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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La theatre-therapie et le corps 연극치료와 몸
  • 비영리 CC BY-NC
ABSTRACT
La theatre-therapie et le corps

잘 노는 사람이 성취도도 높다는 말이 있다. 논다는 것은 뇌와 근육을 활성화시켜 집중력을 높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는 건전한 놀이는 몸의 근육과 뼈를 단련시킨다. 나아가 도파민과 같은 기분 좋은 호르몬이 생성되며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몸의 놀이는 타인과 상호 협력을 해야 하므로 대타관계를 원활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표현적 예술성이 가미된 놀이는 상처 입은 정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연극에서 아르토가 성소나 곳간 같은 공간, 객석과 무대가 분리되지 아니하고 통합된 공간을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통합 공간은 다른 표현으로 전염성이 강한 공간이다. 배우의 몸으로부터 바이러스를 넘겨받은 관객의 몸은 관찰하는 관객에서 감각하는 관객으로 변형된다. 열린 감각으로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 공감의 개념이 생겨난다. 피셔-리히테는 인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힘들의 영향을 공감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공감은 심적인 동조가 아니라 통감각적 공감으로 이를테면 배우의 신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관객의 신체적 고통으로 전달되는 것을 뜻한다. 배우가 신음할 때 관객도 신음하며 배우가 실신할 때 관객도 실신한다. 공감은 감각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신체적 카타르시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같이 몸에 의한, 몸을 통한 공감을 연극적 방식으로 치료에 적용시킨 것이 연극치료다. 따라서 본 글은 몸에 대한 역사적 인식론을 살펴보고, 몸의 현대적 개념을 연극치료에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연극치료에서 몸의 효용성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KEYWORD
le corps , le theatre , la theatre-therapie , la therapie du mouvement , le corps-psychologie
  • 1. 서론

    몸은 인간의 생존과 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전통적인 서양 철학이나 종교에서 몸에 대한 찬미는 저급한 가치 추구라는 미명아래 냉대를 받아왔다. 살아 움직이는 몸을 매개로 하는 공연예술에서조차도 몸은 자연 상태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회문화적 코드인 의상을 덧칠하고 인위적이고 도식적인 동작과 움직임으로 몸을 제어하는데 앞장 서 왔다. 그러나 푸코의 폭로, 여성주의적 비판, 육체와 성(性)의 상품화 담론들에 대한 미학적 반성, 정보화 사회의 초실재적 가상현실이 초래하는 일상의 과잉상징화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물/자연의 진정성에 대한 본원적 자행으로 인해 몸을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될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1) 몸의 드러남이 꼭 필요한 연극에서 몸이 관심의 대상이긴 했지만 생각만큼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현대연극의 한 경향으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내세운 레만의 몸에 대한 연구는 연극에서 몸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시도다. 레만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징을 “재현보다 현전, 경험의 전달보다 공유, 결과보다 과정, 의미화보다 현시, 정보보다 에너지 역학”이라고 요약하고 “몸은 의미를 형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화하는 것”2)이라고 언급한다. 몸의 현전과 에너지의 발화에서 알 수 있듯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몸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몸의 가치를 되찾으려는 흐름이다.3) 레만은 몸성 자체를 강조하는 몸의 연극적 특징들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중심으로 삼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몸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더 이상 이성적 사유에 의한 의미로 귀결될 수 없으며, 몸은 생성적 과정으로 파악된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다음과 같이 몸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4) 첫째 몸은 더 이상 정신을 대리표현하는 매체로써 기능하지 않는다. 몸은 정신의 하수인이 아니라 자체로써 자기지시성을 지닌 “현상 그 자체로 지각된다.” 둘째 몸은 잠재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현존의 몸은 언제 ‘도발’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잠재적인’ 상태에 머문다. 무대의 몸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활화산과 유사하다. 셋째 몸은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전염은 몸을 통한 에너지의 전염을 의미하며” 몸은 자기의 극적 표현화를 수행하며 이를 통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배우의 몸에서 관객의 몸 사이의 전염은 수용미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개념은 몸과 그 움직임을 중시하는 연극치료와 상당 부분 교감한다. 미국연극치료협회의 정의에 따르면 “연극치료는 증상 완화,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통합, 개인의 성정이라는 치료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극을 활용하는 것이다.”5) 즉 소리와 표정과 몸짓과 움직임이 주소통수단인 연극예술을 의도적으로 도입하여 목표치의 치료 수준에 도달하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여기서 몸은 필수적 요소가 된다. 존스는 연극치료 차원에서 몸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6) 첫째 연극치료는 참여자가 자기 몸의 잠재성을 계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레만이 말한 몸의 잠재성과 동일한 맥락이다. 둘째 연극치료는 참여자가 신체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취함으로써 갖게 되는 치료적 가능성과 이점을 강조한다. 이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중시하는 몸의 전염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셋째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을 탐험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춘다. 몸과 사회와의 접촉에 접근함으로써 몸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본 글은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몸의 현대적 개념을 연극치료에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연극치료에서 몸의 효용성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이거룡 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한길사, 2001, p.25 참조  2)김형기,「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개념과 영향미학」, 『포스트드라마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p.28 재인용.  3)“즉 몸의 물질성, 탈의미론적인 몸, 감각성, 몸의 현존, 관객과의 소통에서 나타나는 에너지의 전염, 미메시시의 용해와 참여, 개별적 인체의 집중된 현전, 개별적인 것의 절대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심재민, 「포스트드라마의 몸 : 현상학적인 몸의 현존 방식에 대한 레만의 해석」, 『한국연극학』 42, 2010, pp.157-191.  4)위의 책, pp.161-165 참조.  5)박미리, 『발달장애와 연극치료』, 학지사, 2009, p.32.  6)Phil Jones, 이효원 옮김, 『드라마와 치료』, 울력, 2005. pp.252-253 참조.

    2. 몸의 역사적 관점

    서양철학이나 기독교에서 인간의 몸은 경시되어 왔다. 친구들이 간수를 매수한 덕택에 쉽게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소크라테스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독배를 마신 것은 몸이 영혼의 거푸집일 뿐이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 이상주의자인 그의 철학관에 따르면 몸이야말로 대표적인 현상물로써 형이상학의 세계에 비해 크게 가치가 없다. 몸이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서둘러 떠나야 할 대상이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독배는 영혼을 위한 약사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철학은 계승되어 “플라톤과 데카르트 이래 몸은 정신의 우월성과 정신/몸의 이분법 하에서 고매한 정신적 진리의 그림자나 영혼의 감옥 정도로 폄하되거나 억압되어 왔다.”7)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명제에서 몸의 몫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데카르트의 선언은 “비신체성 혹은 탈육화, 시각중심주의와 독백주의를 대표하고 있는”8) 것이다.

    가톨릭이 가혹하게 박해를 받던 로마 시대에 가톨릭교도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기꺼이 사자 밥이 되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저곳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원죄를 품고 있는 몸, 즉 이곳의 현존재인 몸은 가능한 서둘러 떠나야 할 대상이었다. 기독교에서 몸(육신)의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쁜 것이다. 죽음은 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으면 살리라’ 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죽음은 원죄를 지은 몸에서 해탈함으로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 천상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9)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예술에서 표현된 인간의 몸은 완벽한 조화 자체다. 황금 비율에 따른 인체의 조화미는 인간 몸을 있는 자체 그대로 보기보다는 환각적으로 보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고대의 화가나 조각가들이 부분별로 모델들을 사용하여 가장 아름다운 인체를 만들어 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은 자기를 직접 대면한 것이 아니라 물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속의 모습은 현실의 몸이 아닌 이미지로써 환상적인 형태이다. 나르시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위적이고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몸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몸, 자연스러운 몸, 추하면 추하고 비대칭이면 비대칭인 몸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소위 추 역시 미의 일부로 간주되면서 몸에 대한 진정성이 획득되었다. 추의 강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도적인 몸의 왜곡은 절대적 균형미를 거부하려는 시도다. 예술에서 몸의 진정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니체 철학의 영향이 크다. 몸-이곳을 경시하던 풍조는 현대철학의 시작을 알린 니체에 의해, 신의 죽음이 선포된 이후 태도가 달려졌다. 저곳이 아닌 이곳, 천국이 아닌 현실, 여기에 현존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몸에 대한 가치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를 전통 사상으로 삼았던 한국인에게 있어 몸은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서양 문물이 밀려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유교에는 저곳의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는 피안의 세계인 저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이곳 현재의 삶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유교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유교에서 부모가 물려 준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곳에 대한 존중이며 현존하는 몸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정갈하게 하고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효도의 근본이라고 강조한다.10) “유교의 신체관은 시대에 따라 마음과 몸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은 몸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보는”11)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인에게 있어 몸의 회복은 전통의 회복12)이 되는셈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타인의 몸이 나의 몸을 만지고 내가 타인의 몸을 만지는 촉각의 중요성을”13) 강조하는 것이 흐름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이곳을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로서 몸 가치의 회복은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2.1. 몸과 정신

    서양의 주요 철학과 종교는 대체로 몸을 정신의 거푸집으로 간주하여 왔다. 거푸집의 몸이란 정신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껍질 정도의 미약한 역할만 부여됨으로써 그 가치가 폄훼되어 왔다. 몸-정신 관계가 과거에서 현대로의 이행은 그 중요성이 일방적이었다가 조금씩 평형을 이루어 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몸과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의 구호처럼 어느 정도 균형 잡힌 통합적 관계로 바라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지각적 방어’는 몸과 정신의 통합관계를 잘 드러낸다. ‘지각적 방어’란 인간의 감각이 방어기제로 작용하면서 신체적 장애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 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실명을 하게 되는 경우, ‘지각적 방어’가 된다. 이 방어기제에는 만일 개인에게 실명의 현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생존차원에서 실명이라는 신체적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정신적 충격이 즉각적으로 몸으로 표출되는 이 현상은 몸과 정신이 복종적이거나 일방적이 아닌 통합적 관계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인지행동치료 전문가인 벡과 엘리스는 인지와 정서와 행동이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사고가 우선인가 몸이 우선인가 하는 갈등은 불합리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시간차에 따른 순서가 아니라 몸과 사고, 사고와 몸이 통합적 관계라는 사실이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언급하는 몸을 통해 정신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 정서가 행동과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 또한 정서의 일치를 통해 행동의 일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몸과 정신이 통합적 관계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철학에서 몸의 중시는 이상이나 정신세계보다는 현상이나 현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14)

    본격적인 몸의 연극은 사실주의에서 강조하는 인물의 정서와 배우의 정서가 혼연일체가 된 연극이 아니라 설령 역할이 덧씌우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무대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몸 자체로 성립되는 연극이다. 몸의 연극은 움직임만으로 원초아가 드러나는 무대며 배우가 영매 상태에 빠져들어 몸이 자동적 움직임의 괘도에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다. 마치 무당이 초월적 상태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알 수 없는 현상과 동일하다. 자동적 움직임의 중력에 빠져든 몸은 “무아의 상태이며 곧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으로 이어진다.”15) 방언 상태나 명상의 극적 순간처럼 주체가 없어지고 무중력에서 유영하듯 온전히 내맡겨진 몸의 상태를 코포는 “중립성(neutrality)” 혹은 “신체적 정신적 중립상태”라고 표현한다. “모든 움직임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창조적 에너지를 내포한 그런 순수한 존재의 상태”인 것이다. 순수 존재가 된 배우는 “아무 표정없는 가면(neutral mask)을 쓰고 순수한 에너지와 리듬에 의해 거리낌 없이 즉흥적 신체연기를 통해 중립성을 발견하게 된다.”16) 이렇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현존(presence)이라 부른다. 현존은 우연히 세계에 내던져진 실존(existence)과는 의미가 다르다. 실존은 본질이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지만 무대의 현존은 몸과 정신 모두 중립의 상태가 되어 관객과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실체이기 때문이다.

    서양 사상의 흐름 속에서 방치되었던 몸의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연극치료는 몸과 정신의 균형에 관심을 갖는다. 이 균형은 코포가 말한 몸의 순수한 중립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즉흥적 몸의 움직임을 통해 과거를 투사하고 정신의 오염된 찌꺼기를 정화시켜 깨끗한 몸의 현존을 추구하는 것이다.

       2.2. 몸과 지각의 현상학

    20세기에 들어와 감각의 원천인 몸을 중시하는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에 이르러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 그는 감각함(le sentir)을 인식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험주의와 지성주의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감각함에는 이미 자체적으로 풍부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함은 세계를 바라보거나 우리의 실존에 있어 이미 의미를 띠고 있으며, 우리 몸에 대한 지시성을 가지며, 세계를 우리의 삶에 친숙한 장소로 만들며, 우리의 삶에 친숙한 장소인 세계와 더불어 수행하는 생생한 의사소통이라는 것이다.17) ‘세계에의 존재(Être-au-monde)’18)인 나의 지각의 주체는 “탈시공간적인 정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위치를 갖는 몸”19)이다. “사물은 내 몸의 연장이며, 내 몸은 세계의 연장이다. 몸을 통해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기”20) 때문에 몸으로 체험되는 세계는 이성에 근거해서 만들어지는 객관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토대가 된다. 지각세계에서 주체성과 대상성이 어떻게 동시에 구체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우리 몸이 지각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지각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받아들이면 해결이 된다. 지각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몸은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존재하는(실존하는) 양식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이 독백적이라면 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대화적이며 사회적이다.21)

    대화적이며 사회적인 현상학적 몸에 대한 관점은 연극치료에 적용시킬 수 있다. 연극치료에서 몸은 더 이상 주변적이거나 보조적이지 않으며 의미체로 현존할 뿐 아니라 몸들 사이의 대화를 중시한다. 현상의 몸을 지닌 치료사와 참여자 사이에는 보는 자가 곧 보이는 자이고, 보이는 것이 곧 보는 자라는 봄과 보임의 상호 환위가 일어난다. 연극치료의 공간에서 치료사와 참여자의 몸을 바탕으로 “지각하는 주체가 곧 지각되는 세계”22)가 되기 때문에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체현(embodiment)이 가능하다. 연극치료에서 체현은 ‘몸화’ 즉 ‘몸으로 입는 것’을 말한다. 제닝스는 체현은 인간발달단계 초반부에 거의 본능적으로 체득하는 감각, 모방,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언급한 바있다.23)

    7)김방옥, 『21세기를 여는 연극』, 연극과 인간, 2003, p.65.  8)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아카넷, 2005, p.26.  9)샘 족이 만들어낸 유일신의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기독교도들은 자칫 서둘러 인위적으로 생을 마감할 우려가 제기된다. 따라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절대 신이 부여한 생명을 끝까지 영위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경고함으로써 자살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저곳에 대한 찬미는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서방세계에 성전을 선포하고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몸을 희생시켜 영웅적인 용사가 됨으로써 저곳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0)“曾子曰 身體는 父母之遺體也니, 行父母之遺體하되, 敢不敬乎아” 효경(孝經) :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 不敢毁傷이 孝之始也오 立身行道하야 揚名於後世 하야 以顯父母 孝之終也니 夫孝는 始於事親이오 中於事君이오 終於立身이니라.”. 『소학(小學)』.  11)조민환, 「유가미학(儒家美學)에서 바라본 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한길사, 1999, p.96.  12)전통의 회복은 현재 만연하고 있는 일방적이고 인위적인 몸 미학에서 벗어나 소통의 몸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13)윤형식, 「너의 몸은 전쟁터다」,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p.27.  14)몸의 추구는 물질만능과 소비사회에서 상업성에 의해 왜곡된 인위적 몸짱의 추구가 결코 아니다. 몸에 대한 중요성은 생성의 중요성의 대도와 맥을 같이 한다. 니체의 생성은 변화이자 죽음에 대한 천착이다. 몸은 변화하며 생성하는 물질이자 사라지려는 암묵적인 욕망을 두려움의 떨림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몸은 생성사멸을 통해 새로운 몸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쾌감도 지니고 있다  15)김방옥, 앞의 책, p.79.  16)위의 책, p.79.  17)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2004, p.45 참조.  18)메를로-퐁티는 몸은 세계와 유기적인 하나가 되어 서로 간에 정보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작용을 주고받는 몸과의 관계를 ‘세계에의 존재’(Être-au-monde)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계에의 존재’인 몸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와 하나 되기 위해 세계를 향해 가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일컫는다. 몸과 세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세계에의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를 응용한 것이긴 하지만 ‘세계에의 존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몸과 세계 혹은 세계와 몸이 서로 구조를 교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환 관계 즉 ‘세계에의 존재’에서 우리는 진정한 실존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 우리가 몸을 통해 그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http://bravobo.blogspot.com/2006/05/blog-post_03.html 참조.  19)조광제, 앞의 책, p.51.  20)Merleau-Ponty, 남수인 최의영 옮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04, p.367.  21)정화열, 앞의 책, pp.111-112 참조.  22)조광제, 앞의 책, p.77.  23)박미리, 앞의 책, p.85. 체현의 의미는 몸이 외부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외부로 향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 연극치료와 촉각

    서양에서 몸을 대변하는 감각은 오랫동안 평가 절하되어 왔고 특히 촉각은 시각과 청각보다 저급한 감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감각 가운데 시각은 이성적이며 남성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촉각은 감성적이며 여성적인 것으로 편이 갈렸다. 특히 시각의 강조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거대 공포증적인 제도이며, 관음증의 논리는 독특한 남성적인 논리24)가 된다. “마음의 시선(눈 또는 나)의 관음증과 ‘몸의 접촉(손 혹은 애무)’의 친밀성”25)은 대조적이다. 그리스 철학, 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eidos, 형상)는 시각중심주의의 산물이다.26) 시각이 상위적인 감각으로 대우를 받는 동안 촉각은 미천한 감각으로 여겨졌다. 전통적인 시각중심주의는 신체 개념을 일방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유난히 보는 것을 중시한다. 눈은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 사물을 객관화하고 지배한다. 그것은 거리를 설정하고, 유지하려 한다. 우리의 문화에서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위에 둔 것은 결과적으로 신체적 관계를 빈곤하게 만들었다. (...) 시각이 지배하는 순간 몸은 그 물질성을 잃어버린다.”27)

    과거의 연극 역시 시각의 연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향 효과라는 청각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 연기자의 현란한 자태와 몸짓은 시각을 위한 것이었다. 현대연극은 시각중심주의가 아닌 공감각의 연극을 위한 연구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1964)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가 촉각의 성질을 지닌 맛사지를 끌어들여 『미디어는 맛사지다』28)라고 주장한다. 맥루언이 보기에 원시시대의 인류는 오감을 사용하는 “복수감각형”29)이었다. 그러나 문자의 발명과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의 출현으로 인해 시각이 중심 감각이 되어버렸다. 전자시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인은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전화, 전신, 컴퓨터 등 다양한 미디어들을 접하게 되고 감각 전체를 동원하여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30) 맥루언이 미디어를 지각과 연결시키고 마사지라는 촉각적 현상을 언급한 것은 미디어가 인간의 신체확장이라는 ‘의수-테제(Prothese-these)’와 더불어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 정확히 말해서 인간 감각의 확장, 다시 말해 촉각으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촉각으로의 귀환은 광의의 의미로 공감각으로의 확장이다. 이점은 벤야민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시각적 지각방식에서 촉각적 지각방식으로 전환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 명제와 동일하다. 벤야민은 영화의 지각이란 건물을 지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빌딩 안에 있는 목적지를 찾으려 할 때 그 경로를 미리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빌딩 안에 들어가서 변화는 경로를 몸에 기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촉각적 지각방식이다. 한편 그는 영화 역시 현실에 비해 빠른 속도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촉각적인 지각방식을 암암리에 훈련시키고 있다고 보았다.31) 빌딩 속의 목적지나 영화를 몸으로 지각하는 촉각적 방식은 몸 전체로 지각한다는 공감각적 의미가 담겨있다.

    모성적 감각32)인 촉각은 모든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감각이다. 들릐즈가 언급한 원시적 공감각이 귀로 보고, 눈으로 맛보고 입으로 듣는 식의 감각이라면 맥루언의 공감각은 오감을 한쪽에 치우침 없이 균등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 무대에 세워진 스크린은 영화나 사진이나 텔레비전을 모방하거나 시각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오감의 균등, 적어도 촉각을 활성화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편 하이테크의 매체와 이미지에 의해 활성화된 촉각과 그로부터 촉발된 ‘공감각’의 기제에서 생겨나는 것은 ‘생생함’이다. 이미지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함은 원본이 아닌 복제에서 찾을 수 있는 복제적인 생생함, 즉 원본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복제의 생생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재현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욱 사실적이라는 이념, 극적인 현란한 이미지의 파장은 복제의 복제인 ‘상사(similarité)’가 더욱 실제적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의 개념을 근거로 한다.33)

    연극치료 역시 몸의 감각 중 특히 촉각의 가치를 재발굴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촉각의 생생함을 추구하는 연극치료에서 참여자는 몸을 열어둔 채 촉각을 최대한 활성화시킬 것을 권유 받는다. 시각이 눈뜬 시체가 되도록 강요한다면 촉각은 생생함의 역동을 일구어낸다. 연극치료가 관심을 갖는 촉각의 추동은 선입견에 빠져 있던 몸의 존재, 즉 잠자는 감각을 일으켜 세운다. 혈액이 상승하여 몸이 뜨거워지면 코포가 말한 중립상태가 되어 만지는 주체와 만져지는 대상이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주체와 객체의 주도권 다툼이 사라지고 살과 살의 맞닿음만이 부각된다. 촉각은 시각에 비해 훨씬 상호적 교류와 사회성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간지럼은 타인을 필요로 하는 촉각으로 행해지는 몸의 지각이다. “자기 몸을 간지럽힐 수 없기 때문에 간지럽히는 것은 접촉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간지럼에는 타자의 인정(recognition)이 필요하다. 타자가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간지럼은 진정으로 ‘대촉적’이며, (...) ‘타자의 인정’을 요구한다.”34) 촉각이 열리면서 타인과 살에 의한 소통이 생겨날 때 “개인은 자신의 몸, 그 몸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요소를 살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보다 자각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35) 이렇듯 타인의 존재, 상호소통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촉각의 활성화는 정신적 공허와 촉각의 결핍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연극치료의 주요 메커니즘인 것이다.

    24)“시각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감각인 반면, 촉각은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감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감성(그리고 지성)을 여성화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에서 촉각의 여성적 감각을 강조하고 시각의 남성적 감각을 탈중심화 혹은 탈원형감옥화하는 것이다.” 정화열, 앞의 책, p.97.  25)정화열, 위의 책, p.98 재인용.  26)헬레니즘이 시각적이라면 헤브라이즘은 청각적이다. 성경에서 야훼는 절대 시각에 노출되지 않는 대신 소리(음성)로써만 존재한다.  27)정화열 재인용, 앞의 책, 190쪽. “‘코기토’는 ‘나(I)’와 ‘눈(eye)’의 동일시를 통해 자아중심주의와 시각중심주의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정말로 “나를 본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며, 또는 마음의 나는 마음의 눈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192쪽. 서양의학은 대표적인 서양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각중심주의다. 반면 동양의학은 촉각의 의학으로 이를테면 진맥행위나 침술은 촉각중심의 방법론인 것이다.  28)Marshall McLuhan 외 지음, 김진홍 옮김, 『미디어는 맛사지다』,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29)박정규,「해제」, 『미디어의 이해』, p.421.  30)박정규, 위의 책, pp.425-426 참조.  31)http://elisaday3.egloos.com/625465 참조.  32)촉각의 완성은 종(種)을 계승하며 여성의 몸은 중심이 된다. “인간끼리 그리고 종과 종 사이에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관계는 철두철미하게 육체 사이의 관계이다. 신체 페미니즘은 신체 현상학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우리는 이 신체 페미니즘 속에서 모든 관계의 중심적으로서의 몸을 발견한다.” 정화열, 앞의 책, p.208.  33)보드리야르는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맥루언의 명제를 뒤집어 ‘인간은 미디어의 확장’이라고 언급하면서 신체가 미디어의 가능성을 실천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34)정화열, 앞의 책, p.47.  35)Jones, 앞의 책, p.267.

    4. 몸, 학대와 치유

       4.1. 몸의 학대

    역사적으로 몸은 경외의 대상이자 학대의 대상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몸의 학대는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있다. 몸의 균형미를 예찬할수록 몸을 학대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날카로운 메스로 눈꺼풀에 영원한 흉터를 남기는 행위, 주름이나 지방질 제거 수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름다운 몸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는 각종 트레이닝도 일종의 몸의 학대 행위이다. 몸은 학대받음으로써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깊숙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높이 오르려다 태양열에 녹아버린 이카로스의 후예다. 만년설로 뒤덮인 고봉을 등산하거나 마라톤을 할 때 느끼는 터질 듯한 심장의 고통은 몸의 학대에 대한 은유이다. 성도착증이란 자기 혹은 타인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며 역으로 성을 억제하는 사회적 규범 또한 몸을 학대하는 행위다. 한 예로 신체심리학의 창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통해 몸의 학대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라이히는 말리노프스키의 『성도덕의 출현』을 인용하여 트로브리안드 지역의 어린이의 성생활을 소개한다. 이곳 어린이는 전 생애동안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충분한 성 만족을 얻으며 성장한다. 어린이는 나이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성 활동에 참여하지만 이곳에서 성도착, 기능적 정신병, 정신신경증, 치정살인, 도둑 그 어느 것도 일어난 적이 없다. 배변훈련도 겪지 않은 이곳 사람들은 자연발생적으로 깨끗하고 정연하며 지적이고 근면하다. 비강제적이고 자유의지에 의한 일부일처제 결혼이 성생활의 사회적 형태로서 우세를 점하고 있으며 난혼은 전혀 없다. 반면 좀 떨어진 섬에 사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제도를 지닌 부족에게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신경증 환자들이 지닌 모든 특징들 예컨대 불신, 불안, 신경증, 자살, 도착 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36)

    몸은 학대 혹은 폭력의 수단이자 대상이다. 메를로 퐁티는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몫”37)이라고 말한다. 살인, 고문, 강간, 폭행, 마약 등은 몸에 의해 자행되는 몸에 대한 학대다. 만짐과 만져짐이라는 촉각에 기대고, 몸의 현존에 초점을 두는 연극치료는 몸의 학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연극치료에서 말하는 학대 혹은 폭력은 단순히 감정들의 충돌로 일어나는 주먹다짐이나 육체적 가학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학대는 고통과 죄에 시달리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38) 몸은 학대의 상처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규범이란 채찍으로 몸을 학대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진정으로 몸의 학대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굳이 그 길을 제시하자면 아마도 단 하나, 죽음이 있을 것이다. 생의 연장은 몸을 학대하면서 얻어지지만 몸의 학대가 끝나면 감각 기관이 완벽하게 마비된 죽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죽음은 숨쉬기를 멈추는 생물학적 죽음뿐 아니라 이성의 죽음, 자기의 죽음, 전통의 죽음, 문화의 죽음을 아우른다. 예술에서 몸을 학대하는 행위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메커니즘이다. 주위를 살펴보라. 수많은 예술행위는 곧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현존의 어휘로 몸의 학대를 전면에 드러내는 연극치료는 학대의 결과인 죽음에 메아리처럼 반향 하는 치료행위가 된다.

       4.2. 자연몸의 회복

    몸의 학대에 대한 형태 중 하나는 몸을 소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다. 이는 현대적 삶이 추구하는 소비사회의 환경과 맞닿아 있다. 소비적 몸이란 몸의 외적 가치를 추구하는 몸, 인위적으로 재생시킨 몸이다. 운명적이고 본능적인 몸은 자연몸이어야 하지만 하이테크의 유혹적인 단맛을 경험한 현대인은 자연스런 몸을 견디지 못한다. 첨단의학의 발달로 성형외과는 번창하고 인위적인 몸이 양산된다. 인공적으로 변형된 몸은 다시 화려한 겉치장이 씌워지고 명품 가방과 구두가 덧입혀진다. 인공적인 몸은 소비적인 몸이다. 소비적인 몸의 추구는 욕망의 결핍을 낳고 그 결핍을 채우지 못할 때 몸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날로 자살률이 높아지는 까닭 중 하나는 소비적 몸이 추구하는 욕망의 끝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위성을 탈피한 자연몸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무런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몸이 자연몸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인간의 몸은 인위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태어나자마자 밀림에 버려져 늑대에게 키워진 소년이 있다면 혹시 그는 진짜 자연몸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백퍼센트 자연몸과는 거리가 있다. 자연몸은 원시적인 몸이며 순수한 몸이다. 종교나 정치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몸, 치장하지 않은 몸, 완전히 벗은 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자연몸을 만날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사물과 인간은 그 고유성을 상실했다고 선언39)한 바 있다. 현대인들에게 불가능한 자연몸은 개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전혀 손대지 않는 몸은 아니다. 손대지 않은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때가 끼고 냄새가 나며 더러워진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머리나 손발톱을 다듬지 않으면 인간의 몸은 자연몸이기 보다는 비인간적인 몸이 될 것이다. 현대적인 자연몸은 차라리 개성을 지닌 몸, 예술성이 살아있는 몸, 소통이 가능한 몸으로 보는 것이 옳다. 연극치료가 추구하는 몸 또한 이처럼 개성과 예술과 소통이 가능한 자연몸일 것이다.

    예술적인 몸이 자연몸이라는 선언은 동작중심 표현예술치료 전문가인 할프린(Halprin)의 개념으로 예술성이 깃들어 있는 몸이 자연몸이라는 의미다. 이 의미는 연극치료가 염두에 두는 몸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예술적인 몸은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해 왔다. 이교도로 간주되는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몸이 신성시되었던 적도 있지만 데카르트 이후 이분법 사고에 의해 몸은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이성이 중시되면서 물질적 사고관을 가진 성직자, 과학자, 의사와 같은 권위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자연몸은 뒤로 물러났고, 자연몸과 연관되어 있는 감각이나 치유, 민중에게 속한 민속예술은 미신이나 이단 또는 무지하고 미개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예술은 재력가나 권력가의 밑에서 그들의 권력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 또는 천박한 오락물 제공이나 감각의 배출구 또는 성취감 결핍이나 자유로운 표현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40) 이렇게 이성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예술로 인해 몸은 자연몸에서 멀어졌다. 분리된 환경, 맹목적인 소비욕망이 주를 이루는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예술의 몸은 치유의 힘을 잃었다.41) 따라서 치유의 자연몸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예술이 지닌 본래의 면면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치유의 예술은 “개인과 집단 기능의 본질적인 부분이었으며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소통과 지식을 위한 언어로 기능했다. 예술은 삶과 죽음, 결혼과 전쟁에 대한 통과의례, 질병을 치료하고 자연의 원동력과 상호작용하는 것 등과 같은 부분에 있어 개인과 가족, 집단을 통합하고 또한 신성에 대한 연결과 기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42) 자연몸을 추구하는 예술은 통합을 지향한다. 통합된 예술을 통해 몸이 소비와 욕망의 시선에서 벗어나 원시성을 회복한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은 온전히 하나가 될 것이다. 통합된 몸은 상처 없는 태아 상태의 몸이며 궁극적으로 연극치료가 지향하는 몸이다.

       4.3. 몸의 치유

    전통적으로 무대의 연기자들은 내면의 정서에서 외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인지 반대로 몸의 행동이 내적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를 고민하여 왔다. 소위 ‘안에서 밖으로(Inside out)’인가 혹은 ‘밖에서 안으로(Outside in)의 논쟁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몸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현대 이후의 연기론은 대부분 몸의 표현을 통해 정신적, 내면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43) 연기에 생체역학을 도입한 메이어홀드는 몸의 움직임이 심리를 이끌어낸다고 생각한다. “몸의 움직임이 어떤 심리를 만들어 낸다. 촉발한다.” 내적 정서이입을 강조한 스타니슬라프스키도 이를 잊지 않는다. 그는 “배우가 연기에 필요한 신체적 행동을 수행하지 않고 행동의 심리적 측면에 몰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하였다.”44) 즉 ‘밖에서 안으로’의 경향, 말하자면 몸을 정화 또는 준동시킴으로써 정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인데 이는 바로 연극치료가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45)

    몸은 움직이는 자체만으로도 어떤 효과를 준다. 자기 탐색에 관심이 많았던 융은 몸동작, 그림, 글쓰기 같은 것이 이미지와 상징을 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언급하면서 예를 들어, 만다라 그림이 춤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림이나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몸을 통한 상징적 재연이 보통의 적극적 상상력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46) 몸은 치유의 중요한 매개이자 대상이지만 정체된 몸, 닫힌 몸은 여전히 고통의 몸일뿐이다. 그러므로 몸은 움직여야 하며 그로부터 내적 은유와 무의식의 언어를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경험들의 전체적인 이야기들은 움직이는 몸을 통해 접근될 수 있고 활성화될 수 있다”47) 움직임은 몸의 원초적 언어이므로 움직이는 몸은 우리에게 깊은 느낌과 기억으로 이끈다. 움직이는 몸이 표현을 시작할 때 몸에 담겨 있는 정서가 외현화된다. 몸이 온전한 표현으로 지각되고 이해될 때 몸은 통찰과 변화를 위한 매개체가 된다. 창의적이고 온전한 동작자로서 우리는 표면에 올라온 것은 무엇이든 탐구할 수 있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실험하고 드러내고 연구한다. 이 때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무의식이 밖으로 표출되면서 여태껏 알아차릴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명확한 관점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48)

    동작중심 표현예술치료에서 몸은 신체적인 수준의 몸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지적·영적인 수준의 몸으로 확대된다. 먼저 신체적인 몸에 대한 탐색은 감각, 신체 자세, 신체 부분, 몸짓, 동작 등이 있다. 나아가 정서적인 몸과 인지적인 몸에 대한 탐색이 이어지며 궁극적으로 이들 세 수준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즉 조화 혹은 대립 관계를 파악한다. 또한 이들을 실제에 적용시킬 때 세 수준의 관계를 활성화시키는데 초점을 두며 신체적 반응과 표현으로부터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감명이 일어나는 원리에 기초를 둔다.49) 이 원리는 연극치료처럼 몸을 활용하여 치유를 하는 모든 예술치료가 주목하는 것으로 몸의 반응이 정서와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걷기만 해도 상쾌한 기분이 들거나 스스럼없이 몸을 움직일 때 자유로움을 느끼거나 몸에 역할을 투사하여 감정을 이입시킬 때 새로운 세계의 문의 알아차림은 바로 신체와 정서와 인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수준이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될 때 내면의 영혼과 인간관계의 갈등상황이 나타날 것이며, 조화를 이룰 때 알아차림, 창조성, 표현 수준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몸, 정서, 인지의 세 수준의 상호작용이 창의적일수록, 진실 되고 깊어지며 통합될 수 있고 초월적이고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세 수준이 충분히 통합되면 몸은 우리를 의식의 보다 높은 수준에 접근하도록 허락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50) 몸은 정서와 인지적 반응이 일어나는 근거지이다. 세 수준이 조화를 이루고 우리의 강점과 유연성이 증폭될 때 각 단계 사이에서 에너지의 흐름과 순환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한다.51) 그러므로 세 수준의 통합은 보다 주의 깊게 듣고 다양한 감각을 느끼기 위한 근거지인 신체적 수준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며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동작이 변화할 때 정신도 변화한다. 새로운 동작은 우리를 새로운 신체적 상태로 이끌고, 새로운 경험을 형성하는 상징으로서 신선한 이미지들을 가져온다.”52) 몸과 그 움직임에 주목하는 연극치료는 몸을 통로로 활용하여 닫힌 몸이 열린 상태에서 움직이는 몸으로 변형되기를 기대하는 예술치료 형태다. 이 몸은 기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모체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태아의 움직임이나 모선과 연결되어 있는 우주인의 유형처럼 독특하며 생명을 향한 몸짓을 한다. 이 몸은 촉각에 의거한 움직임과 예술적이고 자연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인지와 정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몸인것이다.

    36)Reich, 윤수종 옮김, 『오르가즘의 기능』, 그린비, 2005, pp.268-269 참조.  37)정화열, 앞의 책, p.53.  38)삶 자체는 실로 고달픈 여정이다. 한 끼만 굶어도 몸은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이 없는 세상은 오로지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으므로 죽음은 ‘영면(永眠)’, ‘영원한 안식’ 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39)하이데거의 선언은 로봇에 의한 자동적 대량 생산이 모든 것들을 개성이 없는,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과 맥을 같이 한다.  40)Halprin, 앞의 책, p.30 참조.  41)“오늘날 예술의 많은 부분은 의식을 고무시키거나 사회적인 딜레마를 푸는 것보다 오락이나 유행, 또는 조작 척도에 기준 하는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위의 책, p.31.  42)위의 책, pp.29-30 참조.  43)김방옥, 앞의 책, p.58 참조.  44)이상직,「배우의 발성」, 『발성연구와 그 활용』,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2000, p.212.  45)“‘Outside In’은 양식화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 양식화 방식은 누구나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연극치료가 (…) ‘Outside In’을 주로 활용하는 이유는 이처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 외에도 치료의 대상자들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미리, 「연극치료의 감정중심 접근방식」, 『한국연극치료협회 2차 학술대회 자료집』, 2010, p.4.  46)von Franz 1980, 126쪽, Chodorow 1977 재인용 Halprin, 39쪽 참조.  47)Halprin, 앞의 책, p.4.  48)위의 책, p.4 참조.  49)위의 책, p.122 참조.  50)위의 책, p.123 참조.  51)이것은 바로 게슈탈트 경험이 된다. 게슈탈트 창시자 펄스는 “당신의 머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감각으로 가라!”고 했다. 위의 책, p.130.  52)위의 책, p.137.

    5. 결론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에 따르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몸은 동시에 타인을 바라본다. 몸은 타인과의 교류에서 보여주고 보는 쌍방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 특수한 물질로써 소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그는 지각방식을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대립하여 ‘신체적 코기토’라고 표현한다. 이는 눈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행위과정도 “지각이 감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정신으로 퍼 올리는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살(chair)이라는 촉각적 접촉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동과정이라는 의미다. 육체와 결부된 운동이라는 감각적 지각이 인식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53) 한 마디로 만지고 만져지는 몸이 있기에 의사소통이나 대인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끼리 그리고 종과 종사이에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관계는 철두철미하게 육체 사이의 관계이다. 신체 페미니즘은 신체 현상학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우리는 이 신체 페미니즘 속에서 모든 관계의 중심적으로서의 몸을 발견한다.”54)

    연극치료가 몸을 중시하는 것은 정신과의 헤게모니 쟁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단절되었거나 매몰되어 있던 몸의 진정성을 발굴하려는 차원이다. 몸을 감각의 근원으로 간주하면서 윤리적 시각에서 어둠의 자식으로 치부하려는 습성에서 벗어나 현존의 인자로 보고 소통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다. 몸을 통해 소통하려는 연극치료의 근본적인 이념은, 양자론에서 우주적 전 존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또는 『주역』에서 우주만물은 전체가 연결되어 있으며 고립된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관점, 또는 “‘동시성(synchronicity)’의 원리로서 “생태학의 제일 법칙”이라고 부르는”55) 생태학적 관점과 괘를 같이 한다.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이나 기타 종(種)들은 상호 신체적이 되며 그들 사이의 관계를 포괄하는 사회적 원칙56)과도 부합한다. 몸으로 존재를 지각하고 사회성의 원칙을 따르는 자, 다시 말해 연극치료의 참여자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현상을 파악하는데 머물지 않고 살에서 파생한 감각을 중시한 메를로 퐁티의 ‘육화된 행위자’57)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몸은 화두다. 촉각적이며 학대의 주체이자 대상인 몸은 사회적이며 생태적이고, 자체적으로 퍼포먼스이며 해프닝이다. 또한 몸은 공연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 해석학’이란 신조어를 사용한 다음의 인용문은 의미심장하다. “육체 해석학 또는 몸의 정치가 공연을 위한 무궁무진한 광장으로서의 몸을 생각할 경우, 공연(performance)은 그 핵심어가 된다. 몸이 바로 공연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공연되기 때문에 몸의 정치나 몸의 문제는 감성적이고 언어적이며, 정신분석학적이고 연극적이며 도덕적인 것이 된다.”58)

    연기자가 무대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신을 찾는 행위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찾게 되면 과거의 영욕과 외상과 원죄와 고통을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다. 그 치유의 행위가 바로 몸을 중시하는 행위다. 몸의 각 부분은 인생 이야기가 스며있는 여러 양상들의 은유다.59) 몸을 직면하면 몸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이야기보따리가 열린다. 그러므로 연극치료에서 몸을 움직이고 활성화시키고 직면하는 것은 몸의 상상력을 통해 몸에 영향을 끼치는 놀이나 이야기를 곁들어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신경과 감각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다. 항상 있어왔던 몸이지만 잊고 있었던 잠재성을 탐색하고 몸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사회성을 탐구하며 지각에서 벗어나 있었던 몸을 교정시키고자 하는 것이 연극치료의 기본적 이념인 것이다.

    53)육현승, 「미디어화 된 지각과 미디어미학, 랄프 슈넬의 『미디어미학』의 문제성과 의의에 대하여」, 『독일언어문학』 제29집, 2005, p.354 참조.  54)정화열, 앞의 책, p.208.  55)위의 책, p.21.  56)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살아가(있)는 것은 몸을 통해서이다. “몸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회성의 원형이다. 몸이 없다면 사교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몸은 사회적 기원의 원형일 뿐 아니라 특권적 근거이다.” 위의 책, p.300.  57)위의 책, p.22.  58)정화열, 위의 책, p.296.  59)Halprin, 위의 책, p.2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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