한 육체와 정신의 상징인 것이다. 그의 사그라든 열정과 정신적인 피로감은 독특한 대사법에서도 나타난다. 코브린은 능금정원에 대한 예찬도, 검은 수사를 만난 후에 들뜬 삶의 정열도 아주 건조하게 발설한다. 마카베츠키의 역할사에서 드러나는 ‘젠틀하고 유약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는 정신의 피로감과 육체적 지침으로 나타나는 불혹의 시간에 대한 일종의 전형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구로프와 안나의 역할을 맡은 이고리 고르딘(И. Гордин, 1965- )과 율랴 스베자코바(Ю. Свежакова, 1971- )는 긴카스 극장의 주역 배우들이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작품 속에서 결혼한 사이거나 사랑하는 사이인 한 쌍의 남녀로 자주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 오스트로프스키의 <뇌우(Гроза)>일 것이다. 고르딘은 티혼(Тихон)을 스베자코바는 카테리나(Катерина) 역할을 맡았는데, 둘은 티혼의 어머니 카바노바(М. Кабанова)로 대변되는 보수적인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젊은 남녀들이었다. <뇌우>에서 비극적인 두 남녀의 최후는 고스란히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안나와 구로프 속에 투영되었다. 관객들은 안나와 구로프의 모습 속에서 <뇌우>의 티혼과 카테리나의 비극적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두 배우가 이미 다른 무대에서 만들어 놓은 역할의 이미지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삭막한 도시 속의 퇴락한 여관에서 느끼는 삶의 잔혹한 실체와 사랑의 비극적인 미래는 전작인 <뇌우>로 연결되며 더욱 극대화 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일종의 삶의 파노라마라는 시선에서, 긴카스는 무대와 배우들의 교차사용을 통해서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도 하였다. 먼저 체호프 삼부작에서 배우들은 그 역할들이 교차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안나는 <검은 수사>에서 타냐 역할을, <검은 수사>에서 페소츠키는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의 역할을, <검은 수사>의 검은 수사는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도 비현실적이고 미스터리한 인물로서의 롯실드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배우들의 역할 중복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삼부작 전체를 관통해 바라보면, 그들의 역할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검은 수사>에서 코브린이 망가트린 정원의 주인인 페소츠키는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아내의 죽음 이후 삶의 잔혹한 실체를 깨닫는,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 늙음으로 다시 등장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사랑에 울먹였던 안나는 <검은 수사>에서 허위관념에 사로잡힌 남편에 의해 절망하고 고통 받는 또 다른 여성의 이미지로서 다시 등장한다. <검은 수사>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미스터리한 실체인 검은 수사는 <롯실드의 바이올린>에서 야코프가 넘긴 바이올린을 마지막으로 연주하며 체호프 삼부작을 모두 우화적으로 마무리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서는 얄타의 해변에 배 한척이 떠 있다. 그들은 멀리 므튜스 대극장 무대에 현현된 푸른빛 가득한 얄타 해변의 낭만성을 더한다. 긴카스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마지막 3부작인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무대가 므튜스 대극장 무대 위에 펼쳐지면, 장의사 롯실드가 만들어 아직 팔지 못한 관구들 사이에서 그 얄타의 낭만으로서의 배 한척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이 배 한 척은 단순하게 체호프 단편 삼부작이 소위 인간 삶의 파노라마로 연속되기를 원한 긴카스의 연출적 제스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배 한척을 체호프 단편 삼부작의 전체 속에서 조망할 때, 그 의미는 전진한다. 긴카스는 장의사 야코프가 만든 관구들 사이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이 배 한 척으로 체호프의 잔혹한 삶에 대한 시선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화적 지혜의 소산으로서의 체호프의 단편소설, 긴카스에 있어 이것은 체호프의 우화가 전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를 무대 위에서 극명하게 도출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제 긴카스는 체호프를 통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 얄타의 낭만과 안나와 구로프의 젊음, 청춘, 속세의 사랑의 종막은 결국 어디인가? 도대체 인간의 삶이란 정녕 무엇인가? 그들이 삶 속에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을 위로해 줄 것인가?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의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이 삶에 대한 정의처럼, 그럼에도 삶은 아름다운 것인가?
사실, ‘삶은 아름답다’는 정의는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 단편 삼부작에는 해당될 수 없는 말이다. 살펴본바와 같이, 긴카스가 무대로 불러들인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삶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 받다 죽어간 외로운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긴카스는 ‘삶은 아름다워’라는 말 뒤에 ‘체호프에 의하면’이라 덧붙였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삶’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극적 아름다움이란, 인간이 자신의 앞에 죽음과 같은 공포가 존재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듯이, 체호프는 인간이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절망과 고통을 통한 깨달음의 능동적인 과정 자체를 아름답다고 한 것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긴카스의 무대는 이러한 능동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무대 위에서 극화하여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체호프가 개별적 인간이 자기 성찰과 자아각성을 통해 자기 전환을 이룩할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과 세계의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고 믿었다면, 긴카스에게 그것은 우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의 구로프와 안나였으며, <검은 수사>의 코브린이었고, <롯실드의 바이올린>의 야코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삶의 잔혹한 실체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성이라는 관념적인 주제를 드러내는 체호프의 우화적 인물에 다름 아니다.
15)이형식 외, 『문학텍스트에서 영화텍스트로』, 동인, 2004, pp.15-28. 16)서상범,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그것의 영상화에 대한 비교 연구」, 『동북아문화연구』 제21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p.613. 17)체호프의 단편소설에 대한 직접 인용(“ ”)은 А. П. ЧЕХОВ,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тридцати томах, Издание Института мировой литературы имени А. М. Горького Академии Наук СССР, Москва, 1974. / 안톤 체호프, 강명수 옮김, 『안톤체호프 선집』, 범우사, 2005. / 안톤 체호프, 오종우 옮김, 『안톤 체호프 선집』, 열린책들, 2004. 를 참조 하였다. 이하, 단편 소설 <롯실드의 바이올린>은 강명수 번역본의 쪽수를, <검은 수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은 오종우 번역본의 쪽수만을 표기한다. 18)이하, 긴카스 연출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 공연대본은 러시아어 공연텍스트와 동영상 등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힌다. 19)А. Соломонов, Распилили скрипку, Известия, 06.03.2004. 20)위의 책. 21)연극평론가 디나 고데르는 긴카스의 <롯실드와 바이올린>에서 소설의 무대화를 위한 연 출가 긴카스만의 특별한 대화구성 방식의 선명한 예로 위의 마르파와 야코프 그리고 보조 간호사의 대화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Д. Годер, Город гробо, www.russ.ru, 09.03.2004. 22)Г. Заславский, Скрипка Гинкаса, НГ, 24.03.2004. 23)О. Егошина, Смертельная музыка, Новые известия, 10.03.2004. 24)존 프리드만, 최영주 옮김, 「러시아 연극은 심심풀이가 아니다. 다섯 개의 독백과 하나의 대화2」까마 긴까스와의 인터뷰」, 『한국연극』 10월호, 한국연극협회, 2006, p.114. 25)“긴카스가 작업하는 모스크바 청년 극장의 예술감독은 그의 아내이자 러시아의 대표적인 여성연출가인 겐리에타 이노프스카야(Г. Яновская, 1940- )이다. 긴카스는 친절한 예술감독의 두둑한 지원 아래 자유롭게 실험할 수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연출가다. 긴카스가 므튜스의 ‘외진’ 공간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시리즈를 무대화 할 수 있었던 것도 친절한 예술감독이 아닌 다음에야 극장 측에서 볼 때는 상당히 불편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관객의 출입이며, 조명과 음향 셋업을 위해서는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긴카스가 므튜스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위해 활용하는 공간은 무대가 아니다. 특이하게도 그것은 ‘방’이다. 긴카스의 도스토예프스키 시리즈 중의 <죄를 연기함>은 극장의 오래된 창고 같은 곳을 하얀 페인트로 칠하고, 아직 페인트의 휘발유 냄새가 가시지 않은 습기 찬곳에서 공연되었다. 그곳은 마치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고 층계를 내려가던 위험천만한 순간에 맡았던 냄새와, 살인 후 다시 들렀던 노파의 집에서 핏자국 위에 칠해진 선명한 페인트 냄새를 묘하게 연상시켰다. 또 한 편의 도스토예프스키 시리즈인 <'죄'의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에서 긴카스는 이제 뒤채에서 극장의 2층에 위치한 조그마한 ‘방’으로 공간이동을 한다. 마르멜라도프의 아내이자, 가여운 쏘냐의 어머니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2시간여의 독백을 들어야하는 공간이다. 커다란 창문은 자연채광을 가능하게 하고, 이곳에서도 긴카스는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페인트로 무대를 꾸몄다. 보다시피, ‘방’에서 긴카스는 편안한 방을 없애고, 수많은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봐주길 기대할 법도 한 연출의 염원도 포기했다. 대신 그가 무대에 불러들이고자 하는 인물들을 이‘방’속에 가두고 몇몇 선택된 사람들 앞에만 내놓았다. (...) 긴카스의 ‘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래서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오고, 관객들은 경험은 하지만 판단 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내버려져있다.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부를 하면서 생성되는 관객들의 연극에 대한 간접체험이나 공명같은 것을 긴카스는 애초부터 차단하고 시작한 것이다. 긴카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한 방법은 이랬다. 마치 손톱만큼의 안타까운 마음도 없이 마르멜라도프의 추도식에 모인 페테르부르그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전정옥, 「친절한 부인씨, MTYUS극장의 카마 긴카스와 겐리에타 이노프스카야」, 『한국연극』 10월호, 한국연극협회, 2006, pp.119-120. 26)Р. Должанский, Чехова вогнали в гроб, Коммерсант, 11.03.2004. 27)Т. Шах-Азизова, … И бездны мрачной на краю…, Экран и сцена, 01.10.1999 28)О. Егошина, Смертельная музыка, Новые известия, 10.03.2004. 29)Р. Должанский, Чехова вогнали в гроб, Коммерсант, 11.03.2004. 30)안톤 체호프, 오종우 옮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2004, p.227. 31)오종우, 「안톤 체호프와 문학의 진실」,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Vol.14, 한국러시아어문학회, 2003, pp.157-158. 32)존 프리드만, 최영주 옮김, 「러시아 연극은 심심풀이가 아니다. 다섯 개의 독백과 하나의 대화2」까마 긴까스와의 인터뷰」, 월간 『한국연극』 10월호, 한국연극협회, 2006, p.111. 33)강명수, 「체호프의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 나타난 ‘자아의 양상'」, 『노어노문학』 제17권 2호, 노어노문학회, 2005, p.107. 34)위의 책, p.83 35)그의 또 다른 체호프 작품에는 에이문타스(Э. Някрошюс, 1952- )가 연출한 <벚나무 동산>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젊은 대학생 페차 역할을 맡았다. 36)“체호프 작품에 있어 객관적인 외양과 성격의 묘사는 체호프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다. 체호프의 보이는 것만 믿었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이고 외양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체호프 주인공의 외향은 중요하다.” 오종우, 「안톤 체호프와 문학의 진실」,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Vol.14, 한국러시아어문학회, 2003, pp.67-68. 37)위의 책, pp.62-63.
긴카스가 무대화한 체호프 단편 삼부작은 <롯실드의 바이올린>을 통해 완벽한 ‘우화’로 막을 내린다. 그것은 우화적 지혜의 수준도 아니며, 우화적 상상력의 수준도 아닌 그 자체가 ‘우화’이다. 더군다나 이 우화 속에서 체호프의 인물은 머뭇거리는 자, 깨닫는 자로서의 ‘비극적인 영웅’의 지점에까지 이른다.
어느 날 야코프의 아내 마르파는 열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머리에 붕대 한번 거머리 한 번 붙여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무뚝뚝하고 심술궂은 남편이었던 야코프는 아내 마르파를 “예의 바르게, 아주 싼값으로 누구에게도 서운치 않게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기 시작한다. 여기서 물질적 이익과 손실만을 생각하며 달려온 야코프의 자아의 문제는 “나와 너의 문제로 환치”38)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용적 담론의 일반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화성이 확연히 감지된다.
야코프의 깨달음을 통해 전해지는 주제는 우화 속에서의 오직 하나로 일반화된 관념적인 주제처럼, 유일한 ‘이것’뿐이다.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야코프의 깨달음이 환치하는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주제는 우화의 해석적 담론과 실용적 담론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야코프의 깨달음 그 자체이다. “삶은 값없이, 아무런 만족도 없이, 그저 헛되이 사라져 버렸다…… 어째서 어떤 이유로 좀 전에 유태인을 놀라게 하고 모욕했는가? 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생활을 방해하는가? 이것 때문에 벌어진 손실은 어떠한가? 참으로 무서운 손실이다. 만일 적의와 악의만 없었던들, 사람들은 서로에게 큰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다.”
결국, ‘빵’과 ‘일상’이나 다름없었던 타인의 죽음이 야코프에게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로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고통’의 대상으로 찾아온 것이다. 체호프 주인공들에게서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후회’를, “인생은 어떠한 이익도 없이 지나가고, 쓸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절망을, 마르파의 죽음 후 야코프에게 들을 수 있음은 지극히 우화적이며, 또한 당연히 체호프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긴카스는 <롯실드 바이올린>의 마지막 이 우화적인 장면을 위해, 야코프의 바이올린을 그가 평생 동안 죽을 사람이 들어갈 관을 짰던 ‘톱’으로 바꾸었다. 롯실드는 선물 받은 바이올린을 들고 마치 항구처럼 정박해 있는 관들 중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톱(바이올린)을 켠다. 마치 샤갈의 그림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것은 깨달은 자에 대한 극명한 이미지로서 한 폭의 우화적 정취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위대한 텍스트를 경험한다는 것, 인간이 연극이 주는 감동의 여운을 안고 객석을 떠난다는 것은 연극만이 주는 일종의 ‘성찰’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과 여운은 그 삶이 아무리 잔혹했다고 할지라도, 부박한 삶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위로한다. 이러한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고 자주 오지 않으며, 만났다면 그것 또한 무대와 관객의 시절인연이며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긴카스의 체호프 단편 삼부작 <삶은 아름다워, 체호프에 의하면!>은 이러한 시절인연으로 새천년을 맞은 러시아 현대 연극 지형의 명징한 좌표이다.
38)강명수, 「체호프의 주인공의 (내면) 세계에 나타난 ‘자아의 양상'」, 『노어노문학』 제17권 2호, 노어노문학회, 2005,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