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체 메뉴
PDF
맨 위로
OA 학술지
The New Historicist Interpretation on the Concept and Category of Historical PlayThe New Historicist Interpretation on the Concept and Category of Historical Play 역사극의 개념과 범주에 대한 신역사주의적 해석*
  • 비영리 CC BY-NC
ABSTRACT
The New Historicist Interpretation on the Concept and Category of Historical PlayThe New Historicist Interpretation on the Concept and Category of Historical Play

한국 역사극의 역사를 서술할 때 부딪치는 첫 번째 문제는 연구의 대상으로서 역사극의 외연을 설정하는 일이다. 역사극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역사극의 역사가 다르게 서술되기 때문에, 역사극의 개념과 범주가 역사극의 역사를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메타역사다. 연극이 공연됐던 시점에서는 역사극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에서는 역사극으로 공연되는 연극이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연극을 역사극의 역사에서 제외해야 하는가, 포함시킬 수 있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가 역사가 됨에 따라 역사극의 외연이 확장된다. 또 역사극 개념 정의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가 역사극의 역사를 계속해서 다시 써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역사극은 당대의 역사담론이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만들어진 텍스트다. 신역사주의는 현재와 과거의 의사소통관계를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상호작용으로 재정의 하는 사조다.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상호작용이 추구하는 것은 과거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효과’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같은 ‘역사효과’를 연극의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장르가 역사극이다. 역사극이란 과거의 사람들이 생산한 사회적 잠재에너지를 연극의 방식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만든 역사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정의에 입각하면,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통해서 사회적 잠재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창작된 모든 연극을 역사극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포괄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신역사주의 관점에서 ‘한국적’ 역사극의 기원을 해명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한국사의 콘텍스트라는 역사성이 ‘한국적’ 역사극의 내용을 채우는 충분조건이라면, ‘한국적’ 역사극 텍스트의 고유한 형식을 창안할 때가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한국적’ 역사극의 탄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됐는가? 1970-80년대 사회변혁 운동의 콘텍스트 속에서 나온 마당극이 ‘한국적’ 역사극 텍스트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켰다는 것이 본 논문의 테제다.

KEYWORD
New Historicism , Historical play , Madangg?k , history effect , textuality of history , historicity of text
  • 1. ‘역사극의 역사’의 메타역사로서 역사극 개념과 범주

    한국 역사극의 역사를 서술할 때 부딪치는 첫 번째 문제는 연구의 대상으로서 역사극의 외연을 설정하는 일이다. 역사극 외연이 역사극 범주를 이룬다면, 이 같은 범주는 역사극 내포를 형성하는 역사극 개념이 결정한다. 내포와 외연은 반비례적인 함수관계를 형성한다. 역사극 외연을 넓히면 역사극 개념이 애매하고, 역사극 개념 규정을 엄격히 하면 역사극 범주는 좁아진다. 결국 역사극 개념과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역사극의 역사가 다르게 서술되므로, 역사극 개념과 범주가 역사극의 역사를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메타역사다.

    종래의 역사극 연구는 주로 루카치가 『역사소설론』에서 제시한 역사극 개념에 입각해서 이뤄졌다. 루카치는 역사극을 “모든 인간들로부터, 역사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보편적이며 합법칙적으로 존재했던 특징들을 이끌어내 보여주는” ‘역사적 현재’로 과거를 체험하는 감동을 주는 연극이라고 정의했다.1) 과거를 현재의 전사(前史)로 파악할 때 ‘역사적 현재’라는 개념이 성립하며, 여기에는 역사를 미래의 진보를 향한 ‘운동의 총체성’으로 보는 근대의 거대담론이 함축돼 있다.

    한국 연극사에서 1930년 중반이래로 1940년대까지 역사극은 어느 연극 장르보다도 많이 공연됐다. 하지만 루카치의 역사극 정의에 입각할 때 이 시대는 역사극 없는 역사극 전성시대다. 이 같은 모순을 극복해야 하다는 것이 역사극 연구자들의 오래된 문제의식이다.2)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역사극에 대한 하나의 이상형을 설정하고 그것에 비추어 역사극의 현실태를 비판하기보다는 당대 역사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창작됐던 역사극들을 귀납적인 연구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타났다.3) 하지만 이 같은 제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왜냐면 개념 없는 인식이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과거를 역사로 인식하느냐를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역사 개념이며, 이 같은 메타역사를 근거로 해서 특정시대 역사가 서술된다. 역사가는 과거의 바다로 역사라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어부로 비유되곤 한다. 어부가 어떤 물고기를 잡느냐를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가 들고 가는 그물이다. 이 그물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역사 인식의 프레임을 규정하는 역사 개념이다. 따라서 역사극 개념과 범주에 대한 메타역사적 성찰 없이 특정시대에 창작됐던 역사극들을 귀납적으로 연구해서 서술된 역사극의 역사는, 역사극이란 무엇인지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 물음에 대한 동어반복적인 대답만을 줄 뿐이다.

    연극이 공연됐던 시점에서는 역사극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 우리시대에서는 역사극으로 공연되는 연극이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연극을 역사극의 역사에서 제외해야 하는가, 아니면 포함시킬 수 있는가? 1970∼80년대 한국 역사극의 지형도를 그리는 박사논문을 썼던 백소연은 전자의 입장에서 6·25 전쟁을 소재로 극화한 작품들을 분석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한 변론으로 그는 “물론 이러한 기준은 편의에 의거한 것이며, 논점과 논의시기에 따라 유동적 설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본다.”고 썼다.4) 결국 논점과 논의하는 시기에 따라 역사극의 개념과 범주가 다르고, 이에 따라 역사극의 역사의 서사 구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유동성의 문제를 당대의 역사극 담론을 아르키메데스 지점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역사극의 지형도를 그것이 공연됐던 당대의 역사담론이 역사극으로 인정한 것들 만을 대상으로 그린다면, 이 같은 지형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1970∼80년대의 관점으로 그려진 지형도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위한 한국 역사극의 역사를 조망하는 인식의 지도가 될 수는 없다. 예컨대 백소영이 1970∼80년대 역사극의 역사에서 제외시킨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연극은 당대에서는 역사극이 아닌 시대극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가? 1962년에 처음 공연된 차범석의 <산불>은 당대의 시각으로는 역사극이다. <산불>이 한국전쟁에 대한 미학적 거리화가 미흡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두 세대 정도의 세월이 경과한 후에서나 역사극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가 역사가 됨에 따라 역사극의 외연이 확장되고, 또역사극 개념 정의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가 역사극의 역사를 계속해서 다시 써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역사극의 역사를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메타역사인 역사극의 개념과 범주 자체가 변한다면, 역사극의 역사라는 텍스트는 역사극 개념과 범주의 역사성을 콘텍스트로 하여 서술돼야 한다. 따라서 귀납적 연구를 함으로써 역사극 개념과 범주에 대한 메타역사적 성찰을 생략할 것이 아니라, 역사극 개념과 범주를 역사극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 가설 연역적 전제로 삼아야 한다. 칼 포퍼가 주장했듯이, 귀납법에 의한 일반화가 아니라 가설 연역적 전제를 추측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논박해 나가는 반증의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할 때 지식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5) 이에 반해 루카치의 역사극 개념을 한국 역사극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가설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존재확인을 증명해 주는 역사극의 이데아(idea)로 선험적으로 상정하는 역사극 연구는 지식의 진화가 아니라 순환논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역사극은 역사라는 내용과 연극이라는 형식의 결합태이다. 역사극의 내용을 형성하는 역사 개념 그 자체가 각 시대마다 변화하는 속성을 갖기 때문에 역사극 개념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그 자체가 역사적 형성물이다. “모든 시대는 신에 직결된다.”는 랑케의 말처럼, 모든 시대는 나름의 역사극 개념을 내재한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도덕의 계보』에서 비역사적인 것만이 정의할 수 있고, 역사성을 가진 개념은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해석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역사극의 역사란 역사극이란 무엇인지를 이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대의 역사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여 이해하는 과정이다. 모든 이해는 무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을 갖고 한다. 이 선입견에 해당하는 것이 연구자가 설정하는 가설 연역적 전제로서의 역사극 개념과 범주다.

    필자는 이 글에서 신역사주의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극 개념과 범주를 역사극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가설 연역적 전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사로서 역사는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가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임의로 역사 텍스트를 생산하지 않는다. 역사서술이든 역사극은 당대의 역사담론이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만들어진 텍스트다. 해체주의 역사인식론은 역사로 서술된 과거만이 기억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로서의 역사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테제로 역사의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서 ‘역사의 텍스트성(the textuality of history)’ 뿐 아니라 ‘텍스트의 역사성(the historicity of text)’을 재인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신역사주의가 대두했다.6) 신역사주의는 역사가의 현재와 과거의 의사소통관계를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상호작용으로 재정의 하는 사조다.7)

    역사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는 E. H. 카의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의 문제점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사람과의 대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성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카의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 같은 불가능한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8) 이 같은 문제사적인 맥락에서 신역사주의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역사적 의사소통이 텍스트를 매체로 해서 이뤄진다고 봄으로써 카가 남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신역사주의는 현재와 과거의 의사소통관계를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상호작용으로 재정의했다. 이 같은 재정의는 한편으로는 역사의 과학화를 통해서 상실된 역사의 문학성을 재인식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성과 텍스트성의 재결합을 통해 사실과 허구의 근대적 경계를 가로질러 넘을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상호작용이 추구하는 것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나타나는 역사효과를 생산하는 일이다. 이 같은 역사효과를 연극으로 구현하는 장르가 역사극이다. 역사극이란 과거의 사람들이 생산한 사회적 잠재에너지를 연극의 방식으로 재활성화 시켜서 발전시키기 위해 만든 역사서사다. 이 같은 정의에 입각하면,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통해서 사회적 잠재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창작된 모든 연극을 역사극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포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역사극 개념 규정과 범주의 확장은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하는 모든 연극을 포괄하는 그야말로 역사극의 ‘빅뱅’을 촉발해서 궁극적으로는 역사극의 종말을 초래한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종전의 한국 연극사에서는 역사극의 결여가 과제로 제기됐다면, 탈근대라 불리는 우리시대에서는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와 같은 당대의 일상극까지도 역사극 범주에 포함시키는 대폭발로 인한 역사극 정체성 위기가 문제로 대두된다. 이 논문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1970-80년대 역사극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역사극 문제가 전도되는 이행기에 해당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이행기를 연극사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우리시대 역사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마련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역사극 개념과 범주에 대한 신역사주의적 해석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게오르그 루카치, 이영욱 역, 『역사소설론』, 거름, 1978, 194쪽.  2)이화진,「일제 말기 역사극 연구- 함세덕의 <낙화암>의 경우」,『한국극예술연구』제18집, 국극예술학회 편, 2003; 김강원,「박정희 정권 시기 역사극 연구」 『한국극예술연구』제26집, 한국극예술학회 편, 2007.  3)백소연, 『1970-80년대 역사극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10, 14쪽.  4)백소연, 앞의 논문, 18쪽.  5)칼 포퍼, 이한구 역, 『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민음사, 2001년.  6)루이스 몽트루즈는 신역사주의 특징을 ‘역사의 텍스트성’과 ‘텍스트의 역사성’의 교차로 설명했다. 그는 ‘역사의 텍스트성’이란 말로 인간의 행동, 제도, 관계가 견고한 사실이지만 언어로부터 분리 가능한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텍스트의 역사성’의 표현을 통해서는 텍스트의 의미는 초월적이지 않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Louis A. Montrose, "Professing the Renaissance: The Poetics and Politics of Culture", Aram Veerser ed., The New Historicism, London: Routledge, 1989, p.20).  7)신역사주의에 대한 국내연구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주로 서구의 이론을 소개하는 데 머물고 그 이론을 적용하여 한국 문학사와 연극사를 재조명하는 연구는 다음의 석사논문 이외에 없다는 점이 아쉽다. 최영희,「오태석의 역사극 연구: 신역사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대학원, 2002.  8)카의 역사관에 대한 메타역사적 비판에 대해서는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역사, 2000, 21~48쪽.

    2. 역사극의 콘텍스트성과 텍스트성: 연극에 관한 역사’와 ‘연극의 역사’

    서연호는 연극사를 ‘연극에 관한 역사’와 ‘연극의 역사’의 두 측면으로 나누었다. 그는 연극사가 대부분 전자의 연극 사회사와 연극문화사의 측면만을 조명함으로써 후자인 연극 예술사나 연극 미학사의 측면이 부각되지 못했다고 말했다.9) 연극이 역사라기보다는 예술 장르에 속한다면, ‘연극의 역사’가 본래의 연극사가 돼야하고 ‘연극에 관한 역사’는 그것의 부차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 따라서 후자에 의한 전자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한국 연극사의 선결과제다.

    역사극의 역사 또한 ‘역사극에 관한 역사’와 ‘역사극의 역사’로 구분될 수 있다. 전자가 ‘역사극의 역사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면, 후자의 관점에서는 ‘역사극의 연극성’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연극사를 주로 연극의 사회문화사로 접근함으로써 연극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천착하는 연극 미학사의 측면을 무시하는 문제점은 역사극의 경우에는 더욱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역사의 메시지를 연극이라는 매체로 전달하는 역사극의 특성 때문에 ‘역사극의 연극성’보다는 ‘역사극의 역사성’이 더 중시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극의 역사성’에 대한 과도한 부담으로 ‘역사극의 연극성’을 경시한 것의 결과는 한국 역사극의 역사를 ‘역사극에 관한 역사’로만 이해함으로써 특정시대를 역사극 없는 역사극 전성시대로 기술하는 모순을 초래했다. 일제시대 역사극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한국 역사극이 탄생했다는 원죄가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까지의 역사극 전성시대를 한국 연극사에서 청산해야할 과거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역사극에서 ‘역사극의 역사성’과 ‘역사극의 연극성’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실제로 역사극의 역사는 이 둘의 상호연관으로 전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연관을 신역사주의식으로 표현하면, ‘역사극의 역사성’이 역사극의 콘텍스트를 형성하는 내용이라면, ‘역사극의 연극성’은 역사극 텍스트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그럼 신역사주의의 문법으로 식민지시대의 역사극의 역사를 읽어보자.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식민지시대의 역사극의 콘텍스트를 형성하는 1910년대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의 역사는 한국사인가, 일본사인가다. 그 당시 한국은 없었고 일본제국 식민지로서 조선만 있었다면, 그 때에는 한국사라는 콘텍스트 없이 역사극 텍스트를 만들어야 했던 시대다. 그렇다면 이 때 만들어진 역사극을 한국 역사극의 역사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제외시켜야 하는가? 그 당시 조선인은 한국인이 아닌 일제의 신민으로 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를 일제강점기라고 시대구분하면서 한국사의 일부로 당연하게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사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극 텍스트를 한국사의 콘텍스트 속에서 ‘역사극에 관한 역사’로 기술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시대착오가 아닌가?

    일제시대 한국사라는 콘텍스트가 부재한 현실에서 ‘한국적’ 역사극이 결핍돼 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사실이 고려되지 않았던 이유는 역사극의 역사를 ‘역사극에 관한 역사’의 측면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제시대 창작된 역사극을 ‘역사극에 관한 역사’이 아니라 ‘역사극의 역사’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사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시대를 독립운동사로 서술하지만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 연극인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준 연극이 김윤미의 <경성스타>(이윤택 연출, 2010)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연출해서 유명해진 임선규는 제1회 국민연극경연대회에서 <빙화>를 공연하여 단체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한국 연극사에서 <빙화>는 결말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대동아주의를 홍보했기에 친일 연극으로 취급된다. <경성 스타>에서 임선규는 역사가 아닌 연극을 위한 변명을 한다. 그에게 연극은 삶의 목적이었다. 일제가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는 1940년대는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검열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는 것을 강요당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조선어로 할 수 있는 연극이 무엇이었겠는가? 당시의 연극은 식민지현실이라는 콘텍스트에 구속당하면서 창작될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그렇기 때문에 <빙화>는 친일 연극인가? <빙화>는 일제 말기 국민연극이 담고 있는 순응과 저항의 이중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10) 이 같은 이중성은 식민지현실이라는 콘텍스트와 <빙화>라는 연극 텍스트의 변증법으로 해독될 수 있다.

    <빙화>는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역사극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빙화>라는 연극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국사’라는 민족사가 은폐하고 배제한 역사들의 중층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에 역사극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빙화>의 주인공 박영철은 미시사의 용어로 표현하면 식민지조선의 지식인을 대변하는 ‘이례적 정상’다.11) 그는 사립학교의 비리를 폭로하는 바람에 연해주로 도망쳐서 일본의 적군인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가담했다. 그의 이런 ‘반역적’ 선택을 관객은 어떻게 봤을까? 여기에는 당시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그 사이에서 표류해야 했던 식민지조선인의 복잡한 역사적 콘텍스트가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강 포수는 젊은 날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였지만 위층에서 러시아 남자에게 조선인 여인이 강간당하는 상황에서 아래층에서 피리나 불며 모른 채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처지로 전락했다. 이 같은 조선인 남자의 슬픈 현실이 당시 조선의 역사였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일제에 대항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러시아라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을 가졌다. 이 같은 결말로 막을 내린 <빙화>는 분명 친일 연극이다. 하지만 그 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야기의 전개과정에는 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저항과 협력 사이에서 번민해야 했던 식민지조선인의 내면적 갈등이 담겨있기에, 지금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역사극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빙화>가 담고 있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순적인 역사적 의미의 층위들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클리퍼드 기어츠가 말하는 ‘치밀한 묘사(thick description)’가 필요하다.12)

    임선규는 일제시대에는 이른바 친일 연극을 만들었고, 해방 후 친일파로 지탄을 받자 이를 피해 남노선노동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탄압으로 연극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자 그의 처 문예봉의 뒤를 따라 월북했다. 이 같은 그의 정치적 변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는 정치를 위해 연극을 한 것이 아니라 연극을 위해 정치를 했던 연극지상주의자다. 과거 없는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과거는 낯선 나라지만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과거의 특정한 흔적들은 궁극적으로 사라지겠지만, 집합적으로는 소멸되지 않는다. 기념되든 거부당하든 주목받든 무시당하든, 과거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13) 한국 연극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정치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연극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 덕분이다. 따라서 민족을 코드로 한 한국사의 콘텍스트에 의거한 ‘연극에 관한 역사’가 아니라 텍스트로 남아있는 ‘연극의 역사’의 측면에서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연극 만세”를 외치며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서술되는 ‘연극의 역사’의 관점에서는 “텍스트로서 연극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테제가 성립한다. 하지만 ‘연극에 관한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연극사는 사회현실의 콘텍스트 밖에서 서술될 수 없다.” 텍스트로서 ‘연극의 역사’와 콘텍스트로서 ‘연극에 대한 역사’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연극사를 서술할 수 있는 제 3의 관점이 신역사주의에 의해 열릴 수 있다.

    미슐레는 “역사가가 역사를 만드는 만큼 역사는 역사가를 만든다.”고 말했다. 후자의 역사가를 만든 역사의 콘텍스트가 바로 역사극의 역사성을 의미한다. ‘역사극에 대한 역사’는 이 같은 역사성을 해명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전자의 역사가가 만든 역사란 텍스트를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역사극이란 극작가가 만든 텍스트로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역사극의 텍스트성’이 성립하며, 이같은 역사극의 텍스트성을 중심으로 서술된 연극사가 ‘역사극의 역사’다. 하지만 ‘역사극의 역사’는 텍스트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극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구성되는 텍스트다.

    신역사주의에 따르면, 역사서술과 역사극은 적어도 2 가지 콘텍스트와의 연관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텍스트다. 첫째, 모든 역사서술은 역사가가 처해있는 사회현실의 콘텍스트 속에서 생산된 텍스트다. 역사가가 살고 있는 사회현실이 ‘텍스트의 역사성’을 형성한다. 둘째, 역사서술이든 역사극이든 텍스트의 창작은 연구사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이뤄진다. 특정 주제를 연구하고자 하는 역사가가 조사하는 것은 해당 과거가 아니라 텍스트의 형태로 기록된 사료와 역사서술이다. 역사가의 실제 역사연구는 원본으로서 과거를 모사하는 역사를 쓰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역사서술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모든 역사연구는 역사서술의 역사로서 사학사라는 테제가 성립한다. 역사가란 이전 역사서술들의 상호텍스트성이 형성하는 콘텍스트를 해체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새역사 창조를 꿈꾸는 사람이다.

    역사극도 이전 역사극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만들어진 텍스트다. 역사극 창작자는 과거의 공연된 연극을 볼 수 없기에 주로 희곡 텍스트들로 구성되는 연극사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역사극의 주제와 변주를 한다. 역사극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결국 희곡이라는 텍스트의 형태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역사극의 연관관계가 만들어내는 콘텍스트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서 각 시대 개별적인 역사극의 역사적 자리매김을 하는 일이다. 따라서 역사극이란 무엇인가의 개념과 범주는 역사극 텍스트를 낳은 사회현실의 콘텍스트를 해명하는 ‘역사극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개별 역사극들의 상호텍스트성으로 구성되는 ‘역사극의 역사’를 통해 해명돼야 할 문제다.

    이 같은 신역사주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역사극의 기원은 언제인가? 민족,제국, 계급의 거대담론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현실의 콘텍스트 속에서 역사극 텍스트는 창작됐다. 한국사라는 콘텍스트가 부재한 상황에서 창작된 역사극은 ‘한국적’ 역사극으로 보기에는 불완전한 텍스트다. 해방 후 한국이라는 국가가 실재할 때야 비로소 ‘한국적’ 역사극이 탄생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한국사의 콘텍스트라는 역사성이 ‘한국적’ 역사극의 내용을 채우는 충분조건이라면, ‘한국적’ 역사극 텍스트의 고유한 형식을 창안할 때가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한국적’ 역사극의 형식과 내용을 충족하는 필요·충분조건의 성숙이 이뤄졌는가? 이 같은 문제의식으로 1970-80년대 한국 사회현실의 콘텍스트 속에서 민중의 역사변혁의 잠재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마당극을 ‘문화시학(poetics of culture)’의 관점에서 해명해 보고자 한다.

    9)서연호, 『한국 연극사-근대편』, 연극과 인간, 2003; 서연호, 『한국 연극사-현대편』, 연극과 인간, 2005.  10)이 같은 일방적인 비판의 시각조정을 요청하는 논문으로는 양승국,「일제말기 국민연극에 담긴 순응과 저항의 이중성-임선규의 <빙화>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16집, 2008, 178~208쪽.  11)미시사의 ‘이례적 정상’에 대해서는 곽차섭 엮음,『미시사란 무엇인가』, 2000, 푸른역사, 51쪽.  12)‘치밀한 묘사’에 대해서는 클리퍼드 기어츠, 김기봉,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과 신문화사」, 안병직 외, 『오늘의 역사학』, 한계레신문사, 1998, 152~156쪽.  13)데이비드 로웬덜, 김종원·한명숙 옮김,『과거는 낯서 나라다』, 개마고원, 2006, 11쪽.

    3. ‘한국적’ 역사극으로서 마당극

    1970~1980년대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까지 역사극의 개화를 잇는 제2의 전성시대다. 역설적이게도 역사극 전성시대는 억압적인 역사의 문제 상황속에서 나타났다. 첫 번째 전성시대가 일제 식민지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망국사’의 역사극 텍스트가 창작된 시기라면, 두 번째 전성시대는 박정희 유신독재라는 사회현실의 콘텍스트와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역사극 텍스트가 만개한 시대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권위적 근대화를 옹호하고 유신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위로부터의 역사극’이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공연됐다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대화 과정 속에서 희생당한 노동자와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극’ 운동이 전개됐다.

    1970년대는 목표로서 근대화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이 일어남으로써, 전통에 대한 재인식이 생겨난 시대다. “전통은 역사적 지역적 공간인 공동체를 단위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그 공동체 내의 집단에 공유되는제반 문화적 요소를 말한다.”14) 전통이란 근대화를 통해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나온 뿌리인 동시에 계승 발전시켜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연극계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실제로 전통과 근대의 접합의 문제의식은 역사극 제1전성시대인 193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유치진은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형식의 역사극이 있는 데, 하나는 외국 역사극 형식에 따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부터 내려온 조선 창극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춘향전’을 전자의 역사극 개념에 의거해서 각색했지만, 전통적인 역사극 형식도 우리가 앞으로 연구하면 세계 연극사에 비추어 유의미한 존재가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15) 하지만 과거의 전통을 부정해야만 하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콘텍스트 속에서 유치진의 문제의식을 담은 역사극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해방 후에도 근대를 역사의 목표로 설정하는 한에서, 전통은 근대화의 장애물이지 근대가 수용하여 발전시켜야 할 문화적 자산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시대는 나름의 전통을 발명한다. “전통은 역사적 결과일 뿐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의미를 해석해 온 과정인 셈”16)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할 권력투쟁의 장소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의 말처럼, 현재의 권력자는 자신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전통을 발굴하고 만들어내서 미래권력을 선취하고자 한다. 이 같은 콘텍스트 속에서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한편으로는 조국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을 통해 민족을 근대화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전통문화 복원 사업을 벌이는 이중의 행보를 걸었다.

    이 같은 위로부터의 전통담론에 대항해서 근대의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동력을 민중문화 전통에서 찾는 아래로부터의 문화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연극에 대한 서양 연극의 지배를 반성하며 나아가 한국연극의 개성과 본질을 찾고 이를 확립시켜 보고자는 노력”17)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극인들은 민중문화의 현대적 재창조를 1970년대 한국 연극의 화두로 삼았다. 이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 근대연극사에서 유일한 자생적인 연극 양식으로 마당극이 등장했다. 우리 역사 문제를 콘텐츠로 하는 자생적인 연극 양식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마당극은 ‘한국적’ 역사극의 탄생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1960년대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굿판 <황토의식 초혼굿>이 마당극의 전사(前史)라면, 1970년대는 마당극의 형성기고 1980년대는 마당극의 개화기에 해당한다. 1973년에 발표된 김지하의 <진오귀>(공연 때의 제목은 <청산별곡>)가 그 출발점으로 거론되는 작품이다. 이영미는 “서구 근대연극에 기반 한 신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한 맥과, 전통 민속연희 부흥운동의 맥이, 바로 이 작품을 계기로 결합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 작품의 의미부여를 했다.18) ‘협업운동’의 선전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갖고 “악귀(惡鬼)를 물리친다(鎭)”는 제목의 의미를 가진 이 작품은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극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연극사의 측면에서 보면 당시의 역사문제를 드러내는 역사극이다.

    마당극이란 용어가 공식화되는 것은 <진오귀>가 공연된 지 7년 후인 1980년 임진택의 마당극론을 통해서다.19) 마당극이라는 장르가 성립하기까지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진오귀>가 전통극 부흥운동의 불을 붙인 것은 틀림없지만 전형적인 마당극으로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악귀들이 펼치는 탈춤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야기 전개를 해설자에 의한 장문의 사설조의 대사로 했다는 점이 연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의 결말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자체 내에서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해설자의 사설이 아닌 마당에서 펼치는 연기와 연행을 통해서 스토리전개가 이뤄져야 한다.

    <진오귀>는 굿의 연극화가 불완전하게 이뤄진 마당극의 과도기적 형태다. 이후 <진동아굿>(1975), <함평고구마>(1978), <덕산골이야기>(1978),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1978) 등 마당극 양식을 실험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나왔다. 이 작품들은 독재정권이 언로를 차단하여 “제대로 알릴 수도,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유언비어의 시대적 수렁에서 알릴 것을 알리고 그릇 알려진 것을 제대로 바로잡음으로써 민중적 진실을 전하는 언론의 한 통로”20)로서의 역할을 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형식을 모방한 ‘사건 전달극’의 성격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채희완은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탈춤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는 둘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인 종합으로 해석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지식을 중재하고 보다 명료한 인식의 도달을 목표로 하여 무대가 사건을 해명해 나가는, 이를테면 변증법적 진행과정 선상에 있는 사건해명극, 또는 현실 인식극이라면, 탈춤은 변증법적 과정의 마무리인 ‘합(合)’의 단계에서 출발하고 있는 사건향유적, 또는 현실해소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탈춤은 변증법적인 서사극에서와 같은 현실인식의 과정이 이미 생활현장에서 수행되어 있고 공유되어 있는 내용의 것이다.”21)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탈춤을 서구 서사극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해석의 과잉이다. 한국적 탈춤을 서구 서사극 형태로 변용시키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마당극이기 때문에, 오히려 탈춤의 서사극적인 지양으로 마당극이 탄생했다고 봐야 한다.

    전통시대 민중은 탈춤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풍자하여 웃음으로 해소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이에 대해 브레히트의 서사극(episches Theater)은 현실의 모순을 구조적으로 인식하여 변화시키는 운동을 벌일 것을 선동한다. 이 같은 선동을 위해서는 ‘라블레식 웃음’을22) 유발하는 해학과 풍자를 무기로 한 저항의 스토리들(stories)을 계급의 거대담론에 의거해서 플롯구성을 한 서사(narrative)로의 전환이 요청된다. 브레히트의 관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해 극장에 들어섬과 동시에 배우의 연기에 몰입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극중 사건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다. 관찰자로서의 관객은 연극을 보면서 보편적 진리에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전되기보다는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각성한다. 이런 관찰자로서의 관객에게 의식화를 넘어서 행동하는 힘을 부여하려는 문제의식으로 아우구스또 보알은 민중연극론을 제시했다.23) 보알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민중의 사회변혁을 위한 잠재에너지를 카타르시스로 해소함으로써 연극이 ‘사회 안전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철폐하는 해방의 무기로 연극을 활용하는 ‘피압박자의 시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이 같은 보알의 민중연극론은 ‘마당극의 연극화’를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 역사극의 역사에서 탈춤의 연극화에 성공한 마당극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1979년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공연된 윤대성의 <노비문서>다. 이 작품은 마당을 무대로 활용하여 특정한 무대장치 없이 가변적으로 움직이는 공간 위에서 펼쳐지는 서사극 형식에 취발이의 노래와 재담 등의 전통 연희의 요소들을 결합시켰다. 이 연극은 노비계층의 인물들은 원형 공간 전부를 차지하고, 지배계층의 인물들은 운동장의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탠드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써, 누가 마당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체임을 공간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해설자의 역할은 코러스가 담당하고, 관중은 등장인물에 따라 노비가 되기도 하고 관군의 역할을 하는 방식으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해소하는 한마당을 연출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삼별초가 직면했던 민족문제와 계급갈등의 복합적 모순을 오늘 우리의 ‘역사적 현재’로 재현함으로써 사건전달극의 차원을 넘어 역사극으로서의 마당극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전통시대 탈춤·풍물·판소리 등의 민속 연희는 로버트 단턴이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미시사적인 분석을 통해 해명했듯이 다수의 지배자들이 소수의 지배자들에 대항해서 벌였던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었다.24) 이것의 한국적인 종합 장르가 바로 ‘굿’이라 할 수 있다. 본래 굿이란 무당이 주재하는 무굿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물굿, 걸판진 구경거리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삶과 분리된 놀이판이 아니라 생활 속의 놀이로서, 이 같은 놀이를 통해 민중은 아직 계급의식을 각성하지 못한 시대에서 나름의 공감공동체를 형성했다. 한국인들은 요한 하위징아가 말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굿의 형식으로 형상화했다. 서구 축제가 추구하는 자유와 놀이의 교집합을 한국인들은 굿으로 구현했던 셈이다. 한국인의 굿의 핵심을 형성하는 코드는 두 가지 한과 흥이다. 굿이란 한국 민중의 한과 흥을 초월적으로 승화시키는 종교와 예술의 접합체다.

    전통시대 한국의 민중은 탈춤과 굿판을 통해 한의 저항성과 흥의 즐거움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기쁨과 함께하는 저항(subversion with pleasure)’의 한마당을 연출했다.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다양한 정부형태에서 소수에 의해 행해지는 불의의 권력에 대항해서 다수의 민중이 저항하는 방식을 데니스 L. 도와킨과 레스리 G 로만은 ‘즐거움과 함께하는 저항’이라고 개념화 했다.25) 전산업사회에서의 민중은 계급모순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역사의 목표로 설정하는 계급의식을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 이 시대에서 민중은 단지 문화적 전복을 통해 얻는 즐거움으로 계급갈등을 해소했다. 이 같은 행위예술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민중은 집단적 신명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의 잠재에너지를 축적하고 발전시켰다.

    전통시대 민속연희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을 지향했다면, 1970-80년대 마당극은 계급의식을 각성한 이후의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무기가 되었다. 마당극이 계급투쟁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마당극을 마당굿으로 회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역사 속에 잠재된 민중의 운동에너지를 드러내어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예술양식인 마당극을 운동양식인 마당굿으로 다시 회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역사극으로서 마당극의 탄생이 ‘탈춤의 서사극화’, 곧 ‘굿에서 극으로서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룩됐다면, ‘극에서 굿으로의 회귀’라는 역설적인 명제는 한과 흥을 초월적으로 승화시키는 집단적 신명을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의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제기됐다.

    채희완은 마당굿이 역사 속에 잠재된 민중의 운동에너지를 드러내어 결집시킬 수 있는 두 정신기조로 ‘놀이정신’과 ‘마당정신’을 꼽았다. 전자가 기쁨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저항을 목표로 한다. 전통시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 대안세계를 건설한다는 비전 없는 ‘기쁨과 함께하는 저항’에 안주했다면, 마당굿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채희완과 임진택은 마당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마당이란 공간적이고 동시에 시간적인 상황개념으로서 삶의 토대이자 그 삶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화 생성의 토대이며 아울러 공동집회의 장소이다. 그것은 호화저택의 넓은 정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수 서민들의 일터이자 쉼터이며 또한 놀이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흥적인 놀이판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고 놀이판이면서 동시에 삶을 억압하는 모든 외부조건에 대한 싸움판이다. 그렇게 삶의 생산성을 드높이는 대결을 거쳐 다시금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대립자와의 화해 및 친교까지도 가능케 하는 개방적 포용성, 그것을 바로 ‘마당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26)

    근대란 노동과 유희, 일과 여가가 분리됨으로써 노동과 삶으로부터의 소외가 일어난 시대다. 마당굿은 이 같은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마당정신과 놀이정신의 재결합을 모색한다. 놀이정신은 보는 자와 하는 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함께 어울려 노는 과정속에서 하나가 되는 효과는 본래 노동에 리듬을 부여하여 노동과 놀이를 하나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전통 민속놀이에서 기인한다. 놀이정신의 핵심은 ‘신명’이다. 서구 연극이 목표로 하는 효과인 카타르시스가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예술적인 정화 체험과 현상인 데 반해, 마당굿이 만들어내는 신명은 집단적이고 외향적이므로 역사를 바꾸는 사회운동의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다.

    ‘연극을 위한 굿’에서 ‘굿을 위한 연극’으로의 회귀는 근대의 탈주술화를 되돌리려는 재주술화의 시도다. 이는 전통의 근대적 지양을 추구하는 ‘전통의 근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근대의 전통적 지양을 기획하는 ‘근대의 전통화’를 목표로 했다. 실제로 서구 근대가 상실한 연극의 본래 참모습을 동양 전통극의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가무와 대사 속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서구 연극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근대에 살면서 근대를 전통으로 되돌리려는 시대착오의 기획을 마당굿이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이다. 임진택과 채희완은 상황적 진실성, 집단적 신명성, 현장적 운동성, 민중적 전형성이라는 4가지 성격이 그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마당굿의 이 4가지 성격은 제의, 모방, 유희라는 3가지 인간 행위의 복합체가 창조한 예술인 연극을 한국 민중문화 전통과 연관해서 재해석한 것이다.

    먼저 상황적 진실성은 연극의 모방본능설에서 유래한 리얼리즘이다. 집단적 신명성은 초월적인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연극의 제의기원설과 연관된다. 현장적 운동성은 집단적 놀이를 통해 발휘된다는 점에서 연극의 유희본능설에 근거한다. 상황적 진실성, 집단적 신명성, 현장적 운동성을 하나로 묶는 것 네 번째 요소가 민중적 전형성이다. 마당굿은 연희자와 수용자가 같이 어울려 놀고 싸움판을 벌이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공감공동체를 형성하여 민중적 전형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마당굿론은 기본적으로 역사와 민중에 대한 거대담론에 의거해서 성립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하는 마당굿은 민족극으로 다시 개념적 변화를 모색했다. 1970-80년대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은 마당극-마당굿-민족극으로 양식적 변화를 겪었다. 이것들 모두는 진보운동이 파악하는 사회현실의 콘텍스트를 반영해서 나온 역사극 텍스트들이다. 먼저 마당극이 전통의 현재적 재창조를 위한 역사극 텍스트였다면, 마당굿은 이것을 다시 역 설적으로 되돌려서 근대를 전통적으로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둘 모두는 탈춤, 무굿, 풍물굿, 판소리와 같은 민중문화에 의해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민중의 역사적 잠재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역사극 텍스트다. 여기서 마당극의 마당굿으로의 역설적 회귀는 운동에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르적 전환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축적한 민중의 운동에너지를 총집결하는 계기가 됐던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전후로 해서는 민족극이 진보적 연극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떠올랐다. 1988년 전국 규모 연극제로 개최된 ‘민족한마당’의 주최 측은 민족극을 분단이라는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예술 이념에 기초하여, 민족 현실을 민중적 입장에서 형상화해내는 연극예술로서, 마당극 양식을 근간하여 다른 연극 양식까지를 포용하기 위한 가치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분단체제 극복이 모든 진보운동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문학, 민족미술이 나오는 것과 맥을 같이해서 민족극 개념이 나왔다. 마당극이나 마당굿은 민족적이며 진보적인 연극이라는 이념적 측면과 서구의 자연주의 연극, 서사극, 부조리극과 구별되는 자생적인 연극 양식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졌다. 이념이 목표라면 양식은 수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보적인 양식으로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연극을 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민족극은 이 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해 양식적 개념을 배제한 가치개념으로 설정됐다.27) 민족이 진보라는 거대담론을 독점하는 콘텍스트 속에서 마침내 아래로부터의 역사극은 민족극이라는 텍스트로 귀결되었다.

    1970~1980년대 사회변혁 운동의 콘텍스트 속에서 나온 ‘한국적’ 역사극 텍스트로서 마당극은 가장 한국적인 연극이면서 바로 제3 세계의 연극이며 그런점에서 세계연극이며 가장 전위적인 실험연극인 동시에, 서구 연극인들이 동양연극에서 되찾고자 하는 축제와 제의적 성격을 결합한 총체극(total theatre)이다.28) 하지만 마당극이 마당굿으로 회귀하고 다시 민족극으로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상실한 것은 예술로서의 연극이다. 사랑도 돈도 명예도 모든 것을 오직 운동만을 위해 희생했던 시대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설자리를 상실하고, 민족이라는 거대담론의 하위 텍스트로 연극과 예술은 존재했다. 하지만 1989년 현실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거대담론의 포로로서의 역사극 텍스트는 의미를 상실했다. 사회주의가 더 이상 자본주의 근대를 지양하는 미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가 현실사회주의 사회의 미래가 된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내부에서 반근대성을 위한 반역을 기획했던 마당극 운동의 에너지는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극사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시선으로 보면, 민중민족주의 역사극이 기성 연극을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은 유민영의 예측대로 꿈에 불과하며 대중오락적인 마당놀이 형태로 존속되고 있다.29)

    마당극과 민족극이 모았던 그 많던 역사의 운동에너지는 어디로 갔는가? 고갈됐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다시 잠재에너지로 잠복해 버렸는가?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침체됐던 마당극은 2000년대에 들어서 지방축제를 위한 대중적인 공연으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인다. 전통문화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지방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자본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사회변혁 운동이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로만 기억되는 우리시대에서 마당극, 마당굿, 민족극을 공연했고, 그것을 보고 열광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그것들은 결국 연기처럼 사려졌고 남아있는 것은 텍스트로서의 역사극뿐인가?

    14)백현미, 『한국 연구사와 전통담론』, 연극과 인간, 2009, 265쪽.  15)유치진, 「역사극과 풍자극」, 『조선일보』, 1935.8.27.  16)백현미, 앞의 책, 265쪽.  17)한상철,「한국연극 10년, 그 의의」,『연극평론』겨울호, 연극평론사, 1979.  18)이영미,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6, 39쪽.  19)임진택,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 『창작과 비평』 58, 1980.  20)채희완, 「마당굿의 과제와 전망」, 『한국의 민중극』, 창작과 비평사, 1985, 4쪽.  21)채희완, 「공동체의식의 분화와 탈춤구조」, 『문화운동론』, 공동체, 1985, 97쪽.  22)‘라블레식 웃음’에 대해서는 로버트 단턴, 조한욱 옮김, 『고양이 대학살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문학과 지성사, 1996, 144~148쪽.  23)아우구스또 보알, 민혜숙 옮김, 『민중연극론』, 창작과 비평사, 1985.  24)‘고양이 대학살’을 E. P. 톰슨이 말하는 ‘계급 없는 계급투쟁’으로 보는 해석에 대해서는 김기봉,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과 신문화사」, 170쪽.  25)Dwarkin, Dennis L. and Leslie G. Roman, View Beyond the Border Country: Ramond Williams and Cultural Politics,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93, P.63.  26)임진택·채희완,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문화운동론』, 공동체, 1985, 117쪽.  27)이영미, 『마당극·리얼리즘·민족극』, 현대미학사, 1997, 192쪽.  28)이상일,「마당극에서 총체극으로-1985년의 공연계, 삶과 꿈」(1985.2), 『전통과 실험의 연극문화』, 눈빛, 2000.  29)유민영,「격공 사회 속의 마당극」, 『우리시대 연극운동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0.

    4. “텍스트로서 역사극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역사극이란 과거의 인물과 사건, 중심이 되는 갈등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무대에 올린 연극을 총칭한다. 이렇게 역사극을 정의할 때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첫째, 역사극의 취급대상인 ‘과거’의 개념, 작품을 쓰는 시점부터 어디까지의 과거를 대상으로 삼는 작품을 역사극이라 할 것이냐다. 둘째, 설화와 민담을 소재로 한 연극도 역사극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셋째, 역사극이 사용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이다.30)

    위의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역사극의 역사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답의 변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역사소설의 견해를 참조하여 대략 두 세대가 지난 시점인 40년 내지 60년 이전의 과거사를 다룬 작품을 역사극으로 규정했다. ‘역사화’ 된 과거만이 역사극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역사화’ 되지 않은 현재의 사건을 재현하는 연극은 역사극이 아닌 시대극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작품이 창작된 시점에서는 당대의 문제지만 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역사인 경우 이 작품은 역사극인가 아닌가? 예컨대 차범석의 <산불>은 당대에서는 역사극이 아니지만 오늘날의 관객은 그것을 역사극으로 본다. 그렇다면 역사극에서 역사의 개념 정의를 하는 주체는 과거의 관객인가, 아니면 현재의 관객인가? 한국전쟁이 아직 역사화 되지 않은 시점에서 <산불>은 당시 민중들의 전쟁 체험을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연극적으로 구현한 실록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역사극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따라서 무엇이 역사극인가의 개념과 범주는 당대의 역사극 텍스트가 만들어진 시점이 아니라 연극사의 콘텍스트 속에서 결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둘째, 설화나 민속 등에서 취한 소재를 다룬 극도 역사극으로 분류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예컨대 심청과 춘향은 실제 역사적 인물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청전>, <춘향전>은 역사극이 될 수 없는가? 이 두 인물에 관한 연극과 영화는 여러 번 제작됐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의 주제와 변주를 통해 해당시대의 표상이 되는 전형이 만들어지곤 했다. <춘향전>을 예로 들면, 춘향과 이도령의 해피엔딩의 방식이 각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춘향전> 텍스트는 대략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텍스트에서는 관기의 딸인 춘향은 이도령과 결혼해도 정처(正妻)는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첩으로 살아야 했다. 19세기 이후의 텍스트는 춘향이 돈으로 양인 신분을 사서 이도령의 정처가 되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한다. 양반과 천민의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진실한 사랑을 주제로 한 <춘향전> 텍스트 자체가 18세기 사회현실의 콘텍스트 속에서는 파격적이었다. 이 같은 텍스트는 기존의 사회현실의 콘텍스트에 대한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는 구체제 신분사회의 모순을 지양하는 역사의 운동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19세기 <춘향전>은 이 같은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변증법으로 리메이크된 텍스트다. 2010년에는 기존의 이도령과 춘향의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사랑이야기가 아닌 방자와 춘향 그리고 이도령과의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 <방자전>이라는 새로운 영화 텍스트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여러 번 각색된 <춘향전> 텍스트들의 연관관계로 이뤄진 상호텍스트성을 해체하여 방자의 입장을 첨부하여 재창작된 텍스트다. 이 같은 텍스트의 변용 그 자체가 역사성의 효과를 낳는다. 신역사주의 해석에 입각하면, 역사극인가 아닌가의 판단기준은 그 연극 텍스트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가가 아니라 ‘역사효과’를 만들어내는 연극인가다.

    셋째, 상상력에 의한 연극적 재구성의 허용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이다. 과거 이야기를 역사서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플롯구성이 요청된다. 플롯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다. 이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적 상상력이다. 역사학은 역사라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허구를 역사적 사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발휘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들의 연관관계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만 역사적 상상력의 나래를 편다. 과거는 신도 과거는 바꾸지 못함에도 역사가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상상력에 의거해서 역사적 사실의 연관관계를 결정하는 플롯구성을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사료가 제공하는 부족한 역사적 사실들의 파편조각을 갖고 퍼즐 맞추기를 하듯이 역사를 쓴다. 퍼즐과 퍼즐 사이에는 틈새가 있고, 역사가에게는 이 같은 틈새를 메우는 정도만큼의 역사적 상상력이 허용된다.

    이에 비해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들을 퍼즐이 아니라 물감으로 삼아 나름대로의 풍경화를 그릴 목적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사용한다. 1970-80년대 마당극은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시각으로 과거의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넘어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 목적으로 역사적 상상력의 나래를 폈다. 하지만 이같은 역사적 상상력은 결국 거대담론 역사의 새장 속에서만 날갯짓을 했던 꼴이었다는 사실이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통해 드러났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모든 인간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대문자 역사의 종말과 함께 소문자역사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 같은 시대적 콘텍스트 속에서 오늘날에는 새로운 역사만들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와 놀 목적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무한정 확대하는 역사극 텍스트가 만들어진다. 역사와 노는 역사극이 시도하는 것은 역사를 무대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뮬레이션이다. 이 같은 시뮬레이션 역사는 오늘날 픽션 또는 퓨전사극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이는 역사극의 종말인가, 아니면 역사극의 ‘빅뱅’인가? 이는 결국 1990년 이후 역사극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해명돼야 할 문제다.

    30)김성희,「한국역사극의 이념적 성격과 그 변모」, 『한국 현대극의 형성과 쟁점』, 연극과 인간, 2007, 263~268쪽.

참고문헌
  • 1. 곽 차섭 2000
  • 2. 김 강원 2007 [『한국극예술연구』] Vol.제26집
  • 3. 김 기봉 1998
  • 4. 김 기봉 2000
  • 5. 김 성희 2007
  • 6. 로웬덜 데이비드, 김 종원, 한 명숙 2006
  • 7. 단턴 로버트, 조 한욱 1996
  • 8. 루카치 게오르그, 이 영욱 1978
  • 9. 백 소연 2010
  • 10. 백 현미 2009
  • 11. 보알 아우구스또, 민 혜숙 1985
  • 12. 서 연호 2003
  • 13. 서 연호 2005
  • 14. 양 승국 2008 [『공연문화연구』] Vol.16집
  • 15. 유 민영 1990
  • 16. 유 치진 1935
  • 17. 이 상일 1985
  • 18. 이 상일 2000
  • 19. 이 영미 1997
  • 20. 이 영미 1996
  • 21. 이 화진 2003 [『한국극예술연구』] Vol.제18집
  • 22. 임 진택 1980 [『창작과 비평』]
  • 23. 임 진택, 채 희완 1985
  • 24. 채 희완 1985
  • 25. 채 희완 1985
  • 26. 최 영희 2002
  • 27. 포퍼 칼, 이 한구 2001
  • 28. 한 상철 1979 [『연극평론』]
  • 29. Dwarkin Dennis L., Roman Leslie G. 1993 View Beyond the Border Country: Ramond Williams and Cultural Politics google
  • 30. Montrose Louis A. 1989 “Professing the Renaissance: The Poetics and Politics of Culture”, Aram Veerser ed., The New Historicism google
OAK XML 통계
이미지 / 테이블
(우)06579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Tel. 02-537-6389 | Fax. 02-590-0571 | 문의 : oak2014@korea.kr
Copyright(c) National Library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