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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Ray Bradbury’s Fahrenheit 451 and Society of Controlled Knowledge 레이 브래드베리의『화씨 451』과 지식 통제 사회
  • 비영리 CC BY-NC
ABSTRACT
Ray Bradbury’s Fahrenheit 451 and Society of Controlled Knowledge
KEYWORD
Digital Media , Knowledge and Information , Nicholas Carr , Technopoly , Societies of Control
  • I. 지식 통제 사회 또는 테크노폴리

    브래드베리의 소설『화씨 451』에서 제목의 화씨 451은 책이 불에 타는 온도를 의미한다. 이 소설은 책이 금지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서른 살의 주인공 가이 몬탁(Guy Montag)은 아직도 숨겨져 있는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 (fireman)’ 라는 직업을 갖고 왜 책을 태우는 지에 대한 개인적인 고뇌 없이 살고있다. 몬탁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방화수였기 때문에 몬탁은 자연스럽게 그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와 그의 동료 방화수들은 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책과 집을 태워버리는데, 종종 저항하는 사람들도 함께 태운다. 방화수로서 몬탁은 사회에 평등한 정도의 지식수준을 보급하는데 앞장서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지식을 파괴하고 무지를 확대해 나아고자 책을 태운다는 사명감마저 갖고 있다. 아주 때때로 이러한 상황에 맞서 책을 읽다가 발각이 되어 불에 타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몬탁의 아내 밀드레드는 이들을 가리켜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한 사람들(simple-minded)’ 라고 부른다. 이 사회에서 정보는 책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달이 되는데, 이 역시 강요에 의해서 텔레비전 시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정보를 얻는다.

    이러한 미래 사회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1984』(Nineteen Eighty-Four)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면서도 사회의 구성원들은 매우 만족감을 느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브래드베리의『화씨 451』 의 사회도 마찬가지로, 사회구성원들은 직접 생각하는 것보다 정보가 주입되는 것에 더 만족하고 있으며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이들은 화도 내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다. 매우 유사하게 쥘 들 뢰즈(Giles Deleuze) 역시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사회(societies of discipline)와 구분이 되는 현대의 사회를 통제사회(societies of control)로 정의 하는데, 통제 사회에서는 통제가 사회 전반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통제를 받고 있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선택권을 갖고 살고 있다고 믿게 된다(황은주, “정보시대에서의 지식의 위기” 17).

    『화씨 451』에서 묘사가 되는 미래의 사회는 지식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야만의 사회가 아니다. 비록 책을 태워 지식의 확산을 막고는 있지만, 방화수라는 직업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직업이 존재하고,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이며,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가 고도로 발달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발달된 사회이다. 또한 몬탁이 도망갈 때 몬탁을 쫓아오는 헬리콥터나 모든 냄새를 기억하고 추적하는 Mechanical Hound 등은 미래 사회의 기술 수준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는 독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지식이 차단된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통제기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계층에서 지식이 요구되는 사회며, 단지 대부분의 대중이 지식에 접근할 수 없도록, 또는 접근을 원하지도 않도록 고도로 지식을 통제하는 사회이다. 마치 들뢰즈의 통제 사회에서 사회의 구성원들이 오히려 통제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회이다. 감시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감시’ 라는 단어는 곧 공포였고, 조지 오웰의『1984』에서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존재는 사회전체를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하지만, 통제사회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안전이나 편리성 등의 다양한 이유로 감시와 통제를 스스로 원하는 사회다. 예를 들어, 통제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더 많은 CCTV의 설치를 원하며, 휴대폰 등을 통해 나의 위치를 타인에게 알리거나 내 일거수일투족을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더 많이 알리고자 한다. 이렇듯 통제사회의 통제는 사회구성원들이 더 많은 통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제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통제가 존재함을 부정 할 수는 없다. 마치 물에 소금을 용해시키면 일반 물과 육안으로 구분이 안 되어 소금의 존재를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소금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날 몬탁은 이웃에 사는 17세 소녀 클라리스를 만나 짧게 대화를 하게 되는데, 클라리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생각이 깊고 따뜻한 면을 갖고 있어, 짧은 만남이었지만 클라리스는 몬탁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특히 클라리스가 몬탁에게 행복한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몬탁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 질문에 매우 당황한다. 몬탁은 아내 밀드레드와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 밀드레드는 몬탁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말하는데, 클라리스는 몬탁에게 밤하늘도 보게 하고,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이 모든 것이 몬탁에게 생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곧 클라리스는 실종되고, 몬탁은 그의 삶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변해가기 시작한다. 밀드레드는 클라리스가 차에 치여 사망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방화서의 비티 서장(Captain Beatty)은 클라리스의 가족들이 사회에 위험요소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클라리스 외에도 책을 태우는 방화수에 저항하다 당당하게 불에 타서 사망한 할머니, 그리고 몬탁의 조언자인 페이버(Faber) 교수 등의 인물들은 방화수로서 책을 태우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몬탁의 신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책을 몰래 소지한 몬탁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화서에 나가지 않자 병문안을 온 비티 서장은 몬탁이 겪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눈치 챘는지, 몬탁에게 방화수라는 직업과 방화수라는 직업을 필요로 하게 된 사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비티 서장에 따르면 20세기에 들어 책의 길이가 점점 더 짧아지고 고전 소설 등은 한 페이지 정도로 요약해서 모든 고전 소설을 다 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지식의 단순화, 보편화 과정을 통해 학교 교육은 점차 짧아지고, 책은 그림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레저나 스포츠 등의 재미를 추구하며 살게 되었다. 오랜 학습 대신 버튼을 누르거나 스위치를 바꾸면 모든 일이 가능해졌다. (비티 서장이 이러한 설명을 하는 가운데도 밀드레드가 켜 놓은 텔레비전 삼촌과 텔레비전 숙모의 소리는 계속 시끄럽게 들린다.) 점차 ‘지적이다(intellectual)’ 라는 말이 모욕적인 말이 되고, 책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식의 수준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새로운 직업의 탄생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책을 태워버리는 방화수가 바로 그것이다(Bradbury 54-59). 『화씨 451』이 보여주는 세계는 대략 서기 2500년 이후라고 짐작해 볼 수 있는데, 브래드베리는 방화수라는 직업의 시초를 식민지[미국]에서 영국의 영향을 받은 책을 태워버린 1790년으로 보며, 때문에 가장 최초의 방화수를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으로 본다(Bradbury 34).『 화씨 451』에서는 사회가 지식 기반의 사회에서 정보 기반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은 5세기 정도를 걸쳐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최근 들어 빠른 진행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몬탁에게 무전기의 기능을 하는 Seashell을 통해 어떻게 행동할 지지시를 내리는 페이버 교수는 원래 영문과 교수였으나 40년 전 대학이 문을 닫자 대학에서 나오게 된 인물로, 40년 전만 해도 대학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사회로의 이전 과정은 현대 사회가 나아가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한국의 경우 학교 교육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신문 기사가 점점 짧아지고, 심각한 뉴스는 재미를 주는 것으로 점차 대치되고 있는 점은 유사하다. 텔레비전은 다큐멘터리 영화나 교육 관련 프로그램보다는 리얼리티쇼나 드라마, 엔터테인먼트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다. 트위터나 카카오톡 등에 익숙한 사람들은 압축하여 말하는 것에 익숙하여 길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서툴고, 이모티콘의 사용이나 줄여 말하는 습관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다양한 어휘의 사용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들은 늘 센세이션(sensation)에 노출되어 있으며, 적절한 센세이션이 느껴지지 않을 경우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낀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지루함을 느끼는 정도가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문화를 도구사용문화(tool-using culture), 기술주의문화(technocracies), 그리고 테크노폴리(technopolies)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포스트먼 37). 도구사용문화는 지금에는 지구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통상 17세기 이전의 문화를 일컫는다. 도구사용문화에서 도구는 주로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두 가지 역할은 수력, 풍차, 바퀴 등의 물리적 삶의 편의성과 성당의 건립이나 시계의 개발 등에서 발견되는 예술, 의식, 정치, 종교 등의 상징이었다. 다음 단계로 포스트먼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을 기술주의문화의 시발점으로 본다. 포스트먼의 주장에 따르면 기술주의문화, 특히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발명에 대한 생각 그 자체였다. 이 문화의 사람들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를 알게 되면서 ‘왜’ 발명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고,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포스트먼 62). 기술주의문화에서 도구는 문화의 사고체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사회적, 상징적 세계가 점차 기술발전에 순응해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도구는 문화 속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이다(포스트먼 45). 포스트먼은 기술주의문화에서는 도구가 문화 자체가 되고자 하여, 전통이나 사회적 습속, 신화, 정치, 의식, 종교등은 도구와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인다고 보았다(포스트먼 45).

    포스트먼의 문화구분에서 세 번째인 테크노폴리는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indslow Taylor)의『과학적 경영원리』(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가 출간된 1911년을 그 시작으로 본다. 효율적인 시스템의 신봉자였던 테일러는 산업적 생산능력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이 기존의 주먹구구식 사고방식을 버리고 시스템에 의존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어떤 종류의 기술이라도 인간 대신 생각을 해준다는 것이며, 이는 곧 테크노폴리의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가 된다(포스트먼 74). 테크노폴리의 사회는 구시대의 신념체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으며, 다윈은 인간의 기원이 그 동안 생각했던 것처럼 고귀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고, 마르크스는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간을 가야 할 곳으로 이끈다고 했다. 이 뿐만 아니라 행동주의 학자들은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에 의해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도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을 강조했다(포스트먼 77-78). 이렇게 테크노폴리는 인간 자신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고, 그 동안의 신념체계를 무너뜨렸으며, 필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불러왔다. 『화씨 451』이 묘사하는 미래 사회는 다른 사이언스 픽션처럼 화려한 미래의 과학기술문명은 묘사가 되지 않지만, 이 사회는 테크노폴리가 극단적으로 발달한 사회이다. 대중들은 책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다. 대신 텔레비전 등의 기술이 발달하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정보를 주입하고, 생활의 만족감도 준다. 이러한 사회에는 예술, 의식, 종교, 문학 등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어떠한 문화도 발달할 수 없는 즉, 도구로서의 기술이 문화와의 싸움에서 이긴 극단적인 테크노폴리 사회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다, 정보의 폭포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정보 희소성에 관한 문제만을 언급했지, 정보 과잉이 일으키는 위험에 대해서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포스트먼은 정보가 불충분해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특히 개인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고 주장한다(포스트먼 86). 정보가 지나치게 과잉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문제를 안고 있는데, 따라서 현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지식과 정보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해봐야 한다. 현대인들이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것이 과연 정보일까, 아니면 지식일가? 우리는 정보가 넘쳐날수록 지식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엘리트 계층은 정보를 지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비엘리트 계층에게는 정보는 그대로 정보에 머무른다. 지식에 계층 간의 격차가 생기고, 이 격차는 계속 커지게 된다.

    브래드베리가 묘사하는 미래 세계에서는 진실은 별 의미가 없고,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것이 진실보다 더 중요해진다. 몬탁이 체포되지 않기 위해 도망칠 때도 정부 당국은 몬탁을 뒤쫓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한다. 하지만 Book People이 몬탁을 숨겨주어 몬탁을 찾을 수가 없었던 당국은 밤에 길을 걷던 사람을 임의대로 몬탁으로 지명하고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 보여주며, 몬탁이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1991)』(The Gulf War Did Not Take Place)에서 최초의 미디어 전쟁으로 불리는 걸프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연합군은 이라크의 군사력에 맞서 날마다 1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방송사들은 연합군이 이라크군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생중계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담 후세인의 정치적, 군사적인 힘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이라크의 정치적 상황도 거의 변한 것이 없어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걸프전을 단순히 일어나지 않은 미디어쇼로 일축시켜 버리는데, 『화씨 451』에 등장하는 몬탁에 대한 거짓 공격 방송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기술, 즉 프로파간다 기술은 특히 20세기 전쟁과 더불어 발달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도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 고 하여, 거짓도 여러 번의 선전을 통해 대중에게 진실로 수용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광고나 선전을 통해 반복적으로 특정한 정보를 대중에게 주입했을 때 대중에 속한 각각의 개인들은 선동하는 대로 그 정보가 마치 자신의 생각인양 믿게 되는 것을 역사의 수많은 예에서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조카로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Louis Bernays)는 이러한 선전과 홍보 분야를 하나의 산업으로 정립한 인물로 그가 1928년 출간한『프로파간다』(Propaganda)에서 이러한 선전과 홍보의 놀라운 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는 모든 시민이 공공의 사안과 개별 행동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이론상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역설하며, 대중은 정치든, 기업의 영역이든, 사회적 행동이든 소수 통치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버네이스 62-3). 버네이스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렇게 여론을 조직하고 이끄는 것이 질서정연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선전과 홍보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 신봉론은『화씨 451』에서 지식통제의 파수꾼인 비티 서장의 분서갱유식 행동주의의 강령으로 볼 수 있다.『 프로파간다』에서 버네이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II. 정보와 지식

    지식은 ‘정보로서 흩어져 존재하는 파편’이 경험과 기존의 지식 체계로 엮어 질 때 만들어지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이 때 ‘생각할 시간’은 지식을 만들어 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니콜라스 카가 “Is Google Making Us Stupid?” 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들이 손쉬운 인터넷 검색으로 인해서 집중력과 사고력을 잃어버리고 대신 많은 양의 정보를 스캔하고 선별하는 기술을 얻었다는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휴대폰의 전화번호부 또는 컴퓨터에 전화번호나 생일 등을 저장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의 전화번호나 생일 등을 더 이상 외우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화씨 451』에서 브래드베리가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가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사회에서는 정보가 지식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하고, 책을 태우는 행위 역시 지식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화씨 451』에서 보여주는 사회에서는 미디어가 존재하여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지만, 미디어는 지식을 (재)생산하지 않고 단순히 즐거움을 제공하거나 시청자들에게 일정한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여 시청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브래드베리는 텔레비전 시청에 매우 열광하는 밀드레드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현대의 미디어는 어떨까? 단순히 즐거움을 제공하고 행동을 통제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디스토피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IT기술 역시『화씨 451』에 나오는 텔레비전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IT 기술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확장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은 IT기술을 이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자기 계발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IT기술을 오락 활동에 이용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드폰이나 기타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학습보다는 게임이나 텔레비전 시청을 한다.

    특히 주변에 정보가 넘쳐난다고 해도, 그것이 개개인에게 지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존 밀러(Jon D. Miller)는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했는데, 그의 연구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52%의 미국인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20%의 미국인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절반 정도의 미국인들은 인간과 공룡이 동시대에 살았다고 생 각 한 다 (Miller, “The Measurement of Civic Scientific Literacy” 211, 황은주, “정보 시대에서의 지식의 위기” 21 참조). 이는 미국인들만 비난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2007년 사이언스 데일리(Science Daily)에 실린 밀러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유럽과 일본의 경우 미국보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더 떨어진다고 한다(Miller, “Scientific Literacy”). 인터넷 강국임을 자랑하는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2012)』의 저자 엄훈은 국내 성인 인구의 24.7%가 글을 읽고 쓰고, 셈을 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완전히 문맹인 경우도 8% 이상이라는 주장을 한다(엄훈 18). 이 책은 학교를 다녔고, 각종 지식 환경 속에 둘러싸여 있는 비문해자들을 통해, 발전한 지식 환경이 개인의 문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보여준다.

    『화씨 451』에 그려지는 미래 사회는 인간이 지식을 갖는 것을 막고자 책을 불태워 버리는 사회이다. 반면 현대 사회는 책과 인터넷으로 연결된 하이퍼텍스트가 넘쳐나지만 정작 현대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양은『화씨 451』에 나오는 미래 사회의 경우보다 낫지 않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가 무한정하고 인간이 축적해 놓은 많은 양의 정보가 그 안에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 많은 양 때문에 인간이 그 정보를 지식으로 변환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조차 쉽지가 않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의 특성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능동적으로 정보를 지식으로 바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널린 정보를 수집하여 정보를 훑어보고 많은 양을 간추리도록 만든다. 많은 정보가 제공되는 정보의 시대에서는 정보는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습득하고 빨리 잊어버려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지속력이 오랜 시간 걸쳐 형성된 지식에 비해 매우 짧다(황은주, “정보 시대에서의 지식의 위기” 20-21). 비슷하게『화씨 451』의 비티 서장역시 지식이 누구에게나 이용 가능하도록 대중화가 되려면, 지식의 수준은 높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지식인과 비지식인과의 차이를 줄이고 누구나 비슷한 정도의 지식을 보유하는 지식의 민주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하지만 비티 서장의 이상과는 달리『화씨 451』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회는 여전히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있는 사회이고, 비티 서장 자신은 지식인의 그룹에 속해있는 모순을 보인다.

    정보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와 지식의 수단으로 대표되는 책의 텍스트를 비교해보자. 인터넷상에서 글을 읽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에는 단순히 텍스트를 넘어선 큰 차이가 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읽을 때는 수많은 정보의 양 때문에 한가지 글을 오래 읽을 수가 없고 대신 모든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고 또 다른 글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즉,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것은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책을 읽는 독서에서는 인터넷처럼 다른 텍스트로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종류의 텍스트를 시간 들여 읽고, 읽은 내용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 독서에는 생각 할 시간이 필연적으로 따르는데,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지식을 생산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정보와 지식의 (재)생산은 둘 다 중요하나, 디지털 정보가 주는 센세이션은 중독성을 갖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식의 재생산보다는 정보가 주는 자극에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기자인 맷 리치텔(Matt Richtel)은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 The National Institute of Drug Abuse)의 노라 볼코우(Nora Volkow) 소장의 말을 인용한다. 볼코우는 디지털 자극이 마약이나 알코올보다는 생명에 매우 필수적이지만 많으면 역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음식과 섹스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디지털 자극은 도파민 분비를 유발하여 겉보기에는 즐거움이나 재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은 프로그램, 예를 들어 이메일이나 인터넷 검색과 같은 프로그램도 중독성을 가질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Richtel의 인터뷰 참조).

    밀드레드나 그의 친구들은 텔레비전에서 주입하는 정보를 마치 지식인양 착각하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엄청난 지식을 얻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인터넷 검색 창에 단어를 검색하여 나온 결과를 마치 지식인양 착각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미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지식을 형성하지 않고 단지 필요한 순간마다 정보를 주입받아 산다. 따라서 비판적인 사고나 지식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처럼 단순한 반사작용을 통해 정보를 주입받고 엄청난 지식을 얻은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이다. 비티 서장은 다음과 같이 몬탁에게 교육시킨다.

    『화씨 451』의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가급적이면 막고자 하며, 이런 이유에서 현관 앞의 포치(porch)도 다 없애버린다. 사람들이 포치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할 기회, 즉 지식을 형성 할 기회를 처음부터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텔레비전은 화려한 색채와 정신을 빼앗는 소리, 주입되는 정보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소음과 색채에 반사반응만을 보이면서도 정신을 빼앗긴 탓에 지치고 무언가를 많이 배운 듯한 느낌을 갖는다. 마치 현대인들이 인터넷을 사용하여 동영상을 보고, 검색하면서 접한 셀 수도 없는 정보를 마치 자신이 얻은 지식처럼 느끼는 것과 같이 말이다.

    III. 밀드레드 몬탁(Mildred Montag)과 현대인

    몬탁과의 대화로 드러나는 몬탁의 아내 밀드레드는 3면으로 둘러싸인 TV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을 제외하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다. 기계적으로 들릴 정도로 단순하게 대답하며, 몬탁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데, 이마저도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보다는 텔레비전에 의해 형성되어 주입된 정보나 느낌 아닌 느낌을 말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보이지 않게 강요하는 신념체계를 벗어난 몬탁과는 달리 몬탁의 아내 밀드레드는 그 사회에 매우 단단하게 매여 있다. 밀드레드는 주인공의 아내로 매우 비중 있는 등장인물이지만 작가인 브래드베리는 밀드레드를 개성이 없고 수동적이고 차가운 인물로 그려 내, 밀드레드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게 만든다. 어쩌면 자신의 의견도 없고, 개성도 없고, 수동적인 것이 밀드레드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밀드레드는 텔레비전 ‘가족’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텔레비전에는 컨버터가 달려있어 아나운서가 시청자들을 익명으로 부르면, 자동적으로 밀드레드의 이름이 몬탁 부인(Mrs. Montag)으로 전환되어 들린다. 텔레비전은 방의 3면에 설치되어 시청자 간에 대화가 가능한데, 미래의 사람들은 이 텔레비전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가족 또는 친척으로 부른다. 텔레비전이 있는 방에 늘 들어박혀 있는 밀드레드는 쉬지 않고 텔레비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색채와 정신을 빼놓는 소리에 사로잡혀 계속하여 웃고 시각과 청각적인 자극을 느낀다. 밀드레드는 텔레비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가족’은 사람들이야. 그들은 나에게 이야기를 해. 나는 웃고, 그들도 웃어. 그리고 그 색깔들이란! My ‘family’ is people. They tell me things: I laugh, they laugh! And the colors (Bradubury 73)!”

    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밀드레드만이 아니다. 작품에서는 클라리스를 만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기 전까지는 몬탁도 밀드레드에게 무심한 남편이었음이 드러난다. 몬탁이 책을 소유하게 된 후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며 힘들어할 때 밀드레드는 몬탁에게 비틀(beetle)이라고 불리는 차를 타고 나가 달리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에서 몬탁 역시 밀드레드에게 무심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밀드레드는 이 사회가 만든 인물로, 이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가 요구하는 사고 체계에 뼛속까지 젖은 인물인 밀드레드 역시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뭔가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고는 있다. 매우 단순하고 문제도 없고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밀드레드는 어느 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 시도를 한다. 그녀의 자살시도는 그녀의 삶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불안정한 인물인 밀드레드는 자신이 자살시도를 했다는 것조차 기억해 내지 못한다. 위세척 후 잠에서 깨어난 밀드레드는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몬탁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밀드레드에게 물어봤을 때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밀드레드는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겠어?(What would I do a silly thing like that for?)” 라고 오히려 되묻는다. 브래드베리는 자살이라는 매우 심각한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억조차 못하면서 넘기는 밀드레드를 보여주면서, 미래 사회의 인간들이 각자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망각하고 만족한 듯 지내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정보가 통제된 사회라는 심각한 상황 역시 밀드레드의 자살 시도처럼 그냥 망각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몬탁이 집에 책을 숨긴 사실을 안 밀드레드는 남편인 몬탁을 방화서에 고발한다. 밀드레드가 고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몬탁이 좌절감을 느낄 때 밀드레드가 보이는 태도는 오히려 몬탁의 연민을 부른다. “불쌍한 가족, 불쌍한 가족, 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어, 모든 것이, 지금 모든 것이 사라졌어. Poor family, poor family, oh everything gone, everything, everything gone now(Bradubury 114).” 여기에서 밀드레드가 말하는 가족(family)이란 몬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행복한 목소리로 대표되는 가족을 말하는데, 집에서 책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에 집이 방화수에 의해 불에 타야하고, 따라서 집에 있는 텔레비전도 불에 타기 때문에 밀드레드는 가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의 밀고로 자신의 진짜 가족이 해체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몬탁의 행동이 텔레비전 가족을 무너뜨린 것에 대해 깊이 절망하고 분노한다. 밀드레드가 남편인 몬탁을 배신하는 부분은 그 동안의 밀드레드와 몬탁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밀드레드가 오랜 시간 함께 한 몬탁에 대해 부부의 정도 없고, 그 둘은 그저 남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이고 허무하게 다가온다. 밀드레드에게 가족은 텔레비전뿐이었고, 몬탁은 가족이 아니라 텔레비전이 요구하는 대로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책을 소유한 것이 발각되고 비티 서장을 죽이게 된 것 때문에 경찰에 쫓기는 와중에도 몬탁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내인 밀드레드를 생각하면서 연민을 느낀다.

    몬탁과 밀드레드는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철학적인 사고 없이 살던 몬탁이 이웃소녀 클라리스를 만난 뒤 자신의 생활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되면서 그가 자신의 아내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 한다. 밀드레드는 남편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도 못할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이외의 것에는 관심도 없다(Bradubury 42). 몬탁은 십 년 전쯤에 밀드레드를 만난 것을 알고는 있지만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도시를 탈출한 몬탁은 그제야 시카고에서 아내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Bradubury 160).

    작가는 밀드레드를 문제의식도 없고, 사랑도 모르고 모든 것에 무지하지만, 텔레비전에만 열광하는 빈껍데기로 그려내는데, 밀드레드는 다수의 현대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밀드레드라는 이름은 ‘약한 정도의 힘, 가벼운 정도의 강도’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이름은 밀드레드라는 인물이 몬탁 처럼 사회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하는 상황과 그 성격을 상징한다. 밀드레드의 친구인 펠프스 부인(Mrs. Phelps)와 볼즈 부인(Mrs. Bowles)이 집으로 방문했을 때, 몬탁은 경솔하게도 그들에게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시 Dover Beach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펠프스 부인은 시를 듣는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어 울음을 터뜨리지만, 그 모습을 본 밀드레드와 볼즈 부인은 몬탁의 행동에 매우 화를 낸다. 몬탁에게 화를 내는 볼즈 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시와 눈물, 시와 자살, 울음과 끔찍한 기분, 시와 구역질, 모든 종류의 뒤범벅에 대해 늘 말했었잖아. I’ve always said, poetry and tears, poetry and suicide and crying and awful feelings, poetry and sickness; all that mush(Bradubury 101).” 볼즈 부인은 이전에 시라고는 한 번도 안 읽었고, 시에 대해서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가 늘 말했다(I’ve always said)’ 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양 표현한다. 사회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입된 정보를 마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듯 착각을 하는 것이다.

    IV. 지식의 재건

    몬탁은 왜 수많은 시 중 Dover Beach를 택해 밀드레드와 그의 친구들에게 낭송을 했을까? 다음은 몬탁이 밀드레드와 밀드레드의 친구들에게 읽어 준 Dover Beach의 발췌문 중 마지막 세 줄이다.

    이 시는 믿음과 신념을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는 시다. 몬탁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느끼게 된 미래 사회는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기쁨도, 사랑도, 빛도 없으며, 확신도, 평화도, 고통에 대한 도움도 없다. 몬탁이 도시를 탈출한 뒤 곧 전쟁이 시작되고, 도시에 대한 폭격이 일어나는 것 역시 위에 인용된 시에 암시되어져 있다.

    『화씨 451』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반복되는 상징이 많이 등장한다. 몬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작품이 끝날 때 쯤 도망치는 몬탁은 도시를 탈출해 Book People에 합류하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고 폭탄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데, 이는 앞으로 더 나은 문명이 탄생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몬탁은 Book people과 이들의 지도자인 그레인저(Granger)를 따라 다른 도시를 찾아 가는데, 이를 통해 작가가 작품 전체를 통해 말하는 ‘다시 시작하는 것’은 지식을 되살리는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시 시작하는 이미지는 몬탁이 종종 피닉스에 비유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피닉스는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전설 속의 새이다. 이는 영원한 인간의 생명력을 상징하여, 인간이 실수나 착오를 범해도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에서 영원히 재생하는 피닉스는 좁은 의미로는 몬탁의 정신적 부활을 상징하며, 넓은 의미로는 인간의 역사가 계속적으로 되풀이됨을 말한다. 또한 몬탁이 불에 뛰어들어 새로운 탄생을 반복하는 피닉스처럼 운이 다한 사회를 끝내고 새로운 사회를 재건할 것이 피닉스라는 상징을 통해 암시된다.

    반면, 비티 서장과 방화수들은 살라만더라는 상징물로 대표될 수 있다. 살라만더는 불에서 사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화씨 451』에서 살라만더는 방화수를 공식적으로 상징하는 동물로 방화수가 타는 방화차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늘 불을 가까이 하지만, 불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비티 서장은 책을 태우는 일을 관장하면서도 수집한 책을 읽어서 지식을 보유한 이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특히 문학에 관련한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말할 때 문학 작품의 인용을 자주한다. 그는 “The Hearth and the Salamander” 장이 끝나갈 때 이러한 말을 몬탁에게 한다.

    비티 서장이 말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에게 평등한 지식수준이 중요함을 언급하면서도 자신은 모아놓은 책을 통해 교육받고, 책을 위험한 무기로 규정하면서도 자신은 자유롭게 이용하는 모순을 범한다. 비티 서장은『화씨 451』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난해한 인물로 책을 읽고 스스로를 교육하는 그가 왜 방화수서장으로 일을 하는지 독자들을 혼란하게 한다. 그가 책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그가 책에 대한 신념을 버린 후에 그 직업을 택했는지, 아니면 책을 자유롭게 읽고자 그 직업을 택했는지는 작가는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몬탁을 둘러싸고 있는 두 인물, 즉 비티 서장과 그레인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책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그레인저는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중점을 두지만, 비티 서장은 책을 읽어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비티 서장은 문학 작품에서 인용하여 말을 하지만, 여전히 책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페이버 교수가 말하는 책의 숨구멍을 못 발견한 것이다.

    책이 갖고 있는 숨구멍은 삶의 표면에 드러나는 숨구멍을 의미한다. 책을 읽으면 삶에서 느끼는 갖가지 복잡한 것들을 내려놓고 생각을 할 시간과 기회를 주는데, 바로 삶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숨구멍이라고 부른다. 책을 읽었을 때 글자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읽으며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비티 서장은 글에만 집중하여 책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한다. 책의 숨구멍을 보고 안 보고가 바로 비티 서장과 그레인저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이다.

    비티 서장은 책을 태우는 방화수의 대표이며, 책을 읽고 지식을 공유하는 Book People의 대표인 그레인저와 반대되는 인물로 비교된다. 이 두 인물이 사는 곳 역시 반대되는데, 비티 서장은 각종 기술로 무장된 편리한 도시에 살며, 그레인저는 강의 반대편 숲 속에서 모든 것이 부족하나 삶에 만족하며 산다. 비티 서장과 그레인저 모두 책을 통해 지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비티 서장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반면, 그레인저는 지식의 복구를 위해 애쓰고, 나중에 몬탁을 Book People에 합류하도록 돕는다. 비티 서장과 그레인저는 둘 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함께 보낸다. 비티 서장은 책을 태워버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책을 읽는다. 그레인저를 비롯한 Book People도 역시 책을 태우는데, 책을 읽고 암기를 하면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Book People은 책이 발각되는 것을 원치 않고, 이동이 잦은 생활 때문에 방화수가 하듯이 책을 태워버리고, 대신 각자가 맡아 외우고 있는 책이 있다. 몬탁은 성경의 전도서(코헬렛, “Book of Ecclesiastes”)를 외우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책의 내용은 지식이라는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과 성경을 외우고 있는 몬탁이 앞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몬탁의 이름이 상징하는 바도 살펴보면 독일어로 ‘월요일’이라는 뜻을 가진 몬탁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첫째 날에 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들었듯이, 몬탁 역시 첫째 날 즉 월요일에 어둠으로 대표되는 무지 속에서 빛으로 상징되는 지식을 확산시킬 운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V. 결론

    1953년 레이 브래드베리의 작품『화씨 451』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소재로 하여 종종 조지 오웰의『1984』와 비교가 되기도 하나, 당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을 담고 있어 21세기 테크노폴리 현상으로 잘 연결되지 못하는 『1984』에 비해 사회-문화적인 문제를 소재로 하는『화씨 451』은 여전히 현대의 테크노폴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씨 451』은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는 미래상에 정보의 차단이라는 소재가 더해 많은 다른 작품과 영화의 직접적인 소재가 되었다. 영화 <일라이(2012)>(The Book of Eli)나 <이퀼리브리엄(2002)>(Equilibrium) 등의 영화에서도 미래 사회에서 일반 대중들이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된다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영화 <화씨 451(1966)>(Fahrenheit 451)이나 <일라이>, <이퀼리브리엄> 등에서는 공통적으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를 보여주며, 동시에 지식의 소유가 곧 정치적 힘의 소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브래드베리가 그리는『화씨 451』의 미래 사회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책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지식을 없애고 대신 필요할 때마다 정보를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는 형태이다. 본 연구는 현대의 테크노폴리 사회가 진행하는 방향이 브래드베리가『화씨 451』에서 보여주고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대의 정보 사회는 책의 소유에 대한 자유는 물론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넘쳐나고 개인의 지식수준도 정보 사회 이전의 사회보다 더 향상되었을 거라고 믿지만, 오히려 많은 양의 정보 속에서 현대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되었고, 능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개별적으로 지식화하기보다는 대신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훑어 읽고, 간추리는 능력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방법은 다르지만『화씨 451』의 사회와 현대의 정보 사회가 지식의 제한, 정보의 일방적 주입이라는 결과 면에서는 매우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주인공 몬탁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결박당한 채 살아가는 아내 밀드레드와 비교되며, 지식의 차단에 앞장서는 비티 서장과도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지식이 통제된 도시를 탈출하여 Book People 사이에서 성경의 전도서 자체가 되는 몬탁은 피닉스가 스스로 자신을 불태운 재에서 새로운 탄생을 거듭하듯이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고 지식을 수호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작가 브래드베리는 밀드레드를 통해 텔레비전과 사회가 주입한 정보에 따르며 비판의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현대의 테크노폴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1990년대 이후 닐 포스트먼이나 니콜라스 카 등의 학자나 작가들이 현대의 정보사회가 오히려 지식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것에 반해, 브래드베리는 이미 1953년에『화씨 451』을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지식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미래 사회를 예견했다. 본 연구는 정보의 확산이 일어난 대신 지식이 줄어들고 있는 테크노폴리의 상황을 책이 금지되고 불타는 미래 사회로 묘사한『화씨 451』을 통해 인간이 과학기술로 인해 얻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했으며, 정보의 양이 지식의 수준과는 늘 양의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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