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owth of ‘Self-realization’ by Dir. Hong Sang-soo between ‘Self’ and ‘Ego’

‘자기’와 ‘자아’ 사이 진화하는 홍상수의 ‘자기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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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BSTRACT

    Herman Hesse truly believes the starting point of arts is at the combination of two different genders. And Carl Gustav Jung’s systematize this theory with the concepts of ‘self’ and ‘ego’. ‘Ego’ at the center of consciousness, contains the limits of physical difference between male and female, and ‘Self’ at unconsciousness includes both ‘anima’, which refers to the feminity in man, and ‘animus’ to the masculinity in woman. C.G. Jung defined ‘Self-realization (Selbstverwirklichung)’ as the process of human being unifying ‘self’ and ‘ego’. The purpose of ‘Self-realization (Selbstverwirklichung)’ is to balance between the femininity(anima) in man and the masculinity(animus) in woman, and to make the whole mind of androgyne in the unconsciousness, for creativity in each human being. <Woman on the Beach> could be considered to show that Dir. Hong Sang-Soo’s unconscious mind, ‘self’, has been developed to meet the point of his conscious one, ‘ego’. Director Hong created the muddled woman character in <The day a pig fell into a well>(1996), the shallow female creature of the motherhood in <The Power of Kangwon Province>(1998), and then he developed the emotional and positive woman personality in <Turning Gate>(2002). However, in <Woman Is the Future of Man>(2004), woman is displayed as being the expendable, not the future of man. who is absolutely necessary for man, but the reason for being is not clear for herself. The female character finally starts to express her animus in <Tale of Cinema>(2005). In <Woman on the Beach>(2006), dir. Hong created the male character, Joong-rae, to run into two kinds of animas, Sun-hee and Moon-sook, from his subconscious level, who help him reveal his desire to achieve ‘Self-realization’. Dir. Hong drastically shows his anima through his characters in his movies more than ever. His male character percepts his cravenness, even saying, “I’m spooked again.” and accepts the shadow for ‘Self-Integration’. Dir. Hong’s character in his future films, is expected to pull each anima/animus from his/her shadowland to the surface on the conscious level, like Joong-rae and Moon-sook. Now he thinks more to give a birth to the unique but intimate type of human being full of possibility for ‘Self-realization’ and ‘Self-Integration’, rare to be controlled by the principle of time and space, through his film-making.


  • KEYWORD

    ‘Ego’ , ‘Dir. Hong Sang-soo’ , ‘Self-realization’ , ‘Anima’ , ‘Animus’ , ‘Shadow’

  • 1. 머리말: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실현

    1916년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제자인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Josef Bernhard Lang)에게 심리 분석 치료를 받게 되면서 칼 융의 심리학에 심취하게 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인생이나 예술이 양성성의 근원인 모성적인 세계와 부성적인 성질의 결합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의 시작점이 양성의 결합이라는 헤세의 믿음을 이끌어낸 융의 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정신이 크게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의식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자아’ 이며, 무의식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을 ‘자기’라 정의한다. 다시 말해, ‘자기’는 이성적 사고의 경계를 벗어난 세계이고, ‘자아’는 의식과 분별의 테두리 안에 놓여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부르는 ‘자아’는 남성과 여성의 물리적인 특징과 한계를 포함하고, ‘자기’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정신적 요소는 남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 ‘아니마(anima)’와 여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남성성, ‘아니무스(animus)’를 포함한다.

    융의 심리학에서 궁극적인 관심은 바로 ‘자기’에 있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중심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여 하나가 되려고 하는 원초적 힘을 가지고 있다. 융은 인간이 ’자기’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의식의 세계와 하나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을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 혹은 ‘개인화 과정(Individuationsproze)’이라고 정의했다. ‘자기실현’의 궁극적 목표는 남자 내부의 아니마와, 여자 내부의 아니무스가 공조하며 서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양성의 전일성, 양극의 합일성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형 상을 ‘자기원형(Archetyp des Selbst)’이라 지칭한다.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은 의식적인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지시를 받아 나아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아는 끊임없이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으며, 그 속의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1)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가 작품의 창작 과정을 통해 조금씩 진보하며 의식의 세계와 만나는 실험적 지점에 서 있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해변의 여인>이다. 그는 작업이 계속될수록 자아 밑으로 억압되어 침잠해 있던 무의식의 여성성을 발현하는데 과감하면서도 솔직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어수선한 여성성의 탄생에서 <강원도의 힘>에서의 피상적 모성의 본체로 제시된 여성, <생활의 발견>의 흔들리지만 적극적인 여성의 이중적 본질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미래’ 보다는 ‘소모품’에 가까운, ‘존재가 필요하나 존재의 이유가 분명치 않은’ 불가시적 여성, 그리고 <극장전>에서 아니무스를 무의식적으로나마 표출해내는 여성이 존재했다면,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남자의 아니마와 여자의 아니무 스가 서서히 표면화되며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 올려 진 양성의 결합이 ‘자기실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는 <극장전>에서 여러 가지 실험적인 영화적 수법들로 버무려진 난해한 기호와 언어를 쏟아내고, <해변의 여인>에 와서는 앞 선 영화들의 부분적 요소들을 혼합한 어설픈 복제품을 완성한 듯 보이지만, 그 궁극의 깊이에 이르면 그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두 가지 여성성의 ‘충돌’과 ‘결합’을 통해 새로운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본 연구는 <해변의 여인> 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유형과 그 표현 방법을 분석함으로써,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작가 홍상수의 ‘자기실현’의 역사와 진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C. G. Jung, Man and his Symbols (London: Aldus Books, 1964), p.85.

    2. 해변에서 ‘자기’를 만나다: ‘문숙’과 ‘선희’, ‘자아’의 사이, ‘중래’

    남자든 여자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 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상대방에게서 발견했을 때라고 한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무의식의 자기 모습인 ‘문숙’과 ‘선희’ 를 만나게 된다. 문숙은 해변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선희는 해변의 길 위에서 맞닥뜨린다. 문숙은 “일루 타세요.” 하고 먼저 말을 걸지만 선희는 두 번째 보면서도 중래가 말을 걸 때까지 반응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숙’과 ‘선희’로 대표되는 중래의 ‘자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남자의 아니마는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자가 지닌 의식의 남성성과 무의식의 여성성은 각각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의 유산이다.

    이와 같이 융에게 있어 원형은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그림자의 ‘자기’를 대면하여 통합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의 아니마로 대변되는 ‘문숙’과 ‘선희’는 또 다른 중래의 ‘자기’이므로, 다른 것 같으나 그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상호 연관성이 있다. 홍상수는 이러한 복잡 미묘한 인과관계를 선희와의 인터뷰를 통해 굳이 드러내 보여주고, 문숙과 선희가 닮았다고 중래의 입을 빌어 여러 번 우기고 있다. 키 큰 것 빼고 잘 모르겠다는 횟집 주인에게 “아이 뭐 그럴 수도 있죠.” 라는 긍정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래의 주장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듯하지만, 닮았다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움직이는 안타까운 울림이 있다. 그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통합’에 대한 욕구는 누구보다도 강한 것이다.

    <표 1>에서 보듯이 문숙과 선희의 캐릭터를 단순화시켜본다면, 문숙은 의식 속의 ‘아버지’를, 선희는 무의식 속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성성은 집착으로 인해 배신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고, 독신 상태에서 기혼 상태로, 그리고 역으로도 변화하게 되는 시간적,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 인과의 굴레로 맺어진 통합된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 속 남자들은 자아와 무의식의 융합의 감동, 즉, 전일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코올과 섹스에 탐닉함으로써 모든 관계의 시작을 ‘욕망의 끝’으로 몰고 가며 전체 정신의 실현에 실패하고, 공허감과 상실감 속에 살아가는 중독 현상에 빠져 있다. <해변의 여인>의 중래 역시 자기에 해당하는 두 여자, ‘문숙’과 ‘선희’를 발견하지만, 그들에게 다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여자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반면, 내재된 아니무스를 과감히 받아들인 ‘문숙’과 ‘선희’는 상호 이해와 공감을 통해 홀로 서기에 성공하며, 또 다른 전일감을 충족시킬 대상을 향해 떠난다. 문숙이 선희에게 지갑을 돌려주는 장면과 모래에 빠진 문숙의 자동차를 낯선 두 남자의 도움으로 건져 내는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러한 대극합일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 홀로 대미를 장식한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해변의 여인>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영화의 많은 실험과 변화를 가늠케 한다.

    중래와 선희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하는 대화는 중래가 말하는 인물이 바로 문숙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기도 함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중래는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선희와도 육체적 결합을 이룸으로써 욕망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무의식과의 합체를 시도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무의식 속 아니마와의 전일감이 육체적 교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으므로 자기실현에 실패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갔다가 다시 옴’을 의미하는 ‘중래’는 이름 그대로 무엇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도에 있다. 영화에서는 문숙에게서 선희에게로 갔다가 다시 문숙에게 오지만, 결국 중래가 돌아가는 것은 두 여자가 없는 ‘자아’의 일상이다. 중래가 ‘자기’의 존재, 관념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문숙’과 다정다감하고도 소박한 ‘선희’를 통해서 소심하고 현학적인 남자의 그림자를 벗어 버리지 못한 채 자기실현에 실패하고, 대신 아니마들을 독립시켜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남겨 놓은 것은 홍상수의 영화가 아직 실험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또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영화로 표현하고자 하는 딱 그 중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와 만나 변화하지 못하고, 그 무의식의 아니마를 길위에 남겨 놓고 떠나 미련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2)칼 융(Jung, Carl),『인간과 상징』, 이윤기 역, 열린책들, 2000, 67쪽  3)이부영,『아니마 아니무스』, 한길사, 2001, 155-156쪽

    3. 피할 수 없는 약한 남자의 그림자: ‘동수’ 와 ‘중래’

    융은 무의식의 일각에 존재하는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을 ‘그림자(Schatten)’로 정의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거부하는 나약한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의식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4) ‘그림자’란 무의식의 한 구석에 있는 자아의 분신으로, <지킬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에서 낮에는 점잖은 의사지만 밤마다 포악한 괴물로 변하는 지킬박사라는 인물은 한 인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지킬 박사의 그림자는 하이드이며, 이 두 인물은 분리 되어 존재하는 다른 인물들이 아닌 하나 속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모습인 것이다.5)

    살다보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공연히 혐오감이 들거나 미운 감정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가 상대에게 투사되며 일어나는 현상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 사람의 혐오스러운 부분이 바로 자신이 ‘문화인’으로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자신의 부정적인 무의식의 측면, 바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존재감이 큰 인물이 될수록 커진다.

    <극장전>의 동수는 마침내 <해변의 여인>에서 남들이 알아봐 주는 영화감독이 됨으로써, 숨기고 싶은 그림자가 더욱 짙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 내부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고 바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로 투사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터뜨린다.

    남자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래는 문숙과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나는 지금 이미지와 싸우고 있다’라고 절규하며 그 이미지들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 보이면서 자신의 처절한 심경을 납득시키려 든다. 외국인 남자를 사귀어 봤다는 문숙의 과거를 ‘연애할 때 더 좋은 것’이라며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척 하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 문숙의 과거는 용인될 수 없는 과오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래는 자기 역시 그토록 자아를 괴롭혀 온 육체적 욕망의 노예라는 점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또 다시 중래의 그림자는 문숙과 자신 사이의 문제를 ‘자아’와 ‘자기’ 의 불일치에서 오는 근원적 모순과 집착에 두지 않고 문숙의 과거에 전과함으로써 관계 회복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러한 중래의 그림자는 모텔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문숙을 데려와 침대에 눕히고 그녀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듯한 장면에서 슬그머니 비집고 나와 그 어두운 본질을 드러낸다.

    <극장전>의 동수(김상경 분)는 자신에게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슬쩍 인정하면서도 선배 이형수의 단편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라며 그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표현한다. ‘말보로 레드’도 자신의 습관이며, 죽으려 하기 전에 눈 내린 것, 약을 한 알씩 나눈 것, 자살하려 여관을 전전한 것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 주장하고 그렇게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믿고 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의 열등감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영화 작가는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이야기의 소재로 취한다. 그것의 적용과 해석이 독창적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한 채 모방에 그친다면 창작력의 한계를 지적받게 된다. 이렇듯 모방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독창성의 한계는 영화 작가에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자이다. 동수가 마음껏 부정하며 영실(엄지원 분)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이형수의 그림자는 바로 자신의 그림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니마로 마주 앉아 있는 영실은 침착하게 대꾸한다. ‘원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비슷하면 다 자기 얘기 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고, 전부 자신은 중요하니까’라고. 홍상수의 영화에는 이렇게 남자의 그림자를 수용하려 노력하는 ‘자기’의 일부로서 그의 아니마가 존재한다. 무의식의 일각인 그림자를 무의식의 중심에 선 아니마가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그 주체가 되는 나약한 남자의 그림자는 아니마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는다.

    융은 사람들이 ‘그림자’의 실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자를 단지 아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삶 속에서 살려내야만 비로소 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자아가 겸허한 자세가 되는 것이 자기실현을 위한 첫 걸음이며, 그 그림자를 통합했을 때 비로소 그의 인격은 풍부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해변의 여인>의 중래도, <극장전>의 동수도 이러한 그림자를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4)이부영,『분석 심리학』, 일조각, 1998, 123쪽 참조  5)이부영,『그림자-분석심리학 탐구 1』, 한길사, 1999, 41쪽 참조  6)이부영, 앞의 책(1999), 80쪽 참조

    4. 아니마의 만남, 혹은 충돌: 적극적인 여인의 ‘아니무스’와 소극적인 남자의 ‘아니마’

    헤르메스(Hermes)와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아들인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us)는 본래 남성이었으나 요정 살마키스(Salmacis)의 만남을 통해 자웅동체로 변하게 된다. 자웅동체와 관련된 신화 중 가장 유명한 이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Metamorphoseon,메타모르포세온)’에 실려 있다.

    열다섯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여행 도중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호수에서 아름다운 요정 살마키스를 만난다.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는 순간 참기 힘든 욕정을 느낀 살마키스는 목욕을 하기 위해 호수로 들어간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지만, 살마키스는 악착같이 그에게 달라붙으면서 기도한다. “오, 신들이시여, 이 소년이 저에게서, 제가 이 소년에게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결국 둘의 육체는 서로 붙은 자국도 보이지 않는 하나의 몸이 되어 버린다. 남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나의 육체, 즉, 남성과 여성을 두루 갖춘 한 몸이 된 것이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출생은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두 신 사이의 결합에 의한 것으로 헤르메스가 표상하는 지성(완벽한 남성)의 이미지와 아프로디테가 표상하는 에로스(완벽한 여성)의 이미지의 결합이다. 본래 남성으로 태어났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살마키스샘에서 일어난 요정과의 결합을 통해 자웅동체가 됨으로써, 자신이 거부하던 에로스, 즉 어머니의 본성과 융합하여 양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개체로서의 ‘완전성’ 을 획득하게 된다.

    헤르마프로디토스 신화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동시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몸에 깃든 살마키스는 남성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여성상인 아니마가 되었고, 살마키스 속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여성들의 마음속 남성상인 아니무스가 되어 사람은 이제 자신의 아니마, 아니무스와 화해하지 않고서는 본래의 완전성을 회복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융은 우리가 깊은 무의식의 차원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 (아니마)을 억압하게 되고 여성은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아니무스)을 억압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닌 한 성을 억압할 때 그 사람은 완전성에 이르지 못하고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된다.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다른 성의 통합 없이는 정신적인 성숙에 도달할 수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격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이뤄지면, 남성은 정서 작용을 발달시키고, 사랑하고 관계하는 능력을 확대시킬 수 있으며, 여성은 합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부영은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남성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회이다. 논리와 이성, 인식의 능력을 감성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능력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사회 말이다. 융이 말하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된 여성과 남성,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에는 세속적 가치가 전제된 성(sex)적 이해가 아닌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가 필요한 것이다.7)

    중래는 해변에서 젊은 남녀의 불꽃놀이를 지켜보며 “자연은 왜 수컷, 암컷으로 나눠 놔서.”라며 불평을 한다. 중래를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인정할 때, 그 또한 이러한 ‘완전성’의 회복에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전성의 회복을 위해 <해변의 여인>은 두 가지 다른 여성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 속 남자들의 비겁함과 치졸함을 모두 씻어 버릴 수 있을 듯이 솔직하고 현실적인 아니마들이며, 이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면, 평범한 여자에게 깃들어 있는 아니무스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즉, <해변의 여인> 에서 적극적인 여인의 ‘아니무스’는 소극적 남자의 ‘아니마’와 동체로 나타난다.

    여성성을 더 지닌 듯 보이는 선희는 오토바이로 중래와 자신을 위협하는 횟집 종업원에게 어영부영 위기를 모면하기만 바라고 있는 중래를 대신해 “죽여 봐 이 XX놈아.” 하며 대든다. 편한 만큼만 솔직해지겠다는 선희는 다소곳하고 상냥한 이면에 거칠고 우악스러운 보호본능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내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반면, 남성적인 기질을 다분히 지닌 듯한 문숙은 약자인 횟집종업원을 홀대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집요하게 중래를 추궁하는 창욱을 향해 “니가 무슨 원칙이 있니?”하고 몰아붙이며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동수와 중래가 갈팡질팡 과거와 미래를 방황하는 것에 비해 이 여자들의 뒤처리는 깔끔하기 이를 데 없다. 문숙은 지루할 정도로 집요하게 선희와의 하룻밤을 추궁하다가 중래가 나가자마자 멀쩡한 모습으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그리고 다음 날, 상쾌하게 잠에서 깨고 말끔한 모습으로 귀경을 준비한 후 최대한 예의 있는 태도로 중래에게 마지막을 고한다.

    이렇게 홍상수의 영화 속 여자들은 남자와의 관계 맺음에 관대하지만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후 뒷정리가 산뜻하다. 관계를 시작하는 것도 여성이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도 여성이다. 문숙은 중래와 하룻밤을 보낸 후에도 소심한 중래의 뒤끝에 비해 담담하고 솔직한 자세를 취한다. 여성들은 성 행위 과정에서도 “그럼 옷 벗어요”, “이렇게 좋아도 되는거예요” 하며 자신의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한다. 잔머리를 굴리며 싱겁고 식상하게 작업을 거는 중래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극장전>의 영실은 동수와 함께 죽어도 좋다고 외쳐대던 정사를 끝낸 후 미련 을 보이는 동수를 내팽개치고 냉정하게 새벽길을 재촉해 떠난다.

    그리고 결정적인 두 아니마의 만남, 달리 보면, 적극적인 여인 속의 두 아니무스의 만남이기도 하고, 소극적인 남성의 무의식적인 소망이 투영된 아니마들의 만남이기도 한 이 기괴하고도 낯선 장면은 지금까지 TV 쇼나 수많은 영화에서 봐 온 한 남자를 두고 삼각관계에 처한 두 여자의 만남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지닌다.

    선희는 가장 두려운 것이 뭐냐 묻고 문숙은 ‘집착’이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남편에게 배신당한 얘기를 하며 괴로워하는 선희에게 문숙은 “털어버리고 살 수 있을 때 제대로 살라”고 충고도 한다.

    영화 속 두 아니마의 만남은 홍상수의 기존 영화에서는 없었던 시도이다. 그동안 남자를 중심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해도 그저 잠깐 스쳐지나가며 부딪히는 존재들이었던 여자들이 서로 맞대면을 하고 있는 이 장면은 시종일관 여성성의 변덕스러움과 그것을 벗어 던지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오, 수정>의 수정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지닌 한 명의 여자인지 아니면 각기 다른 두 여자인지를 헛갈리게 만들어 영원히 만나지 않는 존재들로 고정시켰던 영화 속 두 여자의 만남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순결과 타락의 양 면을 지 닌 한 여자 선화로 귀결되어 두 남자 앞에 던져졌다가, 다시 <극장전>을 통해 영화와 현실 속에서 따로 존재하는 여배우 영실로 조심스럽게 그 만남의 가능성이 시도되었고, 마침내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서는 다르지만 닮은 두 여자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실현되고 있다.

    왜 이 두 여자의 만남이 이뤄져야 하는가는 이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만남을 상징하고 있다는 데에 해답이 있다. 남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림자를 다독일 아니마를 흡수하지도 못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아니무스를 내세워 이 지루한 세계에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중래의 한 쪽 다리에 ‘안 쓰는 근육’은 무의식의 여성성을 억압하고 남성성의 표출만 강요하는 사회의 기류에 편승해 잊고 지냈던 아니마의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안 쓰던 근육’은 결국 중래의 존재로 대표되는 사회적 방해를 극복하고 두 여자의 만남을 이끌어 내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두 여자의 만남은 인과 관계로 맺어진 중래의 두 아니마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회적 억압을 견디고 있는 두 여자들의 무의식, 즉, 아니무스들의 회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홍상수 감독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추구해 온 ‘자아’와 ‘아니마’의 결합이며, 서로 다른 ‘자아’ 속의 닮은 ‘아니무스’간의 화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화는 여자들의 수다와는 거리가 있고, 삼각관계의 감정 대립과도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길 위에서 만난 자신의 아니마를 다시 길 위에 내 놓게 된다. 문숙과 선희가 만나고 있을 때 두 아니마의 충돌에서 동시적인 충격을 느끼고 있는 중래의 불안과 외로움은 극에 달하고, 문숙이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모습과 중래가 시놉시스를 완성하는 과정이 교차되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 속 아니마들은 삶의 반복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홀로 서기에 충실한 시쳇말로 쿨(cool)한 여성들이다. 무슨 결정을 내리든 미련이 남아 과거에, 관계에 질질 끌려 다니는 남자들과 대비를 이룬다. 이로써 모성이라는 뻔한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피동적 소모품으로 겉돌던 여성의 이미지가 <극장전>과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서는 마치 자웅동체의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는 것처럼 완전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돌아보면 홍상수의 영화 <오, 수정>,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해변의 여인>, <옥희의 영화>는 모두 여성을 타이틀에 내세우며 그 존재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서울에 갇혀 있던 20대의 만만한 ‘수정’은 30대의 잡히지 않는 ‘여자’로 거듭나 수도권의 소도시로 거처를 옮겨가고, 결국 신두리 해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자기를 해방시킨다. 비루한 남자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바로 여자들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여자들은 먼저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마침내는 정신적으로도 독립된 자웅동체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7)이부영, 앞의 책(2001) 63쪽 참조

    5. 진화하는 홍상수의 ‘자기실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도시의 아침을 배회하던 <극장전>의 동수는 <해변의 여인>의 중래에게서 그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중래의 다른 자기, 문숙과 선희를 통해 집중력을 발휘하며 조금은 진화된 남성을 보여주리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동수는 ‘돌이’에서 ‘똘이’로, 그리고 ‘바다’로 이름을 계속 갈아치울 수밖에 없는 해변의 진돗개에게로 그 정체성이 옮겨가거나 아니면, 정신은 발전하지 못하고 물리적 상태만 호전된 중래의 미성숙함에 갇혀버린 듯하다.

    소심하고 비겁한 자아를 대표하는 중래는 대범하고 용감한 사람과의 결합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야만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다. 문숙과 선희의 만남을 통해서 무의식에 잠자고 있던 자신의 적극성과 대범함을 의식화 시켜야 그 만남의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이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합일의 방식을 터득하지 못한 중래는 그들과의 만남을 제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약점 많은 ‘자아’의 세계로 귀환한다. 그러나 길 위에 남겨진 중래의 아니마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난다.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남성의 세계와 떨어져 새로운 시각으로 여성의 세계를 동경하는 듯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는 여성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루고자하는 작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동안 고수해 왔던 그만의 미장센의 틀을 깨고 새로운 영화 언어로 완성되어 진다.

    <극장전>을 통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카메라의 줌(zoom)은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서 보다 체계적인 형태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중래’하고 있다. 간혹 던져지는 어색하고 불편한 카메라의 줌 인(zoom in)과 줌 아웃(zoom out)은 무의식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순간 살아 움직이며 절절하게 와 닿는다. 가끔은 투 샷에서 싱글 샷으로, 클로즈업과 롱 샷으로 이동하는 실험적 촬영은 어찌 보면 어설프고 지루하게 보여도, 홍상수 감독의 ‘자기’의 안내를 받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움직임을 따라가는 우리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변의 여인>에서 두 여자가 마주 앉아 술잔을 건네는 장면에서 “언니는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게 뭐예요?” 하며 선희가 어설프게 중래의 질문을 모방할 때, 카메라는 어김없이 두 사람에게 다가서면서 중래의 모습이 투영된 선희라는 아니마를 부각시키고 있다. 중래가 이미지와 전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잠시 잠깐 아니마와의 무의식적인 결합이 이뤄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카메라는 “훌륭하다 자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하고 말하는 그의 아니마, 문숙의 얼굴로 옮겨 간다. 그리고 그 결합이 또 다른 아니마 선희의 전화로 깨지게 될 때, 카메라는 재빨리 문숙에게서 멀어진다. 반면에 중래가 선희와 닮았다는 문숙인지 자기 자신인지를 선희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중래가 객관적인 자세로 자신의 무의식 속 아니마로 문숙을 분석하길 기다리 며 고정된 위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북촌방향>에서의 줌 인은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감정 표현법으로 진보된 모습을 보여준다. 줌 인이 쓰이는 장면 역시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거리 위에 등장한 남자의 고집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을 담아낼 때, 자신의 아니마(이상형)를 만났을 때, 혹은 등장인물들의 감성이 가감 없이 표출될 때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다. 성준(유준상 분)이 ‘겉으로는 깍쟁이 같으나 속은 감정이 풍부해서 여리고 착한’ 자신의 이상형을 이야기할 때 카메라는 빠른 속도로 그의 얼굴에 다가가 미세한 설렘을 보여주고, 성준의 이상형이 바로 자신이라고 우기는 보람(송선미 분)과 ‘내 안에 슬픔이 있거든요.’ 하는 보람의 눈물을 포착할 때는 그녀의 외로움과 슬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니무스, 성준을 어떻게든 설득시켜 보려는 보람의 절절함을 담아낸다. 성준이 예전(김보경 분)과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아니마와의 합체를 이루는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여지없이 줌 인이 사용된다. 그러나 <북촌방향>에서 가장 인상적인 줌 인은 성준이 믿고 따르던 유일한 남성성의 상징인 영호에게마저 어색한 타인의 느낌을 받고 다시 길 위에 방랑자로 남았다고 느낄 때, 자신을 알아보는 사진작가(고현정 분)을 마주하고 사진을 찍는 부분에서 성준의 얼굴 정면으로 사용된 줌 인이다. 또 다른 아니마를 발견한 순간 새로운 희망으로 빛나는 그의 표정을 코앞에서 목격함으로써 남성성과 여성성의 완전한 결합으로 탄생할지 모 를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내용과 형식에서, 그리고 그의 그림자와 아니마를 통해서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남자들은 “내가 또 겁먹었던 것 같아.”하며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할 줄 아는 ‘그림자 수용’의 단계에 이르러 있다. 현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각하고 현실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9) 그러나 <북촌방향>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감독의 남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아니마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부질없는 헤어짐을 반복한다. 성준이 가장 의지하는 ‘영호’(김상중 분)는 유순하고 관대한 듯이 보이지만 술에 취해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하고 보람에게 윽박지를 때 어쩔 수 없는 가부장적 본능을 드러내며 보람과의 화합에 실패하고,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 충실해 가장 속물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성향을 보이다가도 여자들 앞에서는 다시 진지하고 사색적인 남자로 돌변하는 모순적 남성성의 상징인 ‘중원’(김의성 분) 역시 과거의 원 망에 파묻혀 현실의 관계를 재설정하는데 애를 먹는다. 이처럼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북촌방향>의 남자들은 해변에서 중래가 ‘안 쓰던 근육’을 더 이상 진화시키지 못하고 ‘근력’이 없는 상태로까지 퇴화시켜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러 있다.

    그들이 북촌길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찾아 외로움을 덜고 생산적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이지만, ‘사람한텐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예전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우기는 성준처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떠도는 자신들의 아니마에 솔직하게 다가가지 못한 탓에 온전한 자기실현을 이루지 못한다. 성준은 해변의 문숙과 외모나 말투, 행동마저 비슷하지만 문숙만큼 독립적이거나 과감하지 못한 ‘보람’을 돌아보려 하지 않고, 한 없이 받아주고 떠나보내기를 계속하는 모성성의 상징, 경진과 예전(김보경)에게도 사랑한다, 행복하라는 말을 뿌리면서 식상한 이별을 고하고, 길에서 계속 우연히 만나게 되는 미완성의 아니마로서의 여배우도 무시한다.

    결국 유사한 배경과 언행으로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중래’와 ‘성준’은 자신 속 아니마를 끌어 들이지 못하고 길 위에 방치한 채 새로운 아니마 찾기를 탐닉하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지연시키고 있다. 어찌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남자들은 그림자 수용에 실패하면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부장제도의 오랜 폐단에 갇혀 술에 취해야만 속 깊은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정도로 여전히 비겁하면서도 가엽다. 남자의 아니마들은 모두 예쁘고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착한’ 여자들이고, ‘위엄’있고 ‘남자다운’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속성을 간직해 <해변의 여인>에서의 문숙만큼 발전된 아니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자신의 그림자 수용에 인색한 남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세 가지 행복의 조건, 첫째, 좋은 사람들 만나기, 둘째, 술에 취하지 않기, 셋째, 일기 쓰기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함으로써, 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또 길을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여인>과 <북촌방향>은 홍상수 감독의 아니마가 어떤 모습으로 다음 영화에서 자기실현을 시도하게 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호기심과 여운을 남긴다. “내가 두고 볼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변하는 지 꼭 두고 볼 거예요.”라고 말하며 영화에서 퇴장하는 보람의 말은 감독이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다짐과도 같다. 자신의 아니마를 통해 자신에게 당부를 하는 장면과 녹록치 않은 세상의 길 위에 방목되는 느낌을 주는 미완의 아니마로서의 여배우와 미숙한 아니무스로서의 젊은 영화학도들이 함께 작업하기 위해 동행하는 마지막 부분은 해변에서 미련 없이 다시 길을 떠나는 문숙의 모습처럼 도전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요즘 학생들은 작업 준비를 참 잘해요.”라고 말하는 여배우와 남학생들은 후에 어떤 관계로 발전할지 모르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유일하게 ‘창작’을 목적으로 함께 만난 생산적 관계로 맺어졌다. 만남과 관계에 대한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고 ‘안 쓰는 근육’을 훈련시킨다면, 그의 무의식에 존재해 온 ‘아니마’와 ‘그림자’는 이제 의식화되기 위해 깊은 바다로부터 서서히 올라오게 될 것이다.

    융의 말대로 홍상수의 자기실현은 지금까지 완성된 그의 영화들을 통해 시공으로 연결되면서 동시에 무시간성과 무공간성에 도달해 있는 듯하다. 이제 그는 생각을 더 할 것이고, 최종적으로 그려낼 그의 정신 작용은 시공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 자기실현으로 그 완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8)아니엘라 야훼(Yahweh, Aniela),『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1989, 17쪽  9)아브라함 머슬로우(Maslow, Abraham H.),『존재의 심리학』, 정태연, 노현정 역, 문예출판사, 200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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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문숙과 선희의 비교
    문숙과 선희의 비교
  • [<그림 1>]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BC 2세기, 파리 루브르)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BC 2세기, 파리 루브르)