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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No film for old men 한국영화에 투영된 타자화된 노인*
  • 비영리 CC BY-NC
ABSTRACT
No film for old men

엄밀하게 말해 한국영화에서 ‘노인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규정할만한 토대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노인’은 한국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인공의 삶을 보조하는 도구적 인물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최근 개봉된 두 편의 노인 주인공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노인이 중심이 된 영화의 생산적 토대가 마련되는 분위기다. <워낭소리>와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본고는 이 두 영화가 노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회학적 노인문제를 온당히 묘사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판단한다. <워낭소리>의 경우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의 삶을 초월적인 미적대상으로 치환 혹은 단순화시키면서 도리어 노인의 삶이 타자화되고 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경우 원작 만화를 영화적 문법 속에 효과적으로 번역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상업화에 대한 고려나 10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적 한계 탓에 원작이 품고 있는 노인문제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했다고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초월적인 우정이나 낭만적 사랑의 프레임 탓에 충무로 기성 상업영화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노인 주인공의 영화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회학적 노인은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낭만화 되거나 미화되어야 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구체적 역사의 현재 진행형을 여전히 감내하는 일상의 생활인일 뿐이다.

KEYWORD
The problem of Old man , Old man’s film , Alienation , Spectacular , Otherness , Transcendent friendship , Being romantic , Romantic love
  • 1.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

    한국사회의 고령화는 가족구조 및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과 동시에 노인소외, 노인자살, 노인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우리시대의 문제적 화두이다.1)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노인-이미지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떠한가? 사전적 의미에서 노인은 “첫째, 생리적 및 생물학적 면에서 퇴화기에 있는 사람. 둘째, 심리적인 면에서 정신기능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는 사람. 셋째, 사회적인 면에서 지위와 역할이 상실된 사람”2) 정도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하이틴영화와 같은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노인은 꾸준히 등장해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주인공이 아니라 조력자로, 드라마 창출을 위한 반공인물로, 급기야 온당한 가족구성을 위한 형식적 조형물로 호명된 것이 문제겠지만 말이다. 한국영화에서 노인에게 부여된 역할이란 도구적 인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요컨대 충무로에는 노인을 위한 영화가 없다.

    한국영화가 우리시대의 쟁점을 유효적절하게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반대로 그것에 대한 미래지향적 묘파가 내러티브의 중심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노인층은 다른 연령층보다 여가 시간이 훨씬 많고…… 그들을 위한 여가 시설의 확대와 여가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3)는 견지에서 영화 상영관이 노인 복지 공간으로 일정부분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앞서의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는 식의 거친 선언은 실은 아주 간단히 반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최근 노인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일반 상업영화도 쉽게 통과할 수 없는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이라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흥행 면에서도 상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로는 기적에 가까운 293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워낭소리>(이충렬, 2008)와 만화가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그대를 사랑합니다>(추창민, 2010)가 바로 그것이다.

    인용문의 의견을 따를 때 ‘할아버지’나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적극적 관람 행위가 흥행의 교두보였음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세대를 뛰어넘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이른바 관객통합적 전략이 두 영화의 흥행 요인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본고의 문제의식은 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노인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과 이를 둘러싼 ‘세대를 초월한’ 열렬한 반응을 한국사회의 고령화라는 사회적 의제의 반영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이 두 영화의 의외의 흥행 사태와 고령화 추세라는 사회적 의제 사이에 유효적절한 유비관계가 성립하는가?

    본고의 기본적인 판단은 그것이 사태의 지나친 단순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첫째, 한국사회의 고령화 문제는 하나의 일관된 사회적 흐름이지만, 한국 영상산업에서의 이른바 ‘노인영화’의 성공은 ‘돌연변이의 탄생’이나 ‘기적’과 같은 수사에서 쉽게 확인되듯 예외적 상황으로 진단하는 게 합당해 보인다. 둘째, 이들 영화가 성공한 것은 단지 그것이 노인영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 세대가 살았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6) 향수영화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혹은 휴머니즘, 웃음, 감동과 같은 한국영화의 일반적 흥행코드를 성공적으로 내러티브화 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셋째, 특히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경우 강풀의 원작 만화의 대중적 인지도를 등에 업었던 것과 동시에 TV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쌓인 배우 이순재의 스타성, 즉 스타 시스템의 효과적 작동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본고는 노인문제의 모순을 모순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는 충무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한국영화에서의 노인의 위상을 효과적으로 살피는 데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한다. 결과론적으로 본고는 어쩌면 한국사회에 만연된 “고령으로 인해 현실적 능력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에 대한 경시풍조”7)가 영화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에서의 노인의 위상이 여전히 도구적 인물의 수준일 뿐이라는 상식적 차원의 이야기를 반복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워낭소리>와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텍스트로 끌어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나가는 인물 수준의 노인이 아니라 노인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의 노인-이미지라 할지라도 굴절의 메커니즘은 여전하며 그것이 은유적으로 노인을 향한 한국사회의 왜곡된 시선의 총합을 들춘다는 것이 본고의 기본 입장이다. 본고가 분석하려는 것은 노인을 위한 영화라는 사회학적 의제가 아니라 영화 속에 투영된 노인-이미지의 굴절된 위상인 것이다. 미리 말하건대 두 작품에서 노인은 낭만적 메커니즘 속에서 왜곡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학적 노인문제는 부각되기보다는 오히려 기각된다. 요컨대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 벌어지는 노년의 낭만화 양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한국영화에서의 노인의 위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첩경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1)이건호, 「고령화 사회에서의 노인의 범죄피해와 노인학대」, 『한국의료법』 제16권 제2호, 2008, 2쪽.  2)박종천, 「고령사회 노인여가활동의 지리적 특성」, 『한국지역지리학』 제17권 제4호, 2011, 397쪽.  3)김형수, 「고령화 사회의 노인문제」, 『현상과인식』 통권79호, 2001, 95쪽.  4)원승환, 「2009년의 한국 독립영화: 돌연변이의 탄생, ‘다양성’의 증가를 통과하는 진화의 순간」, 『독립영화』 통권38호, 2009, 29~30쪽.  5)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10321235957370&ts=122736  6)강성률, 「‘워낭소리’와 ‘장기하와 얼굴들’이 뜬 이유」, 『민족21』 통권 제98호, 2009, 151쪽.  7)강병만, 「노인, ‘자기’를 찾아서: 현대사회의 우리들 노인의 문제」, 『당대비평』 통권 제22호, 생각의나무, 2003, 332쪽.

    2. 근대 속의 전근대인: <워낭소리>의 경우8)

       2.1.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모호한 경계

    <워낭소리>는 근대화와 함께 이제는 망각된 인간과 동물의 아름다운 공생을 향수어린 시선에서 묘사한 다큐영화이다. 그런데 이것의 흥행돌풍으로 유발된 독립 영화계 내부의 논의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더 힘이 생겨난 면도 있지만 영화의 진정성을 가린 부분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런 것 때문에 영화 자체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9)라는 평가에서 확인되듯, <워낭소리>가 독립영화계에 던진 질문은 향수라는 테제가 아니라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관한 것이었다. “몰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영화적 감정선을 따라 편집하고 연기 디렉팅도 마다하지 않았”10)으며, 할아버지, 할머니, 소의 삼각관계와 재래식 농법의 우위를 구축하게 위해 교차편집이 남발되었다는 지적도 가능하겠다. 간단히 말해 대중을 감동시킨 향수의 풍경이 실은 다큐멘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픽션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다소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위의 논의를 끌어들인 것은, <워낭소리>의 과잉된 허구적 장치에 대한 핵심 쟁점이 인용문에 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이 지적하는 사안을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론으로 번역해 부연하자면 그것은 ‘기록영화’에서는 사용해서는 안 될 ‘금지된 몽타주’이다.12) 소가 눈물을 흘리는 몽타주는 반영화적 조작이고 때문에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장했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본고는 위의 입장이, <워낭소리>에 대한 정확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뭔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추후 보다 상세하기 논할 테지만, 설사 우리가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더라도 크게 화를 내지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낭소리>의 흥행과 연계해 본고가 주목하는 것은, 리얼리즘론에 입각한 속고 속이는 차원을 넘어, 영화가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쉽게 감동해버리는 사태, 즉 알면서도 속아버리는 상황이다.

       2.2. 인간과 자연의 초월적 우정

    <워낭소리>에는 특별한 음성기호가 있다. 할아버지의 대표적 중얼거림 중 하나인 ‘아퍼’가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노년의 상징적 기표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워낭소리>의 인물들은 심한 사투리를 사용한다. 한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하단에 새겨진 자막은 관객을 위한 감독의 현명한 배려이다. 하지만 ‘아퍼’라는 음성기호가 특별한 이유는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의 이유에서이다. 영화에서 그것은 자막의 도움 없이 관객들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유일무이의 투명한 기호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표현을 빌린다면 할아버지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으시고 영화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유독 이 ‘아퍼’라는 표현에서만큼은 침묵하지 않는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 감독은 유효적절한 음향효과와 함께 ‘아퍼’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장면을 반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할아버지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 깊은 한숨, 앙상한 다리와 힘겨운 걸음걸이 등과 병행되며 관객의 정서를 아프게 자극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작 특별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불현 듯 끼어드는 가공의 상상력 때문이다. 단순한 신체적 고통이 보다 높은 운명적 정서로 승화되는 것은, 소가 채 일 년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수의사의 진단과, 그것에 충격을 받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극적으로 오버랩 되는 지점부터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는 인간(=할아버지)과 자연(=소)의 쇠잔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반복·교차·나열한다. 바로 여기가 가공의 상상력이 분출되는 지점이다. 영화 속 노인과 소는 단지 그들이 노년이기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소가 아프기 때문에 아프시다. 반대로 소의 잔명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 역시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적 해석을 따를 때 그들은 각각 아픈 게 아니라 함께 아픈 것이다.

    할아버지의 앙상한 다리를 포착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소의 파리한 엉덩이, 소의 위태로운 노동만큼이나 절뚝거리는 할아버지의 걸음걸이 등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것이 향수어린 풍경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기저에 30년간 동행한 것도 모자라 죽음까지도 함께 할 것 같은 어떤 비장한 운명적 징후, 혹은 죽음조차도 끝끝내 가로막지 못할 초월적 우정의 풍경이 서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소에 대한 수의사의 서글픈 진단이 있은 이후부터 노인의 병원 행이 본격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세상을 떠난 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힘겹게 산을 오르는 두 노인의 안타까운 사연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말하자면 <워낭소리>는 그것 자체로 죽은 친구에게 보내는 노부부의 안타까운 추모곡이자 애잔한 이별가였던 셈이다.

       2.3. 근대적 교환과 전근대적 증여/답례

    하지만 간혹 그런 초월적 우정의 풍경과는 달리, 가령 채 1년도 살지 못한다는 소가 여전히 힘겹게 노인의 달구리를 끌고 가는 장면에서처럼, 우정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 착취로 귀결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돼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역으로 바로 이런 대목이야말로 감독이 할아버지와 소의 초월적 우정의 풍경을 지키기 위해 어떤 극적 장치를 동원해서라도 막아내야 하는 난제이다. 착취로 귀결되는 듯한 장면에 뒤이어 ‘친구’의 먹잇감을 구하는 노인의 안쓰러운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료를 사서 먹이자는 할머니의 합리적인 충고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노인은 기계식 농법을 구사하는 다른 농가와는 대조적으로 농약 한 번 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친구가 먹을 ‘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가 착취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감독은 시종일관 이들의 쌍방향적 교환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특유의 음향효과로 울려 퍼지는 워낭소리야 말로 둘 사이의 주술적 커뮤니케이션(=인간과 동물의 대화)의 상징적 기표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과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워낭소리>에서 노인과 소의 교환이 시장경제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창궐하기 이전에도 분명 교환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전근대적 공동체의 ‘호수적=상호적’ 교환, 즉 부채감을 기반으로 한 증여와 답례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둘 사이의 주술적 커뮤니케이션이야 말로 부채감의 강력한 표징이 아니겠는가? 소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던 노부부의 발언을 떠올려 보자. 아들보다 소가 더 낫다는 동네 사람의 농담 역시 단순히 웃고 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소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대목에서 다큐와 픽션 사이의 모호한 관계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했던 <워낭소리>의 작위적 편집에 대한 비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반복하자면, 소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그것과 상관없는 극적 상황에 임의로 끼어 넣어 관객의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장했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단지 속이고 속는 차원을 넘어 영화가 감동을 기만적으로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서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사태, 즉 알면서도 속아버리는 상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위적 편집에 대한 앞서의 비판은 영화적 장치의 기만성만을 문제시하는 까닭에 관객이 감동해버리는 사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증여에 대한 답례, 즉 할아버지에 대한 소의 부채감을 명쾌하게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가라타니 고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지만 노인과 소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노인=소’라는 강고한 도식 탓에 쉽게 잊어버리지만 <워낭소리>에는 한 마리의 소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늙은 소, 늙은 소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젊은 소, 그리고 젊은 소가 낳은 송아지까지, 정확히 세 마리의 소가 등장한다. 문제는 늙은 소에 비해 젊은 소가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늙은 소의 여물을 힘으로 빼앗는 모습,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 늙은 소가 힘겹게 달구지를 끌 때 마구간에서 여유롭게 식탐을 부리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달구지를 끌 수 없을 정도의 방정맞은 모습 등이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의도된 극화의 지향점은 간명하다. 부모가 자식을 사고 팔 수 없는 것처럼 노인 역시 늙은 소를 결코 다른 소로 대체할 수 없다는 언명인 것이다. 나머지 소들이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외부적 침입자로 묘사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14) 영화적 도식에 따른다면 늙은 소는 근대적 경제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그것은 다른 그 무엇으로 교환 및 대체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할 부모이거나 자식, 말 그대로의 ‘Old Partner’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워낭소리>가 <워낭소리>일 수 있는 공리(公理)이자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할 대명제는 다름 아닌 봉화마을이라는 성스러운 공동체, 죽음까지도 초월한 우정의 풍경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그것은 전 세계적 자본주의에 노출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공간이자 증여/답례로 결속된 전근대적 공동체이다. 바로 그 초월적 전근대적 공간에 ‘워낭소리’라는 주술적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는 성스러운 전근대적 존재들이 살아간다. 당연하게도 그곳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수차례 삽입되는 실제 봉화마을의 전원풍경 만큼이나 아름답다. 영화적 재해석을 통해 현실의 봉화마을 그곳은, 삭막한 도시인들로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시원의 공간, 즉 미적대상으로 치환된다.

       2.4. 미적대상이 은폐하는 것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물론 그것은 작위적 장치의 기만성까지 초월할 정도로 견고하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한 도식을 좀 더 정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미적 대상으로 치환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 치환의 과정에서 은근슬쩍 은폐되는 그 무엇, 견고한 도식 밖으로 추방되는 그 무엇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 일 필요가 있다. 노부부는 늙은 소를 팔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팔지는 않았지만 우시장에 가서 팔려고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 안 판 것이 아니라 못 팔았다는 사실 자체이다. 죽음까지도 함께할 ‘친구’를 팔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가? 물론 할아버지는 ‘안 팔아’를 외친다.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소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것은 사려는 사람이 지나치게 낮은 가격을 부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단적으로, 만약 누군가가 할아버지가 책정한 가격15)에 늙은 소를 사겠다고 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결과를 예측하자는 뜻이 아니다. 본고가 던지는 질문은, 과연 그러했다면 처음부터 우시장, 즉 자본시스템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의 문제이다. 그토록 숭고하게 세공되던 둘 사이의 우정이 시장가격과 비교되어 버리는 상황인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결코 초월적이지 않다. 관객의 감동을 기만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논자들로부터 비난받았던 소의 눈물 이미지가 하필이면 바로 이 대목에서 삽입되어야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위성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편집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추방시켜야 할 풍경이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결코 성스러운 전 근대인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노인이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자기장 안에 놓여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시선은 그런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촌로의 모습을 괄호 속에 단단히 묶어야만 한다. 그것은 숭고한 대상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봉화마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도심의 공원은 그런 노인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반대로 산골마을까지 카메라를 들고 찾아 간 것은 그곳에 도심의 일상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애초에 자본주의 시스템에 포획된 현실적 촌로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혹여 그런 모습이 발견되더라도 끊임없이 추방시켜야만 한다. 뻔히 보이는 억지스런 장치를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부부의 삶은 카메라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그것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미적대상으로 표상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8)이 장은 필자의 비평문(「주술에 취한 탈역사의 풍경-<워낭소리>론」, 『영화평론』 제22호, 한국영화평론가협회, 2009.)에 적용했던 아이템을 모티프로 해서 본 연구 목적에 맞게 대폭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9)『예술로 살아가기―창조적 아티스트와 소통하는 유쾌한 대담』, 상상마당, 147~148쪽.  10)맹수진,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트」, 『작가세계』 제86호, 2010, 320쪽.  11)허문영, 「심금을 울리지만 껴안진 못하겠다」,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51쪽.  12)앙드레 바쟁이 도입한 금지된 몽타주라는 개념은 “사건의 공간적 단일성은, 그것의 파괴가 현실적 사건을 단순한 가공적 표현으로 변형시켜버릴 때에는 반드시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리에서 유추된 개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앙드레 바쟁, 박상규 역, 『영화란 무엇인가』, 시각과 언어, 1998, 69~85쪽을 참고할 것.  13)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 b, 2009, 14쪽.  14)때문에 신문기사가 전하는 <워낭소리>의 후일담, 특히 늙은 소가 죽은 후 그토록 방정맞던 젊은 소가 늙은 소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달구지를 끌고 있다는 소식은,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러나 영화적 서사에 기댈 때는 가히 충격적이다.  15)노인이 책정한 금액은 무려 오백만 원이고, 그것을 ‘고물 값’으로라도 사려는 사람이 책정한 가격은 백만 원이었다. 그러니까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 사이에는 무려 사백만 원의 가격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3. 낭만적/초월적인 노년의 사랑: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경우

       3.1. 원작이 있는 상업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이하 ‘그사다’)는 독립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와 비교할 때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차원이 전혀 다른 영화이다. 기본적으로 <그사다>는 이미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메이저 상업영화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은 본고의 논지 전개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에 투영된 노인의 이미지에 관해 논하는 중이다. <그사다>가 웹툰을 원작으로 취한다는 사실은 만화와 영화 사이의 번역의 문제를 수반한다. 또한 그것이 메이저 상업영화라는 사실은 그런 번역 과정에 필시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 즉 흥행의 문제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노인을 중심에 다룬 이야기가 상업영화로 바뀔 때 발생하는 다양한 지점들을 고찰하는데 있어 <그사다>만큼 유효적절한 텍스트는 없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굴절의 풍경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노인-이미지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상징적 지표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작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영화는 없다. 그것은 영화언어로의 번역, 즉 각색의 과정을 거친다. “영화 만들기는 곧 시간과의 싸움”이며 영화는 “압축과 비약을 통해 필요한 시간을 극소화”하는 매체16)라고 할 때, 다른 매체와 영화를 가르는 본질적인 기준은 시간의 문제이다. 쉽게 말해 원작의 내용을 모두 다룰 수 없다는 것, 압축과 비약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원작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방식으로 굴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감독의 자의식이 스며드는 지점이 바로 압축과 비약의 선택, 즉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하는가의 취사선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단지 원작의 왜곡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로 재탄생될 때부터 이미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반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은 포함되고 어떤 것은 배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포함/배제를 선택하게 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결과 영화에서 강조/누락된 대목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의 해석상의 위상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상업영화가 노인-이미지를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생산적인 판본을 이끌어낼 수 있다.

       3.2. 배제된 캐릭터의 역사성

    영화 전문지 <씨네21>과의 인터뷰17)에서 <그사다>의 추창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구체적인 장면은 선생님(이순재)의 아이디어라 확실히 개그 본능이 있으신 것 같더라. 나는 손녀가 사라지면 다시 켜는 것까지 가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영화 캐릭터 상 그건 좀 심하다고 하셔서 지금과 같은 장면이 됐다’라고 말하면서 감독은, 김만석을 연기한 배우 이순재의 스타성, 즉 인기리에 방영된 TV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구축된 ‘야동 순재’라는 스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원작에는 없는 영화만의 유머 코드, 즉 극중 김만석이 음란한 동영상을 즐기다 손녀에게 들킨다는 설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용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스타의 출연은 투자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 자체가 하나의 ‘광고’효과이다. 이 말은 원작 웹툰의 김만석이라는 인물을 배우 이순재가 연기하는 이상, 그리고 관객이 이순재라는 스타에 평균 수준의 정보를 인지하고 있는 이상, 김만석과 이순재가 겹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감독 역시 이런 사실에 입각한 발상의 전환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극중 인물과 스타-이미지의 겹침이 영화 전체의 얼개나 캐릭터의 입체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메인플롯을 풍요롭게 보조하는 서브플롯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도리어 이것은 긍정적으로 권장되어야 할 사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단지 서브플롯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메인 플롯의 굴절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상식적 차원에서, 김만석과 사랑을 나눌 송이뿐의 캐릭터를 맡은 배우 윤소정의 인지도는 배우 이순재와 비교할 것이 못된다. 물론 인지도 차이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캐릭터의 위상이 원작에 비해 가장 많이 누락된 인물이 송이뿐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그냥 ‘송씨’였다. 영화와 달리 원작에서 그녀의 비중은, 분량뿐만 아니라 캐릭터 자체의 역사성에 있어서도 김만석과 거의 동격이다. 특히 총 27화로 구성된 전체 만화 중 특히 11화는 제목 자체가 ‘송씨’이며, 이를 통해 그녀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상세히 소개되는 것은 물론이다. 대표적으로 “옛날에는 아들만 귀해서 딸이 태어나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계집애에게는 이름도 막 붙이고 그랬잖아요. 끝순이, 간난이, 막녀. 그랬어요” 식의 발언이 그것이다.

    하지만 영화 <그사다>에서의 이와 관련된 정보는 단지 이름을 지어줄 아버지의 부재 정도로 약술될 뿐이다. 송이뿐의 죽은 딸아이의 사연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는 다섯 살까지 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갓난이 때 죽은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문제는 이런 시차 속에서 송이뿐의 사연을 보다 풍성하게 보조하는 딸아이의 역사성 또한 제거된다는 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작에서는 딸아이의 이름 역시 ‘송씨’와 마찬가지인 ‘아가야’, 즉 사실상 무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런 사연은 아예 빠져 있거나 인과적 내러티브 구성을 위한 단순 정보 나열 정도로 제시될 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영화적 재해석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김만석의 입지가 확대되는 것과는 반비례로 송이뿐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단순한 캐릭터 변화가 아니라 ‘송씨’와 ‘아가야’, 즉 그녀‘들’에게 세습되어온 한국근현대사의 봉건적 시선의 제거를 동반한다. 남성 주체에 호명되지 않는 한 합당한 이름조차도 부여받을 수 없었던 여성 주체의 비극적 상황 역시 약화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 주체란 사실상 주인등록증도 없는 제도권 안의 유령이었다는 식의 은유적 문제의식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3.3. 낭만적이고도 초월적인 사랑

    배우의 스타성에 입각해 캐릭터의 위상이 간소화됐다는 맥락에서 송이뿐이라는 인물을 거론했지만, 실상 김만석을 포함해 그 외의 주요 인물들 역시 생략과 압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상황설정의 변화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장만석의 경우 배우 이순재의 스타성에 입각해 내러티브적 위상은 상승했으나 몇몇 대목, 특히 송씨 이전의 아내에 관한 정보는 확실히 축소되었다. 원작 만화에서 권위적 남편 김만석을 묵묵히 뒷바라지 하던 아내, 위암에 걸린 아내를 결혼 후 처음으로 극진히 보좌했던 김만석의 사연, 그리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임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우유배달을 해야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아내와의 마지막 추억 때문이었다는 사연 등등은 배제되거나 생략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요인물인 장군봉 부부(송재호, 김수미)의 사연 역시 마찬가지다. 이목을 끄는 것은 내러티브 전개의 절정에 만나는 가공의 상상력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말기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장군봉이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프레임 하단에 연탄의 서글픈 불빛이 보이고, 수면제를 그릇에 으깨어 오열과 함께 그것을 치매 걸린 아내에게 먹여주는 장군봉의 클로즈업이 포착된다. 그런데 이 대목은 실은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오로지 영화적 상상력에 해당되는 장면이다. 원작에는 청 테이프, 사다리, 평소와는 다른 장군봉의 과잉 미소, 달을 바라보는 장군봉 부부의 정서적 장면 등으로 동반자살의 징후만 제시될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에는 없는 그것의 구체적 정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장면화 시킨다. 방금 설명한 수면제를 먹이는 장면을 위시로 하여 연탄가스가 세어나가지 못하게 문틈을 청 테이프로 봉인하는 모습이 장군봉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대목에서 구축되는 영화 <그사다>만의 상황연출이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장군봉은 평생 함께한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고백을 한다.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온전한 정신상태를 보여준 적 없는 장군봉의 아내가,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기 미안할 정도로 당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받기만 했다고 고백한다.

    본고는 지금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영화가 원작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포함과 배제, 압축과 생략을 통해 구축된 영화적 재해석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이다. 영화 <그사다>의 원작에 대한 재해석은 사실 서정의 우위로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원작의 설명적 장면이 비교적 많이 압축된 반면, 그것의 정서적 장면은 최대한 살리거나 새롭게 추가되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작에서 제시되는 인물들의 다종다양의 정보가 아니라 인물들 간의 정서적 밀착, 즉 낭만적 사랑(김만석과 송이뿐)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장군봉 부부)이다. 역시나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감독은 처음부터 방점을 ‘현재의 로맨스’에 찍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 즉 다양한 과거 행적은 그들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반대로 인물의 현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면 원작에는 없는 가공의 상상력을 일정 부분 가미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전제했던 것이다. 김만석과 송이뿐의 경우, 팔순이 다되도록 베어든 그들 ‘각각’의 기구한 사연은 현재의 ‘함께’하는 낭만적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장군봉 부부의 경우, 죽음마저 초월한 비장한 부부애를 위해서라면 징후적 상황이 기꺼이 비현실적 장면화로 부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작의 주제의식이 이상한 방식으로 치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그사다>는 원작이 있는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원작에 충실한 영화이다. 단, 중요한 것은 원작의 주제 중 일부인 낭만적이고도 초월적인 사랑이 영화적 재해석을 거치면서 훨씬 더 강고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 본고가 말하려는 핵심이 숨어 있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역사성 내지는 내러티브적 현실원직의 제거라는 대가의 결과물이다.

    16)심산,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해냄, 2004, 160쪽.  17)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4903&page=1&menu=&keyword=&sdate =&edate=&reporter=  18)Peter Lehman & Willian Luhr 지음, 이형식 옮김,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198쪽.

    4. 결론: 영화에 투영된 타자화된 노인

    『오리엔탈리즘』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것은 서양이 비서양 사회의 인간을 한낱 사회과학적 대상쯤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이 동양을 미적으로 우러러보는 행위와 충돌하지 않는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지만 인도의 문화만큼은 사랑했다. 동양에서 가장 먼서 서양화된 일본 역시 식민지 조선의 문화를 탐닉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단시 서양과 동양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일한 집단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워낭소리>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들은 대상화시킬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숭고한 미적 대상으로만 포착될 수 없는 타자의 삶, 즉 노인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거칠게나마 선언한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는 명제는 바로 이런 사실의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창동 감독의 <시>(2010)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노인이라는 대상이 어떤 식으로 묘사되었는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본고의 목적 탓에 주요 텍스트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시>라는 영화에 묘사된 노인의 삶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향후 한국영화에서 차지하는 노인의 입지점에 대한 보다 생산적인 토론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양미자(윤정희)라는 인물은 ‘할머니’이면서도 ‘할머니’가 아니다. 집단 강간범 손자를 둔 할머니이지만 시를 배우고 싶은 소녀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사회의 폭력적 남성담론과 싸우는 투사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녀는 그녀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계급 질서와 자본의 한계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좌절을 맛보기도 하는 한명의 실존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지속적으로 타자화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숭고한 미적 대상으로 포착되기 이전의 생활인으로서의 삶, 황혼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삶의 고충과 대결하는 삶, 사회구조적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실존적 고민 빠져 있는 삶……. 요컨대 그녀의 삶은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녀의 삶이 뿜어내는 치열한 성찰의 진폭을 수렴시키기에는 ‘노인’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헐겁다.

    본고가 분석한 두 영화는 물론 그간 주변부에서만 맴돌던 노인이라는 대상을 내화면의 중심으로 이끌었다는 점만으로도 차별적 입지점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워낭소리>의 경우, 할아버지는 결코 성스러운 전근대인일 수 없다. 영화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는 노인이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자기장 안에 놓여 있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단, 그 현기증 나는 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사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흥행이라는 문화상품으로서의 숙명을 수용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스타시스템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인지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로 재해석되면서 그것은, 원작의 균형감각을 상당 부분 상실한 듯 보인다. 구체적 역사성이 제거된 빈자리에 낭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사랑의 극단이 들어서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령 이런 식의 질문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친 사랑과 죽음의 문제는 낭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풍경이 아니라 현실적이면서도 실존적인 고민의 대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초월적인 우정(<워낭소리>)이나 낭만적 사랑(<그사다>)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한 노인을 위한 영화는 충무로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노인을 향한 타자화된 시선, 즉 또 다른 유형의 오리엔탈리즘일 뿐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영화적 시선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노인을 향한 일반적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노인을 위한 영화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노인에 대한 타자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인은 낭만화 되거나 미화되어야 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구체적 역사의 현재 진행형을 여전히 감내하는 일상의 생활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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