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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한국연극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위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중심으로― Dramatug’s role and its position of the Korean theater
  • 비영리 CC BY-NC
ABSTRACT
한국연극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위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중심으로―

This paper is a report on the activities of dramturg in the Korean theater. I started dramaturg job by the proposal of directors in the middle of 2000s. My early dramaturg duties, without a clear recognition, were critical commentary in the objective gaze(‘outside eye’). Having a lasting relationships with particular theater company, I began to recognize the role of ‘production dramaturg'. In the 2010s, producing theaters, Namsan Arts Center, Myeongdong Theater and 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were launched and I began to work professional dramaturg. This process showed how dramaturg works and environment changes of the Korean theater production were closely related each other. This paper sought to explore the role of the Korean dramaturg through the dramaturg theory and history of world theater’s. This article mentioned theoretical case of Lessing and Brecht. In particular, Brecht’s concept of ‘production dramaturg’ will be a good reference to ‘theater company dramaturg’ and ‘producing theater dramamturg’ in Korea.

KEYWORD
드라마투르그 , 내부 비평가 ,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 레싱 , 브레히트 , 극단 , 제작극장 , 극단 백수광부 , 명동예술극장 , 남산예술센터 , (재)국립극단
  • 1. 서론 : 자생적 드라마투르그 활동의 과정

    필자가 드라마투르기(인명: 드라마투르그)의 용어를 처음 접한 것은 2004년이었다. 2004년 5월 예술의전당 젊은연극시리즈 공연의 하나로 올라간 김태웅작ㆍ연출의 <즐거운 인생>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필자는 대학의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희곡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상태였고, 한국희곡ㆍ연극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위치에 있었다. <즐거운 인생> 공연에의 참여는 연출가와의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우연한 계기에 의한 것이었고,1) 희곡 연구자의 입장에서 공연의 실제적인 작업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필자에게 드라마투르그의 개념이나 역할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리고 이는 역할을 제안한 연출가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 배우, 스태프, 극장 관계자, 어느 누구도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저 작품을 분석하고 연습에 참관하며 프로그램에 작품 소개의 글을 써주는 역할 정도로 막연하게 인지하고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업과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단순한 관찰자로서 논평하는 위치와 달리, 프로덕션에 드라마투르그라는 지정된 역할로 참여하는 순간 어느 정도까지 작업에 개입해야 하는지, 연습과정 중의 피드백은 연출가에게만 한정해서 전달해야 하는지 배우나 스태프들에게까지 확대해야 하는지, 드라마투르그의 지속적인 역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매 순간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더욱 혼란스러웠던 것은, 공연 제작과정 중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참여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투르그 당사자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굳이 드라마투르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태였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정체성의 혼란까지 느끼는 상황이었다.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한 페이도 지불되지 않았고, 대신 프로그램 북에 실린 글에 대한 원고료를 지급받았다. 이러한 혼란과 실패를 언급하는 것은, 결국 드라마투르그 작업은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는 실제 작업과정 자체가 불가능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2004년 이후 현재까지 필자가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작업은 총 30편이다.2) 첫 번째 작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다시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계속하게 된 것은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이하 공이모)과 연계된 사업에서였다. 이인극 페스티벌, 핀터 페스티벌, 혜화동일번지 4기 동인 페스티벌 등 페스티벌 사업에 공이모의 평론가들이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는 형태였다(2006~2008년). 이 공연들은, 주로 단기간에 진행되는 페스티벌 사업의 특성상 연습 기간도, 공연 일정도 짧은 공연들이었고, 연습의 참여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공이모라는 단체 차원에서 드라마투르그 작업이 계속 요구되었고, 월례비평 등 현장 작업자들과 이론적ㆍ실천적 교류를 도모하는 공이모 활동의 성격상 현장 작업자들과 폭넓고 실제적인 교류가 가능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 필자 또한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해 다시 ‘의식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의 개별적인 작업에서의 실패와 달리,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해서 함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여를 격려하고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작가ㆍ연출가ㆍ배우ㆍ극단과의 작업은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한 개념과 역할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평론가와는 다른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인한 충돌도 목격하게 되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외부자적 시선(outside eye)’은 평론가의 ‘권위적인 시선’으로 곧잘 오해되었고, 드라마투르그가 제작과정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소극적인 범위 내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작업 내의 모든 의사소통 통로는 연출가 1인에게만 한정한다는 등의 한계를 스스로에게 강제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개별적인 경험을 축적해가는 시기였으며, 이를 토대로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한 더 적극적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단계에서,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대해 더 적극적인 제안을 받게 된 것은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가와 극단 백수광부의 이성열 연출가에 의해서이다. 박정희 연출가와의 작업은 2008년 <태수는 왜?>(고영범 작, 박정희 연출, 극단 풍경, 2008), 이성열 연출가와의 작업은 2009년 <뉴욕 안티고네>(야누쉬 그오바츠키 작, 이성열 연출, 극단 백수광부, 2009)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에서 필자가 스스로 ‘학습’하게 된 것은,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다. 이 단계에서 특정 극단과 파트너십을 가지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연출가 개인과의 작업 범위를 벗어나 극단 전체, 프로덕션 전체와의 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3)

    이 시기에 작가ㆍ연출가ㆍ배우들의 세계 이외에 무대 뒤에서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세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이름은 아니지만 프로덕션 내에서 실제적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극단 백수광부 작업에서 조명 디자이너 김창기의 경우는, 정확한 작품 분석과 영감에 찬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디자이너로 흡사 동료 드라마투르그로 느껴질 정도로 필자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4) 이 과정에서 필자는 무의식적으로나마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production dramturg)’5)의 역할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작품 분석과 연습과정의 피드백의 범위를 무대․조명․의상․음악 등 공연의 모든 요소로 확장시켜 토론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비로소 드라마투르그의 ‘창조적인’ 역할에 대해서 깨닫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투르그 또한 공연 제작과정 중의 부수적인 한 요인이 아니라(“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역할”) 중요함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후 공연에 대한 태도 또한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필자 스스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다른 스태프들로부터 받은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한 번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은 드라마투르기 작업에 대한 의식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자극에 의해서 가능함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또한 특정 극단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경우, 매 공연에서 축적된 경험과 역량이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극단의 앞으로의 방향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소한 사례지만, 예컨대 프로그램 북의 ‘드라마투르그의 글’의 원고 또한 작품 소개나 안내 차원을 넘어 점차 제작과정에 대한 기록과 정리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스스로 인식의 변화에 따라 드라마투르그의 역할 자체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드라마투르그는 작가의 멘토, 연출가의 협력자, 디자이너들과의 관계에서 번역자이자 중재자이면서, 공연의 작업과정을 기록하고 극단의 역사를 지켜보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드라마투르그는 작업과정 중의 참여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공연에 대한 메타적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필자의 드라마투르그 작업과정에 관한 실제 사례분석을 통해 드라마투르기의 개념과 역할, 쟁점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현장작업의 특성상 작업과정을 일목요연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겪었던 혼란과 시행착오 속에서 가지게 된 고민을 공유하고 앞으로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인식 및 작업과 관련한 가능한 비전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1)김태웅과 필자는 1994년 문예진흥원 산하 공연예술아카데미 6기 출신이다. 김태웅은 극작과, 필자는 연출과 학생으로 작가와 연출가로서 워크샵 공연을 올린 경험이 있다.  2)재공연 포함. 재공연 제외하면 26편. 이중 <여행>은 재공연이지만 필자가 처음으로 참여한 공연임. 자세한 공연 목록은 별첨 참고.  3)여기서 ‘프로덕션’은 제작팀을 뜻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동안 극단이 주로 제작 주체의 역할을 맡아왔지만, 최근 제작극장들이 등장하면서 극장 또한 새롭게 제작 주체로 나서고 있다. 제작 주체로서 극단과 극장의 경쟁관계에 관해서는 2-2장 참고. 이 글에서는, 극단은 뚜렷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움직여나가는 운동성을 가진 유기적인 생물체와 같은 존재로, 프로덕션은 제작과정의 주체를 뜻하는 중립적인 용어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4)조명 기술의 문제보다 “대본 분석을 우선”하는 김창기의 태도는 다음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성규, 「공연계 숨은 꽃: 조명 디자이너 김창기 씨」, 『동아일보』, 2012. 9. 6.  5)여기서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는 브레히트의 개념에 따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2장 참고.

    2. 이론적?역사적 모델과 쟁점

    이 장에서는 앞으로 논의의 기반이 될 몇 가지 용어들과 이론적ㆍ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6) 논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개념들을 정리하는 한편 한국적 상황에서 어떤 쟁점들이 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다. 이 장에서는 단순히 드라마투르기의 역사를 훑는 것이 아니라 한국연극에서 가능한 드라마투르기의 이론적 모델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역사적 사례를 검토해봤을 때, 현재 드라마투르기의 가능한 이론적 모델은 세 가지이다. (1) 독일의 레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비평가-드라마투르그,’ (2)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인 ‘공연-드라마투르그,’ (3) 영국의 케네스 타이넌의 경우인 ‘리터러리 매니저(Literary Manager)’가 그것이다.

    이 중 ‘리터러리 매니저’는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이 영국적 맥락에서 변형된 것이다. 타이넌은 1963년 출범한 영국 국립극장의 첫 번째 공식적인 ‘리터러리 매니저’로, 그가 국립극장에 ‘리터러리 매니저’ 역할을 강력하게 제안하고 주장한 데에는 브레히트의 영향이 컸다. 타이넌은 1950ㆍ60년 대에 베를리너 앙상블에 방문해서 연습과정을 직접 지켜보았고, 브레히트의 작업을 “전후 유럽의 극장에서 아주 흥분되는 일”이라며 그의 작업에 매료되 었다.7) 타이넌은 국립극단의 극장장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에 입각한 ‘드라마투르그적 역할’을 제안했으나, 셰익스피어극의 전통이 발달한 영국연극의 특성상 유명 배우 중심의 ‘액터 매니저’의 권위가 높은 상태에서 절충적으로 ‘리터러리 매니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8) 그리고 이후 이사회 등과 불화를 일으키며 ‘리터러리 컨설턴트’로 강등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드라마투르그적 역할을 실천했다. 그러나 타이넌 이후 영국연극사에서 ‘리터러리 매니저’의 작업은 침체기에 빠지는 등 영국적 현실에서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이 실제적으로 뿌리 내리기 힘들었던 상황을 보여준다.9)

    타이넌의 경우에서처럼, 극장장과의 타트너십 관계에서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선정과 단체의 공연 전반에 관한 컨설팅 작업은 실제 공연 제작 과정의 창조적인 참여가 전제되는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실제 공연 제작과 관련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논하는 이 글에서는 드라마투르그의 전통이 강한 독일연극을 중심으로, 특히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중심으로 현재 한국연극에서 가능한 드라마투르그의 실제적인 역할 모델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2-1. 레싱의 모델 : 내부 비평가(in-house critic)

    먼저 ‘드라마투르기’ 용어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레싱의 저서 『함부르크 연극론(Hamburgische Dramaturgie)』(1768~1769)으로부터 기인한다. 레싱은 1767년 개관한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전속 평론가’로 참여하면서,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공연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 번 발행하는 정기간행물 『함부르크 연극론』을 발행하였다. 함부르크 국민극장은 비록 1767년 4월 22일 개관한지 2년만인 1769년 3월 3일 문을 닫아 단명하였지만, 레싱이 당시 발행한 정기간행물을 2차례에 걸쳐 책으로 펴내면서(총 104호, 52호까지 1권, 104호까지 2권으로 발간) 이후 독일연극계에 ‘드라마투르기’라는 용어가 정착하는 데에 기여했다. 실제로 이후 각종 ‘드라마투르기’류의 서적이 간행되는 붐을 이루며,10) 독일연극계에 일찍부터 드라마투르기의 전통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에 브레히트가 직업적인 드라마투르기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초기 작품 활동기를 보냈던 것처럼, 독일연극에서는 이른 시기에 드라마투르기가 ‘직업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요컨대 여기서 ‘드라마투르기’의 의미는,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인 ‘극작법’의 의미를 넘어 공연 제작과정 중에 존재하는 스태프 중의 하나를 뜻한다. 드라마투르그 또한 무대ㆍ조명ㆍ의상ㆍ음악 디자이너 등 다른 전문적인 영역과 마찬가지의 전문 영역이자 직종이다.

    그렇다면 레싱의 ‘드라마투르그’ 활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레싱이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전속 평론가로 주보(週報)의 형태로 펴낸 간행물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싱의 ‘드라마투르그’ 활동은 극장 내부의 전속 평론가, ‘내부 비평가(in-house critic)’였다. 실제로 레싱은 함부르크 국민극장에 올라가는 작품들에 대한 냉정하고 신랄한 평가의 리뷰를 지속적으로 썼으나, 결국 배우와 관리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25호부터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비평과 연기술에 대한 탐구를 전면 중단하고 대신 희곡과 연극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시 독일연극계가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있었던 프랑스 신고전주의 극작법에 반하여 독일만의 극작법, 비극론, 특히 셰익스피어 비극을 독일연극의 새로운 모델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레싱은 독일 계몽주의 문학이 질풍노도기의 새로운 문학의 형태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함부르크 연극론』의 집필 동기를 밝히는 위의 글에서처럼, 레싱은 독일연극만의 극작법과 전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레싱은 책의 곳곳에서 “우리 독일인은 아직 제대로 된 연극을 가지지 못했다”12) 한탄하며, 꼬르네유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왜곡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프랑스인보다 더 고대 그리스 드라마의 법칙을 오해한 민족은 없었다”13)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그런가하면 볼테르와 셰익스피어의 극작법을 비교하며 “셰익스피어의 유령은 실제로 저세상에서 오지만” “볼테르의 유령은 아이들을 놀래기 위한 허수아비”14)만도 못하다고 혹평한다.

    위의 글은 레싱이 함부르크 국민극장에 참여하게 된 경위를 밝히는 내용이다. 위의 글에서처럼 『함부르크 연극론』의 후반으로 갈수록, 레싱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글을 자주 쓰고 있다. 필자는 종종 이 글을 ‘드라마투르기’ 수업시간의 학생들에게 들려준다.16) 레싱의 경우도, 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연한 계기로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아무런 기반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찾아낸 것이다. 레싱은 평론가이자 이론가였으며 작가였고 함부르크 국민극장의 전속 평론가로서 독일연극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아내고 역할을 한 것이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길은 없었지만 한국연극 전공자이자 연구자로서 한국연극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이 한국연극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드라마투르그 활동 초기에 필자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한국연극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개별 공연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고 동시에 그것을 동시대적 맥락의 비평적 감각으로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다. 비록 제한적인 역할이나마 나름대로 한국연극사의 좌표 속에서 드라마투르그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으며 스스로의 드라마투르그 활동에도 피드백이 되는 과정을 만들어갔다. 한편으로 초기의 드라마투르그 활동은 이렇듯 외롭고 자가발전적인 것이었다.

       2-2. 브레히트의 모델 :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production dramaturg)

    이에 비해 특정 극단과 지속적으로 작업하게 되면서 단순히 ‘내부 비평가’의 역할을 넘어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는 주로 브레히트의 작업과 관련하여 지칭되는 역할이다. 브레히트는 본인 자신이 드라마투르그 출신 작가이자 연출가였다. 브레히트는 작품 활동 초기였던 1920년대에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피스카토르와 협력적 관계를 맺는 드라마투르그였다.17) 레싱이 연극비평가이자 이론가로 특정 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면, 현대의 드라마투르그는 작품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높다. 특히 브레히트는 본인이 작가였기 때문에 개작 및 공동구성 등 작가적 역량이 필요한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많은 흥미를 느낀 듯하다. 브레히트의 초기작은 개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많고, 이는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으로의 발전에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브레히트의 마르크스주의적 극작법은 “연극은 사회 변혁을 지향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고, 익숙하고 관습적인 고전을 비틀어 ‘공연을 재맥락화(re-contexualizing the theatre)’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브레히트의 개작의 원칙은 세 가지이다. 첫째 극에서 잠재적인 사회적 논평을 이끌어내도록 한다. 둘째 작품 속의 역사적 순간에 대해 재평가하도록 한다. 셋째 이를 동시대 관객이 재평가하도록 한다.18) 브레히트의 이러한 극작법은 기존의 드라마투르기의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브레히트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드라마투르그 개인의 영향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이 ‘드라마투르기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확대하는 동시에 극단의 공동 작업 속에 깊숙이 참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9) 브레히트는 집단적 드라마투르그 체제를 완성해갔다.

    흥미로운 것은, 브레히트 자신은 자신의 초기 드라마투르그 작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고, 그가 성공적인 전문 드라마투르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48년 이후 망명에서 돌아와 동독으로 귀국한 이후, 1949년 자신만의 극단인 베를리너 앙상블 작업을 통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한마디로 말해서 집단적 공동창작 형태인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작업이다.

    사실 위와 같은 역할들은 동독의 사회주의 예술관의 토대 위에서나 가능한 것들이다. 사회주의 예술관에서 극장은 단순한 오락 기관이 아니라 대중교육을 위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장의 레퍼토리 선정 및 (재)구성, 예술가들 내부의 토론과 기록 작업, 관객 교육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원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공연 전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과 관련하여 중요한 참고점이 된다. 실제로 필자 또한 극단 백수광부와의 지속적인 작업 속에서 작가ㆍ연출가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지적ㆍ예술적 자극을 받으면서 함께 성장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비록 사상적 배경은 다르지만 브레히트가 제시한 공동체적 작업방식으로 프로덕션 작업이 가능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한편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에서 ‘프로덕션’ 개념은 극단과 극장 모두를 함께 의미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상황이 다르다.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ㆍ미국의 경우, 연극의 발달은 극장과 함께, 특히 1960ㆍ70년대 공공극장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져 왔다. 우리와는 달리 극장 중심의 프로덕션 개념이 훨씬 강한 것이다. 독일극장은 대부분 정부의 재정보조를 받는 영구극장(permanent theatre)의 형태로, 인구 5만 이상의 모든 도시는 국립극장(national theatre)ㆍ주립극장(state theatre)ㆍ공립극장(municipal theatre를 가지고 있으며 시즌당 평균 6-8편의 공연을 올리는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21) 영국도 1963년 국립극장의 출범과 함께 로렌스 올리비에 극장장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최초의 공식적인 리터러리 매니저로 케네스 타이넌이 임명되었으며, 극장에서의 레퍼토리 선정과 공연 전반에 관한 컨설팅의 역할이 강화되어 왔다.22)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60년대 중반 이후 Guthrie Theatre, Arena Stage, American Repertory Theatre 등 지방전문연극단체들이 미국예술재단(NEA)의 재정 지원 아래 지속적인 레퍼토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23) 전통적으로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개념이 강한 독일극장을 비롯하여, 1990년대 이후 영국의 데이비드 해어, 카릴 처칠, 미국의 토니 커스너, 데이비드 마맷 등 새로운 극작가들의 등장 배경에는 이러한 공공극장의 발달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공공극장의 레퍼토리 시스템을 책임지는 드라마투르그의 직업화라는 현상도 중요하게 맞물려 있다.24)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극단은 특정한 성격과 방향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적 존재인 반면, 극장은 그야말로 물리적인 극장 공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극장 공간은 주로 대관의 형태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극장이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극장은 단지 잘 지어진 건축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최근 달라진 상황이 있다. 2009년 명동예술극장, 남산예술센터, 대학로예술극장, 2011년 (재)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등 중극장 이상 규모의 극장들이 연이어 개관하며 공공제작극장을 표방한 이후 극장이 적극적인 ‘프로덕션’의 의미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중극장 이상 규모의 제작극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체 기획력이 절실하게 되고 자체 제작 작품들이 나름대로의 성격과 일정한 방향을 가지게 되면서 극장 또한 기존에 극단에서 주로 수행하던 프로덕션 주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공공제작극장의 등장으로 인한 연극 환경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25) 기존의 프로덕션 주체이던 극단과 새로 등장한 공공제작극장이 상호 역할을 조정 중이다.

    이러한 연극 환경의 변화는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에도 영향을 끼친다. 필자 또한 남산예술센터(<운현궁 오라버니>, 2009 ; <남산공동연작 프로젝트>, 2010; <살>, 2011), 명동예술극장(<오장군의 발톱>, 2010 ; <봄날>, 2012), (재)국립극단(<레슬링 시즌>, 2012; <꽃이다>, 2012 ;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 2012) 등 제작극장에서의 작업을 경험하였다. 주로 팀워크를 이루어 작업하던 연출가나 스태프들과 함께 들어가 작업을 한 경우도 있었고, 개별적으로 의뢰를 받아 작업을 한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한 가지 명확하게 인지한 것은, 3, 4년간의 비슷한 역사를 지닌 공공제작극장들이지만 그 성격에 따라서 드라마투르그와의 작업에 적극적인 곳도 있고 소극적인 곳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드라마투르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제작극장은 주로 젊은 연극인들을 지원하거나 후원하는 극장이라는 점이다.26)

    구체적으로, 필자의 경우에 남산예술센터와 (재)국립극단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에 명동예술극장의 경우,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에 대한 인식 자체가 희박했으며 프로덕션의 작업방식도 비교적 권위적이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섭외 또한 실제 작업능력보다는 드라마투르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명동예술극장은 유명 연출가의 명성에 기반한, 유명 배우의 스타 캐스팅에 의존한, 외국 명작을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선정하는 방향을 가진 극장으로,27) 항상 새로운 관점을 개발하고 실험하고자 하는 드라마투르그의 작업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안정과 대중성을 지향하는 명동예술극장의 방향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드라마투르그의 활동과 관련해서 명동예술극장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상 최근 4년간 제작극장과의 관계에서 필자가 내린 중간 결론은 “다시 극단으로!”라는 것이다. 제작극장에서 보다 안정적인 제작환경(물리적인 극장 조건이나 재정적인 보상)이 주어지긴 했지만 그 자체가 작업 과정의 밀도나 예술적인 만족감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작극장과의 작업에서 가장 먼저 당황하게 되는 것은 극단 시스템과는 병행할 수 없는 극장의 프로그램화된 시스템이다. 배우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해야 하고 스태프는 프로젝트 그룹처럼 구성된다. 일회적 프로젝트성 작업에서는 드라마투르그의 활동 또한 기능적으로 제한되기 쉽다. 연습 초반의 작품 분석, 연습 참관 및 모니터링, 프로그램북 노트 작성 및 피드백 등 드라마투르그의 역할 자체도 단순하게 프로그램화된 과정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기 쉽다.

    이에 비해 극단 작업은 비록 열악한 제작환경이지만 극장의 프로그램화된 시스템과는 다른 무엇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사전제작과정의 아이디어 출발 지점부터 무수히 많은 토론 과정을 거쳐 작품을 진행해나갈 수 있는 점은 작품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데 절대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브레히트에서와 같이 확장된 드라마투르그 개념은 작업에서의 주체성과 능동성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우리의 현실에서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적용해본다면 아직까지는 ‘극장 드라마투르그’보다는 ‘극단 드라마투르그’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다만, 가장 최근 작업이었던 (재)국립극단에서의 작업에서 극단에서의 작업과 같은 밀도의 팀워크를 형성하고 예술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작업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핵심에 (재)국립극단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제작 피디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의 <레슬링 시즌>을 함께 한 김미선 피디,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 작품 중의 하나인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와 함께 했던 손신형 피디는 제작극장의 피디라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극과 창작극에 대한 열정과 높은 사명감을 보여준 예였다. 이들은 제작극장의 피디와 프로젝트 별로 구성된 스태프들이 위계적인 관계(이른바 계약서상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에서 고민을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가는 파트너십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극장 드라마투르그’ 작업에서는 작가ㆍ연출가뿐만 아니라 피디와의 의사소통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하게 되었다. 명동예술극 장의 구자흥 극장장이나28) 남산예술센터의 이규석 극장장이29) 기획자 출신인 것과 달리 (재)국립극장의 극장장 격인 손진책 예술감독은 극단 미추의 대표이자 연출가(1986∼)인 창작자 출신이다. 이에 따라 다른 제작극장들과는 달리, (재)국립극단 제작 공연에서는 극단의 제작 과정과 흡사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현재 제작극장들 또한 시도와 실험 혹은 상호경쟁의 과정 중에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그렇다고 해서 ‘극단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이 마냥 장미빛인 것만도 아니다. 현재 극단 시스템은 1명의 연출가를 주축으로 하는 대표 중심의 구조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 개인의 성품이나 연극적 비전에 따라 극단 운영 전체, 작품 제작 과정 자체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좋았던 팀워크가 사소한 계기들로 인해 와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가장 눈에 보이지 않게 작업하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영역에서 작업하는 드라마투르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타격받을 가능성이 크다. 작가와 연출의 협력자, 배우와 스태프들 간의 내부 소통의 중재자 역할을 맡는 드라마투르그는 주로 설득과 협상의 역할을 담당한다. 극단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 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불가능한 일들로 돌변한다.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개념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극단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이 전제되어야 한다.

    6)이하 드라마투르기에 관한 이론적ㆍ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Mary Luckhurst, Dramaturgy: A Revolution in Theatre, UK: Cambrideg Uni. Press, 2006; Cathy Turner and Synne K.Behrndt, Dramaturgy and Performance,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8. 등 참고.  7)op.cit., p. 158.  8)Ibid., p. 152.  9)허순자, 「독일 및 영ㆍ미연극에서의 드라마투르기 발전」, 『연극교육연구』 12, 2006, 229쪽.  10)Mary Luckhurst, op.cit., p. 37.  11)고트홀트 레싱, 윤도중 역, 『함부르크 연극론』,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133~134쪽.  12)위의 책, 109쪽.  13)위의 책, 145쪽.  14)앞의 책, 42쪽.  15)위의 책, 135쪽.  16)필자는 2010년부터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에서, 그리고 2011년 2학기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드라마투르기 수업을 진행했다. 대학 전공과목으로 드라마투르기 과목의 개설은 현장에서의 드라마투르기 작업에 대한 관심이 학문적 대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연극원에서 199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드라마터지’ 수업을 도입한 김미희의 경우, 연극학과의 드라마투르기 전공수업의 목표를 ‘프로덕션 드라마터그’ 양성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김미희, 「드라마터지 교육,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연극의이론과비평』, 1999, 81쪽. 이 글에서 김미희는 기존의 ‘드라마투르기(그)’의 용어가 주로 번역이나 공연대본 구성자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지적하며 한국연극에 필요한 새로운 역할로서 ‘프로덕션 드라마트루기’의 적극적인 의미를 지칭하는 말로 기존의 독일어식 표현을 벗어나 ‘드라마터지(그)’의 영어식 표현을 새롭게 쓸 것을 제안하고 있다. 현재 실제 현장에서는 ‘드라마투르기(그)’ 대신 ‘드라마터지(그)’의 영어식 표현을 쓰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김미희의 제안처럼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의미에서 ‘드라마투르기’ 영역이 재고된 결과이기보다는 드라마투르기의 양적 확산에 따라 까다로운 독일식 표현보다는 친숙하고 편안한 발음인 영어식 표현이 선호되고 있는 결과로 보인다. 또한 김미희의 지적에서처럼 단순히 공연대본 분석ㆍ구성의 사전제작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공연 전반의 제작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은 원래 영미식 모델(‘리터러리 매니저’)이 아니라 독일의 모델에 따른 것으로, 용어의 기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원래 독일식 발음 그대로 ‘드라마투르기(그)’라고 불러야 한다. 단지 최근의 ‘드라마터지(그)’의 영어식 표현이 보편화되고 있는 데에는 그만큼 드라마투르기의 영역이 이전보다 친근하고 일상적으로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17)브레히트는 1922~1924년 Munich Kammerspiele 극장의 연출가 Otto Falckenburg와 Benno Bing 함께, 1924-1925년에는 Deutsches Theater 극장의 연출가 Marx Reinhardt의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고, 1927~1928년에는 피스카토르의 ‘드라마투르그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Cathy Turner and Synne K.Behrndt, op.cit., pp.56~57.  18)Ibid., p. 49.  19)Ibid., p. 56.  20)op.cit., pp. 63~64.  21)김미희, 「드라마터지 역할 연구: 유럽의 드라마터그를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논문집』4, 2001, 5쪽.  22)허순자, 앞의 책, 2006, 229쪽  23)허순자, 「미국연극에 있어서의 Production Dramaturg」, 『한국연극학』 4, 1992, 79쪽.  24)Cathy Turner and Synne K.Behrndt, op.cit., p. 9.  25)2012년은 어느 해보다 ‘극단의 위기’ 담론이 넘쳐났던 해이다. 이는 전 해인 2011년 (재)국립극단의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중극장 시대’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져오던 논의이다. 2011년 중극장 연극에 대한 논의로는 월간 『한국연극』의 2011년 기획 연재물 「중 극장 작업」, 『한국연극』, 2011., 6~9 ; 김지현, 「특집: 극단의 어제와 오늘」, 『한국연극』, 2012.1;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특집: 적응할 것인가, 사유할 것인가-남산예술센터의 연극들」, 『연극평론』, 2011, 가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특집: 오늘, 국립극단을 말한다」, 『연극평론 』, 2011, 겨울. 등 참고. 결국 2012년 ‘극단의 위기’ 담론은 이에 대한 반성과 자정 작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 『한국연극』의 2012년 기획 연재물 「극단 리포트」, 『한국연극』, 2012, 2-9; 편집부, 「특집: 극단은 진정 위기인가?」, 『한국연극』, 2012. 10;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특집: 연극 환경의 변화와 극단의 미래」, 『연극평론』, 2012.겨울. 등 참고. 이상 2009년 이후 현재까지 ‘중극장 연극’과 2012년 ‘극단의 위기’ 담론은 현재 진행 중이고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26)그 외 민간 제작극장으로 두산아트센터의 예를 추가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별도의 논의의 장에서 계속하도록 하겠다.  27)명동예술극장의 “고전 명작 중심 레퍼토리”의 “보수ㆍ안정 성향”은 허순자의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허순자는 명동예술극장 개관 1년의 운영을 총괄적으로 검토하는 글에서, 명동예술극장의 레퍼토리는 50ㆍ60대 이상 중장년층을 중심 목표관객으로 삼아, 50대 후반에서 70대의 중견 이상의 연출가에 의한, “실험이나 리스크보다는 안정성을 드러낸 레퍼토리”를 주로 선택하고 있으며, “프로시니엄 중극장이라는 형식적 온건성” 또한 명동예술극장 레퍼토리의 보수적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허순자, 「제작극장의 운영과 과제에 대한 사례 연구: 명동예술극장을 중심으로」, 『연극교육연구』 16, 2010, 206~211쪽. 결국 명동예술극장의 ‘명품화ㆍ대중화’의 운영방향은 명동의 중장년층 관객을 대상으로 한 ‘럭셔리한 대중극’ 지향이라 할 수 있고, 이는 현재까지도 명동예술극장의 중심 방향을 이루고 있다.  28)명동예술극장 구자흥 극장장은 극단 실험극장의 기획자 출신이다. 1970년 7월 극단 실험극장의 기획 책임자 유용환의 어시스턴트로 연극계에 입문했다.(구자흥, 「너무도 소중한 ‘실험’ 50년」, 『극단 실험극장 50년: 1960~2010』, 극단 실험극장, 33쪽.) 이후 의정부예술의전당 관장(2000~2006),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2007~2008)을 거쳐 2008년부터 현재까지 명동예술극장 극장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29)남산예술센터 이규석 극장장은 1998년 시작된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초창기부터 8년간 기획을 맡아왔으며, 이후 문화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 초대 센터장(2006~2009) 등을 거치며 기획자이자 행정가의 길을 걸어왔다. 남산예술센터의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과 도전을 지원하고자 하는 방향은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기획 출신의 이규석 극장장의 예술적 신념이 중요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희연, 「무대에서 만난 사람: 남산예술센터 이규석 극장장」, 『경향신문』, 2009. 9. 10. 서울프린지페스티벌 www.seoulfringefestival.net

    3.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실제

    앞장에서는 드라마투르그의 역사적 기원과 배경, 특히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실에서 가능한 논의들을 정리해보았다.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 개념이 독일 연극사의 맥락에서 ‘극단의 공동체성’을 담보로 한 ‘극장 드라마투르그’ 개념임에 비해 우리의 경우 아직까지는 ‘극단 드라마투르그’가 가장 현실적인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최근에 변화된 연극 환경 중의 하나인 제작극장의 출현이 앞으로 드라마투르그 작업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봤을 때 앞으로 드라마투르그의 영역은 점점 더 확대되고 더 많은 역할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드라마투르그 작업에도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 한편 실제 작업 현장에서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인식의 정도나 작업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드라마투르그 작업 현장에서 이론과 실제의 간격은 크다. 이에 따라 이 장에서는 실제 작업 과정에서 겪었던 혼란과 고민들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30)

       3-1. 창작극과 번역극

    필자의 경우, 활동 초기 작품을 선택할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창작극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필자가 한국문학ㆍ연극 전공자라는 개인적인 이력이 작용했다. 실제로 이는 창작극 공연에서 유리한 지점으로 작용했다. 예컨대 <태수는 왜?>(박정희 연출, 극단 풍경, 2008)의 경우, 작가 고영범은 신인 작가였고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작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91년 시점이 한국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작가는 대학 81학번이었고 그 세대에게 1991년의 시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태수는 왜?>는 1991년 시점에서 시작되는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판 오레스테스 이야기였고, 작가가 쓰고 있는 동시대적 주제의식은 작품 속에서 작가가 쓰지 않은 것 까지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공연이 이루어진 2008년 시점에서 왜 1991년이 다시 소환되고 있는지를 풀어가는 것이 공연의 중요한 방향이 되었다.

    또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성기웅 재구성ㆍ연출,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2010)의 경우는 국문학 전공자로서의 지식이 직접적으로 활용된 예였다. 일단 박태원의 원작 소설을 재구성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원작 소설이 다루고 있는 소설가 박태원이나 시인 이상, 1930년대 경성에 대한 문학사적 지식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한편 이 공연은 박태원의 원작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그대로 읽는 낭독공연의 형태를 기반으로 영상, 사진, 일러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다원공연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보통의 공연보다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공연이었고 미술 파트를 총괄하는 미술감독과 기술 파트를 총괄하는 기술감독의 존재가 중요한 공연이었다. 따라서 얼핏 드라마(문학) 파트를 맡고 있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할지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1930년대 경성을 제시하는 중심 이미지를 사진의 실사 이미지로 삼을 것인지 일러스트로 삼을 것인지 중요한 판단의 순간이 왔고, 이미 고정된 이미지인 사진보다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일러스트를 작품의 중심 컨셉으로 잡게 되었다. 사진이나 신문 자료와 같은 ‘사실적 고증’이 아닌 손맛을 살릴 수 있는 일러스트를 통해 근대 경성의 ‘감성’을 주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작품의 중심 방향을 1930년대 근대의 ‘감각’을 복원하는 쪽으로 맞춘 결과였고, 소설 원작이 가진 형식적 특성과 주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작품 분석이 미술감독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공연은 매체를 활용하는 기술과 문학이 결합된 독특한 인문학적 공연이 되었다.

    한편, 그렇다고 해서 번역극 공연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핀터 페스티벌 작품이었던 <일종의 알래스카>(이영석 연출, 극단 원, 2007), 폴란드 작가 그오바츠키의 <뉴욕 안티고네>(이성열 연출, 극단 백수광부, 2009), 미국 청소년 극인 로리 브룩스의 <레슬링 시즌>(서충식 연출, 국립극단, 2012) 등 번역극 작업도 병행해왔다. 여기에는 우선 현실적인 맥락이 작용했다. 실제 연극 현장에서는 창작극보다 번역극이 수적으로 월등히 많다. 그리고 마침 학계에서도 번역에 대한 연구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다. 번역을 단순히 ‘이식’ㆍ‘수입’ㆍ‘수용’, 곧 원전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차이를 ‘생산’하고 ‘변형’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로 재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작의 오리지널리티 못지않게 수 용 주체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의미 생산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브레히트 초기 작업의 개작 방식인 ‘공연의 재맥락화’와도 연결되는 지점으로, 공연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매우 유용한 시각이었다.

    이렇듯 현장에서의 현실적인 요구와 학문적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필자 또한 번역극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하게 된 것이 <기국서의 햄릿> 연작(기국서 연출, 극단 76, 1981; 1982; 1984; 1990)이었다. <햄릿>의 상황을 우리의 1980년 5ㆍ18의 현실에 대입시킨 <기국서의 햄릿>은 <햄릿> 원작의 해체적 실험뿐만 아니라 검열 등의 이유로 창작극이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던 시기에 창작극 못지않게 우리의 현실에 밀착해서 발언하고 있었던 문제적인 작품이다.31) 요컨대 <기국서의 햄릿>은 이미 번역극/창작극의 경계를 넘어선 작품이었다. 이를 확장해서 생각해봤을 때, 한국에서 공연되는 번역극 또한 적극적으로 한국 작품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필자 또한 이전에 창작극을 중시하던 태도를 교정하게 되었다.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한 번역극 또한 한국 공연이라는 인식 하에 이후 번역극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야메의사>(이성열 연출, 극단 백수광부, 2009; 2010)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야메의사>는 카프카의 <시골의사>를 해체ㆍ재구성한 작품으로, 2009년 공연에서는 용산 참사와 전직 두 대통령의 죽음의 문제를, 2010년 공연에서는 4대강 사업과 민간인 개인사찰 문제를 다루었다. <야메의사> 작업에서는 카프카의 <시골의사> 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와 우리의 현실에 대한 동시대적 시각 모두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경우, 드라마투르그에게도 작가적 역량이 함께 요구되었다. 이는 단지 번역극의 해체ㆍ재구성 공연뿐만 아니라 공동창작 공연 대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공동창작 공연에서는 드라마투르그뿐만 아니라 연출ㆍ배우ㆍ스태프 등 공연 참여자 모두 작가적 참여를 요구받는다. 이 경우, 무엇보다도 연출가의 통솔력이 우선시되며, 드라마투르그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작품의 진행방향에 따라 메타 비평적 태도를 함께 갖춰야 한다.

    또한 굳이 해체ㆍ재구성의 번역극이 아니라 일반적인 번역극에서도 번역자를 겸하는 드라마투르그가 아니라 공연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전문 드라마투르그가 요구되고 있다. 예컨대 <레슬링 시즌>의 경우, 번역자와 윤색자가 별도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문 드라마투르그로서 참여를 요청받았었다. 이렇듯 최근 번역극 공연에서는 번역자와 독립적으로 작가가 윤색자로 참여하거나 드라마투르그가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번역극 공연은 우리말의 질감이나 일상의 감각, 공연의 동시대적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 고전 번역의 경우, 드라마투르그는 어떤 번역본을 기본 텍스트로 삼을 것인지, 어떤 관점과 방향에서 이를 공연 텍스트로 발전시켜나갈지 검토하게 된다. 공연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드라마투르그에게 공연에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역량을 기대하는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3-2. 신작과 재공연

    드라마투르그 작업과 관련하여 또 다른 이슈로 신작 초연 공연과 재공연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신작 초연 공연에 비해 재공연은 초연을 단순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가? 배우들의 컨디션과 관객과의 호흡에 따라서 매일매일 올라가는 공연도 다르다고 말한다. 해를 달리 해서 올라가는 재공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동일한 배우와 스태프로 공연이 다시 올라가는 경우, 의도치 않게 공연 팀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드라마투르그의 입장에서 재공연에 임하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우선 현실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공연 팀을 새롭게 자극하고 흔들어놓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동일한 결과가 나오더라도(사실 성공적인 공연일수록 그 수준 그대로 다시 공연을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과정 중에 공연 팀이 재공연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고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새로운 자극은 결국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나온다. 시간이 변하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작품에 대한 관점을 변경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기도 한다. 드라마투르그는 항상 공연의 동시대적 맥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단지 1, 2년의 시간차라 하더라도 기민한 반응을 보여야 할 때가 많다. 혹은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이기 위한 개인적인 욕구가 작용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극단 백수광부의 <봄날>(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 2009; 2011; 2012)을 예로 들 수 있다. <봄날>은 원래 1984년 권오일 연출의 극단 성좌에 의해 초연되었다. <봄날>이 2009년 다시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서울 연극제 30주년 기념공연의 하나로 재공연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극단 백수 광부의 <봄날>은 초연 당시 아버지로 출연했던 오현경 배우가 25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다시 출연하여 한국연극사의 역사적인 한 순간을 보여준 공연이다. 그리고 동양화와 같이 간결하고 서정적인 무대, 설화적 시공간의 장면 연출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2009 서울연극제 연출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 3,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오현경) 등 수상의 결과도 잇따랐다. 그런데 문제는 2011년 재공연이었다. 이성열 연출은 2009년 공연에서 강조했던 자연의 이미지와 설화적 해석과 달리 2011년 공연에선 정치성과 우의성을 강화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성열 연출은, 매 공연마다 다른 해석과 관점으로 공연을 올리길 원한다. 매 공연이 새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연출가의 이러한 태도는 공연의 기본적인 관점을 점검해야 하는 드라마투르그를 자극한다. 드라마투르그 또한 재공연을 새롭게 올리기 위한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재공연의 중심 관점을 아버지가 아닌 막내로 잡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는 거의 무모한 제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8년 공연의 성공 요인으로 아버지 역할의 오현경 배우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공연의 중심인물을 아버지가 아니라 실제 나이도 어리고 연기력도 미숙할 수밖에 없는 막내 김현중 배우를 중심으로 놓고 가자는 제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성열 연출과, 오현경 배우를 비롯한 배우들, 스태프들까지 이 제안에 신뢰를 보여주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공연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다음은 당시 작성했던 제안서의 일부이다.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하면서 매번 제안서를 작성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제안서를 작성했던 것은 그만큼 이 문제에 관해서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봄날>은 2011년 재공연에 이어 2012년 세 번째 재공연을 올리며 공연의 완성도를 더해갔다. 2012년 세 번째 재공연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필자가 드라마투르그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더 이상 회의하지 않고, 공연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믿고 갈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했다. 이후 이 경험은 새로운 팀을 만나 작업할 때마다, 혹은 재공연을 올릴 때마다 중요하게 다시 환기되었다. 좋은 공연은 재공연의 기회가 그만큼 많이 주어지고, 새로운 공연을 올릴 때마다 재공연의 레퍼토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3-3. 인정 투쟁 혹은 최소한의 존중

    현재로서, 드라마투르기는 어쨌든 새로운 직종의 일이다. 이에 따라 드라마투르기는 여전히 함께 공연하는 팀 내부에서 설명이 필요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직종이기도 하다. 특히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인식에 명백한 세대 차이가 작용한다. 어느 경우에나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현상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드라마투르기도 그렇다. 연극원과 서울예대 등 몇몇 대학에서 드라마투르기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젊은 연출가나 작업자들에게는 드라마투르기와 함께 작업하는 것이 이미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영석 연출의 극단 신작로의 예에서처럼 젊은 극단의 경우, 극단 내부에 아예 ‘극단 드라마투르그’가 처음부터 함께 참여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반면에 중견 연출가들과 작업할 때는 실제 작업 외에 드라마투르그로서 자기 존재증명을 해보여야 하는 미션이 따라붙는다.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속성상 연출가들의 신뢰를 얻지 않으면 작업 자체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필요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작업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 공연마다 드라마투르그로서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최근, 젊은 연출가ㆍ공연 팀과의 작업에서 이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소설가 구보씨의 1일>(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ㆍ두산아트센터, 2010; 두산아트센터, 2012.)의 성기웅 연출가와의 작업이 그것이다.

    먼저 작업 과정의 합리주의다. 제작극장의 경우, 연습 초반에 계약이 진행되면서 서로 합의하는 시간을 갖게 되지만, 극단 작업의 경우 대부분 구두계약인 경우가 많다. 지원금을 받는 경우, 지원서에 적힌 액수가 그대로 지급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초연은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와 두산아트센터의 공동제작 공연이었다. 배우와 디자이너들은 두산아트센터에서, 필자는 극단 쪽에서 섭외하는 스태프였다. 맨 처음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연출가는 공연 개요와 제작조건을 먼저 설명했고, 페이 문제를 명확히 제시했다. 이는 이전의 어떤 연출가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드라마투르기 작업은 공연을 올리는 민감한 시기에 함께 밀착된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사실 웬만큼 유대감이나 신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작업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성기웅 연출의 제안 방식은 합리적이었고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제안 방식에서 이미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성기웅 연출과 작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이후 6개월 이상 진행된 사전제작과정(pre-production)에서 성기웅 연출은 한결같은 존중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공연이 올라가고 프로그램 북이 나왔을 때이다. 이 공연의 경우, 프로그램 북에 대본을 함께 수록했는데, 대본의 첫 페이지에 원작자ㆍ연출가ㆍ드라마투르그의 이름이 동시에 올라와 있었다. 주로 대본의 첫 페이지에는 작가와 연출가의 이름만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아무리 드라마투르그가 사전제작과정에서부터 공연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와 연출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해도 공연의 모든 성과물은 작가와 연출가에게로 돌아간다. 드라마투르그는 작업이 끝나면 빈 손 들고 나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이번 경우처럼 대본에 드라마투르그의 이름이 함께 올라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때서야 다시 살펴보니 모든 광고 전단에도 드라마투르그의 이름이 연출부의 명단에 함께 올라가 있었다.

    상업적 공연의 경우, 대본 첫 페이지에 오르는 이름과 순서는 저작권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사실 이 공연보다 훨씬 강도가 센 공동창작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지만 한번도 드라마투르그의 이름이 대본에 같이 올라간 적은 없었다. 오히려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했음에도 극단 내부의 나이나 연공서열에 밀려 스태프 명단의 하단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공립 단체인 남산예술센터나 (재)국립극단 에서는 작가ㆍ연출가ㆍ드라마투르그의 기명 순서를 준수한다. 그만큼 남산예술센터나 (재)국립극단에서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3)

    결국 성기웅 연출은 이전의 어떤 연출가도, 어떤 극단도 보여주지 못한 존중과 신뢰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작업과정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순간 중의 하나였다. 다시 한번 드라마투르그라는 작업 자체가 젊은 연극인들에게 적극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워낙 공연의 제작과정 자체가 공동작업의 형태이므로 섣불리 소유권(ownership)이나 저작권(royalty)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34) 그럼에도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의 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ㆍ연출가ㆍ드라마투르그의 기명 순서를 지키거나 적극적인 참여 정도가 인정된다면 대본에 이름을 함께 올리는 정도의 최소한의 존중은 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30)이 글은 ‘한국연극과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필자의 연구 주제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더 구체적인 논의는 향후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완성시켜나갈 예정이다.  31)김옥란, 「5ㆍ18 서사로서의 <햄릿>과 기국서의 연극사적 위치」, 『한국극예술연구』 34집, 2011. 10. 이 논문은 현장에서의 드라마투르기 활동에서 자극받은 문제와 고민들을 연구논문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2009년 연출가 기국서와의 인터뷰로부터 시작하여 2011년 배우 정재진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완성한 글이다.  32)<봄날> 드라마투르그 제작노트, 2011. 3. 10.  33)물론 극장별로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는 존재한다. 남산예술센터는 2011년부터 상임 드라마투르그 2인 체제(평론가 출신 조만수, 월간 객석 기자 출신 김주연)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의 기능은 주로 신작 희곡 발굴 및 레퍼토리 선정의 사전제작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에게는 연습과정에 밀착해서 참여하는 창조적인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로서의 역할보다는, 남산예술센터의 상시투고 시스템인 ‘초고를 부탁해’, 남산예술센터 공동제작 작품 및 상주극작가 선정 및 심의에 참여하여 남산예술센터 시즌 레퍼토리를 결정하는 리터러리 매니저 역할이 중시되고 있다. 실제 드라마투르그 조만수의 연습 참여는 대략 1-2회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맥락도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산예술센터와 공연팀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계약상 ‘갑과 을의 관계’일 수밖에 없고, 극장 드라마투르그는 갑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어 공연팀에 따라 심리적인 부담감을 느끼는 민감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재)국립극단은 작품별로 별도의 프리랜서 드라마투르그를 섭외하고, 드라마투르그에게 실제 공연 제작과정에 참여하여 연출가의 협력자로서의 전문적인 역량을 요구한다. 예컨대 필자가 참여했던 <레슬링 시즌>의 경우, 사전제작과정인 대본선정과 캐스팅 작업이 이미 완료된 시점에서 공연 전문 스태프의 하나로 섭외를 받아 작업을 진행한 경우였다.  34)이는 외국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뮤지컬 <렌트>의 경우, 드라마투르그가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사실 공동작업의 형태로 올라가는 공연의 특성상 드라마투르그의 참여 정도를 누가,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겠는가. 따라서 비록 드라마투르그들이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예술적ㆍ개인적 투자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투르그 작업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개인적 흥미와 아이디어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드라마투르그와 연출가와의 공동작업은 상호 관심과 존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Cathy Turner and Synne K.Behrndt, op.cit., pp. 163~167.

    4. 결론

    이 글은 2012 드라마학회 추계학술대회 ‘이론과 현장의 실천적 소통-드라마투르그의 이론과 현장작업을 중심으로’의 발표 논문의 일부로 기획되었다. 발표 당시 드라마투르그의 활동에 대한 청중석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청중과의 종합토론 시간에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이름 없이 활동하고 있었던 드라마투르그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들의 활동이 증언되던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젊은 연출가들이 드라마투르그와의 작업에 신뢰를 보여주었을 때 드라마투르그의 앞으로의 전망에 긍정적인 신호를 읽을 수 있었다.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에 신뢰를 가지고 함께 가고자 하는 이들 연극인들 곁에 언제나 헌신적인 드라마투르그들이 함께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국연극에서 드라마투르그의 활동 현황에 대한 일차적인 보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를 위해 이론적 토대 없이, 현장에서의 요구에 따라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시작했던 필자의 자생적 드라마투르그 활동 과정을 먼저 정리하게 되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 개별 연출가들의 제안에 의해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산예술센터, 명동예술극장, (재)국립극단, 두산아트센터 등 제작극장의 출범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필자의 활동 과정 자체가 한국연극의 환경 변화와 드라마투르그의 작업이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활동 단계에 따라 드라마투르그가 파트너십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대상도 달라졌다. 연출가, 스태프, 극단 전체, 혹은 제작 피디와 극장 등으로 파트너십의 대상이 달라지면서 그에 맞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들을 찾아내야 했다.

    이 글에서는, 이 과정에서 겪었던 혼란과 고민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들을 해결해나가는 방법의 하나로 드라마투르기의 이론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 역할 모델의 일부로 제시한 레싱과 브레히트의 사례, 특히 브레히트의 프로덕션 드라마투르그의 개념은 필자가 현장에서 습득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재점검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유용한 참고점이 되었다. 그런 한편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과 고민들이 남아 있다.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위상이 높아질수록 그에 따른 요구와 책임도 무거워지고 있다. 드라마투르그 또한 개별적 전문직 종사자이자 예술가이다. 전문직 종사자의 하나로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고, 드라마투르그 스스로의 존재증명도 계속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극과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드라마투르그에 대한 관심과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그에 따른 심리적 압박과 위험부담도 높아지고 있다. 드라마투르그 본인 자신이 예술가ㆍ연극인으로서 자기인식 없이는 언제든 도태되거나 손쉽게 이용(시간적 투자와 순수한 열정)만 당하고 버려지기도 쉽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실제 현실이다. 드라마투르그 또한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냉정한 자기인식과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 글은 이러한 고민과 논의의 첫 출발점이며, 향후 ‘한국연극과 드라마투르기’의 연구주제로 계속 발전시켜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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