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땅, 그리고 모성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Jiseul as Their Own Story about Folktales, Land, and Mother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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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paper concerns how Jiseul (2012) directed by O Muel consoles people who died or survived during Jeju 4.3 incident for their sorrow by way of a ritual and eventually points to the value of peace by using the implied meaning of self-sacrifice and the motherhood in the Seolmundae-Halmang and Ohbaek-Janggun story, which is one of the most famous folktales in Jeju island.

    In this film, Jeju is replaced by the cave in which folks hid themselves during Jeju 4.3 incident or the cauldron in which a pig was boiled. The Jeju island as a devastated land during the incident, is personified as a sister Sundeok’s body, the Jeju as a witness in silence is done as a mother Jeonggil, and the land of Jeju itself is done as a living creature with its own breath and feeling. And, not only the folks but also Sergeant Kim who is one of the punitive forces against the folks are included in Ohbaek-Janggun brothers. With these codifications, this film makes Jeju be a Seolmundae-Halmang who was the creator of the Jeju in the first place and became a part of the Jeju itself at last after the death, and who was the mother having given her own body to her five hundred sons for food. It is the great motherhood of the Jeju island that will brings peace with its self-sacrifice and love.

  • KEYWORD

    Jiseul , Jeju 4.3 incident , self-sacrifice , motherhood , Seolmundae-Halmang , OhbaekJanggun , folktales , land

  • 1. 제대로 치러지지 못 했던 제사

    영화는 구름이 걸쳐진 한라산 정상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자신이 만든 땅을 굽어보는 창조신화 속 거녀(巨女) 이자, 500명의 자식을 먹일 죽을 쑤다 그 솥에 빠져 스스로의 몸과 목숨을 자식들에게 식량으로 내어주게 된 어미, 설문대할망의 시선이 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제주4.3사건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양민의 혼령이 제주 땅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영화 <지슬>은 첫장면을 이러한 POV로 시작하면서 조심스럽게 망자의 혼령을 위령제로 초청한다.(그림 1)

    사실 지금까지 위령제는 제대로 치러진 적이 없었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 점을 확인시켜 준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제사 현장, 토벌대에 점령당한 이 현장은 제기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촛불은 켜져 있지 않은 채 연기만 자욱하다.(그림 2) 살육의 흔적은 서랍장에 구겨 넣어진 여성의 나체 시신으로 처리되어 있고, 살육의 주체인 김 상사와고 중사는 살육의 도구였던 칼로 제수용 과일을 잘라 나눠 먹는다.(그림 3) 이 장면은 제주4.3사건과 그 망자가 대한민국에서 지금껏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진실은 자욱한 연기에 가려진 것처럼 드러나 있지 않았고, 1) 아무렇게나 버려진 여성의 시체처럼 학살된 양민들의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있었다. 진상을 밝혀 규명하거나 억울한 영혼을 달랠 수 있는 제사는 아직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고, 학살의 원흉들은 그 공간 속에서 달디단 과일을 먹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이 장면에 농축되어 있다면, 영화는 이제 토벌대,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 대피하거나 대피하지 않았던 양민들, 양심적이거나 비양심적이었던 군인들, 제주 4.3사건이 벌어진 과묵한 땅 제주 등등을 소개하고 나서 본격적인 제의로 접어든다.

    신위, 신묘, 음복, 소지로 이어지는 영화의 흐름은 제주4.3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었던 경험의 실체, 학살, 그리고 그에 대한어머니 같은 포용과 용서,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어떤 위로와 평화의 안착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의 제사 현장으로 되돌아오되, 버려진 시신이나 살육의 주체가 없이, 흐릿한 연기 없이, 비록 제기는 흐트러져 있지만 촛불이 켜 있고 지방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사가 그럭저럭 치러지고 있는 셈이다.

    1)테리 파크 Terry K. Park는 연기가 캐릭터들을 잘 볼 수 없게 하거나 혹은 재만 남기고 매장되어 있던 억압된 역사를 가리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Terry K. Park, “O Muel’s ‘Jiseul’”, CAAMFest 2013 Reviews; http://www.hyphenmagazine.com/blog/archive/2013/03/ caamfest-2013-reviews-o-muels-jiseul

    2. 학살에 대한 위령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제2조에서,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된다. 2) 그렇지만 제주 4.3사건은 실상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 다양한 관점은 “제주 4.3 혹은 제주 공산당 혹은 빨치산 봉기”, “제주4.3민중항쟁”, “제주4.3 사건”, “제주4.3학살” 등등 이 사건에 관련한 다양한 명칭을 만들어내 기도 했다. 3)

    그렇다면 영화 <지슬>은 제주4.3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힌트는 이 영화가 위령제의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위령제라는 것은 위로할 대상과 이유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위로’를 통해 영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제주4.3사건을 ‘봉기’나 ‘항쟁’이 아니라 ‘학살’로 규정한다.학살에서 주체는 학살의 가해자와 학살의 피해자로 구분된다.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범위를 벗어난 범주는 크게 의미가 없다. 이 영화 에서, 무장대로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무장대에 의해 살상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위령제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 이다. 4) 무장대의 죽음은 양민이 학살된 사례에 해당되지 않으며, 무장 대에 의해 살상의 피해를 입은 경우는 공권력에 의한 학살의 피해 범위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학살의 피해 혼령들을 위로의 대상으로 호출할 때, 토벌대에게 학살당했던 양민들과 죽은 토벌군인 일부만을 호출한다.

    또한, 우리는 이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위로하려 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 구체적으로는 토벌대에게 학살당한 양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이들을 위로 하는 첫 번째 방식은 그들이 세상에 알려진 대로 그렇게 빨갱이들이 아니었다는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다.

    1948년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될 때, 해안선 5km 밖인 중산 간지역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여기서 ‘적’은 ‘빨갱이’를 의미했다. 당시 제주 도민의 약 1/10에 해당하는 3만 명 내외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 지만, 사건 발생 이후 약 50년 간 국가의 공식 입장 혹은 지배 담론은 이 사건을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폭동으로 규정했다. 생사 여부를 막론하고, 제주도민들은 “‘暴徒, 폭도’라는 오명(汚名)과 제주섬(濟州 道)을 ‘빨갱이섬’이라고 호명(呼名)하여 왔던 불명예(不名譽)” 5) 에 시달려 왔다. 더군다나 제주4.3사건은 1980년대 후반까지 역대 정권에 의해 거론조차 금기시 되었고, 6) 지배 담론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었으며, 7) 1978년 창작과비평사를 통해 「순이 삼촌」을 발표했다가 중앙정 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소설가 현기영의 사례나 이적표현물로 간주된 영화 <레드 헌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관련된 발설은 공안당국에 의해 처벌을 받아왔다. 8) 제주도 밖에서, 제주4.3사건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였고, 무관심한 이야기였으며, 잊혀진 이야기였다. 따라서 빨갱이로 간주되었던 학살된 영혼들이 실상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 진상을 밝히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그렇게 살육당할 만한 빨갱이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고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자 친척이자 친구이자 이웃들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그들의 오명과 불명예를 씻어주고 위로하는 최우선의 방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제주4.3사건이 어떠한 사건이었나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제주4.3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이었나를 다루는 영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9) 영화는 이들이 착하기만 할 뿐 아니라, 그저 무지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개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동 어머니는 입산을 한사코 거부하고, 원식이 삼촌은 돼지 굶을 걱정을 먼저 한다. 동굴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도 며칠만 고생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발정 난 돼지와 경준을 접붙이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영화는 그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너머에 있었다는 것, 순박하고 순진무구했다는 것, 때때로 이들의 인간적인 순수함과 친밀감, 유대감 등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 등을 보여주는 것에 혼신을 기울인다. 영화에 그려진 이 사람들은 그저 우리 옆집의 친근한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동네 조카일 뿐이다. 어른을 공경하고, 자식을 위하고, 이성을 사랑하고, 생계를 걱정하고, 서로 다투 기도 하고 위하기도 하고, 서로간의 잘못도 있으면서 그에 대해 용서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 영화가 대상을 위로하는 두 번째 방식은 학살의 참혹함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위로 대상이 당시에 죽음을 당한 영혼들 뿐 아니라 학살의 역사에서 살아남았지만 그 생생한 기억으로 고통 받는 살아남은 자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10) 살아남은 자들은 학살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그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고통당하는 사람들이다. 그 고통은 그들의 인생에 걸쳐 묵중한 무게로 자리 잡고 있다. 기억으로 인한 공포가, 연좌제의 공포가, 폭압 정치의 공포가, 발설에 대한 공포가 그 고통을 가중시켜 왔다. 그런데 이영화는 발설하지 못했던 그들을 대신해서 그 공포의 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해준다. 애써 은폐되고 가려진 그 진실을, 그들만이 알고 있되 발설할 수 없었던 그 고통의 기억을, 영화가 재현으로 세상에 공표해 주는 것이다. 발설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억압 당해온 사람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를 대외적으로 언표하고 발설해 주는 일이다. 요컨대,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다. 발설하지 못 했던 자들이 이것을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 11) 그렇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제약이 있다. 이 영화가 위령제라는 형식을 통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학살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대상들, 즉 토벌대에게 학살된 양민들과 살아남은 양민들을 함께 위로하면서, 이제 오래된 한을 풀라고 요청한다. 정길이 김 상사를 처단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학살의 원흉에 대한 실제적 처단을 대체하면서, 이제 그만 용서하고 포용할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이 영화는 단순히 억울함에 대한 위로를 넘어, 용서와 평화의 땅으로서 제주의 의미를 새기는 것까지 나아간 다. 12)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자연스럽게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을 정도 이내의 참혹함만을 묘사할 것을 강권한다. 참혹함에 대한 묘사가치 떨리는 분노를 일으키며 용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령 그 치 떨리는 수준과 경지의 참혹함이 역사적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13) 이렇게 내적으로 검열된 참혹함의 수준은그 참혹함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 당시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표출하거나 공분할 만큼 절제된 것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고 포용하여 평화로 안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도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오멸은 인터뷰에서, “이미 돌아가신 분을 다시 불러서 또 같은 고통을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 라고 말했다. 14) 이 말은 당시의 고통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의 의도를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죽은 영혼들과 기억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겠지만, 그 끔찍한 기억이 상기되면,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 톤에 균열이 생길 것 또한 자명해 보인다.

    오멸 감독은 제주4.3사건을 이념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 배경 설명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념적인 대립을 그리지 않을뿐더러, 이념 적으로 어느 쪽이 옳은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지도 않고, 15) 이 문제를 어느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토벌대의 김 상사는 약물장이에 불과하며, 서북청년단을 연상시 키는 칼잡이 고 중사도 부모를 잃은 이념 투쟁의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학살 배후로 미군정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 각주처럼 덧붙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본질을 해부하거나 명확히 잘잘못을 가르거나 누군가를 심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고통 받은 사람들 또는 사람들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 고통을 위로하면서 거둬내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오멸 감독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그 고통의 대가가 무엇일까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갈등을 갈등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로 풀어낼 때, 그빈 자리에 채워지는 것이 무엇일까. 상생과 평화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또는 무엇인가의 희생 위에 새롭게 안착하는 것이다. 그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희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영화 <지슬>에 따르면, 그것은 학살당한 양민들이자 여전히 고통 받는 주민들, 자신의 몸을 자식의 식량으로 내어주었던 설문대할망, 폭력의 행사를 통해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희생양이 된 제주이다.

    이 영화에서, 제주도의 의미는 종국적으로 자신의 피를 지불하여 평화를 실현한 곳, 또는 평화를 위해 피를 흘렸지만 그것을 어머니의 넉넉한 사랑과 포용으로 감싸고 용서하는 곳이 된다. 이 글은, 영화<지슬>이 이러한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제주라는 땅을 어떻게 의인화시키는지, 그 땅이 어떻게 여성의 몸뚱이로 치환되고, 그 몸뚱이는 다시 어떻게 제주의 창조신화 여신이었던 설문대할망의 모성과 겹치게 되는지 논의할 것이다.

    2)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법률 제6, 117호, 1999. 12. 16 국회의결, 2000. 1. 12 공포 제정; 강창일, “뒤틀린 한국현대사와 제주4.3사건”, 『釜大史學』, 제27집, 효원사학회, 2003, 207쪽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3)이관열, “제주4.3사건 보도의 언론사적 의미”, 『사회과학연구』, 제42집, 강원대학교 사회 과학연구원, 2003, 60쪽. 이 글에서는 제주4.3사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4)제주4.3사건으로 사망한 희생자는 총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무장대 소속 희생자, ②토벌대 소속 희생자, ③무장대의 습격으로 희생된 민간인, ④토벌대의 처형으로 희생된 민간인. 조명기/장세용, “제주4.3사건과 국가의 로컬기억 포섭 과정”, 『역사와 세계』, 제43집, 2013, 212쪽.  5)허상수, “제주4.3사건의 진상과 정부보고서의 성과와 한계”, 『동향과전망』, 통권 제61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2004, 177쪽.  6)이관열, 앞의 글, 같은 쪽.  7)허상수는 이것을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망각의 정치’로 부르면서, 이에 대항하는 ‘기억의 정치’를 역설한다. 허상수, 앞의 글, 177, 180쪽.  8)김종민, “제주4.3항쟁 –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통권 제42호, 역사비평사, 1998, 27-28쪽.  9)Yeo Jun Lee, “Jiseul: the starting point for the island of peace”, The Jeju Weekly, 2013.04.02.; http://www.jejuweekly.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7  10)인디스토리에서 제공하는 감독의 노트에는 명백히 현재 살아남은 사람들과 제주4.3사건 때 죽은 영혼들의 내면에 있는 깊은 고통을 달래주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http://www.indiestory.com/English/html/indie_filmcontent.asp?filmIdx=1462  11)제주도에서의 흥행 성공이 이 기다림을 말해 준다. 오멸은 제주에서 관객 1만 명 돌파 시점에 제주도민에서 감사편지를 공개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평생 극장에 오시지 않을 것 같은 어르신 두 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길이를 모를 상처와 어둠의 과거를, 또한 잊고 싶었던 기억을 못내 끄집어 내놓은 못된 영화를 보러 오신 게지요.” 김대휘, “제주 4.3영화”지슬 감독 감사편지“, 노컷뉴스, 2013.03.14.; http://www.nocutnews.co.kr/news/1014099  12)이것은 ‘항쟁’이나 ‘폭동’ 등의 개념으로 규정되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화해와 상생을 염원하는 2000년 전후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강창일, 앞의 글, 213쪽. 조명기/장세용의 날카로운 비판에 따르면, 이것은 국가가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려는 과정에서 제주4.3사건을 용서와 화해로 재코드 화하고 제주도의 의미를 평화의 기표로 재맥락화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들은 영화 <지슬>이 취한 양민학살론의 입장이 정치성으로부터의 도피와 외면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러한 도피와 외면 자체가 철저히 정치적인 선택임을 언급하며 이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조명기/장세용, 앞의 글, 209-214쪽.  13)이 당시 학살의 진상에 대해서는 김종민의 글을 참고할 것. 토벌대는 가족 중 한 사람 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학살했고, 주민 집결 후 호적을 대조하며 젊은이가 없으면 폭도로 입산한 게 분명하다며 총살했다. 보초를 세우고는 졸았다고 총살하기도 했다. 비인간적인 모멸감과 비윤리적 죄책감을 안겨주는 사례도 많았다.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던 ‘말 태우기’나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한 ‘뺨 때리기’, 총살자 가족을 세워 놓고 부모 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하는 일,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하는 일, 장모와 사위를 대중 앞에서 성행위를 시키고 나서 총살하는 일 등등. 김종민, 앞의 글, 32-33쪽.  1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141  15)Christopher Bourne, “ND/NF 2013 Review: Jiseul, A Mournful, Beautifully Photographed Depiction of a Historical Tragedy”; http://twitchfilm.com/2013/03/ndnf-2013-review-jiseul-amournful-beautifully-photographed-depiction-of-a-historical-tragedy.html

    3. 제주 ? 섬, 동굴, 가마솥

    제주도는 섬이다. 섬의 지정학적 특징 중 하나는 고립과 폐쇄이다. 고립과 폐쇄는 섬을 육지와 구별시키고, 육지로부터 독립된 정체성을 갖게 만든다. 섬은 육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한 단독의 주체가 된다. 이 명확한 단독성은 섬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 운명공동 체라는 보다 끈끈하고 단단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해 주기도 한다.

    영화 <지슬>을 보면, 마을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윗사람에게 ‘삼촌’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실제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서 복잡한 친인척 관계로 엮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일률적으로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부를 때 이 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나이 불문하고 복잡하게 촌수를 따져서 위아래를 구분하는 모습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공동체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을 사람들의 피난에 상표가 동참하는 장면이다. 상표는 경찰 아버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집에 가도 괜찮으니 집에 가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그는 집에갈 듯 하다가 되돌아온다. 그러고는 좁은 공간에 몸을 부대끼며 꽉끼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꾸역꾸역 밀치고 들어와서 자기도 끼워 달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피난 음식인 감자(지슬)를 나누어 먹는 장면이다. 순덕 어머니가 가지고 온 감자를 나눠 먹을 때도 그렇고, 무동이 마을에서 가져온 감자를 나눠 먹을 때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1983)에서처럼 감자를 위해 사투를 벌이지도 않고, 송일곤의 <간과 감자>(1997)에 서처럼 감자를 얻기 위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법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이들은 소중한 감자를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이것은 제주도 오백장군 설화의 오백 형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설화는 한 할망(어머니)이 오백 명의 자식에게 먹일 죽을 쑤다가 실수해서 죽 솥에 빠져 죽었는데, 자식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 죽을 먹었다가 나중에 알고 돌(영실기암)이 되었 다는 내용이다. 현승환은 이 설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가난이 라고 하면서, 자식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공감할수 있으려면 “자식들이 먹을 것이 없음에도 가족이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는 생활을 경험했을 때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16) 결국, 영화에서 함께 감자를 나눠 먹는 식사 공동체로서의 마을 사람들은 가난을 겪으면서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었던 오백 명의 형제들 이미지와 겹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숨어 있던 공간이 동굴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물론 동굴로의 피난은 제주4.3사건의 다수 실화를 바탕으로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동굴 역시 섬과 마찬가지로 고립과 폐쇄의 공간이다. 이 고립과 폐쇄의 공간은 위험을 차단하고 그로부터 은닉할 수 있을 때는 안전한 공간이지만, 위협에 빠졌을 때는 공포의 공간으로 바뀐다. 제주도는 한국전쟁 시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 이었지만, 제주4.3사건의 “초토화 작전”시기에는 탈출이 불가능한 위험한 지역이었다. 마찬가지로 동굴은 토벌대로부터 은폐되었을 때 안전한 공간이지만 그들에게 노출되었을 때는 출구가 막힌 위험한 공간 이다. 이러한 유사함은, 마을 주민을 제주도민의 대유법으로 기능하게 하는 것처럼, 동굴 공간을 제주도의 대유법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한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고립과 폐쇄의 또 다른 공간은 가마솥이다. 장작불을 떼는 이 가마솥은 아마도 토벌대의 밥을 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가마솥은 김 상사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목욕을 할 때 추위 속에서도 온기와 안락함을 제공하는 편안한 공간이 지만, 돼지를 삶거나 김 상사를 처단할 때는 죽음과 처벌의 공간으로 변한다.

    영화는 제주도를 동굴로, 동굴을 가마솥으로 치환시키면서 끊임없이 오백장군의 설화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주도민은 마을 사람들로, 마을 사람들은 다시 돼지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돼지가 잠겨 있는 검은 가마솥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부감 쇼트 (그림 4)에서, 고 중사가 “빨갱이 새끼들이 동굴 속에 숨었다니까 이잡듯 샅샅이 뒤지라! 알간?”하고 소리 지른다. 이 장면은 학살에 대한 시각적 비유라 할 수 있는데, 그 다음 신의 첫 장면은 마을 사람들이 숨어 있는 동굴의 시커먼 통로를 뻥 뚫린 구멍을 통해 보여주는 부감 쇼트(그림 5)이다. 동일한 부감 앵글, 출구 없이 입구만 달랑 있는 검은 공간의 유사한 이미지, 그 공간 안에 있는 대상으로서의 동일성 등으로 인해 우리는 쉽게 마을 사람들이 돼지로 치환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지슬>이 바라보는 오백장군은 마을 사람들만으로, 또는 제주도민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지슬>은 오백장군의 범주에 토벌대의 지휘관 중 하나인 김 상사를 포함시킨다. 아마도 이 점은 영화<지슬>의 관대한 포용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근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몸집이 약간 통통한데다 게을러 보이는 김 상사는 돼지의 이미지를 갖는다. 그는 돼지가 가마솥에서 끓고 있을 때, 돼지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화면 안으로 기어 들어온다.(그림 6) 조금 시간이 지나면, 돼지를 통째로 넣어 삶았던 바로 그 가마솥에 돼지처럼 몸을 담근 채 목욕을 한다.(그림 7) 영화 말미에서, 그는 그 가마솥에서 돼지와 같은 운명이 된다.(그림 8) 그리하여, 이 영화는 마을 주민과 토벌대를 다함께 오백장군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착하든 악하든, 곱든 밉든, 잘났든 못났든, 어미가 차별 없이 품에 안아야 할 형제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상생과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전제이기도 할 것이다.

    16)현승환, “설문대할망 설화 재고: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중심으로”, 『영주어문』, 제24권, 영주어문학회, 2012, 112쪽.

    4. 땅과 여성

    제주도의 창조신화로 언급되는 것은 설문대할망 설화이다. 옥황상 제의 막내딸이었던 할망은 거대한 몸집과 힘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하늘과 땅을 두 개로 쪼갰다가 옥황상제의 진노로 땅의 세계에 쫓겨 나는데, 치마폭에 담은 흙은 내려놓은 게 제주도가 되었다고 한다. 17) 그런데 어느 판본에서, 그녀는 한라산 물장오리에 빠져 죽는다. 18) 이에 대한 김동윤의 해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동윤은 이명인의 소설 「집으로 가는 길」이 설문대할망 설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논하는 부분에서, “설문대할망이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의 결말 역시, 사라져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할망이 곧 제주섬에 녹아듦으로써 섬 자체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19) 이러한 관점은, 할망이 제주도 섬 자체가 됨으로써 역으로 제주도가 여성화, 혹은 의인화 되는 것을 허용한다.

    흔히 식민지에 가해지는 제국의 핍박,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군사 정권의 탄압 등에 관련된 서술에서, 상처 입은 조국과 망가진 국토는 유린당하는 여성, 특히 어머니나 누이의 신체로 표상되곤 한다. 나운 규의 <아리랑>에서 영희가 마름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하는 것은 지극히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지슬>에서도 여성 혹은 여체는 토벌대에게 학살당하는 제주와 그 땅을 표상한다. 순덕이는 순결한 제주 그 자체의 제유법이다. 영화는 순덕이의 봉긋한 가슴 위로 그동안 갈아 놓았던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는 김 중사의 겁박을 보여준다.(그림 9) 그리고 화면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김 상사가 그녀를 겁탈한다. 얼마 후, 그녀를 사랑했던 만철이 그녀의 죽음을 확인 하자, 울먹이며 들판을 달리기 시작한다. 상표가 그 뒤를 따라간다. 그 다음으로 연결되는 장면은 오름을 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그림 10)

    이 장면은 익스트림 롱 쇼트로 되어 있어서 만철과 상표의 몸을 거의 개미만한 크기로 보여 준다. 달리는 두 남자만큼이나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오름의 능선이 만들어내는 곡선이다. 이제 영화는 매우 놀랄 만한 시간 경과를 보여준다. 만철과 상표가 오름을 오르는 동안 갑자기 빛이 달라지면서 낮이 밤으로 바뀌기 때문이다.(그림 11) 이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만을 표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만철과 상표가 오름을 달려 올라가는 동안 갑자기 낮이 밤으로 변할 리 없다. 그렇다면 오멸 감독이 빛을 변화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림 10’에서 ‘그림 11’로의 변화는 최소한 한 가지를 용이하게 만들어준다. 바로 곡선에 대한 지각이다. 브루스 블록은 “어떤 영상이라도 간단한 라인으로 축소될 수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리니어 모티프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리니어 모티프는 톤의 콘트라 스트를 강조해서 생성한다. 20) 이것은 리니어 모티프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브루스 블록이 제안한 방식으로서, 이미지를 파악하거나 분석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오멸 감독은 영화 장면 내에서 낮을 밤으로 바꿈으로써, 영화 속 이미지 자체가 리니어 모티프로 바뀌도록, 실제적인 사진 이미지가 톤의 강렬한 대비만 남은 추상적 라인으로 바뀌도록 만들었다. ‘그림 10’에서 ‘그림 11’로의 변화를 보라. 낮이 밤으로 바뀌면서, 모든 것은 콘트라스트가 강한 세계로 단순 화된다. 산의 디테일은 생략되고,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능선의 곡선이 도드라진다. 곡선의 모양새만 오롯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때, 오름의 곡선은, 달리 말해서 제주 땅의 이미지는, 그렇게 순덕의 육체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화, 특히 수묵화를 전공했던 오멸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연출이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에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그러면 순덕이 어떻게 제주의 제유법으로 자리 잡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오름의 곡선을 보여주는 장면에 이어지는 신은 마을에 남은 양민들이 토벌대에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담아낸 그 유명한 플랑 세캉스 이다. 즉, 영화의 흐름을 요약하자면, 유린당하는 순덕 → 순덕의 죽음 → 순덕의 육체와 동일한 제주의 땅 → 토벌대에게 학살당하는 제주도민들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은 순덕의 육체를 제주의 땅과 동일시하면서 유린당하는 순덕을 초토화되는 제주의 대표적 표상으로 각인시킨다.

    초토화된 제주가 순덕이라는 여성으로 표상되고 있다면, 이 참담한 비극을 묵묵히 목격하며 슬픔을 짓누르는 제주는 정길이라는 여성으로 표상된다. 정길은 김 상사의 시중을 드는 군인처럼 보이지만, 군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군복을 입고 부대 내에서 생활하면서 김 상사의 일상을 도와주게 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21) 오멸은 그녀가 제주에서 흔히 어머니들이 하는 일인 물허벅(물항아리) 지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캐릭터에 어머니의 상징성을 부여한 다. 22) 따라서, 유린당한 제주가 순덕이라는 누이라면, 악행과 비극을 목격하는 제주는 정길이라는 어머니인 셈이다.

    순덕은 김 상사를 돌보면서 학살의 현장에 있다. 그녀는 김 상사가 목욕할 솥의 물을 져 나르기도 하고(그림 12), 김 상사가 순덕을 겁탈 하려는 동안에 그에게 물 사발을 건네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떠한 학살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다만 문 앞에 서 있거나(그림 13) 학살의 현장에 서 있을 뿐이다.(그림 14) 그렇게 곧추 서 있는 그녀의 몸이 슬픔과 떨림을 표현한다. 그런 정길을, 오멸은 “설문대할망의 재래”로 이해한다. 23)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이 제주도가 되고, 제주도인 설문대할망은 이제 영화 <지슬>에서 정길이라는 몸을 입고 있다. 이 설문대할망, 곧 정길은 또 다른 버전의 설화에서 오백 장군의 죽을 쑤었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동굴 토벌 장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두 종류의 자식,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서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로서의 제주인 정길은 다시 제주 땅 그 자체이 기도 하다. 오멸은 “제주라는 섬이 공간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한다. 제주라는 섬이 지닌 강한 여성성을 인식하면서, 그는 “여성 성이 우리에게 ‘땅’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24) 그러한 의도는 영화의 곳곳에서 의인화된 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 상사와고 중사가 제사상의 과일을 칼로 잘라 나눠먹을 때 밖에서 바람에 떨고 있는 나무, 순덕이 유린당하는 현장에서 그녀의 울음을 듣고 있는 무성한 나뭇가지와 그 옆에서 함께 우는 까마귀들과 눈 쌓인 초가지 붕과 그 옆의 앙상한 나무, 상표가 붙잡히고 나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바람소리, 무동 어머니가 죽은 다음 지평선 위에 무겁게 가라 앉은 안개 등이 모두 제주4.3사건에 대한 목격자이자 감정을 표출하는 배우로 등장한다. 25) 제주인 정길이 학살을 응시하며 몸으로 정서를 드러냈듯이, 비슷한 방식으로 땅 위의 이런 모든 것들이 학살을 목격하고 경험하며 감정을 표현한다.

    17)이 이야기에는 한라산과 우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포함되어 있다. 김가영, “설문 대할망: 제주도 천지창조 여신”, 『수필시대』, 제7권 1,2월호(통권 제36호), 2011, 220-222쪽.  18)현승환, 앞의 글, 95-97쪽.  19)김동윤, “현대소설의 설문대할망설화 수용 양상”, 『탐라문화』, 제37권, 탐라문화연구소, 2010, 271쪽.  20)브루스 블록, 『비주얼 스토리: 영상 구조의 연출 – 영화, 방송, 애니메이션, 디지털 미디어를 위하여』, 민경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100쪽.  21)정길에 대한 설정과 그녀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멸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할 것. 이용철, “이념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문제: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오멸 감독”; http://www.artpluscn.or.kr/NextPlus_webzine/81/NextPlus_webzine_81_13.html  22)김형석, “세월은 흘러도 남아 있는 역사: [지슬] 오멸 감독 인터뷰”; http://movie.naver.com/movie/mzine/cstory.nhn?nid=1679  23)이용철, 앞의 인터뷰.  24)김형석, 앞의 인터뷰.  25)허영선, “독립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 감자 한 알에 담긴 희망”, Koreana: A Auarterly on Korean Culture & Arts; http://www.koreana.or.kr/months/news_view.asp?b_idx= 2984&lang=ko&page_type=list

    5. 모성과 평화

    원래 설문대할망 설화와 오백장군 설화는 서로 무관하게 전승되어 왔던 설화였다. 26) 그렇지만 1960년대에 이 두 설화의 결합이 발생하면서 오백장군의 어머니로 지칭되는 ‘어떤 어머니’가 설문대할망으로 바뀌게 된다. 27) 이렇게 결합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이야기는 이후 제주도의 창조와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거듭 태어난다. 2006년에 개원한 제주돌문화공원은 핵심 테마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내세우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설문대할망제”라는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28) 2009년부터는 이 제의에서 송상일이 지은 ‘설문 대할망제 고유문’이 낭독되고 있는데, 이 고유문에서는 설문대할망을 “창조의 어머니이시자 사랑의 어머니”로 규정한다. 29) 왜냐하면, 창조의 어머니로서 한라산과 오름들을 만들었고, 사랑의 어머니로서 아들들(오백장군)에게 먹일 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식의 먹이가 된 사랑의 크기는 그녀의 몸만큼이나 크다. 게다가 그녀는 죽음으로써 영원히 섬의 일부가 된다. 영화 <지슬>이 보여주는 가치의 구심점은 바로 이 넉넉하고도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품고 있는 제주의 모성을 지향한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성의 다양한 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무동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함께 피난하자는 무동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성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도 별일 없었으니 걱정 말라며, 마을에 남는다. 그리고 ‘초토화 작전’이 펼쳐질 때, 고 중사에 의해 난도 당한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고 중사의 나이를 물으면서, 자기에게 그만한 아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녀가 고 중사에게서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어쩌면 그녀는 고 중사를 자신의 또 다른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고 중사를 욕하지도 않고, 그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다만 한숨을 내쉬며, “빨갱이가 뭐길 래....”라고 읊조린다. 그리고 고 중사가 일어나 가 버리자, 자식 걱정을 하며 지슬 쪽으로 힘겹게 손을 뻗는다. 나중에 무동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가 구한 식량은 그렇게 어머니가 불에 타면서도 끝끝내 품고 있었던 지슬이다. 그녀가 죽음으로 지켜낸 지슬을 무동이 식량으로 구해 가서, 그녀의 또 다른 아들들이라 할수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건네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지슬을 먹으면서 오백장군이 되어 있는 동안, 무동의 어머니는 그렇게 설문대할망이 된다.

    두 번째 표상은 무동의 아내이다.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는 동굴에서 빠져나가야 할 때 몸이 끼어 빠져나가지 못 한다. 무동이 같이 가야 한다며 나가지 않으려 하자, 그녀는 생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면서 어서 나가 생이를 챙기라고 재촉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보다 자식을 더 걱정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위대한 모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에 다시 등장한다. 이 영화의 말미에는 여러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지방이 불살라지는데, 그 첫 번째 지방이 무동 아내의 시체 위로 떨어 지는 지방이다. 이 신에서, 우리는 만삭이었던 그녀의 시체 옆에 갓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갓난아이의 울음은 곧 생명을 의미 한다. 이 생명을 낳기 위해, 자의든 자의가 아니든, 엄마가 죽음을 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엄마의 죽음 위에서 아기의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세 번째 표상은 설문대할망인 정길이다. 이 표상에서, 자식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어머니의 모성은 이제 못난 자식의 속죄를 위해 또는 그의 또 다른 범죄를 막기 위해 자식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확장된다. 정길은 그 동안 보살펴왔던 김상사를 가마솥에 넣고 불을 피워 죽인다. 이 처벌은 단순히 자식들을 학살한 원수에 대한 단죄가 아니다. 정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김상사는 어찌 보면 그녀의 자식과도 같다. 살려 달라는 김 상사의 절규에, 정길은 “이제 그만 죽이세요.”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이 살해는더 큰 살인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인 셈이다. 더 많은 여러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 한 못된 자식을 죽이는 의식인 것이다. 그녀의 어투나 표정, 행위에는 격분이나 노여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다만 “잘 가요, 형”이라며 작별 인사를 한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이 살해하고 있는 그 자식마저도 사랑하고 있는 어머니임을 드러낸다.

    어머니로서의 제주, 땅으로서의 제주는 바로 이러한 희생과 포용의 모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속에서 자라났다. 이것이 제주의 역사에 대한, 크게 보자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오멸의 성찰이다. 평화는 이 희생과 포용의 모성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종말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 된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자신의 종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설문대할망의 세계관이다. 어쩌면 이 큰 세계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스스로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것이다. 그리고 이 넉넉한 모성은 형제의 갈등이나 자식의 비행(非行) 을 우애와 가족애로 통합하게 될 것이다. 경찰인 상표 아버지에 대해 “네 아비도 살아보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라며 이해하는 것,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행위를 하며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병호가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것, 병호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용필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잊어버리라고 말해 주는 것, 토벌대의 일원이 었던 부상당한 한동수 이병을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 일행으로 받아들 이는 것, 죽어가는 무동 어머니를 걱정하며 고 중사가 병사에게 불좀 놔 드리라고 명령하는 것 등등이 모두 그러한 우애나 가족애를 함축한다.

    26)현승환, 앞의 글, 93쪽.  27)여러 기록을 토대로 해서 현승훈은 두 설화의 변형과 결합 과정을 자세히 밝힌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현승훈, 같은 글, 93-102쪽.  28)정진희, “제주도 구비설화 <설문대할망>과 현대 스토리텔링”, 『국문학연구』, 제19권, 국문학회, 2009, 231, 234쪽.  29)정진희, 같은 글, 235쪽. 또한, 창조의 어머니이자 사랑의 어머니로서의 설문대할망에 대한 정진희의 논의는 다음을 참고할 것. 같은 글, 235-236쪽.

    6. 로컬 시네마로서의 자기인식

    영화 <지슬>은, <어이그, 저 귓것>(2009)이나 <뽕똘>(2010) 등 오멸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로컬 시네마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 받는다. 30) 이런 평가는 이 영화가 제주도에서 제주도민들의 자본으로 제주의 영화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제주의 언어로 제주의 문제를 다루었고, 제주도민을 위해 제주도에서도 먼저 우선 개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로컬 시네마의 그와 같은 표면적 특성보다 훨씬 근원적인 실체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제주의 정서가 밑바탕에 깔린 제주의 자기인식이다. 그 자기인식의 핵심에, 희생과 사랑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는 설문대할망의 위대한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은 영화 <지슬>이 위령제의 형식을 빌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함께 위로하면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평화의 가치를 지향 하는지 논의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제주의 대표적 설화로 자리매김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설화에 함축되어 있는 자기희생과 모성의 의미가 영화에 어떻게 차용되고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 보았다.

    고립과 폐쇄의 공간인 섬으로서의 제주는 영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숨은 ‘큰넓궤’ 동굴로, 또는 돼지를 삶았던 검은 가마솥으로 치환 된다. 섬이나 동굴이나 가마솥은 모두 평안과 공포의 양면성을 취하는 공간이다. 고립과 폐쇄의 속성에 따라, 상황이 바뀌면서 평안의 상태가 공포로 바뀌고, 공포가 다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는 특성을 지닌 공간들이다. 이 특성이 곧 제주의 근원적 특성이 된다. 한편, 영화는 제주4.3사건으로 초토화된 제주를 ‘유린당하는 누이 순덕’의 몸으로, 그 비참한 역사의 과묵한 증인인 제주를 ‘어머니인 정길’의 몸으로, 제주 그 자체의 몸인 땅을 살아 숨 쉬며 느끼는 일종의 생명체로 의인화하여 제시한다. 그리하여, 공간이 사람으로 겹쳐지면서, 제주는 학살의 현장이자 학살된 사람들이 되며, 그 학살의 현장에서 새롭게 피어야 하는 평화이자 그 평화를 이끌어내는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어머니의 모성이 넓게 품어야 할 잘나고 못난 자식들의 범주에 동굴 속 운명 공동체인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학살했던 토벌 대까지를 포함시킨다. 그럼으로써 제주는, 무동의 어머니나 아내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자식을 살리고 그 스스로의 종말로 새시대를 여는 위대한 창조와 사랑의 어머니, 설문대할망 그 자체가 된다.

    제주에 대한 오멸 감독의 성찰과 자기인식은 그렇게 의미의 다층적이고도 다면적인 구조화를 통해 이 영화에 기입되어 있다.

    30)김시무, “로컬 시네마의 개념 변천과 아시아 영화에 나타난 로컬리티 사례들”, 『영화연구』, 제56호, 한국영화학회, 2013, 5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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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1>] 첫 장면의 POV
    첫 장면의 POV
  • [<그림 2>] 난장판인 제사 현장
    난장판인 제사 현장
  • [<그림 3>] 학살의 살육 주체들
    학살의 살육 주체들
  • [<그림 4>] 가마솥 부감 쇼트
    가마솥 부감 쇼트
  • [<그림 5>] 동굴 부감 쇼트
    동굴 부감 쇼트
  • [<그림 6>] 돼지 포즈
    돼지 포즈
  • [<그림 7>] 가마솥 목욕
    가마솥 목욕
  • [<그림 8>] 가마솥 처벌
    가마솥 처벌
  • [<그림 9>] 순덕의 나체
    순덕의 나체
  • [<그림 10>] 오름 - 낮
    오름 - 낮
  • [<그림 11>] 오름 - 밤
    오름 - 밤
  • [<그림 12>] 물을 나르는 정길
    물을 나르는 정길
  • [<그림 13>] 정면 응시하는 정길
    정면 응시하는 정길
  • [<그림 14>] 학살 현장의 정길
    학살 현장의 정길
  • [<그림 15>] 바람에 떠는 나무
    바람에 떠는 나무
  • [<그림 16>] 나무와 까마귀
    나무와 까마귀
  • [<그림 17>] 낮은 지평선과 안개
    낮은 지평선과 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