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ing over Mongolian modernity and traditionality.

몽골영화의 근대성과 전통성 가로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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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A Mongolian movie is not familiar with us. Historically, Koreans have had a bad memory about Mongolia. Therefore, it is natural to show a negative attitude about a Mongolian movie. However, the actual reason why Koreans are not familiar with a Mongolian movie is because we didn’t watch it quite often. When we think about a Mongolian movie, only ‘Genghis Khan’ movies generally come up to our mind. A Mongolian movie has managed to survive even though experiencing various historical accidents. Currently, cost of film production is threatening Mongolian movie industry the most. Recently, subject or genre of a movie got to be free, it is short of support to back it up. An issue of a Mongolian movie indicates an issue regarding Mongolia. Currently, Mongolia is threatened by new culture introduced from outsides. Mongolian traditional culture disappears gradually, and foreign culture whose nationality is indistinct, is spreading wide. Culture and artist are worried about Mongolian tradition disappearing. They are concerned about new culture and traditional culture. The director of a movie, ‘Byambasuren Davaa’, is standing in the center of these cultural troubles. She grew up in Mongolia and left for Germany to study abroad. In Germany, she had experienced the cultural trouble of western culture and Mongolian traditional culture with every fiber of her body. She suggested her own trouble and a plain alternative in the movie. I will analyze her movies that consider troubles between Mongolian modernity and traditionality. I can suggest an alternative through these tries to innumerable countries that are concerned about mixture of different cultures. This study means a lot because Korea is also finding a way to resolve cultural troubles with various cultures mixed in Korea. Hybridity which South America that had suffered from cultural mixture, suggested as an alternative can be applied in Mongolian culture. Therefore, this study intends to look closely into movies that are approached with the hybridity by the director of a movie, ‘Byambasuren Davaa’.


  • KEYWORD

    Mongolic Film , Mongolian Culture , Byambasuren Davaa , Cultual hybridization , Cultual creolization , Cultual disparateness , Movie Culture

  • 1. 몽골영화의 흐름

    영화 관련 기기들을 자생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했던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영화는 상업적인 목적을 띠고 처음 유입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0년 즈음, 몽골에 영화가 유입된 것도 중국의 한 상인이 무성영화를 가지고 들어와 지금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의 번화한 장소에서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890년대 말,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동남아시아에 영화시장을 확장시키기 위해 아시아지역을 방문한다.1) 이들 형제가 중국에 들러 여러 도시를 촬영하고 돌아간 후, 1896년 뤼미에르영화사의 직원들이 본격적으로 상하이에 입항한다. 같은 해 8월 11일, 상하이 주민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면서 프랑스 영화는 상업적인 교두보를 확보한다. 이후 미국의 상업적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의 영화시장은 과열되기 시작한다. 몽골의 영화유입은 중국의 영화 유입이라는 큰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지류인 셈이다.

    1688년부터 청나라에 복속되었던 몽골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꾀한다. 청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서구 열강의 힘이 확장되면서 몽골 역시 서구 제국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다. 청나라와의 무역관계가 느슨해지면서 러시아와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861년과 1900년 사이에 두 나라의 교역은 80배로 증가2)하였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맞선 일본제국은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 후 러시아와 일제는 1907년 7월 30일의 제1차 밀약을 통해 외몽골은 러시아가 그리고 내몽골과 조선은 일본이 각각 특수이익을 갖기로 했다. 몽골과 조선은 러시아와 일제의 이익을 위해 교환3)되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 신해혁명(1911년)이 일어나는 것을 계기로 몽골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현재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독립 시기인 1913년에 ‘남난수렌(Shirindambyn Namnansuren)’왕자가 러시아의 영화 몇 편을 러시아로부터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1896년 5월, 뤼미에르영화사가 페테르부르크에 영화관을 개설하고, 1908년에는 러시아 스스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작된 러시아 영화가 또 다른 지류를 타고 몽골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남난수렌’은 1911년 ‘보그드 칸’에 의해 몽골 독립 국가를 세웠을 때, 초대 총리를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해혁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중화민국은 몽골이 독립을 선언한 외몽골 지역이 원래 중국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침공해 들어왔고 결국 몽골은 독립을 취소하게 된다. 1915년에 체결된 몽골, 중국, 러시아 사이의 캬흐타 조약으로 인해 몽골은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그 후 줄기차게 중국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엿보던 몽골은 러시아 혁명(1917년)의 성공에 힘을 얻어 중국군을 소련 국경 밖으로 밀어내려 투쟁한다. 1921년 7월 11일, 드디어 몽골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내 자치구인 내몽골과 분리되어 독립된 현재 몽골공화국의 시작이다.

    이러한 주변국가와의 역학관계 속에서 출범한 몽골의 사회주의 국가 정부는 소비에트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몽골정부는 영화를 사회주의의 대중교육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 몽골의 사회주의 정부는 국영 스튜디오인 ‘몽골 키노(Mongol Kino)’를 설립한다. 몽골 키노는 소련의 기술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리얼리즘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 몽골 키노에서 제작된 최초의 작품은 다큐멘터리 <노동절 74주년 기념>(47th anniversary of the 1st May)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적으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최초의 몽골영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몽골 사람들이 자체적인 능력만으로 제작한 첫 작품은 1938년에 제작된 <몽골 소년>(Mongolian boy)으로 규정하고 있다.

    1)Stefan Kramer, 황진자 역, 『중국영화사』, 이산, 2000, 24쪽.  2)蒙古人民共和國科學委員會 編, 『蒙古人民共和國通史』, 科學出版社, 1959, 200쪽.  3)蒙古人民共和國科學委員會 編, 같은 책, 201쪽.

    2. 몽골영화의 현재

    소련의 영향 하에 있던 몽골공화국은 1961년 유엔에 가입하게 되고, 중국의 영향 하에 놓인 내몽골이 중국의 자치국이 되면서 몽골의 분열은 고착화된다. 외몽골과 내몽골은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하면서 문화적으로 점차 격리되기 시작한다. 1990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해 문호를 개방한 몽골에 외래문화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몽골의 영화를 주도했던 ‘몽골 키노’가 펼쳐왔던 국가 지원의 영화제작은 사라지게 되었다. 사회주의 때와는 달리 자기 자본으로 영화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수의 몽골의 감독들이 영화제작을 포기4)하기에 이른다.

    몽골 영화자본의 붕괴는 인프라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것은 몽골영화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필름을 구하지 못하거나 영화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인근 국가의 도움을 청해야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몽골 영화사업의 붕괴가 몽골영화의 정체성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능한 영화인들이 몽골을 떠나거나 생계를 위해 잡역에 뛰어들어야 했다. 지나치게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몽골의 영화는 정체성을 상실5)하기에 이른다. 몽골영화가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속에서 등장한 감독이 ‘비암바 수렌 다바아(Byambasuren Davaa)’이다.

    ‘비암바수렌 다바아(Byambasuren Davaa)’가 감독한 영화 <낙타의 눈물 (Die Geschichte vom weinenden Kamel)>(2003),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 (Die Höhle des gelben Hundes)>(2005),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Die zwei Pferde des Dschingis Khan)>(2009)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몽골의 영화라는 점에서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국제 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 포함)에 출품되면서 다른 몽골영화보다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경도된 의식으로 몽골을 바라보거나 절묘한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된 이들은 그의 영화를 몽골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영화를 통해 ‘비암바수렌 다바아’가 재현한 몽골에 대해 “거세된 몽골인의 등장, 이국적인 몽골초원 묘사 그리고 영화 등장하는 개나 낙타 역시 이국적”6)이라고 평가한 것은 몽골문화와 영화에 대한 인식부족과 편견으로부터 파생된 결과이다. 이러한 편견은 몽골의 현재적 고민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영화 내면에 자리하고 있고 몽골사람들의 심층과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몽골영화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비암바수렌 다바아’의 작품이 의심받는 것은 우선 그가 독일에서 영화교육을 받았다는데 있다. 몽골의 공영TV에서 일하던 그는 몽골영화 아카데미를 거쳐 뮌헨의 영화학교에 들어간다. 독일은 공교육비가 무료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학을 꿈꿀 수 없었던 그에게 뮌헨의 영화학교는 영화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몽골의 대지를 떠나 독일의 새로운 풍광을 보면서 그는 몽골문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살다보니 몽고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땅이 점점 중요하게 여겨졌고, 몽고에서 살 때는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을 알아가게 되었다.”7)고 고백한다. ‘문화’는 ‘비암바수렌 다바아’ 감독의 삶을 가로지는 화두이다. 몽골과 독일이라는 두 문화의 교차 경험은 그 자신만의 영화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이종문화에 대한 전통문화의 갈등은 유사 이래 반복되어온 사건이다. 게토(Ghetto)화를 추구하는 문화집단을 제외하고 모든 집단은 문화의 유입과 그로 인한 혼재를 감내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혼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비암바수렌 다바아’는 영화를 통해 답을 모색해나가려 한다.

    4)몽골 키노를 통해 매년 1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나, 민주주의 혁명이후 10편 이하로 줄어든다.  5)이 때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합작영화이거나 외국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중국에서 제작된 <징기스칸 (Genghis Khan)>(1998), 일본 자본으로 만든 <푸른 늑대 (蒼き狼: The Blue Wolf: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Sea)>(2007), 러시아 연방과 독일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몽골 (Mongol: The Rise Of Genghis Khan)>(2007) 등은 몽골에서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장면 속에 몽골을 왜곡한 부분도 많다.  6)유재현, 『영화로 보는 아시아의 역사-시네마 온더로드』, 그린비, 2011, 312-313쪽.  7)김도훈,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의 비암바수렌 다바아 감독」, 『시네21』, 2005. 10. 11.

    3. 잡종화(hybridization): 전통문화의 위기 표출

    대부분의 몽골영화나 몽골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게르’가 있는 몽골의 푸른 대지를 화면의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방식으로 몽골의 대지에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의 전형적인 장면을 보면서 직유 표현인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수한 풍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몽골인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은 이들은 몽골의 대지를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타국인의 시선에서 제작된 몽골에 관한 영화들은 대부분 몽골의 문화를 낯선 구경거리로 그려내곤 한다.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몽골영화를 장르상 다큐멘터리로 분류하는 태도8)는 몽골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문제가 현재도 진행 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몽골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몽골의 대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는 직면한 현실이다. 몽골인들에의해 재현된 몽골의 대지는 갈등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생명을 공급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거대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몽골의 대지는 아이를 잉태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9) 동시에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짐승들에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면서 때로는 혹독한 바람과 추위로 삶을 옥죄는 이중적 공간이다. 이러한 몽골 문화의 이중성을 세밀하게 재현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 ‘비암바수렌 다바아’이다. 그는 잡종화된 몽골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암바수렌 다바아’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몽골의 전설과 맞닿아있다. 영화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는 개와 인간의 친밀성을 내포하고 있는 몽골의 전설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영화에 사용된 개에 관한 전설은 남녀의 만남에 개가 지나치게 간섭하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어떤 현명한 어른이 개의 개입을 제거하면서 남녀의 만남이 원만하게 이루어졌고 아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비암바수렌 다바아’ 영화는 등장하는 개나 인간을 통해서 영화의 내용이나 흐름 속에 몽골의 전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단지 몽골의 전설이 노인이라는 매개체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화는 어느 날 돌이 무너져 내린 동굴에서 놀던 아이는 누렁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렁개는 가족과 잘 어울려 지내지만 문제를 일으킨다. 노인의 입을 통해 인간이 개와 너무 친밀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암시를 받는다. 또 다른 불행을 몰고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는 누렁개를 묶어두고 게르를 이동시킨다. 이 때 막내 아이10)가 이동 대열에서 이탈되어 위험에 빠진다. 누렁개는 아이를 지켜내었고, 결국 아버지는 누렁개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이동한다.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에 전조된 분위기는 두려움이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사냥꾼들의 대화 장면에서 개와 늑대의 피가 서로 섞이는 것에 대한 걱정이 서사적 배경으로 깔린다. 사냥꾼들은 들판에 돌아다니는 개는 잡종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런 개들이 늑대를 끌어들여 목축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나눈다. 사냥꾼들의 걱정어린 이야기 속에는 몽골의 개에 관한 전설과 교차되면서 현재 몽골문화가 잡종화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영화 <낙타의 눈물>은 낙타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전설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12별자리에 관한 전설과 몽골의 전통 카드놀이 장면도 등장하지만, 주요 모티브는 낙타에 관한 몽골전설이다. 몽골전설에 낙타 이야기11)가 특히 많은 것은 낙타에 대한 몽골인의 관심과 중요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특히 <낙타의 눈물>에는 ‘낙타’와 ‘막내’ 그리고 ‘흰색’의 몽골의 전통적인 세 가지 상징이 정교하게 교차되어 있다.

    큰 재산 중의 하나인 낙타에게 중요한 사건은 새끼를 낳는 일이다. 영화 속의 모든 낙타들은 문제없이 새끼를 낳았는데 유독 한 낙타만이 난산을 한다. 여러 낙타들 중에서 그 해에 마지막으로 출산할 낙타인데 어려움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이 도와주어 힘겹게 흰 낙타를 낳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어미가 새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미 낙타가 젖도 물리지 않아 새끼 낙타는 점점 허약해간다. 급기야 가족회의가 열리고 후스(Hoos)12)라는 몽골 전통방식의 요법이 시도된다. 몽골의 음악이 울리고 드디어 어미 낙타의 마음이 열리며 새끼를 받아들인다.

    <낙타의 눈물>의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영화적 방해물은 악사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다. 예전에는 가족 중에 한두 명쯤 몽골의 전통 악기인 ‘마두금’을 연주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는 마두금 연주자가 극히 드물다. 가족들은 마두금 연주자를 수소문하여 도시학교에 근무하는 음악교사가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방문한 학교는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화되어 있어 더 이상 전통적인 것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장면 사이로 엿보이는 교실에선 서양예술 과목이 진행 중이다. 음악교사는 학생들이 전통악기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힘없이 말한다.

    학교는 근대성의 산물이다. 그 안에서 전통악기를 가르쳐 보려는 음악교사의 노력은 눈물겹다. 광활한 푸른 대지가 아니라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교실에서 서양음악이론의 틀에 맞추어 몽골의 전통음악을 배우는 장면은 특히 대립적 요소가 불안정한 결합으로 인해 발현되는 위기감으로 가득하다.

    한편 영화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은 마두금에 대한 전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몽골인은 두 마리의 말을 몰고 다닌다. 한 마리를 타고 가다 지치면 다른 말로 옮겨 탄다. 아주 먼 길을 떠날 때는 네 마리를 몰고 가기도 한다. 두 마리의 말을 데리고 다니지만 절대로 어느 한 마리를 편애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두 마리 이상의 말을 몰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몽골말의 군집성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방목된 탓에 군집을 이루며 지냈던 몽골말은 환경적응력이 뛰어나다. 반면에 서양말은 개별성을 돋보이도록 훈련받았다. 따라서 서양말은 사람의 돌봄이 없으면 안 된다.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의 서사는 부서진 마두금과 그 위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몽골 전통문자로부터 시작된다. 몽골의 전통가수인 ‘우르나’는 할머니가 물려준 마두금의 머리 부분에 전통문자로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이라고 쓰인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다. 정확한 내용과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우르나는 악기를 복원해줄 명인을 어렵사리 만난다. 그러나 마두금 조각에 쓰여 있는 글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내몽골에는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내몽골로 향한다. 힘겹게 찾아다니다가 노래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완창을 듣게 된다.

    내몽골과 외몽골에 대한 교차 지점에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이 있다. 문화혁명으로 부서진 마두금과 그 위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전통문자13)는 현재 몽골문화와 정신에 대한 은유이다. 몽골의 전통성은 내, 외몽골에서 모두 위협을 받고 있다. 외몽골은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내몽골은 현대중국문자(간체자)를 사용하고 있다. 아직 언어에 있어 상호소통이 가능하지만, 서로 사용하는 문자가 달라 문화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격차가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이종문화로 몽골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비암바수렌 다바아’은 영화를 통해 몽골의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8)비암바수렌 다바아 감독의 영화 역시 모두 다큐멘터리로 분류되어 있다.  9)영화 <우르가(Urga, Close To Eden)>(1991)를 보면, 말을 포획할 때 쓰는 도구인 우르가(Urga)를 대지에 꽂아 놓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정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사인이다.  10)몽골에서는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권한과 재산을 전수받는 말자 상속제를 취하고 있다. 막내아들을 ‘화로를 지키는 아들’이라 부른다.  11)낙타는 해(年)를 대표하는 12동물의 모든 특징을 가진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하얀 낙타에 대한 특별한 생각도 전설에 반영되어 있다. 데ㆍ체렌소드놈 편, 이안나 역, 『몽골의 설화』, 문학과 지성사, 2007, 70-71쪽, 153-157쪽 참조.  12)먼저 전통악기인 ‘마두금’을 ‘하닥’이라는 푸른 천에 묶어 낙타 봉에 걸어둔다. 그러면 잠시 후 마두금에서 붕붕 소리가 난다. 그러면 마두금을 내려서 악사가 연주하고 곡조에 맞추어 노래하는 하는 사람이 낙타를 쓰다듬으면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동물과 사람이 모두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동물과 동물, 사람들 간의 관계성이 깨졌을 때,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후스요법을 사용한다.  13)외몽골의 경우, 초등학교에서 전통문자를 배우지만 상급학교에서는 러시아어나 영어에 치중한다. 내몽골의 경우, 전통문자를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지만 중국이 소수민족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내몽골 역시 중국어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4. 이질성(disparateness)14): 근대성 침범에 대한 경계

    몽골의 생활 모습을 그려내는 여러 영화들이 있다. 이들 영화중에는 몽골의 문화를 객관적 시각에서 기록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내밀하게 관찰되어 심층적으로 묘사되는 영화들도 있다. 이들 작품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작가와 작품 간의 거리이다. 영화를 만든 작가(또는 작가군)가 현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작품에 반영된다. 작품과 작가의 거리가 멀면 객관성이 드러나 독자에게 객관화를 통한 주체 발견을 도울 수 있다. 반면에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문화와 삶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사실성을 현실감을 느낄 수 있지만, 역으로 작가의 의도에 관객이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

    현대 몽골의 양태를 영상적으로 재현해내기란 쉽지 않다. 편리함과 낯섦으로 중무장한 근대성은 어느 틈에 전통성을 밀어내고 문화 곳곳에 자기 자리를 잡는다. 이종문화는 기존의 문화를 밀어내고 심지어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종문화보다 전통문화를 낯설게 여기는 역전현상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몽골의 현상만을 필름에 담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전형적인 몽골다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몽골의 문화와 유입된 이종문화를 분별해 내야 한다. 잡종화된 문화를 선별해야 하고 그 안에서 전통성을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카메라의 냉정한 시각이 요구된다.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에서 남편은 가볍고 편리해 보이는 플라스틱 바가지를 아내에게 선물로 주지만, 평상시 물을 끓여놓는 몽골인의 풍습대로 게르 한가운데에 있는 난로에 올려져있는 큰 물그릇 안에 두었다가 녹아서 버리게 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남편은 다시 금속성 국자를 만들어 아내에게 건넨다. 몽골인은 늘 불의 발화상태를 유지시키면서 불과 함께 생활한다. 몽골인은 게르의 한가운데 있는 난로를 조상과 연결되는 통로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난로의 불은 항상 꺼지지 않아야 한다. 이런 문화에서 플라스틱 제품은 어울리지 않는다. 불이 물건에 붙을 수 있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도구는 새로운 문화와 어울릴 때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새로운 도구를 예전 문화와 결합시킬 수는 없다. 결국 둘 다 망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화된 도구는 현대적 환경과 문화 아래서 제 역할과 기능을 감당해낼 수 있다. 기존 문화에 적용되지 못하는 문화는 자연스레 이종문화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는 몇 차례에 걸쳐 게르 내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 공간이 아이들에 의해 침범 당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사이에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에 위치한 물건들을 함부로 만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신성한 공간에 마음대로 둔다. 아이들의 행동을 뒤늦게 목격한 부모들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전통문화가 침범당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영화가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에는 근대성의 상징물들과 전통성의 상징물들이 어지럽게 섞여 재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종문화의 침범은 오랫동안 지켜왔던 가치들을 어지럽게 만들며 결국 정신적 혼란을 일으키는 기재로 작용된다.

    한편 이종문화는 아이스크림과 컴퓨터 게임 그리고 TV를 보고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러움의 대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낙타의 눈물>에서 할아버지는 도시로 나가 마두금 연주자를 찾아보려는 아들과 그를 따라나서는 손자에게 라디오에 넣을 건전지를 사오라고 주문한다. 아이들 눈에 도시는 온통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말을 대신하여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질주한다. 새롭게 형성된 도시의 공터에선 아이들이 몰려서 놀고 있다. 아이는 특히 TV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다. 할아버지는 TV를 유리그림일 뿐이라고 하며 TV설치를 거부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게르 위로 태양 전지판이 올라가고 위성TV 수신안테나가 세워진다.

    늘어선 송전탑 아래로 걸어가는 하이앵글장면과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지나다니고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몰려가는 삽입장면 그리고 서양 무용과 서양 악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클로즈업 장면은 늘 변함없고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몽골의 푸른 대지의 미장센과 극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에 시계와 거울, 망원경과 안경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단순히 유용한 도구로서의 의미만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물건과 새로운 문명이기들은 조용히 병치될 뿐이다. 영화는 결국 푸른 초원과 흰 게르 그리고 과도하게 큰 위성 안테나와 화면이 또렷하지 않는 TV가 부조화를 이루며 억지로 동거를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영화는 마지막을 맺는다. 이종문화에 대한 거리두기와 어쩔 수 없는 수용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다.

    오버랩을 주된 기법으로 사용한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은 강력한 이미지로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황폐화되어 가는 몽골의 자연을 강렬한 영상과 겹쳐 보여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진창에 빠진 자동차는 종결부의 거의 직전까지 내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러 사람이 온몸에 흙으로 뒤범벅되며 자동차를 구해내려 애쓰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영화는 진창에 빠진 자동차와 꺼내려 애쓰는 사람들의 장면을 주인공의 진행 장면과 교차시켜 보여주어 주인공의 몽골 미래에 대한 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를 연결시키기 위해 문자를 쳐서 공중으로 던지는 장면이나 이상한 신발을 신고 직접 전봇대를 올라가 전화를 거는 모습은 디지털로 상징되는 현대문화에 접근하기 위해 애쓰는 몽골인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의 주인공 우르나는 전통음악을 지키려 애쓴다. 전통의상을 입고 다니는 그녀에게 시장에서 만난 어떤 남자는 “정말 몽골사람이 맞아요? 요즘엔 관광객만 입지, 몽골 사람도 잘 안 입는데”라는 말을 던진다. 몽골을 중국의 한 지역 부족쯤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몽골의 문화는 중국의 일개문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받기도 한다. 서양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이렇듯 전통적 문화나 의식이 오히려 낯선 문화로 취급되는 문화의 역전현상은 영화의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중국문화혁명은 몽골을 정신적으로 억압했다. 전통노래와 전통악기의 연주를 금지시켰고, 전통문화에 종사했던 이들은 새로운 문화 확산으로 투입되어야 했다. 푸른 대지 위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불어 닥친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박해는 긴 시간 동안 면면이 이어져온 풍습과 역사를 단호하게 단절시켰다. 역사의 단절은 문화의 흐름과 위치를 뒤바꾸어 놓았다. 이종문화가 자연스레 문화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전통문화는 도리어 이질적 문화로 치부되기 시작한다.

    영화 속 ‘우르나’는 차를 타고 걷고 말을 타면서 이곳저곳에서 노래 가사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거나 너무도 노쇠하여 기억해 내기가 어렵다. 왜곡된 문화현상을 제대로 바로잡아 줄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영화는 이종문화의 정체를 밝혀주면서 현재 전통문화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종문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입된 문화를 자신의 문화로 인식하고 전통문화를 낯선 문화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분명한 경계를 제시하고 있다.

    14)이질성은 배타성(exclusiveness)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배타성은 타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를 나타내지만 이질성은 서로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5. 문화의 혼종화(creolization) 추구

    ‘비암바수렌 다바아’의 영화 곳곳에서 새로운 세대의 변화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게르 위에 얹혀있는 태양전지판을 통해 휴대전화의 전기를 공급하거나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어느 덧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더 이상 몽골문화의 ‘순수함’과 ‘진정한 것’15)을 지키기 위해 외부 자극을 철저히 거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착화시키려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몽골인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전통문화의 개념을 살펴본다면, 전통적인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은 집단적인 우울증16)을 유발시키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

    문화에 있어 잡종화와 이질적 태도는 이종문화에 대해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단지 두려움과 경계심 또는 낯선 느낌만이 존재할 뿐이다. 혼종화는 이종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다. 이종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전통적 문화와 융합을 꾀하려 한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양쪽의 특성을 살펴 전통성을 상실하지 않는 범주 내로 좋은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낙타의 눈물>에는 전통성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영화의 곳곳에서 전통성과 근대성이 충돌하고 있다. 다음 세대의 상징인 아이들은 더 이상 전통놀이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대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놀이를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제재하거나 전통놀이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전통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에 몰두한다. TV에 몰두하는 아이들을 향해 할아버지는 적당히 보라는 말을 젊잖게 건넬 뿐이다.

    젖을 물리지 않는 어미 낙타를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어떤 시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가족들은 전통방식에 의해 해결하려 한다. 전통적 악기 마두금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영화는 근대적 방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통적 방식이다. 그러나 영화는 무조건 전통의 방식만이 정답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전통을 이어갈 새 시대의 주체인 막내를 살리는 방법은 젖먹이기를 거부하는 기성세대인 어미와의 화해이다. 여성은 어미 낙타를 붙잡고 노래를 통해 어미의 모성을 자극한다. 감독은 대지처럼 모질지만 예민한 감성을 지닌 몽골인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세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가는 것이 이 시대의 바른 대안임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여전히 이종문화가 게르 안에 혼재되어 있지만, 온 가족이 마두금에 맞춰 노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해는 붉은 기운을 뿜으며 대지와 그 위에 서 있는 게르를 비추면서 넘고 있다. 몽골문화의 혼종성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두 아이가 TV가 나오도록 위성안테나를 조정하는 장면이 추가된다. 아이들의 얼굴은 밝으며 장면 뒤에 자리하고 있는 어른들은 묵시적으로 아이들의 태도를 용인하고 있다.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의 후반부에는 여름을 지내고 게르를 옮기는 작업이 펼쳐진다. 아이의 잃을 뻔 했지만 누렁개의 도움으로 아이가 무사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은 개를 마차에 함께 태우고 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이 동물들을 몰고 가는데 불쑥 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가 나타나 선거에 참여하기위해 투표를 꼭 하라는 방송을 던진다. 영화가 내내 보여주었던 대지의 이미지와 너무도 달라서 생소할 뿐만 아니라, 이질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가족들은 자동자게 짙게 일으킨 먼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향해 간다.

    개를 태우고 함께 가는 장면은 몽골인의 문화적 대안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근대성을 거부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전통성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지향하지 않는다. 전통성이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근대성을 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늑대의 피가 섞여있는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근본을 확신할 수 없는 개를 가족으로 품는 넉넉한 모습을 통해 몽골인의 대지를 닮은 품성을 영화는 그리려 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서 ‘우르나’가 드디어 알아낸 핵심적인 노랫말은 ‘산 위에 눈이 녹을 무렵 두 형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드디어 찾았네.’이다. 노랫말이 가리키고 있는 두 형제는 내, 외로 갈라진 현재의 몽골을 상징한다. 영화는 몽골 통일에 대한 소망을 그리고 있다. 그 사이 진창에 빠진 자동차는 소에 의해 구출된다. 둘로 갈라져 나아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린 근대성이 결국 전통성의 포용으로 구출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르나가 노랫말을 찾는 일로 힘겨워 좌절할 때, 그녀를 위로하는 것은 대지이다. 대지를 통해 위로받을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난다. 할머니는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 관한 노래를 불러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마두금과 서양악기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주를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주인공 여성은 이들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한다. 우르나가 한 할머니에게 배운 노래를 이해하고 부르는 순간, 장면을 바뀌어 흐르는 구름과 함께 펼쳐진 땅 위의 푸른 대지 위에서 우르나의 노래가 울려퍼진다. 한참동안 우르나의 노래가 진행되고 나자 이어서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두 사람의 노래는 몽골의 대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비암바수렌 다바아’ 감독의 영화는 이종문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거나 문화 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에 문화 간의 충돌을 묵과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모든 문화는 정체성의 유지라는 점에서 적대적이거나 경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의 경계적 특성은 문화 사이의 충돌, 병치 등의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계적 특성은 동시에 문화 간의 갈등에 대한 적합한 해결을 요구한다. 그러나 감독은 전통문화와 이종문화의 극한투쟁 또는 날선 대립적 구도를 버리고 문화를 재조직화 하는 작업을 한다. 영상을 통해 문제의 해결점은 동질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불평등을 억압하지 않는 재영토화 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낙타의 눈물>이 문화적 갈등의 산물로서 혼종성을 제시하고 있다면,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에서는 갈등 과정 속에서 나타난 혼종성을 표현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은 혼종성의 재발견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15)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 이성훈 역, 『혼종문화-근대성 넘나들기 전략』, 그린비, 2011, 18쪽.  16)특히 칸클리니는 ‘민속’을 ‘전통의 우울증적 발명’으로 정의하고 있다.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 앞의 책, 267-275쪽 참조.

    6. 몽골명화의 정체성 모색

    앞서 본문에서 거론한 내용을 전통문화와 이종문화 간의 교차를 풀어가는 방식에 적용시키면 몇 가지 방식으로 분류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대립적 방식(against)이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심각한 배타성이 생겨난다. 문화의 충돌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갈등하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이다. 전통문화는 이종문화를 철저하게 배격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든다.

    둘째는 전통문화가 이종문화의 위(above)에 서는 경우이다. 팽팽한 균형을 깨뜨리고 대신 전통문화가 이종문화를 지배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반드시 전통문화가 우위를 점령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때로는 이종문화가 전통문화의 우위에 서서 전통문화를 축소시키기도 한다.

    셋째는 전통과 이종의 두 문화가 교차하지 않고 나란히 진행(and)하는 경우이다.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각자 자신의 문화 확장에 주력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문화와 이종문화의 간극은 넓어지며 서로의 영역에서만 문화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넷째는 전통문화가 이종문화를 완전하게 점령하거나 철저하게 소유(of)하는 경우이다. 전통문화가 완벽하게 이종문화를 흡수하여 상대를 소멸시키고 자신은 인식의 범주를 최대한 확장시키는 경우이다.

    다섯째는 전통문화가 이종문화의 핵심(in)으로 작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전통문화는 이종문화를 소멸시키거나 흔적도 없이 혼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문화가 새로운 이종문화의 핵심으로 작용하여 전통문화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이종문화의 변이와 적응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방식이다.

    전승된 문화를 변형시키지 않고 원형만을 고수한다고 해서 문화정체성이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종문화의 근접을 철저하게 막아낸다고 정체성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의 정체성 수립에 있어 중요한 핵심은 문화적 변화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아가 누가 문화의 핵으로 작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화논의의 핵심이다. 이종문화가 문화의 주도권을 쥐도록 내버려두거나 방치할 경우, 이종문화는 어느 틈에 전통문화를 쫓아내고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근대성은 전통적 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다. 또한 역으로 정형화된 전통문화로 근대성을 한껏 담지한 문화를 대체시킬 수 없다. 새로운 문화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는 다문화의 환경 속에 있다. 우리는 날마다 문화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방관하는 자세는 배타적 자세와 마찬가지로 변화를 수용하거나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문화충돌을 창발적 에너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에게 몽골영화는 익숙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몽골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몽골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몽골영화가 익숙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는 자주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영화라고 하면 칭기즈칸에 관한 영화를 떠올릴 뿐이다.

    몽골의 영화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힘겹게 생명을 이어왔다. 현재 몽골영화의 가장 큰 위협은 제작비용이다. 최근 들어 영화의 주제나 장르는 자유로워졌지만 제작을 뒷받침할만한 지원이 부족한 상태이다. 몽골영화가 처한 문제는 곧 몽골문화에 대한 문제이다. 현재 몽골은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전통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국적이 불분명한 외국의 문화가 넓게 퍼지고 있다. 문화와 예술인들은 몽골의 전통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와 전통문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몽골의 근대성과 전통성 사이에 서 있는 ‘비암바수렌 다바아’감독의 작품을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시도는 통해 문화의 뒤섞임 때문에 고민하는 무수한 나라들에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점차 다문화로 넘어가고 있으면서 갈등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있기에 본 연구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일찍이 문화의 뒤섞임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남아메리카가 대안으로 제시한 ‘혼종성’에 관한 논의가 몽골문화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혼종성으로 접근해가고 있는 ‘비암바수렌 다바아’감독의 작품을 문화적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비암바수렌 다바아’의 영화에서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몽골의 초원은 초국적이며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비춰진다. 그녀의 영화에서 초원은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영화는 이질적 문화의 대립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서사하고 재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어떻게 생성할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의 영화에선 전통성과 근대성의 교차하고 있고, 외몽골과 내몽골의 문화가 교차하고 있다. 최근 들어 혼종성에 관한 논의는 이질적 문화의 충돌과 정체성의 갈등에 대한 분석적인 방법론으로 부각되고 있다. ‘비암바수렌 다바아’의 영화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기의 문화적 표현 양식이 공존하도록 용인하는 혼종성을 제시하고 있다.

  • 1. Kramer Stefan, 황 진자 2000
  • 2. 칸클리니 네스토르 가르시아, 이 성훈 2011
  • 3. 이 안나, 데 체렌소드놈 2007
  • 4. 1959
  • 5. 유 재현 2011
  • 6. 김 도훈 2005 [『시네21』]
  • [그림 1] <낙타의 눈물>에서 도시 학교를 방문한 아이가 교실을 들여다보는 장면
    <낙타의 눈물>에서 도시 학교를 방문한 아이가 교실을 들여다보는 장면
  • [그림 2]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에서 아이들이 신성한 물건을 가지고 노는 장면
    <동굴에서 나온 누렁개>에서 아이들이 신성한 물건을 가지고 노는 장면
  • [그림 3]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서 우르가가 전통악기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장면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서 우르가가 전통악기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장면
  • [그림 4]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서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 장면
    <칭기즈칸의 두 마리 말>에서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