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ppearance of the war in North Korean films during the Korean War

6.25전쟁기 북한 영화와 전쟁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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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This article is on North Korean films of 1950s produced during the Korean War: what kinds of films there were and how they reenacted the war for political purposes. In North Korea on a war footing, the most important was militarizing civilians to support the national mobilization system. Film was mobilized to imprint righteousness of the war on civilians and arouse the animosity towards their enemies. It was a tool of bringing back their memories of war and repression. The documentary films such as <The Righteous War> and <Announcing to the Whole World> were produced to deliver a message that it was the war of aggression of the American imperialist and they were fighting for emancipation of South Korea from American colonial rule. Characters which reminded bad memories of Japanese colonial period, such as police and landowner, were used in the films to emphasize that the South was under the domination of the American imperialist. North Korean civilians joined the army not to lose their land which had been distributed due to the land reform, because for them the American colonialism meant a threat of returning to repressed tenants. Farmers became partisans and joined the People’s Army to fight against Americans. In the films, scenes related to the land reform were used as flashbacks to stress the value for them to protect through the war. And scenes of air strikes and carnage used in the films also infused them with a combative spirit. They represented the brutality of the American imperialist. In short, these symbols and scenes of the films produced during the war were propaganda for militarizing civilians, reminding them of what they should protect and how brutal their enemy was.


  • KEYWORD

    North Korean Film , Korean War , Air Strike , National Mobilization System , the Land Reform

  • 1. 머리말

    흥미로운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영화는 근본적으로 스펙터클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의 이러한 점은 도드라진다. 예컨대 군중의 환호 속에 정복된 도시에 입성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승리의 쾌감을, 반대로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의 모습과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잊지 말아야 할 적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유지시킨다. 또한 극적으로 묘사된 영웅적 행위는 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적 상황은 반전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이러한 효과들로 인해 산업적으로는 전쟁영화라는 장르가 탄생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전쟁을 고무하거나 전의를 북돋는 역할을 영화가 맡았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전쟁을 기록하거나 재현해왔다. 영화탄생 직후 신기한 볼거리를 추구했던 영화업자들에 의해 미서전쟁(1898), 보어전쟁(1899), 러일전쟁(1904) 등이 영화로 촬영되어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총력전의 개념이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부터 각국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영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혹은 회사를 운영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전쟁 발발 후 외무부 안에 웰링턴 하우스(Wellington House)라고 불리던 선전국을 두었으며,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15년 가을부터는 민간의 선전영화 제작을 지원하기 시작했다.1) 1917년 뒤늦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에서도 유명영화감독인 D.W. 그리피스(D.W. Griffith)가 유럽전선에서 선전영화를 촬영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프랑스 전선을 둘러본 후 영국에서 전장을 재현한 <세계의 심장(Hearts of the World)>이라는 선전영화를 촬영해 큰 성공을 거뒀다.2)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1917년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군부서가 외무부의 선전과로 통합되었으며 이곳에 사진영화국(Bildund Film-Amt, BUFA), 즉 부파가 신설되어 모든 영화활동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파는 이미 선전영화를 제작하고 있던 민간영화회사인 데엘게(DLG)와 경쟁했는데, 1917년 12월, 전시 독일영화산업의 통합을 목적으로 우파(UFA)영화사가 설립되어 대부분의 영화회사를 흡수, 전시 독일영화산업을 통할하게 된다.3) 이렇듯 1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는 텔레비전이 그 역할을 이어받을 때까지 전쟁기록과 선전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논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6.25전쟁 당시 제작된 북한영화이다. 6.25 전쟁기 북한영화에 관한 남한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는 미진하다.4) 연구물의 수량도 적을뿐더러, 연구의 폭과 넓이 또한 깊지 못하다. 반미사상과 전쟁기 제작된 북한영화와의 관계에 주목한 함충범의 연구 외에 6.25전쟁기 북한영화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어떤 영화가 제작되었는지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논문에서는 주권이 제한되는 전시에,5) 북한 당국이 전쟁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동원을 위해 영화를 이용하여 북한 인민들의 전쟁기억을 어떻게 선택, 유지, 강화, 지속시켰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에서 발간된 문헌자료들을 통해 영화에 관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영화가 국가에 의해 제시된 전쟁 슬로건을 반복 학습하고, 전쟁의지를 유지, 강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이자 국가에 의한 ‘전쟁기억의 역사화’의 한 수단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1)S. P. Mackenzie(2001), British war films, 1939-1945: the cinema and the services, London : Hambledon and London Ltd, pp.4∼5.  2)폴 비릴리오, 권혜원 옮김, 『전쟁과 영화』, 한나래, 2005, 58∼59쪽.  3)볼프강 야콥센, 안톤 게스, 한스 헬무트 프린흘러 엮음, 이준서 옮김, 『독일영화사 1890년대-1920년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63쪽.  4)북한영화사 관련 주요 연구물은 다음과 같다. 최척호, 『북한예술영화』, 신원문화사, 1989., 『북한영화사』, 집문당, 2000. 민병욱, 『북한영화의 역사적 이해』, 도서출판 역락, 2005. 함충범, 「한국전쟁이 북한영화에 미친 영향 연구-반미구국(反美救國) 논리와 반미사상을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2호,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2006. 이명자, 『북한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 ‘군사위원회조직에 관하여’를 채택”했으며, “일체의 주권을 군사위원회에 집중시켜 전체 인민과 주권기관, 정당, 사회단체 및 군사기관은 그 결정과 지시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선인, 2005, 379쪽.

    2. 전쟁의 발발과 영화제작의 양상

    해방 당시 영화관련 인력과 인프라가 전무하던 북한에서는 1946년 점령군인 소련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영화제작 인프라 또한 구축되기 시작하여 1947년 2월,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가 설립되었고, 인력, 시설, 설비 등을 확충해 1949년부터 예술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6) 더불어 북한 전 지역에 영화관 건설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1개소이던 북한지역의 영화관 수가 1949년에는 110개소로 확충되었다.7) 이렇듯 6.25전쟁 직전 북한의 영화산업은 그 토대가 완성되어갔다.

    6.25전쟁 발발 직전, 남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소규모 전투를 지속했다. 북한의 예술영화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1950), 기록영화 <은파산 전투>(1950)8) 등이 38선을 사이에 둔 국지전을 영화로 재현한 것이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26일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방송연설을 통해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선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했으며, 모든 인력과 물자는 전쟁 수행에 동원하도록 했다.9) 전쟁 발발과 동시에 영화제작조직은 전시체제로 개편되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종군작가로, 영화제작인력은 종군영화반에 소속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예술소편대활동과 기록영화부문에서 주로 활동했다.10)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가 시작되자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의 주요한 설비와 인력은 평안북도 강계를 거쳐 1952년 과거 만영(滿洲映畵協會, 滿映)이 있던 중국 장춘으로 소개되었다.11) 그 사이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는 파괴되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휴전이후까지 중국 장춘에서 영화제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1) 뉴스영화(시보영화)

    북한에서는 전쟁 발발 3일후부터 12개의 종군촬영반이 조직되었다. 종군촬영반의 기록영화촬영가들은 인민군과 함께 종군하며 전투실황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뉴스영화인 <조선시보> 외에 <조국통일을 위하여>라는 제호를 단 새로운 전시뉴스영화를 제작했다. 1950년 6월 30일 공개된 <조국통일을 위하여> 제1보에는 서울에 입성하는 인민군의 모습이 담긴 소위 서울해방전투와 해방지구에 실시된 토지개혁의 모습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국통일을 위하여>는 휴전시까지 제작이 이루어졌다.12) 그 외, 기존의 <조선시보>도 계속 만들어졌다.13)

    북한에서는 이 뉴스영화들이 “전쟁 승리를 위한 전체 조선 인민 특히 후방 인민들의 전선 원호와 후방 공고화를 위한 애국적인 투쟁을 진실성 있게 형상함으로써 그들을 전쟁의 종국적 승리에로 고무 추동함에 기여하였”고, “쏘련을 위시한 형제 국가들의 물질적 원조와 지지 성원, 이 나라 인민들과의 친선에 대한 이야기도 수록”14)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다큐멘터리(기록영화)

    전쟁기간 북한에서는 <정의의 전쟁>(1950), <전세계에 고함>(1950), <승리를 향하여>(1951), <식량전선>(1951), <싸우는 철도 일꾼>(1952), <고원지대 조사단>(1952), <땅의 주인들>(1953), <신천대중학살사건>(1953)등 총 23편15)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16)

    이들 기록영화들은 뉴스영화와 마찬가지로 애국주의와 국제주의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 내용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 미국의 침략과 전쟁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반미), 둘째, 북한 인민들이 전쟁승리를 위해 헌신하는 내용(애국), 셋째, 각종 행사 기록물(행사)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미국의 전쟁도발과 미군의 전쟁 만행을 고발한 작품들을 살펴보자. 전쟁 발발 직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미국의 전쟁도발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한 작품들이 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정 의의 전쟁>(1950)과 <전세계에 고함>(1950)이다. 이 영화들은 6.25전쟁의 발발이 미국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미국의 전쟁도발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한 목적대로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다. <정의의 전쟁>의 전체적인 구성은 해방 후 북한과 남한의 대비적인 모습으로 시작하여 미국이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과정, 북한의 평화적 통일 노력, 미국의 북침, 김일성의 방송연설, 이에 호응한 북한주민들의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1951년 체코에서 열린 제6차국제영화축전에서 기록 영화상을 받았다.17) <전세계에 고함>은 미국의 전쟁 도발에 대한 진상을 보여주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경각심을 높이며 전쟁반대와 평화옹호를 주장한 작품이다.18)

    다음으로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로 <신천대중학살사건>, <세균만행>, <병상포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신천대중학살사건>은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을 기록한 영화로 “무고한 농민, 부녀자들까지 학살한 인간백정 미군”의 만행을 폭로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세균만행>은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세균전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고 폭로 단죄하고, 세균탄에서 나온 각종 세균들의 종류와 특성, 매개 세균들이 병을 일으키는 과정을 과학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보여”19)준 과학영화이다. <병상포로>는 미국이 인민군 포로들에게 독가스탄을 사용하여 손, 다리가 썩어 절단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20)

    둘째, 전쟁승리를 위한 군인과 노동자, 농민들의 활약을 그린 애국주의 영화들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승리를 향하여>, <식량전선>, <싸우는 철도일꾼>, <땅의 주인들>, <고원지대 조사단> 등이 있다.

    <승리를 향하여>는 “모든 것을 전쟁 승리를 위하여”라는 김일성의 호소를 받들고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는 인민의 영웅성과 용감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식량전선>은 “식량을 위한 투쟁은 전선을 위한 투쟁”이라는 당의 호소를 받들어 전선 용사에 못지않게 싸운 농민을 형상화했다. <싸우는 철도일꾼>은 전시에 온갖 난관들과 장애들을 극복하고 전선 수송에 궐기한 철도 일꾼들을 소재로 만들었다. 8차 국제영화축전에서 기록영화상 수상했다. <땅의 주인들>은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발전소가 파괴되고 관개시설에 대한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음에도 농민들이 춘기파종과 모내기, 추수를 완료했는데, 토지를 분여받고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이 노동계급과 더불어 국가의 주인으로 <승리를 향하여>는 “모든 것을 전쟁 승리를 위하여”라는 김일성의 호소를 받들고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는 인민의 영웅성과 용감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식량전선>은 “식량을 위한 투쟁은 전선을 위한 투쟁”이라는 당의 호소를 받들어 전선 용사에 못지않게 싸운 농민을 형상화했다. <싸우는 철도일꾼>은 전시에 온갖 난관들과 장애들을 극복하고 전선 수송에 궐기한 철도 일꾼들을 소재로 만들었다. 8차 국제영화축전에서 기록영화상 수상했다. <땅의 주인들>은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발전소가 파괴되고 관개시설에 대한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음에도 농민들이 춘기파종과 모내기, 추수를 완료했는데, 토지를 분여받고 땅의 주인이 된 농민들이 노동계급과 더불어 국가의 주인으로 전쟁을 위해 헌신한다는 내용이다.21) 더불어 “북부 고지대개발사업을 진행할데 대하여”22)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바탕을 둔 학술조사 기록영화인 <고원지대 조사단>도 전쟁 승리를 향한 애국주의 영화로 꼽을 수 있다.

    셋째 각종 행사기록영화들이다. 우선 전쟁 승리를 기록한 영화로는 <정전담판>, <승리의 날> 등이 있다. <정전담판>은 미국과의 휴전회담을 기록한 영화이며 <승리의 날>은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이 미국의 공격을 막아낸 승리의 기록임을 강조했다. 기타 행사 기록영화로는 <1951년의 5.1절>, <1951년의 8.15> 등 북한의 국가 기념일 행사기록영화와 <제3차 국제청년학생축전>, <중국관광단>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친선행사를 기록한 기록영화들을 꼽을 수 있다.

       3) 예술영화

    전쟁초기 북한에서는 “가장 기동적이고 전투적이며 그 제작과정이 보다 속도적인” 뉴스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반면,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면서 “인민군대와 후방인민들에 대한 애국주의, 영웅주의 교양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예술영화제작이 이루어졌다.23)

    예술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점은 1950년 하반기, 6.25전쟁에 중국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북한에 유리하게 바뀐 후부터이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표면적으로는 내전의 성격이던 전쟁이 국제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장기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예술은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24)는 김일성의 교시가 있은 후, 국립영화촬영소에서는 전쟁 장기화를 대비하여 예술영화(극영화) 제작을 추진했다. 1951년 <소년빨치산>, 1952년 <또 다시 전선으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1953년 <비행기사냥군조>, <정찰병>, 등 총 5편의 예술영화가 전쟁기간동안 제작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4년에는 <빨치산의 처녀>가 제작되어 전쟁기 지속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예술영화제작을 연속성 있게 이어갔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영화는 <소년빨치산>이다. 시나리오는 집체작이었으며, 시나리오가 완성된 직후인 1951년 4월 25일부터 촬영이 시작되어 만2개월이 지나지 않은 6월 23일 완성되었다.25)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서울 이남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여 빼앗겼던 서울을 다시 회복한 직후, 그러니까 중국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춘계공세를 준비 중이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선이 고착화 된 1951년 6월에 완성된 작품이다.

    서울의 경우 개전 후 인민군, 국군(유엔군), 중국군, 국군(유엔군)에 점령된 사실을 보더라도 전황에 따라 점령지 주민들의 동요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러기에 북한에서는 적에게 일시 점령된 지역의 주민들에 대해 적에 대해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도록 교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년빨치산>과 같은 적에게 일시 점령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제작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내용도 미군에 의해 점령당했던 평안북도 안주를 배경으로 안주탄광소년근위대원들의 유격투쟁을 소재로 삼았다.

    연출은 전쟁 직전 남한에서 <마음의 고향>(1949)을 연출한 바 있었던 윤용규가 담당했다. 그는 해방 직후 설립된 남한의 좌익계열 영화 인조직인 조선영화동맹의 서울시지부 위원이었다. 개전 초기 월북하여 북한의 예술영화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화의 주요 출연진들 중 일부는 전쟁 중 월북한 인물들이었다. 면당위원장 역의 남승민, 경찰대장 역의 독은기가 대표적이다. 이 둘은 1940년대 가장 인기 있는 배우들로써 일제말기에는 주요 선전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해방 직후 남승민은 윤용규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조선영화동맹 서울시지부 위원이었고, 독은기는 남한의 조선영화동맹 집행위원이었다. 윤용규, 남승민, 독은기 등 남한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소년빨치산> 제작에 참여한 것은 이들의 연출능력과 스타성을 활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쟁 중 월북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체제의 우월성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함도 있었다.

    <소년 빨치산>에 이어 제작된 영화는 <또다시 전선으로>이다. 이 영화는 1951년 6월 이후 전선이 고착화 되어가면서, 휴전을 대비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남북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고지쟁탈전을 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내용도 이와 관련 있다. “1951년 어느 한 고지쟁탈전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우고 중상을 당한 주인공 강성근 분대장이 후방병원에 후송되여 치료를 받은 후 또 다시 전선으로 달려 나가 고지습격 전투에서 빛나는 공훈을”26) 세우기까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원래 제목은 <조국을 위하여>이었으나 제목에 비해 내용이 빈약하고 형상 또한 부족한 점을 가졌다는 김일성의 지적을 받고 수정되어 1952년 <또 다시 전선으로>라는 제목으로 개작 완성되었다.27)

    시나리오는 한원래와 강호가 맡았다. 과거 카프 출신의 영화인이던 강호는 시나리오 외에 영화의 미술과 처음 예술영화의 연출을 맡은 천상인을 도와 이 영화가 제7차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여받는데 공헌했다.28)

    다음에 제작된 영화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시나리오는 집체작이며, 윤용규가 연출했다. 스태프와 배우가 누구였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1956년까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던 작품이었고, 일본 등지에서 상영되었다.29) 내용은 전쟁 전 토지를 분여 받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평화롭게 살던 주민들이 전쟁으로 미군에 의해 토지와 식량을 빼앗기고, 학살을 당하게 되자 빨치산이 되어 미군에 대항하여 마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이다.30) 후방의 주민들에게 적에게 일시 점령되더라도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53년에는 <비행기사냥군조>와 <정찰병>이 제작되었다. <비행기사냥군조>는 김일성이 미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비행기사냥군조를 만들라는 교시에 부응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다. 미군의 공중폭격은 개전 직후부터 북한군과 북한 주민들에 있어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특히 유엔군의 참전으로 패전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에 미군의 비행기는 전쟁 패배를 상징했다.31) 이에 대해 김일성은 수차례에 걸쳐 대항공 대책으로 비행기사냥꾼조의 결성과 운용을 강조했으며 이에 따라 제작된 영화가 바로 <비행기사냥군조>이다.

    시나리오는 한상운이 썼으며,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인 <내고향>을 연출한 강홍식과 촬영을 맡았던 고형규가 이 영화에서 다시 함께 작업했다. 내용은 동해안의 어느 기지에서 미군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는데 앞장선 김만식을 주인공으로 도시, 농촌, 공장, 철도 등을 지키는 비행기사냥군조의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

    <정찰병>은 <또 다시전선으로>에서 보인 각종 오류32)를 극복한 전쟁기 제작된 영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시나리오는 한상운, 연출은 전동민이 맡았으며 휴전 직전인 1953년에 완성되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부산부근의 전선을 배경으로 정찰임무를 맡은 리학철이 이끄는 부대를 중심으로 미군 장교를 생포하고 적을 교란하는 등의 성과와 포로 심문을 통해 알게 된 적의 포진지를 습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는 내용이다.33)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휴전을 앞두고 전쟁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 전쟁기간 북한군의 가장 큰 전과를 냈던 개전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남한 인민들이 북한군을 환영하고 전쟁을 통해 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초기 북한영화의 형성에 관해서는 「북한영화의 탄생과 주인규」(한상언, 『영화연구』37호, 한국영화학회, 2008)를 참고하라.  7)국립출판사, 『1946∼196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경제발전통계집』, 평양 : 국립출판사, 1961, 179쪽.  8)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조명 스태프로 근무했던 영화감독 안현철은 6.25전쟁 직전 기록영화 <은파산의 전투>(녹취문에는 <운파산의 전투>로 오기)의 촬영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한국영상자료원(KOFA),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156쪽.  9)김일성, 『김일성 저작집』 6권, 평양 :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9쪽.  10)문의영, 「해방후 영화 예술의 발전」, 『빛나는 우리예술』, 평양 : 조선예술사, 1960, 138쪽.  11)일본의 영화학자 몬마 다카시에 의하면 전쟁기 북한 영화는 과거 만주국의 만주영화협회이던 중국의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몬마 타카시, <초창기 북한 영화와 일본인>, ≪조선일보≫인터넷 판, 2000.12.15. ; http://cinema.chosun.com/site/data/html_dir/2000/12/15/20001215000093.html) 그러나 북한문헌에는 당시 촬영소가 의주로 소개되어 미군의 공습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영화제작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서 영화제작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리종우, <전시 첫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이 창작되여 보급되기까지>, ≪조선영화≫1997년 7월호, 41∼42쪽. ; <[영화의 력사를 거슬러] 전쟁의 불길속에서 창작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조선영화≫1987년 5월호, 77쪽.) 그러나 1954년 국내에서 영화제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는 김일성의 교시(김일성, 『김일성저작집』 8권, 평양 :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38쪽.)를 고려해 볼 때, 중국에서 제작되었다는 몬마 다카시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단, 처음부터 영화제작이 중국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중국 장춘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그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김일성의 문학예술 부문의 지도 내용을 담고 있는 『태양의 빛발아래 만발한 문학예술』1권(리일복, 김영희, 평양 : 문예출판사, 1983, 462쪽.)에 1952년 여름, 김일성이 영화인들과 그 가족들을 보다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는 특별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52년 여름경에는 촬영소의 장춘 이전이 마무리 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소희조,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주체영화예술(2) -조국해방전쟁시기 영화예술사업 조직령도->, ≪조선영화≫, 1997년 6월호, 23쪽.  13)6.25전쟁기 제작된 북한의 뉴스영화에 관해서는 문헌에 따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조국통일을 위하여>의 경우 문의영은 총 40편이 제작되었다고 기록했고,(문의영(1960),138쪽.)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서인 『조선전사』(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1981), 『조선전사』27권, 평양 : 과학,백과사전출판사, 383쪽.)에는 총 48편이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시보>와 같은 일반 뉴스영화의 제작편수도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있다. 이렇듯 문의영의 기록을 따르면 전쟁기간 70여편이 제작된 것이고, 『조선전사』에 따르면 80여편이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느 한 기록이 집계의 오류이거나 집계일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14)문의영(1960), 138쪽.  15)아래의 표에 기록되지 않은 5편의 다큐멘터리는 각종 문헌에 그 제목이 알려지지 않았다.  16)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27권, 평양 :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383쪽.  17)장명욱, <당의 품과 영화연출가 천상인>, ≪조선영화≫ 1986년 4월호, 47쪽.  18)문의영, 142쪽.  19)소희조(1997ㄴ), 24쪽.  20)문의영(1960), 146쪽.  21)문의영(1960), 142∼143쪽.  22)김일성, 『김일성 저작집』 7권, 평양 :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350쪽.  23)소희조(1997ㄴ), 23쪽.  24)김일성(1980ㄱ), 222쪽.  25)리종우(1997), 41∼42쪽.  26)장명욱(1986), 쪽47.  27)<전쟁의 불길속에서 창작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조선영화≫, 1987년 5월 호, 78쪽.  28)소희조, <강호와 그의 창작활동>, ≪조선영화≫1997년 3월호, 56쪽.  29)1956년 10월에 있었던 제2차 작가대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주동인은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여러 영화들을 열거한 후 이들 영화들이 “인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국제 무대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주동인, 「씨나리오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제2차 조선 작가 대회 문헌집』, 평양 :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282쪽.) 또한 일본 등지에서 이 영화의 상영이 확인된다. 와다 하루키는 1954년에 재일조선인단체와 시즈오카 좌익 영화서클협의회가 주최한 북한영화 상영회를 통해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와다 하루키, <[와다하루키회고록] 김달수의 ‘현해탄’…불굴의 민족정신 도도히>, ≪한겨레≫2006.6.9.  30)<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시나리오는 『조선영화문학선집 1』(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 평양 :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 실려 있다.  31)김일성은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던 시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군관, 장령회의(1950.10.30)에서 “새로운 반공격준비를 철저히 갖추자”(김일성(1980ㄱ)153∼166쪽.)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인민군대가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되자 일부 사람들은 마치도 공화국이 망하고 인민군대가 패배한것처럼 생각하면서 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동요하였으며 심지어 일부 일군들은 적의 ≪기술적우세≫를 과대평가하면서 비행기가 없이는 적들과 싸우기 곤난하다고 하였으며 우리가 후퇴를 하게 된것도 비행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비행기가 없이는 적들과 싸우기 곤난하다고 하는 것은 패배주의적 사상입니다.”라고 말하며, 미군비행기에 대한 일반의 공포를 패배의식으로 규정했다. 또한 “적비행기를 쏴떨구기 위한 투쟁을 널리 벌려야 하겠습니다. 적비행기와 싸우려면 절대로 적비행기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비행기를 무서워하면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적과 싸울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적비행기와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 적기가 우리의 상공에 함부로 날아들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라며 반항공대책을 주문했는데 “고사포와 고사기관총뿐아니라 중기관총, 경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저격무기를 다 동원”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김일성의 주문은 계속 이어졌는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238호(1950.12.29) “비행기사냥군조를 조직할데 대하여”(김일성(1980ㄱ), 233∼234쪽.),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간부들과의 담화(1951.7.13.)에서 “반항공방어를 강화할데 대하여”(김일성(1980ㄱ), 408∼414쪽.)) 등을 통해 이례적이라 할 만큼 지속적으로 반항공대책을 제기했다. 북한의 미항공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알 수 있다.  32)<조국을 위하여>에 대해 김일성이 지적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민군대의 숭고한 애국심은 조국과 향토, 동지와 부모처자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시면서 인민군대의 대중적 영웅주의와 주인공을 잘형상하는 문제, 영화의 제목을 내용에 맞게 고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시였다.” 장명욱(1986), 47쪽.  33)장명욱, <인민군대의 영웅성과 용감성을 보여준 예술영화 ≪정찰병≫, ≪조선영화≫, 1987년 6월호, 24∼25쪽.

    3. 전쟁기 북한 예술영화의 특징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전쟁기에 제작된 북한 예술영화들은 전황에 따라 선전의 목표와 내용을 달리 설정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적개심을 앙양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군민이 합심하여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 주동인은 1956년 제2차 작가대회에서 전쟁기 제작된 영화들에 대해 “조선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 모습을 형상화한 거세찬 애국주의 사상으로 일관된 성과작들로서 떳떳이 자랑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그 특징과 성과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이처럼 6.25전쟁 중 제작된 예술영화는 북한 인민들의 영웅적 행위를 취재하여 애국적주제로 형상화했으며, 또한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가의 유기적인 협력은 작품의 질을 높혔고, 이와 함께 시나리오의 구 성(슈제트)역시 잘 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북한에서는 애국적 영웅주의라는 말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북한 예술영화의 성과로 꼽고 있는 애국적 영웅주의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매개 영화에서 애국적 영웅주의의 표출 양상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토지개혁으로 상징되는 전쟁 전의 모습을 통해 전쟁을 통해 지켜야할 대상을 설정하고, 둘째, 공습과 학살로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며, 셋째, 이 전쟁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무장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이 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주인공의 애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는 정당성을 얻는다. 위의 세 가지 항목은 전쟁 당시 북한주민들이 전쟁에서 수호해야 할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끄집어 낸 집단 기억의 일부이다. 애국적 영웅주의를 형상화하기위해 북한주민들의 집단 기억을 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토지를 매개로한 군민일치 사상

    북한에서는 1946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고, 이에 따른 현물세를 거둬들였다. 토지개혁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전쟁기간 국군과 유엔군에게 일시점령 당한 지역에서는 북한체제하에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에 의해 토지개혁에 대한 반혁명이 일어났으며, 공포감에 사로잡힌 이탈자들이 속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35) 이 점은 북한정권의 근간을 허무는 우려할만한 사태였다. 피점령지 대부분을 회복한 후, 북한에서는 적에 대한 협력자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처벌하고, 광범한 대중 정치선전사업을 전개하기로 한다.36) 이즈음 제작되기 시작한 북한의 예술영화에서는 전쟁 전 토지개혁과 피점령기간 적에 대한 협력자들의 악행이 중요한 선전 요소로 다뤄졌다.

    가장 중요하게 다룬 부분은 토지개혁 문제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토지개혁이야 말로 전쟁기간 북한주민들과 인민군이 결속하는 가장 큰 무기로 제시된다. 토지를 분여 받았던 소작인들은 빨치산이 되거나 빨치산을 도와 미군에 저항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농민들의 토지를 미군과 지주에게 뺏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여 군민일치의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각각의 영화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농촌을 배경으로 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37)이다. 이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은 전쟁 전인 1949년에서 시작하여 6.25전쟁 발발, 미군에 점령, 다시 미군을 물리치는 1951년까지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포수부부인 운길과 순덕은 라디오에서 토지를 분여 받은 김복돌의 강연을 듣는다. 자연스럽게 순덕은 소작인이던 과거 일제시대를 회상한다. 그들은 흉년에 소작료를 내지 못해 마을의 지주인 전동률에게 소작을 빼앗기고,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려 했지만 산 소유주인 박남춘에게 다시 쫓겨난다. 이들은 포수가 되어 황승대로 사냥을 하며 생활하게 된다. 순덕이 회상에서 깨어나면 벽에 걸린 것은 화승대가 아닌 엽총과 탄띠이다. 순덕은 “화승대를 쏘다가 왜놈들한테 빼앗기구 해방이 된 후 저 렵총을 받았을 땐 정말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나왔어요. 저애들은 아마 우리가 겪은 세상을 못꿀게야.” 라고 말하고 그 말을 받아 운일이 “그런 세상이 다시 왔다간 큰일나게”라고 대답한다.38)

    이 엽총과 탄띠는 미군이 마을에 들어 온 후 운일과 순덕이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는 것을 예측하게 만드는 소품이다. 또한 이 회상 장면은 지주 전동률과 산 소유자인 박남춘이 미군의 앞잡이로 등장함을 예고한다.

    <정찰병>에서는 토지를 매개로 한 군민일치의 모습이 대사와 회상을 통한 직접적인 방식이 아닌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주인공 리학철(박학 扮)이 정찰임무 도중 국군을 만나 도망치던 중 어떤 농가에서 노파(김연실 扮)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탈출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면에 대한 북한문헌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감자는 땅 속에서 자라는 것으로 감자 그 자체가 영화에서는 토지를 의미한다. 땅으로 상징된 할머니의 감자를 받아든 학철이 부대로 복귀한 후 대원들과 감자를 나눠 먹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것은 땅을 매개로 군민일치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빨치산의 처녀>에도 전쟁 전 토지분여와 현물세 납부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빨치산 병영에서 주인공 영숙(문예봉 扮)은 토지 분여를 받아 감격해했던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2) 공습과 양민학살-미군에 대한 적개심

    전쟁기 북한 예술영화의 가장 큰 선전 목표는 미군에 대한 적개심 앙양이다. 미군에 대한 적개심은 주로 공습과 학살의 기억에서 나온다. 미군은 개전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후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 에 무차별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에게 비행기의 공습은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를 공포였으며 미군에 대한 적개심의 상징이었다. 이 시기 제작된 모든 영화 속에서 미군의 공습은 미군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또 다시 전선으로>와 <빨치산의 처녀>의 첫 장면에서처럼 영화는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제시한다. <빨치산의 처녀>의 오프닝은 다음과 같다.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파괴된 도시는 북한주민들의 공습과 피점령의 두려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이다. 특히 공습으로 입은 피해는 주인공들이 미군에 대항해 투쟁하게 되는 이유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빨치산의 처녀>의 주인공 김영숙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전선으로>의 주인공 강성근(박학 扮)의 어머니(유경애 扮) 역시 미군의 공습으로 죽임을 당했다. 강성근이 용감한 군인이 된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를 죽인 미군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비행기사냥군조>에서 역시 공습으로 죽임을 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새해를 맞아 평화로운 마을에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고, 마을은 파괴된다. 갑작스런 공습에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다. 공습이 멎으면 주인공 김만식(채호명 扮)이 연날리기를 함께 했던, 공습으로 죽임을 당한 아이를 안아 아이의 어머니(손병옥 扮)에게 건네 준다.41) 자연스럽게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타오른다. 이처럼 미군의 공습으로 가족과 친우를 잃은 이들은 용감한 군인과 빨치산이 된다. 공습으로 인한 적개심이 주인공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공습과 함께 양민들에 대한 학살도 미군에 대한 적개심의 원인으로 제공된다. <소년빨치산>에서 귀남어머니(문예봉 扮)는 인민군 아들 길용을 체포한 경찰대장(독은기 扮)에게 죽임을 당한다.42) 귀남은 어머니의 죽음에 영향 받아 소년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된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에서는 샘골영감 집에 들이닥친 미군이 며느리를 겁탈하려하자 샘골영감이 미군을 도끼로 찍어 죽이고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43) <빨치산의 처녀>에서는 영숙이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말뚝에 묶인 인민들을 본다. 말뚝에 묶여있는 어머니에게 물을 주려는 길용에게 미군은 총으로 쏴 죽인다. 이 장면을 바라본 영숙의 적개심은 고조된다. 이처럼 공습과 학살은 전쟁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죽임을 당한 가족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싸워 이겨야 할 이유로 제시된다.

       3) 친일주구에서 친미주구로

    1949년 제작된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고향>에서는 지주(태을민 扮)의 핍박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가게 되는 관필(유원준 扮)이 등장한다. 관필은 감옥에서 독립운동가인 학준(심영 扮)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먼저 지주들이 야합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해서 친일파와 매국노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44)

    전쟁 전 제작된 예술영화에서 친일파와 매국노로 대표되었던 지주와 친일협력자들은 전쟁기 영화에서는 미군의 협력자로 자리를 바꾸었다. 이들의 모습은 일제시기에는 친일파, 해방 후 북한에서는 공산 주의자, 전쟁기 미군점령하에서는 미군협력자로 행세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기회주의적인 인물의 전형인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소년빨치산>의 강태식(이재현 扮)과 경찰대장(독은기 扮),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지주 전동률, 박남춘, <빨치산의 처녀>의 치안대장 한창규(김형식 扮)이다.

    <소년빨치산>에서의 강태식은 양민들을 윽박지르면서 미군 환영회를 조직하는 등 미군에게 협조한다. 그러나 강태식을 소개하는 부관은 “일본시대부터 학교 교원노릇하던 인물인데 일본시대에는 일본사람에게 충실했고 공산정부시대에는 공산정부에 충실했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라구 충실하지 못할리 없다구 생각합니다. 더구나 놈의 약점을 리용할수 있으니까 먹이지 안구 부릴 수 있는 똥개와 같습니다. 잘 먹이고도 부리지 못하는 돼지보다는 훨씬 유익할줄 압니다.”라며 강태식이 기회주의적 인물의 전형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사령관 로버트(김걸 扮)는 강태식을 “우리 친구가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종으로 부릴수는 있”는 인물로 생각한다.45) 북한에서 생각하는 미국과 남한과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더불어 경찰대장은 고문을 저지르고 양민을 총으로 쏴 죽이는 등 일제시기 친일경찰을 상상하게 만든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에서는 지주였던 전동률과 박남춘이 미군의 주구노릇을 하며 양민들의 곡식을 빼앗으러 다니는 인물로 등장한다. 농토를 빼앗긴 지주들이 미군에 야합하는 모습은 일제의 그것과 닮아있다. <빨치산의 처녀>에서는 치안대장 한창규가 미군의 하수인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빨치산이 파괴한 교량을 복구하기 위해 미군의 지시를 받아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일을 한다.

    전쟁기 북한영화에서 한국군은 중요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북한의 입장에서 6.25전쟁은 미국과의 전쟁이며 한국군은 <소년빨치산>의 강태식이나 <빨치산의 처녀>의 한창규처럼 미군의 하수인일 뿐이다. 이러한 묘사는 남한의 상황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시기와 다름 아닌 상황으로 보여준다. 과거의 친일파는 친미파가 되고 남한은 미제국주의의지배와 이에 야합한 친미파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식민 지배를 받는 남한의 주민들은 무력으로라도 해방시켜야할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34)주동인(1956), 282쪽.  35)서동만(2005), 467∼468쪽.  36)서동만(2005), 470쪽.  37)이 논문에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시나리오에 바탕하고 있다.  38)문학예술종합출판사, 『조선영화문학선집』, 1권, 평양 :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4, 217∼219쪽.  39)장명욱(1987), 25쪽.  40)문학예술종합출판사, 『조선영화문학선집』 2권, 평양 :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6, 8쪽.  41)시나리오와 실제 만들어진 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시나리오에는 어머니가 죽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아이가 죽임을 당한다.  42)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 184쪽.  43)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 241쪽.  44)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 19쪽.  45)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 174∼176쪽.

    4.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6.25 전쟁기에 제작된 북한영화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뉴스영화, 다큐멘터리영화, 예술영화로 나누어 정리했다. 또한 예술영화를 중심으로 북한에서 전쟁 동원을 위해 어떤 기억들을 소환해냈는지 알아보았다.

    전쟁기에는 총동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군민일치 사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지금 치루고 있는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임을 북한주민들에게 각인 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영화가 동원되었고, 영화는 북한주민들의 전쟁기억을 소환하여 역사화 하는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북한에서는 6.25 전쟁이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의 침략전쟁이며, 미군의 북침을 격퇴하고 미제국주의의 식민 상태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정의의 전쟁>, <전세계에 고함>과 같 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만들었다. 또한 남한이 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영화 속에서 강조하기 위해 일제시기의 친일경찰, 친일지주 등을 연상시킬 수 있는 치안대, 경찰, 지주 등을 예술영화 속에 등장시켰다. 일제강점기의 기억을 소환해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주민들이 일제 강점기와 같은 식민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군민일치의 투쟁이 필요했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토지이다. 북한의 주민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고 자기 땅을 일궜다. 미군의 지배는 북한의 주민들에게 다시 일제 강점기와 같은 소작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미군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농민들은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고, 인민군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는 해방 직후 이루어졌던 토지개혁과 관련한 기억이 회상장면에 이용된 데에는 전쟁을 통해 지켜야 할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빨치산과 인민군의 적개심을 북돋고 투쟁심을 배가시키는 것은 공습과 학살로 대표되는 미제국주의의 잔학성이었다. 공습과 학살은 북한 주민들에게 치떨리는 기억으로 투쟁심을 고취하는 효과를 지 녔던 것이다.

    이처럼 전쟁기 제작된 북한 영화 속 표상들은 전쟁을 통해 지켜야 할 가치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북한주민들이 군민일치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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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6.25전쟁기간 제작된 주요 다큐멘터리
    6.25전쟁기간 제작된 주요 다큐멘터리
  • [<표 2>] 6.25전쟁기 제작된 북한예술영화
    6.25전쟁기 제작된 북한예술영화
  • [1-1]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대원들이 총기 소진을 하고 있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대원들이 총기 소진을 하고 있다.
  • [1-2] 영숙 총을 소제하며 말한다.
    영숙 총을 소제하며 말한다.
  • [1-3] 장동무 창을 손질하며 말한다.
    장동무 창을 손질하며 말한다.
  • [1-4] 카메라 영숙에게 다가가며 화면전환
    카메라 영숙에게 다가가며 화면전환
  • [1-5] 영숙집 앞
    영숙집 앞
  • [1-6] 빨치산 병영 회상에서 깨어나 격발기를 시험해본다.40)
    빨치산 병영 회상에서 깨어나 격발기를 시험해본다.40)
  • [2-1] 파괴된 도시 위로 미항공기가 포탄을 퍼붓는다
    파괴된 도시 위로 미항공기가 포탄을 퍼붓는다
  • [2-2] 파괴되는 건물들
    파괴되는 건물들
  • [2-3] 하늘에 가득한 미항공기
    하늘에 가득한 미항공기
  • [2-4] 파괴되는 도시
    파괴되는 도시
  • [2-5] 파괴된 건물을 따라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무너진 담벽에 “목숨을 지켜 고향을 지키자”라는 표어가 보인다.
    파괴된 건물을 따라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무너진 담벽에 “목숨을 지켜 고향을 지키자”라는 표어가 보인다.
  • [2-6] 파괴된 도시에 입성하는 미군
    파괴된 도시에 입성하는 미군
  • [2-7] 두려운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
    두려운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
  • [2-8] 남매가 “엄마”를 외치며 사람들 틈을 비집는다. 카메라는 남매를 따라간다.
    남매가 “엄마”를 외치며 사람들 틈을 비집는다. 카메라는 남매를 따라간다.
  • [2-9] 미군에 포박되어 끌려가던 엄마가 남매의 외침을 듣고 소리친다
    미군에 포박되어 끌려가던 엄마가 남매의 외침을 듣고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