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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놀이로서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 Le theatre comme jeu―le cas d’En attendant Godot
  • 비영리 CC BY-NC
ABSTRACT
놀이로서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

En attendant Godot de S. Beckett est considéré comme théâtre d’absurde ou anti-théâtre représentatif. Dans ce théâtre, le plot et le thème ne sont pas clairs et le déroulement de l’histoire est ambigu. Le coq-à-l'âne de deux personnages, deux passants étrangers et le Garçon qui parle de Godot font un drame. Il n’y a pas de commencement, ni déroulement, ni fin, mais il y a seulement le devoir d’attendre quelqu’un inconnu. La présentation dramatique que les personnages montrent est ressemblante au jeu d’enfants. L’action des héros est presque proche celle d’enfants. Conversations d’insanité, farces, mises en boîte, et pertes de la mémoire dans cette pièce sont-elles des caractéristiques du jeu?

Si nous voulons lire En attendant Godot par la notion du jeu, nous devons comprendre exactement la notion du jeu. Le jeu qui est considéré traditionnellement comme négatif depuis la philosophie de Platon, s'illumine de nouveau dans le domaine de l’esthétique chez Kant. Alors, en saisissant une signification philosophique et culturelle du jeu de notre temp, nous allons le mettre pour l'instrument de l’analyse d’En attendant Godot. Quand on regarde En attendant Godot par l’angle du jeu, nous pouvons élargir l’horison du théâtre d’absurde, comprendre à neuf des actions absurdes des personnages et le sens de Godot.

Deux hypothèses sont possibles, si nous appréhendons cette pièce absurde dans le point de vue du jeu. Premièrement le théâtre d’absurde signifie le théâtre anti-aristotélicien. Ce théâtre comme un rite pour le culte dionysiaque, vise au celui original composé par la désordre et l'anti-règle. Deuxièmement, il signifie l’anti-raison et l’anti-science. Selon Huizinga, ce théâtre s'oppose à l’idée bourgoise et au théâtre réaliste.

L’adulte qui joue comme un enfant est un être d’absurde. Vladimir et Estragon sont des personnes qui incarnent l’absurdité. L’homme absurde est alors tragique? ou bien négatif? D’après Lanson, ce n’est pas toujours comme ça. Par le plus grand des hasards, l’homme absurde est positif et un possesseur de la conscience raisonnable. Par exemple, Camus montre l’homme absurde en dessinant des confrontations entre le monde irraisonable et la raison de l’être humain dans ses oeuvres. Puis il y montre un modèle de l’homme absurde qui veut découvrir la bonheur à la fois en confirmant une condition de l’homme et en sentant avec finesse la rupture entre le soi et le monde. Chez Camus, une seule chose que l’homme peut faire se révolte contre cette absurdité du monde.

Qui est Godot? C’est la question la plus répétée dans la pièce de Beckett. Mais avant cette question, nous devons poser d’autre question; ne pas savoir l’objet d’attente, ne pas savoir la fin d’attente et seulement le fait d’attente est clair, qu’est ce que cela veut dire? Si nous considérons En attendant Godot comme un jeu, cette question peut se dénouer facilement. D’ailleurs, nous avons besoins de poser des questions sur le sujet, le moyen et le but du jeu. Dans la mesure où la scène d’En attendant Godot est une présentation, non pas une représentation, nous devons mettre les personnages presents sur scène au point, au lieu de la personne imaginaire(Godot). Par là, le drame et le jeu étendu par les deux clowns peut devenir notre réalité.

KEYWORD
놀이 , 부조리연극 , <고도를 기다리며> , 하위징아 , 니체 , 호모 루덴스
  • 1. 들어가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에서 등장한 아방가르드 연극 및 실험연극은 기존 연극에 반기를 들면서 종국에는 반(反)연극(anti-théâtre)을 선언하기에 이른다.1) 연극이 연극이기를 거부하면서 연극으로 호소하겠다는 발상은 제 살을 파먹는 뼈아픈 고백임에 분명하다. 반연극이란 말 그대로 기존의 연극 전반을 해체시키고 이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의미다. 기존의 연극이란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정의된 비극의 개념을 골격으로 하는 연극이다. 현재의 시공간에 복무해야 하는 연극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규칙이 있으며, 연극이 소속되어 있는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연극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획된 공간이 있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을 설정해야 하며,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관객 앞에서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엄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다. 연극이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사상적 흐름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연극의 규칙이 지배 권력의 지배논리와 모종의 내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기도 했다. 연극이 찬란히 꽃 피웠던 고대 그리스 시대,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17세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의 통치이념이 당대의 연극의 주제나 형태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2)

    따라서 반연극은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사회적 흐름과의 단절을 꾀하면서 현실을 비추는 재현(representation) 예술이기를 포기한 연극이다. 반연극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는 현시(presentation)를 목표로 한다. 익숙한 삶의 틀을 벗어나거나 일상에서 탈피한 낯선 미학을 추구하는 연극인 것이다. 미메시스로써 현실을 재현하는 연극이 아닌 새로운 연극(반연극)에서 장엄한 영웅은 사라지고 아이의 놀이나 꿈처럼 비논리적이고 몽환적인 이상야릇한 무대가 그려진다. 놀이로서의 연극은 ‘세상은 연극이다’라기보다는 ‘연극은 놀이다’고 고통스럽게 외치는 뭉크(E. Munch)의 인물과 닮았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삶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며,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반연극은 습관적으로 망각했던 죽음에 맞서고 새로운 발견의 장으로 안내하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3)

    베케트(S.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대표적인 부조리연극4)이자 반연극으로 간주된다. 플롯도 분명하지 않고 이야기 전개도 모호하며 주제도 뚜렷하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 존재하는 두 인물의 횡설수설, 낯선 두 통행인 그리고 고도의 존재를 언급하는 소년이 엮어내는 에피소드가 극을 형성하고 있다. 발단이나 클라이맥스도 없고 불분명한 존재를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회색빛 무대에 가득하다. 사실 그들이 부조리하게 엮어내는 극적 현시는 아이들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 그곳이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대가 현실의 재현이라면 포조가 주머니에 넣었던 물건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다.5) 하루 사이에 나뭇잎에 피어날 리도 없다. 또한 인물의 행동도 어린아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주고받기, 장난치기, 놀려대기, 기억상실은 놀이의 단면들이다. 어른들의 유아적인 놀이, 그것이야말로 부조리인 것이다.

    만일 <고도>를 놀이의 개념으로 읽고자 한다면 놀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철학에서 플라톤에 의해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놀이는 칸트(Kant)에 의해 미학 영역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후 가다머(Gadamer), 니체(Nietzsche), 하이데거에 의해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개진된다. “놀이의 철학적 성찰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는 칸트나 쉴러(Schiller) 및 낭만주의자들처럼 놀이를 인간적 관점(인간의 놀이)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둘째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니체,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 관점(세계놀이, 존재놀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6) 한편 놀이를 문화와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위징아(J. Huizinga)는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문화로부터 놀이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놀이로부터 문화가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 그는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 간주하고 놀이를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근간으로 바라본다. “진정한 문명은 특정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 할 수 없다”8)는 것이다.

    본 논문은 놀이의 철학적·문화적 의의를 밝히고 놀이의 특징과 가치를 개진함과 동시에 이를 <고도>에 적용하여 분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고도>를 놀이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부조리연극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며, 인물들의 극적이고 부조리한 행위 및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인물의 의미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1)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E. Ionesco)가 1950년 연극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를 발표하면서 ‘반(反)-극작품(anti-pièce)’이라는 부제를 붙여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연극에 반하는 연극정신은 대략 극 행동이 도입, 전개, 갈등, 클라이맥스, 대단원으로 전개되는 이상적인 플롯을 지닌 기존 연극을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인들은 이성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데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이성에 기초를 둔 모든 것을 해체시키려고 시도한다. 초현실주의나 실존주의 역시 그러한 흐름의 결과이며 부조리 연극의 성격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2)다른 예술에 비해 연극은 보수적이며 권력과 밀접하다는 경향이 있다.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가 절대군주 곁에서 신임을 받았던 것도 이러한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3)이 점에서 연극은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라는 아로토(A. Artaud)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예술 작품은 재현이 아니며 예술가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이념처럼 예술 작품은 하나의 현실로서 스스로 말하는 존재인 것이다.  4)부조리 연극은 카뮈(A. Camus)의 부조리 철학을 수용하고 나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거부한다. 객관적이고 전통적 의미의 극적 세계를 무너뜨리고 의미나 목적도 없는 세계를 제시하는 반연극 성향의 부조리 연극은 등장인물이나 그들 행위에 정당한 동기 부여가 없으며 인물들의 무대 언어도 비논리적이다. 아울러 반연극에는 동작조차도 없으며 인물들도 몰개성의 성향을 지니고 무의미한 대사가 지루하게 반복된다. 카뮈가 고뇌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모습이야말로 부조리한 삶이고 부조리 연극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부조리 연극은 전쟁을 겪는 동안 유럽의 지식층이 느꼈던 불안감, 가치관과 신앙의 상실, 고독과 소외감, 인간 상호의 커뮤니케이션의 불가능, 개성의 상실이라는 시대적 비극의 산물이다.  5)노예를 부리는 포조는 자본주의 대리인이다. 주머니 속의 물건은 소유물이자 자본이다. 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까닭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물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이다.  6)김재철, 「E. 핑크의 놀이존재론(I)—실존범주로서의 놀이」, 『존재론 연구』 32집, 한국하이데거학회, 2013, 195쪽.  7)하위징아, 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연암서가, 2013, 34쪽.  8)위의 책, 396쪽.

    2. 철학과 놀이

    현대는 놀이의 시대로 규정되고 있으며, 놀이는 여러 분야에서 다각도로 연구되고 있다. “문화인류학적—생물학적 놀이연구(하위징아, 뷔텐다이크), 교육학적 놀이연구(쇼이에를, 피아제), 사회학적 놀이연구(카이와)를 들 수 있으며, 그 이외에도 잉여에너지이론, 휴식이론, 연습이론, 반복이론, 치료를 위한 정신분석이론, 인지이론, 상징적 구성이론, 행동개발이론, 각성이론, 의사소통이론 등과 같이 놀이현상을 관련분야에 응용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9) 한 때 놀이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 적도 있었지만, 현대인들은 노동10)에서 해방될 수록 놀이를 찾아 유목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본가는 돈을 벌 목적으로 디즈니랜드와 같은 거대한 놀이동산을 만들기도 하고, 정치인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놀이라는 명목 하에 도박장소를 공공연히 허용하기도 한다. 보통 놀이는 아이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 놀이를 좋아하는 어른은 철이 덜든 것으로 폄하되었고, 사회적으로 무용(無用)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경우도 있었다. 놀이는 “비-진지한 것, 비-의무적인 것, 비-본래적인 것”으로서 부정성(“비—”)을 가진 경계에서 규정되며, “분방하고 한가로운 것”으로서 “노동”, “삶의 진지함”과의 대립에서 파악되었다.11) 그러나 놀이가 인간에 의해 실천될 때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한 쉴러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놀이는 예로부터 인간에게 있어 근원적인 것으로 철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쉴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하며, 놀이하는 한에서만 완전히 인간이다.”12)

       2.1. 칸트와 놀이

    전통철학에서 놀이(play, spiel, jeu)는 심심풀이나 오락으로 간주하였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특수성, 즉흥성, 상황성, 일회성 등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배척 되었다. 특히 예술가의 창작행위를 이데아의 모상을 다시 모방하는 헛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놀이(paidia)로 표현한 플라톤 이래로 놀이는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13) 철학사에서 경박하고 유아적인 것이며 소극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던 놀이를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그 활동 방식을 형성하는 근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칸트다.14)

    칸트의 놀이 개념은 예술의 학문인 미학과 연결되어 있다.15) 그는 예술의 목적이 진리 추구가 아니라 감각적 쾌감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의 쾌를 제공하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롭고 자유로운 산물이다. 그런데 예술적 상상력은 결코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상상력과 개념이 작동하는 지성이 어떻게 조화로운 일치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부각된다. 이의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놀이다. “상상력은 법칙을 전제하지 않은 채, 자유로이 활동하며,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은 우연히 오성과 일치하고 조화를 일구어낸다. 이것이 상상력과 오성 사이의 필연적인 기계적인 일치와 구분되는, 양자 사이의 자유로운 심미적 일치다. 이러한 일치를 칸트는—기계적 작업과 구분하여—놀이라 부른다. 그것은 지성과 상상력 사이의 자유로운 그러나 조화로운 놀이다.”16)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일치를 놀이라고 할 때, 놀이는 우연적이며, 자체로 어떠한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칸트의 놀이 개념이 아름다움의 취향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놀이는 아이들 놀이에서 발견되는 우연성, 비–법칙, 비–목적성, 동시에 놀이 자체에 법칙과 목적을 담고 있는 자유로운 놀이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칸트에게 놀이란 우연적이며 특수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는 활동이면서도 그 속에서 법칙과 목적을 담아내는 활동이다.”17) 이러한 놀이의 성격은 우연적이며 아무런 목적이 없는 듯한 <고도>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놀이적 행위, 그렇지만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당위성을 간직한 모순적 행위를 설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칸트의 놀이 성격은 미적 판단의 보편화 가능성의 물음에 기여하는 주관의 장치로써 근대의 주관성 철학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18)이며, 본격적으로 존재적 물음과 결부된 놀이의 개념은 니체 철학에서 발현된다.

       2.2. 니체와 놀이

    놀이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담론은 니체로부터 시작된다. 놀이에 있어 니체가 주목한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52』에서 삶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놀이하는 아이’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삶은 우주의 변화무쌍한 놀이판에 던져져 함께 놀이하는 것으로 비유된다.”19)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세계의 유일한 실재는 생성이고, 생성은 언제나 비영속성의 모습을 띤다. 생성과 대립자의 투쟁의 세계는 로고스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놀이의 세계이다.”20)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본 것은 순진무구, 창조가 아닌 파괴, 선과 악을 떠난 신적인 놀이가 세계라는 개념이다. 니체가 보기에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정신으로부터 탄생했다. 조형예술에 비해 음악은 추상적이며 시적이며 놀이의 특성을 지닌다. “음악은 (…) 어떻게 모든 것이 놀이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21) 음악정신과 디오니소스의 비극정신은 불협화음마저도 긍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핵심을 신화와 합창의 절묘한 만남으로 파악한다. 신화는 인간 삶의 부조리를 말해주고, 합창은 삶의 부조리와 추함을 불협화음을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다. 관객은 무대 위의 합창단의 합창을 통해 삶의 부조리를 듣는 동시에 삶의 모순을 이겨내는 예술적 효과를 얻는다.”22)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삶의 부조리와 추함의 불협화음이 승화되어 예술적 효과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언급한 음악정신 즉 추상, 시, 놀이 나아가 삶의 부조리, 파괴, 추함, 불협화음은 베케트 극작품의 커다란 특징이기도 하다. <고도>의 인물들이 추하고 부조리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극에서 나타나는 비—구체성, 비—체계성, 비—전개성은 지극히 추상적인 그림이며,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인 대사의 단편들은 시적 형식을 띠고 있고, 인물들의 유아적 행동은 놀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만일 니체의 언급대로 비극의 불협화음이 삶의 모순을 극복하고 승화에 이르도록 한다면 <고도>의 부조리 역시 삶 자체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 재창조된 삶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도>의 반연극성은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충격 가하기나 파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에 있어 “놀이는 우주의 예술적 놀이, 세계놀이이다. 그는 세계는 신적인 놀이이며, 선악의 저편에 있다면 모든 행위는 단지 일종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 철학함에도 그것에 포함된다. (…) 나에게 모든 것은 놀이다”고 말한다.”23)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이 놀이라는 이념을 <고도>에게 적용시킨다면, 등장인물들은 존재 자체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며 우발적 사건 속에서 주어진 길을 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들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면 부조리한 것이고 놀이라면 놀이인 것이다.

    한편, 니체는 자신의 주요 사상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초인’도 놀이로 풀어낸다. 니체에게 있어 세계란 힘의 의지가 놀이로 펼쳐지는 곳이다. “그대들은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 이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 모순의 놀이로부터 조화의 아름다움으로 되돌아오고, (…) 이러한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그리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24) ‘스스로에서부터 돌아가는 바퀴’인 영원회귀도 놀이다. “영원회귀란 이미 한 번 일어났던 바의 모든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미래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어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25) 니체의 영원회귀는 <고도>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되풀이와 유사하다. 인물들의 대사, 동작, 기다림은 영원히 돌고 돌 것이며, 나뭇잎은 언제든지 다시 피어날 것이다. <고도>의 놀이세계는 “새로운 세계구상 (…) 이미 무한히 자주 반복되었고 자신의 놀이를 무한히 즐기는 순환 운동으로서의 세계”26)인 것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초인이 되기 위한 저 유명한 세 단계의 비유 역시 놀이에 있어 매우 시사적이다. 첫 단계는 낙타의 정신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뜨거운 사막을 불평 없이 걷는 낙타는 순종적이며 수동적이다. 전통적 세계관에 복종하는 낙타의 정신은 ‘너는 해야만 한다’로 요약된다. 낙타의 다음 단계는 자율적이고 공격적인 사자다. ‘나는 원한다’의 정신을 지닌 사자는 용감하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자유롭지만 부정적이다. 결국 사자는 아이가 된다. 아이는 해맑고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아이는 순진무구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에서부터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다. 창조의 놀이를 위한 긍정, 나의 형제여, 창조의 놀이는 신성한 긍정을 필요로 한다.”27) 아이의 특성을 <고도>의 인물에게 적용시키면 ‘순진무구’와 ‘망각’을 떠올릴 수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아이처럼 순진하다. 사실 포조도 얼마나 순진무구한가. 또한 에스트라공의 망각은 너무나 빈번하다.

    망각은 수동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제이며 놀이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망각은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각은 힘과 강건한 건강을 의미한다. 아이의 정신은 세계의 목적과 원인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놀이할 수 있는 것이다.”29) 아이가 상상적 놀이로 다른 세계에 진입하고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 것은 순수한 망각 덕택이다.30) 연극의 관점에서도 배우가 자기를 완전히 망각할 때 비로소 인물에 몰두할 수 있고 진정한 연극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이처럼 망각과 순진무구는 새로움과 창조의 원천이 된다. 창조적 놀이는 망각과 파괴 속에서 생겨난다. 망각과 순진무구를 기반으로 하는 창조, 파괴 그리고 다시 새로운 창조는 아이와 놀이의 특징이자 <고도>의 특징이다. 힘에의 의지를 지니고 파괴와 창조를 일삼는 아이의 놀이는 “영원히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디오니소스적 놀이”31)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와 파괴의 순환적 놀이는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가? 니체에 따르면 “놀이하는 아이의 정신은 최종적으로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의미한다.”32) 따라서 놀이로부터 생겨난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의 시선으로 <고도>를 바라본다면, 부조리 연극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즉 부조리 연극은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려는 인간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삶에 대한 긍정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고도>의 인물들이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것 역시 긍정의 측면이다. 애초에 카뮈가 언급한 부조리한 인간은 삶을 부정하는 비관적인 인물이 아니다. 랑송(Lanson)에 따르면 부조리한 인간(l'homme absurde)이란 “실존은 이유도 종극 목적도 없으므로 부조리하다고 단언하고,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l'homme conscient que tout est absurde)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왜 사는가’하고 감히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질문에서 이해할 만한 답이 끝내 얻어질 수 없음을 확인한 부조리한 인간은 고뇌의 감정을 느낀 뒤, 희망 없는 각성과 무제한한 자유에 도취됨을 느낀다. 이러한 도취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조리한 인간은 우리 운명의 불합리에 대해서 끊임없는 반항 상태에 자신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완전히 자주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아무 것도 건설한다는 희망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각자와 더불어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33) 해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반항을 일삼는 부조리한 인간은 놀이하는 정신의 소유자, 어린아이의 모습과 참으로 유사하다.

    9)김재철, 「E. 핑크의 놀이존재론(II)-실존범주로서의 놀이」, 『존재론 연구』 32집, 한국하이데거학회, 2013, 34쪽.  10)놀이의 개념을 구체화할 때 대비되는 개념이 노동이다. 노동과 놀이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개미와 배짱이>다. 이 우화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놀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을 함에 있어 육체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노동에 노래를 첨부한 노동요가 있으며, <톰 소여의 모험>에서 주인공 톰 소여는 페인트칠이라는 노동을 놀이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예다. 놀이는 노동과 대립되며 진지함, 의무감, 도덕적이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놀이에는 “공상적인 상상의 나라와 텅 빈 가능성” 속에서 구속 없이 빈둥거리며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서 “사물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꿈과 유토피아로의 도피”로서 여겨진다.  11)김재철(I), 앞의 책, 199쪽.  12)위의 책, 203쪽.  13)정낙림, 「인식과 놀이—칸트의 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대동철학회 논문집』 제53집, 2010, 202쪽 참조.  14)최소인, 「놀이와 문화-칸트의 놀이 개념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성찰」, in 『고전해석학의 역사』, 철학과 현실사, 2002, 204쪽 참조.  15)칸트에게 있어 미는 유희(놀이)지만, 그 전에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미는 유용성이었으며,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했다. 다빈치에게 있어 예술은 과학이었고, 바움가르텐에게는 감성적 인식이었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휴머니스트, 2014, 248쪽 참조.  16)최소인, 앞의 책, 216쪽.  17)위의 책, 224쪽.  18)정낙림, 「놀이에 대한 철학적 연구, 니체의 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연구』 제14집, 한국니체학회, 2008, 170쪽 참조.  19)김재철(I), 앞의 책, 194쪽.  20)정낙림, 앞의 책, 164쪽.  21)위의 책, 173쪽.  22)놀이로써 디오니소스적 본능과 음악 정신으로부터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시학>의 비극 정신은 이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단일성과 엄격한 구조를 제시하고 있는 <시학>에서 규정하고 있는 비극의 개념은 불협화음의 음악정신과는 상당히 어긋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것은 협화음의 비극으로 더는 불협화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디오니소스 정신의 순수성마저 훼손시킨 정치적 의미의 비극, 더 이상 놀이가 될 수 없는 행사성의 비극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3)김재철(I), 앞의 책, 195쪽.  24)정낙림, 앞의 책, 181쪽.  25)위의 책, 182쪽 (Z; KSA4, 272f) 재인용.  26)위의 책, 182쪽 (N; KSA13, 376) 재인용.  27)위의 책, 180쪽.  28)앞으로 인용될 극작품의 쪽수는 오증자 역으로 1996년 정우사에서 발행된 극작품이다.  29)위의 책, 181쪽.  30)기존의 자기를 망각한다는 것,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예술치료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밖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시켜 방어로 일관했던 트라우마, 무의식 속에 억제되어 있던 불순물들을 안전한 느낌 속에서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31)정낙림, 앞의 책, 175쪽.  32)위의 책, 182쪽.  33)랑송, 정기수 역, 『불문학사』, 을유문화사, 1993, 384-385쪽.

    3. 문화와 놀이

    놀이하는 인간은 예술과 문화의 공간 속의 인간이며, 예술과 문화를 통해 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는 존재다.34) 사회학자 카이와(R. Caillois)는 삶에는 다양한 형태의 놀이가 있다고 언급한다. “사람들은 축구, 당구 또는 장기와 같은 경기와 게임을 하며 놀고, 로토, 복권 또는 도박과 같은 것에서 행운을 바라며 놀고, 사람들은 네로 또는 햄릿을 흉내 내는 연극을 하며 놀고, 놀이공원의 기구를 타고 빠른 순환 또는 낙하를 통해 주어지는 혼란과 광란의 상태를 즐기며 논다.” 그는 놀이를 “경쟁(agon), 우연(alea), 흉내(mimicry), 현기증(ilinx)의 네 범주로 분류”35)한다. 경쟁은 경기나 게임 놀이, 우연은 도박이나 주사위 던지기 놀이, 흉내는 연극 놀이, 현기증은 혼란과 광란의 놀이에서 생겨난다. 여하튼 카이와가 언급한 일상적 놀이는 다양하며 그 안에 ‘흉내’라는 연극적 특징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한편, 놀이의 특징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본 핑크(E. Fink) 역시, 놀이는 친근한 삶의 현장에서 매일 접할 수 있는 공동의 관계적 행위라고 언급한다. “놀이는 평소에 매일 수행하고 있는 행위로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이다. 또한 놀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세계의 사실”속에 있는 것이다. (…) 놀이함을 통해 우리는 아주 밀접하게 “공동적 인간과 사회적 접촉”을 하고 있으며 “공동적 인간의 지평”을 가진다. (…) 인간은 “놀이함 속에 살고” 있으며 놀이의 “주체”로 살아간다.”36) 일상의 놀이라는 점은 카이와의 놀이 개념과 비슷한데 핑크가 강조하는 것은 놀이의 공동체적 속성이다. 공동체의 집단성은 놀이와 연극의 공동분모인 것이다.

       3.1. 하위징아와 놀이

    하위징아가 보기에 19세기 이후 놀이가 본격적으로 배척된다. 19세기는 공리주의가 만연하고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37) 된 시대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득세와 생산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노동정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탓이다. “19세기의 실험과 분석과학, 철학,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 경제학 등 모든 것이 오로지 진지함만을 추구했다. 낭만주의의 최초의 훌륭한 자연스러운 황홀이 소진되면서 심지어 예술과 문학도 놀이와의 연관을 시시하게 여기며 포기하려 했다. 그리하여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기타 문학과 미술의 사상은 그 이전의 사상들과는 다르게 놀이 정신을 배척했다.”38) 이처럼 자본주의 시대가 보여준 놀이의 부정적 진단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방가르드 연극, 실험연극, 부조리연극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반항, 파괴, 무의미, 반이성의 성향을 보이는 이들 반연극적인 흐름은 하위징아의 관점에서 보면 놀이의 본래적 의미 회복을 위한 예술적 운동이 된다. 이렇게 볼 때 <고도>는 놀이적 연극으로써 놀이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놀이와 유리된 현대인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제시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위징아가 제시한 놀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39) 이 특징은 예술 특히 연극의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첫째,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등산은 유쾌한 놀이가 될 수 있지만 의무적인 산행 훈련은 결코 놀이가 아니다. 아이나 동물 새끼들이 장난치며 놀이를 하는 까닭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 속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놀이는 자발성의 여부로부터 노동과 구별된다. 자발적인 행위 속에서 놀이는 자유 자체가 된다. 놀이의 자발성은 창조적 예술의 자발성의 성격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연극배우의 창조적 연기 역시 자발성에 그 기초를 둔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다. 다시 말해 놀이는 생물적 활동에서 벗어난 것으로 물질적 이해와는 상관이 없으며 어떠한 생물적 이익도 제공하지 않는다. 즉 놀이가 배를 부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행위인 놀이는 생활필수품의 획득과는 다른 방식으로 집단의 안녕과 복지에 봉사한다. 생물적 활동에서 벗어난 무상성의 놀이는 연극과 같은 예술의 특징과 유사하다. 셋째, 놀이의 시간과 장소는 일상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놀이의 시공간이 일상과 구분된다는 것은 놀이의 시공간이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다. 시간의 차원에서 놀이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일단 시작하면 적절한 순간에 종료된다. 또한 반복도 시간의 특징이다. “놀이는 아무 때나 반복될 수 있다.”40) ‘반복’에 주목할 때 <고도>에서 나타나는 언어, 행동, 장면의 반복은 놀이의 시간적 특징이 될 수 있다. 공간의 제약에 대해 하위징아는 먼저 신성한 장소와 놀이터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언급한다. 하지만 경기장, 카드 테이블, 마법의 원, 사원, 무대, 스크린, 테니스 코트, 법정 등은 그 형태와 기능에 있어 모두가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이 놀이터는 일상의 세계 속에 자리하는 일시적인 세계이며, 놀이적 행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공간이다. 놀이의 특징적 공간에 ‘무대’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 공간도 놀이의 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넷째, 놀이의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한다.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놀이는 일상의 규칙에서는 벗어나지만 자체적인 규칙이 따로 있다는 의미다. 연극이 지니는 갖가지 규약, 관례는 놀이의 자체적 규칙에 해당할 것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특징을 다시 요약한다. 놀이는 “진지하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독립되어 있는 자유로운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 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물질적 이해와는 상관없는 행위이고 아무런 이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나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놀이터 내에서,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수행된다.”41) 이 놀이의 특징은 <고도>에 거의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인 황량한 무대는 일상과는 거리가 있으며, 시간 역시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예외적 시간이다. 인물들의 행동은 진지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놀이적 행동이다. 그들에게 규칙이나 의무가 있다면 무대를 떠날 수 없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뿐이다. 즉 무대는 놀이터이며, 그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나름의 놀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4)최소인, 앞의 책, 204쪽 참조.  35)김재철(I), 앞의 책, 197쪽.  36)위의 책, 197쪽.  37)하위징아, 앞의 책, 363쪽.  38)위의 책, 364쪽.  39)위의 책, 41-46쪽 참조.  40)위의 책, 45쪽.  41)위의 책, 46쪽.

    4. 놀이와 연극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놀이와 연극의 닮음 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놀이와 연극은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놀이와 연극은 실재이자 허구로써 양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놀이와 연극은 실존적 존재들이 가상의 세계를 펼치는 제3의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진지성에도 적용된다. 진지하지 않으면서 진지한 것이 놀이이자 연극인 것이다. 놀이와 연극은 규칙이 있지만 현실의 규칙과는 다르다. 이 외에도 놀이와 연극은 그 시원에 있어 동일한 영역을 갖고 있다. 고대로부터 전해온 축제나 제전, 의례를 놓고 볼 때,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놀이와 연극적 요소다. 하위징아는 고대의 축제 속에는 항상 놀이가 있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연극이 되었다고 본다. 각 나라의 언어를 보면 “드라마는 놀이로 불렸고 드라마 공연은 놀이를 하는 것으로 불렸다. (…) 비극과 희극 모두 놀이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테네의 희극은 디오니소스 신의 축제에서 벌어진 방탕한 축제행렬(komos)에서 나온 것이다.”42) 의례 역시 마찬가지다. 의례는 놀이이자 연극의 원류이다. “비극은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한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원래 신성한 연극 혹은 극화된 의례였다.”43) 놀이적 요소가 풍부한 의례는 드라마의 일종인 것이다. “성스러운 의례는 가짜 현실 혹은 외양의 실현 혹은 상징적·신비적 실현을 넘어선다. (…) 의례는 드로메논(dromenon)이라고 하는데 행동된 어떤 것, 하나의 행동, 혹은 행동을 의미한다. 그 행동을 실제로 재현한 것 혹은 그 행동의 구체적 내용이 드라마(drama)인데 무대 위에서 재연된 행동을 의미한다.”44)

    한편, 핑크는 놀이를 가리켜 “진지한 삶의 가상적 바꿔치기(scheinhafte Paraphrase)”45)라고 일컫는다. 사실 놀이가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었더라도 가상의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상상적, 환상적, 비현실적 세계가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핑크의 놀이세계는”46) 연극적 세계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일상을 현시하는 <고도>의 인물들은 호모 루덴스로서 가상적이고 부조리하고 희극적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기로 가득한 반복적인 연극적 놀이 가운데 어느 덧 삶의 본질과 실존이 드러날 것이다. “놀이는 인간 삶의 ‘주변현상’도 ‘우연적 현상’도 아니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인간적 현존재의 존재 구성 틀에 속하며 실존적인 근본현상’이다. 놀이는 인간에게서 그 본질이 파악될 수 있으며, 인간은 놀이 속에서 그 본질이 드러날 수 있다.”47) 놀이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파악된다는 핑크의 놀이세계의 개념은 놀이의 몸짓으로 삶을 성찰하려는 부조리연극의 세계와 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는 놀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4.1. <고도>에서의 놀이

    하위징아에 따르면 그리스의 비극 이래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연극사를 관통하고 있는 연극은 놀이의 개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연극은 전적으로 상상의 세계였다. 연극 무대는 ‘척하기’ 놀이가 빚어내는 상상력이 오롯이 빛나는 곳이었다.”48) 그러나 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낭만주의가 시들해지고 사실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자 연극은 놀이의 속성을 잃어 버렸다. 하위징아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문명은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고, 설령 놀이를 하는 척해도 그것은 가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49) 현대는 놀이의 상실시대며 현대인들은 가짜 놀이를 하는 거짓 호모 루덴스라는 것이다. 현대에 만연되고 있는 가짜 놀이를 언급하는 것은 진정한 놀이의 특성을 찾아 재발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들어 있다. 이 당위성을 인정한다면 기존의 연극에 저항하는 부조리 연극은 놀이의 원래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연극에 해당한다. 부조리연극이 장난처럼 유치해 보이고 사실을 비틀고 왜곡하며 비논리적이고 연극의 규칙과 관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놀이 회복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4.1.1. 놀이 추구

    놀이는 삶과 유리된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관계맺음을 촉진시키고 타인과의 만남을 원활하게 하며 친밀한 관계의 기회를 제공한다. 베케트의 인물들도 놀이를 추구하면서 대인관계와 만남을 촉진시킨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포조와 럭키는 언제나 짝으로 등장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대고 비난하면서 놀이를 한다.50) 그들이 벌이는 놀이는 핑크의 놀이 개념처럼 상대방의 존재를 상호 확인할 수 있게끔 하는 공동체적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인물들은 놀이를 하면서 떨어질 수 없는 상호불가분의 존재가 되고, 궁극적으로 고도와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이 점에서 <고도>의 1막과 2막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블라디미르 : 아니, 또 너를 만났구나! / 에스트라공 : 그래서! / 블라디미르 : 너를 다시 만나니 반갑구나. 아주 떠나 버린 줄 알았는데. / 에스트라공 : 나도 그래. / 블라디미르 : 우리가 다시 만날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 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1막, 15-16) “블라디미르 : “나는 반갑다”라고 해 봐. 에스트라공 :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 나두. 에스트라공 : 나두. 블라디미르 :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2막, 93)

    <고도>의 인물은 끊임없이 놀이를 추구한다. 그들은 시종여일 놀이의 틀 속에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언어놀이는 물론 신발과 모자, 무와 당근을 매개로 놀이를 하고 포조 역시 파이프와 스프레이와 시계51) 또는 럭키를 매개로 놀이를 한다. 포조가 의자에 앉기 위해 에스트라공과 벌이는 장면은 예식이자 놀이 자체다. “포조 : 다시 앉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앉을 수가 있다? / 에스트라공 : 거들어 드릴까요? / 포조 : 당신이 부탁을 한다면 혹시? / 에스트라공 : 뭐를요? / 포조 : 내게 다시 앉아달라고 말이오. / 에스트라공 : 그게 거들어 드리는 게 될까요? / 포조 : 그럴 것 같은데! / 에스트라공 : 좋습니다. 선생님. 부디 다시 앉으시지요. / 포조 :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사이. 낮은 소리로) 좀 더 간곡히 부탁을 해요. / 에스트라공 : 저,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십시오. 감기 드시겠습니다.”(57)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목을 매려는 것 또한 놀이의 일종이다. “블라디미르 : 그야 그렇지만 기다리는 동안 뭘 하지? 에스트라공 : 목이나 매고 말까?”(28)

    포조와 럭키의 지배적 관계도 놀이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의 소꿉놀이에서 권력욕망의 표현52)이 단골 메뉴인 것처럼, 럭키의 목에 밧줄을 메고 이를 끄는 포조의 행위는 주인—노예 놀이가 될 것이다. 네 명의 인물들이 한데 모였을 때는 다시 새로운 놀이가 시작되고, 갑작스런 소년의 등퇴장이나 문답식의 대화 역시 놀이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고도의 기다림 역시 일종의 놀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기다리는 기다림의 놀이 말이다.

    그런데 <고도>의 인물들은 진정으로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놀이로부터 삶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는가? 기다림 놀이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로인해 재미를 느꼈거나 행복감을 느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없고 쓸쓸하고 심심해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하위징아가 진단한 현대인처럼 놀이의 가치를 상실한 인물들로 보인다. 그들은 끈질기게 놀이를 추구하지만, 놀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놀이에서 미끄러지고 마는 현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4.1.2. 놀이에서 미끄러지기

    삶의 놀이에서 모두는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두 주인공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거나 아니면 탄원하는 자의 역할에 머물 뿐이다. 그만큼 그들은 진정한 놀이에서 멀어진 것이다. “에스트라공 : 그 일을 하는데 우리의 역할은 뭐냐 말이다. / 블라디미르 : 우리 역할이라니? / 에스트라공 : 생각을 해 보라구. / 블라디미르 : 우리의 역할이라? 그야 탄원자의 역할이지. / 에스트라공 : 그 정도야?”(31)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낯선 두 인물과 조우한다. 그들이 있는 곳이 길(route)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알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놀이다. 지나가던 두 인물이 제 길을 찾아 떠나자 남아 있던 인물들은 다시 놀이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그들의 놀이는 진정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블라디미르 : 덕분에 시간은 잘 보냈다. 에스트라공 : 시간이야 안 그래도 지나갔을 텐데 뭐. 블라디미르 : 그야 그렇지. 하지만 더 더뎠을 거다. 사이. 에스트라공 : 이제 뭘 한다? 블라디미르 : 글쎄 말이다.”(77)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잠시 지루함을 달랠 수는 있겠지만 둘 만이 남게 되자 어김없이 심심하고 지루하다. 진정한 놀이에 이르지 못한 그들은 실존적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비극적이며 부조리한 신화적 인물을 닮았다.53)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벌이는 놀이가 연극이나 서커스 또는 뮤직홀이 되도록 애써 보지만 결과는 끔찍하다. “블라디미르 : 아름다운 저녁이로구나! / 에스트라공 : 잊을 수가 없군. / 블라디미르 :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에스트라공 : 안 끝난 것 같군. / 블라디미르 : 이제 겨우 시작인걸. / 에스트라공 : 끔찍하구나. / 블라디미르 : 마치 연극 같구나. / 에스트라공 : 서커스 같다. / 블라디미르 : 뮤직홀 같다. / 에스트라공 : 서커스 같다.”(54)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어긋난 놀이는 잊힌 어린 시절의 놀이를 재현하려는 몸짓일 뿐, 그들은 놀이를 흉내 내는 거짓 놀이꾼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자의반 타의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놀이가 주어졌지만 지겨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져 있다. “에스트라공 : (일어서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 하나 오지도 가지도 않는군. 정말 못 견디겠다.”(65) 지겨움, 견딜 수 없음은 곧 놀이에서 미끄러진 인물의 모습인 것이다.

    42)위의 책, 276쪽.  43)위의 책, 277쪽.  44)위의 책, 53-54쪽.  45)김재철(II), 앞의 책, 41쪽.  46)위의 책, 42쪽.  47)김재철(I), 앞의 책, 202쪽.  48)노명우, 『호모 루덴스』, 사계절, 140쪽.  49)하위징아, 앞의 책, 389쪽.  50)소년은 홀로 등장하지만 고도의 메신저라는 점에서 놀이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구별된다. 나아가 소년의 짝을 고도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51)포조는 주머니에 막 넣은 파이프, 시계, 스프레이가 없어졌다며 당황해 한다.(극작품 54-55쪽 참조)  52)아이들의 소꿉놀이에서 자주 등장하는 학교놀이, 병원놀이, 아빠엄마 놀이에는 자신들에게 힘(권력)을 행사하는 어른을 흉내 내는 답습과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동시에 존재한다.  53)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위기의식과 부조리한 행위는 시시포스의 부조리한 행위를 닮았다. 삶은 부조리하다. 그런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놀이다. 매일 커다란 바위를 언덕 위로 들어 올려야 하는 힘겨운 행위를 일종의 쾌락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놀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조리 연극은 놀이 연극이 될 것이다.

    5. 나오며

    놀이의 개념으로 부조리 연극 <고도>를 조망할 때 다음의 두 가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부조리연극이란 반—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나게 한판 놀아보자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정신을 지닌 비규칙과 무질서의 시원적 연극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다. 또 하나는 부조리연극이란 반—이성, 반—과학의 연극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위징아의 이념을 따른 것으로 19세기 부르주아의 득세와 사실주의 사조에 반하는 연극일 것이다. 이처럼 <고도> 앞에는 해석의 지평이 무한히 열려 있다.54)

    놀이를 하는 아이 같은 어른은 부조리한 인간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놀이하는 인간으로 삶의 부조리를 몸으로 체현하는 인물들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비극적인가? 부정적인가? 앞선 랑송의 해석을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예상외로 부조리한 인간은 긍정적이며 명철한 의식의 소유자이다. 예컨대 카뮈의 “작품은 비합리적 세계와 인간의 명석에 대한 원망과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희곡은 인간존재를 극한에까지 밀고 나간 경우의 비인간적 구절을 그리고 소설에서는 자기와 세계의 단절을 예민하게 의식하면서 거기에 인간의 조건을 확인해서 행복을 발견하고자 한 부조리의 인간의 전형을 그리고 평론에서는 부조리 사상을 철학적 기초 위에 두고 있다. 생활이란 단조로운 회전이고 이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자살이나 종교에 의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의식을 맑게 하여 이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55) 부조리한 인간은 반항 정신으로 무장하고 매번 부서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롭게 시작하는 놀이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감안할 때, 놀이에서 미끄러진다고 해서 그들이 꼭 비극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고도>에서 가장 빈번한 질문이 있다. ‘고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다음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기다림의 결론이 어떻게 도출될지 알지 못하고, 다만 기다린다는 사실만이 명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고도>를 한 판의 놀이라고 생각할 때, 예상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또한 고도가 놀이 속에서 창조된 인물이라면 그가 누구인가는 썩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고도는 누구인가도 핵심적인 질문이 아니다. 그 전에 인물들이 어떻게 노는가? 놀이의 주체, 놀이의 방법, 놀이의 추구점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무대는 재현이 아니라 현시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존재(고도)보다는 그 곳에 실재로 현존하는 인물들이 벌이고 있는 놀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어릿광대들이 펼치는 놀이는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몸으로 존재하며 숨 쉬고 있으며,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54)현대 예술은 열림을 지향한다. 예술가의 손을 떠난 열려 있는 작품은 독자나 감상자의 수용적 태도에 따라 무수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젠 하나의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예술가의 임무는 수많은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그걸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14, 274쪽)  55)민희식, 『프랑스 문학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76, 725-7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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