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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관계 속의 공간* L’espace dans le rapport
  • 비영리 CC BY-NC
ABSTRACT
관계 속의 공간*

Avec l’élargissement de l’internet, la notion de l’espace se changait énormément. Les contemporains font également l'expérience du changement de l’espace. Par exemple, le syberspace, porte-parole de l’internet, existe n’importe où, à la fois n’existe jamais. Personne ne peut tourner le dos au syberspace, car tout le monde y vit et tous les phénomènes du monde entrent en liaison avec ça, on ne peut comprendre des courants mondiaux sans reconnaissances du syberspace. Les arts de l’espace comme théâtre, danse, beaux-arts, cinéma, photo se transforment aussi en d’autres figures dans le nouvel espace du syberspace. On ne peut vivre maintenant sans avoir la nouvelle forme de vie en tête. Quand on parle de la relation des arts avec le syberspace, c’est vrai que les arts visuels comme beaux-arts, cinéma, photo deviennent l’objet essential. Pourtant dans la mesure où des performances acceptent volontièrement des médias d'image, on doit faire l’attention à l’espace de la nouvelle forme dans ce domaine.

La connaissance historique-philosophique de Michel Foucault sur l’espace nous offre l'occasion de penser des possibilités de la greffe des performances avec la nouvelle conception de l’espace. Foucault qui énonce que l’espace est principal à la fois pour la forme de vie dans la communauté et pour l’usage du pouvoir, discute de l’histoire de l’espace à travers des études sur l’hôpital et la prison. Selon lui, l’autorité de l’espace établié par les relations parmi politique, société, économie et histoire, c’est l’histoire de la modernité. On peut encore une fois confirmer le point de vue spatial de Foucault dans le concept de l’hétérotopie.

Dans le dictionnaire, l’hétérotopie se définit comme ‘localisation physique de l’utopie’. Elle est l’espace hétérogène de nature différente, et elle est différente de la réalité comme lieu du cinéma et du théâtre. Ce qui est intéressant, c’est que l’utopie est sans cesse représentée par l’image et que l’hétérotopie cherche à cette image représentée. Par là, quand on considère le syberspace, composé d'éléments hétérogènes, le syberspace qu’on ne peut rencontrer personne, mais qu’on peut prendre contact avec n’importe qui, et à la fois extérieur et intérieur, on peut dire qu’il n’est d’autre que l’hétérotopie. Alors dans le moment où le théâtre contacte le syberspace à travers des médias d'image, l’espace scénique va devenir l’hétérotopie. Alors celui-ci n’est autre qu’une scène de deterritorialization créé par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dans Anti-Oedipus (1972).

Si le théâtre est arrangé par le bâtiment construit sévèrement, ça serait l’emplacement selon Foucault et la territorialization selon Deleuze. Le terrotorisation politique se trouvait déjà dans la forme du théâtre en Rome et en Grèce. Si le but politique de la tragédie grecque est une formation des citoyens raffinés, cela aurait rapport à la territorisation de l’espace théâtral. Le théâtre moderne étant à l'extrême à cette territorisation, l’hétérotopie nous donne l’occasion d’y repenser.

KEYWORD
헤테로토피아 , 푸코 , 배치 , 사이버스페이스 , 연극 공간
  • 1. 서론

    인터넷이 세상을 독차지하면서 공간의 개념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현대인은 공간이 빈 것이냐 충만한 것이냐의 논쟁을 벌인 철학적 물음이 아닌, 실제 몸으로 공간의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터넷의 공간으로 대변 되는 사이버스페이스1)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서든 존재한다. 누구도 사이버스페이스를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은 예외 없이 모두가 그 속에 거주하(거주하는 것 같으)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사이버스페이스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현대적인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특히 공간 예술인 연극, 무용, 미술, 영화, 사진은 무형의 공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인 사이버스페이스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새로운 삶의 패턴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예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예술의 관계를 언급할 때 영화, 사진, 미술과 같은 시각 예술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재현성이 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살과 접촉하는 공연예술은 가상현실(vitual reality)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류 문명의 거대한 흐름이 사이버스페이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 공연예술에도 기꺼이 영상매체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연예술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간은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주제인 것이다.

    공간에 대해 푸코의 역사철학적 인식은 어떤 방식으로 공연예술이 새로운 개념의 공간과 접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공간을 사회적 공동체의 삶이나 권력의 행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판단한 푸코는 병원이나 감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공간의 역사를 쟁점화 한다. 그는 『광기의 역사』(1961)에서 일련의 공간화를 기술하면서, 근대의 주체가 이성의 이름으로 타자를 추방하여 배치한 역사를 연구한다.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는 18세기의 임상의학적 기록을 상세하게 검증하여, 근대의학이 병리학적 해부를 통해 가깝고 친숙하며 자명한 신체 공간을 드러내고 질병을 특별한 방식으로 공간화한 것을 폭로한다.2) 『감시와 처벌』(1975)에서는 공간을 권력과 연계시켜 감옥이 공장, 학교, 병영, 병원과 닮았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저술들에는 근대 공간이 자연적 공간이기보다는 정치-경제적 공간이라는 저자의 근본적인 인식이 깔려있다. 말하자면 정치·사회·경제·역사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공간의 권력화가 근대의 역사라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푸코의 관점은 특히 우리의 분석 대상인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이해는 공연예술과 사이버스페이스의 관계 설정에 있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사이버스페이스’는 SF작가인 윌리엄 깁슨은 소설 <뉴로망서>(Newromancer)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것은 “합의된 환각(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장소가 아니다. 공간도 아니다. 관념적 공간이다.”고 언급한다. 이봉재, 「종보통신기술의 철학적 특성」, 한국철학회 편, 『기술문명에 대한 철학적 반성』, 철학과 현실사, 1998, 190쪽 참고. 재인용 채효정, 「사이버스페이스의 실제성, 공간성 및 기술적 세계 구성과 그 정치쳘학적 함의에 대한 분석」, 『경희대학교 대학원 고봉논집』, 제 24편, 1999, 14쪽. 사이버스페이스는 가상공간 또는 가상현실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가상공간은 3차원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로써 우리가 기거하나 신체적으로 그곳에 있지 않는 상징적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 사이버스페이스는 특히 컴퓨터 기술을 그 물적 토대로 하는, 가상현실 기법과 네트워크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매체 매개적 공간을 말한다. 채효정, 앞의 책, 14쪽 참조.  2)Foucault, Naissance de la clinique, PUF, 1963. 홍성민 옮김, 『임상의학의 탄생: 의학적 시선에 대한 고고학』 , 인간사랑, 1993, 246쪽.

    2. 공간과 권력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의학에서 공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질병을 셋으로 구분하고 이를 질병의 공간화 또는 배치라고 말한다.3) 첫째, 질병과 질병 과의 관계이다. 의학에서 질병을 분류함에 있어 질병과 환자의 몸의 질병 위치가 전혀 연관이 없으며, 다만 분류의학에서 본질적으로 질병은 분류표에 자기 공간이 있다. 이것이 질병의 ‘일차적 공간화’가 된다. 둘째, 질병과 육체적 공간 과의 관계로써 질병이 몸에 자리 잡고 표현되는 방식으로 ‘이차적 공간화’가 된다. 일차적 공간화에서 환자의 개별적 증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나, 이차적 공간화에서는 개별 환자가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는 섬세한 의학적 시선이 필요하다. 셋째, ‘삼차적 공간화’는 질병과 사회와의 관계로서 질병을 사회적 공간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질병의 공간화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삼차적 공간화인 질병의 사회적 공간의 재배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병원이라는 기계적 배치와 의학이라는 언표적 배치가 결합된 것으로 의사들이 환자를 분류하고 격리하거나 수용하면서 공간을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와 질병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자 할 때, 즉 공간을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할 때, ‘에피스테메(épistémè)’4)와 ‘권력’ 개념은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푸코는 역사연구를 통해 한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을 찾고자 하였고 시대에 따라 지배적 담론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했는지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특정 시대의 밑바탕이자 무의식적 규칙성인 에피스테메를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에피스테메는 특정한 사회와 시대의 학문적 지식의 총체이자 인식 체계인 그 시대의 담론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규칙성이다. 이를테면 광인은 17세기 전에는 위험한 인물이 아닌 것으로 여겨졌지만, 에피스테메가 바뀌자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국가에서 관리를 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푸코가 보기에 시대를 지배하는 담론은 시대의 지배적인 원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지배적인 원리가 변하면 담론 역시 변한다. 역사의 변화에 개의치 않는 영구불변한 원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원리들이 시대의 변환에 따라 어떻게 변환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5) 이러한 에피스테메는 주체 문제로 규결된다. 철학 일반이 제기하는 주체의 문제는, 주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면, 푸코의 경우에는 에피스테메를 근간으로 하는 역사 속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권력의 문제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저자는 권력이 공간의 분할과 배치를 통해 개인을 어떻게 통제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성의 역사1』에서 권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6) 첫째, 권력은 손에 넣거나 빼앗거나 공유하는 것이 아니며 간직하거나 멀어지게끔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불평등하고 유동적인 관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사된다. 권력은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관계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권력 의 존재론적 지위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을 서로 관계 맺게하는 어떤 힘의 기능이다. 그것은 전략적 위치들의 집단적인 효과이다.”7) 둘째, 권력관계는 다른 유형의 관계들(경제 과정, 인식관계, 육체관계)에 대해 외재성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관계에 내재하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분할, 불평등, 불균형의 직접적 결과이며, 역으로 이러한 차별화의 내부적 조건이다. 권력은 단순한 금지나 추방의 역할에 힘입어 상부구조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산적 역할을 맡는다. 셋째,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생산기구, 가족, 제한된 집단, 제도 안에서 형성되고 작용하는 다양한 세력관계가 사회체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폭넓은 균열 효과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권력은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으며 사회의 모든 지점에서 서로 얽혀 있고 각 지점에서 그때그때 생산된다.”8) 넷째, 권력 관계는 의도적이면서 주관적이지 않다. 다섯째,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항은 권력에 대해 결코 외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종합해볼 때, 푸코에 있어 권력이란 전략이요, 관계요, 기능이다. (...) 권력이란 일정한 장소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장소의 체계들을 변화시키는 힘들의 운동이자 효과이다. (...) 권력이란 분산되는 힘들의 체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이란 계열적 공간을 형성하는 전략들의 망으로서의 기능, 관계 들의 체계이다.9) 권력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기능이며 상호관계의 체계인 것이다. 역사의 출렁거림에 따라 광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변한 것처럼, 에피스테메와 권력의 상호작용과 관계 속에서 행사되는 공간의 분할과 배치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3)권상옥, 「의학적 시선에서 기술적 시선으로 : 미셸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을 중심으로」, 『의철학연구』, 제7권, 2009, 69~70쪽 참조.  4)에피스테메의 “개념은 어느 주어진 시대에 특정 학문 분야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의 형태들을 연결하는 관계 전체를 뜻한다. 예컨대 18세기 말엽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인간의 특수한 존재방식과 인문과학을 가능하게 했다.”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서문 17쪽 역자 주.  5)이정우, 「미셸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 『인문과학』, 제 74집, 1995, 71쪽.  6)이정우, 「미셸 푸코에 있어 신체와 권력」, 『문화과학』, 제4집, 1993, 102~107쪽 참조.  7)이정우, 위의 책, 97쪽.  8)강미라, 「푸코의 근대주체와 권력의 관계」,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116쪽.  9)이정우, 앞의 책, 1993, 97~99쪽 참조.

    3. 헤테로토피아

    1966년 12월 푸코는 라디오방송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에 출연하여 ‘유토피아와 문학’이란 주제로 7일과 21일 두 번에 걸쳐 방송을 한다. 발표 제목은 각각 ‘실제적인 유토피아들 혹은 “장소들 그리고 또 다른 장소들”’(Les utopies réelles ou “lieux et autres lieux”)과 ‘유토피아적 신체(Le corps utopique)’였다. 이 발표문들은 이후 육성으로 녹음된 CD가 나왔고 2009년 Les Nouvelles Editions Lignes 출판사에서 『유토피아적 신체, 헤테로토피아들』(Le Corps utopique, Les Hétérotopi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1966년 라디오 방송이 있고 난 이듬해 1967년 5월 파리에서 있었던 건축가들의 모임에서 푸코는 <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1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게 된다. 이 발표문은 앞서 방송국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여기에 모인 건축가들은 특히 도시 공간의 전문가들이었다. 이 발표문은 방송에서 헤테로토피아를 언급한 후 18년이 지난 1984년에서야 출판되었다.

    <다른 공간들>의 발제는 현대를 공간의 시대라고 단정하면서 시작된다. “아마도 현대의 시대는 ‘공간’(espace)의 시대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동시의 시대, 병렬의 시대, 가까움과 멂의 시대, 인접의 시대, 산재의 시대 이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전해 나가는 거대한 삶이기보다는, 지점들을 연결시키고 그 얽힘을 엮어내는 망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있다. 아마도 오늘날 논쟁을 선동하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시간의 독실한 후손들과 공간에 열중하는 거주자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11)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시대는 공간이 계층화된 시대였다. 중세의 공간 개념은 국지화(localisation)였다. 이때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고 위계가 있었다. 즉 신성 공간과 속세 공간, 도시와 시골, 천체와 지상 등으로 위계지어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중세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장소들의 교차, 대립, 위계였다. 이들 위계의 개념이 해체된 것은 갈릴레이에 의해서다. 갈릴레이가 무한히 열린 공간 개념을 제시하면서 연장(étendue)이 국지화를 대신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는 배치(emplacement, 들뢰즈의 배치는 agencement12))가 연장을 대신한다. 배치란 형식적으로 계열들, 축들, 격자들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점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관계(relation)로 정의된다. 앞서 에피스테메와 권력에서 확인한 것처럼, 푸코가 공간을 연장의 개념이 아닌 관계에 따른 배치로 파악한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이버스페이스야 말로 연장의 공간이 아니라 관계에 따른 배치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배치 또는 자리(place)의 문제는 인구통계적 용어로 제기된다. 인간 배치에 대한 인구통계학적 문제는 단순히 세상에 인간을 위한 자리가 충분한지를 알아보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들의 분류나 측정이나 순환이나 저장의 형태와 인접한 관계들이 어떤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어떤 상황 속에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이 배치된 관계의 형태로 주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13) 현대의 공간이 관계들의 배치라는 점을 이해하면 헤테로토피아 역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푸코는, 공간이란 비어있는 동질적(homogène)인 것이 아니라 모든 특질로 가득 차 있다고 언급한 바슐라르에게 동의하면서, 공간은 자체적으로 지각, 몽상, 정념 내재적인 특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볍고, 지극히 순수하고, 투명한 공간이거나 또는 어둡고, 거칠며, 혼잡한 공간이다. 그것은 높은 공간이며 꼭대기의 공간이거나 아니면 낮은 공간, 진창의 공간이며, 생생한 물처럼 흐르는 공간이며, 돌이나 수정처럼 응고된 고정된 공간이다.”14) 이질적(hétérogène)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은 우리를 갉아먹고 주름지게 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개체와 사물들을 배치하는 공간의 내부에서, 일종의 비어있음(無, vide) 즉 영롱한 광채로 채색된 비어있음의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중첩될 수 없고 서로 환원될 수도 없는 배치를 정의내리는 관계들의 총체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다.”15) 이를테면 거리나 기차들은 통행을 위한 배치이며 카페나 극장이나 해변은 일시적인 휴식을 위한 배치가 된다. 해변의 카페, 극장이 모여 휴가라는 배치가 되고, 책, 책장, 책상이 모여 공부방의 배치가 되는 것이다. 즉 장소들의 관계망이 독특한 의미를 생성하여 하나의 배치가 된다. 이들 배치 가운데 푸코의 관심은 관계들의 전체를 전도시키거나 중립화시키거나 금지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모든 배치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배치들에 있다. 이 공간들은 다른 모든 배치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 다른 모든 배치들과는 어긋나 있는 것으로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유토피아이고 다른 하나가 헤테로토피아이다.16)

       3.1.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푸코는 보르헤스의 소설, 실어증 환자, 중국을 예로 들어 말과 사물의 관계를 설명한다. 교훈적인 우화 형식의 보르헤스 작품에서 제시된 중국백과사전에서 나타난 동물의 경이로운 분류는 “또 다른 사유의 이국적인 매력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의 사유가 갖는 한계, 즉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사실이다.”17) 즉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의 사유체계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분류인 것이다. 상호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 있는 이 분류의 기괴성은 아마도 서양인들의 공통적인 시각으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특정한 문화의 규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르헤스 작품에서는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보르헤스를 읽을 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거북함은 아마 언어가 손상된 사람의 깊은 불안과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장소와 이름의 공통성을 상실한 탓일 것이다.”18) 한편 실어증 환자는 다양한 색깔의 털실 타래를 일관성 있게 분류하지 못한다고 한다. 언어능력의 손상이 가져온 분류 체계의 상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어증 환자는 한없이 모으고 분리하고 다양한 유사성을 늘어놓고 가장 명백한 유사성을 무효화하고 동일성을 깨뜨리고 서로 다른 기준들을 겹쳐 놓고 심적 동요를 내보이고 다시 시작하고 불안해하고 마침내 원인 모를 공포에 빠져 든다.”19) 한편 서양인들은 중국 하면 보통은 “영원한 모습의 하늘 아래 펼쳐지는 둑과 장성의 문명을 떠올리고, 중국 문화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륙의 지표면 전체의 퍼져 굳어 버린 모습으로 상상한다.” 중국 문화를 상상하면서 저자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서양의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에 있어 “존재물이 확산되고 배치되는 공간은, 명명하고 말하고 사유하는 것이 서양인에게 가능한 공간들 중의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문화에 소속되어 있는 사물들의 질서이다. “사물의 배열에 관한 일반 이론과 사물의 배열에 의해 요구되는 해석이 세워지는 데에는 바로 확고한 토대로 간주된 이 질서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말과 사물』에서 보여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환의 법칙, 생물의 규칙성, 말의 연쇄와 말이 갖는 재현의 가치가 질서의 양태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서양의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20) 이 연구는 다른 말로 에페스테메의 연구가 될 것이다. 이처럼 그가 각 시대의 규칙을 연구하고자 하는 까닭에 그의 연구는 역사학이 아니라 고고학이 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푸코는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를 구분한다. 유토피아는 실재하는 장소가 없다고 하더라도 고르고 경이로운 공간에서 펼쳐지며, 비록 공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만 넓은 도로가 뚫려 있는 도시, 잘 가꾼 정원, 살기 좋은 나라를 보여준다. 즉 언어들이 사물과 질서정연하게 조합 되어 있을 때 그곳은 안정감을 주는 유토피아가 된다.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불안을 야기한다. 보르헤스처럼 언어와 사물들이 혼란스럽게 결합되어 있을 때 그곳은 불안을 유발시키는 헤테로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는 아마 헤테로토피아가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이것과 저것에 이름 붙이기를 방해하고, 보통 명사들을 무효가 되게 하거나 뒤얽히게 하고, 통사법을 그것도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뿐만 아니라 말과 사물을 (서로 나란히 마주 보는 상태로) 함께 붙어 있게 하는 덜 명백한 통사법까지 사전에 무너뜨리기 때문일 것이다.”21) 언어의 문법, 언어와 사물의 습관적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발생하는 불안, 이것이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유토피아와 헤테 로토피아는 자체적으로 공간의 개념이므로, 말과 사물의 관계는 곧 공간으로 적용할 수 있다. 사물은 말(언어)에 의해 분류된다. 공간 또한 언어에 의해 사물화 되고 분류된다. 언어의 특징은 분류, 개념, 정의, 배치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비어 있던 공간이 사물로 점유되고 언어로 분류되고 이름이 붙게 되면 그곳은 사물화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병원, 아파트, 학교, 관공서, 영화관, 공연장 등 끊임없이 나열할 수 있는 명명화, 분류, 배치라는 공간의 사물화는 기계적 배치로써 에피스테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리하면 공간 개념으로써의 헤테로토피아는 언어와 결부되어 일상적이고 습관화된 사물의 공간화가 해체되거나 야릇하게 결합시켜 불안감을 유발시키는 공간인 것이다.

    푸코의 사고는 개념 자체로 끝나지 않고 동시대의 지식과 권력에 의해 형성된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고 분석한다. 초호화 저택에 사는 최고 상류층의 어마어마한 공간은 극빈층의 무허가 판자촌의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장소이자 유토피아가 된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거주하는 상류층에게 있어 호화로운 저택은 헤테로토피아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극빈층의 머릿속에는 저편에 유토피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연극 무대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경우에 따라 유토피아가 된다. 그것은 거울 속의 나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지만 관객 또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거울은 기능을 상실한다. 객석이 헤테로토피아라면 연기자가 활동 중인 무대는 유토피아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무대는 자체적으로 유토피아지만 그 무대의 공간 속을 살아가는 역할들에게는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자 헤테로토피아이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가 없다면 유토피아도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없어도 헤테로토피아는 존재할 수 있다.

    푸코는 유토피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째, “유토피아는 실제 장소가 없는 배치이다. 이 배치들은 사회의 실제적 공간과는 직접적이거나 반대인 유비 관계를 유지한다. 그것은 완벽한 사회 자체이거나 사회의 이면이다. 그러나 이들 유토피아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들이다.”22)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존재하는 실제 장소이다. “모든 문화나 문명에 존재하는 실제적이며 실질적인 장소이자 사회제도 자체를 구성하는 장소이다.”23) 어디에도 없음을 뜻하는 유-토피아(no-place)와는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어디든 존재한다. 에피스테메가 변하면 헤테로토피아도 변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종의 반-배치(contre-emplacements)이자 문화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다른 실제의 배치들이 동시에 재현되고 반론되고 전도된다는 점에서 실제로 실현된 일종의 유토피아이며, 위치를 정할 수 있음에 도 그 모든 장소들 밖에 있는 장소들(lieux)이기도 하다. 헤테로토피아가 일종의 반-배치라는 것은 일반적인 배치와 어긋나고 규율과 질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배치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배치로써 유럽사에서 정신병자, 부랑자, 패잔병을 분류하지 아니하고 한꺼번에 가두었던 대감호를 떠올리게 한다. 둘째, 헤테로토피아가 현실로 구현된 일종의 유토피아라는 점이다. 실제로 존재 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그러나 말이나 이미지를 통해 언제든지 존재한다. 물론 헤테로토피아는 실제적 장소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대립된다. 헤테로토피아는 투사하거나 말로 이루어진 유토피아의 배치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의 관계는 없고 있음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투사하고 영향을 미치는 관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푸코는 이들의 관계를 거울을 통해 설명한다. 내가 거울을 바라볼 때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런데 “거울은 장소가 없는 장소인 까닭에 유토피아”가 된다. “거울이라는 열려있는 비현실적 공간 속에 내가 있지만 실은 내가 아니라 일종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나를 보도록 나에게 허락한 거울에서 나는 부재한다. 이것이 거울의 유토피아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헤테로토피아이다. 거울이 실제로 존재하고 내가 점하고 있는 자리에 일종의 귀환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에서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그 자리에 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거울을 통해서이다. 거울은 그것을 둘러싼 모든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절대적으로 현실적이며 동시에, 지각되기 위해서는 그곳인 가상적 지점에 의해 통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비현실적인, 유리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순간 이 거울은 내가 점유하는 장소가 된다는 의미에서 헤테로토피아로서 기능한다.”24) 이처럼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실제적 존재인 나와 거울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통해 헤테로토피아와 유토피아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 헤테로토피아가 반영된 곳이 유토피아이고 유토피아가 실제화한 장소가 헤테로토피아가 된다. 이를 연극 무대에 적용시킨다면 현실의 재현인 무대가 유토피아라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실제적 장소인 객석은 헤테로토피아가 될 것이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힌다. 첫째, 인간 집단에는 매우 다양한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그곳은 특권적이거나 신성하거나 금지된 장소이며, 사회와의 관계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내부의 인간적 환경에서 위기의 상태로 있는 개인들에게 예약되어 있는 장소들이다.”25) 이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는 현재는 휴양소, 정신병원, 감옥, 양로원과 같은 이탈(déviation)의 헤테로토피아로 대체되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삼한시대의 소도(蘇塗) 역시 이 범주의 헤테로토피아가 될 것이다.

    둘째, “문화에 따라 그 기능이 달라지는 신기한 헤테로토피아인 묘지가 있다. 일상적 문화공간과는 분명히 다른 장소(lieu)인 묘지는 시대에 따라 뚜렷한 변화를 겪는다. 18세기 말엽까지 묘지는 거주지와 인접해 있었지만 무신론이 대두되고 유해를 중히 여기지 않게 되면서 도시 외곽으로 옮겨진다.”26) 묘지라는 헤테로토피아는 에피스테메에 따라 신성시되었다가 불결한 것, 전염병을 옮기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실제적인 장소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다양한 배치, 다양한 공간을 병행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연극, 영화, 정원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연극의 네모난 무대는 서로 낮선 장소의 계열들로 연속된다.”27) 무대에서 등장인물들과의 연속적으로 변모되는 접속으로 다양한 계열의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관객은 매우 신기한 네모난 홀에서 삼차원의 공간이 이차원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것을 목격한다. 영화관은 2차원과 3차원이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페르시아의 전통적 정원은 배꼽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정원의 모든 식물들은 소우주의 공간으로 분배되는데, 정원을 복재한 양탄자는 정원의 전체 세계의 상징적인 완벽성을 보여준다. 양탄자는 움직이는 일종의 정원인 것이다. 세계의 가장 작은 파편이자 세계 전체이기도 한 정원은 고대로부터 행복하고 보편화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였다. 헤테로토피아는 실제 장소이면서 낯선 것들의 다양한 배치가 함께 어우러진 공간이다. 우리가 일상의 공간에서 공연장이나 영화관, 정원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란 느낌이 드는 것은 그곳이 바로 헤테로토피아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 원리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 즉 시간과 단절된 공간으로서 묘지도 이에 해당하지만 박물관이나 도서관처럼 시간이 영원히 축적되는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좀 더 가볍고 일시적이며 불안한 것으로 축제의 형식인 장터나 휴양지도 여기에 해당한다. 장터에는 “마을 경계의 텅 빈 놀라운 영역에 일 년에 한두 번 노점상, 진열대, 기묘한 물건들, 씨름꾼, 뱀-여인, 점쟁이들이 모여든다.” 휴양지의 경우 “짧은 3주 동안 도시민들에게 원초적이고 영원한 알몸상태를 제공한다.”28) 이 헤테로토피아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곳,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일상과 단절되는 이질적 장소이다.

    다섯째, 헤테로토피아는 항상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곳은 감옥이나 병영, 또는 제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서 허락이 있을 때만 출입이 가능하다. 또한 순수하게 위생적인 정화의식을 행하는 스칸디나비아의 사우나나 위생적이면서 종교적인 정화의식인 이슬람의 목욕탕처럼 정화의식을 행하는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제사를 지내기 직전에 행하는 한국인의 목욕재계(沐浴齋 戒)를 위한 장소(목욕탕)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헤테로피아로서 또 다른 예로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거대한 농가가 있다. 하룻밤 숙박을 위해 여행자가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배제되어 있는 공간인 것이다. 완벽하게 보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외부가 아닌 것도 아닌 미국식 모텔(현재 한국식 모텔도 마찬가지다)도 이에 해당한다.

    여섯째, 헤테로토피아들은 다른 공간들과 비교할 때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 창녀촌처럼 실제의 공간을 환상의 공간으로 창조하는 헤테로토피아가 있으며, 완벽하고 섬세하고 정돈된 헤테로토피아로서 남아메리카에 세워진 예수회의 식민지가 있다. “그곳은 경이롭고 절대적 규칙을 지닌 식민지로서 인간적 완벽함이 효과적으로 완성되었다. 예수회는 파라과이를 통치하면서 지점마다 규칙을 부여하였다. 마을을 엄격한 배열에 따라, 맨 안쪽에 교회가 있는 네모 난 광장 주위에 배치되었다. 한 쪽에는 학교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묘지가 있 었다. 그리고 교회 앞에는 다른 큰 길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큰 길이 나 있었다. 가족들은 각자 이 두 축을 따라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호(십자가)를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다. 기독교 세계는 그 근본적인 기호를 통해 아메리카 세계의 지리와 공간을 표시했다. 개인들의 일상적 삶은 호루라기가 아니라 종소리에 의에 규율되었다. 기상은 모두에게 동일한 시각으로고 정되었고, 노동도 동일한 시간에 시작되었다. 식사 시간은 정오와 다섯 시였다. 그리고 잠을 잤고 자정에는 부부의 기상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다. 즉, 수도원의 종이 울리면 각자는 의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창녀촌과 식민지는 헤테로피아의 두 극단적 형태이다.”29) 하나는 환상과 혼란의 헤테로토피아이며 다른 하나는 규칙과 질서의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배 역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이다. 항해하는 배는 떠다니는 공간 조각이자, 장소가 없는 장소이다. 배는 스스로 살아가고, 스스로에 갇혀 있으며, 바다의 무한함에 내맡긴다. 배는 항구에서 항구로, 항로에서 항로로, 창녀촌에서 창녀촌으로, 정원에 숨겨진 귀한 것을 찾으러 식민지를 향해 간다. 유럽 문명에서 16세기 이후 선박은 경제적 발전의 가장 커다란 수단일 뿐 아니라 가장 커다란 상상력의 저장고였다. 배는 진정한 헤테로피아인 것이다. 배가 없는 문명에서는 꿈들이 고갈되고, 정탐행위가 모험을 대체하며, 경찰이 해적을 대체한다. 자체적으로 완전한 세상이면서 언제든지 출렁이는 배의 모습에서, 중세기에 찾아가는 무대였던 마차 위의 이동무대(Pageant)를 떠올릴 수 있다. 소품이 다 갖춰진 이동무대는 자체적으로 완전한 세상인 까닭이다.

    이들을 종합하면 첫째,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서든 존재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전체 인간 집단이 지니는 불변수(constante)”30)인 것이다. 둘째, 헤테로토피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고 모호하기도 하다.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유동적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헤테로토피아가 사라질 수 있고 앞으로 새로운 헤테로토피아가 생겨날 수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여러 다른 공간들이 실제 장소에서 함께 할 수도 있다.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실현화이며 상상력이 살아있는 구체적 공간이다. 이 공간에 생동감을 주고 헤테로토피아가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는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인 것이다. 사실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는 그 속성상 모호할 수밖에 없으며 구체적이고 정연한 모습이 되는 순간 헤테로토피아에서 멀어진다. 항상 유동적이고 매순간 변모 하는 헤테로토피아를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3.2. 연극과 헤테로토피아

    앞서 보았듯이 푸코는 연극을 헤테로토피아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게 극적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공간의 이종(異種)의 성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주체의 개념이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의해 변할 수밖에 없다면, 역사에 따른 공간의 의미 또한 시대에 따라 변모될 것이므로 이 관점에서 극적 공간을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푸코가 위계 공간으로 언급한 중세의 공간은, 보이지 않지만 절대로 허물 수 없는 제 4의 벽을 지향하는 사실주의 연극 공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위치가 정해진(localisation) 무대, 고정된 무대는 푸코식의 중세공간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성의 실험정신이 강화되고 최첨단 기기를 활용한 마술적이고 환상적인 무대, 가상현실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적극적인 현대연극의 공간은 에너지와 의미로 충만하고, 거친 파도와 싸우는 작은 돛단배처럼 지극히 위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정, 고착, 균형이 아니라 일탈, 동요, 변화의 공간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개념에 의거하면, 무대에서 한 인물이 어떤 공간과 만날 때 그 공간은 상호 작용에 따라 그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기계로 작동한다. 그렇게 생성된 무수한 기계들의 조합이 한 편의 연극이 된다. 그런데 기계의 접속으로 끊임없이 변모하는 대표적 공간은 바로 사이버스페이스이다.

    한편 연극이 엄격하게 건축된 건물(극장)에 배치(감금)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의도된 배치이자 영토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만일 보이지 않는 정치적 힘이 작용한다면 그것은 관객을 영토화시킬 뿐 아니라 정해진 영토에 고착화시키고자 하는, 즉 사회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정학적 영토화는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이나 로마 극장 형태 에서도 이미 그 모습이 발견된다. 카타르시스를 앞세운 비극의 정략적 목적이 정제된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라면 이는 극장의 영토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 관점에서 현대연극은 거의 극단적인 수준에 와 있다. 자본에 의해 생산된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적 극장은 영토화의 대표적 산물이다. 객석의 종류와 입장료 차등에 따른 계급의 형성은 위계화를 부추기며, 외부와의 엄격한 차단은 홈 패인 공간을 지향한다. 연극의 융성이 도시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단단한 영토화는 연극의 본래적 속성을 무시하고 자본의 논리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탈영토화인 헤테로토피아는 그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연극적 사고의 방향을 재고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연극은 헤테로토피아로서 합당한 배치와 탈영토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미 언급했듯이 역사 속에서 형성된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은 의미나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연 자체에서 펼쳐졌던 공연과 현대식 건물에서 최고의 음향과 조명 시설을 갖춘 공연장에서의 공연은 같을 수가 없다. 같아서도 안 된다. 공간(형식)이 달라지면 공연(내용)도 달라진다. 우리가 연극이란 매체에서 공간 매체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병원이나 감옥에서의 공연, 공사장에서의 공연, 학교에서의 공연, 숲 속이나 정원에서 의 공연,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공연은 엄연히 다르다. 대극장과 소극장만 해도 공연의 질감이 다른데 하물며 원시공간과 현대 공간, 가상현실은 어떨까? 그러므로 아파트 크기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현 사회에서 연극 공간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질문에 답하기 위한 단계적 실천으로 기존 공간에 대한 이해, 공간의 해체, 새로운 배치의 공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 눈에도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임을 알 수 있다. 즉 연 극공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공간의 재정립과 배치인 것이다. 연출(mise en scène)이란 무대(scène, 장면, 공간)를 배치(mise)하는 것이다. 그 배치는 관계들에 의해 성립되고 관계는 힘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작용되어야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이 점을 일깨워준다.

    한편 관객의 공간도 권력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일방향의 감시 체계를 지닌 판옵티콘(panopticon)에서처럼 마치 무대를 감시하는 권력자의 시선을 지니지만 동시에 수동적 자세로 무대의 담론이 암암리에 투사되는 지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권력에 의해 극 공간은 분배되고 그 안의 개인은 목록화 되고 사물화 되고 예속된다. 인간은 권력에 순종적이고 유용한 신체로 변하고 개인의 의식과 주체는 감시와 훈련의 산물이 된다. 판옵티콘은 개인을 가시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평가하고 구별한다.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은 원형 건물이 에워싸고 있고, 그 중심에는 탑이 하나 있다. 중앙의 탑에는 감시인 한 명이 배치되고 역광선의 효과를 이용하여 주위 건물의 독방 안에 있는 수감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 그것은 완전히 개체화되고 항상 밖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한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무대들이자 수많은 감방이다.”31) 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에서 수감자는 언제든지 감시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스스로 피권력자로 전락하게 되어 권력이 행사되지 않더라도 권력관계가 유지된다. 한편으로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은 판옵티콘에서 감시자의 시선이 된다. 관객은 일방적으로 시선을 던지고 무대 위의 존재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관객은 판옵티콘의 수감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연극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권력의 영도를 꿈꾼다면 극 공간의 재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배치는 연기자와 관객이 마주보는 정형화된 공간이기보다는 도시의 거리(서현석의 <헤테로토피아>)이거나, 공간을 조각낸 새롭게 배치(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일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는 극장 공간을 재해석한다. 기존 객석 공간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무대는 두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이것은 설치 예술과의 접목으로 훌륭하게 재탄생되며 알 수없는 무용수들의 음성과 섞인다. 이러한 공간과 소리의 융합을 통해 번역 중에 있는 ‘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32)

    10)<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에 대한 영역은 “Of Other Spaces” 또는 “Different Space”이다. 우리말로는 주로 ‘타인의 공간들’로 번역된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autre는 일반적으로 사 앞에서 ‘다른’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다르다’를 더욱 강조할 때는 명사 뒤에 붙는 경우가 있다. 물론 푸코에서 있어 ‘타인’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푸코가 보기에 서양의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분류에서,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 백인과 흑인 등의 분류에서 비권력에 속하는 부류가 바로 ‘타인’이다. 따라서 그들이 소속된 간이 ‘다른 공간들’일 수 있고, 이질적인 공간들일 수 있다는 견지에서 ‘타인의 공간들’의 역이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이질성이 담겨있는 헤테로토피아의 의미를 살리는 뜻에서 ‘다른 공간들’로 번역하고자 한다.  11)Foucault, Des espaces autres, 1쪽. 본 연구에서 푸코의 「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의 인용은 간행 발제문을 연구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 쪽수는 미간행 발제문의 쪽수에 해당한다.  12)들뢰즈는 모든 개체를 기계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기계가 어떤 개체와 접속하느냐에 따라 그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 개체는 다른 계체와 연결 또는 관계맺음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이 점은 관계에 따라 양상이 달리지는 푸코의 이념과도 상통한다. 기계들이 속하여 이루는 장을 곧 배치라고 한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의 기계라고 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이정우, 『천 하나의 고원 - 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 참조, 돌베개, 2008.  13)Foucault, 앞의 책, 2쪽.  14)Foucault, 위의 책, 3쪽.  15)Foucault, 위의 책, 3쪽.  16)그리스어 ‘hétéro’는 ‘다른’, ‘이질의’를 뜻하며, ‘topos’는 ‘장소’를 뜻한다.  17)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7쪽.  18)Foucault, 위의 책, 11~12쪽.  19)Foucault, 위의 책, 11쪽.  20)Foucault, 위의 책, 12~16쪽.  21)Foucault, 위의 책, 13쪽.  22)Foucault, Des espaces autres, 3쪽.  23)Foucault, 위의 책, 4쪽.  24)Foucault, 위의 책, 4쪽.  25)Foucault, 위의 책, 5쪽.  26)Foucault, 위의 책, 5쪽.  27)Foucault, 위의 책, 6쪽.  28)Foucault, 위의 책, 6쪽.  29)Foucault, 위의 책, 8쪽.  30)Foucault, 위의 책, 4쪽.  31)Foucault, Surveiller et punir,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 나남출판, 1994. 309-310쪽.  32)2013년 <성남아트센터 공연 팸플릿>.

    4. 결론 : 사이버스페이스를 조망하며

    통상, 공간의 분배와 배치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은 공간의 소유 및 공간의 권력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푸코는 생물의 목록화하기, 개념의 분류화하기, 정의로 범주화하기와 같이 상위체계에서 하위체계로의 일목요연한 배치처럼, 인간을 분류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금을 넘었다는 이유로 짝꿍과 갈등을 일으킨 경험이 있을 것이다. 멧돼지가 도심지로 뛰어드는 것도 영역 싸움으로 인한 배치의 권력구조와 지정학적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는 주장이 있다.33) 아파트 소음 때문에 일어나는 이웃 간 싸움이나 부동산의 소유와 배치를 놓고 벌이는 다툼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공간과 어긋나는 헤테로토피아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자체적으로 이질적인 공간이며, 일상 속에 있지만 일상과 다른 공간이다. 영화관이나 공연장처럼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조금 전의 세상과 완전히 달라지는 공간이며, 유토피아가 현실적으로 나타난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술가가 그려낸 세상은 무엇인가? 무대가 재현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거울 속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흥미로운 사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유토피아는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재현된 이미지를 찾아 헤테로토피아가 유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바탕으로 현재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린 사이버스페이스를 고려할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야 말로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 찬 공간으로써, 누구와도 접촉할 수 있지만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공간,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에 있는 공간으로 바로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연예술이 이미지 매체를 통해 사이버스페이스와 접속하는 순간 극 공간의 헤테로토피아화(化)는 더욱 확산되고 가속화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탈영토화된 무대에 다름 아닌 것이다.34)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사물은 연장성을 지니지 않으므로 거리의 부재, 시간의 지체와 증발이 일어나고 이로부터 동시성과 즉시성의 실현이 가능하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실제 세계에서의 시간적 질서, 연속성, 통일성을 깨트리며 공시화(synchronization)를 향해 사건 발생의 순차적 연속성을 수축시킨다. 거리가 증발된 이곳에서 영토적 고착은 사라지고 순간 이동이 가능한 동시성과 즉시성으로 대체되면서 탈영토화가 일어난다.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여럿이 한 지점을 동시에 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적 공간의 필연적 질서가 위반된다. 즉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동일성과 타자성이 혼재하는 공간이며, 동일성과 타자성이 엇갈리는 역동성 속에서 항상 무엇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벤트 공간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타자성의 틈입을 허용하는 섞임의 공간(Hybrid space)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존재가 자기 경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미지처럼 탈실체화되어 틈새 난 자기 존재의 경계 사이로 타존재자의 틈입을 허용하기도 하고 동시에 타존재로 스며듦으로써 유동적 상태가 된다. 즉 사이버스페이스 혼성 잡종과 변이가 일상화되는 공간, 동시성과 즉시성의 공간, 탈실체화의 공간, 탈영토화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는 유동적 유통적 상태를 생성하는 혼성적 변이 과정이 일상화되어 있다.35)

    현재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소용돌이에 처해 있다. 그 순기능과 역기능이 뚜렷이 구분되고 있는 시점에서, 몸과 공간 예술인 연극은 다음의 노선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하는 기로에서 있다. 그것은 기존의 틀을 해체하고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할 것인가, 연극의 고유한 능동성, 체험, 조합, 소통적 방식을 통해 사이버스페이스의 역기능을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전자에 관련하여 “총체성의 후퇴(retreat of synthesis), 몽환적 이미지(dream images), 공감각 (synaesthesia), 퍼포먼스 텍스트(performance text) 등의 징후”36)를 보이며 탈중심화를 선언한 포스트드라마연극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후자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예술적 은유를 통해 사이버스페이스의 역기능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휠덜린의 시구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자란다”를 인용하면서 예술적 은유가 지니고 있는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은유는 타자성을 바탕으로 드러나는 동일성이 그 타자성과 이루는 긴장의 틈새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은유가 극치를 이루는 영역이 예술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함께 타자성 이 혼재하며 펼쳐지는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내면에 은유적, 예술적 잠재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37) 은유의 잠재력이 잠자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가능성이 예술 영역에 놓여 있다.

    33)“특히 서울의 경우 낮 시간대에 주로 나타나는데 등산객으로 인해 서식지가 교란된 개체가 가까운 도심에 출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환경부는 전했다. 서울 북한산, 부산 금정산 등 도시 내에 서식하는 멧돼지는 자체 번식으로 개체수가 증가한 데 비해 어린 개체가 독립하면서 필요한 신규 서식지도 부족한 것으로 분석됐다.” sbs뉴스(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608449.  34)이 점은 Pierre Lévy가 밝히고 있는 바, 그는 들뢰즈를 차용하여 사이버스페이스를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Pierre Lévy, Becoming Virtual, Reality in the Digital Age, New York 1999 참조. 이종관 재인용. 「사이버스페이스와 포스트휴먼–사이버 경제와 인간의 미래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인간의 실존과 초월』, 2000, 271쪽.  35)이종관, 위의 책, 270~271쪽 참조.  36)이진아,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관객의 위치」, 『한국연극학』, 제42호. 2011, 195쪽.  37)이종관, 위의 책,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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