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정치 사이에서 엔지니어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의 변화

Technology, Politics and the Change of Social Role and Social Responsibility of Engin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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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이 연구는 한국의 공학 전문직의 형성과 특성에 대한 사회적 연구이다. 전문직으로써 공학의 발전과정은 근대 국가의 발전 및 산업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공학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성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갖게 된다. 우리는 기술 논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 개의 사례들, 즉 경부고속도로, 당산철교, 4대강 사업을 분석하여 한국공학 전문직의 정체성 구성, 특히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이 형성된 과정과 특징을 조사한다. 기술과 정치가 얽히는 다양한 국면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정치 시스템의 개념을 기반으로 첫째, 한국 공학 전문직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이 형성되는 과정의 특징이 공학 전문직의 정체성과 책임을 규정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분석한다. 둘째, 이러한 지배적 이미지가 이후의 기술적 이슈와 논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의 역사적 연계 과정을 탐구한다. 세 번째는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공학과 엔지니어의 역할과 책임성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고 도전받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공학 전문직이 탈정치화되고 과도하게 정치화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독특한 관료지향성을 갖게 되었음을 밝힌다. 무엇보다 국가로부터의 자율성 확보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국의 공학 전문가들은 사회적 발언권과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This is a sociological study on the formation and characteristics of Korean engineer as a profession. The development of engineer as a profession has been closely related to the modern state, its development and industrialization process in particular. The profession of engineer is said to recognize what is its role and responsibility in the relation to the modern state. This study looks into three significant historical cases in Korean engineering and Korean engineer, the construction of Gyeongbu Expressway, the destruction of Dangsan Steel Railroad and the restoration of Four rivers. This study centers on 'technology-politics system’ showing how technology and politics are inter-connected each other and how technology becomes the social. Based on the system, this study shows what dominant images and practice are in Korean engineering and engineer and how they have been formed and developed. The profession of engineer has carved them into its professional identity and that influenced on its social role and social responsibility. This study also investigates how the dominant images and practice once formed, has influenced on the following critical social issues, controversies and disputes in technology and engineering. Through the historical change of dominant ideas and practice, this study shows how the three cases on target here are historically linked one another. This study concerns about the change of social role and social responsibility of engineer. It claims that Korean profession of engineer is de-politicalized and at the same time is over-politicalized, and that contradictory within the profession seems to lead to the bureaucrat-oriented direction. Whether the bureaucrat-orientation of the engineer is problematic or not, the profession is sure to take severe damage to its professional autonomy(the ability to decide what kinds of work they would do) on the current context. The profession of engineer now faces challenge of recovering social credibility and regaining social voice.

  • KEYWORD

    전문직 , 엔지니어 , 경부고속도로 , 당산철교 , 4대강

  • Ⅰ. 들어가는 말

    과학기술의 거침없는 발전과 동학은 근대적 삶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위험사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를 전면화시켰다. 국가와 시민사회는 다양한 제도적, 규범적 수단을 동원하며 이에 대응해 왔다. 전문직의 탄생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근대와 산업 발전의 필연적인, 그리고 동시에 합리적인 발명품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함께 등장한 집단, 즉 고도의 전문적 기술과 지식을 지닌 특정 집단에 대해 일정한 책임성과 자율성을 부여하고 보장하는 것이 지식과 위험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전제될 때, 전문직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는 끊이지 않는 재난과 사고, 기술적 논란이 이어져 왔다. 서해훼리호 침몰(1993),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붕괴(1995), 대구지하철 가스폭발(1995), 부안 방사능폐기장 사태(2003), 대구지하철 화재(2003), 광우병 논란(2008), 4대강 사업 논란(2008-2012), 그리고 세월호 침몰(2014)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기본 인프라와 연관된 위험들이 삶의 안전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관리 주체인 정부나 관련 행정기관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사회의 인프라를 책임지는 핵심 주체가 정부행정기관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기술적 재난이나 논란에서 전문가 집단의 책임 있는 주도적 역할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과 연관된 많은 사건 속에서 전문가 집단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관찰자 혹은 평론가의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왜 그런가?

    이 연구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기술적 재난이나 논란에 깊이 연관된 공학 분야 직업의 전문성과 책임성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왜 전문성을 증명하거나 주장해야 할 위치에서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로, 혹은 평론가로 나타나는가?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 공학 전문직에 대한 신뢰는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은 다른 나라의 공학 전문직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 사회에 독특한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일까?

    한국의 엔지니어들1)은 흔히 자신들의 직업적 지위와 사회적 위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다른 전문직 못지않게 길고 어려운 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직업을 갖지만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수고에 비해 사회적 위상이 높지 않다고 한다. 엔지니어로서 기업과 사회의 중요한 지위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고 실제 그 비율도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기술적 이슈와 논란이 발생할 때에도 전문가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위치나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비전문가에 의한 관리와 통제가 전문직 엔지니어의 역할을 소외시키거나 오히려 사건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학 전문직 내부의 견해와 외부에서 보는 관점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겪어온 문제를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유난스럽게 사회문제로 제기한다거나(이영희, 2002), 사회의 지도적 위치로 진출할 만한 실제 역량, 즉 의사소통능력이나 리더십이 부족하기 때문이므로 먼저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든지(한국공학교육학회, 1997), 과도하게 성취 지향적이고 일 중심적인 그들의 태도로 인해 사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는 조급증이나 편협성이 오히려 문제라는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공학 전문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들, 즉 관찰자, 사회적 희생양, 준비되지 않은 전문가 중 어떤 것이 실제일까?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우리는 한국 공학 전문직의 이미지와 인식이 한국의 산업화 및 근대화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기술에 대한 고려 없이 근대 한국의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없듯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기술, 그리고 그것을 다루어온 공학 전문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한국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이 정의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기술과 국가(국가의 비전과 발전전략)가 만나고 상호 연관되는 사회적, 역사적 과정을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세 개의 사례를 분석할 것인데, 이들은 한국 공학과 엔지니어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정희 정부 시기(1961-1979)는 공학과 엔지니어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이 형성된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Han and Downey, 2014).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정은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기술적 성과로 한국의 고유한 기술발전 양식과 실천을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를 잘 드러내준다. 두 번째 사례로는 당산철교 철거 및 재시공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소위 문민정부와 민선시장 하에서 추진된 당산철교의 철거 결정은 박정희 정부의 압축적 산업화 과정에 대한 성찰과 전문가 집단의 적극적 대응과 반발이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끝으로 살펴볼 사례는 4대강 사업이다. 4대강 사업 논란은 사업의 본질과 방법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대립 뿐 아니라 찬반 양측에 다양한 전문가들이 포진하는 등 한국 역사에서 기술적 인공물의 실체와 의미를 둘러싸고 벌어진 흔치 않은 논쟁 사례이다.

    이 연구를 위해 우리는 기술과 정치, 전문직, 공학과 엔지니어를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개념적 자원들을 활용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전문직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의료 분야에 집중되어왔고 공학 전문직에 대한 국내의 연구와 토론은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공학 전문직의 제도적 특징이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윤리적 접근을 다루어왔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구체적인 사례 분석을 통해 첫째, 우리나라 기술과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사회적 과정의 특징이 공학 전문직의 정체성과 책임을 규정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둘째, 1960년대부터 형성된 기술과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가 이후의 기술적 이슈와 논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압축적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 공학 전문직의 특징은 개인과 국가, 기술과 정치, 시민과 전문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론적으로는 미시와 거시, 기술과 사회의 역사, 역사 연구와 사회 연구 사이의 상호참조 속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1)이 연구에서 우리는 공학 전문직이라는 용어와 엔지니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한다. 공학 전문직이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해당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직업을 의미한다. 엔지니어란 용어는 실제 현장에서 많이 활용되는 점을 고려하여 함께 사용한다.

    Ⅱ. 이론적 배경

    전문직에 상당한 수준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전통은 단순히 그들의 사회적 위신과 보상을 높이려는 전문가들의 의도적인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밀한 지식에 특정 집단의 이익과 관점이 도입되는 것을 제한하려는 강력한 사회적 요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직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어떻게 보증, 보상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와 협상이 진행되어 왔고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 역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문직에 대한 초기의 연구는 주로 현대 사회에서 전문직이 갖는 의미와 기능을 탐구하고 그것의 유형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모아졌다(Goode, 1960). 예를 들어 파슨스에 따르면, 전문직은 다른 종류의 조직과 달리 사회 전체의 복지와 서비스를 지향하고 있으며 공평하고 합리적인 권위를 내재하고 있어 이들이 지향하는 리더십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Parsons, 1939). 하지만 전문직 또한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하며 국가와 협상한다는 연구들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전문직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비교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Larson, 1977; Collins, 1979; Freidson, 1986). 전문직 제도와 전문직 윤리는 특정 유형을 따라 보편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Rueschemeyer, 1973; Johnson, 1982). 전문직 연구는 대체로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형성과정, 전문직의 제도적 특징과 변화, 전문직 윤리를 탐구하는 영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연구는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성을 규정하는 윤리적 이슈가 전문직의 사회적 형성 과정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공학 전문직의 형성 과정은 근대 국가의 발전 및 산업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과 정치가 만나고 서로 얽히는 다양한 접촉면들 사이에서 탐색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음은 기술과 정치, 공학 전문직 사이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선행 연구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난 세기 사회발전의 중심에 섰던 기술과 공학에 대한 진지한 탐색은 먼저 근대 사회 비평의 차원에서 본격화되었다(Martin Heidegger, Jacques Ellul, Herbert Marcuse, Hans Jonas). 이들 기술철학자들은 근대 사회에서 기술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색하며 그것이 단순한 사물이나 구체적 제품이 아니라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고 인간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술 문명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술을 사회 분석의 개념적 도구로 확장한 사람이 바로 위너(Langdon Winner)이다. 그는 기술이 추상적인 개념적 도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공물의 총체이며, 동시에 우리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한 형식이기 때문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정한 기술적 장치나 시스템의 발명, 설계, 배치 그 자체가 특정한 사회 질서를 정착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혹은 본래부터 특정한 정치적 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보았다(Winner, 1995: 53). 인간 사회에서 권력과 권위가 배열되고 그러한 배열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을 정치라고 볼 때, 기술도 그러한 과정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학 전문직의 형성과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의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술과 정치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구체적인 행위자의 역할과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엔지니어라는 행위자를 기술사 연구의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 20세기 이후의 기술을 시스템으로 분석한 기술사학자 휴즈(Thomas Hughes)의 연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기술은 “물리적 인공물, 기업과 은행, 연구소 등의 조직, 법, 대학 연구, 자연자원과 같이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기술시스템(technological system) 안에서 작동(Hughes, 1999: 123-124)”되며 “기술자, 기계 전문가, 엔지니어, 설계자, 과학자들이 각종 도구와 기계, 지식으로 세상을 재창조하고 인간이 만든 이 세계를 통제하는 것(Hughes, 2004: 4)”과 연관되어 있다. 이 때, 기술은 특정한 목적을 지니며 기술시스템 안에서 합리성, 질서, 효율성과 같은 가치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시스템의 구성요소를 재배치하기도 한다. 그의 연구는 기술을 시스템 차원에서 이해하고 엔지니어나 과학자, 관리자들의 활동과 역할을 한정된 전문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고 시스템 차원의 활동으로 확장시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시스템 개념의 핵심은 결국 기술의 발달과정을 해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전문직으로서 공학과 엔지니어의 형성과 역할을 탐구할 개념적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기술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공학 전문가의 형성과 활동을 연구한 헤트(Gabrielle Hecht)의 작업이야말로 본 연구에 중요한 개념적 자원을 제공해 준다. 헤트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프랑스 사회의 기술과 정치, 국가 정체성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문화적 산물로서 기술의 형성과 특성을 조명한다. 프랑스의 국가 정체성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기술개발 및 변화 과정에 깊이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국가를 통해 제시되는 텔로스와 정당성은 특정한 방향으로의 기술 개발과 변화를 지시한다. 그리고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일단 형성된 행위자들의 관념과 믿음은 그들의 행위와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 정치(technopolitics)란 “정치적 목적을 수립하고 구현하기 위해 기술을 설계하거나 사용하는 전략적 실천”으로 제시된다(Hecht, 2001: 256). 단순히 정치가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은 정치를, 정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헤트는 또한 “기술정치 레짐(technopolitical regim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특정한 제도적 환경 하에서 기술과 조직, 법, 이데올로기, 교육 등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배치되는지를 분석한다. 레짐으로 개념화한 이유는 기술의 정치적 실천 활동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레짐은 휴즈가 제시한 기술시스템 내부에서 작동하면서 상황맥락에 따라 강고해지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서로 다른 기술정치 레짐이 경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특정 레짐의 승리는 결국 누가 국가 정체성이라는 문화적 담론을 선점하고 주도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헤트의 연구는 기술과 정치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개념적, 방법론적 접근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어진 역사적 국면에서 엔지니어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역할을 확보하고 확장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구이다. 기술이나 전문직의 발전과정을 분석할 때, 국가 정체성 담론을 결코 불변하는 환경이거나 외생적 변수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어야 할 역동적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외에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피콘(Picon, 2004)은 엔지니어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사회적 차원과 기술적 차원의 분석을 동시에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프랑스 공학 전문직의 발전 과정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하부구조 설계와 구축, 엘리트 엔지니어 집단의 비전과 열망, 새로운 사회 건설의 이념과 정당성 확보를 둘러싼 여러 사회 집단들 사이의 경합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프랑스와 미국의 현수교가 어떻게 다르게 발전되었는지를 연구한 크라나키스(Kranakis, 1997)는 각 국가의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적 구조가 기술 지식 및 인공물의 생산과 사용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 분석하기 위해 중범위 수준에서 일어나는 교육 환경, 국가의 기술 전통, 특허 시스템, 연구 조직의 특성 등을 흥미롭게 설명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국가의 기술 프로젝트가 구체적인 정치적 기획과 문화적 실천 속에서 추진되고 변화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한국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끝으로 과학기술학(STS)의 전통에 있지만 독자적으로 엔지니어와 공학 전문직에 대한 학제적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다우니(Downey, 2009)의 작업을 검토하고자 한다. 다우니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공학과 엔지니어의 정체성을 그들을 둘러싼 문화적 실천 과정 속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그들이 위치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이 하는 일과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천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공학이나 엔지니어에 대해 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배적 이미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형된다. 다우니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공학과 엔지니어의 역할과 책임, 정체성이 변화될 수 있는 실천적 함의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공학이나 엔지니어의 이미지 자체도 문화적 구성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이라는 효과적인 개념적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는 공학 전문직의 사회적 위상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은 한국의 공학 전문직을 분석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술과 정치, 역사, 문화, 그리고 공학 전문직의 특성을 분석하는데 관련된 중요한 이론적 자산들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는 기술은 정치적이라는 전제 위에서 기술의 존재 형태가 무엇이든, 즉 삶의 형식이든, 혹은 정치적 기획이든, 그것은 이미 근대 사회의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그물망 안에 깊이 얽혀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기술-정치 시스템이라는 개념에 기반하여 한국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성 이슈를 분석하려고 한다. 기술-정치 시스템이란 기술의 설계와 발전이 자연자원, 지식, 규범, 제도 등의 요소를 특정한 방식으로 창조, 배열, 통제하는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의 전략적 실천과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헤트의 기술정치 개념은 행위자들, 특히 엘리트 엔지니어 집단이 정치적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을 설계하거나 사용하는 전략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이 연구는 엔지니어들이 정치적 과정이나 그것과 연관된 전략적 실천에 직접 연관되지 않는 경우에도 작동하는 기술과 정치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자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상이한 사회 환경을 배경으로 다루기 때문에 엔지니어 집단 뿐 아니라 변화하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의 역동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휴즈의 시스템 개념이 제공하는 이점이 있다. 휴즈의 기술 시스템 개념은 특정한 목적을 지닌 기술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요소들이 함께 조율되고 통제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 연구는 새롭게 구축되고 변화하는 기술-정치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한국의 공학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성을 정의하고 인식해 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은 한국에서도 역시 구체적인 교육적, 제도적 요소를 통해 구성되며(Eda Kranakis), 국가 정체성 담론과 연계된 기술정치 레짐을 통해 구현되고(Gabrielle Hecht) 기술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측면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Antoine Picon) 다양한 시스템 요소들과 상호 연관되고(Thomas Hughes) 일상의 공학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Gary Downey)이다.

    Ⅲ. 세 개의 기술 사례 분석: 건설, 철거, 그리고 복원

    이제 한국 사회에서 중대한 기술적 논쟁 혹은 상징으로 자리 잡은 세 개의 사례들, 즉 경부고속도로, 당산철교, 4대강 사업을 분석하고자 한다. 사례로써 토목 건설 분야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한국의 엔지니어 양성과 활용의 산업적,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시점은 1960년대 이후인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산업 부문이 토목 건설 분야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연구는 한국 공학 전문직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인식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분석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기술 분야를 선택하여 비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이 사례들을 통해 한국 기술-정치 시스템의 구축과 변화 과정에서 공학 전문직이 지니게 된 독특한 특성들을 이해하고자 한다.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은 고정되거나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하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1. 경부고속도로: 공학의 지배적 의미와 실천의 구축

    경부고속도로는 한국의 성공적 산업화와 기술발전을 의미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자 기술적 상징물이다. 1960년대 후반 GNP 140달러의 저개발국가가 1968년 2월부터 1970년 7월까지 불과 2년 5개월 만에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니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으로 연결되는 경제성장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많은 회고담들이 고속도로 건설과 연관된 수많은 영웅적 이야기를 그려 왔는데, 우리는 역으로 이 영웅적 이야기들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기술-정치 시스템과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 구축 과정에 관해 검토해 보려고 한다.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힌트를 얻은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이후 강력히 추진하고 있던 수출지향적 산업정책이 궁극적으로 수송 수요를 증가시킨다고 보고 한국적 상황에 맞는 고속도로를 구상하였다(한국도로공사, 1980b; 손정목, 2003). 박정희가 고속도로 건설을 공식 발표한 것은 1967년 4월 29일인데, 이때는 마침 대통령 선거를 불과 나흘 앞 둔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치졸한 정치 쇼를 벌였다고 비판하였다. 어쨌든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리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는 바야흐로 고속도로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산업화의 추진 동력은 철도에서 도로로 전환되었다.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성장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았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한국의 기술엘리트들은 미국, 독일, 일본 등의 고속도로를 답사하면서 국토개발을 통한 산업발전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된다(한국도로공사, 1980b). 당시에는 국제은행(IBRD)이 저개발 국가에 대한 경제지원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간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황병태, 2011) 막상 한국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국제 원조를 요청했을 때, 그것을 거절했다.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속도로보다는 기존 도로 정비나 보수가 더 적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부는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확보한 전후 배상금과 베트남전 참전으로 마련한 재원을 통해 고속도로 건설 자금을 충당하였다(최광승, 2010).

    국제은행의 역할이 단순히 재원 조달 문제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제공한 기술적 자문이 한국 내부의 논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국제은행은 1966년 당시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했었다. 이 보고서는 철로 중심에서 도로 중심으로 수송체계를 전환시키지 않으면 한국의 경제발전이 저해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한국도로공사, 1980b). 당시 도로 정비와 보수 수준이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제시한 최우선 과제는 기존의 도로 정비였고 그 다음이 횡단도로 건설이었다. 종단 고속도로 건설은 언급되지 않았다. 서울-강릉, 포항-부산-순천-여수-광주 등의 횡단도로 건설이야 말로 국토의 장기적 균형 발전에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이 진단을 따를 경우, 일정한 건설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도 함께 제시했다.

    국제은행 보고서의 기술적, 경제적 권위는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측이 박정희 정부의 의사결정에 반론을 펼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당시 건설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이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한국적 상황에서는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종단고속도로 보다는 동서를 잇는 횡단도로 건설이 시급하며 이것은 균형 있는 국토개발과 부족한 자원개발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제7대국회 건설위원회, 1968: 14-15). 당시 야당인 신민당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근대화의 근간인 도로건설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남북 간 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라며 경부고속도로 계획을 문제시했다(박순재, 1968). 하지만 이러한 반대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늦추거나 저지할 정도로 힘을 갖지는 못했다.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기술과 전문성 부족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은 일반도로의 건설과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에는 이러한 기초적 지식조차도 매우 부족했다. 그것은 공사비 추정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68년 12월 대통령이 정부유관부처(건설부, 경제기획원, 재무부, 서울특별시, 육군)와 현대건설에 공사비 추정을 지시했을 때, 주어진 정보라고는 서울과 부산 구간의 대략 430킬로미터 길이의 고속도로라는 정도였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각 기관이 제시한 추정 공사비는 아래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180억에서 650억까지 다양했고 그 근거 역시 상이했다.

    가장 높은 예산을 제시한 건설부는 당시 최고의 기술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울시의 180억에 대해 “이맛살을 찌푸렸고” 현대건설의 280억에 대해서는 “고속도로에 대해 그만큼 안다는 회사가 280억으로 날림공사를 해놓고 그 다음에는 누굴 골탕 먹이자는 것인가”라며 비난하기도 했다(한국도로공사, 1980a: 29). “고속도로는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적어도 20년 앞을 내다보는 수준급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설부의 원칙은 당시 그들의 구상과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한국도로공사, 1980a: 27). 결국 대통령의 중재와 의지로 최종 430억으로 조정되기는 했지만 이들로 인해 경부고속도로가 전문지식과 세심한 설계, 경험이 결합되어야 할 근대적 인공물임을 상기시켰다는 점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제 고속도로 건설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을 살펴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대통령은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고속도로와 노선의 구상, 설계, 공사지 매입, 시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1킬로미터 건설에 1억 원 정도의 비용(당시 일본의 고속도로 건설에는 1킬로미터 당 8억 원 정도가 소요됨)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례를 쉽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음의 <표 2>는 당시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역할과 기여를 요약한 것이다.

    건설에 참여한 이들 각 주체들은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비로소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새로운 정체성 안에서 통합될 수 있었다. 한국도로공사는 1980년에 출판한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현장감독과 시공업자와 노무자, 미친 세 사람에 의해 가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도로공사, 1980a: 109). 지금이라면 최신 장비와 전문지식, 경험이 한 전문직 안에 통합되어 있겠지만 당시에 이것들은 군, 관, 민에 각기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동원하고 배치하는 일이 중요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각기 기능공, 기술자 혹은 산업의 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것이다.

    이 중 우리는 군인들, 특히 젊은 현역장교들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이 다른 집단에 비해 우수한 장비와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외에도 그들은 난공사 구간에서의 리더십으로 그 진가를 발휘했다(박상일, 2010). 그들은 건설현장을 “전쟁터”로 정의하고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라”는 믿음 아래 젊음과 패기, 사명감으로 무장된 조직이었다(한국도로공사, 1980a: 106). 또한 시방서에 명시된 조항 그대로를 준수하며 한 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원리원칙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을 공사에 투입한 이유 역시 공기 단축과 공사비 절약, 난공사의 지휘에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군인의 지휘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아 “원리, 원칙 외엔 쥐뿔도 모르는”, “새파란 장교 나부랭이들”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한국도로공사, 1980a: 111). 하지만 군인 스타일의 일처리 방식은 빠른 속도로 현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장감독으로 참여했던 박경부는 “현장경험이 없어 실제로 감독해야 할 임무를 모를 정도였으나 튼튼하게, 빠르게, 값싸게 시공해야 하는 것이 지상목표였으므로 그 책임은 막중했다(박경부, 2010: 81)”고 술회하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현장에서 함께 일한 군인들과의 업무 경험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기술적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1970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문제투성이였다. “완공 후 곳곳에서 균열과 부실이 발견되었고(김주원, 2010: 88)” 통행 차량도 많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잦았고 새 길에 익숙하지 않은 촌로들이 자동차와 나란히 고속도로를 걸어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최병두, 2010). 하지만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경부고속도로는 경제개발과 반공, 통일이라는 국가적, 정치적 비전과 가치를 물질화하는 데 성공했다(Jeon, 2010). “이것이 남북통일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인 대동맥이요, 또 민족적인 대사업(박정희, 1969: 261)”이라는 박정희의 구상은 한국의 독특한 기술-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며 실현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1960년대는 ‘과학기술의 붐’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활발하게 과학기술과 산업 부문의 제도화가 추진되었고 소위 최형섭과 오원철로 대표되는 기술엘리트의 시대를 열었다(최형섭, 1995; 오원철, 2006; 문만용·강미화, 2013). 기술 인력의 양성과 활용체계가 정립되었고 이것은 정부의 산업정책 하에 거시, 미시적으로 통제되었다(Han & Downey, 2014). 마침 중화학공업정책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 성공적 경험 사례로 대내외에 알려진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하면 된다는 군인정신과 산업발전을 통해 조국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결합되며 독특한 한국식 기술-정치 시스템으로 구축되었다.

    이제 군인정신이 기술문화에서 새로운 규범적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한국 공학의 지배적 실천은 “부족한 장비와 기술, 인력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의 절벽에 도전하고(한국도로공사, 1980a: 110)”, “토요일과 일요일이라곤 없으며(한국도로공사, 1980a: 106)”,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고 정력적으로 뛰어다니며 일에 몰두하는(한국도로공사, 1980a: 106)” 특징을 갖게 되었다. 상사의 명령에 질문하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 이것이 산업전사가 지켜야 할 수칙이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이후 중화학공업 추진과 연계된 남성 기술자 시대의 개막은 군인주의와 남성주의를 바탕으로 한국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이자 공학적 실천의 규율이 되었다.

       2. 당산철교: 전문성 이슈의 등장과 실패

    1990년대 중반에는 유난히 대형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당산철교 재시공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진 것도 이 시점이다. 사건의 경과를 <표 3>에 간략히 요약하였다.

    당산철교는 콘크리트 교각 위에 강구조물을 세운 트러스 플레이트 교량으로 총 길이 1360미터인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전용다리였다. 삼우기술단이 설계를 맡았고 1980년 2월 남광토건이 착공하여 1983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개통된 지 십년도 되지 않은 1993년 무렵 균열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시민단체에서 철교의 균열과 그 위험성을 지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서울지하철공사의 입장은 “공신력이 약한 단체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한승동, 1993)”는 것이었다. 이런 느긋한 분위기는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를 계기로 변화되어 그 다음 달인 11월 지하철공사는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결정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문가 집단을 비롯하여 지하철공사의 공식 입장은 당산철교의 지속되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보수보강을 거칠 경우 교량의 안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1995년 3월부터 3개월간 보수보강을 실시하였다. 때마침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1995년 4월)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 6월)가 연이어 발생하자 구조물의 안전성에 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이 때 조순 민선시장이 취임하게 되면서 당산철교의 운명은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보수보강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균열이 발생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자 서울시는 당산철교 철거 및 재시공 방침을 발표하기에 이른다(1995년 12월).

    서울시와 한국강구조학회 사이의 논란이 본격화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한국강구조학회를 주축으로 한 국내 전문가 집단에서는 당산철교에 비록 결함이 있지만 보수 보강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변한 반면 서울시는 미국 설계회사의 진단을 바탕으로 당산철교 균열의 본질이 구조적 결함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재시공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강승규, 1995; 대한토목학회, 1996). 양측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이것이 언론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짐으로서 안전과 관련된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당산철교 부실시공 및 재시공의 책임 소재를 가릴 것을 주장했다. 1996년 6월 서울지하철공사는 추후 시공사로부터 피해금액을 배상받기 위한 조치로 서울 남부지원에 증거보전을 신청했고 남부지원은 대한토목학회와 시설안전기술공단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에 따라 철거가 연기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서울시는 예정대로 당산철교를 철거했다(1996년 12월). 그로부터 4개월 후 대한토목학회 등은 당산철교가 재시공할 필요 없이 보수보강만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요지의 감정결과를 남부지원에 제출했지만(1997년 4월) 이미 당산철교는 사라진 뒤였다(한경희, 1997: 28).

    외부적으로 드러난 당산철교 논쟁은 당산철교 결함의 기술적 문제를 구조적 결함으로 볼 것인가(서울시), 혹은 보수보강이 가능한 부분적 하자(강구조학회)로 볼 것인가로 압축된다. 하지만 논쟁의 이면에는 보다 복잡한 문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산철교의 철거 결정이 임박했을 당시(1995년 12월), 서울시와 강구조학회는 서로의 의견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두 차례 가졌었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미국 산타페사의 전문가(서울시 측)와 강구조학회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기술적 견해를 개진했을 뿐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즉, 기술적 토론이나 협의를 통한 갈등의 해결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시와 강구조학회의 대립은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거의 35년 만에 민선시장을 맞이한 서울시의 경우, 안전 중심의 정책을 내세워 기존 서울시와의 차별성을 대내외에 과시할 뿐 아니라 철거 비용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철거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면, 비용 부담의 실제 주체인 서울시가 엄청난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철거로 야기된 시민들의 불편 또한 상당했다. 즉, 기술적 결함의 원인을 설계와 시공에서 찾고 이미 안전진단을 실시한 바 있는 강구조학회의 판단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강구조학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 강구조물의 안전 진단을 실시해 온 전문가 집단으로서 그들의 견해가 무시된다면, 전문가로서의 불명예는 물론이고 이미 안전 진단한 구조물에 대한 의심이 증폭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두 집단의 충돌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논쟁의 지형이 외형적으로는 기술적 판단에 관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누가 전문가인가, 시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대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대형사고 발생 가능성을 전제로 안전을 강조한 반면 강구조학회는 전문가 신뢰에 기초한 안전 주장, 즉 우리를 믿으라는 방식을 고수하며 당산철교 재시공의 경제성, 효율성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경제성 담론이 안전 담론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논쟁이 감정적 대립으로까지 확장된 이유는 이것이 누구의 전문성을 신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강구조학회는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해외 기술회사의 진단을 내세운 서울시의 행태를 “시민안전을 핑계로 한 서울 시장의 독선과 치적 세우기”이며 “국내 기술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비판했다(한국강구조학회, 1996: 121). 반면 서울시는 강구조학회의 문제제기를 “국내 학자들의 자존심을 내세운 이기적 발상(권오상, 1995)”이라며 오히려 외국 기술진의 진단방식이 “국내 보다 한 수 위(권오상, 1995)”라고 대응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논란과 갈등은 당산철교의 철거와 함께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논쟁 과정을 통해 한국 공학의 지배적 실천에 균열이 발생하고 도전받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 공학 전문직의 책임과 신뢰성을 둘러싼 새로운 현상이 등장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 형성된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 즉 성과 지향적, 속도 중심, 정부 주도의 이미지는 1990년대 문민정부 시대의 개막과 신기술 분야 기업 주도의 기술혁신 문화의 등장과 더불어 도전받게 되었다. 당산철교 철거를 둘러싼 논쟁은 한편으로 기존의 기술-정치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시민의 요구와 안전의 가치가 이 시스템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문제가 된 구조물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건설되었거나 1970년대 방식으로 시공된 것이었다. 붕괴된 성수대교는 1977년에 착공하여 1979년에 완공된 교량이었고 삼풍백화점은 1987년 설계되어 1989년에 완공, 당산철교는 1978년에 설계되어 1983년 완공된 구조물이다. 따라서 1990년대 중반에 불거진 구조물들의 결함과 붕괴는 우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부터 기인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언론과 전문가, 시민단체들 역시 반복해서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들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기술-정치 시스템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산철교는 독립된 하나의 강구조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드러난 건설 한국의 문제, 즉 빠르고 값싼 시공을 강조하는 문화, 정부와 기업의 유착, 기업의 책임의식 및 안전의식 결여 등과 같은 이미지들과 겹쳐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당산철교 논쟁은 한국 공학 전문직 집단의 형성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경부고속도로 사례에서 보았듯이,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정부 자체가 전문가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산철교 사례에서는 건설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이미 대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있고 그 저변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전문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서울시의 공무원 및 외국의 전문가 집단과 대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강구조 전문가들은 기술-정치 시스템을 구성하는 새로운 사회적 흐름과 요구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당산철교의 핵심 이슈를 기술적 전문성에 기초한 문제로 제한함으로서 서울시가 제기한 안전 이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사실상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 묵살에 대한 분노와 허탈감을 관의 태도 문제로 돌리면서 전문가 집단으로서 충분히 이슈를 주도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시대의 구조물 설계와 시공에 관여했던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리고 전문가집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철교가 철거됨으로써 여전히 관이 기술-정치 시스템을 통제하는 강력한 행위자로 역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4대강: 개발시대 공학적 실천의 재현과 갈등

    4대강 사업은 그 정체성과 성격, 효과에 대한 논란이 많아 정확한 시작과 종료일을 알지 못할 정도이다. 4대강 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이 이명박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체 사업 추진 경과를 검토하려고 한다. <표 4>에 4대강 관련 논의의 경과 및 정치, 사회적 이슈들을 간략히 요약하였다.

    4대강 사업의 정체성은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중요한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에 각 단계를 중심으로 4대강 사업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단계는 4대강 사업의 기본 틀이 짜인 시기로서 국회의원 이명박이 처음으로 경부운하 논의를 제기한 1996년 7월부터 대권주자로서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발표한 2006년 10월까지의 기간이다. 국회의원 이명박은 1996년 7월 18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운하 건설을 통해 물류비용의 3분의 1을 줄일 수 있는 데다 유지보수비가 거의 들지 않고 관광 및 레저 사업 활용, 수자원 활용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 안은 사실 1995년에 민간연구소인 세종대 부설연구원이 내놓은 내륙주운 건설론2)을 원용하는 수준(주명건, 1996; 최영철, 2006)에 불과했다. 당시 이 제안은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1997년 하반기에 금융위기가 도래한 데다 1998년 1월에 수자원공사와 국토개발연구원이 경부 운하의 타당성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은 이명박 시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던 2005년이다. 그가 시장 재임 시절에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2005년 10월 완공)이 우호적인 여론의 평가를 받았던 것이 대선공약을 설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10년 가까이나 폐기되었던 경부운하 구상이 어떻게 대선 공약의 핵심 내용을 차지할 수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은 4대강 사업의 기본 틀을 이해하고 향후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일부에서는 1996년 당시 운하 건설 논의가 주목받지 못하고 정부 기관에 의해 타당성이 없다고 결론 내려진 이유가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이슈이기 보다는 정치적 이유, 즉 이명박에 대한 정부의 견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최영철, 2006)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1996년은 한국 건설사에 있어서 매우 험난한 시기였다. 대형 재난과 사고들이 이어져 건설 산업 전반에 불신과 불만이 팽배했고 1997년 이후에는 경제위기로 인해 대형국책사업을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고려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계산으로도 10조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 운하 사업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거나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대운하 제안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며 자신의 경부운하가 1995년에 제시된 세종연구원의 최초 안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2005년 10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이명박 시장은 “선진국은 강과 바다를 제대로 이용하는 나라”라고 전제한 뒤 “경부운하는 국가 아젠다로 던져볼 만하며 기술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사업”이라고 주장했다(이준혁, 2005). 하지만 2006년 10월 대선공약으로 제안된 경부운하(안)는 세종연구원 보고서와 거의 차이가 없다.

    왜 이명박은 경부운하를 대표적인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한나라당 내부의 대통령 후보 경선과 관련한 경쟁구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자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에 맞서 영남을 공략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명박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기술-정치 시스템의 전략을 모방하고 재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구상 발표와 유사한 방식으로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발표했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운하와 금강과 영산강을 연결하는 호남운하를 각각 건설해 남쪽 지역의 물줄기를 하나로 연결한 뒤 이를 장기적으로 북한의 신의주까지 연결하겠다(전광삼, 2006)”는 것이었다. 운하 구상의 외연이 경부고속도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부에서 호남, 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개념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한 경부운하 건설은 당시의 뜨거운 사회적 관심사였던 경제성장 전략의 일환으로도 등장했다.

    한반도 대운하가 공식 등장한 이후 이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논란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대운하 사업이 대선공약으로 제기되었다가(2007년 6월) 결국 ‘4대강 정비사업’으로 전환되는 2008년 8월까지가 4대강 논란의 두 번째 단계이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의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등장하게 되자 이것은 더 이상 하나의 기술적 인공물이 아닌 특정한 의미를 지닌 정치적 구성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 결국 한반도 대운하 건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이 과정 역시 몇 번의 중요한 국면을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공식 확정(2007년 8월)되기까지의 시기이고 다음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의 과정(2007년 12월)이며 끝으로 한반도 대운하 건설 포기를 선언하게 되는 2008년 6월 19일까지의 시기이다. 이 국면들을 거치며 이명박은 처음에는 같은 당 경쟁자인 박근혜 캠프와 다음은 다른 당의 대선주자와 끝으로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많은 국민들의 반대에 대응해야 했다.

    이명박 후보의 ‘일 잘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는 대선 결과에서 나타났듯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대운하의 추진과정을 통해 불통의 이미지가 확산된 것은 큰 타격이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 및 일부 시민단체의 비판과 반발로 인해 대운하 건설이 반환경적이고 반경제적인 사업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대운하를 대선공약으로 채택할 것인지를 두고 반대 의견이 대두되었고 결국 20개의 가장 핵심적인 대선공약 가운데 15번째 순서를 차지하는 서러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대운하 건설은 새로운 추진 동력을 얻게 되었다.

    대통령 당선으로 힘을 얻게 된 이명박은 대운하의 임기 내 추진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전문가집단과 시민단체의 반대 행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울대 교수모임 (2008년 1월), 운하백지화 국민행동 발족3) (2008년 2월), 한반도 대운하 반대 교수모임4) (2008년 3월)이 창립되고 불교계와 법조계, 언론인들의 집단적인 반대가 이어졌다.

    대운하 추진 지역의 부동산 투기 조짐이 일고 2008년 2월 방송사의 비판적인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4월 9일 총선을 앞두고 대운하는 더욱 치열한 공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의 대운하 반대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5월 2일부터 미국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국면에서 이명박 정부는 대운하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일단은 치수나 수질 문제 중심으로 4대강을 정비하고 나중에 여론을 수렴한 후 운하를 연결하는 건설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5월 24일에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가 운하(이은우, 2008)”라고 양심고백을 하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대규모의 촛불집회로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자 정부는 대운하 논의를 당분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2008년 6월 4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급기야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이 반대하면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김석, 2008)”고 선언함에 따라 대운하 건설론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만인 2008년 12월에 정부가 녹색성장정책의 일환으로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을 발표하자 반대 진영의 활동도 다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2009년 9월에는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을 학문적으로 다루기 위해 대한하천학회가 설립되었고 2011년 9월과 11월에는 시민단체들이 1, 2차에 걸쳐 4대강 찬동인사 각 82명과 117명의 직업 분류별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김혜영, 2011). 2010년과 2011년에도 4대강 사업 추진과 관련된 각종 고소 고발을 비롯해 뜨겁고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4대강 논란의 세 번째 단계 (2008년 12월 이후 4대강 추진사업본부가 해체된 2012년 12월)인 이 시기에는 사업을 둘러싼 기술적, 전문적 견해와 갈등이 가장 많이 표출되었다. 그 논점을 아래 <표 5>에 간략히 요약하였다.

    위의 <표 5>에서 볼 수 있듯이,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사업의 본질에 대한 인식, 물 문제에 대한 진단, 문제 해결 방식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를 드러낸다. 4대강을 추진하는 측에서는 우리나라 물 문제의 본질을 물 부족과 수질 악화에서 찾고 이를 강의 기능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했다(염경택, 2010; 심명필, 2011; 이상돈, 2011). 이를테면, 강은 흘러야 하고 그러려면 강을 준설하고 보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인간화, 즉, 자연을 관리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반면 반대하는 측은 물 문제가 4대강 본류가 아닌 지천의 오염원 관리 부재와 생태계 파괴에 있기 때문에 강이 본래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복원하는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박진섭, 2009; 박창근, 2010; 김명식, 2010). 인간의 자연화, 즉 강의 본래 모습을 되살리고 자연생태에 인간이 적응하고 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찬성 측은 사업의 관점에서 4대강을 보았기 때문에 2012년 완공을 목표로 계획을 수립한 반면 반대 측은 이 사업이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의 환경 보존이라는 큰 틀에서 대응하였다.

    물 문제의 본질과 강의 복원에 대한 이들의 철학과 방법론 차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확대되어 각종 논란들, 즉 건설사의 담합, 녹조, 보의 균열, 물난리 등의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기술적, 환경적, 정치적 측면의 치열한 대립을 야기했다.

    요컨대 경부운하 건설 계획은 한 민간연구원의 연구보고서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후 우여곡절을 통해 ‘실현 가능한 기술 프로젝트’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사업의 정체성은 물류혁명을 통한 경제발전 기여에서 21세기 기후변화 대응으로 급격히 변화해 왔다. 처음부터 정치적 경쟁과 갈등의 한복판에 위치하면서 4대강 사업은 기술-정치적 구성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의 복원에 대한 개념적, 방법론적 관점을 둘러싸고 논란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문제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해결하는 과정 전반에 걸쳐 관련되고 개입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사례와 달리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은 설계와 시공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그 외연이 크게 확대되었다.

    녹색성장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추진은 과거 산업화 시대의 기술-정치 시스템에 최신의 지속가능성 이슈를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정부가 기획하고 전문가 집단이 동원되는 박정희 정부 시대의 지배적 실천과 규율은 국민 일반의 동의는 고사하고 전문가 집단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다. 기술적 인공물이나 개발을 더 이상 국가 발전의 이슈로만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앎의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정의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 시민 사회가 기술-정치 시스템의 중요한 요소로 진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전문성일지라도 그것이 시민과 다른 전문가 집단을 충분히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풍경도 있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적지 않은 엔지니어들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SNS)을 통해 남긴 관련 지식과 의견, 담합에 따른 과징금 소송에서 지난 정부의 부당한 압력을 실토한 건설사(김정수, 2014)의 사례는 21세기를 맞은 한국의 기술-정치 시스템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이 한국 공학 전문직의 자율성과 책임을 확대할 어떤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2)세종연구원은 전국 5개의 강을 운하로 연결하여 전체 길이 500.5km의 대수로를 건설하면 총 물동량의 25%를 운하로 운송할 수 있고 운임이 낮아 엄청난 국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공사비는 준설을 통해 나오는 골재와 부지 판매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 발생하는 고저차(高低差)의 문제는 갑문을 건설하여 해결하고 결국 내륙에 물길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주명건, 1996).  3)운하백지화국민행동은 2007년 9월 경부운하 저지 국민행동으로 발족되었다가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대운하 공약에 맞서기 위해 2008년 2월 19일 발족식을 가졌다. 발족될 당시 참가단체는 총 337개이며 대개 시민연대, 가톨릭환경연대, 환경운동연합, 학계, 기독교와 불교의 진보적 단체, 민주노총, 여성운동 및 문화운동단체 등 다양하게 구성되었다(운하백지화국민행동, 2008).  4)한반도 대운하 반대 전국교수모임은 2008년 1월 서울대 교수 80명으로 이루어진 운하반대 모임에서 출발하여 3월 25일 출범 당시에는 전국의 2,375명의 교수들을 바탕으로 창립되었다. 자연과학, 공학 분야를 포함하여 다양한 학문 분야 교수들의 참여가 있었지만 기관의 차원에서 보면, 인문사회계열 중심의 진보적 성향을 지닌 5개의 학회와 교수단체만이 참여하였다(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 출범 기자회견, 2008.3.25).

    Ⅳ. 기술, 정치, 그리고 공학 전문직

       1. 기술을 압도하는 정치

    기술과 정치에 관한 이 연구의 전제는 기술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술-정치 시스템의 차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정치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그것은 정치를 필요로 하고 정치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Hecht, 2001: 257).” 기술의 설계와 개발에 관한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는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성 역시 이러한 기술-정치 시스템을 통해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 시스템은 각 사례에서 살펴본 국가의 비전과 정책적 목표, 전문가 집단, 관료·기업·전문가 집단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관계, 시민단체, 전문지식과 노하우, 엔지니어들의 일하는 방식과 문화, 그리고 전문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인식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따라서 기술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함께 실어 나른다.

    예컨대, 경부고속도로는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개발주의의 상징이자 구현물로서 한국 공학과 엔지니어의 지배적 실천과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다. 당산철교는 문민정부와 민선시장이 주도한 안전성 이슈 위에 세워진 것으로 관 주도의 건설 관행도 함께 떠받히고 있다. 4대강을 따라 시원하게 쭉 뻗은 길에는 자전거 뿐 아니라 경제 성장과 환경보존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녹색성장의 정치 이념과 국토개발의 관점 도 함께 달리고 있다. 여기에서 관찰하게 되는 것이 바로 기술을 압도하는 정치이다.

    기술을 압도하는 정치란 기술-정치 시스템 안에서 기술적 인공물의 정의와 목적, 그리고 이와 연관된 전문성의 확인과 실행 등이 정치적 이슈에 의해 주로 결정되고 선점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을 설계하고 사용하는 전략적 실천, 즉 기술정치와 다소 차이가 있다. 공학 전문가집단이 스스로 자신들의 기술적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를 활용한 프랑스의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사례는 중앙 및 지방 정부가 정책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국토 개발과 기술적 결정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나 이견들은 쉽게 무시되고 비전문적 견해로 재단되었다. 상대방의 견해를 전문성을 결여한 주관적 견해로 치부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공격하는 일은 이들 논쟁 사례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사실상 당시의 정치적 의제나 사회적 여건에 따라 기술적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구본권, 2013). 이전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던 재시공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서울시, 4대강 사업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했다가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동일한 사업을 총체적 부실로 평가한 감사기관의 행동이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그렇다면 기술적 의사결정에 정치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관행은 공학 전문가들이 직업적 책임성을 인식하고 실행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 번째는 공학 전문가들 내부에서 기술의 중립성에 대한 믿음, 즉 순수하게 기술적 전문성만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럴 때에만 올바른 전문가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 정치적 과정에서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즉, 국가 발전을 위해 무엇이 올바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치 및 행정 분야의 엘리트들이 의사결정의 주요 축을 담당하고 공학 전문직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관리자나 임원으로 승진하면, 그 동안 어렵게 쌓아온 공학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판단보다는 조직의 관리자로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각에는 기원이 있다.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부여된 역할과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기능적 전문인의 모델은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 그리고 이과와 문과를 엄격히 구분해 왔던 교육적 관행에서 획득되고 재생산되어 온 것이다(정영욱, 2004). 기능적 전문화와 공학 전문직의 탈정치화된 역할 모델은 동전의 양면이다.

    두 번째는 엔지니어들이 정부정책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을 전문가의 견해에서 올바른 것으로 보는 과도한 정치화가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과학기술발전의 모든 제도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배분하는 환경에서 공학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정부의 지원과 정책적 방향에 기대어 연구개발 및 산업화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이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이러한 태도의 정착은 국가 산업정책의 우위 속에서 기술인력 양성정책과 과학기술정책이 추진되던 근대화 초기의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특히 대기업의 주도와 이를 지원하는 국가정책의 지속성에 의해 지지되었다.

    공학 전문직의 탈정치화와 과도한 정치화의 모순적 공존은 공학 전문가의 역할을 특정한 영역으로 제한시키면서 정부 정책에 순응적 태도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공학 전문직의 이미지는 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조차도 사회를 주도하고 개혁하는 주체이기보다는 사회 발전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 인식되어 이들의 직업적 책임성 역시 – 바람직하지 않지만 - 매우 소극적인 형태로만 기대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2. 관료 지향적 공학 전문직주의

    이공계 기피, 이공계 위기가 한창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던 2003년 8월 19일 한국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7개 단체의 장들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을 갖고 이공계의 공직 진출 확대를 건의했다. 이들은 건의문을 통해 기술직 공무원의 채용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임용 부처가 편중되어 각종 국가 정책 결정업무에 과학기술인력 활용이 미흡하기 때문에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 및 이공계 공무원의 주요 국가정책 결정과정 참여기회를 확대함으로서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한국공학교육학회, 2003).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 비율이 이공계인들의 정책 결정 참여를 촉진할 것이고 이것은 곧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이다. 관료지향성으로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논리는 한국의 공학 전문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에 속한다. 원로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박정희 정부 시절을 그들에게 좋았던 때라고 회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당시의 국가가 과학기술자들을 인정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과학기술 제도 및 산업 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일부 존재감 있던 이공계 출신 관료들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문만용·강미화, 2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직 진출을 강조하고 요청하는 일은 다른 전문직에서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전문직들은 대개 전문성과 공공의 이익에 대한 기여를 명분으로 단체를 구성하고 국가의 인정과 지원을 이끌어내며 협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다른 나라 공학 전문직들의 경우에도 그들 전공 분야의 학회 조직이나 협회 등을 통해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문직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5) 그렇다면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왜 관료지향성을 갖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그들이 등장하고 성장한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 있다. 한국의 공학 전문직은 과거의 장인 전통에서 발전되지 않았고 근대화 과정에 그 기원을 둔다. 기술이라는 용어 자체가 19세기 후반에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내용과 하는 일은 전통적인 유교 문화 안에서는 지위가 낮은 활동과 연계된 것으로 인식되었다(김상배, 2009: 313-315). 또한 일제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엔지니어들이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Han and Downey, 2014).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 이후에는 국가 건설이라는 임무에 본격적으로 참여해 왔지만 당시 대학생이나 대졸학력자에게 기대된 지성인으로서의 문화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엘리트로서도, 지성인으로서도 지위가 불명확한 한국의 엔지니어들에게 관료가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 외에 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직접 관여하는 활동이 과학기술활동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한국의 공학 전문직이 자율성을 지닌 중간 집단으로 성장하기에는 시간이 짧았고 이들이 처음부터 국가산업정책의 일환으로 양성된 직업 집단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문 모두가 크게 성장하면서 대다수의 엔지니어들이 기업에 고용되는 상황을 맞이했고 이에 따라 이들의 협상력과 전문가적 지위역시 더욱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들이 관료가 되면 어떻게 될까? 기업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꽤 매력적인 지위가 된다. 이런 점에서 공학 전문가들의 관료 지향성은 산업화 초기의 기술 관료의 지위에서 기업의 피고용인 지위로 급격히 전환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강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관료지향성이 공학 전문직의 역할과 책임성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러한 지향성은 전문가로써 자신의 전문적 견해를 자율적으로 표출하고 실행할 의지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발생하는데, 문제는 이로 인해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명박 전시장이 대운하를 추진할 당시 2007년에 [한반도 대운하는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물길이다]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필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서울시 행정에 참여했거나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6) 이들은 대부분 공학 전공자로 대운하 뿐 아니라 4대강 사업을 지지하고 찬성의 논리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전문가 집단이 정부기관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공학의 경우 정부의 정책 지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 기반 시설의 안전성이나 활용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공공의 이익과 안전을 대변하는 전문가 집단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다. 빈번히 발생하는 정부기관과 시민, 전문가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공학 전문가들에게 익숙한 전제, 즉 기술을 정치적 과정에서 분리할 수 있다는 믿음과 가정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지금의 한국 공학 전문직에게는 새로운 도전, 즉 관료지향성이나 정부 의존성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주도할 전문가 집단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주어져 있다.

       3. 공학 전문직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

    전문직 자율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윤리성(ethicality)과 사회적 책임이다. 전문가들에게 그들 직업의 자율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다른 일반 직업과 구별되는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자율성이란 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한 자기결정권, 즉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문직 연구자인 프라이드슨(Freidson, 1988)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의뢰가 들어오게 되면 그들만의 독립적 개념을 전개하여 그 문제와 문제를 의뢰한 일반인을 대하게 된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는가 와는 별도로 전문가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이해한다.

    엔지니어들 역시 외부에서 의뢰한 문제에 대해 그들만의 전문성을 기초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어떤가? 이들 역시 자율성을 지닌 전문가 집단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의 견해와 판단이 의뢰인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거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검토한 세 개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할 당시, 건설부 소속의 엘리트 엔지니어들은 다른 기관이나 기업의 예산안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의 견해가 고속도로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결국 대통령에 의해 조정되었고 건설 예산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유사한 사례를 당산철교 철거 과정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당시 공학 분야는 이미 대학과 학회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나름 제도적으로도 성숙한 전문가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강구조학회의 진단과 해결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의뢰인인 서울시는 오히려 이들을 외국의 다른 전문가 집단과 비교·평가하며 이들의 전문성을 폄하하기까지 했다. 4대강 사업에서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가에 따라 국가-엔지니어, 기업-엔지니어, 시민-엔지니어들7)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문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결국 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4대강 사업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합의된 견해는 도출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도 의뢰인인 정부와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에서 엔지니어의 자율성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제한되었다. 정부에 의해 정의되고 방향이 정해진 문제를 해결해야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기술적 내용으로 국한되었다.

    전문가 집단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들에게 기대된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기대를 포괄하지 못했다. 당산철교 철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강구조학회 전문가들이 문제를 기술적, 경제적 이슈로 한정했던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들은 논쟁의 와중에 안전과 경제성의 이슈를 통합하지 못했고 그들이 고려하는 사회적 책임의 개념도 사회가 기대하는 수준이나 범위를 포괄하지 못했다.

    또한 전문성과 책임의식의 결합 방식이 세 사례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경우에는 엔지니어의 전문성이 충분히 확보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주어진 임무를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는 종류의 책임감은 명확히 존재했다. 이와 달리 당산철교 사례에서 강구조학회는 그들 스스로 엔지니어의 전문성을 마땅히 사회가 인정해야 할 전문가 내부의 자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문가 내부의 소극적 책임 인식 위에서 공유되었다. 4대강 사례에서는 다양한 참여자들로부터 서로 다른 전문성과 책임 인식이 나타났다. 정부기관에서 사업 책임자, 혹은 관료로서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국가-엔지니어, 시공을 담당한 기업-엔지니어, 그리고 시민단체나 환경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자문한 시민-엔지니어들 모두 자신들의 영역에 독특한 문제 정의와 인식, 해결방안, 그리고 서로 다른 사회적 책임의식을 제기하고 논쟁했다.

    따라서 전문직 엔지니어의 전문성과 사회적 책임은 단순히 전제되거나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의되고 확인되어야 할 것으로 전환되었다. 고도로 전문화되고 복잡한 위험사회에서 공학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그들이 단순히 전문직의 경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사소통의 영역으로 나올 것을 요청하고 있 는 것이다. 한국의 공학 전문가들이 이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과 책임의 이슈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는 바야흐로 공학만의 이슈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안전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함께 논의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5)공학 전문직의 발전과정이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전문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를 연구한 대표적 저작으로는 미국의 엔지니어를 연구한 레이턴(Edwin Layton, 1986), The Revolt of the Engineers, 독일의 공학 전문직을 연구한 기스펜(Kees Gispen, 1989), New Profession, Old Order, 그리고 프랑스 사례를 연구한 앨더(Ken Alder, 1997), Engineering the Revolution)를 들 수 있다.  6)조사 결과, 집필에 참여한 18명 중 13명이 이명박 정부 때 고위 관료나 정부출연연구원과 공사의장으로 임명되었고 18명 중 7명은 이명박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청계천 복원사업이나 건설 분야 심의위원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7)이 세 가지 엔지니어를 구별한 이유는 엔지니어들이 속한 집단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들의 가치지향과 의사결정, 판단 등이 다르게 나타났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Ⅴ. 세 개의 기술 사례들 사이의 역사적, 사회적 연계

    이 연구는 전문직으로서 한국 엔지니어가 갖는 특징을 검토하며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이 우리 사회에 독특한 기술-정치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해 왔는지를 탐색하고자 했다. 우리가 살펴본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산철교 철거, 4대강 복원 사업의 설계 및 건설 과정에는 일정한 유형과 인과적 연계가 발견된다.

    이번 사례에서 살펴본 구조물들의 건설과 철거, 복원 과정은 단순히 기술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 개발, 반공통일의 정치이념, 경제성장, 비용절감, 안전 등의 가치와 정부 주도의 발전전략과 같은 요소들이 이들 구조물의 설계 및 시공 과정과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결코 단순한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아니라 반공과 민족주의에 기반한 개발국가의 상징을 건설하는 과정이었고 이것은 한국의 성공적 산업화를 대표하는 거대한 기술-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기술-정치 시스템은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남성중심의 일사불란한 위계적 거버넌스를 조직하고 산업정책의 우위 속에 다른 모든 것들을 재배치하며 개인들을 조국 근대화의 기수, 산업역군으로 호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공학 및 엔지니어의 지배적 이미지, 그리고 지배적 실천이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지배적이라는 것은 구별되고 특성을 지닌 어떤 이미지나 실천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Downey, 2009). 따라서 지배적 이미지란 특정 이미지의 수용이 확장되어(scale-up) 어떤 집단 내에서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그리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부시기에는 개발과 성장 위주의 가치와 그것을 위한 목표 지향적, 성과 지향적 효율성 추구가 당연시되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모든 태도와 행위를 규범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완성되었다.

    공학의 지배적 이미지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 공학을 전공해야 할지, 어떤 직업적 선호와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공학을 전공해야 할지와 같은 진입 단계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지배적 실천은 어떤 사람이 엔지니어로서 성공하거나 실패할 것인지, 공학 관련 분야에서 어떻게 일해야 할지를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지시한다. 현장에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엔지니어 모델은 구두로, 회고록으로, 교육과 현장에서의 만남과 경험을 통해 두루 전해진다. 실패의 모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실패했고 어떤 태도와 시도들이 좌절되었는지의 일화 역시 전해진다. 그러한 사례와 경험이 심각한 반대와 반론에 부딪히고 더 이상 정치적, 물질적 이득을 가져오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공학과 엔지니어의 지배적 이미지와 실천이야말로 기술-정치 시스템의 재생산을 가능케 한 주요 동학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형성된 기술-정치 시스템의 지속성은 그것을 재생산하려는 움직임에서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중반의 당산철교 철거논쟁이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이 당시 발생한 대형 재난 사고들의 원인을 단순한 기술적 실수나 오류가 아니라 압축적 근대화 과정의 부산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경부고속도로가 상징하는 한국 산업화 신화의 대표적 가치인 ‘값싸고 빠르게’와 연계된 지배적 실천에 대한 성찰적, 저항적 담론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반면 4대강 사업의 추진은 박정희 정부의 성공모델을 21세기의 방식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재현 전략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사례에서 우리는 가시화된 구조물을 통해 정부 정책의 목표와 가치, 그 성공을 드러내려는 정치적 열망을 관찰하게 된다. 이 열망은 관 주도의 기획과 대형 국책 사업 추진으로 정권의 목표와 승리를 성취하려는 오래된 기술-정치 시스템의 관성과 지속성에 의해 생존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정치 시스템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재배치하는 움직임 속에 변형된다. 예를 들어, 소극적 반대 속에 사실상 일사천리로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달리 당산철교 철거 논란에서는 전문가 집단의 적극적 반대와 의사표명이 있었다. 4대강 사업의 추진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들 내부의 반대 의견이 이어졌고 무엇보다 다양한 전공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논쟁의 지형이 변화되었다.

    이제 처음에 제기한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종종 전문직으로서 자신들의 위상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기술이 관련된 사건 사고에서조차 평론가적 모습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문가로서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거나 주도권을 갖지 못해온 사회적,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의 발전전략이 기술의 설계와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문가 집단의 성장과 시민사회의 성숙이라는 환경변화 속에서 과거와 같은 방식의 기술 발전 전략이나 공학적 실천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국내 원전비리,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생명윤리 관련 법안과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가 집단의 역할과 책임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움직임들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공학적 실천과 이미지를 변화시킬 새로운 도전과 변화가 가능할까? 4대강 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윤리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공학과 엔지니어의 등장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다만, 이것이 과연 기존의 기술-정치 시스템과 경합할 수 있을 정도로, 혹은 그러한 시스템을 변화시킬 정도로 성공적일 것인지가 관건이다. 특히, 기업이 기술-정치 시스템의 중요한 행위자로 진입하여 역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기술-정치 시스템에 어떻게 개입하고 변화를 도모할 것인지는 단지 공학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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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각 유관부처별 공사비 추정치 현황
    각 유관부처별 공사비 추정치 현황
  • [<표 2>] 경부고속도로에 참여한 각 주체들의 역할과 기여
    경부고속도로에 참여한 각 주체들의 역할과 기여
  • [<표 3>] 당산철교 철거 관련 주요 이슈의 변화 (1993-2005)
    당산철교 철거 관련 주요 이슈의 변화 (1993-2005)
  • [<표 4>] 4대강 관련 논의의 경과 및 사회, 정치적 이슈 (1995-2013)
    4대강 관련 논의의 경과 및 사회, 정치적 이슈 (1995-2013)
  • [<표 5>] 4대강 사업에 대한 찬반 입장별 차이
    4대강 사업에 대한 찬반 입장별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