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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외젠 이오네스코 연극에 나타난 혼돈의 양상 Les aspects du chaos dans le theatre d’Eugene Ionesco
  • 비영리 CC BY-NC
ABSTRACT

Eugène Ionesco, dynamiteur qui a boulversé l’art dramatique du X Xe siècle et cultiva la réflexion de l’absurde de l’après-guerre, incarne mieux que personne une avant-garde, en dehors et au-dessus de toutes les conventions et de toutes les règles. Il marque son siècle de sa plume. Toute sa vie, il crée la nouvelle dramaturgie en combinant la réalité absurde et le rêve fantasmagorique. Il tourne le dos au théâtre anecdotique et ouvre la voie à l’onirisme, aux fantasmes, à l’imaginaire. Il n’hésite pas à décrire plusieurs fois l’état psychique de ses personnages. C’est par là que son théâtre se définit comme la projection spatiale du paysage intérieur. Nous y voyons le chaos qui se mélange l’angoisse et les cauchemars. Et nous y découvrons un Eugène Ionesco semblable à lui-même.

Dans ce point de vue nous allons envisager les quelques aspects du chaos comme suite : la prolifération de la matière, la métamorphose en animal, l’ensevelissement et la chute, la démolition du monde. Pour Ionesco, la vie est cauchemardesque, qu’elle est pénible, insupportable comme un mauvais rêve, et puis le monde est pourri dès le stade de la création. Les personnages de Ionesco souffrent au bord du monde chaotique parce qu’ils vivent dans leur lutte dérisoire et vaine contre l’invasion grandissante du chaos qui est figuré par le triomphe de la matière (le cadavre, les champignons, les chaises), la destruction grotesque de l’humanité, les failles de l’humanité, la chute en enfer, le vide aux portes de la mort etc. Ainsi, pour ce dramaturge, l’espace théâtral n’est pas représentation d’un lieu, mais bien plutôt miroir d’une âme. L’espace scénique reflète la psyché profonde du personnage et il est l’endroit où s’inscrit son obsession et son angoisse. Au travers de ce monde chaotique, l’univers de ses pièces se trouve sous la forme irréaliste, purement onirique.

Au bout du compte, Ionesco donne à un théâtre une dimension métaphysique. Son langage dramatique est un symbole du désir, de la folie. de l’agonie, du paradis perdu et de l’enfer. Un théâtre qui fait appel aux sentiments profonds de l’être ne vieillit pas. Ionesco est mondialement connu comme l’un des auteurs dramatiques les plus joués de notre temps mais on mesure mal encore l’importance et son génie. Nous allons continuer de trouver sa place qui est inscrite dans l’histoire de la littérature dont il est l’un des géants.

KEYWORD
Chaos , monde chaotique , proliferation , metamorphose , chute , demolition , angoisse
  • 1. 머리말

    베케트, 아다모프, 주네와 더불어 프랑스 부조리연극을 장식한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문학과 현실,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해왔다.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도전적 실험정신으로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한 현대인의 욕망과 상실, 고뇌와 슬픔을 무대화했다. 그의 극작품은 희곡과 촌극을 합쳐 서른 편 이상에 달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일관되게 발전하는 몇몇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이행하면서 자신의 세계관과 미학적 성찰들을 새로운 극적 형태들로 심화시킨다. 그의 극작품은 현실을 탐구하고 삶과 죽음의 가치체계를 정의하려는 부단한 모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오네스코의 극중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풀어놓는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써내려간 일기나 고백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그의 극작술에 대해 자전적 글쓰기라는 하나의 특징을 논하기도 한다.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은 대개 작가의 분신이요 화신에 다름 아니다. 현실에 얽매여 창조적 영감을 잃어버린 아메데, 진흙으로 상징된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슈베르, 인간 존재의 파괴적 힘에 저항하며 탈출구를 찾으려는 베랑제, 여인에 대한 환상과 강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장 등등. 이들은 모두 고뇌에 찬 작가 자신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으며 “본능과 콤플렉스”에 묶여 있는 “어둠의 포로들”이다.2) 등장인물들의 강박과 고뇌, 원죄와 지복euphorie의 체험은 작가가 이미 실제 삶에서 경험한 에피소드이거나 꿈의 한 단편들이며, 작가는 자신의 내적ㆍ외적 삶을 끊임없이 문학으로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이오네스코의 글쓰기는 일종의 꿈의 전사 transcription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살던 집 복도에 누워있는 시체에 관한 꿈은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의 출발점이 되고, 자신의 어머니가 화염에 휩싸여 불타는 꿈은 『갈증과 허기』에 등장하는 장의 죄의식과 강박을 형성한다. 이처럼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희곡이나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삼으면서 그것을 객관화하고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 고뇌를 이야기하는 신화로까지 확장시킨다.3) 그리하여 이오네스코의 작품 속 모든 공간은 고뇌를 운반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때때로 죽음의 본능이 여러 형태로 잠복해 있는 세상에서 무방비 상태의 인간이 맞닥뜨리는 위험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즈음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오네스코가 느끼는 악몽 같은 현실이 무대 위에서 종종 카오스의 세계로 형상화된다는 점이다. 작가의 고백을 들어보자 : “나는 삶이 악몽과도 같으며, 힘들고, 사악한 꿈처럼 참을 수 없는 것이라 느낀다. 주위를 둘러보라. 전쟁, 재앙과 재해, 증오와 박해, 혼돈, 우리를 노리고 있는 죽음, [⋯] 우리는 대단한 열병에 걸려있는 세계에서 논쟁하고 있다.”4)

    이오네스코에게 있어 세상은 창조의 단계에서부터 썩은 것처럼 보인다.5) 그노시즘6) 선상에 놓여 있는 시오랑에 의하면, 창조를 주관한 것은 선의 신이 아니며 세상은 어두운 신의 과실이다.7)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모습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러한 그림자들을 볼 때면 ‘악의에 찬조물주mauvais démiurge’가 떠오른다고 그는 말한다.8) 그노시즘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을 이원적으로 바라보면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고 믿었으며, 선한 신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식 등 영적인 것이 나오고 악한 신에서는 악의 근원이 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나온다고 여겼다. 시오랑의 이러한 비관주의는 『굳은 달걀』이나 『증거 없는 살인자』를 통해 보여준 이오네스코의 비관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작가에게 있어 연극은 “괴물처럼 충분히 흉측한 어떤 것을 진열하는 일이다. 조금씩 폭로되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무시무시한 어떤것이다.”9) 그러한 까닭에 그의 작품은 아주 연극적이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무섭다. “무시무시함의 연극만이 있을”10)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극작품에 투영된 무시무시한 것Le terrible, 실존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얼룩진 혼돈의 여러 양상을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어두운 내면 세계를 고찰하고, 그러한 혼란의 풍경을 바탕으로 이오네스코의 극적 공간을 한층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1)Eugène Ionesco, Prsent passé, passé présent, Mercure de France, 1968, p.68.  2)Eugène Ionesco, Découvertes, Albert Skira, 1969 ; 『발견』, 박형섭 옮김, 새물결, 2005, p.12.  3)“우리에게는 하나의 신화적인 연극이 필요하다 : 그 연극은 보편적일 것이다. [⋯] 분명 모든 사람이 모두를 위해 글을 쓸 수는 없다. [⋯]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하며,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타인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ugène Ionesco, Notes et contre-notes, Gallimard, 1966, p.300.  4)위의 책, p.166.  5)Marie-Claude Hubert, Eugène Ionesco, Seuil, 1990, p.139.  6)‘그노시스gnôsis’란 ‘앎’ 혹은 ‘인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지만, 그노시즘에서 사용될 때에 이 ‘인식’이 의미하는 바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뜻하며, 단순한 인식이 아닌 ‘아는 것’, 그것도 직관과 영감에 의한 직접적이고도 개별적인 신비체험에 의해 아는 것을 지칭한다. 이것을 한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인간은 육체를 초월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곧 그노시즘의 첫 번째 특징인 구원 사상이다. 이리하여 영적인 인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 그노시즘의 특징은 사실상 매우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분산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여러 형태의 영지주의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공통분모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영혼에 큰 가치를 두는 것과, 개인의 깨달음을 통한 구원, 극단적인 선악 이원론이 그것이다. 요컨대 그노시스파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선한 영혼이 죄악으로 물든 육체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생명체 내면에깃든 빛, 신성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였다. 이것이 신인합일의 신비사상이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은 원죄 때문이 아닌 ‘참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는 것이 영지주의의 핵심사상이며, 무지로부터 벗어나면 지금 여기에서 당장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노시즘의 설명이다. 세르주 위탱, 『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황준성 옮김, 문학동네, 1996, pp.7~34 참조.  7)“선의 신, 즉 ‘하느님’이 창조라는 소동에 가담했다고 믿기는 어렵고도 불가능하다.” Emile Cioran, Le Mauvais Démiurge, Gallimard, 1989, p.10.  8)“활력을 빼앗긴 소심한 선은 의사소통에 부적합하다. 반면 유달리 열성적인 악은 감염되기를 원하며, 매혹적이고 전염성 있는 존재라는 이중의 특권을 소유한 이상 마침내 감염되고 만다. 또한 우리는 선의 신보다 훨씬 수월하게 퍼져 나가면서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는 악의 신을 목격한다.” 위의 책, p.18.  9)Eugène Ionesco, Entre la vie et le rêve, Gallimard, 1996, pp.160~161.  10)Eugène Ionesco, Notes et contre-notes, 같은 책, p.52.

    2. 물질의 증식

    이오네스코의 초기 작품에는 물질의 ‘증식prolifération’이라는 주제가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의자』의 노인들이 바쁘게 옮겨 나르는 의자들, 『의무의 희생자』에서 마들렌느가 쌓는 찻잔,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의 시체와 버섯, 『새로운 세입자』의 담처럼 쌓이는 가구들, 『자크 혹은 복종』에서 여인의 코와 손가락 등등, 작가의 초기 작품에는 ‘증식’이라는 주제가 끊임없이 변주된다. 그리고 가속화되는 물질의 증식을 통해 작가는 등장인물이 겪는 불안과 고뇌를 물질화한다. 물질이 무대 위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무게 아래에서 모든 자유는 무력해지고 세상은 질식할 것 같은 지하 감옥으로 변한다.

    『의자』의 주인공인 두 노인은 피해망상 환자들로 죽음으로 향하는 몸짓을 연기한다. 그들은 각자 보이지 않는 초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의자들을 옮기고 그 의자들을 강박적으로 쌓는다. 첫 번째 부인, 육군 대령, 벨과 그녀의 남편과 같은 특정 인물을 위해 옮겨진 의자들은 어느 순간 군중들의 것으로 확대된다. 의자는 그 자체로 연기자가 되는, 소위 오브제로 된 등장인물로 점차 변모한다. 이로써 노인들의 망상은 극대화되며, 이들의 유일한 탈출구인 자살에 이르기까지 의자의 증식은 지속된다. 이오네스코는 『삶과 꿈의 사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 “텅 빈 의자들, 의자들의 도착, 인물들이 가져온 의자들의 혼잡함 등이 무대 공간을 꽉 채운다. 그것은 마치 견고하고 육중한 공허가 모든 자리를 침범해 차지하는 것과 같았다. [⋯] 그것은 다수인 동시에 부재였으며, 증식인 동시에 무였다.”11) 의자의 무대적 특성은 이처럼 초대 손님들의 현존을 물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식에 의한 혼돈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허함le vide’ 즉, ‘무le rien’로 향하고, 그러한 혼돈이 지배하는 무대는 노인들의 불안, 나아가 착란과 망상, 광기가 실천되는 장소로 형상화된다.

    그렇다면 『자크 혹은 복종』12)은 어떠한가.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가족 드라마이자 그것의 패러디이다. 등장인물들의 언어는 그들의 태도만큼이나 고상하며 품위가 있지만 종국에는 스스로 파괴되고 해체될 뿐이다. 즉,『대머리 여가수』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일종의 패러디이며, 저절로 해체되어 미쳐버리는 통속극의 캐리커처이다.”13) 이 작품에서 이오네스코는 코가 둘이거나 셋인, 혹은 손가락이 아홉 개인 초현실주의적 인물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킨다. 자크에게 제안된 두 명의 약혼녀들은 기괴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여인들이다. 첫 번째 신부 로베르트I은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베일을 벗기자 자크의 가족은 그녀가 두 개의 코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감탄하지만, 자크는 그녀의 매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코가 셋인 약혼녀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로베르트I과 비슷한 모습에 코가 셋인 로베르트II가 등장한다. 로베르트는 파카소의 그림속에서처럼 세 개의 얼굴 혹은 세 개의 옆모습을 가질 수 있는데, 이로써 그녀의 마스크는 여신의 마스크를 부여받아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의 여러 얼굴을 가진 극동의 신과 유사해진다. 이어 로베르트가 아홉 개의 손가락이 달린 자신의 왼손을 꺼내보이자 자크는 그런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다. 우리는 막이 내리기 전 “좌우로 흔들거리는 코가 셋인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파충류처럼 움직이는 아홉 손가락”14)을 본다. 로베르트는 기묘하면서도 무시무시하다. 코와 손가락의 다수성은 그녀의 성적 환상, 다시 말해 남근숭배적 환상을 강조하는 듯 보이며, 그러한 환상은 결국 자크를 삼켜버린다.

    『자크 혹은 복종』의 테마를 보다 풍부하게 변주한 『결혼할 청년』에서는 자크의 약혼녀들과 닮은 신부들이 한층 더 그로테스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새나 개의 머리를 한 여자, 당나귀의 귀를 가진 여자처럼 동물-여인의 인물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코와 네 개의 눈을 가진 여자, 세 얼굴의 마스크를 쓴 괴물-여인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신체의 복제와 증식을 통해 강조되는 비이성적이고도 초현실적인 무대는 마치 어릴적 작가가 경험한 뤽상부르 공원의 인형극, 수많은 꿈과 환상이 현실과 동화되는 낯설고 기묘한 인형극을 연상시킨다. 이리하여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고와 이미지가 이오네스코의 극적 현실을 이루며, 꿈처럼 비논리적인 연극이 무대 위 현실이 된다. 인물의 정신은 육체를 특징짓고 육체는 공간에 반영되는, 다시 말해 인물의 외부세계는 내면의 거울임이 드러난다.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의 주인공 부부는 시체와 함께 살아간다. 이 작품이 『의무의 희생자』 바로 다음에 쓰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시체는 무엇보다 니콜라에게 살해되었던 수사관을 연상시킨다.15) 그러나 시체의 상징성은 다양하게 관찰된다. 엠마누엘 자카르의 해석처럼 부부의 죽어버린 사랑16)과 소원해진 시간일 수도 있고, 질투에서 비롯된 아메데의 죄의식이나 억압된 환상 등의 물질화로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들렌느의 출산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예로 든다면 죽은 아기로도 보인다. ‘시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는 소설 -“누가 이 얼굴에서 10년 전 어느 날 저녁, 우리를 방문해 나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던, 내가 겨우 5분 정도 집을 비운 사이에 그녀의 정부가 되었던 아름다운 청년을 알아보겠는가?”17)- 과는 달리 희곡에서는 시체의 메타포가 풍부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다층적인 메타포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주인공의 모든 환상과 강박이 커져가는 시체로 구현된다는 것이며, 버젓이 눈을 뜨고 주인공을 바라보는 그 존재는 공포의 카오스 상태를 야기시킨다는 점이다. 버섯이 무성하게 돋아날수록 부부의 사랑은 식고, 시체가 성장할수록 주인공의 불안과 강박은 증폭된다. 아메데와 마들렌느의 흘러간 시간은 불안과 고뇌로 점철되면서 시체라는 형이상학적 물질 속으로 투사된다. 뿐만 아니라 반복과 가속의 희극성은 비극성의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연극은 더욱 풍부한 의미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가 우리 자신이 방어할 틈도 없이 우리를 덮쳐버리는 이런 원형적인 이미지를 통해 무시무시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의 승리로 보이던 시체의 증식은 이내 곧 시체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주임이 드러난다. 2막이 끝날 무렵 아메데와 마들렌느에 의해 집 밖으로 끌려나온 시체는 3막의 광장에 다다르자 점점 작고 가벼워진다. 이제 시체는 아메데의 허리를 감싸는 거대한 깃발이 되어 마치 낙하산 모양으로 펼쳐지면서 아메데의 비상을 돕는 조력자가 된다. 결국 시체를 끌어내어 강물에 버리기 위한 아메데의 고행은 시체라는 물질이 지배하는 세계, 즉 어두운 감정, 일그러진 도덕, 채울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마들렌느와의 유폐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설령 그러한 비상이 『공중 보행자』의 베랑제처럼 끔찍한 세상으로의 추락이 된다 하더라도, 빛나는 하늘 은하수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아메데는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본질적으로 존재와 사물로 구분된 세상에서 이오네스코의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역전되고 주객은 전도된다. 환각 속 인물들을 위해 분주하게 쌓아올린 의자는 노인을 창 밖으로 밀어내고, 성적 환상으로 얼룩진 기묘한 신체는 자크를 집어 삼키며, 아메데의 시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람보다 더 잘 살고 있다. 이렇듯 사물들의 과도한 출현은 정신의 부재를 의미하고 이는 곧 존재의 다양한 죽음으로 나아간다. “물질로 들어찬 세계는 결국 현존의 공허를 보여준다. 그 지나침은 곧 충분치 못함과 합류할 것이며, 사물들은 고독과 반정신의 힘이 승리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18) 요컨대 물질의 증식은 공간을 기괴한 카오스의 세계로 만든다. 지금까지 우리는 존재를 위협하고 승리를 외치는 물질 그리고 그러한 물질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어 결국 물질로 환원될 인간 존재가 마주한 혼돈의 세계, 즉 이오네스코의 극적 환상을 살펴보았으며, 그의 작품은 물질에 포위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 인간의 사물화, 그를 통해 표출되는 강박과 환각의 다양한 극적 형상화임을 알 수 있었다.

    11)Eugène Ionesco, Entre la vie et le rêve, 같은 책, p.72.  12)『자크 혹은 복종』은 『대머리 여가수』에 이어 『수업』과 동시에 집필되었으나 주제와 표현 양식의 기괴함과 환상성으로 인해 1955년이 되어서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수업』이 1951년, 『자크 혹은 복종』보다 뒤에 써진 『의무의 희생자』가 1953년에 초연되고 나서도 2년이 지난 후이다.  13)Eugène Ionesco, Notes et contre-notes, 같은 책, p.271.  14)Eugène Ionesco, Théâtre Ⅰ, Gallimard, 1954, p.127.  15)『의무의 희생자』는 1953년,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는 1954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이 두 작품은 희곡 이전에 소설의 형태로 먼저 발표되었는데, 이러한 글쓰기는 『증거 없는 살인자』, 『코뿔소』, 『공중 보행자』에도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대령의 사진』이라는 소설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데 소설에서 희곡으로 개작되면서 「깃발」과 「대령의 사진」이 각각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와 『증거 없는 살인자』로 제목이 바뀌었으며, 나머지 세 작품은 동명 희곡으로 재탄생되었다.  16)“실제로 관객은 시체를 파경에 다다른 사랑의 구체화로, 시체의 증식을 회한과 원한의 축적으로 간주한다.” Eugène Ionesco, Théâtre complet, Gallimard, Coll.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90, p.1577.  17)Eugène Ionesco, La photo du colonel, Gallimard, 1962. p.14.  18)Eugène Ionesco, Notes et contre-notes, 같은 책, p.232.

    3. 동물로의 변신

    1957년에 발표된 동명의 단편소설이 3막의 희곡 형태로 재탄생되어 무대에 올려진 『코뿔소』는 이오네스코가 젊은 시절 루마니아에서 체험한 파시즘의 염증과 고뇌가 문학적 상상력을 만나 하나의 예술로 승화된 것으로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19) 이데올로기와 체재가 일삼는 파괴 그리고 그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작가는 그로테스크한 동물의 마스크를 한 인간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괴물 같은 짐승으로 변형된 인물들이 카오스의 중심에 자리하는 지옥의 세계를 보여준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곳”20)이라는 작가의 고백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렇듯 작가는『코뿔소』에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의 팽창 속에서 인간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인간성과 비인간성’ 또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대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비인간성 혹은 전체주의는 이내 동물성으로 탈바꿈되며,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코풀소로의 변신을 선택한 자들의 그로테스크한 파괴의 광란은 대혼돈으로 치닫는다.

    일요일 정오 어느 지방 소도시의 광장. 맑은 하늘에 화창한 날씨. 그 평화로움을 깨는 한 마리의 코뿔소 출현으로 1막에서는 고양이가 짓밟혀 죽는다. 이것을 시작으로 코뿔소의 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베랑제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코뿔소로 변하기 시작한다. 2막이 시작되면 인물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뵈프Boeuf가 제일 먼저 코뿔소로 변신하고 곧이어 뵈프부인이 그를 뒤따른다. 베랑제 친구면서 그를 가장 많이 비난하는 장 또한 코뿔소로 변신한다. 이마에 혹이 돋아나고 피부색은 검푸르게 변하며 손은 딱딱해진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동물의 것에 가깝고 언어는 울음으로 변한다. 겉모습 뿐만 아니라 사고 또한 변질된다. 뵈프가 코뿔소로 변했다는 베랑제의 말에 장은 그리 놀라지도 않고 코뿔소로의 변신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인간의 도덕과 정글의 법칙을 혼돈하는 듯 하더니 이내 휴머니즘을 “우스꽝스런 감상주의”라고 매도하며 인간 사회를 떠난다(“내가 왜 코뿔소가 되면 안된단 말이지? 난 변화를 좋아해”21)). 이처럼 작품 속에서 가장 연극적이고 역동적인 부분으로 묘사되는 2막 2장에서의 장의 코뿔소화로 인해 인간의 본성을 옹호하는 베랑제의 두려움과 단절감은 증폭된다. 마침내 3막에서는 터무니없는 삼단논법을 펼치던 논리학자도, 좌파 성향의 퇴직교사 보타르도(“자기 시대를 따라야 해”),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기회주의 지식인 뒤다르도(“난 심사숙고했어! 내 의무는 좋든싫든 상사와 동료를 따라가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베랑제의 곁을 지키던 온화한 데이지도(“저들이 오히려 보통사람들처럼 보여요 ⋯ 아주 자연스러워 보여요. 저들이 옳았어요”, “당신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그 병적인 감정, 무기력함이 부끄러워요”) 모두 베랑제를 떠나 코뿔소 무리에 합류한다.22) 이데올로기라는 질병 앞에서 모든 인간 관계는 힘없이 무너지고, 그러한 질병에 감염된 코뿔소-환자들은 세상을 집어삼킨다. 코뿔소 대열에 저항하기에 이들은 너무나 공허하고 연약하다. 이렇듯 작가는 이데올로기의 야만성과 그것의 무분별한 확산을 매우 연극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더불어 뒤다르를 통해 우리는 이오네스코에게 지식은 곧 광신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수업』의 교수에서 목격하듯, 그것은 어김없이 개성을 파괴하고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또한 장과 논리학자의 태도는 코뿔소병, 즉 악의 징후에 다름 아니다. 장의 코뿔소화는 그럴듯한 외관뒤에 도사린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이고 거만한 언행을 봤을 때 이미 예견된 사태나 다름 없다. 우정은 거짓에 불과하며 사랑 또한 일시적이고 무익한 것일 뿐이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비관적관점은 『공중 보행자』의 베랑제와 조세핀 혹은 『갈증과 허기』의 장과 마리-마들렌느23)의 모습에도 투영되면서 미래의 아메데와 마들렌느 그리고 『의자』의 노부부를 예고한다.

    이와 같이 작가는 동물의 얼굴에 악을 부여하고 그러한 동물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카오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 연극 상연에서도 배우의 얼굴에 괴물의 몰골을 사용함으로써 재난의 성격을 부여했고, 그러한 보조장치를 통해 극은 더욱 희비극으로 확장된다. 관객은 육중하고 둔탁한 코뿔소 무리를 통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성을 목격한다. 베랑제 또한 다르지 않다. 아포칼립스Apocalypse 혹은 카오스Chaos로 뒤덮인 시간. 베랑제는 바로 그러한 묵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일한 인간의 지성으로 남을 것을 다짐한다. 사랑도 우정도 잃어버린 나약하기 그지없는 최후의 인간 베랑제. 차이를 없애고 획일화시키는 코뿔소병 앞에서 고독과 단절의 공포가 그를 엄습한다. ‘아름다운 코뿔소들’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그의 거부refus는 수동성의 최초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거부가 의도적인 자발성을 띠고 있고 하나의 결정을 표명하고 있기에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거부에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사유로 열리는 자기 거부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코뿔소 대열에서 유리되어 종국에는 으스러져 죽어갈 베랑제의 비극적 운명이 절망적 허무주의로만 빠지지 않는 이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는 베랑제의 마지막 거부의 몸짓이야말로 인간보다 더 우월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희망의 외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희망의 목소리. 구속받지 않은 자유의 목소리는 그것이 아무리 침울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인류를 해방시킨다. 혁명지도자 메르 피프의 군중들 틈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뉴브강24)을 찾는 노인처럼 이오네스코는 말한다. “나는 다뉴브의 농부로 남아있길 희망한다.”25) 온화하고 생기 없던 소심한 베랑제는 이제 작품이 대단원을 향할수록 자신의 시대와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위대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옳은 것은 늘 고독하다. 타인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는 심연, 차이에 의한 벽에 고립된 베랑제. 비인간적인 집단 폭력에 추종하기를 거부하는 베랑제. 그는 어떠한 반대 이데올로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코뿔소 전염병이 비본질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뿐, 그저 명석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본질을 보존할 뿐이다. 작가는 쓰고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사라질 운명에 처할 물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 나는 또 하나의 다른 물결이 아니라, 아마도 하나의 바위일 것이다. 다시말해 어떤 인간적인 연속성, 즉 때로는 파도에 의해 드러나지만 언제나 거기에 있는 일종의 보편적인 의식일 것이다. 되는 대로 살지 않기. 자신의 명석함을 지키고, 속지 않으며, 양식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기.”26) 작가에게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발작이다. 그리하여 베랑제는 바로 앞서 써진 『증거 없는 살인자』에서 “맙소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27)라고 말하는 베랑제보다 한층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교리교육의 슬로건 암송을 거부하고 테러 국가에 저항하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28)와 손을 잡는다.29) 이 작품이 나치즘의 드라마이면서 단지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초시간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이처럼 그것이 비단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한 정신과 본연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과 광기에 저항하는 휴머니즘을 말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이처럼 『코뿔소』에서의 카오스는 ‘인간(성)의 사라짐’으로 표현된다. 인간의 자리를 차지한 동물들은 인간의 공간을 점점 축소시키고 결국 영원히 소멸시킬 것이다. 무대 공간 역시 1막의 ‘카페 테라스’라는 열린 공간에서 2막 ‘베랑제의 사무실’과 ‘장의 방’, 3막 ‘베랑제의 방’과 같이 좁은 공간으로 닫혀지면서 주인공을 질식시키고 가속화되는 악의 팽창과 함께 최후의 인간 베랑제가 겪는 고독을 점점 절대화한다. 결국 코뿔소-인간이 몰고 온 카오스는 베랑제와 같은 보편적 인간을 파괴시킬 것이다.

    권력에 대한 성찰은 이오네스코의 전 작품을 통해 발견된다. 그에게 권력을 탐하는 모든 인간은 위험한 편집병 환자이며 그것을 행사하는 모든 인간은 미치광이이다. 정치인은 여러 모습을 띈 이름 모를 패륜아들이다. 어떠한 사람도 결백하게 통치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패륜의 징후이다. 덩컨 대공은 폭군이며 압제자요, 글라미스는 그가 군림하는 것이 증거라고 말한다. 선의의 권력, 현명한 구세주란 없다. 결정적인 구분은 죽인 자와 죽은 자들 사이에 있을 뿐이다. 이오네스코는 특히 『과거의 현재, 현재의 과거』를 통해 압제와 권위에 대한 증오를 자주 표명했다. “내가 보기에 권력은 항상 옳지 못하다.”30) “나는 권위를 증오하며” “모든 정의가 정의롭지 못하며, 모든 권위가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31)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내세우며 작가는 이렇게 덧붙이기도 한다. “그는 권위를 신봉했다. 그는 국가를 존중했다. 그는 국가가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국가를 신봉했다. 나는 권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국가를 증오했다. 나는 국가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믿지 않았다.”32) 작가에게 국가는 범죄의 방패막이다. 범죄를 부추기며 그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국가라는 존재이다. 교육과 다양한 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형이 살고 있는 『갈증과 허기』의 수도원-병사-감옥이야말로 작가의 성찰이 반영된 국가의 메타포이다. 이오네스코는 밝히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반항적”이며 “우두머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33) 이즈음에서 우리는 이오네스코의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만날 수 있다.

    19)1958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사우스필하우스 극장에서 슈트루의 연출로 초연된 이 작품은 1960년 프랑스 오데옹 극장에서 장-루이 바로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면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해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에서 오손 웰즈의 연출로도 공연된 바 있다.  20)Marie-Claude Hubert, Eugène Ionesco, 같은 책, p.140.  21)위의 책, p.76 그리고 p.77.  22)위의 책, p.98, p.103 그리고 p.113.  23)이오네스코의 희곡 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여인으로 묘사되는 마리-마들렌느는 『왕은 죽어가다』의 사랑스런 마리 여왕과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의 신경질적인 마들렌느를 동시에 환기시킨다. 장은 자신의 아내가 마리만큼 사랑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마들렌느의 남편처럼 도망가며 은빛 사다리는 결국 이들 부부를 영원히 갈라 놓는다.  24)독일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를 거쳐 흑해에 이르는 다뉴브강 연안에는 이오네스코의 삶이 묻어있는 도시가 산재해있다. 그가 태어난 ‘슬라티나’는 다뉴브강의 지류인 올트강 유역의 아름다운 소도시이며, 그의 아버지가 살던 ‘부쿠레슈티’는 다뉴브강을 끼고 있는 대도시로 작가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훗날 부쿠레슈티대학에 들어가 프랑스문학을 공부한다. 또 ‘체르나보다’라는 도시에서는 고등학교 프랑스어 교사생활도 한 바 있다.  25)Eugène Ionesco, Antidotes, Gallimard, 1977, p.77.  26)Eugène Ionesco, Prsent passé, passé présent, 같은 책, p.63.  27)Eugène Ionesco, Théâtre Ⅱ, Gallimard, 1958, p.172.  28)솔제니친A. I. Solzhenitsyn을 단숨에 세계적 작가로 만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는 스탈린 시대의 강제수용소를 묘사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성 말살의 참상을 고발한 그의 처녀작으로, 주인공의 강인한 저항정신과 인간 존중의 절규를 담은 현대 러시아의 비극이다.  29)Marie-France Ionesco et Paul Vernois (sous la direction de), Ionesco : Situation et perspective, Belfond, 1980, p.275 참조.  30)Eugène Ionesco, Prsent passé, passé présent, 같은 책, p.146.  31)위의 책, p.23 그리고 p.25.  32)위의 책, p.26.  33)Eugène Ionesco, Antidotes, 같은 책, p.76 그리고 p.115.

    4. 매몰과 추락

    이제 우리는 이오네스코의 연극 가운데 혼돈의 양상이 매몰과 추락의 모습으로 구현된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의무의 희생자』를 보자. 이 작품에서 슈베르는 마들렌느의 안내에 따라 진흙 속으로 빠져 희미한 과거의 진흙, 그 과거와 연결된 감정의 진흙 속에서 몸부림친다. “난 진흙 속을 걷고 있어. 진흙이 내 구두창에 들러붙어... 내 발이 천금같이 무거운 것 같아!”34) 그리고 이러한 진흙은 곧 에로티즘과 결부된다. “더 내려가세요. 진흙 속에서 팔을 뻗어요, 손가락을 펴세요, 그 두께 속에서 헤엄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말로에 닿으셔야 해요. 내려가세요... 내려가요...”35) 슈베르는 상상의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면서 턱까지 차오른 진흙 속으로 매몰되고 점점 성의 세계로 이끌려간다. 그리고 성의 상징성은 억압된 감정의 고통스런 회복이라는 총체적 경험으로 녹아든다. 하강의 경험이 작품 속에서 연극의 장면이 될 때 슈베르는 외친다. “... 고통스러운... 기쁨... 갈기갈기 찢기는 마음... 진정... 충만... 공허... 절망적인 희망. 내가 강하게 느껴진다. 내가 약하게 느껴진다. 아픈 것 같다. 건강한 것같다. 무엇보다 나는 느낀다. 아직도 느낀다...”36) 슈베르는 말로를 찾으면서 기쁨과 고통을 어지럽게 쏟아내고 자신을 억압했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에피소드들, 특히 부모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낸다.

    이오네스코에게 있어 ‘진흙’은 다양한 작품에 걸쳐 부각되는 부정적 물질 이미지로 매우 의미 있는 상징체계를 간직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억압감 가운데 하나인 매몰의 세계를 형상화하면서 때로는 습기와 부패를 끌고오며 죽음과 연관된다. 작가를 괴롭히는 이 불쾌한 물질 이미지는 희곡이 아닌 소설 「수렁La Vase」에서도 재발견되며, 『자크 혹은 복종』에서 로베르트Ⅱ가 자크를 유혹하는 장면에서도 출현한다. 갈증을 느끼는 자크에게 그녀는 속삭인다. “이리 와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요... 난 축축해요... 난 진흙으로 빚은 목걸이를 하고 있어요. 내 가슴은 녹고 있고, 골반은 물렁물렁해요, 갈라진 내 틈 속에 물이 있어요. 난 진흙 속에 빠집니다.”37) 여기서 물렁물렁하고 습한 진흙의 은유는 자크의 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으며, 로베르트Ⅱ를 이루고 있는 진흙은 성의 세계를 상징하면서 관능적인 매몰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의무의 희생자』에서 마들렌느가 슈베르에게 그러했듯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마냥 어린 시절에 머물고자 하는 자크를 부추켜 성의 세계로 매몰시키는 사람 역시 그의 아내 로베르트Ⅱ이다.

    이제 우리는 추락의 희비극을 그린 『공중 보행자』를 살펴볼 것이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에서 무대장치는 종종 애매하고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무대장치가 하나의 장소를 재현한다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을 반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공중 보행자』의 무대장치 역시 그러하다. 평화로운 초록으로 빛나는 무대는 베랑제의 쾌활함이 절망감으로 바뀌면서 불안한 암흑으로 대체되며, 지상 낙원을 연상시키는 평온한 무대배경은 지옥으로 변모한다. 베랑제는 얼마 전부터 아름다운 시골의 조그마한 집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막이 오르면 “무대 안쪽 오른편에 보이는 첫 번째 집들이 사월의 태양을 받아 새하얗고 환하게 빛난다. [⋯] 하늘은 너무도 파랗고 청명하다. 무대 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도 있다 : 꽃이 핀 체리나무와 배나무들.”38) 여기에 계곡을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작은 강까지, 이 모든 정경은 이오네스코가 어린 시절 보냈던 샤펠-앙트네즈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천진난만하게 시골을 산책하며 들뜬 기분으로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이야기하려는 찰나, 그의 집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집은 파괴되고 좋았던 그의 기분은 엉망이 된다. 이어 다른 세계l’Autre monde로의 관통을 가능케 해주는 은빛 다리가 무대 위로 드리워진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랑슬로가 건너간 검劍의 다리39)에 비견할 만한 이 은빛 다리를 통해 우리의 새로운 서사적 영웅, 베랑제는 이제 지옥을 향해 들어갈 것이다.

    걷기와 뛰기를 거듭하면서 베랑제는 땅과 공중을 오가며 보행하고, 숨을 쉬는 것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며 환희에 젖어든다. 이 때 무대 안쪽 천장으로부터 서서히 내려오는 붉은 풍선은 베랑제가 품고 있는 비행의 욕망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보인다. 작가는 일기에서 적고 있다 : “행복감은 거대해져 끝내는 비인간적으로 되고 말았다. 나는 대기를 들이마셨다. 마치 나의 폐를 대신한 푸른 하늘의 조각들, 즉 물과 공기의 중간인 이 천상의 실체인 심장, 간, 뼈들을 삼키듯이. 그러자 그것이 나를 너무나 가볍게 만들었고, 점점 더 가볍게 만들어 걸으려는 나의 노력들을 사라지게 했다. 마치 나는 더 이상 걷지 않는 것 같았다. 뛰어 오르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단지 의지와 에너지를 집중하면 될 뿐. 나는 꿈에서처럼, 혹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이 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40) 베랑제 역시 이오네스코처럼 비행을 찬양한다. 희망의 역동적 이미지인 비행의 꿈, “그건 되찾아야 할 하나의 습관일 뿐” 예전엔 모든 사람들이 날 줄 알았는데 다만 잊었을 뿐이며, “의지만 있으면 아주 쉬운 일”이라고 비상의 진실을 역설하며 그는 몸소 날아오른다.41) 넘쳐흐르는 빛 속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른 슈베르처럼 베랑제는 천상에서의 산책을 기뻐하며 찬양한다. 마침내 하얀자전거가 나타나고 베랑제는 그 위로 몸을 싣는다. 공중으로 비상하기 시작할 때 베랑제의 기쁨은 절정에 달한다. 우리의 새로운 이카로스, 베랑제가 비상할 때 “일종의 빛나는 공 혹은 불꽃을 단 로켓이 보인다. 그것은 눈에 보였다 사라졌다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차 멀어져간다.”42) 이리하여 등장인물과 무대장치는 하나가 된다. 베랑제의 내면에 깃든 하늘 혹은 빛으로의 도피 욕망은 은빛 다리, 공, 자전거로 구체화되며, 이러한 도피 욕망은 이오네스코 연극에서 종종 발견되는 테마이다. 자크는 집을 탈출할 수 있는 지붕의 뚜껑문을 찾고, 무서운 살인자가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베랑제는 ‘빛의 도시’에 열광한다.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가벼움을 소망하며 자유를 찾고자 아메데는 결국 베랑제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그러나 베랑제의 비행은 가혹한 추락으로 이어지고 비행의 해방감은 짧은 순간으로 끝나고 만다.

    이제 평화로운 시골 이면에 숨겨진 반세계l’Anti-Monde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로테스크한 광란과 부조리가 만연한 지옥, 악으로 부패해버린 잔혹한 세상, 희망 없는 환멸의 반사 공간인 반세계. 무대는 어두워지고 세상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확산된다. 붉게 물든 핏빛 섬광이 하늘을 밝히고 천둥소리와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조명이 다시 밝혀졌을 때, “그것은 풍경에 회색의 처량하고 어스름한 분위기를 주는 또다른 조명이다 ; 어쩌면 무대장치 안쪽에서 폭격 당한 몇몇 폐허들, 연기 나는 화산, 성당을 보게 될 수도 있다.”43) 베랑제는 고통 속에서 세상의 종말과 자신의 모험담을 전한다. 무대 공간은 베랑제의 정신적 혼돈을 드러내고,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던 무시무시한 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44) 시시각각 적절히 변화하는 무대 장치와 조명을 통해 베랑제의 비행과 추락은 영웅적 행위와 고통스런 시련으로 상징된다. 이오네스코는 주인공이 고통을 토로하기 전에 이미 그의 고통을 나타내는 표지들을 무대위에 먼저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공간이 매우 의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제 꿈과 환상이라는 초현실은 더 이상 희미한 암시가 아니라 분명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친근한 몽환의 세계임이 밝혀진다.

    이오네스코의 등장인물들은 꿈꾸어진 삶과 현실적 삶의 경계에서 살아 간다. 다시 말해, 일상적인 일이 이상한 일을 설명하고 이상한 일이 매순간 일상적인 일 속에서 확인되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기호를 바꿀 수 있는, 진실과 환상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진지한 것이 비자발적이면서 동시에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중간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오네스코는 『공중 보행자』라는 이 작품을 통해 나날의 일상을 초월하여 유년 시절의 놀람과 꿈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일상을 넘어 유년 시절 경험했던 경이로운 기적을 되찾기 위하여, 태초에 있었던 순결한 세상과 유년 시절 경험한 천국의 빛 그리고 이제 막 탄생한 듯한 손대지 않은 우주의 그 첫 번째 날의 영광, 퇴색되지 않은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자신은 글을 쓴다고, 그에게 글을 쓰는 동기는 그와 같은 것임을 작가는 고백한다.45)

    34)Eugène Ionesco, Théâtre Ⅰ, 같은 책, p.196.  35)위의 책, p.199.  36)위의 책, p.211.  37)위의 책, p.124.  38)Eugène Ionesco, Théâtre Ⅲ, Gallimard, 1963, p.121.  39)Chrétien de Troyes, Romans de la Table Ronde, Gallimard, 1975, p.190. 크레티앵 드 트루아는 아더 왕 문학을 보여준 첫 세대의 대표적 작가로, 아더왕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아더 왕의 궁정을 배경으로 여러 기사들이 겪는 경이롭고 환상적인 모험을 주로 이야기한다. ‘검의 다리Pont de l’Épée’는 『수레의 기사 랑슬로』에서 멜레아강에게 붙잡혀간 아더 왕의 왕비 기네비어를 구하기 위해 랑슬로가 건너야하는 다리이다. ‘검의 다리’를 건너 여러 적들과 싸워이기고 멜레아강까지 물리친 랑슬로는 마침내 기네비어의 사랑을 얻게 된다. 아더 왕을 중심으로 한 여러 기사들의 무용담과 사랑 이야기가 다름 아닌 중세 프랑스문학의 한 갈래인 궁정 소설이다.  40)Eugène Ionesco, Présent passé, passé présent, 같은 책, pp.224~225.  41)Eugène Ionesco, Théâtre Ⅲ, 같은 책, p.169 그리고 p.170.  42)위의 책, p.177.  43)위의 책, p.190.  44)“너무 늦었다.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가야 이 묻혀버린 빛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 여기저기에서 표류물이 썩어 분해된다. 기억하기, 혼돈 속에서 찾기. 나는 내 오랜 과거의 잔해들을 찾기 위해 굳은 땅을 파헤친다. [⋯] 이제 나는 또 하나의 비탈을 내려가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일 뿐이다. 산의 절벽은 나를 나 자신과 분리시킨다.” Eugène Ionesco, Prsent passé, passé présent, 같은 책, p.36.  45)Eugène Ionesco, Antidotes, 같은 책, pp.314~316.

    5. 세계의 해체

    초기 극작품들에서 언어의 해체를 통한 반연극, 조롱의 전위 연극을 추구하던 이오네스코의 극작술은 ‘베랑제Bérenger’라는 주인공의 출현으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른바 ‘베랑제 사이클’이라고 명명된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줄거리를 지닌 비교적 전통적인 드라마의 구조를 띤 연극들을 선보인다. 『증거 없는 살인자』에서 처음 등장한 베랑제는 알 수 없는 악의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코뿔소』에서는 죽음 앞에 직면하고, 『공중 보행자』에서는 이카로스처럼 비상을 꿈꾸다 지옥으로 떨어지며, 『왕은 죽어가다』에서는 마침내 죽어가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오네스코가 ‘베랑제’를 내세워 집필한 네 편의 연극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은 죽어가다』는 장-자크 고티에의 언급처럼 그의 모든 극작품을 통틀어 가장 고전적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46) 전통극에 대한 격렬한 반기를 들면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연극 기법을 선보이며 이른바 ‘새로운 연극’을 추구하던47) 작가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인물의 유형이나 대사, 극의 전개나 짜임새 등이 일반적이고 엄격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작품의 주제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인 ‘죽음’, 즉 개인의 강박이자 집단의 악몽인 타나토스Thanatos를 다루고 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이오네스코의 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고 있지만 이 작품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으로만 이루어져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막이 오르면 우리는 터무니없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왕, 베랑제1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주홍빛 망토와 왕관을 쓰고 왕홀을 쥔 채 위풍당당하게 행차해야 될 것 같은 왕은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게 맨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고 이내 신체적 통증을 호소하면서 점차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왕은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착란과 환상에 빠져 죽음을 거부하지만, 작은 체념들을 거듭하고 난 후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왕비 마그리트가 주재하는 하나의 의식cérémonie처럼 그려진다. 마그리트는 “지혜와 이성과 규칙”이며 바로 “죽음을 주재하는 파르크Parque”이다.48) 이 작품은 이오네스코가 병상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나는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이것은 하나의 교훈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일종의 영적인 연습과도 같은,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애써 한 단계 한 단계 다가가도록 만들고자 했던 점진적인 행진과도 같은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49) 요컨대 이 작품은 작가에게는 죽음을 학습하고 연습하는 글쓰기요, 관객에게는 죽음의 풍경을 무대화한 하나의 예술로 다가온다. 이처럼 『왕은 죽어가다』는 이오네스코의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아가 가브리엘 리세뉘의 논평대로 이 작품은 “죽음의 소동”을 다루었지만 이와 동시에 “삶의 소동”을 다룬 작품이며, 그것이 또 다른 소동인 “악의 소동”까지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50) 죽음의 의식이 진행될수록 세상과 왕을 이어주던 끈들은 하나씩 소멸되고, 죽음의 침범으로 인한 왕의 고뇌는 무대 위에서 카오스적 공간으로 고스란히 투영된다.

    작품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이상 징후들이 도처에서 출몰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카오스적 공간은 왕국의 축소와 파괴의 형태로 먼저 나타난다. 전쟁 중인 왕국은 군인들의 거부로 영토가 축소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국토는 황무지가 되고, 산은 내려앉고, 바다가 제방을부숴 온 나라가 물바다”51)인 왕국은 기상천외한 대재난 앞에 속수무책이다. “사막이었던 이웃 나라에서는 초목이 다시 자라는데 이곳에서는 농작물이 썩고 영토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으며” “국경너머에는 풀이 자라기 시작하는데 [⋯] 왕국에는 나뭇잎이 지고 메말라 떨어진다. 나무는 한숨쉬며 시들어 죽고 땅은 보통때보다 더 빨리 갈라진다.”52) 게다가 자연 현상과 천체 현상에서 발견되는 비정상적 징후들까지 가세하여 왕국은 그야말로 대혼돈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화성과 토성이 충돌하여 둘 다 폭발해버렸으며, 태양도 50내지 75퍼센트 능력을 상실했다.”53) 땅이 갈라져 건물과 사람들이 구멍 속으로 전부 빠져버리는가 하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개구리 비를 퍼붓고 그 비에 고기를 잡던 장관들이 개천에 빠지고 개천은 심연으로 흘러가버린다. 지진과 홍수에 의한 죽음이 왕국에 드리워지는 순간이다. 여기에 행성의 충돌과 폭발까지 가세하여 상황은 점점 우주의 파멸로 치닫는다. 이렇듯 급속히 황폐해지고 노화되는 세상의 풍경은 점점 지옥을 닮아가고, 그러한 모습은 지속적으로 왕의 병증과 겹쳐지면서 악화되는 왕의 건강상태를 가시화한다. 세상은 조물주처럼 군림하던 전지전능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신하들도 더 이상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베랑제는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듯 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류이면서 우주이기도 하다. 그의 노화와 죽음은 곧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옥했던 왕국은 폐허가 되고 점차 단 하나의 궁전으로 축소되어 마침내 왕실만 남게 된다. 마치 공간은 왕이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된다.54)

    왕실은 막이 오를 때부터 이미 해체의 조짐을 안고 있다. 먼지와 담배꽁초, 거미줄 등으로 상징되는 무질서와 불결함은 신성한 왕실의 전락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장난 난방기와 균열이 생긴 벽, 한여름인데도 난방을 해야 하는 추운 왕실은 이미 병에 걸린 상태로 보인다. 무대 공간의 이같은 부패와 해체는 점차 악화되어 가는 왕의 건강상태와 동일한 궤도를 달린다. 왕의 육체는 거대한 세계를 닮은 하나의 소우주이며, 병든세계와 왕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소멸되어 태양이 뜨지 않는 어둠 속으로 잠식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심리는 무대 공간에 그대로 반영되며 왕의 육체는 그러한 공간과 밀접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듯 보인다. 공간은 인물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종종 의인화되고 마침내 인물과 하나가 된다. 즉, “공간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일부가 공간과 섞여 물질화된다. 말이 없는 공간은 완전히 인물묘사의 한 구성요소가 된다.”55) 이렇듯 『왕은 죽어가다』의 공간은 죽음이라는 강박과 악몽으로 점철된 타나토스의 소굴로 그려진다. 육신의 향락과 생의 기쁨에 집착하던 군주는 마침내 죽음의 질서에 복종하게 되며 카오스적 세계의 확산과 환원을 통하여 고요한 어둠인 ‘무’로 빠져들어 이오네스코의 연극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할 것이다. “이제 무대 위에는 회색 빛에 둘러싸인 채 왕좌에 앉아 있는 왕 뿐이다. 이어 왕과 왕좌도 사라진다. 마침내 무대 위에는 회색 빛만 남게 된다.”56)

    이어서 우리는 세계의 해체와 소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으로 『부부의 망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오네스코는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서 보여준 극적 상황을 반복한다. 반복은 강박이고, 변주는 뉘앙스의 재기발랄함이자 분석의 또 다른 기지이다. 작품의 주인공 ‘그’와 ‘그녀’는 아메데와 마들렌느처럼 아파트에 갇혀 살며 17년 전부터 끊임없이 말다툼을 해왔다. 이들의 관계는 아메데의 냉랭한 커플에 비해 다소 폭력적인 양상으로 비춰진다. 그와 그녀는 “거북이냐, 달팽이냐”라는 터무니없는 문제로 싸움을 하기 시작하고 무대 위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돈다. 이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 갇혀 바깥 출입이 불가능하다. 또한 이들의 언쟁은 도시의 두 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완벽히 중첩되면서 『대머리 여가수』나 『4인의 무대』보다 훨씬 격렬하게 형상화된다. 그와 그녀가 서로의 뺨을 때리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점점 거세지고, 두 사람의 싸움이 격양되면 저 멀리 어렴풋이 들리던 총격 소리와 함성이 침실 창문 아래에까지 다다른다. 침실에서 전개되는 작은 전쟁에서는 모욕적인 말들이, 외부세계의 전쟁에서는 포탄들이 비 오듯 쏟아진다. 연극이 전개될수록 창유리를 깨부수는 총알, 닫힌 덧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유탄, 포탄의 불빛들은 점차 거세진다. 대단원에 접어들면 급기야 침실의 벽과 천장이 무너진다. 무대 위에는 석재와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포탄과 함께 마구 굴러다닌다. 그런데 집이 완전히 파괴되었을때 전쟁의 소음들은 축제의 소음들로 대체된다. 그와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자신들이 어찌될지 두려워 서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전쟁의 잔해들 속에서 즐거워하는 군인의 얼굴과 바캉스에서 돌아오는 이웃의 등장을 주저 없이 차단한다. 그와 그녀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들은 파괴된 침실을 복구하고 구멍을 막아 다시 방에 갇힌다. 마치 『살인놀이』의 집 주인이나 『끔찍한 사창가』의 주인공이 외부세계와 연결된 구멍은 죄다 틀어막고 스스로 유폐되는 그러한 강박적인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로써 지금까지 전개된 외부세계의 전쟁은 오직 등장인물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광기와 착란의 결과란 사실이 드러난다. 전쟁은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부부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정신착란의 한 테마이며, 그 전쟁이 끝나자 부부는 감기, 세균과 같은 또 다른 테마를 찾는다.

    한편, 전쟁이 부부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외부에서 무대 위로 날아 들어온 포탄은 깨진 찻잔, 담배통, 인형의 머리 등등 비현실적이고도 환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포탄의 첫 등장은 인물들의 불안이나 초조와 같은 불쾌감을 형성한다. 새로운 세입자의 가구들처럼 이들은 외부에서 들어오고, 증거 없는 살인자처럼 내부에 살고 있는 자들의 삶을 위협한다. 그러나 포탄은 점차 모습을 바꾼다. 살인자였던 “이 포탄들은 코믹하거나괴상망측하게 변한다”57) 그리고 포탄이 야기하는 위험은 점차 감소하여 막이 내릴 무렵에는 아무런 해가 없는 잔해에 불과해진다. 이것은 『아메데 혹은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서 걷잡을 수 없는 성장으로 주인공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공포에 떨게 한 시체가 결국엔 아메데가 꿈꾸던 곳으로의 비상을 가능케 해주는 것과 유사하다. 그와 그녀에게 들이닥친 혼돈은 위험천만해 보였지만 그것이 종국에는 비현실적인 놀이, 즉 축제로 드러나면서 심각함은 파편화된다. 무대 공간의 점진적 해체는 아메데와 마들렌느에서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주인공들의 망상을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와 그녀의 언쟁은 또 다시 되풀이될 것이다. 결국 관객이 짓는 웃음은 비극에 의해 위협받는 애매하고 씁쓸한 웃음, 즉 고통을 동반한 불안정한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이오네스코의 희비극의 개념도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작가는 『부부의 망상』에서 농담과 유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와 외관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공격적인 방식으로 무대화하고 있다. 침실의 점진적인 해체는 외부세계와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재차 말해주는 것이다. 『왕은 죽어가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내면은 인물 밖 세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두 세계의 경계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왕은 죽어가다』와 『부부의 망상』은 유희적 기능을 수반한 채 희극적인 것에서 비극적인 것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전자에서의 해체와 소멸이 죽음을 위한 행진의 전주였다면, 후자에서의 그것은 아메데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착란이 외부에 투사된 결과물, 즉 내적 고통의 물질화로 보인다.

    46)“이것은 비통한 작품이면서 또한 익살스러운 작품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식의 희비극이다.” Jean-Jacques Gautier, Le Figaro, 1966년 12월 7일, Claude Abastado, Ionesco, Bordas, 1971, p.169에서 재인용.  47)“그 어떤 것도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젠 이오네스코, 『발견』, 같은 책, p.123.  48)Claude Abastado, Ionesco, 같은 책, p.171.  49)Eugène Ionesco, Journal en miettes, Gallimard, 1967, p.126.  50)Marie-France Ionesco, Norbert Dodille et Gabriel Liiceanu, Lectures de Ionesco, L’Harmattan, 1996, p.68.  51)Eugène Ionesco, Théâtre Ⅳ, Gallimard, 1963, p.15.  52)위의 책, p.26 그리고 p.17.  53)위의 책, p.17.  54)Marie-Claude Hubert, Langage et corps fantasmé dans le théâtre des années cinquante, 같은 책, p.42.  55)위의 책, p.44.  56)Eugène Ionesco, Théâtre Ⅳ, 같은 책, p.74.  57)Eugène Ionesco, Théâtre Ⅲ, 같은 책, p.217.

    6. 맺음말

    소설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종종 신문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왔다. 온 세상에 대량학살, 반란, 치정살인, 지진, 화재, 무정부 상태와 독재 따위 뿐이다.”58) 결국 혼돈은 나날이 넘쳐난다. 이오네스코가 작품 속에서 그리는 혼돈의 지옥은 어떠한가. 상상의 지옥, 신학상의 지옥, 과연 그러한 것인가. 작가는 말한다. 우리 곁에 지옥이 존재한다고. 때때로 우리가 넘나드는 벽의 뒤에, 또 다른 벽, 보이지 않는 벽의 뒤에 지옥이 있으며, 그로 인해 기적에 관한 의식이, 찬란한 빛의 천국이 희미해진다. 빛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고, 세계의 악몽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며 혼돈은 불현듯 다가와 온세상을 지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혼돈’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오네스코의 다양한 극작품들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작품 속 무대 공간이 단순히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인물의 외부에 놓여있는 하나의 심상이요, 영혼을 비추는 거울임을 알 수 있었다. 시체의 성장이라는 기상천외한 현실, 착란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공허, 이데올로기의 전염으로 파괴된 그로테스크한 세계, 카오스의 접근으로 명백히 드러난 죽음의 진실, 찬란히 날아올랐으나 결국 맞닥뜨린 세계의 종말, 아포칼립스적 비전. 이들은 바로 세계에 잠복해있는 카오스의 여러 얼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며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강박과 불안과 악몽이 뒤섞인 내적 모험의 다양한 투사체이다. 또한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는 이들, 자아와 타자의 경계, 그 심연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이카로스, 이들은 모두 이오네스코의 여러 모습이기도 하다.

    한편, 이오네스코의 삶과 작품에 깃들어 있는 극도의 불안은 무대 위에서 카오스의 세계로 가시화되지만 그것은 불안의 끝, 영원한 고요, 즉 거대한 무라는 심연으로 흘러간다. 등장인물이 사라지면 오직 공허만이 남는다. 평화로운 충만의 순간은 언제나 찰나에 불과하다. 음침한 빛의 세계는 이내 잿더미로 변하거나 깨질 운명에 처한 유리의 세계이다. 『증거 없는 살인자』, 『공중 보행자』, 『코뿔소』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항상 되돌아 가고픈 영원한 향수, 잃어버린 낙원으로 남는다.

    요컨대 이오네스코의 극적 현실은 보다 더 큰 고뇌를 창조하는 환상적 차원의 형이상학적 대혼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존재하기를 멈추는 연극 『왕은 죽어가다』는 존재와 비존재의 희비극이다. 베랑제 왕에게 살아감은 곧 죽어감이요,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또 『왕은 죽어가다』만큼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때의 풍경을 잘 묘사한 『공중 보행자』에서 꿈은 끝이 없으며, 깨어 있음은 시작이 없다. 꿈과 깨어남 사이에 중지란 없는 듯 보인다. 깨어있는 꿈의 무대, 그 속에서 현실과 몽환이 아무런 장막없이 자유로이 왕래한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영원과 덧없음. 양립할 수 없고 융화할 수 없는 이러한 실체들을 공존케하는 불가능한 시도와 모순들 앞에서 관객들은 무장해제된다. 혼돈은 돌고 돌며, 소멸에 대한 위협은 영원하다. 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두려움에 떠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오랫동안 혼돈 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끊임없는 존재론적 탐색을 통해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외젠 이오네스코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극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8)Eugène Ionesco, Le Solitaire, Mercure de France, 1973,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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