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Narrator : Chantal Akerman’ Time-Space and Cinematic Aesthetics

또 다른 화자: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의 시공간과 영화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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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Generic structure of Chantal Akerman’s film appears to be even innovative due to its autistic tendency. Flow of time that is exposed raw in a limited space and the plot without conventional restraint show her sincere contemplation for fundamental aesthetics. It provides audiences with the vacancy which creates a deep passage for their unconsciousness and anti-realism. In many Akerman’s films space is superficially closed, but her unique technique of revealing something hidden by showing everyday life is mesmerizing. In other word, she forms another ‘intimate distance’ by keeping distance (with consciousness of audiences). This report examines the time and space of <La Captive>(2000), which is based on the 5th volume of Marcel Proust’s La recherche du temps perdu. While characters’ behaviour captured in a camera is a means to study the equally given space, and cinematic sound refined with continuous time are building semantic network of non-linguistic narrator as another narrator. The first impression of <La Captive> is that it has a minimal and objective view towards the complicated Proust novel, allowing genuine reconstitution. However, focusing on the restricted space and time, it is destroyed by instantly created non-linguistic narrator including presence and absence of characters. The film lets its audience encounter the fundamental contemplation when they face with the ‘empty time-space’. Her cinematic aesthetics is still on the line of ‘experiment’ that has no boundary for existence of time and space. ‘Another narrator’ is metaphorically time-space itself in Akerman’s film.


  • KEYWORD

    Chantal Akerman , , , Marcel Proust , 『La recherche du temps perdu (In Search of Lost Time)』 , Cinematic Time-space , Empty time-space , Cinematic Narrator , Maurice Blanchot , Alain Robbe-Grillet

  • 1. 들어가며

    벨기에 출신 여성감독 샹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 : 1950∼)2)의 주요 작품을 포괄하는 구조는 일견 그 특유의 자폐적 성향 때문에 오히려 전복적으로 보인다. 제한된 공간에서 생략 없이 드러나는 ‘날것’같은 시간의 표출, 관습적 규약에 얽매이지 않은 플롯을 바탕으로 영화 매체의 근원적 미학에 대한 그녀만의 담담한 고찰은 문득 가시적 세계에 의외의 공동(空洞)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의 의식을 오히려 탈현실적인 몽환 상태로 환치시키거나 그들의 무의식을 표출시키는 보다 깊은 통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 아케르만의 영화적 공간은 표면적으로 닫혀 있다. 일상을 건조하게 직시하는 영화적 장치는 외화면(hors-champ)에 대한 환상을 유발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70년대에 만들어진 그녀의 영화를 살펴보자. 먼저 초기작 중 하나인 <나, 너, 그, 그녀>(Je, Tu, Il, Elle)(1974)에서 가구를 치우고 옷을 벗고 맨바닥에 누워 한 봉지의 설탕을 퍼먹으며 ‘너’에게 편지를 쓰는 젊은 여인 ‘나’의 칩거의 ‘공간’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춘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주부의 ‘되풀이되는’ 일견 건조하고 단정한 일상과 그 반전을 집요하고 건조하게 포착했던 문제작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1976)에 흐르는 3일의 ‘시간’을 들 수 있다.(<그림 1>)또한 감독 자신의 캐릭터에서 페르소나를 설정한 듯 보이는, 한 여성감독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안나의 랑데부>(Les Rendez-vousd’Anna)(1978)도 생각해 보자. 목적은 있으나 공허해 보이는 안나의 이동 중에 주인공이 홀로 마주하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이 중첩된 ‘시공간’은 이미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공통된 연결 고리로 묶여 있다.

    아케르만의 비디오 작품과 단편 영화를 소개하고 작가와의 대담 등과 함께 이루어진 미국 MIT 시각예술센터의 강연에서 줄리아나 브루노(Giuliana Bruno)는 ‘그녀의 영화에서 시공간의 움직임이란 물론 일상을 그대로 펼쳐 보이는 지속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 언급했다. 심리적이고 내밀한 일상을 카메라 앞에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으로 ‘감춰진 무엇인가’를 다시 보여주는 그녀만의 방식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말하자면 거리를 둠으로써 (관객의 의식을 향한) 또다른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를 형성하는 것이다’3)

    아케르만은 이후 다큐멘터리와 설치미술과 아울러 (그리고 감독 자신의 언급하기를) 스스로 틀을 깨고 싶어 선택한 일군의 장편영화로 다양한 이미지를 시도했고 그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감독 자신이 가장 즐기는 하나의 방식,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미니멀한 구조성을 유지하는 작품들에서 그녀만의 개성을 가장 잘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27, 전 7권 16부)의 제5권 「갇힌 여인」(La Prisonnière)을 재해석해서 만든 <갇힌 여인>(La captive)(2000)4)은 아케르만의 작품 중에 가장 상업적인 장편 영화 중 하나이면서 다양한 실험 이후 아케르만이 스스로 밝힌 대로 <잔느 딜망>의 구조에 가장 가깝게 돌아온 회귀적 성향의 작품이기도 하다.5)

    그렇다면 영화에서 비언어적 발화의 위치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서사이론가인 채트먼(Ceymour Chatman)은 1990년에 발표한 “영화적 화자”(The Cinematic Narrator) 라는 논문에서 영화적 화자가 소통의 장치에 있어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한 구조를 이룬다고 말한다.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와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dwell) 등이 진행시킨 영화 서사 기호학의 비교 교찰을 통해 그는 종합적으로 영화적 화자를 크게 청각적 경로(auditory channel)과 시각적 경로(visual channel)로 분류해내고 있고. 전자는 각각 외화면과 내화면의 경로에서 들어오는 효과음, 음성, 음악을 포함되고, 후자는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쓰이는 서사와 시공간적 배경, 배우들의 연기 등의 ‘이미지의 본질’ 외에 ‘이미지의 처리’로 포함되는 촬영기법과 편집기법에서 생성되는 여러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촬영기법에 포함된 것으로 조명, 색채, 카메라(촬영), 미장센이 있고 카메라를 통해 거리와 앵글, 움직임이 생성되고 이것은 모두 ‘영화적 화자’를 구성하게 된다.6) 필자는 채트먼의 주장이 배우의 연기 등으로 재현되는 서사의 주된 흐름 외에, 프레임이 안팎에서 생성되는 ‘비언어적 화자’를 통해 새로운 영화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를 정리한 명료한 발언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고에서는 원작 소설의 다양한 상징적 모티브들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하고 여과한 정제된 미장센들을 통해 비언어적 화자의 위치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끌어왔다고 판단한 아케르만의 <갇힌 여인>의 시공간 분석을 통해 고정된 시간의 와해, 혹은 주관적 시간으로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영화의 ‘또 다른 화자’에 대해 고찰하기로 한다. 아울러 (영화의 시공간을 대면하는) 관객의 의식 작용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아케르만의 영화적 서사법의 실험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를 ‘또 다른 화자’ 의 개념과 연결시켜 그 의미를 규정 가능함을 예증하면서 시공간 안에 관객의 의식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아케르만의 영화미학을 통찰해보고자 한다.

    1)모리스 블랑쇼,.박준상 옮김, 『기다림 망각』, 그린비. 2009, 133쪽 원전 : Maurice Blanchot, Lattente L’oubli, Garllimard,,Paris, 1962 현전/부재를 의미를 오가며 ‘침묵의 작가’로 내면의 사유를 촉발하게 하는 블랑쇼의 이 작품은 설정된 허구의 시공간에서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가 이야기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유기적인 서사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두 남녀는 대화를 통해 시간, 공간, 존재, 죽음과 같은 철학 개념들을 만지고 있지만 그 언어는 늘 언저리를 배회하고 의미의 그물을 스르르 빠져나간다. 필자는 아케르만의 영화적 시공간이 마치 이 글의 봄과 말함 사이의 간극(빈 공간)이 주는 심연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 있으며 그것이 본고의 제목에서 언급한 ‘또 다른 화자’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숙고는 본고 말미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국내에서 샹탈 애커만(아케르만, 아케르망) 이라는 이름으로 혼용하여 표기되나 현지 발음에 가까운 것을 채택하기로 한다.  3)Giuliana Bruno’ Lecture, Chantal Akerman: Moving through Time and Space(Video Clip), MIT List Visual Arts Center, May 1, 2008, 2010.10.2  4)스타니슬라 메하르(Stanislas Merhar), 실비 테스튀(Sylvie Testud) 주연, Arte France Cinema 외 제작, 35mm, 117min.  5)“어쩌면 이 작품은 가장 <잔느 딜망>에 가깝겠죠. 방식도 그렇고, 실내에서 대부분 이루어지는, 아무튼 이 방식이 제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겁니다.”, -영화 <갇힌 여인>DVD 코멘터리 필름 중 도미니크 파이니(Dominique Paini)와의 대담(26min.)에서 아케르만 감독이 발언한 내용이다. (앞으로 이 대담을 언급할 때는 ‘도미니크 파이니 대담’으로 약칭하고자 한다.)  6)Chatman Seymour. “From Coming to Terms (The Cinematic Narrator)”.(1990). In Film Theory and Criticism: Introductory Readings. 5th ed. Ed. Leo Braudy and Marshall Cohen. Oxford UP, NY, 1999. p.483.

    2. ‘갇힌 여인’의 ‘닫혀서 (열린) 시공간’

       1) <갇힌 여인>의 영화적 설정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며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시공간을 새로이 구축하는 프루스트의 기법은 비선형적 내러티브의 원형이 되기도 하고 그 방대한 서술의 그물망은 그만큼 이미지로 표출해내기 난해한 지점을 형성한다.7) 영화화된 아케르만의 <갇힌 여인>8)은 원작 소설에서는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화자(소설에서는 ‘마르셀’(Marcel) 이란 이름으로 단 한번 언급된)라는 청년이 그의 집에 동거를 하게 된 연인 알베르틴(Albertine)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태이나, 영화에서는 이들 남녀가 각각 이름을 달리해 문학도인 시몽(Simon)과 함께 사는 연인 아리안느(Ariane)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내용으로 각색된다.

    부유하지만 불안과 강박에 사로잡힌 청년 시몽은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도이자 작가 지망생이다. 화려한 아파트에서 할머니와 하녀인 프랑수아 그리고 그가 집착하는 연인 아리안느와 함께 살고 있다. 아리 안느는 여자 친구인 앙드레(André)와 가까이 지내며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데, 시몽은 아리안느가 앙드레와 동성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모든 사회적 관계에 대해 극도의 의심을 품는다. 실제로 원작소설에서는 앙드레와 알베르틴은 동성애 파트너로 묘사되는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늘 암시적으로만 드러난다.

    각색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원작의 남녀 주인공들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시몽’은 원작의 여주인공의 성인 ‘시모네(Simonet)’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여인의 세계에 속해있는 화자의 심리를 대변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아리안느’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크레타섬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의 불어식 표기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은 크레타섬의 미궁(labyrinth)에 있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없애기 위해 찾아온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을 매어주어 무사히 빠져나오게 한 후 함께 크레타 섬을 떠났으나 테세우스에 의해 낙소스섬에 버려지고 후에 그녀를 본 디오니소스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에 비추어 볼때, 연인에 대해 강박적인 집착(fixation)에 시달리는 ‘시몽’의 입장에서 ‘아리안느’는 ‘미궁’의 비밀 열쇠를 가진 여인처럼 보여지고 그녀에 의해 시몽은 오히려 그 안에 갇힌 인물처럼 묘사될 수 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영화에서 교체된데 대한 상징적인 의미는 브녜(Martin Beugnet)와 쉬미드(Marion Schmid)의 논문에도 비슷한 맥락으로 소개되어 있다.9)

    한편 영화 속에서는 인물들이 머문 시공간적 배경이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저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원작 소설 보다는 조금 더 현대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 방동 광장(Place Vendôme)에서 아리안느의 뒤를 쫒는 시몽의 차는 1950년대 클래식카이고 아리안느의 차는 1960년대의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어느시대에도 없었지만 그들이 소통할 때 가끔 등장하는 이동 전화 같은 최근의 산물들이 나온다.10) 아울러 19세기라 믿어도 될 만큼 고전적인 가구와 분위기로 가득한 시몽의 아파트와는 대조적으로 지나치게 현대적인 거리 풍경은 진실로 이들이 머문 시공간이 어디인지 관객에게 끝없는 의문만 던질 뿐이다.

    아케르만 감독은 지극히 표면적으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회문(回文)처럼 어지럽게 되풀이되고 시공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해 놓은 이러한 영화적 장치를 통해 관객의 통찰이 개입하는 ‘시간의 소멸(timeless)’, 혹은 정해진 시간으로 부터의 탈피하는 반-시간성(a-temporality)로 이행시키고 있다. 그녀는 영화 발표 후 진행된 한 인터뷰를 통해서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아케르만에게 있어서 문학작품의 영화화는 텍스트의 모방은 분명히 아니다. 그녀는 텍스트를 읽은 후에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가장 핵심적인 구성적 모티브를 남기고 그것을 통해 관객과 교감하는 새로운 창작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그녀는 “19세기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오히려 가장 현대적인 문제들, 동성애, 섹슈얼리티, 소통과 소외, 인종과 정치적 문제들의 혼융을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갇힌 여인>이 포스트모더니즘적 맥락에서 다층적 의미를 가진 텍스트”12)로 자신이 영화의 뼈대를 구성하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2) 응시(gaze)의 시공간에 대하여

    그녀와 함께 사는데도 늘 아리안느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그녀의 사회적 관계에 의심을 품는 시몽은 늘상 그녀를 미행하고, 친구들과 평범하게 함께 어울리는 것만 보아도 질투를 한다. 그러던 중 오페라 여가수 레아(Léa)가 아리안느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시몽의 의심과 질투는 극에 달한다. 극의 중반부 이후 아리안느의 세계를 알고 싶어서 레즈비언들을 만나 질문하기도 하고 아리안느에 대한 집착을 떨치기 위해 동성애자들의 매음굴에 들어가 보기도 하는데, 결국 그녀를 독점하기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결국 예기치 않은 형태로 그녀 자체의 부재13)라는 기묘한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그녀의 대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시몽의 욕망은 전형적인 관음증(voyeurism)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영화는 규칙적인 소음과 함께 불안정하게 포착된 바닷가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여인들의 물놀이와 장면과 함께 영사기를 돌리는 시몽의 모습이 보인다.(<그림 2>) 우선 그의 시선에 ‘갇힌’ 여인의 모습으로서의 아리안느가 보인다. 영사기의 규칙적이고 건조한 소음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를 독점하기 위한 시몽의 자동적 반복강박(obsessions)의 표출처럼 보이는데 실제와 환영을 분리하고 또 교묘하게 연결하는 장치로 보인다. 이 바닷가 장면은 프루스트의 원작에서 화자가 일종의 미와 향수어린 세계의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는 발벡(Balbec)의 바닷가에서 차용해 온 듯 보이는데, 물(l’eau)의 속성에서 오는 유동성, 무정형이 여전히 완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아리안느에 대한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기도 하고 영화 전편에 흐르는 순차적 시공간에 대치되는 일종의 균열로 관객의 의식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의 이미지나 바다의 공간은 일종의 무한한 반-시간에 대한 암시적 공간이기도 하다. 즉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다시 재귀하여 등장하는 어두운 바다는 둘의 관계 혹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여전히 폐쇄적으로 순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동선은 그 환상(環狀, looping)으로 인하여 몰입이 가능한 구조이다. 아리안느를 뒤쫓는 시몽의 뒷모습, 자동차로 이동할 때 조차 그 독립적인 사물 자체는 일종의 (인물들이 머문)은폐된 공간의 일부의 떼어놓은 부유물처럼 보인다. 이런 연출은 공간의 은밀하고 협소한 구조로 인해 강박적인 인물의 캐릭터와 심리, 그의 시선에 갇힌 여인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초기작인 <잔느 딜망> 등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일견 건조해 보이는 카메라 워크는 그대신 자연광이 만들어 낸 빛과 어둠의 변주들, 일상의 소음을 그대로 공간 안에 응축시킨 아케르만의 연출로 그 어떤 현란한 기교보다 집중된 화면을 구성한다. 이로 인해 형식적으로는 텅 비어 있으며 거의 방치된 듯한 느낌을 주는 풍경들 안에서 오히려 극도로 정제되고 단순한 감각의 향연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라캉(Jacques Lacan)식의 응시(gaze) 개념-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엇보다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응시, 빈 공간에서 주체를 흘끗 보고 도망치는 공포와 위협, 불안-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장센 중에 하나로 시몽이 외출한 아리안느의 행방을 찾아 무조건 밤거리를 헤매는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미로 같이 얽힌 좁은 골목길 사이로 두 명의 인물(시몽과 그가 아리안느로 착각하는 한 여인)의 실제 모습과 그들의 그림자가 서로 환영처럼 교차하는 장면(<그림3>)은 이내 시몽이 좁은 계단에서 그녀의 실체-아리안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멈춰서는 장면에서 마무리 된다. 이것은 마치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irgio de Chirico : 1888-1978)의 형이상학적 회화 <거리와 신비의 우울>(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그림 4>)을 보듯 일상적 공간에 투영된 암시적이고 불안한 이들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런 장면에서도 실제로 ‘갇힌’ 인물은 시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끝내 소유하지는 못하는 환영에 대해 모호한 욕망에 사로잡힌 시몽, 욕구와 요구의 불일치와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주이상스(Jouissance)14)가 되어버린 반복적 미행을 수행하는 시몽의 심층 심리는 이러한 시공간을 이용한 장면 구성에서도 의미망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들은 여러 걸작 영화들과 연결되고 겹치는 면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를 풍요로운 텍스트로 만들고 있다. 아케르만이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이를테면 히치콕(A. J. Hitchcock)식의 서스펜스와 감수성을 안고 오면서 영화는 줄곧 독특한 긴장감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다. 남자의 강박적인 지각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과 자폐적 환상과 절시증(scopophilia), 그리고 허구와 실제를 오가는 듯한 중첩적 현실은 확실히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1958)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케르만 자신은 ‘미행에서 오는 시공간의 미스테리한 측면 등 이 영화가 가진 긴장 상태가 히치콕의 감독의 <현기증>의 구조와 유사하지만 히치콕이 관객의 반응을 치밀하게 계산한데서 오는 예상 답변을 가진 반면 자신의 작품의 관객에게 텅빈 시공간을 되돌려 준다는 점에서 의도 하지 않은 논란을 풍부하게 낳는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고통 받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큐브릭(S.Kubrick)의 <아이즈 와이드 샷>(Eyes Wide Shut)(1999)에 착안했다”고 말했다.15)

    7)프루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라울 루이즈(Raoul Ruiz)의 (되찾은 시간>(1988)과 아케르만의 <갇힌 여인>은 두루 비교되는데 전자가 원작의 스토리텔링에 충실한 반면 후자는 풍부한 상징을 안고 있는 서술기법 상의 난해함을 심리적 추이와 정서적인 모호함을 결합시킨 구성으로 주목받았다.  8)국내 번역은 모두 모호하게 ‘갇힌 여인’으로 되어 있으나 원작 소설의 ‘La Prisonnière’는 (갇혀 있는) ‘여죄수’라는 뜻이고 영화 제목은 ‘La Captive’는 (갇혀 있는) ‘포로’를 뜻한다. 제목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의 영역본 제목은 ‘The Captive’ 로 되어 있는데 일차적으로 감독 자신이 이 제목이 의미상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편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1953) 등으로 심리적 표출을 강렬하게 시각화 한 프랑스 감독 앙리-조르주 클루조(Henri-Georges Clouzot : 1907∼1977)의 말년 작품 중에 같은 타이틀의 영화 <여죄수>(La Prisonnière)(1968)가 있는데,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복된 제목이 가져올 수 있는 혼동에 대한 고려도 새로운 제목을 만드는데 다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9)Beugnet, Martin. and Schmid, Marion. “Filming jealously: Chantal Akerman’s La Captive(2000)”, Studies in French Cinema ; 2002, Vol. 2 Issue 3, p.159  10)Ibid, p.160  11)이브 르 코르/사미르 아르종, 샹탈 아케르만과의 인터뷰 (Yves Le Corre et Samir Ardjoum, entretien avec Chantal Akerman, 2000 , 2010.9.30.  12)도미니크 파이니 대담 중  13)소설 「갇힌 여인」에서는 알베르틴이 사라지고 후편인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그녀의 죽음이 언급된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시몽과 아리안느가 함께 여행을 떠난 바다에서 아리안느(알베르틴)이 죽은 것으로 암시된다.  14)라캉 식으로 해석하면 욕망은 상징계(the Symbolic)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죽음 충동으로 체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주이상스(향락,Jouissance)로 발전해간다. 그것은 순수 존재의 대명사이자 상실의 원형 같은 것으로 주체를 사로잡는 욕망의 이상을 말한다. 대타자, 혹은 부성 은유의 상징계를 지배하는 기표는 원래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계의 바깥이 돌출하는 어느 순간, 인간은 금지를 넘어가는 충동이고 끝이 없는 고통스러운 즐거움인 ‘주이상스’를 통해서 간혹 돌출되는 실재계(the Real)의 모습을 잠시 발견한다.  15)도미니크 파이니 대담 중에서

    3. ‘방(La Chambre)’ 들을 통한 공간의 유폐

       1) ‘미궁’안의 두 연인

    시몽이 아리안느를 ‘가두는’ 공간은 어디인가. 그들이 머무는 세계는 어쩌면 종종 죽음을 상기하는 바니타스(Vanitas)16) 회화 그 자체이다. 아리안느가 방문한 조상(彫像)으로 가득한 미술관에서 시몽은 아리안느가 친구 앙드레와 동행을 하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지만 하얀 대리석 여인을 홀린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리안느와 앙드레는 이내 그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굳어버릴 자신들의 운명을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그림5>) 겉으로는 앙드레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 하며 끊임없이 그녀에게 아리안느의 행방을 캐묻는 시몽은 사실은 그녀가 아리안느에게 친구 이상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이들이 움직일 때 마다 박물관 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아리안느)의 규칙적인 것과 (시몽)의 불규칙한 것-의 교차는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시몽의 소외를 청각적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비언어적 화자로 기능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공간은 시몽의 집이다.(<그림6>) 마치 여전히 미완성이고 불안한 이 연인들의 관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부분적으로 공사 중으로 설정된, 고급스럽지만 어수선한 폐쇄된 아파트라는 공간은 여러 개의 방과 그것을 이어내는 여러 개의 모퉁이, 그 사이를 있는 복잡한 복도로 구성되어 마치 아리안느(아리아드네)에게만 그 출구의 관건이 있는 ‘미궁’을 닮았다. 실제로 통제되어있고 서로에게 유폐되어 있는 이들의 관계를 비언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몽의 공간이 언제나 관객에게는 노출되어 있는 반면 아리안느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시몽에 의해 호출되거나 열려져야 하는 닫힌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 중에 하나는 두 연인의 욕실이다.(<그림 7>) 가장 사적인 공간까지 유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유하는 이들은 시몽의 성적인 욕망 앞에 저항 없이 순응하는 아리안느를 보여주고 있지만 일견 그녀에게 분리되지 않은 종속체처럼 보이는 것은 오히려 시몽이다. 서로 개별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유리문 앞에선 시몽은 아리안느의 모습을 자신의 환영인 듯 바라보는 상상계적 답보 상태에 머문 유아에 불과하다. 기실 아리안느란 존재를 제외하고 나면 시몽은 영화 속에서 그 자신이 언급했던 ‘라신’(Jean-Baptiste Racine)의 텍스트 같은 고전을 공부하는 내성적인 문학도에 불과하고(그가 홀로 있는 시간에 펼쳐드는 ‘책’도 역시 바니타스가 아닌가) 그의 공간 역시 그만한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그렇게 탐닉하는 존재인 아리안느와의 육체적 접촉은 영화 속에서 늘 주변부처럼 떠돈다.(<그림 8>)

    심지어 그는 침실로 아리안느를 불러내어 재우고는 옷을 입은 채로 그녀를 뒤에서 안고 쾌감을 느낀다.(<그림9>)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종속되어 있는 그는 늘 직접적인 관계가 불가한 완전한 타자에 불과해 보인다. 원작이 된 프로스트의 소설 전편에 상당히 많은 성적 코드가 숨어 있지만 특히 영화로 형상화된 이 장면은 원작에서 여러 장에 걸쳐 다음과 같은 화자의 서술로 이어진다.

    한편 이 침실장면은 영화에 전편에 마치 기표들로만 미끄러지는 아리안느와 앙드레의 동성애에 대한 시몽의 의심을 확신으로 복선 처리하기도 한다. 아리안느는 자신을 안고 쾌감을 느끼는 시몽의 몸짓에 흥분하고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앙드레!” 라고 외치는데, 순간 시몽의 욕망은 씨늘하게 식은 듯 보인다. 아케르만의 프루스트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영화로 압축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대표적인 예로 이 장면에서 외치는 아리안느의 이 ‘한마디 말’을 언급한다.18) 이것은 소설의 뼈대만 따온 이 영화의 구성에 걸맞는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미장센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상황과 심리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이렇듯 대사를 줄이는 대신 관객과 조응하는 시공간에 함축하여 녹이는 아케르만의 방식으로 정제된다고 볼 수 있다.

       2) 다시 ‘방(Chambre)’으로 돌아온 아케르만

    한편 구획된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는 아케르만의 시각적 연출에 대해 이본느 마르귈리에(Ivone Margulies)는 “방 아케르만 : 창조자로서의 유폐자(La Chambre Akerman : The Captive as Creator)’ 이라는 글에서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그녀의 초기작 부터 보여지는, 협소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시공간의 개념적인 시학들은 그녀 작품들의 일부-가령 <방-1,2>(La Chambre-1,2)(1972)이라는 제목의 싱글 채널 비디오나 <호텔 몽트레이>(Hotel Monterey)(1972) 같은 구조적 영화-에서 영화 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을 가장 단순하게 이용했으되 그 자체로 창조적인 감성을 일깨우는 구현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롱테이크 기법이 미술사조에서 흐름을 연장시킨 구조-미니멀리스트(structural-minimalist)의 미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영화는 구조-미니멀리즘 특유의 공허한 시각적 감성을 여과시켜 보다 엄밀한 매무새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19) 그리고 바로 그 ‘방’에서 이루어지는 신체를 통해 표출하는 일종의 작가적 자의식들은 신체성에 천착해 온 다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르귈리에는 모린 투림(Maureen Turim)의 말을 인용하여 아케르만의 작품이 마치 그녀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던 이본느 라이너(Yvonne Rainer)같은 안무가들이 하는 미니멀한 퍼포먼스-신체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동작들이 기승전결도 없이 동등하게 강조되며 연속적으로 펼쳐지는-의 형태로 선호된다고 말한다. 또한 아케르만의 <나, 너, 그, 그녀>(1978)의 도입 장면-나체로 설탕을 먹는 감독 자신인 배우의 행위(<그림 10>)-를 신체를 매개로 과격한 퍼포먼스를 펼쳐온 전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의 비디오 작품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1975)과 비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퍼포먼스를 행하는 나체의 작가가 1킬로그램의 꿀을 은숟가락으로 느리게 먹는 행위에 이어 역시 1리터의 와인을 마신 후 잔을 깬 다음 자신의 몸에 상처를 가하는 일련의 가학적인 행위가 포함되는데 이것도 일종의 (폐쇄성)안에서 자의식을 드러내 확대한 것이라고 본다.20)

    <갇힌 여인>은 아케르만이 도미니크 파이니와의 대담에서 밝혔듯이 ‘방’으로 다시 돌아온 작품인데, 마르귈리에는 감독의 말을 빌려 ‘방’으로 대표되는 감독의 공간적 미학이 역시 그녀에게 일종의 관객과 자신의 상상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촉발시키는 모태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마르귈리예는 1996년에 발표한 아케르만 작품 연구서인『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음 : 샹탈 아케르만의 극사실적 일상』(Nothing Happens : Chantal Akerman’s Hyperrealist Everyday)에서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 에 스민 공간적 폐쇄와 그 묘사를 ‘극사실주의에 있어 반-의인화적 공격(anti-anthropomorphic thrust of hyperrealism)’ 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가 “거기 있는 존재” 자체로의 “인간 존재(human being)”를 그려내는 누보 로망(Nouveau Roman) 작가들의 시선과 공유되어 있다고 본다. 일례로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 1922-2008)의 소설 같은, 지시적 이미지를 그대로 가리키는 객관적 문학(objective literature) 혹은 그러한 형식적 기술은, 시공간을 날것 그대로 표출하는 아케르만의 극사실주의적 영화와 선을 같이 하며 표면적으로 반정신분석학적, 혹은 반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한다.21) 이와 관련하여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La jalousie)(1957)의 일부를 살펴보자.

    이 소설에서 줄곧 등장하는 시간 부사 지금(maintenant)은 오로지 화자의 경험 세계에 비추어서만 의미를 유지한다. 철저하게 객관적이지만 주관적인 감응을 도출하는 이 시간은 환상(環狀)의 굴레 속에 존재한다. 그 시공간은 오로지 독자(관객)의 눈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아케르만의 영화도 이러한 소설처럼 ‘보고 있음-보여짐’의 관계의 되풀이, 즉 폐쇄된 공간 안에서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음’으로 인해 현존한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고 재배열하는 과정 자체를 통해 관객에게 안겨주는 자율적 공간, 무한한 유희적 공간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앞서 언급했듯이 <갇힌 여인>은 건축적으로 구조화된 공간인, (상상력의)‘방’으로 되돌아온 아케르만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그녀는 코멘터리 필름의 대담을 통해 이러한 시선에 신빙성을 더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객관적이고 건조해 보이는 듯한 구조-미니멀리즘적인 아케르만의 시선이 관객에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심리적 층위를 구성하게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주류 영화가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양식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지속과 그것의 반추, 영화 자체의 순수한 본질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갇힌 공간’은 실제로 역설적으로 (관객의 의식 안에서)‘열린 공간’이다. 그녀의 ‘방’이 견디고 있는 실제의 시공간은 더 오묘한 ‘미로속’과 같다.

    16)17세기 네델란드 정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화적 상징. 라틴어로 ‘인생무상’을 의미하며 ‘삶의 허무’를 그림의 주제로 삼고 있다. 작품 소재로 쓰인 해골과 뼈, 엎어진 유리잔, 거울, 책, 깃털펜, 연기가 피어 오르는 촛불 심지 등은 모두 세상의 삶이 일시적이고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17)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옮김,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국일미디어, 1998, p.90-96 Marcel Proust, , Gallimard, 1988, p.575-579 (국역본을 참조하여 원본을 대비 번역 하였다.)  18)Yves Le Corre et Samir, 앞의 인터뷰  19)Ivone Margulies, , Rouge 2003-13 2010.6.30  20)Maureen Turim, The Films of Chantal Akerman, Trowbridge: Flicks Books. 1999. p. 24-25 Ivone Margulies, Nothing Happens: Chantal Akerman’s Hyperrealist Everyday, Duke UP.Durham, 1996. p. 48-50,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정리  21)Ivone Margulies, Nothing Happens: Chantal Akerman’s Hyperrealist Everyday, Duke UP.Durham, 1996. p. 70-71  22)알랭 로브그리예, 박이문 옮김. 『질투』, 민음사, 2003 p.120 원전: Alain Robbe-Grillet. La jalousie, Les Editions de Minuit, Paris, 1957  23)도미니크 파이니 대담 중에서

    4. 또 다른 화자 : 시공간에 스민 빛과 소리들

       1) 시공간 속의 빛과 소리들

    <갇힌 여인>은 공간에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일종의 비언어적 화자들, 일상의 소리들과 빛이다. 그 층위를 그대로 이용한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구도는 영화에 전체적으로 유현(幽玄)한 빛과 일상의 소리들과 어울린다. 시몽과 아리안느의 관계에 균열이 오기 시작할 때 실제와는 다르게 그림자로는 여전히 한몸으로 보려지는 장면은 ‘비언어적으로’ 이들의 관계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림 11,12>)

    아케르만의 영화는 시각적으로 엄밀하고 분절되어 있는 풍경들을 연합함으로써 불일치적 매혹들을 재현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를 구현한다. 실제 시간의 지속과 천착은 영화의 핍진성을 더한다. 특히 골목, 계단, 방, 복도, 창문 등으로 나타나는 이 영화의 건축적 공간성은 아케르만의 다른 영화보다 더 두드러진다. 건축과 영화에 대한 관계를 연구한 유하니 팔라즈마(Juhani Pallasmaa)는 영화자체가 ‘시간-운동’의 차원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건축물과 거의 같은 존재로 보여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건축가들이 만든 공간이 실제로 시간의 켜를 축적하고 있으며 일종의 정신적 이미지를 잉태하고 추억과 꿈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영적인 내용물로 함의하기 때문에 그것을 영화에서 직시하게 될 때 그 자체로 관객에게 일종의 폐부의 기억을 불러오는 정신작용을 유도할 수 있다’고 한다.24)

    특별히 이와 함께 <갇힌 여인>의 ‘영화적 화자’의 ‘청각적 경로’ 로 분류될 수 있는 것 중에 일상의 음향 외에 세 개의 삽입 음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더. 이들은 주인공들의 심리적 추이를 대변하며 이들의 시공간에 진동을 제공하기도 한다. 우선 슈베르트(Frantz Schubert)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D821)는 시몽이 아리안느를 침실에 불러서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함께 듣는 음악이다. 저음의 첼로 음색으로 표현되는 우울질의 선율은 같이 있되 결코 진정한 연대가 될 수 없는 이들의 관계와 시몽의 우울한 병적 강박 증세를 대변한다. 이 음악은 그가 아리안느의 사회적 관계를 의심하며 그녀를 모임에서 데리고 나온 후 공원으로 드라이브를 할때도 흐르는 음악이다. 또한 아리안느는 극 중에서 친구와 성악레슨을 받으러 다니는데 영화 초반에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그녀의 사랑스런 캐릭터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던 노래는 모차르트(W. A. Mozart)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의 경쾌한 듀엣 아리아 ‘갈색머리 남자를 선택할거야(Prenderò quel brunettino)’이다. 그러나 이 곡을 극의 후반부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에 위치지어진다. 즉 시몽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리안느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친구와 주고 받는 아리아는 상징적 탈출의 매개로 반어적 의미를 획득한다.(<그림 13>) 원작 오페라에서 결혼 상대를 찾는 두 자매 피오르딜리지(Fiordiligi)와 도라벨라(Dorabella)가 함께 부르는 듀엣은 내용상 서로의 이상형을 탐닉하는 사랑에 들뜬 아가씨들의 이야기이지만, 아리안느에게이 노래는 자신의 처지와 상충하는, 일종의 비현실적 바람으로 가득한 역설적인 갈망일 뿐이다. 물론 이 장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몽의 시선과 공간은 이들의 노래와 교차되어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일종의 주제가 될 만한 음악으로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v)의 교향시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 op.29)이 있다. 잘 알려진대로 작곡가가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놀트 뵈클린(A.Böcklin)의 동명의 그림<(그림14>)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시몽이 아리안느를 미행할 때 극의 초중반부에 각각 흘렀던 이 음악은 극의 후반부, 죽 같이 여행을 간 날 밤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겠다며 그대로 바다로 나가 사라져 버린 아리안느를 찾는 시몽의 절규에 맞물려 흐르게 된다. 즉 그를 홀연히 떠나는 방식으로 연인의 집착으로부터 탈출한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셈이다. 이 영화는 밝은 아침, 멀리서 한 척의 배가 다가오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마무리된다. 마치 ‘죽음의 섬’ 그림에 나오는, 저승으로 데려가는 뱃사공 카론의 모습처럼 그 바다 끝 먼 곳에서 배를 타고 다가온 이가 있으니 사라진 연인을 찾는 시몽이다. 결국 그는 카론인 것일까.(<그림 15,16>)

    이 장면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함께 시공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화자가 있으니 바로 지속적으로 울리는 이 배의 ‘모터 소리’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열었던 바다가 마지막을 귀결했듯이 이 모터 소리는 역시 첫 장면에서 들었던 소리와 유사하다. 균일하고 지속적인 소음은 첫 장면에서 시몽이 아리안느를 보기위해 돌리고 있던 ‘영사기 소리’와 겹쳐지는데, 영사기 소리와 함께 환영의 아리안느를 소유했지만 이제는 실제의 공간에서 증발해 버린 그녀의 부재를 직시하는 시몽의 눈빛은 (영사기와 대조적인) 배의 모터 소리와 함께 ‘부재하는 이(Absent One)’25) 로서의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관객의 자리를 다시금 새롭게 확보하게 한다.

    이런 장면에서 볼수 있듯 제한된 공간에서 보여지는 인물의 집중적인 행동, 반복과 재귀 등의 이미지는 브레송(R. Bresson)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 같은 영화를 참조했다는 아케르만의 이야기(도미니크 파이니와의 대담)을 수긍하게 해 준다.

       2) 물(l’eau)의 상징, 물의 시공간

    프루스트의 원작의 감성에 비추어 볼 때 물(바다)이라는 공간에서 아리안느의 현전(presence)/부재(absence)를 드러낸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 영화에서 아리안느는 시몽이 돌리는 영사기 속 물(바다)에서 처음 등장하고 욕실 장면에서 다시 물의 이미지로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은 감독이 원작에서 알베르틴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여인을 향한 화자의 성적 욕망과 코드를 물로 비유했던 프로스트식의 감성을 적절히 공간 안에 재구성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알베르틴은 원작인 「갇힌 여인」에서 ‘오벨리스크처럼 치솟은 아이스크림’(물론 성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에 탐닉하는 여인으로 나오고, 이전의 제2편「꽃다운 아가씨들 그늘에서」(A des Jeunes Filles en Fleure)에서 화자의 입을 통해 ‘이것만으로 마실 것은 충분한’, ‘물 속에 짜 넣은 오렌지’(orange pressée dans l’eau)로 표현되는데, 물 역시 여성을 상징하지만 오렌지도 동시에 여성의 작은 유방을 나타내기도 한다.26)

    이 소설 전편에서 알베르틴은 물의 세계, 발벡의 바다와 비본(Vivonne)의 수원(水原), 즉 화자가 근원적으로 그리는 일종의 향수 어린 절대 미의 세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리안느 역을 맡은 배우 실비 테스튀(Sylvie Testud)가 코멘터리 필름에서 언급하기를, ‘갇힌’ 존재는 결국 시몽이었으며 사라져 버린 아리안느라는 역할로 자신은 배우로서 가장 자유로운 여인상을 연기했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은 결국 유일하게 열린 공간으로 설정되는 바다로 들어가는 길을 바로 아리안느가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전반에 걸쳐 시몽의 요구나 물음에 “당신이 좋은대로”, “원하는대로요” 라고 말하는 아리안느는 표면적으로 시몽의 시야에 갇혀 있는 수동적인 여인상으로 그려지나 영화에서 그녀가 만들어낸 궁극적인 ‘미궁’ 은 더 이상 시몽의 의지대로 찾은 수 없는 물(바다)로 상징되고 있다. 이것은 첨예한 시선으로 원작이 가진 상황적 함의를 공간적으로 확대하고 그 의미를 촉발시킨 감독의 순수한 성과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를 분석해서 『프루스트와 물거울: Proust et le miroir des eaux』이라는 비평서를 발표한 바르기예-오틀루아(A.Barguillet-Hauteloire)는 「갇힌 여인」의 마지막 부분, 즉 극중 화자가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로 하고 상상으로 떠나는 베니스의 바다를 샤파이어빛 암청색으로 가득한, 세월에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니는 일종의 ‘어두침침한 황혼의 물(Les eaux crépusculaires)’이라고 분석하고 있다.27) 베니스 바다는 시몽에게 재생과 망각 두가지 모두 의미를 지닐 것이다. 실제로 그 바다는 시몽에게 영원히 알베르틴(아리안느)를 망각함으로써 영원히 상기시키는 기묘한 생성-죽음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24)Pallasmaa, Juhani. The Architecture of Image: Existential Space in Cineman. Rakennustieto. Helshingki, 2000, p.20  25)우다르(J. Oudart) 는 라캉의 봉합(suture) 개념을 소개하면서 “담론의 사슬로 된 주체의 관계” 라고 정의하였다. 영화의 예로 들어가 보자. 스크린 위의 모든 장면은 그것 자체로 그것을 닫아야 하만 하는 가공의 제4의 벽(무대(스크린)와 관객 사이를 떼어놓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넘어 확장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각하는 것이 아닌 지각된 장면으로부터 가상의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우다르는 사라진 장을 차지하는 관객을 ‘부재하는 이(Absent One)’로서 주목한다. -F.Casetti, Texas UP. Austin,1999, p.163-164  26)김승철, 『프루스트의 성과 언어』’, 한국학술정보, 2006, p.143-153  27)Barguillet-Hauteloire, Armelle. Proust et le miroir des eaux. Éditions De Paris, 2006, p.118-119

    5. 나오며

    아케르만의 <갇힌 여인>에 대한 일차적인 인상은 무엇인가. 우선 난해한 프루스트의 소설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 소설에 대한 일종의 간결하고 우아한 시각적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시몽의 집착과 강박증적인 행동에만 천착해서 본다면, 본고의 중간에서 간간히 언급했듯 프로이트와 라캉의 그물로 직조된 보고서도 가능할 만큼 다층적 함의로 가득한 정신분석학적 텍스트로도 기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해석 이전에 여전히 아케르만이 스스로 돌아왔다고 보는 지극히 현실적인 제한된 시공간에서 ‘봄-보여짐’의 관계에 이 영화의 의미를 맞춰 본다면 오히려 생경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신선한 영화미학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갇힌 여인>은 인물들의 현전/부재를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또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비언어적 영화적 장치들이 가득하지만, 어느새 문득 ‘텅 빈’ 시공간을 마주하면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매혹의 단서들을 상기하게 되는 관객이 그들 스스로의 시선을 느끼고 그로 인해 영화보기의 근본적인 권한을 형성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그물같이 직조된 시공간의 흔적을 관조하게 되는,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미학을 근본적으로 조우하고 담담하게 성찰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갇힌 여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의 의미는 분명히 그대로 이 소설을 묘사한다기보다 프루스트의 소설 미학인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을 시공간의 객관적 구성이라는 영화 어법으로 투영시킨 아케르만의 시선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아케르만의 영화는 바로 앞에 보여지는 날것 같은 시공간과 그 안에 숨겨진 빛, 소리들은 여전히 직접적으로 발화하지 않지만 또 다른 화자로 관객으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실재를 상상하게 하며 풍요로운 의미망을 만들어 낸다. 즉 여전히 시간의 부재와 실재 혹은 공간의 현실과 환영 또는 그 역을 자유롭게 오가는 ‘실험’ 선상에 놓여있는 셈이다. 분명한 언어적 발화들이 의미를 고정시키는 대신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또 흘러가 버리는 시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의미를 변주하게 한다. 지나치게 정직하여 일견 텅 비어 버린 듯한 기호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키고 변주함으로써 다시 드러내 보이는 겹겹의 공감각 자체가 궁극적으로 그녀만의 이러한 ‘실험’이 지향점이기도 하다. 분명 그것은 로브-그리예 방식의 누보 로망, 일명 객관적 문학의 외연과 유사하면서도 그 직시의 종착역은 보이는 것을 통해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심연에 가깝다. 결과적으로는 본고의 앞머리에서 언급한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즉 “봄과 말함 사이의 기다림 속에서 머무르고 있는 빈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건조해 보이는 영화적 시선을 더 풍성한 의미의 하얀 공허에 휩싸여 관객에게 돌아오게 된다(관객이 찾아오게 된다).

    발화로 표현되는 내러티브를 넘어서, 바로 관객에게 직시되는 현재적 시공간 자체가 그녀의 영화에서는 그대로 ‘또 다른 화자’로 기능한다. 그것은 관객의 적극적인 의식 작용을 유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숨겨진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의미의 포화상태를 가능케 하는 아케르만의 매혹적인 영화 미학이기도 하다.

    28)Bonnaud, Frédéric., “Entretien avec Chantal Akerman pour la Captive”, ‘Les Inrockuptibles’, 26 septembre 2000,, 2010.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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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1]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1976)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1976)
  • [<그림 2>] 시몽이 영사기를 돌린 후 투사된 아리안느의 모습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며 스크린으로 다가가는 시퀀스. 스크린에 투사된 아리안느.
    시몽이 영사기를 돌린 후 투사된 아리안느의 모습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며 스크린으로 다가가는 시퀀스. 스크린에 투사된 아리안느.
  • [<그림 3>] 아리안느를 찾아 골목을 헤매는 시몽, 그들의 실체는 만나지않고 그저 그림자로 교차한다.
    아리안느를 찾아 골목을 헤매는 시몽, 그들의 실체는 만나지않고 그저 그림자로 교차한다.
  • [<그림 4>]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irgio de Chirico), <거리의 신비와 우울>(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1914)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irgio de Chirico), <거리의 신비와 우울>(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1914)
  • [<그림 5>] 미술관에서 여인의 대리석상을 바라보는 아리안느와 앙드레. 동성애자인 둘의 관계가 암시된다.
    미술관에서 여인의 대리석상을 바라보는 아리안느와 앙드레. 동성애자인 둘의 관계가 암시된다.
  • [<그림 6>] 시몽의 침실, 아리안느를 불러내 통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몽의 침실, 아리안느를 불러내 통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 [<그림 7>] 그들은 서로에게 분리되지 않은 상상계의 아이들, 종속체처럼 보이지만 기실 닿을 수 없는 타자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분리되지 않은 상상계의 아이들, 종속체처럼 보이지만 기실 닿을 수 없는 타자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 [<그림 8>] 잠든 아리안느를 바라보는 시몽.
    잠든 아리안느를 바라보는 시몽.
  • [그림 9] 잠든 아리안느에게 욕망을 충족하는 시몽
    잠든 아리안느에게 욕망을 충족하는 시몽
  • [<그림 10>] 아케르만(C. Akerman),<나,너,그,그녀( Je, tu, il, elle) 의 도입장면
    아케르만(C. Akerman),<나,너,그,그녀( Je, tu, il, elle) 의 도입장면
  • [<그림 11>] 시몽은 아리안느를 친구들 사이에서 억지로 끌고나와 해질녘 공원을 산책한다.
    시몽은 아리안느를 친구들 사이에서 억지로 끌고나와 해질녘 공원을 산책한다.
  • [<그림 12>] 그들이 관계와는 달리 그림자는 다정하다
    그들이 관계와는 달리 그림자는 다정하다
  • [<그림 13>] 아리안느는 창문을 통해 친구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중창을 노래하며 일종이 상징적 탈출을 시도한다
    아리안느는 창문을 통해 친구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중창을 노래하며 일종이 상징적 탈출을 시도한다
  • [<그림 14>] 아놀트 뵈클린(A.Bocklin), <죽음의 섬>(Die toteninsel),1886
    아놀트 뵈클린(A.Bocklin), <죽음의 섬>(Die toteninsel),1886
  • [<그림 15>] 연인이 사라진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오는 시몽은 뵈클린의 ‘죽음의 섬’의 카론을 닮았다.
    연인이 사라진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오는 시몽은 뵈클린의 ‘죽음의 섬’의 카론을 닮았다.
  • [<그림 16>] 배의 지속적인 ‘모터 소리’는 영화의 도입부에 시몽이 아리안느를 보기위해 돌리던 ‘영사기 소리’의 재귀이다.
    배의 지속적인 ‘모터 소리’는 영화의 도입부에 시몽이 아리안느를 보기위해 돌리던 ‘영사기 소리’의 재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